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지구교육학】세계시민에서 지구시민으로-지구위험시대에 따른 교육의 방향전환- 이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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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문 세계시민교육은 현존하는 지구촌의 문제들을 더 이상 단일국가 시민성에 기초한 근대적 시민
교육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아래 주창된 교육이다. 이 세계시민교육은 ‘세계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과 책임감’ 즉 ‘세계시민주의’을 양성을 목표로 하며, 그 이념은 세계주의(Cosmopolitanism)나 세 계시민성(Cosmopolitan citizenship)의 관념에 바탕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주의나 세계시민성의 이념에는 그것 을 주창했던 스토아학파(Stoics)나 칸트(Kant), 페인(Paine) 등과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입장에서 볼 수 있듯, 서구유럽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유에 기반하고 있다는 그 한계점에 대해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
다. 세계시민성의 이상은 비서구 세계를 서구의 문명 세계로 인도하는 유럽인들의 역사적 사명의 확장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국의 확장을 정당화하는 스토아학파의 세계시민주의가 이후 칸트(Kant), 페인(Paine) 등과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입장에 의해 보완되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유럽식 민족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분파주의적 이념(sectarian ideology)에 불과한 것이다. 다음으로, 세계시민주의는 인간중심주의에 함몰 하여 비인간적 존재들을 포섭하지 못하고 있다는 약점이 있다. 인간과 만물이 하나 의 공동체를 지향해야하 는 이 지구위험시대에 있어서 명백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이제 교육은 서구유럽중심적 이고 인간중심적인 세계시민주의를 넘어 인간과 만물이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지구시민주의를 향해야 할 것이다. 인간을 넘어 다른 존재들에 대한 도덕적·정치적 의무를 다하는 지구시민주의의 교육이 이루어 질 때, 인간 자신의 생존도 보장될 수 있음을 유념하면서 말이다.
차 례
Ⅰ. 머리말
Ⅱ. 고귀하지만 결함이 있는 세계시민교육
Ⅲ. 지구시민교육
Ⅳ. 맺음말
* 공주교육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현재 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 19(Covid-19)의 세계적 대유형과 이상기후는 진정 ‘나비효과(Butt erfly Effect)’를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사건들이었다. ‘나비효과’는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 (Edward Lorenz)가 1972년에 개최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예측가능성: 브라질에서 벌어진 나비의 날개짓 한 번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키는가?”라는 글에서 기원된 용어이다. 그는 이 발표에 서 다음의 두 가지 가설을 내세웠다.
1. 만약 나비의 날개짓 한 번이 토네이도의 생생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또한 그 이전과 이후의 날개짓도 토네이도의 발생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수백만 마리의 나비들의 날개 짓은 물론이고, 우리 인간을 포함하여 수많은 생명체들이 일으키는 나비의 날개짓보다 강한 활동들 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2. 만약 나비의 날개짓 한 번이 토네이도 생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똑같이 토네이도 예 방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1)
물론 로렌츠는 ‘나비효과’라는 용어를 통해 기상변화의 측면에서 카오스이론에 대해 이야기하 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용어는 지구생태계(ecological system)의 특성을 고스란히 설명해주 고 있다. 즉, ‘지구라는 거대 체계에서 모든 존재들은 비록 표면화되지는 않더라도 차후 엄청난 결과를 발생시킬 수도 있을만큼 긴밀한 상호연결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로렌츠는 첫 번 째 가설에서 ‘나비의 날개짓이라는 미세한 활동도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보다 강한 인간의 활동들은 지구에 토네이도에 비할 수 없는 더 엄청난 결과들을 가져올 수 있음’을 논의하고 있다.
그의 이 첫 번째 가설은 곧장 “더 이상 홀로세(Holocene, 現世)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말자. 우리 는 더 이상 홀로세에 살고 있지 않다. 우리는 인류세(Anthropocene, 人類世)에 살고 있다”2)는 파 울 크루첸(Paul J. Crutzen)의 단언을 떠올리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인류세는 ‘인간을 의미하는 A nthropos’와 ‘새로움의 의미하는 Cene’이라는 두 그리스의 결합어로, 인류의 활동이 지구 환경 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새로운 지질시대’를 의미한다. 이전까지 각 지질시 대를 구분하게 만든 근원적 동력은 자연이었으나, 인류세라는 지질시대는 인류가 지질학적 흔적의 주 창조자인 것이다. 하지만 이 인류세를 맞이하여 인간은 지구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주 동력이 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자기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있다는 점이다.
