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09

[펌] 지옥의 역사 앨리스 K. 터너 지음/이찬수 옮김

[펌] 지옥의 역사 (The History o.. : 네이버블로그

[펌] 지옥의 역사 (The History of Hell) - 앨리스 K. 터너  공부(사회)   
2005. 5. 12. 11:35
복사https://blog.naver.com/iocean74/20012592912
출처 어디서 왔지? 어디로 가지? | sevang
원문 https://blog.naver.com/sevang/20010687940
    지옥의 역사1
    지은이:앨리스 K. 터너 지음/이찬수 옮김
    
  
    
    머리말
  인류는 사후 세계를 믿는다. 또 육체의 기능이 멈춘 뒤에도 의식이 있는 인격체가 생존한
다고 믿고 있다. 인류학자, 고고학자, 사회학자, 고전학자, 비교 종교사학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문화에서 이런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한다 .우리는 우리 일부가 어
디에선가 계속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 단순 소박한 진술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살
펴보면, 사후 존재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지만--문화와
신념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우리는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은 자들이 우리를 위해 신
에게 중재를 하기도 하고, 경고하거나 무엇인가를 간청하기 위해서, 아니면 영계의 알 수 d
없는 목적을 위해 우리 앞에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산 자
들도 죽은 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는 죽은  자의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를 공인
된 절차에 매장하거나 화장함으로써 죽은 자가 사후 세계에서 바른 대우를 받도록 하는 것
이다. 우리는 기도하고 제물을 바치거나 또는 무시함으로써 사자들에게 영향을 행사한다 .몇
몇 문화권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인간이든 동물이든 새로운 생명체로 환생한다고  믿는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사후 존재가 죽은 자의  땅에 영원히 머물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도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살과 피로 된 몸의 분자들이 종국에는 물리적으로 부활한다고 믿기도 한
다 .
  대부분 사람들은 논리를 뒷전으로 미룬 채, 이와 관련한 온갖 견해들을 믿는다 .심지어 오
늘날과 같은 세속적 시대에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아서 아저씨'가 무덤
속에 묻혀 있지만 그의 영혼은 자비로운 하느님의 호의로 저 높은 곳 어딘가에 머물고 있으
며, 영매나 심령술사를 통해서 또는 암시나 예언이 담긴 꿈속에서 그의 유령이나 영혼을 만
날 수 있으며, 장차 다가올 심판의 날에는 그의 육체가  인간 최상의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
라는 등등의 말을 다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한두 세대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유령이 특별한 장소나 어떤 개인에게  나타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믿거나, 적어도  반쯤은 믿는다 .그보다 더 이전
시대에는 죽은 사람이 단순히 '아서 아저씨'가 아니라 '아서 왕'이라면,  그가 하늘에 안장되
었다가 언젠가 부활할 것이며, 또 일종의 반영구적인 마취 상태로 잠들어 있다가, 부활할 것
이며, 또 일종의 반영구적인 마취 상태로 잠들어 있다가, 필요할 때 또는 최후 심판의  나팔
소리가 울릴 때 소환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했을 것이다.
  한편 그가 만일 '성 아서'였다면, 사람들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그 시체의 가죽과 뼈를 가
져갔을 것이다. 이교도가 아니라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문자 그대로  그의 육신을 갈갈이 찢
어서 사원으로 옮겨, 병들고 가난한 자들의 간청에 부응하도록 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
게는 죽은 성인의 손가락뼈나 그의 옷 한 조각으로도 기적적인 치료나 중재가 일어날 수 있
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영혼 또는 지속되는 인격이 사후에 머무르는 장소로서 기독교가 인정하는 두 가
지 중요한 장소 중 하나인 '지옥'을 다룬다. 세상의  다른 종교들에도 나름대로의 지옥이 있
는데, 그러한 지옥을 묘사한 장면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유사한 점이 많다. 힌두교는 수백
만 가지나 되는 지옥이 존재한다.  불교에는 여덟 개의 대 지옥에서부터  수천 개에 이르는
지옥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 중 어떤 것도 영혼을 영원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어떤 종교도 기독교만큼 지옥을 중시하지는 않는다. 기독교에서 지옥은 전설, 신화, 종교, 교
리, 그리고 긴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는 심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의 층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환상적이면서 무시무시한 지하의 왕국이 되었다.
  나는 이 책에서 신학적이거나 심리학적 연구보다는 지리학적 연구에 치중했다. 지옥의 모
습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지형도는
시대에 따라 어떤 식으로 변화했는가?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지옥이 지닌 매력은 보통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시인과 예술가들은
항상 지옥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기이한 방식으로 그것을 탐구하기도 했다. 지옥은  이제
신학적으로 보면 관심밖에 있지만 여전히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요정의 나라나 아틀란티스,
발할라 또는 다른 수많은 상상의 장소들보다 더 '현실적인'것  같다. 그 이유는 고대부터 전
해온 지옥 전통, 그와 관련한 기발한 구상, 분석적 논증, 독단적 교리 등이 집적되어 실제적
인 지형을 갖추었기 때문이며, 저승의 지도를 그려내려는 수 천년 동안의 지속적 시도에 얽
힌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신앙 때문이다. 지옥 경관은 상상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공동 건
설 작업의 성과라 할 수 있으며,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단테, 보
쉬, 미켈란젤로, 밀턴, 괴테, 블레이크 같은 예술의 거장들이 그 작업에 참여했다.
  천국은 다르다. 천국을 묘사하고자 했던 신학자들, 시인들, 화가들,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
은 그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천국이라는 개념을
진주빛 대문과 하프 소리와 둥근 후광이 있는 실제적 장소라기보다는 하나의 은유로 이해했
다. 하지만 이러한 은유도 신의 은총 안에 거하는 영혼의 지복이나 황홀을 제대로 전달하기
에는 턱없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죄인을 처벌하는 지옥은  언제나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아마  그 편이 더
이해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천국이 정신적이라면, 지옥은  기이할 정도로 육감적이다. 지
옥에는 상처를 입히는 고문이 있고, 특히 지옥의 역사에서 일정 기간 동안은 지극히 추잡한
분위기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지옥은 천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음침한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며, 역사상 몇몇 시기의 일부 사람들에게 그것은 낭만적으로 비치기도 했다.
  지옥의 본질적인 면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오락적 측면이다. 진지한 종말론 곁
에는 언제나 파괴적인 희극적 내세관이 함께 했다. 그 웃음은  신경질적인 것 일 수도 있지
만, 그러한 유머가 존재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소위 '묘지 유머'라는 것은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즉, 고대 근동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자의 땅'에  관한 최초의 설화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에는 우리 자신의 공포영화 취미와 스티븐 킹의 소설이 누리는 인기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
는 것이다 .지옥에 항상 유머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나  밀턴을 유머 작
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코 웃음과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
았다. 기독교 역사 중 가장 경건했고 교회의 집회가 흥성했던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에도 '즐
거운 지옥'에 대한 예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은 악마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 악마가 지옥에 거주하는 이상  악마를 다룰 수밖에
없다 .악마라는 주제는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그것은 죄악과 고통의 존재와 같은 지지한  문
제들과 연결된다. 여기서는 악마론 보다는 더 단순한 주제인 지옥론을 다루려고 한다.  그런
데 무수한 악귀들, 그리고 군주 또는 대죄인으로서 악귀들 중심에 있는 악마는 모두 지옥의
거주자이자 관리자들이다 .우리는 거기서 그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 외에  지하
세계의 다른 지배자들도 살펴 볼 텐데, 그 중에는 군주가 아니라 여왕들도 있을 것이다.
  현대인 가운데 상당수가 지옥의 존재를 믿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
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히틀러나  연쇄 살인범 말고 그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
기독교인들에게 물어봐도 정치적인 반대자, 무신론자 또는 다른 종교 신봉자라고 해서 그들
을 지옥으로 보낸다면 그것은 온당치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후기 프로이트 시
대에서 '죄'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논쟁의 소지가 있다. 나 자신도 지옥을 믿지는
않는다. 내가 지옥을 믿었다면 이 책을 쓸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옥은  문학
적으로도 그렇고, 한번쯤 가 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지
옥을 하느님이나 악마에 의한 것이 아닌, 인간이 세운 구조물로서 관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옥의 역사는 상상 속에 존재한 장소에 대한 실제 역사인 것이다.
  초기 교회의 그다지 고상하지 못한 개념들 중에 '꺼림칙한  상상'이란 것이 있다. 바로 지
옥에 떨어진 자들의 고통을 명상하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기쁨의 일부라고 보는 관념이다.
수많은 사보하들 속에서 축복 받은 영혼들이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서있고, 그들의 눈은 혼
돈 속에 불타는 아래쪽을 태연히 응시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천국의 영원한
심야 TV를 시청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서 보면, 지옥의 역사를 더듬어 가는 것
은 우리 자신을 축복 받은 자들의 입장에 놓는 것과  같다. 이렇게 바라보는 지옥에는 연출
된 무대를 보는 듯한 비현실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옥이라는
관념은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 그대로 그들의 삶을 규정하는 공포
스런 실재로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이다.

 

  1.하계
 죽은 자의 땅에 관한 이야기중 우리가  알고 있는 최초의 것은 약  4,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은 이라크 페르시아 만 북부 티그리스-유프라테스 계곡에서 출토된 점토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  여럿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이  수메르
다. 사람들은 20세기가 될 때까지 수메르에 대해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했지만, 현대  수메
르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비인도-유럽  어의 해독과 번역이 가능해져, 우리도  점차 고대의
시가와 신화에 대한 새로운 유산을 점하게 되었다.
 수메르 인은 셈 족에 속하는 아카드 인에게 정복당했고,  그 지역은 주도 바빌론의 이름을
따서 바빌로니아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흔히 수메르 인,  아카드 인, 바빌로니아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흔히 수메르 인, 아카드 인, 바빌로니아 인, 그리고 이웃해 있던 아시리아 인을 통
틀어 메소포타미아 인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신앙과 신화라는 공유하고 있었
다. 다만 종적에 따라, 나중에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던 것과  마
찬가지로 메소포타미아 신들에게도 다양한 이름이 있었다.
 이러한 신과 영웅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토록 일찍이 씌어졌음에도 불고하고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이 이야기들은 그 이후의 종교, 사상, 신화 , 문학, 종말론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
중세 연구가인 하워드 롤린 패치는  그의 저서 [저세상]에서 동양과  서양에 전해 내려오는
지하세계, 또는 저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에 등장하는, 지금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소재를정
리해서 방대한 일람표를 만들었다. 그 일람표에는 산맥, 강, 배와 사공, 다리, 출입문과 수위
들, 영험한 나무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에 다리를 제외한 모든 요소들이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이미 등장하고 있다. (죽은 자의 땅으로 연결되는 친바트 다리 이야기는 훗날 이 지
방의 페르시아 문학에 등장한다.)
 현존하는 메소포타미아 이야기 가운데, 부분적이나마 죽은 자의  왕국을 무대로 하고 있는
것은 네 가지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길가메쉬 서사시]이다. 이 작품은 메소포타미
아의 도시 국가 우루크를 다스린 영웅 길가메쉬를 주인공으로  하는 서사시로서, 수메르 어
판본 이외에도 아카드 어, 히타이트 어, 아시리아어로 된 판본이 있다. 물론 [길가메쉬 서사
시]외에 나머지 이야기들도 알아둘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 4,000년 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 시대의  우주 지형학을 살펴보면, 그리스.로마 신화
나 북유럽 신화에 정통한 사람에게는 의외로 낯익은 부분이  많을 것이다. 예를 들어 800만
신들은 천신에게 종속되어 천계에 살고 있다. 수메르 설화에서  가장 흥미롭고 생생한 이야
기는 천상과 지상의 여왕이 이난나에게 집중되어 있다 .아카드 인은 이난나를 이쉬타르라고
불렀고, 아시리아 인은 아스타르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스토레트라고 불렀다. '돌아올 수
없는 땅'인 '하계'에 머물면서 죽은 자들을 다스리는  여왕은 이난나의 자매인 에레쉬키갈여
왕이다. 인간은 지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과 제 세상은 인접해 있다. 가령 마슈산맥 너머 지
상낙원에는 지복의 섬 '딜문'이 있고,  그곳에는 특별히 선택받은 인간이  자기 아내와 함께
영원히 살고 있다.
우리는 그 밖에 헤브라이즘의 에덴  동산, 헬레니즘의 헤스페리데스 정원, 플라톤이  언급한
아틀란티스, 켈트 전설의 아발론, 해저왕국, 중세 전설의 패왕이 프레스터존 왕국에 대한 이
야기 등을 상기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소들은 모두 이 세상에 있다 .그런데 대체  어디에
있을까?
 '지옥정벌'이야기는 여러 가지 형태로 포장되어 빈번히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이를테면 가장
근원이 되는 이야기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하계로 내려가는
이야기인데, 아주 진지한 모험(아내를 찾으러 가는 오르페우스 이야기)에서부터  지나치게오
도된 모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전문용어로는 그것을 '하강 동기'라고  한다. 우
리가 알고 있는 하강 이야기 중 최초의 것이 바로 수메르의 이난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것이
다.
 그이야기는 이렇다. 정확한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이난나가 자신의 자매인  에레쉬스키갈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천계에서 하계로 하강'하는 것이다. 그녀는 신하  닌슈부르를 불
러 진지하게 자기 뜻을 전하고, 만약 자신이 돌아오지 않을 때  해야 할 일을 지시한다  .그
리고 가장 눈부신 옷과 보석으로 치장하고서 지하세계로 통하는 첫 번째 관문인 청금석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시시콜콜 따지기 좋아하는 문지기에게 걸려 제지당하고, 왕관을 빼어 놓은
후에야 그 문을 지날 수 있게 된다. 나머지 여섯 관문을 지나는 동안 그녀의 의복은 하나하
나 벗겨진다. 결국 나체가 된 그녀는 화가 치밀어 오른 상태에서 에레쉬키갈과 마주치고, 그
녀에게 날아간다. 에레쉬키갈은 공중에서 이난나를 정지시킨 뒤, 이난나의 몸에 60가지 고통
을 풀어 놓는다 .또는 이난나를 화형대 말뚝에 매단다. 그렇게  3일 밤낮이 지난다. 그 동안
에 "숫소는 암소에게 달려들지 않고, 숫나귀는 암나귀를 수태시키지 않으며...
남자는 제 방에서 나가지 않고, 소녀는 옆으로 누워 있는" 상태가 계속된다.  계절을 언급하
는 아카드 판은 이 이야기를 퐁요다산 신화로  특징짓지만, '3일밤낮'으로 묘사한 수메르 판
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떠올리는 독자에게 큰 흥미를 느끼게  할 것이다. 또 어떤 독자
는 그리스 신화에서 혼이 소나무로 옮겨간 아티스 이야기나 북유럽 신화에서 9일 밤낮을 세
계수에 묶여 있던 오딘이야기를 연상하면서 흥미를 느낄 것이다.
 한편 충실한 신하 닌슈부르는 이난나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신들에게 여왕을 구해
달라고 간청한다. 에레쉬키갈은 마지못해 이난나를 지상으로  되돌려 보내는 데 동의하지만
그 대신 대속물이 나 몸값을 받기로 한다. (이 주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바뀌어 수많은 신
화나 전설에 등장하며, 기독교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나타나난다. )
그리고 이난나가 약속을 지키도록 한 쌍의 악귀를 지상으로  파견한다 .이때 이난나가 보내
는 몸값은 그녀의 남편인 목양신 두무지(아카드 판에서는 탐무즈)다. 두무지는 이난나가 없
어졌을 때 오히려 기뻐했기 때문에 그녀의 분노를 산 것이다. 두무지는 자기 누이에게로 도
망갔다가, 결국 정치적 협상을 맺어 1년중 6개월만 지하세계에 머물고, 나머지 6개월은 그의
누이가 대신 지하세계에 머물게 되었다. (순번을 바꾸는 착상 그리스 신화의 카스토르와 폴
뤼데우케스 이야기에도 나온다.)
   이 이야기는 죽음-생장-신을 반복하는 신화의 한 가지로서, 이 외에 알려진 것으로는 탐
무즈와 이쉬타르(아카드 신화).텔레피누스와 캄루세파슴(히타이트),바알과 아나트가 있다. 후
대에 와서는 오시리스와  이시스,아티스와 퀴벨레,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 프로세르피나와
케레스,아도니스와 아프로디테 또는 베누스  이야기가 유명하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예수가
부활한 봄날 아침, 여자들 몇 명이 무덤 앞에 나타나는 장면은 앞에서 살펴본 죽음과  재생,
겨울과 봄에 대한 오래되고 의례적인 이야기에서 뚜렷한 영향을 받았다.
 이난나-두무지 이야기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은, 풍요 신화에서는 여신이 죽은 남편을 되살
리거나, 또는 그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전형적인 유형인데도  불고하고 이난나가 남편 두무
지를 제 손으로 죽은 자의 땅에 보낸다는 점이다. 다만 또 다른 수메르 시편은 이난나가 남
편을 정열적으로 사랑한다고 그리고 있다. 실제로는 이난나를 인격화한 여사제상이 매년 두
무지의 대역을 죽여 지하세계로 보내고 잘 생긴 후임자를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니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가지 상이한 이야기, 즉 풍요를  기원하는 제물로서 이난나가
자발적으로-또는 계략적으로(이난나는 교활한 여신이었다. )-하계로  향하는 이야기와 두무
지가 대리 희생물로서 하계에 가는 이야기가 뒤섞여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에레쉬키갈이 어떻게 남편을 찾았는가?"는 아주 다른 이야기다.
시간적으로도 동떨어져 있고 게다가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인 이야기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것
은 위험한 시도일 것이다 .하지만 박사  학위를 따려는 열성적인 학생이 아닌 이상,  어째서
네르갈과 에레쉬키갈 이야기가 전적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 이야기는 전형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사상 최초로 지하세계를 다룬  희극이
자, 요부와 불운한 사내에 관한 '시원적' 음란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어떤 연회에서 시작한다 .죽은 자들의 여왕 에레쉬키갈은 천계에서 벌어지는 연
회에 참석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는 지하왕국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신하를 보내 훌륭
한 음식들을 가져 오도록 했다. 그런데 그 신하가 하급 신, 네르갈에게 수모를 당했고, 화가
난 에레쉬키갈은 네르갈 본인이 지하로  내려와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떠나는 네르갈에게
다른 신들은 지하 여행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충고해 준다.  거기서 살아 나오려면
빵, 고기, 술, 세숫물까지, 다시 말해 하계에서  주는 것은 무엇 하나도 손대지 말라는  것이
다.
  네르갈은 앞에서 언급한 일곱 문을  통해 하계로 내려간다. 그러자  완벽한 여주인으로서
대접을 하려는 에레쉬키갈이 빵, 고기, 술, 그리고 물을  권하지만 네르갈은 모든 것을 거절
한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에레쉬키갈이 자신의 신성한 육체를 내놓자 네르갈의 의지는 흔들
리고 만다 .그 둘은 7일간 무아지경 속에서 침대 위를 뒹굴었다. 실컷 만끽하고 나서 싫증이
난 네르갈은 서서히 돌아갈 궁리를 한다 .그래서 그는 만일 천계로 돌아가 자신들이 약혼했
음을 신들에게 알리도록 허락해  준다면, 갔다가 지체없이  돌아오겠노라고 에레쉬키갈에게
약속한다. 지난 4,000년 동안 이런 식의  상투적인 변심의 말을 들어온 뭇 남성과  여성들이
잘 알 듯이, 네르갈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에렛뮈키갈은 남자의 변심을 가만히 참지 못하는 성미다.
그녀는 천계에 경고한다. 만일 네르갈이  하계로 내려와야 할 스스로의 운명을  거스른다면,
"나 에레쉬키갈은 죽은 자들을 보내 산자들을 삼켜 버리게  만들 것이며, 산자보다 죽은 자
의 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왕의 사신이 네르갈을 데리러 왔을 때, 네르갈은
대머리, 중풍환자,절름발이 등으로 변장하지만, 그런 책략은 모두 실패한다. 네르갈은 다시금
하강할 운명에 처한다.  그리고 이난나가 그랬듯이,  매 관문마다 소유물을  포기해야 했다.
(처음 방문했을 때 이것을 면제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의 지위는 분명히 하락했다.)이 여행
이야기를 기록한 서판은 여기서 끝나지만, 우리는 그 결말을 알고 있다. 네르갈은 결국 신화
사전에 에레쉬키갈의 남편으로 남는 것이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복잡한 대서사시이지만, 어떤 차원에서 보면 그것은 그저  한 인간이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야기다. 우루크의  왕 길가메쉬와 그의 절친한 친구(또
는 연인) 엔키두가 여신 이난나를 모욕했기 때문에,  신들은 두 사람중 한명은 죽어야 한다
는 명을 내린다 .엔키두는 꿈에서, 권능을 갖춘 왕들에게도 치욕을 주는 먼지투성이의  음산
한 지하세계를 본 뒤 공포를 느끼고 병들어 죽고 만다. 갈가메쉬는 비탄에 빠졌고, 또한  자
신에게도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의 운명 때문에 겁에 질린다. 길가메쉬는 이 운명을 피하기
위해, 영원히 죽지 않는 유일한 인물인  우트나피쉬팀(메소포타미아 판 홍수 이야기의 주인
공으로서 구약성서의 노아와 같은 인물이다. 수메르 어로는 지우수드라)을 찾아가기로 결정
한다. 오랜 여행 끝에 길가메쉬는 전갈족이  지키고 있는 마법의 산, 마슈의 완전한  암흑을
통과하고, 진귀한 보석으로 장식된 매혹적인 정원을 지나 바닷가에 이른다 .갈가메쉬는 성스
러운 접대부와 사공을 만나는데, 두 사람 모두 이 탐험에 대해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
하지만 뱃사공은 '죽음의 강'을 건너 매혹적인 섬 딜문까지 길가메쉬를 데려다 준다 .거기에
서 길가메쉬는 불사의 성인, 우트나피쉬팀을 만난다. 그 성인은 먼저 대홍수 이야기를 해 준
뒤, 길가메쉬에게 죽음을 정복하려면 우선  잠을 정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엔키두가
죽은 이후 잠을 잘 수 없었던 길가메쉬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촉촉한 아지랑이 같은 잠
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7일 밤낮을  계속해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난  갈가메쉬는 이 탐험에
부질없음을 깨닫는다.
  우트나피쉬팀은 뱃사공에게 다시는 딜문으로 사람을 데려오지 말라고 명했지만, 뱃사공은
아내의 간청에 못 이겨 길가메쉬를  어떤 식물이 있는 곳으로 데려간다.  그 식물은 불사의
약초는 아닐지라도 젊음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가메쉬가 우루크에 돌아오
는 도중에 뱀이 이 약초를 훔쳐먹는다. 그 뱀은 도망치면서  허물을 벗고 윤기나며 활력 있
는 몸을 되찾는다 .허물을 벗는 능력 때문에 뱀은 고대  세계에서 종종 불사불멸 또는 영원
한 젊음의 상징이 되곤 했다.
  [길가메쉬 서사시]는 열한 번째 서판에서  길가메쉬가 우르크로 돌아가는 것으로  끝난다.
아니, 끝나야 한다 .그러나 [길가메쉬 서사시]에는 분명히  내용이 뒤엉킨 열두 번째 서판이
있다. 그것은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저승에 대해  나누는 종잡을 수 없는 대화로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다른' 이야기의 결말이 끼여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해서 한 필
경사에 의해 [길가메쉬 서사시]의 결말 부분에 첨가되었고 어째서  그 뒤로도 다른 많은 필
경사들이 그것을 그대로 베꼈는가 하는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이난나-길기메쉬-엔키두, 이 세사람을 다른  이야기로, [길가메쉬 서사시]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죽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훌루푸 나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서두
는 일종의 에덴 신화처럼 시작된다. 이난나는 나무 한  그루(아마도 최초의 나무일 것이다.)
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신의 '성스러운 정원'에 심는다  .그리고 나무가 크고 무성하게 자라,
그 나무로 옥좌와 침대를 만들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린다. 그런데 악귀들이 나무에 침범하여
이난나를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 악마들은 뱀, 주 또는 안주라는 새, 그리고 악녀 릴리투다.
이 악녀는 훗날 유대 전통에서 아담의 첫번째 부인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난나
는 울음을 터뜨리며 길가메쉬(여기서는 이난나의  형제로 나오다)에게 도움을 청한다. 영웅
길가메쉬는 청동도끼로 침입자들을 물리차고 나서, 이난나에게 옥좌와 침대를 만들어 준다 .
그러자 이난나는 남은 뿌리와 꼭대기 부분의 가지로 푸쿠와 미쿠를 만들어 길가메쉬에게 준
다 .그런데 이것이 우루크의 여인들을  화나게 했고 푸쿠와 미쿠는 땅에  뚫린 구멍을 통해
지하세계로 떨어졌다.
  바로 여기에서 열두 번째 서판이 시작된다. 엔키두는 푸구와 미쿠를 되찾아 오기 위해 지
하세계로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런 엔키두에게 길가메쉬는 몇 가지 충고를 한다 .헌옷을 입고
갈 것, 몸에 향유를 바르지 말고 맨발로 갈 것, 또 창과  막대기를 갖고 갈 것, 그 누구와도
말하거나 입맞춤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네르갈이 그랬듯이, 엔키두도 이  충고를
무시했기 때문에 에레쉬키갈에게 붙잡히고  만다 .길가메쉬가 신들에게 호소하자,  어느신이
에레쉬키갈의 남편인 네르갈을 설득해서 두 친구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구멍을 만들어 준
다 .그들은 포옹을 하려 했지만, 할 수 가 없었다 엔키두의 몸이 비실체적인 그림자로  변했
기 때문이다.
  하계가 어떤 모습이냐고 길가메쉬가 묻자, 엔키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것이라고 대답한다. 주위는 온통 오물로 뒤 덮여 있고, 독충의 무리가 자신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고 했다. 길가메쉬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땅바닥에 엎드려  여러 사람의 운명에 대해
물어 보지만 나쁜 소식만 듣는다 .
  이런 초기 이야기들에서 죽은  영혼들은 어둡고 황량하고 메마른  세계에서 살고 있지만,
완전히 평등한 존재들이다 .후세와는 달리, 이 이야기들에는 '축복받은 영혼, 특권을 가진 영
혼과 죄를 지은 영혼, 평범한 영혼'의 구별은 아직 없었다. 길가메쉬는  [길가메쉬 서사시]에
서는 과감하게 죽음을 받아들이지만, [훌루푸 나무]에서는 두려움 때문에 왕답지  않은 한심
한 모습으로 쇄락하는 것으로 나온다. 죽은 영혼은 말 그대로  그림자처럼 만질 수 업는 비
실체적인 것이다. 후대 그리스 인은 죽은 영혼에게 싱싱한  피를 맛보게 함으로써 일시적이
나마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고대 이야기에서는 지하세계를 방문하여 괴물과 싸우기도 하고, 선조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영웅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에트루리아인은  컴컴한 지하 세계에 '카룬'이라
는 악마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고대 이야기에서는 지하세계를 방문하여 괴물과 싸우기도 하고, 선조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 영웅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에트루리아인은 컴컴한 지하세계에 '카룬'이라는
악마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의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 이 악마는 폴로 경기에서 공
을 치는 나무 막대 모양과 똑 같은 모양의 독특한 무기를 손에 쥐고 있다 .여기서 카룬이라
는 이름은 죽은 자의 영혼을 싣고 스튁스 강을 건너는  뱃사공, 카론과 혼동할 수도 있거니
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족에 속하는 케이론과도 혼동할 법하다.

    2. 아집트 사자의 서
  무덤 저 편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문자로 기록하여 남긴  또 다른 지역은 이집트다. 상형
문자로 씌어진 이집트 문서들은 4,000년 전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파피
루스에 쓴 최초의 [사자의 서]에 담겨 있는 장례용 주문들은, 문자로 기록되기 전부터  이미
수백 년 동안 실제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중동 지역이  대립하는 종교 신념과 전쟁 때
문에 항상 분열을 거듭했던 데 비하면, 이집트는 장구한  역사를 통틀어 상대적으로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장엄하고 화려한 파라오의 무덤, 정성껏 만든 미라, 엄청난 수의 부장품,  그
리고 파피루스 두루마리 위에 풍부한 삽화와 함께 기록한 [사자의 서](그 내용은 저 세상에
서의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보호 주문을 담고  있다)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집트 인들은
내세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또한 우리는 이집트 종말론 신앙의  변천 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올바른
생활을 하는 귀족만이 내세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고왕국에서 시작하여, 오시리스가
사자의 신으로 등장하는 중왕국을 거쳐, 그  이후 시대에 이르는 추이를 훑어볼 수도  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 인의 내세관은 오늘날 서양인들의 내세관과  완전히 다르다. 유대 인들
은 '출애굽'이전에 이집트 인의 포로로 잡혀 있었지만, 이집트  종교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
았다. 이집트 종교가 너무 낯설고 이국적인 데다가 아주 복잡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집트 신
화 역시 그 풍부한 내용에도 불고하고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단지 후기 헬레니즘의 이시스
숭배만이 예외적으로 영향력을 가졌을 뿐이다.
  이집트 사람들의 관념 중 몇 가지는 기독교 사상 안에 반영되어있다. 거룩한 예수의 모습
은 상당 부분 오시리스에게서 온 것이다.
오시리스는 사자들의 재판관이자 왕이며 신이었다 .그뿐  아니라 이집트 인들은 오시리스를
-다른 대부분의 명부 통치자들과 달리-전적으로 자비로운 분이라고 믿었다.  예수와 마찬가
지로 오시리스 자신도 희생에서 부활한 시이다. 그리고 그의 훌륭한 아들 호루스는 산 자들
의 세계를 다스렸다. 또한 이집트의 사자는 죽은 뒤에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기독교인들
도 최후의 심판 이후에 대해서 비슷한 생각을 한다.  사후 심판이라는 관념은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면 아마 이집트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이집트의 사자도  영혼과 육체의
절멸을 피해 살아남은 자는, 정확하게 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갑작스레 닥치는 무서운 위
험을 겪게 된다.
  이집트 사자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된다 .'봉헌의 들판'에 이르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력과
당신의 영혼은 태양신의 베에 올라탄다.(카는 당신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바는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새로 묘사된다.)그 배는 지금  막 죽은 사람들을 싣고 낮 동안 하늘
의 강을 건너, 밤이 되면 강의 서쪽에 도착한다. 머리를 앞으로 돌리고 있는 아겐과  마하프
는 그 배를 젓는 천상의 뱃사공이다. 베에서 내린 다음에는 일곱 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각
각의 문에는 문지기와 감시자와 전령이 지키고 서있다. 당신은 [사자의 서]를 참조하여 그들
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호소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오시리스 궁전의 수많은 신비한 입
구들이 열릴 때까지 그 앞에서 경배해야 한다.
  그 후 아누비스는 당신을 '심판의 방'을 안내할 것이며, 응당 "순수하고 깨끗해야 하며, 흰
옷과 신발을 착용하고, 검은색 눈화장을 하고 몰약을 바르게"될 것이다. 아누비스는 '재칼의
머리'를 한 신으로 묘사되었지만, 수천 년 동안 그 고귀한 혈통을 이어온 순종 파라오  하운
드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아누비스를 즉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재칼을 특히 인간의
시체와 연결될 때는 불길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충실한  개 아누비스는 영혼의 길잡이로
서 당신을 안내한다.
  아주 달갑지 않은 것은 '정의의 저울'아래 쪼그리고 앉은 무시무시한 작은 괴물 암미트다.
당신은 이곳에서 전생에서부터 계속되는 자신의 존재를 변호할 기회를 얻는다. 따오기 머리
를 한 지혜의 신 토트는 검사 역할을 맡는다 .재판장  오시리스는 두 여신 이시스와 네프튀
스가 보내 준 왕좌에 앉아 있다. 당신은 원하는 대로  유창하게 장광설을 늘어놓을 수도 있
지만, 결국 아누비스는 당신의 심장을 저울의 한 쪽 접시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아누비스
는 진실의 여신 마아트의 머리 장식에서 깃털 하나를 뽑아 반대쪽 접시에 올려놓고 함께 무
게를 달 것이다. 만약 당신의 심장이 얹힌 접시가 죄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처지면 암미트
가 당신의 심장을 먹어치울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종말이다.
  당신이 이 심판에서 살아 남아  '등심초의 들판'으로 가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은
이제 '새로운 육체를 입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고난의 끝은 아니다. [사자의 서]에  담긴 주
문 중에는 악어, 뱀, 거대한 투구벌레들에게서 몸을 지키는 문구가 있다. 또, 공기가 없어 질
식하거나, 부패하거나, 다시 죽음을 겪거나,거꾸로  매달리거나, 강제로 배설물을 먹게  되는
등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주문도 있다. 이제 당신의 목표는  당신 자신을 새로 바꾸는 것이
다. 다시 말해 황금매, 불사조, 왜가리,제비 따위로 변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당신은 악어
또는 뱀에서 보았듯이  뱀은 재생과 회푼의 상징이다)이 되고자 할 수도 있다. 아니면 연꽃
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농부가 되고 싶을지도 모른다 .'등심초의 들판'에는 15개의 지역들이 있으며,
각 지역마다 통치자가 있다. 이 지역들 중  일부는 육안으로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이케시
지역은  '신들의 눈에서 가리워진 지역'으로서, '자신의 알 속에  있는 존엄한 신'이 홀로 살
고 있다. 당신도 거기서 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곳에는 공기가 전혀 없고 알신은  그다
지 우호적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
  하지만 당신은 농경 생활에 어울리는 다른 곳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쟁기질, 파
종, 관수, 이 모든 일들이 당신의 무덤 안에 있는 연장과 도구를 사용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의 사려깊은 친족들은 샤브티라고 부르는 인형을 부장품으로 넣어 줄 것이다. 샤브티는
당신의 내세에서 당신 대신 중노동을 하며 봉사하는 자동인형  노예다. 노동에서 해방된 당
신은 어느 낙원에서나 약속하는 안락한  생활 -훌륭한 술과 음식, 성적  쾌락, 좋은 친구들,
그리고 당신이 집에서 편히 누렸어야 하는 모든 안락함을  누릴 것이다. 투트왕의 무덤에는
샤브티가 414개나 있었지만, 그다지  위대한 인물이 아닌 당신은  샤브티 1~2개로 만족해야
한다.

    3 조로아스터 교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 이후 어느 때인지, 중동에 조로아스터라는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는
중동의 거의 전지역-북쪽으로 남부 러시아, 서쪽으로는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에 오
랫동안 영향을 끼치게 될 조로아스터 교를 창시했다. 번성하던 조로아스터 교는 7세기에 이
르러 이슬람 교도의 침락과 함께 엄청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조로아스터 교도는 인도, 특히
봄베이에 여전히 그 일부가 남이 있으며, 이란에도 최근까지 남아 있다.
  조로아스터가 나타났을 무렵, 이 지역에서는 이미 문자가 사라졌고, 또 그 이후에도  수세
기에 걸쳐 종교적인 이유에서 문자  사용이 금지되었다. 때문에 우리는  조로아스터에 대해
실제로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심지어 그가 살았던 시기가 언제인지도 정확히  모른다.
현대의 학자들은 기원전 1000년경 청동기 문화 생활을 하던 남부 러시아 초원 지역의 유목
민들 사이에서 조로아스터가 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조로아스터 교의 성전인 [아베스타]로 말하자면, 서기 5세기에 와서야 겨우 문자로 기록되
었으며, 그나마도 그 문자라는 것이 그 이후로는 다시 사용한 적이 없는, 특별히 고안된  신
성문자였다.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본도 14세기 것이고  게다가 완본이 아니라는 것을
고려한담녀, 우리가 지금 이 종교에 대해서 알고 이TSms 것은 조로아스터가 생각한 것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종교와  그 창시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의 성전이 신 또는 천사 모로니의 akfTMa을 받아 적ㅇ느 것이라고 할지
라고 그렇다.
  조로아스터 교는 기독교의 역사에, 특히 지옥관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었다. 조로
아스터 교는 원래 바라문 교의 초기 베다신앙에서 시작되었으며,  힌두 교와 불교에도 영향
을 주었다. 그런데 조로아스터는 온갖 신들을 모시는 만신전에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이원
론 신앙을 설파했다. 조로아스터에 따르면, 지혜의 주는 신성한 선의 세력으로서 불멸의 tdj
인들 또는 일곱 천사와 함께  산다. 한편 악령은 거짓의 신으로서  땅밑 지옥의 암흑속에서
산다 .거짓의 신이 악마들을 보내 세상을 괴롭히자, 지혜의 주는 그에 맞서 싸운다. 법과 질
서와 빛이 어둠과 타락과 죽음에 대립한다. 이것은 인간의 영혼을 둘러싼 투쟁이며,  이것이
곧 세계의 역사를 이룬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처음 3일 동안 시신의 머리 주변에서 떠돈다. 그리고 정의의 정
령 라슈누와, 헬레니즘 시대에 군신으로 새롭게 받들어진 미트라가 그 영혼을 심판한다.  그
들은 장부에 모든 선행을 저축으로 기입하고, 모든 악행은 빚으로 기입한다. 계산은 지하 세
게의 친바트다리 밑에서 한다. 만약 선행이 더 많아서 흑자라면, 아름다운 처녀 다에나가 두
마리 번견과 함께 나타나 그의 영혼을 데리고 다리를 건너 노래의 집으로 안내한다. 반대로
악행이 더 많아서 적자라면, "겨우 세 가지  사소한 비행 때문이라고 해도"지옥으로 떨어진
다. 그 지옥은 인류 최초로 죽은  사람이라 일컫는 이마또는 야마가 지배한다. 그리고  선과
악이 균형을 이루면 함미스타간이라 불리는 일종의 림보로 보내진다. 함미스타간은 고대 바
빌로니아의 저승과 매우 유사한 곳이며, 그 영혼은 대환란때까지 그곳에 머물게 된다.  수학
적 계산에 따른 이 판결은 엄정하기 때문에, 아무리 기도하고 제사를 드려도, 심지어 아흐리
만이 은총을 베풀어 준다고 해도 그 결과에는 영향을 미칠 도리가 없다.
  9세게의 필사본 중에는, 더 옛날의 '비라즈'이야기를 베꼈다고 추측되는 것이 있다.  그 내
용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물인 비라즈가 지옥으로 보내져 신앙의 교리를 확인하게 되는
데, 이 이야기는 2세기부터 13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널리  퍼진 기독교의 수많은 환상 이야
기와 형태상 거의 동일한데, 어느 쪽이 어느 쪽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기 어렵다.  죄
와 벌의 여러 형태는 기독교와 다른 부분들도 많다. 가장  동양적인 부분의 영혼과 영혼 사
이에 서로 접촉이 없다고 보는 점이다. 가령 비잔틴 예술에서는 지옥의 영혼들이 각각 격리
된 '상자'안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지옥을 유달리 혼란스럽고 북적대는 곳
으로 보는 서양에서는 볼 수 없는 구상이다.
  결국에는 선과 악 사이에 우주적 규모의 최후 성전이  벌어지고, 악은 영원히 정복당하게
되며, 조로아스터의 씨를 받은 동정녀에게서 소쉬안스라는  이름의 구원자가 태어나 지옥을
정복하게 된다. 참회한 죄인들은 용서받고, 만인의 육체가 부활하여 제각기 영혼과 재결합할
것이다. 지옥은 끓는 쇳물로 타서 완전히 파괴되고, 지상에서 신의 왕국이 열릴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금방 알아볼 수 있듯이, 이러한 고대의 조로아스터  교 사상 대부분은 놀
랄 만큼 지속적으로 후대에 영향을 끼쳤다. 정통 기독교는  조로아스터 교에서 받은 영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4복음서의 저자들 중에서  종말론적 의식을 가장 강
하게 드러내는 마태는 그리스도 탄생 이야기에 동방박사들을 등장시키고 동방의 하늘에  새
로운 별을 띄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태는 자신의 메시아가  조로아스터 교에서 약속한 부
활과 불멸에 굳건히 연결되어 있음을 확실히 하고자 한 듯하다 .마찬가지로 마태는 아기 예
수를 멀리 이집트로 달아나게 함으로써, 예수가 이집트의 옛지혜와도 관련이 있다는 암시를
했다.
  기독교의 이원론적 이단들은 지난 2,000년 동안 반복해서 생겨났다. 비록 그 이단  종파들
의 이름은 매번 달라졌지만, 조로아스터 교에서 시작하여 마니  교, 보고밀 파, 12세기의 알
비 파에 이르는 하나의 계통을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기독교는 고도의 신학적 수준에
서는 이원론과 겨루어 이겼다. 하지만 지금도 대중들 사이에서는  악의 세력이 상당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이슬람  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일신론에 근거한  정통
이슬람신학에서 배척당하는 사탄인 이블리스또는 알사이탄이 민간 전승 이야기에서는  중요
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조로아스터 교는 힌두 교 사상을 미트라 교에 연결하고, 이슬람 교에 연결하고, 또 기독교
자체에 연결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거대  종교들에 나타나는 종말론 시나리오는  여러 가지
사항에서 섬찟할 정도로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이것은 스베덴 보리의  주장처럼 사람들이
보편적 내세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동서양 간에 항상  무역 통로가 열려 있었다
는 점, 그리고 이방의 땅을 누비며 영광을 좇는 군대의  종요적 결의라는 것이 그리 굳건하
지 못했다는 점에거 기인한다.

    4 그리스,로마의 하데스
  서기 5세기 이전의 1,000년 동안 서양 세계 전체는 완전히 변모했다. 하지만 그런  격변의
시대에도 올륌포스의 신들을 받드는 그리스.로마의 종교는  문명화된 지중해 민족들의 세계
에서 일상적인 종교인 동시에 전통을 간직한 종교로 남이  있었다. 그것은 고상한 사람들이
믿는 종교였던 데 반해서, 그밖의 종교들은  너무 원시적이거나 무정부적이거나 이질적이거
나 야만적이거나 또는 과격한 것이었다. 그리스 인들은 페르시아와 대립하며 격전을 치렀다.
그리스 인들은 페르시아와 대립하며 격전을 치렀다. 그런 그리스 인들 입장에서 보면,  페르
시아와 대립하며 격전을 치렀다. 그런 그리스 인들 입장에서 보면, 페르시아왕 다레이오스와
퀴로스의 조로아스터 교가 궁극적으로 그리스 종교보다  지중해 세계에 더 큰 영향을  주게
된다는 견해는 비합리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게다가 유대 인의 특이한 관습은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주장은 정말 터무니없어 보였을 것이다.
  현재 우리에게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는 그리스 작가들은,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성전을
충실하게 기록하여 남기기보다는 시, 희곡, 역사, 철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작품을 남겼다.  그
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표현하는 데 아무런 제약도 느끼지 않았으며, 개성이 담긴 화려한 문
체를 구사하고 정통에서 벗어나는 경쾌한 일탈을 허용함으로써 아주 새로운 글쓰기  형태를
보여 주었다. 문제는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시인과 예술가들이기 때문에,그리스의 정통이 어
떠어떠한 것이라고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선악의  구
분이 조로아스터 교만큼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신들은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동시에 복수심으로 가득찬 파괴적 행동을 저지르는 양면성을 지녔다. 이것을 입증하는 문학
적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구전에 따르면, 호메소르와 헤시오도스는 페니키아 어어ㅔ서 빌려 와 변형한 새로운 알파
벳을 처음으로 사용한 기원전 8세기 경의 시인들이었다. 오늘날 헤시오도스는 호메로스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헤시오도스의 [신통기]는 이후 수많은 문학 작품의 내용을 이
루는 기본 토대가 되었다. 그는 [신통기]에서 그리스 창조 신화와 전설상의 역사를 이야기하
고, 온갖 신과 정령들의 이름을 열거한다. 후대의 신화 연구가들은 그리스의 종교 문학을 정
리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헤시오도스가  구상한 기상 천외한 이미지  가운데 몇 가지를
제외해 버렸다. 예를 들어 스튁스 - 여신으로  의인화된 하데스의 강 - 의 대저택과,그곳에
서 하늘까지 치솟은 은색 기둥이 그것이다. 그러나 고금을 막론하고 시인들은 헤시오도스의
작품을 즐겨 읽고,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빈번히 헤시오도스의 이야기를 되풀이해 그렸다.
  헤시오도스에 따르면,하데스의 상층부 에레보스와 하층부 타르타로스,그리고 밤과 땅은 모
두 함께 '시원의 균열'에서 생겨났다. 헤시오도스는 피로 얼룩진 신들의 전쟁에 대해 말한다.
먼저 천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 사이에서 퀴클로페스가 태어났다. 나중에 자식들
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라노스는  그들을 타르타로스에 던져  버렸다.지상에서 타르타로스에
이르는 거리는 하늘과 땅사이만큼이나 멀다. 하늘에서  쇳덩어리를 떨어뜨리면 18일이 지나
야 겨우 타르타로스에 닿는다. 암흑에 휩싸인 타르타로스는 파수꾼이 지키는 청동벽으로 둘
러싸여 있으며, 벽 안쪽에는 심연이 있다. 그 심연에 빠진 사람은 1년 동안 추락해도 바닥에
닿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 하데스와 '무서운 페르세포네'의  저택이 있으며, 지옥의 번견, 케
르베로스가 그 저택을 지키고 있다.
  '저승 방문'이라는 주제를 다룬 최고의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호메로스
의 [오뒤세이아]다. 이 작품은 너무 유명해진 나머지, 그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
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뒤세우스와 그의 동료들은 마녀 키르케로부터 지하
세계로 내려가 죽은 자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오뒤세우스는 실제로 지하세
계에 내려가지는 않지만, 용케도 지하세계의 입구에서  하데스의 진귀하고 유명한 광경들을
많이 보게 된다.
  이타카의 무왕 오뒤세우스는 10년 동안 트로이아 전쟁에서 싸운 뒤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
중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특히 용서를 모르는 여신 중의  여신 헤라를 필두로 많은 신들이
오뒤세우스에게 앙심을 품고 있다. 오뒤세우스가 용기를 발휘하여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에게
조언을 구한다면, 그 영혼이 귀환 방법을  알려 줄 수도 있다. 테이레시아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남자와 여자의 몸으로 모두 살아 본 까닭에 인간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테이레시아스의 조언을 얻으려면 오뒤세우스는 북쪽으로 항해하여 하데스의 여왕  페르세
포네의 숲으로 가야 한다 .그곳은 저승의 강 플레게톤과 고퀴토스가 아케론 강으로 헐러 들
어가는 곳이다 .그는 거곳에 있는 동굴 입구에서 어린 숫양과  검은 암양을 제물로 죽여 그
피가 도랑에 흐르게 해야 한다. 냄새를 맡은 유령들이 동굴 언저리로 떼지어 몰려올 테지만,
테이레시아스가 도착해서 피를 맛보고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오뒤세우스는 칼로 다른 유
령들을 막아야 한다.
  유령들은 '울부짖으면서' 도착한다. 그 중에는 오뒤세우스의 부하  선원 가운데 가장 어렸
던 엘페노르도 있었다. 그는 얼마전에 마녀 키르케의 궁전  지붕에서 자다가 떨어져 죽었는
데, 달느 선원들은 그가 없어졌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어쨋든 오뒤세우스는 엘페노르가
무사히 하데스에 갈 수 있도록  장례식을 치러 주겠다고 약속한다  .이윽고 테이레시아스가
나타가 피를 마시고, 오뒤세우스의 장래에  대한 암울한 예언을 한다. 오뒤세우스는  거기서
죽은 어머니도 만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 오뒤세우스가  테이레시아스
에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었더니, 피를 마시면 어머니의 기력이 잠깐이나마 회복도니다
는 것이다. 테에레시아스가 돌아간 후 오뒤세우스의 어머니는 피를  마셨고 두 사람은 이야
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그는 어머니를 포옹하려 하지만 길가메쉬가 엔키두에게 손을 내밀
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뒤세우스는 어머니를 품에 안을 수 없다.
  계속해서 몇몇 유명한 여인들의 영도 접근한다. 이 부분에서 후대 시인들이 추종한  전통,
즉 하계 방문 이야기에서는 '레이디 퍼스트'라는 전통이  생겨난다. 여자들 다음에 놀랍게도
트로이아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던 아가멤논이 나타났다. 아가멤논은 귀국한 뒤, 아내에게  살
해당했다.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아이아스등 다른 전우들도 등장한다. 오뒤세우스는  낙
심한 아킬레우스를 위로한다. 게다가 사실 형편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도 않는다. 아킬레우스
는 거기서도 왕족 같은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기력이 다한  사
자' 들을 지배하기보다는, 차라리 비참한 농부의 노예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영혼들이 동굴 입구를 통해 직접 나왔기 때문에 오뒤세우스는 그 유명한 번견 케르베로스
나 스튁스 강의 뱃사공 카론과는 마주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든 한 번 지하세계를 보고
싶어하는 오뒤세우스의 마음이 통했는지, 하데스의 진기한 장면들 일부가 눈에 띈다. 거기에
서는 탄탈로스가 기아와 갈증으로 고통을 당하고있고, 시쉬포스는 둥근 돌을 끝없이 굴리고
있으며, 티탄 족의 티튀오스는 독수리의 공격에 시달린다. eh한 심판관 미노스, 그리고 행복
한 두 영웅 오리온과 헤라클레스의 모습도 본다. 거기까지  보고 난 오뒤세우스는 페르세포
네가 이제 어떤 달갑지 않은 것을 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부하들에게 고함을 질러서
서둘러 배를 젓게 하여 그곳을 벗어난다.
  [오뒤세이아]결말 부분에 또 한 번 하데스를 여행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거지로 위장하고
고향 집에 돌아온 오뒤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자들의 무리가 자신의  궁전을
망쳐 놓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오뒤세우스는 극적인 전투 끝에 구혼자들을 저 세상으로 보
내 버린다.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는  일종의 막간극 또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다.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는 죽은 구혼자들의 영혼을 안내하는  영혼의 길잡이로 등장한다. 구혼자들의
영혼은 헤르메스를 뒤를 따라 어두운  동굴 속의 '박쥐처럼 찍찍거리면서'회색 바다와  꿈의
해변을 지나 세상의 끝으로 간다. 죽은 자의 영혼은 그곳에 있는'아스포델로스 들판'에서 살
게 된다.
  호메로스는 앞에서 구혼자들을 마치 치한처럼 묘사했지만,  그들이 죽은 다음에는 그들의
영혼을 애처롭고 고귀하게 그린다. 그들은 대등한 입장에서 그리스의 영웅들과 만나게 되는
데, 그 영웅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죽음에 영원히 집착하는 듯이 죽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
를 나누고 있다. 앞에 나온 엘페노르와는 반대로,구혼자들의 영혼은 그들의 시체가 매장되기
도 전에 이곳에 도착한다. 이 막간극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의 전통적 사후세계와 모순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적 일탈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매우 특별한 효과를 낸
다 .그리스 인의 경우 정통성도 시가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나중에 페르세포네라 불리게 된 소녀 코레의 유괴와 강간 이야기는 엘레우시스 비의의 기
초가 되었는데, 그 이야기에 따르면 꽃을 따고 있던 어린 소녀가 타르타로스의 지배자인 하
데스에게 붙잡혀 하계로 끌려간다. 그녀는 거기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거부한다.  그녀의
어머니인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는 슬픔에  빠져 농작물도 팽개치고 세상을  떠돈다. 마침내
코레를 찾았을 때는, 딸이 이미 석류씨 7개를 먹은 뒤였다. 그 때문에 코레는 지상으로 완전
히 돌아오지 못하고, 매년 일정 기간을 지하세계에서 지내야 했다. 이것은 풍요 신화의 일종
이다. 다른 올륌포스 신들에 대한 숭배가 피상적인 것이 되어 버린 후에도 엘레우시스 입문
의례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것은 테메테르를 따라 저 세상으로 상징적인 여행을 떠나는
의식이며, 의식의 마지막은 봄과 재생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지옥의 여왕 페르세포네는 '순결한 소녀'코레의 이미지와  별로 공통점이 없다. 그
녀의 바빌로니아 인 자매 에레쉬키갈처럼, 페르세포네는 어둠에 싸인 그녀의 남편 하데스보
다 더 무서운 존재다. 하데스는 종종  풀루톤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그에게 지하  세계의
야금술 권리가 있으며, 죽은 이와 함께 묻는 귀한 부장품이 그의 수중에 들어오고, 또한  비
옥한 토양에서 자란 농작물이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하데스라
는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그의 눈에 띄어 재앙을 입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완곡한 표현법
을 써서 '부유한 자'라고 불렀던 이유도 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례는 오르페우스에 관한 것이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뤼디
케를 되찾아 오기 위해 타이나론  둥굴 안쪽 통로를 따라 지하세계로  갔던 하프 연주자다.
오르페우스 숭배는 수세기에 걸쳐 존속했고, 그리스 종교뿐 아니라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
을 주었다. 오르페우스와 더불어 숭배받던 주신 디오뉘소스도, 반신반인인 어머니  세멜레오
를 구출하고자 저승에 찾아간 일이 있다고 한다. 한편, 디오뉘소스는 천신제우스가 페르세포
네에게서 얻은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디오뉘소스-오르페우스에 대한 신비 의식도 엘레우시
스의식과 마찬가지로 죽음과 부활에 관련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오르페우스는 자
신은 길가메쉬와 마찬가지로 본질적 욕망을 상실하고 만다.
  헬레니즘 시대의 미술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릴 때, 흔히 오르페우스의 특징을
차용했다. 온갖 신들을 모두 섬김으로써 어떤 경우에도 손해보지 않으려는 귀족들을 위해서,
미술가들은 이집트의 호루스와 페르시아의 미트라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
만 선한 목자이자 지옥의 정벌자인 '오르페우스-그리스도'가 가장 인기 있었다.
  이 외에도 지하세계에대한 그리스 서로하가 더 있지만, 그다지  진지한 내용을 담고 있지
는 않다. 그리스 영웅 중에서는 테세우스가 최초로 지옥정벌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의  원정
은 굴욕스럽게도 실패했다. 처음에 그의 친구  페이리토스가 테세우스에게 헬레네를 납치하
는 것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훗날 이름을 떨치는  트로이아의 헐레네는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어린아이였다. 이 계획을 위해 그들은 한 예언자를 찾아갔다.그런데 그 예언자는  조롱
하듯이 말했다. "왜 , 차라리 헐레네 대신에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지 그러느냐?"페이리토스는
어찌나 어리석은지(그리고 어찌나  무분별한지)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타이나론의
통로를 따라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그들이 도착하자 저승의 주인  하데스는 두 사람을 망각
의 의자로 안내했다. 그런데 그들이 의자에 앉는 순간, 거기에 달라붙어 움직일 수 없게  되
었다. 두 사람은 4년 동안 의자에 꼼짝 못 하고 앉아서 뱀들, 푸리아이, 케르베로스의  이빨,
하데스의 조로엥 고통을 당했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두 번씩이나  지
하세계를 방문할 정도로 용감했다. 그가 행한 12가지 과업 중 11번째 과업이 바로 에우뤼스
테우스왕에게 하데스의 번견 케르베로스를  바치는 것이었다. 헤라클레스는 신중했다.  그는
먼저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자 엘레우시스로 가서 비의에 입문했고 테세우스가 그의 보증
인이 되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엄청난 죄과를 씻는데 4년이나 걸렸다 .그 후에 그도  역
시 타이나론 동굴을 통해 지하세계로 내려갔고, 뱃사공 카론을  위협해서 스튁스 강을 건넜
다. 유령들조차 헤라클레스를 보고 달아났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뱀으로 되어 있는 고르곤자
매중 하나인 메두사는 자신이 죽어서 아무 힘도 없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생전에 수많은
사람을 돌로 만든 것처럼 헤라클레스를 돌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다. 물론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오랜 친구인 테세우스가 망각의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헤라클레스는 그의  몸을
억지로 떼어내 구해 주었지만, 테세우스의  몸 뒷부분 중 상당 부분이  의자에 달라붙은 채
남았다고 한다. 헤라클레스는 그 옆에 앉은 페이리토스도 떼어내려고 했지만, 하데스가 용납
하지 않았다.  그 다음 헤라클레스는 겁먹지 않고 케르베로스를 사로잡았다. 그 다음 헤라클
레스는 겁먹지 않고 케르베로스를 사로잡았다.  그는 그 짐승의 목 세  개를 몽땅 움켜잡아
쓰러뜨리고는, 그가 예전에 잡은 사자의 가죽으로 돌돌 말아 버렸다. 그리고 몰골이  흉해진
테세우스와 함께 케르베로스를 끌고 지상으로 갔다.  케르베로스를 본 에우뤼스테우스 왕은
무서운 남머지, 헤라클레스가 그 개를 다시 하데스로 돌려 보낼  때까지 큰 항아리 속에 숨
어 있었다.
  헤라클레스는 알케스티스를 구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저승 여행을 떠났다. 이 여자는 젊은
나이에 죽게 된 아드메토스왕의 아니였다.  왕은 자신을 대신해 죽을 사람만  있다면 살 수
있었지만, 왕의 연로한 부모는 이를 거절했다. 그래서 결국, 충실한 아내 알케스티스가 남편
을 위해 독약을 먹고 죽었다 .당시에  아드메토스의 궁전에 와 있던, 거칠면서도 사려  깊은
방문객 헤라클레스는 알케스티스를 찾으로  저승으로 갔다. 지하세계의  여신 페르세포네도
아내가 남편 대신 죽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헤라클레스는 아무
문제 없이 알케스티스를 구출할 수 있었다. 기원전 5세기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이 이야
기를 주제로 [알케스티스]라는 희곡을 썼다. 하지만 거기에는 지하세계의 장면이  전혀 없다
그럴 수 있는 것이, 그 작품의 주된 관심은 아드메토스  가족간의 심리적 긴장을 그리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종교적인 요소와 아무 연관이 없다. 위에서 본 테세우스 설화는,  테세
우스가 반인반우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무찌르고자 크레타  섬의 미궁(상징적 하데스)으로
내려간다는 진지한 이야기를 저속하게 바꾼것에 불과하다.지하세계는 심심찮게 농담의 대상
이 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기원전 405년, 에우리피데스가 죽은  지 몇 개월
후에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개구리들]이라는 제목으로 지옥  여행에 관한 익살 광대
극을 썼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만한 것은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술최한 디오뉘소스, 그의
dntmRHkdtmfjdns 하인 크산티아스, 그리고 사자 가죽을 두른 멍청하고 우락부락한 헤라클
레스, 이 세 사람을 주인공으로 지옥 여행을 그렸다. 거기서는 무시무시한 괴물들 대신에 개
굴개굴하는 지옥 여행을 그렸다. 거기서는 무시무시한  괴물들 대신에 개굴개굴하는 개구리
들이 스튁스 강을 보호한다.우스꽝스러운 이들 삼총사는 뱃사공 카론과 쓸데없는 흥정을 벌
이기도 하고, 엉겁결에 엘레우시스 의식에 참여하기도  한다(이것은 당신 종교에 대한 신랄
한 풍자였을 것이다.)또한 길가메쉬가 그랬던 것처럼 접대부를 만나기도 한다.끝으로 지하세
계 심판관 중 한 명을 만나, 지상에는 더 이상  훌륭한 시인들이 없으니 에우리피데스를 돌
려 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죽은 자들ㅇ느 에우리피데스를 지지하는  파와,
그보다 나이가 많고 근엄한 아이스퀼로스를  지지하는 파가 서로 나뉘어  폭동을 일으킨다.
그리고 시 경연대회가 열리는데, 아이스퀼로스가 우승한다.
  한참 뒤인 서기 2세기에, 많은 글을 남긴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는 [죽은 자들의  대화]라
는 작품을 통해 유용한 풍자 형식을 창안했다. [죽은은 자들의 대화]에서는 유명인사들(모두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이  정치와 종교를 포함해 쟁점이 되는 여
러 주제들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결국은 저자의 생각)을 펼친다. 이 작품 때문에 루키아노스
에게는 '독설가'라는 별명이 붙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냉소적인 루키아노스를 추종하던 사
람들이 그의 풍자 형식을 되살리게되며, 20세기의 대중 잡지에서도 그 형식을 찾아볼 수 있
다.
  후기 그리스 인들에게 '시끌벅적한 지옥'이 다룰 만한  소재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리스
토파네스는 인기 극작가였으며, 자신이 퍼부은 독설 때문에 잡혀  들어갈 위험도 전혀 없었
다. 하지만 퓌타고라스는 자신이 환상을 보았는데,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가 생전에  신들에
관해 수많은 거짓말을  한 죄로 처벌받고 있더라고 주장한다.그  주장에 따르면 헤시오도스
는 청동 기둥에 묶여 있고, 호메로스는 뱀에 둘러싸인 나무에 매달려 있다.
  다음 장에서는 그리스의 상황을 복잡하게 다루는 플라톤을 다루게  되는데, 그 전에 먼저
그리스.로마의 하데스와 그곳의 거주자들을 개관할 필요가 있다. 으스스한 지하왕국으로  들
어가는 몇 안되는 방문객들은 남부  펠로폰네소스의 마르마리근처에 있는 타이나론  동굴을
경유한다. 반대로 죽은 자가 나타난 일도  한 번 있었다. 그것은 페르세포네의 마법의  숲에
있는 또 다른 동굴을 지나서, 평범한  항해자는 접근할수 없는 섬에 모습을 드러낸  경우다.
방금 죽은 자의 프쉬케 또는 영혼은 헤르메스(영혼의 길잡이)의 안낸를 받아 스튁스('증오')
강을 건넌다. 스튁스 강의 지류에는 아케론('고뇌'),플레게톤('불'),코퀴토스('탄식'),아오르니스
('무조:그러나 실제로는 로마 신화에서 타이나론 동굴에 해당하는 아베르누스를 오역한 것이
다),그리고 레테('망각')가 있다. 그 강들은 보통 4개의 강으로 줄여서  묘사되지만, 언제나 4
개의 강이 똑같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카론은 영혼을 배에 태우고 스튁스 강을 건너는 사공
이다. 어떤 영혼이든 바깥쪽 강둑에서 초취한 모습으로 영원이  지낼 생각이 아니라면 카론
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그의 배를 타야 한다. 케르베로스는 머리가 여럿 달린  번견이다.페르
세포네와 하데스(또는 플루톤)는 하데스, 더 정확하게는 그 상층부인 에레보스를 다스린다.
  하데스의 하층부인 타르타로스에는 티튀오스를 제외한 티탄거신족  전체가 갇혀 있다. 티
튀오스는 아주 기발한 방식으로 벌을 받는 극소수 유명인사 중 하나다. 그는 아폴론과 아르
테미스의 어머니인 레토를 겁탈하려고 덤벼든 죄로, 하데스에서 9에이커나 되는 땅 위에 말
뚝으로 매인 채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힌다. 시쉬포스는 하데스를 속이고 지하세계에서 도망
했던 죄로, 정산에 도달하면 늘 다시 뒤로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언제까지나 언덕 위로 다시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그 옆에는  올륌포스의 여왕 헤라를 겁탈하려 했던 죄로,  멈추지
않고 돌아가는 불타는 수레 바퀴에 묶여 있는 익시온이 있다.  또 그 옆에는 탄탈로스가 있
다. 그는 아들을 죽여 요리해서 신들에게 먹인 벌로 호수 위에 있는 나무에 묶여 있다. 물을
마시려 하면 물이 내려가고, 나무 열매를 따먹으려고 하면 나무 가지가 올라가 버려서 탄탈
로스는 갈증과 허기에 시달린다. 초기 그리스 신화 작가들은 단순히 그의 머리에 커다란 돌
을 매달아 공포에 떨게 하는 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 결혼 첫 날  밤 머리핀으로 남편들을
살해한 다나이데스는, 물이 새는 조리로 영원히 호수의 물을 길어야 한다.
  하데스에는 괴물과 악마들도 살고 있다. 테세우스의 손에 죽은 메두사, 기독교의 악마처럼
사람들이 악행과 우행을 저지르도룩 부추기고  그것을 빌미로 사람들을 처벌하는  알라스토
르, 채찍을 든 복수의 정령들인 에리뉘에스 또는 푸리아이, 무시무시한 날개를 가진  죽음의
정령들 케레스(이들은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의 영혼에 각각 하나씩 존재한다)가 있다. 그리고
마녀신 헤카테와 라미아가  있다. 헤카테는 코레-페르포네-헤카테,  즉 소녀-여왕-마녀라는
삼위일체의 세 번째 측면이다.
  고대 그리스 이야기에서 비행에 대한 처벌은, 아무리 초자연적으로 집행되는 것이라 해도
-가령 어머니를 죽인 오레스테스를 쫓아 다니는 복수의 세 여신의 이야기 같은 것이 있다-
신들에게 대항하는 범죄를 저지른  몇 안되는 경우를 빼면,  일반적으로 사후에는 행해지지
않았다. 오이디푸스의 고뇌, 그리고 아트레우스 가문에 대대로 전해지면서 후손들의 삶을 황
폐하게 만든 그 유명한 저주도 신들이 살아 있는 자에게 내린 것이지, 죽은 자에게 내린 것
은 아니다. 이집트 인이나 조로아스터 교도들과 달리 초기 그리스 사람들이 사후에 대해 그
다지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단지 고대 그리스가 중앙집권화한 사법제도를 확립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스 인은 기원전 5세기경에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가령 핀다로스 같은 이가 사후세계에 대해 쓴 글을  살펴보면, 나쁜 사람들은 사후세계에서
'보기에도 끔찍한 노역'을 감당해야만 했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지하세계  심판관들
의 이름을 열거하는데, 거기에는 유럽인을 심판하는 아이아코스, 아시아 인을 심판하는 라다
만튀스, 그리고 항소 법원을 지키는 미노스가 있다. 선한 영혼은 엘뤼시온들판으로 간다. 핀
다로스에 따르면 그곳에는 마술과 운동 경기를 즐기는 자도  있고, 체스를 두며 즐거워하는
자도 있고, 하프를 연주하는 자도 있으며,어딜가나 꽃이 가득  피어 있다. 그리고 법원을 지
비추는 불로 장식한 신들의 제단에는 다양한 제물이 바쳐진다.  한편 악한 영혼은 타르타로
스로, 그리고 남겨진 자들은 아스포델로스의 들판으로 간다. 오르페우스 숭배자들은  포상이
나 형벌을 받으려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영혼은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1세기의 역사가 디오도로스는 오르페우스 신앙, 엘레우시스 신앙  그리고 내세와 관련된 그
의식(예를 들어 아누비스를 케르베로스의 얼굴)의 기원이 이집트에 있다고 본다. 그리고 호
메로스가 두 번째 하데스 여행에서 저승사자로 헤르메스를 이용하는 것도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본다.
  한편 기원전 5세기에는, 처음으로 '지옥의 역사'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 화가인 폴뤼그노
토스가 등장한다. 그는 오뒤세우스가 죽은 자의 땅을 방문하는  장면을 담은 대벽화를 델포
이의 아폴론 신전에 그렸다. 수세기에 걸쳐 관광객과 순례자들은  그 벽화를 보려고 신전을
찾아왔다. 사실 그 벽화는 오래 전에 (필시  기독교인들에 의해)훼손되었지만, 서기 2세기경
그리스 출신의 여행기 작가인 파우사니아스가 그 내용을 주의 깊게 묘사했다. 파우사니아스
의 상세한 묘사를 읽어 보면, 폴뤼그노토스의 벽화가 [오뒤세이아]의 내용에 문자 그대로 얽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반대로  폴뤼그노토스는 호메로스가 잊어버리고 언급하
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것, 또는 오뒤세우스가 좀 더 용감했다면  밑으로 더 내려가서 불 수
있었을 법한 것들을 채워 넣었다.  그 과정에서 폴뤼그노토스는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취사선택하여 상당수 집어넣었고, 그 중에는 오르페우스도 들어 있었다.또한 폴뤼그노토스는
아마도 자신의 상상력을 동원해서-그보다 수백년 뒤에 태어난 파우사니아스는 그러한 신화
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악마적 짐승ㅇ르 창조해 낸 듯한데,그의 묘사는 어김없
이 지옥 연구자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델피의 안내자들은 에우뤼노모스가 지옥에 사는 악귀들의  하나라고 말한다. 그는 죽ㅇ느
자의 육체를 뼈만 남기고  먹어 치운다. 그런데[미뉘아드]와  [귀환자들]은 물로 호메로스의
시에도 악마 에우뤼노모스에 대한 언급은 없다.그렇지만 나는 거기에 그려진 대로 에우뤼노
모스의 모습을 설명해보겠다. 그 악마의 몸은 마치 고깃덩어리에 달라붙은 파리떼처럼 검푸
른 색깔을 띠고 있다. 그리고 독수리 깃털가죽 위에 앉아 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에우뤼노모스는 검푸른색을 띠고 있던 에트루리아의 카론의 변형이거나 케레스의  일종이
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파우사니아스는 그렇게 생각한 것 같지 않다.여러지역의 신화와  전
설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호기심  많고 견문이 넓ㅁ은 이 작가가,  분산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 인들의 바알 세불, 즉  '파리대왕'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 궁금해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파우사니아스가 그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다면, 그가 파리의 비유를 사용한  것
은 정말 엉청난 우연의 일치다.

