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

9] 【지구인류학】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 포스트휴먼의 재주술화와 생명의 기호학 -차은정*

 9] 【지구인류학】지구위험 시대의 인류학적 사고 - 포스트휴먼의 재주술화와 생명의 기호학 -차은정*

29)

요약문   이 발표문에서는 21세기 이후 인류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사상적 흐름인 ‘존재론

적 전회(Ontological Turn)’의 연구사적 계보를 개략하고, 존재론적 전회의 주요 논제 중 하나인 애니미즘의 탈근대적 회복을 재주술화(reenchantment)의 관점에서 논한다. 이 관점은 생명을 유기체의 물질적 활동으로 환원하고 정신을 그것과 대립하는 인간사고로 규정해온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인간과 비인간 모두의 생명 활동을 기호작용의 측면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호작용은 정신과 물질을 횡단하며 ‘살아있음’의 경계를 생물학적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차 례

Ⅰ.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보 

Ⅱ.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

Ⅲ. 재주술화와 기호의 실재성

Ⅳ. 제언 및 과제

Ⅰ.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보 

21세기 들어 인류는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더욱 노골적으로 목도하고 있다. ‘국익’을 명분으로 한 국지전쟁의 영속화,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와 대량실업 사태, 북극의 이상기온 현상과 북극곰의 멸종위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환경파괴와 지구의 자정 능력 상실, 이민자, 난민, 성소수자, 여성 등의 약자들에 대한 혐오의 일상화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인간은 물론 지구상의 모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든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은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이제는 지엽적인 자구책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음을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으며, 근 대의 사고방식 자체에까지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인류학에서 서구중심의 근대사상에 대한 비판은 레비스트로스 이래로 핵심적인 논제로 자리 잡

아 왔다. 일찍이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분야를 개척한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는 근대유럽의 지식 및 제도가 과학기술의 보편성을 선취함으로써 “서양인들에게만 독점적 으로 자연에의 접근법을 부여하고” 자기 이외의 “타자들은 오로지 과학적 사고를 하거나 근대적 혹은 서구적이 되어야만” ) 대상화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생태 인 류학의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는 서구가 정신과 물질, 마음과 신 체, 문화와 자연, 주체와 객체 등으로 사고의 영역을 이원화하고 자연을 객체화함으로써 인식론적 인 특권을 누려왔음을 논증한다. 그는 “서양 문화에 보증된 인식론적인 특권, 즉 자신이 규정한 자연으로부터 다른 모든 문화를 측정하는 암묵적인 기준이 제시되는 유일한 문화라는 특권”이 다 양한 곳에서 “환경의 특징과 그 환경에 대한 실천적인 관여의 특정 형식” )을 단지 인식의 문제 로 제한해왔다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근대 지식이 서구중심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서구 자신이 자연이라는 관념을 만들었으면서도 ‘절대적인 소여’로 간주하고 자연에 대한 접근방법론 으로서 과학에 우위를 두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을 주체와 객체로 분절하고 그사이의 관계와 실 천을 주체에 의한 인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 곧 서구에 지식의 패권적 지위를 보 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지구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의 과제가 인식 의 문제에서 관계와 실천의 문제로 되돌아가야 하며, 바로 인류학에서는 ‘존재론적 전회’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전환을 기획하고 있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 전회란 서구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을 지양하고 미래 인류의 대안적인 철학을 모색하는 학문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 운동이 인류학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유는 무엇보다 인류학이 지난 20세기 서구중

심의 사고방식에 끊임없이 저항해왔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구 출신의 학자가 비서구를 서구의 시선으로 그려낸다’라는 자신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인류학은 그 어느 학문분과보다도 서 구중심주의에 민감하게 반응해왔다. 1980년대를 전후하여 인류학계에 유입되어 크게 유행한 포스 트모더니즘─대표적으로 조지 마커스의 ‘문화비평으로서의 인류학’을 들 수 있다.─과 포스트콜 로니얼리즘─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피식민자의 양가성으로 발전시킨 분과학문도 인류학이었다.─에 대해서도 서 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에두아르도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Eduardo Viveiros de Castro)는 2014년 메릴린 스트 래선(Marilyn Strathern) 연례강연에 헌정한 논문(「누가 존재론적 늑대를 두려워하는가?(Who is Afra id of the Ontological Wolf?)」)에서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계기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정리한

