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7

도겐의 悉有佛性論 임기영불교연구소

시산회(詩山會)
도겐의 悉有佛性論 | 여래장 사상
도봉별곡 2021. 8. 8. 
http://blog.daum.net/yc012175/15948222


도겐의 悉有佛性論


[출처] 도겐의 悉有佛性論|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가.
1) (1) 悉有로서의 佛性

앞서 말했듯이 ‘불성’사상은 대승교의의 기본전제로서 동아시아 불교를 이해하는데 핵심적 주제가 되어왔다. 일반적으로 불성의 의미는 佛陀의 본성, 깨침 그 자체의 성질, 미완성으로부터 佛이 될만한 성질, 佛이 될 가능성으로 알려져 왔다. ‘佛性’에서 ‘性’은 본래 ‘dhātu’를 말하는데 이는 놓인 장소, 기반, 토대라는 의미이다.

교의상으로는 種族, 種姓(gotra), 因(hetu)와 같은 뜻이다. 따라서 불성은 佛種 혹은 佛種姓이라는 佛이 지닌 속성으로 이해해왔다. 이같은 本性論적인 불성사상은 如來藏사상과 함께 중국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물론 불성의 이해에 본성론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중국 三論學의 대성자인 吉藏(549-623)은 『涅槃經』 번역 후 隨代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던 불성사상에서 11개 학설을 뽑아 이를 비판한 후 三論學的 眼目과 논리로 中道가 正因佛性이 된다고 주장하거나 산천초목도 成佛할 수 있음(草木成佛)을 불교사상 처음 밝혀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불교의 불성이해는 본성론적인 측면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도겐 당시 일본불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본성론적인 불성이해는 성불의 문제와 관련하여 다양하게 해석되어왔다. 그것은 본래성불이라는 대승적 믿음과 중생의 실존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이 성불과 관련된 불성론은 『涅槃經』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종래에는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이 있다” 혹은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로 해석해 왔다.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불성 해석에서 불성은 如來藏과 동일시하는 견해가 생겨났다.

如來藏에 해당하는 인도의 원어는 tathāgata―gārbha로 胎 즉 ‘모친의 배 속’이라는 의미로 여래를 낳아주는 자궁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胎와 같은 생물학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대신 藏을 사용했다. 이렇듯 여래장은 ‘모든 중생이 여래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고 볼 때 중생이 여래를 포섭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와 관련하여 중생과 여래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이론이 나오게 되었다.

如來藏은 중생이 안에 부처를 품고 있음과 같이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 혹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원인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왔다. 이와 같이 여래장사상은 일체중생에 불성이 있다는 불성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전통적으로는 불성을 佛이 될 수 있는 힘이나 능력, 가능성으로 보아왔다. 여기서 불성의 ‘佛’은 覺과 같은 의미로 “衆生은 佛의 활동 혹은 깨닫는 힘을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다”라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불성이 내재함을 의미하므로 ‘불성내재론’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것이 중국불교, 더 나아가서 그 맥을 같이 하는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이해해온 불성론이다.

그러나 도겐의 불성이해는 이와 다르다. 그는『涅槃經』에 나오는 ‘一切衆生悉有佛性’에서 ‘悉有佛性’ 부분을 ‘悉有는 佛性이다’라고 해석하여 ‘悉有로서의 佛性論’을 펼쳤다. 여기서 悉有라는 용어는 도겐이 만든 造語이다. 중국문법에 의하면 도겐의 독법은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도겐은 왜 새로운 독해방식을 택하여 실유불성을 ‘悉有는 불성’이라고 해석한 것일까? 이러한 해석은 그가 품었던 대의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도겐의 문제의식이었던 천태본각사상은 『열반경』에 나오는 “一切衆生은 불성이 있으며 如來는 常住하며 變異가 없다(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 有無變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여기서 불성을 불변하는 ‘常으로서 불성’을 보는 것에 대해 도겐은 의문을 품었다. 만일 불성이 常住不變하고 우리가 본래부처라면 왜 굳이 수행이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다. 도겐은 이 문제의식을 갖고 ‘一切衆生悉有佛性 如來常住 有無變異’를 “모두(一切)가 衆生이고, 모든 것(悉有)이 불성이다. 如來는 常住하며 有無이며 變易한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불성은 여래장사상의 역사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여래장사상에서 씨나 태아와 같은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불성사상에서도 마치 우리 안에 불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즉 불성은 有情에게만 있으며 ‘유정’이 지닌 잠재성으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자칫 인간중심적이고 생물중심적 태도를 지닐 위험이 있다. 

