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 승인 2019.04.14 00:23
- 수정 2021-01-07 14:50
- 댓글 0
나오는 말과 감정
무성적 존재로 여겨졌던
할머니의 속내
“내가 머 성적으로 머를 하자는 그런 욕심이 있어서 그러는 거는 아니야. 그냥 밤에 와서 내 침대에서 같이 자자는 거야. 그러면서 서로 정도 생기는 거잖아. 그런데 니네 아버지는 아주 독하고 인정머리가 없어. 그걸 안 들어주는 거야. 다른 걸로 잘 해주는 거는 그냥 가식이고 거짓이야.”
왜곡과 분노가 최고조를 들락거리던 시절, 어느 날 뜬금없이 차분해져서 큰딸인 나를 붙들고 한 말이다. 인지장애의 기미조차 없이 나름 일목요연하고 타당해보이지만, 저 주장의 핵심은 아흔을 넘은 남편이 방에 다른 여자를 들여 아이까지 낳았다는 거다. 밤마다 남편에게 핸드폰을 해대고, 받지 않으면 더 바글바글 속을 끓이다가, 찾아오는 남편이나 자식들에게 한 바탕씩 하는 거다. 아내에게 당분간은 핸드폰이 없는 게 낫겠다는 간호사와 자식들의 말을 듣지 않은 벌을 남편은 톡톡히 당하고 있는 거고, 귀 잡순 덕에 아버지가 밤잠이라도 푸욱 잘 거라는 게 자식들 생각에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각각 별도의 독립거주공간을 쓰다가 노쇠와 인지장애가 심해진 아내가 공동 캐어홈으로 옮긴 2018년 1월 1일 이후 새롭게 드러난 증상이다. 그 전까지 엄마의 집착과 인지장애에 의한 왜곡은 돈과 장남이었는데, 공동 캐어홈과 휠체어에 ‘갇히’고서는 남편에 대한 왜곡이 단연 최고가 되었다. 만 20세에 결혼해서 주생계부양자가 뒤바뀐 것에서 시작된 갈등이 심했던 부부가, 2012년 만 79세(남편 83세)에 실버타운으로 들어와 1, 2년 사이에 ‘세상에 없는 잉꼬부부’가 된 것이 불가사의였는데, 이제 또 헤까닥 뒤집어진 거고 물론 가끔 엎어지기도 했다. 과일과 간식을 챙겨 하루 세 번씩 아내를 찾아와 휠체어를 밀며 타운 마당을 산책하던 남편은, 다른 노인들과 직원들과 자식들과 때론 손주 며느리에 증손주 앞에서까지 난데없는 모욕을 당해야 했고, 끝까지 잘 견뎠다. 그런 아내를 이제 자기 방에 데려 갈 수 없는 것은 그로서는 최소한의 방어였고, 이를 아는 자식들은 “아버지 방에 가봐야겠다!”는 맹렬한 주장을 아버지 몰래 가끔 들어주면서 방을 싹 다 보여주곤 했고, 엄마가 확신하는 증거는 나올 리 없었다. 그러면 “니네들까지 다 한통속이 되서 나를 바보를 만든다.”고 했다.
그러다가 또 어느 날은 행복해져서, ‘니네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인품이 좋은 사람이’란다. 그 김에 설득이라는 걸 해보려고 그 억지를 들먹이면, “내가 언제 그랬냐? 나는 그렇게 교양 없이 막 되먹은 여자는 아니다, 한국남자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만, 나는 그런 거 가지고 남자를 못살게 구는 여자는 아니다. 양반집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다. 그 애와 증, 제 정신과 딴 정신 사이를 오르내리느라 우선 엄마가 가장 힘들었고, 남편과 자식들과 사위 며느리들 모두 괴로움을 넘어 때로 기가 찼고 민망했지만, 나로서는 한편 각별한 공부거리여서 몰래 흥미로웠다. 워낙에 열정적인 여성이었으니, 성애적 욕망 역시 비교적 많았을 수 있다. 다만 평생 남편을 미워하느라 드러나지 않았을 수 있고, 혹은 눌러 가둬놓았을 수 있다. 인지장애로 자타의 감시에서 자유로워진 채 나오는 말과 감정들은, 무성적 존재로만 여기지는 “할머니들의 성애”에 대해, 모처럼 사례 하나를 확보한 거다. 게다가 그녀는 일흔 끝에 2년 간 나와 구술생애사 작업을 한 내 엄마다. 이리저리 옆구리를 찌르며 끌어내려 했던 성애에 관한 내 질문에 대체로 입을 싹 씻었던 그녀가, 인생 막판에 와서 사실이든 투사된 방어기제든 말과 감정을 털어놓고 있는 거다. 거기에 무심결에 내게 말했거나 내가 보았던, 혹은 딸의 성을 단도리 하느라 했던 잔소리의 기억들을 끌어내 역추적해서, 그녀의 성애에 관한 경험과 인식과 표리부동함과 분열 등을 나름 정리해볼 수 있는 거다.
