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08

19 개벽의 시대, 문명적 전환의 방법과 전략 유정길

개벽의 시대, 문명적 전환의 방법과 전략

by소걸음May 23. 2019

[*이 글은 <개벽신문> 제84호(2019.5) '개벽의 창'에 실린 글입니다]
유정길 (개벽신문 편집위원,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한살림 마음살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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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아니라 개벽(대전환)이 중심이다

조안나 메이시는 시스템이론가, 불교학자이자 여성운동가이며 생태주의운동가입니다. 그녀는 오늘날 위기는 본래 연결되어 있는 사회와 자연을 나누고 구분해 온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며,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서, 끊어지고 갈라진 사회와 의식을 다시 연결해야 위기를 극복하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재연결작업 (WTR : Work That Reconnects)을 해 오던 사람입니다.[ 조안나 메이시, 크리스 존스톤 지음, [Active Hope], 양춘승 옮김, 벗나래, 2016.]

그녀는 오늘날 위기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3가지 관점과 자세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관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냥 살았던 대로 살자(Business as Usual)”는 입장입니다. 이제껏 그랬듯이 정치인이나 과학자들이 정책으로 과학기술로 다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걱정은 되지만 잘 해결될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오늘날의 위기를 받아들이는 세 가지 태도 유형

두 번째 관점은 현재의 위기상황이 대단히 심각하고, 지금이 “대파국, 대균열의 시대(The Great Unraveling)”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위기와 파국에 주목하는 입장으로 위기의 상황이 전 지구적이라고 보고 너무도 규모가 크고 불안하여 이에 대처하고 대응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합니다. 이렇게 위기에 대응하려는 노력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위기를 통해 불안감만을 고조시켜 종교적인 컬트를 만들기도 하고, 정치적 공격이나 권력 장악의 목적으로 사용하며 공포감을 조장합니다. 심지어 무력감을 느끼게 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세 번째의 관점은 현재의 위기를 대전환 (The Great Turning)의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위기는 심각하지만 그 거대한 심각성 때문에 오히려 더 큰 희망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두 번째 입장은 “위기”에 초점을 두지만, 세 번째 입장은 생명사회로의 “대전환”에 초점이 있습니다. 조안나는 세 번째의 초점을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위기와 불안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전환의 큰 설렘과 희망을 말하는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운동은 그 어떠한 혁명보다 크고 큰 “역사상 최대의 사회운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환의 관점에서 오히려 “축복받은 불안(Blessed Unrest)”입니다. 두렵지만 오히려 잘못된 것을 바꾸어 정상의 바른 삶으로 회복하는 중요한 전환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이제껏 수많은 환경운동가들이나 정치인들은 두 번째인 “위기성”에 초점을 둡니다. 만일 3번째 대안과 희망을 말하지 않고 두 번째만 강조하면 그야말로 공포마케팅이 됩니다. 위기가 강조되면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거나 두려운 나머지 강력한 독재자가 나타나 거대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주길 기대하는 “에코파시즘”의 출현을 조성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대전환의 개벽을 강조하는 우리는 오히려 위기가 그동안 인류가 자연과 왜곡되게 관계를 맺어온 것을 정상적이고 건강한 관계로 ‘올바로 펴는’ 전환의 기회로 삼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위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오히려 좋은 도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반생명적 산업문명의 지속 불가능한 페러다임을 ‘폐절’, ‘단절’하고 전환하여 생명친화적인 문명으로의 변화를 꾀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전환운동 또는 생태적 전환운동, 생명평화운동으로 통칭되는 ‘문명전환운동’이라고 할수 있으며, 탈근대 운동, 지속 가능한 발전, 녹색순환사회운동이라는 명칭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이 모두 개벽운동의 다양한 이름이자 다른 표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그야말로 개벽운동의 빅텐트에 들어와 있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회적 개벽, 문명적 전환을 위한 3가지 운동 전술



이 대전환의 개벽운동이라는 행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전술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위기에 대응하는 세 가지 운동 전술