도겐은 불성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인 이론을 비판했다. 김희진은 도겐이 불성에 대한 ‘심리적’인 개념을 ‘우주적’인 개념으로 변형시켜 불성을 眞如(tathatā)나 法性(dharmatā)과 동일시했다고 본다. 따라서 일체중생실유불성은 ‘모든 존재 내에 불성이 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존재가 불성에 내재한다’는 의미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겐이 불성을 심성론적으로 이해해온 기존의 불성이해를 초월하고자 함을 감지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심성론을 넘어서 전우주론적 차원에서 불성을 이해하려는 도겐의 종교세계는 다음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三界는 다만 一心일 뿐이다. 心외에 다른 법은 없다. 心과 佛과 衆生, 이 셋은 차별이 없다.” 여기서 도겐이 말한 三界唯心은 起信論的 唯心論과는 다르다. 『기신론』에서는 “唯是一心 故名眞如”라고 하여 眞如와 心을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즉『기신론』은 존재론과 의식론을 깊은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에서 의식론으로 변모해 간 것도 아니고, 의식론적 성찰에서 존재론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의식론과 존재론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신론』에서 말하는 존재 개념에는 의식성이 깊이 침투되어 있기 때문에, 『기신론』은 인간적이고 주체적이면서 실존적이고 情意的인 존재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마음을 의식으로 환원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無情까지 포함한 삼라만상을 마음으로 보고자 한다. 이 얼마나 혁명적인 사유인가? 도겐에게 있어 有情은 無情의 대립개념이 아니라, 본래 六道를 살아가는 중생이며 전우주의 몸을 의미한다. 즉 유정은 본래 우주의 힘과 조건들의 상호의존관계에 의해 생겨난 모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무정도 유정 개념 안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도겐은 유정을 단순히 어원학적 의미에서만 새롭게 해석하기보다 이를 통해 불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한 것이다.

佛道에서 말한 모든 중생은, 마음을 지닌 자는 모두 중생이다. (그것은) 마음이 곧 중생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無心의) 것도 중생이다. 그것은 중생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모두 중생이고 중생은 모두 유불성이다. 草木國土는 모두 마음이다. 마음이므로 중생이다. 중생이므로 유불성이다. 日月星辰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므로 중생이고 중생이므로 유불성이다.

도겐은 草木國土와 日月星辰까지 포함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를 마음으로 보고, 마음이므로 중생이고 중생이므로 불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히 단어를 새롭게 정의내린 것이라기보다 인간중심적이고 생물중심적인 사유를 넘어선 도겐의 견해를 드러내주고 있다. 이와 같은 해석을 통해 우리는 도겐의 불성관이 종래의 유정중심적인 불성론을 넘어선 있음을 볼 수 있다. 悉有에 관한 도겐의 설명은 이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도겐은 悉有와 동의어로 衆生, 有情, 群生, 群類를 들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은 悉有를 衆生이나 有情과 동격으로 본 것이다. 즉 삼라만상의 중생은 모두 有情이고 悉有이며, 이러한 悉有가 바로 佛性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도겐이 이러한 개념들을 새롭게 정의한 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숨어있다. 먼저 그는 ‘一切衆生悉有佛性’을 六祖 慧能이 南嶽(677-744)에게 물었던 ‘是什麽物恁麽來(무엇이 이와 같이 하여 왔는가)’와 연관지어 해석하고 있다.

釋迦牟尼佛께서는 말씀하신 “一切衆生悉有佛性” 그 宗旨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어떤 물건이 왔느냐’(是什麽物恁麽來)고 말한 것이며 〔불교를 포괄하여 그 근원을 제시한 대설법인〕 轉法輪이다.

여기서 도겐은 『涅槃經』의 “一切衆生 悉有佛性”이라는 ‘佛語’와 是什麽物恁麽來 즉 “어떤 것이 이와 같이 왔느냐?”라는 ‘祖語’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是什麽物恁麽來는 慧能과 南嶽이 처음 對面했을 때 스승인 慧能이 南嶽을 향해서 “너는 누구냐? 어떻게 왔느냐?”라고 묻는 일종의 화두이다. 바꿔 말하면 본래 자기가 누구인지를 묻고 답하는 인생의 決着이 달린 결정적인 물음이다. 南嶽은 혜능으로부터 이 화두를 받고 8년간 이것과 씨름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도겐은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면서, 南嶽이 혜능에게 건네준 화두와 비견하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도겐은 왜 ‘一切衆生悉有佛性’을 설명하면서 ‘是什麽物恁麽來’라는 禪問答을 서두에 꺼낸 것일까? ‘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는 佛語와 ‘是什麽物恁麽來’이라는 祖語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是什麽物恁麽來는 단순한 객관적 명제이거나 사실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의 주체적 사항을 묻는 말이다. 도겐은 일체중생실유불성을 是什麽物恁麽來로 설명함으로써, 불성이 모든 존재 내에 내재한다는 단순한 선언적 차원에서의 견해를 뛰어넘어, 이를 실존적 차원 즉 修證의 문제와 연관지어 해석하고자 했다.

혹은〔悉有를〕 衆生이라고도 하고 有情, 群生, 群類라고도 한다. 悉有의 말은 衆生이며 群有이다. 즉 悉有는 佛性인 것이다. 悉有의 一悉을 중생이라고 한다. 正當恁麽時는 중생의 內外 혹은 불성의 悉有이다. 單傳하는 皮肉骨髓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너가 나의 피육골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불성이 悉有라고 하는 有는 有無의 有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悉有는 佛語이며 佛舌이며 佛祖의 눈동자(眼晴)이며 禪僧의 眞面目(衲僧鼻孔)이다.