    5 플라톤의 지옥
  플라톤은 철학자이자 교사로서 2,500년동안 인류에  확고한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는,종교
에 얽매이지 않았던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인들이 사후세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
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준다 .플라톤은 그의 저작에서 다양한 표현을 구사하며, 때로는  농담
도 한다. 하지만 그가 전개하는 이론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한다.  플라
톤은 다른 대화편들에서도 종종 영혼의 운명을 다루기는 하지만, 전편에 걸쳐 이 주제를 다
루고 있는 것은, 사형 직전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묘사한 위대하고 감동적인 드라마 [파이
돈]이다.
  이 대화편의 화자는 파이돈이다. 소크라테스의 임종 당신 플라톤은  그 자리에 없었기 때
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사약을 마시기 직전에  감옥에서 친구 15명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몇 시간을 보냈다. 그의 정신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  중 누구보다 맑았다. 소크라테스는, 철
학자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영혼이기 때문에 이제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서 풀려나 자유롭
게 된다는 것은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라며 농담까지 한다. 그러나 보이오티아 사람 케베스
는 영혼의 운명을 두려워하며 이렇게 묻는다 .
  인간이 죽는 바로 그 날 영혼은 육체를 떠나 종말을 맞을 것입니다 -일단 육신을 벗어나
면, 곧 연기나 공기처럼 허공으로 날아가 결국 무 안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케베스를 안심시키면서, 이 주제로 최후의 토론을 해 보자고 친구들에게 제
안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 말을 듣는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내 오랜 적들인
풍자 시인들의 한 사람이라 해도,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에  대해 실없는 소리를 한다고 나
를 비난하지는 못할 걸세."
  그 다음에 이어지는 토론에는,  우리가 지각하는 현실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이데아적인
(이상적인)것의 물질적이고 불완전한 모습일 뿐이라는, 형태의 이데아에 관한 플라톤의 이론
이 나온다. 예를 들어 의자를 만드는 사람은 '이데아적인 의자'의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파악
하고 있어야 의자를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서구의 종교 신조들에 깊은 자취
를 남겼다. 헬레니즘 시대의 신플라톤주의자들, 특히 이집트 사람 플로티노스와 유대 계  이
집트사람인 필론은 플라톤의 저작들을 재해석했다. 이것들은  초기 기독교의 그노시스 파와
정통파 양쪽에서 다 읽혔으며, 원죄와 그 이후의 구원  같은 상당히 비그리스적인 관념들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신플라톤주의적 교육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육체적 형상을 지닌 예수를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의 이데아로 해석했다.(예수의 인간적 면모를 완전히 희생시키면서 예
수의 신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곧 가현설 신봉자들은 심각한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나중에
는 동정녀 마리아가 여성의 이데아를 구현했다고 주장하며, 또한  지상에 실현될 하느님 왕
국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던 대로  삶의 이데아적 형태를 구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들은 플라톤 이론에 의지하여 페르시아의 선악 이원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현세의 왕'이 다스리는 죄 많고 타락한 물질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 왕이 영원한 권력을 갖는다고 인정하지는만, 그 왕아  영원한 권력을 갖는다고 인정하지
는 않았던 것이다.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지식이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면서 영혼이 가시적인 육체를  통해 다양하게 현현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영혼은 이데아적 형태와 비슷하고, 일시적 육체와 달리 영원한 것이다. 영혼은 결국  선행에
의해서 "진실한 하데스로 가게 된다네. 하데스는 그  영혼처럼 불가시적이고 순수하며 고귀
한 장소이고, 또한 그 영혼이 선하고  지혜로운 신에게 향해가는 도상에 있는 곳이지.  만일
신이 원한다면 내 영혼도 곧 그곳으로 갈 것일세."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악한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악한 영혼은 육체적인 것에 집착한 까닭에 다름 몸 속에 다시 갇
힌다. 다시 말해 삶의 본성에 따라 이끌려  왔던 대로,  술주정뱅이는 당나귀 몸 속에 갇히
고, 살인자는 늑대 몸속에 갇히는 것이다. 이런 체계는 힌두 교나 불교 교리에 가깝다. 하지
만 소크라테스는 이 부분에서 아주 진지하지는 않다. 그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아테네 시민
들은 체제에 잘 따르기 때문에 나중에 개미나 말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철학자만
큼은 신들의 동료로서 환대 받는다는 말도 한다.
  나중에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거주하는 '진실한 대지'를 상상력을 동원하여 다음과 같이 묘
사한다. 그것은 상공에 있는 둥근 구체이고, 우리가 사는 평평한 원반형의 대지를 감싸고 있
다. 그 구체에서 시작된 거대한 균열은 대지의 중심부까지 파고 들어 가는데, 거기에 타르타
로스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또 대지를 에워싸고 있는 오케아노스강, 그리고 타르타로스의 강
들인 아케론, 퓌리 플레게톤, 코퀴토스,  그리고 스튁스 호수로 이어지는  스튁스 강에 대해
서술한다. '선량하게 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악하게 살지도 않은 자들'의 영혼은 먼저 아케
론 강을 따라 아케론 호수로 가고, 그곳에서 악행을 정화한  다음 선행에 대한 보상을 받는
다. 그러고 나서 인간으로든 짐승으로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돌라온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구제불능의 인간들에게는 지옥이 거의 무한하다고 할 정도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막중한 죄를 지어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자들, 다시 말해 성물절도, 비열하고  잔인
한 살인, 그와 비슷한 끔찍한 짓을 저지른 자들은 제 운명에 합당하게 타르타로스로 던져지
고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게 되네. 그리고 비록 큰  죄를 범하긴 했으나 구제불능일 정도로
악하지는 않은 자들, 가령 순간적인 분노 때문에 부모에게  폭행을 했지만 여생을 뉘우치며
보낸 자, 또는 사람을 죽였지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자들도 역시 타르타로스로 던져진
다네, 하지만 이들은 거기서 1년 동안만 고통을 겪으면, 그후 큰 파도에 밀려 밖으로 나오게
된다네. 단순히 살인을 한 자는 코퀴토스 강으로 밀려나오고, 부모를 살해한 자는  퓌리플레
게톤 강으로 밀려나오지. 그 뒤엔 아케론 호수 앞가지 강을 따라 흘러오게되네. 거기서 지인
들은 자신들이 살해했거나 괴롭혔던 상대를  목청껏 불러서, 연민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또 아케론 호수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해야 한다네. 그래서 만약 요청이 받
아들여지면 그들은 강물을 벗어나 고통을 마감하게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타르
타로스로 돌아갔다가 곧장 파도에 밀려 강물을 따라 흘러나오지. 상대방에게 용서받을 때까
지 그 고통이 반복된다네. 바로 그것이 그들에게 심판관들이 내린 형벌이라네.
  소크라테스는 이런 이야기를 한 뒤에,  몇 가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이와
같은 이야기'는 사실일 것이라고  말한다.[고르기아스]의 끝부분에서도 그와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된다. 소크라테스는, 신들이 세계의 지배권을  어떻게 분할했는지, 영혼의 심판관들은
어떻게 임명되는지, 재판관 라다만튀스가  어떤 식으로 '방종과  쾌락과 오만과 음란함'으로
추악해진 영혼을 구제 가능 또는 구제 불가능으로 분류하여 타르타로스로 보내는지 등에 관
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 준다. 치유하기 힘든  사람들은 언제나 국사를 다루는 공
인들인 것 같다고 그는 덧붙인다. 소크라테스는 그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정의와 모든 덕을 실천하는  것이 최상의 삶을
사는 길이라고 말한다.
  [파이드로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날개 달린 피조물로 묘사한다. 불완전한 영혼은 힘
이 쇠잔해져 땅에 눌러 낮아 유한한 육신에 자리잡는 반면, 완전한 영혼은 하늘로 날아오른
다. 여기서 플라톤은 영혼의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뿐인데, 수세기 뒤에 기독교의  교부
들 중 일부는 이것을 일고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특히 오리게네스는 영혼의 재래가 어
떤 식으로 일어나는가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오리게네스가  보기에,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는 날개달린 영혼의 형상은 지옥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
는 것처럼 보였다.
  플라톤은 [국가론]의 끝부분에 병사 에르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를 집어 넣었다. 에르는 요
즘 말로 임사체험을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터에서 죽은  채로 12일동안이나 방치되어 있
다가 소생해서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다. 에르의 환상은  그리스 고전문화의 하데스에 속하
는 것이 아니었다. 그 환상 가운데  어떤 것은 중세 기독교의 환상을 미리  보여 준 듯하다
(물론 에르의 환상은 의삼할 여지없이 중세 기독교에 영향을 주었다). 또 부분적으로 동양적
이미지도 보인다. 덕 있는 영혼들은 "하늘을 향해 난 오른쪽  길로 올라간다."반대로 죄인들
은 왼쪽으로 내려가 활활 불타는 듯한 형상을 한 자들과  만난다. 이들은 죄인을 강제로 끌
고 가서 채찍과 가시로 마구 때린다. 죄인들은 열두 번째  날이 되면 운명의 여신들이 돌리
는 '숙명의 물레'앞으로 나아가, 자신들이 어떻게 되살아날 것인지 선택한다.  플라톤은 고대
신화의 영웅들을 등장시켜, 그 선택이 - 슬프고도 우스꽝스럽고 또 기묘하게도-양식에  거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영혼들은 레테의강물을 마신 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유성처럼 위로 날아올라 사라져
버린다. 오직 에르만이 생전 그대로 화장용 장작더미 위에서 살아난 것이다.
  영혼을 영원한 것으로 전제하면, 영혼 재래설 -또는 윤회설, 전생설-은 죄와 벌의 형평성
문제, 설명불가능한 인간의 고난에 대한 문제, 현세에서 악덕이 번성하는 문제 등에 대해 아
주 논리적인 해답을 제시한다. 사후에 영원한 보상 아니면 영원한 처벌을 받는 고정된 체계
에 비하면, 영혼 재래설은 훨씬 만족스런 해결책인 셈이다. 윤회는 초자연적 법칙에 따라 결
정된 고정도니 것이 아니다. 윤회설은 도덕적으로 역동적이며, 나비나 변태나 계절의 순환과
같은 자연 질서의 일부가 됨으로써 현실에서 일어나는 몇몇  난제를 피해가게 된다. 그리고
죄는 결국구제 가능하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고정된 체계 안에
있는 일신론자-들의 경우, 악은 신의 대항자가 도리  수 없는 이상, 전능한 신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신론자들은 '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악의 원리'라는 골치 아픈 문제와
씨름해야만 한다. 동양 종교에서는 윤회 사상을 항상 광범위하게 받아들인 반면, 서양  종교
에서는 그것을 거부했다. 물리적인  육체의 부활이라는 기독교 교리가  -조로아스터 교에서
전해졌으며, 이슬람 교 역시 이것을 수용하고 있다. - 영혼의 재생을 불가능하게 했던 것이
다.

    6 로마 제국
  모험심 강한 상인들과 용병의 활약 그리고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여 중동으로 몰아낸 그
리스 군대 덕분에 적어도 기원전 5세기부터 그리스 문화는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그리스 문화의 유일한 경쟁 상대는 오랫동안 안정을 누린 이집트 문명뿐이었다.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계 정복에 착수하면서 여러 도시를 연결하는 교통
로를 건설해 나갔고, 그리스 문명은  인도와 스페인까지 뻗어 나갔다. 알렉산드로스는  자기
휘하의 장군들에게 정복지의 통치권을  위임했고, 그리하여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리아와 소아시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그리스의 영향을
크게 받은 로마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로마 인들은  갈리아 지방의 야만족들과 싸우면
서 서북쪽으로 진출했고, 결국 브리타니아 섬까지 지중해 문명을 전파했다.
  이러한 문화 전파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었다. 군대의 병사들이 정복지의 처녀들과 결
혼하는 일이 흔히 있었는데, 그들은 아내를 고향으로 데려오거나  또는 반대로 군대를 떠나
정복지에 정착했다 - 어느  경우에도 상호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리스. 로마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정복지의 상층  계급 사람들은 헬레니즘의 귀족적  생활양식을 동경했고, 한편
그 지역 농민들은 새로 온 보병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가르쳤다.  그 동안 불만을 품고 있
던 젊은이들은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문물을  접하고서 새로운 문화를 더욱 동경하게  되었
다. 아시아, 아프리카, 스칸디나비아, 슬라브 등지에서 끌려온 노예들과 함께  매우 이질적인
풍습도 유입되었다. '헬레니즘적'이라는 형용사 자체가 그리스와 동양 문화의 혼합물을 가리
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 시대를 포함하는 기나긴 헬레니즘 시대에 이루어진 문
화적 융합은 단순한 문화교류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세계 역사에서 여러 언어와 문화와 풍속과  신앙이 그토록 경의롭게 상호 융합한  사례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뒤로도 20세기가 되기 전까지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다. 종교에서는
온갖 새로운 요소들이 전통 종교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이지브의 세라피스같이 완전
히 새로운 신들이 생겨나기도 했고, 이국 땅에서 숭배되던 오래된 신들이 유입되기도  해다.
아시아에서는 사바지오스, 페르시아에서는 미트라, 이집트에서는 이시스같은 신들이  들어왔
다. 또한 터키에서는 대지모신 퀴벌레의 조상이 로마로 수입되었다. 그 후 퀴벨레 여신을 섬
기는 거세된 사제들이 통성 행렬을 벌이는 것을 보고 로마 원로원은 분개하게 되었다. 원로
원은 뒤늦게나마 시민들에게 큅멜레 숭배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금지했다.
  헬레니즘이 로마 제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문화교류 시기는, 편의상 우리가 서력 원년이라
부르는 시점을 전후해 각각 4세기 정도에 이르는 기간이다. 그 시발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고, 종착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그리고 그 시작과 끝에 지옥이라는 관념을 포괄적으
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상가가 각각 한 명씩 등장했다.  바로 아테네의 플라톤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다.
  로마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경건했지만 신화 만들기에는  그리 열성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토착 종교는 일종의 정령신앙으로서, 일본의 신도와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작은 숲, 시냇물
심지어 나무 한 그루에도 각각 신들이 깃들어 있었고, 가옥  한 채, 안뜰, 그리고 일상 생활
의 온갖 세세한 측면에까지 각각의 신이 있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남자는 게니우스, 여
성은 유노라는 수호신을 갖고 있었다 .게니우스와 유노라는 개념은 나중에 수호천사라는 개
념으로 변하여 기독교에도 전해진다. 사실상 이름을 지닌 모든  것에 저마다  '신령'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수천의 '신령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신들,
예를 들면 하늘, 태양, 달 바다, 추수, 화로의 신들, 그리고 사랑,전쟁, 결혼,지혜 같은 개념을
구현하는 신들을 위해서 로마인들은 그리스 신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단지 그 신화에 등
장하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솜씨 좋게 로마식 이름으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다른 지방의 출정한 군인들도 그 지방 신전에 가서 똑같은 일을 했다.군인들은 어떤 여인
상이든 상관없이 여신상이 놓여 있는 신전은  무조건 로마 여신 디아나의 신전으로  간주했
다. 그리고 그 여신상을 디아나로 모시고 숭배했던 것이다. 그 지방에 사는 갈리아 사람들이
그 여신상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관례는 계속  지켜졌다.
어떻든 로마 군대는 존경심을 표시하며 경건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종교상의 마찰
은 그럭저럭 피할 수 있었다. 제국  말기에도 다른 문화를 대하는 로마인의 자세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는 영국  여배우 패트릭 캠벨이 "뭐든 원하
는 대로 하세요. 단, 길 한복판에서 멋대로  하다가 달리는 말을 놀래키지 않는다면요."라고
한 것과 어느 정도 상통한다. 그런데  퀴벨레의 악명 높은 사제들은 그런 관례를  깨뜨렸다.
그리고 당시 신이나 다름없던 카이사르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은 강경한 기독교인들도  관례
를 깬 사람들이었다. 로마 인의 기준에서 보면 이런 행동은 무례하고 무질서한 것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널리 퍼진 신비주의 신앙은 초기 기독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
면, 기독교인들은 일곱 가지 대죄라는 개념을 도상학적으로 또 지리학적으로 기독교 자체의
지옥관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일곱 가지 대죄는 원래 7이라는 숫자에 신비적 의미를 부여한
조로아스터 교에 근거를 둔 미트라 신앙의 교리였다. 미트라 신 이야기에 따르면, 죽은 영혼
이 염소 자리의 문을 지나서 올라갈 때, 다시 말해 일곱  개의 천구층을 지날 때마다 각 층
에서 그에 해당하는 권고를 하나씩 받는다. "태양 -자만,달-질투, 화성-분노,수성-탐욕, 목성
-야망, 금성-정욕,토성-나태"에 해당하는 것인데, 그런 악덕을 포기하라는 권고를 받는 것이
다. 그리고 12월 25일이 신의 탄생일이 된 것도 미트라 신앙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
리스도를 나타내는 키로사인도 그런 것이었고, 기독교인들이 다른 제사들은 물론 점성술, 수
비학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인 것도 미트라 신앙에서 영향받은 것이었다.
  라틴 시인들은 옛부터 전해오는 그리스 이야기를 윤색하고, 지하세계 이야기에도 상당 부
분을 추가했다. 즉,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에서 볼 수 있는 웅장한 배경, 베르길리우스
와 오비디우스가 쓴 오르페우스 이야기,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당나귀]에 나오는  프쉬케의
모험담, 내세를 부정적으로 그리지 않고 긍정적으로  그린 키케로의 [스키피오의 꿈],플라톤
의 에르에서부터 중세의 꿈 속 환상까지 관통해 보여 주는 플루타르코스의 [테스페시오스의
환상]등이 그것이다. 로마 인들은 몇몇 고유명사들을 바꾸기도 했다. 가령 플루톤 또는 플루
토를 '디스 파테르'라 불렀는데ㅡ,  여기서 디스는 디베스를  축약한 말이다. 다라서  그것은
'부자 아버지'라는 뜻이 된다. 페르세포네는  프로세르피테가 되었고, 그렇게 되면서  원래의
그리스 개념보다 덜 무서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로마에서 메르쿠리우스가 되었
다.
  [아에네이스]는 기원전 30년에서 19년 사이에 씌어졌다. 당시 로마에 살던 베르길리우스는
철저한 준비와 조사를 거쳐 이  작품을 썼다. 베르길리우스의 모델은 호메로스였다.  하지만
[아에네이스]에 나타난 저승 장면을 보면 베르길리우스가 플라톤의 작품에 통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유럽이나 미국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정규과목
으로 베르길리우스를 가르쳤다는 점도 이유가 되겠지만, 어쨌든 그의  작품은 죽은 자의 땅
에 관한 글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서사시 [아에네이스]의 주인공은 그 엄청난 전쟁(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던 트로이아  사
람 아이네이아스다. 그도 오뒤세우스처럼 각지를 떠돈다 .조국 트로이아가 패망했기  때문에
새로 정착할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에 해당하는 무자비한 로마 여신
유노는 아이네이아스를 적대시한다 .그는 유노의 분노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지
하세계로 내려가 죽은 아버지 안키세스에게 조언을 구한다 .죽은 자의 영혼을 꾀어 밝은 세
상으로 나오게 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아이네이아스는 자신이  직접 지하로 하강할 준
비를 갖춘다. 그는 쿠마이의 시뷜레 또는 무녀를 길잡이로 삼고, 또한 사자의 땅의 여러  위
협을 막는 마법의 부적으로 성스러운 황금 가지를 손에 들고 내려간다.
  [오뒤세이아]에서처럼 아이네이아스와 시뷜레는 동굴 입구에서 피의 제물을 준비한다.  하
지만 이번 동굴의 위치는 페르세포네의 숲이나 타이나론의 아니라. 오늘날의 나폴리 근처에
위치한 쿠마이다. 동굴 위치는 이처럼 구체적이다.-  지옥은 이제 상상의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 땅 바로 밑에 위치하는 거이다. 베르길리우스는  그 장면을 무시무시한 특
별 효과로 채워 놓는다. 짖어대는 개, 음습한 동굴,  유독성 연기, 지진, 등골이 오싹한 울음
소리.오늘날 할리우드의 공포영화는 베르길리우스 덕을 크게 본 셈이다.
  림보가 여기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가난뱅이 영혼들'은 림보에서 100년 동안 또는 그들이
땅에 제대로 묻힐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로마 사람들은 적당한  절차에 따르는 관료적 형
식을 선호했던 것이다. 아이네이아스는 자신이 아는 사람이 세  명이나 림보에 있다는 사실
을 알고 당황한다. 그러자 시뷜레는 자신이 나중에 무녀의  힘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겠다고
아이네이아스에게 약속한다. 두 사람은 '잠의 동굴들'을 지나 심술궂은 카론과 함께 강을 건
넌다. 케르베로스에게 우유에 적신 빵 한 조각을 던지고, 미노스의 재판정을 지나던 두 사람
은 여인들과 마주친다. 그들 중 첫 번째 여인이 아이네이아스와 헤어진 슬픔 때문에 자살한
디도다. 디도는 그에게서 얼굴을 돌려 버린다. 여인들과 만난 다음에는 영웅들이 음울한  전
쟁 이야기를 들려 주는데, 그들은 그리스가 아니라 트로이아의 영웅들이다.
  시불레는 아이네이아스를 재촉하여 두 갈래길의 오른쪽으로 간다. 그 길은 디스의 저택을
지나 에루리시온 들판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아이네이아스는  멈춰서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
려 불타는 강 건너편에 있는 3중벽을 두른 요새를  바라보았다. 방비를 위해 육중한 성문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푸리아이 중  하나가 앉아 있다. 요새 안쪽에서는 영혼들의  신음
소리, 채찍질 소리, 철거덕거리는 사슬 소리가 들렸다. 시뷜레의 설명에  따르면, 라다만튀스
가 그들을 그곳으로 보냈다고 한다. 그들은 '흉폭한 여자들'과 머리가 50개 달린 무시무시한
휘드라에게 앙갚음을 당한 뒤 심연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시불레는 유명인사들이 있는 곳을 가리킨다. 티탄, 티튀오스, 익시온, 페이리토스, 텟우스-
특히 테세우스는 시인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마다 다시 망각의 의자로 되돌아가는  것이
다. 거기에는 일반적인 죄인들도 있다. 예를  들어 친척에게 무정했던 사람, 구두쇠,  간통한
자, 반역자 등이 있다. 시뷜레는 자신이 '무쇠같이 튼튼한 목'을 가졌다 해도  그들의 죄목을
모두 열거하긴 힘들다고 말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는 지옥에 대한 최초의 철저한 도해식 묘사이자,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그 안에 묘사된 형상들은 모두 그 당시에는 개략적으로 알려져 있던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길리우스의 묘사가 워낙 생생하다 보니, 사람들이 갖고 있던 개략적
관념들은 아주 구체적인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후대의 시인들과 극작가들, 특히  단테
같은 사람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를 다시 불러내 자신의 길잡이이
자 조언자로 삼았고, 또 단테 자신이 지옥의 지형을 영원히 바꾸어 놓는다 .그뿐 아니라  기
독교 우주론의 초창기 정책들을 만들어낸 사람들, 즉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도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베르길리우스
를 자주 인용했다.
  아이네이아스의 저승 방문 이야기 뒷부분은 전반부만큼  흥미진진하지 못하다. 하지만 애
국적 관점에서 로마 왕실의 혈통과 트로이아의 귀족 가문을 연결하고자 했던 작가 자신에게
는 뒷부분의 이야기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이제 안키세스가 나타나 내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플라톤의 에르가 한
묘사에 가깝다 그런 뒤 아이네이아스의 자랑스런 후손들이 행렬을 지어 나타나 로마가 누릴
미래의 영광을 보여 준다 .아이네이아스는 자손들의 모습에 매로당해서 유노에 대해 조언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오래오래  살아남아 그 혈통의 시조
가 된다는 것을 안다. 마침내  그와 시뷜레는 묘하게도 진실한 뿔의  문 반대편에 자리잡은
거짓된 상아의 문을 통과해 지상으로 나간다.
  플루타르코스는 원래 그리스 인이었지만, 한동안 로마에서 살았다. 그가 쓴 [테스페시오스
의 환상]은 중세 시대 내내 인기를 누렸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 형식은
플라톤의 에르 이야기와 유사하다 테스페시오스라는 무뢰한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리고 3일 뒤 사람들이 시체를 매장하려는 순간에  다시 살아나서, 자신의 '임사'환상에 대
해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그의 영혼은 몇몇 별들이 밝게 빛나는 영역으로 옮겨졌다. 그가 본
것ㅇ느 맹렬한 화염에 휩싸여 부글거리는 거품 속에 죽은 남녀의 영혼이 들어 있는 광경이
었다. 어떤 영혼은 솟아오르고, 어떤 영혼은 혼돈 소에  빠져들었으며, 또 어떤 영혼은 확실
하게 보이지 않았다. 솟아오르는 영혼들은 맑디 맑게 빛났으나, 다른 영혼들에는 비늘  모양
의 반점이 있었고, 어떤 영혼은 몸 전체가 그런 반점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러한 정화의  형
벌을 내리는 일은 재판관 디스가  맡았는데, 어떤 영혼들은 구제불능이었다. 구제불능일  경
우, 복수의 정령 에리뉘에스 중 하나가 그들을 이리저리 쫓아다니며 고통을 주고 결국 심연
으로 떨어뜨렸다. 테스페시오스는 구제불능인 자들의  장소에서 아버지를 발견했다(그의 아
버지는 황금을 얻기 위해서 몇몇 손님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고백했다).그곳의 영혼들은 고
통으로 몸부림쳤고, 어떤 영혼은 내장을 쥐어 뜯겼다. 근처에는 무시무시한 호수가 셋  있었
다. 하나는 뜨거운 황금 호수, 다른 하나는 차디 찬 납 호수 그리고 마지막은 쇳조각 호수였
다. 악귀들은 호수에서 호수로  영혼들을 집어던졌다 .마지막으로  테스페시오스가 본 것은,
교정의 벌'을 받는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망치와 칼자루로 마구 두들겨 맞아 '올바른 상태'가
되면 돌아가서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다. 반면에  비
슷한 시대를 산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당나귀]는 훨씬 쾌활하며, 과거로 되돌아간 느낌을 준
다. 사랑스런 프쉬케가 미의 마술 상자를 가져오기 위해 하데스로 가는데, 많은 이들이 그랬
듯이 그녀도 경고를 무시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프쉬케의  모험은 그 후 행복하
게 끝을 맺는다.  

    7 헤브라이의 쉐올
  구약성서만 보고 판단한다면, 유대 인들은 지중해의 여러 민족들중에서 음울한 세계와 가
장 거리가 먼 민족이었거나, 아니면 가장 상상력이 부족한 민족이었다. 이웃 민족들과  달리
유대 인들은 죽은 자들과 별  관계가 없는 듯 살아갔으며, 죽은  자들을 경배하거나 제물을
바치거나 참배하  따위의 일도 하지 않았다. 사후에 그들과  다시 합치기를 원하지도 않았
다. 그리고 죽음 후에 어떤 형태로든 여호와와 상호 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
았다. 그리고 죽음 후에 어떤  형태로든 여호와와 상호 작용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땅 속에 묻힌 것과 다름없이 되었사오니
  다 끝난 이 몸이옵니다.
  살해되어 무덤에 묻힌 자와 같이
  당신 기억에서 영영 사라진 자와 같이
  당신 손길이 끊어진 자와도 같이
  이 몸은 죽은 자들 가운데 던져졌습니다(시편 88장 4~5절).

  사실 그들은 죽은 자들을 부정하다고 여겼다.
  구약성서에는 헤브라이 어 쉐올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지옥'때로
는 '무덤'또는 '구덩이'등으로 번역되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쉐올이라는 말은 그저 사체
가 드러누워 쉬는 곳이라는 의미로  쓰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듯하다. 단, 예외가
있다면 우울과 절망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이 말을 쓰기도  한다. 또 쉐올은 때때로 감옥
을 의미한다. 종종 지옥으로 번역되는 또 다른 헤브라이 어는 '게헨나'라는 단어다. 이  말은
단지 일종의 쓰레기 더미 또는 마을이 쓰레기장이었던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할 뿐이다. 사
람들은 위생상의 이유로 이곳에  끊임없이 불을 지폈고, 쓰레기뿐  아니라 범죄자나 동물의
시체도 그  속에 던져 놓고 태웠다. 초기에는 이교도의 신  몰록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가 이곳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게헨나라는 말은 불쾌한 장소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었고,
또한 저주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 죽는다는 곳에서  죽는다는 것은 야훼의 율법에
어긋나게 살았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외에 아바돈 과 보르라는 말도 이따금  '지
옥'으로 번역되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웃의 메소포타미아 여러  민족들처럼, 그림자같이 어렴풋한 사
후세계를 메마르고 먼지로 자욱한 지하의 재판소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엔도의
무당의 부름에 응하여 나타난 사무엘의 영혼도 아마 그런  장소로부터 나타났을 것이다. 아
래에 인용한 짧을 글에서 예언자 이사야는 비발로니아 왕을  통렬히 비난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비난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전적으로 바빌로니아적인 것이다.
 
  저 땅 밑 저승은 너를 맞기 위하여 들떠 있고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자들의 망령을 모두 깨우며
  모든 민족의 왕들을 그 보좌에서 일어나게 하는구나.
  그들이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너도 우리처럼 맥이 빠졌구나.
  너도 우리와 같은 신세가 되었구나.
  네 위세가 거문고 소리와 함께 저승으로 떨어졌구나.
  구더기를 요로 깔고 벌레를 이불로 덮었구나.
  웬일이냐, 너 새벽 여신의 아들 샛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던 네가 찍혀서 땅에 넘어지다니!
  네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아니하였더냐?
  '내가 하늘에 오르리라.
  내 보좌를 저 높은 하느님의 별들 위에 두고
  신들의 회의장이 있는 저 북극산에 자리잡으리라.
  나는 저 구름 꼭대기에 올라가
  가장 높으신 분처럼 되리라.'
  그런데 네가 저승으로 떨어지고
  저 깊은 구렁의 바닥으로 떨어졌구나!"

  이 성서 구절은 고대 이스라엘에도 지옥이 존재했다는 것과 루시퍼의 추락을 증거하는 부
분으로 자주 인용되어 왔다. 그렇지만 문맥상 '너'는 아주 명확하게 바빌로니아 왕을 가리키
고 있다. 이것은 본 장 끝부분에서도 언급하겠지만,  [제1에녹서]에서 상세히 열거하고 있는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이 구절의 메시지는 엔키두가 길가메쉬에게 들려 주
는 이야기 - 에레쉬키갈의 영토 안에 들어가면 위대한  왕들도 쇠락한다는 이야기 - 와 정
확히 일치한다. 바빌로니아 왕을 바빌로니아의 지옥에 보내면서 예언자는 싸늘한 조소를 보
내고 있는 것 같다.
  이와 유사한 것이 두로의 왕에 대한 에스겔의 저주  또는 '탄식'이다. 감질나게 짧긴 하지
만 몇몇 성서 구절에는 유대 사상의 내면에 흐르는 종말론에  대한 암시가 나타나 있다. 그
첫 번째 것은 기원전 3,4세기경에 씌어진[이사야]서에서  유래한다. 여호와가 아닌 "다른 상
전이 우리를 지배하였다."고 하면서 예언자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사람이 어찌 다시 살아나겠습니까?
  죽은 사람이 어찌 다시 일어서겠습니까?
  당신께서 그들을 벌하시어 없애 버리셨습니다.
  그들 생각을 말끔히 씻어 버리셨습니다
 
그와 반대로 여호와의 선민은 살아남게 되는 듯하다.

  이미 죽은 당신의 백성이 다시 살 것입니다.
  그 시체들이 다시 일어나고
  땅 속에 누워 있는 자들이 깨어나 기뻐 뛸 것입니다.
  땅은 반짝이는 이슬에 흠뻑 젖어
  죽은 넋들을 다시 솟아나게 할 것입니다
 
  또 다른 것은 [다니엘]서에 나온다.[다니엘]서는 기원전 165년에 씌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세계의 종말에 천사장 미가엘이  나타나며, 하느님의 백성이 해방되기  전에 엄청난 환난의
시기가 다가온다.
 
  티끌로 돌아갔던 대중이 잠에서 깨어나
  영원히 사는 이가 있는가 하면,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을 사람도 있으리라
 
  이 구절을 페르시아의 영향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이사야]
서에서는 가치 없는 자들은 전혀 눈을 뜨지 못하며, [다니엘]서에서는, 그들은 깨어나더라도
"영원한 모욕과 수치"를 받는다고 묘사한다. 주목할 점은 두 구절 모두 육체의 부활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조로아스터 교보다 앞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유대  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더 풍부한 증거는 [마카베오하]에 있다. 이
것은 보통 영어판 성경의 외경에 포함된다. [마카베오하]는 기원전 2세기에 시리아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 승리한 유대 인의 투쟁기를 다룬 역사적 문헌의  하나다. 그 중에서 이와 관
련한 내용이 들어 있는 7장은, 신앙심 깊은 유대 인  7형제와 그들의 어머니가 겪는 고문과
처형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이들의 죄는 돼지고기  먹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셋째,
넷째, 막내 그리고 그 어머니마저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그들이 남긴 유언은 하나같이, 자
신들의 절단된 육체가 여호와의 힘으로 온전히 부활할 것이며,  고문을 가한 원수들에게 여
호와가 복수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 준다.
  서기 1 세기 무렵까지 유대 인들이 지녔던 종말론적 사고는 더  많이 변하게 된다. 그 변
화의 증거는 신약성서에도 나오고, 또 요세푸스라는 유대 인 역사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부활이라는 '외래적'개념을 거부하는 보수주의적  귀족주의자들인 사두개 파와, 그것
을 포용하는 민중적 바리새 파의 마찰을 기록하고 있다.봄베이의 조로아스터 교도를 파르시
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리새'라는 말은 페르시아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도 바울도 개종  이전에는 바리새 인이었으며, 요세푸스  또한 바리새 인이었다.
요세푸스는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25년쯤 지난 후에  죽었는데, 그 당시 살아남은
유대 인들은 거의 다 바리새 인이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19세기의 개혁  유대교는
부활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서기 66~70년, 로마에 대항한 유대 전쟁 직후에 집필을 시작한 요세푸스는, 앞서 말한  두
지파와는 다른 에세네 파에 대해 말한다. 이들 금욕적인 수도사들은 신플라톤주의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육체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체와 분리된 영혼이 부활하는  사
후세계를 상상했다. [유대 전쟁]은 이와  유사한 사상들이 어떻게 로마 제국의 종차들과 융
합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육체는 타락하기 쉬우며,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은  일시적이지만 영혼은 영원히 불멸한다
는 것이 그들의 확고한 신념이다. 가장 순수한 에테르에서 오는 영혼은 자연의 마력에 끌린
듯 육체의 감옥에 걸려들게 된다. 그러나  수년 간의 노예 상태에서 풀려날 때처럼,  영혼은
육체의 구속에서 해방될 때에 기쁨을 누리며 위로 치솟는다.  그들이 가르치는 교리는 그리
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  교리에 따르면, 선한 영혼들을 이해서는 대양  저
너머에 안식의 장소가 준비되어 있다. 그곳은 눈도 비도 더위도 없으며, 대양에서  그지없이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다. 하지만 악한 영혼들은 끝없는 형벌로 가득찬, 음산한
폭풍의 나락에 맡겨진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리스 인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
었다. 영웅 또는 반신이라 불리는 용사들은 축복의 섬으로 가고, 사악한 자들의 영혼은 하데
스에 있는 불경한 자들이 장소로 간다는 것이 그리스  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이야기에
따르면, 하데스에서는 시쉬포스, 탄탈로스, 익시온, 티튀오스 등이 지금도 형벌을 받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설화가 회자되는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영혼을 불멸하는 것
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후에 보상을 받으리라는 희망이 있으면 선한 사람들은 현세에서
더욱 선하게 살 것이고, 또 악한 자들은, 현세에서 용케 형벌을 면하더라도 육체가 죽은  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두려움에서 스스로 악한 천성을 억제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 인에게 있어서 1~2세기는 우선 로마 시대나 헬레니즘 시대나 고대 후기 시대에 속하
지 않는다. 그렇다고 초기 기독교 시대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1~2세기는 우선  로마
시대나 헬레니즘 시대나 고대 후기 시대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초기 기독교 시대로 생
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초기 기독교 시대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1~2세기를  예루
살렘 멸망의 시대이자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시대로 생각한다.  [에녹서]와 [에녹비서]또는
[에티오피아의 에녹서]와 [슬라브의 에녹서]로 알려져  있다)는 이 시기의 것이며, 피난민이
이집트에서 쓴 것이라고 짐작된다.
  아마도 당대 신약성서를 그리스어로 썼던 것처럼 [에녹서]도 그리스 어로 썼을 것이다. 비
록 정경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위경'으로 강등되었지만, 유대  인의 사고와 전설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학자들은 이 문헌들을 치밀하게 연구해 왔다.
  [제2에녹서]에 보면, 에녹이 365세 되던 해에 여호와가 그의 비밀을 보여 주면서, 지상 전
체와 10개  천계(세 번째 천계에 천구고가 지옥이 들어 있다)을 상세히 관찰하고 기록하도
록 허락하는 장면이 있다. 에녹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두사람(천사들)이 나를 북쪽 비탈진 곳으로  데려가서 무시무시한 장소를 보여
주었다. 그곳에는 온갖 고통이 있었으며, 잔인한 암흑, 어슴푸레한 그늘뿐이었다. 빛이라고는
음침한 불꽃이 발하는 빨간 불빛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맹렬히 타오르는 강이 있고, 어딜 가
나 불이고, 어딜 가나 서리와 얼음이며, 갈증과 오한만 있었다. 끔찍한 족쇄가 채워지며,  무
시무시하고 잔인한 천사들은 날카로운 융기로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있었다.내가 말했다.
  "이 얼마나 끔찍한 곳이란 말이냐!"

  십계명의 어느 하나라도 어기는  자는 영원히 이곳으로 간다.  탐욕스런 자, 자비심  없는
자, 아동 학대자, 마법사, 마술사도 마찬가지다. 불과 얼음은 둘다 가까이에 있다. 얼음은 그
리스와 로마의 지하세계에는 없던 것이다. [제1에녹서]는 아주 다른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나는 바람이 어떻게 천상의 궁륭에서 뻗어나와 하늘과 땅  사이에 자리잡는지 보았다. 이
바람은 기둥이다. 나는 하늘의 불기둥이 열주를 이루는 것을 보았다. 그것들 가운데  높이와
깊이를 헤어릴 수 없는 불의 폭포를 이루는 기둥들도 보았다.  그 심연 너머에는 나는 위로
는 천상의 궁륭도 없고 아래로는 단단히 받쳐 주는 바닥도  없는 장소를 보았다. 그곳은 물
도 없고 새도 없는, 그저 삭막하기 짝이 없는 황야였다. 거기서 나는 불타오르는 거대한  산
과 같은 일곱 개의 별을 보아다. 그 별들에 대해 물었더니 천사가 대답했다. "이곳은 하늘과
땅의 끝이며, 이제 별들과 천사 군대의 감옥이 되었다." 불 위로 구르는 별들은 처음 그들이
떠오를 때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다 .약속된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느님의  진노
를 산 별들은 그 죄가 사라질 때까지 1만 년 동안 묶여 있었다.
 
  주목할 점은 이 구절이 헤시오도스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천국에서 심연에 이르는 불기둥
들은 스튁스 대저택의 은빛 기둥을  떠올리게 한다. 감금된 천사들의  처지는 타르나로스에
갖힌 티탄 거신족의 처지와 비슷하다. 요한 계시록에서도 타락한  천사와 떨어지는 별이 동
일시된다.
  4세기의 [하가다]에는 사탄의 타락에 관한 생생한 설명이 나온다. 그 내용을 보면  사탄이
타락한 이유는, 그에게는 아담처럼 짐승에게 이름을 붙이는 뛰어난 재능이 없는데도 아담에
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하가다]에는 아담의 첫 아내였던 릴리트 이야기도
흥미롭다. 릴리트는 페미니스트 악귀였다. 그녀는 말썽 많은 바빌로니아 악마 릴리투의 자매
였다. 여기서 릴리트는 아담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아담이 잠자리에서 남성상위를 강요하
기 때문이다. [하가다]의 지옥은 뱀과 전갈로 수놓은  동양적 지옥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이
없다. 적어도 지옥이 창조된 둘째 날에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낙원은 셋째날이 되
어서야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유대  인들이 생각하는 필요성의 순위를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다).

    8 영지주의
  긴장이 고조되던 고대 후기에 또 다른 지옥관이 유행했다. 바로 사람은 일상적 삶을 누리
는 바로 이 순간에도 지옥 안에 놓여 있다는 관념이었다.  사람들은 이 염세적인 관점에 영
지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지주의는 중세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기독교 이단종파들 사
이에서 반복해서 등장했으며, 정통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학자들은 영지주의자들에 대
한 필사본 뭉치가 발견된 이후, 학자들은 매우 신중해졌다. 인간 세계는 이상적인 세계의 허
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영지주의자들의 견해는 손쉽게 이교도 플라톤에게 귀착될 수  있
을 것이다. 플라톤은 언젠가, 우리 세계에는 "필연적으로 악이 붙어다닌다."고 한 적이 있다.
  영지주의 신화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대개 다음과 같다. 아이론, 또는 천사  소피아는
미지의 높으신 분 또는 외계의 신을 숭앙했다. 여기서 또다시 플라톤의 정식이 등장한다. 우
주의 신비에 경탄하면서도, 인간과 비슷한 신의 개념 또는 공공연히 악을 허용하는 신의 개
념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사람들에게 플라톤의 사유 체계는 아주  설득력 있는 것이었고, 오
늘날에도 여전히 호소력을 갖는다. 천사 소피아는 지고신의 자족적이고 무성 생식적인 창조
력을 진지하게 모방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 실패로 소피아는 깨끗하고 밝고 순
수한 천상에서 추락하게 되었다. 소피아는  고뇌와 절망 속에서 흉칙한 미숙아를  낳았는데,
그것이 우리 우주, 세상, 물질 그리고 인류를 창조한 '저급한 신' 데미우르고스가 되었다. 데
미우르고스는 지고신과 어머니 소피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이런 일을  벌이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세계는 무지와 어리석음 속에서
잉태되었고,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였다 .데미우르고스가 자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에 선하거나 영적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천상에서 지상으로 유배된  소
피아가 이 모든 일의 발단이 된 자신의  잘못을 보상하기 위해 우리에게 불어넣어 준 것이
다.
  그 후 소피아 이야기는, 그녀가 이브,  노아의 보인, 트로이아의 헬레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유명한 여인들로 환생했다는 신화론이 잇따르면서  조잡해졌다. 하지만 영지주의적 신
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현현에 대한 해석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이다. 만약 이  세
상이 무지하고 저급한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이라면, 또는 최소한 하데스나 림보의 하나라면,
그리스도의 강림은 말 그대로 지옥으로 내력간다는 뜻이 되고  만다. 그리스도는 천상의 충
만함에서 내려와 피와 살로 된 조잡한 인간의 몸 속에  머물면서, 실수로 창조된 세계의 불
결한 공기로 호흡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프로메테우스처럼 수난을 무릅쓰고 내
려온 목적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이 불행한 세상을 정벌 또는 약탈하고 인류에게 영지, 즉
비밀의 지식을 전수하여 그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초기 교회가 아직 신흥 계시종교로서의 융통성을 갖고 있었을 때조차도 대부분의  영지주
의 사상, 특히 소피아에 얽힌 이야기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외계의 신 또는 불가지의 신이
라고 하는 개념은 신플라톤주의와도 양립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
는 자'와도 양립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가 복음서에서 가르친 하느님 아버지와는 근본적으
로 다른 개념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독교 신학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만약 지상에 내려
온 예수의 유일한 목적이'영지'를  통해 비교적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특히  영지라는 것이 소수 특권층
에게만 한정적으로 허락되는 등,  영지주의의 전체 구도가 대중적  호소력을 갖추기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당수 기독교인은 이 세상이 악마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다는 생각에 찬성했다 .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포함하여 모든 물질이 악하고 저급하다는 생각에 찬성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악마나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나  왕으로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
인 일이었다. 예를 들면 복음서에도 악마가 예수를 유혹하면서  만일 예수가 자기를 경배하
기만 한다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주겠노라고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 후기에는 로마 인의  타락과 쇠퇴가 확연해지면서,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 금욕주의
운동이 성행했다. 그것은 재물과 음식과 성관계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이었다. 이러한 금욕주
의는 기독교인과 영지주의자뿐 아니라 유대 인들(예를 들면 에세네 파 수도사들),그리고 그
밖의 이교도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기독교인의  아이가 세례를 받을 때
면, 그 대부나 대모가 아이의 이름으로 '세상의 육욕과 악가'를 포기하겠다는 선서를 했다.그
세 가지 개념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시대의 흔적인 것이다.
  초기 기됵교인들과 대부분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왔다고 믿었다. 기독교도들은 천국을 기대하고 지옥을 두려워했다. 그 반면, 영지주의자
들은 비밀의 지식을 통해 천상의 충만함을 성취하고자 열망했다.  지옥은 내세가 아니라 바
로 이 세상이었기 때문에 영지주의자들은  그저 구원받지 못하면 그것이  형벌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인류가 암울한 운명에 처해 있었다 해도, 그 운명이 지상에 있는 지옥보다 특별히
무서울 것도 없었다.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무시무시한 지옥의 이미지를 부풀려가는 것과 대
조적으로, 이 운명관은 상대적으로 온화하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현대적인 운명관처럼  보인
다.

    9 마니 교
  마르키온과 마니는 전통적으로 영지주의자들과 연결된다.  하지만 분인들은 영지주의와의
연관성을 단호히 부인했다. 마르키온은 2세기에 로마에서 살았던 시리아 인이다. 그는  자신
을 기됵교도이자 사도 바울의 추종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신론을 가르쳤다 .마르키온은  구
약성서에 나오는 변덕스럽고 난폭한 야훼를  데미우르고스와 동일시했다 - 데미우르고스는
정확히 사악하다고 할 순 없지만 선한 신은 아니었고, 게다가 전지전능하지도 못했다.  그렇
게 해서 마르키온은 헤브라이 구약성서  전체를 거부했고, 신약성서 중에서도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이외에는 모두 거부했다. 게다가  그는 [누가복음]과 바울서신의 내용마저도  대폭
삭제하여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마르키온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는 '참된  하느님
의'의 아들이며,사심 없는 자비의 정신으로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데미우르고스에게 보
내졌다. 데미우르고스는 인류를 포로로 잡고 있지만, 최후의 심판이 닥치면 그가 창조한  저
급한 물질 세계와 함께 사라져 버릴 존재다. 교회의 정통파 지도자들이 강력하게 반감을 표
시했는데도 불구하고, 4세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마르키온을 추종했다.
  마니는 페르시아 인이며, 215년경 아시리아의 유대 인 기독교 공동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겨우 24세 되던 해에, 새로운 종교를 전도하는 일에 착수하여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상당수에 이르렀으며, 그 영향력은 서방에서는 적어
도 1,000년 동안 지속되었고, 동방에서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
서도 종국에는 아직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마니는 비록 정통파 조로아스터 교도들의 손에 처형되지만(276년경),그의 이원론적 체계는
바로 조로아스터 교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마니 교 안에서도 서로 적대적인 영들이
세상을 지배하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빛의 신이 근원적인 영이며, 그의 왕국은 하늘, 덕, 천
사, 자연의 아름다움을 포함한다. 한편 어둠의 왕국으로부터는  '물질'(사탄 또는 아흐리만으
로 인격화되고 동일시된다)이 악귀들, 불, 연기, 불쾌한 기후, 여자들과 함께 생겨났다. 아흐
리만은 아담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하고 , 그에게 '훔친 빛'을 불어넣었다.  이브도 아흐
리만이 창조했지만, 그녀는 완전히 암흑의 피조물이었다. 그녀의 임무는 아담을 유혹하는 것
이었으며, 그녀의 무기는 정욕이었다(이 이론은 장차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
를 통해 기독교의 역사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다양한 비율로 빛
과 어둠을 갖는다. 그러나 동방 전통의 영향으로 대개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많은 빛을 갖
는다.
  육욕을 억제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 마니의 가르침을  지키면, '선민'들은 많은 양의 빛을
모아들일 수 있게 되고, 사후에 빛의 왕국으로 직행할 수 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뒤에 오는 삶 속에서 정화 과정을 거쳐야만 빛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도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불길 속으로  떨어질 것이며, 이 불길은 1,468년 동안  온
세상으로 태워버릴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 과정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과 크
게 다를 것이 었으며, 또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마니 교는 신중하게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그리고 마르키온주의를 통합하려고 했고 또 스
스로 그 종교들을 대체하려고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영지주의자들의 사상도 끌어왔다. 마니
교의 시도는 영지주의자들과 마르키온주의자들에  대해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들 대부분은
마니 교에 통합되었다 .영지주의자나 마르키온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마니 교도들도 헤브라
이 성서의 여호와를 숭배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앟았다. 그리고  유대 인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모세와 예언자들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담,  노아, 아브라함은 족장적 인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니는 자신이 바울과 같은 예수의 사도라고 주장했다.
  마니 교의 장점은 이해하기 쉬운 교리 체계에 이다. 마니 교는 영혼의 지배권을 차지하려
는 선과 악의 투쟁, 인간 본성에 존재하는 갈등, 그리고 구원의 필요성과 그 과정을 아주 깔
끔하게 설명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그 당시에 자체의  교리를 가다듬고 있던 기독교나
그 외 종교들은 마니 교만큼 명쾌한 설명을 제시하기 못했다.  마니 교는 시간의 종말에 있
을 선악의 최후결전 이야기를 포함하여 당시  사람들이 친숙하게 알고 있던 신화들도  대거
끌어 들였다. 그리고 마니 교의 금욕주의 또한 시대적 분위기를 간파한 것이었다. 마니의 가
르침은 로마 제국 안에서 빠르게 기반을 잡았고, 아시아 깊숙이 침투했다. 만약 4세기에  콘
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이교도에 대한 심한 박해가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마니 교의 영향력은 서양에서 시제로 확인된 것보다 훨씬  더 지속적이었을 것이다. 불교인
의 종교 생화을 본뜬 마니 교도의 금욕적 수도 생활은 에세네 파의 수도 생활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실천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초기 교회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아우구스티누
스도 9년동안 마니 교도였다.
 


    10 초기 기독교
  다소 사람 사울은 유대 교를 믿는 바리새 인이었다. 그는  기독교로 개종한 뒤 로마 제국
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일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전도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에게 초기 기독
교 사상이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으뜸가는 증인이다. 사울은 스스로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
다. 신약성서에 들어 있는 그의 편지는 제일 먼저 씌어진 복음서인 [마가복음]보다 시기적으
로 앞서며, 누가가 바울과 함께 여행한 뒤에 기록한 [사도행전]보다 20년 이상 앞서는  것이
다. 바울은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불꽃 가운데서  예수가 나타날 것이라는 말을 하기
도 하고, "주님 앞에서 쫓겨나 영원히 멸망하는 벌을  받고 주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사후세계에 대해서  이것 이상의 예언은 하지 않았
다.
 기독교 초기의 신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옥  교리를 만들어 내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
성서를 보면 바울이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없는 사람을 열거하는 부분이 세 번 나온다. 거기
에는 음란한 자, 우상을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 남색하는 자, 도둑질하는  자, 술주정꾼,
비방하는 자, 약탈하는 자, 마술사, 시기하는 자, 싸움하는 자, 더러운 짓을 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들이 포함된다. 바울은 이런 비행을 범한 자들에게 지옥행을 선고하지는 않는.  대
신 "죄의 대가는 죽음"이라고 가르쳤는데, 그가 말한 '멸망'이란 단어도 똑같은 뜻이다. 선한
자는 살고 죄인은 죽는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몇 세기 후에, "영혼  절멸설"이라 불리게 된
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와 결합되어  있는 하느님의 은총과 세례를 통해  죽음을 피할 수
있따. 바울의 메시지는 다음 구절처럼 신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사랑하
는 교우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을 키워 주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베드로와 유다 같은
제자들도 그들의 편지에서 미래의 심판에 대해 경고했지만, 불의 심판은 아니었다.
  마가는 최초로 예수의 삶에 대한 많은 회상과 일화들을 한데 묶어 연속적인 형태로 만들
었다. 그는 직접 예수를 만나지는 못한 것같다. 하지만  베드로와는 아는 사이였던 것 같다.
교회사의 아버지나 불리는 4세기의  역사가 에우세비오스는 마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였다. 그것은 자기가 들었던 바를 남김없이 기록하되, 아무 거짓
도 더하지 않는 것이었다." 마가는 성령을 비방하는  몇몇 사람들 '영벌'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만,지옥에 대해서는 단 한  차례만 언급할 뿐이다.[마가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올 것이다. 지옥
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가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그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빼어  버리라는 말도 나온다. 요즘  신자들은 이것을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 원색적으로 과장된 반복적 수사법으로나 받아들일 것이다. 여기서 인간 개개
인에게 자기자신의 죄를 바로잡도록 몰아치고 있다는 점에 독자들은 주목하기 바란다.
  바울과 함께 여행한 누가는 교육받은 사람이었으며 의사였다고 전해진다. 누가는 [마가복
음}에 의거하여 자신의 복음서를 썼는데, 거기서는 위 구절을 빼 버렸다. 누가가  묘사한 예
수는 회개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징벌을 피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
해서다. 누가는 저승과 관련하여,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의미 있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요한복음]을 쓴 사람이 예수의 제자였던 바로 그 요한이건 아니면 다른 인물이건 간에, [요
한복음]에는 지옥에 대한 언급이 없다. 한때 요한이 썼다고  오인했던 [요한계시록]은 또 다
른 것이다.
  이야기는 이제 마태로 넘어간다. 마가에 따르면,  마태는 본래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일곱
번째 제자이고, [마태복음]에는 '세리였던 마태'로 나온다. 하지만 [마태복음]은 상당 부분[마
가복음]에 의존하고 있으며, 실제 목격자가 쓴 글임을 드러내는 특징도  별로 없다. 서기 80
년이 얼마쯤 지난 시기에 쓴 것이라 추측되는데, 그렇다면 저자가 과연 예수의 제자 마태였
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기독교에서 지옥의 존재와 목적에 대한 증명은 상당수가 '마태
복음'에 의거한 것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가 사람들에게  들려 주는 여러  비유들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의
혁신적 측면은 그 비유들에 종말론적 경고를 덧붙였다는 점이다. 그런 경고 없이 똑같은 이
야기르 반복하는 [누가복음]봐 비교해 보면, [마가복음]이  종말론적 경고는 마태 고유의 견
해임이 분명하다. 마태는 종말론을 극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신체를 잘라  버리라는
[마가복음]의 이야기를 두 번 인용한다. 한 번은 산상 설교  마지막에 먼저 인용하고, 또 한
번은 "어린아이와 같아져야 내게 올 수 있다."는 설교 뒤에 인용한다. 두  경우 모두 단순한
과장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마태복음]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으로
가지 말고 올바른 생명의 좁은 문을 열라며 간곡히 타이른다.  예수는 또 육신은 죽여도 영
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며,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
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는 말에다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군중 때문에 노한 예수는, 자신이  두로, 시돈, 소돔에서 기적을 행했었
더라면 그곳은 벌써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심판날에는 소돔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마태가 그린 예수는 뛰어난 달변으로 여러 비유들에 도덕적  의미를 부여한다. 예수는 사
람들에게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다음 두가지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시간
과 노력을 기울여 다음 두 가지를 이해시키려고 했다.  첫째로,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 그리
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대신하는 그의 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구원
받지 못하면 절망적인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밀밭의 가라지'비유를 들면서 예
수는 이렇게 말한다. "그 날이 오면 사람의 아들이 자기 천사들을 보낼 터인데, 그들은 남을
죄짓게 하는 자들과 악행을 일삼는 자들을 모조리 자기 나라에서 추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
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천사들이 선
한 자들을 좋은 물고기처럼 그물에서 가려낼 것이며, 그  동안 악한 자들은 "불구덩이에 처
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마태가 묘사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과 탐욕,
남을 타락하게 하려는 의도를 꾸짖으며 외친다. "이 뱀 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
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 감라산에서 한 마지막 설교에서 예수는 최후의 날과 재림
에 대해 설교한다. 그것은 엄청난 재난의  시기다 도리 것이며, 새 시대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명한 종' '현명한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열 달란트''양 과 염소들'과
같은 비유들을 모두 이어서 이야기한다. 그 비유들의 주제는 하나다. 구원을 받을 만한 자격
이 이는 사람들은 당연한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
운 곳"으로 던져져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거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
비한 영원한 불"또는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던져진다는 것이다.
  오로지 마태만이 이러한 경고를 강조한다. 마가와 누가는 그런  경고 없이도 복음서를 훌
륭히 써냈다. 바울은 [누가복음]을 그 자신이 썼다고 주장할 수 있을 정도로 누가의  복음서
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경고를 강조한 마태의 서술 방식을 그리 좋게 보지 않았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악한 자들을 사후에 처벌하는 장소로서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초기 기독
교인들에게 논쟁의 여지없이 보여 주는 것은 경고자 마태가 아니라 누가의 복음서다. [마가
복음]에는, 어떤 부자가 예수에게 와서  영생의 비밀을 묻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대답을 듣고 근심한다. 여기서 예
수는 낙타와 바늘구멍의 비유를 들었다. 반면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을 더진전시킨 것은 누
가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여러 비유와 교훈적 사례를  들면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
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설교의 마지막에  세속의 재물을 지나치게 좋아한다
는 평판을 듣는 바리새 인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전에 부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는 디베스라고도 불렸다. 그 집 대문간에는 나사로라는 거지가 있었는데,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함께 기다리던 개들은 나시로의 종기를 핥았다. 나사
로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되었다. 하지만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갔다. 부자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천국을 쳐다보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혀를
적실 물 한 방울을 보내 달라고 구걸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되었다. 하지만
부자는 죽어서 지옥으로 갔다. 부자는  지옥의 불길 속에서 천국을 쳐다보고,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통해 혀를 적실 물 한 방울을 보내 달라고  구걸하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부
자에게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행복'을 누렸음을 깨우쳐 주며 거절했다. 게다가  '큰 구
렁텅이'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에 물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자는 자신의 다섯  형제에게
나사로를 보내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했으나, 아브라함은 거절
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모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비유들에는 은유적인 암시가 아주 많다. 그런데 훗날 [누가
복음]이 독자들은 '부자와 나사로'의비유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옥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이용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지옥은 마태가  말한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장소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누가가 보여 준 지옥은 나사로를 '품에'안고 있는 조상 아브라함의 시야에
서 '멀리 떨어진',맹렬하게 불타는 고통의 장소다.
  번역하는 데 있어 문법상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이 ;품'이라는 단어다.  라틴 어 번역 불가
타 성서에서는 그 부분을 '인 시누아브라이'로 읽는데, 라틴  어로 시누스는 옷이 접힌 곳을
의미하므로 그곳은 가슴이나 무릎이다. 중세 미술을 보면, 보통 아브라함의 가슴을 가로질러
수건 같은 것이 펼쳐져 있고, 거기서 나사로와 그처럼 선택받은 동료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
다.(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 가끔 무식한 화가들이 거지 나사로를 성서에  나오는 또 다른
나사로)와 혼동하는 일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죽음에서 살아나는 거지 나사로와 무
시무시한 운명에 처한 부자를 대조하여 그려놓기도  했다.)중세의 현자들은 얼마나 많은 영
혼들이 아브라함의 품에 안착했는지에 대해  오랫동안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정말 나사로
뿐이었는가? '하느님과 걷던' 에녹이라면 어떨까? 하느님이 데려갔기 때문에 그는 아니었을
까?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는  어떤가? 여하튼 아브라함의 품은 정확히 어디
인가?
  아브라함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였다. 아브라함은 유대 인이므
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곧이곧대로 따져보면, 천국은 예수 승천 이전에는 존
재하지 않았다(또는 존재했다고 해도 그 이전에는 오직 천사들만 살고 있었다).그리고 예수
승천 이후에도 천국은 부당한 정치색을 띤 일종의 사설  컨트리클럽 같은 곳이어서, 기독교
인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문제, 즉 기독교가 확립되기 이전의 자격 있는  사람들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일상적 해결책이 림보엿다.
  림보('변경'이란 뜻이며, 라틴어 '림부스'(경계)에서 유래했다)는  이교도에게서 빌려 온 영
역 개념이었지만, 새로운 의미로 쓰였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두 가지 림보를 수용하게  되었
다. 하나는 세례받지 못한 아기들을 위한 것이었다. 세례를 받지 못해서 천국에 갈 수  없는
아기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지옥에 던지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수세기
동안 이결백한 아기들을 구원하기 위한  신학적인 시도가 계속되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이전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특히 구약성서의 사제들 그리고  때로는 기독교를 접할 기회
가 없어서 예수를 믿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 플라톤과 같은 명예로운 이교도들을 위한 것이
었다 .아브라함은 두 번재 림보에 있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의 '품'역시 림보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비유에서는 나사로가 일종의 낙원에 머물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는 도덕적 내용도 있었지만, 지옥에 떨어진 자들의 고통을 관조하
는 것이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일종의 즐거움이라는 주장도 들어 있다 초기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관점은 하느님이 정의로운 분이자 죄를 증오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초
기 교회는 이것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서 구절 두 부분을  인용했다. 그 하나는 사악한 사람
들이 어린 양과 천사의 면전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내용의 [요한계시록]14장
9~11절이다. 다른 하나는 신실한 이들이 밖으로 나가 죄인들의 주검들을 보는데, "그들을 갉
아 먹는 구더기는 죽지 아니하고 그들을 사르는 불도 꺼지지 않으리라/"고 하는 내용의 [이
사야서]66장 23~24절이다. 근대 교회는 이런 '꺼림칙한 상상'을 슬며시 내버렸지만, 예술작품
들에는 여러 세기에 걸쳐 그런 환상이 나타난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성서 정경에 포함되지 못할 뻔했다. 이것이 정경에 포함된 이유는 오
로지 그 저자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현재 [요한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과 구분하기 위해 보통 밧모의 요한이라고 불린다.[요한계시록]은 로마의 지배, 특히 황
제를 숭배하는 제국 종교에 대한 저항으로써 1세기 후반에 씌어진 것으로 알려진 묵시문학
작품이다. 당시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잔혹하고 허세가 심한 인물이었으며, 자신을 "통치자이
자 신"이라고 부르도록 강요했다.
  당시 사람들에게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환상들을 지금 우  리가 느끼는 것만큼 기이하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형식이 [다니엘]서나 [에스겔]서처럼 폭정에 대항하여
씌어진 전통적인 유대 묵시문학의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선악의
우주적인 양대 세력이 벌이는 극적인 대결이며, 악은 붉은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용으로 상
징되는 로마황제다. 그 장면은 곧  세상의 종말이다. 그때에는 땅이  불타고, 바닷물은 피가
되고, 민물은 쑥처럼 쓰게 되고, 산은 불을 뿜고, 메뚜기 떼와 말들이 삶을 습격하고, 인류의
3분의 1이 몰살당하며, 끔찍한 지진이 일어난다.  일곱 천사가 차례로 나팔을 다 불고  나면
'하늘에 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열리고, 천둥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또 다른 지진과 우
박 섞인 태풍이 몰려온다.
  임신한 여인이 '태양을 입고'있는데, 붉은 용이 그녀가 낳게 될 아기를 삼키려  한다. 그러
나 하느님이 그 여자의 아기를 들어올리고, 한편 미가엘은 부하 천사들을 거느리고 "악마라
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을 공격한다. 결국 용
은 땅으로 떨어지고, 그 부하들도 함께 떨어진다.
  그 용은 바다에서 올라온 흉측한 '짐승'에게 자신의 힘을 넘겨 주고, 사람들은 불경스럽게
그 짐승을 숭배한다. 마지막 재난이 세상을 뒤덮고, 바빌론의 탕녀(조로아스터 교 창조 신화
에서 유래한 자디, 또는 제라는 인물이 제거될 때까지 환란이 계속된다.그러고 나서  하늘이
열린다. 머리가 일곱 개 달린 용이  당시 원수였던 로마를 나타내듯이, 여기 나오는  탕녀는
이스라엘의 옛 적인 바빌론을 나타낸다.
   나는 또 한 천사가 끝없이 깊은 구렁의 열쇠와 큰 사슬을 손에 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
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늙은 뱀이며 악마이며 사탄인 그 용을 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끝없이 깊은 그 구덩이에 던져 가둔 다음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
들을 끝없이 깊은 그 구덩이에 던져 가둔 다음 그 위에다 봉인을 하여 천년이 끝나기까지는
나라들을 현혹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후에 사탄은 잠시 동안 풀려 나오게 되어 있습니
다.
  그렇게 1,000년이 지나면, 사탄이 풀려 나와  '곡과 마곡'에서 군대를 소집하는데, "그들이
수효는 바다의 모래와 같을 것"이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서 그 군대를 태워버릴
것임, 악마를 "거짓 예언자"와 함께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 진다.
  [계시록]의 이러한 내용은 기독교의 극단론자들, 다시 말해 재복 천년설 신봉자, 부흥운동
가,황홀파,신비주의자,환상론자 등을 정경안에서 안전하게 _ 전적으로 안전하지는 않았다. 에
우세비오스가 쓴 기록을 보면 3세기의 주교 디오뉘소스는 계시록에 의심을 표명했다.- 승인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이런  극단론자들은 [계시록]을 이용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그다지 화려한 종교가 되지 못했을 테지만,  대신에 훨씬 평안한 역사
를 누렸을 것이다.
   타락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은유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담과 이브가 원초적인
순수함과 에덴 동산의 축복에서 고통, 상실, 고난, 죽음의 세상에서 타락한다는 [창세기]이야
기다. 물론 유대 교에도 이 같은  신화가 있었고, 다른 많은 문화권에서도 지나간  황금기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새로운 교리와 규율을통해 대속과 구원의 의의를
강조하기 위해서, 이 최초의 불복종 행위가 갖는 의미와 결과를 확대하였다. 기독교리에  따
르면, 원죄는 시조 아담과 이브에서 모든 인류에게 유전되어  극도의 부패 분위기를 조장하
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도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기독교 창조 신화에 나타난 첫 번째 타락은 아담의 타락이 아니라 루시퍼의 타락
이었다.(초기 기독교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루시퍼의  타락이 아담의 타락보다 늦다고 주
장하기도 했지만, 기독교 전통은 결국 그것을 부인했다.)한때의 권세를  누리다 타락한 루시
퍼의 모습은 유대인의 [제2에녹서]에도 나오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바빌로니아 왕
을 비웃는 [이사야]서에도 나온다. 타락한 왕에 대한 두 번째 성서적 참고 자료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면서 두로의 왕을 저주한 예언자 에스겔에게서 볼 수 있다. 에스겔은 한때 큰 영광
을 누린 그 왕의 모습을 이렇게 그렸다.
    너는 슬기가 넘치고 더할 나위 없이 멋이 있어 정밀하게 판 옥새를 받아가지고 하느님
의 동산 에덴에 있었다. ... 온갖 보석들로 단장했었다. ...(중략)... 나는 빛나는 거룹을 너에게
붙여 보호자로 삼고 하느님의 산에  두어 불붙는 돌들 사이를 거닐게  하였다. 너는 생겨난
날부터 하는 일이 다 완전하였다(에스겔 28장 12~15절).
  에스겔은 책의 대부분을 할애해서 왕의 죄악을 열거한다 .에스겔은 왕에게 예정된 타락에
말한다. 그리고 타락하기 전에는 보석으로  치장한 그가 얼마나 빛나는  존재였는지에 대해
묘사한다. 그 묘사가 너무 생생했기 때문에, 루시퍼가 천사들 가운데 최고로 사랑받는  영광
스런 존재였다는 믿음이 생겨나기도 했다. 심지어 루시퍼가 하느님의 장자라고 주장하는 이
단 교리도 있었다.
루시퍼('불을 가져오는 자')는 히브리 어로 '빛나는 아침의 아들 Helel ben Sahar'을 뜻한다.
그는 금성Venus과 연결되어 있으며,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헤파이스토스, 프로메테우스,
파에톤, 이카로스와 같은, 불과 함께 추락하는 다른 이들과 연결되기도 한다. 루시퍼를 타락
하게 한 것은 '하느님의 권좌에 오르도록' 부추긴  자만심이었다. 이것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는 'hubris(신들에 대한 교만)'이며, 이 교만은  대개 우주의 정의에 따라 처벌받는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최후의 전투는 태초의 전투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전투는 세상이 시작될
때  루시퍼의 군대와 성 미가엘의 군대가 하늘에서 벌인 전쟁이라는 것이다. 타락 후에, 붉
은 용과 동일시되는 루시퍼는  그토록 아름답던 모습이 흉측하게  변했고, 이름도 사탄으로
바뀌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는 사탄이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누가
복음 10장 18절)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사탄도 빛나는 천사의 탈을 쓰고 나타
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며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경고하였다. 이러한  전거와 [제2에녹서]
의 전거에 의해서, 적이나 휘방꾼 또는 종으로 나오는 구약성서의 사탄은 타락한 또는 부정
한 천사 루시퍼와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헤브라이 성서나 구약성서에서 '사탄'은 적이나 대항자를 의미한다. 사탄은 언제나 여호와
의 천사와 같은 종복이자 대리인으로 등장한다. 그는절대로 신에게 대항하지는 않지만, 그다
지 상찬받지 못할 행동으로 인간을 괴롭힌다. 닐 포사이트는 [옛 적]에서 사탄을 두고 "떳떳
하지는 못하지만 폴리트뷰로에 필요한 일원"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사타은 여호와와
공모하여 이집트의 러인이들을 죽이고 발람을 괴롭히고,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
도록 독려하며, 사울 왕이 비열한 행동을 하도록 부추기고, 이스라엘에 역병을 내리고, 아합
을 꾀어 파멸의 전투로 내보내고, 욥을 고통받게 한다. 학자들은 초기의 필사본  편집자들이
여호와에 대한 평판을 좋게 유지하려는 마음에서 사탄을 등장 시켰다고 믿는다.[사무엘하]24
장 1~25절을 [역대상]21장 1~30절과 비교해 보라. 벙적 조사를 시행했던 다윗  왕의 '죄를'를
벌하려고 보낸 전염병에 대해 각각 다르게 언그보디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 전체에
서 사탄이 여호와에게 질책받는 일은 단 한 번밖에 없다. - 사탄이 이스라엘을 너무 심하게
괴롭혔기 때문이다.(그가랴 3장 2~10절).사탄이 독자적으로 행동한다는  증거는 오로지 이장
면밖에 없다.
  4복음서가 씌어지던 1세기에 이르면, 사탄은 '이 세상의  군주'로서 자치권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광야의 휴혹 장면에 나타난다. 하지만 여기서도 사탄은 예수의 용기를  시험
하는 하느님의 대리자라고 볼 수도 있다.(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데미우르고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사탄은 결코 자신이 지배하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탄은 유
다를 유호해 예수를 당국에 팔아넘기도록 만든다. 하지만 아ㅣ것  역시 그리스도 수난의 역
사에서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사탄이란 말이 갖는 더 오래된 단순한  의
미, 즉 '방해자'로서의 사탄은 신약성서에서도 여전히 살아남는다 .예수가 체포당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을 피하게 하기 이해 베드로가 예수를 말리자, 예수는  베드로에게 "사탄아,물러
가라."하고 말한다.
  설교 이외에 기록되어 있는 예쑤의 주요 행적ㅇ느 하급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이다. 당시
에 상당수의 신앙 요법사, 마술사,  무당들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예수는  성령의 힘을 통해
마귀를 쫓았다는 점에서 그들과 달랐다. 마귀라는 말은 그리스 어 '다이몬'도는 '다이모니온'
에서 온 말이며, 차츰 '디아볼로스'와 동일시되었다. 신약성서에서 디아볼로스라는 말은 오로
지 사탄을 가리킨다. 1세기경 유대 인들은,도처에 존재하면서 고통과 재앙을 일으키는  일상
적인 마귀가 대마왕에서 종속된다고 생각했다. 사탄  신화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이교도
신들이 사탄의 부하 명단에 첨가되었다. 똑같은 존재가 한 살마에게는 신이 되고 다름 사람
에게는 악마가 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원문은 혼란스럽고 모순점이 많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숨낳ㅇ느 암
시와 전설들은 종합,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풍부히 제공했고, 새로운 신화로 인도해  주었
다. 타락천사는 하늘에서 내던져진 붉은 용과 동일시되었고, 그와 함께 떨어진 부하  천사들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이 이제부터 마귀들과  동일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붉은  용은
외관상 헤브라이 성서에 나오는 두렵고  무시무시한 초자연적 짐승들인 레비아단과  베헤못
그리고 바다의 용 라합과 연관된다.
  다음으로 천사 -용- 짐승은 아담과  이브를 에덴 동산에서 타락하게  한 그 태초의 뱀과
연관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사탄이 예수와 유다를  유혹하는 자로 등장했고, [요한계시록]에
서는 온 인류에 대한 최초의 유혹자, 그리고 우리 인간이 그 뒤로 겪는 슬픔과 심지어는 죽
음 자체의 원인으로 나온다.
  [요한계시록]은 사탄을 곡마 마곡의 군대를 거느린 힘 있는 자로 등장시킴으로써, '세상의
군주'라는 사탄의 지위를 적어도 최후의 패배 이전까지는더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다. 명확한
설명은 나오지 않짐나, 그보다 1,000년 전에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 늙은 뱀이자 악마이
며 사탄인 용을 결박했을 때도(요한 계시록 20장 2절),사탄의 세력은 전혀 약화되지 않는 듯
하다.
  선과 악, 두 세력이 우주적으로 최후의 전투를 벌이고 그  뒤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이
라는 관념은 조로아스터 교와 미트라 교의 기록과 유대 묵시문학을 토앻 이미 잘 알려져 있
었다. 글너 관념이 [마태복음]의 묵시적 예언을 확림 ㅏ게  했고, 또 사탄은 하느님의 적이
라는 점이 확인되었다.
  최후에 가서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짐승을 숭배하는 자들),짐승 그리고 그 짐승의
'거짓 예언자'(적그리스도)는 모두 불바다로 던져진다. 오랜 기간 동안 '구렁'속에  묶여 있떤
악마 또는 사탄 자신(용)도 결국 불바다로 던져지고, 인격화한  죽음의 이교도적 푯항인 '죽
음'과 '지옥'도 ㅂ물바다로 던져진다. 그 전에 '죽음'과 '지옥'에 갖혀 있던 사자들도 마찬가지
로 불바다에 떨어진다. 이전까지는 전혀 다른 ㅂ무류였던 여러  형상들을 하나의 부류로 묶
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중세에 이르면 짐승용,  죽음,그리고 지옥이 모두 사탄
이라는 범주 안으로 녹아들게 된다.
  초기 신학자들은 '사실에 입각하는'어려운 집필 작업을 토앻  악마의 역할, 악마와 하느님
의 관계, 악마와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려고 노렸했다. 단순한 이야기 수준에서는 내용이  체
계적으로 종합되었따. [바돌로매 복음서]에서도 살벼볼 수 있듯이,  3세기에 이르면 많은 부
분이 정리된다. 5세기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나머지 부분들을 정리했다 .하지만 중세  이
전까지는 지옥의 특징이나, 심지어 악마의 이름에 대해서도 합의된 관례가 없었다.
 
