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

12] 【지구살림학】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님’을 노래한 시인 이규보 - 조성환**

 12] 【지구살림학】인류세시대의 한국철학* -‘님’을 노래한 시인 이규보 - 조성환**

32)

요약문   오늘날 인류는 과학의 발달로 인해 지구의 운명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인류세’의 시대

를 살고 있다. 19세기의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의 용어로 말하면 “천인상여(天人相與)”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것은 지구와 만물에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의미한다. 즉 종래와 같이 인 간 이외의 존재들(non-human beings)을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본질적 가치를 지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이다. 최시형은 이러한 태도의 전환을 “인심개벽”이 라고 하였다. 이것은 최근에 서양에서 대두되고 있는 ‘대지윤리(land ethics)’ 또는 ‘지구윤리’(Earth eth ics)와 상통한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은 ‘지구적 위험’이라는 공통의 문제상황에 직면하여 조금씩 그 시각 이 좁혀지고 있는 추세이다. 본 발표에서는 이러한 철학적 유사점에 주목하여, 인류세 시대를 살아가는 인 류가 지구와 만물을 과연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한국철학사에 나타난 ‘응물론’의 흐름을 추적함으로써 고찰하고자 한다. 

차 례

Ⅰ. 머리말 : 인류세와 지구학

Ⅱ. 동아시아의 응물론(應物論) 전통

Ⅲ. 이규보의 인물상의(人物相衣) 사상

Ⅳ. ‘물론(物論)’에서 ‘님론’으로

Ⅰ. 머리말 : 인류세와 지구학

 

* 이 글은 지난 1년 동안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진행했던 <지구인문학연구회>에서 스터디한 내용과 원불교 사상연구원의 허남진 연구교수와의 대화에서 많은 계발을 받았음을 밝힌다. **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

일부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현 시대는 ‘인류세’(anthropocene)오 분류된다고 한다. 인류세란 “인간

이 지구시스템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시대”라는 의미이다. 예전에는 지구시스템에 따라 살던 인류가 그 힘이 점점 강성해짐에 따라 지구시스템 자체를 변화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문제는 이 변화가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기후변화이다. 이상기후로 인해 고온이나 폭우는 물론이고 산불도 빈번해지고 있다고 한다. 불길도 거세져서 소방관들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인데, 그 원인은 기후변화에 있다는 것이다. 산불은 자연적인 현상이지만 최근의 화재는 인류 세의 징후라는 것이다. ) ‘인류세’라는 말이 사회적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다

른 생명체들을 약탈한 데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자신의 일시적인 편의를 위해 다른 생명들을 대량으로 희생시킨 결과인 것이다. 마치 전통시대에 귀족이 노비의 노동력을 빌려서 호사를 누렸듯이 말이다. 이

러한 관계를 설명해 주는 개념이 ‘biopiracy’이다. ‘biopiracy’는 1993년에 팻 무니(Pat Mooney)에 의해 처음 고안되었고, 이후 인도의 환경운동가 반다나 시바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이 개념은 약초나 씨앗과 같은 제3세계의 유전(genetic) 자원과 전통 지식을 지적 재산권이라는 이름 하에 아무런 허가도 받지 않고 ‘약탈’하는 행위를 말한다. ) 

그런데 무니나 시바가 말하는 biopiracy가 국가와 국가 간의 해적행위라고 한다면,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지구위기는 인간과 지구 사이의 해적행위이다. 인간이 자신의 편의를 위해 지구의 자원을 ‘약 탈’(plunder)한 결과가 오늘의 기후위기이자 생물다양성의 감소이기 때문이다.3)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의 인류는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학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초의 학살이 제국주 의에 의해 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어진 제노사이드였다면, 오늘날의 학살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제노 사이드인 셈이다. 이처럼 ‘지구학’은 문제의 원인과 진단을 ‘지구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학문을 말 한다.

지구학은 편의상 두세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지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자연과학적으로 연구하 는 ‘지구자연학’과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철학이나 종교학적으로 연구하는 ‘지구인문학’이 다. 이 외에도 지구정치학이나 지구경제학과 같은 분야를 ‘지구사회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

다. 이 글에서 말하는 지구인문학은 지구인문학과 지구사회학을 아우르는 방편적인 개념이다. 