위에서 도겐은 實有의 一悉을 중생이라 표현한다. 悉有의 一悉란 悉有 중 구체적인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도겐은 구체적인 각 중생에게 불성이 드러남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이 표현 안에는 (깨친 자의 시각에서 볼 때) 모든 중생이 불성의 顯現 자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도겐이 말한 중생, 즉 존재하는 각각이 불성의 완전한 究盡이라고 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修의 차원을 배제한 체 우리가 본래 부처임을 다만 선언적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천태본각사상이 지닌 수행무용론에 빠질 수 있다. 도겐이 천태본각사상을 비판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앞서 살펴본 불성내재론 또한 선언적 입장에서 불성을 이해하고 있다. 물론 불성내재론은 수행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씨앗이 자라듯 불성이 점차적인 수행을 통해 성장해 가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도겐은 불성내재론이나 불성현재론적 측면에서의 왜곡된 불성이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불성을 수행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해석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실유는 불성’이라는 이면에는 불성을 修證과 직결하여 해석하고자 하는 그의 원의가 내포되어 있다. 도겐이 중생을 實有의 一悉로서 설명한 것도 이를 말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바로 도겐이 자주 쓴 ‘正當恁麽時’도 깊은 연관이 있다. 正當恁麽時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때’라는 의미로, 도겐은 75권 『정법안장』에서 이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말이 깨침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75권 『정법안장』에 나오는 正當恁麽時의 의미는 압도적으로 ‘佛이 된다’라는 것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75권 『정법안장』에서 나온 正當恁麽時 중 깨침과 관련된 것은 24개가 넘는다. 예를 들면 ‘佛身心現成의 正當恁麽時’(「洗淨」), ‘正當恁麽時 佛祖作佛하며 說法하고 說佛한다’(「看經」) ‘無佛性의 正當恁麽時 즉 作佛된다’(「佛性」) “大悟가 되며 그 正當恁麽時”(「大悟」) “作佛의 正當恁麽時”(「坐禪箴」), “得道의 正當恁麽時”(「畵餠」) “佛祖에 친하게 자기를 面授하는 正當恁麽時”(「面授」), “重生成佛의 正當恁麽時”(「三昧王三昧」) 등이 그것이다.

이렇게 볼 때 正當恁麽時는 도겐이 修證 문제를 다룰 때 사용하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도겐에게 있어 正當恁麽時는 佛性이 現成하는 때이면서 동시에 只管打坐의 때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도겐은 지관타좌의 때인 正當恁麽時가 바로 佛性의 悉有라고 설한다. 이는 도겐이 불성을 수행과의 연관성 속에서 해석하고자 하는 원의를 잘 보여준다.

이와 같이 도겐은 단순히 ‘실유는 중생이고 유정이며 그것이 곧 불성이고 각 존재 하나하나가 불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수증의 관점에서 불성을 보고자 한다. 이것은 도겐이 단순히 유정이나 불성 개념을 확대하려는 것이 아니며, 각 존재 자체가 불성의 顯現이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불성의 현현이 수증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悉有로서의 불성을 打坐의 전제없이 ‘모든 것은 불성’이라 해석한다면, 중생의 모습 그대로를 불성으로 긍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야말로 도겐이 천태본각사상과 관련하여 의문을 품었던 바로 그 문제가 아닌가?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도겐의 불성론에서 수증의 문제를 간과해 버린다면 크게 오해할 위험이 있다. 실제로 기존의 전통종학에서는 ‘悉有로서의 佛性’을 좌선과 연관지어 이해하기보다 ‘悉有의 참된 실태가 그대로 佛性’이라고 해석해왔다. 즉 그들은 悉有佛性에 대한 자각을 다만 불성의 현현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으로 이해해 왔다. 물론 전통종학자들도 只管打坐를 도겐사상의 핵심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은 중생도 지관타좌를 하면 그것이 바로 불성의 현현이라고 해석한다. 중생의 지관타좌나 깨친 자의 지관타좌나 아무런 구별도 없다는 것이다. 과연 전통종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생의 좌선행과 覺者의 좌선행은 어떠한 차이가 없는 것인가? 과연 이것이 도겐이 말한 지관타좌인가?

이와 같이 불성의 현현에 대한 ‘믿음’에 강조점을 두고 도겐의 불성을 해석해온 전통종학의 해석을 佛性顯在論이라 규정한다. 앞서 살펴본 전통종학의 문제점을 상기할 때 도겐의 불성론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佛性顯在論’의 의미와 ‘悉有는 佛性’이 뜻하는 바를 잘 구별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에 따르면 우리는 도겐이 불성을 打坐와 연관지어 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유로서의 불성’을 통해, 불성을 수증문제로 보려는 도겐의 의도를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도겐은 「佛性」권에서 자신의 불성론을 펼치기에 앞서 기존의 불성론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이 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2) (2) 종래의 불성이해에 대한 도겐의 비판

3)

4) ① 개념으로서의 불성

5)
인간이 만든 관념이나 개념은 존재에 직면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경우가 많다. 붓다가 전하고자 한 진리 역시 불교사 안에서 인간의 언어에 감추어져 왜곡되이 전해진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불성’이다. 도겐은 관념 속에 갇혀져온 불성의 허울을 벗겨내는데 혼심을 기울렸다. 불성에서 우리는 도겐의 놀라운 필체를 통해 드러나는 불성을 만나게 된다. 먼저 도겐은 ‘실유(悉有)’의 허울부터 벗겨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무엇이 悉有가 아닌가’부터 설한다.

