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14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 불교닷컴





“윤회는 ‘종 쇼비니즘’…붓다의 깨달음은 연기법”

서현욱 기자
승인 2016.10.06 16:12
댓글 29
기사공유하기
프린트
메일보내기
글씨키우기



[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테너스’ 토크콘서트.ⓒ불교닷컴

강병균 포항공대 교수는 ‘참나’와 ‘윤회’를 크게 비판했다. 강 교수는 불교계 큰 스님들이 말하는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이라고 비판했다. 강 교수는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통해 “참나불교와 윤회불교는 환망공상(幻妄空想)이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즈’ 토크콘서트에서 “스님들이 자주 언급해 온 ‘참나’와 ‘윤회’는 없다”고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하지만 다수의 청중들은 강 교수가 힌두교의 윤회를 마치 불교의 윤회처럼 말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전통적인 불교 교리를 배운 청중들은 강병균 교수의 과학적 불교교리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일부 청중은 ‘참나’ ‘윤회’ 등 교리 논쟁 보다 현실문제에 불자들이 무엇을 실천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는 지난 9월30일 서울 방배동 마지 2층 아카마지홀에서 열린 ‘쓰리 테너스’ 토크콘서트에서 벌어진 청중들과의 열린 토론 내용을 정리했다.

박병기(한국교원대 교수) : 우리나라는 토론문화가 정착되지 못했다. 토론 과정에서 몇 가지 오류를 범한다. 첫째 인신 공격의 오류다. 논점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다. 그 사람의 주장이 있는데 다른 허수아비가 있는 것처럼 세워놓고 공격하는 것이다. 그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유념하면서 토론해 달라.

고명선(문예출판사) : 여래장불교와 대승기신론 자체를 비판 바람이 불고 있다. 대승기신론 안에 참나 찾는 그런 요소가 있기 때문에 선불교가 그런 식으로 간 것 아니냐 문제 제기하는 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원효를 위대한 성인으로 대접한다. 원효는 여래장불교로 전체 불교 통합한 분이다. 대승기신론과 여래장불교 자체를 비판하면 원효까지 비판하는 셈이다. 일반 불교신자 입장에서는 너무 큰 문제다. 세 교수님이 여래장 그 자체, 원효까지도 비판해야 한국불교가 훌륭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인지 한 말씀씩 부탁드린다.

“대승기신론은 이원구조가 문제”

강병균(포항공대 교수) : 대승기신론을 비판한 칼럼을 <불교닷컴>에 썼다. 보기 바란다. 과거 사람을 밟지 않으면 진보가 없다. 과거 사람을 밟는 것은 밟히는 사람도 굉장히 즐거워 할 것이다. 선불교 전통에서 ‘봉불살불(逢佛殺佛)’했는데 어찌 ‘봉조살조(逢祖殺祖)’가 안 되겠는가. ‘봉원효살원효(逢元曉殺元曉)’다.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

대승기신론은 진여라는 것과 생멸심이라는 이원구조가 문제다. 진여가 오염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이론으로 변명을 늘어놓더라도 이원 구조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이원구조면 부처님 무아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것은 진화론이 이야기하는 의식의 발전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렁이에게도 진여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대승기신론에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내가 읽어본 바로는 그런 점만 제외하면 아주 훌륭한 논서다. 당시 열악한 과학이나 인문사회 수준으로 볼 때 놀라운 서적이다.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는 위대한 이론이지만 현재 와서 부족한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당시는 아주 훌륭했지만 지금은 조금 부족하다.




우희종(서울대 교수) : 여러 층위에서 대답할 수 있다. 그 질문이 왜 중요한가 묻고 싶다. 원효 부정이 가슴 아플 정도라면 사실 여래장사상 이런 거 있나 없나, 참나니 이런 거 소용없는 일이다. 우리가 불교를 이야기할 때 여래장 사상이나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불교학자들에게만 중요할 수 있다. 여래장이나 원효의 일심이나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이 손가락이 좋은 손가락이냐, 나쁜 손가락이냐 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여래장이라든지 초기 연기설을 볼 때 또 다른 표현이라고 본다. 맞나 틀리나 보다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드러내는가가 중요하다. 옳다 그르다 이전에, 원효를 부정하느냐 아니냐 이전에 여래장, 일심이 가리키는 게 무엇인가 보는 게 중요하다. 우리 실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부처님 말씀 실천하는데 어떻게 중요한 것인가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만수(동국대 교수) : 힘든 시기 나를 다스리기 위해 명상을 했다. 명상 기간은 평화로웠는데, 명상이 끝나거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큰 변화가 없다. 명상하는 나와 일상 속의 나는 분리되는 존재인가? 강 교수 말씀에 명상 단계가 높아지면 일상 명상의 나가 통일되는 어떤 것을 말씀했다고 생각한다. 생활하는 삶과 명상을 하거나 예술을 하거나 일상 속에서 벗어난 나와 둘이 어떻게 만나 통합되는지 말씀해 달라.