서양의 지구인문학은, 철학과 종교 분야에 한정해서 말하면, 크게 두 가지 주제가 대두되고 있다. 하 나는 지구를 하나의 공동체로 보고 지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려는 작업으로, 토마스 베리의 지구 의 꿈이나 래리 라스무쎈의 지구를 공경하는 신앙 등이 대표적이다. 주로 신학자나 종교학자들에 의 해 논의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인간과 사물(동식물 포함)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작업으로, 제인 베넷의 신유물론이나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등을 들 수 있다. 이 논의는 주로 철학이나 인류학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래서 지구인문학은 지구와 사물, 전통적 개념으로 말하면 천지와 만물에 대한 인식을 지구적 차원에서 새롭게 이해하려는 인문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시도는 150여년 전에 이미 한국에서도 시작되고 있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에 한반도에서 탄생한 개벽종교가 그것이다. 이들은 서구적 근대화가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인간과 인간, 국가와 국가의 범위를 넘어서 지구적 차원에서 생명과 평화의 문제를 고민하였다. 특히 동학의 지도자 해월 최시형(1827~1898)은 천지와 만물에 대한 인식을 생태적 관점에서 새롭게 함으로써 훗날 ‘한살림 운동’이 탄생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서양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지구와 사물에 대한 인식과도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개벽종교와 지구인문학의 철학적 유사점에 대해서는 최근에 지구인문학연구회 멤버들을 중심으로 몇 

차례 논문으로 발표된 바가 있다. ) 그래서 이 글에서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개벽종교 이전의 한국 사상에서의 사물인식, 그 중에서도 특히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인 이규보(李奎報, 1169∼1241)의 물론 (物論)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후의 개벽종교와 어떤 유사점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런 시도는 장차 한국사상 안에서, 더 넓게는 동아시아사상사 안에서 지구인문학적 요소를 발굴하여, 그것을 자원으로 삼아 “동아시아적 지구인문학”을 모색하는데 기초작업이 되리라 생각한다. 

여러 한국사상가들 중에서도 특히 이규보에 주목한 이유는, 박희병의 선구적인 연구에도 소개되어 있

듯이, 그의 물론(物論)이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인간과 만물의 동류성(同類性)을 주장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개벽종교는 물론이고, 지구인문학과도 상통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동 아시아사상사에서 ‘물론’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형태로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 는 것으로 본론을 시작하고자 한다.

 

Ⅱ. 동아시아의 응물론(應物論) 전통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의 사물에 관한 논의는, 서양과는 달리, 사물에 대한 인식보다는 ‘태도’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다. 사물에 대한 태도는 장자(莊子)적인 개념을 빌리면 ‘응물(應物)’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응물’이란 말 그대로 “사물에 응한다”는 뜻으로, 비슷한 개념으 로는 접물(接物)이나 대물(對物) 등을 들 수 있다. 가령 동경대전의 「탄도유심급(歎道儒心急)」에는 “心兮本虛(심혜본허), 應物無迹(응물무적)”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최시형의 해월신사법설에는 「대인 접물(待人接物)」이라는 제목의 챕터가 있다. 여기에서 “心兮本虛(심혜본허), 應物無迹(응물무적)”은 “마음은 본래 텅 비어 있어서 외물에 응해도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그 사상적 기원은 장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장자는 “虛而待物(허이대물)=텅 빈 마음 상태에서 외물이 오기를 기다린다)이나 “應而不藏(응이부장)=외물에 반응할 뿐 담아두지는 않는다)는 응물론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사 마천은 “應物變化(응물변화)”, 즉 “외물에 응해서 변화한다”고 소개하였고(사기(史記)), 3세기의  장자 주석가 곽상은 “허심으로 응물한다”(虛心以應物)는 표현으로 정식화하였다. 이후 허심(虛心)과 응물(應物) 개념은 동아시아사상사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는데  ), 최제우의 “심허-응물”도 이런 전통을 따르고 있다.6)

그런데 “외물에 대한 대응”은 ‘물(物)’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가령 유

학에서는 그 대상이 군주냐 부모냐, 선생이나 친지냐에 따라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그래서 이 대응 방식의 차이를 행위규범으로 규정한 것이 ‘예(禮)’이다. 반면에 성리학의 경우에는, 흔히 “만물일체 의 인(仁)”이라고 알려져 있듯이, 만물의 일체성을 강조하는 물론(物論)을 말하고 있다. 한편 장자는, 

「제물론(齊物論)」이라는 챕터 이름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사물을 고르게 인식하는 논의”를 전개하였

다. “사물을 고르게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래서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지만, 적어도 장자는 사물에 대해서 “제물(齊物)이라는 인식론을 바탕으로 응물(應物)이라는 태도론”을 전개하였 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조선중기의 사상가 김시습은 「애물의(愛物義)」라는 제목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만물을 사랑하라

