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8

카를 융 - 위키백과, カール・グスタフ・ユング




카를 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를 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카를 융

칼 구스타프 융(독일어Carl Gustav Jung [ˈkarl ˈgʊstaf ˈjʊŋ]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은 스위스의 정신의학자로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이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 바젤 대학교와 취리히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부르크휠츨리 정신병원에서 일하면서 병원의 원장이었던 오이겐 블로일러(Eugen Bleuler)의 연구를 응용해 심리학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이전 연구자들이 시작한 연상 검사를 응용하면서 자극어에 대한 단어연상을 연구하였다. 이 연상은 성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당시 학계에서 자주 금기시 되고는 하였다.

그는 특정한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유명해진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이에 관련된 학설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또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정신분석학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프로이트의 성욕중심설말고도 알프레트 아들러의 사회심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13년을 전후해서 독자적으로 이들의 양립에관한 연구로 분석심리학설을 작업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그는 인간의 내면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층들이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한걸음 더나아가 특히 개체로 하여금 내면의 무의식들이 통일된 전체를 실현하게 하는 자기원형이 초월적 기능(transcendental function)이 있음을 주장했다.[1][2][3]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심리치료법을 개발하여 이론화하였고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에게 '개체화'(individuation, 또는 자기실현)라고 하는 자신의 신화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 좀더 유연하고 온전한 인격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1914년 사임하기까지 국제정신분석학회 회장을 역임한바있으며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의 심리학 교수, 바젤 대학교의 의학심리학 교수로 재직하였었고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융의 심리학[편집]

융은 한 개인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집단무의식이 대립구도(enantiodromia)를 이루면서 이러한 대립속에서 끊임없이 조화를 향해 역동적으로 움직인다는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가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길일 것으로 여겼다.[4][5]

한편 이러한 맥락에서 융은 인간이 겪는 괴로움과 고통이 심리적 사회적 성숙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결과로서 삶에 대한 겸손(humble)을 주요하게 언급한 바 있다.

언급[편집]

융의 묘비명에는 "부르든 부르지 않든, 은 존재할 것이다"고 적혀 있다. 그는 신에 대해서 그의 생각을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라고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언급한 바 있다.

The meaning of my existence is that life has addressed a question to me. Or, conversely, I myself am a question which is addressed to the world, and I must communicate my answer, for otherwise I am dependent upon the world's answer. That is a superpersonal life task, which I accomplish only by effort and with difficulty. <Memories, Dreams, Reflections, 1962> (Chapter 11-On Life after Death, P318)
내 존재의 의미는 삶이 나에게 질문을 전해왔다는데에 있다. 혹은, 거꾸로, 내 자신이 세계에 전해진 질문인 것이고, 세상의 답에 종속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나의 대답과 소통해야 한다. 이건 초개인적 삶의 임무이고, 나는 이것을 오직 노력과 어려움으로 이뤘다. <기억들, 꿈들, 반영들> (11장-죽음 뒤의 삶에 대하여, P318)
Here is the greatest and smallest, the remotest and nearest, the highest and lowest, and we cannot discuss one side of it without also discussing the other. No language is adequate to this paradox. Whatever one can say, no words express the whole. (Chapter 12-Late Thoughts III ,P354 MDR)
여기에는 가장 거대한 것과 가장 조그마한 것,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 가장 높은 것과 가장 낮은 것이 있다. 우리는 그 나머지 또한 논의하는 것 없이 이러한 것의 한쪽 편만을 논의할 순 없다. 이런 모순에 언어는 충분하지 않다. 누군가는 무언가를 말할 수 있겠지만, 단어는 전체를 표출하지 않는다. <기억, 꿈, 반성들> (12장-후기의 생각들 III, P354)
The fact, therefore, that a polarity underlies the dynamics of the psyche means that the whole problem of opposites in its broadest sense, with all its concomitant religious and philosophical aspects, is drawn into the psychological discussion. (Chapter 12-Late Thoughts II ,P349-350 MDR)
그러므로 극성이 정신의 역동성의 기초가된다는 사실은 그 대립물의 전체적인 문제를 종교적, 철학적 측면 모두를 포함하는 가장 넓은 의미를 갖는 심리학적인 논의로 끌어들인다. - 기억, 꿈, 반사상 12장 최종 사변 II - P349~350

집단무의식[편집]

The collective unconscious is the sediment of all the experience of the universe of all time, and is also an image of the universe that has been in process of formation for untold ages. In the course of time certain features have become prominent in this image, the so-called dominants. These dominants are the ruling powers, the gods; that is, the representations resulting from dominating laws and principles, from average regularities in the issue of the images that the brain has received as a consequence of secular processes.(Collected Papers on Analytical Psychology 1917- CHAPTER XIV THE PSYCHOLOGY OF THE UNCONSCIOUS PROCESSES - IX(VERSE) The Dominants of the Super-Personal Unconscious P432)[6]
집단적 무의식은 모든 시간의 우주에 대한 모든 경험의 축적물이며, 또한 말할것도 없이 여러 세대 동안 형성되어 온 우주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정 이미지가 이 이미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소위 우성인자(dominants)입니다. 이 우성인자들은 지배 세력, 신들입니다. 즉 뇌가 세속적인 과정의 결과로 받은 이미지의 문제에 있어서 평균적인 규칙성으로부터의 법률과 원칙을 지배함으로써 생겨난 표현입니다.(분석심리학논문집 14장9절 초인격적인 무의식의 우성들 P432)


장자의 꿈[편집]

But then I front of the altar, facing me, sat a yogi in lotus posture, in deep meditation. When I looked at him more closely, I realized that he had my face. I started in profound and awoke with the thought: "Aha, so he is the one who fright, is meditating me. He has a dream, and I am it." I knew that when he awakened, I would no longer be. (Memories, Dreams, Reflections - Chapter 11-On Life after Death, P323)
그런데 제 앞에 있는 제단에서 저를 향해 요기(Yogi)[7]가 연꽃 자세에서, 깊은 명상에 빠져 앉아있었습니다. 내가 그를 더 자세히 보았을 때, 나는 그가 내 얼굴을 가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심취하기 시작했으며 생각과 함께 깨어났습니다. '아, 그는 공포에 빠져서 나를 명상하고있다. 그는 꿈이었다, 나는 지금 깨어있다.' 나는 그가 깨어 났을 때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 장자는 자신을 '나비의 꿈'으로 언급한바있다.

昔者莊周夢爲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俄然覺,則蘧蘧然周也。不知周之夢爲胡蝶與胡蝶之夢爲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此之謂物化。 (莊子 內篇 第二 齊物論)[8]
예전에 장주는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다. 너무나 좋았고 황홀한 나비가 되어 있었다.스스로도 즐거워서 마음 따라 팔랑팔랑 춤추고 있었다. 내가 나인지 몰랐다. 깜짝 깨보니, 어라 장주다. 지금 장주의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의 꿈속에서 장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장주와 나비에는 확실히 구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물질의 변화라는 것이다. (장자 내편 제물론)

저서[편집]

저서로는 '무의식의 심리학' (Psychology of the Unconscious , 1916), 분석심리학에대한 두편의 에세이(Two Essays on Analytical Psychology), 칼 융의 작품집분석심리학 논문집, '기억,꿈,반사상(反射像)'(Memories, Dreams, Reflections,1962) 등이 있다.[9]

같이 보기[편집]

외부 링크[편집]

참고[편집]

  1.  분석심리학 논문집14-THE PSYCHOLOGY OF THE UNCONSCIOUS PROCESSES
  2.  분석심리학 논문집15-THE CONCEPTION OF THE UNCONSCIOUS
  3.  분석심리학 논문집14-THE PSYCHOLOGY OF THE UNCONSCIOUS PROCESSES - VI The Synthetic or Constructive Method
  4.  분석심리학 논문집14-THE PSYCHOLOGY OF THE UNCONSCIOUS PROCESSES - IV The Two Types of Psychology
  5.  위키낱말사전-에난치오드로미아-대극균형작용
  6.  CPAP-C14V9 P432
  7.  요기(Yogi)-요가(yoga) 수행자
  8.  위키문헌-장자 내편 제2 제물론
  9.  위키문헌- 저자:카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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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ール・グスタフ・ユン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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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ール・グスタフ・ユング
人物情報
生誕1875年7月26日
スイスの旗 スイス トゥールガウ州ケスヴィル
死没1961年6月6日(85歳)
スイスの旗 スイス チューリッヒキュスナハト
居住スイス
国籍スイスの旗 スイス
出身校バーゼル大学
学問
研究分野精神医学心理学心理療法分析心理学
博士課程
指導教員
オイゲン・ブロイラー
主な業績分析心理学
影響を
受けた人物
ジークムント・フロイトクラフト=エビングイマヌエル・カントゲーテアルトゥル・ショーペンハウアーフリードリヒ・ニーチェ易経グノーシス主義錬金術ヘルメス主義
影響を
与えた人物
ニューエイジ精神分析
ヘルマン・ヘッセR・D・レイン
署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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カール・グスタフ・ユング(Carl Gustav Jung、1875年7月26日 - 1961年6月6日)は、スイス精神科医心理学者ブロイラーに師事し深層心理について研究、分析心理学ユング心理学)を創始した。

