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7

불교평론



불교평론



불교적 상상, 한국소설의 여명을 밝히다 / 유한근
특별기획 - 현대소설에 나타난 불교적 세계 ①


[77호] 2019년 03월 01일 (금) 유한근 yhkpoet@hanmail.net




- 이광수 〈꿈〉 김동인 〈조신의 꿈〉과 한용운 〈박명〉



불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마음을 다스리는 종교이다. 불교는 비언어적 마음을 바탕으로 성취된다. 본체는 언어 이전의 것이며 비언어적인 것은 침묵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선(禪)은 비언어화의 시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한 선어적 인식으로 소설이 써졌을 때, 그 소설은 불교소설의 원형이 된다. 그러나 타락한 세계가 타락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기존의 리얼리즘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국면이다. 언어화를 통한 침묵의 깨우침, 언어화 과정을 통한 비언어화 상태의 심적인 깨달음에 이르려 하는 선적 마음을 타락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 양식을 통해 실현해야 한다는 불교 혹은 불교적인 모티프로 쓰는 소설은 선방에서 지향하는 언어도단과 불립문자의 경지를 담보할 수 없다.

더욱이 불교소설에 관심이 있는 작가들은 불교의 본체는 이해하지만, 그것이 어떤 인식논리에 의해서 현현(顯現)되고 있는가는 놓치게 되어 체(體)와 용(用)이 엇나가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불교 용어의 이해하기’에 다급한 나머지 교리의 본질을 놓치고 불전 속의 창작적 모티프 탐색에만 그치기 쉽다. 그래서 불교를 소재로 한 소설이 많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불교소설을 접하기는 어렵다.

불교소설은 ‘불교’와 ‘소설’이 결합된 말이다. 그런 만큼 여러 성격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적 소설, 불교 교리를 수용한 소설, 불교 포교를 위한 소설 등 그 개념들이 여러 의미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합하는 개념으로 ‘불전(佛典) 속에 나타난 허구성’과 ‘소설작품 속에 나타나고 있는 불교사상’을 불교소설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에세이의 주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후자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는 없다. 이 점을 전제로 하고 한국 근대 불교소설을 일별한다.

소설 속에 나타나는 불교사상을 찾는 일이 불교소설의 몫이다.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이 해내야 할 몫이다. 물론 경전 속에 나타나는 허구성을 찾아내는 일도 불교문학의 몫이긴 하지만, 문학 연구가의 불교 이해 능력의 한계가 자명하기 때문에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이런 점에서 김운학(金雲學)의 ‘불교문학의 이론’ 연구는 문학 쪽에서 불교문학을 연구하는 데에는 소중하다. 특히 불교적 비평논리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노력은 값지다고 할 수 있다. 직관과 자오(自悟)에 의해서 창작하는 우리 문인들의 정신구조를 서구 논리로는 분석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우리 문학비평 논리를 불교의 인명논리(因明論理)에서 찾아보려는 노력은 값지다는 의미다.

이를 또 다른 전제로 해서 신소설 이후 해방공간 이전(1906~ 1950)까지의 불교소설을 탐색해보려 한다. 이 시기의 불교소설은 양건식의 〈석사자상〉을 비롯한 〈한일월〉 〈아의 종교〉 〈오!〉 등, 이광수의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 〈꿈〉과 한용운 〈박명〉 김동인의 〈조신의 꿈〉 현진건의 〈무영탑〉 등이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불교소설 작가는 친일행적 문제와는 관계없이 이광수이다. 근대문학으로서 최초의 불교소설이 양건식의 〈석사자상〉이고, 한용운 선사의 〈박명〉이 있지만,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는 이광수이다. 3편의 불교소설 중 〈이차돈의 사〉와 〈원효대사〉는 신문에 연재된 장편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집중탐색에 적합하지 않아 이광수의 〈꿈〉을 중심으로 하여 이 시기의 불교소설 판도를 일별하려 한다. 또한 같은 모티프의 소설인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대비 고찰하려고 한다. 그리고 한용운의 〈박명〉을 일별하면서 이들 불교소설이 열어놓은 전망을 가늠하고자 한다.


