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두 사건에서 보는 지구적 전환(two geological turn) - 우리는 어떤 지구를 상상할 것인가 --홍대용의 자전설과 자법어물(資法於物), 라투르의 가이아설과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 -이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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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역사적으로 보면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이는 사회정치적 질서의 혁명으로 이어졌
다. 갈릴레오 사건에서 보듯 지구를 태양 주위로 움직이게 만들 때 사회 전체 구조가 공격받았다. 4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지구의 역할과 위치는 새로운 과학에 의해 변화를 맞고 있다. 인간의 행동은 지구를 예상치 못한 방식 으로 바꿔놨고 또 한 차례 사회 구조가 전복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지구에 대한 관계 재설정을 통해 만물의 사 회정치적 질서를 혁신시킨 두 명의 사상가를 검토한다. 바로 조선 후기 18세기의 기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 1783)과 지구 용어 대신 가이아 2.0 이론을 내놓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치생태학자인 브루노 라투르(Bru no Latour, 1947~)다. 홍대용은 김석문에게 받아들인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이라는 천문학에 바탕으로, 당시 낙론계에서 전개하고 있던 성리학적 본성 논쟁인 인물성동론(사람과 동물은 본성이 같다)과 성범심동론(성인과 범인은 마음이 같다)을 접합해 천시(天視) ‘인물균(人物均)’ 즉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사물이 모두 하나’라는 당 시로서는 혁명적인 만물평등론을 전개한다. 홍대용은 체용의 원리가 아닌 분합의 원리로 위계적이고 수직적인 계열의 존재 구도를 수평적 구도로 전환코자 했다. 체용의 원리는 전체성의 사고를 촉발하지만 분합의 원리는 수평적이며 부분적인 작은 연결을 가능케 한다. 그는「의산문답」에서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는 관윤 자의 말을 인용해 물로부터 규범을 취하고 배운다는 ‘자법어물(資法於物)’의 관점을 제시한다. 사물이나 동물 등의 비인간이 인간의 배경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활동성을 갖고 움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점에서 는 인간을 천시한다는 서술은 오늘날의 신유물론적 입장에서 본 존재론적 평등론을 선취하고 있다. 이는 향후 동학의 경물(敬物) 사상의 원천적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향후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선 등의 북학파에 영향을 미쳐 사물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지식과 예술을 추구하는 18세기의 백 과전서파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신분제의 균열과 중국과 이민족이 모두 하나라는 ‘화이일야(華夷一也)’의 사상으로 중화중심주의에서 빠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처럼 홍대용의 지구의 위치에 대한 관점 변 화는 당시 시대의 사람과 자연의 연결망을 변혁하는 거대한 정치생태적 변화를 예측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는 지구의 움직임을 관찰해 얻은 시선과 관점의 ‘차이’의 발견으로 인한 전체성의 해체와 ‘부분’적 연결의 발견 이다. 한편 인간(人)과 비인간(物) 간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NT)으로 21세기의 과학과 사회의 학제간 융합 연구에 앞장선 인물인 브루노 라투르는 온전한 전체성을 갖고 있는 객관적 과학으로서의 지구에서 벗어나, 부분 으로서도 충족적인 대지로서의 지구로 관점 전환을 요구한다. 그가 제시하는 ‘지구(globe)’에서 ‘대지(terrestrial)’ 로, ‘지오(geo)’에서 ‘가이아(gaia)’로 향하는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은 인류세를 맞아 방향을 상실한 인류가 새 로운 공간 개념으로 이동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코로나가 발생한 2020년에 문을 연 ‘임계영역
* 연세대학교 미래융합연구원
(CZ)’ 공간에서 새로운 전체가 아닌 부분으로서의 지구를 실험중이다. 이 곳은 지구의 얇은 층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생물 수프와 같은 가이아 안의 지구 속 공생자들간 네트워크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알리고 예술 작품화 하는 민감성 높은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 공간이다. 그는 이런 공간 디자인과 큐레이팅 등을 통해 우리 가 새로운 생명을 정의하고 지역성에 기초한 정치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두 사상가의 지 구적 관점 전환은 동서양과 250여 년의 시간차(밀레니엄의 4분의 1)를 두고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 에 대한 관점 전환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 혁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이 고대 코스모스에서 갈릴레오 사건이 일으킨 서구 근대 과학적 지구 (유니버스)로 갔다가 다시 인류세 시대의 지구중심적 사고로 돌아온 신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면, 홍대용이 일으 킨 지구적 전환은 고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고전적 코스모스에서 명시적으로 인간-자 연의 구분을 없앤 ‘천인물합일(天人物合一)’ 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서구적 전체성의 유니버스로의 단 계를 생략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활물(活物)’로서의 만물이 동등한 서열을 갖고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 생을 추구하는 홍대용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코스모폴리틱스)은 서구 근대가 추구한 단일화되고 전체화된 과학(S cience)의 독주로부터 벗어나 만물이 역동적으로 자기 행위성을 다시 찾으려고 하는 라투르의 부분적인 여러 지 구-이야기(geo-stories), 여러 과학들(sciences)이 가고자 하는 돌파구를 보여준다. 이 두 사건의 비교는 인류가 과연 어떤 지구를 상상할 수 있는가에 대한 통찰을 준다.
차 례
Ⅰ. 홍대용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Ⅱ.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가이아 2.0과 임계영역의 사고전시
Ⅲ. 맺음말
Ⅰ. 홍대용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인물성동론, 성범심동론, 인물균으로의 이동 -
2021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에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낯선 흑백 영상이 관객을 맞는다. 을씨 년스런 제주 바람과 파도, 쉬지 않고 줄을 잣는 거미와 무성한 솔숲이 병렬 스크린에 각각 투사된 다. 거기서 우리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말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를 하며 남긴 ‘세한도’(국 보 제180호)를 만나기 전 그가 느꼈을 유배지의 고독과 자연 교감을 7분 간 경험한다. ‘세한의 시 간(Winter Time)’이라는 프랑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장-줄리앙 푸스 )의 작품은 당시 세한도 를 그린 김정희가 느낀 나무와의 연결망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한편 국악그룹 ‘이날치 밴드’는 최근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의뢰로 자신의 수궁가 앨범의 ‘의사줌치’를 개사해 후쿠시마 오염수 137만톤이 바다에 방류된 사실을 알리는 2분짜리 동영상 ‘후쿠시마 의사줌치 feat. 그린피스’를 만들었다. 이날치밴드는 <범내려온다>라는 한국 17세기 판소리 수궁가를 힙하게 개작한 한국관광 공사 홍보영상으로 2020년 전세계 2억뷰를 넘기는 쾌거를 달성한 밴드다. 이 그룹과 합작하는 앰 비규어스 댄스 컴퍼니 무용수들은 후쿠시마 뒷산의 토끼가 돼서 바다와 함께 신음하는 지구 행위 자들의 막춤을 흥과 한의 몸짓에 담아낸다.
현대 문화현상은 이미 인간과 접하고 있는 지구 존재자들의 연결망의 재구축하고 있다.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 손잡고 공동의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들이 다시 소환하는 문화적 원형은 한국의 전통문화다. 세한도가 그렇고, 판소리 수궁가가 그렇다. 한국의 전통에서 어 떤 요소가 특별하길래 21세기 인류세의 시대가 참조하고 있는 걸까. 오늘날 인류학이나 신유물론 전통에서 논해지고 있는 지구 존재자들에 대한 동등한 연결은 어쩌면 조선에서 논해진 인물성동이 론에서 이미 배태했던 생각이 아닐까. 이렇게 연원을 이어가다 보면 인물성동론을 발전시킨 조선 후기 18세기의 기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을 비롯한 북학파가 결국 인간과 비인간의 차이를 없앤 인물균, 인물무분의 사상으로까지 발전시켰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판 존재론적 평등론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다. 인물균이라는 파격적 주장을 했던 홍대용은 어떤 전환을 통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일까.
