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

조성환, 기후변화 시대 기학의 귀환 – 다른백년

기후변화 시대 기학의 귀환 – 다른백년
조성환의 [K-사상사]
기후변화 시대 기학의 귀환

인류세철학과 최한기의 대화조성환 2022.06.30 0 COMMENTS






인문학의 전환

시카고대학의 역사학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 1948~)는 ‘인류세인문학’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2009년에 쓴 논문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The Climate of History : Four Theses)」에서 인류세 담론을 처음으로 인문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이후에 ‘인류세인문학’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차크라바르티’라는 이름은 국내에서는 아직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탈식민지 연구자로 저명하다. 대표적인 저서인 『유럽을 지방화하기: 포스트식민 사상과 역사적 차이(Provincializing Europe: Postcolonial Thought and Historical Difference)』(2000)는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를 세계적인 학자로 만든 것은 역시 인류세인문학이다. 인류세인문학을 시작한 이후로는 라투르와 대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나이는 라투르가 한 살 더 많은데, 라투르가 묻고 차르라바르티가 답하는 형식이다. 이 대담은 2021년에 시카고대학출판부에서 나온 『행성시대의 역사의 기후(The Climate of History in a Planetary Age)』에 수록되어 있다. 제목은 「지구적인 것은 행성적인 것을 드러낸다(The Global Reveals the Planetary)」이다(이상은, 허남진 〮조성환의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의 지구인문학 – 지구(Earth)에서 행성(Planet)으로」, 『문학 사학 철학』 67호, 2021년 12월을 참조하였다).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는 다행히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조지형 〮김용우 엮음, 『지구사의 도전』, 서해문집, 2010에 수록). 그것도 영어 논문이 나온 직후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의 맨 끝에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책이 “어떻게 유럽중심주의를 넘어설 것인가?”(부제)라는 문제의식에서 기획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주제와는 다소 동떨어져 보여서 맨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인지도나 논문의 중요성 때문에 실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면 「역사의 기후: 네 가지 테제」는 권두언으로 들어가도 부족하지 않을 논문이다. 그 이유는 이 논문이 인문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서두에 나와있는 저자의 고백은 이러한 야심찬 기획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최근 몇 년 동안 이런 (기후) 위기에 가속이 붙으면서 나는 지난 25년 동안 읽었던 이론들, 가령 지구화 이론, 마르크스적 자본주의 분석, 탈식민주의 연구, 그리고 포스트식민주의 비평 등이 지구화를 연구하는 데에는 매우 유용하지만, 오늘날 인류가 처한 지구적 위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구사의 도전』, 352쪽. 번역은 가독성을 위해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즉 기후위기라는 현실 앞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공부해 왔던 모든 지식이 무용함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차크라바르티가 학문을 하는 자세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전공이나 분야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요청하는 학문을 하는 태도이다. 원불교 식으로 말하면 “현하(現下)”의 학문을 하는 것이다(“현하 과학의 문명이 발달됨에 따라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의 정신은 점점 쇠약하고…” 『정전』 제1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

100년 전의 과제가 물질문명의 도래였다면 지금의 과제는 기후변화의 위기이다. 그래서 이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학문이 필요하다고 차크라바르티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원불교가 ‘불법연구회’라는 자생종교를 창시하였듯이,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세인문학’이라는 인문학을 개척하였다.



인류세인문학의 시작

그럼 구체적으로 「역사의 기후 : 네 가지 테제」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이 논문의 논지를 인류세인문학의 관점에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울 크루천 등에 의하면, 지난 3세기는 인간의 행위가 지구 환경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데, 이 시대를 ‘인류세’라고 한다. 인류세란 인간이 기후에 갇힌 생물학적 행위자에서 기후를 바꾸는 지질학적 행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지질학적 힘으로 존재하는 새로운 지질 시대를 지칭하는 인류세는 자연사와 인간사를 구분하는 오랜 인문학적 도식을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근대성/지구화에 대한 인문주의적 역사의 엄정한 수정을 요구한다 / 『지구사의 도전』, 355-371쪽

