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6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 마음건강‘길’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 마음건강‘길’

'마음 디톡스' 콘퍼런스 특강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화쟁적 태도로 여러 개의 '옳음'을 인정해야 공존 가능"

글 명지예 기자  2019-07-26URL페이스북트위터카카오톡글자 크게글자 작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불화를 겪기도 한다. 골치 아픈 언쟁을 피하기 위해 대화를 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태도는 갈등과 분열만 일으킬 뿐, 진정한 문제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타인과의 공존이 불가피한 사회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조성택 교수, '마음 디톡스 - 가족의 재발견' 콘퍼런스 특강

조선뉴스프레스 '마음건강 길'이 24일 개최한 <마음 디톡스, 가족의 재발견> 콘퍼런스에서 조성택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조 교수는 '화쟁과 경청의 가족문화'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차이를 분명히 이해할 때 비로소 공존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문학 작품, 영화, 책 등을 사례로 들며 갈등이 끊이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로 '화쟁'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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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조성택 교수의 강연 요약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나 공론의 과정은 없고 늘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논쟁만 있다. 오늘 여러분에게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보자"고 제안하고 싶다. 한국 안에서 한국 문제만 생각해서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 알 수 없다. 서울광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도 서로 다른 집단들이 양분해서 싸우고 있다. 지도 밖에서 지도를 보기 위해 120년 전 한국을 방문했던 한 외국인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비숍이 본 한국인, 국경 밖과 안의 모습이 달랐다

1831년에 태어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인이다. 이분은 영국 왕실의 친척으로,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한국에는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총 네 번 방문했다. 청일전쟁부터 아관파천이 있었던 시기로, 한국이 아주 혼란했던 때다. 그는 한국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했고,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제목으로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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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숍은 한국 국경 안과 밖에서 만난 한국인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호기심을 갖는다. 특히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한국인들에게선 국경 안의 한국인에게서 본 ‘풀죽은 모습’ 대신 ‘주체성과 독립심’을 발견한다. 그는 한국인이 정직한 정부를 만난다면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비숍이 당시 우려했던 대로 그 이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현대사의 아픔을 겪은 후 한국은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정치적 발전,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가 현 시점에서 봤을 때 과연 우리의 성공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가족끼리의 우애가 어떤 나라보다 긴밀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큰 연봉을 포기한 미국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을 받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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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어 폭력, 정신적 폭력이 난무하는 적대적 관계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것은 개인의 수양과 집안의 문제, 사회의 문제가 하나로 관통된다는 것이지 나와 우리 가족이 잘된다고 우리 사회가 잘된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나와 가족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를 별개로 생각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언어폭력과 정신적 폭력이 만연해 있다. 지금은 서로가 경쟁적 관계가 아니라 적대적 관계로 있는 것이다. 태극기는 촛불을, 촛불은 태극기를 혐오한다. ‘한 쪽을 없애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사회에 살고 있다.

미국에서 15년 동안 유학을 하면서 아이를 키웠다. 미국 학부형들도 많이 만났다. 그 때 느낀 것은 미국의 개인들은 그다지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미국 교육 자체도 도덕을 강조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 교육은 도덕적인 인간을 강조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개개인 면모를 보면 어떤 나라보다도 개인적 도덕성은 뛰어나다. 그러나 이런 도덕적 인간들이 모여 사회는 대단히 비도덕적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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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한 학회에 다녀왔다. 주제는 ‘무엇이 좋은 삶인가?’였다. 그곳에 모인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결론은 “좋은 사회 없이 좋은 삶은 불가능하다"였다.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는 현재 80%가 대졸인 세계적인 고학력 사회에 살고 있지만 사회 전체는 몰지성적이다. 4대강 댐을 부수냐 마느냐에 대한 문제에서 무엇이 우리 사회에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 없다. 그저 부수자, 말자 두 문제만 갖고 이야기한다. 사회 전체를 위한 공적 논의도 없이 양자택일 속에서만 머문다.

