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9

초기불교에서 바라 본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

Facebook  문준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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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에서 바라 본 마음[心], 마노[意], 알음알이[識])

각묵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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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 한다. 한국의 불자들은 ‘마음 깨쳐 성불한다.’거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일체유심조).’라는 말에 익숙하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불교를 심학(心學)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의 심리학과도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초기불교에서는 과연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을까. 이러한 관심에서 홍법사의 대중논강 첫 번째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을 것이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할 점은 부처님 가르침은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를 근본으로 한다는 점이다. 무아는 불교를 특징짓는 말로서 초기불교와 아비담마/아비달마와 반야/중관과 유식을 망라한 모든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뜨만이니 자아니 대아니 진아니 하는 무언가 변하지 않고 영원한 실체가 나라는 존재나 세계의 안에 혹은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개념(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당연히 만일 우리가 마음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생각해버린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아를 역설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한국불교 일반에서는 마음이니 자아니 대아니 참나니 진아니 심지어는 대승불교의 여래장이나 불성 등의 가르침조차도 무언가 존재의 배후에 불생불멸로 존재하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실로 많다. 
그래서 오늘 첫 번째 홍법사 대중논강의 주제를 “초기불교에서 본 마음”으로 잡았다고 발제자는 이해한다. 발제자는 이제 몇 가지 측면에서 이 주제를 소화해내고자 한다.

2. 마음의 사전적 의미

먼저 현재 한국에서 통용되는 마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우리말 마음의 의미를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① 사람의 몸에 깃들여서 지식·감정·의지 등의 정신 활동을 하는 것, 
또는 그 바탕이 되는 것. 예: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 
② 거짓 없는 생각. 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다. 
③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대하여 일어나는) 기분. 느낌. 예: 홀가분한 마음. 
④ (어떤 사물이나 행동에 대하여) 속으로 꾀한 뜻. 예: 마음을 고쳐먹다. 
⑤ 심정(心情). 예: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다. 
⑥ 사랑하는 정. 예: 그에게 마음을 두다. 
⑦ 성의. 정성. 예: 마음을 다하다. (준말)맘. 
한편 네이버 백과사전에서는 마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신’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마음’은 ‘정신’에 비해 훨씬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뜻으로 쓰이는 일이 많고, 그 의미 내용도 애매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뜻으로 쓰이는가 하면, 육체나 물질의 상대적인 말로서 철학상의 ‘정신’ 또는 ‘이념’의 뜻으로도 쓰이는 막연한 개념이 되었다.
다음 백과서전에서는 한자 심(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원래 사유기관을 가리킨다.〈맹자〉의 고자(告子) 편에서 “심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心之官則思)라고 하였는데, 심은 보통 인간의 의지·주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객체와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 리고 백과사전들에서는 중국 철학자들의 용례를 몇 가지 소개하고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 혹은 심(心)라는 용어는 참으로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되며 다양한 사람에 의해서 다양한 뜻으로 정의되고 설명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말 마음 혹은 중국어 심만을 가지고는 불교 특히 초기불교에서 설명하는 마음을 알기가 어렵다.
이제 마음에 대한 이 정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불교 그것도 초기불교에서는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를 살펴보자.