첫째로는, 지연전술행동입니다. 사회나 단체가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저항하며, 부패하거나 더 나빠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피해자를 보살피고 생명이 파괴되거나 죽지 않도록 착취와 전쟁, 불평등을 막고 방어하는 행동 전술입니다. 반드시 필요한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두 번째는, 가치실현행동입니다. 생명시스템이 유지되고 살 수 있는 바른 사회의 가치를 실현하는 행동전술입니다. 왜곡되거나 잘못된 것을 바로 세워 평등과 호혜의 원칙과 정의를 바로세우고, 균형을 만드는 생명사회를 운동입니다. 농(촌/민/업)적 문화를 근간으로 공동체적 사회관계를 중심으로 세워 생명 중심의 사회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전환사회행동입니다. 자연과 인간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대안적 페러다임으로 의식과 실천을 세우며 우리가 원하는 비전과 대안사회, 전환의 가치를 직접 만들고 창조하는 행동 방법입니다. 사회변화와 더불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을 동시에 하면서 전환을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별적 자아’에서 ‘관계적 자아’로, 더 나아가 ‘생태적 자아’에서 궁극에는 ‘보살적 자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3가지 활동은 서로 다른 영역이지만 같은 목표로 향한 다른 방법이기 때문에 서로를 격려하고 강화시켜주며 동지로서 함께 돕고 협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3가지는 각자 선 자리에서 집중하는 활동에 따라 의제와 중심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래 내가 서술하려는 것은 우리가 ‘희망과 미래의 대안을 만드는 일을 하려 한다면’이라는 태도를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합니다.



전환사회로의 항해, 암초 제거와 수위 높이기



사회적 전환을 위해서 행동을 전개하는데 시기에 따라 강조점이 이동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지연전술이, 또 어떤 때는 가치실현이나 전환사회행동이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회적 전환운동은 명백하게 대안과 비전, 가치를 지향하는 활동이 기조가 되면서 저항과 감시의 지연전술과 가치실현운동이 배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운동이 전개되는 데 구체적인 실천에 다음과 같은 관계를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환사회로 항해하는 길



새로운 미래의 대안사회를 만드는 데는 A와 같은 수위(조건)에서 활동할 수도 있고 B의 수위(조건)에서 활동할 수도 있습니다. 위의 그림 B의 경우는 물의 수위가 A보다 낮습니다. 따라서 목표를 향해 가는데 수많은 암초에 걸립니다. 이 조건에서 암초는 장애물이고,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암초 1~6등 모든 암초를 피하거나 깨뜨리고 제거하면서 전진해야 합니다. 이러다 잘못하면 그 암초로 인해 난파되거나 좌초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의 상태처럼 물이 많다면 밑에 많은 암초가 있다고 해도 별 상관없는 일입니다. 암초가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장애물 (암초5)이 없진 않지만 그 장애는 6개의 암초가 있는 B와는 달리 1개 밖에 없고 제거할 양도 B처럼 엄청난 양이 아니라 그저 봉우리 (암초5)의 끝만 조금 제거하면 됩니다.



한 국가 및 사회, 조직이나 단체를 운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두 가지 기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수위를 높이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암초가 없다고 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암초가 문제가 안 되도록 수위를 높이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유형은 걸림돌인 암초를 제거하는 데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위의 그림에서 물의 수위는 희망과 대안, 창조와 긍정적 가치들입니다. 조직으로 보면 지지, 격려, 즐거움, 감사함, 건강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암초는 갈등, 분쟁, 마찰, 문제 요소 등이라고 할 수 있고 조직에서는 갈등, 비난, 좌절, 실패, 무력감, 상처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활동 과정에서 갈등과 분쟁이 있다할지라도 희망과 대안과 지지와 격려, 즐거움이라는 물의 수위가 높으면 (A처럼) 희망적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점이나 갈등, 분쟁이라는 암초가 있다고 해도 큰 문제가 없이 뛰어넘는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갈등과 분쟁은 그 자체도 해결해야할 과제이지만, 물의 수위 낮음, 우리 안에 대안적 긍정적 가치가 부족한 것을 원인으로 볼 수도 있는 거지요. 따라서 갈등과 분쟁이 일어난다면 그 원인 해소에도 노력해야 하지만 희망과 긍정적 가치, 즐거움과 감사함이라는 수위를 높이는 것을 동시에 추구해야 원만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우리 조직에서 ‘이것이 문제야’라고 말했을 때 실제 그 단체에서 ‘문제일 수도’ 있지만 ‘문제가 아닐 수도’있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이 문제”라는 말도 있습니다. 보기에 따라 개인의 기준에 의해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 단체의 물의 수위(A의 높이)가 높으면 그 문제(암초)는 문젯거리가 안 됩니다. 그러나 물의 수위가 낮으면(B의 경우) 문제(여러 암초)가 한두 가지가 아니게 됩니다. 실제 수위가 A라 할지라도 문제가 없는 게 아닙니다. 밑에 수많은 암초가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희망과 비전의 수위가 높기 때문에 문제가 안 되는 거지요. ‘문제’가 실제 문제라서 문제인 경우도 있지만, 평상시에는 별문제가 안 되었던 것인데 희망의 비전이라는 수위가 낮아서 그 문제가 문제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암초를 문제 삼는 일은 객관적인 조건을 탓하는 것이지만 수위를 문제 삼는 일은 자신의 주체적 상황을 주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내 부덕의 소치