는 ‘애물(愛物)’의 태도를 강조하였고, 조선후기의 실학자 홍대용은 인간과 비인간의 존재론적 차등을 부정하는 ‘인물균(人物均)’ 사상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조선말기의 기학자 최한기는, 야규 마코토의 연구에 의하면 ), 외물과의 ‘통(通)’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김시습이 애물(愛物)이라면, 홍대 용은 균물(均物), 최한기는 통물(通物)로, 각 사상가의 응물론을 거칠게 정리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응물론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의 ‘여물론(與物論)’이다. 그 이유는 개벽 사상과 지구인문학과의 깊은 연관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하에서는 박희병의 선구적인 연구에 힘입어, 이규보의 여물론(與物論)을 개벽학과 비교하는 형식으로 고찰해보고, 거기에 담긴 지구학적 의미를 생각 해 보고자 한다.  

Ⅲ. 이규보의 인물상의(人物相依) 사상

박희병은 1999년에 출간된 한국의 생태사상(돌베개)에서 이규보의 사상을 생태철학적 측면에서 고

찰하면서 그의 ‘물론(物論)’을 같이 논하였는데, 그에 의하면 이규보는 사물에 대해 두 가지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만물인류(萬物一類)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여물(與物)의식이다. 여기에서 ‘만물 인류사상’이란 “만물을 일류(一類)로 보네”(萬物視一類, 「北山雜題」)라는 이규보의 시구에서 따온 표 현으로 ), 흔히 말하는 ‘만물일체사상’과 유사하다. 그래서 박희병은 이것을 장자의 제물(齊物)사상의 영향으로 보는데, 다만 단순한 수용은 아니고 이규보가 나름대로 ‘자기화’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2 0쪽). 그 이유는 이규보의 만물일류사상은 장자의 제물사상에 ‘측은지심’과 ‘자비’가 결합된 형태 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다 같이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 어찌 너(=쥐)만 나무라겠니 - 「쥐를 놓아주다(放鼠)」 어찌 화롯불 없으리요만 (이를) 땅에 내려놓는 건 자비심 때문 - 「이를 잡다」 (파리가) 술에 빠져 죽으려 하니 맘이 아프네. 살려주는 은근한 이 마음 잊지 말아라. 

- 「술에 빠진 파리를 건져주다」

여기에는 이규보가 쥐, 이, 파리와 같은 미물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그런

데 박희병에 의하면 이것은 단순한 애물사상의 발로가 아니라, 만물일류사상이 가미된 애물사상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조선중기의 김시습의 애물사상보다는 중국의 장횡거나 왕양명에 더 가깝다고 평 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김시습의 애물사상이 인간중심적인 차등적 물관(物觀)을 견지하고 있는데 반해, 장횡거와 왕양명은 민포물여(民胞物與) )와 만물일체의 인(仁)과 같이 우주적 스케일을 갖고 있기 때문이 다. 아울러 이규보의 사상적 연원에 대해서는 장횡거나 왕양명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 신의 사유를 전개하여 만물일류사상에 도달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121-122쪽).     

이러한 관점에서 박희병은 만물일류사상에서 우러나온 애물(愛物)의 태도를, 인간중심적인 애물(愛物) 과 비교하여, ‘여물(與物)’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여물’이란 비인간 존재까지도 이웃으로 생각한다 는 의미이다. 박희병이 들고 있는 이규보의 ‘여물’ 의식의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날아오는 한 쌍의 저 제비, 옛집을 잊지 않고 있었구나. 애써 나의 집 찾아 주니, 의당 친구로 대우하리(當以故人待). ) 

이 문장은 「옛 제비가 찾아오니(舊燕來)」라는 시의 첫머리인데, 여기에서 이규보는 옛 집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비를 “친구로 대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인간 이외의 존재까지도 ‘친구’의 범위에 넣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비록 ‘여물’이라는 표현은 나오고 있지 않지만, 동물까지도 친구로 대하고 있 다는 의미에서 박희병은 ‘여물’ 의식의 발로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규보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무생물에 대해서도 여물(與物)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마치 최시형이 최제우의 ‘하늘’의 범위를 인간에서 만물로 확장하여, “만물이 하늘이다”라고 선언한 것을 연상시킨다(萬物莫非侍天主). 이규보는 자신이 사용하 던 벼루를 향해 다음과 같이 명세하였다(123쪽).