지금 佛性이 悉有라고 할 때의 有는 有無의 有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悉有라는 말은 조금도 始有나 本有, 妙有 등에 드러나지 않으며, 緣有, 妄有에도 드러나지 않으며, 心境性相 등과도 관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곧 衆生悉有의 依正, 業增上力, 妄緣起, 法爾, 神通修證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도겐은 有無의 有나 始有, 本有, 妙有, 緣有, 妄有와 같은 기존의 개념들에서는 실유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始有나 本有는 불성을 ‘當果’로 볼 때 나오는 표현들이다. 當果佛性은 성불이 장래에 일어난다는 것이기에 불성을 始有로 볼 것인지, 本有로 볼 것인지의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열반경』을 번역한 道生은 불성을 始有로 보았으나 그 후 점차 本有의 견해로 기울어져 갔다. 本有란 미래에 成佛된다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 본래 성불’임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始有나 本有의 문제는 그 후 중국선종의 불성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도겐은 「佛性」에서 始有나 本有같은 개념들에서는 불성이 드러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즉 불성은 개념적 논의를 넘어서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겐이 말하고자 한 悉有로서의 불성이다. 마치 나가르주나가 空思想을 펼칠 때, 모든 개념이 사라질 때까지 계속 부정해 갔듯이 도겐도 부정의 방법을 통해 ‘悉有’가 불교사에서 생겨난 개념들을 초월한 세계임을 설하고자 한 것이다.

도겐은 이어서 悉有가 業增上力이나 妄緣起, 法爾, 神通修證에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한 불성은 불교의 근본교리인 緣起나 因果의 힘인 業力으로서도, 法爾로도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다. 이와 같이 도겐은 悉有가 개념 속에 있지 않음을 말함으로써, 불성의 진리가 결코 관념을 통해 드러나지 않음을 설하고자 한 것이다. 즉 우리가 관념에서 자유로와질 때 비로소 悉有로서의 佛性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불성은 바로 주먹을 불끈 쥔 것과 같은 약동하는 삶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佛과 性은 達彼達此이다. 불성은 반드시 悉有이다. 〔왜냐하면〕 悉有가 그대로 불성이기 때문이다. 悉有는 百雜碎(일체의 존재)에 있지 않으며 一條鐵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주먹을 쥐는 것같은 拈拳頭이기 때문이다.

6) ② 佛性內在論 批判

7)
우리는 앞서 도겐이 말한 悉有로서의 불성이 개념적인 悉有 이해와 무관하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종래에는 불성이 우리 안에 내재하는 실재로 이해해 왔다. 야마우치 슌유(山內舜雄)은 이를 佛性內在論이라 칭했다.

불성내재론이야말로 불성을 이해하는 중심사상이 되어왔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佛性을 하나의 종자로 보고 씨가 자라나듯이 성장하는 가능성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미 완전한 불성을 지니고 있으나 그것이 단지 번뇌로 가려져 있을 뿐이라는 것으로, 번뇌(무명)에서 벗어나면 그대로 불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는 佛性을 부처가 될 가능성으로, 다른 하나는 이미 완성된 상태(본래부처)로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다 불성을 內在하는 것으로 본 점에서는 일치한다. 우선 전자에 대한 도겐의 견해부터 살펴보자.

어떤 부류는 말한다. 佛性은 草木의 종자와 같다고. 法雨가 내려 물기를 머금을 때 눈과 줄기가 자라고 가지와 잎이 나고 과실이 생긴다. 과실에는 또 종자가 생겨난다. 이러한 사고는 범부의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같이 생각한다고 해도 종자와 꽃과 과실 모두 하나 하나가 절대의 진실임을 參究해야 한다. 과실 안에 종자가 있고 종자 안에 보이지 않아도 종자로부터 뿌리와 줄기가 생겨나 있다. 모여 있는 것이 아닌데 많은 가지가 나와 큰 나무가 된다. 이것은 종자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古今에 걸쳐서 진실한 것이다. 凡夫의 견해(가능성으로서의 佛性)을 인정한다고 해도 根莖과 枝葉은 동일하게 살고 동일하게 죽으므로 같은 悉有의 佛性이다.

이것은 마치 종자가 싹이 트고 자라 枝葉花果가 되듯 불성을 부처가 될 하나의 가능성으로 보는 견해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행을 통해 깨침으로 나아가는 漸修의 길이다. 즉 이는 우리가 아직 부처가 아니지만 수행을 통해 점차 부처가 된다는 점진적 깨침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도겐은 종자가 자라 싹이 트고 뿌리와 줄기와 잎이 생기듯 수행을 통해 점차 불성을 완성해 간다고 보는 이해방식을 배격한다. 도겐에게 있어 불성은 훗날 깨닫게 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즉 씨가 자라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어가듯 불성은 씨와 같은 깨달음의 잠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겐은 뿌리, 가지, 잎을 일련의 성장과정으로 보지 않고 각각 그 자체를 佛性의 顯現으로 본다.