버락 오바마의 현답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는 지 물어야 한다" 

2007년에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그가 무슬림인지, 미국인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기자들은 그에게 “이라크 전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물었다. 그때 오바마의 답변은 “이라크 전을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모두 미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이라고 답한다. 기자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렇다면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할 때 하나님이 미국 편인가"라고 묻는다. 어려운 질문에 오바마는 “질문이 틀렸다. 내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대답한다. 대단히 훌륭한 답변이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에 의해 어떤 것이 옳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진정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늘 모색하고 다른 사람과 토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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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란 사건의 일면이 아닌 전면을 보는 능력이다. 확신과 확실함은 다르다. 나의 확신은 내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하느냐에 대해서는 유보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대화를 할 때 ‘자비의 원칙’을 지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내 공간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는 태도다. 나와 다른 주장을 가진 사람의 말도 ‘옳다’고 생각하고 듣는 것이다. ‘왜 옳을까?’ 생각하며 진지하게 들어야 한다.

플라톤 "대화로 내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 진정한 대화"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 나의 확신이 흔들리는 경험을 해야만 진정한 대화"라고 말했다. 타인과의 대화로 내 확신이 흔들리고, 고민하면서 나의 지평이 넓어진다. 자신만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견고한 생각의 성에서 나와야 한다. 나도 자식과 이야기하다보면 처음엔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너지고 내 확신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럼으로써 나의 삶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참여 다원주의다. 나와 다른 삶에 대해 “너는 너 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산다"는 똘레랑스(관용)적 태도와 다르다. 끊임없이 서로 묻고 답하며 차이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생각이 다르면 삶도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왜 다른지, 어떻게 다른지는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적대적인 대립 대신 경쟁적 대립의 태도다. 진지한 질문과 대답으로 차이를 이해하는 과정이 바로 화쟁이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되, 평화롭게 다투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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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쇼몽>(1950)
한 사건을 똑같이 겪고도 각자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개의 진실이 있다. 영화 <라쇼몽>은 이것을 극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는 사무라이, 사무라이의 부인, 산적, 나무꾼이 등장한다. 산적은 사무라이를 죽이고 그 부인을 겁탈한다. 나무꾼은 이 사건을 목격한다. 영화는 이것을 4명의 등장인물의 시선에서 각각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누가 범인인지 모를 정도다. 누구 한 명이 거짓말을 해서가 아니라, 한 사실에 대해 복수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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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2010)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것은 늘 옳음과 옳음의 충돌이다.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가 그른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10만부가 넘게 팔린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사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묻는 책이다. 책의 핵심 ‘선(善)과 선 사이에서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이다. 각 언론이 자신이 정론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도 정론이라고 할 수 없다. 정론은 독자의 독서 능력, 즉 모색해가는 과정에 있다. 그렇게 고민해 가는 과정이 바로 대화의 과정이고, 옳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복수의 옮음을 인정하는 사례로 독일의 보이텔스바허 협약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만들면서 보수와 진보 간의 갈등이 있었다. 이들은 협의를 통해 교과서를 만들 때 ‘논쟁적인 주제는 논쟁적으로 남겨둔다’는 원칙을 만든다. 관용과 개방성으로 학생들이 정론을 찾아가게끔 길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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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지하게 듣는' 경청

화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허점을 발견하려고 듣는 것은 ‘매복형 경청’이지 진정한 경청이 아니다. 진지한 대화란 4살짜리 아이가 그림을 그려왔을 때 그 그림에 대해 아이에게 이것 저것 질문하고 진심어린 칭찬을 하는 것이다. 아이에게까지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사회의 품격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에게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더라도 나는 그렇게 대접해주는 것, 그것이 사회의 발전을 이끈다.

결론적으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쟁적 성찰이다. 이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정의감이 아닌 ‘많은 옮음’들이 공존할 수 있고 서로의 ‘옮음’이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보는 ‘개시개비’의 관점이다. 화쟁적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정의의 실현은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어느 한쪽 ‘진영의 승리’일 뿐이며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예고편일 뿐이다. 가족 구성원의 경험은 각자 다르며, 그른 것 없이 모두가 옳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대화를 통해 내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