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공자의 변명> 가운데서 발췌
---
‘빈이락 貧而樂’과 ‘부이호례 富而好禮’라는 두 방향의 정신적 성숙이 뒤따라야 진정한 행복이 온다는 것은 인간과 사회를 깊게 통찰한 탁월한 견해라고 생각한다.
빈이락 貧而樂은 공자 당시에도 가난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고
부득이한 가난이라면 정신적 가치를 즐기라는 말이지만,
물질위주의 소비문화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생태적 재앙으로 되는 현대에 와서는 다른 의미로 더욱 빛을 발한다.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도 있지만, ‘함께 가난하고 함께 살자’는 구호는 현대 인류와는 맞지 않아서 현실성이 없는 관념이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사회가 진정한 인간의 가치에 눈을 떠
물질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감소하는 것이 '빈이락(貧而樂)'의 현대적 살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영성, 생태적 가치, 자연과의 조화, 예술 등에 대해 눈을 뜨고 그러한 삶이 깊어질 때 ‘단순소박한 삶’은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삶이 되는 것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되는 사회 제도를 개혁하는 것은 말할 나위없는 정의의 목표다.
가난의 원인이 사회 제도에 기인하는데도 그것에서 눈을 돌려 정신을 개발하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자를 너무 심하게 왜곡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방향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그 자기 몫을 충족시키고 남은 것을 '나누고 풀어놓는 것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부이호례(富而好禮)'다.
여러 모순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인간의 물질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시스템으로 작동해 왔고, 그 면에서 진보적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물론 불평등과 양극화를 막기 위한 제도적 노력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부유층의 정신적 성숙이 세상을 한 단계 높이 도약시키는 주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토록 그리는 대동 세상은 부유한 사람들의 자산을 탈취(奪取)하는 것으로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자들이 자신의 부(富)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의무를 넘어 좋아하는 것으로 된다면, 어떻겠는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부유한데 따른 조세(租稅)를 저항 없이 오히려 자발적 환원에 가깝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부이호례’의 현대적 살림이 될 것이다.
기왕 나온 김에 한 발 더 나가보자.
계급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비난받았던 로버트 오웬을 현대에 소환해 본다.
그는 자본주의가 태생하면서 생겨난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적으로 자립하는 연대 조직으로 협동조합을 구상하고 실천했던 부자(富者)였다.
물론 여러 사정들로 그의 이상이 당시에는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었지만, 나는 계급투쟁에 의한 혁명로선이 결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해내지 못한다는 세계적 범위에서의 실험을 거친 지금 새롭게 조명되어야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상당한 규모를 갖춘 중견기업가들이 스스로 협동조합기업으로 전환하는 그런 부자(富者)들을 기대할 수 없는가?
그는 현대의 진정한 혁명가다.
단순소박한 삶을 즐기는 시민들과 연대와 협동으로 생산성을 내는 새로운 기업들이 만난다면 어떤 세상이 만들어질 것인가?
빈이락과 부이호례가 이렇게 만나는 나라라면 어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