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7

최현민 연구실 > 도겐 연구 > 도겐의 [무불성론]과 [무상불성론]

최현민 연구실 > 도겐 연구 > 도겐의 무상불성론







도겐의 무불성론

Down : 46, 2011-06-01 11:19:02

1) (2) 無常佛性論

2)

3) ① 無常의 의미

4)

무상불성은 무불성과 함께 도겐의 불성이해에 있어 중요한 주제이다. 김희진은 무상이야말로 도겐의 종교에 있어 알파요 오메가라 칭한다. 따라서 도겐의 무상불성을 살피기 전에 먼저 그의 무상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諸行無常은 원시 불교 이래 불교의 근본 가르침으로 전수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성사상의 발전과 함께 常的인 측면이 불교교리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心性常住論的 불성이해이다. 이러한 불성이해를 바탕으로 도겐이 말한 무상불성은 ‘無常’과 常의 의미를 지닌 ‘불성’이 결합한 것일까? 사실 도겐의 무상불성은 無常과 常을 초월한 絶對無의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도겐의 불성이해와는 거리가 멀다. 도겐은 『정법안장』「山水經」의 서두에서 芙蓉道楷의 말을 인용하여 무상을 설명한다. “푸른 산은 언제나 걷고 있네.” 겉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산도,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르마들의 흐름 안에 끊임없이 변화되어 간다는 의미이다.

이렇듯 전우주가 역동성 안에서 도겐이 말한 ‘全機’라는 표현은 이를 잘 보여준다. 全機를 배에 탄 것에 비유하자면, 배밖에 내가 없고 나밖에 배가 없고 하늘, 물, 해안을 비롯한 세계 전체가 배와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배가 곧 生이며 세계 전체가 배의 기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달리 一法究盡으로도 표현된다. 一法究盡은 하나의 법 안에 우주 전체가 드러남을 의미한다. ‘꽃 한송이에 온 세계가 피어난다’는 도겐의 표현처럼 하나의 법에 모든 것이 내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화엄사상과도 일맥상통하나 도겐의 경우는 그보다 더욱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諸惡莫作」에서 “一塵을 아는 것은 전세계를 아는 것이며 一法에 통하는 것은 萬法을 통하는 것이다. 萬法에 통하지 않는 것은 一法에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 도리에 통철할 때 萬法도 볼 수 있고 一法도 볼 수 있다. 一塵을 배우는 것은 세계 전체를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한 一法究盡의 의미이다. 하나의 달마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말하는 一法究盡은 十方世界 전체를 하나의 眞實人體로 參學하는 것이므로 수행을 떠나선 있을 수 없는 세계이다.

앞서 우리는 도겐의 무상관이 그에게 보리심을 내게 한 동기였음에 대해 살펴보았다. 인도의 龍樹 또한 ‘무상을 觀함이 곧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도겐은 이를 『學道用心集』 초두에 언급하고 있다. “보리심의 명칭은 많지만 다만 하나이다. 용수는 다만 세간의 생멸무상을 觀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이름한다. 참으로 무상을 觀하는 것이야말로 보리심이다.” 이와 같이 무상을 관함이 곧 보리심을 관함이라고 본 도겐은 『정법안장수문기』에서도 이를 다시 강조하고 있다. “무상을 觀함이 第一의 用心이다.”

그러나 도겐에게 있어 무상의 의미는 단지 보리심을 일으키는 차원을 뛰어넘어, 그의 수증관 전체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修證의 문제는 ‘無常을 觀함’과 직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無常을 觀한다’는 것은 무상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깨침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성불하기 위해서 좌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좌선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무상을 觀함은 곧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無我를 觀하는 것이다.

도겐의 표현을 빌리자면 無我를 觀하는 것은 자신의 身心을 放下하는 것이며 身心을 放下하는 것은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집착을 버리는 길이 곧 무상의 자각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집착은 我執과 我慢을 내려놓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도겐이 말한 身心放下이며 身心脫落이라는 것이다. 도겐은 우리가 身心을 放下하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學道해도 깨침을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한다.

身心을 放下할 때 비로소 우리는 佛의 大海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심탈락은 如淨 아래서 도겐이 깨친 세계이다. 도겐은 이를 無我를 觀하는 것이며 無常을 觀하는 것으로 재해석했다. 이렇게 볼 때 무상을 관함은 단순히 보리심을 발하는 차원을 넘어 깨침의 세계와 직결됨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무상불성은 도겐의 무상관과 수증관을 관통하는 세계라 할 수 있다.

5) ② 도겐의 無常佛性
6)
7) ㉠ 도겐의 時間觀
8)

무상불성은 도겐의 시간관 속에 잘 드러난다. 그의 시간관을 잘 보여주는 것은『정법안장』「有時」이다. 도겐은 여기서 “하나의 시간 속에 있는 하나의 有(존재)는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法位에 머문다’라고 표현한다. “알아야 한다. 땔감은 땔감의 法位에 머물고, 재는 재의 法位가 있다. 여기에 前後際斷이 있다.” 前後際斷이란 「現成公案」에 나오는 말로, 도겐의 시간관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땔감이 타면 재가 된다. 재는 다시 땔감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땔감이 앞이고 재는 뒤라고 해선 안된다. ...전후가 있지만 전후의 흔적은 끊어진 것이다.... 땔감이 재가 된 후에 다시 땔감이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사람도 죽은 후 生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生이 死가 된다고 할 수 없는 것은 佛法이 정한 것이다. 그 때문에 不生이라고 한다. 또한 죽음이 生이 될 수 없는 것도 佛說의 규정이다. 그 때문에 이를 不滅이라고 한다. 生도 일시적인 것이며 死도 일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인과관계로 보기 때문에 “땔감이 변해 재가 된다”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도겐은 땔감이 변해 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땔감은 땔감의 때가 있고, 재는 재의 때가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땔감은 땔감의 法位가 있고 재는 재의 法位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하나의 法位에 존재가 全機現한다는 의미이다. 도겐은 이를 前後際斷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마치 “生은 生의 全機現이고, 死는 死의 全機現”라고 표현한 圜悟克勤(1063-1138)의 표현과도 일맥상통한다.

도겐은 이러한 前後際斷의 시간을 ‘經歷’이라고 말한다. 有時의 經歷은 삼라만상이 生死 流轉하는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봄은 여름 가을 겨울을 전제로 한 봄이 아니라 ‘봄’ 자체로서 ‘現成’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봄은 봄의 全機現이고 여름은 여름의 全機現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有時의 도리는 直下當處, 正當恁麽時 또 而今을 떠나선 결코 자각될 수 없다. 이것은 도겐에게 있어 佛道는 결코 정지되어 있는 무엇도, 도착해야 할 무엇도 아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참된 佛道는 깨침이라는 하나의 정착지가 있어 그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목적지로 알고 살아가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한 有時現成, 今現成, 有時而今의 의미이다.

이러한 도겐의 시간관에서 볼 때, 그에게 있어 무상은 단순한 시간관이 아니라, 불성의 근거이다. 무상불성설은 초기선종 자료에서는 볼 수 없으나 『景德傳燈錄』5卷, 「江西志徹章」에는 나오고 있다. 『景德傳燈錄』에서 제자 志徹(行娼)이 혜능에게 『涅槃經』에 나오는 佛性常住에 대해 묻는다. 즉 모든 현상은 無常인데, 生滅常無常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자 慧能은 “無常이 곧 佛性이다. 有常은 곧 一切善惡諸法의 分別心이다”라고 응한다. 이 때 志徹(行娼)이 “『涅槃經』에서는 佛性이 常이라고 하는데 (6조)和尙께서는 無常이라 하니 이는 경전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습니까”라고 반문한다. 즉 行娼은 『涅槃經』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無有變易”를 들어 ‘如來가 常住하여 變易가 없으므로’ 불성은 常住하지 無常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것이다.