1) Edward N.Lorenz, The Essenc of Chaos(EBook edition), the Taylor & Francis e-Library, 2005, p.179. (*강조는 인용자가 표시, 이하 동일)
2) Christian Schwägerl, The anthropocene:the human era and how it shapes our planet, Synergetic Press, 2014, p.9.
현재의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은 그러한 인류세의 전형적인 사태이다. 총, 균, 쇠의 저자 제 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가 지적했듯이, 과거에는 각자의 확동 영역에서 벗어나지 않던 바 이러스가 인간의 활동으로 생태계의 각 영역이 붕괴됨에 따라 기존의 경계를 넘어 인간 자신을 위 협하게 된 것이었다. 바로 코로나 19는 인수공통감염병(人獸共通感染病, zoonosis)으로 천연두, 인플 루엔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 에이즈와 마찬가지로 동물에게서 인간으로 확대된 바이러스 질병이다. ) 여기서 다이아몬드는 “장기적으로 봤을 때 코로나19보다 기후변화가 더욱 심각한 문제라면서, 환경 파괴가 심각해질수록 코로나와 같은 질병의 확산에 더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고 대기질, 가뭄과 홍수, 농업 등과 같은 여러 부분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 다시 말해, 코로나19 사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이례적인 사건인 블랙스완(Black Swan)이 아니라, 인류세 있어서 자주 접하게 될 뉴노멀(new normal)이요, 앞으로 맞이하게 될 더 커다란 기후위기의 리허설(rehearsal)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인류세의 위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의 실마리는 ‘나비효과’
의 두 번째 가설에 나와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뻔한 말이겠지만, ‘나비의 날개짓이 그 원인이지만 똑같이 예방이 도움이 될 수 있듯이’, 인류세의 사태는 인간 자신에게서 그 예방을 찾아야만 한 다. 다이아몬드의 조언처럼 “코로나 19로 전 세계인 한 배에 탔으며, 같이 살든 같이 죽든 한 몸 이며, 지구적 차원의 협력”5)을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인류 문명이 만들어낸 위험 앞에서 그가 요 청하는 ‘지구적 차원의 협력’은, 울리히 벡(Ulrich Beck)이 지적한 것처럼 당위적 상황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인류의 실존적 상황’이다. 벡은 ‘근대성의 사회 체계가 위험을 생산했음에도 그 위험성을 계산하지 못하는 위험천만한 산물로 인해 의도치 않게 세계시민주의에 의존하는 상황이 도래한다’고 주장하였다. ) 그의 말대로 인류는 전 지구적 위험이 닥쳐서야 비로 소 반사적으로 성찰하여 ‘세계시민주의(cosmopolitanism)’에 의존하여 지역적 경계를 넘어서는 세계시민성을 요청하게 되었으며, 교육 또한 ‘세계시민교육(global citizenship Education)’으로의 전환(pivot)을 요청하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세계시민교육을 “학습자들이 보다 정의롭고 평화적이며 포용적이고 안전하며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든 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식, 기능, 가치관, 태도를 길러주고자 하는 교육 패러다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 좀 더 간단히 말하면, ‘세계시민교육은 학습자에게 세계시 민성(global citizenship)을 길러주는 교육 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이와 같은 세계시민교육 의 가치와 이상은 분명히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세계시민교육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지구위험의 시대에 명확한 한계를 지니 고 있다’고 말하고자 한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바로 그 지점이다. 세계시민교육은 사실상 세계시 민주의와 세계시민성에 바탕하고 있다. 하지만 그 교육은 세계시민주의와 세계시민성이 내포하고 있는 본질적 속성으로 인해 이 지구위험시대’에는 명확한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2장에서는 그러한 세계시민주의와 세계시민성의 속성과 한계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다. 다음 3장에서는 지 구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인류 자신의 종말을 향해가는 지구위험시대를 맞이하여, 세계시민교육의
