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계의 풍운아(虱雲兒)로 추산 선생 수모하며
송 순 현(정신세계원장) 1990
취산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취산 박영철 선생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의식과 두뇌 속에 그 이름을 남기셨을 터이고. 나도 아마 평생토록 그 이름을 잊지 못 하고 살아갈 사람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니까 23년 전인 1976년 2월 어느날이었을 것이다. 취산 선생을 처음 것은 초월명상 TM의 공개 강연이 일리는 남대문 옆 그랜드 호텔 강당에서였다. 그날 TM의 제2인자라고 하는 인도인 요기 사차난 의 특별 강연 통역을 맡았던 취산 선생은 열정과 자유로움이 섞인 특유의 언변과 모습으로 청중들의 주의과 관심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열정을 통해 전달된 강연의 내용은 군생활을 마치고 4년만에 다시 대학 2학 년 복학 대기중이었던 나를 곧바로 TM에 입문하게 만들었다. 취산 그후 23년간 이어진 선생과의 인연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취산 선생은 TM의 한국 정착에 지대한 기여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거의 모든 자료를 손수 번역하였 으며 센터 운영에 다방면으로 협조하였고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당시 강남 반포 아파트에 있었던 TM센터를 자주 드나들면서 나는 25년 연상이었던 취산 선생에게서 드러난 세계와 드러나지 않은 세계. 의식(意識)의 신비와 그 개발 가능성 등에 대한 많은 말씀을 들을 수 있 었으니. 그때가 말하자면 나로서는 취산 선생에게서 정신 세계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 취산 선생은 이미 당신이 번역하여 출간되었던 리차드 바크의〈환영(幻影))과 (갈매기의 꿈〉의 번역글을 다시 다듬고 계셨는데. 을 단지 •있음• 으로만 번역해서 독자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는 지에 대해서 고심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 옆에 계시다면 평생을 존재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셨던 취산 선생의 •있음• 에 대한 명철한 말씀을 새로 듣고 싶다
처음 본지 1년 후인가. 취산 선생이 TM보급의 일선에서 물러나 TM창시자인 마하리시 마해시 요기가 주석을 단〈바가바드 기타〉의 번역에 열중하실 때. 여름방학을 맞은 나에게 번역 원고의 교정을 부탁 하셔 서 경기도 금곡의 견성암에서 보름 정도 함께 지낸 적이 있었다. 동국대 역경원 위원으로서 여러 권의 역서 와 저서를 내신 바 있는 그 절의 주지인 한길로 스님과는 도반(道伴)이신 듯하였다. 그곳에 있는 동안 새벽 예불이 끝나면 이어서 법당에서 30분간 스님이 인도하는 실상관(實相觀)에도 함께 참여하였는데, 새벽의 맑은 공기. 물소리 바람소리 속에서 '나는 이제 허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실상의 세계에 들어가네: 하는 스님의 말씀에 따라 생각을 가다듬는 일은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참 정갈해지는 느낌이다.
그 실상관은 다니구찌 마사하루의〈생명의 실상〉에 바당을 둔 실천수행법이었고. 취산 선생께서는 당시 태종출판사가 번역 출판중이던 그 40권 전집 가운데 여러권을 이미 번역하신 바 있으시고 한국에서의 그 사상 보급 단체인 광명회에도 깊이 관련되어 있으시다는 것을 한 것은 나중 일이있다
어두침침한 절방에 앉아 하루 종일 꼬박 번역 일에 열중하시던 모습은 참으로 성실한 학자의 모습으로 내눈에 비쳐졌다. 또 식사나 차를 스님과 함께 하시면서 여러가지 세상 일을 소재로 (허허로이) 도담을 나 누실 때는 세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던가 이미 세속의 모든 질곡을 초탈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했었다.