다. 첫 번째가 표상의 위기이다. 카스트루는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민족지학에서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한편으로는 사람과 사물(혹은 인간과 비인 간)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언어와 실재(혹은 개념과 대상) 사이에 전제된 인식론적 틀이 허물어 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당시 인류학계가 처한 이론적 곤경에서 빠져나와 사고의 

도약을 이뤄낸 것이 스트래선의 증여의 젠더 The Gender of the Gift(1988)라고 말한다. 카스트 루에 따르면, 스트래선은 이 책에서 사회과학의 개념용어들(생산, 젠더, 권력, 부 등)을 사용하지 않 고서도 멜라네시아의 증여론을 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즉 멜라네시아에서 교환은 ‘객체적 인’ 경제적 상호작용이 아닌 ‘주체적인’ 퍼스펙티브의 전환이며, 외부자인 인류학자의 민족지 적 연구란 그러한 퍼스펙티브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다. 이 ‘퍼스펙티브의 상호전환’이라는 주 제는 그로부터 3년 후에 출간된 부분적인 연결 Partial Connection(1991)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 며 존재론적 전회의 이론적 발판을 마련한다.

다음으로 두 번째 계기는 과학기술학의 발흥이다. 브뤼노 라투르의 ‘실험실 민족지’는 1977년 부터 2년간 ‘실험실’이라는 근대과학의 현장을 ‘오지’로 간주하고 그 안에서 이뤄지는 연구자 들의 행위를 ‘원주민’의 낯선 문화를 대하듯이 관찰했다. ) 그 결과 그는 과학의 탈정치적 중립 성이 근대의 정치적 기획임을 밝혀내었다. 다시 말해 근대가 조장한 과학과 비과학의 대립은 과학 이라는 근대성에 포섭되지 않는 비서구의 타자들을 근대 바깥으로 밀어내는 ‘모델’에 다름 아니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연)과 정치(사회) 간의 구획은 또 다른 더 큰 구획, 즉 ‘우리’와 ‘그들’, 서구와 비서구, 인간과 비인간 간의 구획으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라투르는 과학과 비과 학의 구획을 폐기하기보다 그러한 구획에 의한 무수한 실천들을 다중화하고 대칭화한다. 이로써 비서구의 타자들은 자연을 잘못 표상하는 비과학적인 문화의 운반자가 아닐뿐더러 그 대안이기를 주장할 필요도 없다. 마지막 계기는 21세기 인류가 당면한 지구적 위기상황이 만든 ‘시대정신(Zeitgeist)’과 공명한 다. 그것은 생태적 위기와 그와 변증법적으로 얽혀있는 경제적 위기를 넘어서려는 실천에 호응한

다. 인간중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세계를 종말로 이끄는지 모른다는 우려가 학문적인 가 능성으로 검토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인간에 의한 환경파괴가 지구 행성에 돌이킬 수 없는 기후 지질학적 변형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지구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지질시대에 접어들 날 도 머지않았다는 의미에서 현세를 충적세 등과 같은 개념 수준의 ‘인류세(anthropocene)’로 칭해 야 한다는 논의가 지리학계를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또 프랑스의 사변적 실재론자인 퀑탱 메이야 수(Quentin Meillassoux)는 ‘선조이전성(l’ancestralit)’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반칸트주의의 가능성 을 탐색했다. ) 

이 의미에서 존재론적 전회는 일종의 ‘인류 재난의 경보장치’이다. 카스트루가 아메리카 원주 민의 존재론을 이론화한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와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는 생 태적 파국에 대응하는 사고장치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는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The Inconstan

cy of the Indian Soul(1992년)에서 16세기에 이미 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론이 유럽의 사고방식에 내재한 세계종말의 위험성을 간파했음을 당시 유럽 선교사와 아마존 원주민의 만남의 순간을 통해 밝혀내었다. 요컨대 존재론적 전회는 “현상을 사물 그 자체와 분리하는 중대한 노모스의 소진, 자 연과학들과 문화과학들 간의 노동의 위계적인 구분의 파열, 나아가 (이론적인) 순수이성과 (도덕적

인) 실천이성 간의 균열.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의 (단 하나의) 근대적인 존재론―17세기의 과학 혁명이 만든 존재론―이 20세기 초의 과학 혁명에 의해 쓸모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 비 참한 결과로 끝날 것임” )을 자각하게 하는 인류학적 기획이다. 

