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7

정신교육(교재)

나 아닌 내

내, 아는(알려지는) 대상 속엔 없는, 무언가를 아는 내 자신입니다. 
아는 주체인 내 자신을 모르고, 알려지는 나를 내 라고 여겨짐(혼동)을 착각이라 한다. 
모든 내면적 장애의 근본 원인이다.


정신교육(교재)
2020. 2. 24.

1. 정신교육, 왜 필요한가 - 그 이유와 목적.

2.. 정신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3. 저 자신을 깨닫기.

4. 제 본분을 깨우치기.

5. 아는 것(주체, 행위, 객체=意識)

6. 현명과 우매,

7. 자유(自由)와 유자(由自)

8. 실험과 확인.

9.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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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신교육, 왜 필요한가- 그 이유와 목적.2020. 2. 25.

사람이 하는 일을 기능별로 크게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겠다.

1. 생명체의 본성(本性- 유전자에 입려된)이 하는 생명체로서의 성장, 유지관리 이다.

2. 생명체의 두뇌가 하는 심성(위의 1에 소용되는 정보(識)와 평판(意)의 생성과 실행) 활동이다.  

3. 생명체의 정신이 하는 자성(스스로 하는)으로 위의 본성을 보조하고 심성을 통제하는 활동이다.


위의 1 본성(本性)은 본래 부터 죽는 순간까지 불변이고, 생명이 스스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마음이나 정신은

보조 작용을 할 수 있을 뿐이고 그로써 필요, 충분하다.

2. 심성(心性)은 본성(本性)을 보조하는 기능이 최우선이니, 본성에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한다.

3. 자성(自性-자유, 자율)은 심성이 본성에 기여하는지 장애를 유발하는지 점검, 예방, 시정하여야 한다.


위의 세 기능 중에서 교육과 훈련의 필요가 가장 중시되는 기능이 무엇인가는 자명해 진다.

생명(본성)은 교육의 필요도 없고, 교육할 타 기능도 없다, 그냥 그대로 보조만 해 주면 족하다.

마음(심성)은 컴퓨터(두뇌)에 생성되는 자료(정보와 판단) 같은 것 으로, 스스로 누구를 가르치거나, 배우는 자가 될 수 없다.

결국, 본성을 보조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을 하는 정신만이 교육을 할 수도, 받을 수도 있고, 그럴 필요도 있는 대상이다.


본성이 하는 본능적인 일은 상대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고, 무조건 존중되어야 할 일 이다.

심성이 하는 의식적인 일은 본성을 기준으로 하여 (상대적) 비교, 평가, 선택, 판단, 결정등이 가능하고 필요하기도 한바,

그런 상대적인 평판을 수행하는 기관이 바로 정신의 자성(스스로 하는 일) 이다.


이상으로, 정신의 역할, 그 비중이 엄청나게 중차대(重且大) 하다는 것이 이해되리라.

동시에, 그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정신의 능력 계발이 긴요하기 때문에 교육과 훈련도 필요한 이유도, 목적도 이해되리라. 

마음이 잘못 되어서 본성을 위시한 인생에 도움은 적고 해로움이 크다면, 그걸 예방, 시정, 교정하는 역할을 정신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 60억이 넘는 인류가 살고 있다.

각 자의 마음대로 살려고 한다.

그러면 어찌 되겠으며, 지금도 어떤 상태로 인류가 공존하고 있는가?


공존 공영이냐, 공멸이냐의 갈림이 개인마다의 마음에 달려 있고,

그 마음의 목적 방향이 그 정신이 결정하기에 달려 있고,

그 정신의 -공존 공영으로의- 결정은 교육과 훈련으로만 가능하다.


함께 잘 살래!?.

함께 공멸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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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2020. 2. 24.

내가 어디에 있는가?

1. 태허(太虛)라는 영구(無始無終), 부한, 불변, 절대의 텅빔(宇라 하자)에,

2. 공(空 ; 불교적 용어), 또는 [콩알 우주]라는 질량불변(質量不變)인채로, 항상변화(恒常變化)하는 와중(渦中)에 있는(宙)라 하자),

3. ㅇㅇㅇ 은하계, 태양계, 지구, 한반도, 세종시에 살고 있는,

4. 한 사람의 두뇌 속에 있다는 것은 자인(自認)할 수 밖에 없다.

(이 사람이 살아 온 기억이 두뇌 속에 있고, 그 것을 내가 알려면 두뇌 속의 그 기억 가까운 곳에 있을 수 밖에 없으니..)


