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6

알라딘: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강유원

알라딘: 역사 고전 강의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 고전 연속 강의 2
강유원 (지은이)
라티오2012-06-05











































정가
27,000원
판매가
24,300원 (10%, 2,700원 할인)


9.7
100자평(50)리뷰(8)

488쪽
152*223mm (A5신)
75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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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09년부터 40주 단위로 공공 도서관에서 인문학 연속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철학자 강유원의 두 번째 책. 첫 번째 책 <인문 고전 강의>가 인문학 전반에 걸친 기본적인 고전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인문학의 세 분야인 문학, 역사, 철학 중 역사만을 다루어 좀 더 깊이 있는 인문학 공부와 역사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문학 공부는 어떤 분야에서 시작하여도 무방하지만 저자는 역사 공부가 가장 먼저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 있어야만 인문학 공부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나 팩트가 아니다. 이 책이 역사, 역사학, 역사철학의 성격을 모두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고대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각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것들이거나 미래에 대한 역사철학적 전망을 탁월하게 제시하는) 역사 고전들을 읽어 나가면서, 서양의 정치체제와 국제관계의 흐름 속에서 '사회구조와 인간 행위자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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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고대 지중해 세계와 폴리스 시대
제1강/ 제2강/ 제3강/ 제4강/ 제5강/ 제6강/ 제7강/ 제8강/ 제9강/ 제10강

II 로마와 중세 가톨릭 제국 시대
제11강/ 제12강/ 제13강/ 제14강/ 제15강/ 제16강/ 제17강/ 제18강/ 제19강/ 제20강

III 근대 국민국가 체제와 세기말
제21강/ 제22강/ 제23강/ 제24강/ 제25강/ 제26강/ 제27강/ 제28강/ 제29강/ 제30강/ 제31강/
제32강/ 제33강/ 제34강/ 제35강/ 제36강/ 제37강

IV 제1, 2차 세계대전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제38강/ 제39강/ 제40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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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의 근본 원리는 '주권 재민'입니다. 다시 말해서 국민이 주권자이며 주인입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다수의 주권자는 자신의 주권이 유린당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우리가 뚜렷하게 자각하고 있지 않으면 부당한 권위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파고들어 우리의 행위를 제약합니다. 부당한 권위는 강제력과 지식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런 까닭에 주권자인 우리가 강제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면 부당하고 불필요한 권위가 우리의 몸과 정신을 침탈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는 과거의 사실史實을 확인하고 이야기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과거의 집적으로서의 우리의 현상황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설계하게 됩니다.' 접기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1618년에 시작된 30년전쟁부터 1945년에 끝난 제2차 세계대전까지, 즉 서구의 300년은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세계적으로 분열과 파탄이 있었고 그 결과 행복해진 사람보다 불행해진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역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대량 살육이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에 인류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제는 '진보'라는 이름 아래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생각해 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 접기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두 가지 사태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자유로운 노동자'의 공급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혁신입니다. 둘 다 중요하겠지만 앞의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자유로운 노동자가 공급되지 않으면 아무리 기술혁신이 일어나도 공업이 발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말은 세 겹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중세적인 농노 신분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습니다. 둘째, 스스로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동력을 판매할 수 없다면 굶어 죽을 수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아주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습니다. 이것이 근대 노동자의 자유 개념입니다.' 접기