먼저 이 글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인류세의 기점이다. 인류세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견이 있지만, 대략 3세기 이전의 산업혁명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는 증기기관의 발명에 의해 화석연료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탄소 배출량이 급증함에 따라 대기 환경이 변하기 시작하였다(송은주, <포스트휴머니즘과 인류세>, 《HORIZON》(온라인), 2020년 3월 16일).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핵실험을 계기로 상황이 심각해졌고, 1990년대 이래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전개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인류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와 시기적으로 겹친다. 따라서 인류세란 근대와 동일한 시기를 지칭하는 다른 명칭인 셈이다. 같은 시기를 다른 명칭으로 부른다는 것은 이해가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근대는 흔히 ‘이성의 시대’나 ‘자유의 시대’로 특징지어진다. 그런데 인류세는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된 시대”로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근대와 인류세는 인간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근대는 인간이 진보한 시기로 알려져 있지만, 인류세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조건이 위협받는 위기의 시대다.

한편, 차크라바르티에 의하면 인류세는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를 나누는 근대적 인식도 무너뜨렸다. 인간이 지구 환경을 변화시키는 존재가 된 이상, 인간의 역사는 자연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과 분리된 자연 개념은 더 이상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류세적 관점에서 보면, 근대란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입한 시기이자 자연이 인간에 반격을 가한 시기이다. 마치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이 인간이 자연의 영역을 침입했기 때문이라고 말해지듯이 말이다. 그래서 인류세는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천인합일도 아니고 천인분리도 아니다. 그것은 ‘천인착종’의 시대이다.



인류세인문학의 전개

「역사의 기후」가 나온 지 6년 뒤, 차크라바르티는 본격적으로 인류세 담론을 전개하였다. 2015년에 예일대학에서 행한 두 차례의 강연 《인류세 시대의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in the Anthropocene)》이 그것이다. 국내에는 아직 번역이 안되어 있지만,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개념을 인류세라는 시대에 적용했음을 제목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인류세라는 관점에서 인간의 조건을 다시 생각하자는 것이다. 또한 제1강 제목이 “획기적 의식으로서의 기후변화(Climate Change as Epochal Consciousness)”인 점으로부터 ‘기후변화’를 이 시대를 특징짓는 사건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인류세’와 ‘기후변화’는 동전의 양면인 셈이다. 인류세가 특정 시대를 지칭하는 개념이라면, ‘기후변화’는 그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강연 이후로 서구 인문학계에서는 인류세 담론이 분출하였다. 따라서 서양에서도 인류세 논의가 시작된 것은 겨우 몇 년 전에 불과하다. 국내에도 ‘인류세’라는 이름의 번역서가 출판된 것은 2018년이 처음이었다(가이아 빈스의 『인류세』와 클라이브 해밀턴의 『인류세』). 우리에게 ‘인류세’ 개념이 낯선 것은 당연하다.

참고로 차크라바르티의 강연이 있었던 2015년은 국제정치의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해였다. 이 해 12월에 전 세계 195개국이 참가한 ‘유엔 기후변화 회의’에서 지구온도 상승을 막기 위한 <파리협정>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6년에 차크라바르티는 「인류세 시대의 인문학: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칸트적 우화의 위기(Humanities in the Anthropocene: The Crisis of an Enduring Kantian Fable)」를 발표하였다. 이 논문의 첫머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2015년은 지구의 평균온도가 1도 올라간 첫번째 해이다. 그래서 2도 상승의 문턱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건너서는 안될 루비콘 강이다.

이렇게 보면 2015년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의미심장한 해이다.



미셀 세르의 예언

그런데 차크라바르티와 유사한 문제의식, 즉 인간의 활동이 기후를 바꾸고 있고, 그것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경고는 이미 30여 년 전부터 대두되고 있었다. 1990년에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세르(Michel Serres)가 쓴 『자연 계약(Le Contrat Naturel)』이 그것이다. 미셀 세르는 한국에서는 『엄지 세대』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다행히 『자연 계약』은 영어와 일어 번역이 있다. 이 번역본을 참고하여 일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늘날 우리의 전문성과 걱정은 날씨로 향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산업 기술이 지구적 범위에서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 앞으로는 날씨가 우리에게 좌우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이 변동하는 대기(大氣)에 좌우될 것이다. 갈수록 늘어나는 우리의 산업 활동과 기술 솜씨가 수천 통의 일산화탄소와 독성 폐기물을 대기에 쏟아 붓고 있는데, 그것은 지구의 기후시스템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 것인가? / Michel Serres, The Natural Contract translated by Elizabeth MacArthur and William Paulson,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5, p.27