1. 김석문의 지구적 전환과 중국중심주의의 해체 홍대용이 전개한 사상의 핵심은 인물중심주의의 극복인 ‘인물균(人物均) 사상’ 그리고 중화중 심주의의 극복인 ‘화이일야(華夷一也)론’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지전설’과 ‘무 한우주론’이라는 독특한 과학적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각각 북학파의 심성론과 정치외교론, 과학론으로 발전된다. 홍대용의 과학, 철학, 사회 사상이 하나의 세계관 내에서 기존의 편협한 중 심주의를 버리고 존재의 동등성을 일관되게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홍대용이 낙론계 속에서도 자 유분방하게 학술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활동했던 18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의 충격에서 회복되긴 했어도 내적으로는 더욱 심한 갈등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대외적으로는 청 나라 중심의 국제질서가 자리 잡으며 북벌의 가능성이 사라졌다. 청나라의 눈부신 문화 발전은 조 선의 지식인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 또 대내적으로는 상업 발전을 통해 중인층이 크게 성장하 고 있었다. 조선 사회를 주름잡던 화이관(夷狄觀)이나 신분제 등의 기존 틀이 차츰 균열되어간 것 이다. 홍대용의 사상은 이런 시대적 상황과 발전된 천문 과학기술에 기반을 두고 탄생했다. 다음 절에서는 홍대용 사상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의 지구적 전환을 통해 과학의 사회화, 가치도 덕의 자연화가 일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로 의미가 있음을 논증할 것이다. 즉 홍대용을 통해 자연과 사회의 양분법이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의산문답에서 홍대용은 그 이전까지 유지하던 성리학적 가치 개념인 性, 理, 本然, 純善 등을 과감하게 삭제하고, 만물을 기의 자발적 이합취산을 통해 생겨나는 존재로 말하게 된다. 또 기의 응취로 생겨난 땅을 살아있는 활물로 말 하며 만물을 낳고 천리를 부여하던 천의 역할을 땅으로 옮긴다.2)
이 중에서 먼저 과학지식의 변화를 살펴보자. 홍대용 이전에 지전설을 먼저 주장했던 사람은 김 석문(金錫文, 1658∼1735)이다. 그의 우주론은 김석문이 40세에 작성한 역학도해(易學圖解)에 그 림과 글로 상세히 정리돼 있다. 조선의 역학사에는 장현광(張顯光,1554∼1637)의 역학도설(易學圖
說), 선우협(鮮于浹, 1588∼1653)의 역학도설, 김석문의 역학도해 등 ‘도설(圖說)’ 의 전통이 있다. 그 중 김석문의 역학도해는 역학이 인간사만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다양한 면을 모두 포괄 하는 원리임을 도상으로 표상함으로써 역학의 범위와 내용의 포괄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장 재와 소옹 등을 통해 얻은 전통 우주관에 더해 중국을 통해 수입된 서양 과학, 특히 티코 브라헤T ycho Brahe의 천문학적 지식을 결합하며 독자적인 점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홍대용의 스승이었던 김원행의 또다른 제자인 이재 황윤석(黃胤錫)은 김석문이 ‘지전론(地轉論)’을 전개했 다고 요약한다.3) 또 연암 박지원은 김석문의 우주관이 ‘삼대환부공설(三大丸浮空說)’이 핵심이라 고 강조하는데, 이는 “해·달·지구, 커다란 세 둥근 것이 하늘에 떠 있다”는 것이다.4)
장재(張載)는 “지구가 틀을 탄다”고 했고, 역지(曆指)에서는 “기(氣)와 화(火)가 하나 의 구(球) 를 이룬다”고 했다. 기화(氣火) 안에 있는 지구가 그것을 타고 있는데, 그것은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지구와 함께 하나의 체(體)를 이룬다. 그러므로 지구 위의 하늘은 밖은 움직이고 안은 고요 하니, 지구가 비록 돈다고 하더라도 구름이 가고 새가 날며 물건을 던지는 것이 달라지지 않는다. 만약 땅에서 조금만 위일지라도 모두 기가 움직인다고 말한다면, 왼쪽으로 도는 하늘만이 구름이 가고 새가 날고 물건을 던지는 것을 달라지지 않게 하겠는가? 이것은 지구가 자전하지 않는다는 것 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에 부족하다.5)
그가 인식했던 하늘과 땅은 달랐다. 전통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움직이고 땅은 정지해 있다는 ‘천동지정(天動地靜)’, 땅을 중심으로 우주의 외곽으 로 갈수록 점점 더 운행 속도가 빨라진다는 ‘외질중지(外疾中遲)’였으나 그는 전통적 사유를 전 복했다. 대신 땅이 둥글다는 ‘지구설’로 교체한 이후, 모든 천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한다 는 ‘우선설’, 지구가 1년에 366회 회전한다는 ‘지전설’, 우주는 동정이 없는 가장 외곽의 태극 천으로부터 중심부의 지구로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진다는 ‘외지중질(外遲中疾)’의 우주론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 김석문은 서양의 지구설을 자신만의 독자적인 생각으로 재해석해 조선 후기 우주 론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홍대용은 분명 천문론과 우주론에서 김석문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전설’
2) 곽혜성, 「담헌 홍대용의 탈성리학적 사상의 형성-이기심성론에 따른 물의 담론 변화를 중심으로」, 철학 사상문화29호, 2019, 18쪽.
3) 頤齋集권6, 「書金大谷錫文易學圖解後」 참조.
4)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1780년(정조 4) 중국 학인들과 대화 중에 김석문의 ‘삼대환부공설’을 소개한 다. 그는 “둥근 땅덩어리가 해‧달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떠 있다는 설은 김석문이 처음이고, 지구가 자전
한다는 설은 홍대용이 처음”이라고 했다.(열하일기, 「太學留館錄」 8월 13일) 5) 역학도해, 「總解」
과 ‘무한우주론’이라는 천문학에다, 낙론계에서 전개하고 있던 성리학적 본성논쟁인 인물성동론 을 접합해 천시 ‘인물균(人物均)’ 즉 하늘에서 보면 ’인간과 사물이 모두 하나’라는 당시로서 는 혁명적인 만물평등론을 전개한다. 이것은 김석문에게서 이뤄졌던 지구적 전환이 홍대용에게서 와서 정치생태적 전환에까지 이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이는 사회정치적 질서의 혁명으로 이어졌던 역사를 예외없이 예증한 것이다. 인물균 사상의 파급 력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향후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정선 등의 북학파 에 영향을 미치며 사물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둔 지식과 예술을 추구하는 18세기의 백과전서파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 정치적으로는 신분제의 균열과 ’화이일야’의 사상으로 중화중심주의에서 빠 져나오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처럼 홍대용의 지구의 위치에 대한 관점 변화는 당시 시대의 거대한 정치생태적 변화를 함께 추동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세종 때부터 추구됐던 조선만의 독자적 시간 에 대한 추구로 인해 중국과 차이나는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던 차에, 지구자전설이 입증되 면서 이들 북학파에게 더 이상 전체성이나 통일성, 불변의 중심성 등이 의미없어졌다. 바야흐로 차 이의 존재론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위계서열화된 가치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다.
홍대용의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설(地球說), 지구는 스스로 돈다는 지구자전설(地球自轉說), 우주 의 끝은 알 수 없다는 우주무한론(宇宙無限論) 중 앞의 2개 이론은 앞서 김석문도 제시한 것을 응 용한 것이나, 우주무한론은 홍대용만의 독창적인 주장이다. 기존의 이론틀에 매몰되기보다 새로운 관점주의를 펼침으로써 전통적인 우주관에서 벗어나 무한 우주까지 제시할 수 있었다. 홍대용은 대수학·기하학 등 수학 전반을 정리한 주해수용(籌解需用)을 저술하고, 자신의 집에 ‘농수각 (籠水閣)’이라는 실험실을 지어, 혼천의(渾天儀)와 서양의 자명종을 연구해 혼천시계를 제작했다. 홍대용의 자신감은 이런 실험실로부터 나온 실제적인 데이터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2. 홍대용의 심성론, 정치외교론, 그리고 과학담론 그 중에서도 의산문답(醫山問答)은 이 모든 지식들이 소개된 단편 소설로, 하늘의 입장에서 보
면 사람과 사물이 동등하다는 인물균 사상이 특징적으로 잘 소개, 제시돼 있는 대표적 저작이다.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은 그와 관련된 지구 존재자들의 관계를 뒤바꿔놓는다. 그것은 곧 사회 질 서의 혁명이다. 의산문답에서는 물(物)이 모두 57번 나오는데, 이 중에 인과 물이 합해서가 아니 라 별도로 논해지는 단락이 42번이다. 그만큼 사람으로부터 물이 별도의 존재자로 각광받아 등장 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사물의 존재론’을 본격화한 사상서라 할 수 있다.
그의 관점전환은 심성론에서부터 이어진다. 이는 인간과 사물은 구별 없이 모두 같은 성을 갖고 있다는 낙론계열의 ‘인물성동론’의 학풍 변화로부터 시작됐다. 17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조선의 호락논쟁(湖洛論爭) 중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에 관한 담론이었
다. 이 이론은 낙론계의 학자인 김창협, 김창흡, 김원행, 박윤원에서 홍대용, 박지원을 거쳐 박제가, 이덕무, 서형수 등으로 계승되는 학풍이다. 그 중에서도 김원행의 ‘석실서원’에서 수학했던 홍대 용은 물성에 주목하고, 물성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하게 제시했다. 그는 인물성 담론에서 추 론된 인성과 물성의 본질과 관계에 관한 인식에 머물지 않고, 중화와 이적의 본질과 관계에 관한 인식의 준거로도 확장한다. 이 이행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먼저 홍대용의 심성론이 드러난 그의 초 기 저작 「심성문(心性問)」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홍대용은 리를 통해 인과 물을 동시에 사고하고 있지만 이는 일반적인 낙론의 인물성동론의 입장과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사람은 사람의 이(理)가 있고 물(物)은 물의 이(理)가 있다. 이른바 이(理)란 것은 인(仁)일 따름이다. 천(天)에 있어서는 이(理)라 하고, 물(物)에 있어서는 성(性)이라 한다. 천에 있어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이라 하고, 물에 있어서는 인의예지(仁義禮智)라 한다. 그 실은 하나이다. 초목(草木)도 전혀 지 각(知覺)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비와 이슬이 내리고 싹이 틈은 측은(惻隱)의 마음이고, 서리와 눈이 내리고 지엽(枝葉)이 떨어짐은 수오(羞惡)의 마음이다. 인(仁)은 곧 의(義)이고 의(義)는 곧 인(仁)이 다. 이(理)라는 것은 하나일 뿐이다. 호리(毫釐)의 미(微)도 다만 이 인의(仁義)이요, 천지(天地)의 대 (大)도 다만 이 인의(仁義)이다. 보탤 수 없이 크고 덜 수 없이 작으니, 그 지극함인저. 초목(草木)의 이(理)는 곧 금수(禽獸)의 이(理)이고, 금수의 이(理)는 곧 사람의 이(理)이고, 사람의 이(理)는 곧 하 늘의 이(理)이니, 이(理)라는 것은 인(仁)과 의(義)일 따름이다. 호랑(虎狼)의 인(仁)과 봉의(蜂蟻)의 의(義)는 그 나타나는 곳에 따라 말함이다. 그 성(性)으로 말하면 호랑(虎狼)이 어찌 인에만 그치며, 봉의(蜂蟻)가 어찌 의에만 그치랴? 호랑(虎狼)의 부자(父子)는 인이고 이 인(仁)을 행하는 소이(所以) 는 의(義)이며, 봉의(蜂蟻)의 군신(君臣)은 의이고 이의를 발(發)하는 소이는 인이다.7)
하지만 바로 이후 저작인 「답서성지논심설(答徐成之論心說」에 가면 홍대용의 물에 대한 논의는 「심성문(心性問)」과 사뭇 달라진다. 성에 대한 논의를 심으로 심화시키고 있다. 성인이나 범인의 마 음이 모두가 똑같다는 ‘성범심동설(聖凡心同說)’을 물에까지 연장시키고 있다. 특히 심의 영함에 있어서 물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범심론(汎心論)적 특성까지 보이고 있다.