'초보적인 의미의 역사철학은 프랑스혁명 이후에 시작되었습니다. 혁명 이전에는 대체로 신의 뜻을 따르는 섭리적 역사관만 존재했지만, 혁명 이후에는 인간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생각을 뚜렷하게 자각하면서 역사의 주체는 누구인가, 역사의 진행 과정은 어떠한가와 같은 역사철학적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습니다. 인간을 역사의 주인으로 보았다는 것은 크게 보아 인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서구 역사에서 인문주의는 대체로 세 번 생겨났습니다. 첫째는 고대 아테나이에서 소피스트들에 의해 시작되어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으로 이 어진 인문주의입니다. 고전주의로 불리기도 하는 이것은 독일의 미학자 요한 빙켈만(1717~1768)이 말했듯이 철저히 이상적인 것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아테나이의 인문주의는 그 기간이 매우 짧아서 3대 비극 작가 중 마지막 사람인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이 나올 무렵에는 거의 끝나 있었습니다. 둘째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이고, 셋째는 헤르더가 살았던 18~19세기 독일의 인문주의입니다. 이 시기는 '질풍 노도'의 낭만주의 시기와 겹칩니다.' 접기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은 항상 나의 계급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나의 계급적 이익에 철저히 복무하면서 사는 것이 근대인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계급의식을 조장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근대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계급적 정체성을 잘 표현하는 외부의 형태 중의 하나가 바로 '사는 곳'입니다.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묻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자신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접기

'엥겔스에 따르면,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하는 근본적인 심성구조는 '경쟁'입니다. 경쟁은 근대적 시공간을 지배하는 가장 기본적인 심성구조이며, '불안'이 이것에 맞물려 있습니다. 경쟁이 심해질수록 불안감도 늘어납니다. 이 불안감은 사람들을 옥죄는 힘이 아주 강해서, 느긋하게 살 만한 여유를 가진 지배계급은 경쟁 심리를 부추김으로써 피지배계급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이를 지배의 도구로 삼습니다. ' 접기

'한국은 건국된 지 이제 60년이 조금 넘은 나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도 여전히 국가의 정체성을 어디에 세울 것인지를 놓고 계속 해서 논쟁해야 하는 시기입니다. 조선 건국 이후 거의 100년이 다 되어서야 《경국 대전》이 완성된 것을 고려한다면 하나의 정치체제를 세우고 그것을 법전으로 제도화하는 일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대 국민국가를 살아가는 시민의 의무 중 하나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나라의 이념을 어디에 세울 것인지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 나라를 어떤 이념 위에 세울 것인지 고민하고 선거와 운동을 통해 의사를 표출하는 것이 시민의 할 일입니다. 이것은 역사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싸움이므로 어느 한 쪽이 주도권을 잡으면 다른 한 쪽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접기

인문학 공부는 문학과 역사, 철학 등 어떤 분야에서 시작해도 무방하겠지만, 저는 역사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 있어야만 인문학 공부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북다이제스터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J. 굴드에 따르면 인간은 지금으로부터 4~5만 년 전에 진화를 멈췄다고 합니다. 진화가 멈췄다는 것은 이후 인간의 모든 행위가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학습의 산물이라는 뜻입니다. - 북다이제스터

새로운 기술은 그것을 둘러싼 인간 관념에 따라 사라지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세계 최초 금속활자가 유럽과 달리 크게 확산되지 않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도구나 기술보다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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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강유원 (지은이)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 역사, 문학, 정치학 등에 대한 탐구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써 왔다. 오랫동안 개인 플랫폼에서 ‘책읽기 20분’을 진행했으며, CBS ‘라디오 인문학’과 KBS 제1라디오 ‘책과 세계’ 등 방송에서도 전문 서평가로 활동했다. 《책》 《책과 세계》 《주제》 등의 서평집과 《인문 古典 강의》 《역사 古典 강의》 《철학 古典 강의》 《문학 古典 강의》 《숨은 신을 찾아서》 《에로스를 찾아서》 등을 썼으며, 《경제학 철학 수고》 《철학으로서의 철학... 더보기


최근작 : <책 읽기의 끝과 시작>,<에로스를 찾아서>,<문학 고전 강의> … 총 42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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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책 읽기의 끝과 시작>,<에로스를 찾아서>,<문학 고전 강의>등 총 13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18위 (브랜드 지수 19,144점), 고전 32위 (브랜드 지수 39,916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역사 고전 공부를 통해 시대의 메시지를 읽는다!
철학자 강유원의 '인문학 연속강의' , <<인문 고전 강의>>에 이은 두 번째 책

