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2

제4부 - 라마나스라맘 시절의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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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 라마나스라맘 시절의 이야기 1


50. 인지꼴라이 딕쉬따르의 장난



인지꼴라이 야그나라마 딕쉬따르는 첸나이(마드라스)에 있던 대(大)학자인 자가디샤 샤스뜨리의 형이었다. 그는 스깐다스라맘에 와서 두세 달씩 머무르곤 했다. 그는 아주 정통주의적인 사람이어서, 매일 자신의 도띠(dhoti)를 빨곤 했다.



그의 도띠는 약간 누른빛이 돌기는 했지만, 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는 찢어진 도띠를 가지고 타월을 만들기도 했다. 스리 바가반은 그것을 보다가 농담하듯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도 타월 하나 가질 수 있소?”



초기에는 시바야라는 이름의 한 안드라(Andhra-안드라프라데시 주) 헌신자가 비루팍샤 산굴에 계시던 스리 바가반을 찾아뵈러 오곤 했다. 그는 염송을 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길 위에 나뭇가지나 잎사귀가 있으면 그것을 치워서 길을 깨끗하게 했다.



그는 아쉬람으로 보내는 음식이 담긴 에짬말의 그릇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는 항상 아쉬람을 위해 뭔가 봉사를 하고 있었다. 한 번은 스리 바가반과 몇 사람이 산 정상에 올라갔는데, 그는 물 한 단지를 거기까지 들고 갔다. 봉사에 대한 그의 열의가 그 정도였다.



그가 스리 바가반을 마지막으로 뵈러 왔을 때, 야그나라마 딕쉬따르도 아쉬람에 있었다. 시바야는 자신이 출가하여 묵언을 하면서 남부 지방을 순례하기로 했다면서 까비야깐타에게 자신의 가문, 종성(種姓, gothra)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해서 출가했는지를 간단히 써달라고 청했다. 그러면 필요할 경우에 자기가 말을 하지 않고도 그 정보를 써먹을 수 있을 거라는 거였다.



까비야깐타는 시바야를 칭찬하는 내용의 시구 10연을 써주었다. 그 시구를 쓴 종이 뒷면에다 인지꼴라이 딕쉬따르가 연필을 가지고 타밀어로 이렇게 썼다. “여기에 씌어진 것은 모두 사실과 다르다.” 시바야는 타밀어를 몰랐다.



그는 남부 지방의 몇 군데를 들러 꿈바꼬남의 샹까라 정사(Sankara mutt)로 갔다. 그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그 종이를 보여주자, 그들이 그것을 읽어본 뒤에 웃었다. 그가 왜 웃느냐고 물어보자 그들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깊은 슬픔에 잠긴 그는 아쉬람으로 편지를 보냈다.



스리 바가반이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우리에게 물으셨다. “누가 이걸 썼지?” 당신은 인지꼴라이 딕쉬따르도 쳐다보셨다. 그러자 그가 즉시 말했다. “제가 썼습니다. 왜냐하면 까비야깐타가 그에 관해서 쓰신 것이 사실과 다르니까요.” 스리 바가반은 미소를 짓고 침묵을 지키셨다.



51. 묵언 요기의 초능력



나중에 시바야는 꾸뜨랄람(Coutrallam)의 묵언 스와미로 유명해졌고, 많은 정사들을 관장했다. 그는 꾸뜨랄람에서 살았다. 한 번은 에짬말과 바수데바 샤스뜨리가 그를 찾아갔다. 그때 묵언 스와미는 마두라이 미나끄쉬 사원(Meenakshi temple)의 꿈꿈(kumkum-朱砂, 붉은 분말)을 불가사의하게 자기 손바닥에 나타나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종이 위에 “당신의 스와미도 생각하는 뭐든지 나타나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썼다. 바수데바 샤스뜨리가 말했다. “아닙니다, 스와미.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스와미가 말했다. “불가능할 게 뭐가 있습니까?”



샤스뜨리가 말했다. “우리 바가반께는 ‘생각’ 같은 것이 아예 없습니다. 생각을 하지도 않고 생각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스리 바가반의 상태는 생각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을 넘어선 순수한 자각입니다.” 모두가 웃었다. 마우니스와미는 망신을 당했다고 느꼈다.