그때 나로서는 취산 선생을 옆에서 가까이 뵈면서 여러 가지 좋은 영향을 많이 받은 행운을 얻은 셈이 있는데.〈바가바드 기타〉번역 원고 교정 일은 내가 감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도 나에게 해보라고 하 셨던 것은 좋은 공부의 환경과 계기를 마련해 주시려는 배려였던 것임을 나중에야 짐작하게 되었다 그리고〈바가바드 기타〉에서 정의는 곧 사랑의 실천• 이라고 크리슈나가 아르쥬나에게 일러주는 부분 과. 마하리시의 주석 가운데 인생은 고해가 아니고. 삶은 곧 기쁨이다(Life is Bliss)' 는 TM적 해설 내용 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때의 소득 가운데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1979년 대학 졸업후 사회를 배운다는 명분으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세일즈맨으로 사회의 첫발을 내 딛은 나는 그 당시 어떤 특수 개발품 사업에 참여하고 계셨던 취산 선생을 틈틈이 찾아븹고 좋은 말씀을 듣 곤했었다 그러다가 81년에 실바 마인드컨트를 한국센터에 나가 사무일도 돕고 자료 번역도 하면서 나중에는 강의도 일부 맡아 하던 나는 83년도에 이르러 그동안 취산 선생께서 일러 주셨던 해외의 관련 정보를 참고하여 정신문화 사업을 해보고 싶은 의욕을 갖게 되었다.
뜻맞는 몇몇의 친구들과 함끼1 우리는 취산 선생을 모시고 한 달에 한번 정도 회동하면서 사업의 아이디 어를 모으고 마스터 플랜을 싸는 일을 하였는데. 그때 취산 선생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면서 많은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다가 83년 8월. 고등학교 선배인 아람건축의 김기석 소장이 홍대 옆에있던 자신이 직접 설계한 붉 은 벽돌의 아담한 2충 건물에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주어서 그곳에서 류시화씨와 함께 잡지 창간 준비를 시 작하게 되었다. 잡지 이름은 (월간 정신세계〉또는〈정신세계 다이제스트〉를 후보로 하였으며. 발행인은 김 기석씨, 고문은 취산 선생으로 내정하였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잡지 등록이 참 어려웠고. 류시화씨가 3개월쯤 후에 병역 문제로 그만두게 되어 잡지 준비는 보류되었다. 결국 83년12월. 출판등록증을사서 약간의 출판 경력이 있는 한 친구와 함께〈정신세 계사〉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출판의 방향은 이미 취산 선생으로부터 시사(示安)받은 바가 기본 토대가 되 었다
취산 선생께서도 그즈음〈밝은 생활사〉라는 이름으로 출판등록을 하시고 그동안 동호인들끼리 나누어 보던 (보름마다의 편지)를 보다 적극적으로 펴내고 있었다〈삶뒤의 삶〉,〈히말라야를 넘어서〉등 단행본을 출간하기 시작하신 것도 아마 이때쯤인 것으로 기억한다.
이 (보름마다의 편지〉야말로 볼륨은 작았지만 어떻게 보면 국내에서 정신분야 정기간행물의 효시가 아 닌가 짐작된다. 당시 이 작은 책자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세계에 입문하고 소양을 쌓았다고 본다.
여기서 한 가지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있는데. 바로 그 즈음 취산 선생께서 어느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하신 적이 있었다.
“광명회나 밝은 생활사 일을 통해서 늘 밝은 마음. 밝은 생각. 긍정적 사고를 얘기해 오곤 했지만, 내 자 신을 스스로 생각할 때 환갑이 다 된 이 나이에 와서 비로소 내 생활 전체에 걸쳐 ?(Positive Thinking)이 50%선을 넘은 것으로 생각이 되니. 사람이 늘 밝은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실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듯 하군요.” 이것은 참 용기있는 고백의 말씀이셨고 그분 나름의 자기와의 치열한 내면의 싸움이 있어온 것을 느끼 게 해주는 말씀이었기에 나는 그때 오히려 숙연한 마음이 들었고. •이것이 이분이 도(道)를 닦아 나가시는 길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만년에 병고에 시달리시면서 , 또한 아마도 그때까지 그래도 남아 있을 수 있는 '?(Nega1tive Thinking) 과 싸우셨을 취산 선생
“당신은 끝내는 승리자로서 이 세상에서 하실 공부를 다 잘 마치고 가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지금은 깊 은 평화 속에서 존재의 기쁨을 누리고 계시겠지요!”