2009년부터 40주 단위로 공공 도서관에서 인문학 연속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철학자 강유원의 두 번째 책이다. 첫 번째 책 <<인문 고전 강의>>가 인문학 전반에 걸친 기본적인 고전을 다루었다면, 이 책은 인문학의 세 분야인 문학, 역사, 철학 중 역사만을 다루어 좀 더 깊이 있는 인문학 공부와 역사 역사철학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문학 공부는 어떤 분야에서 시작하여도 무방하지만 저자는 역사 공부가 가장 먼저라고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우리 자신의 역동적 상호작용에 대한 역사적 통찰이 있어야만 인문학 공부가 제대로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나 팩트가 아니다. 이 책이 역사, 역사학, 역사철학의 성격을 모두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이 파악한 역사적 계기들을 중심으로 서양사를 서술하면서, 역사를 움직이는 힘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원천적인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탐구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과거의 수많은 유산들 위에서 현재의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깨닫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태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따져 물을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지금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앞날을 장기적으로 내다보는 안목이 요구되는 시기이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는 구조 속에서 우리 행위자들이 어떻게 행위하는가'에 따라 그 경로를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나아가는 세계 속에서 과거를 성찰하는 역사 고전 공부를 통하여 시대의 교양에 기여하는 '참다운 인문인'이 되는 것이자 '역사의 창조자'로 동참하는 것이다.

■ 책의 내용
이 책은 고대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를 대표하는(각 시대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것들이거나 미래에 대한 역사철학적 전망을 탁월하게 제시하는) 역사 고전들을 읽어 나가면서, 서양의 정치체제와 국제관계의 흐름 속에서 '사회구조와 인간 행위자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를 탐구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역사 고전들을 읽음과 동시에 이 고전들이 생겨난 시대적 맥락을 함께 살펴보는데 이를 위한 시대 구분은, 국제사회라는 문제를 제기한 '고대 희랍의 폴리스 시대', 여러 가지 제도와 법률이 확립되기 시작한 '로마와 중세 가톨릭 제국 시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국가 체제와 지식 권력이 성립된 '근대 국민국가 시대', 비약적인 기술의 발전과 위력으로 초래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현재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 구분 아래 각 강의들에는 각 시대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과 역사 고전에 관한 설명, 시대의 의의 등이 들어 있으며, 이것의 대강은 "차례"와 본문에 서술형 문장으로 안내되어 있다. "차례"에서 이 대강을 읽어 책 전체 내용을 개괄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면, 본문에서 제시하는 역사의 큰 흐름과 독서의 맥을 짚어 내기가 수월하다.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는 강의를 하면서 소개했던 "더 읽어 볼 책들"을 읽음으로써 이 책의 한계를 넘어서는 공부로 나아갈 수 있다. 접기




“역사 책을 읽을 때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면, 그때는 바로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입니다.”<역사 고전 강의>(라티오, 2012)


“서울의 재개발·재건축 사업을 통한 해당지역 원주민 재정착률은 20~30% 수준으로 추산된다. 다만 공식적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동산전문가인 김현아 자유한국당 의원은 20%, 서울시는 27~8%, 서울시 산하 서울연구원은 25%로 보고 있다. 더 낮아지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5명 중 4명이 평생 살던 터전에서 쫓겨나고 있는 셈이다.