“불교는 지혜의 종교, 지혜로 관조해야”

강병균 : 우리 속담에 ‘선정만 닦다가는 멍청한 중 늙은이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앉아서 묵조선을 한다든지 해서 마음의 고요함만 닦으면 완전히 고요하다. 그러다 경계를 만나면 당장 흐트러진다. 그래서 그걸 굉장히 경계를 하는 거다. 그런데 진리는 항상 드러나 있고 간단하다. 그래서 계(戒)·정(定)·혜(慧)를 얘기한다. 계·정·혜 순서로 얘기한다. 혜가 마지막 순서다. 불교를 인도종교에서 분류할 때 지혜의 종교라 해서 즈나나 요가라고 분류한다. 지혜가 선정을 닦은 거 외에 지혜가 개입되면 절대 그런 일 없다. 비근한 예를 들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여러 가지 고민이 있고 괴로운 순간 있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에 내가 마음을 두면서 걱정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렇게 마음을 돌리면 상당히 경감이 되고 사라지고 그런다. 지혜로서 자기 마음을 관조하면, 단지 지로서가 아니라 관으로서 관조를 하면 그런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본다.


▲ 진각종 호당 정사가 수행에 대한 의견을 발표했다. ⓒ불교닷컴

호당 정사(진각종) : 논제가 ‘한국불교가 바르게 가고 있는가’ 이다. 과학 전공 교수들인데 불교를 종교적 차원에서 보는 것인가, 과학적 차원에서 보는가? 또 하나 아까 유전자와 환경적인 요인도 말씀했지만 사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한 인연론이다. 인이 있다고 해도 이를 도울 연이 없다면 세상 모든 만물이 성장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이, 지식이 한쪽에 치우친 특수한 시대에서는 스님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지금은 지식이 보편화되고 지식을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책임이 승단이 아니라 재가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속인들이 출가인들을 보면서 진정한 우리들의 인연을 깨쳐야 하지 않겠는가. 일반 정치나 종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시대적 인연이 악인 많으면 악인이 지도자 된다. 선인이 많으면 선인이 지도자 된다. 그것이 시절의 인연이다. 그런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우리가 속가에서 출가를 바라보는 관점도 잘못됐다고 할 수 있다. 강 교수 말씀 중에도 일체유심조 얘기가 나온다. 그렇다면 우리가 좀 더 보살의 마음으로 바라보면 잘못된 것도 잘못된 게 아니라 내가 도덕적인 걸 보충할 수 있는 스승인 게 아닌가 한다. 잘못된 승려를 보면서우리들이 도덕적으로 갖추어야 가르침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병기 : 명상하는 나와 일상생활의 나가 분리되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듣고 싶었다.

“대중을 통해 내가 끼우치는 것”

호당 정사 : 부처님 가르침이 현실을 떠나 이상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세간 떠나 출세간 말씀한 것도 아니다. 산을 보려면 들로 나가야 한다. 들을 보려면 산으로 가야 하다. 중생세계를 바르게 보기 위해 출가라는 방편을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 중생심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바르게 아는 것, 그것이 깨침 아닌가. 그것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그릇, 내 크기만큼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바르게 아는 게 깨침이라 생각한다. 그런 차원에서 명상을 할 때 나의 삶을 바로 살 수 있는 것, 그것이 되지 않으면 관념 이상의 가르침 속에 빠져서 가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진각종은 정사 전수가 마주보고 불사를 본다. 왜 이렇게 마주보고 앉아 있어야 하는지 궁금했다. 깨침은 내가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나를 보기 위해서는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을 보는 것이 자기를 깨치는데 가장 좋다. 관계 중에서 가장 가까운 인연이 부부다. 그러면 흔히 내 반쪽이라고 하는 아내를 쳐다보고 남편이 깨치고, 아내는 남편을 보고 깨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결국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으면 우리는 교수님을 통해 나를 깨치는 것이고, 교수님은 대중을 통해 깨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깨침이 아니겠는가. 생활 속 명상, 깨침을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다.