3.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마음이라는 단어에 해당하는 불교술어는 심(心)과 의(意)와 식(識)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문으로 옮긴 심․의․식의 범어 원어를 살펴보면, 심(心)은 citta(Sk. citta)이고, 의(意)는 mano(Sk. manas)이며, 식(識)은 viññāṇa(Sk. vijñāṇa)이다. 心으로 옮긴 citta(√cit, to think)는 초기경들에서는 주로 생각하는 그 자체를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나고, 意로 옮긴 mano(√man(to think)는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기관 혹은 기능[根, indriya]이나 감각장소[處, 入, ā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나타난다. 識으로 옮긴 viññāṇa(vi분리하여+√jñā, to know)는 여섯 감각 장소[六內處]와 여섯 대상[六外處]이 관여할 때 일어나는 6가지 알음알이[六識]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경들에서는 이렇게 심․의․식의 용처가 다르다 할 수 있다. 
여러 초기경에서는 ‘안다고 해서(vijānāti) 알음알이라한다’고 알음알이[識]를 정의하고 있으며, 다른 몇 경들에서는 “마노로 법을 안다(manasā dhammaṁ vijānāti - S.v.451)”라고도 설명하는 구절이 나타난다. 이를 종합해보면 ‘마노[意]를 통해서 법(대상)을 아는 것’을 알음알이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석서 문헌에서는 마음(citta)을 “대상을 사량한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 [대상을] 안다는 뜻이다.(cittan ti ārammaṇaṁ cintetīti cittaṁ; vijānātīti attho - DhsA.63)”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동의어로 설명되고 있다.
한편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마음[心]과 마노[意]와 알음알이[識]의 셋을 같은 것이라 한결같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북방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주석서 문헌에서 마음[心]과 알음알이[識]는 완전히 동의어로 쓰인다. 그리고 마노[意]는 대상을 아는 기능[根, indriya] 혹은 장소[處, 入, āyatana]의 의미로 쓰이지만 대상을 안다는 것으로는 이 셋은 동의어로 쓰인다.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어떻게 대상을 아는가? 이를 정밀하게 설명해내는 것이 아비담마이다. 아비담마의 설명을 종합하면 마음은 여러 심리현상들(心所法, cetasikā)의 도움을 받아서 마노를 통해서 대상을 안다. 마음이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심리현상들의 도움이 반드시 있어야하는데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심리현상 7가지와 때때로 일어나는 6가지와 해로운 심리현상 14가지와 유익한 심리현상 25가지의 총 52가지 심소법들을 들고 있다. 특히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곱 가지 심리현상들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7가지 마음부수들은 마음이 일어나는 그 순간에 반드시 같이 일어난다. 
첫째,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감각접촉이 같이 일어난다. 이 감각접촉(phassa, 觸)의 기능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과 맞닥뜨릴 수 없다. 
둘째, 느낌(vedanā, 受)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경험할 수 없다. 
셋째, 인식(saññā, 想)이 없으면 마음은 결코 대상을 인식할 수 없다. 
넷째, 의도(cetanā, 意思)가 없다면 마음은 대상을 알려는 어떤 작위도 행할 수가 없다. 
다섯째, 집중(ekaggatā, 心一境, 定)이 없으면 그 대상에 마음을 고정시키지 못한다. 아무리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떤 정도의 집중이 없으면 대상을 알지 못한다. 
여섯째, 생명기능(jīvitindriya, 命根) 즉 생명이 없으면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일곱째, 마음에 잡도리함(manasikāra, 作意) 즉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마음은 역시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다. 
그래서 ‘아는’ 기능뿐인 마음은 이 일곱 가지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다. 마음이 임금이라면 일곱 가지는 최측근의 대신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일곱은 항상 마음과 같이 일어나고 마음과 같이 멸한다.

4. 마음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 saññā, 이성적이고 지적인 초기불교에서는 나라는 존재를 오온의 화합 혹은 무더기로 이해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 독립 불변하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몸(물질, 色, rūpa)의 무더기(蘊, khandha)와 느낌(受, vedanā,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의 무더기와 인식(想인 측면)의 무더기와 여러 심리현상들(行, saṅkhāra, 오온의 문맥에서는 항상 복수로 나타나며 느낌과 인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뜻함)의 무더기와 알음알이(識, viññāṇa, 수와 상과 행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기능을 하는 것)의 무더기가 함께 뭉쳐진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薀]가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인 것이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불교는 마음(citta/viññāṇa)과 정신(名, nāma)을 정확하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정신은 수온, 상온, 행온, 식온, 즉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심리현상들의 무더기, 알음알이의 무더기인데 정신 가운데서 대상을 아는(요별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우리는 알음알이[識]라하고 마음[心]이라한다. 마음(알음알이)은 느낌[受]과 인식[想]과 심리현상[行]들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了別] 것이다. 이처럼 마음은 우리의 정신적 영역 가운데서 단지 대상을 아는 것을 뜻할 뿐이지 마음이 우리의 정신영역 모두를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초기불교는 밝히고 있다. 
이제 이처럼 심리현상들(마음부수법들)의 도움으로 마노를 통해서 대상을 아는 것으로 정의되는 마음의 중요한 성질을 초기경에 준해서 살펴보자.