실제 국토부나 서울시는 ‘주거 잰틀리피케이션’ 현상 악화에도 마땅한 대책 없이 손을 놓은 모습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을 산출하긴 사실상 어렵다”면서 “(재정착률을) 높여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택공급문제부터 환경개선을 위한 비용을 누구에게 얼마나 부담시켜야하는지 등 여러 문제가 엮여있어 대책 마련이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또다른 서울시 관계자는 “의식주를 국가가 책임지는 사회주의가 돼야 가능하지 않겠느냐”며 “무주택 세입자에 대한 지원조차 완벽하다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택소유주에 대한 문제까지 고민하기는 현실적으로 무리다. 장기적으로 국토부와 함께 고민을 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서울시 산하 서울연구원 관계자는 “원주민의 내몰림 현상은 재개발에 따른 비용의 부담금 책정방식이나 조합원으로의 지위유지여부 등 사적·선택적 영역이 함께 뒤섞인 문제”라며 “근본대책은 아니지만 절차적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는 등의 정책들이 정비되고 있고, 도시재생사업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기도 한다”고 대책마련을 위한 움직임을 소개하기도 했다.” <국민일보>(2019. 11. 17.)

"무릇 국가 근간은 땅과 사람이다. 이 사실은 문명이 탄생한 이래 오늘날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위적인 국가에서는 그 명백한 사실이 전도되는 경우가 흔하다. 땅과 사람이 국가를 이루는 게 아니라 국가를 위해 땅과 사람이 존재한다. 삶의 효율성과 편의를 도모하려는 게 제도의 본래 취지임에도 거꾸로 제도 자체가 존속하기 위해 삶이 희생되고 변질된다. 중국 당나라 균전제가 붕괴하는 과정은 바로 그런 전도된 현상을 잘 보여준다.

마을의 한 농민 가구가 가난에 못 이겨 고향을 버리고 떠나면 그 마을에 부과된 세금 양이 그만큼 줄어야 마땅하지만 지방정부와 중앙정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머지 가구들이 그 가구 세금까지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 이런 제도적 결함은 도미노처럼 농민의 토지 이탈을 가속화시켰다. 갈수록 유민이 늘어난다. 부패한 지방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즉각 농민이 버린 토지를 겸병하고 나선다.

균전제의 기본 전제였던 토지 국유 개념은 힘을 잃고 토지는 사실상 지주들에 의해 사유화된다. 토지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계속 확대 재생산된다. 당제국의 실패를, 이후의 역사까지 통틀어 동양식 지배 체계의 근본적 실패라고 볼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동양식 왕조에서는 늘 토지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단지 토지가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 근저에는 토지가 형식적으로는 국가나 왕의 소유이면서도 실제로는 사유화되는 모순이 있다. 이 모순이 중국보다 더 확연히 드러나는 사례는 한반도 사회의 경우다.


고려의 토지제도는 전시과(田柴科)라고 부른다. 식량(田)과 땔감(柴)에서 나온 말인데, 명칭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시과가 고려시대 공무원(관리)에게 봉급을 주던 제도라는 점이다. 사기업이 없고 경제 민간 부문이 활성화되지 않았던 때였으니 당시 공무원 봉급제도는 국가와 사회의 재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은 사회에서 급료를 지불하는 방식은 토지다. 하지만 이런 순경제적인 측면에도 정치 이데올로기가 개입된다.





군주는 자신이 지배하는 나라의 땅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소유하고 모든 백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이것을 왕토사상이라고 부른다. 토지의 유일한 소유자가 왕이니 토지는 원칙적으로 누구에게 넘겨줄 수 없다. 물론 사고 팔 수도 없다. 그러므로 고려 정부는 관리를 임용해도 급료로 토지 자체를 내주는 않는다. 하지만 급료는 줘야 한다. 절묘한 해결책이 있다. 공무원에게 토지 생산물을 수취할 권리를 내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조세를 받을 권리, 수조권(收租權)이다. 왕토사상의 이념과 현실적 필요성을 조화시킨 훌륭한 발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수조권을 받은 관리는 성실하게 일하다가 나이가 들면 은퇴한다. 가족으로서는 가장이자 유일한 수입원이 정년퇴임한 것이다. 연금보험이나 국민연금 같은 건 없다. 그럼 그 집안은 이후 어떻게 먹고 살까? 귀족 신분을 어떻게 유지할까? 관리가 은퇴한 뒤에도 가족이 기존 신분을 유지하려면 뭔가 확실한 조치가 있어야 한다.