52. 타타 렛디아르의 예언



스리 바가반이 구루무르땀에 계실 때, 아쭈따다샤가 당신을 뵈러 왔다. 그와 함께 아짜라빠깜 끄리슈나 렛디아르가 왔다. 몇 년 뒤에 그는 아쉬람에 정착했다. 우리는 그를 타타 렛디아르라고 불렀다. 그는 아주 건강했고, 늘 명상을 하곤 했다. 그는 점성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그는 두세 달 동안 스리 바가반과 함께 머물렀는데, 그 사이에 꽃을 좀 가꾸었다. 그는 몇 가지 방식으로 스리 바가반께 봉사했다.



한 번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기가 아쉬람으로 돌아오면 1주일 안에 죽을 거라고 말했다. 그는 노령임에도 정정했고 (돌아와서도) 어떤 변화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 주일의 마지막 날, 그는 열이 좀 있었다. 우리는 스리 바가반께 그것을 말씀드렸다.



당신이 말씀하셨다. “그는 대단한 점성가지. 자신의 최후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고 아루나찰라와 합일되려고 온 거야.”



렛디아르는 그날 밤 내내 같은 상태였고, 아쉬람 안의 초가 움막 안에 있었다. 스리 바가반은 저녁 식사를 하신 뒤에 그를 보러 가서 그의 곁에 앉으셨다. B.V. 나라싱하스와미도 헌가를 부르면서 거기 있었다. 10시경에 우리는 스리 바가반과 나라싱하스와미에게, 우리가 렛디아르를 보살필 테니 가서 쉬시라고 말씀드렸다.



라마끄리슈나스와미와 내가 거기 있었다. 새벽 4시경에 타타 렛디아르의 영혼은 아루나찰라와 합일되었다. 스리 바가반께 이 사실을 알려드리자 당신은 우리에게 오전 8시까지 매장 준비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는 그렇게 했다.



끄리슈나 렛디아르의 친척들에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그의 조카인 시바라마 렛디아르가 아쉬람으로 왔다. 그는 아쉬람에서 며칠을 보낸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도 그는 아쉬람에 자주 오더니 마침내 아쉬람에서 정주했고, 15년간 아쉬람의 서점을 맡아 보다가 죽었다.



53. 탁발 나가는 일의 큰 가치



스리 바가반은 탁발(bhiksha)을 나가는 것은 좋은 수행이며, 우리의 에고와 육체 의식을 없애줄 것이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라마끄리슈나스와미는 탁발로 살아가고 싶어 했다. 그는 스리 바가반의 허락을 얻어 비루팍샤 산굴에서 살았다. 그는 읍내로 내려가 거리에서 “탁발이오, 탁발이오!” 하고 외치곤 했다. 그러면 어떤 개구쟁이들은 그가 행상인인줄 알고 탁발은 얼마냐고 하면서 놀려댔다.



스리 바가반은 이틀을 연속해서 같은 거리로 탁발을 나가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는 스리 바가반의 지침을 엄격히 따랐다. 네 번째 날 그는 어느 거리로 가서 “탁발이오, 탁발이오!” 하고 외쳤다. 그가 아쉬람 사람인 줄 알아본 락슈미 암말이라는 사람이 그를 집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여 발을 씻겨 드리고 음식을 내왔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에게 《시바 뿌라나》(Siva Purana)를 좀 송경해 달라고 했는데, 그는 그것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그녀 자신이 그것을 송경하고 장뇌를 태웠으며, 라마끄리슈나스와미 앞에서 오체투지를 하고 나서 음식을 드시라고 권했다. 라마끄리슈나스와미는 너무 무안했다. 자신이 전통적인 탁발 절차를 몰랐던 것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그는 그 뒤로 탁발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아쉬람으로 돌아왔다.



스리 바가반이 그 말을 듣자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어떡하나? 만일 우리가 가난 때문에 구걸을 한다면 무릎을 굽히고 남들에게 애걸을 해야겠지. 그는 돈이 없나? 음식이 없나? 전통을 따르고 싶었던 거지. 그게 전부야. 그래서 그는 여법하게 탁발을 청했던 거야. 나도 무관심하게 그러나 여법하게 탁발을 청했던 적이 있지. 그것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오는 것이야. 사두들은 《시바 뿌라나》와 《뻬리아 뿌라남》에 나오는 노래를 잘 알고 있어야 돼. 누가 공양을 올리면 음식을 먹기 전에 그것을 송경해야 하거든. 북쪽 지방에서는 《기타》(Gita) 제15장과 <시바마히마 스또뜨라>(Sivamahima stotra)를 송경해야 하지.”