이러한 내용이 1990년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1990년이면 서양에서는 ‘지구화’ 논의와 더불어 ‘지구’ 담론이 시작된 무렵이다. 그러나 아직 기후 담론은 나오지 않았다. 가령 1986년에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서 “방사능이나 스모그와 같은 위험이 국경을 넘어 <지구화> 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1988년에는 토마스 베리가 『지구의 꿈』에서 ‘지구공동체(Earth Community)’와 ‘지구살해(geocide)’ 개념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브뤼노 라투르가 ‘기적들의 해(The Year of Miracles)’라고 규정한 1989년에는 베를린장벽의 붕괴와 함께 유럽에서 지구 환경회의가 열렸다. 그래서 라투르는 1989년은 근대 시기에 진행되어 왔던 두 가지 착취, 즉 ‘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사회주의)와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자본주의)가 한계를 드러낸 ‘이중 파탄’의 해라고 보았다. 그리고 1992년에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지구회담(Earth Summit)’이 열리고 <기후변화 협약(UNFCCC)>이 채택되었다. 기후 문제의 심각성에 마침내 국제사회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서양에서 지구 담론이 대두되는 시기는 국내에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으로 한국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하지만 생태계 파괴에 따른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한살림운동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한살림은 1986년에 서울의 <제기동쌀가게>로 출발하였다). 그리고 1991년에는 『녹색평론』이 창간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해는 유럽에서 라투르의 고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가 출판된 해이다.

세르의 『자연 계약』은 시기적으로 그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세르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주의건 자본주의건 하나같이 사회 계약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기후변화 시기에는 자연과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 계약』의 주장이다.



기화(氣化)로서의 기후

차크라바르티가 지적했듯이, 그리고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이, 인류세의 특징이 ‘기후변화’이고, 기후변화가 ‘기화(氣化)’의 약자라고 한다면, 결국 인류세란 기(氣)가 화두가 된 시대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기학(氣學)의 시대인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근대의 특징과는 사뭇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근대는 이성이 강조된 리학(理學)의 시대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리학의 시대에 ‘기’에 대한 논의는 신비주의나 비과학적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기후변화 시대는 ‘기’에 대한 탐구가 중심이 된다. 실제로 1970년대에 ‘가이아’ 개념을 제안한 제임스 러브록이나 2000년에 ‘인류세’ 개념을 주창한 파울 크루천은 모두 <대기(大氣)> 화학자였다. 동아시아적으로 말하면 ‘기’를 탐구한 과학자들인 셈이다.

‘기화’ 개념은 한의학의 고전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부터 이미 나오고 있다. 가령 “기화가 일어나면 (방광의 진액이) 밖으로 배출된다.”는 용례가 그것이다(「소문素問: 영란비전론靈蘭秘典論」). 여기에서 ‘기화’는 신체에서 일어나는 생물학적 변화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11세기 성리학에 이르면 등장 횟수가 빈번해진다. 북송 시대의 성리학자 이정(二程)은 “만물의 시작은 모두 기화이다.”라고 하여, 기화를 형체가 갖추어지는 형화(形化) 이전의 단계로 보았다. 이어서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는 나무가 낮과 밤에 자라는 것을 두고 “기화의 흐름은 멈춘 적이 없다”고 하였다. 즉 만물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성장하는 것을 ‘기화’라고 한 것이다. 이 외에도 조선의 성리학자, 가령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그리고 대산 이상정이나 다산 정약용 등도 모두 기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최한기의 기화(氣化)