1. 〈꿈〉의 신화 원형구조와 《삼국유사》



이광수(1892~1950)


김동인의 〈조신의 꿈〉(1935)과 이광수의 〈꿈〉(1947)은 꿈을 모티프로 한 소설이다. 그리고 모티프와 구조원형을 《삼국유사》의 ‘탑상(塔像) 제4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에 나오는 조신설화를 차용하고 있어 이 두 작품을 대비해서 탐색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경계를 갖지 말라고 한다. 《장자》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장자는 심지어 현실과 꿈의 경계조차 가지지 말라고 한다. 《장자》 〈제물론〉의 “방기몽야 부지기몽야(方其夢也 不知其夢也). 몽지중우점기몽언 각이후지기몽야(夢知中又占其夢焉 覺而後知其夢也). 차유대각이후지차기대몽야(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가 그것이다. “꿈꾸고 있는 때는 자신이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점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꿈에서 깬 후에야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 문장은 장자의 유명한 ‘호접몽’의 앞 문장이다. 이 말이 지니는 의미는 꿈과 현실 사이의 경계는 없다는 말이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척도를 잴 수 있는 잣대는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또 한편으로 불경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반야심경》의 “공중무색(空中無色)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 그것이다. “공(空) 중에는 색(色)이 없고, ‘수상행식’이 없다. 감각과 이미지와 행위와 분별이 없다”는 의미이다. 공(空)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감각, 무의식, 모든 인식도 없기 때문에 분별력이라거나 경계 같은 것은 없기 때문에 무(無)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도 그러하고 불경도 그러하기 때문에, 이 소설의 경우는 결국 ‘무(無)’를 말하려는 화두를 던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말한다. “일체유위법은 꿈과 같고, 환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잠깐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마땅 이와 같이 여길지니라”에서 ‘이와 같다’ 혹은 ‘이와 같이 여기다’는 말이 ‘여시관(如是觀)’이다. 하나의 단순한 긍정적인 언어가 아니라, 불법이 함축된 언어이다. 《금강경》의 핵심사상인 공사상(空思想)과 반야사상(般若思想)을 함축한 언어이다. 함축된 언어는 우리 삶의 표상적인 의미인 ‘꿈’이다.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이광수의 〈꿈〉의 원형은 《삼국유사》의 ‘탑상(塔像) 제4 낙산이대성관음정취조신’의 설화이다. 이 설화는 조선조의 몽자소설(夢字小說)의 원형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입몽(入夢)→몽중(夢中)→각몽(覺夢)이라는 이야기 구조를 원형으로 하고 있다. 원형비평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모든 문학작품을 원형이나 신화의 전형적인 형태의 재현으로 해석하고 그런 작품을 바람직한 작품으로 인정한다. 그들은 문학작품에는 어느 시대이든 어떤 공간에서든 역사적 흐름이나 변화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화적 패턴 또는 원형(archetype)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들은 그 원형을 신화에서 찾으려고 하고, 문학작품 분석의 중요한 척도로 삼는다. 그래서 원형비평과 신화비평을 혼용해서 사용한다. 이렇듯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데 신화(myth)를 원형으로 삼을 수 있는 자료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저서 《야생의 사고(The Savage Mind)》(1966), 제임스 G. 프레이저(James G. Frazer)의 《황금가지(The Gol-den Bough)》(1890∼1915), 그리고 카를 융(Carl Jung)의 집단무의식 이론 등이 척도가 된다. 그리고 신화 · 원형비평의 구체적 실천학자는 노드롭 프라이, 로버트 그레이브, 조셉 캠벨, 레슬리 피들러 등이다. 그러나 이들의 보편적 원형을 통한 문학작품의 조망 의도는 보편성의 척도 판단이라는 국면에서 환원주의(reductionism)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이광수의 〈꿈〉은 그 오류를 전복시킨다.



(……) 조신은 장원에 이르러, 태수 김흔(金昕) 공(公)의 딸을 깊이 연모한다. 여러 번 낙산 되었다. 낙산사의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남몰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빌었으나 몇 년 뒤 그 여자에게 배필이 생겼다. 조신은 다시 관음 앞에 나아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뜻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었다. 그리고 그리워하다 지쳐 얼마 뒤 선잠이 들었다. 꿈에 갑자기 김 씨의 딸이 기쁜 모습으로 문으로 들어오더니, 활짝 웃으면서 말하였다.