나는 스리 바가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나서야 《기타》를 배우고 《뻬리아 뿌라남》과 《시바 뿌라나》의 노래를 배웠다. 만약 어떤 정사에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스리 바가반은 나더러 거기 가 보라고 하셨고, 나는 전통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담하게 그런 행사에 참석하곤 했다.



54. 어머니와 아들



라마끄리슈나스와미에게 공양을 올린 락슈미 암말은 대단한 헌신자였다. 달이 새로 커지기 시작하는 날이자 타밀력의 초하루인 끄리띠까(Krithika) 날이 되면 그녀는 꼭두새벽에 목욕을 하고 여덟 살 난 아들을 데리고 산을 돌러 나가곤 했다.



그녀는 아침 5시경에 아쉬람에 도착했는데, 그녀를 보면 스리 바가반은 “오, 오늘이 끄리띠까인가? 초하루라고? 이 두 사람을 보면 이런 중요한 날들을 기억하게 되는군.”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락슈미 암말은 자기 아들에게 <다끄쉬나무르띠 송찬(頌讚)>(Dakshinamurti stotram)을 송경하게 했다. 이 소년은 이 송찬을 순서대로 외지 못했고, 더러 어떤 연들의 첫 마디를 잊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스리 바가반은 아이를 위해 그 첫 마디를 일러주시곤 했다.



샹까라의 이 <다끄쉬나무르띠 송찬>은 스리 바가반이 손수 타밀어로 번역하셨다. 스리 바가반은 당신이 번역한 연들의 첫 단어들을 합쳐서 쉽게 기억할 수 있게 하여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락슈미 암말의 아들은 나중에 띠루반나말라이 시청의 관리자로 일했는데, 지금은 은퇴하여 주(主) 아루나찰라와 스리 바가반께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라마끄리슈나스와미와 나는 별로 할 일이 없기도 했지만 스리 바가반을 시봉했다. 우리는 스승이 계신 곳에서 아무 봉사도 하지 않고서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번갈아 탁발을 나가기로 했다. 라마끄리슈나스와미는 형이 그에게 매달 25루피를 보내주고 있었다. 그것은 그 당시로서는 많은 금액이었다.



읍내에는 매달 5루피를 내어 스리 바가반의 헌신자들에게 음식을 공양 올리는 여사가 한 사람 있었다. 내가 아쉬람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라마끄리슈나스와미는 그녀에게 매달 5루피를 주어서 나에게 공양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우리는 점심 한 끼만 먹고 저녁과 아침 식사는 하지 않곤 했다. 그녀는 그 점심을 비루팍샤 산굴로 보내주었다.



한 번은 라마끄리슈나스와미가 비루팍샤 산굴에서 따빠스를 하기로 했다. 네 번째 날에 그는 환영(幻影)을 보고 놀라서 전율했다. 그는 그 환영 속에서 자신이 꿈바꼬남을 볼 수 있을까 궁금하게 여겼는데, 곧 그곳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꿈바꼬남에 있는 라마나스람을 보기를 원했고 그것도 보았다. 그는 스리 아루나찰라가 자기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빨리 주었다고 기뻐했다. 그는 아쉬람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흥분된 체험을 모두에게 들려주었다. 우리는 모두 그가 하는 이야기에 놀라워했다.



스리 바가반은 그 이야기를 들으시자 “오! 그게 따빠스인가? 꿈바꼬남을 보고, 아쉬람을 보고 하는 이런 것이 다 뭐란 말인가? 이게 따빠스야? 따빠스란 진아 안에 머무르면서 ‘나는 이것을 보았다, 나는 이것을 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지. 그런 것은 찰나적으로 지나가는 것일 뿐이야.”



55. 맹세



우리는 스리 바가반의 친존에서 늘 행복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마치 놀이하듯이 했다. 단식을 하고, 따빠스를 하고, 서로의 몸을 마치 그것이 죽은 것인 양 바라보는가 하면, 하루에 두세 번씩 산을 돌기도 하고, 맨바닥에서 잠을 자는 그런 것들은 우리가 즐겨 하던 놀이의 일부였다.



스리 바가반이 스깐다쉬람을 떠나신 뒤에 브릿다짤람이라고 하는 아루나찰라 사원의 한 승려가 스깐다쉬맘에 와서 머물렀다. 그는 여신 라자라제스와리(Rajarajeswari)를 숭배했다. 그는 많은 약초들의 효능을 알고 있었고, 어떤 약초의 즙을 완화제로 마셨다.