行娼은 常으로서의 불성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行娼에게 6조는 常으로서의 불성관이야말로 禪을 배우려는 자들이 부수어야 할 과제임을 가르친 것이다. 行娼은 자신이 지닌 불성관과 달리 ‘무상이 불성’이라고 설하는 혜능에게 “선사께서 말씀하시는 불성은 『열반경』에 나오는 것과 다르지 않느냐”고 되묻는다. 이에 대해 혜능은 ‘무상불성’이라고 답한다. 도겐이 혜능을 古佛이라고 칭송한 것은 혜능의 무상불성론에 있다. 그래서 도겐은 종전에 사람들이 이해해 온 것과 다른 시각에서 혜능을 보고자 한 것이다.

9) ㉡ 도겐이 바라본 慧能
10)
『壇經』이 혜능의 저술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지만 『경덕전등록』 이후의 송대 불교계(선종)에서는 『壇經』이 육조혜능의 설법집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즉 송대에 들어서면서 혜능은 선불교의 이상화된 조사상으로 정착되어간 것이다. 일본 승려 圓仁이 당나라에 들어가서 수집한 경전 목록(『入唐求法目錄』)에 보면, 장안에서 『曹溪山 第六祖 慧能大師說 見性頓敎 直了成佛 決定無礙 法寶記壇經』(沙門 法海集)을 입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圓珍(814-891)도 福州, 溫州, 臺州에서 『壇經』을 입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慧能 求法이야기」도 소중한 선문헌으로 간주되었다는 것은 당대에 혜능을 얼마나 중시된 인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겐은 『정법안장』「四禪比丘」에서 『壇經』이 見性사상을 설하고 있다고 하여 비판하고 있다.

『壇經』에 見性이라는 말이 있어 그 책은 僞書가 되며 佛祖正傳되어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6조의 언어가 아니며 佛祖의 法孫이 이용하지 않는 책이다.

당시 송대불교나 일본불교에서의 『壇經』의 위상을 생각할 때, 이것이 僞書라는
도겐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다. 종래에는 『정법안장』 중에 『壇經』에서 인용한 것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壇經』과 見性에 관한 비판이 과연 도겐이 한 말인지 의심해 왔다. 그러나 도겐의 저술 속에 나오는 引用語錄을 연구해온 鏡島元隆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법안장』안에는 『壇經』으로부터 인용된 것은 한 문장도 없다. 그러므로 도겐이 한편으로는 『壇經』을 僞書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壇經』을 인용하고 있다는 종래의 통설은 (도겐)禪師에 대한 오해이다. 이 통설에 따라 도겐과 『壇經』을 연결시켜 설한 논자는 『정법안장』의 어느 권이 『壇經』의 어느 本과 일치하는지 명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다만 도겐이 六祖에 대해 설하고 있다는 이유로 『정법안장』이 『壇經』을 인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와 같이 도겐이 『壇經』을 인용했다는 종래의 설을 부정한 鏡島의 연구발표 후 도겐이 『壇經』과 거리를 두고 혜능을 보았다는 해석이 가능해졌다. 도겐은 六祖를 古佛이라 부르거나, 古佛의 古佛이라는 최고의 존칭으로 표현하고 있다. 만일 도겐이 『壇經』을 혜능의 저서로 보았다면 그가 『壇經』의 견성사상을 비판한 것과 혜능을 古佛로 칭송한 도겐은 서로 상충될 것이다. 즉 그가『壇經』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六祖에게 古佛이라고 한 것은 도겐이『壇經』과는 거리를 둔 혜능상을 설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도겐과 『壇經』 그리고 혜능과의 관계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문제에 대해 石井修道는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도겐은 『壇經』을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壇經』을 六祖의 설로 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도겐은 六祖를 古佛이라 불렀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壇經』과는 다른 六祖의 像을 만들었다고 본다.

石井의 말처럼 도겐이 혜능像을 새롭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일까? 이에 대해 石井는 도겐이 『壇經』을 이용하여 혜능像을 만들기는 했으나, 『壇經』에 나오는 견성설과 육조혜능의 연관성을 완전히 없앴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견성사상과는 무관한 혜능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石井는 도겐이 禪을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는데 그 중 하나가 6조의 行狀을 확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은 혜능의 行狀 속에서 見性說과 거리를 둔 채 새로운 혜능의 모습을 등장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壇經』을 보면 見性의 性을 自性淸淨한 性品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품은 곧 불성을 말하며, 그것은 상주불변하는 常의 측면을 갖고 있다.

모든 가르침(萬法)은 모두 자기의 마음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자기의 마음에서 단번에 진여의 본성을 깨닫지 못하는가? 『菩薩戒經』에 말씀하기를 ‘우리들의 本願은 원래부터 본성이 청정하다’ 라고. 자신의 마음을 알고 본성을 깨달으면 스스로 佛道를 이룬다. 『淨名經』에 말하기를 ‘즉시에 활연히 깨달아 본심으로 되돌아간다’라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이 도겐이 견성사상을 비판한 것은 見性의 性을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본 심성상주론에 대한 그의 비판과 맥을 같이 한다. 다시 말해 見性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常으로서의 佛性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견성사상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혜능을 古佛이라고 불렀다고 해서 혜능이 견성사상과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견성은 자성청정심, 본래성불에 대한 자각이다. 다시 말해 대승교의가 지닌 근본적인 믿음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성청정심을 ‘常으로서의 불성’으로 보는 데 있다. 도겐이 비판한 것은 이러한 왜곡된 불성이해에 근거한 견성사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정법안장』에서 그린 혜능에 대해서 고찰해 본다. 도겐은 『정법안장』「行持」권에서 “六祖가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老母에게서 성장하여 벌목꾼으로 모친을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 『金剛般若經』의 한 구절을 듣고 老母를 떠나 大法을 구하고자 했다”고 설한 뒤 “이같이 老母의 애정을 끊는 것은 慧可가 팔을 자르고 달마의 제자가 된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었다”고 말한다. 도겐은 혜능이 老母를 떠난 것은 세속의 恩愛를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法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恩愛의 情을 버린 것으로 해석한다.

도겐은 이어서 “혜능이 弘忍의 會下에 들어가 쉬지 않고 弘忍의 命에 의해 밤낮으로 곡식을 빻는 일을 했고 그 후 홍인에게서 衣鉢을 전수받았다”고 서술한다. 그러면서 법을 얻은 후에도 밀을 빻는 일을 계속했고, 스승이 되어 중생제도를 위해 설법할 때에도 돌절구를 버리지 않았다고 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뛰어난 行持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혜능의 행적에서 무엇보다 중시한 것은 혜능의 佛心과 行持임을 알 수 있다. 南嶽에게 是什麽物恁麽來라는 화두를 던져준 혜능의 가르침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도겐이 그린 혜능은 제자인 南嶽에게 ‘是什麽物恁麽來’라는 화두를 던짐으로써 자신과 직면하도록 촉구하는 조사의 모습이다. 바로 그러한 혜능의 가르침은 도겐이 말한 無常佛性의 가르침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11) ㉢ 無常佛性
12)
도겐은 6조가 말한 무상불성에 기초하여, 자신의 무상불성관을 펼쳤다.

