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몸으로 하는 공부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은이)여름언덕2005-07-18
9,000원
판매가
8,100원 (10%, 900원 할인)
8.8100자평(5)리뷰(17)
194쪽
148*210mm (A5)
252g
책소개
철학박사이자 회사원인 저자가 그동안 냈던 서평집 <책>이나 엄격한 형식으로 짜여 있던 <서양 근대문명의 기반>, <책과 세계> 등과 달리 홈페이지 'armarius.net'에 연재했던, 책과 세상에 대한 잡문집을 엮었다.
자신의 노동과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을 구분해 체제 바깥에서 꿋꿋이 서 체제 안에 흡수되기를 거부하는 저자의 학문, 사회, 문화에 대한 짧지만 속 깊은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그의 텍스트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강유원'이라는 컨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목차
서언
1. 아는 것과 모르는 것
01 말하기와 글쓰기
02 머리로 알기, 몸으로 해보기
03 '안다'는 것
2. 책 따로, 세상 따로
04 책의 속살과 껍질
05 책 따로, 세상 따로
06 지식인은 어떻게 먹고 사는가
07 지식인과 매스미디어
3. '문화'라 불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08 '문화'라 불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09 리영희의 '객관성'
10 한국 '문화' 탐구 방법론
11 패스트푸드 전체주의
4. 학문의 현실적 쓸모
12 노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13 학문의 세 가지 태도
14 철학의 현실적 쓸모
15 방법론적 시니컬
16 고전의 힘
------------------------------
책속에서
우리가 '전체주의' 할 때 떠올리는 것은 대개 폭력과 억압으로 전국민을 내리누르는 독재자의 모습이며, 이런 것을 우리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억압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숨쉴 틈도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보면 상황이 좀 나은 건지도 모르겠다. 뭐가 독재고 뭐가 아닌지를 눈으로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는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는 종류의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어와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말 그대로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이다.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가 농약이라면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생물학적 오염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노예화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기업에 취직하여 자신도 모르게 기업의 전체주의 지배를 돕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빤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요, 그것을 우리는 '패스트푸드 전체주의'라 할 수 있겠다.
끝으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론자에게 두 마디. 첫 마디, 뭘 분석하려면 경제적 바탕 위에서 하도록. 두 마디, 남들 욕하지 말고 자기부터 파시즘적 작태를 저지르지 말도록. - 본문 115~116쪽에서 접기
마야 인들이 마야력을 보존하고 있는 것은 전통문화 수호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없으면 당장의 삶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생활 속의 필요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한 개인이라면 모를까 어떤 집단 전체가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가 없다. -81-82쪽 - 곰빔비
사람들은 흔히 문화가 대단한 정신적 활동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로지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는 있을 수 없다. 소위 몇몇 '문화인'들은 그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몸으로써 그들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내지 않고 이미 자신의 생계를 해결해내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밥통과 관계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것은 '아트'이지 문화가 아니다. 어떤 집단 구성원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인정할 뿐만 아니라 무의식중에 그들의 몸에 배어서 문화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 아니면 문화가 아니다. 거듭 말하지만 새삼스럽게 문화라고 불리는 것은 문화가 아닌 것이다. -82쪽 접기 - 곰빔비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어와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말 그대로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이다.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가 농약이라면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생물학적 오염과 같다. 따라서 이것은 앞으로 우리를 얼마나 노예화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기업에 취직하여 자신도 모르게 기업의 전체주의 지배를 돕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뻔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요, 그것을 우리는 '패스트푸드 전체주의'라 할 수 있겠다. -115쪽 접기 - 곰빔비
끝으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론자에게 두 마디. 첫 마디, 뭘 분석하려면 경제적 바탕 위에서 하도록. 두 마디, 남들 욕하지 말고 자기부터 파시즘적 작태를 저지르지 말도록. -116쪽 - 곰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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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강유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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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철학, 역사, 문학, 정치학 등에 대한 탐구 성과를 바탕으로 공동 지식과 공통 교양의 확산에 힘써 왔다. 오랫동안 개인 플랫폼에서 ‘책읽기 20분’을 진행했으며, CBS ‘라디오 인문학’과 KBS 제1라디오 ‘책과 세계’ 등 방송에서도 전문 서평가로 활동했다. 《책》 《책과 세계》 《주제》 등의 서평집과 《인문 古典 강의》 《역사 古典 강의》 《철학 古典 강의》 《문학 古典 강의》 《숨은 신을 찾아서》 《에로스를 찾아서》 등을 썼으며, 《경제학 철학 수고》 《철학으로서의 철학...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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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지은이)의 말
2002년까지는 책읽기만이 내 인생의 알리바이였으나 2005년에는 글쓰기가 그것에 덧붙여졌다. 예나 지금이나 책읽기와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위기지학이라 여긴다.
북플 bookple
제목이 심상치 않다. “몸으로 하는 공부”.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다’ 쯤 되겠는데, 비슷한 버전으로는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 ‘공부는 머리로 한다’, ‘공부는 돈으로 한다’ 등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책읽기와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여긴다.”(5쪽, ‘서언’ 중)
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식인은 어떤 사람인지, 학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비롯해 문화와 책, 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단상들로 채워진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잡문’을 이것저것 끌어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주제가 모든 글을 하나로 꿴다. 서로 통한다. 그러니 핵심은 몸이고, 공부다.
“공부”는 그렇다 치고, “몸으로”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두 가지만 꼽자면, 우선 ‘직접, 스스로, 끈기 있게’ 공부한다는 걸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190쪽)라는 저자의 말도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
두 번째는 ‘머리로’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으로’이다. 머리 즉, 생각만 하는 건 반쪽짜리 공부다. 몸만 쓰는 것(경험만 하는 것)도 반쪽짜리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완전체다. 경험한 것을 이론으로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은 실천해야 한다.
몸(경험)과 머리(이론)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굳이 공부의 순서를 따지자면 몸이 먼저다. 일상적인 삶, 생활, 현실, 물리적인 습관과 시간 등을 토대로 문화, 멘탈리티, 이론 따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현실, 사례, 예시를 공부하고 이론을 정립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몸으로 하는 공부”의 목적은 ‘위기지학’이다. 위기지학은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다음 백과사전)이라는데, 자기 수양을 위하거나 자아실현, 인간 본질의 실현을 위한 공부쯤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인간다움의 본질은 생각하는 것, 자유로운 것이다.(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저자도 “오히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125쪽)다고 표현하니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국가와 자본, 미디어, 지식인, 권위 등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 상태나 다름없다.(덧붙이자면, 저자는 비판적 사고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말한다.)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130쪽)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공부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실천하자. 몸으로 공부하자.
따로 더 찾아보고 공부해야 할 내용도 더러 있었고(특히 ‘10장 한국 ‘문화’ 탐구 방법론’이란 글에서 여성해방의 역사에 관련된 부분), 동의하기 힘든 의견도 있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책 전체의 주제에는 깊이 공감했다. 부록처럼 실린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는 장도 인상적이다. 스스로를 ‘누군가 뭘 열정적으로 하는 것도 비웃는 사람’(159쪽)이라면서도 저자 자신은 치열하게 공부한다. 구체적인 공부법도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고,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덧붙이는 말1) 이 책이 ‘품절’ 상태인데, 출간이 좀 되었으면 좋겠다. 중고거래가가 지나치게 높다. 예전에 읽고 중고로 팔았는데, 다시 사려니 비싸다(팔 때는 좋았다지). 도서관도 멀지만, 너절한 책을 빌려 읽기가 싫다. 중고거래가가 높다는 건 수요가 있다는 의미일 텐데, 제본 질을 좀 높여서 출간했으면 좋겠다. 읽다 보니 종이가 책 본체에서 낱낱이 떨어질 것만 같다.