또 어떤 약초의 즙을 한 컵 마신 뒤에는 스깐다쉬람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앉아서 명상을 하면서 나더러 방문을 밖에서 잠가 달라고 했다. 1주일 뒤에 내가 문을 열어서 그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이런 일을 몇 번 했다. 그는 나에게 약초들을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곧 잊어버렸다.



하루는 그 승려와 내가 8일 동안 내리 잠을 자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매일 차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고 공부와 명상을 했다. 오후 10시경에는 우리가 아쉬람으로 천천히 내려갔는데, 자정 무렵에 당도하곤 했다. 스리 바가반은 그 시간쯤 해서 밖으로 나오셨다.



우리는 당신의 친존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 아침에 스깐다쉬맘으로 돌아가곤 했다. 우리는 나흘 동안을 그렇게 했다. 5일째 되는 날에는 잠을 자지 않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단식이야 우리가 여러 날 할 수 있지만, 잠을 자지 않고 지내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얼마나 피곤해 하는지 아신 스리 바가반이 말씀하셨다. “그만해요. 맹세를 하는 등의 장난은 그만 하면 충분하니까. 가서 식사를 하세요.” 우리는 더 이상은 계속할 수 없겠다고 생각하고 식사를 했다. 그것으로 우리의 맹세는 끝이 나 버렸다. 나는 다시금 스리 바가반을 시봉하기 시작했다.



56. 절을 하는 의미



며칠 뒤 나는 순례를 떠나 꼬일루르 정사(Kovilur Mutt)로 갔다. 이 정사의 장(長)인 마하데바스와미는 한때 띠루반나말라이의 이사니야 정사의 장이었다. 그는 띠루반나말라이에 있을 때 스리 바가반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우리에게도 늘 친절했다. 디빠발리 날에는 기름 한 병과 무환자(無患子) 가루(soapberry powder-비누 대용품), 새 샅가리개 등을 가져오곤 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인 나떼샤스와미에게 이 전통을 계승하고 따르라고 지시했다.



마하데바스와미는 우리가 스깐다쉬람을 짓도록 돈을 대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정사와 무관한 건물을 짓는 데 그가 돈을 시주하는 것에 반대했는데, 그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우리의 정사들은 어떤 제약과 통제를 받고 있다. 그러나 스리 바가반과 그분의 상태는 최고이고, 사람에 의한 어떤 통제도 넘어서 있다. 그런 진인에게 봉사하는 것은 우리의 행운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내가 정사의 기금에서 시주하는 것을 반대한다면, 내 개인 돈으로 시주하겠다.” 스리 바가반에 대한 그의 헌신이 그와 같았다.



내가 꼬빌루르 정사에 며칠 있다가 아쉬람으로 돌아왔을 때 스리 바가반은 내가 한 일, 간 곳 등에 대해 자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마하데바스와미는 스리 바가반과 아쉬람 사람들에 대해 이것저것 친절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거기 간 날 라자(Raja)인 안나말라이 쩨따이아르와 그의 친척들이 마하데바스와미를 찾아왔습니다.”



스리 바가반은 쩨따이아르가 거기서 무엇을 하더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가 마하데바스와미에게 큰 존경심을 가지고 오체투지를 했으며, 스와미로부터 비부띠 은사물을 받았다고 말했다. 스리 바가반이 물으셨다. “자네도 마하데바스와미에게 오체투지를 했나?” 내가 하지 않았다고 하자 당신이 왜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말했다. “저는 스리 바가반 외에는 누구에게도 절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스리 바가반이 말씀하셨다.



“이런 영리하고 약은 친구가 있나! 자네의 바가반이 소파 위에 있는 이 육신뿐이란 말인가? 그는 도처에 있지 않나? 어떤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한다면 어디에도 가지 말아야지. 만약 다른 곳으로 갔다면 거기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해야 돼. 언제 어디서 오체투지를 하든 자네의 스승이나 애호하는 신을 생각해야 하네. 이렇게 하면 자네의 절은 자네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사람에게 도달할 걸세. 그렇게 해야 하네.”



나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에게 절을 하든 항상 스리 바가반을 생각했다.