生涯[編集]

幼少期[編集]

1875年:スイス、トゥールガウ州ボーデン湖畔のケスヴィルでプロテスタント改革派牧師の家(ドイツ系)に生まれる[1]。少年期は己の内面に深い注意が向けられ、善と悪、神と人間についての思索に没頭する。「生涯忘れられない夢」を1879年または1880年に見られたとされる[2]

1886年、バーゼルの上級ギナジウムへ通う。かつて言語を研究していた父にラテン語の準備をしてもらってから入学した。[2]この時期に内なる性格としての「NO.2」が現れる。またバーゼル大聖堂に神が排泄する夢を見る。更に母親の示唆によって『ファウスト』が必読書となる[2]。また『ファウスト』は後々に衝動や無意識の認識の意味をテーマに扱ったと述べている[3]

バーゼル大学時代[編集]

1895年バーゼル大学医学部に入学。学生時代はゲーテカントニーチェの著作に感銘を受け、後の心理学者としての著作に、ゲーテの『ファウスト』やニーチェの『ツァラトゥストラはかく語りき』への言及も多くみられる。内的な基盤を持たない形式的な信仰というものに疑問を感じ、牧師という職を継ぐことを特には望まず、同名の祖父と同じ名門バーゼル大学で医学を、特にクラフト=エビングの影響で精神医学を学んだ[4]。この同名の祖父には、ゲーテの私生児だと言う伝説があった[5]

1896年には父親が亡くなり、学費を払うのが困難になり工面に苦労する。卒業後クリニックに勤めたのも資金を得るためである側面もあるとされる[2]

ニーチェとの関係[編集]

ユング入学の15年程前にニーチェはバーゼル大学で講師をしていたため、ユングが入学した時も、当時公務を退いておりニーチェの先輩であり友人でもあったブルクハルトによるニーチェの批判的批評を筆頭として、哲学の高尚な学生はニーチェに対して批判的な議論を行っていたという。また、ニーチェの思想をあまり理解できていない学生内でもかつてのニーチェの所作などに関して噂していた[6]。そんな中、ユングは『ツァラトゥストラ』や『反時代的考察』に感銘を受ける。No.2はツァラトゥストラがモデルとなったという[2]。また後に「ニーチェによって近代心理学を受け入れる準備」をしたと語っている[3]。『無意識の心理』(1916) ではフロイトとアドラーとの分岐点をニーチェの「自己保存の衝動(性衝動に対する)」として紹介している。更には『心理学的類型』(1921) ではニーチェの「アポロン」と「デュオニソス」がユングの類型と連関していると明記。『心理学と宗教』(1940) では「神が死んだ時代」を論じ、またニーチェの精神障害は無意識に呑み込まれて分裂症的(自分をデュオニソスと署名した)になったという分析を行っている。1934年から1939年にかけてはチューリッヒの心理学クラブにて英語にてのゼミナールで『ニーチェのツァラトゥストラの心理学的分析』を行っている。

超心理学[編集]

1895年に従妹であるヘリーから降霊術に興味を持つ。そして後々の論文「いわゆるオカルト現象の心理と病理 」に「S.W.嬢」としてヘリーをモデルとして執筆している。但し論文では親族であるということを隠ぺいするためか、1899年から翌年に研究が行われたと記している。この時期、カントの『ある霊視者の夢』も読んでいる[2]

エービングの教科書[編集]

1899年10月国家試験に備えるためにリヒアルト・フォン・クラフト=エービングの精神医学の教科書(1890)を読んで、「自然と精神の衝突が出来事になる場所」「対立し合うものの合一」としての精神医学から衝撃を受ける。当時絶望の場として認識していたユングにとって「人格の病」と捉え「妄想観念や幻覚が精神病に特有の症状であるだけでなく、人間的な意味をもっているということを示すことであった」という部分に意味を見出したようだ[2]

1900年7月にバーゼル大学を卒業し、「ブルクヘルツリ」病院に勤めることを決め、12月には義務である兵役として初年兵学校に行き、アールガウで歩兵としての訓練を終えてから勤める。

バーゼルでは祖父あっての孫ユングとして見られることが多く、また母と妹のしがらみもあり、バーゼルを抜け出せることはユングの喜びでもあった[2]

「ブルクヘルツリ」時代[編集]

1901年からは、チューリヒ大学精神科クリニックの「ブルクヘルツリ」でオイゲン・ブロイラーの元で助手を務める。

オイゲン・ブロイラーは「ミュンヘンのエミール・クレペリンと並んでブロイラーは彼の専門分野においては指針を与える代表的存在」[2]であった。また1898年にオーグスト・アンリ・フォレル(1848-1931)から精神医学の教授を引き継いでおり、「フォレルの弟子として精神分析をスイスに移住したブロイラーは、この発生途上の仕事と、それゆえフロイトの夢研究にもユングの注目を促したはず」[2]

ブロイラーは「人道主義と親切さで患者に感銘を与えた医者として、また若い医者たちを完全に傾倒させるまでにたきつけ、激励する教師として称賛されていた…人間として価値を剥奪された患者を人格として尊敬する」[7]。また患者たちと一つ屋根の中で住むことや禁酒・更に私的な自由区間がほとんどない中で勤務することを戒律としていた[7]

ユング自身は勤務を通して「わたしたちが精神病患者に見出すものは、何ひとつ新しいもの、未知のものはない。むしろわたしたちは自分自身の存在基盤に出会うのである。」[6]と述べている。ブロイラーと同じく真摯に患者と向き合うことを行い、当時の「病んだ人格から疾患をいわば抽象し、診断と症状記述と統計で足りていた」[6]状況を超えようとしていた。また「人間の精神がその自己破壊に直面したときにどのように反応するかを知りたかった」[6]とも語っている。

1902年にブロイラーの勧めで、学位論文を書き、霊媒現象を考察した「いわゆるオカルト現象の心理と病理 (Zur Psychologie und Pathologie sogenannter occulter Phänomene)」を執筆。「E・ブロイラー教授閣下の承認を得て」と書かれていて、周りはオカルト的側面を批判する人もいたらしい一方、ブロイラー教授はユングのその側面を認めていたと言われる[2]。また「遺伝的負因者における夢遊病の一症例」、「ブルクヘルツリ病院の第一助手」という記述もある[7]

1902年秋から1903年にかけて、ブロイラーの信任を得てパリに留学する。かつてフロイトも留学していた「力動的精神医学の新しい体系の最初の樹立者」ジャン・マルタン・シャルコーのもと改革されたサルペトリエール病院でおしていたこともあったピエール・ジャネ (1859–1947) の元で留学する。「ヒステリー」と「神経衰弱」という2つから出発する視点は後のユングの類型に影響に繋がる。また留学週に出版されたアルフレド・ビネ (1857–1911) の『知能の実験てき研究』が出版され、その「内観」と「外観」という類型論的な鍵概念から詳しく取り扱われていたのも、後のユングの「外交的なヒステリー」と「内向的な分裂病」と類型論に影響を与える。また留学中に婦人帽子制作職人となっていたヘリーに驚き、パリの街で会っている[2]

1905年、言語連想法の研究から認められ、医長になり、精神医学の教授の資格をとり、さらにチューリッヒ大学の私講師(学校からでなく生徒からお金をとるスタイル)になる[7]。1906年「早発性痴呆の心理」、1908年に「精神病の内容」と題された論文を発表。1909年には、大学を離れて個人開業を開始する[8]

フロイトとの関係[編集]