사람과 물의 마음이 그 과연 같지 않은가? 또 심(心)이란 것은 신명(神明)하여 헤아릴 수 없는 물로
7) “人有人之理 物有物之理 所謂理者 仁而已矣 在天曰理 在物曰性 在天曰元亨利貞 在物曰仁義禮智 其實一也 草木不可謂全無知覺 雨露旣零 萌芽發生者 惻隱之心也 霜雪旣降 枝葉搖落者 羞惡之心也 仁卽義義卽仁理也者 一而已矣 毫釐之微 只此仁義也 天地之大 只此仁義也 大而不加 小而不减 至矣乎 草木之理 卽禽獸之理 禽獸之理 卽人之理 人之理 卽天之理 理也者 仁與義而已矣 虎狼之仁 蜂蟻之義 從其發見處言也 言其性 則虎狼豈止於仁 蜂蟻豈止於義乎 虎狼之父子仁也 而所以行此仁者義也 蜂蟻之君臣義也 而所以發此義者仁也.”, 湛軒書 內集 1卷, 「心性問」
서 형상(形狀)도 없고 성취(聲臭)도 없다. 같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어떻게 떨어지고 어떻게 합하며 어떻게 완전하고 어떻게 이즈러지는 것인가? 한 번 같지 않음이 있으면 이 마음이 기를 따라 체를 변(變)하니 영(靈)함이 일정한 근거가 없다. 일정한 근거가 없으면 지자(智者)는 우자(愚者)에 대해 서, 현자(賢者)는 불초자(不肖者)에 대해서 모두 같지 않을지니, 이 무슨 이치인가? 그러므로 이르되 우(愚)는 기(氣)에 국한되고 물(物)은 질(質)에 국한되나 심(心)의 영함은 한가지라 한다. 기(氣)는 변 할 수 있어도 질(質)은 변하지 못한다. 이것이 사람과 물(物)의 다름이다.8)
홍대용은 여기서 물의 영함이 사람과 같은 것을 넘어 더 뛰어날 때가 있음을 오히려 주장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홍대용의 사상은 물(物)에 대해 기존의 낙론과는 다른 접근으로 나아가기 시 작한다.
이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일이 있되, 범[虎]은 반드시 자식을 사랑하고, 사람은 충성치 않는 일이 있지만 벌[蜂]은 반드시 임금을 공경하고, 사람은 음란함이 있되, 비둘기는 반드시 남녀간 분별이 있으며, 사람은 무턱대고 하는 일이 있되, 기러기는 반드시 때를 기다린다. 기린의 인(仁)함과 거북 의 영(靈)함과 나무의 연리(連理)와 풀의 야합(夜合)함이 비 오면 기뻐하고 서리 오면 시드니, 이 모 두 그 마음이 영(靈)한 것인가, 영하지 않은 것인가? 영하지 않다면 모르겠으나, 영하다 하면 사람에 비하여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혹 더 뛰어나다.9)
사물의 가치에 대한 존중은 향후 홍대용이 북경의 연행 경험 이후 집필한 의산문답에서 인간 이 자신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물로부터 배운다는 ‘자법어물(資法於物)’이라는 관점으로 확장된 다. 인물성동론을 넘어, 물(物)에 대한 새로운 관점, 즉 상호부조적이며 오히려 인간보다 낫기에 인 간이 차마 두려워하게 되는(경외하는) 측면을 보다 과감하게 말하게 된 것이다. 홍대용의 이런 관 점은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聖人師萬物)’는 관윤자에서 인용한 것10)이지만 그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인간중심주의를 타파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신유물론자인 로지 브라이도티가 하고 있는 기존의 동물과 인간간의 경계인 조에(zoe)와 비오스(bios)의 경계를 타파하 려는 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홍대용이 허자(虛者)라는 화자를 통해 검토했던 인물간의 경계는 비 오스를 넘어 조에의 생명력을 논하려는 브라이도티의 의견을 먼저 선취한 것이다.
홍대용의 물론의 특징 중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인과 물의 상호성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호성은 홍대용이 사람과 사물의 성(性)과 심(心)의 차이에 대한 검토를 거쳐 ‘인물균’에 이르
8)“人物之心 其果不同乎 且心者 神明不測之物也 無形狀無聲臭 雖欲不同 何離何合何完何缺 一有不同 是心逐氣變體 靈無定本 旣無定本 則智之於愚 賢之於不肖 皆不同也 此豈理也歟 故曰 愚局於氣 物局於質 心之靈則一也 氣可變而質不可變 此人物之殊也.”, 湛軒書 內集 1卷, 「答徐成之論心說」
9)“今夫人有不慈而虎必愛子 人有不忠而蜂必敬君 人有淫奔而鳩必有別 人有冥行而鴈必候時 麟之仁也 龜之靈也 樹之連理 草之夜合 雨而喜 霜而憔悴 此其心靈乎不靈乎 謂之不靈則已 謂之靈則方之於人 非惟不異而或過之.”, 湛軒書 內集 1卷, 「答徐成之論心說」
10)“關尹子曰, ”聖人師蜂立君臣, 師蜘蛛立網罟, 師拱鼠制禮, 師戰蟻置兵, 衆人師賢人, 賢人師聖人, 聖人師萬
物. 惟聖人同物, 所以無我.”, 關尹子, 「三極」
는 과정에서 인물간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인물무분(人物無分)의 상태에 도달했기에 가능한 발상이 었다. 상호성은 연결망을 뜻한다. 인과 물이 연결된 관계요, 서로 배워서 (침투하여) 생래적 결여를 보완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의산문답은 ‘인물무분’이라는 개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후 에 박지원도 이에 영향을 받아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은 구별할 수 없다는 인물막변(人物莫辯)을 제시한다. 이것이 인물성 담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다. 실옹은 이러한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을 ‘하늘의 시점’이라고 했다. 하늘의 시점은 인물균과 자법어물을 주장할 때 각기 언급되었는데, 이것은 인물균과 자법어물이 인물무분의 중요한 두 기둥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시점이라 함은 기 존의 중심주의를 타파하고 새로운 관점을 총괄하고 새로운 관점 차이를 도입하는 브라이도티식 조 에중심주의다.
실옹이 고개를 들어 웃고 말했다. “너는 정말로 사람이구나 . 오륜과 오사는 사람의 예의고, 무리 지어 다니면서 나누어 먹는 것은 짐승의 예의고 , 덤불로 피어 무성한 것은 초목의 예의다. 사람의 시점에서 물을 보면 사람은 귀하고 물은 천하지만 물의 시점에서 사람을 보면 물은 귀하고 사람은 천하고 , 하늘의 시점에서 보면 인과 물이 균등하다.11)
지혜가 없으므로 오히려 속이지 않고, 깨달음이 없으니 오히려 꾸미지 않는다. 그러니 물이 사람보 다 귀한 것이다.…봉황은 천 길을 날고 용은 하늘에 있으며, 시초와 기장은 귀신과 통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는 재목으로 사용된다. 사람의 무리와 비교하면 누가 귀하고 누가 천한가? …대도를 해치는 것으로 자랑하는 마음보다 심한 것이 없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물을 천 하게 여기는 이유는 자랑하는 마음의 뿌리 때문이다.12)
그래서 옛사람은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물로부터 규범을 취하지[資法於物] 않은 적이 없었다. 군신 간의 의식은 벌에서 취하고 , 전쟁할 때의 진법 은 개미에게서 취하 고 예절의 제도는 들다람쥐에게서 취하고 그물의 설치는 거미에게서 취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 성인은 만물을 스승삼아 배운다’고 한다 . 지금 당신은 어찌 하늘의 시점으로 물을 보지 않고 사 람의 시점으로 물을 보는가?”13)
홍대용의‘자법어물(資法於物)’과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聖人師萬物)’란 논의는 만물의 우 위성을 증명했다는 점에서 급진적이다. 특히 지구 생명의 입장을 서로 돕는 공생의 입장으로 봤다 는 데 의미가 있다. 이는 수직적, 위계적으로 변질됐던 성리학적 체용의 구조를 분합의 구조로 바 꿔 수평적 인식전환을 시도했다는 의미도 있다. 인현정은 여기서 홍대용이 적용하고 있는 ‘분합 (分合)’의 원리를 주목한다. “홍대용은 체용 구도가 아니라 분합의 구도로 전환했다”고 말하면 서다.14) 그는 홍대용의 분합구조는 리기에 대한 새로운 재편을 낳는다고 보고 있다. 애초 송대 신
11) “實翁仰首而笑曰, ‘爾誠人也. 五倫五事, 人之禮義也. 羣行呴哺, 禽獸之禮義也. 叢苞條暢, 草木之禮 義也. 以人視物, 人貴而物賤, 以物視人, 物貴而人賤, 自天而視之, 人與物均也.”
12) “夫無慧故無詐, 無覺故無爲. 然則物貴於人, 亦遠矣.”, “且鳳翔千仞, 龍飛在天, 蓍鬯通神, 松栢需材. 比之人類, 何貴何賤?”“夫大道之害, 莫甚於矜心. 人之所以貴人而賤物, 矜心之本也.”
13)“是以古人之澤民御世, 未嘗不資法於物. 君臣之儀, 盖取諸蜂. 兵陣之法, 盖取諸蟻. 禮節之制, 盖取諸 拱鼠. 網罟之設, 盖取諸蜘蛛. 故曰, ‘聖人師萬物.’ 今爾曷不以天視物, 而猶以人視物也.”
유학자들이 요청한 체용구도는 사실상 리와 기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였으나, 언어적 한계에 부딪 힌다. 예컨대 기존의 체용(體用)구조 속에서는 인의예지 중 ‘체’ 해당하는 인의 기준이 선재(先在)되어 ‘인’은 용(用)의 세계에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도체(道體)가 된다. 하지만 분합 구조 엔 그런 선후와 위계성이 없다. 체용이 수직구도에 결부됐다면 분합구조는 훨씬 더 수평구조 속에 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 예로 인현정은 홍대용이 四書問辯가운데 「中庸問議」에서 중용12·1 3장에 대한 설명한 대목을 제시한다.