정모경 : 강병균 교수님 책(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을 잘 읽었다. 책 중에 자아가 없다는 증거로 사람을 두 쪽으로 자른다는 얘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설명해 달라.

강병균 : 사람에게 좌뇌 우뇌 둘이 있다. 둘이 완전히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좌뇌와 우뇌가 관장하는 기능이 있다. 좌뇌는 언어를 관장한다.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뇌량’이라는 기관이 있다. 그걸 자르면 의식 분열 현상이 일어난다. 그런 상태에서 좌뇌와 우뇌에 다른 사진을 동시에 보여주면 그 의식이 둘로 갈라진다. 인간이라는 것은 최소 두 개 의식의 공화국이다. 인간 마음속에는 의식이 많다. 의식을 통합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수많은 마음을 관장하는 것이 지혜라고 본다. 지혜를 수련하면 그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기 때문에 번뇌를 이길 수 있지 않나. 한만수 교수 질문에 대한 보충 설명이기도 하다.

임상실험 결과를 보면 어릴 적이든 선천적이든 한쪽 뇌 없는 사람은 잘 산다. 그러나 나이 들어 한쪽 뇌가 없어지면 힘들어한다. 그런 면에서 좌뇌와 우뇌가 독립적으로 의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 좌뇌와 우뇌를 딱 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생물학계 석학 교수에게 물어봤는데 그도 대답을 못했다. 내가 볼 때는 좌뇌와 우뇌를 가르면 독립된 두 개의 사람이 나타난다. 마치 지렁이를 둘로 나누면 두 마리의 지렁이가 되듯이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참나는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할 수 있다. ‘참나는 둘로 갈라졌나?’, ‘영혼이 둘로 갈라질 수 있나’라는 아주 심각한 질문을 할 수 있다. 내가 볼 때는 영혼이 둘로 갈라질 일도, 참나가 둘로 갈라질 일도 없다. 왜냐면 참나나 영혼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든 환망공상(幻妄空想)이기 때문이다. 그게 없다고 해야만 좌뇌 우뇌 분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중층구조 논의를 동일 층위에 두면 혼란”

우희종 : 좌뇌와 우뇌를 나눴을 때 두 개의 의식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가정이다.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들의 감각기간에 의해 형성된 의식, 안이비설신의와 모든 현상의 근간인 형태, 사랑도 칼로 찌르는 사랑도 사랑이고 아카페적 사랑도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고 보고 듣거나 하는 의식이 참나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다만 어느 층위에서 그것을 얘기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오늘 토론처럼 다양한 중층구조 논의를 서로 동일 층위에 놓고 이야기하면 혼란스럽고 알아듣기 힘들다. 하나의 질문에도 담겨 있는 중층 논의구조를 이해하면 논의하기 쉬울 것이다.

송재형(용주사 신도비대위 사무총장) : 오늘 기적과 같은 자리가 마련됐다. 15일부터 간화선 대법회를 한다. 간화선이 불교를 새롭게 세계화시켜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가? 참나불교로 나 혼자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종교라 할 수 있는가? 간화선 추구하는 것이 세계 고통 멸할 수 있는 대단한 것인가? 소승불교로 전락하고 있는 자본과 권력해서 권승이 판치고 조계종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가. 대들보 내려앉고 불타고 있다. 불교는 고통을 없애는 것인데 선과 악의 경계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회적 책임, 종교로서의 불교가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는가?

