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언론-윤회는 불교적인가 - 법보신문
윤회는 불교적인가
이재형 국장 승인 2019.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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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출간된 ‘일묵 스님이 들려주는 초기불교 윤회 이야기’가 서점가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교보문고와 예스24 등 대형서점에서 불교분야의 상위권에 링크돼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많은 이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윤회 문제를 초기경전에 근거해 세계의 구조, 업과 윤회의 관계, 죽음 직전의 모습과 재생연결, 윤회의 원리와 구조, 무아인데 윤회하는 이유 등을 쉽게 전달하기 때문이다.
윤회는 다음 세상에 좋은 곳에 태어났으면 하는 불자들에게도 그렇지만 불교학을 전공한 학자들에게도 초미의 관심사다. 본질이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불교의 무아론이기에 윤회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논쟁과 해석이 끊이질 않는다.
초기불교 수행법을 전하는 제따와나선원장 일묵 스님은 책 서두에서 “윤회를 믿지 않는 불자가 의외로 많다. 심지어 윤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불교학자나 스님들도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는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불교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릇된 견해에 빠지는 것이다. 반면에 윤회를 이해하는 것은 불교를 아는 것이고 바른 견해를 갖춘 것이다”라며 윤회 중요성을 크게 강조한다.
일묵 스님이 언급하듯 불교계에서 윤회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흐름은 꽤 일찍부터 있어왔다. 그 배경에는 윤회가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는 사실과 함께 불교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분석이 이뤄진 영향이 적지 않다. 세계적인 불교학자였던 고 히라카와 아키라(1915~2002) 박사는 “석존의 불교는 윤회사상을 인정해야만 하는 종교는 아니었다. 물론 윤회사상과 모순되는 것은 없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것은, 생존이 윤회적이라면 그 윤회의 생존으로부터 해탈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윤회사상을 적극적으로 배격할 필요는 없었다”며 윤회가 불교의 핵심 사상이 아님을 시사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윤회론은 인도 고유의 사상이 아니라 기원전 7세기를 전후해 본격화된 비(非)바라문적인 문화의 소산이다. 그런 윤회론이 인도문화에서 주류로 정착된 것은 철저한 신분제인 카스트 제도를 윤회론이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서다.
초기불교의 윤회사상을 잘 드러나는 ‘자타카’에서 붓다의 본생으로 제시된 547생들 간에는 전생과 후생의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으며 불교의 윤회론 목적이 보살행의 강조와 연관됐다는 분석이 있다. 정암 스님은 ‘문학 사학 철학’(통권 9호, 2007년)에서 “전생과 후생의 유기적 연관관계가 없는 윤회론이라면 그 윤회론적 의미가 과연 존재하는지에 관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다”며 “이것은 붓다에게 있어서 수용된 윤회론이 인도문화에 있어서의 특수성을 고려한 방편이 아니었는가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윤회론에 있어서 전생과 후생의 유기적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은 윤회론의 실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상통되는 측면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윤회론에 대해 가장 비판적인 학자는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다. 그는 2008년 ‘윤회와 반윤회-그대는 힌두교도인가, 불교도인가?’라는 저술을 통해 ‘윤회는 신분차별을 공고히 하는 힌두교 것이고 불교는 이를 비판하고 극복한 것이므로 반윤회’라고 말한다. 힌두교는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를 규정하고 현생의 내가 다음생의 나를 규정한다고 하여 생을 거듭하는 나의 동일성[有我]을 주장하므로, 불교에서처럼 나라는 것을 부정하면 윤회의 근본이 무너진다. 이것이 곧 윤회의 근본인 자아를 부정한 무아의 깨달음, 즉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재형 국장
팔만대장경에는 윤회론을 옹호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내용과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렇기에 윤회를 부정하면 불자가 아니라거나 반대로 윤회를 인정하면 힌두교도라는 주장은 과격하다. 그 같은 주장이 한쪽으로 쏠릴 경우 불교 철학적, 종교적, 윤리적, 문화적 측면을 크게 상실할 수 있다. 오히려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불교의 핵심사상에 부합하면서도 비불자도 긍정할 수 있는 현대적인 윤회사상의 재정립이 필요한 시기다.
mitra@beopbo.com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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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믿음은 '지혜가 있는 믿음' 입니다.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먼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부터 수용하고
차츰 지혜와 선정을 개발하다보면
윤회와 인과, 무아와 공성에 대해 실증적으로
알게되고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이 생길 것입니다.그리고 믿음이 없다하여도 단순히 교학적인
추론만 해보더라도 윤회를 부정하고는 불교의
핵심인 인과, 연기법, 사성제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윤회와 인과의 가르침은 상좌부, 대승 막론하고 어느
부파에서건 강조하는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또한 실제 많은 수행자들이 숙명통의 경지를 체득하였으며 일반인들도 알 수있는 드러난 사례가 다수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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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2019-03-04 21:06:37더보기
그런데,
일묵비구의 "무아의 윤회설,'
그 견해는
진정 모순된 설이다.
