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 | 퀘이커 300년- 7. 모임공동체(2)
작성자 바보새 16-01-07 11:02 조회36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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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모임공동체(2)
간소함
퀘이커 행동 규준의 네째인 간소함(simplicity)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 예배모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부 수장이나 건축에 아무 장식이 없는 환경 속에서 주님이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는 단순한 식의 것입니다. 18세기에는 간소함이 강조되었습니다. 그 시대의 모임집은 간소할 뿐 아니라 쓸모 있고 아름답고 균형잡힌 것이었습니다. 19세기에 와서는 이런 좋은 기준이 없어졌으나 최근의 건축은 다시 기능적인 간소함으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소함에 대한 관심이 생생하게 살아 있을 때에 그 표현이 고상하였으나 그것이 주로 전통적인 것이 되어버렸을 때 퀘이커의 모임집은 퀘이커 가정의 가구와 마찬가지로 그 모양과 양식이 퇴락돼버렸습니다.
친우들은 품질이 좋은데 반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반대는 ‘옷, 말, 행동’의 지나친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일반으로 친우들은 육체를 괴롭힘을 덕으로 생각하는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쾌락이 도를 지나쳐서 더 중대한 일에 방해가 될 때 그것을 아니라고 했을 뿐입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클라크슨(Clarkson)의 『퀘이커주의의 모습』(Portrait- ure of Quakerism)의 한 귀절이 그 태도를 설명해줍니다.
음악을 만일 친우회가 장려한다면 그것은 장성한 사람들이 지금 종교 예배에서 맛보는 위로의 시간을 빼앗아버리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물러감(退修)을 퀘이커들은 크리스천의 임무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회의 회원들은 예배장소에서만 아니라 가정에서나 또는 제 방에서, 그리고 날마다 하는 직업의 틈틈에서도 조용한 심정으로, 마음을 써서 하는 분주한 생각을 떠나서 일생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방향과 힘을 얻기 위해 때때로 침묵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퀘이커들은 한가한 시간을 즐기기 위하여 악기가 만일 허락되면 이러한 참된 물러남의 시간을 빼앗아버려서 크리스천으로서의 그들의 흥미와 성격에 많이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예술 일반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다. 간소함은 옷과 말과 태도와 건축과 가구의 쓸데없는 장식이 일체 없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질로나 소용으로나 좋은 것을 쓸데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간소함에는 또 경제적 이유도 있었습니다. 월리엄 팬은 “세상의 쓸데없는 장식만을 가지고도 모든 헐벗은 사람을 다 입힐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존 울만은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혜와 선이 완전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제각기 제 분대로 필요한 노동을 하려면 상당한 시간을 써야만 하게끔 만드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여서 사치를 행하고 부자가 되려고 애를 쓰면 어느 정도 압박을 하고 자만심과 경쟁심을 가지게 되며 당과 싸움을 일으켜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데 이르게 됩니다.
사치와 남아돌아감은 사람들의 노동량의 증가를 필요케 합니다. 그러므로 그 노동을 강요하기 위하여 압박이 필요하게 되고 압박에서 자만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존 울만은, 사치품을 삼으로써 가난한 사람에게 직업을 주어서 돕는 일이 된다는 현대 논법을 결코 찬성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사치는 허영과 압박의 근원이요, 결국은 전쟁의 원인이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인간이 만일 겸손하게 그 욕망을 참으로 필요한 것에만 국한시킨다면 지나친 노동과 압박과 분쟁은 없을 것이고, 생활의 필수품은 누구에게나 넉넉히 돌아갈 것입니다.
존 울만은 그의『인간의 참된 조화에 대한 이야기』속에서 그의 신앙과 간소함의 밀접한 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혹시 교만심을 일으킨다고 생각되는 어떤 일에 내 힘을 쓸 때는 내 영혼을 거룩한 사귐 속에서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켜준다고 생각해왔던 그 줄이 약해짐을 나는 느낍니다.
퀘이커의 옷에서는 스튜어드 왕조시대의 특색이었던 모든 장식이 다 없어졌습니다. 검소한 청교도들도 마찬가지의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퀘이커들은 후에도 초기의 의복 양식을 그대로 계속했습니다. 결국은 그것이 표준이 되어 필요하지도 않은데 새것을 사도록 만드는 유행을 따르는 것은 세속의 길에 대한 쓸데없는 양보라는 이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퀘이커의 이론에는, 자기 자랑이 됐다는 점을 내놓고는, 화려한 빛을 쓰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마가레트 폭스는 18세기초에 엷은 갈색만이 쓰이게 되는 것을 보고 반대했습니다.
