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정호 작가 |
A :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동물·사물도 정치적·능동적 행위자
(26) 제인 베넷(Jane Bennett, 1957~)
토양 質 높이는 배추벌레 행위 인간의 경로 바꿀 능동성 가져 네트워크서 만날 때 더 큰 효과
온난화 · 코로나19 확산 문제 전통적 인식론으론 해결 못해 물질을 동등 주체로 인정해야 인간도 생동적 물질성과 결합 새로운 생태적 정치 행위 가능
| ▲ 김종미 코번트리대 문화미디어학과 부교수 | 북아메리카의 오대호에 속하는 이리호는 현재 심각하게 오염된 상태다. 주변 농가와 하수 처리 시설로부터 막대한 양의 폐수와 화학 비료 성분이 유입되면서 녹조를 비롯한 독성 물질이 넘쳐나게 됐다. 더 이상 식수를 공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2018년 오하이오주 털리도 시의회는 이리호가 인간처럼 ‘생존하고 번성하고 자연적으로 진화할 권리’가 있는 주체임을 선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인간에게만 법적 권리가 있다는 전통적 시각을 깨뜨리는 엄청난 정치적 사건이었다. 한편 최근 ‘가디언’에는 고색창연한 나무 사진 한 장과 함께 ‘나무도 인간과 같은 권리를 가져야 하는가?’라는 기사가 실렸다. 자연과 사물이 인간과 같은 권리를 가질 수 있다니? 만약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과 물질을 정복해야 할 타자나 수동적 대상으로 보지 않고 어엿한 법적·정치적 주체로 인정한다면 세상은 지금에 비해 어떻게 달라질까?
◇자연과 물질도 적극적·능동적 주체
미국의 정치 철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제인 베넷은 자연, 윤리, 정동에 초점을 둔 연구를 통해 자연과 물질도 인간처럼 세계의 변화에 활발하게 반응하는 적극적·능동적 주체라는 점에 주목한다. 베넷의 새로운 사고는 지금까지 인간 중심의 사고에 집중돼 있던 정치 이론, 철학, 인류학, 사회학에 많은 파장을 일으켰으며 사고의 전환을 주도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은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자연과 물질은 인간의 행위에 수동적으로 임하는 대상, 인간은 언어로 표현하고 자연은 말이 없는 객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뉜 채 분석됐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2000년간 이어져 온 인간/사물, 사회/자연, 주체/객체라는 이른바 ‘대분할(Great Divide)’의 벽을 허물려 한다는 점에서 베넷의 도전은 급진적으로 보인다. 오늘날 일어나는 급속한 기술 발전에 둘러싸여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인간을 특권적 존재로 상정하는 정치 철학만으로는 변화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베넷은 환경 운동을 포함해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어떤 정치 이론도 자연과 사물 같은 비인간 행위자가 모든 사건에 얼마나 능동적으로 관여하는지를 이해할 때 정치적 행위와 역할을 비로소 제대로 성찰할 수 있다고 꼬집는다.
베넷은 브뤼노 라투르, 질 들뢰즈, 바뤼흐 스피노자, 마누엘 데란다, 엘리자베스 그로스, 브라이언 마수미 등의 영향을 받아 인간뿐 아니라 자연과 물질도 정치적 경로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연과 물질도 활발하고 능동적으로 행위하며 변화를 위한 응집력 또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베넷은 라투르가 제시한 ‘행위소(actant)’ 개념을 본격적으로 확장한다. 지금까지 인간은 자신들만이 의지와 목적을 갖고 주변에 존재하는 환경, 사물, 비인간 생명체들을 동원하고 이용해 효과적인 결과를 성취한다고 생각했다. 라투르의 경우, 사물의 행위성은 인간과 비인간의 결합에 의한 네트워크 안에서 비로소 발휘된다고 봤다. 하지만 베넷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인간 행위자들에는 그 자체로 잠재적 행위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마당 한구석에 조그만 텃밭을 만들어 작물을 생산한다고 생각해보자.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배추벌레는 흙을 갈아엎고 작물의 잎사귀를 뜯어먹어 토양의 질을 풍부하게 한다. 이렇듯 비인간 행위자의 적극적 행위에는 인간 행위의 경로를 바꿀 수 있는 능동성이 있다. 인간과 배추벌레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네트워크에서 만날 때 더 극적인 효과를 보여줄 수 있다. 인간만을 행위자로 여기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네트워크 안에서는 인간이나 배추벌레나 모두 동등한 행위소로서 만나며 효과를 낳는다.
◇군중은 인간-자연-사물의 집합체
베넷이 제기한 새로운 생기론(vitalism)적 접근법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과 사물이 서로 만들어내는 다양한 환경론적 감수성, 즉 정동성에 있다. 전통적 이분법과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정치적 행동으로 이어지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베넷은 수직적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인간과 사물 및 자연의 관계를 수평적 관계로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행동은 집합적 행동이다. 고전적 정치의 주체는 목적성과 의도성을 가진 인간의 집합, 즉 대중이었다. 하지만 자연을 포함한 사물에도 그와 같은 행위성이 있다면 인간과 결합하는 방식에 따라 정치적 군중 집합체가 될 수도 있다. 이른바 공적 삶이란 매 순간 인간과 사물의 다양한 결합 방식에 따라 다르게 생성돼 효과를 일으킨다.