대안으로서 ‘지구시민교육(Earth/Planetary citizenship Education)’을 제안하고자 한다. 3장에서 살 펴보겠지만, 지구시민교육이란 ‘지구인(earthling)으로서의 책임과 역량을 길러주고자 하는 생태학 적 시민교육 패러다임’을 말한다. 마지막 4장 결론에서는 앞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고 남은 문 제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Ⅱ. 고귀하지만 결함이 있는 세계시민교육
세계시민교육이 교육의 주요담론으로서 부각되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2012년 9 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주도하는 ‘세계교육우선구상(Global Education First Initiative)’ 선
언과 함께 이루어졌다. ‘교육이 우선’이라는 세계교육우선구상은 ‘모든 어린이의 취학, 교육의 질 제고’와 더불어 ‘세계시민성 함양’을 3대 목표로 하고 있었다. 더불어 세계교육우선구상은 ‘세계시민성 함양’을 ‘사회에 환원하는 공통체 의식과 적극적인 소속감을 기르는 것’이자 ‘남녀 불평등, 따돌림, 폭력, 외국인 혐오, 착취를 포함한 모든 형태의 차별이 학교에서 사라지도 록 하는 것’으로서 규정하였다. ) 이와 같은 세계시민성의 함양은 2015년 5월에 개최된 유네스코 ‘세계교육포럼(World Education Forum)’의 핵심주제로 선정되고, 같은 해 9월 유엔 세계정상회의 에서 채택한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가운데 하나로 선정됨에 따 라, 세계시민교육이 주요한 교육담론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바로 세계시민교육은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공통된 문제들을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발전 이 이루어지는 미래사회를 모색하기 위해, 학습자에게 ‘세계시민성’을 함양하는 것을 목표로 하 는 교육이다. 유네스코는 이 세계시민교육이 ‘맥락과 지역 및 공동체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 으로 적용될 수 있겠지만, 세계시민성의 함양을 위해서 학습자들에게 다음의 5가지 공통 역량들을 길러내야 할 것’을 요청하였다.
○ 다면적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개인의 문화,, 종교, 인종 및 기타의 차이를 초월하는 ‘집단적 정 체성’의 잠재력에 기초하는 태도
○ 세계적 문제와 정의, 평등, 존엄, 존중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대한 깊은 지식
○ 서로 다른 차원과 관점 및 각도에서 문제를 인지하는 다중접근방식을 채택하여 사고하는 것을 비롯하여, 비판적, 체계적,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인지적 기능
○ 서로 다른 배경, 출신, 문화 및 관점을 가진 사람들과 상호하기 위한 공감과 갈등 해결과 같은 사회적 의사소통 기능과 태도를 포함하는 비인지적 기능
○ 세계적 과제에 대한 세계적 해결 방안을 찾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자 협력하고 책임감 있게 행 동하는 행동 역량9)
여기에서 보다시피, 세계시민교육은 학습자에게 국민국가의 시민의식에서 벗어나 ‘인류공동 체’에 속해있다는 소속감과 책임감을 길러주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 한 기능과 역량을 발달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시민’의 의미를 배타적이고 편협한 ‘국민 국가수준의 정체성’을 벗어나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적 수준으로 확대한 것이다. 하지만 세 계시민교육이 키워야 할 역량으로서 ‘지구상에 있는 비인간존재들과의 공존’을 명시적으로 말하 지 않는다. 바로 세계시민교육은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 근본적으로 바탕하고 있다. 예컨대, 세계시민에서 요청하는 ‘정의, 평등, 존엄, 존중과 같은 보편적 가치’도 인간의 관계증진을 위한 가치인 것이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증진을 위한 가치는 아니다. 그 점에서 세계시 민교육은 인류가 마주하고 있는 지구위험시대에 분명한 한계를 내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지구 위험시대는 세계시민교육이 토대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가 파생시킨 생태적 위험시대’이기 때 문이다. 다시 말해,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나 존재들을 인간의 번영을 위한 도구적 가치에 불 과하다’는 그 불미스러운 ‘서구유럽의 사유방식’에서 지금의 지구위험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 다.