“계율 살아야 변태불교서 본래불교로 돌아갈 것”

박병기 : 경전에 계·정·혜 삼학(三學)이 함께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출발은 계라고 전제하고 있다. 선불교 정착 발전 과정에서 계를 쉽게 무시할 수 있고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불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계율을 현대적으로 재해석되는 과정도 포함해야 한다. 율장은 금서처럼 인식됐다. 한국불교가 본래 불교로, 변태불교에서 본래 불교로 돌아가는 출발점은 계율이 이 시대에게 맞게 살아나는 것이어야 한다. 승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에게도 역시 시대에 맞는 계율을 찾아야 하고, 불자들이라면 어떻게든 계를 지켜야 한다. 불자라면서 범계하는 풍토가 일반화돼 있다. 이번에 범계 스님을 대상으로 한 심판의 화살이 재가자들에게도 일정 부분 자성으로 가야 의미가 될 것이다. 한 쪽을 일방적으로 비방 지적하는 것은 곤란하다. 현재 직면한 범계 상황은 심각하다. 그런 것 정리하지 못하는 승단의 자정능력은 문제다. 심각하게 해결해야 할 독화살 중 하나다.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에 대해 질문하는 김영국 연경불교전책연구소장.ⓒ불교닷컴

김영국(연경정책연구소 소장) : 참나란 없다. 윤회가 없다. 큰스님들이 참나나 윤회 이야기를 방편으로 생각하지 않는가? 부처님 경전에 숫하게 이야기하는 게 참나, 윤회 없다는 거다. 큰스님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방편이 아닌가? 강병균 교수는 그런 부분을 문자에 집착해서 말하는 것은 아닌가. 큰스님들이 진짜 참나 있다, 윤회 있다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윤회는 ‘종 쇼비니즘’…윤회 진설로 받아들여 문제”

강병균 : 향봉 스님이 성철 스님에게 찾아갔다. 향봉 스님이 “윤회는 방편이다” 하니 성철 스님은 “윤회는 진설이다.” 했다. 성철 스님에게 윤회는 방편설이 아니다. 성철 스님은 윤회가 사실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윤회 사례, 학자들 주장을 수집해 책을 냈다. 진제 스님이나 연세 되는, 법랍이 되는 스님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이 몸뚱이 버리고 저 몸뚱이로 간다’, ‘주인공이 몸뚱이를 떠나면 며칠 지나지 않아 몸뚱이가 썩는다’는 것이다. 그분들에게는 확신이다. 이것은 소위 임사 체험과도 관계가 있다. 그분들이 명상을 통해 임사 체험 비슷한 것을 경험한다. 그러면 의식의 장난에 속아 주인공이 자기 몸을 빠져나간다고 망상을 한다. 현대 의학에서 인위적으로 임사체험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이미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임사체험 대가였던 사람, 이를테면 수잔 블랙모어라는 여자가 있다. 마음대로 유체이탈 하던 여자인데, 어느 날 자기 친구에게 물어본다.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이런 저런 일 하는 것을 봤는데 사실이냐” 하니 친구가 전혀 엉뚱한 대답을 했다. 거기서 충격을 받고 그 여자가 임사체험이라는 건 마음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윤회는 큰 스님들에겐 방편이 아니고 진설이다.

윤회는 ‘종(種) 쇼비니즘(chauvinism)’이다. 인간이라는 종이 모든 생명계의 생명체를 흉악한 존재로 만드는 쇼비니즘이다. 백인들이 흑인, 황인종을 열등종족이라 하고, 하나님이 실수로 흑인을 만들었다고 하는 종쇼비니즘에 해당한다. 동물들이 무슨 죄를 짓는가? 토끼가, 사슴, 노루, 참새가 무슨 죄를 짓는가. 죄 짓는 거 없다. 우리는 선업을 쌓지 못하면 토끼, 돼지, 말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실제 인간이 가장 흉악한 존재다. 다 잡아먹는다. 거꾸로 인거 같다. 흉악한 짓을 하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윤회론이라는 것이 경전에 나와 있다고 부처님의 진설이거니 하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불합리한 점을 간과한 점이 있다.

김영국 : 성철 스님이 윤회는 진설이라고 한 법문이 유명한 백일법문이다. 백일법문할 때가 1970년대다. 법문 하면서 “윤회가 있더라” 했다. 그 당시 서구에서 애드가 체이시 등의 임사체험이나 환생체험 책이 나왔을 때 그 책을 읽고 이야기했다. 성철 스님이 1994년 돌아가실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셨는가. 알고 있다면 답변해 달라. 내가 볼 때는 티베트불교의 환생이나, 서구의 환생, 임사체험 이런 책을 보고 한 때 경도가 됐을지는 모르겠는데, 실제 내가 아는 성철 스님은 윤횐느 방편이라 생각하셨다. 교수님이 성철 스님의 1970년대 생각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강병균 : 성철 스님이 말년에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 성철 스님이 아니더라도 티베트불교에서 윤회는 바뀔 수 없는 진리다. 달라이 라마는 환생신들에게 인가해 주고 그랬다. 스페인 가서 태어난 환생신이 있다. 그 젊은이가 스무 살에 “나를 이런 불교적인 틀에 가둬서 고문하느냐”하며 뛰쳐나와 지금 영화공부 중이다. 그렇듯 윤회라는 것은 환망공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가. 달라이 라마를 너무 신격화해서 그렇다. <불교닷컴> 칼럼에 에드가 케이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것 있다. 읽어보셨으면 한다. 전부가 애드가 케이시의 망상이다.