평소에 제복을 입는 것은 세상에 대하여 그 사람의 선 자리가 어디인 것을 손쉽게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퀘이커들은 그것이 자기네를 가서는 아니되는 곳에 가지 않도록 잘 지켜준다고 했습니다. 한 번 퀘이커 옷을 입으면 거기 맞게 살지 않으면 안다고 느꼈습니다. 후에는 현대의 옷이 대체로 간소하고 기능적이기 때문에 퀘이커 옷을 입는 것은 하나의 빈 형식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게 되었습니다.
말을 간소하게 하는 것도 철저한 친우의 두드러진 특색이었습니다. 수식적인 지나친 말은 말에서도 글에서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퀘이커는 무뚝뚝하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모임에서나 어디서나 말을 할 때에 웅변조를 금했습니다. 퀘이커 책에는 명문을 쓰려고 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삼가서 자제하는 태도로 깊은 종교적 체험을 말했습니다. 월리엄 펜은 친우의 열두 가지 특색을 드는 가운데 그 여덟째로 “그들은 언제나 말을 적게 하여서 그 실지 모범으로 침묵을 권하고 있습니다” 했습니다.
간소함, 즉 쓸데없는 것을 제해버린다는 가르침은 생활의 모든 면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결혼식, 장례식에 검소의 정신이 지켜지게 하기 위하여 위원회가 임명됩니다. 백년 이상을 무덤의 비석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표적으로 그것을 쓰게 된 후에도 그것은 조그맣고 보잘 것 없는 것으로만 썼습니다. 세간 살림 같은 것을 간소하게 하자는 초기 퀘이커의 생각을 현대에는 미적인 이유 때문에 최신 유행이 그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친우들이 예술에 반대한 것은 단순히 그것이 쓸데없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또 그것은 다만 생활의 표현일 뿐인데, 생활 자체 노릇을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연극을 하는 배우는 그가 실지로 느끼지 않은 감정을 느낀 듯이 나타내고 소설가는 실지로 생긴 일이 없는 사실들을 있는 듯이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실지 행동의 출구를 얻을 수 없는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에 오히려 해가 될는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성 어거스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을 가리켜 “이것은 육의 만족이므로 영혼이 거기 사로잡히어 맥빠져버려서는 아니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술은 사실의 참이 아니요 그릇된 상을 길러냄으로써 그것을 따르는 사람을 하나의 상상적이요, 비진실적인 세계에 살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대의 영화는 보는 자를 꿈나라에 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예술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의 퀘이커들은 상상의 세계의 성질에 대하여는 확실히 잘못 생각 했습니다. 예술은 그 자신의 실재성을 가지고 보통의 행동이나 말로써는 가닿을 수 없는 어떤 의미를 전해주는 그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어떤 종류의 미를 감상하기를 피해왔기 때문에 친우회는 심미적으로는 어느 정도 떨어진 상태지만, 근대의 친우들은 예술에다 적당한 지위를 주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친우들은 쓸데없는 물건을 금했기 때문에 퀘이커 장사꾼들은 그런 물건을 팔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그들의 사업은 여려 가지 제한되는 것이 많았습니다. 재단사, 모자장수, 책장수, 장의사, 인쇄업자, 은방, 무역상들은 이 주장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퀘이커 재단사 존 홀(John Hall, 1637~1719)은 “주님과의 평화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소유를 잃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사업 그 자체가 거기 너무 취해버리면 시간의 허비가 되고 지나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 너무 정신을 뺏겨버리면 종교적인 의무를 다할 수 없어지는 것을 친우들은 깨달았습니다. 종교가 그의 제일의 관심사라면 그는 사업을 줄였습니다. 그것은 순회전도자의 경우에 가장 많이 그러했습니다. 거의 모든 퀘이커의 일기가 다 사업이 너무 커져서 종교에 써야 하는 시간까지도 거기 써야 하게 될 때에는 사업을 줄여버린 실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기 속에서 몇 개의 실례만 들면 사업을 제한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다니엘 휠러는 그의 직업인 씨앗장사가 너무 번창하여 친우로서의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몇 번이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하나님의 능력 가까이, 그 안에, 그 힘에 있으려고 힘썼기 때문에 내 무엇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되는 필요가 조만간 일어날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장사를 완전히 내던지고 가족과 한가지로 조그마한 사업으로 물러가는 것이 현재의 평화를 위하여서도 또 미래의 행복을 위하여서도 가장 좋다고 진심으로 믿게 됐습니다.
