알라딘: 숨은 신을 찾아서
숨은 신을 찾아서 -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성찰 |
책소개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고어의 사상과 불교 사상, 자연과학적 태도, 그리고 오뒷세우스와 에이해브 같은 서사 주인공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신념 체계들을 성찰한다. 인간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이 ‘신념 체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을 결단하는 것이다.
저자 고유의 문체와 겪음이 담겨 있으며, 《성서》, 《고백록》, 《성찰》, 《팡세》, 《오뒷세이아》, 《모비 딕》 등의 인용 텍스트를 통해, 깊게는 형이상학의 근본 테제들에 관한 개념적 파악을, 넓게는 삶의 현실에 대처하는 지혜를 음미할 수 있다.
목차
1 2 3 . . . 7 8 . . . . . . . . . . 19 . 21 . 23 24 . . . . . . . . 33 34 . . 37 38 39 추기追記
책속에서
- “바울로가 아테나이에서 만난 이들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몇몇 철학자들’이다. 그들도 분명히 신을 말하였다. 그들의 신은 어떤 신인가. 에피쿠로스 학파는 쾌락을 추구한다. 정신의 쾌락을 찾는다. 맘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쾌락을 누리려 한다. 마음의 평정심, 아타락시아ataraxia를 찾으려 한다. 스토아 학파는 고대 희랍 사유의 최종 결집체이다. 단순한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modus vivendi)으로까지 자리잡은 것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법칙(logos)이 있다고 한다. 이것은 우주 만물에 관철되어 있다. 이 법칙은 섭리(providentia)다.” 접기
- “불교 수행자들은 육체를 폐기하고, 육체에 깃든 생각을 폐기하고, 생각을 폐기했다는 것마저도 폐기하고, 저절로 멍한 상태로 들어간다. 이것은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이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 한번 해보라. 온갖 잡념雜念이 머리 속에 쏟아져 들어오고 무럭무럭 솟아난다. 몸이 있으니 생각이 있다. 몸을 버리면 생각이 없어질 것이다. 몸을 버리지 않은 채 생각을 끊을 수는 없다. 몸을 버리는 것은, 소중한 몸뚱아리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몸을 비롯한 일체의 사물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몸을 버림으로써, 생명체를 끊어냄으로써 수월하게 무념무상의 경지로, 우주의 참다운 근원으로 들어설 수 있고 되돌아갈 수 있다.' 접기
- “우리는 어떤 사건들에 대해 의견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의견들은 다양한 정보들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의견이 행동으로 여러 번 실행되어 일정한 효과를 거두면 상당히 견고한 믿음이 된다. 믿음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것들은 여간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겪고 나서야 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 체계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충돌에 관한, 그리고 충돌이 생겨났을 때 어떻게 하는지를 둘러싼 다양한 심리적 논의들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논의에 등장한 여러 사람들을 그러한 분석틀로써 면밀하게 고찰할 수는 없으나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강유원 (지은이)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 역사, 문학, 정치학 등에 대한 탐구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써 왔다. 오랫동안 개인 플랫폼에서 ‘책읽기 20분’을 진행했으며, CBS ‘라디오 인문학’과 KBS 제1라디오 ‘책과 세계’ 등 방송에서도 전문 서평가로 활동했다. 《책》 《책과 세계》 《주제》 등의 서평집과 《인문 古典 강의》 《역사 古典 강의》 《철학 古典 강의》 《문학 古典 강의》 《숨은 신을 찾아서》 《에로스를 찾아서》 등을 썼으며, 《경제학 철학 수고》 《철학으로서의 철학... 더보기
최근작 : <책 읽기의 끝과 시작>,<에로스를 찾아서>,<문학 고전 강의> … 총 4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숨은 신이라 불릴 만한 형이상학적 신념들은
우리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우리 눈앞에 다양하게 흩어진 사태들이 있다. 그것들을 나누고 모아서 하나로 꿰어진 설명을 만들어낼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 사태를 이해하였다고 믿는다. 즉 현전하는 사태들에 대한 그럴 듯한, 믿을 만한 설명을 꿰어서 체계적으로 만들어낼 때에라야 만족에 이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신념의 체계’다. 과학도,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이러한 체계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철학이 하는 일은 하나 더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념의 체계들이 잘된 것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철학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신념의 체계들을 음미한다.” 이러한 신념 체계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실존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고어의 사상과 불교 사상, 자연과학적 태도, 그리고 오뒷세우스와 에이해브 같은 서사 주인공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신념 체계들을 성찰한다.