사실 관리가 은퇴하면 수조권을 국가에서 회수하는 게 마땅하다. 관리가 없는데 급료가 계속 나간다면 국가재정의 낭비다. 그런데 그렇다고 즉각 수조권을 빼앗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게다가 개국 초기 관리들은 대부분 개국공신이므로 설령 정부에게 의지가 있다 해도 심각한 반발과 사회문제를 각오하지 않는다면 강행할 수 없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관리 재임 시에 주어졌던 토지 수조권은 퇴임 관리가 계속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는 자식에게 상속되는 게 관행으로 자리 잡게 된다.





수조권이 상속된다면 이미 그것은 사실상 토지 소유권이다.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자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는 지주다. 제도에 구멍이 뚫린다. 이런 점 때문에 고려의 토지제도는 초기부터 삐걱거렸다. 로마처럼 화려한 정복왕조라면 정복한 토지를 나눠주면 되지만 고려의 토지는 유한하고 심지어 새로운 관리를 임용하여 수조권을 내줄 때마다 오히려 줄어든다.





이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심지어 기존 수조권이 설정된 토지에 새로 수조권을 덧씌우기도 한다. 같은 토지 권리를 놓고 전직과 현직 관리의 다툼도 문제지만 졸지에 이중과세를 부담하게 된 농민은 아예 죽을 맛이다. 농민은 토지와 고향을 떠나 유민이 되며(농민이 유민화하는 현상은 농경문명이라는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동아시아 역사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기본 패턴이다), 버려진 토지는 자연스럽게 사적 매매 대상이 된다. 그래서 고려 중기에 들면 전시과는 완전히 무너지고, 그에 따라 국가재정도 붕괴한다.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것은 엉뚱하게 고려를 정복한 몽골이다. 몽골은 고려의 서서히 곪아온 경제 문제를 식민지 방식으로 해결했다. 원래 정복자는 식민지 내정에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기존 체제를 온존시키기 마련이다. 1945년 한반도 남부에 들어온 미군정이 일제 강점기의 사회 인프라를 그대로 가져간 것과 마찬가지다. 정복자에 고분고분한 고려 기득권층 대토지 소유자들은 즉각 친원파로 변신해 몽골 정권을 등에 업고 ‘사회 안정’이라는 미명 아래 ‘이대로 영원히’를 외쳤다.





반면 농민은 나라도 잃고 땅도 잃었다. 친일파를 미워하던 20세기 한반도인처럼 13세기 고려 백성들도 친원파를 미워했다. 그런 분위기에 그전까지는 미약했던 민족의식도 한층 강화된다. 13세기 중반 고려 전성기에 간행된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신라 건국으로 시작하는 것과 달리 몽골 식민지 시대의 역사서인 일연의 <삼국유사>가 단군 신화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오랑캐 지배를 받는 처지로 전락했으나 원래는 유구한 문명 역사를 가진 우수한 민족이었다는 이데올로기를 강조하여는 의도다. 그 덕분에 터무니없는 단군기원이 생겨났다.





얼마 안가 이성계가 고려를 타도하고 조선을 세우고 과전법을 시행한다. 하지만 이름만 바뀌었을 뿐 기본 취지는 전시과와 다를 바 없었다. 처음에는 좋았다. 고려 권신과 대토지 소유자를 소탕했으므로 토지 소유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빈 도화지에 그림 그리기는 어린아이도 할 줄 안다. 새나라 조선의 기백은 좋지만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는 세상에 이름만 바뀐 제도가 온전할 리 없다. 관리에게 봉급으로 주어진 수조권은 고려 때처럼 자연스럽게 세습된다. 관행을 바꾸려면 제도가 아니라 ‘문화’가 달라져야 하는데, 조선은 고려와 ‘다른 이념’을 채택하기는커녕 유학 이념을 더욱 강화한 왕조다. 고려 말기 도입된 성리학은 유학 중에서도 가장 수직적 질서를 강조하는 장르다.