내가 어디에 있는가는 알았지만, 내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모를 뿐만 아니라 알 길이 전혀 없다.

왜냐, 내가 내를 알려면 아는 자(주체)로서 알려지는 자(객체)를 알아야 하는데,

내가 하나이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둘이라고 가정해도, 알려지는 자를 "아는 자는 하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는 자 하나가, 동시에 아는 자(주체)와 알려지는 자(객체)로 두 곳에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그래서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이 무엇이냐고 묻고 있다면, 바로 그 묻는자 자신이 내 이다.

대답은 "내가 내다", "내가 내 자신이다", "내가 내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내가 아는 것 일체가 내 아니다" ,

"내가 내 자신이라고 안다는 것이야 말로, 그 것이 내 자신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남은 것은, 내가 내(自) 아닌 것(他)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름을 무엇이라 지어서 자칭(自稱)하느냐 뿐 이다.


남이사 내를 볼 수도, 만날 수도 없으니 전혀 알 수가 없다.

단지, "저 사람의 정신이 잠들지 않고 깨어 있구나", 어떨 땐 "술이 취하여 정신이 (거의)없구나" 할 때도 있으니,

내 또한 내 이름을, 사람들의 보편적, 객관적인 이름을 따라 "정신"이라고 하자.

자칭할 때는 "내", 또는 "내 자신"이라 하고. 


내는 두뇌 속에 있는 정신이다.

잠들면 아무 것도 모르고, 내가 어디에 잠들어 있는 줄도 모르고, 깨어 나면 스스로  온갖 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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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자각(自覺, 生覺)하기.2020. 2. 24.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아는 주체로서, 내를 알려지는 객체로 삼을 길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고 나면- 너무나 쉬운 일 이다.

그렇지만, 이해하지 못 하면 알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 한 일 이다.


그래서, 시대의 고금(古今). 양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 자신을 찾고, 만나서, 알겠다고 나섰지만

누구도 성공할 수 없을 수 밖에.

게다가 그 일이 성공할 수 없는 원인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헛수고만 크게 하였지....  


그래서 "내가 내 자신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구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왜 부가능한지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 하였던지,

그 후로는 "생각(生覺)하라, 깨달음(覺)을 내라(生)"고 가르쳤지만, "깨달음"이란 말의 뜻을 또 "말로 가르칠 수 없다",

"오직 스스로 깨달아서 증득(證得)하는 수 밖에 없다"고 하니, 도대체 깨닫기를 하라는건지, 말라는건지....

알지도 못 하는 일을 무슨 수로 하라, 한다는 건지.....,


필자는 아주 쉬운 방법을 하나 제시한다.

자, 심호흡을 한번 하고 지금 부터 내 스스로 무엇이건 해 보자.

단지, 내가 스스로 하고 말고를, 어떻게 하고 말고를 주도하면서 한다는 걸 잠시도 잊지 말고.


그렇게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던 일을,

 "자, 멈추고 돌이켜 보자" 하고는 "내가 지금 조금 전에 한 일을 되 돌아 보고 있다"고 명확하게 말 하시라.

 그 다음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건, 그 일을 멈추자 하고는 일단 멈추자 하라.


그런 다음에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한 자가 누구냐(무엇이냐)?"를 확인해 보시라.

알고 있는 모든 일을 확실히 알고는, 그 일은 일단 제외하고 남는 게 무엇인가?

바로, 그 일을 한 자가만 남는다. "그게 바로 내 였고, 지금도 여전한 내 이구나" 하는 것이 깨달음, 자각이다.


두뇌에다 스스로 질문이나 명령하는 말을 걸어 놓고, 그 말을 내가 했구나, 그 말과는 따로 -그 어떤 말을 하건 말건-내가 있구나 하는

깨달음(覺)을 만들어 냄(生)을 생각(生覺)이라 한다.

아는 일(知)이, 대상(객체, 他)를 향하여 [후랫쉬]를 비추어 나아 가는 일 이라면, 깨달음(覺)은 내를 향하여 [후랬쉬]를 되돌아 비춤(返照)과

같다.


쉬운 예를 들자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일을 무엇이 하는가?"

그 일을 하는 자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일"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 일 모두를 제외하고 나야, 그 일을 한 자를 알 수가 있다.

바로 두뇌 속의 내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자"고 하였음을 망각(忘覺)하지 않았다면.


무언가를 찾는 자는, 그 찾는 행위나 몸 표면에는 없다, 두뇌 속에서 찾자고 명령하고 있으니까.