이 기획은 마틴 홀브라드(Martin Holbraad)를 위시한 영국 사회인류학의 케임브리지 소장학파에 

의해 명시화된다. 홀브라드와 그의 동료들은 카스트루와의 협업의 성과물로서 2006년 사물을 통 해 생각하기 Thinking Through Things를 출간하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존재론적 전회를 21세기 인 류학의 핵심적인 아젠다로 선언한다. 인류학계에서 ‘존재론(ontology)’이라는 용어는 어빙 할로웰

(Irving Hallowell)의 1960년 논문 「오지브와 존재론, 행위, 그리고 세계관(Ojibwa Ontology, Behavior, and World View)」에서 중요하게 언급했고, 그 외 과학기술학 관련 논문에서 종종 사용되어왔다. 그 러나 홀브라드 등이 말했듯이, 1980대와 90년대에 존재론을 둘러싼 연구작업들이 당시 포스트모던 의 영향력이 지대했던 영미 인류학계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8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사회인류학 분과에서 진행한 카스트루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코스몰로지(Amerindian Cosmo logy)>라는 특별연속강연에 참여한 학생들이 후에 괄목할만한 연구자로 성장하여 연구그룹을 형성 하면서 존재론적 전회의 진지를 구축하고 비로소 인류학의 지분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그룹은 지

금까지도 ‘조용한 혁명(A quiet revolution)’의 중심에서 그 흐름을 이끌고 있다. ) 

이제 서구와 비서구를 분절하고 비서구를 통해 서구 자신을 기술해온 20세기 인류학은 21세기에 

이르러 완전히 새로운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21세기 인류학에서는 ‘서구와 비서구’라는 관계항 이 더 이상 이론적으로 효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서구중심의 근대적인 사고방 식이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시대적인 징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모든 지역을 두루 섭 렵한 인류학의 학문적 역량이 ‘탈-비서구’라는 새로운 지식의 장에 들어섰음을 시사한다. 카스 트루에 따르면, 이러한 ‘탈-비서구’는 ‘안티나르시시즘’과 ‘사고의 탈식민화’를 경유한다. ) (비서구의) ‘타자’는 (서구의) ‘자아’의 표상―인식론적인 대상―이 아니다. ‘타자’는 생성되 는 것이며, 그렇게 생성되는 존재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동물들, 죽은 자들, 영들, 사물들까지도 저마다의 보편적인 세계―자연―속에서 누군가의 ‘타자’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그 러므로 ‘타자의 학문’이란 단 하나의 갇힌 세계에 그러한 존재들을 표상으로 얽어매는 것이 아 니라 무한히 열려 있는 세계들―자연들―에 제각기 살아가는 존재들의 퍼스펙티브를 횡단하는 길 을 모색하는 것이다. 

 

Ⅱ.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류학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타자의 지위에서 본격적으로 탐색한 민족지적 연구로는 에두아르도 콘(Ed

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를 들 수 있다. 콘은 2013년 이 책을 출간하기 전까지 인류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2002년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 책이 나오기까 지 10여 년간 단 네 편의 논문만을 제출했는데, 그중 2007년 논문 「개는 어떻게 꿈꾸는가(How Dog s Dream?: Amazonian Natures and the Politics of Transspecies Engagement)」외에는 주목받지 못했 다. 그런데 그의 첫 단독저서인 숲은 생각한다로 그는 존재론적 전회의 또 다른 축으로 급부상 하게 된다. 