나는 비록 키가 6척이나 되지만(吾雖六尺長) 사업이 너를 빌어 이루어진다(事業借汝遂). 벼루여! 나는 너와 함께 돌아가겠다(與汝同歸). 살아도 너로 말미암고 죽어도 너로 말미암겠다(生由是, 死由是) - 「소연명(小硯銘)」 

여기에서 ‘與汝(여녀)’는 ‘與物(여물)’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與(함께)’의 

범위가 생물에서 무생물로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같은 ‘여물’ 이라고 해도 앞에 나온 파리나 쥐의 사례와는 유형이 다르다는 점이다. 물(物)에 대한 감정이 연민이나 자비보다는 ‘고마움’이나 ‘동지애’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희병은 이 구절에 대해 다 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글은 (…) 일촌밖에 안 되는 벼루라고 해서 6척의 ‘나’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 ‘나’는 물(物)인 벼루에 의지함으로써만 나를 실현할 수가 있다는 것, 그 고마움을 생각하면 ‘너’와 ‘나’ 두 존재 사이에 어떤 연대감을 느끼게 되고, 그래서 생사를 함께하고자 한다는 것, 이런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123쪽, 강조는 인용자의 것)

여기에서는 연민이나 자비보다는 의존, 감사, 연대의 정서가 느껴지고 있다. 그것은 나와 벼루가 서로 

의존관계에 있다는 자각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과 연대감이다. 이 경우에는 ‘여물’의 ‘與(여)’가 단 순한 ‘이웃’이나 ‘친구’의 의미를 넘어 ‘동지’나 ‘파트너’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즉 서로 협력 하고 연대하는 관계를 나타내는 ‘여(與)’인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가 「續折足几銘(속절족궤명)」이다. 이 시는 다리가 부러진 책상을 고친 후에 쓴 글로, 

박희병에 의하면 사람과 사물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다는 이규보의 생각을 잘 보여 주고 있다(124 쪽). 

  나의 고달픔을 부축해 준 자는 너요, 너가 절름발이 된 것을 고쳐준 자는 나다.   같이 병들어 서로 구제하니(同病相救), 어느 한쪽이 공(功)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사물에 대한 의존관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과 사물의 상생관계

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동병상구(同病相救)”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자신은 책상의 위로를 받았고, 책상은 자신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책상은 단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도구 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도와주는 은혜로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박희병도 이런 점에 주목하 여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규보는) 物我相救(물아상구)라고 요약할 수 있는 깨달음에 이르고 있다. (…) 장자의 제물사상 에서 출발한 이규보가 장자를 자기화함으로써 존재의 근원적 연대성을 깊이 투시하는 데까지 이르 렀음을 잘 보여준다.”(124쪽)

여기에서 박희병은 이규보의 동병상구(同病相救)를 물아상구(物我相救)라고 바꿔 표현하면서, 이규보 가 “장자를 자기화”하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자기화한 것일까? 여기에서 ‘자기화’ 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구체적으로 장자의 제물사상에 ‘무엇’이 추가되어 이규보적인 여물(與物) 사상이 되었다는 것일까? 앞서 소개한 생물들의 사례에서 자기화의 요소는, 박희병에 의하 면, 자비와 애물이다. 그런데 이곳의 무생물의 사례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자비나 애물보다는 감 사나 연대의 감정이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생물에 대한 감사와 연대의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인간과 사물이 서로 의존하고 서로 살려주는 상의(相依)와 상생(相生)의 관계

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다. 달리 말하면 人物相依(인물상의)와 人物相生(인물상생) 관계에 대한 자각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장자의 제물사상이나 중국의 만물일체사상과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제물이나 만물일체는 ‘일체성’을 강조하지만, 상의나 상생은 ‘상호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렇 게 해석하면, 앞에서 살펴본 자비와 연민의 사례도 상호성의 측면에서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 면 다음과 같다. 

사람은 하늘이 낳은 물(物)을 도둑질하고(人盜天生物), 너는 사람이 도둑질한 걸 도둑질하누나(爾盜人所盜).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니(均爲口腹謀), 어찌 너만 나무라겠니!(何獨於汝討) - 「쥐를 놓아주다(放鼠)」

  

여기에서 하늘과 사람 그리고 쥐는 각각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하늘이 생성한 것을 사람이 훔치고, 사람이 훔친 것을 다시 쥐가 훔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이 생성 하지 않으면 사람은 먹을 것이 없게 되고, 사람이 훔치지 않으면 쥐도 먹을 것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똑같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짓이다”는 말은 전후맥락상 단지 각자도생(各自圖生)을 의미하기보다는 상호연결성의 함축을 담고 있는 셈이다. “내가 살고 싶으니까 쥐도 살고 싶겠지”라고 하는 “살고 싶 은 욕망”에 대한 공감([均])이 “내가 하늘에 의존해 있듯이 쥐도 나에게 의존해 있다”는 의존관계에 대한 공감과 동시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기생하고 있듯이 쥐도 기생하고 있으 니까, 내가 하늘로부터 도둑질 하듯이 쥐도 나로부터 도둑질 하는 것이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규보가 쥐를 살려준 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 즉 자기와 ‘동일한’ 의존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기 때문이 었다. 그 동일함과 공감을 나타낸 개념이 ‘균(均)’이다.  