六祖가 제자인 行娼에게 말한다. “無常이 곧 불성이다. 有常은 곧 善惡一切諸法分別心이다. 소위 六祖가 말한 無常은 外道二乘에게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二乘外道의 鼻祖鼻末(祖先에서 末流에 이르기까지)이 무상을 말한다고 해도 그들(二乘外道)이 무상을 究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상은 스스로 무상을 說하며,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行하며, 무상이 무상을 證하기에 모두 무상인 것이다.” 지금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得道하는 자는 곧 자신을 드러내서 법을 설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성이다. 또한 긴 法身을 드러내거나 혹은 짧은 法身을 드러내서 스스로 자신과 남을 위해서 佛法을 설한 것이다. 늘 聖인 것도 無常이고 늘 凡인 것도 無常이다. 늘 凡이거나, 늘 聖인 것은 불성의 드러남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자는〕어리석은 생각과 좁은 사고방식을 지닌 자이다.... 이런 견지에서 6조는 “무상이 불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도겐은 “無常은 佛性이며 有常은 善惡一切諸法分別心”이라고 한 혜능의 말을 언급하면서 다른 종교사상이나 聲聞, 緣覺 등 二乘外道의 祖先부터 末流에 이르기까지 모두 常으로서의 불성을 지녔기에 6조의 무상불성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불성을 영원한 것으로 아는 이들은 無常에 대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二乘外道들도 무상에 대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六祖의 무상과 外道의 무상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6조는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說하고 行하고 證한다”고 한다. 무상이 스스로 무상을 行하고 證한다는 것은 無常이며 無我인 우리가 無常을 행하고 證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無常이고 無我이므로 우리에 의해 설해지는 것 또한 무상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무상이 무상을 설한다는 것은 ‘무상인 우리’가 ‘무상’을 설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無常인 우리가 無常을 行하고 깨달아가기에 무상이 무상을 行하고 證한다는 것이다. 무상인 우리가 무상을 행하고 증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무상을 살 때 가능하다. 지금 여기를 무상을 깨치기 위한 수단의 장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를 生의 전기현, 死의 전기현으로 여기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무상불성에 대한 도겐의 해석에서 ‘무상은 불성’이라는 것에 이어 나오는 ‘常은 未轉’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마치 석존께서 법륜을 돌려 법을 전하듯 正法은 佛祖에 의해 轉해지는 것인데, 常으로서의 불성은 轉해진 佛法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즉 佛法正傳을 중시한 도겐 입장에서 볼 때 佛祖에게 전해지지 않은 常으로서의 불성은 진정한 佛法이라 할 수 없다.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佛祖를 통해 轉해진 것이며 無常佛性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이 轉法輪으로서의 불성이야말로 도겐이 말한 무상불성의 핵심이다. 다시 말해 도겐이 무상불성을 통해 말하려는 것은 불성은 고정되어 있는 무엇이 아니라 佛에서 佛에로, 祖師에서 祖師에로 전해져 正傳佛法이라는 것이다.

도겐의 수증관을 이루는 두 축 중 하나는 正法인 좌선이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 왔다는 것이다. 도겐은 무상불성 역시 이 안에서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무상불성은 불성의 현성뿐 아니라 正傳불법의 의미까지 보여줌으로써 도겐의 수증관의 핵심을 드러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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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wn : 44, 
2011-06-01 


가. 2. 도겐의 無佛性論

나.

1) (1) 無佛性

2)

3) ① 4조와 5조를 통해 본 無佛性과 修證의 관계

4)

도겐은 悉有佛性에 이어 無佛性에 대해 말한다. 無佛性은 마치 무신론과 유신론관계처럼 有佛性의 대립개념인 ‘불성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도겐이 말한 무불성은 이것과 거리가 멀다. 그래서 종래에는 무불성에 대한 도겐의 해석을 무불성이 유불성과 상반된 것이 아님을 전제로 有無를 초월한 絶對無로 해석해 왔다. 김희진은 絶對無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으나 무불성을 '구체적인 실재를 초월한다'는 의미로 보았다. 다시 말해 무불성이 지닌 초월적 힘이 존재의 특수성에 고착화됨에서 자유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有無를 초월한 입장에서 ‘悉有佛性’이 하나하나의 구체적인 존재에 불성이 드러남을 표현한 것이라면,  ‘無佛性’은 그 존재에 고착화함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쓰여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무불성’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有無를 초월한 絶對無나 유불성을 초월한다는 것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를 고찰하기 위해 4, 5조의 문답에 나오는 무불성에 관해 살펴보자.

五祖 大滿禪師는 黃梅人이다. 아비없이 태어나서 童兒로서 道를 얻었다. 松을 재배하는 자가 되었다. 처음에 蘄州 西山에 살면서 松을 재배하는 자가 되어서 西山에서 松을 재배하다가 4祖를 만났다. 4祖는 “나는 너에게 法을 전하고자 하지만 너는 나이가 너무 많다. 만일 네가 다시 태어나게 된다면 그 때까지 나는 너를 기다릴 것이다.” 5祖는 周氏家 여자의 태를 빌려 다시 태어났다. 그는 하구에 버려졌다. 그가  神物을 지니고 있어서인지 7일간 아무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를 데려와 키웠다. 7세에 이르러 童子가 되었을 때 黃梅路上에서 4祖 大医禪師를 만났다. 4祖가 그를 보았을 때 그의 骨相은 寄秀하고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서 4祖는 “너의 姓은 무엇이냐?(汝何姓)”고 물었다. 답하기를 “姓은 있으나 常姓은 아닙니다(姓卽有 不是常姓).”

다시 (4祖가) “姓이 무엇이냐(是何姓)”라고 묻자 5祖는 “불성입니다(是佛性)”라고 답한다. 4祖가 “너는 불성이 없다(汝無佛性)”라고 하자, 5조는 “佛性은 空이므로 無라고 한 것은 옳습니다(佛性空故 所以言無)”라고 답했다. 이에 4조는 그의 法器를 알아보고 그를 제자로 삼아 후에 그에게 정법안장을 전했다. 그는 黃梅東山에 머물면서 크게 玄風을 떨쳤다. 

4조가 5조에게 ‘너의 姓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5조는 나의 姓은 ‘佛性’이라고 답한다. 4조는 개별적인 姓을 물었는데 5조는 개별적인 ‘姓’의 의미를 넘어 보편적인 ‘(佛)性’으로 응한 것이다. 그러자 4조는 다시 “너는 무불성이다”라고 답한다. 무슨 의미인가? 이는 보편적인 (佛)性으로 답한 5조에게 또 다른 도전을 던진 것이다. 4조가 말한 무불성은 중국선종이 피어나는 시기에 있었던 차별사상과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는 姓에 따라 신분이 결정된다. 따라서 姓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아는 것이다. 이같은 신분적 차별사상을 전제로 할 때 “너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한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발언이다. 실제로 부모없이 태어난 5조에게 “너는 불성이 없다”고 한 4조의 말은 5조의 출신을 무시하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5조는 “불성은 空이므로 無”라고 응하여 空의 입장에서 무불성을 해석한다. 도겐은 이러한 4, 5조의 문답에 대해서 새롭게 해석한다. 그럼 먼저 4조가 물은 ‘汝何姓’에 대한 도겐의 해석부터 살펴보자.
조사가 말한 의미를 參究할 때 4조가 “너의 姓은 무엇이냐”라고 물은 것은 그 宗旨가 있다. 〔『傳燈錄』의 問答에서는〕 옛날에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何國人)’라고 물으면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답하고, ‘어떤 姓인가(何姓)’라고 물으면 ‘어떤 姓’이라고 답했다. 그 때에는 姓이 무엇인지를 묻고 확인한 후에 법을 설한 것이다.

