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2

자본주의 넘는 새로운 변혁 주체, 생태주의+노동운동 < 생명·생태·평화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자본주의 넘는 새로운 변혁 주체, 생태주의+노동운동 < 생명·생태·평화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자본주의 넘는 새로운 변혁 주체, 생태주의+노동운동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 소장

키워드#생태주의운동#녹색노동운동#자본주의이후
  • 기후문제 해결할 주체로서 ‘녹색계급’의 책무는?

  • ‘생산 확대’ 아닌 ‘거주 가능 조건 유지’로 방향 전환

  • 자본주의 변혁 세력으로 사회주의 대신 생태주의

  • 생태주의와 노동운동 조응…녹색노동운동으로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녹색불교연구소소장

박태주 위원이 지난 8월 초에 쓴 글 “기후위기 앞에서 ‘녹색화’, 연대 지향하는 노동운동”과 8월 말에 쓴 “녹색노동운동, 고용문제 해결과 생태전환 함께 간다”는 제목의 글에 대하여 답글을 쓴다. 그동안 필자의 게으름 때문에, 또 몇가지 일 때문에 차분하게 글을 쓸 여건이 부족했다.

노동운동에서 녹색노동운동으로

박태주 위원의 최근 글은 기후위기에 정면으로 맞서는 전략으로 ‘정의로운 전환’을 넘어 노동운동의 녹색화를 의미하는 녹색노동운동을 분명히 제안하고 있다. 그 내용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구온난화를 막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활동에 노동운동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더욱이 노동운동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도 탄소중립을 실천하고 기후정의를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두 번째 핵심 내용은 불평등을 완화하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앞으로 저성장사회가 고착되면 불평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특히 기후위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욱 심각한 피해를 끼치기 때문에 불평등의 해소가 중요한 과제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노동운동 차원에서 정규직, 비정규직, 하청노동자 등이 받는 불평등을 완화시키며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해결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중요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 고용불안과 불평등 같은 ‘오래된 위험’과 기후위기와 같은 ‘새로운 위험’을 통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기존 단체협약과 녹색 단체협약이 함께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기후운동이 주장하는 탈성장 전략은 대중의 동의를 받기는 어렵지만, 무한성장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며, 실제로 저성장 체제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성장 이후의 사회, 포스트 성장에서 노동의 변화, 노동조합의 모습과 정체성은 어떠해야 하는지 과제라고 논의를 열어 놓고 있다.


기후변화 운동가 그룹 라스트 제너레이션(Last Generation) 활동가들이 8월 31일 독일 남부 뮌헨 도심의 거리에서 "석유는 죽인다"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24시간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4.8.31. AFP 연합뉴스

기후환경운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 동안 박태주 위원은 기후 해결에 있어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동맹적 주체 임을 강조했다. 노동운동이 기후환경 문제를 환경 단체만의 의제로 떠넘겨서는 안되며, 동일한 책임자적 주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강조는 필자가 이전 글에서 노동운동이 자본과 더불어 성장동맹의 한 부분이라는 비판에 대한 반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기후 문제의 성격상 계급운동처럼 주체가 명확하지 않다. 과거 봉건사회와 자본주의사회에서 가장 큰 피해자이자 변혁의 중심 주체로 간주되었던 노동자, 농민들이 기후위기 시대에 그와 같은 변혁주체의 지위를 누릴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이 말은 노동자, 농민이 중심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 운동 자체가 누가 중심 주체이고 누가 제휴의 대상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의미이며, 한편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연 기후문제를 해결할 주체로서 녹색계급이 있을까. <녹색계급>이란 책을 쓴 브뤼노 라투르와 니콜라이 슐츠의 논의가 있다. 그들은 이 책에서 녹색계급은 형성되고 있는 과정에 있으며 새로운 제3신분의 처지에 있다고 말한다. 이 계급은 다른 계급들이 ‘포기하거나 배반한 문명’ 전환 과정을 시작하려는 집단이며 모순이 심화될수록 늘어나고 결집될 것이라고 말한다. 포기하거나 배반한 계급이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옹호했던 계급이며, 이들은 모두 생산/생산주의와 국민국가라는 차원(지평)에 사로잡혀, 그것을 ‘감싸고 생성’시키는 지구적 차원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거나 인정하지 못했고, 결국 지구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동시에 사회를 회생시키는 데에도 실패한 집단이라고 비판한다.