조선의 토지제도는 개국한지 50년도 못되어 갈팡지팡한다. 다행히 세조는 판을 새로 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세조는 조카 왕위를 찬탈한 쿠데타를 한 덕분에 개국공신들의 세력을 꺽을 수 있었다. 이런 배경에 그는 다시금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허용한다는 직전법(職田法)을 시행하는데, 사실 개국 초기로 되돌아가자는 취지이므로 명칭이 오히려 새삼스러운 제도다. 문제 근원을 해결하지 않은 미봉책이요 대중요법의 전형이다. 결국 직전법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명종 때는 직전마저 지급 분능이 되면서 국가 부도를 초래하고 만다. 명종 치세에 임꺽정 같은 도적 무리가 횡행한 데는 토지제도의 문란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역사>(들녘, 2008)










“현실에서 빈곤이 진보와 함께 나타나는 진정한 원인은 생산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지주가 지대(地代)를 차지하는 것을 합법화하는 토지 사유제 때문이다. 빈곤은 “개인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조직의 차이에서 생긴다.” 이러한 점을 무시하고 “정치적 민주주의만 추구하는 사회는 무정부 상태와 전제정치로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현실을 봐도 알 수 있다. 분포의 편중을 나타내는 지니계수로 살펴보자. 지니계수 1은 극단적인 편중 즉,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할 경우고 0은 완전 평등 즉, 모든 사람이 같은 몫을 갖는 경우를 말한다. 2005년 기준 “우리나라 소득분포 지니계수는 0.3 전후이고, 금융자산 분포 지니계수는 0.6 전후지만, 세대별 토지 소유 분포의 지니계수는 0.81이다. 이처럼 토지 소유가 심하게 편중된 상황에서 최근 5년간 전국 지가 상승률이 24.6%나 되어, 토지로 인한 계층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전국 주택 보급률은 106%에 이르렀지만, 전체 가구의 44%가 무주택자다. 전체 세대의 5%가 전체 주택 21%를 소유하고 있고 상위 30명이 주택 9,923채를 소유하고 있다.”





헨리 조지의 해결책은 명확하다. “생산요소는 토지, 노동, 자본이다. 생산물인 부(富)는 이 세 가지 요소에 대한 대가로 모두 분배된다. 즉 지대, 임금, 이자로 분배되며(부=지대+임금+이자), 이 세 가지 분배법칙 간에도 서로 배타적인 상호 연관성이 있다. 예를 들어 지대를 부의 20%, 임금을 35%로 하면, 이자는 45%가 되어야 한다.” 이중 “지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부-지대=임금+이자’가 된다. 이처럼 임금과 이자는 노동과 자본의 생산물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물 중 지대를 공제하고 난 뒤 잔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력이 아무리 높아지더라도 지대가 같은 정도로 높아진다면 임금과 이자는 상승할 수 없다. 진보하는 지역에서 생산력이 증대하는데도 임금과 이자가 상승하지 않는 이유는 지대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향상된 생산력은 지대로 흡수되어 버리고 임금과 이자는 전과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대는 왜 계속 상승하는가? 한마디로 인구증가와 기술 개선 같은 물리적 진보 때문이다. 더욱이 지대가 오르면 미래 토지가치가 상승할 것이 확실해 보여 토지 투기가 일어난다. 또한 “토지 투기는 되풀이해서 발작하는 산업 불황의 근본 원인이 된다. 지대가 지나치게 오르면 노동과 자본은 적은 대가로 만족하거나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다. 생산 중단은 수요 중단으로 나타나고, 다시 또 다른 부문의 생산을 제약한다. 그 이후 상대적 정체기가 지속되면서 서서히 균형이 형성되고 다시 같은 현상이 되풀이된다. 산업 활황기에 토지가치가 꾸준히 상승하여 결국 또 토지 투기가 생기고 그로 인해 토지가치가 또 뛴다. 지대 또는 토지가치의 투기적 상승은 토지 소유자가 노동과 자본을 배척하는 효과를 낸다. 노동자가 물자 부족을 겪으면서도 실업이 발생한다. 부의 분배가 불평등한 가장 큰 원인은 지대를 전유할 수 있는 토지소유의 불평등 때문이다.”