사사건건 사소한 것까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단체나 조직을 불편하게 하며 불화를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체에서 정말 눈엣가시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불화를 조장하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 조직의 문제점과 구멍을 발견하여 대책을 세우도록 중요한 기여를 하는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될지 나쁜 사람이 될지는 단체의 자신감과 관용성, 조직의 비전과 희망의 크기에 따라 달라집니다. 단체의 비전과 관용의 수위가 낮은데 계속 암초 역할을 한다면 결국 그 조직(배)은 좌초할 것입니다. 이 경우 문제제기하는 사람도 파괴적이고 폭력적으로 제기할 것이 아니라 배(단체)가 파괴되지 않을 수준, 견딜 만한 수준을 염두에 두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제기의 방식도 “가운데를 향해 문제 폭탄을 잔뜩 투척하고 자신은 구석으로 도망가는” 무책임한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되 해결의 관점에서 제안하는” 책임 있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단체의 대표나 책임자는 아무래도 들어오는 정보의 양과 자신의 직위로 인해 ‘독수리의 눈’으로 볼 수밖에 없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분 업무를 하는 실무자들은 아무래도 ‘비둘기 눈’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표가 가져오는 일감과 업무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튼 전체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시점이 중요함에도 부분적 시점을 주장하고 고집하면 개인과 단체가 곤란해집니다



물의 수위가 낮으면 암초가 문제가 되지만 수위가 높으면 그 암초 속에 수많은 해조류와 물고기들의 풍부한 서식처이자 어장의 역할을 합니다. 조직의 책임자는 전체의 시점에서 우리의 비전과 희망의 수위를 높이면 암초도 좋은 어장이 되듯, 암초를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큰 희망과 비전의 자신감과 조직적 관용성의 낮음을 탓해야 할 것입니다. 예로부터 임금이자 지도자들은 자연재난이나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 부덕의 소치”라는 말을 써 왔습니다. 실제 조직에 책임 있는 사람이 덕이 크고 넉넉하여 사회적으로 관용과 여유로운 분위기로 높은 수위의 문화를 만들었다면, 국가와 조직의 분위기가 믿음과 희망, 즐겁고 행복한 조건이 되었을 텐데, 책임자가 용렬하고 치졸하면 내부의 분위기도 팍팍하고 삭막하게 되어 물의 수위가 내려가 평상시에는 암초가 아닌데 결국 암초가 되어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결국 책임자의 부덕의 소치인 것이지요.



암초는 단기적 과제와 수위는 장기적 과제



조직 내에서 수위를 높이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끼리의 신뢰와 존중, 즐거움과 격려와 배려 등이 풍성하면 조직의 수위가 높아지고, 웬만한 문젯거리는 대부분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서로 비난하고 상처를 주고 갈등 경쟁을 하면 조직의 수위를 낮추는 일이 됩니다. 수위가 낮아지면 과거에 없던 일들이 문제로 되어 마구 튀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드러난 암초로 인해 단체나 조직은 고통을 받고 좌초하게 됩니다. 그래서 단체 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원인을 해결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서로 더 친해지지 않아서 사랑하지 않아서 신뢰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단체의 경우 단합대회나 MT, 회식이나 뒷풀이 등을 자주하여 물의 수위를 높이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지요.