1900年には、ジークムント・フロイトの『夢判断』に触れるものの、当初は特に影響がなかった[9]

ブロイラーの病院ではゲマインザーメという一般会議において所長のブロイラーが議長を行っていて、受け持ちの患者についてや論文についての議論もなされたようである。そこで「ユングに任されたこの種の最初の仕事の一つは、ちょうど出版されたばかりのジークムント・フロイトの『夢判断』に関するレポートであった」[2]1907年からは、フロイトとの間に親交が生まれた[10]

生理学的な知識欲を満たしてくれる医学や、歴史学的な知識欲を満たしてくれる考古学に興味を抱き、友人と活発に議論を交わし、やがて人間の心理と科学の接点としての心理学に道を定めた。精神疾患の人々の治療にあたるとともに疾患の研究も進め、特に当時不治の病とされた分裂病(統合失調症)の解明と治療に一定の光明をもたらした。ヒステリー患者の治療と無意識の解明に力を注いでいたフロイトと、親しく意見を交わした。

1911年には国際精神分析協会を設立し、その初代会長になる。フロイトでなくユングなのは、ユダヤ人以外を会長に選ぶ目的があったためである[11]

ところが、フロイトとは別に神話研究に励むユングは、次第にフロイトとの理論的な違いを表に出し始め、1914年には国際精神分析協会を辞して、フロイトらと袂を分かつことになり[12]、チューリヒ大学医学部の私講師の職も辞任した[13]。フロイトと別れた時期から精神的不調をきたし、数々の幻覚に出会う。スイスの街並みが水没し多数の市民が溺死する幻覚を見て慌てふためき、また天上より降りてきたキリストと思しき男性が教会を破壊しつくす幻覚に出会っていたことが『赤の書』によって明らかになっている[14]

フロイトと親交を結ぶ3年前の1904年、勤務先のチューリヒ大学に入院してきた患者のザビーナ・シュピールラインと治療を通して親しくなり、不倫関係となった。ザビーナはユングと別れた後にフロイトに師事し、精神分析家となる[15]

その後[編集]

精神分析の運動から離れ一人研究を進め、1916年には石油王ジョン・ロックフェラーの四女イーディス・ロックフェラー・マコーミック(en, 1872年 - 1932年)の助力で「心理学クラブ」を設立して、分析心理学の確立に努める[16]。このクラブには、ヘルマン・ヘッセも訪れている[17]。このマコーミック夫人の縁でジェイムス・ジョイスを知り、『ユリシーズ』の批評も書いている[18]

1922年にはスイスのボーリンゲンに土地を得て、塔の建設を開始する[19]。この塔は瓦焼き職人に教わったやり方で造られており、この作業によって自身の精神的不調が安定化したとしている。

1921年には代表作『心理学的類型』(『タイプ論』『元型論』とも)を公開する。

1928年、ユングはリヒャルト・ヴィルヘルムの手による中国道教錬金術のドイツ語訳を入手し、曼荼羅に夢中になる。これにコメントを付けて、1929年に『黄金の華の秘密』というタイトルで出版した[20]。ユングは、精神的不調の回復期にあって、曼荼羅に描かれるような幾何学模様を描くことが多くなり、その折、チベットの仏僧の描く曼荼羅と自分の絵との偶然の一致に感嘆し、ここに意味を見出した。

ユング研究所

1948年に共同研究者や後継者たちとともに、スイス・チューリッヒにユング研究所を設立し、ユング派臨床心理学の基礎と伝統を確立した。また1933年からは、アスコナエラノス会議において、主導的役割を演じることで、深層心理学神話学宗教学哲学など多様な分野の専門家・思想家の学際的交流と研究の場を拓いた。開催をしたオルガ・フレーベ・カプタインは、ユングに強く協力を求め、ユングが参加できない場合は廃止も辞さない構えであった[21]。これには1951年まで出席する[22]。ここで、鈴木大拙ミルチャ・エリアーデハーバート・リードらと親交を結ぶ。

1946年に『転移の心理学』、1951年に『アイオーン』、1955年1956年には『結合の神秘』の第1巻と第2巻が出版されている。これらは、70歳を過ぎての著作であった[23]

1961年6月6日逝去。チューリッヒ州のキュスナハト改革派教会に葬られた。スイスでは晩年のユングは気味悪がられたが、世界的に精神病の理解には一石を投じるものとして価値づけられている。

死の直前まで、ユング唯一の一般向け著書『人間と象徴英語版』をマリー=ルイーズ・フォン・フランツジョゼフ・ヘンダーソンアニエラ・ヤッフェヨランド・ヤコビーの4人と分担して英語で執筆し、ユング自身は担当する第1章を死の10日前に書き終えた[24]

著作の大半は、下記のようにドイツ語でなされた。

ユング心理学の変遷[編集]

精神科医であったユングは、ピエール・ジャネウィリアム・ジェームズらの理論を元にした心理理論を模索していた。フロイトの精神分析学の理論に自説との共通点を見出したユングはフロイトに接近し、一時期は蜜月状態(1906年 - 1913年)となるが、徐々に方向性の違いから距離を置くようになる。

ユングがそのキャリアの前半において発表した「連想実験」は、フロイトの「自由連想」法を応用して、言葉の錯誤と応答時間ずれ等を計測し、無意識のコンプレックスの存在を客観的な形にしたということで、科学的な価値を持ち、フロイトもそのために初めは喜んでユングを迎え入れた。両者の初めての邂逅において交わされた対談は10時間を超し、以後両者は互いに親しく手紙で近況や抱負、意見を伝えあった。しかし数年の交流のうちに、両者の志向性の違いが次第に浮き彫りになってきた。フロイトは無神論を支持したが、ユングは神の存在に関する判断には保留を設けた。またユングはフロイトとアルフレッド・アドラーの心理学を比較・吟味し、両者の心理学は双方の心性の反映であるとし、外的な対象を必要とする「」を掲げるフロイトは「外向的」、自身に関心が集中する「権力」に言及するアドラーは「内向的」であるといった考察をし、別の視点からの判断を考慮に入れた。

ユングは歴史や宗教にも関心を向けるようになり、やがてフロイトが「リビドー」を全て「性」に還元することに異議を唱え、はるかに広大な意味をもつものとして「リビドー」を再定義し、ついに決別することとなった[注 1]。ユングは後に、フロイトの言う「無意識」は個人の意識に抑圧された内容の「ごみ捨て場」のようなものであるが、自分の言う無意識とは「人類の歴史が眠る宝庫」のようなものである、と例えている。

ユングの患者であった精神疾患者らの語るイメージに不思議と共通点があること、またそれらは、世界各地の神話・伝承とも一致する点が多いことを見出したユングは、人間の無意識の奧底には人類共通の素地(集合的無意識)が存在すると考え、この共通するイメージを想起させる力動を「元型」と名付けた。また、晩年、物理学者のウォルフガング・パウリとともに共時性シンクロニシティ=意味のある偶然の一致)に関する共著を発表した。

ユング心理学の特徴[編集]

ユング心理学(分析心理学)は個人の意識、無意識の分析をする点ではフロイトの精神分析学と共通しているが、個人的な無意識にとどまらず、個人を超え人類に共通しているとされる集合的無意識(普遍的無意識)を視野に入れた分析も含まれる。ユング心理学による心理療法では能動的想像法英語版が行われる場合もある。能動的想像法は文字通り意識的に無意識のイメージを掘り下げる手法であり、無意識が活性化する場合があるため、経験を積んだセラピストの元で行われない限り、危険な手法である。

また、ユング心理学は、他派よりも心理臨床において夢分析を重視している。集合的無意識としての「元型イメージが日常的に表出している現象」[25]でもあり、また個人的無意識の発露でもあるとされる。

夢の分析はフロイトが既に重視していたことであった。しかしユング心理学の夢解釈がフロイトの精神分析と異なる点は、無意識を一方的に杓子定規で解釈するのではなく、クライアントセラピストが対等な立場で夢について話し合い、その多義的な意味・目的を考えることによって、クライアントの心の中で巻き起こっていることを治癒的に生かそうとする点にある。

ユングはフロイトとの決別以後[26]、自らの無意識から湧き出る元型的イメージと真摯に対峙しながらも患者への治療を続けた。これら元型的イメージは統合失調症の患者のイメージにおいても同様なパターンが見られるため、ユングは統合失調症患者であり、オカルティストであるという誤解を受けることもある。しかしその時期においても、ユングが医師として患者への治療を行い、多くの患者を癒やし、現実に導いていたことはユング心理学の理解の上で重要なことである。