(本寺遺僧調信爲知莊. 信到莊上, 悅「太」守金昕公之女, 惑之深, 屢就洛山大悲前, 潛祈得幸, 方數年間, 其女已有配矣. 又往堂前怨大悲之不遂己, 哀泣至日暮, 情思倦憊, 俄成假寢, 忽夢金氏娘, 容豫入門, 粲然啓齒而謂曰)



위의 인용문은 김동인의 〈조신의 꿈〉과 이광수의 〈꿈〉의 서사 원형구조인 《삼국유사》의 조신설화의 서두 부분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그리고 그리워하다 지쳐 얼마 뒤 선잠이 들었다”는 이 설화의 입몽(入夢) 부분이다. 꿈속으로 들어가는 이 부분을 이광수 〈꿈〉에서는 이렇게 표현된다,



등잔불 하나에 비추어진 관음전은 어둠침침하였다. 그러한 속에 조신은 가부좌를 걷고 앉아서 목탁을 치면서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신의 눈은 언제나 관세음보살님의 얼굴에 있었다. 반년나마 밤이면 자라는 쇠가 울기까지 이 법당에서 이 모양으로 앉아서 이 모양으로 관세음보살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칭호를 하였건마는, 오늘 밤에는 특별히 관세음보살님의 상이 살아 계신 듯하였다. (……)

절에서는 대중이 모두 잠이 들었다. 오직 석벽을 치는 물결 소리가 높았다 낮았다 하게 조신의 귀에 울려올 뿐이었다. 그리고는 조신이 제가 치는 목탁 소리와 제가 부르는 염불 소리가 어디 멀리서 울려오는 남의 소리 모양으로 들릴 뿐이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조신이 몸이 피곤함을 느낄수록 잡념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 “이거 안 되겠다.” 하고 조신은 자주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사흘 동안이야 설마 어떠랴 하던 것은 어림없는 생각이었다. 조신의 정신은 차차 흐리기를 시작하였다. 조신은 무거워 오는 눈시울을 힘써 끌어올려서 관세음보살을 아니 놓치려고 힘을 썼다. 그러나 어느 틈엔지 모르게 조신은 퇴 밑에 벗어놓은 김랑의 분홍신을 보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다.

조신은 목탁이 부서져라 하고 서너 번 크게 치고, “나무 대자대비 서방 정토 극락세계 관세음보살 마하살.” 하고 불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요, 또 수마(睡魔)는 조신을 덮어 누르는 듯하였다. 이번에는 앞에 계신 관세음보살상이 변하여서 김랑이 되었다. 분홍 긴 옷을 입고 흰 버선을 신고 옥으로 깎은 듯한 두 손을 내어밀어 지난봄 조신의 손에서 철쭉을 받으려던 자세를 보이는 듯하였다. 조신은 벌떡 일어나서 김랑을 냅다 안으려 하였으나, 그것은 허공이었고 불탑 위에는 여전히 관세음보살님이 빙그레 웃고 계시었다.

조신은 다시 목탁을 두들기고, “나무 관세음보살 마하살.”하고 소리높이 불렀다. 얼마나 오래 불렀는지 모른다. 조신은 이 천지간에 제가 부르는 ‘관세음보살’ 소리가 꽉 찬 듯함을 느꼈다. 김랑도 다 잊어버리고 제가 지금 어디 있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저라 하는 것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오직, “나무 관세음보살” 하는 소리만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이때였다.

“똑, 똑, 똑, 똑.”

“달그닥 달그닥.” 하는 소리가 조신의 귓결에 들려왔다. 또 한 번, “달그닥 달그닥.” 하는 소리가 났다. 조신은 소스라쳐 놀라는 듯이 염불을 끊고 귀를 기울였다. 이때 용선 스님이 잠근 문이 삐걱 열리며 들어서는 것은 그 누군고? 김랑이었다. 김랑은 어제 볼 때와 같이 분홍 긴옷을 입고 흰 버선을 신고 방그레 웃으며 들어왔다.

“아가씨!”