걱정하는 나를 찾아 보라, 걱정 속에도 없고 걱정한다는 행위에도 없다, 두뇌 속에서 "걱정스럽다는 나"는 보고 알 뿐 이다.

깨달음을 왜 강조하고 권하느냐 하면, 깨닫지 못 하면 착각에 빠져서 내 일을 제대로 못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라고 아는 모든 것은 -착각의 소산일 뿐-  내가 아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제외하고 나서 남는 유일무이한 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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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自) 본분(本分)을 깨우쳐 알기.2020. 2. 25.

"깨우치다"를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고자 한다.


깨다 : 단단한 것을 부수다, 둘러 싸고 있는 껍질을 까다는 뜻 이다.

우(愚) : 어리석음. (모르는 줄도 모름) 

치(痴) : 어리석음. (제가 알고 있는 그대로를 맹신, 맹종함)

깨우치다(脫愚痴) : 알려고도 못 하고, 고집불통인 정신자세를 깨고 나오다.


본분(本分) : 본래 부터 짊어 지고 있는 불변의 소임이다.


이 사람의 정신인 내 타고 난 본분이 무얼까?

이런 질문을 두뇌 속에 하려면, 첫째 내(自)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런 다음에 둘째, 내(自)를 무엇이 왜 만들었을까?를 -과학적 연구는 불가능하니- 논리적으로 탐구해야 하고,

셋째, "아하 그 것(내를 만든 자)이 그래서(그런 목적으로) 내를 만들었구나" 수긍할 결론을 이끌어 내도록 까지

갖 가지 가설을 제시해 가면서 검토해야 한다.


이 사람을 만든 자는, 어차피 내가 알 수는 없는 이 사람 창조자 이다. (太虛? 空?, 콩알우주? 절대신?)

그가 이 사람 안에 내(自)라는 정신 기능을 만들었을까?

"내가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그래서 이 사람의 인생을 잘 살게 운전하라는 명령을 부여해서"

그걸 두 가지로 요약하자면 생명(生命 ; 본성대로 살개 하라), 운명(運命 : 두뇌(意識)를 잘 운전하라)이라고.


이 둘이 내 본분인지 여하를 확인해 보자.

1. 내가 할 수 있고, 내 이외의 무엇이 할 수 없는 일 인가?

2. 내가 올바르게 하면 이 사람의 인생에 도움이 되고, 하지 않거나 잘못 하면 인생에 해로움이 되는 일 인가?

위의 두 가지 질문에 "그렇다"는 대답만이 가능하다면, 내 아닌 누구의 일 이라 할 수가 없으니, 내 본분이 아니라 할 수도 없다.


깨어 나 있으면서 자기로 부터의 생명과 운명 수행에 성실해야 하고 말고.

내 만의 유일한 본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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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내(아는 주체)가 스스로(自) 아는(觀) 것(意識).2020. 2. 26.

사람마다의 그 내가 아는 것이야 너무나 많지만,

"내가 아는 것" 이라는 말의 뜻은 거의 모른다.

그저 "내가 아는 것이, 내가 아는 것 이지" 하는 동어반복식으로 아는 줄 믿고 있을 뿐 이다.

이하의 설명을 듣고도, 과연 그리 알고 말는지...그의 결정이지만.


1. 내는,

그 사람의 내부에서 아는 일을 하는 기관, 즉 아는 행위의 주체이다. 

고로 내가 없으면 아는 일을 할 자가 없으니, 아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내가 아는 주체이기 때문에, 아는 일을 하지 않아도 내가 없지는 않지만, 그 반대(내가 없이 아는 일이 있는)는 없다.


2. 아는,

내가 대상을 대(對)하여 아는(觀) 일 이다.

여섯 가지 식(識)과 두 가지 마음의 소리(意語)를 대(對)하여 아는 일을 본다(觀)고 한다. 

두뇌 속에서 떠 올려 본다, 들어 본다, 맡아 본다, 맛 본다, 만져 본다, 느껴(마음을) 본다 하는 등등이 모두 아는 일 이다.


3. 것.

내가(1), 아는(2), 대상인 것(3) 으로 두뇌 속의 내(1) 앞에 아는(2) 대상으로 등장해 있는 의식(意識)이다.

색성향미촉(前 5識) 다섯가지 정보와 인간관계에서 획득된 언어(문자) 정보(제6 述語識)과, 그 정보들에 부가되어 있는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적인 말(意語)로 남으로 부터 전해 진 평판(제7 他意語), 내 자신이 만든 평판(제8 自意語),그리고 심층의식(제9 의식)이다.