실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남다른 이력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아마존 숲에서 1,100개 이상의 

식물표본과 그 외에 400개 이상의 무척추동물표본, 90개 이상의 파충류 표본, 60여 개의 포유류 표 본을 수집해서 에콰도르의 국립식물원과 동물학박물관에 기증할 정도로 다종다양한 생물종의 생태 에 누구보다도 박식한 전문가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마존에 대한 그의 민족지적 관심은 인간에만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의 생태학적 전문지식과 연구 활동이 존재론적 전회의 또 다른 축을 형성할 만큼의 

힘을 발휘하게 한 이론적 토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아마존의 생태계를 살아있는 기호들 의 장으로 구축하게 한 찰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의 기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찰스 퍼스는 반데카르트주의자로서 데카르트에 기초한 근대철학의 사상적 전제와 문 제설정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사고란 ‘내적인 관념의 지각’이 아니라 ‘기호 혹은 언어를 연쇄 적으로 창출하는 끝없는 추론 과정에의 참여’로 규정함으로써 실천―‘프라그마(pragma)’―에 의한 진리추구의 방법론으로서 프래그머티즘(pragmatism)을 수립했다. 퍼스는 인간의 사고란 무한 히 이어지는 기호의 연쇄 과정이며 이 과정은 감각에 매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코기토로서의 ‘나’에 이르는 보편적 회의주의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불과하다고 말한 다. ) 콘은 이러한 퍼스의 비이원론적 기호학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의 ‘사고’에까지 확대 적 용한다. 퍼스의 기호학이 ‘해석체(interpretant)’를 인간에 한정한 것은 아니지만 숲은 생각한다 에서만큼 비인간의 풍부한 사례들로 논증하지는 않았다.

콘은 에콰도르 동부에 위치한 아마존의 아빌라 숲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부류의 생명체들의 기호

과정을 ‘자기들의 생태계(ecology of selves)’로 엮어놓는다. 여기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생명체까지 끊임없이 기호를 주고받는 ‘자기들(selves)’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혹은 정말 로 그렇다는 것을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콘은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 선 기호를 인간적인 것 너머로 확장한다. 퍼스가 기호를 아이콘(icon), 인덱스(index), 상징(symbol) 의 세 부류로 나누고 규약 혹은 관습에 의한 인간의 언어를 상징으로 정의했듯이 언어는 기호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언어만이 기호가 아니고, 기호는 모든 생명체와 함께한다. 가령 닮 음의 기호인 아이콘은 비인간 생명체의 기호이기도 하다. 아마존의 대벌레가 주변 식물과 구별되 지 않을 정도로 보호색을 띠는 것은 아이콘의 일종이다. 또 진드기에게 사슴이든 인간이든 낙산(bu tyric acid)을 풍기는 것이라면 다 같은 항온동물로 표상되는 것은 아이콘의 기호작용에 의해서다. 지시기호인 인덱스의 경우, 아마존의 흰털원숭이가 자신이 올라앉은 나무의 흔들림을 그다음에 일 어날 어떤 위험의 신호로 해석한다면 나무의 흔들림은 원숭이에게 위험을 가리키는 인덱스가 된 다. 이렇듯 대벌레, 진드기, 흰털원숭이 또한 기호의 해석체가 될 수 있다.

주의할 점은 이 모든 부류의 기호가 ‘부재(absence)’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아이콘은 직관적으

로는 닮음의 기호이지만, 그것의 기호작용은 닮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닮지 않음의 부재에 의한 것이다. 진드기에게 사슴이 인간의 아이콘인 것은 사슴과 인간의 차이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인덱 스가 현재 부재하는 미래의 사태 혹은 사건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인덱스의 기호작용 또한 부재를 포함한다. 흰털원숭이에게 나무의 흔들림은 그 후에 일어날 포식자의 공격이 현재 부재하기에 위 험의 인덱스일 수 있다. 자의적인 상징 표상인 언어 또한 부재로부터 그 의미가 만들어진다. 수많 은 음운의 부재 덕분에 발화되는 음운들에 의해, 대상의 물리적인 부재에 의해, 현재 부재한 미래 까지도 표상한다는 것에 의해 비로소 언어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부재는 생명 활동에 필 수적이다. 가령 대벌레가 아마존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주변 식물과 덜 구별되어 잡아먹힌 자 신의 조상들 덕분이다. 즉 주변 식물과 구별되지 않는 대벌레의 보호색이라는 기호가 조상들의 부 재를 표상하기에 대벌레는 살아남았고, 흰털원숭이는 나무의 흔들림을 위험의 인덱스로 해석할 수 있었기에 살아남았다.