덧붙이는 말2) 책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저자가 어릴 때 박목월이 쓴 박정희 전기를 읽고 박정희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커서 박정희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고, (…) 독서의 기억과 겹쳐짐으로써 배신감, 증오심까지 생겨났다.’(51쪽)고 한다. 너무 증오한 나머지 연좌제가 불법이고 ‘애비와 자식은 무관하지만’(같은 쪽), ‘뻔뻔스럽게 설치고 다니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는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같은 쪽)라고. 2005년에 쓴 책인데, 지금 저자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 때려죽이고 싶은 정도보다 더 심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cobomi 2017-01-03 공감 (19) 댓글 (2)
강유원의 새책이 나왔다.
역사고전 강의.
이번 주말은 부처님도 오셔서 길다.
이제 퇴근하면 강유원을 끌어안고 뒹굴 거다.
외모는 철학하는 사람보다 철학관하는 사람에 가깝지만, ㅋ
그의 글은 정직하고, 세밀하다.
그의 글을 믿고, 주말을 맡기련다.
이참에 그의 책을 되새겨 보면, 제법 읽은 게 많다.
태그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주말 애인으로...
글샘 2012-05-26 공감 (19) 댓글 (8)
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말 중의 하나가 공부라는 말이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았다. 그 당시로서는 오남매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경제력에 비해 공부해야할 아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때문에 아들들이 당연히 우선시 되었고 딸인 나는 은근히 책 좀 안봤으면, 공부좀 덜했으면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했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말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학창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공부하라는 말은 듣기 싫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하라고 할때의 그 공부가 듣는 사람이 하고싶은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또 오빠나 남동생을 겨냥하고 있는 그 말에는 공부를 잘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기대를 담고 있는듯해서 옆에서 듣는 나까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가능하면 공부하라는 말은 삼키고 살았다. 참다 참다 하는 말이 고작 '책 좀 봐라' 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펴들었었다. 수십번을 봐서 책은 너덜너덜 한데도 그것만 본다. 한참 보다가 깔깔거리고 웃는 대목도 언제나 똑같다. 거의 외우다시피 봐도 여전히 웃긴다는 것이다. 참 질긴놈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재미있는 책들이 많은데도 왜 한가지만 파고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위해서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순 거짓말이거나 경험적 오류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책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책에서 멀어져갔다. 책을 읽다가 혼자보기 아까운 내용이 있어 읽어보라고 하면 엄마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보고 있냐고 되묻는다. 좀 더 커서는 세상에는 책보다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외려 가르치려 든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날보고 공부하는게 그렇게 좋냐고 비아냥 거린다. 공부라고 해봐야 정말 공부하는 분들과는 체급이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책을 보는거다. 즐거울 때가 많지만 책을 보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나마 가장 즐겁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할 것이다. 나도 하루 일과 중에 책 보는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려고 애쓴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책볼 시간이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직장생활과 집안살림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란다. 책과 함께 있을때는 신간이 편안하다. 죽을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어릴때 남들은 귀에 닳도록 듣는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란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대를 물려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공부라는 것을 강유원은 몸으로 하라고 한다. 아니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어때야 한다라거나 자신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좀 다부지고 논리적인 문체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그에게 책을 읽는 것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알리바이' 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읽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도 양에 대한 의미보다는 깊이에 천착한 '인생의 알리바이'다. 한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기를 그는 권하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는 독서의 깊이 못지 않게 넓이도 갖추고 있고 읽은 책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 짐작할 수 있다. 원전에 입각해서 수십번씩 읽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 독한 사람이다 싶다. 그는 이런 방법을 그의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참 존경스러운 분이고 그것을 또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도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의 시기를 계몽주의 시기라고 한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이성을 대중화하라'였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대중은 매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원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대중매체에 대항하여 '대중을 이성화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지식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식인으로 꼽고 있는 대상은 소설가와 대학에 관련된 교수 혹은 그 주변인물들이다. 그는 어떤이가 명백하게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다면, 즉 소설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소설가가라 부를 수는 없고 기업가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그들을 먹여살려주는 학생들을 위해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제'를 적용해야한다는 제안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강유원은 세가지 학문하는 태도를 짚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인문학적 태도,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과학적 태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하는 공학적 태도이다. 가장 좋은 학문하는 태도는 이 세가지 태도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유원은 이 밖에도 지식인과 매체와의 관계, 패스트푸드의 전체주의 등을 짚는다. 그는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명성에 굶주린 거지'라고 부르고 부르디외를 인용하여 '일회용 사고의 전문가들'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읽는이들에게도 자극적이지만 그가 지향하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준다.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다. 맥도날드가 성공하게된 전략적 특성을 명료하게 요약 정리 한 그는, 전세계적으로 성공신화를 거둔 '맥도날드화'는 폭력과 억압, 독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보다도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야했다. 무언가를 참 많이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날날이 직장인이었고, 날날이 엄마, 주부였고, 순 날날이 원생이었다. 한마디로 순 날탕 인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책은 무지한 나를 이성화 시키는데 단초가 되어주었다. 그가 궁금해졌고, 자신의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www.armarius.net)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어가는 독서클럽, 원전강독, 많은 리뷰들이 그대로 오픈되어 있었다. 내게는 버겁겠지만 자주 들러서 몸으로 하는 공부를 함께 해야할 것 같다. 한동안 강유원을 해바라기 할 것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행복하다.
반딧불이 2008-06-14 공감 (8) 댓글 (0)
8.8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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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등이 가려울 때 읽으면 좋은 책이다. 근데 강유원 선생님이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스스로 너털웃음을 터트릴 거 같다.
무진무진 2019-03-28 공감 (0) 댓글 (0)
몸으로 공부하기
제목이 심상치 않다. “몸으로 하는 공부”. ‘공부는 몸으로 하는 거다’ 쯤 되겠는데, 비슷한 버전으로는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 ‘공부는 머리로 한다’, ‘공부는 돈으로 한다’ 등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책읽기와 글쓰기는 몸으로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여긴다.”(5쪽, ‘서언’ 중)
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식인은 어떤 사람인지, 학문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비롯해 문화와 책, 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단상들로 채워진 책이다. 저자의 말처럼 ‘잡문’을 이것저것 끌어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주제가 모든 글을 하나로 꿴다. 서로 통한다. 그러니 핵심은 몸이고, 공부다.
“공부”는 그렇다 치고, “몸으로”라는 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두 가지만 꼽자면, 우선 ‘직접, 스스로, 끈기 있게’ 공부한다는 걸 표현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190쪽)라는 저자의 말도 그러한 의미가 아닐까.
두 번째는 ‘머리로’의 반대(?) 개념으로서의 ‘몸으로’이다. 머리 즉, 생각만 하는 건 반쪽짜리 공부다. 몸만 쓰는 것(경험만 하는 것)도 반쪽짜리다. “몸으로 하는 공부”가 완전체다. 경험한 것을 이론으로 정리할 줄 알아야 한다. 아는 것은 실천해야 한다.
몸(경험)과 머리(이론)가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굳이 공부의 순서를 따지자면 몸이 먼저다. 일상적인 삶, 생활, 현실, 물리적인 습관과 시간 등을 토대로 문화, 멘탈리티, 이론 따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현실, 사례, 예시를 공부하고 이론을 정립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몸으로 하는 공부”의 목적은 ‘위기지학’이다. 위기지학은 ‘자신의 본질을 밝히기 위한 학문’(다음 백과사전)이라는데, 자기 수양을 위하거나 자아실현, 인간 본질의 실현을 위한 공부쯤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인간다움의 본질은 생각하는 것, 자유로운 것이다.(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겠다- 저자도 “오히려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살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125쪽)다고 표현하니까)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국가와 자본, 미디어, 지식인, 권위 등에 휘둘리지 말고,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과 관계 속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예 상태나 다름없다.(덧붙이자면, 저자는 비판적 사고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철학이라고 말한다.)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130쪽)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공부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고, 실천하자. 몸으로 공부하자.