월리엄 에반즈(William Evans, 1787〜1867)는 큰 포목상을 같이 하자고 의논이 왔을 때 그것을 거절했습니다.
나의 현재 사업은 내가 잘 아는 조그만 것이기 때문에 쉽게 경영해갈 수 있습니다. 자본도 별로 필요치 않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에 끌려들어가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 걱정이 없고, 별 방해받음이 없이 모임의 약속에 참석할 수 있고, 또 언제나 모임에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할 때에는 자유로 갈 수가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라는 대로 직업 전환을 하면 나는 친우모임도 잃어버릴 것이고, 내 속의 종교적인 활동도 잃어버릴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땅은 주의 것이요 일천 언덕의 소도 그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내 앞길과 사업을 비록 작기는 하지만 새로운 평화와 만족을 가지고 내다보았습니다.
토머스 실리토(Thomas Shillitoe, 1756~1836)는 말했습니다.
내가 좋은 직업을 내버리고 집을 떠나 더 자유롭게 나의 종교적인 의무를 다 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하는 시간이 빨리 빨리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때때로 내 마음속에 일어났습니다. 나의 거룩하신 주님이 새삼스럽게 내 귀에 외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네 모든 물건을 네 집에 모아넣으라, 나는 너의 남은 날들이 필요하다.”
토머스 실리토는 길러내야 하는 자녀가 다섯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우리를 풍성하게 돌봐주신 그 전능하신 능력”에 맡겼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잘 되어가는 사업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때로는 내 영혼에 대해 지독한 시련이었습니다” 했습니다.
마르다 루드(Martha Routh)는 그 학교가 건물에 비해서 커졌을 때에 더 큰집을 어떻게 찾아냈던가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방에서 방으로 나가는 동안에 나는 문득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집이 수용 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학생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희미한 그러면서도 분명한 생각의 암시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그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맘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어떤 때는, 퀘이커 학자들은 종교에 더 많은 시간을 쓰기 위하여 그 공부를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유명한 과학자 월리엄 알렌은 그의 일기 속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늘 아침은 유쾌했다. 나의 자연과학에 대한 강한 매력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이 밝아지는 듯했다. 즉 그것이 너무 강하여서 지배적이 되는 때면 거기 너무 빠지지 말고 거기에 바치는 시간을 줄이고 쉬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아이어랠드의 의사요, 중요한 의학책의 저자인 존 러티(John Rutty)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먹고, 마시고, 자고, 담배 피우고, 공부하기 위해 사는 살림에서 나를 건져주시옵소서.
말을 간소하게 한다는 것은, 지나친 말을 아니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순수와 진실을 의미합니다. 퀘이커들은 주저하는 나머지 이따금은 너무 사실 그대로를 말하려다가 웃음거리가 되는 수가 있습니다. 지나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말을 꺼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그렇게 틔지 않습니다” 하는 문구들이 질문서의 대답하는 가운데 씌어 있습니다. 친우는 “나는 반대입니다” 하지는 않고, 대개는 “나는 아무래도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합니다. 참을 말하는 것의 부산물의 하나는 장사에서 정찰제를 시작한 것입니다. 17세기에는 장사꾼이 받을 값보다 많이 부르고, 손님은 줄 값보다 적게 부르는 것이 일반 습관이었습니다. 그래서 흥정을 한 결과 서로 맞는 값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퀘이커들은 처음부터 꼭 받을 값을 불렀습니다. 그 결과 퀘이커는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퀘이커 상점에는 물건을 사기 위해 어린아이를 보내도 좋았습니다.