“빈곤을 타파하는 방법은 토지의 개인소유를 공동소유로 바꾸어야 한다.”<진보와 빈곤>(살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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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지 문제

<역사 고전 강의>에서 강유원은 역사 책을 읽는 팁 한 가지를 알려 준다. “역사 책을 읽을 때 토지 문제를 둘러싸고 대규모 변화가 일어나면, 그때는 바로 사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시기입니다.”


“동학혁명 당시 한국의 조세체계는 백성을 격노하게 만드는 가혹한 세들을 모조리 끌어모은 형국이었다. 세의 종류에는, 정부에 내는 국납, 토지세(한 종류가 아닌 매우 다양한 종류의 토지세와 이외 부가세와 수수료에 해당하는 세금이 더해짐), 휴경지세, 군납(몸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남성, 즉 양정에게 포 1필이 부과되었으나, 이것이 토지세보다 타격이 더 심한 경우가 많았다), 지방관에게 내는 세, 지방 지배자에게 내는 세 등등이 있었다. 소금, 어물, 선박과 다른 많은 물품에 붙는 세금 등을 포함시키지 않아도 목록은 이렇게 길었다. 죽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영아와 노인, 세금징수관을 피해 달아난 사람들의 친척과 이웃 등, 살아 있는 것 중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것에는 다 세금이 붙었다.


백성들은 환곡이라고 하는 악명높은 곡물 대부제도를 통해 관리에게서 곡식을 꾸거나, 태고적부터 모든 이의 몸에 박힌 가시 같은 지방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돈을 꾸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이성적 행동은 세금을 피하는 것이었다. 서원명부나 관리명부, 특권 혈족의 명부, 무엇보다 세금과 징병이 면제되는 양반명부로 뛰어오르거나, 하급관리를 매수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세를 뜯게 하거나, 산으로 도망가서 자작을 하는 길밖에 없었다. 오직 토지에 묶여 있는 정착 영세농가만이 항상 수탈을 당했다.”


이와 같은 봉건적 토지 제도가 한국전쟁 때 해소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후 서울시인민위원회는 대부분 남한사람들 주도로 신속히 조직되었다. 인민위원회는 7월 초순에 이르러 모든 일본인 재산과 대한민국 정부, 관료, 독립자본가 재산을 몰수했다. 조선인민군은 비축된 쌀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사법행정을 지역 치안대 손에 맡겼다.


이점은 미국이 이전 한국에 요구했던 개량주의적 토지재분배에 반대했던 봉건적 지주계급에 대한 혁명적 승리로 간주되어야 마땅하다. 토지재분배는 연합군 부산 방어권 밖 모든 지방에서 이루어졌으며, 비록 전시에 급하게 수행되었지만, 계급구조와 계급권력을 일소함으로써 나중에 이승만의 토지 재분배 계획을 가능하게 했다. 한국전쟁은 20세기 중반의 한국을 크게 평등하게 만든 계기가 되였다.”