따로 더 찾아보고 공부해야 할 내용도 더러 있었고(특히 ‘10장 한국 ‘문화’ 탐구 방법론’이란 글에서 여성해방의 역사에 관련된 부분), 동의하기 힘든 의견도 있었지만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책 전체의 주제에는 깊이 공감했다. 부록처럼 실린 ‘내가 공부하는 방법’이라는 장도 인상적이다. 스스로를 ‘누군가 뭘 열정적으로 하는 것도 비웃는 사람’(159쪽)이라면서도 저자 자신은 치열하게 공부한다. 구체적인 공부법도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고,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덧붙이는 말1) 이 책이 ‘품절’ 상태인데, 출간이 좀 되었으면 좋겠다. 중고거래가가 지나치게 높다. 예전에 읽고 중고로 팔았는데, 다시 사려니 비싸다(팔 때는 좋았다지). 도서관도 멀지만, 너절한 책을 빌려 읽기가 싫다. 중고거래가가 높다는 건 수요가 있다는 의미일 텐데, 제본 질을 좀 높여서 출간했으면 좋겠다. 읽다 보니 종이가 책 본체에서 낱낱이 떨어질 것만 같다.
덧붙이는 말2) 책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저자가 어릴 때 박목월이 쓴 박정희 전기를 읽고 박정희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커서 박정희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고, (…) 독서의 기억과 겹쳐짐으로써 배신감, 증오심까지 생겨났다.’(51쪽)고 한다. 너무 증오한 나머지 연좌제가 불법이고 ‘애비와 자식은 무관하지만’(같은 쪽), ‘뻔뻔스럽게 설치고 다니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는 정말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같은 쪽)라고. 2005년에 쓴 책인데, 지금 저자는 ‘그의 큰딸’에 대해서 때려죽이고 싶은 정도보다 더 심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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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7-01-03 공감(19) 댓글(2)
대중의 이성화
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은 말 중의 하나가 공부라는 말이다. 내가 어릴때 우리집은 가난하고 아이들은 많았다. 그 당시로서는 오남매가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경제력에 비해 공부해야할 아이들이 많았다는 거다. 때문에 아들들이 당연히 우선시 되었고 딸인 나는 은근히 책 좀 안봤으면, 공부좀 덜했으면 하는 암묵적인 분위기에 젖어 있어야했다. 그러니 공부하라는 말 한번 들어보지 못하고 학창시절이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공부하라는 말은 듣기 싫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하라고 할때의 그 공부가 듣는 사람이 하고싶은 공부가 아니었기 때문인 것도 같다. 또 오빠나 남동생을 겨냥하고 있는 그 말에는 공부를 잘해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한 기대를 담고 있는듯해서 옆에서 듣는 나까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가능하면 공부하라는 말은 삼키고 살았다. 참다 참다 하는 말이 고작 '책 좀 봐라' 였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만화로 된 '조선왕조실록'을 펴들었었다. 수십번을 봐서 책은 너덜너덜 한데도 그것만 본다. 한참 보다가 깔깔거리고 웃는 대목도 언제나 똑같다. 거의 외우다시피 봐도 여전히 웃긴다는 것이다. 참 질긴놈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재미있는 책들이 많은데도 왜 한가지만 파고드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이들의 독서습관을 위해서는 부모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말은 순 거짓말이거나 경험적 오류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책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책에서 멀어져갔다. 책을 읽다가 혼자보기 아까운 내용이 있어 읽어보라고 하면 엄마는 왜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보고 있냐고 되묻는다. 좀 더 커서는 세상에는 책보다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다고 외려 가르치려 든다.
아이들 뿐만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날보고 공부하는게 그렇게 좋냐고 비아냥 거린다. 공부라고 해봐야 정말 공부하는 분들과는 체급이 다른 이야기지만 말이다. 나는 정말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냥 책을 보는거다. 즐거울 때가 많지만 책을 보는 것이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그나마 가장 즐겁고 가치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 할 것이다. 나도 하루 일과 중에 책 보는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하려고 애쓴다. 이 말은 상대적으로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면 책볼 시간이 없다는 얘기와도 같다. 직장생활과 집안살림만으로도 시간은 늘 모자란다. 책과 함께 있을때는 신간이 편안하다. 죽을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마도 어릴때 남들은 귀에 닳도록 듣는 공부하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자란 무의식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대를 물려 듣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은 공부라는 것을 강유원은 몸으로 하라고 한다. 아니 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어때야 한다라거나 자신은 이렇게 공부하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좀 다부지고 논리적인 문체로 적어놓았을 뿐이다. 그에게 책을 읽는 것은 죽을 때 후회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알리바이' 라고 한다. 죽을 때까지 읽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그것도 양에 대한 의미보다는 깊이에 천착한 '인생의 알리바이'다. 한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그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기를 그는 권하고 있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공부』라는 이 책을 읽다보면 그는 독서의 깊이 못지 않게 넓이도 갖추고 있고 읽은 책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는 공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다 짐작할 수 있다. 원전에 입각해서 수십번씩 읽고 생각을 모으고 정리했다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참 독한 사람이다 싶다. 그는 이런 방법을 그의 스승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참 존경스러운 분이고 그것을 또 몸소 실천하고 있는 그도 마땅히 존경받아야할 사람이다.
근대가 시작될 무렵의 시기를 계몽주의 시기라고 한다. 계몽주의의 모토는 '이성을 대중화하라'였다. 현대는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대중은 매체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강유원은 대중을 우민화하는 대중매체에 대항하여 '대중을 이성화하라'고 외친다. 그것은 지식인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식인으로 꼽고 있는 대상은 소설가와 대학에 관련된 교수 혹은 그 주변인물들이다. 그는 어떤이가 명백하게 '돈을 위해서 소설을 쓴다면, 즉 소설을 하나의 상품으로서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소설가가라 부를 수는 없고 기업가라 불러야 마땅하다'고 한다. 대학의 지식인들이 그들을 먹여살려주는 학생들을 위해 공부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나 이를 해결하기 위해 '쿠폰제'를 적용해야한다는 제안은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다.
강유원은 세가지 학문하는 태도를 짚는다. 그것은 현존하는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는 인문학적 태도,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과학적 태도,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하는 공학적 태도이다. 가장 좋은 학문하는 태도는 이 세가지 태도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강유원은 이 밖에도 지식인과 매체와의 관계, 패스트푸드의 전체주의 등을 짚는다. 그는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명성에 굶주린 거지'라고 부르고 부르디외를 인용하여 '일회용 사고의 전문가들'이라고 꼬집는다. 이러한 단어들은 읽는이들에게도 자극적이지만 그가 지향하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해준다. 맥도날드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다. 맥도날드가 성공하게된 전략적 특성을 명료하게 요약 정리 한 그는, 전세계적으로 성공신화를 거둔 '맥도날드화'는 폭력과 억압, 독재자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보다 더 무서운 전체주의라는 경고를 잊지 않는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를 읽으면서 나는 감동보다도 부끄러움을 먼저 느껴야했다. 무언가를 참 많이도 하고 있지만 제대로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나는 날날이 직장인이었고, 날날이 엄마, 주부였고, 순 날날이 원생이었다. 한마디로 순 날탕 인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책은 무지한 나를 이성화 시키는데 단초가 되어주었다. 그가 궁금해졌고, 자신의 싸이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www.armarius.net)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어가는 독서클럽, 원전강독, 많은 리뷰들이 그대로 오픈되어 있었다. 내게는 버겁겠지만 자주 들러서 몸으로 하는 공부를 함께 해야할 것 같다. 한동안 강유원을 해바라기 할 것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행복하다.
반딧불이 2008-06-14 공감(8) 댓글(0)
공부하는 즐거움을 온몸으로 느껴보자!
나는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을 무림의 고수로 여긴다. 그의 텍스트 지향 홈피를 들락거리고 그가 쓴 책과 번역한 책들은 의심 없이 읽고 있다. 호남의 강준만이나 영남의 박홍규처럼 의심 없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정도로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오호惡好의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깊이 공감하기도 한다.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선호하는 저자가 생기고 혐오스럽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그의 책을 사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는 몇 년 전에 출간 된 책이지만, 기회를 놓치고 미루다가 집어 든 책이다. 이 책은 그의 표현대로 잡문집이다. “‘잡문’이라는 단어는 논쟁들, 지엽말단의 문학, 지나친 자유, 언어의 가치하락에서 유래하는 폭력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투르니에의 글을 인용해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강유원식 겸양 어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어쨌든 그의 생각과 그간의 이력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되어 편안했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적어나가 쉽게 읽혔으며 그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과정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강유원 개인에 대한 궁금증까지 골고루 해소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부’를 통해 우리가 만났던 강유원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 생각의 끝자락을 내보이고 편안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렇게 강유원식 공부 방법에 대한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긴요한 책이다. 소설 읽기 이외에 다른 독서가 필요하지 않거나 조중동의 기사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독자들에겐 필요없는 책이니 선별해서 읽어야겠다.