57. 산 오른돌이와 동중(動中) 명상



한 사두가 매일 산을 돌곤 했다. 그는 명상이나 염송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하루는 그가 스리 바가반께 어떤 특정한 책을 좀 보여주십사고 청했고, 스리 바가반은 나더러 그에게 그 책을 갖다 주라고 하셨다. 나중에 당신은 나에게 그 책을 그에게 주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주었다고 말씀드리고, 스리 바가반께 그 사람은 산 오른돌이 하는 데만 관심이 있고 다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데 왜 이 책을 찾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스리 바가반이 말씀하셨다. “산 오른돌이만한 것이 없지. 그거 하나면 충분해. 한 곳에서 염송이나 명상을 해도 마음은 헤맬 수 있지. 그러나 산 오른돌이를 하면 팔다리는 움직이지만 마음은 고요할 것이야. 걷는 동안 다른 아무 생각 없이 염송이나 명상을 하는 것을 동중삼매(動中三昧, samadhi in movement)라고 하네. 예전에 걷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한 것도 그 때문이지.



산 오른돌이는 중요하네. 산 위에는 몇 가지 약초가 있는데, 거기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은 건강에 좋을 거야. 산 위에는 지금도 더러 싯다들과 진인들이 계신데 우리가 볼 수는 없지. 우리가 산을 돌 때는 길 왼편을 걸어야 하네. 그렇지 않으면 그분들의 움직임을 방해하게 될 테니까 말이야. 우리는 또한 그분들을 오른돌이 하는 이익을 얻을 것이고, 그분들의 축복도 얻게 될 것이야.”



나는 산 오른돌이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주 즐거웠다. 그 이후로 나는 오른돌이에 더 열성적으로 되었다.



58. 알라멜루 암말



마두라이의 ‘띠루뿌갈’ 알라멜루 암말은 주(主) 수브라마니아에 대한 대단한 헌신자였다. 그녀는 수브라마니아를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고, 다른 누구도 자신의 스승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띠루뿌갈(Tirupugazh)》을 송경했기 때문에 띠루뿌갈 알라멜루 암말이라고 불렸다.



그녀는 아버지가 부(副) 징세관으로 일하고 있을 때 띠루반나말라이로 왔다. 그 아버지가 그녀에게 스리 바가반을 뵈러 가자고 했으나 그녀는 거절했다. 그날 밤 그녀는 스리 바가반의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바가반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주(主) 수브라마니아가 나타났다.



다음날 그녀는 아쉬람으로 와서 스리 바가반을 뵈었다. 그런데 처음 스리 바가반을 친견할 때 아직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중에 당신이 주 수브라마니아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당신에게 완전히 순복했다. 그녀는 그 뒤에도 여러 번 스리 바가반을 뵈러 왔다.



59. 누구?



뿌두꼬따이의 락슈마나 샤르마와 B.V. 나라싱하스와미는 아주 초기의 헌신자들이다. 두 사람 다 돈 잘 버는 법률가로서 개업하기를 포기했다. 샤르마는 스리 바가반이 가르치는 탐구의 방법에 매료되어 아쉬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그는 스리 바가반의 <실재사십송(實在四十頌)>을 몇 가지 운으로 산스크리트로 번역했다. 그는 그것이 출판되는 데 관심이 없었다.



스리 바가반이 말씀하셨다. “그걸 몇 가지 운으로 번역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따빠스이다.”



그 원고들은 모두 아쉬람의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스리 바가반의 철학에 대해 《마하 요가》라는 책에서 멋지게 기술했다. 그는 <실재사십송>에 대한 주석을 ‘누구’(Who)라는 익명으로 썼다.



60. 바가반은 모두의 좋은 점만 보신다



스리 바가반은 보통 남들의 좋은 점이나 나쁜 점에 대해서 결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아는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으시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칭찬하시곤 했다. 가끔 우리는 우리도 죽으면 스리 바가반으로부터 좋은 말을 듣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그런 말을 듣기 어려울 것이었다(바가반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였으므로-역자). 우리는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즉시 스리 바가반에게로 가서 당신 앞에 앉아서 그 타계한 영혼에 대한 당신의 말씀을 듣곤 했다.



띠루반나말라이에는 깐다스와미라는 이름의 부자가 한 사람 있었다. 그의 처신은 특별히 훌륭하지는 않았고 지역 주민들은 그를 혐오했다. 그는 가끔 스리 바가반을 찾아오곤 했다. 말년에 그는 가난에 시달렸다. 한 번은 죽이 먹고 싶었던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아쉬람에 부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아쉬람 맞은편의 한 허름한 사원에 살고 있었다. 스리 바가반은 죽을 준비해서 그에게 보내주게 하셨다. 이렇게 하기를 사흘간 계속했다. 나흘째 되는 날 깐다스와미는 죽었다. 우리는 스리 바가반께 이 소식을 전해드렸다. 우리는 스리 바가반이 이 사람에 대해서는 좋게 말씀하실 것이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스리 바가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깐다스와미만큼 몸과 옷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청결 면에서 그는 인지꼴라이 딕쉬따르에 버금가지. 그는 기름도 바르지 않고 비누도 쓰는 법이 없었어. 아침 8시에 성수지에 와서 도띠와 타월을 빨기 시작하는데, 그가 목욕을 끝내면 낮 12시가 되곤 했지. 그의 머리와 수염은 티 한 점 없이 깨끗했어.”