우리의 삶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우리 눈앞에 다양하게 흩어진 사태들이 있다. 그것들을 나누고 모아서 하나로 꿰어진 설명을 만들어낼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그 사태를 이해하였다고 믿는다. 즉 현전하는 사태들에 대한 그럴 듯한, 믿을 만한 설명을 꿰어서 체계적으로 만들어낼 때에라야 만족에 이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신념의 체계’다. 과학도, 철학도, 종교도, 예술도 이러한 체계들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런데 철학이 하는 일은 하나 더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념의 체계들이 잘된 것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철학은 자신이 만들어낸 것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을, 신념의 체계들을 음미한다.” 이러한 신념 체계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인간의 실존에 어떻게 맞닿아 있는가.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고어의 사상과 불교 사상, 자연과학적 태도, 그리고 오뒷세우스와 에이해브 같은 서사 주인공들의 삶의 방식을 통해, 신념 체계들을 성찰한다.
인간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이 ‘신념 체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종류의 삶의 방식을 결단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 고유의 문체와 겪음이 담겨 있으며, 《성서》, 《고백록》, 《성찰》, 《팡세》, 《오뒷세이아》, 《모비 딕》 등의 인용 텍스트를 통해, 깊게는 형이상학의 근본 테제들에 관한 개념적 파악을, 넓게는 삶의 현실에 대처하는 지혜를 음미할 수 있다. 접기
9.7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치를 부여하고 탐구하는것은 인간의 본질일까?
막시무스 2016-12-02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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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쓰는데로 살테니 절판된책들좀 어떻게 해달라!
잉순이 2016-11-25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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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책이 드디어 나왔네요^^ 연말 지인들에게 전하는 선물은 이걸로 정하겠습니다...잘 읽어보겠습니다.
또복엄마 2016-11-18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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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나 성당에 다녀도 경건하게 신을 찾지 않으면 신앙인이 아니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않아도 경건하게 신을 찾으면 신앙인이다. 책 한 권이 신을 찾아 나서는 그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리드미 2016-12-10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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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얇고 작은 책이다. 휴대하기 좋다. 추기까지 모두 40장으로 목차가 되어있다. 목차를 내용별로 여러장들을 묶어표시한 것에 ‘어떤 숨겨둔 의미가 있나‘하는 사소한 호기심이 든다. 여러 번 반복해 읽으니 좋다. 저자의 ,일종의 고백록 축약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독서중 2016-12-18 공감 (4) 댓글 (0)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방식으로 죽음을 예비하자
이 책은 헤닝만켈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연장선 상에서 읽게 되었다.
강유원의 책들을 그동안 몇 권 읽은지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하라면 반듯하지만 좀 지루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었다.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이나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철학자인 그가 '숨은 신을 찾아서'란 제목의 책을 들고 나왔으니,
얼핏 생경하였었다.
"1"장에서 그동안 그가 뜸했던 이유가 나오는데, 이같은 제목을 쓴 이유도 엿볼 수 있었다.
태평양과 이어지는 동해 바닷가 도시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을 서둘러 나왔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이라는 허겁지겁만이 전부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아니, 그 무기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옳겠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絶望, 즉 희망을 끝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7쪽)
10여년 정도 많이 아팠었나 보다.
많이 아프거나 나이 들어 죽음을 예비하게 될 때 삶을 돌아보게 마련인데,
그는 삶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책을 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 따위,
위대한 사람들의 저서 속 삶을 엿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성찰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따위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펼쳐서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가 독서법을 가장하여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았다.
논점이 명확하고,
그 명확한 논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예는 자상하게 들되, 중언부언 군더더기가 없다.
헤닝만켈'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꾸준히 내면에게 묻기를 강조했었는데,
강유원은 신앙의 필수적 전제 조건으로 얘기되는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을 언급한다.