〈정신세계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을 시작한 나는 번역서로 어린이 정신 세계 시리즈 3권을 첫 출판물로 내놓았고. 김기석씨의 추천으로 요가난다 자서전을 그 다음 책으로 내기로 하였다. 돈없이 시작하였기에 경 비를 절약하기 위해 나도 일부 번역하고 대학 동창들을 동원하여 무료번역을 시켰었는데. 내용중 아무래도 우리 실력으로는 자신이 없는 부분이 있어서 급기야 그 부분은 취산 선생께 부탁을 드리게 되었다.
그것은 요가난다가 스승 유크테스와에게서 올바른 가르침을 받고 사마디를 경험한 것에 대한 서술 부분 이었다. 1984년 3월에 취산 선생께서 번역해 주신 그 부분을 여기서 다시 한번 음미해 보는 것도 취산 선 생에 대한 좋은 추모가 될 것 같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취산 선생을 생각하며 다음 글을 함께 음미해보 면 좋겠다.
사마디
빛과 어둠의 장막 걷히고 모든 슬픔의 안개 사라졌네. 덧없는 쾌락의 뿌리는 뽑히고 침침한 감각의 신기루 사랑 • 미움. 건강 • 질병. 삶• 죽음 이원성의 스크린에 드리워졌던 이 헛된 그림자들 꺼져 버렸네. 마야의 폭풍도 영묘한 통찰의 마술 지광이로 고요히 잠들고
과거. 현재. 미래 그런 것은 더이상 내게 없다.
다만, 한결같이 지금 있는, 온통 넘실대는
나. 나만이 있다.
항성들, 휴성들, 성운, 지구.
최후의 날에 쏟아져 밀려오는 화산의 폭발.
창조의 이글거리는 용광로. 소리 없는 방사선의 빙하.
불타는 전자 입자의 홍수, 지난 때, 지금, 앞으로 올. 온 인류의 상념들, 하나하나의 풀잎. 나의 자아, 인류, 우주 티끌의 낱낱의 입자.
분노 탐욕, 선, 아. 구원. 욕정.
그 모두를 나는 삼켜.
나 자신의 존재 하나 인에서 출렁이는 끝없는 피의 바다 속으로 녹여 넣었다.
끊임없는 명상으로 쌓이는 기쁨은 나의 눈물 어린 눈을 부시게 하면서.
마침내 지복의 영원한 불꽃으로 타올라, 나의 눈물과 나의 뼈대와 나의 전부를 태워 버렸네.
너는 나. 나는 너.
앎. 아는 자, 알아지는 것이 곧 하나였구나! 고요하면서 한결같이 이어지는 전율, 그것은 영원히 살아 있고 한결같이 새로운 평화이어라.
넘보는 상상을 넘어서는. 그러나 생생히 누릴 수 있는 그것은 사마디 곧 커다란 복이어라!
그저 허한 혼절의 상태가 아니다. 또는 의지적인 회귀가 불가능한 마음의 마취제도 아니다.
사마디. 그것은 나의 의식 영역을.
필멸의 들올 넘어 영원의 경계자 끝.
나 우주의 바다가 내 안에서 떠도는 왜소한 자아를 지켜보는 곳까지 넓혀 주누나.
끊임없이 변하는 원자들의 속삭임이 들리도다.
시커먼 땅. 산과 골짜기들, 보라! 녹아내리는 용암!
넘실대는 바다가 성운의 안개로 화하네!
음의 울림이 안개 위로 울려퍼지며 그 장막들을 신기하게 열어제쳐.
대양은 속을 드러내니 눈부신 전자(?)들이어라. 마침내. 마지막 들리는 우주의 북소리! 거친 빛들 모두가 온 누리를 꿰뚫어 스며들어 있는 영원한 빛살 속으로 사라져 버렸네. 나 기쁨에서 왔고, 나 기쁨 위해 살며, 나 거룩한 기쁨 속으로 녹아드는도다. 마음의 큰 바다여, 나는 모든 창조의 파도를 마신다. 고체, 액체, 기체. 광체의 네 장막을 단정히 걷어 올려라.
모든 것 속에 있는 나. 커다란 들10하 들어서네. 변덕스레 깜박이던 덧없는 기여의 그립자들 이제 영원히 사라졌c毳 티없이 맑디맑은 내 마음의 하늘. 아래도. 앞에도 또 저 높은 위에도 영원과 나. 그것은 어우러진 하나의 빛살. 조그만 웃음의 물거품이던 나. 열락. 그것의 바다 되었네.