대체로 암초는 항해하면서 당장 부딪치는 문제입니다. 긴급하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수위를 높이는 것은 금방 효과를 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우선은 암초를 피하기 위해 등대를 세우거나 지도를 보면서 피할 방법을 찾으면서 헤쳐 나가야 합니다. 아무튼 사람들 간의 신뢰, 사랑과 배려 등의 수위를 높이는 일은 금방 성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만들어 가야 할 문화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사회적으로 조직적으로 그러한 희망과 비전을 향한 꿈을 공유하고 서로 믿고 즐기는 문화를 만들고 일상에 배어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 이 두 가지가 단기적이나 장기적인 과제로 구분되지 않기도 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문제를 발견했을 때 그 원인이 되는 암초를 제거하는 활동과 더불어 그것을 교훈의 계기로 삼아 수위를 높이는 문화를 만드는 해법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변화의 경우에는 서로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습니다.



전환의 관점에서 지연과 가치실현행동을



앞서 3가지의 활동—지연전술행동, 가치실현행동, 전환사회운동--은 모두 똑같이 중요한 활동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문명적 대전환을 행동의 중심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위의 3가지가 기계적으로 동일하지 않습니다. 전환사회운동을 위한 가치와 희망이라는 수위를 높이는 일, 즉 대안적 가치와 비전의 가치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지연전술행동과 가치실현행동으로서 저항운동과 비판운동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지요.



기후변화와 위기시대에 희망이 없어 보이고, 남북의 갈등이 여전하고, 평화의 가능성이 요원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대안과 희망을 조직화하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오래 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희망이 있어서 희망하는 게 아니라 희망이 있어야 운동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회운동이나 종교운동 또한 이렇게 저항운동(지연전술행동)과 대안운동(가치실현 및 전환사회운동)이라는 2가지를 동시에 구사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와 경제, 사회문화의 반민주적이고 불평등한 요소를 감시하고 저항하는 운동(Watch Dog)에 주목하는 시민단체가 있는가 하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미래사회를 현실에서 구현해 보려는 마을운동, 공동체운동, 공유사회운동, 협동조합운동 등 대안사회운동이 있습니다. 앞의 사회운동 세력을 저항 주체라고 한다면 뒤의 사회운동은 창조 주체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둘 다 모두 필요한 것이라 서로를 돕고 지원하며 협력적 관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항운동은 그 특징으로 볼 때 적과 아를 구분하는 이분법적 인식이 동반되어야 하며 필연적으로 상대를 대상화하고 타격하고 비판하는 운동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운동은 상대를 적대하는 과정에서 자기 세력 간의 단합과 단결을 도모하며 동지적 유대를 만들 수 있지만, 한편 비판과 공격에 매몰되면 스스로 피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저항 과정에서 미워하며 닮아가는 일, 괴물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괴물이 되는 과정을 역사에서 많이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환운동의 관점에서 저항운동을 한다면 진영논리에 매몰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일에 함께하지 않는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거나 적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타격하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지요.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전환사회를 만드는 소중한 동력이자 동지인 것입니다.



감시와 저항의 과정에서 모아진 사람들이 장기적으로 희망적인 대안적 사회와 비전을 위해 함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대안운동을 통해 모색되는 활동들이 저항운동의 방향과 방법을 규정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저항운동과 대안운동은 통전적인 관점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고 협력하는 활동이며 단지 역할을 분담한 것이며 서로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등을 통해 어려움을 견디는 근육 키우기



갈등이 있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해서 갈등을 해소하려고 하고, 심지어 <갈등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갈등 없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갈등이 나쁜 것’이며 완벽히 없어야 한다는 ‘바로 그 생각’이 오히려 위험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말은 풍요로움이라는 좋은 점을 누릴 수 있지만, 갈등이라는 어려움도 감내해야 한다는 양면성을 갖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런 갈등이 없는 완벽한 평화, 평등한 균형관계는 기계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의 찬바람 부는 침묵의 균형, 평등은 죽음의 세계이자 기계적 세계의 ‘정적균형’일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 그것도 활발히 움직이는 생명은 살아 움직이고 꿈틀거리며 요동하는 것, 자체가 균형입니다. 그래서 ‘기우뚱한 균형’, ‘동적 균형’이라고 표현하며, 시스템 이론으로 보면 생명의 피드백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체가 아무런 소동과 교란이 없는 것보다 오히려 적절한 교란은 단체의 건강한 긴장을 높일 뿐 아니라 단체의 근력을 키우는 역할을 합니다.