신앙을 갖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산다면 훌륭한 삶을 산 것이라는 상식도 있다. 참으로 논박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유하거나 인간의 모든 행위는 헛된 집착에서 나온 것이니 적극적 행위를 포기하라고 설파하는 것은, 망동과 망언으로 간주된다. 그들에게 세계관의 전회를 요청할 수는 없다. 그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그들에게 물어볼 여지는 남아 있다. 자신들의 도덕적 신념은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우리는 물러나야 한다. 그러한 물음이 그들 자신의 신념 체계에 대한 잠깐의 회의라도 불러일으켜 그들을 더 깊은 의심에서 제기되는 물음들로 나아가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물어볼 수 있을 것인가.(30~31쪽)
헤닝만켈도 그랬고, 강유원도 그렇다.
인간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을 한다.
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주에 대해...끊임없이 묻는다.
헤닝만켈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는다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입장을 표명하는 반면,
강유원은 '신'이라고 불리우고 신념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유명인들과 그들의 저서를 인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세계는 우주의 티끌들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걸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의 몸은 언젠가는 티끌로 되돌아갈 것임을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의 정신이 탐욕스럽게 읽고 있는 책들이 모두 한순간의 응축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만년필은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않은가, 그대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찰라에 스러져버릴 것들임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는 왜 그것들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그대는 존재의 진상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기독교도라 말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146~147쪽)
슬픔을 이기려면.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한다.(151쪽)
고 얘기한다.
그의 방식은 죽음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삶을 사는 방식을 통하여 죽음을 예비하자는 얘기가 아닐까.
그는 이렇게 얘기하며 이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텍스트를 내재적으로 읽거나 삶의 배경 맥락을 읽거나, 증거를 찾아 구축하여서, 해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다 덧없는 것이라 여겨 놓아두거나.(157쪽)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제주 어디에서 그의 강의가 몇 번 있다.
제주라는 섬이 치유하기에 좋은 곳인가 보다.
덩달아 나도 제주에서 그의 강의나 찾아들으며 일 년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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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3-29 공감(36) 댓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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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선생님의 하이엔드 책!
이번주 내내 기다렸는데 드디어 만나보겠네요~ 표지부터 아름다워요~~
nanum77 2016-11-18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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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흔적을 더듬는 추체험
얼마나 깊건 얕건 간에, 책은 저자의 투영이다. 강유원은 여태의 저작들에서 선생 강유원, 공부하는 강유원의 모습만을 투영하고자 했다. 그래서 선홍빛 표지를 보며 궁금했다. 왜 <숨은 신을 찾아서>일까. 이 제목은 도발적이다. 적어도 여태의 저작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그렇다. 강유원이 이런 제목을 붙였다니, 조금은 그답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뒤로하고 책을 읽었다.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을 중심으로 쓰였다. 이 두 텍스트를 비교하며 중세인과 근대인이 생각하는 세계의 근본 원리, 혹은 ‘신’에 관한 의식의 차이를 살핀다. 믿음의 체계를 밝히는 과정이니만큼, 논리 구조가 조금은 빈약한 곳도 있다. 하나 결코 성긴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 곳곳에는 선생 강유원이 아닌, 인간 강유원의 내밀한 곳이 투영되어 있었다. 논리나 이성으로는 증명되지 않되 삶의 궤적에 언뜻 비치는 ‘신’의 흔적을 더듬는 강유원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 강유원이 자리하지 않으면 이 책은 성립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숨은 신을 찾아서>일 수밖에 없었지 싶다. 그가 앞으로 어떤 책을 쓸지 모르지만 어쨌건 나는 그의 독자일 것 같다. 영원은 아니더라도, 아마 확신컨대 꽤 오랜 시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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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케이 2016-12-23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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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강유원이 ‘신‘을 찾았을까?
강유원이 '숨은 신'을 썼다는 것에 의아함을 가졌다.
그가 공부하고 읽어온 과정들은 '유물론자의 삶'인 것처럼 보여서였다.
철이 없었다.
삶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오만함이 넘쳤다.(6)
그래. 이런 것이 강유원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이란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 즉 희망을 끊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7)
작가의 말이나 프롤로그 정도로 여겨지는 1장이 이 책의 집필 동기다.