익히 알려져 있듯 강유원은 직장 생활을 하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경야독하는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공부방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를 50번쯤 읽고 나니 눈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기가 질리는 게 아니라 막말로 참 ‘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방법과 태도에는 공감했고 스스로의 절제와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 공부라는 사실을 이제 몸으로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진짜(?) 공부가 뭔지 공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모두다 챙겨 들을 만 하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유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혹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 온 사람이라면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 P. 18
이렇게 작은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공부 이야기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책 따로, 세상따로, ‘문화’라 부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학문의 현실적 쓸모 등 네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져 있지만 그 구분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제시한 ‘탈 아카데미즘의 길목에서’와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공부라는 대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혹은 나름의 방식과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에게 좋은 참고 도서가 될 것 같다.
타인의 방식을 빌려 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이 생기고 그것이 몸에 익혀진다. 완전히 자기만의 공부 방법이 생길 때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행복한 공부가 된다. 입신 영달을 위해, 돈 벌이의 수단을 위한 공부를 공부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트이고 앎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입장권이 생기지는 않는다.
즐겁고 행복한 공부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채찍질할 수밖에 없다. 앎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희열, 끝없는 지적 호기심도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허영이 아니라 생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방법과 도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짜릿함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기쁨이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꿔야 진정한 목적이 달성된 것인지, 나의 안목과 시선이 달라지고 관점의 변화만 가져오면 되는 것인지, 실용적인 목적과 개인의 이익의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하지만 책을 읽고 정리하고 무엇인가 써나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이제 어렴풋하게 체험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고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 P. 194
080525-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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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힘 2008-05-25 공감(7) 댓글(0)
공부는 역시 팍팍해
강유원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보았을 때,
그리고 그의 철학적 메세지가 담긴 책들의 제목을 보았을 때,
막연히 한번 읽고싶다고 생각하게 된건,
그 이름과 함께 떠돌던 단어들이 주로 '거침 없이' '자유' '날카로움' 등의 매력적인 수사 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소개에 따르는 몇가지 수사들 정도만 보고 하는 얄팍한 책 고르기 , 정확히는 책이라는 상품 고르기에 젖어 있는 나로서는,
(강유원씨는 이 잡문집 속에서 책을 상품처럼 대하면 안된다고 한다)
강유원씨처럼 책 표지 하나 에도 세밀하고 강력한 자기 주장을 펼쳐야 마땅할만큼 호불호가 정확하고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학자인 사람이 굳이 '잡문집'을 낼 필요가 왜 있었을까 싶은 의구심을 여태껏 떨치지 못하겠다.
잡문집이란 말 그대로 여기저기 적어보았던 잡문들을 묶는 것이고,
그런 기획을 하는 출판사나 작가나 모두 이름만 보고도 살 수 있는 독자층이 있음을 의식하고 내는 것 아니던가.
강유원씨가 '온통 기업가의 상업적 이윤을 토대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체제' (이런 표현은 역시 그가 책 속에서 한것이다)를 무시하고 자유롭고 올곧은 마음으로, 오로지 수많은 무식한 대중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이 책을 냈는지, 그것이 의심된다면, 내 의심이 지나친걸까.
논조는 정확하고 이지적이지만, 이 사람의 산만하게 모아둔 잡문들에서 독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 각 잡문들 간의 유기성 따위는 사실상 찾아보기 어려운데, 그렇다면 그냥 자신이 가르치는 혹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하는 사람만 읽을 수 있게 잡문을 배포해도 좋지 않았을까?
철학을 공부한 사람 답게 많은 사회적 문제나 논쟁이 될만한 이슈들을 골고루 더듬어서 자신만의 생각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를 어우러서 보자면 그야말로 '공부'가 될만하지는 않다는게 나의 소감인데, 이는 내 난독증 때문이라기보다는 - 사실 책은 쉽게 쓰여있어서 철학을 몰라도 아주 술술 잘 읽힌다 - '아유 그래 너 잘났다, 할 말이 없어서 안 하기보다는 쓸데없이 싸우기 싫어서 안할란다' 라는 마음 때문에 오히려 그가 제시하는 문제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을 해볼 맘이 사라지게 되어서 그렇다.
왠지 공부 못하는 애들에게 이런 선생님이 걸리면 점점 더 공부하기 싫어지게 만들 것 같은 그런 강유원씨,(그래 나 공부 못해서 이렇게 삐딱한 리뷰 쓴다 -_-;)
차라리 잡문이 아닌 완전 하나의 주제를 정해서 쓴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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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6-06-07 공감(6) 댓글(7)
생각하며 살아가기
비판적으로 생각하며 살아 가는 것.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우리.. 비주얼 문화에 보다 익숙해진 우리.
'강유원' 이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알아갈수록 꽤나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그의 사회적 지위를 의식해 남의 이목 때문에 주저하기 보다 강한 주관을 소유한 이며, 사회적 부조리나 부도덕에 대해 쓴소리, 비판도 서슴치 않는 듯 하다.
이책은 특정 주제에 관한 것이라기 보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그의 잡문집이다. 쉽게 부담없이 읽어질 수 있을 듯.
솔직히 제목에 솔깃해져 한번 더 손이 가는 거 같다. 책의 마무리 부분에 작가가 제시하는 그의 공부법이 소개되어 있어 한번 기회가 되면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그가 철학자인 만큼 철학 공부법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여러 분야에도 두루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pp. 193-194)
1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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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2008-10-25 공감(2) 댓글(0)
강유원식 서평쓰기
강유원의 서평집이 오랜만에 출간되었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라티오). '책읽기가 지식이 되기까지'가 부제인데, 제목과 부제가 겨냥하는 것이 모두 서평이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이 서평에 대한 정의이며 책읽기를 지식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 게 또한 서평의 역할이다. '오랜만'이라고 적었는데, 서평집으로는 <책과 세계>(2004)와 <주제>(2005) 이후 15년간 강의와 방송활동을 하면서 쓴 책이라고 소개된다. 그 사이에는 강의책들이 있었다.
"서평집이지만 서평집 그 이상이기도 하다. 단지 서평들을 모아 놓은 서평집은 하나의 주제로 일관하기가 어려워 읽고 나면 읽어야 할 책 목록만 남기 쉬운데, 이 책은 내용과 형식에 따라 주제를 일관하고 있어 부제처럼 ‘책읽기가 지식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인용이 풍부한 서평, 수준(초급, 중급, 고급)에 따라 작성된 서평, 논고, 논문, 역자 후기 등 다양한 형식의 서평을 포괄하고 있어서, 글을 쓰고자 하는 목적에 따라 참조할 수 있는 일종의 ‘책에 관한 글 쓰기’ 안내서이기도 하다."
'책에 관한 글쓰기' 안내서를 자임하는 일종의 전략적인 서평책이다. 더 간단히는 강유원식 서평쓰기 책이라고 해도 되겠다. 강유원의 저작으로 검색되는 첫 책은 <근대실천철학연구>(1998)인데, 짐작에 학위논문과 연관돼 보이지만 나는 실물로 보지 못했고, <인터넷으로 떠나는 철학여행1>(1998)도 시리즈로 기획됐던 것 같은데 역시 보지 못했다. 내가 처음 접한 건 <책>(2003)이라는 제목의 첫 서평집. 나대로의 분류에 따르면 <책>과 <주제>에 이어지는 것이 <책읽기의 끝과 시작>이다. 아마도 <책>이 절판된 상태라 그보다 널리 알려진 <책과 세계>를 언급한 것이리라. 거기에 <몸으로 하는 공부>(2005)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들이 강유원의 서평관과 공부관을 미리 엿보게 해준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그의 책을 읽어온 독자에게는 그 종합판으로 여겨진다.