조신은 허겁지겁으로 불렀으나, 감히 손을 내어밀지는 못하고 합장만 하였다. 조신은 거무스름한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고 있었다. (……) 조신은 가사를 벗으려 하다가 잠깐 주저하고는 관세음보살상을 향하여 합장 재배하고,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님 고맙습니다. 제자의 소원을 일러 주시오니 고맙습니다.” 하고는 가사와 장삼을 홰홰 벗어서 마룻바닥에 내어던지고 앞서서 나온다.



이광수의 〈꿈〉은 앞서 언급한 대로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를 모티프로 해서 창작된 소설이다. 이와 유사한 모티프의 동명 단편소설이 《문장》(1939.8)에 게재된 것으로 연구되어 있지만, 이 소설은 광복 후인 1947년 면학서관에서 발행되면서 발표된 중편 분량의 소설이다.

이 소설의 서사는 ‘첫째 권’ ‘둘째 권’ ‘셋째 권’으로 나누어져 구성되어 있다. 위의 인용문은 ‘첫째 권’의 일부이다. 승려 조신은 세달사 농장일을 하다가 꽃놀이를 나온 진골 김 태수의 딸 달례(月禮, 15, 6세)를 보게 된다. 그녀에게 반해 조신은 석벽에 핀 철쭉 한 포기를 꺾어 그녀에게 준다(이 부분의 경우도 신라가요 수로부인 관련 설화 〈헌화가〉의 원형을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일이 있고부터 조신은 달례를 잊지 못해 고민 끝에 낙산사 용선대사를 찾아가 참회한다. 용선대사는 그에게 그저 관세음보살을 암송하라고 할 뿐이다. 그 후 김 태수 일가가 불공을 드리러 낙산사에 오게 되어, 달례와 재회한 조신은 그녀가 곧 모례라는 남자에게 시집간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조신은 마음이 급해 용선대사에게 달려가 달례와 연을 맺게 해 달라고 간청하지만, 용선대사는 그에게 사흘 동안 법당에 들어가 참선하라고 명한다. 참선을 하다가 지쳐 잠깐 잠이 든 조신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난다. 놀랍게도 달례가 그를 찾아와 자신과 함께 달아나 주기를 청한다. 그로 인해 조신은 달례와 집을 나온다. 이 서사가 입몽 구조 전까지의 이야기이다. 여기까지의 스토리는 김동인의 〈조신의 꿈〉도 유사한 구조를 이룬다, 이광수의 〈꿈〉이 중편 분량이기 때문에 부정적 인물인 평목 스님의 이야기가 추가로 전개된다거나 〈꿈〉에서는 조신이 세달사 승려인 데 반해, 김동인의 〈조신의 꿈〉에서 단편 분량으로, 조신을 낙산사 승려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뒤의 공간 설정이나 스토리 전개가 다소 작가의 허구적 상상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조신설화의 원형구조를 일탈하지는 않는다. 조선조 소설에서 몽자소설의 몽중 구조는 신선놀음과 같은 판타지 세계와 꿈이라는 것은 일장춘몽과 같은 것임을 교시하기 위해 시련과 갈등구조를 이중적으로 형성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광수의 〈꿈〉의 몽중 이야기는 조신과 달례가 태백산 깊숙한 곳에 터를 잡고 2남 2녀를 낳고 단란하게 사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낙산사 승려인 평목이 나타나면서부터 그들의 삶을 어려워진다. 평목이 가능하지 않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협박하자 조신은 그를 목 졸라 죽이고 시체를 동굴에 유기한다. 그러나 죄악은 드러나기 마련, 후일 모례가 태수의 안내로 사냥을 오게 되어 조신이 안내를 맡게 된다. 모례가 쏜 화살에 맞은 사슴이 동굴로 들어가는 바람에 평목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로 인해 조신은 교수형을 당한다. 조신이 살려 달라고 고함을 치는데, 누군가가 엉덩이를 차는 바람에 눈을 떠보니 용선대사가 웃으며 서 있고, 관음보살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부분이 각몽(覺夢)하는 부분이다. 잠에서 깬 조신은 달례에 대한 자신의 욕망이 덧없음을 깨닫고 다시 불도에 정진하여 대사가 된다는 이야기로 소설은 끝난다.