2. 과거 식민지 청산이 안 된 이유

“남한 역사가들은 1910년 이후 시기에 대해 일차자료, 기록보관소 문서, 회견 같은 역사연구의 기본사료를 이용하여 역사를 쓰려 하지 않는다. 한국의 주요 역사책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의 모든 책이 20세기를 결과론으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남한에서 1935년에서 1945년 사이라는 특정한 시기는 비어 있는 찬장과 같다. 왜 그런가? 일본에 협력한 수천명의 한국인들이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아주 지워버렸다.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한국인들이 식민독재에 부역했으며, 해방 후에도 너무나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관행을 자신 행동모델로 삼았다. 한국을 일본에 파는 데 몰두한 일진회 회원이 몇몇 소수인 양 주장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시도 역시 과장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참상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남한 정부가 방치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성적 노예에 대한 조사를 개시하게 되면 많은 한국여성들이 한국남성들에 의해 동원되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여운형은 ‘현재의 혼란’의 핵심요인은 미국이 식민지경찰을 유지한 데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미국인들은 그들 역사에서 국립경찰에 저항해왔으며, 일본에서는 맥아더가 비무장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점령 목표에 장애가 된다고 해서 일본의 국립경찰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한국에서 미국은 서울에서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과 노조, 농민단체들에 대항해 독자적인 국립경찰을 창설했다. 1945년 10월쯤에는 일본 경찰에서 근무한 한국인들의 약 85%가 국립경찰에 채용되었다.


반면 북한은 해방 후 일년 내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던 식민지기구들을 철저하게 혁신하면서 일제에 복무한 한국인들을 치안세력에서 완전히 제거했다.”





“4. 19. 혁명 이후 국립경찰 가운데 일제에 복무한 약 600명의 경찰관료 대부분이 사직하거나 면직되었고, 몇몇은 다시 한번 가혹한 농민재판의 희생자가 되었다. 몇몇 시골 마을에서는 사람들이 경찰에게 20여년 전까지 소급하는 원한을 앙갚음했고, 어떤 경우는 마을 사람들이 식민지 경찰 하나를 기름에 튀기기도 했다. 한국 군부에는 일제시대 출신의 고위장교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이들 대부분을 젊은 대령들이 한줌만 남겨놓고 체포하거나, 해고하거나, 은퇴시켰다.”




3. 우리나라에 좌우만 있는 까닭

“일본 식민지배 마지막 10년 동안 한민족이 서로 불화하는 유산이 생겼다. 이때는 일본 통치가 가장 가혹했던 시기로 한국인들이 가장 고통스럽게 기억하는 시기다. 192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조직되어 도, 군, 읍, 노동현장에 지부를 두었다. 다음해 조선반공연맹이 모든 도에 지부를, 경찰서에 지방 사무실을, 그리고 마을, 공장, 기타 작업장에 유관단체를 조직했다. 공산주의자들이 일본에 저항하는 정도에 비례해 노동현장과 학교에서 반공 ‘정신’ 토론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가 되었다. 전체주의적 심문방식을 통해 머릿속 ‘불순한’ 사상을 색출당했다. 이런 관행은 해방 이후 남한과 북한에 깊이 해독을 끼쳤다. (남북한은 모두 정치적 ‘사상교육’ 프로그램에 빠져들었는데 물론 북한이 더 심하긴 하지만 남한도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사상교육을 한다. 한국전쟁 기간의 비전향 정치범들을 1990년대 초까지 남한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일본인들 덕분에 한국에는 중도 세력이 없었으며, 이런 상황은 1980년대까지 계속된다. 특히 이러한 계기는 미국의 신탁통치 기간 가속되었다. 1947년 말 하지 장군은 미국이 처한 본질을 포착했다. ‘공산주의와 싸우고자 할 때는 파시즘이 권력을 접수할 위험이 항상 있다. 히틀러가 독일에 구축한 것은 공산주의와 싸우기 위해서였지만 독일은 나찌즘으로 이행했다. 에스파냐도 마찬가지다. 다른 한편으로 공산주의자들이 힘을 구축하면 민주주의는 붕괴되며, 그 나라는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자, 이 문제의 해답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떻게 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정치적인 중간선을 택하겠다는 것인가? 토론해보자고 거론한 것뿐이다. 나는 해답을 모른다. 해답을 알고있다면 좋으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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