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07

“운허ㆍ이광수 ‘망국의 한’ 서로 같아” - 불교신문

“운허ㆍ이광수 ‘망국의 한’ 서로 같아” - 불교신문



“운허ㆍ이광수 ‘망국의 한’ 서로 같아”

 승인 2008.09.27 10:04 호수 152 댓글 0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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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철 교수, 춘원연구학회 논문서 주장

독립운동과 역경사업 등을 통해 근현대 한국불교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운허(耘虛, 1892∼1980)스님. 또 운허스님의 8촌 형으로 한국근대문학의 선구자였지만 친일행적으로 스님과는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일제 강점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한집안 두 인물의 삶을 재조명한 논문이 소개돼 눈길을 끌었다.



신용철 경희대 명예교수가 ‘춘원 이광수와 운허스님-망국과 해방, 분단과 전쟁을 겪은 20세기의 두 위인’을 주제로 지난 9월25일 2008년도 춘원연구학회 세미나에서 발표한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신용철 교수는 서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강당에서 열린 이날 세미나에서 “춘원의 생애에서 가족을 제외하면 어릴 때부터 1950년 납북될 때까지 서로 많이 접촉하고 영향을 미친 사람은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같은 해에 태어난 8촌 동생 운허스님(속명 이학수)”라고 소개하고 “두 인물이 가는 길이 달랐어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존경했으며 일생동안 돕고 의지하는 친척이자 친구였다”고 밝혔다. 또 “이들의 발자취에서 일제 식민시대를 살았던 당시 지식인들의 고뇌와 갈등을 엿볼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신 교수에 따르면 춘원과 운허스님은 조선말, 일제 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대한민국 정부수립 등 격변의 시기를 살면서 우리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두 인물 모두 무너져 가는 대한제국을 보면서 비통해 했고,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찾는 일에 몸을 바쳤다.



하지만 난국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전혀 달랐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발전된 일본에 유학하며 문물을 접한 춘원은 조국의 낙후를 가슴 아프게 고민했고, 외국을 가 본 적이 거의 없는 운허스님은 전통적인 민족의 역사 속에서 답을 찾았다. 신 교수는 “두 사람은 모두 파란만장한 생애에서 구불구불한 길을 바로 가느라 애썼지만, 춘원은 결국 민족을 배반하고 굴절된 길을 선택함으로써 후세의 비판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신 교수는 같은 시기를 살며 엇갈린 행보 속에서도 밀접한 만남을 이어갔던 두 인물의 인연에 주목했다. 그는 “불과 50리 떨어진 동향의 8촌간인 두 사람의 인연은 1950년 춘원의 삶이 끝나는 시기까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됐다”면서 “특히 춘원에게 운허스님은 가정의 부유함이나 꾸밈없는 성품 등에서 어릴 적부터 부러움의 대상이자 의지처였다”고 밝혔다.



신 교수는 또 춘원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것도 운허스님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허스님은 일제 말기 당시 친일행적 문제로 괴로워하는 춘원에게 <법화경>을 건네며 위로했고, 이후 춘원은 참회하는 심정으로 불심에 더욱 귀의해 <법화경>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허정철 기자 hjc@ibulgyo.com







[불교신문 2463호/ 10월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