내가 무엇이냐, 내가 무엇을 아느냐 하는 두 가지 질문은 밀접한 관련을 지을 수가 있다.

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알면, 내 앞에 무엇이 있느냐를 알기 쉽고,

내가 아는 것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를 알면, 그걸 아는 내가 무엇인가를 알기가 쉽기 때문이다.

아는 자와 아는(알려지는) 것은 가까이, 마주 대(對)하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몰라도,

내가 온갖 기억이나 상상을 안다는 것, 그 기억이나 상상이 두뇌 속에 떠 올라 있어서 안다는 것은 안다.

그러니 내 또한 두뇌 속 기억과 상상 가까이에, 마주 대(對)하여 있으면서 아는(觀하는) 내(自稱), 즉 정신(통상적 호칭)이라고 안다.


이상 내(주체), 아는(행위), 것(객체)을 정확히 이해하여,아는 모든 것이 [내 스스로 아는 의식]임을 명념하고,

특히 내 스스로(自) 깨달음(覺)을 놓지지 않아야 본분(生命과 運命 수행)에 충실할 수가 있다.

실제 그대로를 전부 아는 것도,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마음대로" 알면서 그걸 사실 그대로라 오인함을 경계, 확인해야 한다..


그러니 현명, 겸손, 신중, 침착, 성실등등은 아무리 강조, 명심해도 지나치다 할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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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내(정신), 현명(賢明)과 우매(愚昧).2020. 2. 27.

현명(賢明), "지혜롭고(賢) 사리에 밝다(明)"고?

"무엇이 지헤이고 사리이냐?" 물으면 뭐랄텐가?


우매(愚昧), "어리석고 사리에 어둡다."고?

역시 "무엇이 어리석음이고, 사리가 무엇인데?" 물으면 뭐랄텐가?


어차피 언어의 뜻은 그걸 사용하는 사람 개, 개인의 두뇌 속에 있지, 달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여기서는 내 나름의 뜻 이라고 제시해 보이련다.


정신의 아는 능력의 본원(本源)을 지혜라 하련다. 

자각능력, 탐구력, 관찰력, 기억력, 상상력, 사고력, 분석력, 종합력, 비교력, 평가력, 판단력, 추리력, 논리력, 반성력, 결정력 등등..

내가 하는,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의 원천을 지혜라 한다고.


본래의, 불변의, 원천(源泉)적 능력이기 때문에 후천적으로 더(加)해 지고, 덜(減)해지지 않고, 본원에서는 변하지도 않지만,

현현(顯現)되는 능력은 정신이 스스로 계발해서 쓰기 여하에 달려 있다.

고로, 남이 충고나 조언을 해 줄 수는 있지만, 대신하여 남의 지혜를 계발헤 주고 받거나, 감소케 하고 감소당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비유하자면, 동굴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을 비추는 등불(정신)의 빛(지혜)과 같아서, 그 등불을 쓰는 사람이 쓰기 여하에 따라서 비추어져서 알고 쓸 수 있는 보물이 찾아지는 것과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고로 지혜를 계발해서 쓰려면,

가장 먼저, 내(개인의 두뇌 속 정신)가 지혜라는 빛을 쓰는 등불과 같다는 자각을 하고 있어야 한다.

잠 들면 등불이 꺼짐과 같고, 잠 에서 깨면 켜 짐과 같다고.

등불로 빛의 강약과 방향을 조절하는 것이 내 기능이고 역할이라고.


다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열거와 분류별 종합을 해 보자.

1.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감각신경을 움직여서 관찰(정보획득)을 해 보자. (예 : 눈을 이렇게 저렇게 움직여서)

2.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운동신경을 움직여서 (의식을) 실행해 보자.(예 : 손으로 이런 저런 일을 하기)

3.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언제, 어느 때를 기억해 내어서 보자.(예 : 초등학교 졸업식 장면을 추억하기)

4.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내일, 어디서, 무엇을 할지를 상상해 보자.(예 : 내일 몇시에.......거쳐서 병원에 가서...를 상상해 보기)   

5.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앞으로 어떻겟 살아 갈 것인가 여러가지 구상을 해 보자.(예 : 법관, 공무원, 군인, 농사꾼...)

6. 두뇌에다 질문을 걸어서 "그 사람을 그리워(또는 미워) 하면 무슨 효과가 발생하나?" 대답을 요구해 보자.

7. 두뇌에다 명령을 하여 "백해무익한 마음은 께끗이 청소하자"고 해 보자.