“쪼그만 기집애가 벌써!“ 여덟 살 즈음 이불 속에서 자위를 하다 들킨 내게, 눈을 흘기며 누구 들을 새라 속삭이듯 빠르게 뱉은 엄마의 잔소리가 그 시작이다. 그렇다면 엄마도 이미 자위의 꿀맛을 알았던 거다.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인지장애 할머니의 성애(2)
최현숙 구술생애사작가 승인 2019.06.04 07:45 수정 2021-01-05 07:37 댓글 0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인지장애든 울화든
자식들과 영감에 대한
분노와 의심과 왜곡과 생떼는
한편 당연하기도 했다.
혹은 늙어 죽어감의
가차 없음에 대한
한 생명의 마지막 절규였으리라.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 ⓒ이정실 사진기자
“이젠 당신하고 나하고 둘 밖에 없는 거야. 내가 누가 있어? 그런데 못 보게 하잖아. 당신이 아프다는 말만 하고, 저 못된 것이 데려다주지를 않는 거야. 죽더라도 나 보는 데서 죽어야할 거 아냐? 독감 옮으면 같이 죽으면 되지 머.”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 안기기라도 할 듯 엄마는 행복에 겨워 있었고, 여든여섯 아내의 손을 하염없이 매만지고 있는 아흔의 남편은 벌써 울음이 삐져나오고 있다.
인지장애증과 집착이 뒤엉켜 영감을 의심하며 모욕과 망신을 주는 아내를 다시 만난 것은 2주 만이었다. 그 2주를 두 양반 다 한 달이 넘었다고 우겼다. 아버지가 독감에 걸려 엄마한테 옮길까봐 당분간은 못 오신다는 핑계를 꾸며 자식들과 아버지와 직원들까지 입을 맞췄던 건데, 영감을 만나야겠다는 아내의 막무가내에 영감도 돌변을 한 거다. ‘다른 여자’랑 ‘애기’는 다 까먹은 듯 당장 뒤집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 예순 둘의 못 된 딸년은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제 너그 아버지 안 모실란다’며 별도 공간을 사용하겠다는 게 2012년 실버타운 입주 때 엄마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나는 몰래 반가웠다. 여든 나이에 마침내 ‘자기만의 방’을 갖겠구나 싶었다. 6.25 중이던 십대 말 좌익운동 여성부장의 짧은 경험은 ‘한 때 불장난’으로 후다닥 묻어버렸지만, 성차별에 대한 감수성은 지워질 수 없었을 거다. 1953년 휴전 직전 혼인해서 농촌봉건사회를 떠나 서울로 이주 후 다섯 자식을 키우며, 돈은 안 벌고 권위적이기만 한 서방을 무지 미워하면서 주생계부양자로 맹렬하게 살았다. 남편의 실버타운 보증금 2억 여 원을 선뜻 지불할 경제적 여유가 있었지만 ‘자기만의 방’은 언감생심이었다. 결혼생활 60년 만에 이혼이나 별거에 대해, 그것도 서방이나 두 아들은 빼고 세 딸들한테만, 말만 무성했지 실천은 불가능한 나름 양반이었다. 그렇다면 실버타운 같은 층 30미터 거리의 개별공간이 너무 늦었지만 합의 가능한 대안이겠다 싶었다. 의식주를 위한 노동을 제공받은 돈 덕, 피차의 ‘자기만의 방’,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져주기 등으로, 2014년경부터 둘은 원앙 같은 부부가 되었는데, 그 때부터 엄마는 알츠하이머 성 예쁜 인지장애가 시작되어 심지어 서방에게 애교와 ‘어린양’까지 부렸다.
2015년 부산 가족여행에서 두 분 방문을 열었던 나는, “좋습니다!”만 민망하게 소곤대며 얼른 닫고 나왔다. 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아내의 팬티를 갈아입히던 서방이, 아내의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며 둘이 좋아하고 있었다. 귀 잡순 할배도 인지장애인 할매도, 딸의 노크 소리나 ‘좋습니다!‘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즈음 이미 영감은 아침식사를 위한 외출을 위해 이른 아침마다 아내에게 와서 샤워를 시켜주었고, 그 때마다 이 영감 마나님은 여러 놀이를 즐겼을 거다. 나는 방문 때마다 1박을 하며 엄마와 함께 긴 목욕을 했는데, 그 때마다 엄마는 내 늘어진 젖을 우스워하며 자신의 볼록한 젖과 뽀얀 피부를 자랑하곤 했다. 엄마가 독립생활이 힘들어져 공동 케어홈으로 옮겨야 했던 건 2017년부터였는데, 엄마도 엄마지만 아버지가 마다해서 따로 간병인까지 들이며 독립 공간 사용을 늘렸다. 그렇게 알콩달콩 하다말고 결국 2018년 1월 1일 공동 케어홈으로 갈 수 밖에 없었으니, 인지장애든 울화든 자식들과 영감에 대한 분노와 의심과 왜곡과 생떼는 한편 당연하기도 했다. 혹은 늙어 죽어감의 가차 없음에 대한 한 생명의 마지막 절규였으리라.
항상 아등바등 하는 엄마로만 생각했는데, 장례식에 쓸 영상을 준비하느라 뒤져본 앨범에는 화사한 생애 장면들이 챙겨져 있었다. 죽음 직전까지도 늘 주머니에 빗을 넣고 다니며 아내의 백발을 빗겨주던 영감은, 아내만 먼저 들어간 가족 납골묘에 그 빗을 넣어주었다. 대체 자식은 부모를 얼마나 아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