그러나 조선의 유학자들 중에서도 기화를 특히 애용한 학자는 혜강 최한기였다. 가히 동아시아사상가 중에서 최고라고 할 만하다. 최한기가 1860년에 쓴 『인정(人政)』에는 ‘기화’라는 말이 무려 150여 차례나 보이고 있다(<한국고전종합DB> 참조). 그 용례도 “기화지정(氣化之政)”, “일신기화(一身氣化)”, “천인기화(天人氣化)”, “천지기화(天地氣化)”, “승순기화(承順氣化)”, “기화도덕(氣化道德)” 등 매우 다양하다. 실로 그의 철학은 ‘기화의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리고 그러한 기화의 철학을 체계화한 것이 『기학(氣學)』(1857)이다. 『기학』에는 기화는 물론이고 ‘대기(大氣)’ 개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점은 기학을 기후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이상, ‘기화’에 관한 용례는 조성환, 『농촌과 목회』 83호, 2019년 가을호를 참조하였다).

그런데 최한기는 지금까지 ‘실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 연원은 1930년대의 조선학 운동이다. 정인보, 문일평, 안재홍, 최남선 등이 다산 정약용을 실학자로 규정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 후 최한기도 ‘실학파’로 묶여지게 된다. 이런 최한기 이해를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 1990년에 나온 김용옥의 『독기학설(讀氣學說)』이다. 이 책에서 김용옥은 실학파는 ‘근대성’이라는 서구적 역사 서술의 도식을 빌어서 조선후기사상사를 서술하려고 한 데서 나온 허구적 개념이라고 비판하였다. 아울러 최한기의 철학은 종래의 성인 패러다임을 기화 패러다임으로 전환시킨 획기적인 사상이었고, 그런 점에서 단순히 ‘실학’이라는 틀로 가둘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기학은 어떤 틀로 독해되어야 하는가? 이와 관련해서 『독기학설(讀氣學說)』이 나온 해가 세르의 『자연계약』이 나온 해와 같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세르의 문제의식에서 최한기를 다시 읽으면, 기학을 기후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즉 실학이라는 근대의 틀로 읽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라는 인류세의 틀로 읽는 것이다. 이하에서는 그 해석의 단서를 몇가지 소개하고자 한다(이하, 『기학』의 원문과 번역 그리고 쪽수는 손병욱 역주, 『기학』, 통나무, 2004에 의한다).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대기(大氣)

먼저 최한기는 인간이 그동안 ‘대기’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고 지적한다.

운화하는 대기(運化大氣)가 항상 피부와 뼈를 두루 적시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물과 물고기가 서로를 잊고 있듯이, 이것을 무형(無形)이라고 치부하기에 이르렀다(154쪽).

대기가 인간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없는 셈 치고 살았다는 것이다. 마치 물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잊고 살듯이, 인간도 대기의 고마움을 잊고 살아 왔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대기’가 오늘날 말하는 ‘대기(atmosphere)’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더 근원적인,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인 힘을 말한다. 그래서 거기에는 공기도 들어가고 기후도 포함된다. 이 점은 최한기의 다음과 같은 말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태어나서 자라고 늙어서 죽는 것은 모두 대기의 운행에 의한 것으로 피할 수 없다. (68쪽)

대기가 (모든 것을) 둘러싸서 운화함으로써 스스로 만물을 생성한다. 어찌 다른 원인을 기다려서 회전하며, 외부를 빌려와서 운화하겠는가! (51쪽)

최한기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대기의 운행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대기는, 마치 라투르가 가이아에는 어떠한 외적 원인도 없다고 했듯이(Facing Gaia, p.106), 누군가 시켜서 그렇게 운행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자체의 ‘활동운화’하는 성질에 의해서 운행할 뿐이다(“기의 본성은 활동운화이다” 109쪽). 그리고 그 운행에 의해서 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한다. 러브록이나 라투르는 만물의 활동과 행위에 의해서 대기 환경이 갖추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한기의 입장에서 보면, 그 활동과 행위가 가능한 것은 그들 안에 ‘대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기(大氣)의 활동에 의해서 우리가 오늘날 기후라고 부르는 대기(atmosphere)가 가능해졌다.



대기와의 자연 계약

대기가 모든 존재의 근거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고마움의 대상이다. 그래서 최한기는 대기를 부모에 비유한다.