ユングは人間の心の成長過程を「個性化の過程」と呼び、健常者、統合失調患者を含めた全ての人間が経験するものとした。従ってセラピー(心理療法)が終了しても、人間の個性化の過程は継続する。ユング派のセラピーでは、セラピー終了後もクライアントをサポートするためにカウンセリングを継続する場合もあり、この場合のセラピーを、「個性化」と呼ぶ場合がある。ただし、これは他の心理療法と同様、クライエントの「生き方」に介入したり指示を与えたりするものではないし、いたずらにセラピーを長引かせるためのものでもない。

また、日本においてユング心理学が隆盛を極めたのは、その心理臨床において箱庭療法を積極的に取り入れ、多くの著書を発表した河合隼雄の影響が大きい。

ナチズムや反ユダヤ主義の勃興に対する姿勢[編集]

ナチスが政権を取った1933年、ドイツ精神療法学会が改編されることになりヒトラーに反対したユダヤ人エルンスト・クレッチマーがその会長を辞任。新たに設立された国際精神療法学会の会長にユングが就任した[27]。そのためユングはナチスに加担してクレッチマーを追い落としたと一部に言われた[注 2]。後にユングは精神療法という学問分野を守りたかったので非ユダヤ人である自分が会長職を引き受けたと述べている。実際ナチスからの影響を逃れるために国際精神療法学会の本部をスイスチューリッヒに移し、ドイツ国内で身分を剥奪されたユダヤ人医師を国際学会で受け入れ、学会誌にユダヤ人学者の論文が掲載されるように図ってもいる。ユングはユダヤ系の師フロイトにも支援の意図について打診[注 3]しており、長年にわたってユングの秘書を務めたユダヤ人のアニエラ・ヤッフェによれば、「ナチスへの対応には甘いところがあった」が、ユングはナチスの反ユダヤ人政策には明確に反対し、ユダヤ人のドイツ脱出支援活動にも関与していたとのこと[28][29]

ユングと超心理学[編集]

ユングはその学位論文『いわゆるオカルト的現象の心理と病理』において、従妹ヘレーネ・プライスヴェルクを「霊媒」として開かれた「交霊会」を扱ったこと(ただしこの論文では神秘的要因ではなく精神の病理的状態に帰されている)、また錬金術占星術、中国のなどに深くコミットしたことにより、オカルト主義的な傾向を見て取られ、また新異教主義的な人々からその預言者とみなされる傾向がある。これにはおそらく母方のプライスヴェルク家が霊能者の家系として著名だった出自も影響していると思われる。また「集合的無意識」や「元型」などの一般の生物学の知見とは相容れない概念を提起することによって、20世紀の科学から離脱して19世紀の自然哲学に逆戻りしてしまったという批判がある[30]。またフロイトもユングとまだ訣別する前に、「オカルティズム」を拒絶するよう強く求めた[31]

一方で、ユング自身は、夢に見られる元型に関して、遺伝に関連づけて言及していたくだりがある(『分析心理学』)。無意識に蓄えられている遺伝情報は莫大であり、人の心性がそれを基礎にしているからには、その生み出すものも、その起源をはるか過去に遡ることができるとする解釈も可能であり、遺伝情報内の大量の経験データの中には、人に平均して訪れる体験の体系も含まれていると考えた場合、元型の普遍性も説明できるであろう。また、そうした無意識内容を生み出す傾向、というユングの説明の付与は、人間が普遍的な基盤に立脚しながらも、決して固定された構造ではなく(これが生物学的な本能にしばられた動物と違う点である)、変化の可能性を秘めていることを示唆している。無意識と意識の調停作業はユングの言う「個体化」に結実する。

ただし19世紀末から20世紀初頭の状況は、一方では精神医学を極めて機能主義的に捉えることのみが科学的であり「心の治癒」といったものを語ることは出来ないという流れがあった一方で、アカデミズム以外でオカルティズムの大流行があったのみならず、ウィリアム・ジェームズのような学者も心霊主義の実験に乗り出すなど、心の問題に関するアプローチは現在以上に定まらないところもあった[32]。こうした問題に関してユングに批判的であったフロイトも、そもそも性理論を打ち立てるのはオカルトの「黒い奔流」に対する「堅固な城塞」を築かねばならないからだという動機を口にしており[6]、こうした問題に必ずしも安定した姿勢で臨んでばかりいたわけではなかった。またユング自身はきわめて厳格に学問的な方法論を意識して研究を進めていたという主張もあり[33]、こうした点について決定的な評価を下すことはまだ難しいといえる。

著作[編集]

ユングの著作は、『ユング全集』にほぼ全ての重要な論文(単行本を含む)が網羅されている。全20巻の構成となっている。ドイツにおいて『Gesammelte Werke von C. G. Jung』 (Walter Verlag) として出版されている(「GW」 と略する)。英語版は、ユングの監修の元に翻訳が行われている(『 The Collected Works of C. G. Jung 』)。 代表的な著作としては、以下のものがある。

  • 『転換のシンボル』 Symbole der Wandlung, 1912, /1950, GW Bd.5.
  • 『心理学的類型』 Psychologische Typen, 1921/1950, GW Bd.6.
  • 『心理学と宗教』 Psychologie und Religion, 1940/1962 (GW Bd.11).
  • 『アイオーン』 Aion, 1950, GW Bd.5-2.
  • 『心理学と錬金術』 Psychologie und Alchemie, 1944/1952, GW Bd.12.
  • 『ヨブへの答え』 Antworf auf Hiob, 1952/1967 (GW Bd.11).
  • 『結合の神秘』 Mysterium Coniunctionis, 1955/1956, GW Bd.14.

ユングが登場するフィクション[編集]

映画
テレビドラマ
コンピュータゲーム
小説

親族[編集]

  • 父方の曾祖父であるフランツ・イグナツ (1759–1831) はナポレオン戦争のとき、野戦医師を勤め、マンハイムに移る。その際、マンハイム劇場の近くで、ゲーテを取り巻く多くの詩人と交友。後妻となるゾフィー・ツィーグラーも詩人らと交友していてゲーテと関係を持ち私生児としてユングの祖父であるC.G.ユングを生んだという伝説がある[2]
  • 父方の祖父であるC.G.ユング(1794–1864:ユングと同名)はハイデルベルクで医学を勉強。その際、ベルリンの神学者フリードリッヒ・ダニエル・エルンスト・シュライエルマッハーの影響からカトリックからプロテスタントに改宗される。1817年ドイツ統一のためのデモに参加し投獄(時代のパラダイムとしてはナポレオンのくびきを落とし統一ドイツに繋がる1848年の革命「フォアメルツ」に繋がる)。その後、パリに行きアレクサンダー・フォン・フンボルト (1769–1859) と知り合いになり、スイスのバーゼル大学に紹介され後々には教授となり更には総長になる。また1848年の肖像画は今もバーゼル大学の昔の玄関にかかっている[2]。市民病院を拡大させ、精神薄弱児たちの住む家「希望の施設 (Anstalt der Hoffnung)」を作る。またバーゼル市長の娘ゾフィー・フライと三度目の結婚をし父パウルを出産。
  • 父のパウルはアラビア語に関する研究で哲学博士を得るが、経済的な理由で教授になる道を断念しボスヴィルの牧師になる。この側面がニーチェを受け入れる準備となる[2]
  • 母方の祖父であるザムエル・プライスヴェルク (1799–1871) はバーゼルのレオンハルト教区の説教師。改革派の牧師仲間ではいわゆるアンティスティス(牧師長)として通っていてた。ヘブライ語の私講師として学位を得ており、アメリカにまで普及したヘブライ語の文法書の著者と見なされていた。彼によって発刊されていた月刊雑誌『モルゲンラント(朝の国)』で彼は、ユダヤ人がパレスチナに再び定住することに対して関心がある事を公言した(シオニズムに先駆ける発言)[2]

脚注[編集]

[脚注の使い方]

注釈[編集]

  1. ^ ユング著「リビドーの変容と象徴」(1912)にフロイトは難色を示したが、ユングは学問的な視野の拡大化をはかる意味合いを著書に持たせていた。
  2. ^ ナチスが国際精神療法学会に干渉して、ナチスへの忠誠を誓うマニフェストが学会誌に掲載されたために、会長のユングは非難された。ユングは反論したが、非難の意見は現在も存在する。
  3. ^ ただし、これに関してはフロイトに「敵の援助を受けることは出来ない」と拒まれている。