예를 들면 〔六祖가 제자 南嶽懷讓에게 보여준〕“나도 이와 같고 너도 또한 이와 같다(吾亦如是 汝亦如是)”라는 말이 그것이다..... 4조가 말한 “당신은 무슨 姓이냐(是何姓)”에서 ‘何는 是이며 是는 何이고 그것이 곧 姓’인 것이다. 무엇(何)이라고 묻는 것이 是이며 是라고 하는 것이 何이다. 姓은 是이며 何이다. 이것은 쑥탕(蒿湯)이나 茶湯을 끊이는 것같은 日常茶飯의 생활 안에 偏在해 있다.

4조가 “당신은 무슨 姓이냐?(是何姓)”고 물은 것은 단순히 개체를 가리키는 이름의 姓을 물은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是何姓의 ‘是, 何, 姓’ 각각을 독립적으로 보아 是는 곧 何이고 何는 곧 是이며, 姓은 是이고 何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도겐의 해석은 ‘是, 何, 姓’ 각각을 모두 現成하는 불성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何라고 묻고 是라고 답할 때, ‘是’인 불성과 ‘何’인 불성이 顯現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四祖가 ‘姓이 무엇이냐(是何姓)’고 물었을 때 五祖는 ‘불성이다(是佛性)’라고 답했다. 종래에는 4조가 개별적인 姓을 물었을 때, 5조가 佛性으로 답함으로써 우리의 관심을 ‘姓’에서 ‘性(佛性)’에로 돌려 놓았다고 해석했다. 즉 5조는 각자의 개별적 姓의 관점에서 보편적 佛性에로 우리의 시선을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겐은 무불성을 통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를 넘어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측면을 말하고 있다고 해석해 왔다. 다음은 도겐의 무불성의 의미를 새롭게 보게 한다.

이 宗旨는 是는 佛性이라는 것이다. 何이기 때문에 佛이 되는 것이다. 是는 何姓일 뿐임을 究取해야 한다. 是는 이미 不是의 때에 불성이 된다. 즉 是는 何이며, 佛이라고 해도 〔그런 불성마저도〕脫落하고 透脫할 때 반드시 姓이 된다. 그 姓氏가 (5조의 경우는) 바로 周인 것이다.

도겐이 是佛性을 “是는 佛性이다. 何이므로 佛이다”라고 하거나 “是는 모두 不是의 때에 불성이 된다”고 한다. 이에 대해 종래에는 常으로서의 존재방식을 넘어선 불성을 말하기 위함이라고 해석해왔다. 즉 何이건, 是이건, 姓이건, 佛이건 간에 고착하는 곳에서는 불성이 현성할 수 없으므로 도겐은 그 모든 것에서의 透脫을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是는 이미 不是의 때에 불성이 된다”고 말한 의미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이 무불성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常이라는 불성의 고착화로부터 초월하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나, 도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증의 차원에서 이를 해석한다.

4조는 말한다. 너는 無佛性이다. 이는 너는 (다른) 누가 아니라 너는 너일 뿐이지만 無佛性으로서 開示한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時節의 無佛性인지를 알고 배워야 한다. 覺者로서의 無佛性인가, 覺者가 佛向上한 無佛性인가,... 佛性成佛時 無佛性인가, 보리심을 발한 때(發心한 때) 無佛性인지를 묻고 말해야 한다. (禪院에 있는 하나의) 露柱에게도 물어보자. 露柱에게도 묻지 않으면 안된다. 佛性에게도 묻지 않으면 안된다.

도겐은 4조가 말한 汝無佛性을 ‘너는 불성이 없다’로 해석하지 않고 ‘무불성’을 한 단어로 보아 ‘너는 무불성’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면서 도겐은 이 때의 무불성이 覺者로서의 무불성인지, 覺者가 佛向上한 무불성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修證 안에서만 무불성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하기 위함이 아닐까? 이러한 해석은 그 뒤에 도겐이 말한 무불성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 20년, 30년 아니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끊임없이 參究해야 한다고 역설함에서 입증된다.

이와 같이 도겐이 말한 무불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修證의 세계를 떠나서 이해될 수 없음을 먼저 자각할 필요가 있다. 無佛性의 세계는 우리가 發心하여 수행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세계라는 자각이야말로 도겐이 말하려는 무불성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데 열쇄가 된다.

도겐은 佛性成佛時 無佛性인지, 發心時 無佛性인지 묻고 있다. 이것은 發心할 때의 무불성이나, 修行할 때의 무불성, 成佛할 때의 무불성이 같은지, 아니면 다른지를 묻는 것이다. 도겐이 자주 사용하는 용어 중에 行持道環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발심한 후 수행하고 그 후에 보리를 얻어 열반에 드는 것과 같이 점진적인 경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발심의 때나 수행, 보리, 열반의 때가 각각 불성이 現成하는 때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佛性成佛時 無佛性’이나 ‘發心時 無佛性’ 모두 불성의 현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의 무불성 역시 修證의 관점에서 표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修證의 관점에서 무불성을 본다면 앞서 살펴본 有佛性과 무불성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도겐은 무불성이 유불성보다 우수하다고 말하고 있다. 도겐은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5조와 6조의 무불성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5) ② 5조와 6조의 無佛性과 作佛의 관계

作佛은 ‘내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敎信에 바탕을 두고 성불하기 위해 닦는 수행을 말한다. 그렇다면 ‘본래 부처’라는 중국선종의 祖信의 관점에서, 작불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나? 무불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5조와 6조 간의 문답은 작불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第6祖 曹谿山 大鑑禪師가 黃梅山에 처음으로 갔을 때
5조; 너는 어디에서부터 왔느냐?
6조; 嶺南人입니다.
5조; 와서 무엇을 찾고자 하느냐?
6조; 作佛을 바라고 있습니다.
5조; 영남인무불성인데 어떻게 作佛하겠는가?

이것의 출처는 『壇經』인데 거기서는 5조가 6조에게 “영남에서 왔다면 너는 오랑캐가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꾸짖는 것으로 나온다. 다시 말해 5조가 “너는 영남인이기 때문에 불성이 없는데 어떻게 作佛할 수 있겠느냐”라는 식으로 혹독하게 6조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6조는 자신을 무시하는 5조의 말에도 불구하고 “사람이야 남쪽과 북쪽이 다르겠지만 불성에도 남북이 있겠습니까? 나의 오랑캐몸과 大師의 몸이 같지는 않겠지만 우리의 불성이야 무슨 다름이 있겠습니까”라고 응한다.

 이러한 6조의 응답에 대해서 종래에는 “弘忍과 같은 蘄州 黃梅縣 出身의 북쪽 사람과 혜능과 같은 廣東省 新州 出身의 남쪽 사람은 구별할 수 있으나, 인간의 근원인 불성은 남북과 같은 차별이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 왔다. 즉 물질적인 육체는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虛融한 空이므로 남북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는 것을 ‘모든 중생에게 평등하게 불성이 있다’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의 의미로 해석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영남인무불성에 대한 해석이다. 종래에는 이를 ‘영남인은 불성이 없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도겐은 ‘영남인무불성’을 하나의 고유명사로 보고 있다.

‘영남인무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영남인은 불성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영남인은 불성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남인무불성’일 뿐이다.