    11 지옥으로 내려가다
  거의 2,000년 동안, 예수가 성 금요일과 부활절 주간의 일요일 사이에 지옥으로  내려갔었
다는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 이야기하는 예수의 삶,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이라는 연속적인
순환 중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에 대해 신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는 자료는 모호
하나마 [마태복음]에 있다. 이 구절에 따르면 예수가 죽을 때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이  열리
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  [베드로전서]는 더욱 구체적이다. "그리
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
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다소 두서없이 노아,
대홍수의 물, 세례의 물의 의미까지 설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구절의 배경에는, 십자가 죽음
직후에 예수가 노아보다 선대인 구약시대 족장들의 영혼에게도 말씀을 전해서 이들이  영혼
이 거룩한 도성, 즉 천국으로 들어가게 했다는 믿음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예수는, 이들뿐
만 아니라 죽은 모든 이들, 이교도, 유대 인 심지어 죄인들에게까지 설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아주 빨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에서는 예수가 의
로운 자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전투적인 구세주로서 지하세계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 모
험을 다룬 유대 교 문헌으로는 기원전 100년경에 씌어젼 [12족장의 교훈]이 있다. 이 기록에
서는 메시아가 포로들을 구출하기 위해 지옥의 우두머리인 벨리알 왕국으로 내려갔다고  전
한다. 3세기에 이르러 [실바누스의 가르침]과 [바돌로매  복음서]에서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
이 유대 교의 메시아에서 예수로 바뀐다 .기독교 초기  문헌에는 예수가 지옥에 내려갔다는
이야기와 관련한 것들이 많다. 이 중 가장 구성의 완성도가 높고 영향력 있는 것은 [니고데
모 복음서]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최초의 판본은 5세기 무렵의 것이지만,  그 내용은 분명히
그 전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고 여러 세기에 걸쳐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서로 연관이 있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번째 부분은 '빌라도 행전'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약의 복음서에도 나오는 그리스도심문과 사형 집행에 대한 이야기를 연장하여 설
명한다. 두 번째 부분은 '지옥정벌'에 관한 것으로서, 화자는 대사제 시몬의 두 아들이다. 두
사람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위대한 사건들을 증언하기 위해 죽은 자들 가
운데서 일시적으로 살아난다. 사탄은 예수가 십자가에도 고난받도록 일을 꾸몄지만, 결국 고
난은 엄혹하게 사탄 자신에게 되돌아왔기 때문에 지옥의 거주자들을 석방할 구밖에  없었다
는 것이다.
  엄밀히 해석한다면, 예수는 지옥을 정벌한 것이 아니라. 유대 민족의 선족들이 머무는  림
보를 정벌한 것이다. 이 림보는 어두운 지하감옥으로 묘사되며, 하데스가 자신의 지상적  대
리인인 사탄과 함께 이곳을 다스린다.  여기서 겪는 고통은 일반 감옥에서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며, 특별히 혹독한 고문은 없다. 갇혀 있던 유대 조상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도
리 것인지 눈치채고 기뻐 날뛰며 소란을 피운다 - 이것이 [니고데모 복음서]가 사랑을 맏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수는 도착하자마자 사탄과 그의 부하 마귀들을 물리친다. 그리고 하데스
로 인격화한 '죽음'자체까지 물리치는데,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상징적으로 중요한 의미
를 갖는다.
  예수의 지옥정벌 이야기는 아주 중대한 시기에 대한 설명이다.  그와 동시에 아담과 이브
에서 시작하여 아브라함을 포함하는 구약성서의 존경스런 인물들을 합당하게 처우하고 있음
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은, 부자의 시대에 머무르던 곳이 어디였든 간에 이제는 저 높은  하
늘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부활의 약속을 신약성서의  어느 복음서보다도 훨씬 더
극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더욱이 이 지옥 정벌 이야기가 기독교의 이미지에서 극히  중요한 이유는, 예수를 남성적
이고 힘 있는 모습으로 묘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고통받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악마와 싸우고, 죄인들을  구출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승승장구하는 용사나 왕자처럼 명령을 내린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가 죽음에 대해 승리하고
죽은 자들을 구하는 이야기를 이 신흥 종교의 가장 매력적이고 기분 좋은 부분으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옥정벌에는 불기 어려운 문제도  있다. 만일 사탄이 예수에게  패배하고 감옥에
갇혔다면, 어째서 그는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는가? 만일 사탄의 죽음이 하데스나 림
보에서 선조들이 해방됨을 보증하고, 또 함축적으로 모든 선한 기독교인이 장차 그곳으로부
터 자유롭게 됨을 보증하는 것이라면, 그 면죄의 대가는 누구에게 치러야 하는가? 악마에게
주어야 할까? 초기 교회 교부들중 일부는 바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교부들은 그
러한 생각에 분노를 표시하며, 어찌 악마가 감히 하느님과 거래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니고데모는 하데스와 사탄을 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속론(면죄금 이롬)을 '희생론'으
로 뒤집는 가장 좋은 학문적  방법은 사탄과 하데스를 분리하는  것이다. 예수가 강적(악마
또는 사탄)을 달래거나 매수하기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죽음에 대한 승리를
상징하기 위해 죽었다고 가정해보면, 추상화된 하데스 또는 의인화된 죽음의 이차적 특직은
'유혹자 - 악마'인 사탄과는 분리된 형태로, 또 사탄의 지배자의 형태로 파악하는 것이 유익
하다. [니고데모 복음서]에서는 민간 전설의 '속임수 이론'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 줄거
리를 보면, 악마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몰아냈다고 생각했지만 속은 것이었고, 실제로는 자신
이 몰락한다. 하지만 하데스 또는 인격화한 죽음이 이 이야기에서 사라지고 중세 말기에 이
르기까지 나타나지 않자,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예수가 지옥으로 내려갔다는 문자 그대로의 사실
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초기 기독교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은 이렇게 선포한다.
 
  지옥으로 내려가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그곳으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16세기의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예외지만)훗날  교회 시경들에서는 지옥으로 내려간다는
구절이 빠졌다. 그 구절은 고도의 지적 수준에서 보면  지옥정벌 이야기와 관련하여 궁극적
불안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6세기에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프랑크 족
의 역사]첫머리를 [창세기]에 근거한 세계창조 이야기로 시작했고, 예수의 삶에 관한 내용도
집어 넣었다. 하지만 그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설명을 생략했다. 한편 그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대제를 위해  지은 부활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들어 있다.
 
  예수께서 지옥을 정벌하고
  사로잡힌 포로들을 인도하시니
  암흑과 혼돈과 죽음이 빛의 면전에서 도망가도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아우구스티누스까지도 예수의 지옥정벌  이야기
를 완전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야기의 역사적 기원도 문제삼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이 이야기가 갖는 본질적 가치에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중세 시대 내내, 대다
수 성직자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는 예수의  지옥 정벌 이야기가 아담과  
이브 이야기, 베들레헴의 기적이야기처럼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적그리스도THE ANTICHRIST
 
  마태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 경고했다. 그중에 특히 적그리스도는사
탄의 편에 서서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사악한 대립자다-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은  [요한계시
록]의 불바다에서 볼 수 있다. 계시록에서는 적그리스도가 와서 활개를 친 다음에야 천년왕
국이 도래 하게 되어 있다. 그런  이유 적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해서 수많은 추론이  있었다.
로마 제국에는 적그리스도라 할 만한 황제들 - 도미티아누스, 칼리굴라, 네로-이 꽤 있었다.
하지만 적그리스도란, 영적 지도자로서 기적을 행하는 자에 가까워 보인다. 바로 사마리아의
시몬 마구스같은 사람이 일찍이 적그리스도로 지목되었다. 그는 사도 베드로, 바울과 논쟁을
벌인 증거도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이름이 거론되었고,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면 프로테스탄
트들이 적그리스도란 필경 교황제도  전반을 가리키며, 자신들이 거짓된  종교를 받들며 천
년을 살아왔다고 주장한다.
  천년왕국은 혼란스러운 용어다. 엄밀히 말해, 그것은 계시록에서 예언한대로 지상에  실현
될 하느님 왕국 - 새로운 예수살렘 또는 하느님의 도성 - 이 지속되는 1,000년의 기간을 뜻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으로 신과는 대립하는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1,000년이 될 것이
고, 이것도 또한 묵시록의 어두운 부분에는 예언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최후의 심
판과 역사의 종말에 앞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용어의 의미는 계속 변하여, 이제는 거의  최
후의 날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이고 있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모두 천년왕국 신봉자
들이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왜 그들이 그렇게 기다렸는데도 종말이 오지 않았는지를 설명하
기 위해 계시록이 인용된다. 천년 왕국설은 기독교 역사에  항상 존재해 왔다. 그리고 2,000
년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것이 부질없는 희망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놀
랍게도 오늘날가지 천년 왕국설은 널리 퍼져 있다.
  예술가들은 지옥의 적그리스도를 사탄의 아들로 묘사했다.  적그리스도는 종종 사탄의 무
릎에 앉아 있기도 하며, 나중에는 아마게돈(실재하는 헤브라이 전장의이름)에서 벌어질 최후
의 전투에서 곡과 마곡의  세력-이교도, 불신자,이단자,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이끄는 자로
그려지기도 했다. 오늘날 적그리스도는 [로마즈마리의  아기]같은 영화를 제외하면 더  이상
대단한 소재는 아니다.

   12 최후의 심판
  지옥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복잡하면서도 최종적이며, 기독교에  없어서는 안 도리
것은 최후의 심판, 다시 말해 진노의 날에 대한 것이다. 헤브라이 성서에는 결국 정의 가 승
리하는 '여호와의 날'내지는 '주님의 날'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차 있다. 종말론을 다루는 [에
녹서],[제4에스드라서],[다니엘]서, 그리고 유대교의 외경도 이 사건을 고대하고 있기는  마찬
가지지만, 신약성서와 비교하면 중대한 차이가 있다. 그 심판은 죽은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
라, 산 자들에 대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은 기독교의 종말론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복음의 성구들을 담고 있다. 올
리브 산에서 예수는 다가올 재난의 시간, 즉 전쟁, 배교의 시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
자들',그리고 '징조와 놀라운 일들'에 대해 제자들에게  경고한다. 천체가 붕괴하고 "이 세대
가 지나가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라고 예수는 말한다 .그런데 그 다
음에는 좀 얼버무리며 이렇게 말한다. (마태는 예수가 죽고 거의 50여 년이 지난 뒤에 이것
을 기록했다.)."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그 날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고 재촉하면서, 예수는 여러 비유를 들어 청중에서  경고한다.
그 마지막 비유가 양과 염소의 비유이며, 이것은 심판이 어떻게 행해지는지 보여 준다.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 염소는 왼편에 자리잡게 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베네치아의 토르첼로 성당에 있는 12~13세기경의 모자이크로, 최후의  심판을 완전히 개관
하고 있다. 맨 윗단은 그리스도의 지옥 정벌 그림. 세례 요한이 예언한 대로 그리스도가  아
담, 이브, 다윗, 솔로몬의 영혼을 풀어 주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는 장면이다. 다음 단은 재
림 모습이다. 중재자인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후광'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가리키고있
고, 측면에는 이미 하늘로 올라간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있다. 다음 단 중간은 그리스도가 수
난당할 때 쓰이던 도구들, 성경과 함께  표현한 옥좌의 모습. 천사들이 마지막 나팔을  불고
있고, 양쪽에는 땅과 바다의 피조물들이 죽은  몸들이 부활할 수 있도록 넘겨주고 있다.  그
아래 단에서는 문 바로 위에서 천사가 저울을 들고 있고,  마귀들이 저울 한 쪽을 내리누르
고 있으며, 마리아는 자비를 간구하고 있다. 왼쪽에는 축복  받은 자들의 대열이 있고, 오른
쪽 천사들은 무릎 위에 적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사탄에게로 사악한 자들을 몰아대고 있다.
맨 아래 왼쪽에는 품에 한 영혼을 품고 있는 아브라함과 성모 마리아, 세례 요한,하늘의  문
을 안내하는 '수호 천사',베드로, 영혼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천사가 있다.
   마태는 이것이 산 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까지 심판하는 것임을 명확히 보여 주지 않는
다. 하지만 바울은 널리 유포되어 있던 자신의 편지에서 그 본질적인 차이를 이미 설명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지옥정벌 이야기가 그것을 확증해 주었다.
  서력 기원 초기는 사람들이 종말이란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최후
의 심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신앙은 결국  그 이전의 수세기 동안 전해도언 여러 사상에
근거한 것이었고, 그리 복잡하지도 않았다 .의문점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났다.  만일 '주
의 날'이 되어서야 심판을 받는다면, 몸이 죽은 뒤부터 그 날이 올 때까지 어떤 일들이 벌어
지는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어떻게  몸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가? 지옥에 떨어
진 영혼들도 부활하게 되는가, 아니면 축복 받은 영혼들만 부활하는가?
  이러한 의문 때문에 개별 심판의 개념이 생겨났다. 이집트나 페르시아 신앙에서처럼, 개인
의 영혼의 운명은 그 사람이 죽을 때 개별 심판을 통해 결정된다는 것이었다.부자와 나사로
의 비유는 이러한 즉결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가
선한 도둑에게 약속한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묵시적 천년왕국설  신봉자들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했다.
  초기 교회 교부들은 이러한 모순과 대립의 견해들을 조정하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2세
기의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선한 자들의 영혼과  악한 자들의 영혼은 서로 떨어진  지역에서
최후의 심판을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시대에 저술을 남긴  타티아누스는 영혼들이
최후의 시간까지 잠을 잘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단  교파와 프로테스탄트 종파가 여기
에 동의 했으나, 로마 카톨릭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다.
  3세기에 테르툴리아누스는, 곧장 하늘로  올라갈 순교자들의 영혼을 제외한  몯느 영혼은
서로 나뉘어 각각 차등이 있는 림보에서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4세기에 푸아티에의 힐
라리우스는 비록 영혼에 대한 영원한 결정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죄인들
은 죽음 직후에 벌을 바들 것이라는 경고를 했다.  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두 가지 심판
에 대해 말했다. 하나는 죽음 직후에 받는 심판이고, 다른 하나는 부활 이후에 뒤따르는  심
판이 다. 여러 세기가 지나 연옥에 대한 교리가 다듬어질 때까지 막연하게나마 이것이 서방
교회의 견해였다.
  성경에서도 '최후의 또는 전체적 심판'에 대해 종종 언급하고 있지만, 죽는 당시에 결정된
다는 '개별 심판'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부자와 나사로 이야기,
그리고 회개한 교부들은 이 심판들 사이의 차이를 결정해야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
에서 이 차이를 육체의 부활이라는 가르침으로 교묘하게 해결하려고 했다.
  영혼은 그 육체를 떠날 때 먼저 심판을 받고, 나중에 몸과 합하여 다시 심판을 받게 된다.
영혼은 자신이 머물렀던 것과 똑같은 육신 속에서 고통받거나 영화를 누린다.
  이것은 각기 차등 있는 별개의 림보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최
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죄인들의 영혼은 자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죄인이라
는 두려움으로 이미 형벌을 받고  있지만, 그들의 영혼이 육체와 다시  합할 때까지는 지옥
불 속에서 당하는 형벌(육체로 경험하는 고통)은 아직  시작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확장한
것이다.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의로운 이들의 영혼은, 영화로운 몸으로 하늘의 최종적인  축
복을 받을 때까지 즐겁고 상쾌한 곳에서 머문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이 갖는 문제점은, 만일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철면피한 죄인들에게
도, 그들이 명백히 받도록 되어 있는 형벌을 받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 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예수가 죽는 순간에 구약의  족장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는 예수의 지옥정벌 이야기와 모순된다. 그리고 그것은 일반일에게는 너무 복잡한 해석
이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영혼이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을  때조차도 일단 그 대
가는 받아야 한다는 믿음을 언제나 지녀왔다. 평신도들은 시간이나  등급의 차이가 있는 심
판을 양립시키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다.
  베드로의 편지에서 증언하고 있듯이, 최후의 심판은 타락한 천사의 운명가지  결정지었다.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천사들을 용서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던져서 심판 때까지 어둠  속에
갇혀 있게 하셨습니다."그리고 [유다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또 천사들도 자기 자리를 지
키지 않고 자기가 사는 곳을 버렸을 때에 하느님꼐서는 그들을 영원한 사슬로 묶어서 그 큰
심판의 날까지 암흑 속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1세기 동안, 타락천사들은 올륌포스  신과 싸
워서 패한 티탄 신족과 마찬가지로 아직 악마는 아니었고,  그저 죄수이거나 감옥지기 또는
고문관이나 유혹자였다.
  묵시록적인 종말이 곧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가 점점 희박해지면서, 초기 교회의 주교들은
여러 가지 중요한 교리상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큰 문제는 우주적 규모의
심판과 형벌에 대해 공식  견해를 확립하는 것이었는데, 어떤  노선을 택할것인지 결정하는
일은 쉽기 않았다. 가령 영지주의적 사조라고 할 모험주의적 신학의 경우처럼 신용할 수 없
는 것도 있었지만, 기독교의 문헌 중에서 정경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결정하는 데도 교회는
여러 세기를 보냈다 .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을 믿는 묵시적  종교이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은 물론 부정적인 측면 역시 매우 큰 관심거리였다 .어떤 사람이 구원받
고 어떤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는가 하는 것이 언제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주제가 되었
다. 단순하게 보복적 환상이 제시되기도 했다. 아프리카의 천년 왕국설 신봉자인 테르툴리아
누스는 그 위대한 심판의 때가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없는 지경이었던 것 같다.
  그 날의 광경이란 얼마나 장엄하랴!  나는 어떤 장면에서 처음으로 웃고  박수칠 것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지던 왕들은 그들이 올라가는 것을 지켜본 신들의 왕 유피테르와 함
께 어두운 심연 속에 빠져  신음을 하고 있으리라. 주의 이름을  박해한 통치자들이 용감한
기독교도들을 죽이려고 지른 불보다 더 맹렬한  불꽃속에서 녹아가고 있으리라. 불구덩이에
함께 빠져, 제자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는 현명한 철학자들, 세계는 하느님의 관심 밖에 있다
는 철학자들의 주장을 추종한 자들, 도대체 영혼이란 없다고 믿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영혼
은 그 본래 몸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은 어찌 되는가? 제우스의 아들 라
다만튀스나 미노스의 심판대 앞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벌벌 떠는 시인의
모습, 놀랍지 않은가? 자신만의 멜로드라마 속에서 통곡하는  비극 배우들의 목소리는 어쨌
든지 들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불 속에서  펄쩍 뛰는 희극 배우들이야말로 볼만할 것이다!
전차를 모는 유명한 전사는 그의 불바퀴 위에서 구워질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가 아니라 불 속에서 바퀴처럼 굴러갈 것이며... 이것들은 서커스장에서보다도, 어떤  극장이
나 운동경기장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신나는 일들일 것이다.
  가장 급진적인 성찰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의 제자인 오리게네스에게서 나왔다. 훌륭
한 교육을 받은 클레멘스는 플라톤의 이론을 악의 문제에 적용했고, 악이란 '선의 결여'라고
설명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완전한 선이기  때문에 악은 비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를 야기한다 .물질을 악으로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영지주의자 또는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견해다. 그리고 물질이 비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적
하듯이 섣부른 행동이었다.)또한 클레멘스는,  악마와 그를 따르는 천사들의  반역과 타락은
자유의지의 이론을 증명한다는 견해를 세웠다. 하느님이 모든 것을  이미 정해 놓았다는 예
정설을 따르면 하느님이 일부러 악의 피조물을 창조했다는 결론이 나오므로, 그는 예정설을
승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클레멘스를 좇아서 오리게네스는 자유의지설, 그리고 악한 천사와 죄 많은 영혼이 하느님
의 곁을 떠나 조야한 물질계로  내려왔다는 클레멘스의 생각을 받아들였지만, '변치않는  악
마'가 거처하는 '영원한 지옥'이라는 관념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자주 지적한 것처럼 영혼은 영원하고 불멸하므로, 거대하고 잴 수도 없는 우주 안
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시대에 걸쳐 가장 높은 선에서 가장 낮은 악으로 타락하거나, 아니면
그와 반대로 궁극적인 악에서 가장 위대한 선으로 복귀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죽음 뒤에도 자
유를 누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플라톤이 시사한 것처럼 영혼의 재생이란, 존재의  사다
리를 올라거거나 아니면 내려가는 운동의 한 형태다. 오리게네스도 그러한 생각에 경도되었
지만, 완전히 치우치지는 않았다.
  오리게네스는 악마를 제시했다. 그리스도가 모든 이를 위해 죽었다면, 그 '모든 이'에는 천
사도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악마도 원래는 천사였다. 또한 하느님이 무한하다면, 시간의 종
말에 이르러 만물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에게 돌아가 그  일부가 될 것이다 - 악마의 부정적
측면은, 정화의 불 속에서 천사의 본질적인 자아만 남겨놓고 파괴될 것이다. 이 우주적 구원
론을 '보편 구제설'이라고 부른다.
  오리게네스의 논리에 따르면 지옥은 시간의 종말에는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만일 지옥이
존속한다면, 그것은 쥐와 악마의 승리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 또한 실제로
육체에 가해지는 벌에 대해서 타당성 있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후대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오리게네스도 역시 일반 민중들의 범죄를 막는 장치로서 지옥의 형벌에 대한 믿
음은 필요하다고 느꼈다.
  영혼은 불멸하면서도 타락하기 쉽다고 보았던 오리게네스의 견해는 플라톤의 영혼관과 밀
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오리게네스에 관한 히에로니무스의 해설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
다. 히에로니무스는 상승과 하강을 거대한 순환으로 설명한, 반오리게네스적 인물이다.
  오리게네스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이성적이고 불가시적이고 빗물질적인 존재(여기서는
천사들)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서서히 바닥 없는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고 한
다. 그들은 이미 내려가 있던 물질을 재료로 해서 인간의  육신에 들어 있는 공기와도 같은
희박한 몸을 취하게 된다. 반면에 악마의 인도에 따라 자신을 결정함으로써 주님에 대한 경
배에서 떨어져 나간 마귀들이라 할지라도, 만일 가까스로 나마 자기의 본심으로 되돌아온다
면 그들은 인간의 육체(오리게네스가 클레멘스이 주장을 따르면서 악마들이  머문다고 가정
한 육체로서, 더 저급하고 더 물질적인 육신과는  대조적인 육체를 말한다)를 입게 될 것이
다. 그럼으로써 저마다 참회를 하게되고, 처음으로 육신으로 들어가 하느님과의 친교를 회복
하게 되며, 공기와도 같은 희박한 몸을 벗어버리면서 처음의  타락과 동일한 원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도리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은 하늘과 땅과  지하의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
고, 하느님은 우리와  더불어 모든 것이 되실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윤회에 가깝고, 또 불교와도 조금 연관이 있다. 히에로니무스는 오리게네
스에 찬동하지 않았지만, 암브로시우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나잔추스의 그레고리우스같은
초기 교회의 다른 교부들은 오리게네스의  이론에 동의했다. 종말론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3세기에서 5세기에 이르는 동안 집중적으로 계속된  보편 구제설에 대한 논쟁은, 히포(지
금읜 알제리아, 아나바)의  대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가  영원하면서도 본질적으로 정적인
부동의 지옥이라는 존재를 완전히 '증명'함으로써 끝이났다.
  9년 동안이나 마니 교를 믿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세를 일종의 지옥으로 보고  물질을
악으로 보는 영지주의자들(이때쯤에는 영지주의자들이 마니 교에  통합되었다)의 해로운 견
해를 논박하는 데 온 마음을 쏟았다.  그는 [창세기]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이 창조한  자연은
아름답고 선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느님께서 그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다." 아름답고
선한 자연에 대치하는 것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의 교리를 들었다.  비록 이 원죄 교리
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위적 창작이라는 비난을 받아오기는 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전기
작가인 피터 브라운에 의하면,  옛날에 저지른 범죄가 인류의  계속되는 불행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당시 이교도나 기독교도 모두 공통적인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공헌은 원죄를
성에 연결지은 것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처음부터 예정론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집요하게 원죄를 강조하다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예정론으로 기울게되었다한편으로는 종족 번식을 위한 포유 동물의 행위와
연결된 유전적 죄로, 우리들 대부분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비참하고 돌이킬 수
도 없이 더럽혀졌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자유의지를 옹호하는 일은 불가능했
던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신학자조차 자신의 대립하는 두  가지 견해를 조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면, 예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이 그 후 오랬동안 기독교를 괴롭힌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창조된 세계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 그는 물
질이 아닌 인간의 유한성이 죄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 마니  교에서는 암흑의 주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보듯이, 그 또한 악마가 지금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가
볼 때 기독교의 악마는 마니 교와 달리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언젠가 벌을 받아
야 할 존재였다. [신국]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서를 인용해 그것을 입증하고자 했다.
  불과 유황의 바다라고도 불리는 지옥은 실제로 물질적인 불일 것이며, 사람이든 악마든 -
딱딱하게 굳은 몸이든, 공기같이 가벼운  몸이든 - 타락한 자들의  몸에 고통을 줄 것이다.
만일 영혼과 육체를 모두 가진 것이 인간뿐이라고 한다면,  악령들에게는 육체가 없을 것이
다. 그러나 악령들 역시 불 속에 들어가 생명을 받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
런 악령들 역시 불 속에 들어가 생명을 받지 못한 채 고통스러워하게 될 것이다. 똑같은 불
하나가 그렇게 양자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만일 자비와 분에 넘치는 은총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아무도 형벌에서 면제  받지 못
하다. 그의 논법은 "성공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다른 사람들이 실패하지 않는다면."는 식이
다. "어떻게 우리는 은총에 정 반대하는 불행을 충분히 보지 않고서 그것을 인정할 수 있겠
는가, 그리고 정당함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만인이 알도록 하기  위해 형벌에서 해방된 사람
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형벌은 영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우구스티누수는 [마태복음] [요한
계시록][베드로서]를 인용하여 반박했다. 또 자신이나 다른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성인들과
천사들에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반박하기 위해서는, 만일  기독교인이 불경하고 사악한 천사
들을 위해 기도할 수 없다면, 마찬가지로 사악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할 수 없다는 논증
을 폈다. 그는 플라톤과 베르길리우스를 인용하면서, 그렇게  사악하지는 않은 사람들이 '첫
번째 죽음'이후에 일시적으로 머무는 연옥이라는 장소를 제안했고, 최후의 심판에 의함 둘째
죽음 이후에 받는 선에 대한 보상과 악에 대한 형벌을  모두 영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리고 그는, 지옥에 떨어진 자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들은  다른 어떤 이들보다 더한 고통
을 당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세례는 그 자체로는 악인을 구할 수 없지만, 구원에는 필수적이다. 이교도들의 파멸은  이
미 예정되어 있다. 또 세례 받지 않은 아이들도 그렇다 .이것이 에클라늄의 율리아누스의 격
렬한 분노를 일으켰다 .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완고함에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던 그는 이렇
게 적고 있다.
  당신 말에 따르면 하느님의 갓 태어난 아이들을 박해하고, 아이들을 영원한 불 속으로 보
내는 등의 판결을 내는 분입니다. 당신 같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종교적 감정, 문명화한
감정, 그리고 평범하고 단순한 상식도 없는 자로 여기는 것이 타당하고 적절한 태도일 것입
니다. 당신의 주 하느님은 야만인조차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정의에 반대되는 죄를 범할
수 있는 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감정을 품은 사람이 율리아누스뿐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의견이 우세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올리아누스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지만  -원죄가
지닌 두려울 정도의 잠재적 영향력과  하느님의 불가해성을 근거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
하느님은 정의롭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인간의  정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도덕적 기준은 소용이 없다. 세례는 원죄를 씻어 주는 진지하고 거룩한 성사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며, 구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이들에 관한 것은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첫번째'죽음과
'둘째'죽음 사이에 일시적인 연옥이 있다고 한  제안은 700년이 흐른 뒤에야 하나의  교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그러나 오리게네스와 그가 보여 준 악마에 대한 동정론에  비한다면,
승리는 완전히 아우구스티누스 쪽이었다. 주교들은 54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모여서 다
음과 같이 선포했다.
  누구라도 악마들과 신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  지옥에서 받는 고통에 시간 제한이  있다고
말하거나 생각한다면, 또는 그 고통에 끝이 있을 것이라든지  언젠가는 용서받을 수 있다든
지 다시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파문당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들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오리게네스를 15개 조항
의 단죄 항목을 달아 파문하였다 .그 징계가 온당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 뒤에 계속된
553년, 680년, 787년 그리고 869년의 공의회에서도 오리게네스는 반복해서 지옥의 저주를 받
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리게네스의 사상은 계속  전해 내려왔다. 20세기 말인  지금 우리가
'만인 구원론'이라 부르는 이 견해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13 묵시록에 나타난 지옥
  기독교 초기의 몇 세기 동안 씌어진 묵시적 문헌들은 최후의 심판과 심판 후의 삶에 대한
예고편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사도, 성인,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존엄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루거나, 또 실제로 그런 인물들이 기록했다고 알려져 있다. [바울 묵시
록]의 서문에서는, 그 필사본이 진짜라는 증거로 그것이  사도 바울의 신발이 들어 있던 상
자 안에서 발견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위작자는 그 문서의 '발견'날짜를 388년이라고
기술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것은 중세의 학자들을 매우 당혹하게 만들었다. 388년에  발견
되었다는 [바울 묵시록]이 그보다 150년이나 전에  오리게네스의 저작에서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묵시록은 2세기 중반에 씌어진 [베드로 묵시록]이다. 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그보다 더 상세하게 잘 씌어진 [바울 묵시록]이다. 이 작품은 시리아 어,  콥트어, 에티
오피아 어로 필사되었고 또 유럽의 모든 언어로 필사되었다. 그리고 [동정녀 묵시록]도 일찍
이 씌어진 것으로서, 훗날 중세의 성모 마리아 숭배에 중요한 성전이 된다. 그 밖의  묵시록
들 중에는 원문의 일부밖에 남지 않은 것도 있따. 그 내용에는 도마, 스바냐, 바룩, 고르고리
오스, 에스라, 이삭, 파코미오스, 엘리야가 등장한다.
  [베드로 묵시록]에는 다른 대다수 지옥 여행 이야기와 달리, 그리스도 외에는 안내자나 영
혼의 길잡이가 등장하지 않는다. [베드로 묵시록]은 불쾌할 정도로 복수심에  불타는 무시무
시한 어조로 지옥을 조잡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신곡]의 [지옥편]보다 1,200년이나  앞서는
[베드로 묵시록]에서 사후 처벌의 대략적 윤곽을 이 정도까지 그려내고 있는 것을 보면,  단
테 애독자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묵시록]과 단테의 [지옥편]은
죄인들의 분류 방법이 크게 다르다.
  [베드로 묵시록]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심한 경쟁을 벌이던 시기에 쓴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심판과 처벌을 받아야 할 첫째 후보들은 이교도의 우상과 형상들 속에 머물고 있는
'영혼들'이다. [베드로 묵시록]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심한 경쟁을 벌이던 시기에  쓴 것
이 분명하다. 따라서 심판과 처벌을 받아야 할 첫째 후보들은 이교도의 우상과 형상들 속에
머물고 있는 '영혼들'이다. [베드로 묵시록]의 저자는  이들을 진지하게 마귀로 다룬다. 그러
나 지옥의 화로 속으로 떨어지는  이집트의 동물 신상의 묘사는 웬지  활기가 없고, 사탄은
아직 등장하지 않는다. 초기 단계에서는 하느님을 받드는 공정하고  엄한 두 천사 우리엘과
에즈라엘이 지옥을 관리하고 있다.
  여기서는 가족의 가치를 특별히 중시하고 있어서 이것을 저버린 사람들이 앙갚음  당하는
장면을 혹독하게 묘사한다. 낙태된 아이들은 불로 어머니를 눈멀게 하고, 부모에게 학대받은
아이들은 사나운 짐승들이 부모를 토막내는 장면을 바라본다. 무례한 아이들과 순종하지 않
았던 노예들은 고문을 당한다 .타락한  처녀들은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간음한  자들은
동성연애자들과 마찬가지로 혹독한 형벌을 받는다 .단테의 [지옥편]에서는 마지막 두 범주에
속한 죄인들만 등장하고 있는데, 단테는 이들에 대해 적지 않은 동정심을 보여 준다.
  중세 시대의 지옥은 대개 인간의  결점 또는 나약함을 남김없이 펼쳐  보이는 '일곱 가지
대죄'에 따라 조직되었다. 하지만 초기 묵시 문헌에서 죄는 주로 생식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다. [베드로 묵시록]같은 문서들은 폭력, 범죄와는 대조적으로 성적 행동을 주로 다루
었고, 그것은 기독교 초기의 지옥이 갖는 독특한 모습이 되었다 .소름끼치는 처벌 묘사는 청
중들을 끌어 모았는데, 초기  묵시 문헌들에 나타난 지옥  광경은 위선적인 포르노그래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드로 묵시록]의 저자에게는 관음증, 가학증과 함께 외설적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이 나
중에 나온 환상문학의 분위기를 결정지었다 .한편으로 그는 기이한 시대를 살았다.  2세기가
되기 이전에 로마 제국의 법률은 시민들에 대한 고문을  금지했다. 노예들에게만 고문을 가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죄를 저질러 기소당했을 때만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 실제로는 노
예들을 재산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주인은 노예에 대해 절대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
지만 로마 시민들을 위한 시민권  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헤이해져서, 1세기 전이라면
결코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방만하게 시행되었다. 이것은  1세기 후반에 예루살렘에서 체
포당한 바울에 대한 교훈적 서술에서  알 수 있다. 군인들이 바울을  치안 방해죄로 체포한
뒤 재판도 하기 전에 채찍질하여 심문하려했을 때, 바울은  자신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음을
밝힌다. 자신에게 로마 시민권이 있다는 바울의 주장에 파견  대장은 진지하고 즉각적 반응
을 보였다. 파견 대장은  (그의 설교에 분개했던  유대인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족히
270명은 되는 무장 군인들이 바울을 가이사리아로 호송하여 그 지방 총독의 공정한 로마식
재판을 받게 했고, 이것으로 이 사건을 끝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2세기에 로마 원로원은 많은 시민들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이것은 시민들이 이제
심문과 고문을 받을 수도 있게 도니 것을 의미했다. 통치자인 황제와 그의 정부에 반대하는
행위로 해석할 수 있는 '반역'을 저질렀을 때는, 어떤 사람이든지 고문을 당할 수 있었다.
  로마는 유대 교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했고, 기독교도 대개  유대 교의 분파라고 간주했
기 때문에 안전했다. 그러나 64년경 악명 높은 황제 네로가 유대 교에서 기독교를 분리했다.
이후로 기독교인들이 신앙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불경스럽고 파괴적일 뿐 아니라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기독교인들은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초기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이름을  하나하
나 열거하다 보면 박해가 얼마나 가혹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에우세비오스는 177년,  군중
들이 6일 동안 기독교도들에 대해  끔찍한 고문을 행한 사건과,  특히 불란디나라는 이름의
가난한 노예 소녀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벌어진 그 비참한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기독 속에 남아 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적는다. "티베레 강이
범람할 때나 나일 강이 범람하지 않을 때나, 하늘이 움직이지 않고 대신 땅이 흔들거리거나,
굶주리거나 병이 들거나, 그 어느 때나  사람들은 한결같이 외쳤다. - 기독교도를 사자굴에
던져라!."특히 제국 말기에 이르면 로마 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공공연한 피의 숙청을  즐겼
다.
  [베드로 묵시록]은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도 무시무시하고, 또 그것이 폭넓은  영향을 끼쳤
다는 점은 유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구문에 대한 위협이  기독교를 믿는 시민들의 새로운
근심으로 대두하던 그 당시에 이 작품이 씌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세기
부터 5세기 사이에는 신체의 관절과 근육을 못쓰게 하는 고문, 채찍질, 매질 그리고  빨갛게
담금질한 쇠로 하는 고문이 점점더 성행했다.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주요 형벌은 금지되었
지만, 여하튼 고문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로마의 대표적인  형벌은 목
매달기, 돌로 치기, 곤봉으로 때리기, 절벽에서 내던지기 그리고 생매장이었다.  그리스 인들
이 사용했던 고문인 목졸라 죽이기와  독약 먹이기는 금지되었다. 십자가  처형은 노예들과
천한 신분의 죄수들 몫이었다. 사자로 죽이는 방법은 너무  사치스러워서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없었다.
  [바울 묵시록]의 지옥에는 불, 눈, 피의 구덩이 외에도 불의  강들이 나오며, 심지어 [베드
로 묵시록]보다 더 많은 벌레들, 짐승들 그리고 고문 도구로 복수하는 천사들이 있다. [바울
묵시록]에서 타르타루쿠스는 최후 심판의 날까지 고문하는  책무를 맡고 있는 천사다. 심판
을 받기 전에 각 영혼은, 자신의 행적을 다룬 페르시아  양식의 문서를 가지고 있는 수호천
사를 만난다. 누군가 열다섯 살 때부터의 영혼의 행적을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한다면, 하느님
은 오직 5년 전까지의 일에만 흥미가 있다고 응답한다.  지옥의 북쪽에는 악취를 풍기며 불
타는 좁은 갱이 불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안에는 '잠들지 않는 벌레'
가 있는데, 그 중 몇 마리는 머리가 두 개다 .그것들은 불로  가득 찬 갱 속에 있는데도, 추
위에 떨면서 이를 딱딱거리며 울고 있다.
  [바울 묵시록]에서 혁신적인 것은 지옥에 '위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들의 고통을 보고 난 이후 바울은 죄인들의 운명에 슬퍼한다.  이 때문에 그는 비난을 받기
도 한다.(이것은 단테가 받아들인 주제의 하나가 된다.) 여하튼 바울이 슬퍼하는 까닭에, 천
사장 미가엘이 천사 군단을 이끌고  내려온다.(미가엘은 반역천사들을 패주시킨 것  말고도,
흔히 최후 심판의 날 염소와 양을 나누어 놓고, 그들이  적절한 곳에 머물도록 감시하는 역
할을 맡고 있다.) 바울의 동정심 덕분에 앞으로는 부활절 '하루밤낮'동안만은 지옥에서 고통
이 그칠 것이라는 예수의 음성이 들려온다. 이 대중적인 주제는 중세 시대로 전승되는데, 중
재자의 역할은 대개 성모 마리아가 떠맡는다.
  특이하면서 상당히 흥미로운 또 다른 묵시록은, 3세기의 주목할만한 작품 [바돌로메 복음
서]다. 이 작품은 사탄이라고 칭해지던 야수 벨리아로과의 대화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일군
의 수도사 방문객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예수가 심연에서  끌어낸 것이었다. 벨리알은 길이
가 1,463미터, 넓이가 37미터, 날개 길이가  7미터가 넘으며, 불타는 사슬에 묶인 채  천사들
660명의 감시를 받고 있다 .[바돌로매 복음서]에서는 바돌로매가 벨리알의 목을 밟고서 그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있다. 이것은 예술 작품에서 친숙한 장면이다. 벨리알이 들려 주는  이야
기의 대략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어떻게 그가  첫 번째 천사로 창조되었는지, 어떻게
아담에 대한 경배를 거부했고, 그의  추종자들(여기서는 그들 중 600명만 나온다)과  더불어
타락했는지, 어떻게 세상의 여기저기를 방랑했는지, 어떻게 이브를  유혹했는지(그의 방법은
특이했다. 이브는 물에 섞인 그의  땀을 마셨다),어떻게 인간들의 영혼에 벌을  주며 자신은
어떻게 세상으로 보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또 [바돌로매 복음서]는 '예수의 지옥정벌'에 대한 초기의 설명을 담고 있고, (특이하게도)
예수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이 초기 기록 중에 더욱 두드러지는 것은 간략하
게나마 최초로 성모 마리아를 지옥의 여왕으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다. '벨리알 - 사탄'은 아
직도 악마-여기서는 바알세불-와 구별되어 있고, 죽은 영혼들의 지하세계를  지키는 하데스
와도 분리되어있다. 벨리알에 대한 처벌을 집행하는 것은 복수의 천사들이지만, 인간들을 유
혹하고 벌하는 것은 벨리알 군데의 역할이다.