出典[編集]

  1. ^ 山中 2001, p. 12.
  2. a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ゲルハルト・ヴェーア(訳)村本詔司 (1994). ユング伝. 創元社
  3. a b ユング(訳)高橋義孝 (1977) [1916]. 無意識の心理. 人文書院
  4. ^ 山中 2001, p. 34.
  5. ^ ヴェーア 1994, p. 13.
  6. a b c d e 『ユング自伝』。[要文献特定詳細情報]
  7. a b c d ゲルハルト・ヴェーア(訳)安田一郎 (1996-09-10). C・G・ユング 記録でたどる人と思想. 青土社
  8. ^ 山中 2001, p. 35.
  9. ^ ヴェーア 1994, p. 80.
  10. ^ 山中 2001, p. 38.
  11. ^ ヴェーア 1994, p. 107.
  12. ^ ヴェーア 1994, p. 131.
  13. ^ ヴェーア 1994, p. 138.
  14. ^ 赤の書 ―The“Red Book". 創元社. (2010年6月)
  15. ^ ザビーネ・リッヒェベッヒャー 著、田中ひかる 訳 『ザビーナ・シュピールラインの悲劇』岩波書店、2009年。[要ページ番号]
  16. ^ ヴェーア 1994, p. 189.
  17. ^ 河合 1994, p. 137.
  18. ^ 河合 1994, pp. 137–139.
  19. ^ ヴェーア 1994, p. 185.
  20. ^ 河合 1994, pp. 111–112.
  21. ^ 河合 1994, pp. 148–150.
  22. ^ ヴェーア 1994, p. 224.
  23. ^ 河合 1994, pp. 180–181.
  24. ^ C.G.ユング 著、河合隼雄監訳 訳 『人間と象徴』 上、河出書房新社、1975年。"序文"。
  25. ^ 湯浅赳男 『面白いほどよくわかる現代思想のすべて』日本文芸社〈学校で教えない教科書〉、2003年1月、29頁。ISBN 453725131X
  26. ^ 1906年4月から1913年の訣別まで、約360通の書簡が、『フロイト=ユンク往復書簡』(上・下、金森誠也訳、講談社学術文庫、2007年)で訳されている。
  27. ^ エレンベルガー 1980b, p. 308.
  28. ^ 河合隼雄『ユングの生涯』第三文明社レグルス文庫100、1978年、pp.52-56。
  29. ^ 平田武靖「ユンク心理学の系譜 -ユンク・ナチス・ユダヤ人-」『is No.1』ポーラ文化研究所、1978年。
  30. ^ ノル 1998, pp. 201–202, 382–383, 415–417.
  31. ^ ユング 1972a, p. 127.
  32. ^ 上山 1989, pp. 483, 488–491.
  33. ^ 林道義 『ユング思想の真髄』 朝日新聞社、1998年。[要ページ番号]

参考文献[編集]

関連項目[編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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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

출처: 무료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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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
캐릭터 정보
탄생1875년 7월 26일 스위스 투르가우 주 케스빌
스위스의 국기
사망1961년 6월 6일 (85세) 스위스 취리히 쿠스 나하트
스위스의 국기
라이브스위스
국적스위스의 국기 스위스
출신 학교바젤 대학
학문
연구분야정신과 , 심리학 , 심리 치료 , 분석 심리학
박사과정
강사
오이겐 브로일러
주요 성과분석심리학
영향을
받은 사람
지크문트 프로이트 , 크래프트-에빙 , 이 마누엘 칸트 , 괴테 , 알투르 쇼펜하우어 , 프리드리히 니체 , 이경 그노시스 주의 , 연금술 · 헤르메스주의
영향을 미친
사람
뉴 에이지 , 정신 분석
헤르만 헤세 , R · D · 레인
서명
템플릿 보기

칼 구스타프 융 (Carl Gustav Jung, 1875년 7월 26일 - 1961년 6월 6일 )은 스위스 의 정신과 의사 · 심리학자 . 브로일러 에게 사사하고 심층심리에 대해 연구, 분석심리학 ( 융심리학 )을 창시했다.

평생 편집 ]

어린 시절 편집 ]

1875년: 스위스, 투르 가우주 보덴 호반 의 케스빌에서 개신교 ( 개혁파 ) 목사 의 집( 독일계 )에서 태어난다 [1] . 소년기는 자신의 내면에 깊은 주의를 기울여 선과 악,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색에 몰두한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꿈」을 1879년 또는 1880년에 보였다고 한다 [2] .

1886년 바젤의 고급 기나듐에 다녔다. 한때 언어를 연구했던 아버지에게 라틴어 준비를 받고 나서 입학했다. [2] 이 시기에 내면의 성격으로서의 「NO.2」가 나타난다. 또 바젤 대성당에 하나님이 배설하는 꿈을 본다. 또한 어머니의 시사에 의해 「파우스트」가 필독서가 된다 [2] . 또 「파우스트」는 나중에 충동이나 무의식의 인식의 의미를 테마로 취급했다고 말하고 있다 [3] .

바젤 대학 시대 편집 ]

1895년 바젤 대학 의학부에 입학. 학생시절은 괴테 , 칸트 나 니체 의 저작에 감명을 받고, 뒤의 심리학자로서의 저작에, 괴테의 『파우스트』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하기』에 대한 언급도 많이 보인다. 내적 기반을 갖지 않는 형식적인 신앙이라는 것에 의문 을 느끼고 , 목사라는 직을 이어받기를 바란다 . 의학을 배운 [4] . 이 같은 이름의 할아버지에는 괴테의 사생아라고 하는 전설이 있었다 [5] .

1896년에는 아버지가 죽고, 학비를 지불하는 것이 곤란해져 공면에 고생한다. 졸업 후 클리닉에 근무한 것도 자금을 얻기 위한 측면도 있다고 한다 [2] .

니체와의 관계 편집 ]

융 입학 15년 정도 전에 니체는 바젤 대학에서 강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융이 입학했을 때도 당시 공무를 물리치고 있어 니체의 선배이자 친구이기도 한 부르크하르트 에 의한 니체의 비판적 비평을 필두 로서 철학의 고상한 학생은 니체에 대해 비판적인 논의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니체의 사상을 별로 이해하지 못한 학생내에서도 과거의 니체의 소작 등에 관해서 소문하고 있었다 [6] . 그런 가운데 융은 '차라투스트라'와 ' 반시대적 고찰 '에 감명을 받는다. No.2는 차라투스트라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2] . 또 나중에 "니체에 의해 근대심리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고 말하고 있다 [3] . 『무의식의 심리』(1916)에서는 프로이트와 아들러와의 분기점을 니체의 「자기 보존의 충동(성 충동에 대한)」로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심리학적 유형'(1921)에서는 니체의 '아폴론'과 '듀오니소스'가 융의 유형과 연관되어 있다고 명기. '심리학과 종교'(1940)에서는 '하느님이 죽은 시대'를 논하고, 또 니체의 정신장애는 무의식적으로 삼켜져 분열증적(자신을 듀오니소스라고 서명했다)이 되었다는 분석을 실시해 있다. 1934년부터 1939년에 걸쳐서는 ​​취리히의 심리학 클럽에서 영어로의 세미나르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심리학적 분석』을 실시하고 있다.

초심리학 편집 ]

1895년에 종매자인 헬리로부터 강령술에 흥미를 가진다. 그리고 뒤의 논문 '이른바 오컬트 현상의 심리와 병리'에 'SW양'으로 헬리를 모델로 집필하고 있다. 다만 논문에서는 친족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1899년부터 다음 해에 연구가 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 칸트 의 '한 영시자의 꿈'도 읽고 있다 [2] .

에이빙 교과서 편집 ]

1899년 10월 국가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리히알트 폰 크래프트=에이빙의 정신의학 교과서(1890)를 읽고 「자연과 정신의 충돌이 사건이 되는 장소」 「대치하는 것의 합일」로서 의 정신 의학에서 충격을 받는다. 당시 절망의 장으로서 인식하고 있던 융에게 있어서 「인격의 병」이라고 파악해 「망상 관념이나 환각이 정신병에 특유의 증상일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라는 부분에 의미를 발견한 것 같다 [2] .

