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변명과 논술
야래향
2009. 9. 10. 10:09댓글수0공감수0
공자가 겨울방학 중 수준별 보충학습을 할 때, 심화반 학생인 자로가 공자에게 질문을 했다.
“선생님, 귀신이 있습니까?”
“선생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공자는 잘난 척 수업을 하다가 제자의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고민을 했다. 사실 이 문제는 공자도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귀신이 있다고 말을 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죽음은 경험을 하는 순간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공자로서는 남의 죽음을 말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공자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 버렸다.
“자로야, 너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느냐?”
“너는 삶도 모르면서 어찌 죽음을 말하느냐?”
“미지생언지사(未知生焉知死)”
공자는 예수나 석가처럼 훌륭한 선생님이다. 그리고 우리 학교에 있는 선생님도 모두 훌륭하다. 우리 학교에 있는 선생님도 공자와 같은 수준별 보충수업을 하며, 제자의 질문에 답하기 어려우면 질문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그런데 제자가 질문을 했는데 잘 모르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수업 중에는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고,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며 화를 낼 수도 있고, 잘 모르겠다고 하고 나중에 가르쳐 준다고 할 수도 있고, 인터넷 지식검색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할 수도 있고, 학원에 가서 학원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할 수도 있고, 질문과 관계없는 어려운 말을 하여 학생을 헷갈리게 하면서 아는 척 할 수도 있고,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서 학생을 질책할 수도 있다.
공자는 질문의 방향을 바꾸면서 자로를 질책했다. 그리고 자로는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런데 속으로는 자신의 질문을 시원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선생님이 2% 부족하다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로는 청출어람(靑出於藍)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 공자 선생님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알 때까지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이렇게 자로는 2%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열공했을 것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공자도 제자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우리 학교에 있는 선생님들도 제자를 가르치면서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공자와 같다.
2007학년도부터 대학입시에서 통합논술이 중요해졌다. 그래서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모여서, 통합논술을 지도하기 위한 교수학습방법과 교수학습내용을 구안하고, 공동연구도 하고, 공동수업도 하고, 공동첨삭도 하였다. 그런데 항상 2% 부족한 느낌이 든다. 통합논술은 교과서를 통합하여 논술 문제를 만든 것이다. 윤리 교과서와 정치 교과서, 수학 교과서와 물리 교과서 등등에서 제시문을 추출하여 문항을 구성한 것이다. 그런데 국어를 가르치면서 논술수업을 하는 나는, 윤리와 정치와 경제와 사회문화와 지리와 화학과 생물 등등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공자와 같다. 그래서 제자들은 항상 2%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제자들이 스스로 2%를 채울 것을 기대한다. 아! 나는 진정 공자처럼 부족한 것인가? 공자처럼 부족하지만, 논술이 무엇인지 서울대 문제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문항 1】<제시문> 북소리 둥둥 울려/ 사람 목숨 재촉하네./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구나,/ 황천에는/ 주막 한 곳 없다 하니,/ 오늘 밤은/ 어느 집에 묵고 간담?(擊鼓催人命 回頭日欲斜 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
논제. 위의 시는 성삼문이 죽기 전에 쓴 절명시이다. 이 시에 나타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기술하시오.
<논제의 요구>
논제의 요구는, ‘이 시에 나타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기술하시오.’이다. 여기서 이 시에 나타난 것은(주제는),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세계’이며, 작가의 생각은(주제는),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세계’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삶과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 세계’를 정리해야 한다. 정리하고 정리(분석)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쓰면 아래와 같다.
<제시문 정리>
삶(이승) :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있고, 해와 주막과 집이 있는 곳
죽음(이승과 저승의 경계) :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하고
죽음 이후의 세계(저승) : 해가 진 상태, 밤, 주막과 묵을 집이 없는 곳, 황천
<정리한 내용을 중심으로 글을 쓰면>
삶은(이승은)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있고, 해가 있고, 주막이 있고, 집이 있는 곳이다.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있고’에서, 북소리는 질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리의 반복과 주기는 질서인 것이다. ‘해가 있고’에서, 해는 밝음, 임금, 질서, 절대적 가치의 의미를 지닌다. ‘주막이 있고’에서, 주막은 생동감이 있는 삶, 인간적인 삶의 공간의 의미를 지닌다. ‘집이 있는 곳’에서, 집은 안온한 공간, 쉴 수 있는 공간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삶은(이승은) 질서가 있고, 밝음이 있고, 임금이 있고, 절대적 가치가 있고, 생동감이 있는 삶이 있고, 편안하게 �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저승은) 해가 사라진 밤이며, 주막과 묵을 집이 없는 곳이며, 황천이다. ‘해가 사라진 밤’은 밝음, 질서, 임금이 사라진 세계,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세계의 의미를 지닌다. ‘주막과 묵을 집이 없는 곳’은 인간적인 삶과 안온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세계는(저승은) 삶(이승)이 없는 곳이다.
죽음은(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하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 하는 상황이다. ‘북소리가 목숨을 재촉하고’는 질서의 급변, 심장 박동과 관련이 된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해도 지려하고’에서 시적화자의 현재 위치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시적화자는 바라보는 사람이다.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현세적 삶이 없는 저승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유학자로 살았던 성삼문의 삶과 관계가 될 것이다.1) 삶을 긍정하면서도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 성삼문의 태도는 이런 점에서 생사초월적이다.
1) 공자는 제자인 子路가 죽음에 대하여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 (未知生 焉知死) !”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죽음까지 알려고 하느냐고 제자가 차근차근 공부하지 않고 덤벙대는 것을 꾸짖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며 타이르는 말씀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말에서 공자는 죽음보다 삶을 더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1(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p.21.
출처 : 달마의 세상읽기
글쓴이 : 달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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