죽음의 문 앞에서 누구나 삶을 돌아보는 것인 인지상정일 것이다.
불교에는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정결하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해골을 볼 일이다.(94)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과
오디세우스와 에이해브 선장을 읽는다.
사변보다는 문학이 훨씬 인물이 내음이 확 풍긴다.
에이해브 선장은 위엄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을 사람이다.(152)
에이해브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 최계 위에서 확고한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바다의 인간이었던 오딧세우스와 마찬가지로 갈등없이 자신이 길을 간다.(156)
결국 죽음 앞에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살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살던 대로 살자는 것 아닐까 싶다.
희망이란 것을 갖고 살다보면,
어느날, 그것이 '끊어지는' 절망을 만날 수 있으니,
신에 대해 생각하며 떨고 있는 갈대 같은 '팡세'보다는,
오딧세우스나 에이해브 선장을 본받아 살 일이다.
작가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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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7-01-22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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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나아감
신은 숨어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이라 부르든 그렇지 않든지 관계없이 숨은 신을 찾는다. 이 책의 부제는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대한 고찰이다.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 사이. 그리고 삶의 과정은 '숨은 신'을 찾아가는 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본문의 구성을 크게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및 팡세)로 읽을 수 있다. 중세와 근대를 가로지르는 서양사 스케치로도 읽힌다. 본문 21장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데카르트로 변해가는 시대의 변화를 그린다.
성도들의 도시와 유사한 공동체가 이념의 도시이다. ... 근대 이후의 인간들은 혈연, 지연, 학연 혹은 이를 포괄하는 국가에 헌신한다. ... 불안에 가득찬 근대인들은 상위의 공동체에 스스로를 맡긴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리라고 착각한다. (p.100-. 일부 수정)
무한한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다른 유사 신을 필요로했다. 난 무신론자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요새는 이 또한 하나의 믿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무신론을 믿으면 남는 것은 유물의 세계. 하지만 앞서 근대 이후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국가를 비롯해 나의 신들을 곳곳에서 재확인하고 있지 않던가. 한국인에겐 서구에서 말하는 시민사회가 형성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나름 합리성의 절정이었던 유학은 성리학을 거치면서 교조적인 영향력으로 조선 후기의 시대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정치력을 유지했다. 일제를 거치고 해방을 맞이했다. 조선 후기와 일제 그리고 해방을 거쳐가던 이 시간대가 (과거 조선인이었던)한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근래의 관심사이다. 왕에서 총독을 거쳐 대통령이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농민천하지대본을 외치다가 전쟁과 전쟁의 사이 사이에 수탈과 원조가 교차하면서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온 수출천하지대본의 사회가 되었다. 그저 많이 낳아 일손을 거들던 고사리 손들은 훗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도 듣게 된다.
그래서 요즘 펄럭이는 태극기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들의 삶의 방식과 신념 체계. 독재의 시기가 그들에게 과연 고통의 시간이었던가. 강력한 국가로부터 보호받는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요즘 북한의 고통받는다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들의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 그들은 고통의 원인을 독재로부터 찾고 있을까. 강력한 보호를 원하는 국가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를 생각해본다. 미션스쿨을 나온 덕에 교회에 출석해야 했고, 신은 없다고 강력하게 확신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그려냈던 신은 없다고 아직도 확신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심쩍다. 드라마 속에서 지은탁은 행복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다. 가까스로 이뤄낸 행복을 두고 자신을 희생하며 생명을 구한다. 그 장면을 보며 '신'이라는게 혹여 저런 거라면... 드라마 속에서 이 소식을 뉴스로 듣던 어떤 사람이 '천사가 아니었을까'라던 말처럼. 요즘은 내가 '신'을 무척 좁게 생각하는게 아닐까 곱씹어본다. 아주 잠깐씩. 저자의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신은 숨어 있다. 우리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알지 못하니 갈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에서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멈춰 설 곳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 것은 비극적 전망이 아니다. 그저 가는 것이다. 꿈도 없이 희망도 없이. (p.149)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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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 2017-02-1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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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가치를 부여하고 탐구하는것은 인간의 본질일까?