5. 마음은 무상하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마음을 비롯한 제법(유위법)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초기경을 통해서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느낌은 … 인식은 … 상카라[行]들은 … 알음알이는 항상한가 무상한가?” 
“무상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아니면 즐거움인가?” 
“괴로움입니다, 세존이여.” 
“무상하고 괴로움이요 변하기 마련인 것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M26, M109)
“자 매들이여, 여기 기름 등불이 타고 있다고 칩시다. 그 기름도 심지도 불꽃도 불빛도 모두 무상하며, 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기름과 심지와 불꽃은 무상해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 불빛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그 기름과 심지와 불꽃이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인 것처럼 그 불빛 또한 무상하여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 와 마찬가지로 자매들이여,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은 영원하지 않지만, 그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들을 반연하여 느끼는 즐거움, 괴로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은 영원하고 영속적이며, 다함이 없고, 결코 변하지 않는 법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옳겠습니까?” 
“옳지 않습니다, 존자시여.” 
“무엇 때문입니까?” 
“존자시여, 제각기 나름대로 조건을 반연하여 그에 상응하는 느낌들이 생겨나고, 조건들이 멸하면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느낌들도 멸하기 때문입니다.”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장하십니다, 자매들이여. 이와 같이 성스러운 제자는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M146)

6. 마음은 찰나생․ 찰나멸이다

이 처럼 마음(알음알이)을 위시한 모든 법들은 무상하다. 그래서『증지부』에서는 특히 마음의 무상성을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citta)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A.i.9)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무상을 통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첩경이다. 무상을 통찰할 때 우리는 고를 절감하고 실체 없음(무아)을 체득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석서들에서는 한결같게 이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하였으며 각각 무상(無相)해탈, 무원(無願)해탈, 공(空)해탈이라 불렀으며『화엄경』 「정행품」등에서도 이 공․무상․무원은 거듭 강조되어 나타난다.
마음을 위시한 제법은 주석서와 아비담마에서는 카나(khaṇa, 찰나, 순간)로 정착이 된다. 찰나의 규명은 주석서 문헌을 통해서 이루어낸 아비담마 불교의 핵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비담마 불교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존재를 법들의 흐름(santati, 相續)으로, 찰나의 연속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위시한 법들은 일어나고 사라짐, 그것도 찰나생․찰나멸의 문제이다. 그것은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다. 대승에서도 많이 인용하는「가전연경」(S12:15)에서도 세상의 일어남을 보기에 없다하지 않고 세상의 소멸을 보기에 있다하지 않는다고 하고 있으며 이런 것을 중(中)의 견해라고 하고 있다. 찰나는 초기불교의 도처에 나타나는 무상의 가르침과 법들의 일어남, 사라짐, 머문 것의 변화함이라는 가르침을 철저하게 계승한 것이다. 
수행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흐름, 변화, 무상성, 찰나를 제거해버린 수행이 다름 아닌 사마타수행 혹은 삼매수행이다. 삼매는 변하는 대상에서 변하지 않는 표상(nimitta, 니밋따, 이것은 법이 아닌 개념에 속함)을 취해서 거기에 집중하는 수행이기 때문이다. 위빳사나 특히『청정도론』18장부터 22장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는 위빳사나는 변화와 무상을 주시하는 수행이다. 변화와 무상을 관찰해 들어가서 찰나를 만나고 이런 찰나생․찰나멸하는 법을 내관하는 수행법이다. 제법의 찰나생․찰나멸을 직시하여 매순간 무너지고 있는 법의 무상이나 법의 고나 법의 무실체성을 직시하여 무너짐(해체)의 지혜(bhaṅga-ñāṇa)로써 ‘나’니 ‘내 것’이니 하는 존재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제행에 대해서 평온(우뻬카, 捨)을 유지하는 지혜를 개발해서 도와 과를 증득하는 체계를 위빳사나수행이라 하고 있다. 이처럼 찰나는 법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므로 법을 통찰하는 위빳사나와도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리고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uppāda-ṭṭhiti-bhaṅga) 세 아찰나(亞刹那,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특수한 상황을 설정하게 된다. 찰나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인 흐름 그자체일 뿐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역자가 사용한 아찰나(sub-moment)라는 술어는 서양학자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 주석서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아비담마에서는 아찰나란 단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일 아찰나라는 단위를 인정한다면 다시 아찰나를 구성하는 아아찰나(亞亞刹那)를 인정해야 하고 다시 더 짧은 단위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무한소급의 오류에 빠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은 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위빳사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면서 존속하는 최소단위가 찰나이고 이것은 위빳사나의 대상이다. 그래서 법은 찰나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7. 마음은 흐름이다

