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로 살자’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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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06
‘붓다로 살자’에 대한 비판
2015년 2월 10일 허정
불교는 진리와 진리를 보는 방법을 설명한다. 붓다의 유언인 법등명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기 위해서는 경전의 언어를 잘 이해해야 한다. 모든 경전은 부처님과 제자들의 대화로 채워져 있기에 불교는 ‘대화의 종교’라 일컬어진다. 대화의 종교는 정확한 언어 사용이 매우 중요한데 제가 알기로는 조계종 안에서 정확한 언어 사용을 가장 강조하시는 분이 도법스님이시다. 저는 실상사 화엄학림에서 도법스님과 많은 토론을 통하여 언어사용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는데 송구스럽게도 지금은 제가 도법스님의 언어사용을 지적하게 되었다. 이것은 지난날 도법스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먼저 토론을 하기전에 토론에 사용하는 ‘용어’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도법스님이 사용하는 ‘붓다’의 의미가 속담에서 나타나는 착함, 양심에서부터 이타심, 깨어있음,일념등과 4향4과라고 부르는 성인의 지위까지를 포함하고 또한 계정혜 삼학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광범위한 붓다의 의미는 정리될 필요가 있다. 이제 ‘붓다로 살자’에 대한 문제점을 몇가지 짚어보자.
첫째 ‘붓다로 살자’는 ‘일체중생실유불성’ ‘천상천하유아독존’ 그리고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추고 있구나. 다만 어리석고 미혹해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奇裁奇裁 此諸衆生 云何具有如來智慧 愚癡迷惑 不知不見)’라는 대소승 경구(經句)를 기반으로 한다. 이 경구들은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는 원리와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법스님은 ‘본래부처’이기 때문에 특별한 수행을 통해 다시 붓다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고 ‘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고 한다. 나아가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듯 본래 붓다인 우리가 붓다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우리가 이미 붓다라면 우리는 저절로 붓다의 말과 행위를 하게 될 것인데 왜 그렇치 못하고 다시 죽을 힘을 다해서 노력해야 하는가? 또한 구체적으로 무엇이 부처의 생각이며, 어떻게 말하는 것이 부처의 말이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부처의 행위인가?
또 누가 그것들을 규정하는가?
둘째 도법스님은 자신의 생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로 소중하고 그것이 부처라고 말한다.(2014,8,조계사법문) 상윳따니까야에서 말리까왕비와 빠세나디왕은 무엇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인가를 이야기하다 서로가 ‘나에게는 나 자신보다 더 사랑스러운 다른 사람은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부처님도 이 말씀에 동의하며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는다. “마음이 어떠한 곳으로 돌아다니더라도 자기보다 더 사랑스러운 것을 찾지 못하듯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사랑스러우니 자기 자신을 위해 남을 해치지 말라” 부처님은 인간의 이기심과 생존본능을 인정하되 그 욕망을 돌아보아 상대방에게 자비심을 내라고 가르치는 반면 도법스님은 자기 자신이 최고로 소중하므로 자신이 붓다라고 말한다. 불교는 목숨이 아무리 소중하다해도 그것에 집착을 하면 괴로움이라고 가르치고 진리를 모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진리를 알고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고 가르친다. 부처란 생사에 집착이 없는 분이지 목숨을 최고로 여기는 분이 아니다. 목숨이 부처라는 말은 불교가 죽음을 미워하고 삶만을 원하는 욕망의 종교, 세속적인 종교로 오해하게 만드는 비불교적인 발상이다.
셋째 도법스님은 내 인생을 내가 주체적으로 살 수 있기에 부처라고 말한다. 이른바 일체유심조, 자업자득의 근거인 ‘자유의지’를 부처라고 말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졌기에 착한일도 하지만 나쁜 일도 한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부처라면 착한부처와 나쁜부처를 인정하는 것이고 살생하고 도둑질하는 것도 자유의지이므로 살생하는 붓다. 도둑질하는 붓다를 인정하는 꼴이다. 또 생각이란 것은 본인의 의지없이 문득 나기도 하는 것인데 시시때때로 떠오르는 생각들 중에는 붓다의 생각이라고 부르기에 부끄러운 것들이 많다. 그때마다 우리는 번뇌하는 붓다, 우울한 붓다가 될 것이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살 수 있기에 부처라는 발상도 비불교적이다.
넷째 불교가 탁월한 점은 어떤 믿음이나 전제조건 없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 것으로 시작할 필요가 전혀 없다. 불교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사는가’를 문제 삼는 사람들의 것이다. 가르침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면 실천하여 보아서 자신에게 이득이 되면 받아들이면 된다. 불교는 인간에게 생겨나는 ‘괴로움이 무엇이고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이고 괴로움의 소멸시키는 길은 무엇인지’를 현실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하는 즉문즉설의 종교이다. 일반인들에게 ‘붓다로 살자’며 ‘붓다’라는 용어를 들이대는 것은 전제 조건없는 가르침을 협소한 종파의 울타리에 가두는 것이며 ‘불성’에 대한 믿음이나 ‘본래부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와서 보라’고 가르친 부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다. 또한 비불자들에게 ‘붓다로 살자’는 ‘예수를 믿으라’는 말처럼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다. 우리가 익히 알듯이 전제조건을 달고 믿음을 강조하는 종교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거나 그 공포로 거래를 하게 된다.
결론 및 요구사항:
1.지금 당장 ‘붓다로 살자’라는 말은 교리적으로 모순이 있으니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여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 혹은 ‘보살로 살자’라는 운동으로 전환하거나 ‘맑고 향기롭게’ ‘내 탓이오’처럼 불교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운동으로 나아가자
2. 믿음의 불교대신에 전제조건 없는 불교, ‘와서 보라’는 불교, 이해의 불교를 하는 것이 현대인들에게 적합하다.
3. 도법스님의 ‘붓다로 살자’와 무비스님의 ‘인불사상’은 꼭 ‘사람이 부처’이기 때문에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가장 소중한 것이 목숨이므로 목숨이 부처라고 설명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 또한 ‘사람이 부처’이기에 불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서 탁월한 것도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오히려 인간 각자가 이기적이고 생존본능이 있기에 타인의 생명을 존중하게 되는 것이다.
4. 본래부처와 불성사상은 싯다르타가 몸소 보여 주신 깨달음(탐진치소멸), 전제 조건없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구체적인 가르침(사성제),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8정도)을 제시하는 불교와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