어떤 관계망에서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행위자의 결합은 그 자체로 곧 주체가 된다. 인간은 통치권자도, 자율적 주체도 아니며 다만 능동적인 몸과 사물들의 복잡한 관계망들로 구성된다. 또한 인간은 그와 같은 결합 과정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수정된다. 결국 모든 사물은 역동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채 서로 ‘정동(affect)’한다. 베넷이 제시하는 새로운 생기론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이 연결망에 얽혀 있는 수많은 행위자 중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베넷의 생기론에서는 능동적 인간 주체와 수동적 대상을 구분했을 때 필요로 하는 사회적 배경, 정치성, 환경, 맥락 등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 인간은 매 순간 사물과 네트워크로 결합해 효과를 일으킬 뿐이다. 비인간을 포함한 군중은 일종의 인간-자연-사물의 집합체다. 이는 “아주 작고 단순하고 미세한 몸일지라도 활기찬 힘으로 표현되고 연결되며 행위소들은 결코 외로이 혼자서 행위하지 않는다.” 베넷이 말하는 정치 생태학은 바로 인간과 사물이 결합된 집합체가 만드는 정치적 행동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베넷의 정치적 생태학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물질의 집합 행위는 일상생활의 측면에서 어떠한 함의가 있는가? 인간의 문화가 자연/물질과 뒤얽혀 활기차게 반응한 결과라면 인간의 의도 또한 거대한 비인간 행위자인 환경을 통해서 완성될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 개인 또는 배타적 인간 집단이 아니라 어떤 문제를 둘러싼 인간-사물이 결합한 덩어리가 민주주의의 기본 단위가 돼야 한다. 어떤 물질도 홀로 행위하지 않는다. 모든 행위는 항상 변화하며 그 행위는 애초부터 합법적이거나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다. 베넷이 보기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 동물, 사물도 정치적·능동적 행위자다. 결국 행위란 떼를 지어 살아 움직이는 무리의 생동하는 반응이다. 행위에 반드시 언어로 구성된 목적이나 계획이 있지는 않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개인이 혼자서는 결정할 수 없으며 한발 앞서 결과를 예상할 수도 없다. 이들의 행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이미 관계 과정에서 반응하거나 진행 중인 움직임이다. 그래서 모든 것은 생동한다.
베넷의 급진적 주장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운동에 어떤 함의가 있을까? 베넷이 제안하는 대안적 정치 이론은 ‘정치 생태학’이다. 문제는 복잡한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강화되고 사라지고 상호작용한다.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구 온난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단순히 인간의 우월성에 기반한 전통적 인식론적 문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이 결정해 놓은 비인간 행위자의 속성에 근거해서는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베넷에 따르면, 물질을 인간과 동등한 정치적·법적 주체로 인정할 때 인간은 이들 물질에 내재하는 생동적 물질성과 결합할 수 있다. 비인간 행위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힘을 생성해 정치적 흐름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작동하고, 인간이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좌우하는 정치적 행위에서 벗어나 인간, 비인간, 환경이 결합하는 새로운 생태적 정치 행위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김종미 코번트리대 문화미디어학과 부교수 공동기획 : 이감문해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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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인 베넷
분야 : 정치 철학, 생태 철학, 페미니즘 사상 : 신유물론, 생기적 물질론 주요 활동·사건 : 학술지 ‘정치 이론’ 편집인 활동(2012~2017), 학술지 ‘이론과 사건’ 공동 창간
신유물론에 근거해 사고하는 정치 이론가로 생태 철학, 예술과 정치, 정치적 수사학, 미국 정치사상, 동시대 사회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존스홉킨스대 정치학과 학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1979년 시에나대에서 정치 철학 학사 학위를 받고 코넬대에서 환경 과학을 전공하는 등 환경 연구와 정치 철학 분야에서 학문적 이력을 시작했다. 시에나대 재학 시절, 정치 철학자이자 여성학자인 캐시 퍼거슨을 만나 그에게 학문적·이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매사추세츠대 정치학 박사 과정에 진학해 1986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대 국제문화기술연구·미디어철학대학, 옥스퍼드대 키블대학, 런던대 버벡인문학연구소, 호주국립대에서 연구원 생활을 했다. 2013년에는 코넬대 비평·이론학부 학장을 지냈다.
초기 저서로 ‘무모한 신념과 계몽’(1987), ‘소로의 자연’(1994), ‘현대적 삶의 매혹’(2001)이 있다.
2010년 발표한 대표작 ‘생기론적 물질’은 환경과 신유물론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킨 책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환경 정치학적 생기론을 제시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최근에는 월트 휘트먼의 시에 나타난 정치적 함의에 주목하고 있으며, 2020년 5월에 출간할 신작 ‘유입과 유출’에서 해당 주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할 예정이다. ‘유입과 유출’은 생기론의 맥락에서 물질이라는 행위 주체가 어떻게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정치적 변화를 이끄는지를 탐구한 후속 연구로 알려져 있다.
▶‘21세기 사상의 최전선’ 연재가 26번째 제인 베넷 편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연재에 참여한 김환석(국민대 사회학과 교수), 임소연(숙명여대 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연구교수), 정찬철(한국외대 미네르바교양대학 교수) 등 세 연구자의 마무리 좌담이 오는 10일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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