마 음이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이렇게 명명백백한데 어떻게 없다 할 수 있는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금강경: 心流注)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남북방 불교에서 공히 강조하고 있다. 초기경의 비유를 살펴보자.
“찟따여, 예를 들면 소로부터 우유가 있고 우유로부터 응유(curd)가 되고 응유로부터 생 버터가 되고 생 버터로부터 정제된 버터(ghee)가 되고 정제된 버터로부터 최상의 버터[제호]가 되는 것과 같다. 우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응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때에는 오직 우유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 응유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생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정제된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 최상의 버터가 되어 있을 때에는 우유라는 이름을 결코 얻지 못한다. 응유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생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정제된 버터라는 이름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때에는 오직 최상의 버터라는 이름만 얻을 뿐이다.”(D9)
이러 한 마음의 상속은 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이 후찰나의 마음이 멸하는 즉시에 후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고 … 이렇게 쉼 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것을 말한다. 마음은 마음을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으로 대표되는 탐욕․성냄․어리석음(탐진치)이 다할 때 까지 흐르는[相續] 것이다.
대부분의 불교학자들이 무아라면 윤회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바로 이 흐름이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흐름으로 파악한다. 탐·진·치로 대표되는 수많은 심리현상들이 용틀임하며 흘러가는 것이 윤회요, 바로 중생의 삶의 현주소이다. 이런 흐름을 과거·현재·미래나 전생·금생·내생이라는 틀로 부르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매 찰나의 흐름일 뿐 과거·현재·미래라는 실상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금강경』에서는 과거심도 불가득이요, 현재심도 미래심도 불가득이라고 결론짓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금강경』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는데『금강경』에서는 마음을 마음의 흐름(citta-dhāra, 心流注, 18장 현장 역, 구마라즙은 心으로 옮기고 있음)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의 전변을 흐름(srota)으로 인찰나의 소멸과 과찰나의 일어남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무튼 초기 - 아비담마/아비달마 - 반야/중관 - 유식에서 공히 마음은 흐름으로 이해되고 있지 결코 고정불변한 마음을 상정하지 않는다.

8. 마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다 - 대상이 없는 마음은 일어나지 못한다.