생각건대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다는 것은 ‘은’하다”라는 말에서 ‘은’은 ‘좁은 것[微]’와 ‘작은 것[小]’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인의 알 수 없고 행할 수 없다’는 것과 ‘천지에 대한 유감스러운 바’는 費다”라는 말에서 ‘비’는 ‘넓은 것[廣]’과 ‘큰 것[大]’을 의미한다 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큰 것을 말한다’와 ‘작은 것을 말한다’는 비·은의 뜻을 다시금 해석 하는 까닭이 됩니다. 대개 합해서 말하는 것은 넓고 또 크게 되어 ‘비’라고 말합니다. 나눠서 말 하는 것은 좁고 또 작게 되어 ‘은’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의 차이는 나누고 합하는 ‘분합(分合)’에 있지 ‘체용(體用)’에 있지 않습니다. 15)
인현정은 이 분합의 구도가 홍대용의 인물성동론과 논리적으로 어울릴 수 있게 된다는 분석한 다. 18세기는 기존의 체용관으로 담아내기엔 용(用)의 세계, 상(象)의 세계 너무 확장됐기에 홍대용 은 새로운 분합의 수평적 틀로 물(物)을 통한 치지 영역을 넓히려고 했다. 의복과 음식, 혼천의와 악기 등 인간의 개별 사물들에 대한 이해를 강조했다. 기존 질서의 해체는 과학적 세계관의 발전 을 견인한다. 실제 홍대용은 향후 북학파와 백과전서의 학파에도 영향을 미치며 향후 미술 화풍에 도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16) 또 과학지식의 발달은 전체적으로 중인층의 성장을 가져온다. 이는 후기 조선사회에서 문학, 미술 등의 예술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김창협이 금강산 봉우리를 보고 쓴 시는 하나하나 춤추며 날아갈 듯하다던지, 구름에서 나와 치달린다고 하는 등, 사물을 인간의 위치 와 대등하게 바라보고 그 본질을 파악하려고 시도하는 물리(物理) 파악의 관물론적(觀物論的) 시도 다. 그 절정이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인데, 이 그림의 금강산은 정선 개인의 한정된 체험적 시각 이 아니라 하늘 위에서 새가 날아 보듯 다시점으로 형성된 회화적 진경의 공간을 구성해낸 것이
다. 또 박지원의 호질 등에 동물 우화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여러 가지 기담에서 나오는 핍박받던 기이한 존재의 향연을 부활시킨다. 홍대용의 인물균 사상 또한 지구에 대한 지식의 결과물로 생긴 결과다. 즉 지구가 돌고 돌며, 관점이 바뀌어 천시(하늘)의 관점에 이르면, 그것은 지구는 만물에 동등한 위치와 연결망을 부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사람은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사물에 이르려는 노력, 사물로부터 배우려는 노력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현식은 이런 홍대용의 화법을
14) 인현정, 「홍대용의 정치철학과 물학(物學)의 관계 연구」, 이화여대 박사논문, 2017.
15) “妄意可知可能者隱也, 隱者, 微也小也. 聖人之不知不能與天地之所憾者費也, 費者廣也大也. 所謂語大語小者, 所以重釋費隱之義, 其曰造端乎夫婦者, 隱也, 其曰察乎天地者, 費也. 所以申言君子之道而結章首費隱二字之義也. 盖合而言, 其廣且大則曰費也. 分而言, 其微且小則曰隱也. 其言之異, 在於分合而不在於體用也.”, 湛軒書 四書問辯, 中庸問疑.
16) 이현경, 「정선 <금강전도>의 구도와 시점에 대한 역사ㆍ사회적 고찰」, 예술학, 2:2, 2006.
“허자는 위계적 관계 인식을 표상하고 실옹은 영향 관계적 인식을 표상한다.”고 설명한다. ) 당시 18세기 조선 사회에서는 ‘인물성동이론’과 ‘성범인심동이(聖凡人心同異)’ 논쟁이 함께
진행됐다. 이 중 홍대용은 인물성동론과 성범심동설을 주장했기에, 성인론이 만들어내는 수직적 질 서를 동론과 공존시키려 했다면 왕으로부터 하층민까지, 청나라나 명나라나 모두 동일한 ‘사람’ 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기존의 ‘체용일원’이란 개념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체용개념만을 위계적이고 도식적으로 적용했다는 모순에 물들어있어 이를 쇄신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홍대 용은 체용이 아닌 ‘분합’ 구도를 적용해 관습적 체용 구도의 부조리한 적용을 비판하고, 확장되 고 변화된 현실을 드러내려 했다.
인물무분은 인과 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보완적 관계에 있다는 인식에 기반을 둔다. 의산 문답에서 허자는 끊임없이 인과 물의 관계를 분리된 관계요, 배타적 관계라고 믿지만, 실옹은 인 과 물의 관계를 연결된 (서로 영향을 주는) 관계요, 보완적 관계라고 믿는다. 이 관점은 인과 물의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차이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허자는 물의 결여만 이야기했지만 실옹은 물 의 결여만이 아니라 인간의 결여도 이야기했다. 허자는 인간우월성을 말했지만 실옹은 인과 물 모 두 우월하다고 말했다. 실옹은 인과 물이 서로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공생 관계라고 지적 한다. 서로 다툰며 경쟁하고 배운다는 뜻이다. 인과 물의 대등성은 하늘에서 보는 구조적 관점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런 구조적 관점은 인물론을 넘어 자연론, 역사 담론, 현실 담론까지 이어진다. 각 담론은 병렬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물성 담론이 청나라 담론을 위한 복선이기도 하
다. 실옹이 인물성 담론을 전개하면서 이런 개념을 추론하고 그것을 각 담론에 적용시키려고 한 의도가 있었음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허자가 화들짝 크게 깨닫고, 또 절하고 나와 말했다. “인과 물은 구분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 었으니, 인과 물의 탄생의 뿌리에 대해서 묻고 싶다.” 실옹이 말했다. “좋구나, 질문이여! 그렇지 만 인과 물의 탄생은 자연에 근원한 것이니, 내가 먼저 자연의 실정을 말하겠다.”… 허자가 말했
다. “자연의 형상과 정황에 대한 말씀은 이미 들었으니, 마지막으로 인과 물의 근원, 고금의 변화, 중화와 이적의 구분에 대해서 듣고 싶다.”
이 부분은 인물론 단락과 자연론 단락의 연결 부분이다. 허자는 인과 물의 구분이 없는 관계라
는 것을 깨우치고 난 후 인과 물의 생명 기원에 관해 배우기를 요청하고 실옹이 이에 동의한다. 이것은 두 담론을 동일한 원리로 설명하려는 실옹의 의도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자연론 단락 과 역사 현실 단락의 연결 부분에서도 역사담론과 현실 담론 역시 동일한 대도로 설명하려는 의도 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서 홍대용은 구조적 시각을 가능하게 하는 천을 리나 태극이 아닌 ‘자연천(自然天)’의 의
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에게 천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은 가치가 아닌 사실의 관점에서 인과 물을 평가하려는 것이다. 이 천은 그가 농수각이라는 실험실에서 직접 관찰하며 얻어낸 과학적 천이다. 의산문답은 이렇게 기존의 도덕, 가치 중심으로 인과 물을 통합해서 보던 전체론적 사고를 벗어나 인과 물의 사실적 차이 철학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홍대용은 여기서 인과 물을 무조건 합일적 관점에서 보던 보편원리를 약화시킨다. 인간중심적 가치를 물에 투사하는 시선 자 체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심성문(心性問)」에서나 「답서성지논심설(答徐成之論心說」에서 여 전히 동물의 영함이나 동물의 인간보다 뛰어남을 논하면서 성리학에서 규정하는 예의 즉 인간중심 적 가치의 틀 안에서 머물렀던 것에 비해 의산문답이 일진보한 측면이다.
Ⅱ.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과 정치생태학 : 가이아 2.0과 임계영역의 사고전시
<그림1> 지구(우라노스)를 짊어진
아틀라스
<그림2> 어린 예수를 업은 St.Christopher
<그림3> Master of Messkirke in
Basel의 St.Christopher
1. 브루노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 라투르의 지구 존재자들의 연결망 합성과 재구축
인간(人)과 비인간(物) 간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으로 21세기의 과학과 사회의 학제간 융합 연
구에 앞장선 인물인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는 인류세의 시대를 맞아 우리가 온전한 통일성과 연속성을 갖고 있는 객관적 과학(Science)으로서의 지구에서 벗어나, 대지로서의 지구로 관점 전환을 해보자고 권한다. 2010년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제시하는 지구에 대한 대안적 어휘 설 정은 세 가지 축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기존의 ‘지구(globe)’에서 ‘대지(terrestrial)’로 전환 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지구의 접두어를 ‘지오(geo)’에서 ‘가이아(gaia)’로 바꾸는 전환이다. 그는 지구를 geo-라는 객관적 땅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에 간지러워하고 인간 세계에 침입해 복수 하는 gaia-로 형상화하는 게 인류세를 맞은 인류의 상황에 더 적합하다고 설명한다. 또 globe는 멀 리서 태연하고 초월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어감이 느껴지는 반면, terrestrial는 천상계의 초 월로부터 단절된 떠나올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삶의 조건이자 터전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마지막으로 그는 단일한 전체성을 지닌 ‘유니버스(universe)’에서 여러 코스모스 들의 정치적 경쟁, 즉 ‘코스모폴리틱스(cosmopolitics)’로의 전환을 말한다.
이렇게 브루노 라투르는 끊임없이 지구를 다른 관점으로 보기를 제안한다. 그가 지구 대신 제시
하는 가이아 이론은 특히 엄마와 같이 보살펴주는 여신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침입하고, 매우 거친 자연이다. 또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이자벨 스텐저스의 가이아 이론과 맥을 같이 하고 있 다.