우리는 스스로 정말 부끄러웠다. 스리 바가반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좋은 점만을 보시는 데 일가견이 있으셨다.



61. 베다를 배우고 싶은 욕구



한 번은 내가 코임바토르에 가까운 뻬나이유르에 있는 샨딸링가 정사(Santhalinga Mutt)에 갔다. 그때 나뚜꼬따이의 쩨따이아르 일가 사람들에 의해 그 사원의 관수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몇 명의 사두가 그들의 초청을 받아 타밀 나두의 각지에서 와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은 그전에 스리 바가반을 뵈러 아쉬람에 온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관수식이 끝나고 나서 우리는 식사를 했고, 그런 다음 몇 가지 사항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나는 스리 라마나스와미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소개되었다.



누군가가 나더러 ‘순수한 자각’을 설명해 달라고 했다. 나는 스리 바가반이 이것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몇 번이나 들었기 때문에, 《리부 기타》에서 인용해 가면서 설명을 했다. 또 속박에 관한 질문도 받았다. 나는 그것을 《베단타 쭈다마니》에서 인용해 가면서 설명했다.



사두들은 내 설명에 만족해했다. 나는 정사에서 보통 가르치는 것을 나도 좀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릴 때 친구이자 띠루깔라르 정사(Tirukalar Mutt)의 장(長)인 끄리슈나난다스와미와 의논했다. 그는 내가 베단타에 관한 책 16권을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이 책들은 스링게리 정사의 나라싱하 바라띠(Narasingha Bharati-샹까라짜리야의 한 사람)가 선정한 것으로, 그는 지(知, Jnana)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서사문학이나 세속 문학은 공부하면 안 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이 16권의 책을 철저히 읽으려면 몇 년이 걸릴 것이라고 내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나는 그것을 공부하고는 싶지만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고 싶지는 않네. 나 혼자 읽겠어. 어려운 부분은 자네가 설명해 주면 될 거고. 두 달이면 다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석 달이면 끝낼 수 있겠지. 부디 띠루깔라르로 와 주게.” 그가 말했다. 그는 내 열의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가능한 빨리 띠루깔라르고 가겠다고 약속했다.



62. 그대가 진아라면 일체를 알아야 한다



며칠 뒤 나는 아쉬람으로 돌아와서 스리 바가반께 뻬리아유르에서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내가 말했다.



“우리 아쉬람에서 오는 사람들은 정사들을 방문하면 베단타에 관해 이런저런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 질문들에 답변을 하지 못한다면 아쉬람에도 영향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띠루깔라르 정사의 끄리슈나난다에게 부탁해서 저에게 베단타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만약 제가 띠루깔라르로 오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능한 신속하게 저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띠루깔라르로 갈 계획입니다.”



스리 바가반은 웃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베단타를 공부하고 싶겠지만 나중에는 싯단타, 산스크리트, 논쟁술 등을 공부하고 싶겠지. 만약 자네의 진아 안에 머무르는 법을 배울 수 있으면 그것은 일체를 다 배우는 것과 같지. 내가 무슨 베단타를 공부했나? 자네가 진아 안에 있으면 자네가 듣는 자네 심장의 메아리는 일체와 조화를 이룰 것이야. 이것이 소위 신의 음성이라는 거지.”



나는 즉시 베단타 공부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내면의 음성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질문들에 답변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스리 바가반의 은총 때문이었다. 스리 바가반은 <진아지>(Atma Vidya)에서 이렇게 노래하셨다.



그대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른 것들을 이해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그대 자신을 이해했다면,
달리 이해할 것이 뭐가 있으랴?