거 듭 말하지만 마음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상(ārammaṇa)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대상이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의 여러 곳에서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緣]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난다. … 마노[意]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난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M18 등) 
그리고 이것은 아비담마의 가장 중요한 전제 중의 하나이다.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마음(식)은 크게 여섯 가지로 일어난다. 형상(혹은 색깔)이 대상이 될 때는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소리가 대상이 될 때는 귀의 알음알이가, 같이 하여 코의 알음알이, 혀의 알음알이, 몸의 알음알이,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난다. 
한편 아비담마에 의하면 의식(마노의 알음알이)의 대상은 ① 감성의 물질(pasāda-rūpa) ② 미세한 물질(sukhuma-rūpa) ③ 이전의 마음(citta) ④ 마음부수들 ⑤ 열반 ⑥ 개념(paññatti)의 여섯 종류라고 한다. 이 여섯을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이 여섯은『아비담마 길라잡이』319-321쪽을 참조할 것) 
그리고 우리는 이 여섯 가지 혹은 12가지 가운데서 어떤 것을 대상으로 하여 내 마음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매순간 살펴서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은 피하고 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을 향해서 마음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혹 해로움을 일으키는 대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을 통해 해로운 업을 일으키지 않고 이로운 업을 일으키도록 지혜롭게 마음에 잡도리함(yoniso manasikāra, 如理作意)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 초기불교와 아비담마가 우리에게 간곡히 전하는 메시지 가운데 하나이다.

9. 마음은 연이생(緣起, 조건발생)이다.

연기(혹은 緣而生)는 세 번째 논강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초기경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도반들이여,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緣] 눈의 알음알이[眼識]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하여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sañjānāti, 想) 인식하는 것을 생각하고(vitakketi, 尋)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papañceti, 戱論)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산냐라는 헤아림이 함께 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들에서 그러합니다. 
도반들이여,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코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혀와 맛을 조건으로 혀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몸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 
마 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가 일어납니다. 이 셋의 화합이 감각접촉[觸]입니 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느낌[受]이 있습니다. 느끼는 것을 인식하고 인식하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퍼져나가게 하고 퍼져나가게 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에게 퍼져나가는 산냐라는 헤아림이 함께 일어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마노로 알아지는 법들에서 그러합니다.”(M18)
“도 반 사띠여, 그렇게 말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지 마시오. 세존을 비방하는 것은 좋은 일 이 못됩니다. 세존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도반 사띠여,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지워져서 일어남[緣起]난다고 설하셨습니다.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는 그 비구들과 더불어 반문하고 대꾸하고 대화하였지만 그 삿된 견해를 완강하게 국집하고 고집하여 주장하였다. 
“도반들이여, 저는 세존께서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알음알이가 건너가고 윤회한다.'라고 설법하셨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비구들이 사띠를 데리고 세존께 가서 지초지종을 다 말씀드리자 세존께서 사띠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띠여, 그러면 어떤 것이 알음알이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좋고 삿된 업들의 과보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도대체 내가 누구에게 그런 법을 설했다고 그대는 이해하고 있는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참으로 나는 많은 방편으로 알음알이는 조건 지워져서 일어난다고 설하였고 조건이 없어지면 알음알이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나 그대는 자신이 스스로 잘못 파악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자신을 망치고 많은 부덕을 생기게 하는구나. 이 쓸모없는 인간이여, 그러니 그대는 긴 세월을 이익됨이 없고 괴롭게 될 것이다.” <중략>