어디든 갈등은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갈등을 발전적으로 전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체의 그릇이 작을수록 리더십의 자신감이 없어 갈등을 견뎌내는 근육이 약하고 관용성이 좁아집니다. 그래서 그 갈등을 암초라고 생각하여 제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의 수위가 높고 크고 넉넉한 단체는 갈등을 견딜 뿐 아니라 갈등을 전화위복으로 전환하는 근력과 내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부에 성질이 예민하고 강한 사람도 넉넉히 관용하는 조직적 자신감이 있습니다. 실제 조직과 단체의 관용의 크기는 문화적 리더십의 탄력성의 폭만큼 많아집니다.



우리나라 초기 대안학교로 유명했던 원불교의 영산성지학교의 교훈은 ‘꼴 봐주기’였다고 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그 꼴을 못 봐’ 줍니다. 꼴을 봐 주는 근기가 없어 불화하고 갈등합니다. 그러나 이 꼴 봐주기는, 행동의 옳고 그름은 단지 현재의 조건에 따른 인연일 뿐 좋고 나쁨은 본래 없다는 걸 인식하는 불교적 지혜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고, 넉넉한 단체의 관용성의 크기인 것이지요.



암초는 죄가 없다



그런데 조금 더 나아가 보자면 ‘암초’라는 규정은 누가 하는 걸까요? 수위가 결정하는 거지요. 그 사람이 항해를 할 생각이 없으면 암초라고 부를 필요도 없고 걸림돌도 아닙니다. 내가 목표를 만들어 (유위) 무엇인가를 하려고 (항해)하니까 그것들이 암초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나의 관념이 만든 거지요.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마음의 수위가 A처럼 높으면 암초는 걸림돌이 아닙니다. 아무런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내가 갖고 마음의 수위가 B로 낮으면 모든 돌들은 암초이며 걸림돌로 나에게 나쁜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해 암초는 내가 ‘암초’라고 부르기 전에 그냥 한 바위였을 뿐입니다. 암초는 죄가 없습니다. 단지 내가 뭔가 하려는 ‘유위, 작위’의 마음이 바위를 암초로 인식하에 만든 것입니다. 또한 물의 수위는 나의 조건, 내 조직의 조건,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의 주체적인 마음가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암초는 내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며 어쩌면 내 밖의 사회적 현상들입니다. 다시 말해 암초는 스스로 장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바위일 뿐입니다. 결국 내 마음의 기준에 따라 암초가 되기도 하고 풍부한 물고기가 노는 어장이 되기도 합니다.



자 여기서 문제는 내가 항해하는데 전정한 장애는 암초일까 수위의 낮음이 문제일까요. 암초를 문제 삼는 사람은 단체나 조직에서 암초 역할을 하는 사람을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여 제거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위를 문제 삼는 사람은 오히려 그 암초는 오히려 우리를 단단히 단련시키고 결속시키는 풍부하고 단단한 근육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속담이 있습니다. 한 사건이 어떤 경우 좋은 일 될 수도 있지만 그 일이 다시 나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사건은 그저 한 사건일 뿐입니다. 좋다 나쁘다고 분별과 구별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관념이 만들어낸 인식인 거지요. 마치 바위는 바위일 뿐인데 그 사람의 태도와 조건에 따라 걸림돌이 되거나 물고기의 어장으로 보기도 하는 거니까요? 이게 바로 불교에서 ‘공(空’)하다는 거지요



욕망 내려 놓기과 욕망을 키우기



불교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그 고통은 “탐(욕망), 진(분노), 치(어리석음)”에서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집착, 탐심, 욕망(貪)이 생기면 욕망에만 눈이 어두워 자신의 이익밖에 보이지 않고 다른 것은 ‘뵈는 게 없어져’ 분노(瞋)합니다. 그렇게 시야가 좁아지니 당연히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지혜로운 판단보다 어리석은(癡)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큰 해탈을 얻는데 장애가 되는 탐심(貪心)이라는 암초를 걷어내는 일, 그렇게 내려놓고 방하착(放下着)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욕망을 없애거나 줄이라는 말도 하지만 한편 대승불교에서는 욕망을 더 키우라는 말도 나옵니다. 이름하여 큰 원이라는 표현으로 서원(誓願)입니다. 앞의 욕망은 개인을 위한 욕망이지만, 뒤의 욕망은 ‘큰 나’를 위한 (대자적인) 욕망이지요.