김동인(1900~1951)


김동인의 소설 〈조신의 꿈〉에서 조신은 김랑과 살림을 차리고 꿈같은 세월을 보내며, 사십여 년 동안 살게 된다. 견디기 힘든 가난이 그들을 괴롭힌다. 사랑만으로는 이겨낼 수 없는 궁핍한 생활 때문에 고향을 떠난다. 가던 길에 그들은 기아로 큰아들을 잃고, 내외가 모두 몸져눕게 된다. 조신은 어쩔 수 없이 큰딸에게 구걸을 해오게 하는데, 구걸 나간 큰딸은 개에게 물려 죽고 만다. 결국 조신은 오십 년간의 부부 생활을 접고 김랑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고 아내를 북으로 떠나보낸다. 그리고 문득 잠에서 깬다. 이것이 각몽 부분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결말 부분은 모든 것이 꿈이었음을 깨닫고 안도하며 조신이 부처의 큰 뜻에 감복하며 삼배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 소설도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도 같은 스토리로 전개한다. 가난으로 인해 자식을 잃고 구걸하다 개에게 물린 여아의 이야기, 그 비참한 조신의 비극적인 삶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조신의 꿈〉이 그의 다른 소설처럼 문학사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은 서사의 중심구조를 《삼국유사》의 조신설화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점이다. 모티프의 원형을 살렸다는 점에서는 주목될 수 있지만, 신화원형에 창의적인 스토리를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의 〈꿈〉은 조신이 욕망으로 파계한 후, 본래 지니고 있었던 자기 정체성이 파편화되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 특히 삶에 대한 허무의식을 섬세하게 그리고, 그것의 결과물로 조신의 살인이라는 스토리로 구성하고 있는 점은 소설의 허구화 미학을 주목하게 한다. 〈꿈〉의 스토리 라인은 애욕→욕망의 성취→갈등과 파탄→자아정체성 회복의 구조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구성미학으로는 입몽→몽중→각몽으로는 몽자소설의 원형을 지키면서 허망하고 덧없는 사바세계(娑婆世界)를 환기해준다.

현실과 꿈의 세계를 교차시켜 《금강경》의 진공묘유(眞空妙有) 사상을 환기해주기도 한다. 인간 삶의 본체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묘한 것, 그것이 진공묘유이다. 조신의 몽중 이야기가 꿈속의 이야기만도 아닌 것처럼, 조신의 입몽 전과 각몽 후의 현실적인 삶이 꽉 찬 공간이 아닌 비어 있는 세계일 수 있다는 진공묘유 사상을 이 소설을 보여준다. 공(空)을 근원으로 하여 존재하는 현상인 진공묘유. 그 마음은 모든 분별이 끊어진 부처의 마음일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최상의 마음이고 지혜의 언어다.

《삼국유사》의 조신 이야기는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 결말 부분과는 달리 각몽으로 끝나지 않고 후일담처럼 그 뒤의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형개(形開)하니 잔등(殘燈)이 흐리게 토했다. 야색(夜色)이 점차 흐려졌는데, 또 새벽엔 수발(鬚髮,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니 망망연(惘惘然) 달리 인간세의 뜻이 없었다. 노생(勞生)을 이미 싫어하기가 백년신고(百年辛苦)에 배부름과 같고, 탐염지심(貪染之心)이 씻은 듯 얼음 풀리듯 했다. 이에 참회하여 성용(聖容)을 대하니, 이미 참회하고 씻을 것이 없었다. 해현(蟹峴) 아이 묻은 무덤으로 가서 파니, 석미륵(石彌勒)이었다. 물로 씻어 이웃 절에 봉안(奉安)하고는 경사(京師)로 돌아와 장임(莊任)을 면하였다. 사재(私財)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고 백업(白業)을 근수(懃修)했다. 후에 마친 바는 알 수 없다. 의(議)하여 말하되, 이 전(傳)을 읽고 책을 덮고 이를 거슬러 풀이해 보면, 하필 신사(信師)의 꿈에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인간세(人間世)의 즐기는 바가 흔흔연(欣欣然) 역역연(役役然), 특히 이를 깨닫지 못한다. 이내 사(詞)를 지어 이를 경계해 말한다.