“비구들이여, 마치 무엇이든 그것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기나니 장작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지저깨비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지저깨비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짚을 반연하여 불이 타면 짚불이라는 용어가 생기고 소똥을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소똥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왕겨를 반연으로 하여 불이 타면 왕겨불이라는 용어가 생기며 쓰레기를 반연하여 불이 타면 쓰레기불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무엇이던 그 조건을 반연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바로 그것에 의해서 용어가 생긴다. 눈과 형상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눈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귀와 소리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코와 냄새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코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혀와 맛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혀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몸과 감촉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마노[意]와 법들을 조건으로 하여 알음알이가 일어나면 마노의 알음알이라는 용어가 생긴다.” <중략>
“장하구나, 비구들이여. 비구들이여, 그대들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하고 나도 역시 이와 같이 설한다. '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즉,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 행위[行]들이, 의도적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알음알이를 조건으로 정신-물질[名色]이, 정신-물질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六入]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감각접촉[觸]이,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愛]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取]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 남[生]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그는 눈으로 형상을 보고서 사랑스러운 형상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형상에는 혐오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
귀로 소리를 듣고서, … 코로 냄새를 맡고서, … 혀로 맛을 보고서, … 몸으로 감촉[觸]을 닫고서 … 마노로서 법을 분별하여 알고서 사랑스러운 법에는 홀리게 되고 사랑스럽지 않은 법에는 혐오한다. 그는 몸에 대해서 마음 챙김을 확립하지 못하고 머문다. 마음은 제한되어 있고 그에게서 삿되고 해로운 법들이 남김없이 소멸되어버리는 심해탈과 혜해탈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는 이와 같이 무슨 느낌이든 그것이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치우쳐서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다. 그가 그런 느낌을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 있으므로 기쁨이 일어난다. 느낌들에 대한 기쁨이 바로 취착이다. 그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있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근심·탄식·괴로움·슬픔·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이것이 전체 괴로움의 덩어리가 일어남이다.”(M38)
“왓차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그대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불이 붙고 있다면 저는 ‘내 앞에서 이 불이 붙고 있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 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붙고 있는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붙고 있는가?’라고 한다면 저는 이렇게 설명할 것입니다. ‘내 앞에서 붙고 있는 불은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붙고 있습니다.’라고.” 
“왓차여, 만일 그대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그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겠는가?” 
“고따마 존자시여, 만일, 제 앞에 있는 불이 꺼진다면 저는 ‘내 앞에 있던 불이 꺼졌다.’라고 알 것입니다.” 
“왓차여, 그런데 만일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앞에서 꺼진 그 불은 꺼진 후에 어떤 방향으로 갔는가, 동쪽인가, 서쪽인가, 북쪽인가, 남쪽인가?’라고 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고 따마 존자시여, 그것은 적용될 수가 없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참으로 마른 풀과 나뭇가지라는 연료를 조건으로 하여 타올랐던 불은 그것을 다 써버리고 다른 연료를 공급받지 못하면 연료가 없어서 꺼졌다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M72)