이에 따라 ‘자기들’의 생명 활동은 생리작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든 비인간이 든 단수의 개체이든 복수의 집합체이든 “무언가를 어떤 측면이나 능력에서 대신해 누군가에게 무 언가를 나타내는”(CP 2.228) 기호의 네트워크에 참여한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아마존의 가 위개미들은 일 년에 한 번 교미를 위해 각자 개미집을 떠나 일제히 이합집산한다. 이때 개미를 잡 아먹으려는 박쥐와 새는 개미가 날아오르기를 기다리고, 개미는 박쥐와 새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밤과 낮의 틈새에서 날아오를 적당한 타이밍을 노린다. 아마존의 원주민 또한 개미를 잡아먹 기 위해 날아오르는 개미들을 향해 ‘엄마의 부름’으로 들리도록 휘파람을 불어 개미들이 자기 쪽으로 모여들게 한다. 개미, 박쥐, 새, 인간 모두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서로의 기호를 알아듣고자 애쓰고 또 서로에게 기호를 전달하고자 애쓴다. 이처럼 자기들의 생태계란 농밀하게 직조되는 기 호의 네트워크 그 자체이며, 이 속에서 생명은 기호적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자기가 또 다른 자기 의 기호를 알아듣지 못하면 곧 죽음에 이른다. 자기는 또 다른 자기의 기호를 알아듣기 위해 또 다른 자기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 아마존에서 인간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되지 않기 위해 재규어 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봐야 하는 것처럼, 기호적인 생명 활동은 때로 종의 경계를 넘어 기호의 수신자와 발신자를 반전시킨다. 이것이 아마존 숲에서 인간-재규어와 같은 변신(transmutation)이 넘쳐나는 이유이다.

이러한 자기들의 생태학에서 ‘다자연주의(multinaturalism)’는 기호적으로 전향한다. 다자연주의 를 맨 먼저 제기한 카스트루는 모든 존재가 각각의 보편적인 자연─“육체에 각인된 기질의 산 물”─속에서 ‘나’의 퍼스펙티브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다. 그것들은 “자기 음식을 인 간의 음식처럼 지각하고(재규어는 피를 마니옥 술로 보고, 검은 독수리는 부패한 고기에 들끓는 구 더기를 구운 물고기로 본다), 신체적인 특성들(가죽, 날개, 발톱, 주둥이 등)을 장신구나 문화적인 도구로 본다. 그것들의 사회시스템은 인간적인 제도에 따르는 방식(추장, 샤먼, 반족, 의례 등)으로 조직된다.” ) 여기서 ‘나’의 퍼스펙티브는 또 다른 ‘나’에게 부분적으로만 ‘타자’로 생성될 뿐이며, ‘타자’는 ‘나’의 퍼스펙티브로 파악되지 못한 나머지다. 

그런데 콘은 ‘나’의 퍼스펙티브가 신체로 환원되지 않을뿐더러 기호작용을 통해 또 다른 ‘나’의 퍼스펙티브와 교차 가능하다고 말한다. 허수아비가 옥수수밭을 해치는 흰눈잉꼬를 내쫓 기 위해서는 그것이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와 상관없이 흰눈잉꼬에게 맹수로 보여야 한다. 실 제로 인간은 그렇게 허수아비를 제작해왔다. 흰눈잉꼬와 다른 신체를 가진 인간이 흰눈잉꼬의 퍼 스펙티브를 알 수 있는 것은 기호의 네트워크에서 생명 활동을 전개해왔기 때문이다. 