이러한 도겐의 해석에 대해 종래에는 4조와 5조의 무불성과 같이 ‘영남인무불성’에서 無의 의미는 佛性의 有無가 아니라 유무를 초월한 절대무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도겐이 ‘嶺南人無佛性’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영남인무불성 자체를 佛性의 現成으로 보려는 것이다. 이는 영남인이 그 자체로 ‘무불성으로서의 불성’을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영남인을 ‘무불성으로서의 불성’이라고 본 도겐은  “영남인무불성인데 어떻게 作佛하겠는가?” 또한 종전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종래에는 본래부처라는 祖信에 근거하여 불성을 이해해 왔으므로 다만 이를 자각하면 된다고 말해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성을 종자로 보아 마치 씨앗이 자라듯이 수행을 통해 점차 부처가 된다는 작불 개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6조가 작불을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6조가 말한 “사람에게는 남북이 있어도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도겐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六祖는 말한다.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 이 말을 들어서 그 句의 뜻을 공부해야 한다. 南北에 대한 말을 바로 존재 그 자체(赤心)의 現成에 비추어 고찰해야 한다. 六祖가 道得한 句는 宗旨가 있다. 이른바 사람은 作佛해도 불성은 作佛하지 않는다는 것은 一隅의 搆得이 있다.

六祖가 말한 ‘사람은 남북이 있으나 불성은 남북이 없다’는 것을 거듭거듭(再三撈摝) 參學공부해야 한다. 그 공부(撈波子)에 力量이 있어야만 한다. 六祖가 말한 “사람은 남북이 있으나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는 말을 조용히 拈放(참학공부)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는 말한다. “인간에게는 일정한 공간(質礙)이 있어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虛融해서 남북의 논지가 미칠 수 없다.” (이것이) 六祖가 말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자이다. 이 邪解를 벗어버리고 곧 바로 參學해야 한다.

종전에는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는 것을 “인간에게는 육체라는 공간(質礙)이 있어 남북의 구별이 있으나 불성은 虛融하여 남북의 구별이 없다”고 해석해 왔다. 그러나 도겐은 이러한 해석은 六祖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본다. 도겐은 어떤 관점에서 이를 잘못되었다고 보았을까? ‘불성에는 남북이 없다’는 말에는 ‘불성은 상주불변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불성은 상주불변하므로 남북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사람은 作佛해도 불성은 作佛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一隅의 搆得이 있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말하는 搆得이란 본래 會得, 合點, 了解, 契當의 뜻으로 ‘깨닫는다’는 의미이다. 도겐은 搆得 앞에 一隅를 써서 이를 ‘하나의 한계’라는 뜻으로 보았다. 즉 본래성불의 관점에서는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이 맞는 표현이나, 도겐은 여기에 일종의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작불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려는 도겐의 의도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작불에 대한 도겐의 새로운 해석은 무엇인가?

종래에는 “사람은 作佛해도 佛性은 作佛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에게는 南北이 있어도 佛性에는 南北이 없다”는 견지에서 이해했다. 다시 말해 불성은 본래 주어져 있으므로 수행을 수단으로 깨침을 얻고자 하는 작불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작불에 대한 견해는 본래성불이라는 祖信에 바탕을 둔 수증관에서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祖信에 근거해서 볼 때 좌선을 수단으로 삼아 성불한다는 作佛 개념은 부정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6조가 말한 것처럼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이를 ‘一隅의 構得’으로 보아 그 안에 한계가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도겐은 ‘作佛’ 또한 수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는다. 도겐에게 있어 작불은 무엇인가?

앞서 말한대로 본래부처라는 祖信에 근거한 수증관에서는 수행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보조국사 知訥(1158-1210)은 수행의 관점에서 自性定慧와 隨相定慧를 구별한다. 隨相定慧의 定은 수행자가 그때 그때 직면하는 相과 事로서의 번뇌에 꾸준히 대처해 나가는 삼매(samādhi)이며, 慧는 諸法 하나 하나에 대하여 미혹됨이 없이 그 空을 觀하는 般若(prajnā)를 의미한다. 지눌에 의하면, 隨相定慧의 修는 北宗이나 기타 방편적 가르침들에서 행하는 修의 길로서 最上乘禪이 아니다.

반면, 自性定慧는 자신의 본성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定과 慧를 의미한다. 이것은 眞心의 體가 지니는 두 측면인 寂과 知, 定과 慧를 가리킨다. 따라서 自性定慧를 닦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의 心性에 내재해 있는 불성을 닦는 것이므로 ‘修 아닌 修’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作佛行은 隨相定慧의 修이다. 도겐의 작불해석은 隨相定慧에 근거한 작불개념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겐은 어떤 관점에서 作佛을 새롭게 보고자 했는가? 그것을 파악하려면 먼저 도겐이 말한 時節因緣의 의미부터 알아야 한다. 도겐은 『大般涅槃經』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성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반드시 時節因緣을 온전히 이해해야 한다. 시기가 到來하면 불성은 現前한다.

여기서 말하는 ‘시기가 도래하면’의 의미는 ‘불성이 現前할 시기가 나중에 도래한다’는 것처럼 들린다. 이렇게 보면 불성은 우리 안에서 점차 자란 후에 드러나는 것처럼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도겐은 ‘시기가 도래하면’을 미래형으로 보지 않고 ‘시기가 도래해 있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지금 여기’에 현성하는 것이므로 성불은 ‘지금, 여기’에 드러나는 불성의 현성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성불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성불과 더불어 있는 것이다. 도겐은 『정법안장』「柏樹子」에서 “불성은 成佛 이후의 장엄이며 成佛과 同生同參하는 불성이다. 柏樹는 불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는 불성과 成佛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불성은 성불과 더불어 드러나지 성불과 동떨어진 어떤 실재가 아니다. 도겐이 말한 작불과 불성의 관계는 이러한 성불과 불성의 관계에서 제대로 이해된다.

 “불성의 도리는 성불보다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으며 불성은 반드시 성불과 동참한다”고 도겐은 말한다. 이와 같이 불성이 성불과 동참한다는 것은 도겐의 수증관인 ‘證 위의 修’일 때 가능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불이 먼저이고 불성이 뒤가 되든지, 불성이 먼저이고 성불이 뒤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불이 불성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는 도겐의 불성은 결코 선언적 차원에서의 불성내재론이 아님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불성을 수증의 문제와 연관지어 보려는 도겐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 불성내재론과 차이를 보이고 있는 도겐의 불성론은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라는 6조의 견해에 대한 그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불성을 상주불변하는 것으로 볼 때, 즉 불성이 완성된 형태로 이미 우리 안에 주어져 있다고 볼 때, 불성을 완성하기 위해 행하는 수행인 작불 행위는 敎門의 믿음에 바탕을 둔 수행이 된다. 따라서 6조는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敎門의 믿음에 근거한 불성론과 수증론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에도 一隅의 搆得은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불성은 역시 작불한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도겐은 6조가 비판한 성불하기 위해 닦는 작불행을 다시 긍정한 것일까?