10.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이 상의 여러 인용문들에서 봤듯이 고정불변한 마음이란 불교에는 없다. 마음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연이생(緣而生, 조건발생, 연기)일 뿐이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다. 고정불변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의 아뜨만(자아) 이론이 되어버린다. 불교는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들의 무상과 고와 무아를 설하는 가르침이며 그래서 무상․고․무아 혹은 무상․무아․열반은 삼법인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발제자가 마음은 무상이라고 하고 찰나생․찰나멸이라 하고, 연이생이라 하고, 실체가 없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마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냐. 그렇다면 불교는 허무주의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마음이 무상이요 찰나생멸하고 흐름이며 연이생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고정불변한 마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 은 흘러간다.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 탐진치가 있는 한, 우리가 의도적 행위(업)를 계속해서 짓는 한 마음은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하여 쉼 없이 연속적으로 지속적으로 거듭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중생의 삶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이다. 갈애가 다 할 때 마침내 이러한 흐름은 끝이 나게 되며, 이것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반열반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무상이나 찰나생멸이나 실체 없음을 강조하여 설한다고 해서 결코 허무주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매찰나 지금여기에 충실하게 된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 만나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11.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보는 것이 해탈이다

그 러면 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위시한 제법의 무상․고․무아와 연이생을 강조하셨는가? 이것을 봐야 해탈․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탈․열반은 무상이나 고나 무아의 통찰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해탈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무상과 고와 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이라고 주석서들은 강조하는 것이다. 
초기경들에서는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오온에 대해서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는 것을 설하는 경들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고, 존재(5온․12처․18계)에 대한 염오-이욕-소멸-고요-최상의 지혜-깨달음-열반을 강조하시기도 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마음을 위시한 일체법의 무상, 고, 무아, 연이생 등을 강조하신 것은 이러한 제법의 보편적인 특징에 사무칠 때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불변하는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과 계합하고 그것과 하나 되려는 발상을 가지면 그것은 관념놀음에 지나지 않게 되어 결코 해탈․열반을 체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금강경』은 자아[我]니 영혼[壽者]이니 인간(진인, 人)이니 하는 것을 단지 산냐(saññā, 相, 想)일 뿐이라고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론송 삼제계로 잘 알려진 인연소생법 아설즉시공 역위시가명 역명중도의에서도 인연소생법 즉 제법의 연이생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것을 체득해야 공과 중도를 철견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유식에서도 식을 의티기로 이해하며 식전변을 연이생과 찰나생․찰나멸로 이해하고 있다.
이제 몇 가지 초기경을 인용한다.
“비 구들이여, 눈과 형상들을 반연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이 셋의 만남이 감각접촉이다.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즐거운 느낌에 닿아서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묶여 있지 않다. 그에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그는 괴로운 느낌에 닿아서 근심하지 않고 상심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하지 않는다. 그에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해있지 않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닿아서 그런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안다. 그에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해 있지 않다. 비구들이여, 그가 참으로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탐하는 잠재성향을 버리고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적대하는 잠재성향을 없애버리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 무지한 잠재성향을 뿌리 뽑고서 무명을 버리고 영지를 일으키고 지금 여기서 괴로움의 끝을 만들 것이다라는 그런 경우는 있다.”(M148)
“비구들이여, 눈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형상들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알음알이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며,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도 있는 그대로 알고 볼 때에 눈에 집착하지 않고 형상들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에 집착하지 않고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가 집착하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미혹하지 않고 달콤함을 찾지 않으며 머물 때에 미래에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이 쌓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갈애가 버려진다. 그의 육체적인 곤란이 버려지고 정신적인 곤란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성가심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성가심도 버려진다. 육체적인 열병도 버려지고 정신적인 열병도 버려진다. 그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누린다.”(M149)
“비 구들이여, 그러므로 어떠한 물질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물질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서 보아야한다. 어떤 느낌이든 … 어떤 인식이든 … 어떤 심리현상[行]들이든 … 어떤 알음알이이든, 그것이 과거의 것이든, 미래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거칠든 섬세하든, 저열하든 수승하든,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그 모든 알음알이에 대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있는 그대로 바르게 통찰지로서 보아야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물질에 염오하고 느낌에 염오하고 인식에 염오하고 심리현상들에 염오하고 알음알이에 염오한다.”
“염 오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 바랜다. 탐욕이 빛바래므로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라는 지혜가 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한 삶[梵行]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꿰뚫어 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60명의 비구들의 마음은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해탈했다.(M109)
“보 라, 아난다여. 그 모든 형성된 것[行]들은 지나갔고 소멸하였고 변해버렸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무상하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은 견고하지 않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형성된 것들은 안식을 주지 못한다. 아난다여, 그러므로 모든 형성된 것[諸行]들은 염오하여야 마땅하며 빛바래도록 해야 마땅하며 해탈하여야 마땅하다.”(D17)
한편 초기경들을 이해하는데 가장 바른 지침서로 알려진『청정도론』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일 어나고 사라짐을 파악하여 흐름[相續]이 해체될 때 무상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계속되는 압박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행동거지가 드러날 때 괴로움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여러 요소로 분해하여 견고함이 해체될 때 무아의 특상이 자기의 성품에 따라 나타난다.
이 가운데서 ① 무상이란 무더기 다섯 가지[五蘊]가 무상한 것이다. 왜 그런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하는 것이 무상의 특상이다. 혹은 있다가 없어짐이라 불리는 형태의 변화(ākāra-vikāra)가 [무상의 특상이다]. 
②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 가지가 괴로움이다. 왜 그런가? 끊임없이 압박받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압박받는 형태가 괴로움의 특상이다. 
③ “괴로운 것은 무아다.(S.iii.22 등)”라는 말씀 때문에 그 무더기 다섯은 무아다. 왜 그런가?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형태가 무아의 특상이다.”(청정도론.21.3-5)