끊임없이 나에게 정신적 자양분을 공급해 주시고 많은 사업적 아이디어도 제공해 주신 취산 선생은 롭 상 람파의〈제3의 눈〉을 번역해 정신세계사 독자들의 정신 세계를 넓혀 주는 일에도 기여해 주셨다. 그리고 한국의 모든 일을 정리하시고 미국으로 이민 가시기 전에 밝은생활사에서 당신이 번역하여 출간쾼던 맥도 널드 베인의〈히말라야를 넘어서)(후에〈히말라야의 성자를 찾아서〉로 개명됨)도 정신세계사로 넘겨 주시 어 우리의 귀중한 기본도서로 삼게 해주셨다.
취산 선생께서 미국으로 이민 가신 것이 87년쯤인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마도 그 이유는 먼저 이민가서 살고 계셨던 부인에 대한 배려 때문이 아니셨는가 싶다. 90년도에 •책방 정신세계• 를 열기 전에 나는 이 계통 유명 책방을 견학하기 위해 미국의 몇 개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워싱턴시 근처에서 세탁소 를 운영하는 아내를 돕고 계시던 취산 선생까|서 직접 벤을 운전하면서 시내 구경을 시켜 주시고 유명한 (yes! bookstore〉도 안내해 주시던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도(道)공부 한다고 오랜 세월 마누라 마음 고생 많이 시켰는데. 이렇게 마누라 일을 도우면서 딸들과 함께 가족이 모두 모여 오손도손 살아가니 참 마음이 편안하고 다른 욕심도 없고 이것이 행복이구나 싶어요.”
그렇게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에 잠겨 계시는가 싶었다. 아. 그때 분명히 그러셨는데 2년 후 불쑥 한 국에 다시 나타나셔서는 나를 불러 앉혀 놓으시곤 무슨 번역 원고 보따리를 내놓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내가 다시는 이런 데 속지 않고 여생을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말이요. 이건 정말 붓다가 미국에 환생을 한 것 같으니 송 사장도 한번 이 원고를 들여다 보고 의견을 좀 내주시오.” 대뜸 하면서 해리 팔머와 아바타 코스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 취산 선생은 이미 아바타 프로그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한국 에서의 보급에 대한 모든 구상을 가지고 계신 듯했다.
곧 아바타 코스 제1부 교재이기도 한 그 원고는 그 후(창조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고 취산 선 생은 대단한 열정으로 계획한 일들을 척척 진행시켜 나감으로써 아봐타의 위력을 몸소 주위 사람들에게 보 여 주셨다.
93년 4월, 막 마스터가 된 이구상씨의 첫 학생으로서 아바타 코스를 밟은 나는 9일간 내내 코스를 함께 진행하신 취산 선생을 바라보면서 저분이 이제는 정말 흔들림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봐타 코스에서 •프라이머리. 세컨다리• 연습을 많이 한 덕택에 나는 그때 계획중이던〈정신세계원〉 문을 곧 힘차게 열 수 있었는데. 여기에도 취산 선생의 공덕이 깃들어 있다고 하겠다.
그후 취산 선생은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 •미내사• 를 구성하시고.〈지금 여기〉발간하시면서 젊은이를 능가하는 놀랄 정도의 왕성한 활동력을 발휘하셨으니 그 정열이 어디에서 나오시는지 궁금할 정 도였다. 칠순을 넘긴 연세에 평생에 하고 싶으셨던 일들을 한꺼번에 일사불란하게 펼쳐 나가시는 그 모습을 뵈면서 '참 멋있는 인생이디• 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취산 선생이 말년에 병마와 싸우신 것도 당신이 스스로 선택한 이 생에서의 마지막 치열한 구도 과정이 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차일피일 미루다 그 마지막 선전(善戰)하시는 모습을 뵙지 못한 것이 나로서는 못 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신계의 풍운아로서 언제나 참신한 정보와 많은 깨달음을 전해 주셨던 취산 박영철 선생은 언제나 우 리 안에 함께 계실 것이다.
지금. 아. 거기가 바로 여기예하시는 말씀이 취산 선생의 그 특유의 웃음 소리와 함께 들리는 듯하다.(이거, 채널링인가?)
취산 선생을 사모하는 송순현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