    14 중세
  지옥의 역사는 로마가 멸망한 이후 1,000년 동안 가장  풍성했다. 그 시기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학문에 대한 고전적 접근이 재탄생한 시기)사이에 자리잡고 있다로마
가 망했을 당시에도 지옥의  모든 기본 요건은 이미  자리잡혀 있었지만,일반적으로 지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중세를 통해 폭넓게 정교해졌다.
  중세 신학자들은 교부들이 이루어 놓은 교리를 끊임없이 다듬었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
적인 사건 - 1253년 연옥 교리를 공인한 것 -을 제외하고는 지옥에 대한 사상적 발전은 찾
아볼 수 없었다. 걸출한 인물로 에리우게나정도를 들 수 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지옥이  존
재한다는 것을 의심했다가 이단으로 낙인찍혔고, 실제로 그의 제자들이 편으로 그를 죽였다
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추종했던 롬바르두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불타는 지옥에서  겪
는 육체적인 고통에다가 마음과 영혼의  고통까지 덧붙였다. 특히 아퀴나스는 '꺼림칙한  상
상'의 즐거움을 강조했다.
  지금 보아도 놀랍게 느껴지는 것은 신학자들이 문자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문자 그
대로 해결하는 데 골몰했다는 것이다. 교육받은 지성인이었던 그들이  만일 수세기 후에 태
어났더라면, 우주의 쿼크나 블랙홀을 운운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 또는 은유적 표현
에 숨겨진 의미를 설명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먹었던 음식
이 부활하는 육체의 일부가 도리 것인지 어떤지 하는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그렇다.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리고 여기서 식인종의 경우는 어떠하게  되는가 하는 재미있는 의문
이 생겨난다. )신학자들은 "바늘 끝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춤을 출 수 있겠는가?" 따위
의 의문에 골몰했고, 악마의 수를 세기도 했으며, 지옥의  규모를 재고, 지옥의 위치가 어디
인지를 - 땅 아래 있는 것인지, 대기권 내 어딘가에 있는 것인지 - 알아내려 애썼다.
  샤를마뉴가 육성한 새로운 대하에서, 이른바 스콜라  철학자라고 불리는 교육가와 사상가
들이 기독교 구원의 중심적인 문제들을 종래의 플라톤주의가 아니라,  그 당시 새롭게 발견
하고 받들게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신학상의 여러 반
대 논의를 조화하기 위해 그리스 이성주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
다 .그러나 중세의 고등 신학은, 이른바  대중적 광신주의만큼 지옥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
다.
  교구민들이 라틴 어로 진행되는 미사에 당황스러워 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났기 때문에,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자국어 설교가 상당히 일찍부터  발전하였다. 마을이나 작은 도시에
서 일요일 설교는 가장 중요한 행사였고, 신들에게는 유일한  즐거움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
다.'지옥불'설교는 복합적인 이유로 군중을 끌여 들였고,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은 계속되고있
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그런  류의 설교가 훌륭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조이스가 더블린에서 학창 시절에 들은 실제 설교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중세 설교자들이 설교를 준비하고  고해를 듣는 데 도움이  되는 참고서적으로서
설교집, 예화집, 설교자 기도서 그리고 참회록 등이 있었는데, 그런 서책들의 내용 중에서도
죄지은 자의 비참한 말로를 다룬 것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이 주제는 교회나 성당을 장식
하기 위해 제작된 조각, 부조 모자이크, 프레스코 화, 수채화 등에도 자주 등장했다.
  이들 설교들과 여러 소도구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는
것으로 그 인기를 추측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중세  연극에서 지옥이 인기 있는 주제였다
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러 설교나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성사극도 처음에는
성서의 내용을 교구민들에게 가르치는 방식의  하나로 선을 보였다 .그러나  이내 성사극도
시작할 때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성사극들의 지옥 장면은 극에 등장하는 악마들의 엉
덩방아, 폭죽 그리고 화장실 낙서 같은 엉터리 시들과 함께 가장 사랑받는  대중 연극 - 유
일한 대중 연극 - 이 이 되었다. 수세기 후 결국 공연이 금지되자, 성사극은 오늘날의 형식
으로 변화했다.
  중세 희곡이 '문학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고상한 문학 전통에  속하는 것 중에서도
지옥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 놀라울 만큼 많다. 특히 중세  후기에 묘사한 다양한 지옥의 모
습들 중 일부는 전율스러울 만큼 매력적인 것도 있었다. 교회가 보여 주는 무시무시한 그림
을 못마땅히 여기던 작가들은 지옥에 대해 옛부터 전승된  주제를,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
화, 민화, 봉건적인 환상, 시가 등의 소재를 취하여 절충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여기서  지옥
은 요정나라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우화적인 기사들이 모험을 떠나는 그런 곳이었다 .
  이 모든 것 중 가장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아마도 1,000년 동안 축적된 환상문학일  것이
다. 중세의 환상문학은 예전의 여러  묵시적 문헌과는 스타일도 확실히 다르고,  오늘날에는
대중을 겨냥한 장르로 변모했다 .현재 60가지의 환상문학 작품들과  수백 권의 필사본이 남
아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어떤 이가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아 지옥을 한 바퀴 돈  다음, 연
옥으로 갔다가 결국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비록 환상들을 기록한 이는 문학가들이었
지만, 이 환상들은 분명히 매우 평범한 사람들도 믿고 종종 경험하는 것이었다  .환상문학에
상응하는 현대적 개념은, 아마도 미확인 비행물체  UFO납치에 대한 보고문들일 것이다 .황
당무계하기는 하지만, 그 시대는 강박적  신앙으로 자진 단식을 하고,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던 시대였고, 열병이 들어도 항생제를 쓰지 않던 시대였으며, 사람들이 환상을 믿도록  교
육받은 시대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환상을  원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환상들 중 몇 가지는 특히 후기의 지옥 이야기에 이르면, 경건하고 신실한 사람들의 경탄을
자아내기 위해 타고난 이야기꾼들이 지어낸 것이 틀림없다.
  360년대에 율리아누스 황제치하에서 이교가 잠깐 부흥했다가  몰락한 뒤, 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이교가 잠깐 부흥했다가 몰락한 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
로 발흥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살았다. 410년에는 서고트
족이 도시를 약탈했으며, 야만인들이 떼지어 로마 영토를 넘나들었고, 429년에는 반달  족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살던 북아프리카를 침략했다. 늙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
이 폐허가 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다음해에 죽었다 .
  로마 제국의 멸망이 세계 종말의 신호라고 해도 지나친  과장은 아니었다 .수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유럽 내륙까지 널리 전파된  로마 문명은, 북부와 서부의 종족들인 고트  족,
서고트 족, 동고트 족, 프랑크 족, 색슨 족, 알레만  족, 수에비 족 그리고 동부의 훈족의 침
략으로 무너진 뒤, 476년에는 결국 항복하게 되었다(실제로  로마는 다음 세기에 가서야 물
리적으로까지 파괴되는데,  그것은 야만족들이   아니라 비잔틴 인들에   의해서였다). 이후
1,000년 동안 비잔티움은 화폐 제도, 군사  제도 그리고 무역 체제를 고스란히 보존해  왔으
며, 서로마 제국은 암흑기로 향했다. 이 암흑기는 적어도 샤를마뉴 대제의 통치가 시작될 때
까지 존속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가 지원하던 학교와 대학 체제가 무너지고, 동시에 국내를 통일하던 정치력이 붕괴하
면서, 당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거대 조직체인 교회가  주도권을 장악할 기회를 맞이하였
다. 여기에다가 통찰력, 행정 처리 능력 그리고 실천적인 상식을 지닌 탁월한 교황 그레고리
우스 1세 덕택으로 교회는 재빠르게 지도자적 위치를 장악해 나갔다 .
  로마의 부유한 법률가의 아들인 그레고리우스는 590년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수도사 출
신으로는 처음으로 교황에 오른 그는 자신이 속한 베네딕트 회 수도사의 엘리트 집단에 잠
재해 있는 뛰어난 행정 능력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있었다. 베네딕트 회
의 훈련은 군대의 훈련에 맞먹는 것이었으며, 소속 회원들의 교육 수준과 지성은 상당해 높
앗다. 그는 베네딕트 회원들에게 법률과 경영 관리를 교육했고, 예술과 문학에 대한  관심을
고취했다 .그리고 그들을 어느 정도는 기독교화한 이방인들에게 선교사로 파견했다.
  베네딕트 회원들은 문화와 신학의 중심이 되는 수도원을 설립하는  일 말고도, 라틴 어를
모르는 지방 지도자들을 도와 로마 법률을 근거로 성문법을  만들고, 재정 관리, 징세, 유산
관리, 역사 편찬 등의 일을 했다. 요컨대, 그들 자신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만든 것이
다 .수도사들은 훌륭한 농부이자 포도주 상인이었으며, 이방인들에게 토지의 효율적  관리가
어떤 것인지 전형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토지세를 피하고자  하는 시민들이 수도원에 토지
를 양도하게 되면서 수도원 소유지는 점차 광대해졌다.
  그레고리우스는 일찍이 로마 제국의 군대가 정복지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 실용주의적 관
용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그리스도의 병사들'에게, 게르만과 프랑크  족의 유럽에서
는 꺼림칙하고 불쾌한 이교도 미신을 수도 없이 만나게 도리 테지만, 스스로 이것들에 적응
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그는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끌
어야지, 강요해서 도리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레고리우스는 이때문에 뒤늦게 심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보다 엄격한 태도를 취했더라면 메로빙거 왕조와  같은 거친 집단과는 결
코 교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지방의 관습에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도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
도록 독려했다. 교황으로 선임되기 전에 그는 영국으로  가기를 희망했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소년 노예들 몇 명을 보고서, "그들은 앵글족이 아니라 천사들
이다!"라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민담과 재미있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있었고, 음악도 사랑
했다. 아름다운 그레고리안 전례 성가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다음에서  보겠지
만 서유럽 스타일로 도니 첫 번째 기독교 환상을 쓴 사람이 그레고리우스였다는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590년경 쓴 [대화록]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아주 많은 진기한 이야기들을 가식 없는 문체로
기록하고 잇다. 그 첫째 이야기는 한 동료 수도사가 그레고리우스에게 들려 준 스페인 수도
사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보면,  베드로는 병으로 '죽었는데', 그때 지옥에
서 이 세상의 명사들이 불  속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장면을  보았으며, 그런 뒤에 행실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경고해 준 한 천사 덕택에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레파라투스라는
귀족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환상 속에서, 티부르티우스라는 죄  많은 사제를 벌하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화톳불을 보았다 .그래서 깨어나자마자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전
령을 보냈지만, 티부르스라는 또 다른 사제는 죽어가는 사람에게  제때 사면을 베풀지 못한
것이 안타까워서 탄식했더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났다. 그 사람의 이야기에 의하면 입과  코
에서 불을 토해내고 있던 '구역질  나는 사람들'이 그를 어두운  곳으로 끌어가고 있었는데,
어떤 '잘 생긴 젊은이'가 끼여들었다 .그리고 하느님이 세베루스의 기도를 받아들여 그 죽은
죄인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하느님은 때때로 죽은 죄인을 풀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  죄
인은 무사히 사면 받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죽었다고 한다.
  또 다른 환상은 스테파노라는 상인이 그레고리우스에게 직접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스테파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병에 걸려 죽은 사람으로서, 생전에 지옥 이야기를 듣기는 했
어도 믿지는 않았던 사람이다. 그는 지옥에 가서 여러 가지 장면을 보았는데, 운 좋게도  다
른 사람으로 여겨져 살아 돌아왔고, 그 대신 동명이인인  대장장이 스테파노가 죽게 되었다
는 것이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스테파노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3년 후에  전염
병으로 다시 죽었다 .바로 이때 어느 시골 병사가 '죽어' 지옥의 환상을 체험했는데, 그 병사
는 죽은 상인 스테파노를 보았다고 한다.
  시골 병사의 이야기는 후에 서유럽의 환상문학에서 매우 친숙한 것이 될 지형적 특징들에
대한 최초의 보고문이다 .그 병사는 '불결하고 참기 어려운  냄새'가 나는 검은 연기에 휩싸
인 강과 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보았다. 강 건너에는  상쾌한 초원과 빛나는 집들이 있
고, 그 중 한 채는 황금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다리는 병사가 본 사제처럼  결백한 자만
이 건널 수 있는 다리였다. 이 다리 한 쪽에서, 가학적인  교회의 관리인(그레고리우스가 실
제로 알고 있던 사람이다)이 '가장 불결한  장소'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으며, 불쌍한 스테파
노도 다리를 건너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가 미끄러져 넘어지자,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다
리를 잡아 끌어들이려고 강에서 솟아 나왔다." 동시에 아름다운 백색의 존재들도 팔로 그를
잡아당겼다. 바로 이 장면까지 본 뒤 병사는 다시 삶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결국 스테파노가
(다리 건너) 황금 저택으로 갔는지 못 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이 기괴한 이야기들에 대한 그레고리우스의 다소 평범한 주석에 따르면 내세에 대한 환상
들은 때때로 그것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교훈이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듣는 사
람들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해 주는 '타인들을 위한 증언'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레고
리우스는 그 불행한 강변에 있는 저택은 육체의 죄를  지었지만, 기본적으로 고귀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지방 주교인 투르의 그레고리우스가  있었는데,
그 역시 교육자, 경영자 그리고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 그는 성인들의 기적  이야기
를 기록한 첫 번째 작가 중 한 사람이었는데, 그를 유명하게  해 준 것은 그의 훌륭한 저서
[프랑크족의 역사]였다. 그 안에는 살비우스와 서니울프가 본 두가지 환상을 수록했다. 살비
우스는 의식을 되찾기 전에 운 좋게도 천국의 단면을 볼 수 있었지만, 란다우의 대수도원장
인 서니울프는 사람들이 '벌집의 벌떼처럼  몰려 있는' 불타는 강으로  끌려갔다. 강 위에는
발 하나를 올려놓을 수 있을까 말까한  좁은 다리 하나가 있었고, 강 맞은  편에 하얀 집이
있었다. 신자들을 보살피지 않았던 성직자들은 강에 빠졌고, 어떤 이들은 허리까지 다른  이
들은 겨드랑이가지 또 다른 이들은 턱까지 잠겨 있었다 .그렇지만 성실한 성직자들은 그 다
리를 건너갔다. 그레고리우스 1세가 보았다면 이것을 '경고의 환상'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가경자 베데는 영국 수도사로서 [영국 교회사를 썼다. 이 책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고전적
기초사료가 되었다. 베데는 그 안에서 자신의 선배들보다 더 장황하게 지옥에 대한 두 환상
을 기록했다. 베데는 세세한 부분까지 살필 수 있는 눈을 지닌 재능 있는 작가였다  .그리고
그는 일부 묵시적 문헌뿐 아니라, 두 그레고리우스의 작품들을 정독했음이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소재의 특징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 더욱이 그 이야기들은 그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 지금은 소실된 어
떤 책에서 그는 퍼세우스라는 인물이 화자로 나오는  이야기를 읽었다 - 그 이야기들을 자
유롭게 윤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데에 따르면 퍼세우스의 환상은 63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퍼세우스는 윌리엄 블레이
크처럼 환상을 좇는 경향이 있었다. 아일랜드의 목사였던 퍼세우스는  첫 환상을 체험한 뒤
영국 동부에 전도 기관을 세웠고, 두 번째 환상체험에서는 천사들의 합창을 들었다고  한다.
그의 세 번째 환상은 훨씬 더 무서웠다 .환상 속에서 그는 천사들에 이끌려 어두운 계곡 위
로 날아가던 도중, 하늘에서 네 개의  불기둥을 보았다. 그 불기둥은 거짓말쟁이,  욕심쟁이,
싸움과 불화를 낳는 자, 몰인정한 자와 사기치는 자를 벌주기 위한 것이라고 천사들이 이야
기해 주었다. 그 불기둥들은 하나의거대한 불덩어리로 합해졌고, 퍼세우스에게 약간의  돈을
물려 준 사람이었다 .퍼세우스의 영혼이 그의 육체로 되돌아왔을 때, 그의 턱과 어깨에는 환
상체험의 흔적으로 화상의 흉터가 남았고, 그것은 평생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베데는 자신이
아는 나이든 수도사가, 실제로 퍼세우스를 만난 남자를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 남자는 한
겨울에 퍼세우스르 보았는데, 퍼세우스는 얇은 옷을 걸치고 있으면서도 마치 한여름처럼 땀
을 흘리며 앉아 있었다고 한다.
  696년의 일이라고 기록한 베데의 두 번째 드리이텔름이라는  가장에 관한 것이다. 드라이
텔름은 해질 무렵 죽었다가 새벽에  갑자기 살아나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그는 재산을 삼등분하여 아내에게 3분의 1, 아이들에게 3분의 1을 주고, 나머지는 자선사
업에 기부한 뒤, 멜로즈수도원에 가서 성직자가 되었다.
  그에게 일어났던 일은 이렇다. 한 천사가 나타나서 조용히 그를 북동쪽으로, "엄청나게 넓
고 깊으면서도 끝없이 긴 어느  계곡"으로 끌고 갔다. 계곡의 한쪽에서는  불길이 일어났고,
다른 쪽에서는 맹렬한 우박과 눈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양쪽에서 추한  영혼들이 고통받고
있었는데, 안내자는 드라이텔름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이것은 네가 생각하는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지옥이 아니다." 그리고 계곡의 먼 발치가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거대한 검은
불꽃 여러 개가 악취나는 구덩이에서 불쑥 솟았다가 다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각각의
불꽃은 인간의 영혼들로 가득차  있었다. 드라이텔름은 뒤쪽에서  애처로운 탄시고와 함께[
간드러진 웃음 소기를 들었다. 거기서는  악령들 한 무리가 또 다른  영혼들을 어둠 속으로
끌어가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서 드라이텔름은 성직자 한 사람, 평신도 한 사람, 여자 한 명
을 발견했다. 몇몇 악령들은 그를 보자마자 벌겋게 달아오른  부지깽이를 들고 그에게 달려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드라이텔름에게 닿기 전에 그의 안내  천사가 암흑 속에서 혜성같이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겁주어 쫓아버렸다.
  천사는 드라이텔름에게 일종의 엘뤼시온 들판을  보여 주며 그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은 하늘의 왕국이 아니다."하고 말했다. 그러고 넛 진짜 천국을 보여 주었다. 천사는 그들
이 지나온 계곡에 대해 "죽을  때까지 고백과 회개를 미루던 영혼들을  재판하고 처벌하는"
연옥과같은 장소라고 설명했다. 또한 영혼들은  심판의 날이 되어서야 구원을 받게  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의 기도가 그런 구원  과정을 앞당길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물론 그 구덩이
속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저주받는 자들이었다 .이번에도 베데는 목격자를 등장시킨다 .수도사
인 헴길스는 동료 드라이텔름이 종종 목까지 차는 얼음물 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
했다. 드라이텔름은 얼음물 속에서 "나는 이보다 더 혹독한 추위도  겪어 보았다."고 말했고
한다 .
  존경을 받으며 광범위하게 읽혀지고 있는 이들 세 작가는 서구 환상문학의 정통을 확립하
고 발전시켰다. 사람들은 이들의 환상문학을 마치 순수한 꿈처럼, 또는 열병에 걸렸을 때 보
이는 선명한 색깔의 생생한 꿈철머 믿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들 중 베데가
더 잘 발전시킨 세부를 보면,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가는 불타는 궤의 이미지를 끌어내고 있
는 [테스페시오스의 환상]의 사본이 영국에까지 전해진 것이 아닐까하는 짐작이  든다. 퍼세
우스가 문신을 새겼다거나, 극한 추위를 참고 있는 모습은  베데가 기적극의 상투적인 수법
을 따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베데는 또한 임종을 맞은 어느 병사가 환상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영혼들이  제각
각 현세의 행실을 담은 '회계 장부'를 들고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레
고리우스 1세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를 소개한 적이 있지만,  베데가 들려 준 것만큼 상세하
지는 못하다. 베데는 위대한 전통의 창시자라  할 수 있다. 환상문학의 예들이 유럽  전역에
남아 있지만, 그 중에서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나온 작품들의  내용이 가장 풍부하고 상상
력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1149년에 아일랜드 수도사가 쓴 [툰달의 환상]이다 .이 책은  최소
한 15개 언어로 필사되었고, 필사된 사본만도 현재 거의 250권이나 남아 있다. 그 중 한  사
본은 시몬 마르미온이 11개의 지옥 장면을 그려넣은 완전한 삽화판이다. 환상문학에서 이런
삽화가 들어 있는 작품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중세의 성무 일과서들 중
에서 갖아 유명한 작품인 [아주 풍요로운 시간]에는 - 이것은 1413년경 베리 공작, 장의 위
탁을 받아 림부르크 삼형제가 그린 것이다. - 툰달의 지옥을 그린 세밀화가 들어 있다.
  왜 툰달의 모험이 그렇게 인기였을 까? 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툰달]은 기법적으로 뛰어
난 작품이다. 따라서 12세기에 이르러 성직자와 평신도 양쪽에서 이것을 순수하든 통속적이
든 본격적인 문학 장르로 평가했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성서 이후에 고대 스칸
디나비아 말로 번역된 첫번째 책이 [툰달]이었다. 환상 이야기들이 대체로  비슷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대 독자들은 지루하게 느낄지도 모르지만,  한 번에 하나의 이야기만
읽거나 들었던 중세 독자와 청중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게다가 [툰달]은  지루하게 느낄지
도 모르지만, 한 번에 하나의 이야기만 읽거나 들었던 중세 독자와 청중에게는 문제되지 않
았다 .게다가 [툰달]은 그 아류작들보다 더 풍부한  장면과 괴물과 매력이 있었다. 주인공은 
미남의 아일랜드 기사로서 호감이 가는 건달이었다 .그는 교회에 헌금을 하는 대신, 그 돈으
로 '재담꾼, 음유시인, 어릿광대'들과 어울려 지냈다. 지하세계를 방문한 대부분 사람들이 구
경만 하고 돌아온 것과 달리 그는 엄청난 형벌들을 직접 체험해야 했다.
  [툰달의 환상]은 저녁 식탁에서 시작된다. 툰달은 같이 있던 친구에 데힌 노여움을 억누르
려고 애쓰다가 발작을 일으키고 졸도한다. 그 뒤로 이틀 동안 그는 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 순간 육체를 떠난 툰달의 영혼에게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무시무
시한 마귀 떼거리가 나타나 툰달 자신이 애창하던 노래를 멋대로 개작하여 소름끼치는 목소
리로 끽끽거리며 불러댔고, 이를 갈며 툰달에게 다가오더니, 손가락으로 자신들의 볼을 양쪽
으로 잡아늘인 채로 이렇게 외친다. "좋은 시절 어디 보내고 이제 왔느냐? 어여쁜 소녀들은
어디에 있느냐? 네 오만함은 어디로 갔느냐?"툰달의 영혼은 겁에  질려 굳어 있다. 그때 갑
자기 천사가 등장한다 .그가 전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수호천사였다 .이  수호천
사는 만일 그가 여전히 뉘우치지 않는다면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  주겠다고
한다. 천사 때문에 툰달을 건드리지 못하게 된 마귀들은  괴성을 지르며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한다.
  툰달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석탄들로 가득찬 협곡을 가로질러 놓인 석쇠 위에서 지글거리
며 타고 있는 살인자들을 본다. 계곡 한쪽의 산은 불타고 있고, 도 반대쪽 산은 눈과 얼음으
로 뒤덮여 있다. 양쪽 산 사이에는 우박이 내리고 있으며, 마귀들이 신앙이 없는 자들과  이
단자들(또 다른 판본에서는 첩자들과 반역자들)에게 쇠갈고리와 쇠스랑으로 온갖 고문을 가
하면서 혹사하고 있다.
  그 다음은 독기를 뿜어내는 깊은 계곡이다. 이곳에는 널빤지로 된 다리가 놓여 있는데,
 길이는 1,000피트나 되지만 폭은 겨우 1피트에 지나지 않는다. 거만한 자와 인색한 자는
모두 그 다리에서 떨어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툰달의 영혼은 천사의 도움으로 다리를 건
너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서 거대한 괴수 아케론과 만난다 .아케론의
눈은 불꽃으로 이글거리고, 큰 입속에는 큰 악마 둘이 기둥처럼 박혀 있었다. 그 괴수의 뱃
속에는 탐욕스러운 자들이 들어 있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툰달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가 있
는 것이 아닌가! 그의 수호천사는 사라져 버리고, 기다리고 있던 마귀들은 그를 광포한 사
자들과 미친 개들 그리고 뱀들에게 내던져 물어 뜯기도록 만든다 .그는 천사가 다시 나타날
때까지 불에 타고, 추위에 얼고, 악취에 질식하고, 악마들에게 뭇배질을 당한다 .툰달은 너무
쇠약해져서 천사의 치료를 받은 뒤에야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 시련은 굶주린 맹수들로 가득한 호수를 가로지르는 2마일 길이의 다리를 건너는
일이다. 그렇지만 다리의 폭은 한뼘 정도에 불과한데다가 온통 날카로운 못으로 뒤덮여 있
다. 도둑과 강도들이 그 다리를 건너야 하며, 툰달 자신도 거친 소를 몰고서 그 다리를 건너
야 한다 ."기억해 보라."천사가 말한다. "너는 친구의 소를 훔쳤지?"그렇지만 그것을 되돌려
주기는 했으니 큰 고통을 당하지 않을 것이야."라고 천사는 말한다.
  툰달은 운이 없게도 그 위태로운 다리 위에서 반대쪽으로 가는 영혼과 마주친다. 하지만
그는 어찌해서 다기 살아남게 되고, 천사가 그의 찢어진 발을 치료해 준다. 그리고 폭식가들
과 간음자들을 처벌하는  잔인한 프리스티누스의 둥근 솥 모양의 집으로 간다 .현세에서
툰달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아는 천사는 그에게 이곳의 벌도 경험해야 한다며 내버려 둔다.
   다음에는 쇠부리를 지닌 거대한 새가 등장한다. 이 새는 음란한 수녀들과 사제들을 삼킨
뒤 얼음 호수에 배설한다. 그 호수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모두 뱀을 낳는다. 툰달은 이  고통
도 경험해야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자세히 들을 수가 없다. 그 뒤  툰달
은 경사가 심한 비탈을 힘겹게 오랄.  불의 계곡에 도착한다. 거기서 악마들은 툰달을  활할
타오르는 집게로 붙잡아서 거의 몸이 시뻘겋게 될 때까지 불구 넣어 둔다 .그런 다음 20-30
명쯤 되는 악한 영혼들과 함께 모루 위에 놓고 망치질해서 그들과 한 덩어리로 만들어 허공
에 던져 버린다. 그런 뒤에야 천사가 다시 나타나 그를 구해 준다. 툰달과 천사는 이제 진짜
지옥을 향해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날뛰기 좋아하는 마귀들이  거대한 저수지를 '벌떼처럼'둘러싸고  '죽음의 노래'를 부른다.
저수지의 심연 속에서 한때 "하느님이 만든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력한 최초의 피조물"이었
던 루시퍼가 있다. 하지만 이제 루시퍼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까마귀보다 더 검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부리가 있고 뾰족한 꼬리가 달려 있다. 팔이 수천
개나 되는데, 각각의 손에는 손가락이 20개씩 달려 있고,  손톱은 기사들의 창보다 더 길다.
바로가 발톱도 비슷한 형상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손발 모두가 불행한  영혼들을 꽉 죄고
있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석탄 위에 놓인 쇠그물에 사슬로 묶인 채 누워 있다. 그 주변에는
엄청난 마귀 떼거리가 모여 있다. 그리고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입에 가득 들어 있던 불행
한 영혼들은 지옥의 고통 안으로 내동댕이쳐졌다. 그리고 숨을 들이 쉴때는 그 영혼을 다시
빨아들여 씹는 것이었다.
  이 불행한 영혼들 가운데는 툰달의 친구와 친척도 여럿 있었다 .시몬 마르미온은 그가 그
린 지옥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그로테스크한 사탄의 모습을  재현하고자 애썼다. 한편 림부
르크 삼형제도 그 장면을 충실히 보여 주기는 했지만, 수많은  팔과 다리에 대한 묘사는 모
두 어물쩡 넘겨버렸다 .림부르크 삼형제가 그린 사탄은 전통적인  뿔과 갈고리 발톱을 가지
고 있으며, 온천 휴양지 같은 곳에서 일광욕이라도 즐기고 있는 모습니다.
  다음과 툰달은 목초지같이 보이는 연옥으로 나아간다. 이곳에서는 악하긴 하지만 그 정도
가 심하지 않은 자들이 기아와 갈증과 폭풍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선하긴 하지만 아주 선하
지도 않는 자들은 활짝 개인  곳에서 만족스러워한다. 천국은 은색 벽  뒤에서 이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툰달과 천사는 천국도 방문하지만, 천국에서는  비교적 짧은 시간만 보낸다.
그리고 툰달은 비로소 "자신에게 육체가 입혀졌음을 느낀다."
  이와 동시에 툰달은 눈을 뜬다. 툰달은 성찬식을 요청해서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가난
한 사람들에게 준다. 그는 자기 옷 위에 십자가 모양을 수 놓으라고 명하고, 하느님의  말씀
을 전하기기 시작한다.
  정치적 성향을 띤 환상들도 있었다. 가령 9세기 슈바벤의 뚱보왕 카를은 아버지와 삼촌의
종교적 조안자들이 ('좋지 않은')충고를 했다는 이유로)끓는  역청에 담겨 있는 모습을 보았
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삼천과 사촌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죄를 정화하
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대비해서  카를 자신을 위해서도 부글거리고
있는 깊은 물통 두 개가 준비되어 잇는 것을 보았다. 이 환상을 교훈삼아 카를은 선정을 베
풂으로써, 자신에게는 끓는 물통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납득하게 했다.
  랭스의 힌크마르느 베르놀트이야기를 전해 준다. 이것은 수많은 주교들과 대머리 왕 샤를
이 대주교 힌크마르의 탁월한 조언에  귀기울이지 않았다가 고통받는 모습을  베르놀트라는
사람이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명백히 힌크마르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다.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있는데, 그것은 에우케리우스라는 사람이  샤를마뉴의 할아버지인 샤를 마르텔
이 고문받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결국 샤를 마르텔 역시 좋은 충고(예를
들어 힌크마르 같은 사람의 충고)에 귀기울여야 했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샤를마
뉴 자신은 [베티의 환상]에서 지옥에  등장한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씌어진 [로차리우스의
환상]에서 샤를마뉴는 낙원에 등장한다.
  어떤 환상은 다른 문학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서킬의 환상에서는
한 영국인이 흑백 반점을  지닌 영혼들([테스페시오스의 환상]에서 영향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늘 등장하는 불, 늪, 못투성이의 다리, 솥 모양의 화로,  구덩이, 그리고 저울추를 얹은
천칭을 본다 .그는 또 계단식 좌석이 있는 광장도 보았는데, 그곳에서는 한  무리의 '군중'이
하얗게 달군 쇠테와 못으로 고정된  채 앉아 있었다. 다른 좌석에서는  악마들이 마치 극장
무대를 바라보듯 앉아서, 한 사람 한 사람씩 고문당하는 모습을 억지 웃음을 터뜨리면서 즐
겼다 .근처의 산꼭대기 성벽 위에서는 성인들도 서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서킬은 농부였
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의 환상은 과연 그가 농부였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세심하고
화려하다. 아마 누군가가 테르툴리아누스의 이야기를 그에게 읽어 주었거나 설교를 한 것임
에 틀림없다.
  [알베릭의 환상]은 단테도 읽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책이다. 세테프라티의 알베릭은  몬테
카지노에 있는 유명한 수도원의 수도사였다. 1115년경, 병에 걸려 9일 간 혼수상태에 빠졌다
가 깨어난  그는 동료  수도사 귀도네에게  자신이 경험한  환상을 받아쓰게  했다. 그리고
10~15년 후에 그는 다른 동료 수도사 피에트로 디아코노의 도움으로 그것을 재정리했다. 환
상 여행에서 알베릭은 적어도 세 명의 안내자들, 그의 영혼과 함께 날아간 비둘기는 빼더라
도, 성 베드로와 천사 임마누엘 그리고 엘리기우스를 대동했다. 불타는 가스 안에서  더러움
을 씻어내고 있는 아이들을 강조한 것을 빼면, 그는 지옥의 전형적 장면들, 다시 말해  안개
낀 협곡, 가시 돋힌 나무, 뱀 빨갛게 달군 사다리, 역청이 담긴 가마솥, 지옥불 화덕, 피바다,
끓는 금속 대야, 불바다, 불의 강, 폭이 좁은  다리들을 보앗다. 진기한 것으로는 유다, 아나
니아, 가야바, 헤롯, 그리고 가장  죄가 무거운 자들이 갇혀 있는  구덩이와 그 근처에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용과, 늙은 수도사를 처음으로 구덩이 안에  떨어뜨린 다음 닷 끄집어낸 거
대한 새 한 마리였다.
  중세 후대에는 일부 환상문학이 (때로는 풍자적인)문학적 우화로 바뀌었다. 1215년쯤 라울
드 우댕이 쓴 [지옥의 꿈]에서는, 꿈을 꾸고 있는 순례자가 우의화한 풍경 속을  여행하면서
'탐욕의 강'과 '절망의산'등을 지나간다. 이  작품에서 순례자가 빌라도, 바알세불과 함께  한
만찬 식탁에는 마늘 소스를 곁들여 구운 이단자와 싸움꾼들의  고기가 나온다 .그리고 순례
자는 사악한 음유시인들에 대한 책을 지옥의 왕에게 큰소리로 읽어 준다.
  좀더 진지한 내용을 다룬 것으로는, 플랑드르의 시인  얀 드르모트가 쓴 [지옥의 길과 낙
원의 길]이 있고, 150년쯤 흐른 뒤에는 [낙원으로 가는길] 이 영어로 씌어졌다. 우화적 몽유
시로 가장 유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윌리엄 랭글랜드의 [농부 피어스의 꿈]인데, 여
기서도 지옥정벌 이야기를 다시 거론하고 있다.
  4세기부터 14세기의 기간 동안 계속된 환상문학의 확산과 인기가, 오늘날 대중이 공포 영
화를 요구하는 거소가 똑같은 욕구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은 특별히 정신 분석가나 문학 비
평가가 아니더라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환상들은 또 다른 쟁점들을 반영하고
있다. 비록 지식인 개별 심판과 전체적 심판에 대한 논쟁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환상문학이
누린 인기는 보통 사람들이 - 주교와 왕을 포함하여 - 사후에 벌어지는 모든 일은 임종 뒤
에 즉시 경험하는 것이라고 믿었음을 증명해 준다. 이것들은 먼 미래에 대한 환상이 아니었
다. 그리고 죽음은 최후의 나팔이 울리는 부활의 시간까지 잠들어 있는 것이라는 관념은 결
코 찾아볼 수 없었다.
  연옥의 경우도 비슷하다. 비록 13세기 중반까지는  교회가 연옥이라는 개념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7세기 베데의 [드라이텔름]같은 초기의 환상에서 이미 암시한 것, 다시 말해 사후
에 일시적으로 정화의 형벌을 받는 시간이 있다는 생각은  환상가들뿐 아니라, 그것을 옮겨
적은 교양 있는 필사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뚱보왕 카를의  아버지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자마자 곧장 하늘로 올라갔다. 한편, 툰달과 알베릭의 시대에 이르러 연옥은  각
각 분리된 광대한 영역들을 갖게 되었다.
  연옥이 13세기까지는 교리화되지 않았음을 고려해 볼 때, 12세기의  한 이야기가 연옥 문
제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인상 깊은 일이다. [성 패트릭의 연옥]은 엄격히 말해 환상 문학
은 아니다. 그 이유는 아일랜드 기사 오언이 아이네이아스나 오르페우스 또는 테세우스처럼
살아 있는 몸으로 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죄의식으로, 특히 교회 재산을 훔친 것으로 고통스
러워하던 오언은 도니갈의 락  더그에 있는 스테이션 섬에 5세기경 건축된 수도원으로 가서
성 패트릭의 연옥을 방문했다. (지금까지도 여행객들이 방문하는) 그 섬의 한 동굴이 연옥으
로 가는 관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언은 거기서 하룻밤을 지새던 중, 불꽃
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빠르게 돌아가는 지옥의  수레바퀴를 보았고, 마귀와 괴물들을
만났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악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곳에서  빠져나온
오언은 헌신적으로 자선 사업을 벌였고 성지 순례도 했다. 1398년경 라몬 드 페렐로스는 오
언과 같은 경험을 하고자 카탈로니아에서 락 더그까지 갔고, 적어도 그의 말에 따르면 그도
오언과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성 브렌단의 항해]에서는 한 성인이 아일랜드 인들이 말하는 '임람'에 나선다 .'임람'은 항
해서 신밧드의 모험의 기독교판 시리즈다.  실제로 브렌단이 살았던 시기는  5~6세기였지만,
이 로망스(수많은 언어로 된, 최소한  116개의 사본이 남아 있다)가  씌어진 것은 10세기다.
이야기는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배 한 척에  올라타고 대서양을 향해 모험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느 섬에서 그들은 작은 흑인 소년으로 위장하여 한 수도사를 유혹하는 마귀 하
나를 만난다. 다른 섬에서는 영혼을 상징하는 한 떼의  새들이 루시퍼의 유혹에 빠져들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참회하고 있다. 세 번째  화산섬에서는 악마적인 대장장이가 수도사들에게
불타는 석탄을 내던진다. 다른 마귀들은 한 수도사를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결국 그
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속이 비어 있는 바위 위에 앉아 일요일 휴식을 취하고 잇는 가롯 유
다를 발견한다. 가롯 유다는 일주일에 6일 동안은 지옥에서 보내지만 일요일에는 그곳을 벗
어나 쉴 수 있다. 성 브렌단이 유다를 위해 특별 휴가 하루를 베풀어 준 것인데,  이 때문에
악마들은 대단히 약이 오른다. 프랑스 소설  [위옹 드 보르도]에서도 역시 바다  한복판에서
유다와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 유다는 '지옥의만'근처에서 돛단배를 타고  있다. 다른
프랑스 시 [세부르크의 보두앵]에서는 사라센 항해자들이 브렌단의 섬이 있는 곳으로 간다.
  대부분의 환상문학뿐만 아니라 임람과 로망스도 현실과  유리된 이야기다. 사실상 고문은
별로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고, 예전의 묵시문학만큼 외설스럽지도 않다. 그것들은 그저 이
야기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이따금  스웨덴의 성 브리지트처럼 황홀경  상태에서 지옥에
더욱 가까이 가는 일도 있다.
  악령의 발 아래에서 이글거리는 화로의 불은  마치 파이프를 통해 분출하는 물처럼  위로
솟아올라 머리 위에서 간헐천처럼 뿜어 나온다. 악령의 혈관에는 불꽃이 흐르는 것 같다 .귀
는 대장장이의 풀무처럼 머리 속으로 광풍을 불어놓고 있었다.  뒤집어진 눈은 머리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은 열려 있었고, 혀는 콧구멍을 타고 늘어져 입술 아래까지 걸쳐져 있었
으며, 송곳 같은 이빨이 턱에 빼곡히 박혀 있었다 .팔은  발 아래까지 닿고, 양손은 활활 타
는 역청을 쥐고 있었다. 피부는 생가죽을 뒤집어 쓴 것 같기도 하고, 정액이 흩뿌려진  아마
포 의복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음같이 차가운 몸에서는 곪아터진  궤양에서 나오는 고름 같
은 분비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이 세상의 것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악취를 풍겼다.
  고대 영어는 유럽의 여러 언어 중에서 가장 일찍 독자적인 문학을 이루어낸 언어다. 현존
하는 작품 대부분이 우리 가까이에 있는 제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독자들은 놀랄 필요
가 없다.[그리스도와 사탄]과 더불어 [창세A]와 [창세B]에서는 루시퍼-사탄의 전기를 제시하
고 있으며, [니고데모]의 초기 운문 번역도 있다. 이 시가들은  캐드몬학파에 속한 사람들이
지었다고 전해진다. 캐드몬은 우리가 알고 최초의 시인이다. 그는 원래 7세기의 농부이자 평
수사였는데, 천사의 환상을 통해  시적 재능을 얻었다. 일부  비평가들은 [베어울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작품이 규범적 문학으로 승격된 것은 전적으로 현대의 일이다.
  [창세 B]는 더 오랜 전통을 가진 [창세 A]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루시퍼과 반역천
사들의 타락 이야기들을 완성하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비슷해  보이지만,
B가 A보다 더 상세하고 봉건시대 특유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반란을 꾀하면서 헛된 영
광을 구하던 신하가 천국의 북쪽에서 왕권을 수립하자, 화가  난 하느님은 지옥을 만들어서
가신들과 함께 그를 던져 놓는다. 그들은 모두 마귀로 변한다. 여전히 상당한 지도자의 위치
에 있던 사탄이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하느님은    불공평하게 유
죄 판결을 내렸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아주 새로운 세계안에  경멸스런 한 쌍의 지상 피조
물을 창조하려는 더 불공정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사탄 자신은 지옥에 묶여 있지
만, 부하 하나를 뽑아 하느님의 계획을 전복하고자 시도한다. 부하는 아주 괴상한  방법으로
그 일을 진행한다. 마치 중세의 전형적인 기사처럼 그는 먼저 가정의 가장인 아다에게 접근
한다. 퇴짜를 맞자 그는 간교한 아첨조의 거짓말로 이브를 구슬린다. 작전이 성공하고, 그는
악마적 미소를 지으며 물러난다.
  [그리스도와 사탄]은 [타락천사들의 탄식] [지옥정벌][황야의 유혹]이라는 세 개의 장에 걸
쳐 사탄 이야기를 계속한다. 우선  [창세]의 사건을 대강 요약한 뒤,  그것이 원래 다루려던
소재로 옮겨간다. 사탄은 낙심하며 그들 모두가 이런 무시무시한  곳에 들어가게 된 운명을
개탄한다. 부하 마귀들도 큰소리로 외치며 불평한다. 인간을 지배해야하는 사탄의 자식은 어
찌될 것인가? 상황은 하느님의 아들이 모든 영광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인다(이 천국에서는
천사장 미가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전쟁을 지휘한다.)이 장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
으로 끝을 맺는다.
  [지옥정벌]은 [니고데모]를 따른다. [황야의 유혹]에서는 사탄이  (지옥에서 어떻게 탈출했
는지에 대한 언급도 없이)그리스도를 자신의 어깨 위로 들어올려 세상을  보여 주면서 자신
에게 충성하면 온 세상과 거기에 속한 재물을 주겠다고 한다. 게다가 자기에게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천국까지 주겠다며 유혹한다.  그리스도는 이 유혹을 일축하고, 사탄을  행해
지옥으로 되돌아가 직접 지옥의 깊이와 너비를 재어보라고 명령한다.  지옥의 크기는 각 방
향에서 십만 마일이나 되었다.
  이 시편들은 9세기 초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약 복음서의 정경으로 번역도니
또 다른 [니고데모]는 그보다 이전 것이었다. 10세기가 되면 에인샴의  대수도원장 앨프릭이
다시 한 번 사탄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서술하고, 거기에 적그리스도와 세계종말의 이야기도
보탠다. 14세기에는 윌리엄 랭글랜드가 [농부 피어스의 꿈]에서 그리스도의 지옥정벌 이야기
를 다시 언급하면서 그 이야기를 우화적으로  변형한다. 랭글랜드느 사탄과루시퍼를 구분하
면서, 후자에게 에덴 동산에서 ("여인의 얼굴을 한 뱀의 모습으로")이브를 유혹한 죄를 물어
책망한다. ㅡ리고 사탄을 악마와 동일시한다. 1610년 영국의 플레처가 쓴 [천상과 지상에 실
현된 그리스도의 영광과 승리는 천상에서 벌어진 전투를 새롭게 다룬 책이다.
  밀턴의 노트를 보면, 그가 일생의 대작을 위한 주제를 물색하면서 '영국적 비극'을 고려했
음을 알 수 잇다. 그리고 결국 그는 너무나도 영국적인 테마를 찾아냈던 것이다.
  북서부 유럽의 많은 종족은 보통 세 집단으로  나뉜다. '켈트 족 또는 갈리아 족'  '게르만
족 또는 튜튼 족' '스칸디나비아 족 또는  바이킹 족 또는 노르웨이 족'이 그것이다.  이것은
로마 인들의 분류법인데, 이주해 다니는  전사, 농업이나 어업으로 먹고 사는  부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분류였다. 그러나 어족들의 구별을 위해 편의상  이 이름들을 계속 써 왔
따.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켈트 족은  라인 강 서쪽의 종족을  가리킨다. 게르마니아라고 할
때는 라인 강과 다뉴브  강사이의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동쪽으로는 폴란드 비스툴라까지,
북족으로는 덴마크, 남부 노르웨이, 스웨덴까지 이르는 지역을  가리킨다. 바이킹 족은 훨씬
더 먼 북쪽에 있던 종족이다. 바이킹 족은 기독교로 개종한 마지막 집단이었던 까닭에, 우리
는 다른 족속들보다 바이킹의 전통적 종교와 신앙에 대해서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
러나 게르만 족과 켈트족의 신앙도 지역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대동소이했
던 것 같다.
  북부와 서부로 파견된 기독교 선교사들은  그레고리우스 1세의 정책에 따라 그들이  만난
다른 종교들과 대립하기보다는 포섭하는 정책을 폈다 .이렇게 해서 남은 개념들 중 '헬'이라
는 것은 어원상으로 스칸디나비아 족의 죽음의 여신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며, 하데스가 그
리스에서 신과 장소를 모두 뜻했던 것처럼, 그 여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말하는 것이기도 했
다. '헬리아'는 '헬'의 게르만 이름이다. 북쪽 지방에서는 그 낱말이 라틴  어인 인페르누스로
대체되었다(인페르누스는 로망스 어를 쓰는 나라들에서는 다시 조금씩 변형되어 사용된다).
인페르누스라는 말 자체도 원래는 그리스 어 하데스를 대신해 사용된 것이었다.
  바이킹의 지옥은 '니플헤임'이라 불렸다. 바이킹들은 세 계수 '이그드라실'의 뿌리 바로 아
래쪽에 있는 세상의 최   북단의 땅에 지옥이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쪽에는 거인
족의 나라인 '요툰헤임'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쪽에는 거대한 허공인 '긴눙가가프'를 가로질
러 화염의 나라 무스펠이 있고, 거인 수르트가 이곳을 통치하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미드가르드, 말하자면 중앙의 땅이었다. 12세기 아이슬란드 시인 스노리 스툴루슨의 [산문에
다]를 보면, 니플헤임은 헬의 최하층부로서 에레보스 또는 하데스의 바닥 없는 심연인 타르
타로스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타르타로스와 때같이 그것은 완전한 암흑과 부패와 불
모의 장소였다.헬과 니플헤임은 춥고 어둡고 메마른 망령의 땅이기는 했지만 형벌의 장소는
아니었다 .한편 나스트론드는 '사자의 해변'에 세워진 성관으로서, 그 입구는  모두 북쪽으로
나 잇고 지붕은 독사로 만들어져있다. 이곳은 사후에 고통받는 장소였던 듯한데, 죄인들보다
는 적들을 벌하는 장소로 보인다. 용, 특히 니드호그('시체를  먹어 치우는 자'라는 뜻)도 헬
과 연결되어 쓰였고, 또한 사자의 부장품과도 연결되었다.
  이 불쾌한 장소와 대조적인 곳이 어딘의 신전인 발할라였다.  발키리라 불리는 오딘의 시
녀들은 용감한 전사들의 영혼을 이곳 발할라에 데리고 와서 돼지 고기와 꿀술을 한껏 베풀
어 주고, 또 다시 맹렬한 전투를 계속하도록  했다(이것은 바이킹이 왜 그토록 무서운 공포
의 대상이었는지 보여 주는 천국관이다).그리고 켈트 족의 '티르 나 느옥'(영원한 청춘의 땅)
또는 웨일즈의 안벤과도 유사한 글라시스벨리르라는 곳도  있다. 이곳은 낙원이면서도 무시
무시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요정나라였다 .남자 손님들에게 시녀들이 시중을 드는 낙원은
발할라 말고 또 있다. 켈트 족에게는 '여성의 땅'이 있었고, 중세 게르만 족에게는 남자를 관
능적 세계로 유혹하는, 안개에 둘러싸인 베누스베르크가 있었다 .물론 중세 이슬람 교의  낙
원에 있는 검은 눈의 처녀들도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헬방문기는 전령 헤르모드의 이야기다.  그는 신들의 거처인 아스가르드에서
부터 다리가 여덟 개 달린 오딘의 말 슬레이프니르를 나는  듯이 몰라, 9일 동안 암흑의 계
곡과 높은 산과 깊은 강을 지나 교즐강에 도착했다. 거기서  다시 해골 처녀 모드구드가 지
키고 있는 '메아리의 다리'를 지나 그 강을 건넌다 .그는  북쪽 내리막 길을 따라 철의 숲으
로 간다. 그 숲은 날카로운 금속 잎사귀로 덮인 검은 나무들이 무성한 곳이다. 이 생생한 이
미지는 환상문학과 단테를 통해 계승된다.
  슬레이프니르는 '헬'에 도착해, 가슴이 피로 범벅이 된 사냥개 가름이 지키고 있는 발그린
드의 문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곳에는 거대한 가마솥 헤븐겔미르가 있는데, 그 가마솥에서는
사악한 자들(전쟁의 적들이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겠지만)을 삶고 있다. 그들은 큰
뱀 니드호그의 먹이가 된다. 거인 미미르가 굳건히 지키고 있는 우물에서는이상한 강줄기들
이 흘러나오는데, 그 중 하나인 얼음 강 슬리트는 칼과 창으로 가득차 있다(보쉬가 이 이미
지를 차용한다),그러나 북유럽 신화에서도 이야기가 다르면 이미지와 이름도 다르게 나타난
다. 오딘의 아들 발드르 이야기조차도 다양하게 변형된다. 한 이야기에서는 오딘이 그를  찾
기 위해 방랑자 베그탐의 몸을 하고 '헬로 가고, 다른 이야기에서는 실제로 발드르를 죽이게
되는 형제 호드르가 살해에 사용할 마술의 무기를 찾으러 '헬'로 가는 것으로 나온다.
  반은 검고(또는 썩어가고 있고)반은 살색을 띤 여신 '헬'은 로키의 딸이다. 로키는  사탄과
비교되기도 하고, 프로메테우스에 비교되기도 할 만큼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프로메테우
스와 마찬가지로 로키는 엄밀히 말해 신이 아니며, 거인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전적으로  사
악하지만도 않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그의 명성에 누명을 씌운 것으로 보인다.       본래
그는 책략가, 재담꾼, 도둑이었으며, 성전환의 대가였다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는 '헬'
의 어머니이 뿐 아니라 늑대 펜리르, 팔각마 슬레이프니르, 그리고 세계를 칭칭 감은 거대한
뱀 미드가르드의 어머니였다.
  로키는 그리스 신화의 아티스 또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두무지에 해당하는  노르웨이의
미소년 발드르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헤르모드는 니플헤임에서 발드르를 찾으려고 했으
나 실패했다. 사탄과 프로메테우스처럼 로키는 조리를 진 후에 묶였다. 사탄처럼 그도  최후
의 날에 자유롭게 풀려나 라그나로크의 대격전, 다시 말해  신들과 거인들의 최후의 전투를
유발한다.
  라그나로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최후의 전쟁과 유사점이 있다.9세기 고고지 게르만 어로
씌어진 기독교의 묵시적 시편인 [무스필리]에서는 그 양자를 혼합하고 있다.  여기에서 늑대
펜리르는 전쟁터에서 적 그리스도와 사탄과 동맹을  맺지만, 엘리아스가 이끄는선의 군데에
패배한다. 수르트와 무스펠의 아들들은 기독교 이전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지상을 제압한다
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명백히 인정한 것은 아니다.
13세기 노르웨이 시 [꿈의 노래]는 그 이미지들이 북유럽적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전형적인
환상문학에 속한다(이처럼 운문으로 씌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언제나 등장하는, 악취
나는 수렁 위의 다리는 명백히 '메아리의 다리'이다. 그  다리는 날카로운 고리를 가진 적색
과 황금색의 첨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뱀(또는 용), 개, 황소가 지키고 서 있다. 이런 세부
묘사를 빼면 줄거리는 아주 상투적이다.
  켈트 족의 종말 신화를 명확하게  재현하기는 어렵지만, 그 내용은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며, 영혼 재래설을 포함하고 있다. 로마 인들은 켈트 족이  전쟁터에서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평했다. 돈이라  불린 지하
세계의 신이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려진 것이  거의 없다. 또'모신들'이라 불린 수수께
끼 같은 게르만 족의 3인조 지하세계 여신에 대한 자료 역시  그리 많지 않다. 괴테는 수세
기 후에 만화경 같은 지옥도 안에서 이 여신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 '저 세상'은 멀리 떨어져 있거나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러나 켈
트 족과 게르만 족은 어느 정도 우리 인간세계와 혼재하는 정령들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
었다. 거인, 도깨비, 트롤, 꼬마  요정, 난쟁이, 악귀, 브라우니, 요정,  작은 요정, 물의 요정,
아일랜드의 시드, 노인의 요정, 늑대 인간 또는 곰 인간 그리고 흡혈귀등이 나오는 설화들은
- 이런 피조물들은 저 세상에 나타나기도 하고 우리가 사는 세계에 출현하기도 한다- 지금
도 수없이 많이 남아 있다. 그 피조물들은 기독교 세계에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 그 중 일부
는 기독교의 마귀로 변한 것도 있다. 그 결과 원래의 요정이 갖고 있던 악마적 신분이 '꼬마
도깨비'정도로 약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꼬마 도깨비는 '장난꾸러기 꼬마'만큼도 악하지 않은
존재였다.
  로마 제국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도시, 무역로, 해운, 화폐 주조, 노예제를  바탕으로 한
국제 경제, 중앙집권적 군대 등을 떠올린다. 기독교의 비잔틴 제국이 이런 형태를 계속 유지
하고 있었지만, 서방의 성장은 그렇지 않았다 .지방 영주들이 광활한 농토와 숲을  경영하는
분산된 정부 형태인 봉건주의는 중세의 특징이었다 .세금문제, 법률 문제,  종교문제, 자선을
베푸는 일, 그리고 일상의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이들 영주들이 관리했다. 인류학자들은  이
런 구조를 인위적 친족 구조라고 불렀다 .중심에는 종족의 지도자로서 모든 이의 충성을 다
짐받는 '아버지'인 영주가 있었다. 높은 귀족들은 자신들의  광활한 토지 한가운데 거대하게
자리잡은 성 안에서 생활했으며, 무장한 기마 부대와 가신들이 함께 살았다 .농사를 짓던 많
은 수위 노예와 농노들은 기술 노동자와 함께 영주의 땅에서 생계 수단을 얻는 대가로 부역
을 했다.
  수도원들은 세속적인 봉건 체계를  그대로 수용했다. 대수도원장은  영주, 수도사는 가신,
평수사는 종과 같았다. 수도원장이 교황에게 더 큰 충성을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주는
왕에게 공식적인 경의를 표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천국의 계층 구조를 봉건제도의 양식대로 묘사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천국의 독자적 영주인 신이 있고, 사도들이라는 수행원을 거느린 왕자가 있고, 동정녀  마리
아는 영주 부인과 같이 여겨지고, 성인들은 일족의 장로들이 되는 셈이었다. 천사장  미가엘
은 제1의 기사로서, 몸에 갑옷을 두르고 창을 휘두르며 뒤에 정렬해 선 천사 부대들과 함께
종종 등장한다. 루시퍼가 타락했을 때, 그는 자신의 기사들을 대동했다 .단테가 묘사한 디스
시의 성은 담으로 둘러싸인  실제 중세도시의 모습이고, 흉벽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것으로
묘사도니 반역천사는 깡패 기사 또는 배반자를 그린 것이다.
  루시퍼의 죄, 다시 말해 높은 자리에 있는 신하가 왕에  대한 서약과 충성을 저버리는 것
은 중세 시대에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봉건 체제에서 배반이란 크나큰 죄였다
.국제적인 교회와 각 지역 국가의 연대 위에서 엄격하게  유지되던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체
제 하에서는 영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종교 교의에 대해서도 서약을 지키는 것은 지상 명
령이었다. 단테의 [지옥편]가운데 최하층부인 제9환은 반역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사탄을 제
외하면, 신의 없는 자들 중 가장 악질적인 사람은 유다였다. 그는 충성의 입맞춤을 하고서도
자신의 명예와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또는 사라센 사람들을 부르는 일반적 표현은 '불신자',즉 믿음이 없는 자라는 말이
었다 .그들은 유대 인들이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지 못하는 단순한 이교도들보다도 더  나
쁘게 여겨졌다 .유대 인들은 나름대로 성서를 가진 사람들인데다가, 신약성서 주신의 신앙에
서 멀어진 데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단한 인기를 누린 프랑스 기사 무훈시 [롤랑의 노
래]에서도 이슬람 교도들은  거의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사탄의
종'으로 보았으며, 이슬람 교도들 역시 기독교인들에게 같은 식으로 되받아쳤다.
  파우스트와 악마의 계약 이야기는 크리스토퍼 말로우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거
기서 악마가 요구하는 것은 충성이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라, 그리하면 네게 명예, 권력,  행
운,재산, 말하자면 초대 기독교인이 하느님과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바라던 모든 것을 주겠노
라고 악마가 말한다. 계약을 맺는 사람은 암흑의 주의 엉덩이에 경의의 입맞춤을 하는 것으
로 추측되었다.
  중세 교회가 강조한 끊임없는 지옥의 위협에 대해 보통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성직자들이 관련 문서를 독점했기 때문에, 극소수의 단서로 평신도들의 태도를 추론할 수밖
에 없다. 15세기에 프랑수아 비용은 어머니를 위해 [성모께 드리는 기도]를 썼는데, 그가 묘
사한 어머니의 감정에 많은 사람들 아니 대부분의 중세 사람들은 공감했을 것이다. 그는 어
머니의 감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저는 일자무식에다 아는 것 없는
  늙고 가난한 여자입니다.
  제가 예배를 드리는 교구 교회에는 하프, 류트와 함께 낙원이 그려져 있고
  지옥에는 저주받은 자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하나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지만
  다른 하나는 저를 공포에 떨게 합니다.
  위대한 여신이시여, 제게도 그 즐거움을 주소서.....
  그런데 비용 자신은 지옥을 믿었던가? 설혹 믿었다 해도, 그것은 비용이 악행을 거듭하는
데 아무 방해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리 큰 죄를 지어도 임종할 때 죄를 뉘우치면 사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비용은 (교회 재산을 훔친  것으로 유명한)전문 도둑이었고, 호색가이
며, 싸우다가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그는 종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엠마뉘엘
르루아 라뒤리는 [몽타이유]에서 15세기 초의 프랑스 이단자  촌락을 생생하게 재구성해 보
여 준다. 거기에 나오는 농부 중 한 사람인 래몽 드 래르는 그의 이웃들과 마찬가지로 성직
자를 적대시했을 뿐 아니라, 예수와 관련한 기적은 물론 내세의 존재도 단호히 부정했다. 그
가 좀 유별난 사람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만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
다. 그는 악마가 불행을 몰고 온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 이유는 그것이 가장 타당한  논
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상당히  논리를 따지는 사람이었던 듯하다 .이웃들은  관습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의 태도에 심한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들은 다양한 내세관에  흥미가
있었던 것이다.
  15세기는 상당히 최근의 일이라고 반론할 수도 있을 수  잇다. 그러나 6세기 투르의 그레
고리우스는 내세를 믿지 않는 어떤 남자 이야기를 전해 준다. 그리고 12세기의 프랑스 로망
스[오카생과 니콜레트]도 있다. 주인공은 애인에게 구애하면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된다고 위
협받고서, 이렇게 대답한다.
  낙원에 가서 뭘 하겠나? 내 사랑 니콜레트가 없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네. 낙원에는 기
껏해야 다음과 같은 사람들만 있겠지, 하루 종일 제단 앞이나 오래된 지하 예배당에서 허리
를 굽혔던 늙은 사제들, 낡은 외투 자락과 넝마 조각을 질질 글고 다닌 불구의노인들,  알몸
과 맨발에 기아와 갈증과 추위와 고통으로 죽어간 이들, 그들은 낙원으로 가지만, 나는 그런
자들과 아무 상관이 없어. 나는 지옥으로 가고 싶다네.  왜냐하면 잘생긴 성직자와, 마상 창
시합과 격렬한 전투에서 죽은 기사들, 그리고 선한 관리와 귀족이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지.
나도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네. 그리고 그곳은 남편 말고도  두세 명의 애인을 가진 아름답
고 우아한 부인들, 금과 은을 두르고 모피를 걸친  이들, 하프 연주자들과 곡예사들, 그리고
왕들이 가는 곳이지. 사랑스런 니콜레트와 함께라면 나는 그들과 함께 갈 것이네.
이런 식의 감상은 매우 친숙한 것인데, 이것은 교회의 통치가 절정에 이르렀던 12세기에 나
온 것이다.
  이들 몇몇 단서들과 구제하기 힘든 범죄에 대한 끊임없는  경고들을 보면, 중세에도 꽤많
은 사람들이 내세의 상벌에 대한 정통적 시각에 회의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도전적인  생각
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아 있는 문헌들 대부분은 이와 반대되는 증거들을 보
여 주지만, 그런 문헌들의 기록자는 결국 성직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지옥은 성직자들의 강력한 무기였다. 그들만이 영혼을 구제할 수 있는 침례의식과 사면식
을 주관하도록 위임받았기 때문이었다. 교회에는  파문하고 정죄할 수 있는 권위가  있었다.
그들은 영혼을 지옥으로 보낼 수 있었다. 설교단에서는 암흑과  불과 악취와 악마와 사탄을
상기하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성직자는 또한 고해실에서 죄를 없애야 한다는 명목으로 고행을  명할 수도 있었다. 아일
랜드의 어느 고해 규정집을 보면,  365일 주기도문 암송하기, 365일  무릎꿇고 예배 드리기,
'일년 내내 매일 고통을 참아가며'365일 스스로 채찍질하기  등, 죄지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
한 고행이 정해져 있었다. 각각의 죄에 대한 고행을 열거하는 것은  더 일반적이었다. [양심
의 가책]과 [The Agenbite of Inwit(이것  역시 '양심의 가책'이란 의미)]과 같은 인기  있는
설교집에서는 '열네 가지 고행the 14 peynes'과 귀청을 찢는 듯한 지옥의 '대음향dyn'을  열
거하고 있다.
  [규범집]은 설교를 더 생생하게 하기 위한 도덕적 일화모음집이었다. 불어로 된 어느 규범
집을 보면, 부모를 잃은 뒤 많은 유산을 제멋대로 쓰던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소
녀는 지옥에 있는 어머니를 보았는데, 어머니는 하루 500번  화형당한 뒤 얼음물 속에 담겨
파충류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천국에서 아버지를 만난 후에 그 소녀는 선
한 삶을 살게 된다.
  12세기 초에 씌어져 그 뒤로 널리 사요오딘 설교 자료인 [엘루시다리움]에는 오툉의 오노
리우스가 그린 2개  지옥 그림이 있다. 상층부 지옥에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경험하는 고통
들이 지속되고 잇고, 하층부 지옥에는 사람들이 지상에서 경험하는 고통들이 지속되고 있고,
하층부 지옥에는 악한 영혼들이 겪는  아홉 가지 고통들이 간략히 그려져  있다. 아홉 가지
고통이란 꺼지지 않는 불, 견딜 수 없는 추위, 벌레와 뱀, 역겨운 냄새, 몽둥이 질 하는 악마
들, 공포에 휩싸인 암흑, 괴로운 모멸감, 섬뜩한 광경들과 소리, 시뻘겋게 달군 족쇄였다. 또 
악한 영혼들은 등을 맞대고 거꾸로 뒤집혀 손과 발을 잡아  늘리는 고문을 받는다. 악한 영
혼들이란 뽐내는 자, 시기하는 자, 교활한 자, 경건하지 않는 자, 폭식가, 술고래, 호색가, 살
인자, 잔인한 자, 도둑, 약탈자, 노상 강도, 음란 한 자, 탐욕스러운 자,  간음한 자, 거짓말쟁
이, 위증자, 불경스러운자, 불량배, 독설가, 싸움꾼을 말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그들
의 가족은, 그들의 괴로움과 고통을 '저수지에서 물고기가 솟아 오르는 것'을 바라보듯 재미
있게 구경할 것이다.
  레겐스부르크의 베르톨는 14세기의 가장 뛰어난  설교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앞으로
구원받을 사람은 십만 명 중 한명밖에 안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나머지 9만  9,999명에게는
사태가 더욱 가혹해질 최후  심판의 날까지, "백열의 우주안에서  몸부림치는" 자기 자신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그들은 "태초부터 살아 온 모든 짐승에게서 자란 몸의 털의 개수"만큼
수많은 고통이 계속되는 것은 상상할 수 있었다.
  우의적인 중세 후기의 설교들은 흔히 죄악으로 가득찬 도성의  모습을 상기해 주었다. 그
도성을 지키는 수석 기사는  '분노'이고, 금고 당당자는 '탐욕'이며,  요리장은 '폭식', 그곳의
의전관은 '타내', 성주와 마님은 '자만'과 '정욕'이었다.[중세  영국의 문학과 설교]을 쓴 오스
트는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의 원천이 된 설교문의 원본을 14세기 필사본에서 발견했다.  이
에 따르면 번연의 '절망의 수렁'은 사실상 순례자가 그가  죄의 자루와 함께 떨어지는 '지옥
의 수렁'이다. 또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와 최후 심판의 날에 부자가 어떤 운명을 맞게  되는
지 강조하던 웅변가들은 중세 말기의 사회에서 소작농들의 불만을 저장하는 데 한 몫을 담
당했다는 점을 오스트는 시사하고 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심판의 날은 너무나 먼 훗날의
응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성직자들의 설교는 엄청난 드라마를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 주었고, 더 나아가 수도사들이 행한 야외 설교는 진일보한 형식을 낳았다. 그것은 바로
드라마 그 자체를 말한다.

    15 성사극

  초기 교회는 로마의 활발한 연극 전통을 탄핵하고 금지한 뒤,  예배 중 라틴 어로 교창하
는 부분에 초보적이 형태의 성극을  창안해 도입했다 .이교도의 사상이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시기에, 교회는 배우, 대화, 줄거리를 갖춘 본격 드라마로 문맹인 대중들에게 다가서
성서를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교회는 이같은 취지에서 교회를 장식하는 회화적인 요소들(조
각품, 회화, 스테인드 글래스등)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기독교 축제 때 행하던 연극을 일컫는 '성사'라는 말은 어원을 따지면, 라틴  어의 '미니스
테리움',다시 말해 '성무'에서 나온 것이다 .아주 초기에는  교회 안에서 도덕적 교훈을 강조
하는 단막극을 예배 절차의 하나로서 상연했다. 이 단막극들은  곧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
작했다. 종교적으로 고무된 이 드라마 전통은  10세기경부터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참신함을
더해가며 꾸준히 성장했다. 축제일에는  음악가, 무용수, 마술사나  다른 재주꾼들이 경연을
벌이기도 했다.
  12세기에 공연되던 극들도 몇 편이 남이 있지만, 많은 것들이 소실되었다. 그러한  연극들
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영국까지 유럽  전역에서 상연되었고, 차츰  지방별로 다듬어지면서
천지창조에서 최후의 심판에 이르는 세계 역사를 관통하는 이야기  군을 다르게 되었다. 영
국에는 그러한 이야기 군 네가지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 중 요크 군,  체스터
군, 웨이크필드 군, 이 세가지는 상연되던 지방 이름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헤
게군 또는 엔 타운군 또는 루두스 코벤트리에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탈리아에는
남아 있는 중세 연극이 없지만, 프랑스, 스페인,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에는 다
수의 극들이 전해오고 있다.
  독일 남부의 오베람메르가우에서는 1643년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예수의 고난을 다룬  수
난극을 공연해왔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종교극 상연이 중단되었
음을 생각해 볼 때, 이 수난극이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이 극은
나치 치하에서 잠시 중단되었을 뿐이다. 이 수난극에는 대사가 있는 배역만 해도 124명이나
되며, 군중 장면에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분장을 하고 나온다. 가히 마을 사람 전체가  동
원되며, 그 장면을 한 번 공연하는데 무려 여덟시간이나  걸린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오베
람메르가우 수난극은 그 대본이 수세기 동안 여러 차례 근본적으로 수정되었기 때문에 중세
당시의 극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중세극의 규모가 어떠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성사극은 항상 그처럼 공들여 상연된  것도 아니고 또 항상 그렇게  세속적이지도
않았다 .일례로 영국의 어느 수녀원에서 상연된 [지옥정벌]이라는 전례 공연은  아주 소박하
지만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그 내용은 구약성서의 족장들역을 맡은  수녀들이 예배실 문 뒤
에 갇혀 있다가, 사제가 훈계의 대사를  읊은 뒤 문을  문을 활짝 열면  수녀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라틴 어 찬가를 부르면서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중세 후기에는 성직자들이 직접 극에  출연하는 일이 사라졌다. 큰  도시에서는 상인들의
여러 길드가 연합하여 공연 책임을 맡고 점점 더 세련된  연극을 만들어 냈으며, 각 조합은
각자의 공연 장소를 구해 놓고 독자적으로 단막극을  만들었다. '지옥정벌'이야기를 다룬 극
을 주로 요리사나 빵 굽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불을 능란하게 다룰
수 있어서 지옥의 불길을 가장 잘 연출할 수 있었고, 고문 도구로 쓰일 많나 가마솥이나 서
로 부딪쳐서 갖가지 음향 효과를 내는 냄비나 프라이팬을 쉽게 조달할 수 잇기 때문이었다
.
  시끌벅적한 지옥 장면에서는 계속 엄숙하게 진행되던  극이 희극적으로 이완되었다. 시간
이 흐르면서 그 희극성은 점점 더 저속해졌고, 악마의 방귀 소리는 더 자주 들려 왔다. 비평
가들 중에는 말로우의 [파우스투스 박사]에 나오는 마귀들의  소란스런 난장판 장면에 대해
서, 그 부분은 다른 이류 극작가가 썼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저속한  악마
극은 수세기의 전통을 이어왔고, 말로우 역시 관객의 환심을 사야 했을 것이다.
  성사극 공연에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부분은 뭐니뭐니해도  지옥 장면이다. 초기 성사극에
서 천국 장면을 위해서는 사다리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옥 장면만큼은 초창기에도 아
주 세심하게 연출했다. 12세기의 [아담의 신비]를 보면 쇠사슬, 연기, 가마솥이 달그닥거리는
소리, 큰 북 소리 등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동시대의 또 다른 작품으로, 앵글로 노르
만 어로 쓴 [성인의 부활]은 무대 한쪽에 감옥을 만들어서 림보를 표현했고, 예수는  거기서
구약의 족장들의 영혼을 구원한다 .후기 작품들에는 불꽃, 화약, 불타는 유황, 대포, 모조 독
사, 두꺼비까지도 동원되곤 했다.
  제작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부분은 역시 지옥의 입이었다 .화가들은 진작부터 말 그대로
'지옥의 아가리'를 그렸고, 무대 연출자들은 거기서 한 술 더 떴다. 목수들은  목재나 딱딱한
종이, 옷감, 반짝이는 소대 등 온갖 재료를 써서 괴수의 머리를 만들었고, 그것을 무대의 뚜
껑문 위에 설치했다. 지옥의 넓은 아가리에는 경첩을 달고  권양기와 밧줄을 연결하여 자유
롭게 열고 닫을 수 잇게 했다. 또 그안에서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고약한 냄새와 비명 소리
가 새어나오게 하여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어떤 경우에는 진짜 고래의 턱뼈로 지옥의 입을
만들기도 했다.
성당이나 마을 광장 주변에는 대개 극 전체를 상연할 수  있는 정해진 장소가 있었다. 그런
곳에 무대를 설치할 경우 지옥의 입을 아주 크게 만들고 그 안에서 연기를 할 때도 있었다.
어떤 공연에서는 입 안의 공간이 좌우 3미터 가까이 될 때도  있었다 .그렇지 못할 때는 뚜
껑문 위에 설치된 지옥의 입 옆에서 연기하기도 하고, 또는 무대보다 낮게 바판을 설치하고
장막으로 가렸다가 필요할 때만 장막을 걷고 그 위에서  연기하기도 했다. 단막극들은 때로
유랑하면서 상연하기도 했다. 15세기 플아스의 부르즈 지방에서는 수레 위에 이동식 무대를
꾸며 놓고 행렬하면서 공연하는 야외극, 이른바 패전트(이동 무대)극이 있었다 .공연 행렬의
선두에서는 한 무리의 악마들이 소란을 피우며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뛰어 다녔다.
악마들이 소란을 피운 뒤에 지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는 4미터를 넘고, 폭은 2미터 50센
티미터가 넘는 거대한 바위 형상의 지옥 위에 끊임없이 불을 뿜는 탑이 돌출해 있고, 그 화
염 속에서 루시퍼가 상체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루시퍼는 번쩍거리는 장식이 달리 곰가죽과,
온갖 색깔로 꾸민 가면이 두 개 달린 털가죽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루시퍼는 계속하여 입
에서 불을 토해내고, 양손에 쥔 뱀과  살모사들이 불을 머금고 요동친다. 바위 네  귀퉁이에
솟아오른 네 개의 작은 탑 속에서 영혼들이 고통받는 광경이 보인다. 바위 앞쪽으로 무지막
지하게 생긴 무서운 뱀 한 마리가 휘익 바람 소리를 내면서 목구멍, 콧구멍, 눈으로 불을 토
해낸다 .바위 주위에는 온통 징그러운  두꺼비와 뱀들이 우글우글거린다. 이것은 무대  장치
안에서 각기 역할을 나눠 맡은 사람들이 고역을 참아내야만 제대로 연출할 수 있었다.
  대부부의 극은 이처럼 성대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헌의 기록으 보더라도 이 지옥 광
경을 연출하는 데에 마을 사람들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최근 독일의
한 문헌에 따르면, 그 극들에는 "기괴하고 화려한 모습을 한 악마들이 많이  들어있으며, 그
것을 위해 막대한 독과 노력이 들었다."고 한다.
  '지옥의 입'으 대개 세계사의 시작과  끝 부분에서만 필요했지만, 덩치가  너무 커서 쉽게
옮길 수 없었을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공연 내내 그 자리에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옥
의 입은 언제라도 지체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천지창조를 위한 무대 설치는 아무리 생각해
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나 하늘 높은 것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로 그것을 대
신했다. 그리고 하느님이 일곱 번째날을  안식일로 선포하면서 무대 뒤로  사라지는 형식을
취했다. 이어서 루시퍼의 타락으로 극을 시작했다.
  루시퍼는 요란하게 치장하고 감히 하느님의 옥좌에 앉아 호령을 한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에 따라 둘로 나뉘어, 사탄을 추앙하거나 아니면 사탄의 행각에 전율한다.  둘로
나뉘어, 사탄을 추앙하거나 아니면 사탄의 생각에 전율한다. 그러나 사탄은 마침내 추방당한
다. 요크 지방에서 상연되던 이야기 군을 보자.
  아! 애통하다! 모든 것이 땅에 떨어졌다.
  내 능력, 위대한 힘은 다 어디로 갔는가.
  땅에 떨어져 버렸으니, 부하들이여 이를 어찌하랴.
 
  그리고 악마는 '부하천사들'을 이끌고  지옥의 입구로 들어간다.  루두스 코벤트리에 군의
극에서는 다음과 같이 연출된다.
 
  이제 지옥길로 가노라
  끝없는 고통의 구덩이로
  불길에 놀라 나는 방귀를 뀌노라.
 
  루시퍼 역할은 상당히 위험했다. 입으로 불길을 뿜어야 하고, 양손에 폭죽을 들고 또 등에
도 폭죽을 달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마의 가면과 의상 안쪽에는 화상을 피하기
위해 진흙을 발라야 했다.
  그 장면이 무사히 끝나면, 루시퍼는 곧장 (때때로 밀턴의 [실락원]에서처럼 마귀들의 회의
장면을 삽입한 후에)에덴 동산의 유혹 장면을 위해  지옥의 입에서 나온다. 이 부분에서 루
시퍼를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많은 의상이 필요하다. 배우는 가면이  달린 뱀 모양의 의상을
들고 나오거나 또는 반쯤 걸치고  나온다. 아담과 이브를 유혹한 뒤  악마들은 천사 복장을
벗고, 기괴한 가면과 털이 숭숭난옷으로  갈아 입고 신나서 날뛴다. 악마들은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 앞부분가지 진행되는 성사극 전체 공연에서 가인과 아벨,  욥의 이야기 등의 장면
에도 중간중간 등장한다. 사탄은 그리스도를 유혹하는 장면을 위해서  또 다른 모습으로 세
번째 변장을 한다.
  사탄은 유혹의 실패를 코믹하게 연기한다. 루두스 코벤트리에 군 성사극에서 사탄은 방귀
를 뀌며 지옥의 입으로 달아나고, 체스터군 성사극에서는 관중을 향해 이런 '유언'을 하기도
한다.
  
   이 연극에 찾아오신 여러분께
   내 똥을 유산으로 드리겠소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후에, 구약의 예언자들을 구하러 지옥으로 내려가는 장면에
서 지옥 입구 장면은 절정에 이른다. [니고데모]는  완전한 시나리오를 제공하고 있다. 장중
한 분위기의 십자가 고난이 끝난 후에는 아우성치고 싸우면서 더욱 저급한 코미디로 관중의
재미를 돋군다. 어떤 성사극에서는 사탄이 갑옷을 입고 예수와 일대일 결투를 벌인다.  극은
선의 군대가 승리하고, 악마들이 패해서 감옥 속에 처박히거나  뚜껑문으로 만든 지옥 속으
로 빠지면서 막을 내린다.
  간혹 '지옥정벌'장면에는, 맥주에 물을 섞어  판 죄로 지옥에 갔다가  악마와 결혼한 술집
접대부의 이야기를 곁들이는 경우가 있었다.  이 접대부는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시작하여
아리스토파네스의 [개구리들]을 거쳐 중세의 지옥정벌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동안 계
속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이야기는 예수의 생애를 다룬 극들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 까닭에 그 이
야기는 매우 대중적이고 극적인 소재였음에도 불구하고  - 천사와 악마 사이의 흥미진진한
움을 보여 주고, 적그리스도가 거짓 기적들을 발휘할 때는  진귀한 묘기와 요술들을 선보인
다. - 보통 별도의 단막극으로 상연하거나  [최후의 심판]단막극 첫머리에 나오는 눈요깃거
리 정도에 그쳤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사극의 하나로  12세기 독일 테르게른제 수도원
에 남아 있는 [적그리스도]극이 있다.
  [최후의 심판]에서는 부활한 사자들이 몸에 딱 붙는 보디 스타킹만 입은 '벌거벗은'모습으
로 예수의 심판을 받는 동안 성모 마리아가 중재자로 나온다. 구원받은 이들은 천사들의 환
영을 받으면서 하늘로 올라가고, 저주받은 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면서 지옥의 입으로
향한다. 저주받은 자들은 대체로 왕, 왕비, 주교, 대상인들과 같은 높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서민 관중들을 통쾌하게 할 때가 많았다  .타우넬레이극에서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이
많아서 악마들은 기뻐하고, 지옥문의 문지기는 쉴 틈도 없을 정도라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던컨왕이 죽임을 당한 직후인 2막  3장에 나오는 문지기 장면은
바로 이것에서 따온 것이다.
  악마들은 포로를 많이 잡아 잠시 기뻐하지만, 마지막에는 선인들이 승천하며 풍악이 울려
퍼지는 근엄한 장면으로 끝난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나 '현명한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같은 성서의 이야기들은 부
분적으로는 '역사'가 아니기도 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튀링겐 후작, 프리드리히가 목격한 사
례처럼 생각지 않은 역효과가 잠재해 있기도 한 탓에 거의 상연하지 않았다. 1321년 프리드
리히는 아이스나디 소년 학교가 공연한 [현명한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을  보았는데, 어
리석은 처녀들역을 맡았던 앳된 소년들에게 가해진 대중의 비나노가 야우가 너무  불쾌하여
극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죄인들이 자비로운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의 중재로도
구원받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의 신앙이란 게 무슨 소용이 잇겠는가?"라고 격앙한 어조로 반
박했다.
  프리드리히의 일화는 몇 가지 점에서 매우 교훈적이다. 이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극
을 공연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력이 있는지를 설명해 주고, 지옥 광경이 왜 익살스러워야
했는지도 보여준다. 귀여운 '소녀들'이 부주의 때문에 저주를 받는 장면을 보면 관객들이 마
음이 편할 리 없기 때문이다. 부자를 적대시하는 관객일지라도  극 중에서 부자가 형제들에
게 자기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보호해 주거나 조심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하는 장면에서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스꽝스럽게 생긴 도깨비들이  사람 형상의
애꿎은 허수아비를 고문하는 신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오히려  대중들을 축제 분위기 속
에 들게 했다. 영국 무대에서 종교극이 쇠퇴한 원인은  이러한 후기 성사극들이 상투적으로
- 16세기에 가서는 더욱 진부해졌다.-변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파우스투스
박사]와 같이, 한결 쟁점이 되는 '진지한'극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중세 후기의 연극은 기적극과 도덕극이 주류를 이루었다. 기적극은  여러 세기 동안 구전
된 성인과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을 극화한 것이었다. 원래는  신앙적 영감을 고취하기 위해
서 만든 것이지만, 사람들이 기적극을 좋아했던 실제 이유는 역시 무대 위의 액션 때문이었
다. 프랑스의 음유시인 장 보델이 쓴 [성 니콜라 기적극]은 십자군 전쟁 장면과 함께 매음굴
과 선술집 장면들을 보여준다. 다른  극들은 주로 무대 기법을 이용하여  기적 행위, 큰 뱀,
야수, 현실감 넘치는 순교 장면들을 연출했다.
  여기에도 지옥의 입을 자주 사용하였다. [테오필의 기적]이란 작품에서는 파우스트의 선배
격이라 할 수 있는 어떤 인물이 동정녀 마리아의 도움으로 지옥의 입에서 구원된다. 독일의
어느 기적극에서는 성 미가엘이 가짜 '여교황 조반나'를 구원해 주고, 네덜란드의 어느 기적
극에서는 교황이 구원자로 나온다. 마귀들은 성인들을 유혹하기도 했고, 성인들을  박해한자
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기도 했다.
  도덕극 또는 극화한 우화들은 중세 말기에 나타났다. 중세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어
느 정도 시인하고 있듯이, 문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우의화는  작품을 아주 복잡하게 할 여
지가 있다. 하지만 대중 연극의 차원에서 볼 때  우의화는 사탄 대신에 '죽음'을 등장인물로
내세우고, '일곱 가지 대죄'를 인격화하여 지옥의  입에 머물게 했을 뿐이다. 스페인의  어느
연극에서 '자만'역은 홀과 왕관을  갖추고 있고, '시기'는 그럴듯하게  차려 입고서는 안경을
쓰고 있고, '폭식'은 먹을 것을  주렁주렁 매달고, '분노'는 갑옷을  입고, 또 '정욕'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인으로, '탐욕'은 학자의  옷차림에 지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나태'는
후줄근한 잠옷 차림에 베개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각각 나온다.
  도덕극에서는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사람의 종말을  다루었다.죽음을 향한 여행과 영혼의
운명이 도덕극의 주제였다.'자비'와 '정의'가 논쟁을 벌이고, '악덕'과  '미덕'이 서로 잘났다고
싸움을 벌인다. 가끔씩 배우들이 실제로 싸우는  바람에 극이 중단 되기도 했다. 가장  길고
오래된 도덕극 중 하나인 [인내의 성]에서는 세상, 육체,  악마, 탐욕, 하느님의 옥좌라는 다
섯 개의 무대장치를  갖추고 있는데, 현대인들이  보기에 이 극은  지루하기 이를 데  없다.
1475년에 극본이 씌어진 [인류]라는 단편 도덕극은 훨씬 재치가 있다. 극이 절정에 도달했을
때 배우가 앞으로 걸어나와  빈 모자를 관객들에게 돌리면서,  우두머리 악마 티티불루스는
지금 돌리고 있는 모자에 돈이 가득 찬 다음에나 등장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장 잘
알려진 영국의 도덕극[만인]은 인기 있던 악마 티티불루스를 등장시키지 않았다.
  15세기 유럽 회화에서는 '죽음'이 살아  있는 송장이나 해골의 모습으로 의인화되는  일이
흔했다. 이런 음산해 보이는 분위기는 154세기 초반의 도덕극인  [세 명의 산 자와 세 명의
죽은 자의 전설]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다.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흔히 [전설]이라는 말
만으로도 통하는 이 도덕극은 한껏 맵시를 부린  세 젊은이가- 떄로는 세왕이-말라 비틀어
진 세 송장을 만난다는 이야기다. 그  송장들은 이렇게 읊조린다. "우리도 한때는 너히 같았
다. 너히도 언젠가는 윌처럼 될 것이다."
  이보다 더 순수히 시각적인 테마는 [죽음의 무도]였다. 이  주제는 16세기에 홀바인 이 지
극히 중세적인 모델에 기초를 두고 재현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죽음의 무도]는
[전설]보다 훨씬 정교하고 아이러닉했고, [전설]보다 훨씬 많은 양의 삽화를 필요로 했다. 죽
음이란 개별적인 것이며, 모든 사람이 각각 자신의  사자를 가지기 때문이다. [죽음의 무도]
에는 전체적으로 냉소적인 분위기가 흘렀는데, 홀바인의 목판화는 더욱 그러했다.  홀바인의
시대에는 '죽음'은 말라 비틀어진 송장보다 해골의  모습으로 표현했는데, '냉소적'이라는 말
은 바로 뼈나 앙상한 해골을 묘사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죽음'을 의인화하는 14,15세기의 경향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 피에타, 성인의 순교,  임종
장면을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한 그림과 조각에도  나타나고, 중자화들을 담아 인
쇄한 소책자 [죽음의 기술]그리고 도덕극은 물론 시에도 나타나다. [죽음의 무도]가 당시 극
의 주류를 이룬 까닭이 전염병 따위의 재앙에 대한 반응이었는지, 아니면 그 시대에 나타난
자연스런 염세주의적 경향의 하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 중요한 것은, 그림이나  문학
사조를 보면, 교회가 지옥에 대한 지배적 상상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 연옥 교리를 채택
한 직후부터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지옥을 믿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거의 모든 사람은 여전히 지
옥을 믿었고, 교회 역시 사람들이 지옥을 믿게 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연옥은
죄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었고, 그에 따라 지옥에 대한 공포가 죽음에 대한 공포로 바뀐 것
은 분명하다. 바로크 시대에는 득실거리는 벌레 가운데 나체의  송장들이 누워 있는 끔직하
면서도 사실적인 조각들로 무덤을 장식하는 것이 전혀 진귀한 일이 아니었다.
  15세기 중반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그림에서는 이 두  개념, 지옥과 죽음을 완전히 도식적
으로 연결하고 있다. 낡은 지옥의 모습을 새로운 해골  모습의 '죽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이다.