마치 생태 맑스주의자인 제임스 오코너가 전통적인 맑시즘이 역사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조응”으로 바라보는 잘못을 비판하며, “생산력/생산관계”와 자연이라는 “생산조건”을 고려한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는 논의와 유사하다. 라투르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계(우리가 살아가는 수단–인간세계)”와 “우리를 먹여 살리는 세계(우리가 살아가는 장소로서의 세계-지구생태계)” 두 개의 세계가 있으며 후자가 전자를 가능케하는 기반인데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후자를 소비하고 배경으로 취급하며 전자와 후자의 조화를 파괴했다고 비판한다.


기후변화 운동단체 '절멸 반대'(Extinction Rebellion)의 활동가들이 8월 30일 영국 윈저에서 그들의 '업그레이드 민주주의('Upgrade Democracy') 점거운동의 일환으로 롱워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3일간의 대규모 점거 활동기간 동안, 활동가들은 새로운 영국 정부에 기후 행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화석 연료 배출을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2024.8.30.EPA 연합뉴스

‘생산 확대’가 아니라 ‘거주 가능 조건 유지'로 방향 전환

맑스는 생산수단을 소유했는지 여부에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누지만, 라투르와 슐츠에게 중요한 것은 재생산 수단의 소유 여부다. 그래서 녹색계급의 책무는 인간세계/인간의 ‘생산’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더 큰 ‘생성’의 세계에 집중한다. 그래서 방향 전환은 ‘생산의 확대’가 아니라 ‘거주 가능 조건을 만드는 것, 거주할 수 있는 지구환경의 유지’를 우선한다. 이러한 역할을 할 녹색계급은 지구시스템을 지속시키는 과학자, 창의적인 기술자들과 발명가, 기후난민, 기후변화 피해자, 기후활동가, 선량하고 평범한 시민, 농민, 텃밭 가꾸는 사람, 기업인과 투자자, 노동자와 종교인 등 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은 공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생자이기도 하며, 이들이 단일대오로 수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방향으로의 분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태주의, 생명운동은 과거 사회주의가 갖고 있던 전복성을 이어갈 새로운 가치이다. 노동운동은 기후위기의 극복을 위해 노력을 해야 하며, 동시에 박태주 위원이 강조한 불평등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변혁세력으로서의 노동운동 본래의 역할을 생태주의에게 떠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콜롬비아의 노동조합원들이 8월 7일 수도 보고타에서 구스타보 페트로 대통령 정부를 지지하는 칩회에 참석하고 있다. 2024.8.7. AFP 연합뉴스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하는 노동조합인 '팀스터스'의 노조원들이 8월 22일 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에서 소속 회사가 폐쇄된 뒤 캐나다 국영철도(CN) 본사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2024.8.22. 로이터 연합뉴스

사회주의 대신 자본주의 변혁세력으로 등장한 생태주의

환경관련 운동은 이념적으로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를 구분한다. 환경주의는 오염된 자연환경의 복원과 정화, 심화된 기후 문제의 해결에만 주목한다. 그래서 연관된 경제와 정치, 철학과 사상 등의 페러다임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생태주의는 환경위기를 시그널(Signal)이자 메시지로 보며, 위기의 해결뿐 아니라 그것을 야기시긴 정치경제 시스템과 가치와 사상 등의 페러다임 전환에 동시에 관심을 갖는다. 이념적으로 앞의 환경주의는 환경개량주의로 비판받고 있고, 뒤의 운동은 생태주의운동으로 불린다. 이러한 생태사상에 인간의 정신성, 영성의 중요성이 결합되어 생명운동으로 불리고 있다. 필자는 노동운동이 기후환경만 문제삼는 환경개량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생태주의적 가치를 포괄하며 생활양식과 정치시스템, 의식의 전환까지 관심을 갖는 생명운동으로의 정체성을 갖는 운동이 되길 권유하는 바이다.

