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상-기독교’ 독서회
▸9월 23일(月, 116회) 10.00~12.00시
주제: “선(禪)과 기독교④”_융(C. G. Jung)이 풀어 본 선(禪)
기독교인들 페친 중 불교 공부를 한다고 페북 글을 절연한 이들이 많다. 기독교와 불교 및 동학 그리고 샤머니즘을 왕래하면서 올리는 사정을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이 상처를 받을 수도 있어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는 이들도 있다. 페북을 시작하여 한 4년, 성화를 통해 성서를 곡절(曲切)히 해석한 글을 올렸을 때는 참 응답이 좋았다. 그러나 명목상의 성화나 성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석이 정신 바싹 차리고 가리키는 실제 뜻이 중요한 것이니, 예수라는 상표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권정생 선생은 “예수라는 상표만 붙은 가짜 기독교를 더 이상 퍼뜨리지 말아야 한다”고 질정한다. 그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자. 선생은 “기독교가 들어가는 곳이면 어느 집이나 어느 마을이나 우리들의 전통문화가 파괴되어 버린 것”에 대해 탄식하신다. 마을 밖 서낭당의 돌무더기도 없어지고, 정월 대보름달 동신제에도 기독교인은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성주단지나 용단지고 깨뜨리고 부숴버린다. 조상들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논밭에서 음식을 먹을 때 고수래도 안 한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게 한 것이다. 이런 건 모두가 미신이고 우상이라 매도하고 철저히 파괴했던 것이다. 이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본래 가지고 있던 우리의 아름다운 풍습이나 명절도 멀리하고, 생일날짜도 분명치 않은 크리스마스만 최고의 명절로 삼고 있다. ”
반샤마니즘적 풍토는 물론 기독교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유학의 합리주의가 그 풍토를 오랜 세월 조성했으나 샤마니즘은 생활 속에 끈질기게 살아 있었고, 일제의 종교적 차별, 그리고 무엇보다 70년대 바람 분 새마을 운동이 그렇다. 이때가 전통 무속의 최대의 수난기였다고 문학평론가 임우기 선생은 말한다. 더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내건 한국 근대문학, 특히 4.19세대의 반샤머니즘적 풍토가 광기 수준이었다고 알려준다.
반샤마니즘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권정생이 성서에 나오는 유대 풍습과 우리의 샤마니즘적 풍습을 서로 유비한 대목은 참으로 종교학자의 탁월한 안목 이상이다.
“하란으로 가던 야곱이 들판에서 돌단을 쌓고 기도를 했던 것처럼, 우리네 조상들은 마을 밖 서낭당에서 돌을 쌓으며 신에게 빌었다. 그 신의 이름을 야훼나 서낭당이라 다르게 부른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기를 점지해 주는 천사의 이름이 성서에는 가브리엘이지만 우리는 삼신할머니다. 고기를 먹던 유대인들은 악귀를 쫓는 데 양의 피를 뿌렸고, 농사를 지어 곡식을 주로 먹고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붉은 팥죽물로 악귀를 막았다.”
그런데 성서가 언급하는 야훼, 가브리엘, 양의 피는 성스럽고 왜 서낭당, 삼신할미, 팥죽물은 불경한 것인가? 권정생은 이것이 흡사 달력이 있기 때문에 날짜가 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라는 비유로 그 본질이 왜곡되었음을 논증한다.
“해를 기준으로 만든 달력은 양력이고, 달을 기준으로 만든 달력은 음력이다. 어느 것을 사용해도 세월은 같이 흐른다. 양력이 편리할 때도 있고, 음력이 유리할 때도 있다. 달력이야 있으나 없으나 지구는 돌아가고 철은 바뀐다. 그런데도 요새 사람들은 흡사 달력이 있기 때문에 날짜가 가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착각 정도가 아니라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실상을 버리고 허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이 있고, 교회에 가서 울부짖는다고 하느님이 역사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보다 더 본질을 직관하는 말씀이 또 어디에 있을까! 핵심의 진술은 이어진다. “기독교가 있든 없든, 교회가 있든 없든, 하느님은 해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 동안 우주를 다스려 왔다. 선교사가 하느님을 전파하면 하느님이 거기 따라다니며 머물고 같이 사는 게 아니라,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하느님은 어디서나 온 세계 만물을 보살펴 오셨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당연한 말씀 아닌가! 하느님은 기독교보다 크고, 하느님은 선교사의 등에 업혀 다니지 않는다. 기독교는 영원하신 하느님, 무소부재하신 하느님을 고백하지 않는가!
“하느님은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인간들의 마음이다.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 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 게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바로 자연의 섭리가 된다. 하느님은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분이라 했다. 그러니 하느님은 곧 자연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멋진 대목도 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정말 아름답다.” 권정생님의 말씀이다. 신에 완전 취하지 않고서야 선생님과 같은 삶이 나올 수 없지.
이론가들이 무신론과 유신론, 유신론 안에 이신론, 초월적 유신론, 범재신론, 범신론 등, 신과 세계의 관계맺음의 방식을 구분하는데, 그건 이론이고 권선생님과 같은 분은 ‘full full consciousness(life) of God’이 가능하다는데, 어쩔 것인가? 일찍이 이사야께서 말씀하셨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신을 아는 지식으로 세상이 충만해질 때, 신과 세계는 不一不異의 관계가 될 것이다. 이사야는 스피노자의 선구자인 셈이다. 권정생의 하느님은 천지개벽 이래 왕의 지배와 양반의 억압 속에서도 땅을 떠나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구절양장 신산고초의 삶을 살아오면서 부지불식간에 형성되어 온 조선의 얼 속에 모셔진 民의 하느님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인간다운 삶은 종교 안에 비로소 생긴 것은 아니지 않은가. 기독교가 있기 전에부터 있었다. 당연한 얘기 아닌가. 이 당연한 얘길 기독교가 부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이 있었고 信心이 있었다. 기독교의 어머니는 유대교였고 유대교의 어머니는 인간이었다. 하느님은 그 인간의 마음속에 외부에서 숭배받는 우상이 아니었다.”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 속에 계신 분이다. 인간이 아무리 속되고 미물이고 거지같이 보일지라도 하느님을 마음 속에 모신 존재가 아닌 인간은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도 두손 모아 꿇어앉아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 거기엔 공자님의 말씀도 스며있고, 부처님의 말씀도 들어있고, 서낭당이나 당집에 빌던 우리의 조상들의 신도 함께 있으며, 바위 앞에서, 고목나무 앞에서 치성을 드리던 원래의 하느님도 섞여있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권정생은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말씀을 한다. 권선생의 말은 수운과 해월 그리고 이어 의암이 천명한 侍天主, 養天主, 人是天, 人乃天의 사상과 동일하다. “우리의 모습이 본래부터 하느님이었는데 새삼스레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 노력은 가장 우둔한 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