1900년 7월 바젤 대학을 졸업하고 '부르크 헤르츠리' 병원에 근무하기로 했고, 12월에는 의무인 병역으로 초년병학교에 가서 아르가우에서 보병으로서의 훈련을 마치고 나서 근무한다.

바젤에서는 할아버지의 손자 융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았고, 또 어머니와 여동생의 시끄러움도 있어 바젤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융의 기쁨 이기도 했다 .

'부르크 헤르츠리' 시대 편집 ]

1901년 부터는 취리히 대학 정신과 클리닉의 '부르크 헤르츠리'에서 오이겐 브로일러 의 근원으로 조수를 맡았다.

오이겐 브로일러는 "뮌헨의 에밀 크레페린과 함께 브로일러는 그의 전문 분야에서 지침을 제공하는 대표적인 존재" [2] 였다. 또 1898년에 오그스트 앙리 포렐(1848-1931)로부터 정신의학의 교수를 계승하고 있어, 「포렐의 제자로서 정신 분석을 스위스에 이주한 브로일러는, 이 발생 도상의 일과,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꿈 연구에도 융의 주목을 촉구했을 것" [2] .

브로일러는 “인도주의와 친절함으로 환자에게 감명을 준 의사로서, 또 젊은 의사들을 완전히 기울이기까지 힘쓰고 격려하는 교사로 칭찬받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가치를 박탈당한 환자를 인격 로 존경한다” [7] . 또한 환자들과 하나의 지붕 속에서 사는 것, 금주, 더욱 사적인 자유구간이 거의 없는 가운데 근무하는 것을 계율로 했다 [7] .

윤 자신은 근무를 통해 “우리가 정신병 환자에게 찾아내는 것은, 하나 하나 새로운 것, 미지의 것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자신의 존재 기반을 만나는 것이다.” [6] 라고 말하고 있다. 브로일러와 같이 진지하게 환자와 마주하는 일을 하고, 당시의 「병든 인격으로부터 질환을 말하자면 추상해, 진단과 증상 기술과 통계로 충분했다」[6] 상황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또한 "인간의 정신이 그 자기 파괴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6] 라고도 말했다.

1902년에 브로일러의 권고로, 학위 논문을 쓰고 영매 현상을 고찰한 「소위 오컬트 현상의 심리와 병리(Zur Psychologie und Pathologie sogenannter occulter Phänomene)」를 집필. "E·브로일러 교수각하의 승인을 얻어"라고 쓰여져 있고, 주위는 오컬트적 측면을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은 한편, 브로일러 교수는 융의 그 측면을 인정하고 있었다고 말해진다 [2] . 또 「유전적 부인자에 있어서의 유유병의 일증례」, 「부르크헤르츠리 병원의 제일 조수」라고 하는 기술도 있다 [7] .

1902년 가을부터 1903년에 걸쳐 브로일러의 신임을 얻어 파리에 유학한다. 한때 프로이트도 유학하고 있던 '역동적 정신의학의 새로운 체계의 첫 수립자' 장마르탄 샤르코 아래 개혁된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했던 적도 있었던 피에르 자네 (1859-1947) )에서 유학한다. '히스테리'와 '신경쇠약'이라는 두 가지에서 출발하는 시점은 이후 융의 유형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유학주에 출판된 알프레도 비네(1857-1911)의 '지능의 실험해 연구'가 출판되어 그 '내관'과 '외관'이라는 유형론적인 열쇠 개념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던 것도 융의 '외교적인 히스테리'와 '내향적인 분열병'과 유형론에 영향을 미친다. 또 유학중에 부인모자 제작 장인이 되고 있던 헬리에 놀라, 파리의 거리에서 만나고 있다 [2] .

1905년, 언어 연상법의 연구로부터 인정되어, 의장이 되어, 정신의학의 교수의 자격을 취해, 한층 더 취리히 대학의 사강사(학교로부터가 아니라 학생으로부터 돈을 취하는 스타일)이 된다 [7] . 1906년 「조발성 치매의 심리」, 1908년에 「정신병의 내용」이라고 제목이 붙은 논문을 발표. 1909년 에는 대학을 떠나 개인개업을 시작한다 [8] .

프로이트와의 관계 편집 ]

1900년에는 지크문트 프로이트 의 『꿈 판단』에 접했지만, 당초에는 특별한 영향이 없었다 [9] .

브로일러 병원에서는 게마인 상어라는 일반회의에서 소장인 브로일러가 의장을 하고 있었고, 수용 환자와 논문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진 것 같다. 그래서 "융에 맡겨진 이런 종류의 첫 작품 중 하나는 방금 출판된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꿈 판단'에 관한 리포트였다" [2] . 1907년 부터는 프로이트와의 사이에 친교가 태어났다 [10] .

생리 학적 지식욕을 충족시켜 주는 의학 이나, 역사학적 지식욕을 채워주는 고고학 에 흥미를 갖고, 친구와 활발하게 논의를 나누고, 이윽고 인간의 심리와 과학의 접점으로서의 심리학에 길을 결정했다. 정신질환 사람들의 치료에 해당하며 질병 연구도 진행되어 특히 당시 불치병으로 여겨진 분열병( 통합실조증 )의 해명과 치료에 일정한 광명을 가져왔다. 히스테리 환자의 치료와 무의식의 해명에 힘을 쏟고 있던 프로이트와 친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1911년 에는 국제정신분석협회 를 설립하여 그 초대회장이 된다. 프로이트가 아닌 융인 것은 유대인 이외를 회장에게 선택하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1] .

그런데 프로이트와는 별도로 신화연구에 힘쓰는 융은 점차 프로이트와의 이론적인 차이를 표에 내기 시작했고, 1914년 에는 국제정신분석협회를 그만두고 프로이트들과 함을 분배하게 된다 . ] , 취리히 대학 의학부의 사강사의 직장도 사임했다 [13] . 프로이트와 헤어진 시기부터 정신적 부조를 겪었고, 수많은 환각을 만난다. 스위스의 거리가 수몰해 다수의 시민이 익사하는 환각을 보고 당황하고, 또 천상에서 내려온 그리스도라고 생각해 남성이 교회를 파괴하는 환각을 만났던 것이 「붉은 책」에 의해 분명히 되어 있다 [14] .

프로이트와 친교를 맺기 3년 전인 1904년 근무처 취리히 대학에 입원해 온 환자의 자비나 슈필라인 과 치료를 통해 친해지고 불륜관계가 되었다. 자비나는 융과 헤어진 후 프로이트에게 사사하고 정신분석가가 된다 [15] .

그 후 편집 ]

1916년 에는 석유왕 존 록펠러 의 사녀 이디스 록펠러 맥코믹( en , 1872년 - 1932년)의 조력으로 '심리학 클럽'을 설립 , 분석 심리학의 확립에 노력한다 [16] . 이 클럽에는 헤르만 헤세 도 방문하고 있다 [17] . 이 맥코믹 부인의 인연으로 제임스 조이스 를 알고 『유리시즈』의 비평도 썼다 [18] .

1922년 에는 스위스의 볼링겐 에 토지를 얻어 탑의 건설을 개시한다 [19] . 이 탑은 기와구이 장인에게 가르친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이 작업에 의해 자신의 정신적 부조가 안정화되었다고 한다.

1921년 에는 대표작 '심리학적 유형'('타입론', '원형론' 모두)을 공개한다.

1928년 , 융은 리하르트 빌헬름 의 손에 의한 중국 도교 의 연금술 의 독일어 번역을 입수해 만다라 에 열중한다. 이것에 코멘트를 붙여, 1929년 에 「황금의 꽃의 비밀」이라고 하는 타이틀로 출판했다 [20] . 융은 정신적 부조의 회복기에 있어 만다라에 그려지는 기하학 무늬를 그리는 경우가 많아 그 때 티베트의 불교가 그리는 만다라와 자신의 그림과의 우연의 일치에 감탄 그리고 여기에 의미를 발견했다.