막시무스 2016-12-02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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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쓰는데로 살테니 절판된책들좀 어떻게 해달라!
잉순이 2016-11-25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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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책이 드디어 나왔네요^^ 연말 지인들에게 전하는 선물은 이걸로 정하겠습니다...잘 읽어보겠습니다.
또복엄마 2016-11-18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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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나 성당에 다녀도 경건하게 신을 찾지 않으면 신앙인이 아니다. 교회나 성당에 다니지 않아도 경건하게 신을 찾으면 신앙인이다. 책 한 권이 신을 찾아 나서는 그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리드미 2016-12-10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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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얇고 작은 책이다. 휴대하기 좋다. 추기까지 모두 40장으로 목차가 되어있다. 목차를 내용별로 여러장들을 묶어표시한 것에 ‘어떤 숨겨둔 의미가 있나‘하는 사소한 호기심이 든다. 여러 번 반복해 읽으니 좋다. 저자의 ,일종의 고백록 축약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독서중 2016-12-18 공감 (4) 댓글 (0)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방식으로 죽음을 예비하자
이 책은 헤닝만켈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의 연장선 상에서 읽게 되었다.
강유원의 책들을 그동안 몇 권 읽은지라,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하라면 반듯하지만 좀 지루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었다.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이나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철학자인 그가 '숨은 신을 찾아서'란 제목의 책을 들고 나왔으니,
얼핏 생경하였었다.
"1"장에서 그동안 그가 뜸했던 이유가 나오는데, 이같은 제목을 쓴 이유도 엿볼 수 있었다.
태평양과 이어지는 동해 바닷가 도시의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을 서둘러 나왔다. 당장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뿐이라는 허겁지겁만이 전부였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아니, 그 무기력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고 해야 옳겠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絶望, 즉 희망을 끝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7쪽)
10여년 정도 많이 아팠었나 보다.
많이 아프거나 나이 들어 죽음을 예비하게 될 때 삶을 돌아보게 마련인데,
그는 삶을 돌아보는 방식으로 책을 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 따위,
위대한 사람들의 저서 속 삶을 엿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념 체계를 구축함과 동시에 성찰한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아우구스티누스, 데카르트,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따위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펼쳐서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지레 겁을 먹었던 경험이 있는지라,
그가 독서법을 가장하여 자상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좋았다.
논점이 명확하고,
그 명확한 논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한다.
예는 자상하게 들되, 중언부언 군더더기가 없다.
헤닝만켈'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꾸준히 내면에게 묻기를 강조했었는데,
강유원은 신앙의 필수적 전제 조건으로 얘기되는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을 언급한다.
신앙을 갖지 않아도 도덕적으로 건전한 삶을 산다면 훌륭한 삶을 산 것이라는 상식도 있다. 참으로 논박하기 어렵다. 그들에게 초월적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권유하거나 인간의 모든 행위는 헛된 집착에서 나온 것이니 적극적 행위를 포기하라고 설파하는 것은, 망동과 망언으로 간주된다. 그들에게 세계관의 전회를 요청할 수는 없다. 그저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를 그들에게 물어볼 여지는 남아 있다. 자신들의 도덕적 신념은 확고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는 대답을 들으면 우리는 물러나야 한다. 그러한 물음이 그들 자신의 신념 체계에 대한 잠깐의 회의라도 불러일으켜 그들을 더 깊은 의심에서 제기되는 물음들로 나아가게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물어볼 수 있을 것인가.(30~31쪽)
헤닝만켈도 그랬고, 강유원도 그렇다.
인간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을 한다.
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주에 대해...끊임없이 묻는다.
헤닝만켈은 자신이 좋아하는 책들을 다시 읽는다고 표현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입장을 표명하는 반면,
강유원은 '신'이라고 불리우고 신념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유명인들과 그들의 저서를 인용하는 방식을 취한다.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 세계는 우주의 티끌들의 우연한 결합이라는 걸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의 몸은 언젠가는 티끌로 되돌아갈 것임을 그대는 알지 않는가, 그대의 정신이 탐욕스럽게 읽고 있는 책들이 모두 한순간의 응축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대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만년필은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대는 알지 않은가, 그대가 몹시도 사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찰라에 스러져버릴 것들임을 그대는 알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대는 왜 그것들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그대는 존재의 진상을 알면서도 왜 자신을 기독교도라 말하고 신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가.(146~147쪽)
슬픔을 이기려면.