그의 공부관과 서평관은 <책읽기의 끝과 시작> 서문에 잘 정리돼 있다. 책읽기의 본래 목적은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한 입력이 아니라 자기화이다, 책읽기를 자기화하는 필수적인 방법이 서평쓰기다, 라는 것. 책은 자기화의 '단계'(레벨)를 실제 서평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 비유컨대 '책읽기로 몸만들기' 같은 과정이다. 독서를 섭식에 비유하자면 지식의 자기화는 음식을 근육으로 만드는 일에 해당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근육운동이 서평쓰기이고, 이 일련의 프로세스가 공부다.
이번 서평집에서 특이하게 생각한 건 부록인데, '아주 긴 서평'이라는 이름으로 '<장미의 이름> 읽기'가 들어가 있다. 절판됐던 <장미의 이름 읽기>(2004)을 그대로 되살려놓았는데, 원래 제목도 그렇지만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읽기'에 해당한다. '아주 긴 서평'이라는 작명은 강유원식 유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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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20-03-26 공감 (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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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만두라면을 끓여먹으며 윤시내의 '공부합시다'를 듣고 있다. 거의 20년도 더 전의 노래 같다. 지금은 '추억의 가수'이지만 이 열정적인 '여자 조용필'은 가끔 뜬금없는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는데('공연히'란 데뷔곡이 그랬듯이), '공부합시다'도 그런 종류이긴 하다. "안돼안돼 그러면 안돼안돼 그러면/ 낼모레면 시험기간이야 그러면 안돼!"란 노래를 들으며 학창시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20년도 더 후에 이 노래를 찾아서 들어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없었을 법하다. 다른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신간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 2006)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문득 그 노래가 떠올랐을 뿐이다. 게다가 (낼모레가 아니라) 바로 오늘이 수능시험일이 아닌가?(덕분에 나는 집에 남아서 밀린 원고들을 쓰기로 했다.)
'점심시간'이란 핑계를 대고 잠시 공부에 관한 책들을 검색해봤는데, (악명높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부터 (수준높은) <몸으로 하는 공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술과 비결, 그리고 즐거움이 소개돼 있다(참고로, 나의 '공부론'은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를 참조). 이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읽고 싶은 책, 혹은 '공부에 지친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싶은 책이 일단은 <장정일의 공부>이다(나는 그의 <독서일기>의 애독자였다). 이열치열이라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다스리는 데에는 '공부'만한 것이 없다(그러니 '열심히 공부하세!'). 더구나 장정일은 중졸 학력이 전부이다. 장정일식 공부가 (예비)고졸 수험생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06. 11. 16) 모범생 변신 장정일 “이념대립 우리사회 알고싶어 공부”
“젊었을 때는 아웃사이더로 떠돌면서 ‘싫다!’고 외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요.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사회의 구조와 배면(背面)을 살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 장정일씨(44)가 ‘장정일의 공부’(랜덤하우스)란 인문서를 냈다. 1995년부터 10여년에 걸쳐 쓴 ‘장정일의 독서일기’(전6권)를 통해 독서이력을 자랑하고, 지난해 KBS의 ‘TV, 책을 말하다’ 진행을 맡으면서 지성적 이미지를 대중에게 각인시킨 그다. 이번 ‘장정일의 공부’는 그동안의 독서를 바탕으로 2002년 이후 우리 사회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탐구한 지점을 23가지 주제로 나눠 정리했다.
“정치나 사회 이슈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2002년 대선 이후부터 우리 사회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걸 보면서 한국사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대구에 살던 그는 10권으로 된 ‘장정일 삼국지’를 쓰기 위해 한 건물에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옆방에서 건물주인 노인과 그의 친구들이 모여 두런두런 정치이야기를 하는 게 들렸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한국 현실에 대한 각자의 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게 됐고, 그것이 ‘공부’로 이어졌다.
이 책은 양심적 병역 거부, 대학의 교양교육 저하, 민족주의 논쟁, 이념이 없는 정당정치, 레드콤플렉스, 미국 극우파에 대한 생각 등 다양한 현실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민주주의가 아닌 과두정으로 가고 있다는 것과 우리 사회의 과거사 청산이 바둑에 비유하자면 흰돌과 검은돌이 아닌, 파란돌을 놓는 방식으로 전혀 다른 기준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중심적인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책에서 공부의 내용뿐 아니라 공부의 필요성도 함께 역설하고 있다.
“작가는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 없는 존경을 받지요. 그러나 시인이라면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구 성서중 졸업이 최종 학력인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라는 이름에 씌워진 과대평가를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양비론이 판치는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알고 확실히 편들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90년대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일련의 문제작으로 기성사회와 문학에 대해 도발적으로 질문을 던지던 소설가 장정일은 사라졌다.
이에 대해 그는 “‘장정일 삼국지’를 쓰면서 더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역사·이론서로 방향을 틀었다”면서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또 자신의 공부는 60세에 ‘장정일의 독서일기’ 20권을 완간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이 독서일기의 목록이 많이 달라지겠다).
그렇다고 창작을 접은 건 아니다. 올 3월부터 소설가 하일지씨의 추천으로 동덕여대 문예창작과에서 희곡론을 가르치고 있는 그는 60세 이후 쓰려던 희곡집필을 앞당겨볼 생각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으로 등단했고, 95년 ‘긴여행’이란 희곡집도 냈다. 또 ‘장정일의 공부’를 쓰면서 파악한 우리 사회의 구조와 배면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우익청년의 일대기를 쓴다는 야심찬 계획도 갖고 있다.(한윤정 기자)
06. 11. 16.
P.S.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범우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지난 2003년부터 재출간됐는데, 나는 그 이전에 나온 판본으로 4권인가 5권까지 읽은 듯하다(기억에는 이후에 책값이 너무 뛰었다). 나머지는 겨울방학 때 도서관에서 한번 대출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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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11-16 공감 (24) 댓글 (5)
주말의 애인...
강유원의 새책이 나왔다. 역사고전 강의. 이번 주말은 부처님도 오셔서 길다. 이제 퇴근하면 강유원을 끌어안고 뒹굴 거다. 외모는 철학하는 사람보다 철학관하는 사람에 가깝지만, ㅋ 그의 글은 정직하고, 세밀하다. 그의 글을 믿고, 주말을 맡기련다. 이참에 그의 책을 되새겨 보면, 제법 읽은 게 많다. 태그를 하나 만들어야겠다. 주말 애인으로... ... + 더보기
글샘 2012-05-26 공감 (19) 댓글 (8)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
아침에 옮겨놓은 '공부론'을 저녁을 먹고 나서야 시간을 내 마무리짓도록 한다. 사실은 가짜 학위와 관련해서 역시나 예일대 박사학위를, '인크레더블'하게도 32살의 나이에 3개나 획득했다고 소개된 '석학' 조중걸/조송배 교수가 생각이 나서(http://blog.aladin.co.kr/mramor/1055226 참조) '강유원'을 다시 검색했다가 우연히 김영민 교수의 칼럼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에 대한 논평('신문읽기의 어려움')을 읽게 되었고 그 두 기사를 아침에 옮겨놓았었다. 먼저 어떤 내용인지는 비교해가며 한번 읽어보시길. 필자 소개상으론 '철학자 vs 회사원'이 아니라 '철학자 vs 철학자'이므로 맞장을 뜨는 게 문제되지는 않겠다. 동급이니까.
한겨레(07. 05. 20) '아뵤~’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
“이소룡이 유연성으로 이룬 스타일을 흉내내면서 우리는 우리의 스타일이 만들어지길 소망했다. 쿵푸처럼 공부도 그런 것이다. 칼이든 펜이든 진실을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들면 자신의 스타일이 생겨나는 것이다”
무술가 리샤오룽(이소룡, 1940~1973)은 어떤 ‘스타일’일 수밖에 없었다. 나태하거나 보수적인 치들은 종종 스타일에 반감을 지니지만, 스타일은 주류의 각질을 뚫는 아웃사이더의 징후로 일정한 혐오감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헤겔과 마르크스의 분쟁에서 보듯이, 스타일이 없이는 진정으로 스승과 결별할 수조차 없다.