세계시민교육이 서구 유럽의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일 수 없는 것은 ‘그 교육이 세계시민주의’
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C. Nussbaum)은 “철저히 인간중심주의적이며, 전형적으로 존엄성의 핵심을 도덕적 추론능력과 선택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두고” 있다고 평가 한다.10) 물론 그녀는 “세계시민주의 전통이 수많은 현대의 윤리적 주장이 다가가고 있는 결론들 에 보다 깊이 있고 원칙에 입각한 명분을 제공”한다는 우수성을 지님을 인정한다.11) 하지만 그녀 는 세계시민주의 전통이라는 자신의 저서 부제목을 ‘고귀하지만 결함있는 이상’이라고 할 만 큼, 세계시민주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녀는 세계시민주의의 가장 심각한 잘못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9) UNESCO(2014), Ibid., 9
10) 마사 C. 누스바움(2020), 강동혁 옮김, 세계시민주의 전통: 고귀하지만 결함 있는 이상, 뿌리와 이파리,
297쪽.
11) 마사 C. 누스바움(2020), 281쪽.
아마 세계시민주의의 가장 심각한 잘못은 다른 종과 자연 환경에 대해 우리가 지고 있는 도덕적· 정치적 의무를 숙고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이 지구를 다른 감정이 있는 존재 들, 살아가며 번영할 자격이 있는 그런 존재들과 공유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12)
곧 세계시민주의는 ‘이성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만을 존엄하고 가치롭게 여길 뿐, 그러한
능력을 지니지 못한 ‘비인간 동물과 자연계에 대한 경멸적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녀가 주장하고 있듯이, 세계시민주의의 전통은 ‘짐승’에 대한 경멸적 대조를 통해 인간의 가치 를 옹호하여 왔던 것이다. ) 곧 ‘인간과 동물(자연계)의 대립적 인식’과 ‘인간우월주의’가 이 세계시민주의의 토대인 것이다. 그 점에서 ‘인류 전체를 넘어 자연계와의 공생과 공존 의식’이 요청하는 이 지구위험시대에, 과연 세계시민교육이 적절한 교육으로 자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지 니게 한다. 아니 세계시민교육은 ‘인간과 자연계와의 공생과 공존 의식’은 커녕 ‘인간 자신들 만의 공동체 의식’을 기르기에도 적절하지 못한 교육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계시민주의는 그 기 원에서부터 제국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 이념(sectarian ideology)으로서 자리해왔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세계시민주의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의 견유학파(Cynicism)와 스토아학파(stoicism)에서
찾는다. 주지하다시피 견유학파의 창시자인 디오게네스(Diogenes)자신을 ‘도시도 없고(a-polis), 집 도 없는(a-oikos) 우주의 시민(kosmopolites)’으로 선언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리스의 스토아학파 는 정부(politeia)는 특정 도시 국가에 국한되기보다는 ‘모든 이가 거주하는 세계(oikoumene)’ 또 는 ‘전체 우주(kosmos)’와 함께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고대 그리스 세계시민주의자들 은 모든 이들이 인종, 종교, 출신에 관계없이 단일한 형제 구성원으로서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러 한 고대 그리스의 세계시민주의적 전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키케로(Cicero) 등과 같은 로마의 스토아학파의 인물들에게 이어졌다. )
로마의 스토아학파는 ‘사람은 두 개의 공화국, 즉 폴리스(polis)와 코스모폴리스(cosmopolis)의 시 민으로 태어나는데, 이 둘 가운데 충성심의 갈등이 발생할 때 도시국가로서의 폴리스보다는 세계 도시국가인 코스모폴리스에 대한 시민의 의무가 언제나 앞선다’고 보았다. ) 하지만 로마의 스토 아학파는 폴리스의 시민과 코스모폴리스의 시민은 동일한 일을 한다면서, 하지만 시민들에게 자신 이 속한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세계시민성을 합일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보편적 이성을 지닌 인 간이라면 인종, 종교,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나 평등하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시민권을 이성을 가 진 온 인류로 확장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스토아학파가 강조한 세계시민주의의 입장은 그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로마 제일주의의 이념’ 앞에서 변질되었다.16) 곧 세계시민주의는 ‘강 력한 세계도시국가로서의 로마 제국에 대한 충성’과 ‘그 제국의 세계적 확장’에 비호하는 데 이용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변질로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로마에 대한 의무를 명시적 으로 인정한 키케로나 세네카(Seneca)의 이론과 저작은 로마인들에게 로마제국과 코스모폴리스 자 체를 동일시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로마시대의 스토아학파의 논의는 로마제국의 패권주 의를 강화시킨 이념적 기반으로 작동하였던 것이었다.17)