조신은 꿈에서 깨어나 참회하고 꿈속에서 잃었던 아이의 무덤을 찾아가 파 보니, 석미륵(石彌勒)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미륵상을 잠깐 이웃 절에 맡겨 봉안했다가 사재(私財)를 털어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한다.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은 조신설화를 마친 뒤 설화의 의미를 되새긴다. “하필 신사(信師)의 꿈에만 그러하겠는가? 지금 인간세(人間世)의 즐기는 바가 흔흔연(欣欣然) 역역연(役役然), 특히 이를 깨닫지 못한다. 이내 사(詞)를 지어 이를 경계해 말한다.”라고 덧붙인다. 이 부분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조신의 꿈은 우리 모두의 꿈일 것이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매우 기쁜 것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것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일연은 사(7언 배율)를 지어 제시한다.



快滴須臾意已閑 즐거운 시간은 잠시뿐 마음은 어느새 시들어

暗從愁裏老蒼顔 남모르는 근심 속에 젊던 얼굴 늙었네
不須更待黃粱熟 다시는 좁쌀밥 익기를 기다리지 말지니
方悟勞生一夢間 바야흐로 힘든 삶 한순간의 꿈인 걸 깨달았네
治身臧否先誠意 몸을 닦을지 말지는 먼저 뜻을 성실하게 해야 하거늘
鰥夢蛾眉賊夢藏 홀아비는 미인을 꿈꾸고 도적은 장물을 꿈꾸네
何以秋來淸夜夢 어찌 가을날 맑은 밤의 꿈으로
時時合眼到淸凉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의 세계에 이르는가



이 시는 조신설화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강조하는 운문으로 “바야흐로 힘든 삶 한순간의 꿈인 걸 깨달았네” 그리고 끝 구절의 “어찌 가을날 맑은 밤의 꿈으로/ 때때로 눈을 감아 청량의 세계에 이르는가”에서 진공묘유 사상을 통해 청정한 마음을 가져야 함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두 편의 소설에서는 교시적인 기능을 유보한다.

그럼에도 이광수의 〈꿈〉은 곳곳에서 불교적 진리를 접할 수 있다.



달례도 법사의 소리를 맞추어 옥같이 흰 두 손을 머리 위에 높이 들어 관음상에 주목하면서 나부시 절을 하였다. 그러고는 관음참회례문이 시작되었다.

“옴 아로륵계 사비하.” 하는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은 법사의 소리를 따라서 일동도 화하였다. 달례의 맑고 고운 음성이 중들의 굵고 낮은 음성 사이에 울렸다. 조신도 전생 금생의 모든 업장을 소멸하여 줍소서 하는 이 진언을 정성으로 염하였다.

“백겁에 쌓은 죄를(百劫積集罪)/ 일념에 씻어지다(一念頓蕩除)/ 마른 풀 사르듯이(如火焚枯草)/ 모조리 사르어지다(滅盡無有餘)” 하는 참회게를 이어,

“옴 살바 못댜모리바라야 사바하. 원컨댄 사생 육도(四生六途)에 두루 도는 법계 유정(法界有情) 목숨 있는 무리 이 여러 겁에 죽고 나며 지은 모든 업장을 멸하여지이다. 내 이제 참회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절하오니, 모든 죄상을 다 소멸하여 주옵시고 세세생생에 보살도를 행하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는 참회 진언과 축원이 법사의 입으로 외어질 때에는 일동은 한참 동안이나 엎드려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이 모양으로 몸으로 지은 업과 입으로 지은 업과 마음으로 지은 업을 다 참회한 뒤에 다시는 죄를 짓지 아니하고 불, 법, 승 삼보(佛法僧三寶)를 공경하여 빨리 삼계 인연을 떠나서 청정 법신을 이루어지이다 하는 원을 발하고는 삼보에 귀명례한 후에, “삼보에 귀의하외/ 얻잡는 모든 공덕/ 일체유정에 돌려/ 함께 불도 이뤄지다.” 하고는 나중으로, “이몸 한 몸속에(我今一身中)/ 무진신을 나투와서(現無盡身)/ 모든 부처 앞에(遍在諸佛前)/ 무수례를 하여지다( 一一無數禮)/ 옴 바아라 믹, 옴 바아라 믹, 옴 바아라 믹.” 하는 보례게(普禮偈)와 보례진언(普禮眞言)을 부르고는 용선 대사는 경상 위에 놓았던 축원문을 들어서 무거운 음성으로 느릿느릿 읽었다.