라투르는 2011년 런던의 프랑스 인스티튜트 강연 ‘가이아를 기다리며. 예술과 정치를 통해서 공동 세계를 합성하기’ )에서 이같은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여기서 그는 과학의 대표적인 도구를 예술과 정치의 도구와 연결함으로써 생태 문제에 대한 해법을 시도한다. 19세기까지 인간 은 숭고한 ‘자연’의 장관에 무력하고, 압도당하며, 전적으로 지배당하는 느낌을 가져왔다. 그러 나 이제 우리는 그 숭고한 자연(나이아가라 폭포, 남극의 얼음)이 동일하게 영속하지 못함을 느낀
다. 칸트가 말한 우리 안의 도덕 법칙에 대한 숙고와 우리 밖의 자연의 무고한 힘들에 대한 숙고 사이의 오랜 균형은 이제 뒤집어지고 있다. 라투르의 과학사회학(STS) )와 행위자 연결망 이론(AN T)는 이런 위기상황에 적합한 이론화 작업이다. 지구 분과학문들, 장비, 매개자, 과학적 연결망들이 확대되면서 이제 지구는 구체(globe) 즉 공 모양이 아니라, 데이터 점들이 수집되고 모형수립자들 에게 다시 전송되는 기지들과 믿음직하게 안전한 연결망들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는 척도 모형(scal e model) 즉 여태까지 가장 아름답고, 견고하며, 복잡한 조립체들 가운데 하나인 태피스트리가 된 다. 이 태피스트리에는 많은 구멍이 있어서 이 안으로 매듭과 노드를 엮어내며 조정, 모형화, 재해 석할 수 있고, 그래서 이 태피스트리는 놀랍도록 강하다. 인류세의 역사에서 이런 느린 태피스트리 엮기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기후과학자도 이제 지구를 직접 측정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가 능한 대안은 아주 작은 실험실 현장의 국소적 모형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작업을 표준화하고 조정 하는 것뿐이다. 이제 한쪽편에서 지구에 대한 전지구적으로 완전하고 전체적인 시야로부터 득을 보는 과학자들이 있고, 저편에는 "제한된 국소적인" 시야를 가진 가련한 보통시민들이 있는 시대 는 지났다. 오로지 부분적인 시야들이 있을 뿐이다. 생태적으로 고무된 활동가가 충분히 전지구적 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명목 아래 시민에게 창피를 주려는 노력은 쓸모없다. 이제 아무도 지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고 아무도 초월적인 견지에서 생태계를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과학자, 시민, 농 부, 생태학자, 지렁이가 전혀 다르지 않다. 자연 즉 지구는 관찰자가 사물들 "전체"를 보기 위해 이상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관점에서 포괄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 함께 합성 되어야 하는 모순적인 존재자들의 조립체이다.
현재 인류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우리에게 이런 조립 작업이 특히 필수적이다. 모든 조립 체에는 중간 매개자들이 필요한데 위성, 센서, 수학 공식, 그리고 기후 모형은 물론 국민국가, 비정 부 기구, 의식, 도덕, 책임감도 포함돼야 한다. 이런 조립체는 "과학적 논쟁들의 지도 그리기"라 부 르는 여러 행위자의 작업으로 만들어진다. 여기서 라투르는 합성(composition)이란 개념을 쓴다. 과 학 논쟁은 회피할 게 아니라 매 행위자마다 합성돼야 하며 예를 들어, 대기 난류의 역할, 그 다음 구름 역할, 다음 농업 역할, 다음 플랑크톤 역할 등이 연쇄하며 기후를 모형화하면서 매번 참된 지 구 극장을 만들어간다. 여기서 사실과 의견은 이미 뒤섞여 있고 앞으로 훨씬 더 많이 뒤섞일 것이 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과 정치 세계를 분리시키는 게 아니라 뒤얽힌 우주론들의 상 대적인 무게를 새로운 도량형 코스모그램(cosmogram)으로 판별하는 것이다. 이제 논쟁적이고 과학 적인 여러 우주들을 서로 비교하고 겨루게 하자. 그게 정치다.
라투르는 이런 식의 용어와 인식 전환을 통해 인류세를 맞이한 지구가 서서히 기존의 역사적 지 구에서 공간 중심의 지구로 이동해야 함을 말한다. 이런 전환의 일환으로 라투르는 인류가 코로나 를 맞은 2020년에 문을 연 ‘임계영역(CZ)’이라는 국소 공간을 실험중이다. 이 곳은 지구의 얇은 층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이아 안의 지구 속 공생자들의 네트워크를 관찰하고 연구하고 알리고
예술작품화하는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를 하는 공간이다. 사고 전시는 ‘사고 실험(thoug ht experiment)’에 대비되는 말이다. 사고 실험이 사물의 실체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가상의 시 나리오가 어떻게 동작할지 생각하는 선험적 방법이라면 ‘사고 전시(thought exhibition)’는 관찰이 나 실험이라는 경험적 방법을 통한 공간 디자인과 큐레이팅으로 아직 정의되지 않은 새로운 생명 을 기술하고 지역성에 기초한 생태계를 복원하겠다는 뜻을 담는다. 이 공간에서는 예술가들과 과 학자들 사회학자들이 모두 모여 각자의 방식으로 또 학제 간 협동을 통해 임계영역에 대한 합동 탐구를 진행한다. 생태적 다양성이 깨진 지구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임계영역에서 빨리 발 견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기민함을 통해 인류세의 대처능력을 높일 수 있다. 어차피 지구 전체 의 통일성과 연속성을 전부 파악하는 과학자는 이제 불가능함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브루노 라투르는 여러 강연과 저작에서 자신의 지구 철학을 설파하는 데 있어서 종종 독일 철학 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의 구체 이론을 극찬한다. 특히 슬로터다이크의 구체 디자인 이 가질 수 있는 새로운 형이상학에 매료됐다고 강조한다. 라투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피터 슬로터다이크의 구체 이론은 지구에 대한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 그가 구체 (Globe)의 시대로 말한 17~20세기 말까지 ‘유니버스(universe)’라 불리는 모든 요소 사이에는 연 속성과 통일성이 있었다. 그는 우리가 이 시점을 기해 ‘한정된 코스모스’(restricted cosmos)에서 ‘무한한 유니버스’로 움직였다고 말한다. 인간 밖 모든 것 즉 땅, 공기, 달, 행성들, 은하수, 그리 고 빅뱅에까지 모든 것이 동일한 물질적 재료로 이루어져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또는 "갈릴레 오적" 혁명은 그렇게 지상계와 천상계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슬로터 다이크는 유니버스가 아니라 멀티-코스모스, 코스모폴리틱스, 즉 버블 또는 거품으로서의 지구를 상상하도록 유도한다. 단 하나의 천상의 지구라는 유니버스는 이제 없으며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으 로 자기의 조그만 거품으로서의 지구에 머물고 있다. ) 슬로터다이크는 세계가 이런 관점에서 세 가지 세계화의 변화를 겪은 것으로 묘사한다. 첫 번째는 그리스 우주론에 의해 촉발된 형이상학적 인 변화로 이 세계는 미시구체(microsphere)다. 두 번째는 16세기의 세계적인 항해 탐사로 시작된 국제적인 것으로 이 세계는 거시구체(macrosphere)다. 이 시기가 유니버스의 시대다. 세 번째는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지방적인 ‘거품’인데, 이 세계는 다구체(plural spheres)이다. 거품처럼 여 러 개의 구체가 서로 경쟁하고 다투고 협력한다.
여기서 거품은 브루노 라투르의 ‘임계영역’과도 비슷한 이미지로 상상된다. 거품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지구의 국소적인 매우 얇은 막 또는 스킨인데 그 위에서 공생이 이뤄지고 있는 지대다. 생물권은 바로 여기서 형성되고 그래서 인간은 단지 이 지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깊숙이 함께 얽혀들어 있다. 라투르는 이곳의 과학실험이 사고실험이 아니라 사고전시(실험이 과학자들만 의 용어를 연상시킨다면 전시는 예술과 정치, 과학과의 융합을 떠올리게 한다)라며 모든 학제간 연 구자들이 함께 모여 결과를 전시하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가이아 안에서의 행위자 네트워크의 현장이 될 수 있다고 강변한다.
라투르는 그래서 자신의 역사성은 공간성으로 흡수되고 있다고 말한다. “역사철학은 공간철학 (가이아정치학, Gaiapolitics)이라는 더 이상한 형태가 동반된 지리정치학)의 특이한 형태로 흡수되고 있다” )는 게 라투르의 진단이다.
이제 로봇과 소수 사이보그 우주인들은 공상과학영화처럼 저 너머로 갈 수 있지만, 나머지 인류 는 "부패와 타락의 소굴", 또는 위험과 원치 않는 결과들로 가득 찬 곳이 된 옛날 코스모스에 여 전히 묶여있다. 이제 우리는 지상계에서 넘어갈 수도 벗어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다. 우리가 초월 적 관점(View from Nowhere)을 취하지 않고서는 지상계에 숭고한 것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유니버스에서 코스모스로 이동한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연속성과 통일성이 없어진 더 이상 자연의 숭고가 불가능해진 지상계로서의 우주다. 여기서의 우주론은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말한대로 더 이 상 하나의 구체가 아니라 거품들의 정치다. 이사벨 스텐저스는 이를 코스모폴리틱스이라고 말한다. 이런 코스모스로의 이동을 라투르는 “우리는 탈근대적(postmodern)한 게 아니라 탈자연적(postnat ural)이다”고 말한다. 라투르는 그간 ‘우리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하기에 탈근대적이 라고 할 수도 없다.
실제로 새로운 코스모폴리텍 시대에 가이아는 더 이상 자연과 비슷하지 않다. 가이아는 인간의 곤경에 무심하다. 가이아는 어머니 자연이나 여신처럼 ‘우리를 돌보는’ 것이 아니다. 가이아는 인간의 행위에 민감하지만 우리의 복지를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가이아는 우리를 제거해 박살내 고 소멸시키며 ‘복수’한다. 가이아는 자연의 수호자 역할을 하기엔 너무 연약하며, 어머니라기엔 우리의 운명에 너무 무관심하고, 여신이라기엔 거래와 희생으로 달랠 수 없는 너무 까다로운 캐릭 터다. 가이아는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모성의 대지가 아니다.
