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7

황석영 [김지하를 추도하며]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김지하를 추도하며]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김지하를 추도하며]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

[김지하를 추도하며] 6

황석영 소설가  |  기사입력 2022.06.22.

이제 우리 나이 팔십이 되었지만 나는 몇 년 전부터 주위의 경조사에 참례하지 않게 되었다. 수년 동안 서울을 떠나 지방에서 글 쓰며 은거했고, 칠십대 중반쯤에 부모님 유해를 납골당에 모시고 제사도 폐하면서 저절로 남의 장례식장에도 발길을 끊게 되어버렸다. 옛사람들도 늙은이가 되면 인편으로 부조나 보내면서 바람결에 지인들을 떠나보내던 것이다.

아난다여, 나는 피곤하다. 눕고 싶구나.

석가모니의 마지막 장면이다. 깨달음을 얻었을 때 마셨던 우유 한 잔과 죽음의 원인이었던 버섯 몇 개는 똑같은 타인의 공양물이었다.

죽음은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의 '저 모퉁이'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길의 끝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러하듯 나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청년 김영일을 만난 것은 그의 외삼촌 정일성이며 조동일 등이 연출을 하고 나의 고교 동창 친구들 몇이 배우가 되어 연극을 하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유진 오닐의 연극에 나오는 등장인물처럼 결핵성 미열을 가진 문예반 청년이었다. 나는 남도를 떠돌다 베트남 전쟁을 거쳐 다시 글쓰기로 돌아왔고, 그는 조태일이 꾸려가던 시인지를 거쳐 김지하 시인이 되어 있었다. 시대는 마침 박정희의 유신시대였고 우리는 한없이 목마르고 거칠었다. 이용악, 백석이 그랬듯이 김지하는 모던에서 토박이로 차림새를 갖춘다. 이는 이미 우리가 60년대에 6.3 투쟁을 통과하며 습득한 문화체험의 결과이기도 했다. '오적'과 '비어'를 거치며 그는 수년간 우리 곁을 떠나있게 된다. 도피 시절 간간히 만나면서 그는 나에게 후배들과 더불어 현장문화운동을 이끌어 줄 것을 당부했고,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가 김수영을 비판한 적이 있으나 그것은 김수영의 일상을 간과했던 탓이다. 김수영의 일상은 소시민적 모양새였지만, 그것은 '살아 돌아온 자'의 치열한 일상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누군들 일상을 견디는 장사가 있으랴. 

팔십년 광주를 거쳐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그는 석방되었고, 감호처분자의 신세로 바깥 세상에 던져졌다. 김지하는 사상가로 성장하여 돌아왔으나 일상을 여전히 간과했던 듯하다. 이는 지식인들의 일종의 투옥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그의 생명사상이나 수운 해월의 가르침들은 김지하의 때와 장소에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김지하는 김영일의 무거운 짐이었다. 시인은 누구나 자기 시대와 불화할 권리가 있으나 또한 그 불운을 견디어내야만 한다.

그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고 호통을 치고 나서 분노한 민심의 표적이 되었을 무렵에 나는 마침 평양에 있었다. 나는 젊은이들의 연이은 자살투쟁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북의 소설가 홍석중은 그 소식을 보며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말의 뜻은 옳지만, 차라리 침묵하느니만 못하다."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홍석중이 말했다. 

"김지하니까." 

김지하는 투옥되어 있던 나에게 면회도 왔고,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에는 일산에 살고 있었다. 만날 적마다 그는 뭔가 스스로를 해설하려고 애썼다. 그의 담론은 어느 부분 번쩍였지만 늘 비약의 연속이었다. 미디어와 출판사들은 뭔가 얻어가려고 끊임없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말이 미끄러진다고 했던가. 그의 말과 현실은 그래서 어긋나고는 했다.

"시시데기는 령 넘어가고 새침데기는 골로 빠진다." 

라는 옛말이 있지만 그의 외로움은 깊어갔다. 그의 비약적인 담론을 참을 수가 없다고 누군가 불평하면, 시인 최민은 간단하게 타일렀다. 