63. 학자들도 우리처럼 될 것이다



한 학자가 스리 바가반을 친견하러 북쪽에서 와서 아쉬람에 며칠간 머물렀다. 그는 스리 바가반의 소파 옆에 앉아서 우빠니샤드 등 산스크리트로 된 다른 말씀들을 소리 내어 계속 읽곤 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스리 바가반께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고 명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스리 바가반은 인내심 있게 그 모두를 경청하셨다. 이렇게 열흘이 지나갔다. 하루는 그가 스리 바가반의 곁에 있는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는 한쪽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내가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스리 바가반이 말라얄람어로 말씀하셨다.



“그 학자도 우리처럼 되었군.”



그랬다. 그 누구도 책 지식만으로는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향상시킬 수 없다. 그 학자는 지(知)의 태양이신 스리 바가반 앞에서 자신의 학식을 과시하다가 마침내 침묵하기로 한 것이다. 학자든 무식한 사람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스리 바가반의 자비로운 눈길을 통해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의 무지, 자만 그리고 걱정도 사라졌다.



64. 순다람발



순다람발은 마드라스 근처의 띠루발루르에 사는 한 법률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고 시댁으로 가서 아주 심한 두통을 앓았는데, 어떤 치료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가 친정으로 돌아가자 두통이 나았다. 그런데 다시 시가로 오니 두통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가면 두통을 사라지는 것이었다. 남편은 신사였다. 그는 그녀를 안쓰럽게 여겨 친정에서 살게 해주었다.



몇 년이 지난 뒤에 그녀는 스리 바가반의 소문을 듣고 자기 아버지와 함께 바가반을 뵈러 왔다. 한 번은 우리가 스리 바가반과 함께 산 오른돌이를 나갔을 때 그녀가 우리와 동행했다. 그녀는 스리 바가반께 몇 가지 질문을 했고, 의문을 해소했다. 스리 바가반은 나를 돌아보고 말씀하셨다. “그녀에게 쭈달라(Choodala)의 이야기를 좀 해주지.”



나는 아주 열심히 《요가 바쉬슈타》에 나오는 대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바가반이 말씀하셨다. “아주 좋아. 그 이야기를 아주 잘 하는군.”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리 바가반의 친존에서는 말을 떠듬거리고 더듬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친존에서도 결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자애로운 어머니 앞에 있는 사람같이, 나는 당신의 친존에서 시들을 읽거나 영적인 문제를 토의할 때 즐겁고 신이 났다.



순다람발을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몇 달 뒤 띠루반나말라이로 돌아와서 에짬말의 집에 머물렀다. 그녀는 첫날 스리 바가반을 뵈러 왔으나 다음날은 오지 않았다. 아쉬람에 온 에짬말이 말했다. “순다람발은 21일간 단식을 하기로 했습니다.”



20일이 지나 그녀는 에짬말에게 대중공양을 한 번 낼 수 있는 돈을 주어 그 음식을 아쉬람으로 가지고 가게 했다. 그녀는 그 다음날 아쉬람에 왔다. 그녀는 아주 약해 보였다. 그녀는 21일째 되는 날에 스리 바가반의 친존에서 단식을 텄다.



그녀는 보통 침묵을 지켰고, 필요할 때는 스리 바가반께만 말을 했다. 그녀는 냉수로 목욕을 했고 머리를 결코 빗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칼이 헝클어졌다. 우리는 그녀를 ‘쑥대머리’ 순다람발이라고 부르곤 했다.



여자들은 오후 6시 이후에는 아쉬람에 머물러 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브라민 여자들은 에짬말의 집에서, 그리고 다른 여자들은 무달라이아르 할머니의 집에서 밤을 보내곤 했다. 순다람발은 에짬말에게 오래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나마사바야 산굴의 반대편에 방을 하나 세내어 자취를 했다. 그리고 산을 돌거나 스리 바가반을 찾아오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그녀에게 매달 돈을 보내주었는데, 그는 송금환에다 이렇게 쓰곤 했다. “오, 이샤(Isa)! 자가디샤(Jagadisa)! 까빨리샤(Kapalisa)!”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그의 관대한 행동에 놀라곤 했다.



이렇게 몇 달을 보낸 뒤에 순다람발은 북쪽으로 순례를 떠났다가 돌아왔고, 그러고 나서 다시 남쪽으로 순례를 떠났다. 그 뒤에는 띠루반나말라이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나는 빨라니에서 그녀를 한 번 보았는데, 그 이후로는 그녀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65. 내 스승



말라얄람 꾸빤디스와미는 내가 어릴 때 나에게 베단타를 가르쳐 주고 나에게 스리 바가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분이다. 내가 스리 바가반을 시봉하고 있을 때 그가 바가반을 뵈러 한 번 왔는데, 나를 보자 아주 기뻐했다. 그는 48일간 연속해서 산 오른돌이를 했다. 한 번은 그가 스리 바가반께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야자잎 원고를 보여드렸다. 그는 베단타에 관한 사항들을 뛰어난 타밀어로 거기에 써두고 있었다.