 

        지옥의 역사 2
    지은이: 앨리스 K. 터너
    출판사: 동연
 
   
    16 연옥 Purgatory
  지옥이 영원히 계속된다는 관념은 신학자들의 오랜  골칫거리였다. 기독교보다 역사가 깊
은 종교들에서도 지옥은 무서운 것이었지만,  불변하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었다 힌두교,  불
교, 조로아스터교의 지옥은 운명을 개선해 줄 수도 있는 윤회전생주기에 근거한다. 모든  존
재는 때가 되면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오리게네스의 주장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와 교회 정
통파의 거센 반발을 받았으나,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다.
  성서에는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와 제물 따위를 바치면 실제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음
을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 ' 마카베오하 ' 12장 43-45절은 유대의 애국자 마카바이오스가 전
쟁으로 죽은 유대 인 병사들의 영혼을 위해 20만 드라크라를 제물로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
다.
 
     그가 이처럼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
에게 전사자들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없었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헛
되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이다.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이 커다란  은총을 받을 것이라는 그
의 생각은 그야말로 갸륵하고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거지 나사로는  물론, 엘리야와 에녹까지  안식을 취했다는  아브라함의 품Abraham`s
bosom이 있다. 그것은 '휴식장소refrigerium'와 같은  의미였다. 유대 민족의 교부들과  세례
받지 못한 어린아이들의 림보도 거론되었다. 아주 명확하지는 않지만, 바울도 불에 의한  구
원과 같은 것을 암시한다 (고린도전서 3장 15절). 여러 세기에 걸쳐 그려진 여러 가지 환상
도 역시 연옥의 형벌이 지옥의 형벌과는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보여 주었다.
  교회가 제 3의 사후세계를 승인하기에 이르는 역사에 대해서는, 프랑스 역사학자,  자크르
고프가 '연옥의 탄생The Birth of Purgatory'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 연구서는 학문적 탐구
작업의 본보기라 할 만하다. 교회가 연옥을 승인하는 과정을  고찰했던 러시아의 중요한 중
세 연구자 아론 구레비치는, 르고프가 사후세계의 환상체험을 등한시했다고 비판하면서,  교
회가 연옥을 공식적으로 수용하기 훨씬 전부터 연옥에 대한 개념은 환상체험 속에 확립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새로운 연옥 교리는 1253년  교황의 친서에서 언급되지만, 트렌토
공의회(1545-1563)에 이르러서야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
  회의 후에 작성한 트렌토 공의회의  교리 문답서를 보면, "독실한  자들의 영혼은 한동안
연옥의 불길 속에서 정화된 후, 마침내 더러운 것들은 들어올 수 없는 영원한 나라로 갈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연옥에 유배된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신앙심이 깊은 사람
의 기도가 있어야 하고, 특히 기꺼이  제물로 바칠 수 있는 희생양이 있어야  한다."고 적혀
있다. 한편 주교들은 "교화에 득 될 것이 없는  난해하고 미묘한 문제들, 특히, 미신을 부추
기고, 부정이득을 꾀하거나, 권위를 실추하고 모욕하는 성향이 있는 것들"에  대해서 언급을
피하도록 강력하게 교육받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갈등이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연옥은 이단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승인한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단이란 반드시 초기 프로테스탄트를 가르키는 것은 아니지만, '순교자의 서Book  of Matyrs
'(1563)의 저자 존 폭스같은 프로테스탄트는 그렇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1,12세기에는  정통
교회가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자유로운 사고가  만연하였다. 불가리아의 어느 사제
의 이름을 딴 이단 종파인 보고칠  파가 동쪽에서 서진해 왔고, 발도 파와  카타르 파 또는
알비 파가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로니아와 피레네 산맥에서 북쪽과 동쪽으로 진출하여  이탈
리아 북부 베로나 근처로 집결했다. 성지 순례와 십자군 원정과  같은 대규모 이동 또한 이
단 사상의 확산을 부추겼다.
  중세를 피로 물들인 이단과 종교재판의 장구한 역사에 대해서는 아주 짧게 설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교회에서 낙인찍힌 이단자들 대부분은  절대로
자신을 이단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훌륭한 기독교인이라 자부했다는 사실이다.  그
들은 갈수록 부패하고 탐욕스러워지는 교회 관료주의에 안주하는 기성 기독교인들보다 자신
들의 신앙이 훨씬 깊고  성스럽다고 생각했다. 성  프란체스코(1182-1226)의 탁발 수도회는
바로 그런 정서 위에서 창설되었다.  교회는 마지못해 프란체스코 회를 포용하고  흡수했고,
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이단 사상이 일어나는 강력한 동기라 할 수 있는 반 교권주의 외에 이단자들이
공통적으로 견지하던 것은, 그리고 교회가 마니 교 사상이라고  부르면서 핍박의 빌미로 삼
았던 것은 바로 이원론이었다. 하지만 이단 종파의 지도자들이 마니Mani란 이름을 들어 본
일이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더 그럴 듯한 의견은, 중세의 하급 성직자와 귀족은 물론 무식한
일반 민중들까지도 모호한 이원론에 경도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당근과 채찍'을 번
갈아 쓰며 그 뿌리를 뽑으려고 했다. 이른바 알비 지방의 이단 소탕전과 그 뒤의 끔직한 이
단재판이 채찍이었다면, 당근은 바로 연옥이었다.
  연옥은 효과적인 선전도구였다. 지옥의 유황불 운운하며 겁주는 레겐스부르크의 베르톨트
같은 설교자들 때문에 천국에서 소외당했던 민중이 이제는 '연옥'의 개념을 통해 다시  구원
의 희망을 얻었기 때문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연옥은 아브라함의 품과 두 개의 림보를 솜씨
좋게 통합한 것이다.(하지만 단테는 이교도의 림보를  지옥의 제1환First Circle of Hell으로
규정했다.) 그럼으로써 세례를 받지 않고 죽은  아이들도 연옥에서는 아주 짧은 정화기간을
거치면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연옥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믿었던 유령ghost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도  해명해 주었다.
또 사람이 죽을 때 받는  개별 심판Particular Judgment at  death과 궁극적인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가 하는  복잡한 의문도 풀어 준 셈이었다. 성인
이나 순교자 그리고 용서할 수 없이 사악한 영혼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연옥에 가
게 되리라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그리고 교회는 살아있는 자들이 기도하면 죽은 자들이 연
옥에 머무르는 시간이 줄어든다고 공공연하게 설교했다.
  그러나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연옥의 여왕이 되어 당치 않는
역할을 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4,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마리아   묵시록The
Apocalypse  of  Mary'을  보면,  성모   마리아는 지옥에서   죄인들에게 일시적인   휴식
refrigerium을 얻어 주는 일을 했다. 바울 역시 비슷한 일을 했는데, 수도원들에서는 바울의
이야기다 더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과 같은 이야기 형식을 갖추지는 못했
다. 1070년의 기적 이야기에서는, 한 여인이 젊은  시절 동성연애(!)를 한 죄로 지옥에 갔다
가 성모 마리아Mother of God의 중재로 목숨을 온전히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슷한 시기
에 나온 또 다른 이야기를 보면, 성모 마리아가 죄를 지은 귀족을 구해 주기도 한다.  그 귀
족은 죄를 지었지만 가난한 자들과  교회에 대해 큰 자비를 베풀었고,  이것이 죄를 보상할
만했으므로 성모 마리아는 악마의 무리에서 그를  구해 준다. 다만, 그를 묶은 사슬은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죄인이 죽을  때까지 그대로 매고 있으라고 명한다.  일단 지옥에 떨어지면
아무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앞에 말한 죄인들은  연옥에 있을 때 구원을 받았음
에 틀림없다. 물론 당시에는 아직 그렇다고 결정된 사항은 아니었다. 연옥에 대한 정의가 확
립되기 얼마 전, 1220년경 하이스테르바하의 카이사리우스가 쓴 글을 보면,  크리스티안이라
는 이름의 젊은 사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크리스티안은 성모의 도움으로 악마들에게서
구출되는 환상을 경험한 뒤 개과천선해서 죽을 때까지 경건하고  겸손한 삶을 산 인물이다.
그 덕에, 젊어서 두 명의 사생아를 -  둘 다 수도사가 되었다 -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어서 곧장 낙원으로 간다고 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마리아의 구원이야기는 테오필리스에
관한 것인데, 그 이야기는 나중에 파우스트 전설을 다룰 때 다시 소개하겠다.
  "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소서, 현재도, 죽은 후에도. " 예수는 심판자이고, 마리아는
중재자다 심판 장면을 그린 수많은 그림에서 예수는 심판자로, 마리아는 중재자로 나타난다.
연옥관이 널리 퍼지고 마리아가 연옥에서 행하는 권능이 점점 커짐에 중세에서는  마리아를
예찬하는 기운이 드높이  일어났다. 나중에 프로테스탄트는  그런 현상에 대해  '성모숭배열
Mariolatry'이라는 경멸적인 표현을 썼다. 사람들의 뜻을 쫓아서, 교회는 마리아에게 더욱 초
자연적인 속성을 부여한 것 같다. 마리아는 부모의 죄(성교)를 거치지 않고 무염시태에서 태
어난 순결한 여성이다. 아들이 지상에서 죽은 것과 달리, 마리아는 죽지 않고 그냥 잠들었다
가(몽소Dorminition) 육신이 성화하여 천국으로 갔다.(승천Assumtion).  이것은 1950년이 되
어서야 신앙의 조목이 되었다. 마리아는 그 모습 그대로 지상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고,  또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마리아의 성화상은 실제로 웃고, 진짜 눈물을 흘리고, 신
자의 기도를 들어준다. (동정녀의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성보상자들relics은 중세 후기에
대부분 폐기되었다.) 마리아는 '요한계시록' 12장 1절에 나오는 '태양을 입은 여자'다. 예수의
탄생장면에서는 새 생명의 어머니이고,  비탄의 성모상Master Dolorosa에서는 슬픔에  잠긴
죽음의 여신이다. 프랑수아 비용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쓴 기도시에서 마리아를 "하늘의
여신이요, 지상의 여왕,/ 수렁 같은 지옥의 왕후"라 부르면서 칭송한다.
  어떠한 성인이라도 생전에 또는 사후에(대개는 사후에) 기적을 일으켰다. 하지만 사람들이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할 때는 마리아가 으뜸이었다. 마리아는 살아있으면서 초자연적인 신분
을 얻었을 뿐 아니라 연옥에서도 가장 큰 권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세례 요한
이 마리아와 함께 중재자의 직책을 공유했지만, 13세기말부터는 - 연옥이 등장한지 얼마 되
지 않는 때였다. - 마리아가 홀로 등장해 아들의 진노에서  죄인들을 보호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했다. 그래서 중세 후기에 전염병, 전쟁, 기근으로 유럽 전역에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을 때, 마리아가 세례 요한보다 더 인기가 있었던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트렌트
공의회는 그녀의 권위를 제한하느라 애썼지만,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카톨릭 신자들 사이에
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면, 그 노력이 별다른 성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연옥은 이론상 매우 타당하고 게다가 인간미 넘치는 조치였지만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이 연옥개념을 부정하고, 동시에 성모 마리아에 대한 '우상숭
배적'신앙을 부정한 것은 끊임없이 공표된 사실이므로, 여기서는  특별히 다루지 않겠다. 결
국 교회는 사후 형벌을 면해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교황의 사면, 즉 '면죄부'로 장사를 시작
했다. 자선 헌금함에 돈을 넣을 때 촛불을 밝히고 기도해  주는 것으로 끝났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심히 정도를 벗어날 위험이 있었고, 실제로도 자주 정도
를 넘어섰다. 예를 들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Dives'보다도 훨씬 믿음이 좋
다는 돈 많은 사람들이 공력을 세운답시고 가난한 사람을 고용해 단식과 기도와 성지순례를
하게 하고, 십자군 전쟁에 참전시키고, 심지어는 고해자의 누더기 옷을 입히고 몸에  채찍질
을 하며 고행하도록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교회는 이러한 행위 대신 적절한 헌금과 재물
만 바치면 속죄한 것으로 인정해 줄 만큼 비굴해졌다.
  중세 시대에 교회는 인간 생활의 모든 측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연옥은 그
런 교회에 인간의 사후 운명까지 주관하는 새로운 권한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
은 '전능한' 로마 카톨릭 교회에 큰 손실을 초래하게 된다.
  연옥은 단테의 정죄산과 같은 일시적인 지옥이었다. 그곳에서는 지옥과 같은 종류의 벌을
받기는 하지만, 지옥의 벌처럼 호된 것은  아니었다. 연옥은 마치 '정련소의 불'처럼  사람의
원죄와 후천적으로 저지른 악을 깨끗하게 살라 버리는 불을  연상하게 한다. 화가들은 연옥
으로 내려온 천사들이 죄를 정화한 벌거벗은  영혼들을 낙원으로 데리고 하는 모습을  그렸
다. 19세기까지 카톨릭 교회의 대부분의 제단 장식은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묘사하고 있었
다.
 
    17 단테의 지옥편 Dante`s Inferno
 
  단테(1265-1321)에 대한 해설서들은 단테가 만들어낸 지옥Inferno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
다. 그리고 그런 책들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단테의 '지옥편Inferno' 과  그 지옥의
공학, 지형도에 관한 내용이다. 단테가 지옥 광경을 그려내며 발휘한 건축적 창의성은  언제
나 독자를 매료한다. 요즘 나오는 '신곡Divine  Comedy'판본은 대개 지도와 도해를 싣는다.
한편 옛날의 삽화가들은 '신곡'사본에 등장인물과 괴물뿐만 아니라. 둑, 해자, 성곽, 도랑, 디
스 시City of Dis의 시뻘겋게 달구어진 철벽 등을 그려 넣었다. 갈릴레이도 1587년 학생 시
절, 단테의 지옥 구조에 대해 재미있는 논문을 쓴 바 있다.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한 하데스는
평면적으로는 광활하지만 상하의 깊이가 그리 대단치 않는 데 비해서, 단테의 '지옥편'은 그
리스도가 지옥의 제 1환을 정보한 뒤 가공할 만한 지진 때문에 생긴 지반 붕괴, 균열,  폐허
를 3차원으로 묘사한다.
  유배 생활 중에 단테는 위대한 시를 지으면서 역사,  당시 피렌체의 청치, 성직자의 푸태,
동시대인의 도덕적 자세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고, 특히 자신의  정신 상태를 연구하는 데데
힘을 쏟았다. 7시기가 지난 오늘날, 그가 풍부한 정서를 지녔다는 것은 금방 알아볼 수 있지
만, 그 모든 것을 당시 현실에 맞춰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야기 줄거리'만  따라
'지옥편'을 읽는 독자라 해도, 단순히 순례의 이야기에 경탄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고, 거기에
묘사된 광경, 음향 , 그리고 악취(!)에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다.
  단테는 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주제와 씨름한다. 철학, 신화, 신비주의에 관한 주제, 악마,
유혹, 환상에 관한 주제, 우화, 괴기주의, 희극에 관한  주제, 그리고 심리학적 주제- 단테는
이런 것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한  배려 속에 연결했다. 그의 종교관은  보수적이었지만,
그의 상상력은 예외였다. 비록 '신곡'이 환상여행vision tour을 봉해  고적 적인 하데스의 속
성과 기독교적 지옥의 속성을 급진적으로 결합한 것에 불과하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단테의
예술적 공헌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더욱이 그가 끼친 영향은 그 이상이었다.
  이 세상에서 단테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도시국가 피렌체의
부유한 친척 손에서 자랐고, 거기서 고전문학과 당대의 시에 대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
는 이탈리아 어휘에 관심이 많았고, 그런 동기에서 이탈리아  반도 전역의 방언들을 통합하
는 '범이탈리아적' 언어를 확립하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비록 단테가 '신곡'을 피렌체 방
언으로 쓰겠다고 결심하면서, '범이탈리아적'에 대한 구상은 무산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당초
의 계획을 실천한 셈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씌어진  '신곡'은 훗날 테트라르카와 보카치와의
공헌과 더불어 토스카나 방언을 이탈리아의 문어로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단테는 상인, 군인, 정치가, 철학 교수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거쳤다. 그리고  당시의 복
잡한 정치 문제에 휘말려 생의 마지막 20여 년을 빈궁한 생활은 아니었다 해도 여러 망명지
를 떠돌며 보내는 불운을 겪었다.
  단테의 유년 시절에 관한 일화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아홉  살 때 한 살 아래의 베아트
리체를 만난 것이다. 그들의 만남은 궁정  연애의 전형이었다. 둘은 몇 번밖에 만나지  못했
고,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했지만, 단테는 일생 동안 그녀를 향한 시를 썼다. 그녀는 1290년
에 죽었는데, 그 후 정확히 10년 뒤인 1300년에  단테가 '신곡'을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서 기억되는 해다, 그녀는 시에서 '신성한 사랑'  또는 '은총'으로 등장해 시인 베르길리우스
가 체현한 인간이성Human Reason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단테가 1300년
에 '신곡'을 쓰기 시작한 데는 몇 가지 다른 이유도  있다. 1300년은 그가 35세가 되는 해였
고, 인생을 70으로 보는 그에게는 인생의 반 고비를 넘는 나이였다. 또한 1300년은 한  세기
에서 다른 세기로 넘어가는 해이기도 했는데, 단테는 숫자들을  시적 도식의 본질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 시련기도 그 무렵 시작되었다.
  단테의 물리적, 윤리적 우주를 그려보려면,  표면이 울퉁불퉁한 원뿔 또는 깔때기  모양의
구멍이 지구의 북반부에서 지구 중심까지 뚫려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그 원뿔형 구멍
의 한가운데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을 둘러싼 원의  지름은 약 3,950마일(6,357km)이며,
이는 지구의 반지름과 같다. - 갈릴레이는 지구의 반경이 그 보다 몇  백마일 더 짧다고 계
산했다. 이 구멍은 루시퍼와 부하천사들이 하늘에서 추락할 때 그 무게와 힘이 지각을 때리
면서 생긴 것이다. 그 충격으로  밀려난 물질들은 베르길리우스와 단테가  지옥에서 탈출할
때 사용하게 되는 그 통로를 따라 남반구까지 이동하여 어는 고도 위에서 뒤집힌 원뿔 모양
으로 연옥의 정죄산mountain of Purgatory을 이루었다. 지옥의 입구는  둥근 천장으로 덮여
있는데, 갈릴레이는 그 천장의 두께를 405.52마일(652km)로 계산했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두
께가 얇은 곳에 갈라진 틈이 있었고,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그 틈으로 들어간다.  '지옥편'
서곡을 읽어보면, 순례자(단테)가 어두운 숲을 헤매다가 표범, 사자, 암 여우를 피해  언덕을
오르는데, 이곳이 지하세계로 들어가는 은밀한 입구였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글귀
가 적혀있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자들이여, 희망을 버릴진저."
  단테의 지옥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지동설을 믿었던  갈릴레이와 달리 단테가 프톨레마
이오스의 천동설을 믿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는 그 중심에 지
구가 있고, 지구 둘레를 투명한 천구 9개가 돌고 있었다. 제 1천부터 차례대로 열거하면, 월
천Moon, 수성천Mercury,   금성천Venus, 태양천Sun,  화성천Mars,  목성천Jupiter,  토성천
Saturn, 이어서 제 8천이 항성천fixed stars이었다. 제 9천은 원동천prime mobile이며 ' 최초
의 원동력first mover'으로서 우주의 조화를 유지한단. (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당시엔 외행
성 3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이 천구들 너머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최고천Empyrean은
하느님, 천사, 성인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단테의 천국들heavens은 각각의 천구 안에
설정되었다. 지옥도에서 현관vestibule은 열  번째 구역을 이룬다.  이것은 최고천이 우주의
제 10천을 이루는 것과 같고, 또 지상낙원earthly paradise이 아홉 단계로 된 연옥의 꼭대기
에 위치하는 것과도 같다.
  정확한 구조와 상징적 수비학에 대한 단테의 정열은 시 자체의 구조에도 적용된다. '신곡'
은 모두 삼운구terza rima로 씌어졌다. 모든 연stanza은 3행으로 되어있고,  각 연의 1,3행이
서로 압운rhyme을 이루며, 제 2행은 뒤따라오는 연의  1,3행과 압운을 이룬다. 각각 33곡으
로 되어있는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은 또 한  차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지옥편'의 서곡
을 포함하면, '신곡'전체가 100곡이 되는데, 이런 구조를 이토록 읽기 쉽게 운용하는 것은 놀
라운 일이다.
  제3곡에서 두 시인은 '지옥의 문'을 거쳐 지옥의 현관에 들어서는데, 단테는 이곳에 제 인
생은 물론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우유부단한' 사람들을 배치한다. 그 죄인들은
지옥에 들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한다. 지옥 현관을  지나면 아케론강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순환하는 세 강의 첫 번째 강이다. 아케론은 다음 강인 스튁스로 흘러 들어가고,  ( 세 번째
강인 플레게톤을 거쳐) 마지막에는 지구의  중심에 있는 얼음 호수인  코퀴토스에 도달하게
된다. 단테는 극적 효과를 위해 레테- 전통적  지옥의 네 번째 강 -를 연옥으로  옮겨 놓는
다. 베르길리우스는 헤시오도스 같은 태도로 순례자(단테)에게, 이 모든 강물은 크레타의 이
다산중에 서 있는 커다란 금속상이 흘리는 눈물에서 발원했다고 말한다.( 이 입상은 성서의
'다니엘서' 2장 31-34절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그 금속상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순전히 단테가 지어낸 것이다. )
  지하세계의 원뿔 전체는 계단 모양으로 되어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간이 좁아지는데,
가장 아래 우묵하게 패인 구멍이 지구의 중심부인 코키토스가  있는 곳이다. 뱃사공 카론이
두 시인을 태워 건너는 아케론 강과, 그 다음 두 번째 강 스튁스 사이에 지옥의 1-5환이 위
치한다. 맨 위의 제 1환을 림보라 하는데, 이곳은  세례는 안 받았지만 덕망 있는 영혼이 -
대부분 이교도들이다. - 거주하는 곳이다. 제 1환에서는 아무도 형벌을 받지 않는다. 이곳은
일견 베르길리우스의 '아에네이스'에서 낙원의 꽃 (아스포델)이  만발한 엘뤼시온 들판과 흡
사한 곳이다. 철학의 성Castle of philosophy이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제 1환은 통한의
눈물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베르길리우스 자신도  호메로스( 단테가 호메로스의 저작을 읽
은 것 같지는 않고, 단지 그 명성만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를 위시한 다른 이름난 이교도
들과 함께 제 1환에 머물고 있다. 물론 헤브라이 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옥정벌'을 통해 구원
을 받았다. 단테는 세례 받기 전에 죽은 아이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
다.
  림보 다음에 놓인 제 2-5환은 무절제한 자들, 말하자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욕망에 굴
복한 사람들이 벌받는 곳이다. 단테는 죄의 유형을 분류하면서, 당시에 일반적이던, '일곱 가
지 대죄'분류를 따르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체계를 따랐다. 제 2환은 미노스가 지
키고 있는 곳으로, 끊임없이 불어대는 욕망의  폭풍이 '육욕의 죄를 범한 자들the  lustful'을
괴롭힌다. 지옥의 번견 케르베로스가 지키고  있는 제 3환에서는 '폭식가들gluttons'이  악취
나는 차가운 음식찌꺼기 더미 위를 뒹굴고 있다. 플루토스('부'를 관장하는 신)가 지키는  제
4환에서는 주로 성직자들인 '탐욕스런 자들the avaricious'과 '방탕한 자들the prodigal'이  서
로 싸우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스튁스는 강이라기 보다는 더러운 진흙탕이며, 제 5환의 일부
를 이루는 동시에 디스 시City of Dis성곽의 해자 이기도 하다. 또한 스튁스는 상부 지옥과
하부 지옥의 경계선이 된다. 스튁스의 늪 속에는 '분노하는 자들the wrathful'이 서로를 쥐어
뜯고 있고, '게으르고 나태한 자들the sullen'이 흐트러진 자세로 숨을 헐떡이며 진흙을 삼키
고 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위쪽 강둑의 큰 망루 아래서 플레귀아스의 배를 타고 스튁스를 건
너 지옥의 도읍이자 타락한 반역천사들의 거처가  된 디스Dis(사탄) 시에 이른다. 반역천사
들은 두 시인의 입성을 막지만 하늘에서 온 천사가 문을  열어 두 시인을 들여보낸다. 푸리
아이와 메두사가 경비하는 디스 시의 - 실제로는 디스  요새라 불러야 하겠지만 - 성벽 안
쪽으로 하부 지옥전체가 펼쳐진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제 6환이 시작되고, '이단
자들heretics'이 불타는 무덤 속에서 헐떡이고 있다. 한편 단테의 지옥에서는 그 이름에 걸맞
지 않게, 디스 시의 성벽 안에서만 화형이 행해진다.
  시인들은 미노타우로스가 지키고 있는 깎아지른 경사면을 더듬어 내려가서 제 7환에 이르
고, 켄타우로스가 지키고 있는, 펄펄 끓는 피의 강 플레게톤을 만난다. 그때 괴물들 중 하나
인 네소스가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해 준다. 제 7환에서는 '폭력을 휘두른 죄인the violent'이
벌을 받고 있다. 이곳은 세 원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원이 다름 아닌 플레게톤  강이
다. 이 끔찍스러운 강에는 전쟁광, 폭군, 약탈자, 조직  폭력배, 정신 이상자 등 살인을 저지
른 자들이 빠져 흘러가며 아우성치고 있다. 하르퓌아이가 지키고 있는 다음 원은  '자살자들
의 숲'( 아마 단테가 만들어낸 것들 중 가장 섬뜩한 개념일 것이다. )이며, 그 숲 가장자리에
는 부랑자들이 검은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모습도 보인다. 마지막 세 번째 원은 고리 대금업
자, 신성 모독자. 동성연애자들이 있는 '불타는 벌판'이다. 두 시인이 '불타는 벌판'을 빠져나
가는 유일한 방법은 돌이 깔린 수로의 둑을 따라 가는 것이다. 이 수로를 따라 흐르는 플레
게톤 강은 절벽에 이르러 폭포를 이룬다.
  그 다음 괴물 게뤼온이 시인들을 절벽 아래로 싣고 날아서 내려간다. 이곳이 가장 정교하
게 만들어진 지옥의 제 8환이며, 앞의 것들과 다른 마지막 죄, 사기와 악의의 죄를 심판하는
곳이다. 제 8환은 말레볼제라고  불리며, 이곳에는 열 개의  둥근 구덩이 또는 '볼제(주머니
들)'가 있고, 각각의 볼지아(주머니) 위로부터 중앙의  구덩이를 향해 바퀴살 모양으로 돌다
리가 뻗어 있어서, 마치 거대한 석조 원형 극장처럼 보인다. 각각의 볼지아마다 죄인들이 들
어있는데, 그 중 첫 번째 볼지아에는 포주(남을 위해 여자를 농락한 죄)와 난봉꾼(자신을 위
해 여자를 농락한 자)들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고, 뿔 달린 마귀가 양쪽 죄인들 모두를 끊
임없이 괴롭힌다. 두 번째 볼지아에서는 아첨꾼들이 똥물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고, 세  번
째 볼지아에서는 적어도 교황 한 명을  포함하여 부패한 성직자들이 세례반 모양의  통속에
거꾸로 박힌 채, 발에 불로 세례를 받고 있다. 네 번째 볼지아에서는 거짓 예언자와  점쟁이
들이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머리가 완전히 등뒤로 돌아가 있어서, 눈물이 엉덩이로  흘러내
린다. 장님예언자 테이레시아스 역시 '오뒷세이아'에서 행하던 권능을 잃고 가엾게도 여기에
갇혀 있다.
  다섯 번째 볼지아에 이르러 단테는 말레브란케('사악한 손톱들Evil Claw'이란 뜻 )를 등장
시킨다. 말라브란케는 성사극에 나오는  일단의 기괴한 악마인데,  그들은 부정한 관리들 -
부정 이득자와 공직에 있는 사기꾼들 -을 끓는 역청 속에  던지고 논다. 분위기는 그로테스
크한 희곡처럼 바뀌고, 제 21곡 끝부분에서는 급기야 전통적인 '방귀' 나팔까지 울려 퍼진다.
  단테가 이 지점에서 희극적 이완을  뒤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 그
자신의 볼지아였기 때문이다. 그는 교황을 적대시하고  음모를 꾸몄다는 막연한 혐의에다가
공금을 횡령하고 정치적 뇌물을 받았다는 죄목으로 고향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 이 무서운
소극은 그에게 부여된 혐의에 대한 항변이다. 실제로 단테가  알고 지냈음에 틀림없는 위선
자들이 곧이어 다음 볼지아로 떨어지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시인은 예수의 지옥정벌 직후 발생한 지진으로 여섯 번째 볼지아로 통하는 다리가 무
너졌음을 알게 되고, 성난  말레브란케의 추격을 피해서 울퉁불퉁한  비탈을 기어 내려가야
했다. 그 비탈 아래의 여섯 번째  볼지아에서는 위선자들이, 안쪽에 납을 대어 만든  무거운
망토를 입고, 그 무게가 힘에 겨워 눈물을  흘리면서 발을 질질 끌며 줄지어 걷고 있다.  두
사람은 허물어진 다리의 벽을 타고 힘겹게 기어올라가 마침내 일곱 번째 볼지아에 다다르는
데,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도적과 뱀들이 서로 뒤바뀌어 변하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여덟 번째 볼지아에서는 모략자deceiver들이 불꽃에 싸여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오뒤세우
스도 있었다. -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트로이아 인 (그리고 이탈리아 인) 편이었기 때문에,
오뒤세우스를 목마의 간계를 쓴 악인으로 본 것이다. 아홉  번째 볼지아에서는 불화의 씨앗
을 뿌린 자들이 악마의 칼에 참혹하게 토막 나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무하마드도 있었는데,
단테가 보기에는 그도 '믿음이 없는' 이단자였다. 이 볼지아는 사방  20마일(32km)정도의 좁
은 곳이었고, 꼭대기는  극도로 비좁았다.  마지막 열  번째 볼지아는  둘레가 겨우  11마일
(18km)에 폭이 반 마일(0.8km)밖에 안 되는 더 좁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다. 그곳에서는 거
짓말쟁이(위증자, 위조자. 불륜의 정욕을 채운 자, 연금술사)들이 끔찍한 병에 걸려서 시달린
다.
  말레볼제의 밑바닥에 있는 우물에는 키가 50피트(15m)나 되는 거인들이  늘어서 있다. 이
것은 그리스 신화의 타르타로스에 갇힌  거신 족들의 이야기를 단테식으로  개작한 것이다.
나락의 밑바닥을 지키는 그 거인들은 상반신만 물위로 내놓고 있다. 그들 중 하나인 안타이
오스가 몸을 구부려 거대한 손으로 시인들을 들어다가 제 9환 한복판에 내려놓는다.
  얼어붙은 호수인 코퀴토스는 반역자 디스의 영역이다. 그 주위에 있는 세 개의 고래 안에
는 온갖 배신자들이 갇혀 있다. 카이나(성서의 '가인'에서 따온 이름)에는 혈족을 배신한  자
들이 갇혀 있고, 안테노라(트로이아의 반역자인 안테노르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는 호메로스
의 영웅이었지만,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와 트로이아인의 편이다.)에는 조국을  배신한 자들이
갇혀 있으며, 프톨레메아(자신의 장인이자 제사장인 시몬과  시몬의 두 아들을 초대해 주연
을 베풀고 나서 그들을 살해한  여리고의 수장 프톨로미에서 따왔다.  )에느 손님을 배신한
자들이 갇혀 있다. 궁극의 중심- 지옥의 중심이자 지구의 중심-  인 주데카( 물론 그리스도
를 팔아 넘긴 유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에서는 은인을 배반한 자들이  벌을 받는다. 그
중앙에는 위대한 신에 대항한 최강의 적대자였던  디스(사탄)가 얼음 속에 갇혀 있다. 가롯
유다, 브루투스, 카시우스의 망령들을 먹어 삼키는 디스의 눈에는 눈물이 흘러 내린다. 이제
시인들은 지상의 상쾌한 공기와 별빛을 볼 수 있는 출구를 찾기 위해 털이 부숭숭한 디스의
허벅지 위를 기어올라간다.
  단테가 그린 디스 또는 사탄의  모습은 전통적이면서 동시에 독창적이다.  환상문학vision
literature에서는 대체로 사탄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피하거나, 기껏해야 괴이한 모습을 비추
는 것에 불과했다. 단테는 '툰달'을 읽기는 했어도, 거기에 등장하는 지네 형상의  사탄은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상상해낸 사탄은 아주 그로테스크한 것이었다. 얼굴은 세 개였는데,
유다를 물고 있는 가운데 얼굴은 붉고, 브루투스를 물고 있는 왼쪽 얼굴은 검으며, 카시우스
를 문 오른쪽은 노랗다. 각각의 얼굴 밑에는 날개가 한  쌍씩 달려 있어서 그것을 퍼덕이면
코퀴토스를 얼려버릴 만한 바람이 일어났다.
  새 얼굴을 가진 사탄은 화가들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피렌체의 대다수 사람들처럼,
단테도 산지오반니 대성당의 세례실 천장을 호화롭게 장식한 새로운 '최후의  심판'모자이크
화를 보았음에 틀림없다. 이 모자이크 화는 1300년에 완성되었는데, 이 해는 단테가  고향인
피렌체에서 추방당하기 두 해 전이다. 바사리의 '예술가들의 생애'에 의하면, 단테는 역시 피
렌체 사람인 지오토와 막역지우였다고 한다. 추방당하고 나서 단테는 파도바 시의 스크로베
니 예배당을 방문한 것이 틀림없는데, 이곳은 1307년경 지오토가  그의 유명한 프레스코 화
를 완성했던 곳이다. 이 예배당은 엔리코 스크로베니가 아버지 레지날도의 약탈행위를 면죄
받기 위해 지은 것이었다. 레지날도는 죽어가면서도, "내 돈은 아무도 못 가져간다!"면서 금
고 열쇠를 가져오라며 배를 움켜잡고 악을 썼을 만큼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자였다. 그래서
지오토는 천국(그 역시 자신을 이곳에다 두었다)에서 엔리코가 성자들에게 예배당의 모형을
바치면서 경의를 표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단테는  짓궂게도 친구 지오토와는 달
리 엔리코의 아버지 레지날도를 고리대금업자들이 모인 지옥의 제 7환에 두었다. 제7환에서
두 시인이 게뤼온의 등에 업혀 더 아래쪽에 있는 지옥(말제볼제)으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바로 레지날도다.
  이 두 '최후의 심판'그림(산 지오반니 성당과 스크로베니 예배당)이 나타내는 사탄의 모습
은 모두 괴상 망측하다. 사탄들의 양쪽 귀에서 기어 나와  죄인들을 잡아먹는 뱀 두 마리의
모습은 시적인 묘사라기보다는 차라리 기괴한 편이었다. 단테는 이 형상을 삼위일체에 대립
하는 것으로 재배열한 것이다. 비잔틴 양식의 '최후의  심판'그림들에는 사람과 비슷하게 생
긴 악마들이 그려져 있고, 죄지은 이들의 영혼을 잡아먹는  독사들이 사탄의 권좌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것은 지옥의 입Hellmouth을 그림의 구도 안에 배치하는 교묘한 방
법으로서, 피렌체(산 지오반니 성당)의 둥근  천장과,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있는) 지오토의
그림도 이 착상을 빌어 쓴다. 죄인들을 삼킨 후에는 곧 배설하게 될 터인데, 사탄이  앉아있
는 자세가 그것을 암시한다. 디스의 몸을 털투성이로 그리는 것은 성사극에 쓰이던 악마 복
장이 짐승 털과 새깃으로 덮여 있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서 보티첼리의 그림에서도 금방 눈
에 띈다 디스의 날개에 대해 말하자면, 삽화가들은 성서에  나오는 스랍처럼 복잡한 날개를
포기하고 대부분 날개 한 쌍만 그려 넣기 시작했다.
  단테의 문학적 묘사는 비록 그것이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이고, 지오토가 그린 (스크로베
니 예배당의) 짐승 모습과 환상문학Vision literature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아주 새로
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사탄이 완전한 패배자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사탄은 침을 질질 흘리
면서 정신없이 물어뜯고 눈물을 흘리고 있으며, 두 시인이 분명히 자신의 몸을 타고 도망치
고 있는데도 꼼짝 못 한다. 사탄은 얼어붙은 원형질의 모습으로 전락해 있다. 단테는 사탄을
간략하게 묘사한다. 이것은 환상문학Visions의  전통이며, 예술적으로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괴물을 묘사할 때, 깊은 인상을 주는 것과 우스꽝스런 느낌을 주는 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옥편'의 필사본은 세간에 유포되기 시작하면서 곧 선풍을  일으켰다. 이때는 단테가 여
전히 '신곡'의 후반부('연옥편'과 '천국편')을 집필하고 있던 1314년경이었다. 삽화까지 곁들인
'지옥편'사본들이 우후죽순처럼 만들어졌고, 이는 공공 미술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14세
기에는 이탈리아 도처에서 성당 건축이 활기를 띄고 있었는데, 그 성당들을 장식한  '최후의
심판'그림들은 단테가 고안한 연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들어 낸 연옥의  정죄산이
회화에서 연옥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
보다 화가들을 매료한 것은 역시 그의 지옥이었다.
  단테와 함께   지옥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환상문학vision
literature의 세계를 무너뜨렸다. 그리고 지옥을 허구나 비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
다는 점에서 지옥 자체도 무너뜨렸다.  그는 사실인 체하는 환상문학의  구태의연한 전통을
거부했고, 그 대신 독자를 단테 자신과 베르길리우스의 순례 이야기에 초대했다. 다시  말해
서 앞선 시대의 다른 작가들을 심미적, 비평적으로 음미하는 한 작가(단테 자신)의 예술 작
품 속으로 독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피렌체의 나르도 디 치오네의 벽화를 보면 어떤 사
람이든 그 그림이 문자 그대로의 지옥이 아니라 단테의 지옥을 묘사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그림 19,20). 단테 자신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지옥의 현실성을 약화하고 거부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 뒤로, '신곡'에서 그린 순례 여행은 지속적으로 정신 세계의 은유로 작용했다. 프로이트
이후 끝없이 신화의 지도를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건대,  사자의 땅 또는 지옥-
그밖에 어떤 말로 불리는 것이든 간에 -여행이란 '영혼의 어두운 밤'을 헤매면서 정신적 재
생을 도모하는 개인적 경험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이다.  '현대인의 종교'라 불리는 정
신 분석학에서는, 환자가 올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불행에 빠질 수밖에  없는 깊은 원인을
그의 '안내인'과 더불어 탐색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분석하고 검증하는 고통스러
운 연옥을 거친 후에 비로소 정신적 건강을 되찾고 상대적인  낙원에 이르게 된다. 마약 중
독이나 알콜 중독을 고치기 위한 어떤 12단계 프로그램에서는 중독과 파멸 행위로 몰락하는
것을 가리켜, 지옥으로 떨어지는 소용돌이 안에 휘말리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말하자면, 지
옥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털이 부숭부숭한 사탄의 다리를 타고 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
어오르는 것이다. 이 경우 술이나 마약이 없는 불안한 낙원으로 돌아가기 위한 행동 제한이
모두 연옥이다. 조셉 캠벨은 융에 의거하여, 모든 종교 신화나 기사 무훈담에 기본적으로 존
재하는 것이 '영웅 역정'이라고 본다. 역정 속에서 영웅은 먼저 '야수의 뱃속'으로 모험을 떠
나야 하고, 그 뒤에 이상을 향한 '시련의 길'을 걸어야 한다.
  현대를 풍미하고 있는 이러한 은유적 사고방식은 단테가 '신곡'을 쓰지 않았다면 태동조차
못 했을 것이다. '신곡'은 새로운 영역의 어휘를 제시해 주었고, 우리의 정신적인  삶을 직관
하게 하는 유용한 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18. 중세의 흥성기 The High Middle Ages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는 환상문학의 전통이 단테에 이르러 갑자기 끊어지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소설 문학fiction이 생겨났다. -  사실주의적 소설 문학이 요청되고 씌어지기
까지는 여러 세기가 걸렸다.  끔찍하고 영원한 지옥을  소유하고 '지배했던'교회에 대항하여
소설 문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했다. 단테는 고전적인  하데스를 이용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 유럽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었던 베르길리우스
의 '아에네이스'는 시인들에게 광맥과 같은 것이었고, 그들은 그것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용했다.
  14세기에서 17세기까지 이탈리아 서사시, 기사 시가에서는  이야기 전개에서 지옥 여행을
중심적으로 그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단테의  작품들과는 달리 이런 시들  대부분은 완전히
세속적이었고, 그들이 탐구한 지옥 이미지는 기독교적 전통보다는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
스에 더 가까웠다. 그런 것들이 족히 수십편은 되었다.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꼽히는 작품으
로는, 사라센 사람들에 대항해  싸운 샤를마뉴의 용장 롤랑  이야기를 환상적으로 각색하고
거기에 지옥의   리디아 이야기를   그린 로도비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올란도Orlando
Furioso'(1532)와, 제   1차 십자군  원정 이야기인   토르쿠아토 탓소의  '해방된 예루살렘
Jerusalem Delivered'이 있다. '해방된 예루살렘'은 천상의 전투를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 사
탄은 플루토라고 불린다.
  지하세계의 모험 이야기는 이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마뉴의
조부인 샤를 마르텔이 지옥으로 가는 오래된 전설이  나중에 기사도 소설(로망스)로 각색되
었다. 12세기경에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샤를  마르텔과 그  후계자들의 역사History   of
Charles Martel and His Successor'에서 샤를은, 자신의  말썽쟁이 서자를 안내자인 마법사
와 함께 지옥으로 보내 루시퍼에게 가서 경의의 표시로 공물을 받아오도록 명한다. 물론 그
것은 성사되고, 샤를은 자신이 직접 지옥을 방문해 충성을 다짐받는다. 좀더 후기  작품이면
서 가장 일찍 단테를 모방한 것으로 알려진  프랑스의 '오베르뉴의 위옹Huon of Auvergne'
은, 샤를 마르텔 설화에 켈트족의 로망스 주제들을 섞은 작품이다. 여기서는 샤를이  위옹의
아이네아스와 오랑즈의 윌리엄과 동행해서 지옥의 여러 광경들을 보고 직접 벌도  받으면서
정력적으로 여행을 하다가, 샤를 마르텔의 의도에 담긴 진의를 발견한다. 루시퍼는 샤를  마
르텔의 가신이 되는 데 동의하고, 조공으로 천 마리의  황금 새들과 왕관, 반지, 휘황찬란한
가마를 바친다. 이 마법의 가마는 물론 샤를 마르텔을 곧장 지옥으로 날라다 준다.
  그리고 이즈음부터는 요정 나라Fairland의  이미지가 그 동안 지옥이  담당했던 전통적인
역할을 이어받기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 13세기말에 씌어진  '오르페오 경Sir Orfeo'이라는
영국의 시는, 12세기  후반 프랑스의  여자 시인인  마리 드 프랑스가  쓴 '오르페의  시Lai
d'Orphee'를 모방했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특별한  설명도 달지 않은 채 지옥이 요정
의 나라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리고 하프를 잘  타는 왕자 오르페오 경(플루토 왕의 아들이
자, 유노 왕의 아들)이 요정들에게 빼앗긴 아내 헤우로디스(에우뤼디케)를 찾아가는 곳도 이
괴상하고 복합적인 장소였다.
  이 요정들은 사냥개로 사냥을 즐기고 송골매로 매사냥을 하며 "기이한 복장으로  춤을 추
는dauncing in queynt atire"중세 궁정 풍의 요정들이다. 그러나 이 시인은 (마리 드 프랑스
에게 경의를 표하면서도) 오비디우스와 베르길리우스에게서  소재를 찾았다. 오르페오 경이
유랑하는 음유시인을 가장하고 성의 뜰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는 무시무시한 '잠든 자들'의
무리를 보게 된다.
  
    어떤 이들은 머리가 없이 걸어다니고,
    어떤 이들은 팔이 없고,
    어떤 이들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고,
    어떤 이들은 미쳐 날뛰고,
    어떤 이들은 말 위에 무장해 있고,
    어떤 이들은 밥 먹다가 목 졸려 죽고,
    어떤 이들은 목말라 시달리고,
    어떤 이들은 불에 타 일그러져 있고,
    그런 와중에 아낙네들은 해산을 하고,
    어떤 이들은 죽어 있고 어떤 이들은 돌아 버렸고,
    놀랍게도 그 옆에선 사람들이 누워 있다.
    한창 때 잠들어 버린 모습 그대로

  그리고 그들 가운데 에우뤼디케가 나무 아래 누워 있다. 오르페오 경은 아내를 되찾기 위
해 요정의 왕 앞에서 하프를 연주하고, 아내와 함께 성으로 돌아오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곳이 무시무시한 기독교적 지옥이었다면 오르페오  경은 그곳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요정 나라는 지옥에 대한 불가피한 대안이었다. 지옥과 요정의  나라가 서로 긴밀해지기 시
작했다는 증거는 귀족의 위탁으로 만든 성무일과서Books of Hours와 임람에 실린 삽화에도
나타난다. '에어셀던의 토마스Thomas of Erceldoune'라는 로망스에서는 어떤 기사가 신비로
운 여인과 어둠 속을 사흘 간 여행하다가 천국, 연옥, 지옥, 요정 나라로 통하는 네 길을 본
다. 12세기 말엽에 프랑스어로 처음 번역된 '아에네이스'에서 시뷜레는 마녀로, 아이네이아스
는 중세 봉건 기사로, 케르베로스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발과 긴 팔, 그리고 개 모습의 머
리를 세 개나 지닌 악마로 그려진다.
  '요정의 여왕The   Faerie Queene'은  중세의 흥성기에   씌어진 우의적  로망스  서사시
romance-epics의 금자탑으로서, '비극적, 희극적,  역사적, 목가적'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단테와 마찬가지로 에드먼스 스펜서는 이미 전성기를 맞았던 이 문학 양식을 반추하고서 그
장르를 종합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단테가 방언을 사용하는  데 있어 전위적인 역할
을 했다면, 스펜서의 서사시는 의도적으로 고풍스런 언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아서 왕  설화
에 영국 신화를 더함으로써 영국 서사시를 이탈리아 양식으로 쓰고자 했다. 그가 시도한 '열
두 가지 덕목을 특정 짓는 열 두권의 책XII  bookes fashioning XII morall vertues'은 엘리
자베스 여왕 궁정에 있는 그의 동료 기사  시인인 필립 시드니경과 월터 랠리 경을 비롯한
상류 귀족 측을 깊이 감화시킨  로망스이기도 했다. 지옥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볼 때 거의
나삽한 시속에 나타난 가장 혁신적인 사상은 선과 악의 투쟁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했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당시 조류에 따라)충실하게 반 카톨릭 적인 청교도였다.
  스펜서가 쓴 이 장편 우화는 클레오폴리스 출신의 글로리아나가 다스리는 요정 나라를 배
경으로 한다. 여기서 클로리아나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대역인 셈이고,  클레오폴리스는
런던을 나타내는 것이다. 스펜서의 기사들은 아주 봉건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시대에 맞
춰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신하가 되기 위해 활약했다. 적십자 기사는 그리스도를 표상 했고,
따라서 그가 무찌른 괴물들은 사탄의 표상이었다. 스펜서는 교황을 비롯한 모든 '카톨릭  적
인 것'을 포함하여 당시  영국에서 지옥의 표상으로 알려진  것들을 열정적이고도 풍부하게
다루고 있다. 제1권 '오류의 동굴'편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것은 반은 여자이고  반은 용의
모습을 한 기괴한 괴물이 죽으면서 자신의 추악한 배에서 오래된  책과 서류들(카톨릭의 가
르침)로 가득찬 독을 토해 내자, 그녀의 자식들이 제 어미의 독이 섞인 피를 핥아먹고 마침
내 배가 터져 죽는다는 이야기다. 엄격한 의미의 우화라고 할 수 는 없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아르크미아고는 경건한 은자처럼 보이지만, 곧 사악한 마법사임이 탄로
나며, 악마들의 시중을 받는 완전한 적그리스도의 표상이라는 것 역시 드러난다.
  
  그는 플루토의 여신을 잠에서 깨우고,
  천국을 저주하고 생명과 빛의 주이신
  지고하신 하느님을 모독한다.
  고르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서
  코퀴토스 강을 요동하게 하고 스튁스 강도 달아나게 만드신
  암흑과 죽음과 밤의 왕자.

 '지복의 나라'는 요녀 아크라시아(키르케로 읽는다)가 다스리고 있다. 도덕주의자이기를  거
부한 시인 스펜서는 이런 사악한 음탕함을 좋아해서 글에 자주 등장시킨다. '자만의 저택'에
있는 루시페라 여왕은 그녀를 시중드는  대죄들이 탄, 여섯 야수가 끄는  황금 수레를 타고
지나간다. '밤'을 거느리는 마녀 두에사는 "입을 벌리고 있는 아베르누스 동굴의 심연"을 통
해 하데스로 내려간다. 하데스에는 연기와 유황불, 무시무시한  푸리아이들, 아케론 강의 모
진 물결, 플레케톤의 불바다, 그리고 현관 계단 위에  케르베로스가 지키고 서 있는 '영원한
고통의 집'이 있다. 익시온은 수레 바퀴를 돌리고, 시쉬포스는 돌을 굴리고, 탄탈로스는 나무
에 묶여 있고, 티튀오스는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고, 다나이데스는 물을  긷고, (그리스, 로마
신화의 작가가 아닌 보카치오가 지옥으로 보낸) 의술의 신인 아이스퀼라피우스가 사슬에 묶
여 있다.
  '절망의 동굴Cave of Despaire'은 자살을 충동질하고, 거기를 지나면 사탄을 상징하는, 불
을 내뿜는 용을 만나 싸운다.  그  다음에는 우의적인 죄들이 지키고 있는 지옥의  문 근처
지하에 '맘몬(부자)의 동굴Cave of Mammon'이 있고, 이곳에는 '부의 집'이 있다. 그 다음은
프로세르피나의 정원이다. 이 정원 안에는 의자 하나와 황금 사과들이 달려 있는 나무 옆으
로 코퀴토스 강이 흐른다. 그 의자에 않거나 그 사과들을  먹는 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는 자명하다. 기사 기용도 그것을  미리 알아채고서 맘몬(부자)의 환대를  단호히 거부한다.
강둑 너머에는 "지독한 냄새가 나는  칙칙한 물결 속에서 저주받은 인간들"이  울부짖고 있
다. 그리고 탄탈로스도 다시 등장하고 있다. 또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 것을 허락한 보디오
빌라도는 끝없이 제 손을 씻고 있다.

   중세의 쇠퇴기
 
  고상한 우화극과 로망스들이  부각되는 것이 중세 후기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것은 민중
이 즐긴 저속한 유머의 일종이기도 했다. 물론 그 대부분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기
적극miracle play의 자옥 장면들이나 피터 브뤼겔과 그를 추종하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그림
속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라블레의 작품들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중세 후기에는 날짜로 치면 모두 합쳐 한 해에 석달 가량은 온갖 축제들로 가득했다고 역
사가들은 추정한다. 이 축제들 중에는 '바보제festa fatuorum'라 통칭하는 것들이 있었다. 순
절 이전시기, 스데반 성인의 날(12월 26일)에서부터 신년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헬러윈 축
일, 그리고 마을마다 서로 다른 성인들의 축일인 있었는데, 이런 특별한 날에 교회에서 스콜
라 학자들과 하급 성직자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거행한  것이 바로 '바보제'였다. 야단법석
을 떠는 행렬을 동원하는 이 축제는 오늘날에 비해 위계질서가 훨씬 엄격했던 중세 신분사
회의 질서를 전복하는 행위들, 말하자면 경망스러움, 술주정,  성스러운 것에 대한 노골적인
모독이 주를 이루었다. 이렇듯 평소에는 불가침으로 여기던 숭배 대상을, 이때만큼은 조롱하
는 것이 허용되었을 뿐더러 심지어는 의무적인 것처럼 여기기까지 하였다. 비록  우리는 어
렴풋하게 인식할 뿐이지만, 이때 지옥과 지옥의 거주자들은 축제에서 필수적인 부분을 차지
했던 것이다.
  17세기초에 와서는 축제용 지옥 행진이 너무 소란스럽게 통속화해 종종 폭력을  일으키기
도 하였다. 그래서 1540년에 창설한 예수회 또는 성직자들이 공연한 것을 제외하고는,  유럽
전역에 종교극을 금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축제 분위기를 통해 사회적 긴장을 완화해주
는 이런 역할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긴요한  것이었다. 사라지기는커녕,  즐거운 지옥Merry
Hell은 점점 더 통속화했다. 먼저 중세 말기에는 환락과 우화를 병적으로 표출한 '죽음의 무
도Dance of Death'가 등장했다. 해골의 모습을 한 '죽음Death'이 마찬가지로 분장을 한 부하
들과 함께 등장해서, 익살맞은 행동을  하면서 그들의 반동적인 행렬에 관중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나서 할리퀸들이 등장했다.
  할리퀸은 원래 게르만의 이교적인 마귀였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밤에 출몰해 난폭한 사
냥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악마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사냥꾼 헤른으로, 독일에
서는 요정의 왕으로 통했다. 적어도 13세기쯤에,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세속극인 아담  드
라 알의 '나뭇잎 놀이Le Jeu de la Feuillee'에서는 에를르캥  크로크조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아를레키노라  불리면서, 거리의 즉흥  광대들zanni중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우스꽝스런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없이 보여주는 배우들을 통해
당시 금지 당했던 '종교적'악마들을 대신했다. 할리퀸은 그밖에도 폴치넬라(또는 폴리키넬레,
페트로슈카, 펀치)가 있었다. 18세기에는 인형극에서  인기를 모은 할리퀸은, 후에 이탈리아
즉흥 가면 희극commedia dell'arte에도 나타났다. 나약한 태도에 특이한 복장을 하고 나타났
던 할리퀸은 마침내 오늘날에는 산책길이나 공원길에서 악역을 맡아 길거리 무언극까지  끼
여들게 되었다.
  지옥의 모습을 패러디한 글들도  있었는데, 13세기 프랑스의 '성  피에르와 종글뢰르Saint
Pierre et la Jongleur'가 대표적이었다. 종글뢰르는  악마 연기를 우스꽝스럽게 하던 거리의
광대였다. 그가 죽어서 지옥에 갔는데, 루시퍼와 여러 악마들이  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 성
베드로와 내기를 해서 지는 바람에 지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베드로에게 빼앗기고 만다.
루시퍼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고는  화가 치밀어 그를 지옥 밖으로  던져 버리고, 다시는
어떤 종글뢰르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맹세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나온  '지옥의 인사Salut
d'Enfer'에는 마귀 테르베간의 연회장에 차려진 온갖 음식이-더 많은 이단자의 구운 고기가
나온다.-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할리퀸과 펀치처럼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도  원래는 무대용 악마였다.  그들의 모험을
기록한 책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대부분 어리석은  정신에 대해 적고 있고, 음란,  외
설, 폭음과, '일곱가지 대죄'까지 즐기라며 찬미하고 있다. 대부분의 코미디처럼, 이들의 유머
가 너무도 국지적이기topical 때문에 오늘날에 그 유머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요정의 여
왕The faerie Queene'만큼 극단적이지만, '요정의  여왕'이 매우 고상한 편이라면, '가르강튀
아와 팡타그뤼엘'은 의도적으로 저속하게 씌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다음에는 베네딕트 회로 옮겼고, 다시 의사가 되었던 프랑수아 라블레(1495-1553)
가 별다른 박해를 받지 않고, 그런 것을 다루었다는 사실은 시대가 변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에게는 상류층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들 덕분에 검열을 모면하고  그저 비판을 받는 것으
로 끝난 것 같다.
  희극의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할 때,  라블레의 지옥은 지겹고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그의
로망스 모델은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가 아니라, 지적인 농담 한 마디로 지옥을 풍자하
는 루키아노스였다. 루키아노스는 '메니푸스'에서 사후세계에 있는 칭송 받는 철학자들을 높
이 받드는 반면, 크세르크세스와 알렉산드로스 같은 왕들을 격하하고  있다. 라블레는 (신발
을 수선하는)알렉산드로스와 겨자를 파는  크세르크세스를 포함해서 고전적인 역사와  신화
들, 아서 왕 이야기와 로망스 문학,  그리고 교황의 계보를 망라한 여러 유명한  인물들에게
상상력을 뻗쳤다. 그러나 라블레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것은 그들에게  고문 대신 매독을 벌
로 내리는 것뿐이다. 그의 지옥에는 소변보는 장면이 유난히 많다.
 
  중세 말기의 사람들은 속담이나 민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격언이나 아이들의 놀이를 그
린 브뤼겔의 그림들은 당시의 민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일곱가지 대죄와 지옥 장
면을 그린 그의 삽화들도 마찬가지다. 지옥에 대한 상당한  양의 자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으니, 누군가 그것을 분류해 보려고 시도했다는 사실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최초의
지옥 연구가infernologist라 불리는 레지날드 르 크는 '지옥의 심연Baratre Infernel'을 1480에
썼다.
  그 책에는 그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일(지옥의 역사를 개관하는 일)을
했고, 이교도에 대한 자료와 기독교의 자료를 자유롭게 인용했고, 지옥에 수용된 자들과  거
기서 벌어지는 광경들을 서술했으며, 그 자료에서 지옥을 정리하고 어떤 결론을 끌어내려고
했다. 그는 먼저 오래 된 자료들 62가지를 "도덕적인 것, 풍자적인 것,  애가적인 것, 계보학
적인 것, 신학적인 것, 역사적인  것, 철학적인 것, 신화적인 것,"으로  분류했다. 거기에서는
기독교인 작가 50명과 성경 10권과 기타 외경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든 예들은 '툰달'과
뚱보와 샤를의 환상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목차만으로도 실로 방대하다.
 