“오늘 지극하온 정성으로 재자 명주 날리군 태수 김혼공은 엎데어 대자대비 광음대 성전에 아로이나이다./ 천하 태평하여지이다./ 이 나라 상감님 성수 무강하셔지이다./ 큰벼슬 잔벼슬 하는 이 모두 충성되어지이다./ 백성이 질고 없고 시화 세풍하여지이다./ 불도 흥황하와 중생이 다 죄의 고를 벗어지이다./ 이 몸과 아내와 딸 몸 성하옵고 옳은 일 하여지이다./ 딸 이번에 모례의 집에 시집가기로 정하였사오니, 두 사람이 다 불은 입사와 백년 해로하옵고 백자 천신하옵고 세세생생에 보살행 닦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몸 죄업 많사와 아직 아들 없사오니 귀남자 점지하여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위의 인용문은 소설 〈꿈〉에서 태수 김흔 공 가족들이 세달사에서 불공드리는 장면이다. 법당에서 법사와 스님, 그리고 달례 가족이 행하는 관음참회예문의 진언 의식을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관음예문은 ‘관세음보살을 초청하여 덕을 찬양하고, 보살핌을 발원하는 관음신앙 의식’이다. 그 의식 절차는 거불(擧佛)→보소청 진언(普召請眞言)과 청사→관세음보살 도량 초청→귀의 예를 통해 관세음보살에게 참회하는 진언을 외우며 발원하면 된다.

불교를 아는 분이면 익히 알지만, 관세음보살은 현생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원해주는 보살이며,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중생들을 제도하는 보살이다. 위의 인용문의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은 관세음보살 진언으로 모든 업을 소멸하기 위해 드리는 진언이다. 이에 반해 지장보살 진언은 멸정업진언(滅定業眞言)으로, 이미 잘잘못을 통해 업을 생성한 중생이지만, 그 업까지도 소멸시키겠다는 지장보살의 큰 원이 담긴 진언이다.

이러한 관음참회예문 장면을 위에서처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소설가 이광수의 박식한 불교 교리, 그리고 소설 창작에 대한 깊은 조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는 일제 강점기에 친일행각을 했던 자신의 과거 잘못을 참회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광복 후 파행적으로 진행되었던 우리 해방공간의 역사와 사회문제를 다루지 않고 불교소설인 〈꿈〉을 창작한 것도 그런 맥락일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것도 그러하다. 위의 참회게의 “백겁에 쌓은 죄를/ 일념에 씻어지다/ 마른 풀 사르듯이/ 모조리 사르어지다”처럼 과거의 잘못을 불태워 소멸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3. 대승불교사상의 소설적 가치로서 수용



한용운(1879~1944)


이광수의 〈꿈〉 이외에 잘 알려진 불교소설은 〈이차돈의 사〉와 〈원효대사〉이다. 이 소설들은 불교 모티프 취향적 역사소설이다. 양자의 공통적인 특징은 시대적 배경을 신라시대로 설정하고 있다는 점과 세속적인 사랑의 욕망과 불심과 불법과의 갈등, 그로 인해 성(聖)과 속(俗)의 변증법적 합일을 제시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불교 역사소설인 〈이차돈의 사〉와 〈원효대사〉는 순교자의 영웅적인 삶과 대승불교의 실체가 어떻게 보여질 수 있는가를 살펴볼 수 있었고, 〈꿈〉은 신화원형적 불교소설의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었다.

한용운의 장편소설 〈박명(薄命)〉은 이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불교 역사소설도 아니고, 삼국유사 신화원형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계모설화 모티프와 인신매매 모티프 소설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용운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부터로 장편소설 〈흑풍(黑風)〉(1935년), 〈후회〉(1936년), 〈박명〉(1938), 단편소설 〈죽음〉 등 몇 편의 소설이 전한다.