스리 바가반이 말씀하셨다. “그는 말라얄람인이면서도 야자잎에 타밀어로 너무나 아름답게 글을 썼군!” 당신은 그의 작품을 대단히 칭찬하셨다.



그는 떠나려고 할 때 내 손을 잡아 스리 바가반의 손 안에 쥐어드리고 말했다. “이 젊은이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들이 베단타학자가 되기를 바라고 이 사람을 저에게 맡겼습니다. 그래서 한 동안 그에게 베단타를 가르쳤지만, 제가 순례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더 이상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당신께 온 것은 전생에 지은 복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당신께서 그의 피난처이시니, 부디 잘 돌봐주십시오.”



그는 북받치는 감정으로 스리 바가반께 절을 하고 나서 순례를 떠났다. 그 뒤로 나는 그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뭉클 한다.



66. 자다스와미의 삼매



자다스와미는 스리 바가반이 띠루반나말라이에 오시기 전부터 산 위에 아쉬람을 설립해 두고 있었다. 그는 대단한 박애주의자였다. 그는 음식을 먹기 전에 이웃에 사는 사두들이 식사를 했는지 먼저 알아보았다. 그리고 아직 먹지 못한 사두들에게 음식을 보내곤 했다. 그러고 나서야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목욕을 하지 않고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의 헝클어진 머리는 너무 길어서 땅에 닿았다. 목욕을 하고 나면 머리가 마를 때까지 누군가가 그것을 붙들고 있어야 했다.



그는 스리 바가반께 대단히 헌신했다. 스리 바가반의 어머니가 매장될 때, 그는 모든 의식이 끝날 때까지 빨리 띠르탐에 있었다. 그는 우리가 스리 바가반의 헌신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잘해 주었다.



스리 바가반이 어머니 삼매지로 아주 내려오시고 나서 몇 년이 지나, 한 번은 까르띠가이 축제의 엿새째 날 의식이 거행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와서 자다스와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알렸다. 스리 바가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필요한 일이 있으면 뭐든지 하게.”



나는 즉시 자다스와미의 아쉬람으로 달려갔다. 이때 그의 제자인 마다바난다는 거기 없었고, 아루빠뚜무바르 정사의 샹까라난다스와미가 와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했다. 만약 축제 기간 중에 누군가가 산 위에서나 산나디 거리(Sannadhi Street)에서 죽으면, 사원의 신이 행렬에 나오지 않곤 했다. 우리는 읍내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기 전에 자다스와미의 시신을 즉시 옮겨가기로 했다.



우리는 두 사람이 시신을 어떻게 산 아래로 옮겨갈까 궁리한 끝에, 그가 앉던 의자에 그를 앉히고 밧줄로 묶었다. 그리고 그를 세샤드리스와미의 삼매지까지 천천히 운반했는데, 너무 힘들어 우리는 숨을 헐떡거렸고 그 뒤 1주일 동안 내내 어깨가 욱신거렸다. 새벽에 우리는 스리 바가반께 우리가 한 일을 말씀드렸다.



당신은 우리의 기지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능숙하게 잘 처리했군. 이제 스리 아루나찰라의 축제에는 아무 장애도 없을 걸세. 아주 영리하군 그래!”



날이 새고 그 소식이 퍼지자 라마스와미 스와미와 다른 사두들이 왔다. 자다스와미는 돈을 한 푼도 남겨둔 게 없어서, 대중들로부터 돈과 물자를 거두어 자다스와미를 위해 좋은 삼매지를 하나 지었다. 의식이 다 끝났을 때는 오후 1시였다.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스리 바가반의 제안에 따라 모두 스리 라마나스라맘에서 식사를 했다. 한편 매년 까르띠가이 축제의 7일째 되는 날에는 자다스와미의 제자인 마다바난다가 구루 뿌자(guru pooja-스승에게 올리는 예공)를 거행했다.



내가 스리 바가반을 뵈러 가던 길에 뜻하지 않게 자다스와미를 만난 것은 1920년이었다. 나는 그의 몰골에 놀라서 달아났었는데, 여러 해가 지나 내가 그의 시신을 운구해야 했으니 인연도 참 이상한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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