미완의 <사망유희>를 유작으로 남긴 채 이소룡이 세상을 뜨자 수많은 잡룡들을 내세워 모작들이 제작되었지만, 그의 스타일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다는 사실만 날로 분명해졌다. 그러나 양식(Typus)은 스타일이 아니다. 요컨대 스타일은 흉내와 더불어 죽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양식은 오히려 흉내내기의 네트워크를 통해 공고해질 뿐이다. 그래서, 스타일에는 매순간 스스로의 부끄러움을 치열한 실존의 열정 속에서 승화시키는 아이러니의 빛이 있다. 키르케고르처럼 말하자면 스타일 속에는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양식은 부끄러움을 없애는 문화적 법식이다. 가령,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하는 양식이란 꼭 그런 것이다. 나아가, 비코나 융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 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소룡의 쿵푸(工夫) 스타일에는 형이상학적인 게 없다. 철학도이기도 했던 그는 더러 노자류의 잠언을 흘리면서 ‘물처럼 되라!’는 주문을 하기도 하지만, 그의 테크닉은 간결하게 정곡을 찌를 뿐 실없이 용장스러운 데가 없다. 그는 스크린의 스타가 됨으로써 스펙터클화한 영자(英姿)를 탁이(卓異)하게 뽐내면서, 군부독재와 개발지상주의의 아버지 체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모든 불량스러운 10대의 우상이 되었다. 우리는 교실에서 책상을 마구 뛰어넘고 헛되게 쌍절곤을 돌리다가 형광등을 부수곤 했다. 그의 스타일은 응당 양식으로 굳어지면서 스타의 비용을 치르게 되었지만, 우리는 그 양식 속에서 우리의 스타일이 부활하기를 소망했다.
그는 자신의 무술을 설명하는 중에 형(type)이라는 말을 싫어하고 늘 ‘자기표현’이라고 했다. 그것은, ‘디-자인(de-sign)이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사인(sign)이고, 탈(脫)코드는 그 자체로 가장 매력적인 코드’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대중적 이미지, 그 시절인연(時節因緣)과 같은 것이었다. 우리들은 15살의 과도기를 깜냥껏 지나면서 이소룡의 스타일을 향한 불가능한 욕망을 반복강박적으로 양식화했다. 과거, 제자가 스승을 배우는 방식은 반복되는 흉내 속에서 양식을 얻고 마침내 그 양식마저 뚫어내며 자신의 스타일에 이르는 길이었다. 즉, 동화(同化)-이화(異化)의 변증법을 금강산을 스쳐가는 계절처럼 무심히 반복하는 것! 그리고, 이른바 염화시중의 길은 그 깨침의 극점에서 비밀처럼 보여주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비경인 것이다.
그러나 이소룡의 이미지가 재현하는 한편 우스꽝스러운 양식은 스타가 된 아웃사이더들의 세속적 운명이다. 그들은 스타일을 양식 속에 죽이면서 세속의 명성을 얻는다. <사망유희>에서 노란 체육복을 입은 채 예의 괴상한 새울음을 토하며 상대의 쌍단봉을 대적하여 회초리처럼 길게 깎은 대나무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은 몹시 흥미로운 파격이다. 그 복색과 무기의 취지는 그가 늘 한결같이 그의 제자들에게 강조하던 유연성(pliability), 즉 주류의 엄숙주의를 가로지르는 바로 그 유연성의 이단과 다를 바 없다. 뛰어난 춤꾼이기도 했던 그는 그 이단적 유연성으로써 그만의 무술 스타일을 얻었으나, 그 스타일을 대중의 환호 속에서 양식의 제물로 희생함으로써 대중적 스타의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유연성은 오직 실전 무술의 실용성을 위한 것이었다. <징비록>(1647)에서 유성룡은 신립의 호령이 번거롭고 요란스러워 반드시 싸움에서 패할 것이라고 했고, 인재 등용의 귀재였던 세종대왕은 말수를 줄이고 듣기에 기민했다고 했지만, 쿵푸도 공부 곧 그런 것이다. 주먹이든 말이든, 칼이든 펜이든, 그것은 사태의 진실을 향해 유연하고 실제적으로 파고드는 방식에 주력해야 한다. 연암 박지원도 학문과 문장을 논하면서 억지로 기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일이 아니라고 경계한다; 요점은, 자신의 스타일로 사실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이 곧 기이하고 새롭게 된다는 것이다. 언거번거한 말은 외려 어눌한 것보다 못하고, 형(型)만 요란스러운 동작은 실없기 때문이다. 이소룡의 추억! 그것은 그대로 어떤 공부의 환상이다.(김영민/철학자)
미디어오늘(07. 06. 16) 신문읽기의 어려움
1988년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었을 때의 일이다.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내 친구 하나가 ‘요새 한겨렌지, 한거랜지 때문에 골 때린다’는 말을 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같이 장사하는 사촌 형이 한자를 몰라서 그동안 신문을 통 못 봤었는데, 한겨레 나오고 나서는 신문을 어찌나 열심히 읽는지 세상 물정을 다 가르치면서 야단을 치는 통에 그런다”는 것이었다.
한글 전용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깨우쳤는지를 뚜렷하게 느낀 사례 중에 그만한 것이 없었다. 이는 달리 보면 신문이 어떤 사람을 독자로 여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신문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면 그런대로 무난하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가끔씩 우리교육 교사아카데미(www.uriedu.co.kr/edu)라는 곳에서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하여 ‘책읽기와 글쓰기’에 관한 몇 주 짜리 강의를 한다. 수강생 전부가 교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본래의 목적에 합당하게 교사들이 학생들과 함께 읽어 볼만한 책을 소개하면서 책을 읽기에 필요한 내용을 곁들여 설명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방법을 함께 궁리해보는 것이 그 강의가 하는 일이다. 이 강의에서 가끔 사용하는 일종의 교재 중의 하나가 한국의 현실을 생생하게 반영하는 글인데, 더러는 신문기사가 교재로 쓰이기도 한다. 사실 마땅한 기사가 별로 없다.
그런데 최근 강의에 사용하기 위해 신문을 검색하다가‘아뵤∼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라는 글을 한겨레(5월19일자)에서 읽게 되었다. 철학자 김영민씨가 쓴 글이었다. 나는 이 글을 준비하여 교사들에게 나누어주고 검토의견을 내게 하였다.
검토의 기준은 이러했다. 첫째, 주장하려는 바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것이 글 첫머리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주장되고 있는가. 둘째,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핵심적인 개념들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는가. 셋째,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이 적절하게 준비되어 배치되었는가. 마지막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독자가 읽기에 어려움은 없는가.
몇 분 동안 검토를 마친 교사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것들이었다. ‘논지가 분명하지 않아 읽기가 짜증스럽다’ ‘스타일과 양식이 진짜 공부와는 다르다는 건 알겠는데 정의가 없다’ ‘공부법을 알려주기보다는 자기가 얼마나 유식한지를 자랑하기 위해 글을 썼다는 인상이 강하게 든다’. 어떤 이는 ‘한겨레 편집담당자는 도대체 무얼 하기에 이런 글을 신문에 싣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였다. 나야 속사정을 모르니 ‘철학자의 난해한 글을 읽고 이해할만한 도사가 신문사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우스개로 넘겨버렸다.