배발생적 불성론을 비판한 점에서 이미 도겐이 성불을 위한 닦음으로서의 작불을 비판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성은 작불한다’는 의미는 불성이 작불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불의 자리가 곧 불성이 드러나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은 작불하지 않는다는 것에 一隅의 搆得이 있다’는 것은 작불이 성불을 위한 수행이 아니라, 작불 그 자체가 성불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도겐에게 있어 작불로서의 좌선은 종래의 해석처럼 성불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불과 동참하는 의미의 좌선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작불의 좌선을 성불의 좌선과 동일시하는 것은 ‘證은 修에 卽하여 드러나며 修를 떠나서 證을 말할 수 없다’는 本證妙修의 수증관에서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겐은 작불을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중생의 입장에서도 도겐이 말한 것과 같이 作佛을 이해할 수 있을까? 중생이 행하는 수행도 도겐이 말한 작불의 의미로 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결론부분에서 다루고자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불성이 4조에서 5조를 거쳐 6조에 전해졌다는 사실은 무불성이 바로 佛祖에서 佛祖에로 正傳되어온 正法의 세계임을 말해준다. 우리는 「불성」권에서 도겐이 무불성을 正傳佛法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 ③ 正傳佛法으로서의 無佛性
7)

도겐은 齊安國師의 일체중생실유불성과 潙山의 일체중생무불성을 비교하여 양자 중 일체중생무불성이 더욱 佛道에 성숙한 것으로 평가한다. 齊安國師는 馬祖의 法嗣이며 大潙는 馬祖의 法孫인데 오히려 孫 쪽이 스승보다 佛道에 숙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무불성이 유불성보다 우수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무불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실유불성이지 무불성이 아니기 때문에 무불성의 의미를 알아듣는 것이 쉽지 않다. 따라서 도겐은 “見佛聞法(佛道에 나아감)에 있어 최초에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일체중생무불성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見佛聞法(佛道에 나아감)에 있어 최초에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 중생무불성이다. 선지식이나 경전을 통해 배워서 기뻐해야 할 것은 중생무불성이다. 일체중생무불성을 듣고 깨닫는데 있어 參飽하지 않으면 불성을 아직 見聞覺知하지 못한 것이다. 六祖가 오로지 作佛을 바라기에 五祖는 그가 잘 作佛하는 것외 다른 말이나 善巧는 없다. 다만 영남인무불성인 것이다. 無佛性의 말과 소리를 알아야 한다. 이것이 作佛의 똑바른 길임을. 그러므로 無佛性의 正當恁麽時가 곧 作佛이 된다. 無佛性을 아직 보거나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한 자는 아직 作佛하지 않은 자이다.

도겐은 ‘일체중생무불성’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佛道에 나아감에 있어 그 의미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일체중생무불성을 배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無佛性의 正當恁麽時가 곧 작불이 된다”는 도겐의 표현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正當恁麽時는 좌선의 때이면서 동시에 깨침의 때이다. 따라서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라 하면 무불성으로서 좌선하는 때이면서 동시에 깨침의 때를 의미한다. 도겐은 바로 이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를 作佛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를 作佛이라고 한 것은 作佛 역시 깨침의 行임을 의미한다.

도겐이 작불을 ‘깨침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 않는 것은 ‘修는 證을 떠날 수 없고 동시에 證은 修를 떠날 수 없다’는 본증묘수의 관점에서 수증을 보기 때문이다. 도겐이 무불성을 강조한 것도 이같은 작불에 대한 그의 해석과 깊은 관련이 있다.

작불 이외에도 도겐이 새롭게 재해석한 것 중에 ‘罣礙’라는 표현이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에서 罣礙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도겐은 괘애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하고 있다.  4, 5조의 문답과 관련하여 罣礙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4조, 5조의 문답인 무불성의 道得, 그 罣礙의 力量을 지닌 一隅를 받아서 迦葉佛 및 석가모니불의 諸佛이 作佛하고 轉法함에 ‘실유불성’이라고 말할 역량이 있다. 悉有의 有는 無無의 無를 통해 법을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무불성의 얘기는 4조와 5조(의 室)로부터 듣게 된다. 이 때 六祖정도의 사람이라면 이 無佛性의 말을 功夫해야 한다. “有無의 無는 그만 두고 불성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이 불성인지 물어야 한다. 지금의 사람들도 불성을 물을 때 불성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불성의 有無의 뜻을 묻는다. 이것은 경솔(倉卒)한 일이다. 모든 無의 無는 無佛性의 無에서 배워야 한다.

도겐은 4조와 5조의 無佛性을 ‘罣礙의 力量’이라고 말한다. 罣礙란 ‘방해한다’는 의미이므로 보통 보리심을 방해하는 번뇌나 갈등, 망상의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즉 우리는 흔히 깨침의 길에서 이는 장애요인이기에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왔다. 마치 장애물로 인해 물이 흐를 수 없듯이 마음 안에도 罣礙로 인해 종교적 생명이 차단되어 흐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도겐은 罣礙야말로 4조가 5조에게 불법을 전수해 준 하나의 힘으로 보았다. 어떻게 괘애가 그런 힘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까?

종래에는 도겐이 말한 ‘괘애의 역량’에 대해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이 ‘한정된 것’으로 드러났다고 해석해 왔다. 마치 절대적이고 영원한 불성이 석존으로부터 가섭존자라는 구체적인 존재를 통해 전해져온 것과 같이, 불변적이고 영원한 불성이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것을 罣礙의 力量이라고 본 것이다. 이렇게 해석할 때 괘애의 역량은 영원과 지금, 불변과 변천의 양면을 이어주는 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는 ‘불성’을 영원하고 불변적인 ‘常’으로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영원불변한 불성이 있어 그것이 역사 속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도겐은 처음부터 불성을 상주불변하다는 견해를 철저하게 비판해 왔으므로 罣礙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는 문제가 있다. 종래에 이와 같이 해석해 온 것은 一切衆生悉有佛性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다. 즉 ‘일체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라는 단순한 선언적 차원에서 불성을 이해한 것이 이러한 해석을 낳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왜 무불성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는지를 깨닫게 된다.

무불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불성을 선언적 차원에서 우리 안에 내재된 것으로 이해하려는 견해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불성’이 ‘좌선’을 통해 드러남을 의미한다. 그래서 도겐은 무불성의 의미를 알려면 佛道에 參入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도겐에게 있어 ‘佛道에 參入’함은 곧 좌선수행함을 말한다. 이와 같이 좌선수행을 통해 드러난 불성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괘애의 역량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괘애의 역량이란 영원불변한 불성이 한정된 사람에게 전해졌다는 의미라기보다, 佛祖가 佛祖에게 불법을 전수해준 하나의 힘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괘애의 의미를 잘 드러내주는 도겐의 표현으로 ‘葛藤’을 들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葛藤」에서 “갈등이야말로 佛法이어서 갈등을 지니고 갈등을 자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석가모니불이 정법안장을 전한 자는 靈山會에서 가섭대사 뿐이다. 그로부터 28대를 거쳐 보리달마에 이르렀다. .....聖者들은 갈등의 근원을 잘라내는 參學을 지향한다고 말하지 갈등을 갖고 갈등을 잘라내는 것을 參學하지 않는다. 〔그들은〕갈등을 갖고 갈등을 휘감는 것에 대해서는 모른다. 더구나 어떻게 불법이 갈등으로부터 갈등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알겠는가? 이와 같이 불법을 받는 것이 갈등임을 아는 이는 없다. 그런 말을 듣는 자도, 말하는 자도 없다. 더더군다나 몸으로 實證한 자는 얼마나 있겠는가?     