창조를 이해하고 그 아름다움과 진실과 순수함을 아는 통찰력을 얻으려는 노력은 퀘이커들을 과학적 탐구로, 그리고 식물학과 새의 연구로 이끌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문적인 과학자나 되기도 했습니다. 과학은 예술보다도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가지가지의 오락을 내버린 대신 과학은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지나친 교육도 다른 사치품과 마찬가지로 온전히 제외되어버렸습니다. 퀘이커의 도덕가 조나단 다이몬드(Jonathan Dymond)는 1825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문학보다는 과학이 낫습니다. 말의 지식보다 사물의 지식이 낫습니다.
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교육에서도 글자나 형식에 거리끼는 것은 반대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로서의 자연에 대한 지식은 인간의 사업에 대한 지식보다도 사람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다이몬드의 말을 다시 인용해봅니다.
호라티우스가 무엇을 썼는지 아는 것이나, 그리스 시집을 비평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무슨 법칙을 가지고 자연의 활동을 다스리시며, 또 무슨 방법으로 그러한 활동들을 생명의 목적에 소용되도록 하려는지를 아는 것보다는 중요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퀘이커가 과학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진실과 사실에 한층 더 가까이 가자는 노력의 직접 결과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러한 흥미 때문에 퀘이커 과학자의 수는 참 많았습니다. 루드 프라이(A. Ruth Fry)는『퀘이커의 길』(Quaker Ways) 속에서 말하기를 1851년으로부터 1900년 사이에 영국의 퀘이커는 영국 학사회(Royal society)의 회원으로 당선되는 율이 다른 사람들보다 46배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법정에서 선서를 거부하는 것보다도 더 심한 박해를 퀘이커에게 가져 오는 것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친우들이 이 증거를 지키노라고 여러 해를 더러운 감옥 속에서 지냈고, 그 안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퀘이커가 맹세하기를 거절한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에서였습니다. 첫째, 맹세를 하는 것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마태복음」5:34) 한 그리스도의 계명과, 둘째, “내 형제들이여,무슨 일이 있더라도 맹세하지 마시오”(야고보서 5:12) 한 야고보의 말에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 참에 대한 두 개의 표준을 세우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법정 안에서 하나는 그 밖에서. 그러면 그것은 맹세가 없는 곳에서는 거짓을 말해도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퀘이커들이 재판에 끌려와 그들을 유죄로 결정하는 증거가 잘못되었거나 불충분한 때에도 그들은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들으면 거절했고, 그 때문에 그들은 투옥을 당했습니다. 맹세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친우들은 또한 관세법을 지킬 수 있는 권리, 부채의 지불, 소송하는 권리, 법정에서 증인이 될 수 있는 권리, 재산에 대한 자격을 주장할 수 있는 권리, 관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월리엄 펜의 경구 “사람들은 참을 말하기 위해 말하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맹세하지 않기 위해 참을 말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라는 말은 퀘이커의 입장을 남김없이 말한 것입니다. 펜은 과거 100년 동안에 각 통치자들이 일정한 형식의 종교를 지지하기 위하여 맹세를 요구했고, 다음에 또 다른 통치자가 일어나서 또 다른 형식의 종교를 지지하라고 맹세를 요구하면, 수많은 승려들이 전에 한 맹세를 거침없이 버렸을 때에 어떻게 쓸데없는 맹세들이 세워졌던가 하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드디어 오랜 투쟁 끝에 1696년 승인을 허락하는 법령이 의회를 통과했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친우들이 그 새 형식 안에는 ‘엄숙히’(solemnly)이라는 종교상의 문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쓸 수 없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런던 연회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어구에 합의를 얻기 위하여 25년간 싸웠습니다. 이것은 다수파가 소수파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독히 참아온 하나의 좋은 예입니다. 결국 1722년에 이르러 한 안에 합의를 보아 그것이 법률로 제정되었습니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는 펜의 헌법이 승인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친우를 만족시키는 승인의 안을 허하는 식민지회의의 특별법이 국왕에 의하여 참 의원에서 비준된 것은 겨우 1725 년에 가서야 됐습니다.
퀘이커의 판사로서 선서를 요구했던 사람은 초기에는 모임에서 제명이 됐습니다.