콘의 숲은 생각한다는 아마존 숲에서 펼쳐지는 종들 사이의 의사소통 방식을 세밀하게 묘사하

면서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자기들의 생명 활동을 기호적으로 구성함으로써 비인간도 사고하는 존재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그려내었다. 이를 통해 근대를 떠받쳐온 인간 개념의 독점성 및 특권 성을 해체하고 비인간을 인간과 동등한 인류학적 지위로 격상했다. 콘은 ‘타자’로서 충분한 자 격이 있는 비인간이 어떻게 인간과 상호 횡단하는지를 논파했다. 그런데 생명체의 기호작용은 또 다른 차원에서 인류학적인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근대에 의해 초자연의 영역으로 밀려난 주술화 의 세계를 복원한다는 것이다.

Ⅲ. 재주술화와 기호의 실재성

19세기 이후 과학적 합리주의의 효과로서 전개된 “세계의 탈주술화”(Max Weber 1917)는 근대

의 지식 및 믿음체계에서 토테미즘, 샤머니즘, 애니미즘 등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영향력을 제거하 였다. 프랑스의 인류학자 프레데릭 켁(Frédéric Keck)에 의하면, 이것은 20세기 근대학문의 어떤 난 제를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곧 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간의 모순을 불러일으킨 것인데, 이 모순 은 오귀스트 콩트에서 에밀 뒤르켐, 그리고 마르크 블로크의 아날학파에 이르기까지 20세기 프랑 스 사회철학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논제로 표출되었다. 즉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들은 ‘심성’이 어 떻게 사회적 실천에서 유효하면서도 그것과 모순적인 긴장 관계에 놓이는지를 해명하고자 했다. 켁은 이 논제가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이데올로기로서 주제화되었고 미셸 푸코에 이르러서는 감 시 장치의 역사로 이행하면서 점차 주체성에 대한 고찰로 향해갔다고 말한다. 그런데 켁에 의하면, 푸코조차도 감시 장치의 내부로 이동하는 ‘심성’의 방식과 그 구조적 효과로서 주체의 형태를 해명하지는 못했다. 

켁은 여기서 레비-브륄의 논의를 끌어와 감시 장치와 ‘심성’의 관계방식을 규명하고자 한다. ‘감시’는 전쟁이나 재해와 같은 외부의 위협에 대한 일종의 반응으로서 ‘관리사회’라고 하는 세계와의 관계방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때 ‘감시’를 둘러싸고 표출되는 심적 상 태는 레비-브뢸이 논한 ‘원시심성’의 ‘초자연적인 것의 지각’에 상응한다. ‘감시’라는 훈육 장치는 매우 근대적인 시스템의 일부이지만, 그것의 작동방식은 천재지변처럼 뜻하지 않은 위협에 대한 전근대적인 지각양식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위협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 를 지배한다는 본래적인 두려움을 유발시키며 그에 대처하는 ‘원시심성’을 발동시킨다. )  

레비-브뢸은 보이지 않는 초자연의 영역을 자연적인 인과성으로 포섭하는 과정으로서 ‘원시

인’의 신화와 제의를 논했다. 여기서 신화와 제의는 신비적이고 직접적이면서도 심적 일관성을 유지하는데, 그러한 심적 일관성은 신화와 제의의 논리를 발휘시키는 ‘참여’에 의해 보증된다. )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들로 가시화하는 레비-브뢸의 ‘참여의 원리(principe de participatio n)’는 레비스트로스에 이르러 토테미즘의 ‘야생의 사고’로 변증법적으로 발전된다. ) 레비스트 로스는 ‘야생의 사고’가 “레비브뢸의 견해와는 반대로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이 성적 판단에 의해서 움직이며 혼동과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변별과 대립의 도움으로 기능하는 것”이라며 “양화된 사고(pensée quantifie)”임을 주장한다.13) 레비브뢸이 신화와 제의에의 ‘참 여’를 통해 가시화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역을 ‘원시심성’으로서 제기했다면, 레비스트로 스는 그것을 ‘차가운’ 이성의 논리로 개념화했다. 