葛藤의 葛이나 藤는 덩굴풀로서 禪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속박하는 것, 文字言說 또는 번뇌로 이해되기도 하나, 도겐에게서는 正法이 스승에게서부터 제자에게로 직접 전해지는 것으로 해석된다. 갈등에 대한 도겐의 깨침은 如淨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天童如淨 古佛은 “덩굴의 덩굴손이 덩굴을 감는다”고 설한 적이 있다. 如淨으로부터 갈등의 불법에 대해서 배운 도겐은 “이같은 설법은 지금까지 古今에서 보고 들은 적이 없다. (如淨)古佛이 처음으로 이를 보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도겐은 “덩굴풀(胡廬)의 덩굴이 덩굴을 감는 것은 佛祖가 佛祖를 參究해서 佛祖가 佛祖를 實證하고 契合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以心傳心”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갈등을 佛法傳受의 의미로 해석하여 佛法을 전수받는 것은 곧 갈등을 전수받는 것이라고 본다. 釋尊이 點華하여 전한 것이 곧 갈등이며, 가섭이 이를 받아서 破顔微笑한 것이 바로 皮肉骨髓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겐은 佛祖의 갈등이야말로 ‘皮肉骨髓의 命脈’라고 말한 것이다.

 도겐은 「갈등」권에서 달마의 피육골수를 종전과는 달리 해석한다. 종래에는 이를 피육골수의 高低나 深淺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도겐은 달마의 피육골수를 통한 불법전수에서 골수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피육골수 각각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각 존재의 형태가 바로 불성의 완전한 究盡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도겐에게 있어 피육골수는 모두 불성의 顯現일 뿐이다. 즉 骨髓가 가장 깊은 것도 아니고, 皮膚가 가장 낮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도겐은 단순히 피육골수가 佛性의 顯現에 머무르지 않고, 달마가 자신의 皮(吾皮), 肉(吾肉), 骨(吾骨), 髓(吾髓)로서의 正法을 제자들에게 주었음에 주목한다.

 이와 같이 달마가 자신의 皮, 肉, 骨, 髓 각각을 제자들에게 주었다고 볼 때 皮肉骨髓는 모두 불법전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우리는 “佛祖의 갈등이야말로 皮肉骨髓의 命脈”이라고 한 도겐의 표현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피육골수처럼 갈등도 佛道嗣法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도겐은 갈등을 끊어버릴 번뇌가 아니라 佛法의 세계로 나아갈 佛道嗣法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즉 도겐은 정법의 전수를 갈등의 전수로 해석한 것이다.

 “갈등의 종자에 脫體의 力量이 있어 갈등이 휘감겨 붙은 가지나 잎, 꽃, 열매가 回互, 不回互함으로써 佛祖現成하고 公案現成한다.” 갈등을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온 佛法의 의미로 본다는 것은 作佛이나 罣礙에 대한 도겐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도겐이 작불을 無佛性의 正當恁麽時로 봄으로써 작불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작불을 본증묘수의 관점에서 봄을 의미한다. 이러한 도겐의 견해는 종전의 좌선관과 차이를 보이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종전에는 좌선을 깨달음의 수단으로 간주해 왔는데 도겐은 좌선 자체를 證으로 보았기 때문에 작불 또한 ‘證 위의 修’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은 종래에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온 作佛과 罣礙마저도 무불성을 통해 證上의 修로 수용함을 보여줌으로써 종래 실유불성의 의미를 더 깊게 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일체중생무불성이 일체중생실유불성보다 佛道에 더욱 성숙하다고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무불성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때 비로소 유불성의 의미도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무불성과 유불성을 함께 한 趙州에 대한 도겐의 해석에서 잘 드러난다.

8) ④ 趙州의 有, 無佛性을 통해 드러난 本證妙修

趙州從諗(778-897)하면 狗子無佛性을 떠올리게 된다.『趙州錄』에 의하면 수행승이 “위로는 諸佛에,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왜 개에게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묻는다. 이에 조주는 ‘개는 業識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趙州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할 때 그 없다(無)는 의미는 有無의 無를 말한 것이 아니라, 번뇌와 業識에 빠져 있는 수행자에게 業識에 빠져 있으면 불성이 드러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有無라는 망상에 빠져 있으면 佛性의 現成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도겐은 『學道用心集』에서  ‘禪僧이 행할 바(禪僧の行履の事)’를 설명하면서 趙州無佛性을 언급한다.

趙州에게 어느 僧이 ‘개(犬)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趙州는 ‘없다’고 답한다. 無字에 대해서 理知分別해 보아도 알 수 없다....身心은 무엇이고, 수행(行李)은 무엇이며, 生死는 무엇이고, 佛法은 무엇인가, 世法은 무엇이며, 山河大地, 사람, 동물, 가옥은 무엇인가. 결국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렇게 차례차례 반성해 가면 자연히 움직임과 고요함(動靜)이라는 두 개의 相이 없어진다. 이 차별의 相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의 작용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경지는 인간으로서는 실증할 수가 없다. 이것을 모르고 미혹하는 자가 수없이 많다. 參禪하는 學徒들이여, 조금 미혹되거나 완전히 미혹되더라도 뒷걸음질치거나 주저해서는 안 된다. 오직 수행할 뿐이다. 

도겐은 참선수행을 一生의 大事로 본다. 이는 수행의 비결은 다름 아닌 ‘끊임없이 수행해 가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까지 佛道수행을 계속해가고자 하는 마음과 각오가 필요하다.

 만일 깨침의 경지에 집착해서 거기에 안주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수행을 잊은 퇴보일 뿐이라고 도겐은 경고한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마저 내려놓고 그저 수행할 뿐이다. 이것이 도겐의 수증관의 핵심이다. 趙州가 無佛性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 역시 도겐이 『學道用心集』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행의 지침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趙州는 狗子無佛性만이 아니라 狗子有佛性도 언급하고 있다. 이와 같이 趙州는 有佛性과 無佛性을 모두 말했지만 『無門關』에는 狗子無佛性만 나오고 狗子有佛性은 언급하지 않는다. 왜 『無門關』에서는 조주가 말한 유불성은 삭제하고 무불성만 다루었을까? 그것은 宋代에 들어서 『無門關』이래로, 有보다 無를 더 중시하는 풍토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有를 버리고 無를 택하는 것이 더 높은 경지로 보는 분위기가 宋代에 만연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永明延壽(904-975)의 말에 귀를 기우릴 필요가 있다.

卽心是佛은 表詮으로써 그 현상을 그대로 표시하고 自心을 몸소 증명하여 뚜렷하게 見性하는 것이다. 非心非佛은 遮詮으로써 어그러짐을 보호하여 틀림을 막고 의심을 떨치고 집착을 파하고자 함이다. ...마음도 부처도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에 非心非佛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의 학자들은 이미 혜안도 없을 뿐만 아니라 多聞하지도 못하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말에만 치우쳐 분명하고 뚜렷한 이치를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이 表詮보다 遮詮을 중시하고, 有보다 無를 택하고 부정의 표현을 더 중시하는 宋代의 분위기에 대해서 延壽는 날카로운 비판을 하고 있다. 『無門關』에서 무불성만을 다룬 것도  宋代에 表詮보다 遮詮을 중시하는 경향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편견 속에서 無는 형이상학적으로 초월화되거나 절대화되어갔고, 그리하여 有無를 떠난 絶對無로 탈바꿈해 가는 경향을 보였다. 趙州는 상대의 이러한 경향성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일생동안 無를 絶對無의 차원으로 보는 경향을 부수려고 한 것이다. 절대나 초월이라는 관념이 고개를 드는 순간, 趙州禪과는 멀어진다는 이런 이유에서이다.