12. 무상․고․무아는 해탈의 관문(vimokkha-mukha)이다

먼저『청정도론』22장을 인용한다.
“이 지혜가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가운데 하나의 관찰로 일어날 때 [믿음, 삼매, 통찰지]의 세 가지 기능(根)들 가운데 하나의 지배력으로써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무 상이라고 [형성된 것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行]들은 부서짐으로 나타난다.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공포로 나타난다.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형성된 것들은 공으로 나타난다.(Ps.ii.48)” 
그들은 표상 없음, 원함 없음, 공함이라는 세 가지 해탈의 관문이 된다.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① 확신(信解,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無常)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표상 없는(無相) 해탈을 얻는다. ② 편안함(輕安, passaddhi)이 큰 자는 괴로움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원함 없는(無願) 해탈을 얻는다. ③영지(靈知, veda)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공한 해탈을 얻는다.(Ps.ii.58)” 
이처럼『청정도론』을 위시한 모든 주석서들에서는 무상․고․무아를 해탈의 세 가지 관문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상은 무상(無相)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고 고는 무원(無願)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며 무아는 공(空)해탈을 실현하는 관문이다. 이 이외에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법의 세 가지 특상인 무상․고․무아를 통찰하는 것을 반야라고 하며 위빳사나라고 정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슨 정해진 열반이나 자아나 아뜨만이나 브라흐만이나 진리를 상정하고 그것을 체득하는 것으로 혹은 그것과 하나되는 것으로 깨달음을 설정한다면 그것은 단지 관념이나 상놀음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부처님께서 간곡히 설하신 해탈과 열반은 아닌 것이다.

13. 맺는 말

이 상으로 간략하게 초기경에서 언급되는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그래서 괴로운 것[苦]이요 실체가 없는 것[無我]이다. 이러한 사실을 아비담마에서는 찰나생․찰나멸로 규정하고 있으며 심찰나라는 말을 즐겨 쓴다. 이런 전통은 유식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편 이러한 무상한 마음의 생멸은 연이생(緣而生, 緣起, 조건발생)이다. 모두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조건이 소멸할 때 소멸한다. 마음은 대상이 있을 때 일어나며(所緣緣) 앞 심찰나에 조건지워져서(等無間緣) 일어난다. 한편 마음은 과거의 심찰나에서 지은 업의 결과로도 일어나는데 이를 업연(業緣)이라 부르며 이때 일어난 마음을 이숙식(異熟識, 과보의 마음)이라고 아비담마와 유식에서는 부르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불변하는 실체를 세우면 그 순간 그것은 관념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아무리 그 실체 혹은 본체와 하나 되는 것으로나 그것을 직관하는 것을 설해도 그것은 이미 관념적인 것(산냐, 相, 想)에 지나지 않는다. 깨달음을 실현하고 해탈․열반을 체득하는 길은 오직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이 무상이요 고요 무아요 연이생일 뿐임을 이해하고 이러한 것을 지금여기 내 안에서 분명하게 볼 때 실현되는 것임을 초기경들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초기불교에 서 본 마음은 무상이요 고요 무아이다. 무상은 찰나생․찰나멸로 정리가 되고, 무아는 연이생(연기)의 다른 이름이며, 고는 사성제의 고성제로 정리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일 뿐이며 불변하는 실체란 없다. 만일 고정불변이요 영원한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가장 큰 집착이요 삿된 견해이다. 집착과 삿된 견해가 남아있는 한 깨달음도 해탈도 열반도 결코 실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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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묵스님   강의  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