과거의 경험 속에 사례를 들자면, 한 중학생이 부모에게 나이키 신발을 사달라고 조르자 집안에 심각한 불화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우연한 기회에 중학생이 중국에 역사기행을 갈 기회가 생겨 갔다가 북중 접경 지역에서 굶주리며 구걸하는 북한의 자기 또래의 소위 ‘꽂제비’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돌아와서 나이키 신발을 잊어버리고 각 학년과 반을 돌아다니며 북한을 지원하고 돕는 활동에 열심히 나섰습니다. 나이키 신발을 사달라고 조르는 사람에게 신발을 사줘 버리면 불화는 해결됩니다. 원인을 해결하여 해소시킨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학생이 북한을 도와야겠다는 숭고한 마음으로 염원과 원이 더 높아지자, 나이키 신발을 사달라는 요구는 사라졌습니다. 나이키가 해결된 것이지요.



하나의 해법은 나이키를 사줘서 욕망을 충족해서 해결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욕망의 수준을 높이는 바람에 갈망을 채을 필요가 없어져 자동으로 해결된 것이지요. 이렇듯 욕망을 키우는 일, 서원을 키우는 일, 수위를 높이는 일이 문제 해법에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것도 문제 저것도 문제라고 분별을 내는 것이 도(道)가 아니라 현재 조건에서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도(道)라고 하는 말이 그런 뜻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대전환 운동, 개벽운동의 동력은 감사와 즐거움, Recareation



한때 7-80년대 사회운동은 ‘적개심과 분노’를 동력으로 이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상대를 향한 적개심이 우리 진영을 단결시키는 도구로 생각하고, 상대를 비하하거나 우스운 조롱거리로 만들면서 우리들끼리의 오락과 즐거움을 만들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저항 주체로서는 적당할지 모르지만, 대안 주체와 창조 주체로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제 대전환운동과 개벽운동은 긴 호흡의 운동입니다. 길게 해야 할 일입니다. 과거에는 고뇌에 찬 결단을 하는 소수의 지사들이 필요했고, 그들이 선도적으로 깃발을 올리면 따라가는 것이 중요한 운동이었지만, 그러한 선도적 운동은 장애와 장벽을 파괴하고 일점을 돌파하는 큰 힘은 될지 모르지만, 참고 인내하는 소수의 결단의 일로 인해 개인에게 ‘내가 남과 다른 결단을 한 사람’이라는 관념적 우위성을 갖게 하여 시간이 갈수록 괴로움을 자초하게 만듭니다. 잠깐 동안의 파괴와 저항에는 지사적 결단이 필요했지만, 그런 방식으로 이를 앙다물고는 오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대전환의 거대하고 유장한 활동을 하려면 긴 호흡의 동력이 필요합니다. 그 동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하기”입니다. 이웃에게 감사하고 자연에 감사하고 친구들에게 감사하고, 심지어 적에게도 감사의 절을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많이 생기고 감사의 감각이 발달하여 아주 사소하고 섬세한 감사로 인생과 삶이 즐거워집니다. 이렇게 감사하면 내가 행복해지고 내가 행복해야 오래 할 수 있고 그래야 남도 나를 따라오게 됩니다.



고뇌에 찬 결단을 하는 사람은 소수의 지사로 존경받을 수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하는 일은 위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더 옆으로 성공하는 일을 만듭니다.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연대하면서 거대한 사회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입니다. 대안적인 전환의 삶을 사는 사람은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대안이 되고 그 삶이 비전이 되어 함께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그의 행동과 삶을 믿는 것이지 그의 말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개벽을 영어로 찾아보니 Creation 이더군요. 그런데 우리가 주장하는 “다시 개벽”은 “Re-creation”이 되는군요. 레크레이션은 재창조라고 번역하지만 보통은 오락과 놀이를 뜻하잖아요. 그래서 이 운동은 바로 오락과 놀이처럼 즐겁고 재미있게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 개벽 운동운 ‘틈 전략’이고 ‘중심이동 전략’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에 포섭되지 않은 비자본주의적 호혜의 영역을 발견하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넓히는 전략이며, 정권을 잡아 전복하는 정치혁명이 아니라 서서히 중심 이동시키는 일입니다. 변방의 것을 중심에 오도록 하는 일, 비주류를 주류와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