콘은 자기들의 삶 속에서 이 보이지 않는 영역이 보이는 영역과 교차됨을 보이고 그 교차의 논 리를 ‘형식’(form)으로 개념 규정한다. 앞서 논한 퍼스의 기호학을 다시금 상기해보면, 아이콘으 로부터 인덱스가 창발하고 인덱스로부터 상징이 창발하며 그와 더불어 기호의 일반성 또한 창발한 다. 콘은 이 창발되는 기호의 일반성에서 보이는 영역과 보이지 않는 영역이 기호적으로 교차한다 고 주장한다. 일상에서 단속적으로 나타나는 몽상이나 망상 속에서 숲의 영적인 주재자와 살아있 는 인간이 교차하고, 죽은 자와 산 자가 교차하며, 역사와 신화가 교차하는 것은 전적으로 기호의 일반성에 의해서다. 그리고 기호가 실재한다면, 기호를 배치하는 가능성의 제약(보이는 영역과 보 이지 않는 영역의 기호적인 교차)으로서의 형식 또한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형식 자체 는 숨을 쉬지 않지만, 환경 세계의 자기-조직화의 계층적인 논리를 발생시키며 일정한 자기-조직 화의 패턴화를 창출한다. 

이 형식의 자기-조직화는 인간의 세계와 비인간의 세계를 총괄적으로 관통한다. 형식은 생명을 

넘어 창발하며 계층적으로 무한히 증폭된다. 물론 이 형식의 계층적 확산은 인간세계의 도덕적 가 치와 무관하다. 형식은 인간적인 영역에서는 역사의 우연한 산물인 것처럼 나타나지만 그 너머에 서는 신체들과 역사들의 우연성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인간뿐만 아니라 비인간, 죽은 자 와 숲의 영까지도 모든 부류의 기호적인 존재들은 도덕적으로 위계화되지 않으며 무도덕적인 형식 으로 수렴된다. 이를테면 아마존의 샤먼이 상류에서 하류로 아마존의 강 길을 따라 수련 여행을 떠나는 것은 “다양하게 중첩된 형식들을 통합하는” ) 계층적 논리를 밟아감으로써 더 높은 수준 의 창발적인 영역─숲의 영적인 주재자들이 속하는 영역─에 이르기 위한 것이지 인간적인 도덕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숲의 영적인 주재자의 영역에서 역사의 시간은 형식에 의해 동결된다. ‘언제나 이 미’라는 무시간적인 영역의 내부에서는 인간적인 역사의 선형적 인과관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 다. 이 영역의 내부에서 신체의 생물학적인 죽음을 투과한 죽은 자들 또한 숲의 영들과 함께 영원 히 살아갈 수 있다. 죽은 자들과 영들은 선형적인 역사의 ‘지금 이 순간’ 부재하기에 ‘우리’ 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기호적인 실재에서 그들은 살아있다. 인간과 비인간이 어우러져 살아 가는 자기들의 생태계, 죽은 자들과 영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숲의 보이지 않는 세계, 강과 땅, 경 제와 정치 등의 다양한 영역들은 기호의 세계에서 실재한다. 

 

Ⅳ. 제언 및 과제

지금까지 존재론적 전회의 연구사적 배경과 주요 문제의식 그리고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 한다를 중심으로 생명 활동을 기호작용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생명-기호론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

다. 그것은 21세기 인류학에서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형이상학의 출현과 보이지 않는 주술화의 영역의 도래로 특징지을 수 있다. 20세기 서구중심의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밀려난 주술의 세계 는 근대 너머로 확장되는 우주론(cosmology) 속에서 재구축되고 있다. 이러한 탈인간주의는 최근 1 0년간 세계적으로 여러 분과학문을 횡단하며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다. 

한국 인류학계 또한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다. 20세기 인류학의 지난 개념과 용어, 이를테면 문화 개념이나 타자 개념의 재고, 자문화와 타문 화라는 인식론적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민족지적 방법론의 개발, ‘우리’의 퍼스펙티브에 대한 안티나르시시즘적 접근의 고안, 20세기 한국 인류학의 사상사적 재평가 등등 이제까지 서구이론에 기대어 안주했던 한국 인류학을 통렬하게 자기비판하고 지금이라도 ‘우리’의 인류학을 모색해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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