강의를 마치고 집에 와서 글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 신문을 읽는 사람 중에 이 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200자 원고지 열 매 남짓한 이 글을 이해하여 공부법에 관한 뭔가를 터득하려면 “헤겔과 마르크스의 분쟁”은 무엇인지, “게오르크 지멜이 설명하는 양식”은 또 무엇이며, 어떤 점에서 “비코나 융이 말하는 양식은 지멜의 것보다 한층 더 깊어보이고, 제법 형이상학적”인지 알아야 하는 건 아닐까? 게다가 헤겔의 철학을 전공한 나도 “동화(同化)-이화(異化)의 변증법”은 무얼 말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 건 다 제쳐두고라도 한글 전용에서 출발하였기에 어려운 한자말을 풀어서 쓰려는 방침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는 한겨레에서 “영자(英姿)”나 “탁이(卓異)” 같은 낯선 한자어가 들어가 있는가하면 굳이 나란히 쓰지 않아도 될 ‘Typus’와 같은 라틴어를 곁들인 이런 글을 싣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철학자 김영민씨가 어떤 의도로 이 글을 썼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그가 이소룡에게서 뭘 배우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렇지만 신문이라는 공공매체의 편집담당자에게, 그것도 한겨레의 담당자에게 꼭 묻고 싶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이도 한번 쓰윽 읽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싣는 이유는 뭔가. 그런 글을 실으면 김영민씨의 표현처럼 “일반자적 양식 속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단독자적 체취가 생생한” 스타일이 생겨나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신문이 되는가.(강유원/ 철학자)
07. 07. 18.
P.S. 나는 이소룡 세대가 아니다. 그의 영화 <정무문>(1972)을 극장에서 보긴 했지만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었다. 분류하자면 나는 성룡 세대이고, 성룡보다 먼저 나를 매혹했던 이는 <소림 36방>(1977) 같은 영화에서의 유가휘였다(왜 있잖은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면 요즘처럼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보는 게 아니라 으레 쇼브라더스의 홍콩무협영화를 보던 시절 말이다).
유가휘? 황비홍의 직계제자라고도 하는 이 '무술인 배우'는 <킬빌2>에도 우마 서먼의 상대역 도인으로 나오기도 했다(소림 '무술인 배우'의 계보는 알다시피 이연걸이 이어가게 된다). 하지만 지난달인가 <소림 36방>을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잠깐 다시 보니 30년전에 느꼈던 '비장함'은 온데간데 없고 유치함만이 남아 있었다(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때쯤 학교의 단체관람으로 봤을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의 대표작을 <소림 36방>에서 <소림 용문방>으로 바꾸었다.
잠시 여담이 새어나왔는데, 사실 소림사 무예로 잘 알려진 '쿵푸'가 '공부(工夫)'와 같은 어원을 갖는, 그러니까 동일한 의미연관을 갖는 말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다(오래전 김용옥의 책에서 처음 그런 내용을 읽고 '그렇구나!' 했었지만 이젠 그런 내용을 접하면 식상하다). 예전에 '공부냐 학습이냐'란 페이퍼(http://blog.aladin.co.kr/mramor/799694)에서 주장한 대로 나는 '자기단련'이나 '자기연마'로서의 '공부'보다는 '가르치고 배움' 혹은 '가르치면서 배움'으로서의 '학습'에 더 놓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나는 이렇게 적었었다.
‘학이시습지’의 즐거움, 곧 ‘학습(學習)’의 즐거움은 가르침으로써 배움을 완성하는 즐거움이다. 이 ‘학습’이란 말이 (주로 사무/행정적인 용어로만 남아있고) 일상어에서는 ‘공부(工夫)’(=쿵푸)로 대체된 것은 그래서 좀 아쉽다. 공부란 말에는 ‘즐거움’이 왠지 빠져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부’는 ‘비변증법적’이다.
해서,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가 되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김영민은 '이소룡에게서 배우는 공부'가 있다고 하는데, 그에게서 그것은 자기만의 문체(스타일)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영자(英姿)'나 '탁이(卓異)' 같은 낯선 한자어"나 "굳이 나란히 쓰지 않아도 될 ‘Typus’와 같은 라틴어를 곁들인" 이유는 그런 문체를 만들어나가는 그의 (혼자만의) 보행/산책과 관련되며 구경꾼-독자들과는 무관하다.
'몸으로 하는 공부'를 주창하는 강유원은 그보다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공부에 타자를 끌어들이는데, 그건 '가르치는 자'로서의 자신의 포지션을 항상 고려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나는 생각한다(인용한 칼럼에서 그는 '교사들을 가르치는 강사'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혀 다른 '공부'를 제시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기본적으로는 강유원 역시 '쿵푸로서의 공부'라는 태도를 견지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공부는 각자가 하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나의 근육을 단련한다고 해서 남들의 뱃살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자기 뱃살은 자기가 빼야 한다.
하지만 '이소령에게서 배우는 공부'가 있다면, '성룡에게서 배우는 공부'도 있을 법하다. 어떤 성룡인가? 바로 '재수없는 영화' <취권>(1978)의 성룡이다. 무술이라기보다는 코미디를 닮은 성룡식 쿵푸.
"평소에는 무표정한 얼굴로 진중하게 행동하다 결국 싸울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옷 속에 감추어놓은 무골을 드러내고 한 방에 적들을 제압해버리는 이소룡! 그는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었고 도탄에 빠진 약자들의 구원자이다. 그러나 <취권>에서의 성룡은 이소룡과 정반대의 면모를 하고 있다. 그가 연기한 황비홍은 약자들의 구원자들이기 보다는 아녀자들에게 치근덕대는 무뢰배이고, 패배를 모르는 영웅이 아닌 무술 연습이 하기 싫어 잔꾀를 부리는 말썽꾸러기이다. 까불거리는 모습은 진중함과는 거리가 먼데다 무도인이라면 당연히 정정당당해야 할 승부에서 번번히 속임수를 쓰곤 한다.
결국엔 그의 필살기가 되는 ‘취권’도 각이 잡혀있는 절권도와는 사뭇 다르다. 비록 ‘술에 취한 여덟 명의 신선들의 비기’라는 그럴듯한 설명이 붙어있긴 하지만, 그것은 시전함에 있어 결코 ‘가오’를 기대할 수 없는 우스꽝스러운 무술이다. 여기에 성룡은 (지금은 그의 영화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버린) ‘지형지물이용 무술’을 융합했으니, 그의 권법은 ‘무예’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예’였다. 이소룡의 강렬한 카리스마를 체험한 사람들에게 성룡은 ‘광대’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컬한가.('<취권>, 또 한 마리의 용(龍)을 탄생시키다', Joycine, 04. 02. 17)
요는, 보행 공부나 몸으로 하는 공부 말고 '잔꾀'로 까불거리며 하는 공부도 있다는 것. 자신의 무공으로 상대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지형지물'을 임기응변으로 이용해서 어쩌다 상대를 제압하는 수도 있는 법이고. 비록 우스꽝스럽고 '가오'가 잘 안 나오기는 해도 이걸로 우리의 인식을 확장하고 삶의 기쁨을 배가시킬 수 있다면 나름 그럴 듯하지 않을까?.. 아침에 우연히 마주친 기사(=지형지물)들 때문에 잠시 '기예'를 부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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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7-18 공감 (9) 댓글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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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운 책'에 대한 부록
(이 페이퍼는 리뷰 '아까운 책에 대한 오마주이자 입문서(http://blog.aladin.co.kr/755125167/5082937)'에 대한 부록임을 밝힙니다)
1. 아까운 책들
여기에 소개될 리스트는 『아까운 책』 396쪽부터 398쪽까지를 인용한 것이다. 책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나다 순으로 배열했음을 밝힌다. 참고로, 가격과 품절·절판 여부는 알라딘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 혁명』 강수돌 지음│산지니│2010년 5월│13500원
『개성의 탄생』 주디스 리치 해리스 지음│곽미경 옮김│동녘사이언스│2007년 6월│16200원
『경제학 3.0』 김광수 지음│더난출판│2009년 12월│9750원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한국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증언팀 엮음│풀빛│2001년│16200원(개정판 기준)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전 3권)』 김봉렬 지음│이인미 사진│돌베개│2006년 3월│각권 21250원