그래서 도겐은 “종자와 꽃과 과실은 모두 각각 赤心임을 參究해야 한다”고 말한다. 赤心은 존재의 現成 그 자체를 의미한다. 즉 종자와 꽃, 과실이 각각 존재의 現成 그 자체이지, 미완성인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도겐은 “뿌리나 가지, 잎은 동일하게 살고, 동일하게 죽으므로 같은 悉有의 불성”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불성은 어느 시기에 이르러 드러나는 깨달음의 잠재성이 아니라 지금이 바로 불성이 현현하는 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이 바로 불성이 顯現한다는 견해는 이미 불성이 완성된 상태로 우리 안에 내재한다는 견해를 낳았다. 이것은 바로 心常相滅論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도겐은 여러 곳에서 心常相滅說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우리는 심상상멸론과 도겐의 불성이해를 잘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도겐의 불성이해는 심상상멸론과 혼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8) ③ 心常相滅論 批判

心常相滅論은 心常身滅論으로 인간의 신체는 멸해도 인간 마음의 본체인 心性은 결코 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心常相滅論은 중국불교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玄奘(622-664)의 法相唯識 보급으로 한 때 혼란을 겪은 중국불교계는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唯心思想을 중시하게 되었다. 그 중 특히 선종은 佛心宗이라고 불리울 만큼 마음을 중시해 왔다. 이같은 경향은 “身是無常 心性是常”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몸을 無常으로, 마음을 常이라고 봄으로써 心性常住的으로 해석하는 견해로 나아갔다. 도겐이 「佛性」권에서 비판한 心常相滅論은 이러한 중국의 心常相滅論과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도겐은 「佛性」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성에 대해서 듣고 많은 학자들은 (불성을) 先尼外道가 주장하는 我로 오해해서 생각해왔다. 그것은 그들이 진실한 사람을 만나지 못했고, 진실한 자기를 만나지 못했고, 스승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도겐은 인도의 先尼外道처럼 불성을 우리 안에 ‘상주’하는 무엇으로 이해함을 비판하고 있다. 「辯道話」의 제10문답은 心常相滅論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佛法에는 본래 身心이 하나이며 性과 相이 둘이 아니라고 설한 것은 인도나 중국에서 똑같이 알려진 것이나 결코 여기에 걸려선 안된다. 만일 常住를 설할 경우 萬法이 常住이므로 몸과 마음을 구별해선 안된다. 또 寂滅을 말할 때 모든 것(諸法)이 寂滅이므로 性과 相을 나누어선 안된다. (그런데) 왜 몸이 소멸하고 마음은 常住하는가?..... 生死가 곧 涅槃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생사 외에 열반을 논해선 안된다.....佛法에 心性大總相의 法門이라는 것은 一大法界를 性과 相으로 나누지 않으며 生滅을 논하지 않는다. 보리열반에 이르기까지 心性이 없는 것은 없다. 일체법, 삼라만상이 모두 다만 一心이어서 나뉘는 것이 없다. 이 모든 法門이 모두 평등한 一心이다. 모두가 다르거나 어긋남이 없다. 이것이 곧 佛家의 心性을 이해하고 있는 진상이다. 그런데 이 一法에 身과 마음을 구별해서 생사와 열반을 나누어 보는가?

도겐은 身心一如의 입장에서 心常相滅論을 비판했다. 이는 결국 도겐이 修證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와 연관성이 있다. 도겐은 「佛性」권에서 先尼外道를 비판하나, 이는 인도의 先尼外道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당대에 이와 유사한 견해를 지닌 자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도겐의 비판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天台本覺法門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도겐의 교단에 들어온 달마종 사람들을 대상으로 心常相滅論을 비판했다는 견해, 또 宋代 중국선종을 향한 비판이라는 해석도 있다. 도겐의 心常相滅論 비판을 본각사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주장한 袴谷憲昭의 견해는 이러하다.

本覺이란 현상세계를 초월한 근원적 깨침으로 이 깨침이란 본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갖추어져 있어 常住하나 그것을 자각하지 않는 사이에 현상으로서 변화생멸한다. (중략) 그것은 동시에 心常相滅論을 의미한다.

여기서 袴谷은 心常相滅論에서 말하는 不變하는 마음을 本覺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그는 도겐이 본각사상을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心常相滅論을 본각사상과 동일하게 보는 것은 문제가 있으나, 도겐의 心常相滅論 비판이 천태본각사상과 관련이 있다는 袴谷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

당시 천태종 학자들 간에는 切紙의 형태로 쓰여진 문구들이 널리 전승 유포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本無生死論이다. 그 내용 중에는 “一心은 去來함이 없고 生滅도 없으며 본래 常住한다”는 의미가 적혀 있다. 즉 여기서의 一心常住는 심상상멸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달마종의 『法門大綱』에도 靈知라는 표현이 보이는데, 이는 煩惱卽菩提의 입장에서 靈知를 菩提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자료들을 종합할 때 심상상멸론에 대한 도겐의 비판에는 천태본각사상과 깊은 관련이 있는 달마종도 포함됨을 알 수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卽心是佛」에서 인도의 先尼外道의 견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인도에는 外道가 있으니 先尼라 부른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靈知는 環境이나 物과는 달라 歷劫에 常住한다. 지금 현재 있는 모든 환경도 靈知의 측면에서 보면 진실한 것이 아니다. 本性으로부터 緣하여 생겨나서 실제의 법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모든 실체들〕은 靈知와 같이 상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멸하기 때문이다. 명암에 상관없이 靈知하므로 靈知라고 말한다. 또 眞我라고도 하고 覺元이라고도 하며 本性이라고도 칭한다.