<그림4> 에이와(Eywa)가 살고 있다고 믿는 홈트리나무(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의 등장나무)
위의 사진은 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2009)에서 나비족이 신성하게 여기는 홈트리 나무는 '영혼의 나무'이며, 판도라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연결하는 여신, 에이와(Eywa)가 살고 있다고 믿는 나무다. 에이와는 나비족 언어로 '모든 이를 안는다'라는 뜻이다. 나비족의 정신적 계보는 모계신화 를 바탕으로 어머니 자연(nature mother)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기서 여신 에이와는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일체(통일성)를 유지하며 주인공 네이티리의 어머니 차히크는 나비족을 위해 에이와 여신의 신명을 받는 무당이자 여제사장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의 가이아 2.0은 이와는 반대다. 라투르에 의하면 가이아는 우연적인 양과 음의 사이 버네틱한 고리들의 집합일 뿐이다. 그런 고리들이 항상 훨씬 더 얽혀 있는 복잡한 양과 음의 새로 운 고리들을 위한 조건들을 조장하는, 전적으로 돌발적인 결과를 차례로 낳는 일은 그냥 일어난
다. 어떤 목적도, 어떤 섭리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에 관해서 걱정할 필요는 말은 아니다. 곤경에 빠진 자는 실은 가이아가 아니라 우리다. 인류세라는 수수께끼는 희한한 뫼비우스 의 띠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그녀를 위협하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녀를 포괄하고 있는 듯 보이 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녀 밖으로는 아무데도 갈 곳이 없기에 어느 순간 그녀가 우리를 포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의 가이아가 흥미로운 건 여기에 통일성이 전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이다. 유니버스(최소한 지상계 부분)의 연속성은 사라졌다. 이제 인류가 하나의 통일된 행위주체가 아닌 것처럼 가이아도 하나의 연속적 행위주체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가이 아도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모른다. 따라서 서로간의 대칭은 완벽하다. 라투르는 “우리 속의 가이아 또는 가이아 속의 우리, 즉 이런 기묘한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씩 합성되는 일만 남았다.” 고 말한다. 그는 “더 이상 구분될 수 없는 것(자연과 사회, 인간과 비인간 등)들을 구분하려고 노 력하는 대신, 이런 핵심적인 질문들을 제기하자. 당신이 조립하고 있는 것은 어떤 세계인가? 여러 분은 어떤 존재자들과 함께 살기를 제안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거대 석유회사, 담배 제조업체, 반 낙태주의자들, 창조론자들, 공화당원들, 그리고 소수의 인간과 소수의 자연물로 이뤄진 노드 사이 의 연결은 부엽토(humus), 인도적인(humane), 인간성 또는 인문학(humanities) 사이를 연결하는 것 만큼 흥미롭다. 지구인들은 죽어서 되돌아갈 흙과 먼지(부엽토)에서 태어나고, 그래서 ‘인문학’도 이제는 지구과학이 돼야 한다. 라투르는 이런 기조에서 2010년부터 과학적, 정치적, 예술적 표상이 라는 삼중의 작업으로 전문적인 예술가, 과학자를 훈련시키기 위해 시앙스포 주관으로 "정치 예술 (political arts)"이란 프로그램을 운영해왔고 2020년부터는 그 훈련을 임계영역에서 국소적 지구로서 ‘사고 전시’하는 중이다.
현재 우리가 가이아의 어깨—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어깨—에 매우 무거운 짐을 서로 올려 놓고
있기 때문에 모종의 거래를 할 만하다. 가이아와 우리의 운명은 매우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코 스모스에 파묻어 들어가 있는 아기 그리스도를 짊어지고 있는 성 크리스토퍼의 아이콘<그림3>이 딱 적절하게 맞아떨어진다. 라투르는 성 크리스토퍼의 그림은 과도한 짐을 짊어진 아틀라스<그림 1>보다 인류에게 더 희망적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여기서 크로스토포로스(christophoros)는 희랍어로 "그리스도를 메고 가다"는 뜻이다. 크로스토퍼
는 여행자의 수호성인이다. <그림2>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다 주는 일로 생계를 꾸리던 크리스토퍼는 "자기보다 더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알고 섬기겠다"고 선언한 이교도 거인이었다. 어느날 조그만 어린이를 메고 강을 건너는데, 물속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무거워지며 건널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인데"고 중얼거리자, 그 어린이가 말했다. "너는 지금 전 세계를 옮기 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찾던 왕, 예술 그리스도다".
가이아는 전 세계인 아기 예수며, 우리는 그 가이아를 어깨에 멘 크로스토퍼다. 그림에서 보면
크리스토퍼와 예수는 지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뫼비우스처럼 얽혀있다. 크리스토퍼는 예수의 어깨 에 예수는 크리스토퍼의 어깨에 서로 기대고 있듯, 우리는 가이아의 어깨에, 가이아는 우리의 어깨 에 지운 짐을 통해 서로의 운명이 연결돼 있다.
2. 브루노 라투르와 이자벨 스텐저스의 ‘가이아 2.0’ 세계는 코로나로 모든 것이 무너진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기후변화와 바이러스의 출현 모두 인 간 활동에 따른 결과지만 폐쇄 앞에서 ‘글로벌’이란 단어는 순식간에 힘을 잃었다. 팬데믹 속에 서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은 이제 미터법 도량형을 따르는 공간, 즉 실체 가 위치하는 곳이 아니라 갈등과 법, 기술 등의 총체적 요소가 벡터화된 곳이다.
라투르는 2017년 강연 ‘왜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닌가(Why Gaia is not a God of Totalit y)’에서 “만일 당신이 무관심한 외부 관찰자의 시선에서 보는 것이 ‘지오’라면, 경계에서 일어 나는 굉음의 부딪힘을 목격하며 그 안에 있는 상황을 ‘가이아’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3) 이는다운 투 어스(2017)에서 또 다른 표현으로 중복돼서 설명하기도 한다. ‘지구(the Glob e)’는 외부자의 시선 즉 인간 문제에 무관심할 정도로 멀리서 사물을 파악하지만, ‘대지(The Ter restrial)’는 같은 사물을 가까이서, 인간의 매사에 매우 내밀하고 민감하고 빠르게 반응하면서 관 찰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적 영향을 회복하고, 재방향설정하는 데 필수적인 메타포이자 민감성인
‘알고자 하는 욕망(libido sciendi)’이다.”(14장) 여기서도 전체가 아닌 ‘부분’이 강조된다. ‘부 분’에 대한 논의는 메릴린 스트래선의 개념을 생각나게 한다. 그녀는 부분하면 바로 ‘전체’를 떠올리는 ‘메레오그래피mereography’란 개념 대신 생물학 용어인 ‘부분할部分割’ 즉 ‘메로 그래피merography’라는 새로운 용어를 창안해서, 그것으로서 전체로 회수되지 않는 부분을 논한 다. 스트래선 역시 ‘신체를 초월해 전체를 내려다보는 시야’를 문제시하고, 세계에 대한 앎을 완 결적으로 닫는 게 아니라 닫힌 전체를 절개해 앎을 무한히 생성하는 행위를 중시한다. 여기에서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전체일 수 없으며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부분들 사이의 상호 관계로 대체된 다.24)
라투르의 ‘대지(The Terrestrial)’는 단지 인간이 거주하는 환경이나 배경을 의미하는 것이 아 니다. 그것은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다. 지구가 안정적일 때 사람들은 영토를 소유가능하다고 생각 하고 땅 위에서 자신들이 영원할 거라 믿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영토 자체가 인간과 맞서고, 인간 생활에 관여한다. 라투르는 생태학이 ‘대지’를 엄밀히 정의내리지 못한 결과, 19세기 이후의 사 회 투쟁에서 발생한 변화의 정치적 동력을 생태로까지 끌어내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이런 라투르 의 대지 이론은 신유물론자 로지 브라이도티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는 포스트 휴먼에서 대지로서의 정치적 행위자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우리는 주체(subject)를 인간과 우 리의 유전자적 이웃인 동물과 지구 전체를 포괄하는 횡단체(a transversal entity)로 시각화(형상화) 해야 하며 이해할 수 있는 언어 안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차크라바르티와 나는 지구중심적 관점(g
23)“오늘날 러브룩이 말한대로, 가이아는 복수를 한다. 그의 ‘복수하는-가이아(Gaia-The-Vengeful)’란 구절 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마굴리스가 말한다. “생명은 행성 수준의 현상이며, 지구는 적어도 30억년동 안 살아왔다. 내가 볼 때 인간이 살아있는 지구를 책임지겠다고 말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그것은 능 력은 없으면서 말로만 떠드는 것과 같다. 우리가 지구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우리를 돌보는 것이 다. 혼란에 빠진 지구를 올바로 이끌라거나 병든 지구를 치유하라는 우리의 주제넘은 도덕적 명령일 뿐이
다. 우리는 오히려 자지 자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202-203쪽) 그리니 처음으로 해야 할 일 즉 우리를 스스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가이아를 전체성의 신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신 또는 다른 전체성, 다른 구성물, 차라리 다른 ‘가이아-‘퇴비(compost)’가 있을지 모른다.” 이런 복합적인 비선형적 커플링은 부분적으로만 일관된 전체를 이루고 있으며 전체론적이지 않은 연결만을 추구하고 있 다. (라투르 ‘왜 가이아는 전체성의 신이 아닌가’)
24) 차은정, “21세기 사상의 최전선-전체론으론 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나: 메릴린 스트래선”, 《경향신 문》, 2019년 9월 24일자,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9092401031612000001.
eo-centred perspectives), 생물학적 행위자에서 지질학적 행위자(geological agents)로의 인간의 위치 변화가 주체성과 공동체 개념 모두에서 재구성을 요청한다고 결론짓는다.”25)
그녀는 이를 통해 ‘지구-되기’를 요청하고 있다.