내가 멈춰 선 곳에 신이 있다고 확신한다.(151쪽)
고 얘기한다.
그의 방식은 죽음을 거부하거나 저항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삶을 사는 방식을 통하여 죽음을 예비하자는 얘기가 아닐까.
그는 이렇게 얘기하며 이 책을 끝맺는다.
우리는 이들의 삶을, 텍스트를 내재적으로 읽거나 삶의 배경 맥락을 읽거나, 증거를 찾아 구축하여서, 해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다 덧없는 것이라 여겨 놓아두거나.(157쪽)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제주 어디에서 그의 강의가 몇 번 있다.
제주라는 섬이 치유하기에 좋은 곳인가 보다.
덩달아 나도 제주에서 그의 강의나 찾아들으며 일 년만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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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7-03-29 공감(36) 댓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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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선생님의 하이엔드 책!
이번주 내내 기다렸는데 드디어 만나보겠네요~ 표지부터 아름다워요~~
nanum77 2016-11-18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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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흔적을 더듬는 추체험
얼마나 깊건 얕건 간에, 책은 저자의 투영이다. 강유원은 여태의 저작들에서 선생 강유원, 공부하는 강유원의 모습만을 투영하고자 했다. 그래서 선홍빛 표지를 보며 궁금했다. 왜 <숨은 신을 찾아서>일까. 이 제목은 도발적이다. 적어도 여태의 저작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그렇다. 강유원이 이런 제목을 붙였다니, 조금은 그답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뒤로하고 책을 읽었다. 책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을 중심으로 쓰였다. 이 두 텍스트를 비교하며 중세인과 근대인이 생각하는 세계의 근본 원리, 혹은 ‘신’에 관한 의식의 차이를 살핀다. 믿음의 체계를 밝히는 과정이니만큼, 논리 구조가 조금은 빈약한 곳도 있다. 하나 결코 성긴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책 곳곳에는 선생 강유원이 아닌, 인간 강유원의 내밀한 곳이 투영되어 있었다. 논리나 이성으로는 증명되지 않되 삶의 궤적에 언뜻 비치는 ‘신’의 흔적을 더듬는 강유원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렇게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인간 강유원이 자리하지 않으면 이 책은 성립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숨은 신을 찾아서>일 수밖에 없었지 싶다. 그가 앞으로 어떤 책을 쓸지 모르지만 어쨌건 나는 그의 독자일 것 같다. 영원은 아니더라도, 아마 확신컨대 꽤 오랜 시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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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케이 2016-12-23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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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강유원이 ‘신‘을 찾았을까?
강유원이 '숨은 신'을 썼다는 것에 의아함을 가졌다.
그가 공부하고 읽어온 과정들은 '유물론자의 삶'인 것처럼 보여서였다.
철이 없었다.
삶을, 온전히 쥐고 있다는 오만함이 넘쳤다.(6)
그래. 이런 것이 강유원이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이란 병실로 옮겨진 뒤 복도 끝까지 걸어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
좌절은 없었다.
삶을 손에 쥐지도 못했고,
어디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운명이라든가, 믿음이라든가, 그런 말들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밀려 들어왔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절망, 즉 희망을 끊는 일이다.
야욕과 절망 사이에는 10년 정도의 시간이 놓여 있었다.
그 시간은 인간 존재의 하찮음을 가르쳐주었다.(7)
작가의 말이나 프롤로그 정도로 여겨지는 1장이 이 책의 집필 동기다.
죽음의 문 앞에서 누구나 삶을 돌아보는 것인 인지상정일 것이다.
불교에는 부정관이라는 수행법이 있다.
정결하지 못한 것을 보는 것이다.
해골을 볼 일이다.(94)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데카르트의 성찰과
오디세우스와 에이해브 선장을 읽는다.
사변보다는 문학이 훨씬 인물이 내음이 확 풍긴다.