이후 세계시민주의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애덤 스미스(Adam Smith)와 같은 계몽주 의 사상가들에게 다시 주목받게 된다. 그들은 모두 국가를 넘어서는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 를 구상하였다. ) 먼저, 스미스는 ‘세계사회(World Society)’라는 보편적 공동체의 이상을 표출하 였다. 그는 특히 ‘시장(market)’이라는 장치를 통해 국가와 국경에 무관하게 개인들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강화시킴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이익을 동시에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헤겔 (Friedrich Hegel)은 스미스의 ‘시장을 시민사회로 재해석하게 된다. 곧 스미스의 시장이론은 헤겔 을 거쳐 ‘개인의 보편성을 근거로 형성된 세계사회(World Society)’라는 보편적 시민 공동체를 기획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
다음으로, 칸트는 ‘국제사회(International Society)’라는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를 구상하 였다. 이 ‘국제사회’는 개인들의 연합체인 스미스의 세계사회와 달리 단일한 주권국가를 구성으 로 한다. 특히 칸트는 ‘국제사회’는 인간들 사이에 자연적으로 조성되는 전쟁상태 바로 그 자체 를 통해 인간을 평화로운 법적 상태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한다고 주장하였다. ) 지속적 인 전쟁으로 인한 피로와 무기력으로 인해 개별 국가들로 하여 어쩔 수 없이 세계시민적 법체제를 만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곧 ‘국가들 사이의 합법적인 대외 관계’를 마련하는 ‘국제법의 제 정’을 통해 ‘국제사회’를 구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영구적인 평화상태를 수립’할 수 있다 고 전망한 것이었다. ) 실제로 20세기에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 s)’과 ‘국제연합(United Nations)’의 수립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칸트와 스미스의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는 현대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 다. 하지만 그 한계는 분명하다. ‘국제사회’를 대표하는 유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합법 적인 대외 관계’를 보장하는 조직이기보다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흔들리는 경우’가 허다하 다. 또 현대판 ‘세계사회’인 세계무역기구(WTO)와 같은 경우 국가들간의 상호의존성을 강화시킴 으로써 각 국가와 전 세계의 이익을 동시에 발전시키기 보다는, 강대국의 이익을 위해 저발전지역 의 희생과 배제만을 강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꿈꾸었던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의 현실판은 이토록 강대국 중심 주의의 조직으로 자리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이론과 현실의 괴리때문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하지 만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라는 칸트와 스미스의 이상 자체가 ‘서구 패권주의에 경도된 세계 시민주의’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더 적절한 답이라 할 수 있다. 분명 세계시민주의에는 식민지 국가들을 문명화한다는 사명감이 반영되어있으며, 제국주의적 팽창 의도를 은폐하는 이데 올로기로서 알게 모르게 작동되어왔다. ) 구체적으로 칸트의 「영구평화론」에 기반한 ‘세계적인 보편적 공동체(국제사회)’의 이상은, ‘식민지 국가들을 문명화시켜야 한다’는 유럽중심적 사명 감이 흠뻑 담겨져 있다. 곧 그의 세계시민주의적 계몽사상은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이자 분파 주의적 이데올로기’인 것이었다. )
이러한 면모는 칸트의 「영구평화론」(1795)과 이에 앞서 작성한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 (1784)라는 글에서 여실하게 드러난다. 그는 이 두 글에서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과 함께 ‘유 럽인과 비유럽인의 인종주의적 구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간의 최고의 완전성은 백인종에 게서 발견되며, 황인종인 인도인들은 보다 적은 능력을 소유하고, 흑인들은 훨씬 못미쳐,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가장 지체되어있다”는 식의 인종주의적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편 견은 문명화된 유럽 백인이 비유럽지역의 야만인(유색인종)을 계몽(문명화)해야 한다는 이념을 내 포하고 있었다. 바로 계몽이라는 미명아래 식민지배를 추구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 칸트는 또한 “유럽인들에 의해 인식되지 않은 민족의 역사는 미지의 영역”이라면서 유럽중심적인 사유에 함몰되어 있었으며, 유럽중심주의적인 진보사관을 설 파하고자 중국의 후진성을 강조하였다. 바로 서구유럽 중심으로 설정한 보편사적인 위계질서의 그 첨단에 유럽인을 놓고 말단에 비유럽인을 위치시켰던 것이다. )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세계시민주의는 서구(유럽)중심적인 기준을 보편성의 토대로 설정함으로