靈知思想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心常相滅論에 관한 것이며 이는 곧 천태본각사상에 대한 그의 비판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심상상멸론에 대한 도겐의 비판은 천태본각사상뿐만 아니라 중국선종사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도겐은 『정법안장』에서 南陽慧忠( ? -775)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南陽慧忠이 당시 중국에 先尼外道적인 견해를 지닌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唐의 大證國師 慧忠和尙이 어느 僧에게 물었다.
師; 어디서 오는가?
僧; 남방에서 왔습니다.
師; 남쪽에는 어떤 선지식이 있는가?
僧; 많은 선지식이 있습니다.
師; 어떤 것을 가르치고 있는가?
僧; 그곳의 선지식들은 당장에서 학인들에게 제시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는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대들은 이제 모두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성품을 갖추었는데 이 성품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껌벅이게 한다. 가고 옴에 활용되어 온 몸에 두루 편재하므로 머리를 만지면 머리가 알고 다리를 끊으면 다리가 안다. 그러므로 정변지(正徧知)라 한다. 이것을 떠나서는 따로 부처가 없다. 이 몸에는 생멸이 있지만 心性은 시작이 없는 옛부터 일찍이 생멸한 적이 없다. 몸이 생멸한다 함은 용이 뼈를 바꾼 것 같고 뱀이 껍질을 벗은 것 같으며 사람이 헌 집을 나서는 것과 같다. 몸은 이렇듯이 無常하나, 性은 변함이 없다 (常)”고 하였습니다. 남방에서 말씀하신 것이 대략 이렇습니다.
師; 만일 그렇다면 그들은 先尼外道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이 말하 기를 “나의 이 몸에는 하나의 신비한 성품이 있어 이 성품이 감각을 느낀다. 그러다가 몸이 무너지면 정신이 떠나는데 마치 집에 불이 나면 주인은 나가는 것 같아서 집은 무상하고 주인 은 항상하다”고 한다.

南陽慧忠은 남쪽 스승들의 가르침을 先尼外道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면서 당시 남방사람들을 비판했다. 이러한 혜충의 비판은 그들이 ‘몸은 생멸하지만 心性은 생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이라는 二元論인 先尼外道說的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先尼外道에서는 마음과 육신을 구분하여 용이 뼈를 바꾸고 뱀이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나, 사람이 古宅을 나와 새로운 집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무상한 신체와는 달리 상주불변하는 불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 뿐 아니라 우리의 몸 안에 있는 불성은 모든 것을 見聞覺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南方宗旨에 대한 혜충의 비판은 당시 중국선종의 문제인 心常相滅論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何燕生은 洪州宗에서 말한 ‘心性’이나 荷澤宗의 ‘靈知’ 모두가 상주불변하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남양혜충과 동시대를 살았던 宗密(780-840)은『禪源諸詮集都序』에서 홍주종과 하택종을 비교하면서 양자 모두 맑은 구슬(眞心)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있다고 본다. 물론 宗密은 홍주종이 眞心의 體 중 변하는 用인 隨緣用만 알고 不變의 用인 自性用을 모른다고 비판했지만, 양자의 차이는 불성론의 차이라기보다 眞心의 用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홍주종은 사람의 모든 행위가 佛性의 드러남이기 때문에 따로 깨침을 구할 필요가 없고 다만 天眞自然을 자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편 하택종은 空寂한 마음이 靈知이며 이를 자각함이 깨침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南陽慧忠이 비판한 心常相滅論은 중국선종의 불성론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도겐 역시 心常相滅論을 비판했는데 이는 천태본각사상과 관련하여 달마종에 대한 비판이면서 동시에 중국선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도겐의 心常相滅論 비판이 구체적으로 누구를 향한 것인지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함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것은 도겐이 문제삼은 心常相滅論이 당시 일본선종인 임제종과 달마종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그 근거가 된 중국선종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니, 도겐이 품은 문제의식은 어쩌면 대승불교사상 전체와도 연관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本證이나 本覺, 佛性 그 어느 표현을 쓰더라도, 그것이 사물의 본래 모습이라면 이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수행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본래부처를 기반으로 한 대승불교의 수증문제는 이런 점에서 도겐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도겐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갔는가?

9) (3) 妙修 위에서 드러나는 佛性의 顯現
10)
11) ① 黙照禪과 도겐의 수증관 비교
12)
도겐이 말한 ‘悉有는 불성’이라는 표현은 ‘모든 것이 불성의 드러남’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미 불성이 顯現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수행의 필요성이 드러나지 않는다. 松本史朗은 “悉有는 불성이다”는 표현을 전형적인 佛性顯在論이라고 본다. 佛性顯在論은 모든 것이 불성의 드러남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미 불성이 顯現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수행의 필요성이 의문시된다. 그것은 불성현재론이 배발생론처럼 수행을 통해 점차적으로 불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으므로, 수행의 필요성이 요청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성현재론의 문제점이 바로 대혜가 묵조선을 향해 비판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먼저 대혜가 비판한 黙照禪과 도겐의 수증관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묵조선과 도겐의 수증관이 같다면 대혜의 묵조선 비판은 도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굉지와 도겐사상을 비교해온 종래의 연구는 두 관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도겐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묵조선 사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전자의 대표적 학자는 石井修道이다. 그는 『정법안장』에 드러난 굉지의 말에 대한 도겐의 해석을 근거로 도겐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럼 그의 주장을 살펴보자.