대기가 호흡하고 적셔주는 혜택과 부모가 낳고 기른 은혜에 대해서는 이 몸이 세상에 사는 동안 수시로 힘을 다해야 한다. (204쪽)

이러한 생각은 19세기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이 “천지(天地)가 부모이다”라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만물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낳고 자라기 때문에 진정한 부모는 천지이고, 천지에게 부모와 같은 은혜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한기는 그 천지조차도 대기에 의해서 가능했기 때문에 대기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류세인문학적으로 해석하면, “기후야말로 인간의 생존 조건이기 때문에 기후에 대해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최한기는 이러한 기학적 입장에서 전통적인 경천(敬天), 외천(畏天), 사천(事天)을 재해석한다.

경천(敬天)이란 참된 마음으로 기의 운화를 어기지 않는 것이다.

외천(畏天)이란 기의 운화를 어길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사천(事天)이란 이 기의 운화를 계승하고 받드는 것이다.

순천(順天)이란 이 기의 운화를 고마워하고 따르는 것이다. (79쪽)

성리학자인 주자(朱子)는 외천(畏天)을 “리를 어길까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에 대해 최한기는 “기를 어길까 두려워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주자가 말하는 ‘리’는 사회적 규범이다. 세르 식으로 말하면 사회 계약의 영역이다. 반면에 최한기가 말하는 ‘기’는 생존의 근거이다. 그래서 그 기에 따르는 것은, 세르 식으로 말하면 ‘자연 계약’을 맺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물론 과학주의자들은 오늘날 인간은 기후도 바꿀 수 있는 조천(造天)의 경지에 와 있다고 반론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인간의 생존에 맞게 바꾸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즉 인간의 활동에 의해 어그러진 기후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려는 노력이다. 그래서 순천(順天)의 조작이지 역천(逆天)의 조작은 아니다.



기후와 정치

기학 체계에서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대기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 기학의 용어로 말하면, 인기운화(人氣運化)는 대기운화(大氣運化)에 따라야 한다.

대기화(大氣化)가 조화로운가 조화롭지 못한가가 천하의 풍년과 흉년을 가른다. 1년 중의 강우량, 일조량, 바람 등의 변화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므로, 사람이 때를 놓치지 않고 할 일을 다 해야 하고, 흉년에 대비하여 조금씩 저축해야 한다. 이것이 인기운화(人氣運化)의 방법이다. (122쪽)

여기에서 인기운화(人氣運化)는 인간의 활동을 가리킨다. 그냥 ‘인(人)’이라고 하지 않고 ‘인기(人氣)라고 한 것은 모든 존재는 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단지 ‘인기(人氣)’라고 하지 않고 ‘인기운화(人氣運化)’라고 한 것은 그 기가 활동운화하는 성질을 지닌다고 보기 때문이다.

농사의 예를 든 것은 최한기 시대만 해도 아직 농업 사회가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앤서니 기든스의 『기후변화의 정치학』(2009)을 참고하면, 기후와 정치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니 오히려 기후변화 시대에는 기후가 정치의 최우선 의제가 되어야 한다고 기든스는 주장한다. 최한기 식으로 말하면 대기(大氣)가 인정(人政)의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천인(天人)의 기가 하나가 된 ‘일통운화(一統運化)’라고 한다(37쪽, 287쪽).



자연-정치-과학의 네트워크

최한기는 기본적으로 농업사회를 모델로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업사회의 도래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용운화(器用運化)’를 중시하고 있는 점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크게는 우주운화(宇宙運化)의 기가 있으니, 역수(曆數)를 정리하여 그 대강을 제시함이다.

다음으로 인민운화(人民運化)의 기가 있으니, 정교(政敎)를 닦고 밝혀서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작게는 기용운화(器用運化)의 기가 있으니, 책을 지어서 간직하고 기계와 도구를 제조하여 백성의 쓰임을 넉넉히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합하면 일기운화(一氣運化)가 되고, 나누면 삼기운화(三氣運化)가 된다. (…) 이것이 『기학』이다. (168-9쪽)

이에 의하면 기용운화란 도구를 제작하는 인간의 활동을 말한다. 우주운화는 대기의 운화를 가리킨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자연의 영역이다. 인민운화는 정치와 사회의 영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삼기운화는 ‘자연-사회-기술’의 세계가 하나로 통합된 차원을 가리킨다. 라투르는 이 영역들이 일견 구분된 듯 보이지만 사실은 별개가 아님을 ‘행위자 네트워크’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래서 이것들이 완전히 분리된 ‘근대’란 존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였다.