윤연구소

1948년 공동연구자와 후계자들과 함께 스위스 취리히에 융연구소 를 설립하여 융파 임상심리학 의 기초와 전통을 확립했다. 또 1933년 부터는 아스코나 에서 엘라노스 회의 에서 주도적 역할을 맡아 심층 심리학 · 신화학 · 종교학 ·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사상가의 학제간 교류와 연구의 장을 개척 했다. 개최를 한 올가 프레이브 캡타인 은 융에 강하게 협력을 요구하고 융이 참가할 수 없는 경우에는 폐지도 그만두지 않는 자세였다 [21] . 여기에는 1951년 까지 참석한다 [22] . 여기서 스즈키 오오조 , 밀차 엘리에데 , 하 버트 리드 등과 친교를 맺는다.

1946년 에 「전이의 심리학」, 1951년 에 「아이온」, 1955년 과 1956년 에는 「결합의 신비」의 제1권과 제2권이 출판되고 있다. 이들은 70세를 넘은 저작이었다 [23] .

1961년 6월 6일 서거. 취리히주의 쿠스나하트 개혁파 교회에 장사되었다. 스위스에서는 만년의 융은 기분 나빠졌지만, 세계적으로 정신병의 이해에는 일석을 던지는 것으로 가치가 있다.

죽음 직전까지 융 유일한 일반용 저서 ' 인간과 상징 영어판 ) '을 마리 루이스 폰 프란츠 , 조제프 헨더슨 , 아니에라 야페 , 요랜드 야코비 의 4명과 분담해 영어로 쓰기 하고, 융 자신은 담당하는 제1장을 죽음 10일전에 써 마쳤다 [24] .

저작의 대부분은 아래와 같이 독일어로 이루어졌다.

윤심리학의 변천 편집 ]

정신과 의사였던 융은 피에르 자네 와 윌리엄 제임스 등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심리 이론을 모색하고 있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의 이론에 자설과의 공통점을 발견한 융은 프로이트에 접근해, 일시기는 밀월 상태(1906년 - 1913년)가 되지만, 서서히 방향성의 차이로부터 거리를 두도록(듯이) 된다.

융이 그 경력의 전반에 발표한 ' 연상실험 '은 프로이트의 '자유연상'법을 응용하여 말의 착오와 응답시간 어긋남 등을 계측해 무의식 컴플렉스 의 존재를 객관적인 형태로 했다는 것으로 과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프로이트도 그 때문에 처음에는 기뻐하며 융을 맞이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나눠진 대담은 10시간을 넘었고 이후 두 사람은 서로 친하게 편지로 근황과 포부, 의견을 전했다. 그러나 수년의 교류 가운데, 양자의 지향성의 차이가 점차 부각되어 왔다. 프로이트는 무신론 을 지지했지만, 융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판단에는 보류를 마련했다. 또 융은 프로이트와 알프레드 아들러 의 심리학을 비교, 음미하고, 양자의 심리학은 양쪽의 심성의 반영이라고 하며, 외적 대상을 필요로 하는 '  '을 내걸는 프로이트는 '외향적'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하는 '권력'을 언급하는 애들러는 '내향적'이라는 고찰을 하고 다른 관점에서 판단을 고려했다.

융은 역사와 종교에도 관심을 돌리게 되어, 곧 프로이트가 ' 리비도 '를 모두 '성'으로 환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훨씬 광대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리비도'를 재정의하고 , 드디어 결별하게 되었다 [주1] . 융은 나중에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은 개인의 의식에 억압된 내용의 '쓰레기 버리는 곳'과 같은 것이지만, 자신이 말하는 무의식이란 '인류의 역사가 자는 보고'와 같은 것 라고 비유하고 있다.

융의 환자였던 정신질환자들의 말하는 이미지에 신기함과 공통점이 있는 것, 그리고 그들은 세계 각지의 신화·전승과도 일치하는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 융은 인간의 무의식의 노 바닥에는 인류 공통의 소지( 집합적 무의식 )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이 공통된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역동을 「원형」이라고 명명했다. 또한 만년, 물리학자의 월프강 파울리 와 함께 공시성 ( 싱크로니시티 =의미가 있는 우연의 일치)에 관한 공저를 발표했다.

윤 심리학의 특징 편집 ]

윤심리학( 분석심리학 )은 개인의 의식, 무의식의 분석을 하는 점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과 공통이지만, 개인적인 무의식에 그치지 않고, 개인을 넘어 인류에 공통하고 있다고 되는 집합적 무의식 (보편적 무의식)을 시야에 넣은 분석도 포함된다. 융심리학에 의한 심리요법에서는 능동적 상상법 영어판 ) 이 실시되는 경우도 있다. 능동적 상상법은 말 그대로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이미지를 파내는 수법이며, 무의식이 활성화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경험을 쌓은 치료사의 근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위험한 수법이다.

또한 융심리학은 타파보다 심리임상에서 꿈 분석 을 중시하고 있다.  은 집합적 무의식 으로서의 「원형 이미지가 일상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현상」[25] 이기도 하고, 또 개인적 무의식 의 발로이기도 하다고 한다.

꿈의 분석은 프로이트 가 이미 중시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융심리학의 꿈해석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다른 점은 무의식을 일방적으로 산자 통치자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 와 치료사 가 대등한 입장에서 꿈에 대해 토론하고 그 다의적인 의미·목적 를 생각함으로써, 클라이언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치유적으로 살리려는 점에 있다.

융은 프로이트와의 결별 이후 [26] 자신의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원형적 이미지와 진지하게 대치하면서도 환자에 대한 치료를 계속했다. 이러한 원형 이미지는 정신 분열증 환자의 이미지에서도 유사한 패턴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융은 정신 분열증 환자이며 오컬 티스트라는 오해를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도 융이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고 많은 환자를 치유하고 현실로 이끌고 있던 것은 융 심리학의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윤은 인간의 마음의 성장과정을 '개성화의 과정'이라 부르며 건강한 사람, 통합실조환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것으로 했다. 따라서 테라피(심리요법)가 종료해도 인간의 개성화 과정은 계속된다. 융파 테라피에서는, 테라피 종료 후에도 클라이언트를 서포트하기 위해 상담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어, 이 경우의 테라피를, 「개성화」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다만, 이것은 다른 심리요법과 마찬가지로 클라이언트의 '생활방식'에 개입하거나 지시를 주거나 하는 것이 아니며 장난에 테라피를 길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또 일본에서 융심리학이 융성을 이룬 것은 그 심리임상에서 박정요법 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많은 저서를 발표한 가와이 하야오 의 영향이 크다.

나치즘과 반유대주의의 발흥에 대한 자세 편집 ]

나치 가 정권을 취한 1933년 독일 정신요법학회가 개편되게 되어 히틀러 에 반대한 유대인 에른스트 클레치머가 그 회장을 사임. 새롭게 설립된 국제정신요법학회의 회장에 융이 취임했다 [27] . 그 때문에 융은 나치에 가담해 크레치머를 쫓아버렸다고 일부에게 말해졌다 [주2] . 이후 융은 정신요법이라는 학문 분야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에 비유대인인 자신이 회장직을 맡았다고 말했다. 실제 나치의 영향을 피하기 위해 국제정신요법학회의 본부를 스위스 취리히  옮겨, 독일 국내에서 신분을 박탈당한 유태인 의사를 국제학회에서 받아들여, 학회지에 유대인 학자의 논문이 게재되어 하도록 도모하고 있다. 융은 유대계의 선생님 프로도 에게도 지원의도에 대해 타진 하고 있다. [주 3] 하지만, 융은 나치의 반유대인 정책에는 명확하게 반대하고, 유대인의 독일 탈출 지원 활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 [28] [29] .

윤과 초심리학 편집 ]

융은 그 학위 논문 '소위 오컬트적 현상의 심리와 병리'에서 종매 헤레네 프라이스베르크를 ' 영매 '로 열린 '교령회'를 다룬 것(단, 이 논문에서는 신비적 요인이 아니라 정신의 병리적 상태로 돌아온다), 또 연금술 이나 점성술 , 중국의 용이 등에 깊게 커밋한 것에 의해, 오컬트주의적인 경향을 보고 취해지고 또한 신이교주 의적인 사람들로부터 그 선지자로 본다 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아마 어머니의 프라이스베르크 가가 영능자의 가계로서 유명했던 출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집합적 무의식'이나 '원형' 등 일반 생물학 의 지견과는 어울리지 않는 개념을 제기함으로써 20세기 과학 에서 이탈해 19세기 자연철학 으로 되돌아 버렸다는 비판 있다 [30] . 또한 프로이트도 융과 아직 조별하기 전에 ' 오컬티즘 '을 거절하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31] .