우희종 : 층위가 다른 것을 지금 얘기한다. 또 하나는 깨달았다는 이에게 너무 완벽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완벽한 것은 없다. 우리 이대로 온전한 것이다. 다만 깨달았다고 할 때 불교적 지향성, 연기실상에 대한 깨달음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경전에는 헛된 망상이 윤회한다는 표현도 있다. 스님들이 몰랐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각 종파마다 강조점이 다르고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티베트불교가 바라보는 것, 선종에서 바라보는 것 관점이 다르다. 이런 게 섞이게 되면 혼란스럽다. 사랑을 끈끈한 사랑이 사랑이냐, 아카페적인 사랑이 사랑이냐 논의 한다면 층위를 정해놓아야 잘 풀어갈 수 있을 것이다.

박병기 : 윤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티베트불교이다. 티베트불교를 공부하는 분에게 얘기 들어보자.

“윤회 않는 중생에게 윤회 멈추라 했겠나”

김준영 : 티베트 명상을 하고 있지만 간화선도 하고 있다. 상충되는 것이 아니다. 윤회 있다 없다 이 자리에서 증명 불가하다. 어찌 보면 희론에 가까울 수도 있다. 중요한 신념이 있을 것이고, 신념 속에 체험적으로 깨달음에서 본 것도 녹아 들어갈 것이고, 시대적으로 지금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벗기기 위해 방편으로도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를 멈추는 것을 말씀하셨지만, 부처님이 윤회를 멈추는 것 말씀하셨을 때는 분명히 윤회를 인정했기 때문에 말씀하셨지, 윤회하지 않는 중생에게 윤회를 멈추라고 한 것 아닐 것이다.
▲ 강병균 교수에게 질문하는 김준영 씨.ⓒ불교닷컴

조계종이 사랑의 매를 많이 맞는 거 같다. 대한민국 불교를 대표하는 게 조계종이라고 누가 얘기하고 있는가, 불교 지키고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이들이 출가자라고 한정돼 있다는 건 어느 법인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세워 놓고 우리를 때리고 있는 것 같다. 참나, 무아의 반대 개념으로서 유아적 참나인가? 그러면 유아론이 몇 분 선지식, 진제, 송담 그분들의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조사선, 간화선의 기본적 견해가 그렇다는 것인가 묻고 싶다.

강병균 : 중요한 질문을 했다. 간화선 조사어록을 보면 윤회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그런 점에서 선불교가 혁명적이라고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에는, 특히 옛날 스님 법문에는 거의 윤회론이 나온다. 나는 선불교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근자에 들어와 유행하는 현재 한국불교의 참나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김준영 : 내 경험으로는 윤회는 사실이고, 윤회는 욕망이 나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왜냐면 욕망을 쫓아 태어나는 것이라면, 그래서 윤회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윤회의 조건이라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여쭙겠다. 달라이 라마 존자가 미국 의학자들과 이야기 하다가 기관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 나왔을 때 “뇌라는 기관은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아닐까?” 이야기했다. 그때 “그런 가설을 한 번 세워볼 필요가 있다” 해서 그런 가설을 만든 분이 강 교수님이 발표할 때 명상의 효과에서 뇌의 변화를 말씀하실 때 잠깐 언급했던 존 카밧진 교수로 알고 있다. ‘마음이 사용하기 위해서 생겨난 기관이 뇌’라는 이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근이 안경 만날 때 안식 생긴다”