결국 포스트휴먼-되기는 공유된, 세계 영토적 공간에 대한 우리의 애착과 연계 의식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다. 그 공간은 도시적 공간, 사회적, 정신적, 생태적, 지구행성적 공간일수도 있다. 포스트휴 먼 이론에서 주체는 비인간(동물, 식물, 바이러스) 관계들의 관계망에 완전히 잠겨있고, 내재돼 있 는 횡단적 존재다. 자아는 사실 공통의 생활공간 안에 있는 이동 가능한 배치이며, 주체가 결코 장 악하지도 소유하지도 못하고(never masters nor possesses) 단지 늘 하나의 공동체, 묶음, 집단, 무리 로 거주하고 횡단만 하는(merely inhabits, crosses) 것이다.
생기론의 이 비본질적 유형은 합리적 의식의 오만한 기세를 꺾는다. 합리적 의식은 수직적 초월 행 위기는커녕 급진적 내재성에 접지하는 운동으로 재설정되고 하강한다. 의식은 자아를 세상으로 펼 치는 행위면서 세상을 안으로 접어들이는 행위다. 의식이 사실은 자신의 환경과 관계맺고 타자와 관계를 맺는 또 하나의 인지 양태라면 어쩔 것인가?
의식이 이 생명, 이 조에 우리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우리를 움직이는 비인격적 힘에 대한 처 방전을 끝까지 찾지 못한다면 어쩔 것인가. 포스트휴먼 사유는 인간중심적(anthropocentric) 세계도 아니고 의인화된(anthropomorphic) 세계도 아니며 지정학적(geo-political)이고 생태지혜적 (ecosophical)이며 조에중심적(zoe-centred) 세계 안에서 우리가 몸담는 복잡성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줄 방법이다.
브라이도티나 라투르의 이론은 기존의 생태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수직적이고 초월적인 행위가
아니라 급진적 내재성으로 접지하고 안으로 접어드는 행동이다. 그래서 라투르의 지구 안 임계영 역의 실험은 의미있다. 브라이도티는 심층생태학을 주창하는 아르네 네스나 제임스 러브록의 가이 아 가설에 대해 그것이 총체성을 되살리고 지구 전체를 하나의 신성한 유기체로 보는 개념으로 복 귀하는 이론이라며 거부한다. 그녀 생각에 네스와 러브록의 전체론적 접근과 그것이 기반을 두고 있는 사회구성주의적 이원론은 문제적인데, 이들은 지구를 산업화에, 자연을 문화에, 환경을 사회 에 대립시킨 후 자연 질서의 편을 들기 때문에 소비주의와 기술관료적 이성과 기술문화를 과도하 게 고발한다. 그 사이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이 극복하고자 하는 그 이분법, 즉 자연과 인공(기성품) 사이의 범주적 분리를 재기입하기 때문이다.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디자인이 없었던 초기 시절에 제임스 러브룩과 린 마굴리스이 처음으로
제시한 가이아 가설(1979)은 그간 지구에 대한 진지한 담론을 촉발시켜왔지만 브라이도티가 본 이 들의 이론은 한계를 갖는다. 대신 그녀는 “지구와 지구 타자들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브라이도 티, 변신, 491쪽)시키며 포스트휴먼 즉 ‘지구-되기'에 대한 들뢰즈적 요청을 재확인한다. 인간중 심주의적 습관의 결과가 지구를 전지구적 환경 위기로 몰고 가버린 현재 인류세의 시대에, 브라이 도티는 주체성이라는 관념을 인간, 비인간 그리고 지구 전체를 포함하는 횡단적 존재자로서 다시
25)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108쪽.
표현하기를 제안한다. 지구를 횡단하는 모든 존재는 모든 종에 공통적인 비인간적 생성력과 활력 으로 간주되는 ‘조에(zoe)’의 생명체다.26) 브라이도티는 지구행성적 관점으로의 탈-인간중심주의적 선회는 ‘인간’의 동물-되기와는 전혀
다른 규모의 개념적 지진이라며 지구를 중심에 두는 주체는 어떤 모습일까를 묻는다.
문제는 브라이도티의 말대로 심층생태적 가이아가 문제가 있는 개념이라면 라투르는 왜 하필 지 금, 지구 라는 용어 대신 심층생태적 가이아를 다시 왜 소환하는 것일까. 그가 진화생물학자 린 마 굴리스(Lynn Margulis)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재검토하기 때문이다. 마굴리스의 공생설은 인간만이 지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함께 서로 진화한다는 이론이다. 그녀는공생자 행성 에서 공생자로서의 지구에 대해서 말한다. 공생자로서 가이아에서 만물은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인식은 점차 더 현대적으로 변해 사물에 대한 해석과 더불어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에 와서는 ‘세속 가이아(secular Gaia)’(Facing Gaia, 2013) 이론으로 프랑스 철학자 이자벨 스텐저스 (Isabelle Stengers)의 ‘침입자 가이아(Gaia the Intruder)’ 이론으로 인류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가
이아 형상화로 탈바꿈하고 있다. 라투르와 스텐저스는 기후 변화가 더 이상 진행되기 전 인류가 벌 수 있는 시간을 위한 거울로서 가이아의 모습을 활용한다. 클락(2017)은 러브룩과의 오래된 공 조 속에서도 마굴리스만의 독특한 상호침투적인 ‘자기 생성적 가이아(autopoietic Gaia)’ 이론은 비전체론적이고, 이질적이지만 일관된 가이아 개념에 대한 스텐저스와 라투르가 추구하는 인류세 시대의 정치적 의사소통방식에 효과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다고 설명한다.27) 아마도 알려져 있 는 가장 간단한 자기생성적 개체가 박테리아 세포라면, 가장 큰 자기생성적 개체는 가이아일 것이 다. 세포와 가이아는 생체의 속성을 보여준다. 가이아 안 시스템은 생물과 비생물의 협력에서 비롯 되며 그래서 전통적 사회과학적 구분을 무너뜨린다.
라투르의 가이아는 지구의 항상성과 안정성을 유지하며 인간이 살아갈 터전을 보살펴주는 자애
로운 어머니 여신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광포하고 잔인한, 비인간적인 힘으로 묘사된다. 인간의 무분별한 활동이 지구의 항상성을 회복불가능한 정도까지 몰고 가는 순간, 과거 공룡 등 다른 생명체들을 멸종시켰던 무자비한 가이아가 깨어난다. 세속적 가이아는 새로운 형태 의 지구중심주의를 갖고 온다. (Latour, 2013 :64) 우리는 현대 과학의 여명기에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 서구 세계의 우주 개념의 중심에서 지구를 단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으로 쫒아냈음을 기억한
다. 이제 가이아 이론은 지구의 우주 중심성을 다시 인정하는 신지구중심주의를 세속적 방식으로
26)“차크라바르티(Dipesh Chakrabarty, 2017)는 지구화 이야기가 본질적으로 인간중심적이라고 지적하면서, 지구시스템이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적(Homocentric, anthropocentrism) 사고에서 생명중심적(Zoecentric, non-anthropocentrism) 사고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차크
라바르티가 말하는 ‘생명중심적 사고’는 비인간 존재들까지도 지구시스템의 일원에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구적 사고’(global thinking)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조성환⋅허남진, [공공학-공공철학] 학 문의 지구적 전환, <더퍼블릭뉴스>, 2021년 1월 15일,http://www.thepub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 no=16788. 여기서 조성환⋅허남진은 조에중심주의적 생명체에 대한 차크라바르티의 이론을 소개한다. 조 에중심주의는 라투르, 차크라바르티, 브라이도티, 등의 신유물론 학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이론이 되어가 고 있다.
27) Bruce Clarke, Rethinking Gaia: Stengers, Latour, Margulis, Theory, Culture & Society, Vol. 34(4) 3–26, 2017.
불러온다. “위에서 보았을 때 지구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큰 수프와 같다.” 가이아 안에서 일어나 고 있는 미생물의 이동성은 ‘애니매이션’이다. 보이지 않는 캐릭터는 가이아의 행성 외피를 통 해 퍼지는 무수하고 무한한 미생물의 복합 기관이다. 파스퇴르의 경우 효모없이는 발효하지 못하 며 이 과정이 맥주, 포도주, 식초를 만들어내듯, 가이아 안에서도 공기, 물, 불, 흙을 휘젓는 유기체 안에서 미생물이 화학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가이아의 생물 정치 속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또는 인 지적 지구 생물권 내에서 수평적 관계로 돌아왔다.
이자벨 스텐저스는 재난적 시대에서: 다가오는 야만주의에 대항하기(In Catastrophic Times : R
esisting the Coming Barbarism, 2015)에서 인류를 초월한 가이아의 행성적 자율성에 주목한다. 그는 자본주의 산업의 추출적 활동이 가이아를 자극하고 현재의 예측할 수 없고 빠르게 진화하는 '침입' 모드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폭주하는 인간의 자원 추출에 대항해 스스로를 유지하려는 비인간은 참지 못하고 있다. 스텐저스가 말하는 가이아는 현대 인간 활동을 협박하고 저항한다. ‘가이아는 간질간질(Gaia is ticklish)하다’고 정체 불명의 목소리가 선언한다. “우리는 가이아의 참을성에 의 존하고 있다. 참지 못함을 조심하라”(2011:164) 이 가이아는 코스모폴리티컬한 비유며, 생태적 폭 력에 대한 저항의 개념 자원이다. 스텐저스는 “가이아의 이름을 지정하고 다가오는 재난을 침입 으로 특성화시키는 것은 실용적인 이유에서다”며 “이름을 짓는 것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힘을 부여한다”고 말한다. 가이아는 콘 크리트 속의 지구가 아니며, 생활하고, 고군분투하고, 느끼고, 생각하는 자원이다. “가이아는 우리 의 목적에 무신한 힘들의 간지러워하는 집합체다.”