조셉 돈튼(Joseph Thornton)은 자기가 맹세를 요구했던 것을 크게 잘못으로 알았기 때문에 이 앞으로는 그럴 필요가 있는 자리에는 취직하지 않기로 결심했으며, 이제는 맹세를 하는 것은 친우회의 규칙에도, 자기 마음의 깨달음에도 허락되지 않는 것임을 알았다고 선언했습니다. (미들타운 월회, 1762)
혁명전쟁 후 왕을 버리고 새 정부에 충성한다는 맹세 혹은 승인을 요구하는 법령이 제정되었습니다. 수많은 친우들이 이 맹세를 거부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그 결과로 법률의 강행은 얼마 못 가서 폐지됐습니다. 승인은 허가되었지만 연회는 “우리들은 어떤 정부를 세우고 넘어뜨리는 기구 노릇을 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미국에서는 모임 공동체가 적절하게 제정된 행동기준에 따라 일을 하며 식민지시대에 있어서 그 발전의 최고도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은 그때에는 서로 경쟁되는 흥미의 가짓수도 적었고, 또 모임의 주위에 사는 사람들도 대부분이 퀘이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의사록에는 간소함의 증거를 지키기 위하여 주의했던 여러 가지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몇 개 듭니다,
우리 부인회는 엘리저베드 베넬이 의복과 말을 간소하게 하는데서 많이 떠나서 음악과 무용의 장소에 자주 출입하는 것을 불만으로 여기게 됐습니다. 존 밀하우스와 리버 페리스가 부인 친우회에 참가하여 그녀에 대하여 처리하고, 다음 모임에 그녀의 동향에 대하여 보고하기로 했습니다. (월밍론, 1778)
N.H.는 자기가 트럼프놀이를 한 것이 잘못이라는 편지를 보내왔으므로, 모 임은 그 편지를 받고 그에게 그 편지를 트럼프를 했던 그 장소에서 벤자민 프레드와 월리엄 할리데이 앞에서 읽으라고 했으며, 그의 교제하는 태도와 진리에 대한 성실성이 친우들을 좀더 만족하게 할 때까지 그는 사무모임에 오기를 중지하라고 했습니다. (뉴가든, 1725)
교만심을 눌러야 한다는 관심이 이 모임을 덮었습니다. 그것이 부인들이 철사 든 치마를 입는 데 얼마쯤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많은 친우들에게 걱정거리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의견이 우리 중에 아무도 그런 것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과 우리들의 목회자나 중견 되는 친우들이 회원들을 조사하여서 잘못이 있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말을 해줄 것과 그러한 철사 든 치마나 그밖에 적당치 못한 옷을 입는 사람을 제명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했습니다. (콩코드, 1739)
1695년과 1723년에 두 번 필라델피아 연회는 회원들에 대하여 점성술자, 요술쟁이, 그밖에 무슨 마술을 한다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경고를 내렸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믿었던 사람은 모두 잘못을 고백하라고 하였습니다. 조셉 월터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 말에 대하여 알려고 어떤 사람에게 갔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하지만 그가 어떤 나쁜 요술을 쓰기를 바라는 생각은 없었습니다.”(콩코드, 1738)
매우 이른 초창기부터 퀘이커 모임은 술을 너무 과도히 쓰거나, 혹은 그것을 만들고 파는 회원에 대하여는 매우 신속하게 처리했습니다. 다음의 질문서는 1755년부터 쓰였습니다.
친우들은 알콜분이 많은 주류를 너무 많이 사용하지 않도록, 술집과 오락장에 자주 드나들지 않도록, 생일 결혼식 장례식에서 진정으로 중용과 절제를 지키도록 힘쓰고 있습니까?
질문서는 점점 더 엄한 편으로 기울어갔습니다. ‘알콜분이 많은 주류’는 ‘모든 주류’로 변경됐습니다. 질문서에 ‘모든 주류’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1874년 필라델피아에서 모임의 정면에 앉은 늙은이들에 대해 일어난 젊은이들의 반항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조수아 베일리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은 마치 하원이 상원에 대해 반항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하원이 이겼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20 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와서야 그 질문은 절대 금주를 채용했습니다.
간소함에 대한 옛날의 가르침은 현재에는 한가와 휴양의 시간을 방해하는 지나친 활동을 줄이는 데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 절약을 위하여 만든 여러 가지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일반 생활을 분주하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어떤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지휘봉이 생활의 속도를 점점 높여가는 듯합니다. 해결은 모든 위대한 종교의 성자와 선각자들이 지적해준 것같이, 우리의 재주를 높이는데 있기보다는 우리 욕망을 낮추는 데, 말을 바꾸어 하면 간소함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