도겐은 『정법안장』「坐禪箴」에서 굉지의 坐禪箴을 소개한 후 자신의 「坐禪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도겐이 宏智의 「坐禪箴」에 나오는 ‘不觸事而知 不對緣而照’(대상에 접하지 않아도 알고, 경계에 반연하지 않고 비춘다)라는 표현을 ‘不思量而現 不回互而成’으로 고쳐썼다는 점이다. 왜 도겐은 이를 바꾸었을까? 우리는 이 대목에서 굉지와 도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石井修道는 宏智의 ‘知와 照’ 부분을 도겐이 ‘現과 成’으로 바꾸어 쓴 것에 대해, 宏智의 知와 照는 道家的 觀照의 세계를 연상케 한다면, 도겐의 現과 成은 只管打坐를 통해 드러나는 不思量, 不回互의 세계를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宏智는 坐禪箴을 통해 理法으로서의 觀照의 세계를 드러냈다면, 도겐은 坐禪이 곧 모든 無所悟의 現成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이 굉지의 표현을 자신의 언어로 바꾼 것은 도겐이 굉지의 선사상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石井修道는 주장한다. 이 점에서 도겐은 굉지의 선사상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도겐선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道元と中國禪思想』을 쓴 何燕生은 石井修道와는 달리 도겐이 오히려 자신의 좌선잠을 서술하기 위해서 宏智의 坐禪箴을 빌려쓴 것이라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 도겐은 자신의 좌선관을 표명하기 위해 스스로의 선체험과 깊은 인식을 기초로, 자신의 선사상과 계통이 같은 宏智를 참고하여 자신의 坐禪箴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何燕生은 도겐이 宏智를 如淨과 함께 古佛으로 칭송한 점과 조동종 法脈을 이은 如淨으로부터 배웠다는 점을 들어 도겐이 宏智禪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도겐이 古佛로 칭한 조사들은 도겐이 강조한 行佛과 全一佛法 즉 行의 철저함과 법의 정당성을 지닌 선사였다고 何燕生은 주장한다. 따라서 도겐이 宏智를 古佛로 칭한 것은 단순한 칭송 차원이 아니라, 그를 정법의 전수자로 보았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굉지와 도겐이 사상적 연계성이 있는지에 대해, 石井修道는 도겐이 宏智 사상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이를 초월하여 독자적인 선사상을 구축했다고 해석한 반면, 何燕生은 도겐이 宏智禪을 이은 것으로 해석하여 중국불교의 연계선상에서 도겐사상을 이해하려 했다. 그러나 石井修道가 주장한 것과 같이 도겐사상을 중국불교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 그의 독자성만을 주장한 것이나, 何燕生처럼 도겐이 굉지선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것 모두 도겐사상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필자는 도겐사상이 중국불교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 자신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도겐은 분명 「坐禪箴」에서 宏智禪師의 ‘坐禪箴’에 대해서 극찬하고 있다.

坐禪箴은 ....宏智禪師 正覺和尙이 選한 그것만이 참된 佛祖에 의한 것으로서 참된 坐禪箴이고 이 坐禪箴만이 佛法界의 表裏를 두루하는 광명이며 고금에 걸친 佛祖 가운데의 佛祖이며 과거불과 미래불도 이 坐禪箴으로 계를 삼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조사들도 이 坐禪箴에 의해서 출현한다.

石井修道는 도겐이 굉지의 좌선잠에서 ‘不觸事而知 不對緣而照’을 ‘不思量而現 不回互而成’으로 바꾼 것을 들어 도겐사상의 독특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굉지도 不思量과 不回互의 사상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더라도 何燕生이 주장하듯이 도겐이 굉지사상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해석도 문제가 있다. 물론 何燕生의 주장처럼 도겐이 굉지의 묵조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양자의 수증관에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양자의 수증관을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다음을 들 수 있다.

도겐의 『永平廣錄』에 보면『宏智錄』제4의 上堂에 나오는 “皓玉無瑕 彫文喪德”를 “皓玉無瑕 琢磨增輝”로 바꾸어 표현한 부분이 나온다. 皓玉無瑕 彫文喪德은 ‘본래 티가 없는 옥에 세공을 가하면 오히려 옥이 지닌 아름다움이 상실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皓玉無瑕의 부분은 같으나 그 뒷부분인 ‘彫文喪德’을 도겐은 ‘琢磨增輝’로 바꾸어 표현하고 있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굉지가 말한 “皓玉無瑕 彫文喪德”은 本證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도겐은 옥에 티가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琢磨增輝라 하여 닦고 닦음으로써 점점 옥이 빛을 더하게 된다는 本證 위의 ‘妙修’를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도겐에 있어 수행은 단지 本證을 드러내는 것에 머물지 않고 本證에 빛을 더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양자의 수증관 간에 미묘한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양자는 본각을 강조한 점에서는 일치하나, 굉지는 ‘다만 본연의 모습을 더럽히지 않는다’고 하여 수행이 본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한 데 반해, 도겐은 ‘닦아서 더욱 빛나게 해야 한다(琢磨增輝)’고 하여 本證 위에서 이루어지는 수행의 역동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黙照禪과 도겐의 수증관을 비교해 보았다. 굉지는 본연의 모습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좌선이 本證 위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했다면, 도겐은 닦아서 더욱 빛나게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本證과 妙修 간의 역동성을 더욱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겐이 묵조선의 수증관을 수용하면서도, 천태본각사상의 수행무용론을 극복하기 위해 수행의 측면을 보다 부각시키려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本證과 妙修의 역동적 관계야말로 도겐의 수증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전통종학자들 역시 本證에 치중하여 도겐의 수증관을 해석하여 도겐사상이 지닌 妙修의 측면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굉지와 도겐의 종교세계는 그 배경 및 문화의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양자 간에는 분명히 문제의식의 차이가 있었다. 도겐은 천태본각사상이라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묵조선은 무사선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양자의 수증관이 그 표현양식에 있어 유사성을 지녔어도 이를 같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즉 양자의 배경이나 문제의식을 배제한 체 양자가 표현하는 수증관만 보고 양자의 사상이 같다고 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13) ② 실유불성을 통한 수행론

