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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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물질주의도 하나의 형이상학이다
-올더스 헉슬리, <영원의 철학>에 대한 변명
그 중에서도 인도 힌두이즘의 베단타철학을 주춧돌로 삼고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신비전통과 동양의 불교와 노장사상을 기둥으로 세워 이 책을 구성했다.
대중교화를 위한 유치원적 법문이 횡행하는 제도로서의 종교 너머에 진리를 직접 겨냥한 신비전통이 동서고금을 통해 보편적으로 전해져오고 있다는 것이다.
책 머리에서 헉슬리는 ‘영원의 철학(philosophia perennis)’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원의 철학은 사물 생명 마음의 세계에 본질적인 ‘신성한 실재(divine reality)’가 있음을 인정하는 형이상학으로,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온 보편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이 책에서 설파된 교설이 과학적 논증 너머의 형이상학이라는 이유로 헛소리의 향연에 불과하다는 견해가 제기될 수 있다. 특히 모든 신비적 사고를 배제하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우주와 생명의 실상에 접근하려는 지식인들의 경향성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자연과학과 형식논리로 증명되지 못할 운명을 가진 이 책의 논지는 형이상학적 사유라는 이유로 무시되어도 좋은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형이상학은 그 어떤 과학과 철학도 피해나갈 수 없는 사유의 얼개로서 저변에서 우리 사고를 지탱해주고 있다.
과학적세계관을 표방하고 있는 그 어떤 철학과 사상조차도 형이상학이라는 비계 없이는 세계관을 구축해낼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이 전개하고 있는 형이상학은 존재와 의식에 관한 두가지 대등하고 대립적인 형이상학 중의 한 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티벳불교의 수장 딜라이라마는 그의 책 <한 원자 속의 우주>에서 과학적세계관 자체도 하나의 형이상학적 입장이라고 단언한다.
“이 세계에 대한 과학관이 모든 지식과 인식 가능한 것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견해는 관찰자의 주관성, 우발성과 관계없는 객관적인 세계가 있다는 가정을 전제한다”고 그는 포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이 관점의 바탕을 보면, 분석의 마지막엔 물리학에 의해 기술되고, 또 물리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물질이 존재의 모든 것이라는 가정이 놓여있다. 따라서 이 관점은 심리학이 생물학으로, 생물학이 화학으로, 또 화학이 물리학으로 환원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가정을 이루는 아이디어들은 과학적 지식들로 구성되지 않고, 결국 철학적 형이상학적 관점을 나타내는 것임을 딜라이라마는 지적한다.
그는 “실재성에 대한 모든 측면들이 물질 및 그에 대한 여러 입자들로 환원된다는 견해는 사실 조직화된 지성체가 실재성을 창조하고 조정한다는 견해만큼이나 하나의 형이상학적 견해라고 여겨진다.”며 “인간존재와 실재성 그 자체는 오늘날의 과학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것 그 이상의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딜라이라마는 현대인들의 철학적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가장 최근의 과학적 성과인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적 사유를 적극 받아들여 불교를 재해석해온 종교인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파동방정식을 도출해내어 양자역학의 초석을 놓은 과학자 슈뢰딩거도 형이상학에 대해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그의 과학적 업적 못지않게 철학적사유에도 전력을 기울였는데(그의 역작인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생물학계에 미친 영향은 지금도 그 파장이 이어져오고 있을 정도로 사유가 심원하다) 그는 과학자답게 정밀한 논리로 형이상학이라는 주제를 파고 들었다.
슈뢰딩거는 그의 책 <나의 세계관 Meine Weltansicht>에서 합리주의 진영, 즉 자신의 동료 자연과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세계관이 이런 종류의 비아냥을 받게 될 것임을 의식한다고 했다.
“여보게, 이런 걸로 우릴 괴롭히지 말게. (개개의 의식영역이 분리되어 있음에도 공동의 세계를 체험하는 것은 )물질적 세계가 (개개의 의식에) 공통적으로 주어졌기 때문이라는 가정은 지극히 자명하고 억지스럽지 않지. 누구나 아주 소박하게 이런 가정을 하는 것이고, 이런 가정은 형이상학이나 심지어 신비주의와는 그 자체로 무관하다네.”
이렇게 말하는 대다수의 동료들에게 슈뢰딩거는 바로 그 형이상학과 신비주의 양측면에서 반박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첫째로 우리의 광범위한 공동체험의 원인으로 공통의 물질적 세계를 가정하는 것은 두 차원의 문제를 혼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일치를 우리가 인식하는 것과 그러한 일치가 존재함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전자는 상당정도 구조적으로 일치함을 상호검증할 수 있지만 후자는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상반된 비합리적이고 신비적인 가설로 나아갈 수 있다.
- 하나는 이른바 실재하는 외부세계라는 가설이고 또 하나는 우리 모두가 실은 일자의 다양한 측면이라는 가설(동일성 교설)이다. 즉 둘 다 형이상학적 가설임에는 마찬가지니 자신만 그렇지 않다고 상대방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인 것이다.