조주 당시에 ‘북쪽은 趙州, 남쪽에는 雪峰(823-908)’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남북이 서로 다른 선종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조주는 당시 설봉교단에 대해 선문답의 모범답안을 외워서 그것만을 고집하는 교조주의자들이라고 비난했다.  선문답을 판에 박힌 것처럼 외는 선사들에게서는 본래 선문답이 지닌 생명이 사라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覺을 중시하는 당시 경향에 대해서도 조주는 같은 맥락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기에 조주는 무불성만이 아니라 유불성도 말한 것이다. 그럼 趙州가 狗子無佛性뿐 아니라 狗子有佛性을 말한 것에 대해 도겐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조주에게 한 사람의 僧이 물었다.“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 물음은 僧이 趙州를 상대로 문답한 것이다. 이같이 불성에 관한 문답은 佛祖의 日常茶飯事인 것이다. 조주는 말한다. ‘있다.’ 이 有는 經論의 학자가 말하는 有도, 〔小乘의〕 說一體有部가 말한 有도 아니다. 나아가서 佛有를 배워야 한다. 佛有가 곧 趙州有이며 趙州有가 개의 有이며 개의 有가 佛性有인 것이다. 僧은 말한다. “개가 이미 불성이라면 왜 가죽으로 들어가 있는 것입니까? 이 승이 말한 것은 今有인지 古有인지 旣有인지를 물은 것이다. .....旣有는 개 가죽 안에 들어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개가죽 속으로 들어가는 行履, 헛되이 佛道를 밟음에서 벗어나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 승려는 자신이 알고 있던 불성개념을 갖고 조주에게 개의 불성에 대해 묻는다. 이에 趙州는 ‘있다’고 답한다. 이에 대해 도겐은 조주가 말한 ‘有’는 經論의 학자나 上座佛敎의 說一體有部에서 말한 有가 아니라 ‘佛道의 有’라고 해석한다. 즉 조주가 말한 ‘有佛性의 有’는 불성의 有라는 것이다. 개 안에도 불성이 顯現한다는 것이다.

승려는 “개는 이미 불성인데(旣有) 왜 불성이 개의 육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까”라고 되묻는다. 여기서 도겐은 趙州가 말한 有는 今有(시간 안에 실재하는 有)나, 古有(고래부터 있던 본래의 有), 旣有(이미 존재하는 有)가 아니라, 개가죽 속으로 들어가는 行履, 즉 修證의 실천에서만 드러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조주가 무불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불성에서도 禪僧의 行履 즉 수행의 자리에서 비로소 불성이 드러남을 말하고 있다.

 유불성이든, 무불성이든 불성의 참뜻을 알려거든 ‘수행하라’는 메시지가 도겐의 조주의 유불성, 무불성 풀이 안에 함축되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조주의 유불성과 무불성을 통해 불성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유불성이든, 무불성이든 불성은 구체적인 수행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이 바로 도겐이 말하려는 핵심주제이다. 즉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수행의 삶을 사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성불하기 위해 수행함이 아니라 그저 항구히 수행하는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을 드러내는 자리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 설 때 作佛이나 罣礙 역시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도겐이 作佛이나 罣礙를 새롭게 해석한 것도 성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작불과 괘애를 보았기 때문이다. 작불과 괘애에 대한 도겐의 해석에서 그가 종전의 상주불변하는 불성관을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상주불변하는 불성관에서 부정되어오던 작불과 괘애가 새롭게 재해석된 것은 바로 수증의 관점에서 불성을 보고자 한 도겐의 불성관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무불성과 관련한 도겐의 修證論은 그의 無常觀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도겐의 無常佛性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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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민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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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종교(2008.2 수업계획서) 글자 확대 글자 축소
 WRITER:  관리자  (118.♡.103.201) DATE : 10-10-25  READ : 846
수 업 계 획 서
                            (2008년. 2학기)
 
과목명 : 일본종교의 이해                              담당교수 : 최현민
학  점 : 3학점
수강대상 : 1-4학년                              수업시간 : 화목 16:30-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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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과 목표
  일본의 신도사상에서부터 불교, 및 16세기부터 동진한 서학사상의 전래의 고찰을 통해 일본종교의 전반적인 이해를 고찰한다. 또한 현대 일본의 종교상황을 신종교와 연관지어 살펴보고  동아문화권을 함께 형성하는 중국과 한국과의 사상적 비교고찰도 시도한다.

2. 수업방법
  가. 강의 : 80%      토론과 발표 : 20%

3. 교과개요 및 내용
가. 교과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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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교  수  내  용                수업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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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인의  종교성
2                일본의 신도사상 1
3                일본의 신도사상 2
4                일본의 고대불교 Ⅰ(나라불교)
5                일본의 고대불교 Ⅱ(헤이안불교)
6                일본의 중세불교Ⅰ (가마꾸라불교)
7                일본의 중세불교 Ⅱ (가마꾸라불교)
8                일본의 근세불교 (에도불교)             
9                일본의 기독교 Ⅰ
10              일본의 기독교  Ⅱ
11              현대 일본 신종교
12              현대 일본 신신종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 교과내용
1.    무종교성의 실체
2.    무종교성의 역사
3.    신사의 신앙으로서의 신도--신도의례(마츠리)
4.    신화의 전승으로서의 신도
5.    가미신앙으로서의 신도
6.    신불습합론
7.    국가신도
8.    나라(奈良)불교
9.    헤이안(平安)불교 1
10.  헤이안(平安)불교 2
11.  가마꾸라(鎌倉)불교 1
12.  가마꾸라불교 2
13.  가마꾸라불교 3
14.  에도불교 1
15.  에도불교 2
16.  일본의 기독교 전래 및 탄압
17.  소설 침묵 발표 및 분석
18.  일본 기독교단과 천황제와의 대결
19.  일본기독교와 한국 기독교 비교
20.  현대일본신종교 1
21.  현대일본신종교 2
22.  현대일본신신종교 및 종합

4. 교 재
1) 일본종교개관

아마 도시마로, 정형 역, 『일본인은 왜 종교가 없다고 말하는가』, 예문서원, 2000
박규태, 『상대와 절대로서의 일본』, 제이앤씨, 2005.
무라카미 시게요시, 『일본의 종교』, 최길성 역, 예진, 1993.
미토 마사히데, 엄석인 역, 『사상으로 보는 일본문화사』, 예문서원, 2003.
나가오 다케시, 『일본사상이야기 40』, 박규태 역, 2002.
이에나가 사부로, 이영 역, 『일본문화사』, 까치, 1999.
석전일량, 성해준 역, 『일본사상사개론』 J&C, 2003

2) 일본불교

서영애, 『일본문화와 불교』, 동아대학교출판부, 2003
와다나베 쇼오꼬오, 『일본불교』, 이영자 역, 경서원, 1987.
『일본불교사』, 이영자 역, 민족사, 1988.
柳田聖山, 『선과 일본문화』, 불광출판부, 1995.
한보광, 『일본선의 역사』, 여래장, 2001.

3) 신도

村岡典嗣, 『일본신도사』, 박규태 역, 예문서원, 1998.
J. B 노스, 『세계 종교사』, 윤이흠 역, 1988.
 
4) 그리스도교

사와마사히코, 『일본기독교사』, 대한기독교서회, 1995.
도히 아키오, 『일본기독교의 사론적 이해』, 서정민 역,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1993.
김승혜, 『동아시아 종교전통과 그리스도교의 만남』, 영성생활, 1999.
윤이흠 외, 『한국인의 종교』, 문덕사, 1994.(일본기독교와 비교)
古屋安雄 , 『日本神學史』, 요르단사, 1991

6) 현대일본종교

시마조노 스스무, 박규태, 『현대일본종교문화의 이해』, 청년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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