만약,
그 대목이 경전상에 기록되어 있다면,
그 설은,
붓다의 정설이 아니다.
무아의 경지란,
중생의 근본을 초탈한 경지이며,
불교수행의 궁극처인 Nirvana의 경지이며,
유위를 초탈한 무위의 경지이며
중생근본의 해탈 경지 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경지를 체득한자가
이제 남은 중생 삶을 마치면 돌아갈 본지이다.
헌데,
"무아의 윤회"를 거론하며
무아의 해석을 "일묵비구"식으로 왜곡해석하려는 것인가?
분명한 답을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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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어렵죠 2019-02-27 12:31:02더보기
지금도 왕권불교는 남방불교 대부분 지역이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우리나라는 옛날에 벌써 불교라는 종교적 측면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벗어났나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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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2019-02-25 20:49:42더보기
부처님은 출생이 브라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브라만을 결정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집배층에 의해 왜곡된 가르침이라고 불설도 무시하실건가요? 절대왕권사회에서는 불교 뿐 아니라 유교 도교 기독교 등 거의 모든 종교와 사상이 지배층의 입맛에따라 왜곡되었습니다. 오늘날같은 민주주의사회에서는 무아만을 논하다 막행막식하여 반윤리적 행동을 일삼고 깨달음과는 더욱 멀어지며 대중에게 지탄받는 부작용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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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 2019-02-25 20:06:43더보기
힌두교와 불교는 윤회의 주체가 다릅니다. 힌두교는 영원불변한 아트만이라 하지만 불교는 끊임없이 변하는 의식의 흐름이라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불교는 현생의 업도 중요시합니다. 부처님은 전생의 업 뿐만 아니라 현생에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사에 의거한다면 정세근교수님 말씀은 불설을 면밀히 고찰하지 않은 주장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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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윤회는 부처님 가르침인가요
승인 2005.05.07 10:01
호수 152
갈애.무명 있으면 윤회는 계속돼 상응부 등 경전 ‘오도송’서도 언급Q:불교는 무아를 근본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윤회를 강조합니다. 무아와 윤회는 상호 모순되는 가르침인 듯합니다. 어떻게 무아이면서 윤회합니까? 어떤 분은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도 하던데 … 설명을 부탁드립니다.A:먼저 힌두교에서 설명하는 윤회와 불교에서 설명하는 윤회를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이해해야합니다. 힌두교에서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하는 것을 윤회라 하지만 불교에서는 금생의 흐름이 내생으로 연결되어 다시 태어나는 것, 즉 ‘재생(再生, rebirth)’을 윤회라고 부릅니다.주석서에서는 “5온/12처/18계(蘊處界)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되는 것을 윤회라 한다”고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서로서로 조건지워져서 생멸변천하고 천류(遷流)하는 일체법의 연기적 흐름을 뜻합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무아) 연기적 흐름을 윤회라고 멋지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r, to move)인데 문자적으로는 ‘함께 움직이는 것, 함께 흘러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아의 재육화보다는 오히려 연기적 흐름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아(연기)와 윤회는 아무 모순이 없습니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입니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死心)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입니다. 많은 불자들이 힌두교의 재육화와 불교의 재생을 정확하게 구분짓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깝습니다. 힌두교의 재육화는 자아의 전변이지만 불교의 재생은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입니다.윤회는 〈상응부〉 여러 경에서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는 문맥 등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오도송이라고 알려진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왔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짓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아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하였다.”(법구경 153-154)는 게송도 윤회와 윤회의 종식을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이처럼 부처님께서는 분명히 윤회를 설하셨고, 갈애와 무명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갈애(渴愛)를 ‘재생을 하게 하는 것(ponobhaavikaa)’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윤회의 흐름은 계속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사윤회라 합니다. 물론 갈애로 대표되는 번뇌들이 다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윤회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불환과(아나함)까지도 다시 태어남 즉 윤회는 있습니다.윤회는 결코 방편설이 아닙니다.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가장 생생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윤회는 힌두교 개념이고 불교는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면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 갈애)을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 열반)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를 실현하는 방법(道, 팔정도)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설프게 ‘윤회는 없다,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으셨다’고 주장해서는 곤란합니다.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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