  플랑드르 화가들과 미켈란젤로
 
  얀 반 에이크(1390-1441?)는 15-16세기에 명성을 떨쳤던 플랑드르 예술학교의  초대 교장
이었다. 그의 그림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은 지옥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가 죽음의
모습, 또는 새롭게 인습을 탈피하기 시작한 시기를 아주 명확히 보여 준다. 로저  반 델  웨
이든, 디에릭 부츠, 그리고 한스 멤링은 제단 장식을  위한 지옥의 모습들을 뛰어나게, 심지
어는 아름답게까지 그렸다. 하지만 인습적 수준을 훨씬 넘어선 화가는 보쉬였다.
  히에로니무스 보쉬는 지옥을 참으로 독창적으로 그린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다. 제
단 장식을 할 때 보통 3면에다가 그림을 그려 넣는 15세기 후반의 관습에 그대로 따른다면,
가운데에는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오른쪽 화관에 그린 지옥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왼쪽 화
판에는 천국이나 에덴 동산의 그림을 그려 넣을 테지만,  보쉬의 그림에서는 지옥이 슬그머
니 전체적인 구성을 차지하였다.
  보쉬는 스헤르토헨보쉬라는 플랑드르 지방의 마을에서 살았고,  그의 이름은 거기에서 따
온 것이다.(그의 성은 반 알켄 이었다.)  그곳은 벨기에 국경과 라인 강변에서 가까운,  현재
네덜란드에 있는 마을로서, 중세가 쇠퇴하면서 새롭게 번창한 중산층 도시의 하나였다. 당시
는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이 중세  교회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고, 보쉬와  그의 가족들 역시
성모 마리아를 받드는 여러 종교 집단 중 하나인 성모형제회Brotherhood of Our Lady에 속
해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네 삼촌 가운데 적어도 세 명, 형제 구센 등이  모두 화가였으
나, 할아버지가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마을의 프레스코 화만이 남아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
의 그림들은 남아 있지 않다. 1479년과 1481년 사이의 어느 해에 그는 어떤 돈 많은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림을 몇 번 위촉받은 때에  대한 기록 외에, 그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이것뿐이다.
  미술사가들의 호기심과 당혹 감을 자아냈던 거의 그림들은, 지옥의 역사를 지켜본 사람들
에게는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것이다. 보쉬가 글을 읽을 줄 알았든 그렇지 못했든 간에, 그
는 그가 살던 시대 사람이었다. 그 시대의 지옥에는  우의적인 환상, 문학적 패러디, 신화와
속담에 대한 풍부한 전통이 있었고, 반교권주의,  기괴한 언동, 외설, 어릿광대짓 따위가  그
내용으로 담겨 있었다. 보쉬는 이것들을 섞어서 그림을 그렸고, 반복해서 여러 가지  변용을
시도했다. 지옥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의 관심을 끈 주제임에 틀림없다. 에덴을  그린그림
에서조차 반역천사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한편에서는 쥐, 개구리,  사슴을 대수롭지 않게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그가 중앙 화판에  그린 그림 중에는 건초를 실은 마차Hay-Wain가
한 악마를 태우고 지옥을 향해 달리는 장면이 있고, 비엔나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심판' 그림
의 중앙의 화판은 연옥과 관련한 것으로 보인다. '지복의 정원Garden of Earthly  Delight'은
종래의 지상낙원보다는 베누스베르크나 전설적인 코케뉴의 나라와 유사하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와 익숙하면서도 획기적인 장면들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슬리트 강
위로 미끄러지듯 달려가고, 악마들은 강기슭에서 희생물들을 쇠꼬챙이에 꿰어 굽거나,  납작
하게 냄비에 튀긴다. '건초차Hay-Wain'의 지옥에서는 '툰달의 소'가 다리를 건너하고,  '지복
의 정원'에서는 투달의 새가 죄인을  삼키고 배설한다. 단지와 납작한  냄비. 주방 기구들이
우리에게 요리사와 빵 굽는 사람들을 연상하게 해 주고,  그들은 악기들을 가지고 시끄러운
소음을 낸다. 우리는 그들이 받는 벌을 보고 일곱 가지 대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둥그
런 가마솥, 화덕, 지옥의 입을 나타내는 문들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다. 악마와 형벌의 양
태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제까지 보았던 것보다도 더 다양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기는 하지
만,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단테처럼 보쉬도 옛것을 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 보쉬의 그림에는 단테의 영향도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소재는 모두 다 북유럽 적인 것이었
다. )
  단테와 마찬가지로 보쉬의 혁신은 성공적이었다. 당시에  인쇄기는 발명되어 있었으나 사
진기는 없었던 탓에,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보게 된 사람들만이 그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  보
쉬의 후손들에게는 운 좋게도 대단한 후원자들이 있었다.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은 1504년
에 죽을 때, 그의 그림을 세 점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는 스페인이 네덜란드를 통치하고  있
을 때였다. 베네치아의 추기경 그리마니도 보쉬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낙원'과 '지옥'
이라는 그림이었던 것 같다. 이 그림들은  현재 도제 궁에 있다. 누구보다도 보쉬의  그림을
열광적으로 수집한 사람은 스페인의 펠리페2세(1527-1598)였다.  그는 이미 다른 이들의 소
장품이 된 것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펠리페는 심성이 그다지 좋지 못한 사람이었
다고, 광신적인 카톨릭 신자였다. 그는 피의 메리의 남편으로서뿐 아니라, 가혹한 이단 재판
을 남용한 주범으로도 악명이 높다. 그가 얼마나 보쉬의 그림을 열광했는지는 리스본,  에스
코리알 그리고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한 수많은 보쉬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다.
  지옥에 대한 이런 관심은 플랑드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귀족들은 어떤 악마성을 바
란 것일까? 안트워프와 브뤼셀을 그거지로 일했던 일군의 화가들은 그들이 얻고자 했던 것
이 그것이었다는데 동의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그림을 그렸고,  그들 중에는 얀 만딘, 피
터 후이스, 피터 브뤼겔(1525-15:69)과 그의 두 아들 얀 과 피터가 있었다. ( 피터는 지옥 풍
경화를 상당히 많이 제작했기 때문에 '지옥Hell'이란 별명을 얻었다. )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은 피터  브뤼겔(아버지)이었다. 그는 일곱 가지 대죄에 유머를
가미했고, '반역천사들의 타락 Fall of the Rebel Angels'(1562)에 부산스런 활기를 불어넣었
다. 그가 그린 것들 중 가장 기괴한  그림은 지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최후 심판일을  그린
'죽음의 승리The Triumph of Dearth' 다. 여기에는 여윈 말 위에 탄 죽음의 신이 해골을 가
득 실은 마차를 끌고 가는 장면이 있으며, 행진하는 해골  대열은 곡과 마곡의 병력을 나타
낸다. 그러나 훨씬 독창적인 그림 ' 악녀 그리에트 Dull  Griet(1534)' 이다. 브뤼겔의 유명한
작품들에는 민간 속담이나 격언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지옥 입구까지 가서 제물을 약탈하고
도 아무 탈없이 돌아올 만큼 대담무쌍한 한 아낙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여자를 혐오하는
내용의 잠언을 해학적으로 묘사한다. 악녀 그리에트('사나온 그레텔'이란 뜻)는 갑옷을  입고
큰 숟가락을 휘두르며 노획물을 담은 시장 바귀니와 자루를 들고 있다, 그녀는 주위에서 벌
어지는 악마들의 행동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브뤼겔의 아들들은 아버지에 비해 독창성이 떨어지고, 더  기회주의적이다. 얀 브뤼겔의 '
오르페우스'는 르네상스의 나체화, 보쉬의 그로테스크한 화법, 아버지의 유머를 비롯해서 온
갖 종류의 유파들에서 빌려온 여러 요소들을 버무려 놓았다. 그것은 어떤 용도로도 쓰일 수
있는 다목적 지옥 풍경화다.
  지옥을 그리는 데 일생을 바친 보쉬나 판매에 관심을 기울였던 브뤼겔 일가와는 달리. 미
켈란젤로(1475-1564)는 지옥을 한 번 밖에 그리지 않았다. 그가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벽
에 그린 '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 ' 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들 중 하나다. 비록
그림적 지배요소는 아니지만, 그의 지옥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시대에 가장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그의 긴
생애동안 그는 언제나 자신을 화가라기보다 조각가로 여겼지만, 사실상 양쪽 모두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돔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가 긴  생애
중 쌓은 온갖 업적을 여기에 전부 기록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 그가 비록 기독
교인이었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영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젊었을 때에
는 로렌초 디 메디치의 정원에서 배운  플라톤 사상에 심취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작품에는 확실히
고전적인 그리스 정신이 담겨 있다.
  미켈란젤로는 1508년부터 1512년까지 작업하여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을 완성했다.
이 기나긴 작업은 오랫동안 발판에 누워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 채 불편한 자세로 일해야만
하는 몹시 고된 일이었다. 그는 1534년 교황 클리멘스 7 세가  자신을 다시 불러 들였을 때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다. 당시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위쪽 가장자리  벽에는 페루지노의
프레스코 화가 그려져 있었다. 교황은  최후의 심판 그림을 원했고, 미켈란젤로에게  그것을
그리도록 명했다. 그 당시 미켈란젤로의 나이가 거의 60에 가까웠지만, 거절할 방법이  없었
다. 교황 클리멘스는 얼마 후 죽었으나,  그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3세 역시, 최후의 심판
그림에 대해서는 완강하였다. 그 웅장한 프레스코 화를 완성하는 데는 7년이라는 시간이 걸
렸다. 지오토는 스크로베니 예배당 벽화에서 자신을 구원받은 자들 편에서 그렸지만, 미켈란
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지치고 생기 없이 처진  자신의 모습을 성 바돌로매의 벗
겨진 살가죽 안에다가 풍자적으로 그려 넣었다. 중세의 관습대로라면 그것은 순교의 표시였
다.
  그림을 완성한 다음에도 그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조수 중 한 사
람인 비아지오 다 체지나의 비평을 듣고 미켈란젤로에게 나체를 거부한 남자들의 성기를 가
려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황을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화가 난  미켈란젤로
는 오히려 지옥에 머무는 미노스의 얼굴에 비아지오의 그다지 잘나지 못한 얼굴을 그려 넣
었다. 비아지오가 항의하자, 바오로 3세는 비아지오에게 이렇게 답했다. '화가가 그대를 연옥
으로 보냈다면, 나는 그대가 거기서 벗어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오. 그러나 나는 지
옥에 대해서는 아무 힘도 없소. " 후에 그의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4세는 다른 화가 다니
엘라 다 볼테라에게 전임 교황이 하고자 했던 일( 남자의 생식기를 가리는 일)을  시켰다. (
원래의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 1990년대에 대대적인 지우기 작업이 있었지만, 겹쳐 그려진
사타구니 천가리개와 마름모꼴 무늬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바티칸 당국은 시간을 아무리 많
이 들여도 그 부분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미켈란젤로는 초자연성을 나타내는 데 흔히 쓰는  후광과 날개 같은 치장을 그리지  않았
다. 그림에 들어 있는 유일한 날개는 하데스의 뱃사공 카론의 배 내지는 그 밑에 있는 어떤
피조물에 붙어 있는 것으로서, 다소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낸다. 악마들에게는 당나귀의 귀,
또는 작은 뿔이 달려 있고, 미노스에게는 뱀 꼬리가 붙어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면
서도 악마와 천사들은 사람의 모습에 가깝고 성구별이 분명하다.  전형적인 짐승 형상의 한
악마가 그림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 다름 아닌 준엄한 예수 -을 공격한다. 그 사람의 얼굴
은 자신이 정말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사람의 표정을 하고 있
다.
  천국의 네 강들은 그림 전체를 꿰뚫고 소용돌이친다.  그리고 왼쪽 (우리가 볼 때는 오른
쪽 ) 에서는 바람의 강물들이 스튁스 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그 너머로 불타는 플레게톤 강
이 흐른다. 지옥 자체는 그림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 그림은 변경을 그린 것이다. 연옥
Purgatory을 나타내는 가운데 하단 부에는  죄인을 굽는 가마솥 같은  거이 있는데, 소수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보인다.
 
      19 종교개혁   The Reformation
   
  12세기 이후, 교회에 대한 불만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날로 높아갔다. 성직자들의 부패, 무
지, 위선, 자가당착적 태도는 순수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괴롭혔다. 특히 면죄부를
팔아먹는 뻔뻔스러운 행위는 큰 반감을 샀다. 수도원의 막대한 부, 세금이 면제된 광대한 토
지( 유럽 전체의 1/3에서 1/2에 이를 정도였다),  집요한 헌금 요구, 정치 간섭 그리고 교회
법 집행을 위한 교회 법정  소유권 등은 세속 군주들을 분노하게  했다. 중산층 상업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독재적 계층 구조의 봉건 제도는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14세기에는 교황 두
세 명이 동시에 존재하였고, 이는 교회 성무를 업신여기는 경향을 부추겼다. 당시에  공개화
형은 대중의 여흥거리였고, 사람들은 이단자, 유태인, 문둥이, 마녀를 당연한  사냥감으로 여
겼지만, 그런 시대에도 이단심문의 잔혹함은 지각 있는 사람들을 격분하게 했다.
  15세기 중반, 인쇄기의 발명은 민중의 이러한 저항에 엄청난 도움을 주게 된다.  당시까지
교회는 평신도가 성서를 읽는 것은 이단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신자의 국어로 번역된 것
은 말할 것도 없고, 라틴 어 성경을 읽는 것조차 금하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이후로 번역
사본들이 암암리에 떠돌았고, 아무리 교회가 번역본을 없애려고 안간힘을 써도(번역자를 체
포했을 경우에는 번역자도 함께 태웠다.), 인쇄기의 보급은  교회의 희망을 꺾어 버렸다. 게
다가 참신한 사상을 담은 새로운 책들이 곧바로 더 많은 독서 인구를 확보하면서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 새로운 시대에  처음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람은 에라스무스(1466?-1536)였다.
그의 책은 수십만 부나 팔려  나갔다. 품위 있는 작가이자 깊이  있는 휴머니스트였던 그는
'우신예찬The Praise of Folly'(1511)에서 풍자한 바와 같이, 중세  교회가 곧 붕괴할 것이라
고 보았다. 그러나 그도 교회의 붕괴와 함께 일어날 대학살은 예견하지 못했다.  에라스무스
는 플라톤을 옹호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수용한 스콜라 학파의 형이상학과 신
학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반대했다. "그들은 마치 연옥이 수학 공식으로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항아리쯤 되는 것처럼, 그곳에서 보내는 기간을 연, 월, 일, 시간까지 정확하게 계산
하며, 마치 지옥에서 여러 해 살아 본 것처럼 그곳 풍경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는 교회가 벌이는 장사치 같은 사업, 예를 들면 면죄부매매, 순례 여행, 죽은 자
를 위한 미사, 그리고 구원을 위해 여타의 재정적 수단을 동원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성
서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이성과 지적 자유에 기반을  둔 평화로운 도덕 개혁을 주
창하였다. 한편, 여러 세기 동안 금서로 묶여 있던 오리게네스의 저작이 그 무렵 다시  읽히
기 시작하자, 에라스무스는 죽기 직전에 오리게네스의 신판을 준비했는데, 이 또한 시의  적
절한 일이었다. 에라스무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종교라는 이름 하에 자행된 16세기의 소름
끼치는 학살을 회상하면서, 그의 온건성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들은 에라스무스의  온건성
이 신념 부족 탓이라고 여겼다. 만약 에라스무스가 앞장을 섰더라면 낡고 사악한 예전의 교
회를 조화롭게 개혁해서 단일성을 유지하고, 한 세기에 걸친 학살과 박해와 대량 살상을 피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실제로 그 시대의  지도자가 된 사람은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사제 마르틴 루터
(1483-1546)였다. 주석 광산 인부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활달한  달변가였다. 그는 1517년
자신의 신념에 목숨을 걸고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면죄부에 반대하는 95개조의  논박문을
게시했다. 그는 색다른 투사였다. 스콜라 철학 타도, 성경으로의 복귀, 면죄부를 비롯한 부패
척결 등 그의 목표는  에라스무스와 다르지 않았지만, 루터는  점진적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대단한 정열과  의지가 있었으며, 하느님이  자신을 수도원으로 불렀고,
개혁자의 임무도 하느님이 직접 주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다.  루터는 독일 국민과 제후들
에게 교회에 불복할 것을 직접 호소했다. 그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자기 운명
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수도원에서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공부하였고, 중세 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
를 추종한 스콜라 철학자들이 정도에서 벗어났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독서를 하면서 그에게
가장 감명을 준  생각은 예정론predestination이었다.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을 구원하거나
벌할 수 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루터가 볼 때
교회가 사후세계에 간섭하는 당시의 모든 구조는 잘못된 것이었고, 탐욕을 채우려는 사악한
인간들이 꾸며낸 것에 불과했다. 그는 곧 로마 교황청을 "사탄에 사로잡힌 적그리스도의 권
좌"라고 여기게 되었다.
  루터는 연옥Purgatory이란 개념을 거부했다. 또, 중재자로서의 성모 마리아, 신격으로서의
성모 마리아를 포함하여 연옥과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했다.  그가 믿는 지옥은 아우구스티
누스의 무섭고 영원한 지옥, 즉 전능하신 하느님이 사악한 자들을 벌하기 위해 창조한 지옥
이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은총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하며, 그 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선행을 쌓은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나타내는 표시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고, 죽은 자를 위한 기도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느님은 악마를  창조하여
타락의 운명을 짐 지웠다. 루터는 옛날 사막의 교무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악마가 그를 괴롭
힌다고 믿었고, 전형적인 중세인이 그랬듯이 그의 창자와 악마를 연관해 생각했다. 말하자면
몸의 고통을 모두 악마의 장난으로 간주한 것이다. - 그는 실제로 위장에 가스가 차는 병과
심한 변비에 시달렸다고 한다. 루터는 마녀들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마녀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고 믿었다. 이는 마녀 사냥이  카톨릭 쪽보다 개신교 쪽에서 더  잔혹했던 이유를 잘
설명해 준다.
  종교개혁의 두 번째 지도자는 칼뱅(1509-1564)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주로
제네바를 무대로 활동했다. 칼뱅은 학생 시절에 루터의 사상을 접했으며, 20대 초반에  개종
했다. 칼뱅은 루터가 내세운 원리들에는 동의했으나, 예정론에 대해서는 훨씬 앞으로 나아갔
다. 그는 태초부터 하느님이 미리 정해 놓은 계획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역사라고 생각했
다. 17세기 중엽 케임브리지의 칼뱅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이든 천사든,  어떤 자에
게는 영생이, 어떤 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미리  정해져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리스
도는 만인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단지 선택받은 자들을 위해 돌아가신 것이었다. 사탄은
신의 명령에 따라 사악한 자들을 벌하는 행동을 한다. 기도, 선행, 임종 때의 참회, 사죄, 그
어떤 것도 냉혹한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칼뱅은  '이중 예정설'이 가혹하다는 것을 인정하였
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전제하는 이상, 그것은 논리적으로 일관된 견해였다.
  종교개혁의 세 번째 지도자인 츠빙글리(1484-1531)는 루터, 칼뱅과 함께 연옥Purgatory을
부정했다. 그러나 그는, 세례 받지 못하고 죽은 아이들의 영혼이 머무는 림보의 존재를 인정
했고, 죽음과 '최후의 심판'사이의 중간 상태도 인정했다. 이 기간 동안 선택받은  자들은 아
브라함의 '품'으로 간다고 칼뱅은 생각했다.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의 운명은 의심할 여지없이 '유다 서'에서 악마가 받는 운명과 동일
하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내려진 벌을 받기 위해 끌려갈 때까지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부활, 마왕의 존재 그리고 영원한 지옥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오리
게네스의 말에 따라 사면의 보편성을 주장한 재세례파는 루터 파와 카톨릭 양쪽에서 비난받
으며, 이중으로  박해받았다. 반면에  아르미니우스(1560-1609)는 '조건부  예정론conditional
predestination'을 제안했다. 조건부 예정론에서는 자유의지로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받도록
예정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르미니우스 파는 그 교의를 의심받기도 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
리 속에 점진적으로 파고들어 결국 이를 장악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거의 모든 프로테스탄
티즘은 어느 정도 아르미니우스의 색채를 띠고 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마침내 종교 전쟁이 끝났다. 유럽의 어떤 나라도 이 전쟁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스위스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나라는 종교 문제를 시민 투표에 붙였
다. 이탈리아의 경우, 비록 베네치아와 피렌체에서 개혁주의자들이 불평불만을 터뜨렸고, 몇
몇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의 스위스로 이주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카톨릭으로 남아  있었다.
그 이유는  일찍이 문예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그에 대한  관심을 일깨웠던  고전적 고대
classical antiquity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곳이 바로 이탈리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랜
교황적 위계 질서가 이탈리아 귀족 정치와 친족적 연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종
교 재판을 엄격히 행한 덕에 스페인에도 그럭저럭 카톨릭의  통제가 미쳤다. 또 포르투갈과
아일랜드도 카톨릭으로 남았고, 오스트리아, 동부 유럽, 그리고 불안하지만 프랑스도 그랬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모든 나라들은 루터주의를 국교로  채택하였고, 16세기 중반에는 독
일에서도 루터주의를 합법화했다. 독일은 지금도 어중간한  프로테스탄트 국가로 남아 있으
며, 루터 파와 칼뱅 파로 반분되어 있다.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그노 장로교를 채택한 존
녹스(1505-1572)가 주도해서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칼뱅을  추종했다. 네덜란드에 대해 이단
심문을 하려고 했던 스페인 왕 펠리페 2세는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 결과 네덜란드는 프
로테스탄트의 홀란드와 카톨릭의 벨기에로 나뉘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1491-1547)가 신앙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로마와 불과하기
시작했고, 영국 국교회는 '교황 없는  교황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헨리8세는 새로  유행하는
프로테스탄트 사상의 동조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고, 교회와 국가의 결합에 대해
불안감을 표시한 주교들의 목을 베었다. 그는 수도원들을 해산하고, 그 땅과 소유물들을  빼
앗았다. 그는 영어판 성서의 편찬을  장려했고, 카톨릭의 우상 숭배적 요소를  제거하면서도
고래의 미덕을 충실히 담은 영어판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권장했다. 아들
에드워드 6세도 헨리의 정책을 유지했다. 그리고 '피의 메리 여왕Bloody Mary'이 영국을 카
톨릭 국가로 되돌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영국으로서는 엘리자베스 1세의 오랜 통치(1558-1603)가 큰 행운이었다. 여왕은 동시대의
다른 통치자들이 갖지 못한 타고난 능력으로 협상과 절충이라는  두 기술을 한껏 활용했다.
영국 국교회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er(이 용어는 여자 '우두머리'
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불쾌감을 피하기 위해 쓰는  것이었다.)로 삼는 국교를
유지했다. 카톨릭 교도들은 벌금형에 처해졌지만, 박해받지는 않았다. 영국 의회가 교황권과
미사를 거부한 다음 해인 1560년에 스코틀랜드 장로파도 교황권과 미사를 거부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엘리자베스 시대는 영국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아주 중요한 시기에 현명한 통치
자를 얻었다는 점에서, 행운의 여신은 영국을 향해 이중으로 미소짓는 듯 했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영광은 그  시기에  등장한  희곡 문학,   특히 윌리엄   셰익스피어
(1564-1616)의 희곡에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천국과 지옥에  대한 주제를 다루지 않은 것은
약간 놀랄 만한 일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당시에는 그 주제를 다루지 못하도록 되어있
었다. 전통적인 기적극miracle drama은, 자체의 저급하고  소란스런 장면 때문에 16세기 중
엽에는 거의 전 지역에서 금지되었다.  영국에서 기적극은 1584년 코벤트리에서  열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영국 의회에게 마지막 남은  눈엣가시 같은 작품은 1589년  말로우가 내놓은
'파우스투스 박사의 비극적인 이야기Tragical  Historie of Doctor  Faustus' 다. 1594년에서
1597년 사이에 그 작품이 23차례 상연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포고령을 내린 뒤 이런 종류
의 극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종교극religious play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
도 유일한 대중 연극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것도 금지되었다. 이 해는 셰익스피어가  작가의
삶을 시작한 바로 그해(1589)였다. 이런 극들이 금지된 마당에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
들에게 남은 길은, 새로운 형태의 세속적  민중 오락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이  시대까지
통속극은 현학적이고 부자연스러웠으며, 한정된 상류계급 관객을 위해 상연되었다.
  따라서 '파우스투스 박사'는 시대의 전환점에 위치한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파우스투
스  박사'는  논쟁의  소지가  다분한  극이었고,  그  작품의  작가인  크리스토퍼  말로우
(1564-1593) 역시 물의를 일으킬 여지가 있는  젊은이였다. 그의 적들은 그가 무신론자이며
불경스럽고, 첩자 노릇을 하며 부도덕하다는(동성연애를 한다는) 비난을 하였다. 사실 이 모
든 비난은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말로우의 아버지는 제화공으로서 길드  회원이었다.
아버지의 경제적 형편상 말로우는 장학금을 받아야만 케임브리지에 갈  수 있었다. 그는 몇
가지 경범죄 때문에 학위를 못 받을 뻔했지만 직접 중재에 나선 국왕이 "거장 말로우는 '국
익에 영향을 주는 문제들  때문에' 학업을 소홀히 했던  것 같다." 면서  그를 옹호한 덕에,
1584년에는 학위를 받았고 3년 후에는 다시 문학석사 학위까지 받았다. 세간에는 그가 예수
회원들을 염탐하기 위해 몇 달 동안 랭스에 파견된 적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대학 당
국에서는 그것을 오인하여 그가 카톨릭으로  개종할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당시 영국에서
카톨릭 교도들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는 있었지만, 학위를 받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말로우는   극작가로서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23세에  발표한   '탬벌레인  대왕
Tamburlaine'(1587?)에서는 강인한 영웅을 창조해 냈고, '말로우적인' 무운시에서는 낭랑하면
서도 구르는 듯한 언어를 구사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유명한 희곡은 역시 '파우스투스  박
사'이다.
  '파우스투스 박사'는 '요한 파우스텐 박사의 이야기Historia von Dr. Johan Fausten'이라는
1587년판 독일어 책을 기초로 한다. 이 책은 1592년 신사 피 에프라 불린 사람이 영어로 번
역했는데, 말로우가 희곡을 쓴 시기는 이보다 앞선 1589년쯤인 것 같다. 피 에프의 책표지에
는 "요한 파우스투스 박사의 비난받아 마땅한 삶과 응분의 죽음에 대한 역사- 새로 인쇄한
판본이며, 필요한 부분은 수정했고,,,, '라고 써  있으므로 그 전 판본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은 소실된 이 책을 보통 '파우스트 서Faust book'라고 부른다.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철학자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된 것이며, 기독교 전설에서는 사마리
아의 시몬 마구스까지도 올라간다.  시몬 마구스는 1세기 영지주의자이자  마법사로서 사도
빌립에게서 세례를 받았다.(사도행전 8장 5절). 그리고 2세기의 외경인 '베드로 행전Acts  of
Peter'에 따르면, 베드로가 그를 떨어뜨려 머리가  깨져 죽는데, 죽기 전에는 로마 공장에서
요술을 부리며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과거에 창녀였던 헬렌이라는 여자가
그와 함께 여행을 하는데,  시몬은 그녀가 환생한 트로이아의  헬레네(그리고 소피아, 이브,
노아의 부인,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헬렌이 처음으로 그  이야기 속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의 항상 그 책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신성한 물건들을 팔고  교환하는
것을 일컫는 '시모니'라는 말은 시몬 마구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프로테스탄트에게는
로마 카톨릭의 면죄부와 성직 판매가 어리석은 시모니로 비쳤기 때문에, 시몬이라는 이름은
종교 전쟁 동안 수없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시몬은 '거짓 예언자'의 전형이었고,  모든
기독교 이단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단테는 제 8환에서 그를  아주 깊은 곳으로 떨어뜨려 놓
았고, 적그리스도의 표상으로 여겼다.  이 시기에 프로테스탄트들은 교황을  적그리스도라며
경멸했다.
  중세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삽화로 자주 그려졌던 이야기는  테오필리스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아마도 테오필리스 아르다나라고 불린 터키의 한 도시  교회의 부제가 아닌가 싶
다. 새로 임명된 주교가 자신을 해고하자, 테오필리스는 악마와 접촉하기 위해 유대 인 마법
사에게 간다. 거기는 그는 성공과 부에 대한 대가로 영혼을 교환한다는 계약서에 피로 서명
을 한다. 성공과 재물을 얻었지만 양심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악마와 다시 흥정하려고 시도
해 보았지만 실패하였다.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하던 도중 잠이 든 그는 꿈을  꾸었는데,
성모 마리아가 그가 맺은 계약증서를 들고 나타났다. 성모는  자신이 지옥에 내려가 악마에
게서 그것을 몸소 빼앗아 왔다면서, 테오필리스가 용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잠
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그 증서가 옆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고백성사를 하고, 평화 안
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이야기는 성모 마리아와 악마가 맞붙어 싸우는 수십 가지의 구
원 이야기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이다.
  실제 인물 파우스투스 박사는 1509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다음에
나오는 그에 관한 일화는 일단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감옥에 있을 때, 그는 그곳  사제
에게 만일 공짜로 포도주를 마시게 해 주면, 그 대가로 면도칼 없이 얼굴과 머리에 있는 털
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주겠노라는 제안을 했다. 포도주가 도착했고 파우스투스는 사
제에게 비소가 들어 있는 고약을  주었다. 물론 이 고약은 사제의  머리카락뿐 아니라 그의
피부까지도 없애 버렸다. 분명 이  가학적인 익살꾼은 점성가나 연금술사, 마술사로  개업을
했던 듯 하다. 또는 지금 우리가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자라고 생각하는 모든  인물들,
예를 들어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 존 디(1527-1608), 타코 브라헤(1546-1601),
지오르다노 브루노(1548?-1600), 프란시스 베이컨(1562-1626),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산네스
케플러 모두에게 어울리는 호칭인 '철학자'이기도 할 것이다. 17세기도 꽤 지난 시기에 뉴턴
은 연금술을 공부했고, 한 세기가 지난 후에 괴테 역시 연금술을 공부한 것이다.
  스콜라 철학이 프로테스탄트들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종교적인  연구는 카톨릭
교도에게 골칫거리였다. 모든 학식 있는 사람들이 '금지된'  지식을 추구하면서 얼마간 악마
와 협력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핵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라고 해서 이런
태도를 성급히 조롱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략 1590년에서  1620년까지는 마녀 사냥의 거
대한 물결이 유럽을 휩쓴 시기임을 명심해야 한다.  말로우가 '파우스투스 박사'를 집필하던
당시 '멕베스'에 나오는 것과 같은 '악마적인 인간들' 또는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개념은 상
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파우스트의 서'는 독일의 악명 높은 의사에 대한 여러 전설들을 하나로 모아 뒤섞은 책이
다. 말로우의 희곡 내용이 도중에 어수선한 흐름으로 바뀐 것은, 원본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
이다. 그는 여기서도 새로운 전통을 창조한다. 파우스트의 긴 계보에 속하는 주요  저작물들
은 한결같이 어수선하다는 특징이 있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같은 단편 작품들도 도중에 혼란스러워 진다. 결국 지옥의 특징  중 하나가 혼돈chaos인 것
이다. )
  메포스토필리스는 말로우가 '파우스트의 서'의 새 등장인물인 '위대한  루시퍼의 하수인'에
게 붙였던 이름이다. 사탄이 구약성서에서 여호와의 세속적 대리자였던 것과 꼭 같다.  메포
스토필리스는 그리스어로 빛을 증오하는 자Not-light-lover라는 뜻이다.  보통은 메피스토라
고 쓰는데 이것은 라틴어의 메피투스, 다시 말해 '악취가 나는stinking'의 뜻에 가깝다. 말로
우의 이 악마는 때때로 전통적인 야단스런 도깨비들imps의 시중을 받기도 하지만, 침통하고
심술궂고 심지어는 감상적인 구석도 있다. 그는 라블레의 작품에 나오는 고상하고 약아빠진
마법사, 파뉘르즈('모든 것을 만든다'는  뜻이며, 영지주의의 조물주  데미우르고스를 흉내낸
이름)를 원용한 듯하다. 메포스토필리스는 유혹자도 거짓말쟁이도 아니다. 대신 그는 자신의
운명에도 파우스투스의 운명에도 개의치 않는다. 파우스투스는 회의주의적인 '과학적'사고방
식 때문에 영혼도 지옥도 믿지 않는다. 사후에 어떤 세상이 있다면, 파우스투스는 흔쾌히 그
리스, 로마 신화의 내세를 택할 것이다.
 
    '천벌damnation'이란 말도 나를 위협하지 못한다.
    나에게는 지옥도 낙원도 하나이므로,
    내 영혼은 옛날의 철학자들과 함께 하노라.
 
  그렇지만 파우스투스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는 메포스토필리스에게 이것저것 캐묻
는다.
 
파우스투스 : 루시퍼와 함께 사는 너는 대체 누구냐?
메포스토필리스 : 루시퍼가 하느님께 대항할 때  함께 했고, 그가 떨어질 때 함께  떨어졌고
그와 함께 영원토록 저주받은 불행한 영혼이다.
파우스투스 : 너는 어디에서 영벌을 받느냐?
메포스토필리스: 지옥에서
파우스투스 : 그렇다면 어떻게 지옥에서 나왔느냐?
메포스토필리스 : 무슨 얘기를 하는가? 여기가 바로 지옥이다. 나는 지옥 밖으로 나오지 않
았다 . 생각해 보라. 하느님의 용안을 뵙고  천국의 열락을 누리던 내가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었는데, 그 고통이 만개의 지옥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자 다시 묻는다
 
파우스투스 : 그렇다면 지옥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말해 보라.
메포스토필리스 : 하늘 아래에.
파우스투스 : 아니, 이 세상 만물은 다 하늘 아래 있지 않은가. 지옥은 어디쯤 있는가?
메포스토필리스 : 우리가 고통받으며 영원히 머무는 곳에 있다. 지옥은 경계도 없고 고정되
어 있지도 않다. 우리가 있는 곳이 지옥이다. 또 지옥이  있는 곳에 우리도 영원히 있다. 요
컨대 온 세상이 해체될 때 모든 피조물은 깨끗해지고 모든  곳이 지옥이 되고, 천국은 어디
에도 없으리라.
파우스투스 : 죽고 나면 어떤 고통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나 파우스투스가 생각하고 있는 줄
아느냐? 아니다. 그런 것들은 한 푼 값어치도 없는, 늙은 아낙들이나 하는 사설에 지나지 않
는다.
메포스토필리스 : 그러나 파우스트, 내가 그 증거가 아니냐? 나는 저주받은 몸이고 지금 그
대로 지옥에 있는 것이다.
파우스투스 : 어째서 여기가 지옥이란 말이냐? 오냐, 좋다.  이곳이 지옥이라면 나는 기꺼이
여기서 벌을 받겠다. 어떻게? 잠자고, 먹고, 걸어다니고, 입씨름하면서.
   
  파우스투스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만, 메포스토필리스는  이 세상이
지옥이라는 영지주의적 견해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메포스토필리스는 '유죄 선고
를 받는 고통poena damni'과 '죄인들이 육체로  경험하는 고통poena sensus'이라는 오래된
이분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  두 가지 벌을 교묘하게 뒤틀어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진
악마가 육체의 고통보다는 박탈감이라는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파우스트 서'의
지은이보다 학식이 놓았던 말로우는 자신이 프로테스탄트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분법의 사용
도 용인될 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연옥이라는 정화의 장소를 얻은 카톨
릭 교도들에게는 그런 이분법이  허용되지 않았다.) 물론  파우스투스는 마침내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지옥을 앞두고, 눈물을 자아내는 통속극에서처럼 육체의 고통poena sensus을 당하
게 된다. 이런 결말은 관객들이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다.
  루시퍼, 바알세불, 메포스토필리스가 천둥 속에서 나타나 파우스투스가 마지막으로 고뇌하
는 모습을 지켜본다. 중세의 세밀화에서 볼 수 있듯이, 임종에 처한 사람의 영혼을 차지하려
고 서로 다투는 선의 천사와 악의 천사들이 나타난다. 그런데 선한 천사들이 권리를 포기하
자, 장막이 걷히고 무서운 지옥의 입이 열린다.
  "오 파우스투스여 이제 네 생명은 겨우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파우스투
스의 처절한 독백은 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연기해 보고  싶어하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그
리고 명배우 에드워드 알렌은 이 독백이 그를 위해 씌어졌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부분에
서 무대 전체를 뒤흔드는 열연을 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감동적인 시구와는 별도로, 여기에
는 미묘한 사상적 문제가 숨겨져  있었다. 파우스투스 이야기는 테오필레스 이야기와  달리,
주인공이 지옥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파우스투스의 죄악이 너무  컸기 때문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이 어떤 중재자의 중재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는
스스로 선택한 것 같지만) 파우스투스의 지옥행은 예정된 것이었고, '하느님의 엄청난 진노'
를 피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전대미문의 매우  아름다운 시구로 그리스도에게 호소
한다.
  
  아아, 우리 주님 계신 곳으로 올라가련다!
  나를 밑으로 끌어당기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보라, 보라,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는 창공을 보라.
  그의 피 한 방울만으로도 나는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
  오 그리스도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내 가슴을 찢지 말지어다.
  나는 그리스도께 청하련다......오 나를 살려다오, 루시퍼......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리 안에서는 그 누구의 자비도 엄정한 심판을 누그러뜨릴 수 없기
때문에 임종 직전에 회개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 루시퍼는 예전
에 이미 파우스투스에게 경고해 두었다.
 
  그리스도는 네 영혼을 구해 줄 수 없다.
  그는 엄정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길 말고 다른 방도가 없구나.
 
  파우스투스의 가슴 저미는 애원도, 그가 상기한 피타고라스의 철학(윤회설)도, 그 어떤 것
도 그가 받을 영원한 벌을 한  치도 덜 수 없고, 지옥문 안에서  그의 사지를 찢어발기려고
괴성을 지르는 악마들의 손아귀에서 그를 벗어나게 해 주지도 못한다. 그리스도의 피 한 방
울이라는 이미지는 성서에서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물 한 방울을 청했던 것을 언급하는 것이
다.
  말로우는 말다툼을 하다가 칼에 찔려 죽었는데, 그가 서른 살도 되기 전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퀸 맵의 말솜씨로 능변을 구사하는 익살꾼 머큐쇼는 말로우를  모델로 한 것이
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매우 타당성 있는 추측이다.
  셰익스피어는 부분적으로는 그의 경쟁자인 말로우 덕택에 종래의 문학 전통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것은 셰익스피어 자신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그의 희곡에는 당시의  미신
이나 믿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매력적인 장면들이 많고, 그러한 것들은 그가 종교적 주제들
을 피하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 아주 잘 보여 준다. 가령 '햄릿'(1602)은- 신학적으로 건
전한 '파우스투스 박사'와는 달리-온갖  종말론적 모순의 혼란스런  총체였고, 또한 민중의
격식 없는 신앙을 그대로 반영하는 거울이었다.
  '햄릿'에는 우선 망령ghost이 등장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망령을  믿었고, 카톨릭
교회는 망령들을 연옥과  관련지었다. 셰익스피어도  ('맥베스'에서는 아니지만 )'햄릿'에서
망령의 입을 빌어 연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셰익스피어는 카톨릭 신자가 아니었던 데다가,
영국 국교회 '공동 기도서' 제  22조는 연옥이 '분별 없는  것'이고, '하느님의 말씀에 모순
하는 것'이라며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엘리자베스  시대의 일상적인 신앙 속에는 연옥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망령이 그릇된  교리에 대해 언급한다는 것 자체
가 망령이란 변장한 악마와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네 아비의 망령,
  밤에는 겨우 정해진 시간을 헤매 다니지만
  낮에는 겁화 속에 갇혀서 단식의 고통을 당한다.
  생전에 저지른 비열한 악행이
  불에 타서 깨끗이 씻길 때까지는 참아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비밀을 누설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내가 말하는 한 가지 이야기만으로도
  네 정신은 완전히 혼란해지고 그 젊은 피는 얼어붙을 것이며
  두 눈알은 유성처럼 튀어나가고
  헝클어진 네 머리카락도 온통 풀어져서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곤두서게 되리라.
   
  햄릿은 숙부 클로디어스가 부왕을 죽였다는 사실을 '쥐덫'의 계략을 써서 알아낸다. 하지
만 숙부가 기도하고 있을 때 죽이면 자칫  그를 천국으로 보내게 될까봐 살해를 뒤로 미룬
다. 그리고 클로디어스가 육체의 향락에 빠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다.
 
  그때에 일격을 가하면 놈의 뒷발은 하늘을 차고
  오욕스러운 영혼은 지옥 같은 시커먼 빛깔에 물들어
  그대로 거꾸로 떨어질 것이다.
 
  그것은 아주 전통적인 생각이었지만-종막 부분에서 호레이쇼가  읊는 대사, '천사들의 노
래에 실려 안식의 세계로 가소서.'라는 구절을 빼면, 극중에서  유일하게 전통적이고 종교적
인 사고방식을 담은 부분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햄릿이 선왕의 망령을 보고도 진짜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세운 단순한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밖에  다른 장면에서
보이는 내세관은 불분명하다.
 
  누가 이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지루한 인생 고에 신음하며 진땀을 빼겠는가.
  사후의 어떤 것에 대한 공포,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저 미지의 나라가
  우리의 의지를 흐려놓지 않았던들,
  그리고 그 미지의 나라로 날아가기보다
  오히려 이 세상의 번민을 짊어지도록 마음먹게 하지 않았던들.
 
  햄릿 왕자의 명상은 당시 프로테스탄트나 카톨릭 교회의 어느 쪽 생각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어떤 면에서 오히려 더 근대적인 것이었다.
  묘지에서 햄릿은 해골을 가지고 놀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카이사르의 유해가 진흙이
되어 맥주 통의 구멍을  메우는데 쓰일지도 모른다는  농담을 하고, '죽음의  무도Dance of
Death'를 인용하기도 한다. ("자, 내 아내의 방으로  가서 이렇게 말하고 오너라. 얼굴에 분
을 한 치나 발라도 결국 이런 꼴이 되는 거라고.") 이것은 사후 세계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강조한 15세기의 죽음의 표정memento mori이다.  '맥베스'1606)에 나오는 '먼지 같은  죽음
dusty death'도 역시 마찬가지다. '맥베스'는  마법적이고 악마적인 것에 깊이  기대고 있지
만, 거의 과도할 정도로 사후세계에 대한 언급을 기피하고 있다. 그보다 30년 전쯤에 씌어진
이야기였다면, 맥베스와 그 아내는 곧장 지옥의 입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e'(1604)에서 클로디오는  햄릿의 위대한 대사를 재현하
고 있다. 불길과 얼음,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처럼 바람에 갇힌 영혼,  고문 때문에 신음하는
소리 같은 지옥의 오래된 광경을 묘사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중세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죽어서 어느 곳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차디차게 꼼짝 않고 누워서 썩는다는 것은,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따스한 육체가
  이겨 놓은 진흙이 되고
  즐거워하던 영혼이 불바다 속에 빠져 든다든지,
  또는 두껍게 둘러싸인 몸서리쳐지는
  얼음 지옥 속에 파묻히게 된다든지
  공중에 매달려 있는 지구 둘레를 쉬지 않고 강렬하게 불어대는
  형체 없는 바람 속에 갇혀 있게 된다든지
  또 무법 천지의 덧없는 생각으로도 상상 못 할
  가장 고약한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너무도 무서운 일이야.
  늙는다든지 병고라든지 감옥에 갇힌다든지
  이런 가장 진저리나고 가장 싫은 이승의 일도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그래도 마땅히 극락이라 할 수 있지.
 
  여기까지가 셰익스피어가 이 주제에 대해 표현하는 전부다. 확증할 수는 없지만, 필경  극
작가들은 중세 풍의 진부한 표현들cliches에 식상해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이아고와 맥베스는
자신을(득의양양하게)악마들에 비유하고 있고, 앤 여왕은 리처드 3세를 악마라고 노골적으로
힐난했으며, 그녀의 남편은 '리어 왕'에 나오는 고네릴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가 묘사한 극악무도한 자들은 여전히 철저하게 인간적이다. 공포에  대한 서술들은 존 웹스
터와 시릴 터너의 복수극에서 특별히 점점 더 잔인해지고  파렴치해지는데, 그런 경향은 셰
익스피어의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어떤 희곡에서
도 웹스터의 '몰피 공작부인The Duchess of Malfi'(1613)만큼 무시무시한  죽음을 연상시키
는 구절은 없다.
 
  나는 지옥에 대한 이런 저런 의문으로 어지럽다.
  지옥에는 단 한 가지, 영겁의 불길만이 있지만
  모든 이가 한결 같은 고통을 당하지는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를 썩 꺼지게 하라, 죄지은 자의 양심이란 얼마나 끈질긴가!
  뜰에 있는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갈퀴가 달린 것 같은 어떤 것이
  나를 때리려 하는 듯하다.
 
  프랑스 테카당트 파의 어떤 작가도 이와 같은 심상이나 염세성을 표현하지 못했다.
 
  20.   바로크 시대의 지옥
      Baroque Hell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교회는 도미니코 회 수도사들과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들  사이
의 알력으로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종교 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어려움을 잠시
모면할 수 있었지만, 곧 설자리를 잃고 말았다. 베네딕트 회 수도사들만이 윤택한 생활을 하
고 있었는데, 빈궁해진 군주들은 베네딕트 회마저 그냥 놔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반  종교개
혁 운동을 주도할 임무는 참신하고 정력적인 예수회Society of Jesus에  맡겨졌다. 예수회는
유서 깊은 바스크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난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가 1540년 창
립한 단체였다. 로욜라는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현역에서 물러난 뒤, 긴 요양 기간동아 아서
왕 이야기를 비롯한 궁정 로망스와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탐독했다. 이러한 독서 경험을 통
해 그는 신성한 기사도라는 봉건적 이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원치 후에 그는 공
부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젊은 기사로서 그가 받은 교육은 초보적인 수준이었다-33세에 바
르셀로나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이단심문의 화를 피해 파리로 건너간 로율라는 그
곳에서 44세에 마침내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가 새로운  단체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줄 여러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그가 창립한 교단은  카톨릭을 개혁하고 프로테스탄트 세
력이 잠식해 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효과적인 휘 계통을 세워 발전시켰다.
  예수회의 이념은 자기 자신의 영혼만이 아닌 이웃의 영혼도  함께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
런 점에서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를  함께 행하는 교단이다. 예수회원들은  예수회의 신념을
아시아와 동남아와 인도차이나 반도들에 있는 국가들 그리고 아메리카대륙으로 전파하였다.
그들은 카톨릭의 전통적 체계에 진실함, 생명력 신선한 사상을 불어넣었다. 또한 새로운  바
로크 예술에도 똑같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과학 분야에서도 - 한정된 분야에서 한해서는
- 당시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았다. 17세기 초 중국에 간  예수회 선교사들은 정확하게 일식
을 예측하였다 나중에 그들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부동의 신 주
위를 도는 것과 같다는 견해를 표명함으써 갈릴레이 문제와  관련하여 실수한 것일지도 모
른다고 공식적으로 시인했다.
  근대 초기, 인쇄된 서적이 유통되고 교육 수준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교육에
힘쓰던 예수회 수도사들은 재빠르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변화를 선도할 수 있는 위치
를 차지했다. 왜냐면 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의
자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부르크하르트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
했다. '르네상스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에 이탈리아  중상류 계층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느끼
는 감정은, 경멸에 찬 뿌리 깊은 반감, 이상화된 외형적 교회관습 묵인, 그리고 성사와 각종
의식에 대한 의존감, 이 세 가지가 뒤섞인 것이었다. "예수회는 그런 감정을 바꾸어 놓는 작
업에 착수했다.
  그 효과적인 접근 방법의 하나가 지옥을 바꾸는 것이었다.  당시까지의 지옥은 확실히 무
시무시한 부분도 있지만, 그와 동시에 시선을 잡아끄는 활극적 요소도 많았다. 사실  예수회
가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오락적이었다. 지옥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켜 선행을 유도할 수 도 있었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지옥을 그
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회는 거추장스런 장식을 없애 버렸다. 그들은
불구덩이를 제외한 모든 고문을 없앴고, '결코 잠들지 않는 벌레'만을 남겨 놓고 나머지 괴
물들도 전부 없애 버렸다. 물론 불과 벌래가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기는 했다
(아마도 그 벌레는 나쁜 양심에 대한 은유일 것이다.) 글들은 당시 상황에 딱 맞아떨어지는
것 -발로 도시적인 비열함을 지옥에 첨가했다.
  예수회가 말하는 지옥은 사람들로 꽉 들어차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히고 불쾌했
다(아마도 새로 이주한 프로테스탄트들이 수백만이나 되었기 때문이리라). 지하 토굴과 시궁
창을 한데 혼합해 놓은 것 같이 몹시 습하고, 폐쇄 공포증을 일으킬 것만 같은 그곳에는 고
상한 체하던 귀족들과 부유하던 상인들이 서로 난폭하게 떠밀고  있으며, 거칠고 고약한 냄
새를 풍기는 불결한 농부와 나병 환자, 빈민들이 한데  어우러져 볼과 턱을, 배와 궁둥이를,
입과 입을 맞대고 서로 밀치고  있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육신은 예수가  부활할 때 영광을
누리지만, 저주받은 자들의 몸뚱아리는 기이한 형태로 변하고,  부풀고 , 맥없이 흐늘흐늘하
며, 병들어 역겨운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포도 압축기 속에 한데 쏟아 부은 포도알  같은
모습이었다(이것은 그들이 가장 즐겨 사용한 이미지다). 그곳에는 땅을 파 만든 임시변소도
없었다. 지옥의 고약한 냄새는 인간이 풍기는 것이었는데, 몹시 역겨웠으며 끝도 없이  계속
풍겼다. 그 냄새는 오물, 배설물, 전염병, 고름이 흐르는 종기, 불쾌한 입냄새가 뒤섞인 것이
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부유한 고객들이 마음을 고쳐먹도록 하기  위해 그런 악취를 창조
적으로 고안한 것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이미 악취 나는 작업장에서 중노동을 하며 말로 표
현할 수 없이 가난하게 살아온 도시 하층민들에게도 두려움을 주었지는 알 수 없지만, 상류
층과 중류층에 영향을 준 것만을 분명하다.
  지옥에서 불을 뺀 모든 고문이  사라진 것을 보고 탐탁찮게 여기던  삶들도, 이 연금술적
시대에 어울리는 불의 속성을 깨닫고 안심하게 되었다. 가령  1682년 로몰로 마르켈리에 따
르면, 지옥불은 벌레나 뱀에게 산 채로 잡아먹히거나,  면도칼이나 화살에 베이거나, 가슴이
저며지고 뼈가 부서지고 관절이 어긋나고 사지가 절단되었을 때의 고통은 물론이고, 굶주림
의 고통, 칼에 찔려 죽거나 목이 잘리거나 화장 당했을 때 또는 야생 동물에게 사지가 찢겨
죽을 때의 모든 격렬한 공통을 '증류하여 압축한' 불이다. 지옥불은 그 모든 조그만 불똥 속
에도 그런 고통을 담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에서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마음을 그토록 심란하게 한 무시무
시한 설교는, 300년 동안 완벽하게 보존되어 온 예수회의 지옥을 소름끼칠 정도로 상세하게
보여준다.
  예수회원들은 지옥에서 악마도 다  추방했다. 서로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일으키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는 한, 악마도 필요하지 않았다. 여하튼 악마는 이제  새로운 임무가 맡았
는데, 그 임무란 이 곳 지상에 있는 인간들 - 특히 가난하고 늙은 여자들 - 을 유혹해서 타
락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녀 사냥 시대에 예수회가 '마녀'들에게 보여준 태도는, 도미니코
화가 이단자들을 대했던 태도와 같았다. 마녀 사냥은 르네상스와  같은 시기에 시작해 19세
기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특기해야 할  것은 마녀 사냥이 카톨릭  국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귀들의 중대장이라 할 수 있는  사탄이 마녀들의 수장으로 지복되
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관계, 예를 들면 야간 비행, 악마적 난장판, 사악한 주문  등등,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붙잡혀 고문 받을 뒤  낱낱이 고백하는 역겨운 소행들은 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교도를 막론
하고 지옥에 대한 진지한 토론에서 사탄을 결코 등장하지 않았다.
  예수회원들은 악마가 이단자나 무신론자 또는 파우스투스와 같은 철학자들을 위해 늘  시
간을 낸다고 하였다. 그래서 브루노는 화형을 당했고, 갈릴레이는 거짓말을 해서야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으며, 존 디는 마법사라는 위험한 혐의를 받았다. 때는 17세기  중엽이었는
데도, 테카르트는 신상의 위협을 느껴 프로테탄트 국가인 홀란드로 이주해야 했고, 그  뒤에
볼테르와 루소는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예수회원들은 필요하다면 악마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리고 평신도들이 종교극을 상연하
는 것이 금지되어 있던 탓에 예수회가 종교 연극을 떠맡게  되었다. 1597년 뮌헨에서 성 미
가엘 교회의 헌당식이 행해질 때, 그것을 축하하는 대규모 야외 무대가 마련되었고, 수백 명
에 이르는 배우, 악단, 용,  죄인, 이단자 등이 등장했다. 그리고  종막에서는 악마로 분장한
연기자 300명이 사상 최대의 지옥의 입으로 뛰어드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예술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던 화가들은 사랑스런 어린아이 푸디(쿠
피도)의 장밋빛 육체를 그리고 싶어했으며, 예수회에서  말하는 지옥에 대해서는 매력을 느
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최초의 예수회 교황인  제수교회의 휘황 찬란한 천장
그림은 대단한 기술과 독창성으로 예수회의 신성한 이념을 추하지 않게 전달하면서 뮌헨 축
제의 정신도 반영하고 있다. 이 천장 벽화는 베르니니의  후계자인 일 바치조가 1670년에서
1683년에 걸쳐 최신 바로크 양식의 원근법과 모든 기법을  동원하여 그린 것이다. (그림24).
천국의 둥근 천장은 실제로 열려 있는 듯하고 , 축복  받은 이들이 그룹들과 천사들과 함께
황홀하게 위를 바라보면서, 신이 산다는  최고천으로 올라가는 것 같다. 천장의  가장자리와
모퉁이 부분에서 천장화는 조각상으로  바뀌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저주받아 파멸한 자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어 몸부림치면서 아래로 굴러 지옥에 떨어지는 것 같다 - 또는 보는 이
의 위치에 따라서 교회 회중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도 있다.
  바로크 시대는 항상 오페라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예수회도  유럽 카톨릭 국가들의 귀족
왕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므로 오페라나 발레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1600년에서 1607
년 사이에 만들어진 최초의 피렌체 오페라 세 작품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의  이야기에
기초를 둔 것이다. 이 오페라들은 특수 효과를 갖춘 지하 세계의 광상곡이나, 우화적인 발레
를 통해 골치 아픈 종교적 문제들을 피해 가는 방법을 보여 주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가 1607년에 작고한 세 번째 피렌체 오페라 '오르페오Orfeo'는 오페라 사상 처음으로 큰 인
기를 얻었다.
  공연 횟수를 놓고 볼 때 이교도적 소재인  오프페우스 이야기와 겨룰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로테스탄트의 파우스투스와, 카톨릭의 난봉꾼'돈 후안Don  Juan'뿐이었다. 대개의 극에서
돈 후안도 파우스투스처럼(꼭 그렇진 않지만)자기 죄 때문에 지옥으로 끌려간다. 18세기 후
반에 모차르트가 '돈 지오반니'를 작곡하고, 괴테가 쓴  '파우스트' 단편의 초판에 파우스트
가 그레트헨을 유혹하는 이야기가 첨가된 뒤에야 파우스트와 돈 후안은 서로 비슷한 인물이
되었다. 비록 1829년 크리스티안 디트리히 그라베의 희곡에서 파우스트와 돈 후안이 사랑의
경쟁자로 함께 등장한 예도 있기는  하지만, 베를리오즈나 보이토, 구노의 오페라에  영감을
준 것은 괴테가 '파우스트'의 제1부에서 창조한, 파우스트와 돈 후안이 한데 합쳐진 인물이
라고 할 수 있다.

 

    21. 밀턴의 실락원Paradise Lost
  존 밀턴(1608-1674)은 한 세대 먼저 케임브리지에 다닌 크리스토퍼 말로우와는 아주 다른
인물이었다.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한 밀턴의 아버지는 공증인 일을 하며 때로는 대금업을 하
기도 한 사람이었다. 존 밀턴은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 케임브리지에 다닐 때 밀턴에게는 귀
부인(Lady)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 별명은 그의 수려한  용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고상하
고 얌전한 행동 때문에 붙을  것이었다. 그의 가족은 밀턴에게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키려고 했지만 밀턴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문학사와 문학석사 학위를 위해)대학에
다닌 7년 동안 밀턴은 '쾌활한 사람 OnL'Allegro' '사색하는 사람 Il Penseroso'  등의 시를
썼다. 이 세 편의 시를 통해 그는 지방에서 명성을 얻었고, 문학가의 삶을 살겠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다.
  관대한 아버지는 그가 이탈리아로 - 그곳에서 그는 갈릴레이를 만났다 - 여행을 떠날 수
있도록 허락했으며, 그는 거기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20년 동안  종교의 자유를 옹호하는 글
들을 썼다. 당시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들이 영국에 종교 분쟁의 싹을 틔워 내전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또 밀턴은 번역가,  편집자로서 활동했고, 때로는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정군에서 정치를 하기도 했다. 그 는 세 번 결혼했고,  첫 부인에게서 세 딸을 두었다. 그는
점점 눈이 나빠지다가 1562년에 가서는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그가 언제나 집필하겠
다던 위대한 서사시의 첫 구절을 쓰기도 전이었다. 찰스 2세 왕권을 되찾았을 때, 그가 교수
형을 당하지 않고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도 눈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앤드류 마벨이
그를 변호했다고 한다.
  밀턴은 때때로 청교도 시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인 '실
락원Paradise Lost'에서는 전혀 청교도답지 않았다. 칼뱅주의가 영국 교회에 침투하던  시기
에 태어난 밀턴은 영국 국교도로 성장했고, '실락원'의 전반적인 관심사는 예정설을 논박하
고 자위의지를 증명해 보이는 것이었다. 사탄은 천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더 사악한 짓을
선택했는데, 우리들은 사탄의 그러한 뒤틀린 생각을 모두 공유하고 있다. 어리석게 유혹  당
한 이브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락원'의 관점에서
보건대, 아담은 이브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압도하게 되면,  (비록 그 세세한
결과까지는 모른다 해도)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실상 밀턴은 '
실락원(1667년 출판)을 집필하기 시작했던 때에 이르러 꽤  독자적인 종교적 관점을 지니게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관점은 당시의 다른 지식인들과 보조를 맞춘 것이었지만, 대부분의 다
른 지식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힐 정도로 용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밀턴은 시
에 자신의 견해를 짐짓 어지럽게 늘어놓았고, 그 결과 후세에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종교적
으로(또는 비종교적으로)서로 대립하는 각각의 진영에 서서,  '실락원'을 아전인수격으로 끌
어들이기도 했다.
  '실락원'이 재료로 삼은 자료들은 방대하다. 스페인의 위대한 르네상스 극작가인 세르반테
스(1547-1616, 베가(1562-1635), 바르카(1600-1681)는 모두 악마의 운명을 주제로 삼았다. 폰
델(1587-1679)의 '루시퍼'가 이름을 날릴  무렵, 홀란드의 그로티우스는 라틴  어로 '아담의
추방Adamus Exul'을 썼고, 밀턴도 이  작품을 읽었다. 프랑스의 바르타스(1544-1590)는 천
지창조와 타락을 주제로 위그노Huguenot교 스타일의 시 한 수를  썼다. 이 시는 1605년 실
베스터에 의해 '성주간과 천지창조 The Divine Weeks and Works'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영국에서도 널리 읽혀지고 있었고, 밀턴도 이 시를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실락원' 제
3편 천사들의 찬송에 나오는 '불변의, 불멸의, 무한의'라는 구절은 여기에서 빌려온 것이다.
  밀턴이 묘사한 사탄은 장엄하면서도 거대했다. 밀턴의 사탄을 놓고  수세기 동안 종종 엄
청나게 열띤 토론이 벌어졌지만, 여기서는 우주론Cosmography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그 토
론에 대한 언급은 피하겠다. 하늘에서는 바야흐로 긴박한 전쟁이 벌어지며, 하느님은 아들을
보내 미가엘과 그의 천사 군대를 지원한다. 그렇게 되자 사탄과 그 군대는 곤경에 처한다.

  (신께서 사탄과 그의 군대에 )
  불을 붙여 무서운 타락과 파멸을 가하시고,
  청화천에서 바닥 없는 지옥으로
  거꾸로 내던지셨다. 거기, 금강의 쇠사슬과
  형벌의 불 속에 살도록 하셨다.
    
  9일동안 그들은 혼돈Chaos속으로 떨어졌다.
 
  드디어 지옥은 입을 벌리고
  그들은 모두 삼킨 뒤 그들 위로 닫힌다.
  지옥은 그들에게 합당한 곳,
  꺼지지 않는 불이 가득한, 슬픔과 고통의 집.
 
  그들은 불타는 연못에 물을 튀기면서 내려앉았고, 주위를 둘러보고 자신들이 밝은 천사의
모습에서 많이 변했음을 알게 된다. 그들 주위는 다음과 같다.
 
  주위 사방에는 암굴,
  그것은 마치 불길이 이는 화덕, 그러나 그 화염에는
  빛이 없고, 겨우 보일 정도의 짙은 어둠에
  드러나 보이는 것은 다만 비참한 광경뿐,
  슬픔의 장소, 우수의 그림자,
  평화와 안식은 없고,
  사람이면 모두가 가지는 희망마저 없고,
  다만 끝없는 가책과
  꺼지지 않고 한없이 타오르는
  유황의 불바다만이 끝없이 펼쳐진 곳,
  그 반역도를 위해 영원한 정의는
  이곳을 마련하였다. 여기 하늘 밖 어둠 속에
  그들의 감옥을 정해 그들의 차지로 하였다.
  하느님과 하늘의 빛에서 떨어진 그 먼 거리가
  중심에서 우주 극점까지 세 배나 되는 곳에.
 
  감옥은 정해졌으나 그곳에 거주할 사람까지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지옥은 준비가 되어 있지만, 사탄과 그 군대가 그곳을  점령하도록 처음부터 운명지어진 것
은 아니다. 어떻게 그들이 견고한  쇠사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는지는  설명할 수 없으나
(밀턴과 그 선배들 역시 아무도 그것을 설명하지 못했다. ), 어찌 어찌해서 그들은 지상으로
빠져나갔다.
 
  저기 메마르고 쓸쓸하고 거친 평야,
  빛도 존재하지 않는 황량한 곳,
  그저 이 검푸른 불꽃들만이 깜박이면서
  창백하고 무시무시한 빛을 던질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그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메포스토필리스의  탄
식을 기묘하게 반전하면서 이렇게 도전을 선포한다.
 
  잘 있거라,
  영원한 기쁨 깃들이는 복된 들판이여, 오라, 공표여 오라,
  악마의 나라, 그리고 너 무한히 깊은 지옥이여,
  네 새 주인을 맞으라, 장소나
  때에 따라 변하지 않는 마음의 소유자를,
  마음의 집은 마음이니, 그 자체로
  지옥을 천국으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내가 언제나 다름없는데, 내가 어디 있든
  무엇이든 무엇이 문제랴, 다만
  벼락 때문에 위대한 그보다 조금 못할 뿐.
  드디어 이곳에서는 자유로우리라, 그 전능자가 시기하려고
  이곳을 지은 것은 아닐 테니, 여기서 우릴 내어쫓지는 않겠지.
  여기서 우리는 편안히 다스릴 수 있어, 나로선
  다스리는 것이 소망이다. 비록 지옥에서나마.
  천국에서 섬기느니, 지옥에서 다스리는 편이 낫지!
 
  악마들은 청교도적 열정에 휩싸여 화산 쪽에다 찬란한 궁전을  짓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
마 독자들이 마음속으로 그려보려면, 죄 많은 바빌로니아는 말할 것도 없고, 바로크  양식의
로마와 비잔틴양식의 콘스탄티노플에서 볼 수 있는 최악의 무절제한 모습을 연상하면 될 것
이다. 설계자는 물키베르다. 그는 올륌포스의 이교도 대장장이인 헤파이스토스 또는  로마의
불카누스에 해당한다. 건축가는 맘몬이라는 우리의 돈 많은 옛친구다. 맘몬은  "하늘에서 떨
어진 가장 저속한 영이다. 그는 하늘에 있으면서도 눈길과 생각은 항상 아래로 향했고, 천국
의 거룩함과 성스러움보다 황금으로 뒤덮인 천국 거리의 부를 더 찬탄하였다." 그들이 함께
노력한 결과 놀랄 만한 어떤 일이 벌어졌다. 악마전pandemonium은 지옥의 역사상 가장 호
화롭고 광대한 건축물로서, 스펜서의 어떤 구조물도 이보다 더 장엄하지 못했고, 단테의 '디
스시City of Dis'도 이 같은 위엄을 갖추지 못했으며, 헤시오도스의 스튁스의 대저택도 이보
다 휘황찬란하지 않았다. 사탄은 호화로운 회합 장소에서 회의를 소집한다. 지옥 회의는  전
통적인 문학작품과 연극에서 종종 볼 수 있었지만, 밀턴의 접근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거
기서 사탄은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금박을 입힌  유람선에 올라탄 클레오파트라의 호화로움
과 대적할 만한 휘황찬란함 속에 앉아 있다.
 
  오르무스와 인도의 부보다 찬란한,
  이방의 진주와 황금을 아낌없이
  왕들에게 뿌려주는 화려한 동방의 부보다
  호사스런 옥좌에 사탄은 높이,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다. 제 실력으로,
  이렇게 출중한 악으로 떠받들어지면서.
 
  수천에 이르는 악마들이 "봄날의  벌떼처럼"  회의장에 몰려들었다. 원로  악마들이 각각
연설을 했다. 분노의 화신인 몰록은 전쟁을 주장했고, 태만의 상징인 벨리알은 분별력은  있
었지만 비겁하게도 전쟁 행위라면 무엇이든 반대했다. 탐욕의 화신인 맘몬은 지옥의 '보석과
금'을 위해서라면 지옥불의 불편 함쯤은 견딜 수 있었다. 서열 2위인 바알세불은 질투의  상
징이다. 그는 "또 다른 세계, 즉 인간이라는 새로운 종족의 복된 보금자리"에 대해 이야기하
면서, 인간을 파괴하라고, "우리가 쫓겨난 것처럼 그 하찮은 생물들을 몰아내거나 그렇지 않
으면 그들을 우리편으로 꾀어내라."고 제안한다. 회의에 모인 이들이 바알세불의  계획에 기
뻐했고, 표결에 붙여 그 제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누가 방랑의 길을 떠나 " 그  어둡고 바닥
없는 무한의 심연"을 거쳐 인간 세계를 방문할 것인가? 자부심과 긍지를 가진 사탄  이외에
누가 있겠는가.
  지옥 회합은 해산하고, 악령들은 흩어져 몇몇은 영웅적인 시합에 합류하고, 나머지는 하프
를 연주하거나 철학적인 사색에 잠겼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새 세상을 탐험하는 일이
었다.
 
  또 다른 패는 저 험악한 세상을 널리 탐험하고자
  대담한 모험에 나서, 혹 그들에게
  더 편안한 안식처를 주는 나라가 있는가 하고,
  지옥의 네 강둑을 따라 사방으로
  날아서 행진한다. 그 강들은 독기 있는 물줄기를
  불타는 바다에 토해내는데,
  죽음 같은 미움의 흐름인 증오의 스틕스,
  검고 깊고 뼈저린 비애의 아케론,
  회한의 물 흐를 때 소리 없이 들리는
  통곡이라는 이름에서 생긴 코퀴토스, 폭포 같은
  불의 물결이 격분하여 불타는 플레게톤,
  이 강들에서 멀리 떨어져 천천히 고요히
  흐르는 망각의 강 레테, 이것이 굽이쳐
  물의 미로를 이루니, 그 물 마시는 자는
  당장에 이전의 상태와 존재를 잊고
  즐거움과 슬픔, 기쁨과 아픔을 모두 잊는다.
  이 강 저쪽으로 얼어붙은 대륙이
  깜깜하고 황막하게 놓여, 소용돌이와 무서운 우박과
  끊임없는 폭풍을 받는다. 굳은 땅에
  우박은 녹지 않고, 산처럼 쌓여 고대 건축의
  폐허와 흡사하다. 그밖에는 모두 깊은 눈과 얼음이다.
 
  땅과 동물들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이같이 이리저리
  쓸쓸한 혼란의 행군을 계속하며, 모험의 무리들은
  공포에 싸여 창백하게 떨며, 눈은 겁에 질리고,
  비로소 가련한 운명을 보고, 안식처가
  없음을 안다. 어둡고 황량한 여러 골짜기들,
  우울한 여러 지방, 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앨프같은 여러 산들.
  바위, 동굴, 호수, 늪, 습지, 골짜기에 또
  죽음의 그늘을 넘어서 그들은 간다.
  천지는 죽음으로 가득, 그것은 하느님이 저주하여
  만드신 악이다. 오직 악만을 위해 만든 선,
  거기서 모든 생은 죽고, 죽음이 살며, 자연은
  심술을 피우고, 온갖 보기 흉하고 기괴한 것,
  징그럽고 형언할 수 없는,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나오는 것보다 무서운,
  공포의 산물인 고르곤, 휘드라,
  키마이라보다 더한 것만 낳는다.
 
  그러는 사이에 사탄은 "날쌘 날개를 펴고", "세 층 세 겹으로 된" 지옥의 문을 향해  날아
오르는데, 이 문은 세 겹은 황동, 세 겹은 쇠, 또 세 겹은 금강 바위로  되어 있는데, 무시무
시한 두 형상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 형상들은 의인화된 '죄Sin'와 죽음'Death'이었다.
'죄'는 아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허리까지는 여자같이 아름다운데,
  아랫도리는 흉측스럽고, 수많은 비늘이 겹겹이
  둘둘 말려 있고, 커다란 죽음의 독침으로 무장한
  큰 뱀이다. 허리 근처에서는
  지옥의 개떼들이, 케르베로스의 큰 입으로
  쉴 새 없이 무시무시한 큰 소리로 짖어댄다.
  그러나 그 소리를 방해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 내키는 대로 그녀의 자궁 속으로 기어 들어가
  거기서 자리잡고, 안에 숨어 여전히
  짖고 고함을 친다.
 