14)
비판종학자인 松本은 도겐의 불성론이 존재론적으로는 佛性顯在論이지만, 수행을 강조한 점에서는 불성현재론과 구분되는 측면이 있으므로 이를 佛性修現論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佛性修現論이라 해도 이것 역시 존재론적으로는 불성현재론과 같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수행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松本의 주장이다.

따라서 松本은 도겐이 「불성」에서 수행을 언급하기는 했지만, 불성현재론과의 존재론적 유사성 때문에 도겐의 수행론이 논리적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근거하여 松本은 도겐이 자신의 前期사상 속에 불성현재론적 요소가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비판하는 시각에서 만년에 12권『정법안장』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松本의 주장이 도겐의 불성에 대한 바른 이해라 할 수는 없으나, 불성현재론에 대한 그의 비판은 도겐의 불성론에 대한 전통종학의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그것은 本證의 信에 근거하여 도겐의 수증관을 해석한 전통종학에는 佛性顯在論的 측면이 다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겐이 ‘불성을 悉有’로 해석한 것은 불성현재론처럼 중생의 현재 모습 그대로가 불성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수행에 즉하여 드러나는 불성의 現成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도겐은 우리가 身心脫落하여 분별의식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불성의 현성을 자각할 수 있다고 본다. 즉 我執으로부터 자유로와졌을 때 비로소 불성의 현성을 자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불성의 顯現이 수행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불성을 修證의 문제로 보려는 도겐의 의도는 ‘正當恁麽時’라는 표현을 통해 잘 드러난다. 正當恁麽時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恁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恁麽는 是什麽物恁麽來에도 나온다. 이같이 是什麽物恁麽來와 正當恁麽時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恁麽’는 北宋 때부터 속어로 사용되어온 것으로 ‘이(와)같이’라는 뜻이다. 도겐은 雲居道膺의 다음 귀절을 들어 恁麽의 의미를 표현하고자 한다. “恁麽事를 얻고자 한다면 恁麽人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恁麽事는 ‘현재 이같이 있는 그대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임마사를 살려면 我執에서 벗어나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야 한다. 바로 그렇게 되려면 ‘지금 여기’를 진정으로 사는 恁麽人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現成한다는 의미에서 恁麽의 세계는 우리가 깨침의 세계를 측량하는 일을 그만둘 때 비로소 우리 앞에 펼쳐진다. 도겐은 『정법안장』「恁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恁麽는 佛의 척도로 잴 수 없고, 마음의 척도로도 잴 수 없다. 法界의 척도로도 잴 수 없고, 우주의 척도로도 잴 수 없다. 모두가 恁麽人이므로 恁麽事 아님이 없다.

우매한 인간은 역사 안에서 恁麽를 규정하고 측량하려 애써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恁麽는 부처의 척도나 마음의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恁麽를 알 수 있는 길은 우리가 지닌 부처나 마음의 척도, 法界나 우주의 척도를 내려놓을 때 가능하다.

恁麽란 그 어떤 척도로도 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恁麽 속에서 살아가는 길뿐이다. 혜능이 남악에게 물은 “어떤 것이 이와 같이 왔느냐? (是什麽物恁麽來)”는 바로 이러한 恁麽로의 초대이다. 이와 같이 불성의 문제를 고타마 붓다이래 모든 祖師들이 지닌 修證의 관점에서 보고자 함은 도겐이 수증관의 관점에서 불성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是什麽物恁麽來’ 외에 ‘轉法輪’이라는 표현에도 잘 드러난다.

일체중생실유불성을 전법륜이라 한 도겐의 표현 속에 붓다가 『涅槃經』을 통해 설한 “一切衆生悉有佛性”을 불법전수와 연관지어 해석하려는 도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즉 도겐은 붓다가 처음 자신의 깨침을 다섯 비구에게 설한 初轉法輪 이래 正傳되어온 佛法이 바로 一切衆生悉有佛性이며 이것이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온 것임을 말하려 한 것이다. 이와 같이 도겐은 일체중생실유불성과 是什麽物恁麽來를 같은 맥락에서 봄으로써 불성을 修證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보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를 밝혔을 뿐 아니라, 일체중생실유불성을 轉法輪으로 표현하여 修證一等인 佛性이 佛祖를 통해 正傳되어온 佛法임을 밝히려 한 것이다. 이상에서 도겐은 실유불성론을 통해 불성과 수증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해서 역설해 왔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무불성론에서 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