"그냥 진지하게 들어주면 되잖아."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잠자코 들어주면 김지하의 격앙된 정서는 가라앉았다. 

어느 무렵부터인가 그의 잠적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 김영주에게서 내게 급박한 전화가 왔다. 그가 열흘 이상 연락이 없어 어디 갔는지 못 찾겠다고 했다. 사방에 수소문하여 그가 백양사에 있다고 알려주면서야 그가 행려자처럼 이곳저곳 떠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래 전에 그는 심한 환각증에 시달린 뒤에 치료를 받고 술을 끊었다. 물론 그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냥 허전해서 떠돌았을 것이다. 

어느 해 대선 시기에 박근혜에서 비롯된 풍파 역시 그 나름대로의 해원의 뜻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매체들이나 또는 강연회장의 청중들은 내게 김지하를 어찌 생각하는가 벼르듯이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김지하는 아픈 사람이라고, 그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 보자고, 말하곤 했다. 

스승이 젊은 소리꾼에게 물었다. 

"소리도 좋고 기량도 좋고 재간도 뛰어난데 그것만 좋은 놈을 머라고 하는지 아냐?" 

"그것만 좋다뇨?" 

"소리든 머든 다 사람이 하는 거 아녀?" 

하고 나서 스승은 말했다. 

"소리에 그늘이 있어야 한다고. 그늘이 없는 재간꾼을 노랑목이라구 그러지." 

"그늘이 무엇인데요?" 

"그게 살아가면서 아프게 곡절을 겪다보면 생기는 거지." 

스승이 막걸리 한 잔을 주욱 들이키고 나서 다시 말했다. 

"헌데 그늘이 너무 짙어지고 바닥까지 갈아 앉으면 소리가 넘어갔다구 그런다. 소리가 넘어가 버리면 쓰잘데기 없는 소리가 되어버려. 할 필요두 없구 들을 필요두 없는 소리가 되지."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요?" 

"흰 그늘이 되어야 쓰지." 

"흰 그늘이란 무엇인가요?" 

"그건 그믐밤에 널린 흰 빨래 같은 것이니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칠흑같이 캄캄한 달도 없는 그믐밤에 흰 이불 홑청이 널려 있다. 멀리서든 가까이서든 그것은 어둠 속에서 희부연 하게만 느껴질 정도일 것이다. 누군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깊은 슬픔에 겨워 몇 날 몇 밤을 실컷 울고 나서 피시식 하고 저절로 나오는 희미한 웃음 같은 것. 그리고 그 웃음의 시초는 차츰 서슴지 않게 되고, 까짓 거 다시 살아내자 하는 신명을 타고 일상으로 자신을 끌어내어 줄 것이다." 

"흰 그늘이 소리의 끝인가요?" 

젊은 소리꾼이 물었더니 스승은 머리를 흔들었다. 

"더 있지. 남을 여, 소리 향, 여향이라는 게 있다네." 

"여향은 또 어떤 것입니까? 

"먼 산사에서 범종을 칠 때 마지막으로 당목을 때리고 나서 그치면 뎅 하는 소리가 울리고 잔음이 길게 여운을 끌며 퍼져 나간다. 데에에엥 하며 소리의 여운은 길게 아주 천천히 사라져 간다. 그리고 어느 결에 사방은 고요한 정적에 이른다. 그 고요한 정적이 여향이니라." 

소리꾼은 모든 소리가 그친 정적이 어째서 소리의 최고 경지가 되는가를 묻지 못했다. 스승도 여향이 무엇인지 똑똑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은 아주 조금씩만 나아져 간다. 그래서 세월이 답답하고, 지난 자취는 흔적도 없이 잊혀 가고, 먼지 같은 개인은 늙고 시들고 사라져 간다. 

우리가 김지하를 그냥 보내지 못하고 이렇게 기억을 더듬는 것은 아직도 시절이 마뜩치 않고 남은 안타까움이 많아서다.

이것이 남루하지만 숙연한 오늘의 우리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