이제까지 필자는 노동은 자본과 대립했지만 결과적으로 대안성, 전복성은 사라지고 서로를 성장시킨 성장동맹적인 역할을 하여 결국 기후위기의 원인 주체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박태주 위원은 이런 표현이 ‘무섭고 파괴적’이라고 비판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으로 노동운동은 이념과 실천에서 자본중심의 사회를 뛰어넘어 대안적 체제를 모색해 온 변혁의 선도적 주체였다. 그런데 노동운동은 여전히 이러한 변혁성을 자기활동 내용으로 삼을 수 있을까? 환경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정치적 의제에 목소리를 내며 참여하지만, 자본주의를 뛰어넘으려는 의지와 고려도 없고, 그저 자본주의의의 허점을 매꿔주면서 지속시키는 역할 속에 임금이나 일자리 문제에만 집중한다면 결국 경제적 조합주의로서 성장동맹의 일원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사회주의도 결국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한정된 자원 채굴을 기반으로 한 생산력주의를 추구해 온 이념으로, 위기의 공동정범으로 평가되었고, 더욱이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그 대안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 노동운동에게 요구되었던 변혁적 과제가 더 이상 자신의 의제가 아니게 되었다면, 과거의 통일, 인권, 여성, 환경운동을 맨 앞자리에서 이끌었던 지도력이나 선도적 지위에서 누렸던 사회운동에서의 역할과 위치는 재배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의 붕괴가 곧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인식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같은 학자들이 헤겔과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의 역사는 끝났다고 주장했고, 미국 등 서방 자유민주 진영의 주도로 자본주의는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1992년 브라질 리우 환경회의를 통해 기후위기로 대표되는 각종 생태적 위기를 확인하면서 이제껏 사회주의와 경쟁하느라 보지 못했던 뒤편에 더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는 위기의 원인자로서의 자본주의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무너졌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자본주의의 우월성이 드러났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사회주의 위기와 비교할 수 없는,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산업사회의 전 지구적 위기성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대안의 희망이 사라진 그 시점에 GDP(국내총생산), GNP(국민총생산)로 표현되는 생산중심의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전환적 대안사회를 주장하는 새로운 전복적 세력으로 생태주의와 녹색운동이 등장했다. 어쩌면 과거 노동운동에게 주어진 변혁과제를 생태주의가 떠맡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2020년 9월 12일 미국 캔자스주 에밋 인근의 일몰 무렵, 제프리 에너지 센터 ​​석탄화력 발전소의 굴뚝이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2020.9.12. AP 연합뉴스

전환사회를 위한 생태주의와 노동운동이 조응하려면

이 생태주의적 변혁은 한 국가로 한정된 변혁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를 포함하면서 의식과 영성, 정신성,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와 미래 세대 등을 고려한 총체적인 변혁이다. 그래서 문명적 전환을 도모하는 거대한 변혁이라는 의미에서 ‘개벽’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이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변혁적 의지를 갖는 세력이라면 생태주의가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과제에 함께 조응해야 할 것이다. 생태주의는 세계를 가르고 분리하며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인식을 폐절하고 모두가 연결되고 관계 맺고 있는 그물망적 사고를 토대로 해야 하는데, 노동운동이 그런 인식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태주의는 더 이상 지하자원의 채굴과 수탈을 통한 무한 성장을 도모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현재 이미 노출된 자원의 재사용을 강조하면서 이제 물질적 생산과 소비가 아니라 정신적 풍요와 관계 및 협력을 중시하는 사회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노동운동이 이러한 논리를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

생태사회는 거대한 국민국가가 아니라 분권화된 지방자치, 순환사회를 단위로 하며, 그렇게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일을 대안사회의 근본단위로 생각하는데, 노동운동의 비전은 이러한 내용과 어떻게 조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생태주의는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식물과 흙과 강과 산과 바위 등 비인간 존재들과의 평등을 지향하는 관계를 모색하는데, 노동운동이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을까? 또한 지금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의 이해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태주의의 고민을 노동운동이 자기 의제로 삼을 수 있을까?

노동운동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을 여전히 중요한 자기 과제로 삼고 있다면, 현 시스템을 넘어서려는 생태주의와의 깊은 연대는 대단히 중요하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생태주의운동은 아직 주체도 분명하지 않은 오합지졸로 보이고, 노동운동에 비해서도 단일한 대오도 집단적 세력도 경제적 재력도 갖고 있지 못하지만, 점차 거대하게 응집되고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현재의 사회시스템을 가장 강력하게 흔들며 변혁하려는 동력임에 틀림없다. 노동운동이 기후위기 생태운동에 결합하면서, 갈수록 깊이 과제를 자기화하면서 거대한 문명전환과 변혁의 중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