『꽃의 제국』 강혜순 지음│다른세상│2002년 6월│12800원
『꿀벌의 우화』 버나드 맨더빌 지음│최윤재 옮김│문예출판사│2010년 11월│15300원
『남회근의 알기 쉬운 논어 강의(전 2권)』 남회근 지음│송찬문 옮김│씨앗을뿌리는사람│2002년 9월│각권 32300원(절판)
『노동을 거부하라!』 크리시스 지음│김남시 옮김│이후│2007년 11월│12750원
『단절의 시대』 피터 드러커 지음│이재규 옮김│한국경제신문사│2003년 12월│12800원
『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김상훈 옮김│행복한책읽기│2004년 11월│9800원
『데르수 우잘라』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베치 아르세니에프 지음│김욱 옮김│갈라파고스│2005년 11월│10880원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앤 해링턴 지음│조윤경 옮김│살림│2009년 2월│12800원
『모던 수필』 방민호 엮음│향연│2003년 7월│8500원(절판)
『몸으로 하는 공부』 강유원 지음│여름언덕│2005년 7월│8550원(품절)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임형택 해제│창비│2005년 3월│7600원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붕가붕가레코드 지음│푸른숲│2009년 10월│10560원
『빅 스위치』 니콜라스 카 지음│임종기 옮김│동아시아│2008년 11월│12000원
『사르트르 평전』 베르나르 앙리 레비 지음│변광배 옮김│을유문화사│2009년 4월│28000원
『삼엽충』 리처드 포티 지음│이한음 옮김│뿌리와이파리│2007년 12월│18700원
『서양문명의 기반』강유원 지음│미토│2003년 11월│8550원(절판)
『수술, 마지막 선택』 강구정 지음│공존│2007년 5월│12800원
『스마트 월드』 리처드 오글 지음│손정숙 옮김│윤영수 감수│리더스북│2008년 6월│16000원
『스코트 니어링 평전』 존 살트마쉬 지음│김종락 옮김│보리│2004년 11월│15300원
『신화와 인생』 조지프 캠벨 지음│다이앤 K. 오스본 엮음│박중서 옮김│갈라파고스│2009년 2월│15300원
『아날로그 맨1』 김수박 지음│새만화책│2006년 12월│8100원(품절)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행복한마음│2008년 1월│7200원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지음│방대수 옮김│이다미디어│2005년 9월│7200원
『엘랑 비탈』 윤철호 지음│북스넛│2010년 6월│12600원
『엠마 골드만』 켄데이스 포그 지음│이혜선 옮김│한얼미디어│2008년 10월│25200원
『역사적 예수』 존 도미닉 크로산 지음│김준우 옮김│한국기독교연구소│2000년 12월│24700원
『염철론』 환관 지음│김한규 옮김│소명출판│2002년 12월│24700원(품절)
『원더풀 사이언스』 나탈리 앤지어 지음│김소정 옮김│지호│2010년 1월│18700원
『이미지와 환상』 다이엘 부어스틴 지음│정태철 옮김│사계절│2004년 2월│17100원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션 B. 캐럴 지음│김명남 옮김│지호│2007년 7월│14400원
『이중톈 교수의 중국 남녀 엿보기』 이중톈 지음│홍광훈 옮김│에버리치홀딩스│2008년 1월│12800원
『인체 시장』 로리 앤드루스·도로스 넬킨 지음│김명진·김병수 옮김│궁리│2006년 4월│11730원
『일상생활의 혁명』 라울 바네겜 지음│주형일 옮김│시울│2006년 10월│14020원
『작가』 박상우 지음│시작│2009년 7월│8000원
『진술』 하일지 지음│문학과지성사│2000년 10월│5950원(품절)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찰스 핸디 지음│강혜정 지음│에이지21│2008년 3월│10500원
『칠레의 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우석균 옮김│열린책들│2010년 2월│7840원
『침묵의 언어』 에드워드 홀 지음│최효선 옮김│한길사│2000년 3월│13500원(품절)
『큰손과 좀도둑의 정치경제학』 최윤재 지음│나무와숲│2002년 11월│8070원(품절)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 사이토 다마키 지음│김영진 옮김│황금가지│2005년 5월│11050원(절판)
『한국의 전통문양』 임영주 지음│대원사│2004년 9월│19800원
『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박중서 옮김│뜨인돌│2005년 8월│8500원
『현대미술의 이해』 팸 미첨·줄리 셸던 지음│이민재·황보화 옮김│시공사│2004년 8월│14400원
이외에도 서평 속에서 언급하거나 서평 뒷부분에 쓰여진 '저자의 다른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에 언급된 책을 포함해, 이 책에선 총 580권의 책이 언급된다.
2. 서평꾼들
'아까운 책'들의 서평을 썼던 46명의 서평꾼들을 만나보자. 책날개를 참고하여 썼다. 마찬가지로 가나다 순이다. 반점 후에 쓴 책명은 그들이 서평을 썼던 책이다.
강수돌: 고려대 경영학부 교수, 『노동을 거부하라!』
강신익: 인제대 의대 교수, 『마음은 몸으로 말을 한다』
강신주: 철학자, 『일상생활의 혁명』
강인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교수,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마을혁명』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붕가붕가레코드의 지속가능한 딴따라질』
김기태: 출판 평론가, 『이미지와 환상』
김낙호: 만화 연구가, 『아날로그맨1』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 『큰손과 좀도둑의 정치경제학』
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삼엽충』
김민영: (주)행복한상상 이사, 『작가』
김민주: 리드앤리더 대표 이사, 『꿀벌의 우화』
김보일: 배문고 국어 교사, 『어느 무명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염철론』
김은섭: 경제경영 전문 서평가, 『찰스 핸디의 포트폴리오 인생』
김이경: 작가·번역가,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연구소 연구실장, 『역사적 예수』
노태복: 번역가, 『데르수 우잘라』
이영수(듀나): 영화 평론가·소설가, 『당신 인생의 이야기』
류대성: 수내고 국어 교사, 『몸으로 하는 공부』
박상진: 경북대 명예 교수, 『꽃의 제국』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엠마 골드만』
반이정: 미술 평론가, 『현대미술의 이해』
변정수: 출판 평론가, 『원더풀 사이언스』
손철주: 미술 칼럼니스트, 『한국의 전통문양』
신정근: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교수, 『이중톈 교수의 중국 남녀 맛보기』
안광복: 중동고 철학 교사, 『서양문명의 기반』
안상헌: MEANING독서경영연구소장, 『신화와 인생』
안치용: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경제연구소장, 『스마트 월드』
엄기호: 인문학자,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
예병일: 연세대 원주의대 교수, 『수술, 마지막 선택』
오승주: (주)코이즘 대표 이사, 『남회근 선생의 알기 쉬운 논어 강의』
우석훈: 2.1 연구소장, 『경제학 3.0』
유영만: 한양대 교육공학과 교수, 『엘랑 비탈』
이기중: 전남대 인류학자 교수, 『침묵의 언어』
이은희: 과학 칼럼니스트, 『인체 시장』
이정모: 과학 저술가, 『이보디보, 생명의 블랙박스를 열다』
이진숙: 미술 칼럼니스트, 『문장강화』 『모던 수필』
이택광: 경희대 영미어학부 교수, 『사르트르 평전』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 『해바라기』
장석주: 문학 평론가, 『진술』
정혜윤: CBS 라디오 PD, 『칠레의 밤』
최성각: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스코트 니어링 평전』
최준식: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 『김봉렬의 한국 건축 이야기』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 『개성의 탄생』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빅 스위치』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단절의 시대』
이외에도 서평에서 언급한 사람이나 '함께 읽으면 좋은 책'에서 언급된 저자들을 비롯해, 총 212명의 인물이 언급된다.
3. 서평의 구성
'아까운 책'에 실린 46편의 서평(리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도입부: 제목과 부제,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출간연도가 윗 부분에 써 있다. 가운데 부분에는 책의 표지를 비롯한 책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아랫 부분에는 곧 읽을 서평에서 일부분을 가져온 '인용구'가 실려 있다.
-첫 장: 윗 부분에 작은 글씨로 다시 제목이 써 있고, 그 아래에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사람의 리뷰 제목이 써져 있다. 본문을 읽기 전에 서평꾼의 이름이 나오고, 첫 장 맨 아래에는 서평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나온다.
-중간 부분과 마지막 부분: 서평의 본문에는 두 세개의 소제목이 글의 흐름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 부분에는 리뷰가 끝난 후, '아까운 책'의 저자가 쓴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 소개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책의 도입부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