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교회 예배는 세상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시론] 교회 예배는 세상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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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2020.03.26.
종교 자유와 시민 사회의 책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가야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
국내외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전파력이 전례 없이 막강한 이번 전염병은 ‘초(超)연결사회’를 졸지에 장벽사회로 만들었다. 의도적인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두가 고독한 존재가 됐다. 마치 바벨탑이 무너지듯 인류가 애써 축적한 것들이 상당 부분 물거품처럼 흩어져 버렸다.
사회적 약자들의 경제적 고통 역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고, 귀한 생명이 속절없이 죽음을 맞고 있다. 앞으로도 변종 바이러스와의 만남이 잦아질 것이라니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인류가 치른 엄청난 희생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이라 여기고 가치투쟁이라도 해야겠다.
종교들도 역시 낯선 경험에 직면했다. 신앙의 본질로 여겼던 뭇 종교 행위를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편성을 기본가치로 삼는 가톨릭교회의 경우 예외 없이 국가의 방역 정책에 협조했다. 불교와 원불교 역시 단일 체계에서 사회적 가치와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 그 태생에 있어 개체성에 방점을 두었기에 각기 의견을 달리했다. ‘오직 믿음’이란 가치가 개별성에 근거한 탓이다. 절반 정도의 교회들이 하느님 신앙을 내걸고 예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적 결속을 강화한 이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바라보는 교회 밖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열린 공동체의 길이 아닌 사회와 단절된 폐쇄집단으로 비치는 까닭이다. 위기는 기회일 수도 있는데 전염병 위기가 교회의 미래를 빼앗는 결과로 이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개별성은 근대 세계를 열었던 종교 개혁의 열매로서 본디 좋은 가치다. 제도보다 자유를 앞세운 까닭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종교는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해야 할 책무도 있다. 종교의 자유와 시민 사회의 책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가야 할 두 축인 것이다.
방역을 책임진 국가의 일시적 예배 중지 권유를 사회주의 체제의 종교 탄압으로 몰아가는 일부 교회들의 시각은 이 점에서 크게 잘못됐다. 교회와 성당 모두가 방역 정책에 따라 빗장을 걸어 잠근 서구 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함께 인정할 때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예배는 천지 창조 이후 당신이 지은 세계를 보며 “참 좋다”는 하느님의 환호를 지속해서 기념하는 일이다. 그 환호는 피조물 모두가 제 역할을 하며 갈등 없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악해졌고 온갖 피조물들이 신음했으나 거죽만 남은 예배를 고집하는 직업적 종교인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은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의로움(正義)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예배라는 종교 행위가 결코 세상과 유리된 것이 아님을 적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예수 또한 당대 종교를 전복시키는 엄청난 말씀을 남겼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예배는 사람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하느님 찬양을 위해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일은 그쳐야 옳다.
최근 예배를 대신해 마스크를 만들어 주변에 나눠주는 어느 작은 교회의 감동적 소식을 접했다. 하느님의 눈에는 그것이 자신을 경배하는 참된 예배로 보일 수도 있겠다. 뜻을 찾아 ‘작음’을 지향하는 교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이때 대형교회들이 곳간을 열어 더불어 작아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전염병이 끝난 이후 세상으로부터 더 큰 호응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전염병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이후의 가치를 살라고 일깨운다.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
사회적 약자들의 경제적 고통 역시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가 됐고, 귀한 생명이 속절없이 죽음을 맞고 있다. 앞으로도 변종 바이러스와의 만남이 잦아질 것이라니 우리가 맞이할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그런데도 인류가 치른 엄청난 희생을 무용지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19와의 전쟁을 ‘3차 세계대전’이라 여기고 가치투쟁이라도 해야겠다.
종교들도 역시 낯선 경험에 직면했다. 신앙의 본질로 여겼던 뭇 종교 행위를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편성을 기본가치로 삼는 가톨릭교회의 경우 예외 없이 국가의 방역 정책에 협조했다. 불교와 원불교 역시 단일 체계에서 사회적 가치와 공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신교의 경우 그 태생에 있어 개체성에 방점을 두었기에 각기 의견을 달리했다. ‘오직 믿음’이란 가치가 개별성에 근거한 탓이다. 절반 정도의 교회들이 하느님 신앙을 내걸고 예배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내부적 결속을 강화한 이점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를 바라보는 교회 밖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열린 공동체의 길이 아닌 사회와 단절된 폐쇄집단으로 비치는 까닭이다. 위기는 기회일 수도 있는데 전염병 위기가 교회의 미래를 빼앗는 결과로 이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개별성은 근대 세계를 열었던 종교 개혁의 열매로서 본디 좋은 가치다. 제도보다 자유를 앞세운 까닭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종교는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해야 할 책무도 있다. 종교의 자유와 시민 사회의 책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굴러가야 할 두 축인 것이다.
방역을 책임진 국가의 일시적 예배 중지 권유를 사회주의 체제의 종교 탄압으로 몰아가는 일부 교회들의 시각은 이 점에서 크게 잘못됐다. 교회와 성당 모두가 방역 정책에 따라 빗장을 걸어 잠근 서구 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사회 구성원의 역할을 함께 인정할 때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예배는 천지 창조 이후 당신이 지은 세계를 보며 “참 좋다”는 하느님의 환호를 지속해서 기념하는 일이다. 그 환호는 피조물 모두가 제 역할을 하며 갈등 없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세상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은 악해졌고 온갖 피조물들이 신음했으나 거죽만 남은 예배를 고집하는 직업적 종교인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언자들을 통해 하느님은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의로움(正義)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예배라는 종교 행위가 결코 세상과 유리된 것이 아님을 적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예수 또한 당대 종교를 전복시키는 엄청난 말씀을 남겼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예배는 사람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하느님 찬양을 위해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일은 그쳐야 옳다.
최근 예배를 대신해 마스크를 만들어 주변에 나눠주는 어느 작은 교회의 감동적 소식을 접했다. 하느님의 눈에는 그것이 자신을 경배하는 참된 예배로 보일 수도 있겠다. 뜻을 찾아 ‘작음’을 지향하는 교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이때 대형교회들이 곳간을 열어 더불어 작아지는 모습을 보인다면 전염병이 끝난 이후 세상으로부터 더 큰 호응을 받을 것이라 확신한다. 전염병은 우리에게 자본주의 이후의 가치를 살라고 일깨운다.
이정배 전 감신대 교수, 현장아카데미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