8, 두뇌에다 질문과 명령을 섞어 가면서 이런 저런 사고(思考)를 형성해 보자.

9, 두뇌에다 말을 걸어서 "내 자신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대답을 들어 보는 문답을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해 보자.

10,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 아니라고 부정(否定)하기를 끝까지 하고, 더 이상 부정할 것이 없을 때, 지금까지 모든 걸 내 아니라고 부정하던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해 보자. (있기는 있는데, 찾아지지 않는구나...바로 찾는 내가 내 이구나...깨닫기 까지)

11. 희망을 만들기, 희망을 스스로 버리기를 해 보자.

12. 누군가를 나쁘다고 말해 보고, 무언가를 좋다고 말해 보자, 그리고는 그걸 버리기를 해 보자.

13, 내를 무엇이, 왜 맍들었을까 질문하고, 내 스스로 납득이 되겠금 추리를 해보자.

14. 내게 삶을 도우라는, 운전하라는 명령을 누가(무엇이) 부여해 놓았을끼?

15. 우주란, 시간과 공간은, 만물의 시작은...등등의 말을 해 놓고 두뇌 속에서 그 답을 만들어 보자.

이하 무궁무진하므로 생략하련다.


이런 거의 무진장에 가까운 능력을 제대로 계발하여 쓰지 못함을 우매(愚昧)라 한다.

등불(정신)이 빛(지혜)을 제대로 밝히지(明) 못 하여, 어둑컴컴한 새벽같은 상태라는 비유로 우매라 한다.

현명한 정신, 우매한 정신이 다른 게 아니고, 본래의 실상으 ㄴ같지만, 단지 입고 있는 옷이 밝고 화려한 빛이냐, 어둑칙칙하냐의 차외와

같을 뿐 이다. (고로, 우매한 옷의 안 에는 현명한 잠재력이 계발해 쓰라고 대기하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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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자유(自由 = 내 스스로 말미암아)와 유자(由自 = 이유가 내를...)2020. 2. 29.

자유(自由), 글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내 스스로(自) 말미암아(由)"이지만,

쉽게 풀이하자면 "내 스스로 만드는 이유, 구실, 의도, 목적등등.."라는 뜻 이다.

내가, 이유등을 만들어서 사용하고 지배한다는......


유자(由自), 통상적인 용어기 아니라, 위의 자유와 상반되는 뜻으로,

"이유, 구실, 의욕, 의도, 목적 등등이 내를 지배하는 것 처럼" 이란 뜻 이다.

이유가 내를 (사실상)지배한다는. 내가 이유에 지배당하면서 그런 줄 모르는 경우이다.


예컨대, 자살폭탄 공격에 나서는 사람의 정신이,

생생한 각성(生覺, 自覺) 상태에서, 자주적으로 이유와 목적을 만들어서 그걸 실행, 실현하는 경우라면 자유(자신의 이유)라 하고,

제가 알게 된 이유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정신 상태를 유자(이유에 종속적인 자신)라 한다는 뜻 이다.

대부분의 자살폭탄 공격자는 확신범적 자유에 빠진, 실제로는 그 자유에 지배당하는 유자(由自, 자유의 자식같은)에 불과하다.


정상적, 합리적인 정신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고집불통에 빠진 사람에게 물어 보라.

그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한다고 할까, 그 어떤 이유도, 목적도 없이 "무조건 내 하고싶은대로(그걸 자유라고) 할꺼야" 할까? 


용어나 풀이가 불완전 하여 이해하기 곤란하더라도, 대충 그런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정도로는 이해되리라. 

자유와 유자의 사이에 "자유 같은 유자"라 할만 한 것이 있으니 바로 "자의(恣意)"이다.

마음(意)이긴 한데, 내 자유의 산물인 내 마음(自意)이 아니라, 두뇌 속에 멋대로 형성된 -경험적 습성과 학습의 소산인- 만든 자 불명의 마음(意)이 사실상 주인 노릇을 하는 경우이다. (일종의 방자한 마음이다) 


확고한 자각(自覺)으로 본분 수행을 위하여 구사하는 내 스스로의 합목적적인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 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마음대로할 자유"는, 진정한 [자유]와는 정반대인 사이비 자유라 해야 옳다.

그래서 "(사이비)자유로 부터의 (내) 자유"니, "(사이비) 자유에 대한 (내) 자유"니 하는 말이 나오는 것 이다.


이 구별만 헷갈리지 않게 할 수 있으면, 그래야만 진실한 자유를 누리게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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