강병균 : 명제를 하나 이야기하겠다. ‘윤회는 있어도 소용이 없다’는 명제다.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씩 드리겠다. 여러분들에게 굉장히 이루고 싶은 소원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을 것이다. 내가 제안한다. 내가 빌게이츠인데 당신에게 100억 원을 당장 준다. 단 조건은 지금 이 순간부터 과거 기억은 다 잃고 갓난아기 같은 백지 상태로 돌아간다면 수락하겠는가? 여러분은 수락하겠는가? 거의 대부분의 사림이 즉각 거부한다. 어떤 사람은 “죽는 것과 같다. 난 안한다.” 이런다. 윤회라는 것은, 다시 태어나도 지구상에 자기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달라이 라마도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가 어렸을 때 기억한 거 같은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 그러면 갓난아이 상태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데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면 그 윤회가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이런 근본적 질문을 하는데 어느 누구도 반박을 하거나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한 적이 없다. 이게 첫 번째다.

두 번째, 마음이 수단으로 쓰는 것이 뇌이지 않은가 하는 것은 정확히 심신이원론이다. 마음이 따로 있다고 얘기하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왜냐면 불교에서 안근(眼根)이 안경(眼境)을 만날 때 안식(眼識)이 생긴다고 돼 있다. 안식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안근이 안경을 만날 때 안식이 생긴다 한다. 이건 현대과학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라 물체에서 나온 빛이 우리 망막을 때릴 때 생체전기가 발생한다. 생체 전기가 열심히 달려 우리 시각중추로 가면 본다는 현상이 일어난다. 전기가 열심히 달리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다. 그것은 마치 컴퓨터에 전기를 넣어 작동하기 전까지 컴퓨터는 그냥 죽은 물건인 것과 똑같은 현상이다. 안식이라는 게 미리 우리 두뇌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어서 마음이 뇌를 움직인다는 것은 내가 볼 때 ‘마설(魔說)’이다. 부처님 근본 사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나는 티베트불교를 귀신불교라 부른다. 귀신불교인 티베트불교엔 국가 신탁이 아직도 있다. 티베트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무당 같은 이가 존재한다. 귀신불교 입장에서 영육 이원론을 이야기한다. 영, 마음이 육, 뇌를 움직인다. 불교의 가르침과는 십만 팔천 리는 어긋난 가르침이라 생각한다.

“방편설로 여래장 충분히 의미 있다”

김준영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가 존 카밧진 교수에게 ‘마음이 사용하는 기관으로서 뇌’의 가설을 세울 수 있느냐고 물어본 것에 감사한다. 왜냐면 그래서 탄생된 MBSR이라는 의료명상에 많은 환자들이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여래장사상은 방편설이라 생각하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을 주장하는 것 때문에 수행 측면, 실제 공부하는 데서도 그렇고 자기 상대적 대비적으로도 그렇고 자기 위치를 파악하는 데 여래장사상이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방편설로서 여래장사상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생각한다. 강 교수님에게 고맙다.

우희종 : 나는 윤회 유무에 대해 믿지만, 또 믿지 않는다. 개인이 죽어서 나쁜 짓하면 개가 되고 돼지가 된다는 그런 윤회는 믿지 않는다. 방편설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한 것처럼 존재하는 순간 우리는 윤회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직선적 시간 속에서 윤회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시간은 직선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에 의한 육근 세계에서 내가 태어나서 죽음이 있기 때문에 시작과 종(끝)으로 이어지는 직선적 시간 속이 불가에서 말하는 윤회의 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 삶의 현장에서 존재하는 순간 마음은 육도 윤회를 하고, 몸 또한 이 세계와 열린 상태에서 단 한 순간도 윤회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정리하면 좋겠다.

뇌가 마음이라고 하니까 다양한 개념이 들어와 혼란스럽지만, 예를 들어 손이 물건을 쥔다. 물건을 쥐고 글 쓰는 것이 손이 하는 것인가? 뇌가 시켜서 하는 것이다. 그 논리를 그대로 적용해 뇌가 뭐 생각하고 한다는 데 이것 역시 마음, 그 무엇의 표현력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굉장히 과학적 자세다. 지금의 과학 수단, 방법으로 접근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또 다른 논의이다. 저에게 그 질문은 매우 소중하다. 개인적으로도 손 자체가 쥐는 게 아니라 뇌가 지시해서 손이 그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가 물건을 쥐는 것은 아니다. 뇌도 그 무엇에 의해서 변하는 기관일 수 있다는 가정은 여전히 열어놓고 있다.