한편, 융 자신은 꿈에서 볼 수 있는 원형에 관해서 유전 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싶은 곳이 있다(『분석심리학』). 무의식적으로 축적된 유전정보는 막대하고, 사람의 심성이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낳는 것도, 그 기원을 훨씬 과거에 거슬러 올 수 있다고 하는 해석도 가능하며, 유전정보 안의 대량의 경험 데이터 중에는, 사람에게 평균적으로 방문하는 체험의 체계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경우, 원형의 보편성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러한 무의식 내용을 만들어내는 경향이라는 융의 설명의 부여는 인간이 보편적인 기반에 입각하면서도 결코 고정된 구조가 아니라 점이다), 변화의 가능성을 숨기고 있음을 시사한다. 무의식과 의식의 중재작업은 융이 말하는 '개체화'에 결실한다.

다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상황은, 한편으로는 정신의학 을 지극히 기능주의적으로 파악하는 것만이 과학적이며 「마음의 치유」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흐름이 있었던 한편, 아카데미즘 이외에 오컬티즘의 대유행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윌리엄 제임스 와 같은 학자도 심령주의 의 실험에 나서는 등, 마음의 문제에 관한 어프로치는 현재 이상으로 정해지지 않는 곳도 있었다 [32] . 이러한 문제에 관해 융에 비판적이었던 프로이트도 원래 성이론을 세우는 것은 오컬트의 '검은 분류'에 대한 '견고한 요새'를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동기를 입으로 하고 있다 [6] . 에 반드시 안정된 자세로 임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융 자신은 매우 엄격하게 학문적인 방법론을 의식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어 [33] , 이러한 점에 대해서 결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아직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저작 편집 ]

윤의 저작은 '융 전집'에 거의 모든 중요한 논문(단행본 포함)이 망라되어 있다. 총 20권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독일에서는 "Gesammelte Werke von CG Jung"(Walter Verlag)로 출판되었습니다 ( "GW"로 약칭). 영어판 은, 융의 감수의 바탕으로 번역이 행해지고 있다(『The Collected Works of CG Jung』).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다음이 있다.

  • '전환의 상징' Symbole der Wandlung, 1912, /1950, GW Bd.5.
  • "심리학의 유형" Psychologische Typen, 1921/1950, GW Bd.6.
  • 심리학과 종교 Psychologie und Religion, 1940/1962 (GW Bd.11).
  • '아이온' Aion, 1950, GW Bd.5-2.
  • 심리학과 연금술 Psychologie und Alchemie, 1944/1952, GW Bd.12.
  • 욥에 대한 대답 Antworf auf Hiob, 1952/1967 (GW Bd.11).
  • "결합의 신비"Mysterium Coniunctionis, 1955/1956, GW Bd.14.

윤이 등장하는 소설 편집 ]

영화
TV드라마
컴퓨터 게임
소설

친족 편집 ]

  • 아버지의 증조부인 프란츠 이그너츠 (1759-1831)는 나폴레옹 전쟁 때 야전 의사를 근무하고 만하임으로 옮긴다. 그 때 만하임 극장 근처에서 괴테를 둘러싼 많은 시인과 교우. 후처가 되는 조피·지글러도 시인들과 교우하고 있어 괴테 와 관계를 갖고 사생아로서 융의 할아버지인 CG융을 낳았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2] .
  • 아버지의 할아버지인 CG 융(1794–1864: 융과 동명)은 하이델베르크 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 때 베를린의 신학자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슈라이엘 마하의 영향으로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된다. 1817년 독일 통일을 위한 시위에 참가해 투옥(시대의 패러다임으로서는 나폴레옹의 곰팡이를 떨어뜨려 통일 독일에 연결되는 1848년의 혁명 「포메르츠」에 연결된다). 그 후 파리에 가서 알렉산더 폰 훔볼트 (1769–1859)라고 알게 되고, 스위스의 바젤 대학에 소개되어 뒤에는 교수가 되어 심지어 총장이 된다. 또 1848년의 초상화는 지금도 바젤 대학의 옛 현관에 달려 있다 [2] . 시민병원을 확대시켜 정신박약아들이 사는 집 '희망의 시설(Anstalt der Hoffnung)'을 만든다. 또 바젤 시장의 딸 조피 플라이와 세 번째 결혼을 하고 아버지 파울을 출산.
  • 아버지의 파울은 아랍어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를 얻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교수가 되는 길을 포기하고 보스빌 의 목사가 된다. 이 측면이 니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 [2] .
  • 어머니의 할아버지인 자무엘 프라이스베르크(1799–1871)는 바젤 레온하르트 교구의 설교사이다. 개혁파의 목사 동료에서는 이른바 안티스티스(목사장)로서 다니고 있었다. 히브리어의 사강사로서 학위를 얻고 있어, 미국에까지 보급된 히브리어의 문법서의 저자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에 의해 발간되고 있던 월간잡지 '모르겐란트(아침의 나라)'에서 그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다시 정주하는 것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것을 공언했다(시오니즘에 앞서는 발언) [2] .

각주 편집 ]

각주 사용법 ]

주석 편집 ]

  1.  융의 '리비도의 변용과 상징'(1912)에 프로이트는 난색을 보였지만, 융은 학문적인 시야의 확대화를 도모하는 의미를 저서에 갖게 했다.
  2.  나치가 국제정신요법학회를 방해하고 나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매니페스트 가 학회지에 게재되었기 때문에 회장의 융은 비난되었다. 윤은 반박했지만 비난의 의견은 현재도 존재한다.
  3. ^ 단, 이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에게 "적의 원조를 받을 수 없다"고 거절당하고 있다.

출처 편집 ]

  1. ↑ Yamanaka 2001 , p. 12.
  2. q 게르하르트 베어 (역) 무라모토 사지 (1994 ) .
  3. ↑ b 윤(역) 다카하시 요시타카(1977) [1916]. 무의식의 심리 . 인문서원
  4. ↑ 야마나카 2001년 , 34쪽.
  5. 베어 1994 , p. 13.
  6. e 『융자전』. 요문헌 특정 상세 정보 ]
  7. d 게르하르트 베어(역) 야스다 이치로 (1996-09-10) .
  8. ↑ Yamanaka 2001 , p.35.
  9. ↑ 베어 1994 , p. 80.
  10. ↑ Yamanaka 2001 , p.38.
  11. ↑ 베어 1994 , p. 107.
  12. ↑ 베어 1994 , p. 131.
  13. ↑ 베어 1994 , p. 138.
  14. 빨강의 책 ―The“Red Book” . 창원사. (2010년 6월)
  15. 자비네 리히베베야 저, 다나카 히카루 번역 '자비나 슈필 라인의 비극' 이와나미 서점, 2009년 요점 페이지 번호 ]
  16. ↑ 베어 1994 , p. 189.
  17. 카와이 1994 , p. 137.
  18. ↑ 카와이 1994 , pp. 137–139.
  19. ↑ 베어 1994 , p. 185.
  20. ↑ 카와이 1994 , pp. 111–112.
  21. ↑ 카와이 1994 , pp. 148–150.
  22. ↑ 베어 1994 , p. 224.
  23. ↑ 카와이 1994 , pp. 180–181.
  24. ↑ CG 융 저 , 가와이 하야오 감역 "서문".
  25. 유아사토오 『재밌을 정도로 잘 아는 현대사상의 모두』 일본문예사〈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교과서〉, 2003년 1월, 29쪽. ISBN  453725131X .
  26. ^ 1906년 4월부터 1913년의 별별까지, 약 360통의 서한이, 「프로이트=윤크 왕복 서간」(상·하, 가네모리 세이야 번역, 코단샤 학술 문고 , 2007년)로 번역되고 있다.
  27. ↑ 엘렌베르거 1980b , 308쪽.
  28.  가와이 하야오 『융의 생애』 제3분명사 레글루스 문고 100, 1978년, pp.52-56.
  29.  히라타 타케야스 「윤크 심리학의 계보 -윤크 나치 유대인-」 「is No.1」폴라 문화 연구소, 1978년.
  30. ↑ Nor 1998 , pp. 201–202, 382–383, 415–417.
  31. ↑ Jung 1972a , p. 127.
  32. ↑ 업힐 1989 , pp. 483, 488–491.
  33.  임도의 『융 사상의 진수』 아사히 신문사, 1998년. 요점 페이지 번호 ]

참고 문헌 편집 ]

관련 항목 편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