Ⅳ. ‘물론(物論)’에서 ‘님론’으로 

이규보가 제비나 쥐와 같은 생물은 물론이고, 벼루나 책상과 같은 무생물에게까지 연민과 공감의 정 서를 느낀 것은 조선후기에 유씨부인(兪氏婦人)이 썼다고 하는 「조침문(弔針文)」을 연상시킨다. 가령 「 조침문」에서 바늘이 특별한 재주를 지녔다고 절찬하는 대목은 ) 이규보가 벼루에 대해서 “사업이너를 빌어이루어졌다”(「小硯銘」)고 평가한 구절과 상통한다. 장자적으로 말하면 사람뿐만 아니라 사물에게 도 ‘덕(德)=탁월함’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울러 유씨부인이 부러진 바늘에 대해서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년고락(百年苦樂)과 일시생사(一時生死)를 한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라고 고백하는 대목은 이규보가 벼루에 대해서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한다”고 맹세했던 구절과 흡사하다. 마치 현대인들이 ‘반려동물’을 가족이나 벗으로 여기고 있듯이, 유씨부인이나 이규보는 바늘이나 벼 루를 ‘반려사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반려’의 범위를 생물에서 무생물로 확 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정서를 표현한 한국말이 ‘님’이라고 생각한다. ‘님’은 상대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

고 존경과 연민의 정서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동학사상가 해월 최시형이 인간뿐만 아니라 만물도 ‘하늘님’이라고 한 것도 사물에게 ‘님’의 정서를 느꼈기 때문이리라. ‘하늘’을 노래한 시인 윤동 주가 「서시」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한 것도 죽어가는 것으로부터 ‘님’의 정서 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최시형 식으로 말하면 “하늘(=생명)에 대한 공경”의 마음을 느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규보의 ‘물론(物論)’은 ‘님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연명(小硯銘)」이나 「續折足几銘(속절족궤명)」는 “님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 있고, 유씨부인의 「조침문」은 “님을 그리워하는 글”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규보가 「소연명(小硯銘)」에서 “너를 빌어 사업을 이룬다”고 표현한 것은 최시형이 인간과 

하늘의 관계를 “천인상여(天人相與)”, 즉 “하늘과 사람이 함께 한다”고 한 말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서 하늘은 만물 속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말한다. 최시형에 의하면, 사람은 만물 속의 하늘을 먹고 살 아가고, 하늘은 사람의 힘을 빌려서 자신의 생명력을 표현하는데, 그런 점에서 양자는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해월신사법설「천지부모」). 이것을 표현한 말이 ‘천인상여’이다. 이 표현을 빌리면, 이 규보가 생각한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人物相與(인물상여)”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사물이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물(物)’을 ‘하늘님’으로 표현한 것이 최시형의 동학사상이

다. 따라서 이규보와 최시형은, 적어도 물론(物論)의 측면에서는, 서로 연속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규보에게서도 ‘물(物)’을 ‘님’으로 대하는 태도가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규보가 인간은 사물에 의존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한 것은, 원

불교의 은(恩)사상과 상통한다. 원불교의 핵심교리 중의 하나는 사은(四恩)인데, 여기에서 ‘은(恩)’은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관계를 말한다. 원불교에서는 그 은혜의 관계를 “천지·만물·동포·부모” 라는 네 가지로 범주화시켜서 사은(四恩)이라고 하였다. 

한편 최시형은 “천지가 부모이다”는 천지부모사상을 주창하였는데, 여기에서 ‘천지’는 넓게는 우

주 전체를, 좁게는 지구를 의미한다. 그래서 “천지가 부모이다”는 “지구를 부모와 같은 ‘님’으로 대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님이 부모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사물에 대한 이규보 의 인식과 태도는 훗날의 개벽종교와 유사한 점을 많이 보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이 사물 을 도구적으로 대하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지구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처방은 “만물을 님으로 대하라”는 이규보와 최시형의 ‘님론’을 실제 삶 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