써 지역적 특수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또한 앞에서 세계시민주의는 ‘인간과 동물(자연계)의 대립적 인식’과 ‘인간우월주의’라는 치명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 한 점에서 이러한 세계시민주의에 기반한 세계시민교육은 ‘인류 전체를 넘어 자연계와의 공생과 공존 의식’을 길러 이 지구위험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적절한 교육으로 자리하기 어렵다. 그렇 다면 어떠한 교육을 말해야 하는가? 이 글은 세계시민교육이 아닌 지구시민교육(Earth/Planetary cit izenship Education)을 요청하고자 한다.
Ⅲ. 지구시민교육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지구위기의 시대에 있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시민교육이 요청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교육이 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롤스톤(Holmes Rolst on)은 이전의 교육이 ‘국가적/국제적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라면, 지금의 교육은 ‘생태적 역 량을 지닌 지구인(earthling)을 길러내는 교육’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 였다.
교육받은 사람의 특징으로 오늘날 점점 더 ‘교육받은 시민’ 이상이 되기를 요청한다. 좋은 ‘시 민’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국제적인’ 시민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 면 두 용어 모두 충분한 ‘자연(nature)’과 충분한 ‘지구성(earthiness)’을 지니지 않고 있기 때 문이다. ‘시민’은 단지 절반의 진실일 뿐이고, 나머지 절반은 우리가 대지(landscapes)의 ‘주 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인(earthling)이다. 지구는 우리의 거주지이다. 이 점에서 생태적 역 량이 없다면 시민적 역량도 없는 것이다.27)
지구적 환경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현 지구위기의 시대에는 생태적 역량이 시민적 역량의 첫 번
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곧 지금의 교육은 학습자를 세계시민이 아닌 지구시민으로 길러내야 한다. 인간과의 관계증진을 넘어서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증진을 추구하고 노력하는 시민을 양 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돕슨(Andrew Dobson)은 전통적 형태의 시민성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한 다. 그는 시민성의 개념을 확장하여 전통적인 ‘자유주의 시민성(liberal citizenship)’과 ‘시민공화 주의 시민성(civic republican citizenship)’과는 다른 새로운 ‘후기 세계시민주의 시민성(post-cosm opolitan citizenship)’을 요청한다. 이 세 시민성의 특징은 다음의 표와 같다.
27) Holmes Rolston(1996), “Earth Ethics: A Challenge to Liberal Education”, J. Baird Callicott and Fernando
José R. da Rocha, eds., Earth Summit Ethics: Toward a Reconstructive Postmodern Philosophy of
Environmental Education,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p.186
<세 가지 시민성 형식>28)
1. 자유주의 시민성 2. 시민 공화주의 시민성 3. 후기 세계시민주의 시민성
권리/권리부여 (계약적) 의무/책임 (계약적) 의무/책임 (비계약적)
공적 영역 공적 영역 공적 및 사적 영역
덕성 중립 남성적 덕성 여성적 덕성
영토성 (차별적) 영토성 (차별적) 비영토성 (비-차별적)
돕슨은 ‘세계시민주의의 시민성(cosmopolitan citizenship)’과 ‘후기세계주의의 시민성’은 여 러 차이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보편적 인간성이라는 ‘얇은(thin)’ 공동체와 ‘역사
적 의무(historical obligation)’라는 ‘두꺼운(thick)’ 공동체간의 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세계시민주의가 국가, 국제, 지구, 세계 등을 은유적 정치공간으로 삼는다면 후기 세계시민주의 시 민성은 생태발자국(ecological footprint)이라는 실재적 개념을 정치공간으로 삼는 차이라고 규정한 다.29) 돕슨은 후기 세계시민주의의 시민성의 한 예로서 생태시민성(Ecological Citizenship)을 제시한 다.