  밀턴적인 여러 가지 주제 중에서 "사탄, 죄, 죽음"을 가장  좋아한 삽화가들이 '죄'의 형상
을 표현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음은 이해할 만하다. 한편, 화가들이  '죽음'의 형상을
그릴 때는, 형체 없는 그림자가 왕관을 쓰고 창을 흔드는 밀턴식의 표현에는 주의를 기울이
지 않았고, 그저 전통적인 15세기식 해골이나 생기 없는 시체로 묘사해 버렸다.
 아테네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것처럼, 사탄의 딸인  '죄'는 다 자란 모습으로 사탄의
이마에서 뛰쳐나온다. '죽음'은 제우스와 그 딸과의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아들인데, 그 사
실이 밝혀지자 '죄'는 지옥문을 열고, 그리고 모두 잠시 동안 '혼돈'을 응시한다.
  이 시점에서 독자는 밀턴의 지옥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하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그의 지옥은 분명히 전통적 장소인 지구 중심에 있지는  않다. 밀턴이 묘사하는 반역천사들
이 추락할 때 이 세상은 아직 창조도 되지 않았다.  지옥은 폐소 공포증을 일으키는 예수회
의 감옥과 같은 것이 아니라, 광막한 세계이며, 반역자들, '죄'와 '죽음',  그리고 몇몇 거대한
괴물들을 제외하고는 아직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곳이다. 아마도 밀턴의 지옥은 다른 행성
의 표면, 아니 행성 내부에 위치한 것 같다. '죄'가  지옥의 문을 열었을 때, 그것은 마치 사
탄이 우주 공간 안으로 막 걸어나오는 것 같은 광경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 우주 공간은 '혼
돈Chaos'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반적 우주 개념에 때라 '혼돈'은 그 우주 바깥쪽에 있다.
  '혼돈'속에서 원소들은 시끄럽게 서로  싸우고, 그러는 동안  사탄은 이리저리 시달리다가
'혼돈'과 그 동반자인 '밤Night'의 천막에 도착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지옥이 사탄이 있는
곳보다 '아래쪽'에 있다는 것과, 새로운 '세계World'가 '연대Legion가 타락하기 전에 본래 있
던 쪽과 황금사슬로 연결되어' 혼돈 '위'에 걸쳐져  있는 것을 본다. 사실 이렇게 걸쳐  있는
물체는 지구 하나만이 아니라, 지구 주위를 도는 천체가 있는, 오래 전 프톨레마이오스가 주
장한 그 우주다. 밀턴은 갈릴레이를 알고 있었지만, 예전의 우주관이 시적으로 매우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탄은 '죄'와 '죽음'이 자기 뒤에서 지구와 지옥을 잇는 거대한 다리를 만드는  것을 보았
다. 그 다음에는 단백석의 탑과 천국의 청옥색 흉벽이 보였고, 그리고 천국에서 드리운 황금
사슬에 걸려 있는 지구가 보였다. 지구는 천국과 비교해 보면 달 옆에 떠 있는 작은 별처럼,
하늘에 비해 아주 작게 보이는 것이었다.
  사탄은 "어리석은 자의 낙원Paradise of Fool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림보처럼- 이곳은
낡은 사상을 고수하는 로마 카톨릭을 위해  마련한 곳이다.- 보이는 이 '세계(우주)'의 제일
가장자리 지역에 착륙한다. 사탄은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지만, 발길을 돌려 항성
지역을 통과한다. 토성, 목성, 화성을 지나 천사들 중  지위가 가장 높은 우리엘이 다스리는
태양에 이른다. 사탄은  매력적인 그룹cherub(지품천사)로 변장하고  그에게로 가서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본다. 우리엘은 그에게 아담이 살고 있는 낙원 쪽을 가리킨다. 그러자 사
탄은 나는 듯이 달려가 니파테 산을 향해 그의 위대한 독백을 읊조린다. 다음은 그 일부다.
 
  비참하구나, 내 자신이여. 어디 쪽으로 날아야 하나?
  무한한 분노와 무한한 실망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어디 쪽으로 날든 지옥이다. 내 자신이 지옥이다.
  가장 깊은 심연에서 더 깊은 심연이
  당장 나를 삼킬 듯 입을 크게 벌리니,
  그에 비하면 내가 고생하는 지옥은 천국이다.
  아, 그렇다면 결국은 항복뿐인가?
  회개의 여지는 없는가, 사면의 여지는?
  복종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런데 그 말은
  모욕스러워서, 그리고 하계 영혼들 사이의
  수치가 두려워서 못하겠다. 그들에게 나는
  굴복이 아닌 다른 약속을 하고,
  큰소리치며 그들을 유혹했었다.
  전능 자를 정복할 수 있다고 뽐내면서.
 
  이 단편은 적어도 세 가지 이유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린 것이 바
로 천벌이라고 보는 말로우적 경향이 보인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유의지에 대한 이 시의 주
장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17세기부터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한 오리게네스의
만인 구원론university salvation에 대한 암시가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사탄도 회개할 수 있
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태에서  회개한다면, 자신의 자존심은 물론 부하들까지  배반하는
셈일 것이다.
  사탄의 여행 이야기는 읽기에  혼란스럽다. 밀턴은 프톨레마이오스적  우주관에서 천국과
지옥을 완전히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최고천Empyrean 대신에,  '혼돈Chaos'이 원동천을 둥
글게 에워싼다. 천국과 지옥은 두 개의 분리된 천체 내지는 우주에서 각각 반대편에 존재한
다. 아니면, 천국은 높은 천장이나 승강장의 일종일 수도  있다. 밀턴의 우주를 논리적인 지
도로 그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 지도를  만들려는 시도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밀턴 자신도 '기독교 교리Christian Doctrine'에서  "지옥은 이 우주의 끝 너머에 위
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바  있으며, '혼돈'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가복음'  21장 8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가 요즘 시대에 살았다면 '평행우주설parallel universe'을 전개하
기 위해 입자 물리학자나 공상 과학자들이 쓰는 용어들을 기꺼이 수용했을 것이다. 어느 재
담꾼은 밀턴이 '혼돈'에 대해 쓸 때는 이상하게도 글이 혼돈스러워진다며 정곡을 찌르는  불
평을 늘어놓기도 했고, T.S. 엘리엇은 "밀턴의 천상과 지옥은 넓기는 하지만 비품을 완비하
지 못한, 그저 무거운 대화로만 가득 차 있는 아파트"라고 평했다.
  그러나 밀턴의 작품을 그림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여러 사람들 중에는 지옥에 대한 감각이
뛰어났던 사람도 있었다. 그는 마로 존 마틴(1789-1834)이다. 자신이 살던 당시에 마틴은 상
당한 존경을 받았지만, 그 명성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 그
의 그림은 너무 현란하고 지나치게 손이 많이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며, 그가 신뢰할 만
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계시록'과 서사시 그림의 대가였
지만, 거대한 규모의 건축술과 공학(특히  하수도 공학)에 대해서도 흥미가  있었다. 마틴은
광산촌에서 자랐는데, 형제들 중 한 명이 유명한 미치광이 방화범이었다. 아마 이런  관심과
성장배경의 조화는, '실락원'을 위해 조각을 하고 동판을 새기고 그림을 그린 일련의 과정에
대해 설명해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작품에서 희미한 불꽃이 음울하게 비추면서 모든
것을 가두는 광대한 지하세계의 암흑에 대한 느낌을 잘 표현했다. 그는 밀턴의 지옥을 이해
하는 유일한 삽화가다. 밀턴의 지옥에서 묘사하는 모든 지형상의 특징을 고려해 보건대,  그
의 지옥은 정확히 하수구와 같은 것은 아니라고 해도 동굴 모양의, 사실상 지하세계 내부다. 
그리고 그는 '혼돈'을 지나는 대리를  아주 훌륭히 그려냈다. 악마전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
그는 여러 차례 그곳을 되짚어 보았다. 그리피스D.W.Griffith의 영화 '인톨러런스Intolerance'
에 나오는 웅장한 바빌로니아 무대장치가 실제로는 마틴이 그리 악마전 모습을  직접적으로
빌려온 것임을 알게 된다면, 평범한 영화 수집가로도 신기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틴이 이런  광경들을 장엄하게 묘사한  최초의 예술가는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악마전 근처에서 불타는 호수의 둑에서 부하들을 정렬하는 사탄. 밀턴에서."라고 하는 근사
한, 극장용 파노라마의 해설이 남아 있게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의 전신에 해당하는  환등기
영상의 해설문이었다. 그  환등기는 1782년 루터르부르Philippe  Jacques de Loutherboug가
제작했고, 당시에는 아이도푸시콘Eidophusikon이라고 불렀다.
 
  이 앞쪽의 경치를 보면, 산 아래에서 높은 정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색깔의 불꽃으로 타
오르는 산들 사이로 헤아릴 수 없이 길게 뻗어 있는 혼돈의 무리가 장엄한 어둠 속에서  일
어난 뒤, 점점 형체를 이루어 가다가 마침내 우뚝 섰다. 그 형체는 호화스런 건축물에  딸린
거대한 사원의 내부 같았으며, 용해된 놋쇠처럼 밝게 빛났고, 겉으로 보기에는 꺼버릴 수 없
을 것 같은 화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어머어마한 광경에서 램프 앞에 놓인 색유리가 감
춰져 있었기 때문에 색유리가 재빨리 바뀔 때마다 원하던 교과를  그대로 낼 수 있었다. 처
음에는 유황 색을 띤 파란색에서 짙은 빨강으로, 다음에는  다시 창백하면서도 선명한 빛으
로,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마치 밝은 용광로에서 갖가지 금속들이  용해될 때 발산되는 것과
같은 신비스런 혼합 색으로 바뀌었다. 그 놀랄 만한 광경과 함께 들리는 소리들은 가뜩이나
심하게 놀란 관객의 귀에 타격을 가했다. 속이 빈 기계장치  속에 공과 돌멩이들을 넣고 마
구 흔들어서 천둥소리나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굉음을 냈다. 게다가 솜씨 좋은 조수가 탬버
린의 표면 위를 손가락으로 싹싹 쓸어서 신음 소리 같은  음향 효과를 냈는데, 그것은 지옥
의 정령들이 내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유감스럽게도 아디도푸시콘은 19세기초에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복락원Paradise Regained'에서 밀턴은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간 이야기 대신, 그리스
도가 유혹 받는 내용을 통해 사탄 이야기를 끌어들였다.  17세기 말엽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가 영혼을 구한다는 이야기는 인기를 잃고 있었다. 분리되어 나간 프로테스탄트 종파들
은 항상 자신들의 교리에 "그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내용을 포함하기는 했지만, 이
는 신념이라기보다 그저 전통을 따른 것에 불과했다. 20세기 들어, 나중에 분리한 종파들 중
특히 감리교는 슬며시 그 문구를 빼버렸다. 아마도 지옥과 림보의 차이를 더 이상 일반적으
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지옥정벌 이야기는 사탄을 두드러지게 그
렸고, 그리하여 밀턴 이후에는 사탄과 다른 악마들이 지옥과 맺는 연관성은 점점 더 약화되
었다.
 
    22. 기계론적 우주The Mechanical Universe

카톨릭의 지옥Hell과 영벌electnal punishment이란  관념은 1564년 트렌토 공의회가  공포한
'교리 문답서Carechism'에서 단호하게 확인되었다. 그리고 브루노와 갈릴레이가 이단재판으
로 고통받는 것을 지켜본 카톨릭 교도들은, 교회 신조dogma 에 도전하는 것을 삼가게 되었
다. 그러나 세속 세계의 지식이 발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쉽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초기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유럽 전역의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양 진영은, 과학과 역학 분
야에서 새로운 것들을 차례로 발견해 냈다. 그리고 17세기에 이르러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더욱 두드러지는 과학과 성과를 올렸다. 당시 뉴턴과 함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던 르
네 데카르트는 예수회 학교에서 수도사들과 함께  공부한 사람이지만, 갈릴레이의 천문학적
발견들을 연구하고 갈릴레이가 옳다는 확신을 얻게 되자,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로 옮겨가
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18세기가 되면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은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네덜란드, 영구,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 시기에는 광학과 시계 제조술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 17세기 중엽에는 진자 시계
와 휴대  시계용  태엽이 등장했다  -  사람들이 수학과   천문학에 매료되면서, '기계적인
mechanical' '시계 장치식의clockwork' 또는 '시계공의watchmaker's 우주관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우주관에 따르면, 모든 자연현상은 신이 정한 자연법칙을 따르는 물질  운동
의 결과였다.  '초자연적' 역사, 법칙,  종교가 지배하던 그 이전의 여러  세기를 돌이켜보면
격세지감이들 정도였다. 칼뱅의 예정설calvinist predestination도 초기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 법칙이 무척 엄혹하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기계적 우주관mechanical universe이 처음 등장한  것은 14세기 무렵이지만, 그 중요성을
부각시킨 것은 갈릴레이의 발견들이었다. 그것을 다시  철학적으로 가다듬은 사람은 토마스
홉스였다. 그는 인간의 생명에 대해 "추잡하고  야만적이며 단명 하는"것이라는 영지주의적
정의를 내렸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홉스 그 자신은 장수한 편이었고 또한 이지 적이었
다. 그는 자기 책 때문에 다른 이들의 적대감을 샀지만 - 홉스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자주
비난받았다 -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영위했다. 말년에 이르러 홉스는 찰스 2세의 비호를 받
았다. 찰스 2세는 어릴 때 홉스에게 수학을 배운 적도 있어서 항상 그를 아껴 주었다.
  홉스는 처음에 기하학에 빠져들었고, 그 다음에 역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
에서는 갈릴레이를 찾아가 천문학과 우주의 본질에 대해 토론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홉스는 결코 무신론자가 아니다. 과학을 타락, 변질시켜 종교적 성전으로 만드는 일 에는 관
심이 없었고, 단지 수학적 방법론이 갖는 논리적 순수성에  매료된 독창적 사상가였을 뿐이
다. 그는 유물론자였으며, 과학정신을 가진 왕립협회 회원들처럼 최초의 '영국 이신론자'라고
불린다. 하지만 정작 왕립협회는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냉소적인 기질이나
미신에 대한  경멸은  ('리바이어던'의 제4부   어둠의 왕국에  대하여Of the   Kingdom of
Darkness'를 볼 것)18세기 분위기에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하지만 또한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지옥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급진적 해석을 했다. '바닥
없는 '지옥의 구덩이가 '유한한' 지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모순이고,  '아사야' 14장 9절을
보면 지옥은 해저 심연일 것이라고 추측되며 '마태복음에 나오는 지옥 불은 단지 죽음의 고
통에 대한 비유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홉스는 결국 구원받은 자들the saved만이 부활하고, 지옥에 떨어진 자들the damned은 영
원히 죽게 된다는 영혼 절멸설annihilation theory을 주장했다. 이것은  아우구스타누스 말한
천벌Augustanian damnation에 대립하는 두 가지 근대 기독교 이론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오리게네스의 노선과 어느 정도 일치하는 만인 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다.
  데카르트는 이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정신과 육체'라는 전통적인 이원론을 신중하게 재검
토하여 좀더 다루기 쉬운 이원론, 즉 이성지와 감각기의 대립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는 기독
교도였지만, 물질 세계는 영적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천지창조 이후로 하느님은  더 
이상 이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홉스와 갈릴레이의 뒤를 이어, 이 세계는
하느님이 세운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장치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만일 세상이 불완전
하다면, 그 이유는 하느님만이 완전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세상의 고통이  원죄
에서 비롯되었다는 전통적 사고에서 교묘하게 벗어났다. 유물론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는,
성서의 기적들을 포함한 초자연적 현상들의 가능성을  부인했다는 점에서 홉스를 넘어섰고,
이것은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그는 거기서 일보 양보하여  하느님의 계시는 실증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미묘한(그리고 편파적인)이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그는 회
의주의skepticism에 물꼬를 텄다.
  회의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사람은 홀란드의 스피노자였다. 유대인이어서 그랬는
지도 모르지만, 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기적은 물론  예정론과 자유의지freewill를 둘러싼
논쟁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불멸의 영혼이나 천사의 존재에 대한  성서의
증거들을 부정하는 바람에 25세도 되기 전에 유대 교회에서 파문당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
트의 기계적 우주관에서 자신이 발견한 세 가지 결함, 즉 초월적인 하느님, 정신 - 육체 이
원론mind-body duality,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을 바로잡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하느님
대신에, 모든 것을 포함하며 그  자신은 숭배 받는 일에 무관심하지만  우리의 숭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우주론적 존재being of the universe'를 상정했다. 그 존재는 의식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의지는 없으며, 최후의 심판이나 영원한 형벌
따위에 관심을 가지거나 그럴 수 있는 존재와는 거리가 멀다.  정신과 육체는 본래 한 유기
체의 두 측면이고, 정신은 그것의 의식적 부분을 담당한다. 그러나 육체의 본능, 식용,  욕망
은 자유의지를 유린하고, 희로애락의 감정에 변화를 준다.  사람은 자유의지나 감정이 아닌,
본능이나 희로애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선한  것은 개체나 종에게 유용
한 것이지, 하느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기적은 자연적 사건들을 잘못 이해해서  생긴
인상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정신의 어떤 부분은  영원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그의  전체적 사유 체계와
모순되는 듯하다. 그는 17세기에는  무신론자라는 이유로 비난받았지만, 18세기에는  똑같은
무신론자로서 수용되었다.
  좀더 전통적인 사고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난제는,  기계론적 우주 속에서 왜
그렇게 많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기 위해 창조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독일의  라이
프니츠는 '선을 택하느냐 악을 택하느냐에 대한 개인의 자유의지를 내포하는 데카르트식 합
리주의Cartesian rationalism'와 '칼뱅의 이중 예정설double predestination'을 융합하려  애썼
다. 하지만 나중에 하느님이 더 나은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며,
따라서 이 세상의 결합은 원래 천지창조 때부터 갖추어진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소 아르미니
우스적인 '낙관주의optimism'로 돌아섰다. 라이프니츠는 볼테르가 철학 콩트  '강디드candide
'에서 조롱한 지극히 낙천적인 팡글로스 박사('모든것pan을 설명함gloss',또는 '모든 것pan을
닦음gloss'의 뜻)와 같은 사람이었다. 팡글로스 박사는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세
상 중에서 최고"라고 선포한 사람이었다.
  과학 시대 초기 사람들의 과거의 지식과 현재의 새로운 지식을 통합하려고 힘쓴 반면, 볼
테르는 반 기독교적인 계몽주의 시대에 속해  있었다. 17세기의 과학자와 철학자들(그 당시
까지도 여전히 그들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었다)은 성서뿐 아니라 그 밖의  여러 가지
제약 속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우선 그들은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그
들은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그들은 우주와  지구가 겨우 수천 년 전
쯤에 생겨났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보통 성서에 근거한 시간인  기원전 4004년을 우주의 시
작으로 추론했다. 그리고 '창세기'에 대략 서술된 것을 따라. 식물과 동물이 본래 고정된  기
계적 질서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진화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
의 놀라운 균형을 하느님의 신성 불가침한 솜씨, 예정론의 증거로 보았다. 이것이 이른바 논
증argument from design")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시계공의 우주는 아주  작았다. 로마 카톨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경도된 사람들은 모두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받아들였지
만, 행성은 아직 겨우 6개만이 알려져 있는 정도였고, 그 중에 케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여섯
번째 행성에 넣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모험적인 사람들은 수많은  별들 중에 또 다른 태
양들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하의 성운들을  식별할 수 있을 만한
망원경은 당시에 없었다. 수없이 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각각의 우주 안에는 수십 억  개의
태양이 있으며, 그 각각의 태양 주위를 수조 개의 행성들이 공전하고 있다는 생각은 그로부
터 먼 훗날에나 등장한다.
  뉴턴은 홉스를 제외하고 대부분 뜻을 같이 한 영국인들의 모임이었던 왕립협회에서  가장
저명한 회원이었다. 그들은 데카르트에게 우주의 모형을  취해서 뉴턴을 주축으로 우주론을
확립하였으며, 그것과 성서를 조화하고자 노력하였다. 꾸준하고도 조심스럽게 그들은 칼뱅주
의의 영국 국교회에서 벗어나  그보다 단순한 이신론, 말하자면  자연조교natural religion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가장  출중했던 뉴턴은 신앙을 고수한 과학자로서  존경받았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그의 개인 문서들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참으로 신앙이 깊으면서도 동
시에 진실하고 헌신적인 수학자로 알려졌던 뉴턴도 서서히 예수의 부활을 포함한  기적들에
대해 믿음을 잃었고 또, 삼위일체Trinity도 부정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여기서 나타난 견
해는 로크의 견해와 똑같은 것이었다. 비록 뉴턴의 수학과 성서의 기적은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뉴턴은 지옥의 영원성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후의 심판 이후에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처벌을 경우에 따
라 겁을 주기도 하고, 죄인을 바로잡거나  치유하기도 한다. 지옥은 확실히 겁을 주어  죄를
막는 억제책이었다. 개인적으로 지옥을 의심하는 사람조차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히  하층민
들에게는 지옥이 쓸모 있는  것이라고 느꼈다. 카톨릭의 연옥은 교정과 치유를 위한 것이었
다. 그런데 시간의 종말에 가서는  유한한 죄를 지은 사람이 무한한  형벌을 받는다는 것인
가? 이것은 치유도 억제도 아니다. 그것은 악의 에 찬 복수일 뿐이다. 이중 예정론을 거기에
더해 보라. 그러면 당신은 전율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하느님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하나
님은 압도적 다수의 저주받은 자들을 창조하고("많은 사람들이 부름 받지만, 극소수만이 선
택받는다"). 구원의 교리로 그들을 놀리고, 그 자신이 창조한 죄의 상태를 이유로 영원히 벌
을 받게 할 뿐이다. 17세기 합리주의는 하느님에 대한 그런 견해를 용납하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은 이중 예정론을 정말로  믿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마도(자신이 아니
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처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애매한 형태의 자유의지를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분히 사리를 따질 줄 아는 많은 사람들은 영원한 징벌이 있다는 생각을 조용히 버
리기 시작했다. 홉스, 로크,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악한 자는 자신의 죄에
합당한 고통의 기간을 - 대략 천 년 정도- 겪은 후에 깨끗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 직후에 영혼이 절멸annihilation한다고 생각했다. 소치니 파  교도들이
이렇게 믿었다고  한다.  유대인들도 이   견해에 동조하고 있었다.   1세기 전에  재세례파
anabaptists에게도 이와 비슷한 견해가 있었다. 이런 집단들이 이단 용의자로 몰린 반면, 18
세기에 이르면 데이비드 흄이 앞장서서 모든 종류의 내세를  부인하고, 임종의 침상에서 모
든 것이 소멸한다는 설(deathbed annihilation)을 내세웠다. 이것은 신앙심 깊은 보즈웰을 곤
경에 빠뜨렸다.
  자연과학적 방법이 중세처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왕립
학회에서도 종종 있었다. 1714년 토비어스  스윈든은 당시의 최신 이론에 입각해서  '지옥의
본질과 위치 탐구 AnEnquiry into the Nature and Place of Hell'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구가 태양에 위치한다는 것을 논리적, 과학적으로 입증하고자 했다. 그의 고찰에  따
르면, 만약 지하세계가 지옥이라면 오랜 세월에 걸쳐 겹겹이  쌓인 영혼들이 이미 지하세계
의 모든 공간을 가득히 채워 버렸으며,  지옥의 불이 계속 탈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공기도
공급될 수 없었다. 오로지 태양만이 과거나 미래에도 변치 않고 그 많은 저주받은 영혼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고 맹렬하며 영구적이었다. 더욱이 코페르니쿠스적 우주의 중심
인 태양은, 지구 위쪽에 있다고 잘못 여겨져 온 최고천Empyrean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에 위치했다. 과연 명쾌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3년 후에 휘스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뉴턴의 뒤를 이어 수학
교수로 봉직했으나, 신앙이 비정통적이라는 이유로  쫓겨났다 - '자연종교와 계시종교의 천
문학적 원리들Astronomical Principles of  Religion, Natural and  Reveal's'을 발간했다. 이
책은 그가 뉴턴에게 헌정한 책이다. 뉴턴이 제시한 운동의 제2법칙이 휘스턴으로 하여금 혜
성은 정해진 궤도를 도는 천체이며, 그 궤도는 타원형이지만  기계론적 우주 안에서 계산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1705년 에드문트 헬리는 주기
적으로 나타나는 혜성 24개의 궤도를 계산하여 책으로 써냈고,  뉴턴의 혁명적인 수학을 이
용해서 자신의 이름을 붙인 한 혜성이 1758년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정확히 예견했다. 휘스
턴은 핼리의 헤성궤도 계산을 깊이 연구하고, 성서 등에 나타난 지옥의 증거, 특히 극단적인
열과 냉기에 대한 증거들을 종합한 결과, 혜성의 궤도야말로 - 그 궤도는 태양에 아주 가까
운 곳에서부터 멀리 "토성 근처의 차가운 지역"까지  펼쳐진다.- 고통의 장소인 지옥의 "표
면 또는 대기권"이라고 결론지었다.
  휘스턴은 영국 왕립협회의  동료들에게서 불신을 받자,  이전의 영혼 절멸설로  후퇴했다.
1740년 '지옥 형벌의 영원성에  대한 소고The Eternity of  Hell Torments Considered'에서
그는 지구 내부에 징벌 받지 않은 영역,  하데스를 설정하고- 이곳은 형벌은 없지만, 그 혼
란스러움을 생각하면 결코 쾌적한 곳은 아니었다. - 죽은 자들의 영혼은 모두 다 여기로 모
여 자기 행실을 개선할 기회를 얻는다고 썼다. 최후의 심판 때 ( 휘스턴은 천년왕국설의 신
봉자였다. ), 축복 받은 자들은 영적인 몸으로 승천하고, 극악무도한 자들은 죽을 당시의 병
들거나 손상된 몸으로 다시 돌아간다. 벌레의 등장도 이것으로 설명이 된다. 그 뒤에는 세계
종말의 거센 불길이 일어나서, "그들은 고뇌의 극한 속에서 소멸한다."고 한다.
 
  런던 성  바울  대성당의 주임사제였던   존 던(1573-1631)은  '이그나티우스의 비밀회합
Ignatius, His Conclaue'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예수회를 풍자했다. 그  무대는 지옥인데,
예수회 스타일의 지옥이 아니라 루키아노스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 낸
해학적인 지옥이다. 던은 마치 지옥의 변방인 림보와 연옥을 거쳐  정말 지옥에 갔다 온 듯
이 이야기한다. 또한 지옥의 마왕(루시퍼)이 이그나티우스 로율라와 환담을 나누던 도중, 새
로운 세계 질서라는 것을 만들어 낸  괘씸한 과학자와 사상가들을 재판하려고 하는  장면을
직접 봤다는 듯이 이야기를 써 나간다. 마왕과 로욜라가 괘씸히  여긴 자들을 보면 우선 코
페르니쿠스, 이어서 존 던의 관심을 끈 책들을 쓴 연금술 의학자 파라켈수스, 그리고 마왕을
교묘히 부추겨 이그나티우스를 저버리게 하게는 마키아벨리  등이 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
을 이용하여 마왕과 이그나티우스는 달 표면에 새로이 식민지를 세우고, 이그나티우스가 그
곳을 통치하기로 한다. 이 지옥은 바티칸이 유죄 선고를 내린 모든 이단자들을 수용하기 위
한 것이다.
  이 에세이는 즐겁게 보라고 쓴 가벼운 글이지만, 당대의 과학적 발견뿐만 아니라,  신대륙
발견에 대한 관심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거기에는 당대 사람들을 매
우 흥분하게 했던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  동방의 여행기들도 있었다. 존 던은 로마  카톨릭
신자로 자라며 예수회 수도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도 공
부했지만, 종교 때문에 학위는 받지 못했다. 그는 항상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홉스와 밀턴
이 갈릴레이를 찾아갔던 것처럼, 던은 오스트리아 벽지에 있던 케플러와 교제했다.
  던은 종교적으로나 감각적으로나 강렬하고 고상한 시를  쓴 것으로 우리 기억에 남아  있
다. 그는 나중에 영국 국교회로 개종한 뒤 저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그러나 지옥 불로  신도
를 겁주는 설교자는 아니었다. 비록 말년에 이르러 과격한 성향을 띠긴 했지만, 그는 기질상
지옥불 운운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다. 아래에 인용된 글은 존 던의 설교문으로서,  온건하
고 교양 있으며 과학 지식을 갖추고 있으면서 신앙심도 깊은 당시의 중산층 프로테스탄트들
이 선고받는 지옥의 고통poena damni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 준다.
 
  하느님 그분은 집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과 같은 아주 평범한 모습으로, 결국 말씀과
자비로 내 영혼 속에 들어오실 수 없으면, 심판을 내리시어 학질과 중풍으로 이 육신이라는
집을 뒤흔드시며 이 집을 열병과 열사병으로 불타게 하시고, 그 집에 거처하는 주인, 곧  내
영혼을 공포와 근심으로 짓눌러 떨게 하시면서 내게 들어오십니다.  나에 대한 당신의 목적
과 실천을 포기하고 그만 두실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 마치 내가 한 푼의 가치도 없었
다는 듯이 나를 내팽개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마침내 이  영혼을 마치 연기처럼 증기처럼
거품처럼 사라지게 하십니다. 영혼이 연기나 증기나 거품이 될 리야 없겠지만, 암흑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중략)... 하느님의 모습을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저주보다 더
한 고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설교에서 '나'라는 일인칭을 사용한 것은 놀라운 효과를 발휘한다. 던은 말로우와 셰익
스피어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그들보다 오래 살았던 까닭에, 그의 시와 산문은 모두 다가
오는 과학의 시대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었고,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시대 이후 사라진 지 오래 된 일종의 자기계시self-revelation에 대한 기대도  담겨
있었다.
  토마스 브라운(1605-1682)의 '의사의 종교Religio  Medici'에 나오는, 던에  필적하는 자기
고백적 문구는 던과 유사하면서도 약간 급진적인 영국 국교회의 입장을 드러낸다. 브라운은
다른 지상인들처럼 이신론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결코 지옥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고 회고하며, 하느님은 인간이 자신을 분노하게 했을 때  오직 최후의 수단으로써만 지
옥을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겁에 질려 천국을 간 사람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느
님을 섬기는 자들은 천국을 향해 똑바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 무서워서 하느님에게 굽
실거리는 타산적인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를 전능하신  분의 사도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형편없는 노예일 뿐이다.
 
  한편, 수백 명의 청교도  설교자들은 아래에 인용한  크리스토퍼 러브(1618-1651)와 같이
청중을 위협하여 공포에 떨게 했다.
 
  여러분이 만약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기도한다  할지라도, 한숨짓다가 허리가
부러질 정도가 된다 할 지라도,  여러분의 말이 한숨이 되고, 모든  말이 눈물이 되고, 모든
눈물이 한 방울의 피가 되다 할 지라도, 결코 아담이  잃어버린 하느님의 은총을 되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그  한가지 죄 때문에 하느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고, 그 분의 지혜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만 번의 설교와 만 번의 예배로도  되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러브'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극단주의자였던  그는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위로를
주는 설교보다 공포를 주는 설교가 훨씬 더 큰 효과가 있다."며 자신의 주장을 변호했다. 또
"억세고 문제 투성이인" 영혼들에 대해서는  "지옥불의 섬광만이 그들의 양심을  놀라게 할
것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한편 온건한 성직자 로버트  버튼(1577-1640)은 '우울한 해부The
Anatomy of Melancholy'(1621)에서 "격노하여 고함을 질러대는  사제들" 때문에 병적인 절
망에 빠져 버린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고, 그런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성서에서 뽑은 구절을
제시했다.
  그러나 17세기의 모든 설교자들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침례교도인 존  번연
(1628-1688)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의 구원을  향한 여정을  그린 우화  '천로역정Piligrim`s
Progress, from This World to That  Which Is to Come'(1678)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
다. '천로역정'은 1792년까지 160판을 발행했고, 19세기를 통틀어 영어로 씌어진 책  중 성서
다음가는 베스트셀러였다. 거기서 지옥은 주변적으로만 등장한다. 번연의 두 번째 유명한 책
은, 초판이 나온  1658년부터 1797년  사이에 30판을  찍은 '지옥에서  들려오는 한숨소리A
Few Sighs from Hell' 다. 이 두 작품에 나타난 번연의 견해와 기법은 완전히 중세적인  것
으로서, 그 책들이 누린 큰 인기는 엘리트 층의 사고방식이 민중의 사고방식과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입증한다. 실제 설교를 토대로 한 '지옥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는 환상적인 지
옥 주변을 청교도적인 공포의 웅변으로 채색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뱃속은 불타는 역청 또
는 녹은 납으로 가득 차 있고, 빨갛게  달군 집게가 살을 갈갈이 찢고, 사지는 떨어져  나간
다. 그리고 기름에 튀겨지고 불에 그을리거나 구워지고 영원히 불에 타는 영혼들을  그린다.
당시 청교도 집안의 아이들은 흔히 번연 작품의 사본을 선물로 받았다.
 
    23.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
 
  18세기에는 지적활동의 중심이 영국에서 프랑스로 바뀌었고,  계몽주의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은 프랑스 인이건 아니건 '필로조프(자유사상가)'라는 프랑스 어로 불렸다.  그들
중에는 물론 철학자도 있었지만, '필로조프'라는 프랑스 어가 반드시 영어의 '철학자'를 의미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학자이기 전에 사상가이자 작가이자 논객이자  비평가였으며,
합리성과 과학에 대한 믿음, 그리고 억압을 벗어난 자유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문필가들
이었다. 여기서 억압을 벗어난 자유란  상당 부분, 제도화한 종교의 압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했다.   "유치함을 타도하자Ecrasez   l`infame!"라는 볼테르의  구호에서  '유치함
l`infame'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데이비드 흄이 지옥의 공포란 사람들을 억압하는 장치
에 불과하다는 점을 역설하면서 "우매함, 기독교, 무지"라고 불렀던 바로 그것이었다.
  편의상 피에르 베일(1647-1706)을 첫 번째 '필로조프'라고 해 두자. 비록 18세기를 6년 밖
에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는 18세기 식의 풍자적 말투를 썼고, 학문적 작업에서도 18
세기 특유의 방식을 취했다. 그것은 한 관점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자료와 의견을 부지런
히 수집하는 방식을 말한다. 때는 바로 존 레이(1627?-1705)가  '종species'의 개념을 해명하
여 동식물을 분류하는 유용한 방법을 확립한 때이며, 18세기의 지성인들은 필로조프이건 그
반대자들이건 사전, 백과사전, 목록, 총서, 일람표, 수집물  등 온갖 체계들을 열성적으로 만
들어 내던 시기다.
  프랑스의 필로조프들 중에 잘 알려진 이로는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그리고 44권으
로 된   '자연의 역사Natural   History'를 두   명의 과학자   달랑베르(1717-1783)와 뷔퐁
(1707-1788)이 있고, 다른 필로조프들과 심하게 다투고 끝내 그들고 절연한 루소가 있다. 영
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철학자 데이비드 흄,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그리고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이 있다. 미국에서는 선구적 영웅인 이탄  알렌(1738-1789)고 정치
이론가인 토마스 페인(1737-1809)을 들 수 있다.  한편 벤자민 프랭클린과 토마스 제퍼슨이
만든 '독립 선언문'은 계몽주의 시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 문서가 되었다.
  17세기 사람들과는 달리, 계몽주의 시대의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걸과들에 맞는 성서 구절
을 찾는 일에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단, 성서를 비방할 때는 빼고 말이다.) 이런 태도는
진정한 경험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처음으로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뷔퐁은 단순히 몇 천년
전으로 한정되는 창세기 규모의 시간이 아니라 아득히 던  과거로 눈을 돌렸고, 천지창조가
6일만에 이루어 질 수는 없으며, 여섯 기에 걸쳐 완료된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른다. 각종
보고서들과 온갖 상품들, 그리고  신세계와 극동 지역에서 점점  빈번하게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유럽은 편협한 시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꾸준히  전개된 번역작업을 통해
유럽인들은 과거와 타문화를 존중할 줄 알게 되었고,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철학, 과학, 종교
는 각각 다른 범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지옥에 대한 정통 교리를 논패하기 위해 필로조프들이 택한 과학적 접근 방법이 어떤 것
인지 알아보려면,   이것들 가운데  선두 주자   격인, 베일의  백과사전  '역사 비평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이 도움이 된다. 사실상 에세이  모음집인 이 사전
에서 베일은 교리에 대항하는  평범한 논쟁뿐 아니라, 특이하게도  칼뱅주의 위그노 교도의
지도자인 피에르 쥐리외에 반대해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쥐리외는, 하느님이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보여 주려고 죄짓는 것을 허용했다고 말했다. 베일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함으
로써 죄에 대한 증오를 보여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고 반박했다. 쥐리외는 "이
성, 관습, 그리고 세상의 모든 법률에 기대어 볼 때도" 지옥은 필요하다고 논증하였다. 그러
나 베일은 동의하지 않았다.
  지옥에 대한 직접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 그리 신중한 태도가  아니었으므
로, 베일은 '역사 비평 사전'에 지옥에 관한 항목을 넣지 않았다. 그 대신 베일은 이단, 타종
교, 무신론, 계시, 그리고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들에 관한 글로 위장하고 측면공격을 시도했
다. 그의 무기는 기지와 박학다식이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을 보면,  윤리와 도덕적인 삶은
고통을 주는 하느님(또는 신들)에 대한 두려움과 무관하며,  하느님(또는 신들)은 어떤 사람
에게는 신앙적 신비일지 모르지만, 다른 이에게는 음울한 미신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쥐리외는 칼톨리시즘을 비난하면서 초대 교회가 이단에 대해 일관되지 못한 태도를  취했다
고 지적했다. 베일은 그러한 쥐리외의 논법을 그대로 이용하여, 칼뱅주의 자체도 정통  신학
이 맹렬히 비난한 새로운 이단들을 그 어는 것도 구원의 대상에서 배제하지 못했다고 논증
했다. 베일의 주장 중에서 가장 아이러닉한 관점은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는 자
연스럽게 도덕을 갖춘 사람인데 반해서, 정작 사악한 사람은 영원한 형벌에 대한 신앙이 있
어야만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50년 후에는 디드로가 장대한 '백과사전Encyclopedie'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이제 지옥에
대한 공격은 노골적이었다. '천벌Damnation' 항목을 보면, 정통 교리의 비 논리성이 모두 드
러난다. 예를 들면, 유한한 죄와 - 그것이 아무리 극악한 것일지라도 - 영원한 벌의 불균형,
최후의 심판 이후에 받는 형벌의 무의미함, 하느님의 자비  또는 그리스도의 희생이란 개념
과 양립하기 어려운 영원한 고통 등이 있다. 도덕적인 이교도, 고결한 미개인noble savages,
그리고 모든 프로테스탄트와 그 밖의 이단자들은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져야만 할까? 여기서
스윈든과 휘스턴의 주장을 진지하게 다루지만 결국 비합리적이라고 결론 내린다. '백과사전'
의 '천벌'항목에서 천벌에 대한  논증은 오직 하나뿐이다. "천벌의  증거는 성서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다."는 구절이다. 성서에 대한 디드로의 이러한 회의주의는 듣기 좋은 설교 따위를
혹평한다.
  '백과사전'의 마지막 권은 1772년에 선을 보였는데, 그것이 나오기 전에 볼테르는 직접 편
찬한 '철학사전Dictionnaire Philosophique'을 출판했다. 그 사전은 베일의 것보다  훨씬 짧았
지만, 일종의 소론집이었다는 점에서는 베일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볼테르는 전적으
로 체제를 타파할 목적으로 그 사전을  썼다. 볼테르의 말에 따르면, "  '백과사전'은 혁명을
일으키기에 너무 크고 무거웠던 반면, 1764년 익명으로 출판한  자신의 값싼 소책자는 즉각
당국의 강한 비난을 살 정도였으니, 오히려 작은 책인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었다."
  볼테르는 당면한 논쟁들에 참여하기보다는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고, 그 다음에는 그 사실
들에서 논리적이면서 파괴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냈다. 딱딱한 훈계들이나 '중국식 교리 문답
Chinese catechisms' 속에 담겨 있는 예리한 비판들은 죽음과  부활, 종말론, 묵시, 기적, 성
서적 '사실들', 그리고 철학적  이론 등 온갖 것을  담고 있다. 여기서  지옥 항목인 '앙페르
Enfer'는 다른 항목만큼 재미있지는 않지만 정확하다. 그가 볼 때 지옥은 페르시아 인, 갈대
아 인(메스포타미아 인 ), 이집트 인, 그리스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지, 형벌은 ' 네 새대'까지
만 이어진다고 믿었던 유대인의 발상은 아니었다. 또한 보통 재주로는 구약성서에서 지옥에
대한 희미한 증거도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볼테르는 말한다.  바리새파와 에세네 파 신
도들에게 지옥 신앙이 있었다는 것은 볼테르도 인정하지만, 그것도 원래는 그리스, 로마에서
온 것이라고 그는 단정한다. 그리고 교회의 몇몇 교부들이 "어떤 가난한 자가 염소 한 마리
를 훔쳤다고 해서 영원히 불에 타야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라며 지옥을 거부한 이야기
를 소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지옥이라는 개념을 비웃는  한 사제의 해학적인 말
을 인용하면서, 지옥은 "당신의 하녀, 재단사, 법률가나 믿는 것이다."라고 말하다.
  사무엘 존슨(1709-1784)의 영어사전 'Dictionary'고 볼테르의 논법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
운 일이다. 신실한 영국 국교도인 존슨은 필로조프들을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흥
미로운 것은  그의  풍자소설 '라셀라스Rasselas'가   같은 해에  출판된 볼테르의   '캉디드
Candide'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는 지옥에 대해, 각각 적절한  문구와 인용문들을 덧
붙여 여섯 가지 정의를 내리고, 일곱 번째에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옥 : 여성명사. (어원은 색슨 어의 helle) 1. 악마들과 사악한 영혼의 장소  2. 선하건 악
하건 개별적 영혼들의 장소 3. 일시적인 죽음 4. 술래잡기 놀이에서 붙잡힌 사람이 끌려가는
장소 5. 재봉사들이 옷감을 버리는 장소 6. 극악무도한 세력들  7. 현대 작가들보다 옛날 작
가들이 곧잘 사용하는 어휘.
 
  이보다 더 정확하고 정중한 정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보즈웰이 존슨에 대해 한 이야기
중에 조금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이야기는 18세기의 교양인, 다시 말해 같은 사교 단체
나 보즈웰이 표현한 대로 '클럽'이라는 것에 속해 있던 사람들 사이에도 의견 차이가 있었음
을 어느 정도 알려 주고 있다.
  1784년 6월 12일 토요일, 문단의 대가 존슨, 사제인 아담스 박사, '학식 있고 신실한' 핸더
슨, 그리고 보즈웰, 이 사람이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존슨이
공표했다.
 
  "나는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탓에 나  자신이 저주
받아야 할 사람들 중 하나가 될까 두렵습니다.(침울해 하면서)."
  아담스 박사 : "저주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존슨(흥분해서 크게) : "네, 지옥으로 보내져서 영원히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스 박사 : "나는 그 교리를 믿지 않소.... "
  존슨은 약간 동요하면서 우울한 기분으로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분명히 존슨은 그때 75세였다. 그런데 이의를 제기한 성직자 아담스 박사는 그보다 세 살
위였다.
  보즈웰이 데이비드 흄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위의 대화와 비교해  보자. 스콜틀랜드
철학자 흄은 죽기 7 주 전인 1776년 7월 7일 일요일에  보즈웰을 만났다. 보즈웰은 다소 재
치 없게 불멸에 관한 주제를 꺼냈다가, 흄이 불멸은 물론  아무 종교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
자 매우 놀랐다. "어떤 미래의 상태가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 하고 보즈웰이 묻자,
 
  그는 불 위에 있는 석탄 한 조각이 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영원
히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가장 비합리저인 꿈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완전히 사라짐에 대해
생각할 때, 한 번도 불안한 적이 없었는지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미래에 자신이  사라지
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있지(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할 때도 불안함은
없다고 말했다.
 
  철저하게 정통 신앙에 뿌리를 둔 보즈웰은 당황하면서도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나는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것은 흐뭇한 것
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최근에 죽은, 내가 알고 있고, 흄도 높이 평가할  만한 사람
셋의 이름을 들었다. 그는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흐뭇한 일이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들 중 아무도 죽은 후에도 서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가 상식을 거부하고 무엇이든 회의부터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바보스
럽고 불합리한 견해를 표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보즈웰은 흄과 헤어졌지만, 그 대화에서 받은 인상은  한동안 그의 뇌리에서 사라
지지 않았다.
 
  물론 18세기에는 다른 방식으로도 지옥 이야기에 대한 흔적을 남겼다. 루키아노스가 창안
한 '사자들의 대화dialogue of the dead' 형식이 잡지나 소책자에  다시 살아났고, 종교와 정
치적 논평, 때로는 스캔들에 있어서까지 가장 인기 있는 풍자 형식이 되었다. 호가트William
Hogarth(1697-1764)와 고야Jose de Goya(1746-1828), 그리고 그 밖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화가들이 그린, 때로는 음산하기까지 한 풍자화들도 마찬가지였다. 대화의  참여자들은
보통 고전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거나, 또는 최근에 죽은 저명 인사들 이었다. 그 중  사
무엘 존슨 박사가 특히 인기가 높았다. 그 밖에 미노스, 플루토, 카이사르, 소크라테스, 몽테
뉴, 군주들, 주교들, 사교계 여인들, 애디슨Addison(1672-1719)과 스틸Steele(1672-1729)같은
저널리스트를 꼽을 수 있다.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지옥의 돈 후안을 그
린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은 이 대화들을 모델로 하였다. 죽은 자들의  대화는 20
세기 초의 잡지들에까지도 등장했다.
  돈 후안의 생애는 그의 악마적인 동반자인 파우스트의 생애에  필적할 만큼 화려했다. 돈
과 그의 아름다운 정부 그리고 지옥으로 던져버리는 석상이  처음으로 무대에 등장한 것은,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라는 필명을 쓰는 스페인 사제가  1630년경 쓴 희곡 '세빌
리아의 호색가El Burlador de Sevilla'에서였다. 그 두 주인공은 모차르트의 '돈 지온반니Don
Giovanni'(1787)와 그 이후의 이런저런 작품들에서  계속 지옥에 사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우스꽝스러운 춤과 노래로 된 지옥의 가곡으로서, 토마스 쉐드
웰이라는 왕정복고 시대의 극작가가 돈 후안 연극 '난봉꾼The Libertine'(1676)의 향연 장면
을 위해 쓴 것이다.
 
  악마1 : 서둘러라 서둘러, 새 손님이 오신다.
          지옥의 가장자리까지 오셨다.
  악마2 : 새로 유황불을 지펴라,
          악마들아 모두 모여라.
          지옥에 있는 어떤 자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한 자들의
          끔찍한 최후를 기다리자.
   악마들의 합창 : 그들이 오게 하라, 오게 하라.
          무시무시하고 영원한 불행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하라, 오게 하라.
  악마3 : 지옥에 떨어진 그 누구보다 더 사악한 그들이
          여기서는 눈물을 흘리고, 동정 받지 못할 신음을 하리라.
          여기서는 울부짖고, 끊임없이 한탄하리라.
  악마1 : 피와 욕망을 통해 그토록 잘 누렸던
         그들은 응당 지옥의 가장 뜨거운 불길을 느끼게 되리라.
  악마2 : 끝나지 않을 격심한 고통 속에서
          지난날의 소행을 통곡한들 아무 소용 없으리.
  악마3 : 그들은 영원한 어둠을 보게 되고
          영원한 쇠사슬에 묶이리라.
  악마들의 합창 : 오게 하라, 오게 하라.
          무시무시하고 영원한 불행이 있는 곳으로,
          오게 하라, 오게 하라.
 
  거의 같은 시기에 윌리엄 마운트포트William Mountfort는 할리퀸과 스카라무슈를 등장시
킨 '익살극으로 엮어 본 파우스투스 박사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Doctor Faustus
Made Into a Farce'을 연출하고 직접 출연했다. 1724년에는 '광대 파우스투스 박사Harlequin
Doctor  Faustus'라는  가장  무도  무언극을  드루이   레인에서 공연하였다.   콜리 시버
(1671-1757)가 연출한 이와 비슷한 연극에 대해서  알렐산더 포프(1688-1744)는 '바보들The
Dunciad'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갑자기 고르곤들이 야유를 퍼붓고 용들이 노려보고
  뿔이 열 달린 악귀들과 거인들이 출정한다.
  지옥이 솟고 하늘이 내려와 땅위에서 춤춘다.
  신들, 도깨비와 괴물들, 음악, 격노와 환희,
  화염, 춤, 전쟁과 무도회,
  큰 불이 모든 것을 삼키고 나니 끝이 난다.
 
  전 유럽의 광장과 장터에서는 인형극장들이  아주 번성했다. 인형극은 이동이 쉽고,  배우
몇 명만으로도 (다급한 상황에서는 한 사람만으로도 )제작할 수 있었고, 비용이 적게 들었으
며, 정식 연극과 달리 국가  검열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비록 관중은 아이들로 붐볐지만,
이 극들은 아이들을 위한 것 이었다기 보다는  가장 널리 퍼져 있는 민중 유머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오늘날 텔레비젼의 시추에이션 코미디sitcom와 똑같이, 친숙한 배우들과  반복
되는 이야기에 의존했던 이 극들에서 독창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펀치와 주디'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최후의 인형극이지만, 그 전에 인기를 끌었던  것은 돈 후안과 파우스트
의 기적과 장난을 우려먹는  것이었는데, 관객이 지겨워하지 않는  이상 얼마든지 줄거리를
길게 늘일 수 있었다. 그런데 돈과 파우스트는 정작,  극의 실제 주인공은 아니었다. 관객들
은 그 둘의 광대 같은 하인들. 즉 한스 피켈헤링, 한스 부르스트 또는 할리퀸에게 갈채를 보
냈다. 이들은 제 주인들의 모험을  따르고 흉내내면서 관객들을 웃기는데, 마침내  악마들이
그 패거리를 지옥의 입으로 끌고 가려고 할 때, 이 촌뜨기들은 꾀를 써서 달아난다. 그때 관
중들은 폭소를 터뜨리고 박수를 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말로우의 희곡이 아니라 시장터
의 인형극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말로우의 희곡을 번안하여 공연하고 다니던
유랑극단이 인형극에 영감을 준 것도 사실이므로 말로우는 괴테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
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성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종교나 지옥  자체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도 않았다. 1732년 알폰소 데  리구오리는 카톨릭 교회들의 설교단에서  지옥 불로
설교할 설교자들을 양성할 목적에서  구세주회Order of Redemptorists를  창설했다. 다음은
그들의 교구 안내 책자인 '영원한 진리The Eternal Truth'에서 따온 것이다.
 
  그 불행하고 가련한 사람은 아궁이 속의 장작처럼 불 속에 휩싸일 것입니다. 그는 아래서,
위에서, 그리고 사방에서 화염의 깊은 나락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가 만지고 보고  숨
을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어디에서나 불에 닿고 불을 보고 불을 호흡할 수 있을  뿐입
니다. 그는 물 속의 물고기처럼 불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불은 그 저주받은 사람을 둘
러쌀 뿐 아니라 그의 창자 속에 들어와 모진 고통을 줄 것입니다.  그의 몸이 온통 불이 되
고, 몸 속에 있는 창자가 불타고, 심장은 가슴속에서 불타고, 혈관에서 피가  불타고, 골수마
저도 머리 속에서 불탈 것입니다.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은 모두  그 자신이 불 아궁이가 될
것입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대단한 설교자들이었다.  프랑스에서 백과사전 파  학자들이 파격적인
메시지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대단한 설교자들이었던 예수회원들 중에  그 유명한 아베 브
리덴과 다른 설교자들은 파리 전체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자랑거리
역시 설교였고, 영국 국교를 따르지 않는  프로테스탄트와 극단주의자들이 거주지로 택했던
미국에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영국 국교도들은 버지니아 식민지에 정착했다. 메이플러워  호를 타고 메사추세츠에 도착
한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의 계급 질서에 항거한 조합교회주의자들이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침례교도들도 즉시 독립해서 로드 아일랜드Rhode Island에 정착했다. 영국에서 박해받던 퀘
이커 교도들은 펜실베니아에 자리를 잡았고, 스코틀랜드 장로교도들이 그곳 펜실베이니아와
뉴저지에서 그들과 합류했다. 존 웨즐리가 세운 감리교회는 뉴욕 주에 뿌리를 내렸다.  하지
만 중앙교회는 많은 분파로 갈라지고 말았다.
  1730년대를 시작으로 복음주의 부흥 운동evangelical revivalism의  물결이 식민지 미국을
휩쓸었다. 이른바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으로 불리는 그것은  장로교회 복음주의자인
길버트 테넌트(1703-1764)와 더불어 뉴저지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것은 유명한 조합교회
주의의 신학자, 조나단 에즈워즈(1703-1758)가  뉴잉글랜드 전체에 퍼뜨렸다. 그  뒤를 이어
칼뱅주의 감리교도인 조지 화이트필드(1714-1770)는 그 자신이 얘기한 대로 "정열과 명료성
과 힘"을 겸비한 선풍적인 방식으로 설교활동을 했다. 그들이 밝힌 목표는 "잠들어 있는 영
혼에게 공포의 쐐기를 박는 것"이었다. 청중들이 눈물을  흘리고 부르짖고 몸부림치고 졸도
하며 집단으로 개종하는 사태가 일어나곤 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뉴잉글랜드의 성직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에서  뉴턴과
로크의 사상을 공부했고, 1723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연과학을 청교도주의의 틀
안으로 받아들이려 노력했고, 상당한 성공도 거두었다. 그는 악과 형벌이 신의 위대한  계획
의 일부라고 생각한 철저한 구원 예정론자였다. 한편, 도취적인 면도 있어서 '공포의 설교'를
하는 데 능했다. 그의 첫 부흥 대집회는 1734년부터  1735년까지 메사추세츠 노셈턴에서 열
렸고, 대각성 운동이 절정에 달한 1741년에 그가 행한 '진노하신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
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설교는 특히 유명했다. 그는 "그들의 발
이 예정된 시간에 미끄러지리라."는 성서 원문에다가,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고서는 어떤 것
도 악한 자들을 한시라도 지옥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다."는 해석을 달았다.  이를 설명하면
서 하느님의 손에 달리 있는 가는 실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불길 위에 떠 있는 거미들의 전
율적인 이미지를 그려 보였다.
  그는 "천성적으로 죄악으로 부패한" 사람들이 일요일에 보이는 고상한 태도에 분노했음이
틀림없다. 그는 '죄지은 자들이 미래에 받는 피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벌The Future
Punishment of the Wicked: Unavoidable and Intolerable'이란 제목의 또 다른  설교의 끝을
이렇게 맺었다.
 
  머지 않아 당신은 놀랍게 변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위대하신 하느님의 진노와 지옥에
대해 들으면서 편안하고 평화스럽게 앉아 있다가 태평하게 자리를  뜰 당신들은, 이윽고 몸
을 흔들며 벌벌 떨고 울부짖고 비명을 지르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무시하고 넘어간 것들이 얼마나 위대하고 중요한지를 납득하게 될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이
되려고 설교를 들을 필요는 없어 질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은 아주 정숙하고 태평하게 듣고
있는 하느님의 진노와 능력도 그때가 되면 얕보지 못할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화이트필드의 야외복음 전도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해진
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에드워즈의 견해를  온건하다고 여길 수 있을  정도로 격렬했다는
화이트 필드의 말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최초의 대각성 운동(나머지는 19세기에 걸쳐 몇 차례 일어났다. )은 미국 역사에 두 가지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첫째는 각성 운동을 통해 해방된 감정이 곧바로 식민지 전체를 혁명
적 열기 속으로 끌어 들였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  열기를 천년왕국 시대의 출발점으로 보
게 했다는 것이다.
  2차적인 영향은 좀더 미묘한 것으로서, 부흥 운동의 지도자들도 예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부흥 운동가들이 엄청난 논쟁과 종교적 동요는 헌법 제정자들Founding Fathers에게도 예외
없이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 시대에 프랑스에서 한동안 살았던 프랭클린이나 제퍼슨 같은
이들은 종교적 열광을 혐오한 탓에  온건한 기독교마저 이탈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기독교에 동의했을 것이다. 프랭클린은 철저한 이신론자가 되었고, 제퍼슨도 암묵적으로  그
러했다. 두 사람 모두 미국을 파벌주의와 광신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려면 종교의 다원주의
를 보장해야 한다고 보았다. 제퍼슨이 프랭클린의 도움으로 작성한 미국의 독립 선언문에서
는 "자연과 법과 자연의 신"이라고 까지만 언급할 뿐이었다. 이 형식에 대해서는 흄도 승인
했을 것이다. 미국 헌법에는 하느님이라는 이름은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으며, 교회는  단
호하게 국가와 분리되었다.
   
    24 스베덴보리의 환상 Swedenborg`s Vision
 
  18세기의 마지막 금자탑을 쌓은 인물 중 하나는 스톡홀름의 에마뉴엘 스베덴보리였다. 그
러나 그의 영향력은 그가 속한 시대보다 19세기에 더  커졌다. 주교의 아들이던 스베덴보리
는 동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지속적으로 과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에게는
과학에 대해 상당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천문학에서부터 대수학, 금속학, 당시에
눈에 띄게 진보하고 있던 물리학, 해부학에 이르는 광범한 분야에 관심이 있었다.  에머슨은
그를 "위대한 영혼colossal soul"이라 칭송했고, 그보다 덜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문학의 거
장들 중 한 사람"이라고 칭송했다.
  스베덴보리가 과학과 철학 분야에서 쌓은 업적은, 그가 50세에  이르러 환상적인 영적 계
시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하면서 얻은 명성에  가려 버렸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1758)'에서 이   계시를 설명한   부분들은 중세의   환상문학vision
literature처럼 매혹적이면서도 다른 면이 있다. 스베덴보리의 접근법은  지리학자의 견문 기
록처럼 냉정하고 정확하며 비감성적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중세의 환상문학과  다르지
만, 형태는 길이가 훨씬 길다는 점만 빼면 상당히  비슷하다. 중세 환상문학과는 달리, 그는
지옥보다는 천국과 천사들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였다. (중세의 환상문학과 마찬가지로 그
의 우주관에서도 천국과 지옥은 복수 형태를 취하는데, 그것들은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전체
속에서 각각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청동 엘리베이터 같은 것을 타고 내
려간 저 아래쪽 세계를 충실히 묘사하고 있다.
  영적 세계spiritual world에도 자연계와 똑같이 평원과 산과 강  따위의 경치가 있다고 그
는 설명한다. 천국들heavens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가 그
밑에, 그리고 그 두 세계 아래에 지옥들hells이  있다. 영들은 '내면의 눈'을 열지 않으면 천
국을 볼 수 없고,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도 그들 위에 있는 세계를 전혀 볼 수  없다. 그렇지
만 천국과 지옥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지옥에서는 끊임없이 악을 퍼뜨리려 하고, 천국에서
는 끊임없이 선을 장려하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에게서 보이는 오리게네스의 여운은 논쟁
을 야기하며, 죄인들을 삼켰다 뱉었다. 하는 '툰달'의 루시퍼같은 모습도 보인다. 스테덴보리
는 일단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 뒤에는 어떤 개심의 여지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이
는 열성적인 만인 구원론자였던 에머슨의 반감을 샀다. 또 다른 환상체험visionary인 블레이
크William Blake도 처음에는 스베덴보리에게 매력을 느꼈지만, 얼마 후 예정설을 일절 거부
하고 돌아섰다.
  스베덴보리가 주장한, 영들이 머무는 중간세계는 19세기의 강령술사들과 20세기의 임사체
험기록자들을 가장 당혹하게 했다. 그것에 상승하는 것이 카톨릭의 형벌 없는 연옥이며,  또
는 일부 프로테스탄트들이 애써 정의하고 싶어했던 천국과 지옥  사이의 어떤 지대였다. 신
비주의 자나 영매들은 이곳과 현세가 교류한다고 믿었다. 스베덴보리가 본 바에 따르면,  이
음침한 림보와 같은 곳에서 영혼들은 제 본성에 때라 천국이나 지옥을 향해 천천히 걸어간
다.
  모든 천국 구역은 그에 상응하는 지옥 구역을 갖는다. 가장 나쁜 지옥들은 서쪽, 특히  북
서쪽에 있는 것들인데, 거기에는 로마  카톨릭 교도들이 갇혀 있다. 그들은  "스스로 신처럼
숭배 받고 싶어한 자들이고, 또 자신들이 인간의 영혼과 천국까지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
으며, 그러한 생각에 반기를 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증오와 복수심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는 무신론자, 세속적 욕망에 얽매인 자,  원한에 사무친 자, 적개심이 강한 자,  도
둑, 강도, 수전노, 탐욕스럽고, 무자비한 자들이 산다. 북서쪽 지옥들 뒤에는 "사악한 영혼들
이 맹수처럼 어슬렁거리는 어두운 숲들"이 있다. 남서쪽 지옥 뒤는  사막인데, 그곳에는 "속
임수와 기만의 죄를 범한 가장 교활한" 자들이 살고  있다. 스베덴보리는 지옥들을 무한 히
다양한 악에 따라 엄격하게 분류하고 있다.
 
  산 언덕, 바위 밑이든, 평야나 골짜기 밑이든 어디에나  있다. 지옥으로 가는 좁거나 또는
넓은 입구는... 대부분 바위에 울툴불퉁하게 난 구멍이나 틈새처럼 생겼고, 모두 거칠기 짝이
없다. 이 구멍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어둡고 침침하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극악무도한 영혼
들은 불붙은 석탄이 발하는 것과 같은 발갛고 희미한 빛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지
옥의 어둠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생전에 신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았기 때
문이다. 모든 지옥 입구들은 영들의 세계에서 사악한 영혼들이  던져질 때를 제외하고는 닫
혀 있다. 그것들이 열릴 때는 안에서 연기 같기도 하고 불같기도 한 그을음 또는 짙은 안개
같은 것들이 흩어져 나온다. 나는 이 지옥의 영혼들이 이런  불이나 연기 또는 안개와 같은
것들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고 들었다. 그것들 속에 빠져 있으면,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땅 안에 있는 것처럼 숨쉬고, 그렇게 해서 삶의 즐거움을 찾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지옥의 상층부는 암흑에 휩싸여 하층부는 화염에 휩싸
여 있다. 상층부에는 악의 허위에 물든 자들이 살고, 후자에는 '악' 그 자체에 빠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정이 좀 나은 지옥에는 허름한 오두막 같은 것이 보이고, 때로 도시처럼 거리와 골목들
이 반듯이 정돈되어 있는 곳도 있다.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언쟁을 벌이고 적개심
을 드러내고 치고 받고 싸우면서 서로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길거리에서
는 절도와 약탈이 판을 친다. 어떤 지옥에는 온갖 오물과 배설물이 가득한, 보기에도 역겨운
매음굴이 있다.
 
  이런 지옥들은 그 전원적인 풍경에도  불구하고, 도심의 불결함과 부패를 떠올리게  한다.
에머슨은 환상적 사색visionary thinking을 인정했지만 천국과 지옥은 믿지 않았다. 그가 볼
때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은 둘 다 시덥잖은 것이었다.  그는 스베덴보리에게 시심이 부족
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견해는 우선 스베덴보리를 당황하게  했을 법하다. 스베덴보리는 자
신을 여전히 참된 사실만을 기록하는 과학자라고 믿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에머슨은 스베덴보리의 글이 머지않아 인기를 잃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스베덴보리는 19세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과학이 계속  진보함에
따라 '이성의 시대Age of Reason'가 표방했던 것들에 대한 급격한 반동으로 낭만주의, 심령
주의 spritualism, 지관, 모호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옥과  다른 세계들에 대한 견해를 인
습적이라고 비웃는) 새로운 형태의 환상으로 사람들은 옮겨가기 시작한 것이다.
  