- 둘째로 감각지각 및 의지와 관계된 우리체험과 물질세계 사이의 가설적 인과관계는 자연과학에서의 인과관계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 즉 이런 관계 자체는 ‘그것 때문에’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 다음에’ 관찰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 중 한 쪽인 감각지각 또는 의지만이 참으로 지각 또는 관찰가능한 반면 다른 한 쪽인 물질적 원인 또는 물질적 결과는 그저 상상을 통해 구성된 것이 때문에 오히려 이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신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슈뢰딩거는 실재하는 물질적 세계를 가정하는 것 또한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물질외부와 정신내부는 하나로 이어져있다는 현대 뇌과학의 기본전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과학자로서 매우 특이하게 그는 이 모든 것이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물질의 자기 전개현상이 아니라 하나인 정신의 발현현상(영원의 철학에서 뿌리로 삼는 동일성교설)으로 본다.
사실 외부세계의 실재는 과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으며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외부세계라기보다는 외부세계라는 관념이기 때문에 어느 관점을 취해도 과학으로 검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임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동일성교설이 지니는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윤리적내용과 우리의 허망한 삶에 제공하는 깊은 종교적 위안을 생각해볼 때 물질주의의 손을 들어주기가 어렵다는 것이 슈뢰딩거의 견해이다.
딜라이라마도 지적했듯이 극단적인 과학적 물질주의의 주요문제들 중 하나는 편협한 통찰력 때문에 허무주의가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슈뢰딩거는 지난 천오백년 동안 서양의 사유는 모든 초월자를 영구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목적인데 원래 겨냥했던 지식의 영역에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삶의 영역에서는 실천적으로 제거되기 시작했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그의 사후 반백년이 지나기 전에 우리의 삶을 떠받쳐왔던 모든 윤리적 종교적 철학적 기둥들은 무너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고대말기와 끔찍하리만치 닮았다. 종교와 윤리가 전반적으로 결핍되었다는 점과 실용적 지식이 보편적 형식과 토대에 있어서는 굳건하고 안전한 궤도에 들어섰다고 믿는 바로 그 점에서 두 시대는 닮은 것이다. 그런 보편적 형식과 토대는 고대에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었고, 오늘날에는 근대 자연과학이다. 그 길은 2천년만에 다시 한번 우리를 파산으로 이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 횡행하는 마르크시즘을 비롯한 유물론은 우리의 인식 바깥에 외부세계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는 확신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다. 슈뢰딩거나 되니까 과학적세계관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속류 유물론의 권위에 저항하여 이런 철학적 사유를 떳떳하게 전개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고보면 요즘 들어 형이상학적 질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어렴풋이 그런 종류의 의문이 생긴다해도 그런 의문자체가 우스꽝스럽고 바보 같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시대분위기 때문에 다들 숨기고 싶어한다. 이는 현대과학의 발전으로 그 질문의 소구력이 상당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과학의 권위에 짓눌려 자유로운 사고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인 듯도 하다.
외부세계의 실재성과 동일성교설 중 어떤 것을 취할 것이냐는 결국 논증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만 그 선택에는 우리 인류가 장구한 세월동안 발전시켜왔던 윤리감정과 신비체험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걸려있다.
나는 경험하지 못하고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직접 보고 알았다는 인류의 증언은 역사적으로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종교의 근거일뿐만 아니라 영원의철학이 전승되어온 근거이기도 하다. 현대과학수준에 고착된 물질주의 세계관이 휩쓸고 있는 이 시대 사상적 풍토는 이러한 인류의 증언을 정신이상이나 환상으로 치부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형이상학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지배적인 형이상학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 헉슬리나 되니까 사회주의가 휩쓸고 있는 당대 영국의 지성계에서 홀로 지배적인 유물론적 형이상학에 반기를 들고 이런 영원의 철학을 집대성하고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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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박
'과학적으로 증명된거냐?' 이걸 모든것에 적용하는데 심한 거부감을 느낍니다. 직관과 통찰, 상상력이 인류발전의 요체인데. 과학이란것도 사실 별로 과학적이지도 않고요.
박정미
박동원 저도 그렇습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두가지 입장이 대립하고 있는데 한 편만을 들고 있으면서도 상대편을 무지몽매하다고 치부하는 그 과도한 자기확신이 우리시대의 지배적 경향성인것 같습니다.
동원박
박정미 특히 한의학을 경멸하고 무시하는걸 보면. 한의학은 통계의학이 아니고 직관과 통찰이 더 중요한 포인트인데. 과학의 눈으로 보지못하는 세계가 있다는걸 모르고. 피라미드니 마추픽추니 현대 과학으로 도저히 풀지못하는 고대의 기술들이 인류의 직관과 통찰의 산물이란걸 모르고 외계인설을 들고 나오지요.
박정미
박동원 그렇습니다.나는 모른다. 라는 것을 아는게 지성의 출발점이고 진정한 대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