첫째 생태시민성은 비영토성을 갖는다. 이는 지구온난화 오존층 파괴와 같은 환경문제들이 국가
단위를 벗어난 전세계적인 문제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결국 이러한 비영토성은 나의 행동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을 하게한다. 여기서의 비영토성은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에도 적용된다. 현세대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 이다. 돕슨은 이러한 비영토성을 지닌 생태시민성의 특징을 생태 발자국개념을 끌어와 설명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자연자원과 서비스에 대한 인류의 수요를 추산한 것으로, 자연자원과 서비스 의 공급을 추산한 생태용량과 함께, 우리 인류가 지속가능한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지표이 다. 곧 개개인마다 시·공간적으로 서로 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생태 발자국은 시민 개 개인의 일상적 삶을 통해서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이방인이나 환경에 대해 가해지는 영향이라 고 할 수 있고 시민 개개인들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때 인간과 비-인간의 자연환경 사이의 대사적(metabolistic) 관계에 의해 형성된다. 즉, 생태 발자국은 그것이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발시킨다. 생태시민의 공간은 자연환경과 개개인들이나 집단 활동의 대사적이거나 물질 적 관계를 통하여 생산되는 것으로 국민국가나 EU와 같은 초국가적 기구의 경계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생태시민의 활동 공간의 범위는 이미 결정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둘째, 생태시민성은 지구시민(Earth citizen)으로서 권리보다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다. 여기서의
책임과 의무는 비계약적이고 비호혜적이다. 즉 계약에 따라 타인과 공평하게 주고 받는 것이 아니
28) Andrew Dobson(2003), Citizenship and the Environment, Oxford University Press, p.39.
29) Andrew Dobson(2003), p.99
며 보상과 상관없이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 책임과 의무의 범위 역시 비영토적이며 따라 서 그 대상은 공동체의 구성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공간에 있는 모든 존재 현세대 뿐 아 니라 미래 세대도 포함한다.
셋째, 생태시민성은 덕성에 기반한다. 즉 생태시민이 다른 공간과 시간에 있는 생명에 대한 책임 과 의무를 갖는 것은 내부적 동기인 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첫 번째 덕성은 정의
다. 이는 생태적 자리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의미를 담는다. 두 번째는 동정 배려 연민이다. 이는 정의를 효과적으로 적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넷째, 생태시민성은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 영역을 중요시한다. 사적 영역에서의 행동이 공
적 영역에 연결되면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가정에서 재활용을 하고 소비를 줄이며 정원에 퇴비를 주는 등의 모든 사적 ‘녹색행동’은 동시에 공적인 행동이 된다. 따라서 생태시민 성은 일상의 삶이 생태적이 되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Ⅳ. 맺음말
우리는 생태계를 넘어서서, 한 단계 더, 지구적 수준(the global level)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환경 윤리는 우리가 지구윤리를 가질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미래 세대들, 동물, 식물, 종, 생태계는 여 전히 친숙하지 않은 윤리적 영역이며, 지구를 위한 윤리(ethic for Earth) 그 자체는 가장 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모두가 건강한 환경을 원하기에, 아마도 윤리는 우리의 첫 번째 초점인 인간에 머물 러 있을 수 있다. 건강한 지구 환경은 건강한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이것은 그들의 권리이다. 곧장 우리는 인간의 복지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환경 보건에 관심이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삶의 비전은 우리 영토의 변명이 아니라 거대한 자원으로서 지구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삶의 비전은 우리 영토의 방어가 아 니라 거대한 재산 자원으로서 지구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공동체에서 가치를 지닌 거주지로서의 지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