    25. 19세기의 지옥 The Nineteenth Century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 군대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4반세기 동안의  정치적
격동이 가라앉았다. 10월에 그는 세인트 헬레나로 유배되었고,  거기서 삶을 마감했다. 타락
한 영웅, 부유하는 사탄의 상징으로 그의 일생은 필연적으로 신화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디선가 천사(또는 적 그리스도)처럼 나타나 타락과 파산의 상태로 피에 물든 프랑스를 인
수하여 세계 정복을 향한 공포의 십자군 원정으로 내몰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멀리 미국의 독립이 불러일으킨  것보다 훨씬 큰 충격을 유럽에  주었다
프랑스 국민들을 봉기하게 만든 전제  정치와 부패와 불의는 주변국가에서도  자유주의자와
개혁주의 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계몽주의 선도를  받았던 국민들은, '인권선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Man'(1789)에 공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세기의 전환기에 씌어진 시
들은 가장 진정한 의미의 천년왕국이 오리라는 희망과 흥분으로 가득했다. 프랑스는 지상에
실현될 하느님 나라를 향해 앞장서 가는 듯 했다. 그러나  환멸의 시기가 닥치자 깊은 상처
만이 남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19세기의 '시대 정신'에 대해 많은 많은 토론을  벌였다. 존 스튜어스 밀도 1830
년대에 출판하기 시작한 일련의 사색적  글들이 바로 이 '시대  정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어떤 점에서 19세기는 더할 나위 없이 빠른 속도로 직진했다. 산업이 발달하고, 과학,  탐험,
정복, 무역, 철도사업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미국의  역사가들이 노골적으로 조롱하며, '악덕
자본가robber barons'라고 불렀던 사람들이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표면적인 성장의 저변에서 '시대 정신'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전 18
세기의 필로조프(자유사상가)들은 기지, 이성,  학식을 동원해서,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던
미신이라는 상부구조와 전체 정치의 유물을 공격했다. 하지만 새  시대에 들어서자 이런 전
통이 희미해지고 불확실성이 대두하면서, 이성은 실패했다는 의식이 생겨났다. 19세기의  시
대 정신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놀라울  정도로 반지성적인 것이 되었다.
역사가인 피터 게이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18세기가  끝나갈 무렵 필로조프들은 게르만
적 이데올로기의 압박을 받았다. 그것은 로마 카톨릭과 고대  그리스 그리고 게르만 민중의
여러 관념이 기묘하게 뒤섞인 복합체- 일정의 튜턴적 이교 사상이었다." 19세기말에 이르기
까지 이 묘한 복합체에서, 고딕 문학, 낭만주의 문학과 음악이 생겨났고, 환상과 민간전승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으면, '악마주의diabolism'를 포함하여 수많은 초자연적이고 신비적인  유
파들이 싹텄다. 그리고 자기 심리를 성찰하는 세속적인 접근법이 생겨나 훗날의 정신분석으
로 연결된다. 또한 19세기 말에는 죽음과 임종에 대한 기호가 병적일 정도로 강렬하게 나타
났다. 이런 경향은 15세기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숭고함sublime'이란 말이 많이 회자되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프스 산맥의 장관이나 낭
만주의 세대의 열렬한 감성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한 미적 질서와 조화의 차
원을 넘어서 무한의 혼돈에 이른다. 에드먼드 버크스는  1756년에 쓴 에세이에서 "무한성은
우리의 마음에 기분 좋은 경외감을 채워 주곤 한다. 그 경외감은 숭고함의 순수한 결과이자
진실한 척도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의를 보면, 지옥에  대한 19세기류의 새로운 환상을 가
지고 말장난한다는 느낌이 든다.
  18세기에는 돈 후안과 파우스트를 유용한  소재로 하는 산문 소설들이  다수 발표되었다.
돈 후안은 사무엘 리차드슨의 '클라리사'(1748)에서는  '러브레이스'라는 인물로 라클로의 서
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Les Liasions Dangereuses'(1782)에서는 '발몽'이라는 인물로 분한다.
이 두 소설도 미덕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는 한다. (여주인공들은 죽은 뒤 천국에 가기 때문
이다.) 그러나 전체 구성을 이끌고 독자로 하여금 책장을 계속 넘기게 하는 것은 분명히 악
덕이다. 악역을 맡은 귀족 출신의 남자 주인공들이 음모를 꾸며 죄짓는 일에 여념이 없는데
도, 이 책들은 그들이 지옥으로 가는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는다. 뭔가 새로운  기류
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가장 악명 높던 악마적인  귀족 사드 후작Marquis de Dade(1740-1814)에게는  악덕
그 자체가 시적 영감이었다. 그는 많은 날들을 감옥과 정신병원에서 보냈는데, 그것은  오히
려 그에게 공상할 수 있는 풍부한 시간을 주었다.  그는 '순수한' 성적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변태적 강간,  고문,  살인을 다룬  자신의  포르노그래피 '쥐스틴'(1791)과  '쥘리엣  이야기
Histioire de Juliette'(1796)에 대해서, 그 두 작품은 계몽주의 사상의  합법적 연장선에 있다
고 주장했다. 만일 하느님이 없다면, 신에 대한 책임감도  사회계약도 필요 없고, 타인에 대
한 성적 가학 행위까지 포함하여 못 할 일이 없으며, 만일 인간이 객체라면( 자주 오용되는
용어 '오프제  드 베르튀Object   de vertu'의 말   그대로의 의미에 따르면   성적 대상sex
object), 도덕성이 주관적 판단에 지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의지는  아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사드 후작이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는 이전의 모든  작위적인 제한을 넘어서는 선정적
이고 외설적인 내용에까지 손을 뻗쳤고, 지옥의 묵시적인 환상이나 경악스러운 순교 이야기,
또는 통상적인 복수극을 뛰어넘는 다른 또 다른 폭력성을  구현하였다. 사드의 작품에는 어
떤 도덕성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쥐스틴'에서 하늘은 여주인공이 수도 없이 타
락을 거듭하면서도 집요하게 미덕을 집착하는 것에 노하여 그녀를  죽여 버린다. 사드 자신
도 후에 작가들의 상상 안에서  지하 영웅이 된다. 낭만주의의 파멸  귀족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광기와 악덕의 바이런 경'의 원형이 된 것이다.
  고딕 소설은- 그 '중세풍'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사실주의 소설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
작되고 같은 보조로 발전했는데, 사실 '클라리사'는 고전적인 고딕 소설에 아주 가깝다. 호레
이스 월폴의 '오트란토의 성The Castle of Otranto'은 고딕 소설로서 돈 후안 주제를 중세적
고딕 양식으로 배경에 삽입하였다. 음산한 분위기 성, 철컥거리는 사슬, 폭풍우, 상념에 잠긴
주인공, 학대받는 여주인공,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는 심문 도구들은 고딕 소설의 특징인  동
시에 수많은 낭만주의 시가와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음침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고딕 소설이 묘사한 지옥은 생각보다  덜 끔찍했다. 사드 이후
에 거의 필연적으로 나타난 현상 같기는 하지만, 고딕 소설 작가들은 지옥을 지상에다 재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독자들을 흥분시키기 위해 공포와 전율(공포horror는  자연적이고 전
율terror은 초자연적이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을 끌어들인  이유는 독자들을 계도하기 위
한 것이 아니라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혼쭐이 나는 쪽은 언제나 무고한 사람들이고, 벌
을 주는 것은 오히려 죄를 범한 사람들이었다.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는 '수도사The Monk'(1789)에서  새디즘적인 고딕 소설을 적나라하
게 그려 보이고 있다. 이 소설은 그가 21살이 되기도 전에 썼는데, 이 책 때문에 그는 '수도
사' 루이스라는 유명한 별명으로 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사드는 이 작품
을 걸작이라고 보았고, 바이런도 거기에 동조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젊은이
들에게 독이 되고, 방탕을 조장한다."고 생각하였다.  루이스는 부패한 대수도원장을 통해서
로마 카톨릭을 강간, 향락, 머리가 쭈뼛할 정도의 폭력과 연결한다. 루시퍼가 종국에 가서는
죄 많은 수도승을 찢어서 죽이지만, 실제로  지옥 장면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밀실
공포증, 감금, 고문, 지하의 음침한  분위기 등은 굳이 지옥이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고서도
지옥의 분위기를 충분히 제공한다. 그리고  루이스가 묘사한 인물 중에서  희생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사악하게 행동하는 자들이다. - 요녀 마틸다는 바로 악마 그 자체다.
  지상의 지옥을 다루는 이러한 경향은 찰스 로터트 매튜린 의 '유랑자 멜모트Melmoth the
Wanderer' (1820)에서 훨씬 명확하게 나타난다. 타락과 절망, 퇴폐가 점점 더 심해지는 암울
한 세계를 무대로, 악마와의 계약을  주제로 하는 파우스트적 에피소드가 묘사되고  있지만,
여기에서도 역시 지옥 장면은 없다.  또한 포우의 어떤 작품에서도 지옥  장면은 찾아볼 수
없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곱추Notre Dame De Paris'(1831)에서는 이상하게  생긴 기
형의 거지들이 군집해 있는 어두운 지하 왕국이 일종의 현세적 지옥을 상징하고 있지만, 꼽
추 카지모도는 일종의 천사로 묘사된다. 심리적 기괴함이 점차  수용되는 시대에 예전의 초
자연적인 요소는 쓸모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것들을  단호하게 그리고 경멸적으로 거부
한 바이런은 '맨프레드'에서 이 장르를 총괄하는 당당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26. 괴테의 파우스트 Goethe`s Faust
 
  독일의 위대한 시인 괴테(1749-1832)는 역사적으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가? 그는 장수
하면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18세기에는 고전주의classicism에서 시작하여, (실상은 자신이
조직했으나 나중에는 등을 돌렸던) 독일의 '스트룸 운트 드랑'시대,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
옹 전쟁(괴테는 나폴레옹을 만났고, 더 나아가서는 그를 승인했다.)의 시기, 그 뒤의 고딕 낭
만주의, 빅토리아 양식, 현대의 환상적 경험주의에 이르기까지,  괴테는 자신이 살던 시대에
등장한 모든 창조적 문학 사조와  관계를 맺었다. 여기서 우리가  논의할 대작 '파우스트'는
그가 60여 년에 걸쳐서 쓰고 개작한 작품이다. 19세기 낭만주의 오페라는 이 희곡의 제 1부
에서 영감을 얻었고, 20세기 문학은 말하자면, 그 혈통 전체가 (괴테의  요청으로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된) '파우스트' 제 2부에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괴테는 프랑푸르트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라이프니치히에서 법률을 공
부했지만, 병을 앓은 뒤에 스트라스부르로 옮겨 1771년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술, 건축,  의
학, 자연과학(그는 다윈의 진화론을 예견하고 있었다. )과, 특별히 스피노자를 동경하면서 철
학에 관심을 두었고, 스테덴보리 신봉자들을 비롯한 비의적 신비주의에 흥미가 있었으며, 특
히 여자에 관심이 많았다. 10대 초반부터 죽을 때까지 수 많은 여성들과 사랑을 나누었지만,
자신에게 아들을 낳아 준 여종과 딱 한 번 - 그 것도 편의상 - 결혼을 했을 뿐이다.
  스트룸 운트 드랑('질풍노도')은 18세기 연극무대를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 극작가 코르네
이유와 라신의 고전 비극에 반기를 든 의식적 운동이었다. 이 운동의 놀랄 만한 첫 번째 성
공작은 짝사랑을   그린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The   Sorrows of   Young
Werther'(1774)이었다. 이 작품 대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젊은 사람들의 자살이 유럽 전역
에 유행했다. 이 작품은 또한 문공국의 젊은 군주 카를 아우구스투스공을 매혹시켰다.  아우
구스투스 공은 저자인 괴테를 초청해서 처음 만나본 뒤 그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괴테는 그
곳 바이마르 영지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농업, 광물학, 자연과학에 전념했고, 궁정 극장의 감
독으로 20여 년 동안 봉직했다.
  이 기간 동안에도 그는 집필 작업을 계속했다. 대부분은 극장 상연을 위한 것이었고, 인기
를 끌었던 두 편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과 '친
력Wahlverwandtschaften'(1890)도 이때 쓴 것이다. 그러나 괴테가 필생의 노고를 바친 걸작
은 바로 '파우스트'다.
  아직 바이마르로 가기 전인 20대 초반에, 괴테는  '파우스트'제 1부의 기본 플롯을 구상하
고 있었다. -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사주를 받고 순진한  처녀 그레트헨을 유혹했다
가 저버린다는 내용이다. 괴테는 말로우의 희곡을 읽은 적이 없지만, 장터 인형극 '파우스트
박사'와 '돈 후안'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의 플롯을 적절하게  변형하여 결
합했다, 1790년 그는 '단편 파우스트Faust: A fragment'를 발간했고,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1808년 '파우스트' 제 1부를 완전한 형태로 출판하였고,  이것은 뒤이어 나온 오페라와 연극
의 원작이 되었다. 20년 후에는 '헬레나'를 출간하였는데, 이것은 제 2부에 포함된 완결된 하
나의 장이며, 바이런을 추모하는 단편  하나가 실려 있다. 제 2부  전체를 탈고하고, 봉인한
것은 그가 죽기 직전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파우스트'에는 지하세계를 그린 장면이 없다. 단지 2부에서 괴테는 주인공
을 지하세계로 보내려는 구상을 해 보았을 뿐이다. 그것은 파우스트가 헬레나에게 청혼하기
위해서 저승 여왕 프로세르피나의 궁전으로 내려가려고 하는 장면인데, 문제는 그러한 시도
가 괴테가 구상한 기독교적 결말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대신 '고전적인  발
푸르기스의 밤'의 장에 하데스의 여자 요괴들을 불러내고, 그녀들의 출현에  당황해하면서도
매혹되어 버린 고딕적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로 하여금 그 요괴들과  춤을 추게 했다. 이것은
제 1부에 나오는 마녀들의 비밀회의 장면에 견줄 만큼 훌륭한 풍자적 장면이었다.
  괴테가 맺은 결말은 지식인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면이 있었다. 괴테는 제1부 초판에
서 크레트헨을 카톨릭 신자로 그리지만, 사실상 그녀는 범상한 여인일 뿐이었고, 파우스트는
굳이 머라고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괴테처럼 단지  신비주의자occultist였을 뿐이다. 서곡에
는 하느님과 악마의 내기 장면이 나온다. 구약성서의 '욥기'를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하느님
(또는 괴테)이 마지막에는 파우스트를 구원할  것임을 암시한다. 고전적 스타일에서 밀턴의
문제까지 여러 문학 양식을 구사하여 써  내려간 제2부는 지적 아이러니와 환상을 보여  준
뒤 파격적 결말을 맺는다. 결단의 순간에 전통적인 악마들이  지옥의 입에서 튀어나와 파우
스트를 데려갈 양으로 무대의 한 편에 포진한다. 하지만 이때 하늘에서 아름다운 어린 천사
들putti and amoretti의 무리, 천상의 성가대, 성모가 등장하여 무대의 또 한  편을 차지해서
빅토리아 시대 연극에나 어울릴 장면을 연출한다. 이것은 기적극을 네오 바로크식으로 패러
디한 것처럼 보인다. '영원한 여성' 그레트헨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파우스트의 구원을 중
재한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어린 천사들의 발가벗은 엉덩이를  보고 욕정을 품었다가 구원의
날을 놓치고 만다. 괴테가 그 작품을 봉인해 두기로 결심한 이유도 수긍할 수 있다.  괴테가
생전에 이 작품을 발표했더라면, 독자들을 펄쩍 뛰게 만들 이 결말부를 놓고 떠들썩한 논쟁
이 벌어졌을 것이고, 괴테 자신도 거기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카톨릭 옹호자라면 그러한 결말부에 대해 그다지 동요하지 않고, 그 결말은 늙은 괴
테가 죽음을 앞두고 개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27. 낭만파 The Romantics
 
  르네상스는 재발견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한껏 즐겼고,  밀턴은 기독교 신화를 확장했다.
이신론자들은 과학을 신화로 만들었으며, 계몽주의자들은 모든 종류의 신화화를 타파하려고
했다. 낭만주의 작가들은 과거에 반항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신화를 만들어 냈다. 이는  과거
의 신화들을 불신하고 뒤엎는 것이었다. 19세기가 진행함에 따라  그런 새로운 신화들은 점
점 합리성을 잃고 신비적 환상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그렇지만 아주 독창적이지도 못했다.)
그리고 점점 더 인위적 환성, 즉 마약에 의존하면서 자의적으로 퇴폐에 빠져들었다.  이러한
관점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공식적으로 '대항문화counterculture'라는 이름을 갖게  되
었다.
  이러한 급진적 시각의 확산은 19세기 초,  블레이크(1757-1827)의 글과 그림에 잘 나타나
있다. 어떤 면에서 그의 작품은 미래의 축도라 할 수 있다. 런던에서 양품점을 하던 양말 제
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블레이크는 소년  시절 판화가의 견습생으로 일을  배웠다. 21세에
독립해서 가게를 연 후 아내 캐서린과 함께 평생 판화 상점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단한  독서가였다. 그의 신학 이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지만, 블레이크는 깊이 있는 종교가이자 환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일련의 복잡한  서
사시들을 통해 블레이크는 그리스, 로마 신화, 기독교 신화, 밀턴과 스베덴보리의 신화, 심지
어는 단테의 신화 체계까지 자신의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체계적인 시들은 블레이크 생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그
의 명성을 유지해 주는 것은 아름답고 간결한 몇 편의  서정시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
라 점점 더 그 심오함을 인정받는 수백 편의 독특한  그림과 삽화들이다. 하지만 그 시대를
정의한다고 볼 수 있는 모든 사건에 블레이크가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점에서, 그는 자기 시
대의 리트머스 시험지였다. 그는 역사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환희하고  때로는 절망하면서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묵시적인 시들을 썼다. 한편, 반 세기 동안 가장  중
요한 시로 꼽혔던 '실락원Paradise Lost'에 대해 자신이 직접 쓴 '밀턴'으로 대응했고, 스베덴
보리에 대해서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을 써서 자신의 생
각을 밝혔다. 그는 그 시대의 비의적, 신비적 혼란을 반경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시는
우리에게 처음으로 산업혁명의 부정적 측면을 바라보게 해 준다. '런던'과 '예루살렘'에서 도
시의 빈민굴은 소외된 계층의 지옥으로  그려진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후대  시인들이 너무
자주 차용하는 바람에 진부한 표현이 되어 버렸지만, 블레이크가  갖는 힘은 사라지지 않았
다. 구약성서의 예언자처럼, 그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위선과 냉혹함을 통렬히 비난했다. 그
리고 그의 서사시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사탄이 억압적 폭군에 대항하는 영웅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절정에 이른 낭만주의 시가에서도 이처럼 강렬한 주제는 없었다.
  블레이크가 우의 체계는 그의 상징들과 그 상징들이 나타나는 바가 유동적이기 때문에 참
고 서적의 도움을 받아도 판독하기 어렵다. 하지만 블레이크가 악마적 형상들을 긍정적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는 악마적인 자들을 시의 천재 또는 시의 귀재와
동일시한다.  니체라면 이것을 고전미의 질서 위에 선 아폴론의 힘에 대립하는 장엄한 혼돈
에 싸인 디오뉘소스의 힘이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블레이크가  밀턴에 대해 "진정한 시인은
악마의 편에 선다."라고 한 말이 의미하는 것도 이것이다.
  후대 등장한 어떤 시인도 블레이크의 시만큼 복합적인 신화를 써 내지 못했다. 단지 기억
할 만한 것은 셸리Percy  Bysshe Shelley(1792-1822)가 쓴 '사슬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Unbound'라는 작품에서도 제우스가 억압적 폭군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제우
스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만물을 그릇되게  창조한" 데미우르고스로서, 새로운 천국과 새
로운 지상의 천년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도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한 제우스
에 대항하는 자가 바로 사슬에 묶여 고통받는 거인 프로메테우스다. 셸리는 자기 시의 서문
에서 직접적으로 또 호의적으로 프로메테우스를 밀턴이  말하는 사탄의 위치로 끌어올린다.
왜냐하면 프로메테우스는 야심, 질투, 복수심,  자기 과시욕 등의 오점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카우카소스 산 꼭대기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하강의 모티프를 풀어가기 어렵게 했지만, 셸리는  프로메테우스의 정신의 화신인 아시아를
'무덤 아래'에 있는 저 세상, 심부Deep로 내려 보내는 형태로 해결한다. 나중에 아시아는 그
곳에서 "무시무시하고 기이하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형체들" 가운데 이름  모를 세계와 신과
권력자들, 정령들, 영웅과 야수들 그리고 "거대한 암흑, 데모고르곤"을 보게 된다.
  그 심부는 지옥도 아니고 하데스도 아니다.  셸리는 그곳을 제우스와 푸리아이(복수의 세
여신)와 연결짓는다. (이것은 사도에 떨어진 기독교 또는 세속과 결탁해 확립한 교회의 권위
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암흑의 마왕 데모고르곤은 거대하고 어두운 무정형의
존재이며, 셸리는 이것을 아직 조직화되지 못한 불분명한 민중의 힘과 동일시한다. 제우스는
마침내 타도되어, 기독교의 (또는 플라톤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 부분은  그리스 비극과
중세의 성사극을 동시에 연상시킨다.
 
  지옥을 열게 하라.
  거대하고 광폭한 불의 바다를 열게 하라.
  그것들을 바닥 없는 심연 속으로 내리 눌러라.
  ......
  아! 아!
  사대가 나를 거역하니
  나는 아찔히 가라앉는다. - 바닥으로 영원히.
  그리고 구름처럼 내 위에 있는 적은
  환호하면 내 추락을 암울하게 한다. 아! 아!
 
  땅과 달과 정령들은 위대한 사랑의 승리를 찬미하고, 이제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데모고
르곤도 하늘의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을 축복한다.
  존 키이치(1795-1821)는 태양신의 자리를 아폴론에게 빼앗긴  휘페리온을 그의 거인Titan
으로 선택한다. 신화를 소재로 한 그의 첫 번째  시 '휘페리온'은 셸리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기술적 문제에 부딪친다. 다시 말해, 지하세계 타르타로스로 몰락한 거인들이 슬픔과 우울함
으로 무력해져서- 문자 그대로 거의 돌처럼 굳어져서 -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다. 키이츠는 두 번째 설화시 '휘페리온의 추락Fall of Hyperion'에서 자기  자신이 꿈속에서
지하세계로 내려감으로써(그는 단테를 읽었다.)그 거인들을 움직이게  했다. 그가 연옥의 계
단 같은 것 앞에 서자, 여자 거인 모네타가 그에게 계단을 오르라고 명령한다. 두려움에  떨
면서 복종하는 그는 얼음과 같은 냉기로 고통스러워하며 비명을 지른다. 모네타는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 배운 것이라고 그에게 말해 준다. 그 다음으로 그는 타르트로스를 본다.
그의 시적 자아는 휘페리온의 후계자, 즉 태양의 신이면서 동시에 시의 신인 아폴론으로 다
시 태어나기 위해 공통과 죽음을 겪어야 하고, 지옥을 정복해야 한다.
  이 시는 비록 완결되지 못했지만, 창조적 야망에 대한 은유로 사용된 하강의 모티프 그리
고 이전 시대의 거장들 또는 아버지와도 같은 인물들과 벌이는 예술적 투쟁을 다룬 매력적
인 초기 작품으로 남아 있다. 19세기라는 시대는 그 시대 전체가 프로이트를 기다리고 있었
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대를 살았던 조기 고든 바이런 경(1788-1824)은 그가 쓴 작품뿐  아니라 실제로 그가
체현한 낭만파의 사악한 영웅의 삶 때문에 낭만파 시의 중심 인물로 널리 인정받았다. 바이
런은 오랫동안 기이한 행동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복누이와 벌인 근친상간 추
문으로 명성을 떨어뜨렸다. 가정에서의 가학적이 행동 때문에 파탄에 이른 결혼 생활, 줄 이
은 성적 스캔들 때문에 그는 영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는 '맨프레드'를 출판함으로써,  망명
생활에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이 시는 근친상간에 빠져든  갱생불능의 '사탄적인' 귀족 또는
참으로 바이런적인 귀족에 관한 파우스트류의 드라마다. 맨프레드는 하느님에게도, 악마 (여
기서는 아리마네스라고 불린다.)에게도 복종을  거부한다. 마침내 그는 지옥으로  가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신을 끌고 가기 위해 찾아온 악마에게, 주인이 주제넘은 복종에게 호통치듯이
추상같은 기세로 호령한다.
 
  네 지옥으로 돌아가라!
  너는 나를 어찌할 힘이 없다. 내 그것을 느낀다.
  너는 나를 결코 점유할 수 없다. 내 그것을 안다.
  이미 저지른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나는 비록
  고통받고 있지만, 그것은 네게서 얻은 것이 아니다.
  영생불멸의 정신은 선하고 악한
  생각에 스스로 보답해 준다.-
  그 스스로가 악과 종말의 근원이며 -
  그 자신이 공간이며 시간이다...
 
  너는 나를 유혹하지 않았고 유혹할 수도 없었다.
  나는 네게 속아넘어가는 사람도, 네 전리품도 아니었다.-
  나를 파괴할 수 있는 자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나 자신 뿐이다. - 돌아가라 너 실패한 마귀여!
  죽음은 내게 달린 것, 너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여기서 바이런은 영국의 부르주아 사회체제에 대한 경멸을 '실패한 마귀들'이라는 말로 표
현했으며, 그러한 공격은 더할 나위 없이 성공적이었다. 전혀 아이러닉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자신의 악명 높은 이미지를 철저히 이용하면서, 스스로를 억압에 맞서  프로메
테우스처럼 반란을 일으킨 고독한 영웅으로, 추방당한 예술가로, 모든 여성이 사모한 비운의
돈 후안으로, 오만하면서도 기이한 고딕적 반영웅anti-hero으로 표현했다. 사람들은 먼저 그
의 행동을 샀고, 그 다음에 그의 시를  샀다. 괴테는 바이런을 오이포리온, 다시 말해  '시의
정령'이라 부르며 칭송하며, 미솔롱기에서 '시인다운'  최후를 마친 바이런을 기리는  애가를
'파우스트'(제2부)에 삽입했다. 또 괴테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볼품없는 외발로 묘사한 것은 바
이런의 그 유명한 기형 발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이런은 또, 악마 이야기가 나오는 시 '가인Gain'에서  루시퍼를 바이런적 영웅으로 그리
고 있다, 여기 나오는 지옥은 그  시대와 바이런 자신의 또 다른 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바이런은 뷔퐁과 다윈 사이에 교량 역할을 하는  인물인 프랑스의 지질 학자이자
고생물학자, 퀴비에 남작Baron George Cuvier의  책을 읽고 있었다. 남작은  오늘날도 흔히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아주 오래 전에 어떤 재해 또는 잇따른 재해가 거대한 뼈를 가진 피
조물들을 멸종하게 했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19세기의 화석 수집가들은 그 뼈들을 지속적으
로 수집했다. 바이런은 "그때 지구상에 있었던 거인들"에  대한 성서적 설명들을, "맘모스만
큼이나 힘이 세고 인간보다 지능이 더 발달했던 이성적 존재들"의 뼈에 대해 서술하는 시적
허구를 구상하는데에 이용했다. 그는 그 멸종한 존재의 영혼들과 함께, 공상과학적인 하데스
가 우주의 어느 곳인가에 있다고 가정했다. 영화 '수퍼맨'에서 수퍼맨이 로이스 레인을 메트
로폴리스위로 데려가듯이, 루시퍼는 가인을 정령들의 세계로 데려간다. 가인은 황홀하면서도
두려워 묻는다.
 
  오! 출렁이는 그림자와 거대한 형상으로 된
  너 끝없는 어두움의 세계여.
  모두 거대한 우울함에 둘러싸여 있다.- 너 무엇이냐?
  살아 있느냐, 살아 있었더냐?
 
  루시퍼는 양쪽 다 어느 정도 맞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강력했던" 과거 한때의
모습으로 인도한다.
 
  지적이고 선하며 위대하고 영광스런 존재,
  그대의 아버지 아담이
  에덴에 머물렀을 때보다 더 뛰어나도다.
  육만 세대 이후의 그대 자손이
  그대와 그대의 아들보다
  훨씬 무디고 침체되고 퇴화해 가리라.
  그들이 얼마나 허약한지
  그대 자신의 육체를 보고 판단하라.
 
  거대한 짐승들은 '대양의 환영'너머에 있다.
 
  저 거대한 뱀,
  심연에서 솟아 나와
  그 늘어진 갈기와 저 거대한 머리를
  도도한 삼목보다 열 배나 높이 곧추 세우고,
  얼마 전 보았던
  천체를 감싸듯이 틀며 보고 있다.
  에덴의 나무 아래서 햇빛을 쪼이던
  바로 그 농이 아니던가?
 
  프론토사우루스(뇌룡)가 에덴의 뱀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또다시) 근친상간이라는 주제 그리고 의식적으로 맹목적인 교리에 대한 불복종(여호와에
순종하지 않은 가인)을 찬양함으로써, 바이런의 시에는 신성모독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것
은 분명히 바이런이 의도한 것이었다. 그의 메시지 또한 분명했다. 지식과 사랑은 소유할 만
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설파하면서, 그것을 금하는 하느님(또는 국가)이야말로 악이
라고 불러서 마땅하다는 것이다.
 
  바이런과 셸리는 이탈리아에서 마약에 손을 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의 시인들은
손을 대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지옥을 경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비록  세기초에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1772-1834)와  드   킨시Thomas  De
Quincey(1785-1859)가 신경안정을 위한 '진통제'  또는 아편을 복용하기 시작했을  때, 아직
마약중독이라는 의학적 개념을 정립되지 않았지만, 19세기  초에 이미 그들은 파우스트식의
흥정, 즉 마술적 세계에 들어 가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환각체험visions을 얻으려면 언제나 대가가 필요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기꺼이 감내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세 시대에는 신비  체험을 위해 장시간의 기도, 단식, 채찍질,  발
열, 인위적 불면 등의 대가를 치렀다. 한편, 밀에 기생하는 독성 균류인 맥각과 같이 자연적
으로 생기는 환각물질을 섭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블레이크나 보쉬처럼 약물의 도
움 없이 저절로 환각을 체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산업사회에서는 마약을 쉽게 구
할 수 있었으므로, 인공적인 환각 상태에 빠져들기가 쉬웠다. 마음의 저 반대편에서  발견한
놀라운 신세계, 이곳은 황홀하게  빛나고, 중독될 만큼 뇌쇄적이며,  위험할 정도로 '시적인'
우의적 지옥이었다.
  마약복용으로 인한 체험들은, 흔히 피안으로 여행하는 것 같은 형태를 취할 때가 많기 때
문에 20세기 후반의 환각 체험자들은 그 것을 흔히 '소풍trip'이라고 불렀다. 그 좋은 본보기
가 콜리지의 '늙은 선원의 노래'다. 항해하던 배가 왠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열대의 태양아
래서 갑자기 잠잠해진 기묘한 빛의 물에 둘러싸인다. 그곳은 "꾸물거리는 수천의 생물들"과
원혼들로 가득하다. "죽음"과 "악몽 같은 죽음의 생명체"가 탄 유령선이 나타나고, 선원들이
하나씩 쓰러져 죽고, 마침내 그 늙은 선원만 남고 물은 다 말라 버린다. 그는 (알바트로스를
한 마리를 죽인)자신의 죄로 7일 밤낮은 고생하다가  무력해진 채 차라리 죽기를 갈망한다.
그러다 무심코 달빛 속에서 그가 경멸했던 "꾸물거리는 생명체"을  내려다보다가 달빛 속에
서 그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발견한다. 그의 마음에서  물뱀에 대한 사랑이 용솟음쳐 나오
기 시작할 때- 낭만주의적 반전의 또 다른 예다-  비로소 음산한 적막이 깨지고 비가 내리
기 시작한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배는 죽은 선원들의 몸에 깃든 천사들을 태우고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 
  '늙은 선원의 노래'는 콜리지 자신의 (번듯한) 주석을 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분에서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란 외적 범주에서 볼 때  작품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도 아니고, 어떤 작품도 그것을 완벽하게  조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마약으로  얻은
환상여행의 의미가 완전히 엉터리라는 말도 아니다. '늙은 선원의 노래'와,  그밖에 환상적이
고 초자연적인 주제를 다룬 그의 다른 단편들, 예를 들어 '크리스타벨'과 '쿠블라 칸'은 - 콜
리지는 이 작품을 마약의 도움으로 썼다는 것을 시인했다. -  지금까지도 호소력을 잃지 않
고 있다.
  프랑스의 낭만주의자들도 영국 낭만주의자들처럼  밀탄의 사탄에 대항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나폴레옹도 끼어 있었고, 그들의 모반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샤토브리앙은  지
옥의 무대를 북아메리카로 옮겨 놓았고( '나체즈 족Les Natchez ,1826), 빅토르 위고는 사탄
을 저주에서 풀어 주려는 의도로, 미완성 3부작을 썼다. 한편 프랑스의 젊은 시인들은  압생
트와 함께 대마와 아편을 벌레 먹은 나무에서  채취한 중독성의 약물에- 환각과 환청을 일
으키며 노에 치명적 손상을 줄 수도 있다.-  적셔 삼키면서 그들 자신의 행보를 취했다. 보
들레르Charles Baudelaire(1821-1867)는 고질병이었던 매독 때문에 40세가 되기도 전에 거의
정신착란증에 빠질 지경이었다. 스베덴보리를 신봉했고 바이런과  포우에 경도 되었던 보들
레르는 자신의 첫 시집 제목을 '악의 꽃Les Fleurs du  Mal'(1857)이라 이름 붙였다. 거기서
수록한 시들은 어떤 식으로든 거의 모두  사탄, 지옥의 거주자들, 시체, 흡혈귀를  얘기하고,
적어도 불길하고 어두운 어떤 것들에 대해 언급한다. 보들레르는  그런 것들에 전적으로 공
감하지는 않았지만 그 황홀함에 매료되었던 듯하다. 다소 아이러닉하지만, 그는 마약의 도움
으로 지옥을 배회하기로 했다. 마약은 그를 몰락시켰다. 마약복용은 최악의 경우 칙칙한  세
계를 경험하게 할뿐이었고, 최선의 경우 그가 거부했던 여호와에 도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시는 선과 악이 교차하는 "차갑고 불길한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표현한다. 이 시집 때문
에 보들레르는 풍기 문란죄로 기소되었고, 법정은 그 중 여섯 편의 시를 삭제하라고 판결했
다. 하지만 이 시집은 시대의 산물이었기 때문에 그 인기는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다.
  랭보Arthur Rimbaud(1854-1891)는 보들레르의 추종자로서,  맥독으로 고통받았다는 점에
서까지 비슷한, 이른바 '저주받은 시인poeye maudit'이었다. 그는 16세 때부터 19세가 될 때
까지 아주 짧은 기간동안 시를 썼을 뿐이지만, 실제로 그  역시 마약을 복용했던 것으로 알
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시  '지옥에서 보낸 한철Une Saison  en Enfer'에서는 마약에 대한
이야기보다 마약에 중독 되었던 제 3의 시인 폴 베를린과의 애정행각에 대해서 더 많은  이
야기를 하고 있다. 여한튼 랭보는  환각체험trip 시 중에서는 아마 가장  유명하다고 할만한
'명정선 Le Bateau Ivre'이라는 시를 썼다. 여기서 랭보는 환각적인 신세계의 강을 항해하는
험난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시에서 그는 토사물로  얼룩진 자신의 육신인 배boat를 주체
하지 못하고 강을 떠내려가다가 이윽고 은하수에 이른다. 기이함과 추억으로 점철된 보수의
그림같은 풍경이 - "환상의 플로리다"와  같이- 주마등처름 지나가는데, 그  체험은 공포에
들뜨게 하면서 동시에 무한한 장엄함을 일으킨다. 랭보는 지옥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한다.
  영혼 깊은 곳으로의 환상여행을 위해 반드시 마약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마치 그런
것처럼 되었다. 멜빌Herman Melvile은 자신의 초기 해양소설들을 솔직하고 밝은 어조로 쓰
다가, '백경Moby-Dick'에 이르러서는 그 우의적이고 환상적인 긴 항해에 독특하고 환각적인
문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항해 이야기에는 이런 식의 문체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또, 거칠면서도 번득이는 데가 있는 크레인Hart Crane의 20세기 환상여행소
설을 상기해 볼 수 있다. 한편, 자기 자신은 마약과 거의 관련이 없으면서도  'C문자의 코미
디언The Comedian as the Letter C'같은 작품에서 환상여행이란 장르를 우아하게 패러디한
시인 스티븐스Wallace Stevens가 있다.
  마약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의 신비주의, 특히 윌리엄 B.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스
윈번Algernon Swinburne(그의 시에서는 일종의 지상 지옥에 대한 에로틱한 새도매저키즘을
극단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와일드를 회원으로 하는 '황금새벽의 연금술사회Hermetic
Order of the Golden Dawn'같은 악마신앙 회합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예이츠는 평생 신
비주의 신봉자였고, '악마는 반전된 신의  모습Demon Est Deus Inversus'이라는 '영적'이름
이 있었다. ) 그들의 악마적 작품 성향은 세기말 fin de siecle의 '진홍빛 연기'속에서 멋지게
피어났는데, 때로는 오브리 비어즐리의 삽화처럼 아이러니를 가미하기도 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마약과 관련한  시  중에서도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악귀시장Goblin
Market'(1862)은 가장 기이하다. 그녀는 시인이면서 예술가인 그녀의 오빠 단테 가브리엘 로
세티가 주도한 런던의 예술동맹과 연관을 맺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마약 경험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녀는 왜  로라를 '고양이 얼굴'과 '쥐  얼굴'을 하고서 이상한 열매를
가지고 그녀를 유혹하는 악귀들 속에 머무르게 했을까? 가엾은 로라는 곧 마약에 중독되고,
악귀들이 그녀에게서 사라지자  고통에 겨워 비참하게  몸부림친다. 착한  리지는 여동생의 
아픔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악귀들을 찾아간다. 악귀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본성을  적나라
가게 드러낸다.
 
  그들의 소리는 크게 울리고
  모습은 흉칙하다.
  난폭하게 꼬리를 움직이면서
  그녀를 짓밟고 밀치며
  팔꿈치로 떠밀고
  발톱으로 할퀴며
  짖어대고 울부짖고 신음하고 조롱하면서
  그녀의 옷을 찢고 양말을 더럽히고
  머리채를 잡아채고
  그녀의 부드러운 발을 짓밟는다.
  그녀의 손을 붙들고 자기네 과실로 즙을 내어
  먹으라고 그녀의 입 속으로 넣으려 한다.
 
  이 장면은 '오르페오 경Sir Orfeo'이라는 중세 성사극을 변형한 장면이다. 하지만 낯선 장
면이 나온다. 용감한 리지는 악귀들의 과즙을 맛보지 않고, 그것을 온몸에 뒤집어 쓴 채  로
라에게 돌아와 외친다.
 
  "보고 싶었지?
  와서 입맞추렴.
  내 상처는 신경 쓰지 마,
  껴안고 입맞추고 빨아먹으렴,
  널 위해 악귀들에게서 과즙을 짜 왔어,
  악귀의 과육과 악귀의 이슬을.
  나를 먹고 마시고 사랑해 주렴.
  로라, 나는 리지야."
 
  로라는 그녀에게 달려든다. "학질에 걸린 듯 두려움과 고통에 떨면서, 로라는 굶주린 입으
로 리지를  맹렬히 핥아댄다." 웬일인지 과즙이 쓰게 느껴졌지만 로라는 멈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리지의 덕성이 자기 몸에 묻은 과즙을 해독제로 변하게 했기 때문에, 이윽고 로라는
'피 속의 독'에서 해방된다. 자매의 우애에 대한 따뜻한 교훈, 그리고 미묘한  뉘앙스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고집스러운 맹목성을 담고 있는 이 장면 덕분에 이 무시무시한 시는 온 가
족이 함께 읽는 작품이 되었다.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은 강신술이나 최면술, 접신술에 심취했고, 자기네 여왕이 그랬던 것
처럼 죽은 자에 대한 애도, 예배에 맹목적으로 집착했다. 특히 나이 어린 사람이 죽었을  때
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그들은 유령 이야기, 공포 소설, 공상 소설을 좋아했다.  이 공상
적인 이야기들은 때로 결말에  가서 달콤한 교훈으로 덧칠되기도  했지만, 기독교적 교의는
거의  담고   있지 않았다.   이것들은   미국의 공포   소설-  대체로   포우Edgar  Allen
Poe(1809-1894)가 만들어낸 형태라 할 수  있다.-과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소재를 얻기보다
는 '무덤 저편'의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영의 세계에서 온 도깨비, 유령, 망령들에  대한 내용
을 담고 있다. 공상과학 소설은 이제 은하 건너편으로 무대를 옮긴다.
  20세기의 인기 있는 환상작품으로서 잊혀지지 않는 세 작품을 아래에 소개한다. 이것들은
온갖 가능한 소재를 구사하여 씌어진 고딕소설로서 사람들은 이 작품들을 끊임없이  모방하
고 응용하였다. 이 세 편의 소설은, 과학이 기괴한 생명체를 만들어 낸 뒤 그 괴물을 유기한
다는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케슈타인'(1818), 파우스트 류의 과학자가 장기이식이 아니라
현현한 '이드'로 생명을 창조한다는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지킬박사와 하이드
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Hyde',  그리고 사랑에 빠진, 본래적인 의미의 고딕적
악마가 저지르는 연쇄 살인 이야기인 스토커Bran Stoker의 '드라큘라'(1897)다.
  그런데 지옥은 이 세 편의 고딕 소설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드라큘라와 그의 앞잡이
들은 악마다. 십자가로 그들을 물리친다는 대목을 보면 혼동이 생길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
적 의미의 악마는 아니다. 그들은 구전 설화의 어두운 숲 속에서 온 밤의 피조물들이다.  시
체가 먼지로 화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흡혈귀 또는 그 희생자들이 지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
하는 독자는 없다. 하이드 역시 악마다. 하지만 화자가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을 벗어나지 못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자연적으로 저주받은 영혼은 아니다. 하이드는 현대적인 비유로서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이드에 상응하는 인물을 도리어 그레이다. 그는 지킬  박사의
얼굴 속에 하이드의 영혼을 감추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의  숨겨진 진짜 모습을
하인들이 보게 함으로써 도리언에게 충분한 벌을 주었다고 생각한 듯한데- 물론 옳은 이야
기다.) 스토커와 스티븐슨이 자기 시대에  걸맞는 소설을 썼다면, 마리 셸리는  그들보다 한
시대 더 진보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사람 모두 자신들의 어리석은 피조물들이
형벌의 지옥에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엽에 지옥은 대중문화에서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문자 그대로의 지
옥의 이미지가 중산층의 사고방식  속에 여전히 존속했다고 한다면,  도대체 지옥은 어디쯤
위치하고 있단 말인가? 분명히 지사는 아니다. 1865년 루이스 캐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를 출판한 이래 지옥은 지하를 벗어났다. 그것은 윌리암
휘스턴이나 바이런에 이르러 우주 어디쯤 인가로 튀어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28. 만인 구원론Universalism
  격렬한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19세기 후반에도 기독교 교회 내에서 지옥Hell을
없애려는 시도가 있었다. 오리게네스가 모든 사람은 결국 용서받게  된다는 이론을 편 이래
로, 만인 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은 기독교의  배후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의 성직자들이 모두 단호히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
다. 1,500년의 세월이 흐른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상식을 벗어난 이론들에 대해  처음
으로 공공연한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친숙하지만 150년 전만 해도 색
다르게 다가왔던 관점, 즉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낭만주의적 개념은  주주에 대한 새로운 시
각을 요구했다.
  1750년경 만인 구원론이라는 교리를 처음으로 선포한 사람들 중 하나가 영국인 제임스 렐
리(1720-1778)였다. 처음에 렐리는 침례교도였고,  그 악명 높은 설교자  조지 화이트필드를
추종했다. 하지만 화이트필드가 불을 뿜는 듯한 부흥회 설교로 조나단 에드워즈까지 침묵하
게 만드는 것을 보고 렐리는 적잖게 당황했던 듯하다. 그  후 렐리는 화이트필드를 떠나 온
건한 존 웨즐리의 감리교회로 옮겼다.  하지만 렐리는 결과적으로는 더욱  급진적인 사람이
되어 결국에는 정통 칼뱅주의를- 이 시점의  칼뱅주의는 대부분의 영국 종파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아마 퀘이커 교도는 여기에서  제외될 것이다.- 거부하고 순회  설교자가 되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만약 그리스도가 만인을 위해 돌아가셨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
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칼뱅주의자 존 머레이는 렐리의 영향으로  전향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1770년 머레이는
뉴저지 주의 굿 럭에 도착하자마자 북동부 식민지 전역을 돌면서 만인구원론을 설교하기 시
작했다. 1781년,   침례교도인 그의  동료  윈체스터(1751-1797)는 만인   침례교회Universal
Baptist Church를 설립하여 순식간에 개종자들을  끌어들였고, 1790년에 이르러서는 필라델
피아에서 만인 구원론자 성직회를 열 정도로 세력을 키웠으며, 1820년대에는 미국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초기의 만인 구원론자들은 프로테스탄트 종파들의 정통 교리를 따랐고, 거기서 말하는 모
든 주제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원한 고통이라는 주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영국
의 초기 이신론자들처럼 지옥의  존재를 믿었지만, 지옥에 머무는  것은 일시적이며 정화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머레이는 하느님은 선하기 때문에  징벌을 내리는 존재라기보다는 용
서하는 존재이며, 오리게네스를 따라 - 머레이가 그의 가르침을 알았든 알지 못했든 간에 -
인간은 지옥에서도 자유의지를 가지며, 지옥의 공포를 생각한다면 인간은 반드시 회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아니 회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영향력 있는 지도자인 호세아  발로우
(1771-1852)는 비록 그의 선배들만큼 제대로 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사려가 깊었고 타고난
지적 재능이 있었다. 그는 이신론자들의 글을 읽었고, 이성을 믿었으며, 토마스 제퍼슨과 에
탄 알렌을 받들었다. 그는 만인 구원론이 지닌 신학적 난제들에 정면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본성이 구원을 보증하고 인간의 본성이 궁극적으로 선한 것을 택한다면, 그리스도
의 희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간은 왜 그리스도의 신성함 또는 그의 부활을 믿어야 하
는가? 삼위일체는 왜 필요한가? 인간은 왜 타락했고 왜 원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는가? 무엇
보다도 만약 영원한 지옥이 없다면. 무엇에서 '구원되는' 것이란 말인가?
  발로우는 정통파의 신학논리는 모두 불필요하다는 과격한  결론을 내렸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은 파멸의 운명에서 인간을 구원할 것을 보증했고, 그 파멸의 운명은 십자가 고난 이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영벌의 고통을 믿지 않았고 급기야
는 지옥도 전혀 믿지 않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속한 교회까지 당혹하게 했고 분열을
초래했다. 만인 구원론자들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이리저리 표류해야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일시적인 벌 -이것을 '원형회복restoration'이라고 한다. -을 받는다는 주장으로  기울었다가,
20세기에는 발로우의 극단적인 주장으로 옮겨갔다. 그 무렵 많은 만인 구원론자들이 사후세
계에 대해 아무 것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만인 구원론은 자체적으로 중, 고등학교와 - 만인 구원론자인 호레이스 만은 미
국 공립학교 제도가 발전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 대학들을 설립해서 사회적 기반을 닦
아 나갔다. 그들은 1860년대 다윈의 진화론이 몰고 온 종교적  위기를 다른 어떤 기독교 종
파들보다 잘 극복했으며, 전반적으로 과학을 긍정했다. 상행위에도 긍정적이었는데, 가령 서
커스 단장이며 흥행사였던 바넘 같은 이도 저명한 만인 구원론자였다. 그는 "장사에서 단골
은 1분마다 한 명씩 생겨난다."라는 식의 얘기를  공공연하게 할 만큼 장사에도 열정적이었
다. 20세기 들어서자 만인 구원론자들은 진정한 종교는 어떤 면에서 보더라도 '보편적'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세계의 다른 거대 종교들에까지 손길을 뻗쳤다. 1960년이  되면
미국 만인구원교회는 미국 유니테리언 연합회와 합병하였다.
  하지만 정통론 자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던 19세기에, 특히 일시적 지옥에 머무른다는
설조차 의심하는 만인 구원론자의 가르침은 발로우가 주장한 바로 그 근거들의 온갖 측면에
서 공격을 받았다. 하느님이 모든 인간, 심지어 가장 사악한 죄인들까지도 구원해야  한다는
입장은 부도덕하고 불경스러워 보였고, 아르미니우스 파의 자유의지 옹호자들이 지적했듯이,
칼뱅주의만큼이나 결정론적인 것으로 들였다. 지옥의 실재를 부인하는 것, 그로써 예수의 십
자가 죽음의 중요성까지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 정신도 함께  포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단
순한 '휴머니즘'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를 파문으로 여겼다. - 당시 사람
들은 20세기 후반의 미국 근본주의자들과 같은 엄격한 견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19세기에 설립되었거나 이미 운영 중이던 미국 신학교의 도서관목록들은 오래되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책꽂이 위에 놓여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을 한 번쯤 들여다보는 것은
예전의 논쟁이 얼마나 치열했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1836년  감리교도들이 설립한
아틀란타의 에모리 대학에는 다음과 같은 빅토리아 시대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다.
  '성서의  천벌론  견해사   A History   of  Opinion  on   the Scriptural   Doctrine  of
Retribution'(1878)
  '끝없는 형벌과 영원한 생명 Everlasting Punishment and Eternal Life'(1879)
  '끝없는 형벌 Everlasting Punishment'(1880)
  '끝없는 형벌에   대해 믿을   수 있는  것은?  What  is of   Faith as   to Everlasting
Punishment?' (1880)
  '끝없는 형벌에   관해서 진리는   무엇인가? What  is  the  Truth  as to   Everlasting
Punishment?' (1881)
  '끝없는 미래 : 인간의 시련과 도래할 무한한 우주와의 가능한 관계  The Endless Future
: The Probable Connection between Human Probation  and the Endless Universe that Is
to Be'(작자는 이 책을 익명으로 출판하고자 했다. 그의 목적과 의도는 명예가  아니라 진실
이기 때문이었다.)
  '영원한 파면의 운명 Doom Eternal'(1887)
  '미래의 천벌, 이성과 계시의 관점에서Future Retribution: Viewed in the Light of Reason
and Revelation'(1887)
  '형벌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자비God`s Mercy in Punishment'(1890)
  '미래의 천벌Future Retribution'(1892)
 
  이런 종류의 책들은 논쟁의 양쪽 당사자들이 쓴 것이었다. 이 많은 책자 중에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인이 쓴 것도 있다. 또한 성직자들뿐만 아니라 확신에 찬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
이 진솔하게 쓴 것도 많다.
  보수 세력은 단호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1879년 영원한  지옥과 악마가 존재함을 긍정하
는 교서를 발행하였고, 카톨릭의 지성인들에게 그 노선을 따르도록 요구하였다. 전통적인 빅
토리아 시대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번연의 작품이나, 사제인 조셉  퍼니스가 지은 베스트
셀러 '지옥의 풍경The Sight of Hell'을 선물로  주었다. '지옥의 풍경'에서는 저주받은 영혼
들이 지하 감옥에서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꼬마 아이가 붉게 달군 가마솥 안에 있다. 들어 보라, 아이가 밖으로 나오려고 지르는  비
명 소리를. 바라보라, 아이가 불 속에서 어떻게 몸을  뒤척이고 비비 트는지를. 아이는 솥뚜
껑에 자신의 머리를 부딪는다. 아이는 바닥에서  그 작은 발을 동동 구른다..... 하느님은  이
어린 아이에게 아주 자비로우셨다. 하느님은 아이가 점점 더  사악해지고 결코 뉘우치지 않
으리라는 것을 아셨고, 그대로 두었다가는 아이가 지옥에서 더  심한 형벌을 받으리라는 것
을 아셨기에 자비를 베풀어 그 아이를 아직 어렸을 때 세상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이런 전통은 소규모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면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독
교 종파들이 여전히 영원한 지옥에 대해 긍정적인 믿음이 있었지만, 그 점을 지나치게 강조
하는 것은 카톨릭 전통주의자들과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자들뿐이었다. 지옥은 일종의 당혹
감을 안겨 주는 그 무엇이 되었고, 천벌이라는 위협에  의지하던 주교는 즉시 대중언론에서
비난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볼 때, 사후세계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설픈 만인  구원론
의 입장- 그것이 현대의 것이든 아니면 과거 식으로 일시적 형벌을 받는 것이든-에 동조하
는 듯하다.
  그 어떤 기독교 종파도 공식적으로  아직 '유니테리언=만인 구원론자'라는 정식을 인정하
지 않는다. 만인 구원론자들은 에머슨식의 산문조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하느님의 특성에 의거하여 보면, 영원한 지옥이라는 가르침은,  하
느님에 대한 가장 비열한 모독이며, 천국에서 누릴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
는 이를 철저하게 거부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포
함하여 인류의 반이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심장이 돌이 아닌 이상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이 어두운 가르침대신에, 미래의 생활은  영원
한 정의와 사랑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우
리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이, 다가올 세상에서는 그의 모든 아이들의 확실한 아버
지가 되실 것을 믿는다. 그리고 세상은 여기에서 올바르게  행동한 사람들에게 모두 영원한
선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그릇된 행동을 한 사람에게도 영원한 희망을 선사할 것이라고 우
리는 믿는다.
 
    29.프로이드의 시대The Age of Freud
 
  현대 세계의 예언자로서 자주 인용되는 인물 네 명을  들자면 다윈, 마르크스, 니체, 프로
이트가 그들이다.
  찰스 다윈(1809-1882)은 1859년에 '종의  기원'을 발표해 지적  충격을 주었다. 그 책에서
다윈이 제시한 생물학적 결정론은 당시의 가장 진보한 철학 사상까지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
았다. 기계론적 우주는 스스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미 삐걱거리고 있었고, 생물과 유기체의
갈등이 지질학상의 태곳적부터 존재했음이 알려지면서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하느님의 힘과
선함을 보여 준다고 여겨지던 자연의 조화는 이제 개체들의  생식의 결과로 드러났다. 그것
은 무신론과 부도덕을 수반한 추잡한 사상으로 보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인간이 완전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원숭이나 유인원에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큰 분노를 일으켰다. (또는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다
윈의 새로운 복음을 확실한 진보의 표시로서, 즉 자연과 인간사회가 전진, 상향하는  증거로
서 환영했다.
  이보다 앞서 1848년에 칼 마르크스(1818-1883)는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발
표했다. 이보다 훨씬 영향력이 컸던 '자본론Das Kapital'은 그의 사후인 19세기 말엽에 엥겔
스가 편집했지만, 세기말까지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책에서, 지배 계급이
역사적으로 착취와 독재를 비호하고 촉진하는 도구로  종교를 이용했다고 보고, 종교를 "인
민의 아편"이자 속임수라고 비난했다. 또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종교와 함께 사유재산, 계
급을 타파하고, 노동력의 부당한 사용과  임금의 부당한 분배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20세기의 여러 나라들에서 국가적 규모로 실험되기 전에도, 지식인과 인도주의자
사이에서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는 진보를, 특히 획일적인 평등주의에 의한 진보를 믿지 않았
다. 인간은 지나치게 순응적이고 그 자체로 몰개성적이며, 기독교는 비열하게도 이를 이용해
인간으로 하여금 기괴한 초자연적 위협에  복종하도록 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니체의  '초인
Ubermensch'은 -나치는 이 말을 상습적으로 왜곡했다- 어떠한 복종(특히  제도화한 종교를
포함하여 파시즘과 같은 것들에 대한 복종)에  대해서도 항거하고, 최고의 인격적이고 윤리
적인 규준을 확립할 수 있는  의지와 힘을 지닌 사람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괴테는 완벽한
'초인'의 모범이었다. 그 시대의 시인들처럼 괴테는, 디오니소스적 희열의 숭고함을 찬미하여
아폴론적 미의 질서 위에 있는 어떤 것으로 높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옥에  대한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중추적인  인물은 지그문트  프로이트
(1856-1939)다. 19세기에는 은유적이고 '시적인' 사고방식이 발전했다면, 프로이트는 인간 정
신의 지형을 탐험하여 어두운 영역에 새 빛을 비추었고,  현대의 용어체계를 영구히 엄청나
게 바꾸어 놓았다. 예정론 대 자유의지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났고,  원초적 이드Id와 자아
Ego와 초자아Superego의 투쟁의 문제에 몰두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원죄가 아
니라, 불안, 억제, 억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그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 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는  결정적인 것'이라는 주장에 집착했던 만큼
이나 이 모든 것을 극단적으로 성행위에만 결부하여 생각했다.
  프로이트는 종교에 반대했다. 그는 종교를 제도화한 노이로제로 여겼다. 그러나  신비주의
적 기질을 지닌 젊은 동료, 칼 융(1875-1961)은,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종교에 대
해서도 프로이트와   견해가 달랐다.  융은  개인은  물론 종족에도   의미를 지니는  원형
archetypal figures을 끌어들이면서  집단적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덧붙였다. 융은 무의식을
억압한 결과 생겨난 절망을 '그림자Shadow'라고 부른다. 예술가나 작가들에게 끼친 융의 영
향력은 프로이트 보다 훨씬 큰 것 같다. 그들은 확실히 '그림자'를 이해했던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지옥은 사라지기는커녕 가장 중요하고  지배적인 은유의 하나가 되었
다. 번연도 '천로역정'에서 전통적인 설교의 '지옥의 구렁텅이Slough of Hell'라는 말을 '절망
의 구렁텅이Slough of Despond'로 바꾸었는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느 정도는 자신
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로이트와 니체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은 토마스 만과
같은 지식인 작가가 사용한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토마스 만은 히틀러의 독일을
무대로 하여 '파우스투스 박사Doktor Faustus'(1948)를 썼는데,  이는 음악가인 주인공인 강
박관념 속에서 절망적으로 미쳐 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선과 악, 정상과 광기의 문제를 탐구하는 일련의 힘있는 소설들 속에서 이미 사실적인 기법
으로 악마의 형상을 그려냈다. 아무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둘째 아들 이반보다 니체
가 말한 '신의 죽음'을 강력하게 표현해내지 못했다.
  근대의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과 폭넓은 상상력으로 지옥이라는 은유를 사용해왔다. 그 중
에서 지배적인 것은, 아이러닉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사용한 것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제
2부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1922)를 '밤거리Night town'또는 지하의 매춘굴로 이끌고,
그 뒤로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윌리엄 가디스의 '인식The Recognitions', 샐먼 루
시디의 '사탄의 시The Satanic Verses'(1988)를 면면히 이끌었다. 이 중 마지막 작품은 지옥
보다는 악마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내면 세계의 여행 못지 않게, 정글이나 전쟁터 같은 위험한 지대의 여행도 빈번히 작품화
하기 시작했다.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중심Heart  of Darkness'이 잘 알려진 예다. 코
폴라 감독은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1979년도  영화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에
서 환상적인 이미지를 사용하는 기법을 썼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대에는 좀더
친숙한 기법인 것 같다.  조셉 헬러도 '캐취-22'에서 같은  기법을 사용했고,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저지 코잔스키의 '화장한 새The Painted Bird',  그리고 코에츠의 '마이클 K 의 생
애와 시대The Life and Times of Michael K.'도 그랬다.  이와 유사하게 피카소의 걸작 '게
르니카'(1937)도 전쟁의 참상을 그리고 있지만, 엄밀하게는 전통적인 지옥을 그린 것임이 확
실하다.
  또한 지성적이라고 할 만한 지옥도 있다. 버나드 쇼의 '지옥의 돈 주앙 Don Juan in Hell'
에서는 나름대로의 해석과 함께, 전통적으로 '돈 주앙' 극들에서 덕의 인물로 등장하는 기사
돈 곤잘로를 지옥으로 내려보낸다. 천국은 너무 천편일률이고 융통성이  없다는 것을 돈 곤
잘로가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편 사르트르의 '비상구는 없다.No Exit'에서 세 명의
등장인물은 사후세계의 영원성 때문에 서로 진절머리를 낸다.
  지옥을 황무지로 보는 또 다른 현대적 시각이 있다. 이것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로버
트 브라우닝의 '암흑의 도시로 간 젊은이 롤랜드 Childe Roland to the dark tower came'라
는 작품에 나오는 "굶주린 듯한 참혹한 초목" 장면이다. 브라우닝은 제 시의 메마르고 악몽
같은 상이 어디서 연유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른다고 공언했지만, 엘리어트는 '황무
지'에서 한층 살벌한 형상으로 황무지라는 지옥의 이미지를 그려냈다. 엘리어트는 전통 전체
에 기반을 두면서 거기에다 새로운 요소를 덧붙인, 신비스럽고 위대한 시인들 중 하나다. 그
의 지옥은 고갈된 지옥이고 아노미의 지옥이며, 의미와 감정의 공허함이  덧붙여진, "골목엔
쥐들이 들끓고,/ 죽은 이들이 뼈를  잃어버리는 곳"이라고 표현되는 건조하고  텅 빈곳이다.
엘리어트는 다른 시들에서도 이런 황무지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암흑의 중심Heart of  Darkness'의 한  구절을 에피그래프로 쓴  '공허한 인간The  Hollow
Men'(1925)이다. 그리고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의 네 번째 시, '리틀 기딩'(1942)에서
도 황무지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단테와 예이츠(예이츠는 '리틀 기딩'이 나오
기 직전에 죽었다.)의 융합체로 보이는 낯익은 안내자가 그를 지하세계로 이끌어 간다.
  나는, 황량한 땅이라는 것은 베케트의 거의 모든 소설과  희곡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꾸물
대거나 빈둥거리는 곳, 또는 그들이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어느 '볼제(주머니)'에  갇
힌 자들처럼 목까지 파묻혀 있는 곳과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카프카의 '폐허'의 이미
지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톨킨의 3부작 환상동화 '반지전쟁The Lord of the Rings'에
서도 황폐한 영토가 등장한다. 이곳은 흉측하게 생긴 사람들만이 살고 있는 곳이며,  핵폭발
뒤의 사막 같은 폐허인데, 이 작품에서 톨킨은  암흑의 영주Dark Lord가 지닌 파괴적인 힘
을 보여준다.
  소설(픽션)뿐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지옥을 우울증이나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과 관
련짓는 것이 있다.  한나 그린버그는  '나는 너에게 장미  정원을 약속하지  않았다.I Never
Promised You a Rose  Garden'에서 정신 분열증을 다루면서  밀턴식의 반짝이는 이미지를
이용했다. 본네거트는 '에덴 익스프레스The Eden Express'에서 마약과 정신분열 증세를  서
술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레잉은 마약에 의존하든 아니든 간에, 의도
적으로 미쳐 버리는 것이 영혼에 이로울지도 모른다고 제안했다.  레싱은 여러 소설들 가운
데 특히 '지옥행 안내Briefing for a Descent into Hell'에서 그러한 광증의 절차를 서술하고
있다.
  영화나 텔레비젼에서 다루는 지옥은 대체로 고딕풍의 유치한 무대장치만을 보여 줄  뿐이
다. 지옥을 꾸미는 것은 무대감독이나 특수효과 담당자들이 자신들의 전문기술을 뽐내는 기
회일 뿐이다. 영화에서는 은유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장 콕도의 '오르페', 카뮈의
'흑인 오르페Black Orfeus'는 그 훌륭한 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상업 영화 제작자들은 이
런 은유적인 영화를 피한다. 상업 영화 중에서 지옥이라는  오래된 테마를 다룬 공상과학영
화 '에일리언Aliens'(1986)이 있는데, 여기서 여주인공 시고니 위버는 우주 시대의 이난나 같
은 모습으로 가공할 괴물 예레스키갈에게서  어린아이를 구하려고 공포의 지옥으로  내려간
다. 재미있는 아기 도깨비가 등장하는  희극적인 지옥의 모습은 만화책이나  만화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스탠리 엘킨의 블랙코미디 소설 '생지옥The Living End'(1979)에서는 능란
한 속임수를 사용해서 무시무시한 중세의 전통적인 지옥을 그렸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은  예전의 종교적 교화  기능에서 멀어져 갈  것이다. 특히
"임사체험near-dearth experience"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면서 그런 현상을  심화될 것이다.
그러나 융통성 있는 은유로서 지옥의 무궁무진한 가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메소포타미
아 시대 이래로 빈번히 그러했듯이, 지옥은 분명히 계속 변해갈 것이다.
 
  맺음말
 
  여러 저명한 학자들이 이 책의 각 장들을 검토해 주었다.  예일 대학과 뉴욕 대학에서 강
의하는 해롤드 블룸, 뉴욕 대학의 노르만 캔터와 제임스 카스, 하버드의 에밀리 베어모일 외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하지만 텍스트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전적으
로 내 책임이다. 뉴욕 대학 예술과학 대학원의 교양학부에서 여러 분야에 걸쳐서 연구할 수
있는 출발점을 마련해 준 덕분에 제 1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도서관을 사
용할 수 있도록 톡전을 베풀어주신 신시아 워드에게 감사드린다. 학교 동료인 캐롤 힐과 '고
딕적' 영감을 불러 일으켜 준 마가렛 아트우드, 적절한 제안을  해 준 테드 클라인, 존 마틴
을 알게 해 준 톰 디쉬, '예술과 고미술'을 멋지게 개관해 준 제프리 샤이어 , 열정을 가지고
책을 탄탄하게 편집해 준 안네 프리드굿과, 지도까지 여럿 그려 준 켄 파이셀에게 감사드린
다. 마지막으로 내 대리인이자 친구인 에릭 애쉬워드, 그리고 유익한 책과 무한한 지혜와 정
신적 후원을 주었던 선배인 앤 스테인튼 데인, 이 두 사람에게는 특히 감사드린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참고 문헌 목록에 실은 책은 다 좋은 책들이다. 지옥론infernology
이 악마론diabology과 어떻게 다른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도 악마에  대해 아주 재미있
게 읽을 수 있는 다섯 권짜리 책을 쓴 제프리 버튼 러셀의 선구적인 학문 수업은  지속적인
시금석이었다. 중요하고 유용한 다른 책들로는  로버트 휴즈의 '서양 예술에 나타난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in Western Art' , 워커의 '지옥의 쇠퇴The Decline of Hell', 자크 로
고프의 '연옥의 탄생The Birth  of Purgatory', 폴  존슨이 쓴 '기독교의  역사A History of
Christianity', 그리고 하워드  롤린 패취의 '저  세상The Other  World' , '예수의  지옥정벌
Harrowing of Hell'에 대한 벨의 미 출판된  논문 등이 있다. 각종 논문들을 복사해서 주신
알렌 번스타인에게 감사드린다. 번스타인은 중세 지옥에 대한 학문적  서적을 곧 출간할 예
정인데, 지옥의 전 계통과 관련해 매우 기대되는 작품이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오랜 시간동안 자문해 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뒤늦게 발견한 길가메쉬, 엔키두, 이난나, 에레쉬키갈이었다. 나는 메스포타미아 신화에 충격
을 받았고, 매우 기뻤다. 그 것이  나를 하계에 대한 탐구로 이끌었다.  그것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 준 여행이었다.
 
  옮긴이의 글
 
  이 책은 앨리스 K. 터너가 쓴 'The History of Hell'(1993, Harcourt Brace)를 완역한 것이
다. 번역을 하면서 현세는 '부정적 내세', 말하자면 지옥이 규정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인류가 지옥에 대해 그토록 깊은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아무래도 선과 악,  인
간의 고통이라는 현실적 삶, 윤리 문제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불법 행위, 약자가 바라보는 강자의 횡포 등
현세의 온갖 모순의 반영이었던 것 같다. 내세에 대한 종교적 가르침 때문에 현세의 질서가
정당성을 부여받고 유지된다는 말도 맞지만 , 역으로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내세의 근거 역
시 선과 악, 이상의 현실  사이에서 모순과 괴리를 경험하는 현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현세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요청'이 지옥의 탄생과 변천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세상에서 고통받던 사람은 사후세계에서라도 편안히 살날이  있어야 하고, 현세에서 부정
한 방법으로 편안하게 살았던 사람은 어떻게든지 힘든 자들의 고통을 알 기회가 있어야 한
다. 악은 언젠가는 심판 받고 선은 어떻게든지 보상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부조리한
세상살이를 어떻게 견뎌 나가랴,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가져왔다. 이러한 사고는 회화, 문학,
대중극 등 온갖 예술 분야에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통쾌해하기도 하고, 현재의 모
순과 고통이 해결될 때가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기도 했던 것이다.
  이 책은 독자로 하여금 이렇게 말할 수 있게 해 주는 온갖 자료를 상세히 제시한다. 특히
종교, 문학, 신화, 예술 등에 나타난 '지리적' 접근을 통해 사람들이 무엇을 지옥이라고 보았
나, 지옥과 같다고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왜 시대에 따라 지옥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지를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여 서술하고 있다. 지옥에 대한 신화적 철학적 접근 또는 심리학
적 분석은 피하고자 했다는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지옥이란 결국 인간의 어두운 구석이
시대와 상황에 따른 가장 부정적인 언어 또는 기탄의 수단으로 표현되어 온 것이 아니겠는
가 하는, 심리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지옥도 역시 '역사'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책은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차분히 음미하며 앞장부터 읽다보
면 서양의 종교, 문화, 문학, 예술의 본령이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지은이의 의도와  상관없
이 정말로 지옥의 본질이 마음에 와 닿을지도 모르겠다.
  초역 작업의 일부를 맡아 준 황수정씨에게 감사드리고, 원고를  꼼꼼히 손질해 준 편집부
에 감사드린다.
[출처] [펌] 지옥의 역사 (The History of Hell) - 앨리스 K. 터너|작성자 툭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