에이해브 선장은 위엄있는, 신을 믿지 않는, 신을 닮을 사람이다.(152)
에이해브는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신념 최계 위에서 확고한 일관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바다의 인간이었던 오딧세우스와 마찬가지로 갈등없이 자신이 길을 간다.(156)
결국 죽음 앞에서 그가 생각했던 것은,
살고 싶은대로가 아니라,
살던 대로 살자는 것 아닐까 싶다.
희망이란 것을 갖고 살다보면,
어느날, 그것이 '끊어지는' 절망을 만날 수 있으니,
신에 대해 생각하며 떨고 있는 갈대 같은 '팡세'보다는,
오딧세우스나 에이해브 선장을 본받아 살 일이다.
작가의 건강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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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7-01-22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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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나아감
신은 숨어있다. 우리는 이것을 신이라 부르든 그렇지 않든지 관계없이 숨은 신을 찾는다. 이 책의 부제는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에 대한 고찰이다.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 사이. 그리고 삶의 과정은 '숨은 신'을 찾아가는 데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본문의 구성을 크게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데카르트(및 팡세)로 읽을 수 있다. 중세와 근대를 가로지르는 서양사 스케치로도 읽힌다. 본문 21장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데카르트로 변해가는 시대의 변화를 그린다.
성도들의 도시와 유사한 공동체가 이념의 도시이다. ... 근대 이후의 인간들은 혈연, 지연, 학연 혹은 이를 포괄하는 국가에 헌신한다. ... 불안에 가득찬 근대인들은 상위의 공동체에 스스로를 맡긴다.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리라고 착각한다. (p.100-. 일부 수정)
무한한 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또다른 유사 신을 필요로했다. 난 무신론자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요새는 이 또한 하나의 믿음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무신론을 믿으면 남는 것은 유물의 세계. 하지만 앞서 근대 이후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국가를 비롯해 나의 신들을 곳곳에서 재확인하고 있지 않던가. 한국인에겐 서구에서 말하는 시민사회가 형성될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나름 합리성의 절정이었던 유학은 성리학을 거치면서 교조적인 영향력으로 조선 후기의 시대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정치력을 유지했다. 일제를 거치고 해방을 맞이했다. 조선 후기와 일제 그리고 해방을 거쳐가던 이 시간대가 (과거 조선인이었던)한국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근래의 관심사이다. 왕에서 총독을 거쳐 대통령이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농민천하지대본을 외치다가 전쟁과 전쟁의 사이 사이에 수탈과 원조가 교차하면서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온 수출천하지대본의 사회가 되었다. 그저 많이 낳아 일손을 거들던 고사리 손들은 훗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말도 듣게 된다.
그래서 요즘 펄럭이는 태극기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들의 삶의 방식과 신념 체계. 독재의 시기가 그들에게 과연 고통의 시간이었던가. 강력한 국가로부터 보호받는다고 믿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요즘 북한의 고통받는다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들의 신념 체계와 삶의 방식. 그들은 고통의 원인을 독재로부터 찾고 있을까. 강력한 보호를 원하는 국가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를 생각해본다. 미션스쿨을 나온 덕에 교회에 출석해야 했고, 신은 없다고 강력하게 확신했다. 드라마 '도깨비'에서 그려냈던 신은 없다고 아직도 확신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심쩍다. 드라마 속에서 지은탁은 행복한 순간에 죽음을 맞이한다. 가까스로 이뤄낸 행복을 두고 자신을 희생하며 생명을 구한다. 그 장면을 보며 '신'이라는게 혹여 저런 거라면... 드라마 속에서 이 소식을 뉴스로 듣던 어떤 사람이 '천사가 아니었을까'라던 말처럼. 요즘은 내가 '신'을 무척 좁게 생각하는게 아닐까 곱씹어본다. 아주 잠깐씩. 저자의 이 책을 읽으면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신은 숨어 있다. 우리는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니 신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없다. 알지 못하니 갈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에서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멈춰 설 곳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나아가기만 하는 것은 비극적 전망이 아니다. 그저 가는 것이다. 꿈도 없이 희망도 없이. (p.149)
우리의 모든 탐구는 '숨은 신'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찾아가는 삶의 과정에 있다.(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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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 2017-02-16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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