“강 교수 윤회 비판은 힌두교 윤회 비판”


▲ 강 교수의 윤회불교 비판을 재비판하는 보성 정사(진각종).ⓒ불교닷컴

보성 정사(진각종) : 수행적 측면과 학문적 측면에서 무아(無我), 아(我)를 알아야 한다. 아를 모르고는 무아를 알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강병균 교수는 참나를 유아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진정한 참나는 무아라고 알고 있다. 참나는 무아적인 참나다. 나는 그런 이론적 결론을 가지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강 교수의 참나에 대한 해석은 유아적인 참나이다. 개념적 정의가 너무 과학적으로 치중돼 있고, 한편으로는 단순하지 않나 비판해 본다.

윤회는 불교 탄생 이전에 브라만에서 나온 단어이고 교리적 체계이다. 강 교수는 윤회라는 것을 불교가 받아들이면서 힌두교적인 윤회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 하는데, 불교적 윤회와 힌두교적 윤회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대승불교, 밀교로 넘어오면서 힌두교적 윤회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대부분 말씀하신 것이 힌두적인 윤회다. 강 교수의 윤회에 대한 비판은 힌두교적 윤회에 대한 비판이라 생각한다.

강병균 : 정사님 질문이 충격적이다. 첫째는 한국 선사들이 입에 달고 하는 말이 있다. “눈이 보느냐. 아니다. 마음이 본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이렇게 반격을 한다. “눈이 본다면 어떻게 송장은 보지 못하는가?”, “마음이 보는가? 그러면 왜 송장이 보지 못하는가?”, “봉사는 마음이 있는데 왜 보지 못하는가?” 내게는 항상 원칙이 있다. ‘간단한 질문에 답을 못하면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원칙이다.

서암 전 종정 스님은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노하는 이 주인공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존재다.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 영원히 있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한국 모든 선사들도 만장일치이다. 참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이상화해서 만든 용어가 아니다.

힌두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힌두교에서는 의식을 네 가지로 나눈다. 각성시 의식, 꿈꿀 때 의식, 숙면시 의식, 투리야 의식 네 가지 이야기하다. 투리야는 브라만의 의식이라고 얘기한다. 참선하면서 자기가 겪는 의식 상태를 참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가 한국에 힌두교 성자들이 인기 있는 이유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하나는 스님들은 청담 스님도 그렇고, 대부분 선사들은 생각은 참나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그 참나는 실체다. 결코 방편설,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정확히 자기 몸 끌고 다니는 실체로서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윤회 말씀하지 않았다니…”

▲ 강병균 교수의 참나불교 비판에 혼란스럽다는 한 불자.ⓒ불교닷컴

방명숙(직장인) : 재가자로 혼란스러울 때 많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그때마다 무한한 생을 달려왔고 다시는 집을 짓지 않겠다고 했다. 힌두교적이든 대승불교적이든 윤회하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나라는 실체가 이어진다는 생각은 안하지만 연기법, 존재의 실상이라는 거 뭔가 연결된 연기식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체득한 선정 명상의 단계가 일반 종교에서 말하는 명상과 종류가 달랐다는 것인가. 그런 여러 가지를 꿰뚫어본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윤회를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강병균 : 부처님이 보통 ‘견명성 오도’했다고 한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됐다.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게 아니고 밤새 사유하다 새벽이 온 것이다. 깨달음 얻었을 때 그때가 새벽이었다가 맞는 말이다. 초기경전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이라고 나온다. 내가 참나를 찾았다 이런 말은 절대 없다. 그래서 큰스님들이 얘기한 것이 전부 거짓말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다. 만약 참나를 깨달았다면 브라만교의 브라흐만을 깨달았다는 것과 같다.

선정 단계 이야기기했는데, 부처님이 처음에 색계 사선정을 버렸다. 그런데 색계 사선정의 특징은 일선에는 심이 있고, 이선에서 사가 있고 이런 식이다. 심사희락정으로 간다. 심사는 사유다.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은 나에게 사유력, 정진력, 인내력이 없었으면 나의 깨달음은 오지 않았다 이야기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밑에서 일주일 동안 버티시며 사유를 하신 결과 나온 게 연기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법에 의한 종교이지 참나를 깨닫는 종교가 아니다. 어디서 이런 무지막지한 참나가 나왔는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난다. 분명히 연기법에 의한 깨달음이다. 연기법에 의한 측면으로 보면 소위 윤회라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꼭 자아 정체성이 다음 생으로 간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같으면 유전자가 있다. 사실은 부처님 생사리가 사방으로 돌아다닌다. 부처님의 DNA만 복원하면 32상 80종호를 복원할 수 있다. 네팔 사람들에게는 부처님 유전자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추적을 하면 언젠가는 32상 80종호를 복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DNA를 자기 몸에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통도사 사리에는 DNA가 없다.