소설은 장르 특성상 타 장르보다는 직접적으로 현실세계를 반영한다. 불교는 현실초극 종교이며, 초역사성과 초시대성을 지닌 영원의 종교이다. 상구보리만을 추구하지 않고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불교소설은 현실을 사실적으로 반영한다. 그래서 소설 속의 불교사상은 소승불교 사상보다는 대승불교 사상 즉 ‘자리이타행(自利利他行)의 표상인 보살사상’을 추구한다. 또한 ‘생사즉열반’이라는 말은 불이(不二)를 실천하는 보살사상이다. 그래서 부처를 ‘초세간적(超世間的) 존재’로 본다. 깨달음에 도달했으나 중생구제를 위해 성불을 뒤로 미루는 보살을 이상상으로 삼고 속세간에 존재한다. 이로 인해 소설에서 수용할 수 있는 불교사상은 대승불교 사상이다.

한용운의 장편소설 〈박명〉은 여주인공 장순영(張順英)의 일대기를 순차적으로 그린 소설이다. 고대소설과 신소설의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개연성이 없는 구성 즉 우연성의 남발, 그리고 인물 성격 창조의 전형성 등이 근대소설의 특성을 드러낸다. 장순영, 그녀는 조실부모하고 시골에서 계모의 슬하에서 핍박을 받고 살다가, 송씨 부인과 친구 운옥의 유혹에 빠져 상경하게 된다. 수양 엄마가 되어준다는 송씨 부인과 친구의 유혹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하는 단초가 된다. 그녀는 상경 중 원산항에서 실수로 바다에 빠지게 되는데, 그때 한 남자가 그녀의 생명을 구해준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 대한 보은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비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서울에 오자 송씨 부인은 약속과 달리 그녀를 색주가에 팔아넘긴다. 하지만 그녀는 색주가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우연히 생명의 은인인 남자 김대철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향락주의자인 남편은 경제적으로 무능력자였고 이혼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아이를 잃는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그녀는 마약중독자로 다시 나타난 남편을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다. 남편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 그녀는 친구 운옥으로부터 원산항 앞바다에서 자신의 생명을 구한 사람이 남편인 김대철이 아니라 환희사의 여승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로 인해 그녀는 남편이 죽자 불가에 귀의하게 된다. 이것이 장편소설 〈박명〉의 대략적인 줄거리이다.




이 소설의 스토리 라인은 평범하고 믿음을 배반한 사람들 때문에 비극적으로 산 한 여성의 삶을 그렸기 때문에 전형적이고 진부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소설에 보여주는 종교적 가치는 대승불교의 이타행의 하화중생 사상이다. 대승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관(中觀)과 유식(唯識)을 이해해야 한다. 중관사상은 용수가 확립한 이론이다.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실체성을 믿는 나머지 영원불변성에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온갖 번뇌망상에 시달린다. 이러한 마음을 초극한 경지를 용수는 ‘무상정득각의 세계’라고 한다. 그리고 그 세계를 중도의 세계라고 부른다. 한용운의 〈박명〉에서 장순영의 삶은 보은한다는 마음으로 남편에게 희생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고 부질없다는 생각 때문에 불가에 귀의하는 것은 중관과 유식설을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생(生) · 멸(滅), 상(常) · 단(斷), 일(一) · 이(異), 거(去) · 래(來) 등 이러한 여덟 종류의 극단적인 상반된 4가지의 성격을 부정한 세계가 팔부중도관(八不中道觀)인 중관과 용수의 허무주의적 사상을 보완하기 위한 사상인 미륵사상, 무엇도 집착하지 않는 무착(無着) 그리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대승 행위인 세친(世親) 등을 실천하기 위한 보살행이다.

소설이라는 문학 양식이 작자의 자아표현의 주 도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반영하는 방편으로 적절한 양식이라고 할 때, 불교를 모티프로 하는 불교소설은 상구보리보다는 하화중생을 현현해내고 실천하는 데 적합한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문학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 이전의 소설인 한용운, 이광수, 김동인의 불교소설은 자명하다. 그리고 그 후에 전개될 불교소설의 전망을 가늠케 해준다. ■






유한근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월산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