여기서 라투르의 ‘애니메이션 가이아’와 스텐저스의 ‘간지러워하는 힘의 집합체인 가이아’ 는 순전한 물질적 역동성과 민감성을 드러내는데 효과적인 수사학이다. 간지러워하는 가이아는 발 작을 일으키기 쉬우며 고통스러워한다. 인류세 시대의 가이아는 우리의 행동에 민감해하며, 우리도 그에 대응해 ‘조심스럽고 민감해져야 한다.’
3. 임계영역에서의 사고 전시를 통한 주체의 지구-되기 라투르는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 상황을 ‘신기후 체제’로 명명하면서 생태 적 위기 뿐 아니라 정치문화사, 관점의 윤리적, 인식론적 변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학자들 은 예전에 지구정치에 대해 논할 때는 물질이나 영토에 대한 점유를 위한 국가간의 싸움이었다. 오늘날 지구정치는 거주할 수 있는 땅 자체에 대한 정의에 대한 전쟁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전 체성이 아닌 부분적 연결, 국소적인 영역인 임계영역(크리티컬 존)에서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만 으로도 새로운 비평의 근거가 생긴다. "임계 영역(Critical Zone)"이라는 용어는 지구 과학에서 따온 것으로 생명이 생성되는 표면인 지구의 생화학적이고 깨지기 쉬운 층을 설명한다. 라투르에 의해 이 용어는 지구 역사상 전례 없는, 살아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관계로 확장됐다.
그 점에서 브루노 라투르는 임계영역에서의 지도그리기를 시도한다. 그는 “인류세의 싸움은 국 제지질학회 같은 관료주의 내에서 복잡한 결정을 통한 해결도 필요로 하지만, 각 임계 영역이 인 간의 이미지를 강력한 지구형태변형적 힘으로 제공하여 우리에게 지형학의 새로운 이미지 즉 지형 학적 인간의 이미지를 제시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애나 칭의 “폐허 속에 살다(living in the ruins)”라는 표현을 빌려와, 세한도처럼 늘 영속하기에 숭고한 자연이 아닌 포스트자연 속에 살고 있는 인류가 만들어가야 할 새로운 지구이미지를 강조한다.28)
그가 보기에 첫 번째 지구(Globe)는 우주에서 바라본 유명한 푸른 행성의 이미지다. 그러나 임계
영역에서 본 두 번째 지구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작고 연약하며 평형과는 거리가 멀다. (‘임계 (critical)’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기도 하다). 지구는 외부적이며 영속적이고 단일하게 전체적인 ‘지구로만’ 간주되는 게 아니라 내부적이며, 논란 많고 다층적이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얽혀있
는 존재태(intermingling entities)으로 간주되는 일종의 간지러운 피부다. 라투르는 이런 이미지의 대조를 표현하기 위해 사람이 탈착 가능한 장신구처럼 지구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분리될 수 없는 방식으로 지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 지구인 형제자매(the Earthlings), 지구에 뿌리내린 존재들(the Earthbound), 인류세의 부모자식들은 자연(nature)에서 태어나 상징과 사회의 세계에서 졸업하는 게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 지 우리의 모든 삶을 퓌시스(physis), 즉 우리가 꿈에서도 절대로 빠져나오거나 탈출할 수 없는 그 런 퓌시스 한가운데서 보낸다. 이것이 바로 인류가 지구 ‘위’가 아니라 지구 ‘안’에 있다는 의미다.
라투르가 자꾸 차크라바르티와 함께 논의를 기존의 전통적 역사철학에서 공간적이고 지구(지리)
정치학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계의 발견자들은 이제 공약가능하지 않은 여러 행성으로 흩어졌다. 라투르는 세계World도 글로브Globe도 지구Earth도, 글 로벌Global도 아닌, 가이아(Gaia), 또는 대지적(Terrestrial)라는 단어로 이를 대체하고자 한다.
임계 영역에서는 비인간 및 인간 행위자의 네트워크는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하수 슬러지 과정에 서 여러 노드는 인간의 미생물 군집과 다양한 종류의 해양 및 육상 서식지가 포함된다. 임계 영역 은 우리의 서식지일 뿐 아니라 더 나은 비인간 동거를 위한 접촉 구역(contact zones)이다.
예술가들의 전시 공간은 헤게모니 지식 형성의 해체, 변형 및 이동을 위한 잠재적 공간으로 기 능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예를 들어 예술가 크리스티나 그루버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거주 하고 일하는 예술가이자 담수 생태학자이다. 그녀는 예술과 과학의 교차점에서 일하면서 우리 세 계를 형성하는 사회 현상을 다룬다. 지난 몇 년간 물이 그녀에게 특별한 관심사였는데, 지구상의 모든 존재자가 공통적으로 가진 요소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Water Bodies>에서 강은 물벼룩이나 철갑 상어와 같은 원시 물고기와 같이 그 안에 사는 모든 유기체와 생물 모두를 의미한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에 그루버는 과학적으로 무한한 관계와 그 주기를 돌보며 연구한다. 그 는 팟캐스트에서 예술가와 함께 미시시피의 무인 늪지대와 다뉴브 해역의 다양한 지역을 여행한 경험을 나누며 인간이 풍경에 미치는 영향과 지구 표면의 모양을 조사한다.
28) Bruno Latour, “Is Geo-logy the new umbrella for all the sciences? Hints for a neo-Humboldtian university”, the Cornell University, 25th October 2016.
라투르가 차크라바르티, 도나 헤러웨이, 이사벨 스텐저스, 피터 바이벨 등의 학자와 예술가와 작 가들과 함께 참여하고 칼스루에 대학이 주관하는 이 ZKM 예술 및 미디어 센터의 2020 전시는 기 후 변화에 직면한 세계의 방향 감각 상실을 묘사한다. 전시도록에 실린 텍스트와 500여개의 삽화 는 인간이 착륙할 수 있는 새로운 풍경을 탐구한다. 임계 영역이든, 가이아든, 대지의(terrestrial)이 든 뭐라 부르던 간에, 지구 안에서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을 향한 재설계된 지정학적 갈등과 도구 를 찾는다. 이 “생각 전시”는 새로운 기후 체제를 탐구할 수 있는 가상 공간을 열어준다.
Ⅲ. 맺음말
위에서 살펴본 조선의 홍대용과 프랑스의 브루노 라투르란 두 사상가의 지구적 관점 전환은 동
서양과 250여 년의 시간차(밀레니엄의 4분의 1)를 두고 일어난 일이지만, 우리가 사는 지구에 대한 관점 전환이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정치적 혁신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입장에 서 있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가 바뀔 때마다 사회 질서의 혁명이 이어졌다. 갈릴레오 사건을 볼 때 과 학자들이 지구를 태양 주위로 움직이게 만들었을 때 사회의 전체 구조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느꼈 다.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지구의 역할과 위치는 ‘신기후체제’라는 새로운 과학에 의해 격변 한다. 인간의 행동은 지구 스스로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밀어 붙였고 다시 한번, 사 회의 전체 조직이 전복됐다. 우주 질서를 흔들면 정치 질서도 흔들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 는 땅은 두 가지 다른 정의를 갖는다. 우리가 국민으로서 권리를 얻는 주권 국가라는 땅 이외에 거주하고, 숨쉬는 땅이다. 우리가 거주하는 땅은 지구 또는 초월적 관점에서 보는 “푸른 대리석” 이 아니라 일련의 부분적이고 국소적인 그래서 거칠고 불연속적인 임계 영역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주체의 지구-되기며, 다른 이질적 존재자를 만나는 민감성 그리고 공생성이다.
홍대용은 리와 태극의 전체성의 하늘이 가진 위계적 관점을 벗어나 자연천의 관점에서(天視) 본
시점으로, 인간보다 더 우월할 수 있는 비인간을 상정하며 그 상호관계망에 대해 논했다. 이는 브 루노라투르가 크리티컬 존에서 얇은 피부에서 생물권이 공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고 서로를 스승삼아 배우는 그런 생태계와 상당히 유사하다. 라투르의 지구적 전환이 고대 코스모스에서 갈 릴레오 사건이 일으킨 서구 근대 과학적 지구(유니버스)로 갔다가 다시 인류세 시대의 지구중심적 사고로 돌아온 신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면, 홍대용이 일으킨 지구적 전환은 고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고전적 코스모스에서 명시적으로 인간-자연의 구분을 없앤 ‘천인물합 일(天人物合一)’ 코스모스로의 이동이라는 점에서 서구적 전체성의 유니버스로의 단계를 생략했다 는 특징이 있다. 특히 ‘활물(活物)’로서의 만물이 동등한 서열을 갖고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공생을 추구하는 홍대용의 새로운 정치생태학(코스모폴리틱스)은 서구 근대가 추구한 단일화되고 전체화된 과학(Science)의 독주로부터 벗어나 만물이 역동적으로 자기 행위성을 다시 찾으려고 하 는 라투르의 부분적인 여러 지구-이야기(geo-stories), 여러 과학들(sciences)이 가고자 하는 돌파구 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여러 개의 과학으로, 하나의 구체가 아니라 여러 개의 거품 즉 다중구체로
이것이 브루노의 목표다. 라투르의 가이아를 마주하며Facing Gaia(2013)는 책은 라투르가 페터 슬로터다이크(2013)에게 헌사한 책인데, 라투르는 그곳에서 페터가 제시한 인간 면역의 수정궁을 위해 이렇게 제안한다.
얽힌 루프에 대한 높은 민감도 없이는 면역학이 불가능하다. '미미한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거나 대 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파멸이다. 어떤 이유로든 이 루프를 중단, 삭제, 배경, 감소, 약화, 거부, 모 호화, 연결 해제하는 사람들은 무감각한 정도를 넘어 범죄자다. 우리의 우주적 결합이 일어나는 가 이아 중심에서, 우리는 시스템의 얽힘(systemic entanglements)에 예민한 생물 정치적 동물이 되야 한다. 이 새로운 가이아 담론의 모습이야말로 가이아 존재의 직관에 적합한 행성의 상상력을 배양 한다.
참고문헌
關尹子
湛軒書
역학도해 열하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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