그리고 무형의 유전자가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 온 동양, 서양에 퍼져 있다. 그것이 부처님의 정신적 사리이다.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정신적인 사리이지 육체적인 사리가 아니다. 그런 면에서 유전자가, 정신적 유전자가 세상에 퍼진다, 그런 것을 윤회로 해석을 해야지, 좁은 의미의 윤회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 좁은 의미의 윤회는 철저히 개인주의다. 내가 복을 지어서 다음에 좋은 몸을 받겠다는 것이지 내가 좋은 업을 지어서 일체중생이 해탈을 얻겠다가 아니다. 대승불교는 무연자비(無緣慈悲)를 설한다. 아무 연 이 없는 사람에게도 자비를 베푼다. 그것은 내가 윤회를 못하더라도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연자비이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윤회라는 것이 있어도 아무 소용없다. 갓난아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윤회 유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즉 자기가 하는 행동이 민족, 동양, 인류, 생명계에 얼마나 기여하고 무연자비를 베풀 수 있느냐가 진정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네가 다음에 윤회 한다 안 한다, 네가 고생 안하려면 복을 쌓아라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부처님을 크게 폄훼하는 거라 생각한다.

“무아, 윤회 논쟁 지금 무슨 쓸모가 있나”


▲ 이혜숙 금강대 교수는 교리 논쟁 보다 현실적으로 무엇을 실천할 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불교닷컴

이혜숙(금강대 객원교수) : 유아냐 무아냐, 윤회가 있냐 없냐 하는 게 무슨 쓸모가 있는가. 윤회를 믿는 사람이면 다르게 사는가, 안 믿으면 또 다르게 사는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어느 법회에 가든 늘 이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가. 지금 물 맞아 죽은 노인이 있다. 그 일은 윤회를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안 믿으면 어떻게 반응하게 하는가. 대한민국이 정신 건강이 매우 나빠서 죽고 살기가 날마다 세계 1위인데, 여기 진지한 불자들은 그 아파서 혼자 죽는 그 수행에 대해서 무아며, 혹은 무아가 아니며, 어떻게 하시는 건가. 그거 생각해보자 도대체 이게 뭔 소린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다.

박병기 : 박광서 교수에게 총평을 듣겠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점이 중요하다”


▲ 총평을 하는 박광서 종자연 상임대표.ⓒ불교닷컴

박광서(종교자유정책연구원 상임대표) : 우리가 불교라는 것을 인연으로 만났다면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편했으면 좋겠고, 그것이 사는데 힘이 됐으면 좋겠고, 학술적으로도 불교에 대한 확신이 섰으면 좋겠다. 더 나가야 간다면 이혜숙 교수의 말처럼 우리들이 여기서 이런들 사회가 어떻게 바뀌는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는가 더 고민해야 한다. 오늘은 좁고 깊게 교리에 대한 논의가 되겠구나 그런 바람 가지고 왔다. 이혜숙 교수 말처럼 큰 바람은 없었다. 때로는 거칠고 때로는 과격하고 때로는 끊으면서 자극을 주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왜 불교를 믿는가. 나는 왜 불교를 믿는가,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해 봤으면 한다. 불교공부는 3개월만 하면 끝난다. 그 다음엔 연습하면 된다. 그 다음엔 불교 공부한 것으로 연습해야 한다. 평생 가정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회를 따뜻하게 하는 일에서 연습해야 한다. 그걸 안하고 평생 배우다 내생까지 미루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박병기 : 불교는 신앙이 아닌 신행이 기본이다. 신행은 행, 삶, 실천이 중심이다. 과연 우리가 불교적 믿음에서 신행에 충실하고 있는지, 충실하기 위해 교리공부하고 있는지, 교리공부 자체가 독립된 목표가 된 것은 아닌지 이런 것들을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불교중심 불교닷컴. 이 기사에 대한 반론 및 기사제보 mytrea70@gmail.com]


저작권자 © 불교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