반면에 최한기는 당시에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서양 과학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용운화’라는 개념으로 동아시아의 기학적 세계관에 편입시켰다. 그러나 그 도구를 만드는 활동이 자연의 운행, 즉 우주운화에도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차크라바르티 식으로 말하면, 인간사가 자연사에 영향을 준다는 본 것이다. 기학적 입장에서 보면, 자연의 운행과 도구의 사용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모두가 ‘기’의 운화의 일환이다. 이러한 얽힘의 관계를 표현한 말이 ‘일기운화’이다.



기후변화 시대의 신기학(新氣學)

차크라바르티를 비롯한 서구의 인류세인문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시대를 근대 또는 탈근대에서 인류세로 새롭게 인식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계몽주의자들이 주창했던 진보나 자유와 같은 인간 조건을 도외시한 가치들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가이아’라는 생존권/임계영역 안에서 나아갈 수 있을 뿐이고, 자유를 누린다고 해도 그 한계 안에서의 자유로울 뿐이다. 근대에 계몽을 부르짖은 서구인들이 이제서야 계몽이 되고 있는 느낌이다.

한편 최한기는 세계를 보는 눈을 리학적 관점에서 기학적 관점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기학적 세계관이란 인간과 자연이 모두 ‘기’로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말한다. 이러한 인식이 최한기 이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장자』가 기의 취산(聚散)으로 생사를 설명한달지, 인간과 자연을 기의 감응으로 설명하는 『회남자』의 감응사상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한기가 살았던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지배적인 시대였다. 성리학은 ‘리’라는 당위가 앞서는 철학이다. “~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와 역할이 전제된다. 반면에 기학은 ‘기’라는 행위(활동운화)에 주목하는 철학이다. 그 행위에는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포함되어 있다.

인류세란 기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활동운화로 지구의 활동운화가 바뀌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 변화된 지구의 활동운화가 다시 인간의 활동운화를 제약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의 활동운화에 주목한 최한기의 기학이야말로 인류세 시대에 다시 조명되어야 할 한국철학이 아닐까?

물론 아직 기학에는 인간 이외의 존재(nonhuman)의 활동운화에 대한 논의는 없다. 오늘날 생태학과 결부되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한 문제의식도 희박하다. 반면에 ‘기화도덕(氣化道德)’이라는 말로부터 알 수 있듯이, 인류세 시대에 요청되는 도덕과 수양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이처럼 기학은 인류세철학과 대화의 여지도 많고 미완의 요소도 많다. 이러한 점들을 잘 살피고 기워 나간다면 기후변화 시대에 요청되는 <신기학(新氣學)>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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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중국에서 경험한 나의 원전, 그리고 문재인과 윤석렬의 그것

조성환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다시개벽' 편집인. 지구지역학 연구자. 서강대와 와세다대학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였고,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한국 근대의 탄생'과 '개벽파선언'(이병한과 공저), '하늘을 그리는 사람들'을 저술하였다. 20∼30대에는 노장사상에 끌려 중국철학을 공부하였고, 40대부터는 한국학에 눈을 떠 동학과 개벽사상을 연구하였다. 최근에는 1990년대부터 서양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지구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일관된 문제의식은 ‘근대성’이다. 그것도 서구적 근대성이 아닌 비서구적 근대성이다. 동학과 개벽은 한국적 근대성에 대한 관심의 일환이고, 지구인문학은 ‘근대성에서 지구성으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 양자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지구지역학’을 사용하고 있다. 동학이라는 한국학은 좁게는 지역학, 넓게는 지구학이라는 두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을 바탕으로 장차 개화학과 개벽학이 어우러진 한국 근대사상사를 재구성하고, 토착적 근대와 지구인문학을 주제로 하는 총서를 기획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