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26

Philo Kalia - 우희종 “종교성과 매조키즘(마조히즘)”이란

Philo Kalia - 어제 종교대화모임(19회)에서 #우희종 교수께서 “종교성과 매조키즘(마조히즘)”이란... | Facebook


Philo Kalia

  · 
어제 종교대화모임(19회)에서 #우희종 교수께서 “종교성과 매조키즘(마조히즘)”이란 발표(40분)를 해주시고 장시간(90분) 대화와 토론이 있었다. (다음 기록은 메모에 의존한 것이다. 내 생각 포함)


“종교의 두 축은 고통과 사랑이다.”라는 말로 발표는 시작되었다. 창세기 혼돈과 공허로부터의 창조, 빛이다. 혼돈과 질서, 형태 없는 텅빔과 빛, 무질서와 질서, 어둠과 빛, 능동과 수동, 마조히즘을 절대적 수용이라고 의미부여 했다. ‘창조적 수용성‘ 혹은 ‘하느님 어머니‘라고도 했다.
“질 들뢰즈가 프로이드의 가학-피학의 구조를 전복시키고, 빛과 어둠, 선과 악이라는 주류 종교를 전복적으로 읽어 진정한 만유의 근원 혹은 본래면목을 되찾기 위해서는 비움과 적극적 순종/귀의의 매조키즘만한 용어가 없다.”(우희종)고 했다. 
프로이트의 사디즘-마조히즘(가학증-피학증), 도착 변태에 익숙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보통 상식으로 편견을 바로잡는 전복적 일이 바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들뢰즈의 연구를 조금 알고 보니 마조히즘을 가학증으로 이해하면 안 되겠다 싶다. ’학대‘는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긍정적 의미를 가질 수 없지 않은가. 그냥 마조히즘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마조히즘을 사디즘의 반대 극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마조히즘은 사디즘의 반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들뢰즈는 마조히즘이란 인간이 실제의 질서에 의해 완전히 지배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라 말한다. 실제의 질서에 속하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환상적인 것이다. “마조히즘은 환상의 기술이다.” 마조히스트는 이 현실의 세계가 완벽하다고 믿기를 거부하며, 차라리 날개를 달고서 이 세계로부터 벗어나 꿈의 세계로 달아나려고 한다. 여기서 이상을 향한 상승운동이 펼쳐지는데 마조히즘이란 이상주의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자기 스스로의 절제, 금욕, 겸손, 비우기, 겸허, 바닥으로 내려가기 등, 더 많은 사랑을 하기 위한 고통의 감내는 환상을 꿈꾸는 자들에게 빈번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어떤 자연적 존재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존재에로 자기 변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픔(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마조히즘은 리비도(생명력)이며, 창조적 수용성이다. 무고한 욥의 지난한 고난(고통)의 수용은 하느님의 폭력적 무의식(사실 이스라엘, 아니 인류의 깊은 무이식)을 반성하게 했고, 욥의 고통 이후 새로운 하느님 관념이 생긴 것이다. 새 하느님 관념은 새로운 자기이해와 세계이해를 포함한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했던 아담(프롬의 You shall be as God)과 하느님과 씨름했던 욥은 예수의 본보기이다. 예수는 긴 수난의 수용성을 통해 수동성이 자학이나 학대의 무기력한 수용이 아니라, 창조적 수용성이며 능동적 수동성임을 보여 준 것이다.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이다. 수동적 능동성의 표현이다.
능동과 공격 일변도를 강조한 근대의 사유로 빚어진 생태계 파괴는 존재의 수동성과 수용성의 차원을 적극 밝혀야 한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공격과 지배를 비판하고 사물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신유물론 역시 사물에 내재된 피학의 능동적 수동성/수용성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포스트휴먼 시대의 종교성과 부합할 수 있다.
창세기의 심연(흑암에 덮힌 깊음)이 지닌 “’무질서의 질서’를 잘 표현한 것은 아나키즘에서의 ’아나키’라는 생각이다. 빛과 질서의 세계에서는 눙동적 주체의 피학성인 매조키즘으로 좁은 문을 열고 나아가, 결국 모든 것의 어머니인 아나키의 대자유를 얻는 셈이다.”(우희종)
탈종교 현상이 짙어가는 이 시대의 종교성은 기성 종교의 교학적 논증, 계율과 법, 제도, 혹은 순종과 겸손, 케노시스라는 단어 등까지 모든 좋은 말을 포함하여 제도적 언어의 식상함에 물들어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껍질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개념들이 담아냈던 체험과 사건이 설득과 신비로 드러나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마조히즘의 종교성은 제도적 종교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 마조히즘은 복종 속 반란이다.
“종교에서의 생명성/종교성/영성은 굳이 다양한 신학적 해석을 요구하지 않는다. 당신의 신학적 입장이 어떠하건, 생명성은 삶의 현장에서 오직 삶의 자세로, 생명감수성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우희종)
들뢰즈의 마조히즘 연구가 조현수도 종교성과 마조히즘을 적극적으로 연결한다. “우리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을 넘어서는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근본적인 ‘삶의 과제’로서 요구되고 있다는 것, 이것은 바로 종교가 전통적으로 우리에게 말해 오는 것이다. 즉 종교의 존재이유란 이와 같은 ‘근본적인 자기 변형’의 요구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는 데 있는 것이다.”
근본적인 자기 변형의 요구, 그게 거듭남이고 悟道의 가르침이다. 마조히즘은 생명의 깊은 비밀을 재활성화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세계(우주 전체)의 참모습에 대해 어쩌면 종교가 과학보다 더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일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마조히즘은 성과 영성은 곧 일치하는 것이며, 영성이란 자신의 현실적인 모습인 감각적인 육욕의 모습을 넘어 ‘초감각적인 모습’으로 새롭게 거듭나려는 성의 본래적인 모습을 가리킨다고도 말한다. 탄트리즘은 바로 성과 영성의 근본적인 일치를 보여준 사례라고 조현수는 말한다. (『성 우주 생명』 참조)
불교인인줄만 알았던 우희종 교수께서 자신을 기독교인으로도 소개해 깜짝 놀랐다. 불교와 기독교, 양자택일이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 양 종교 사이의 긴장에서 통합적 자기의식이 실현 가능한지 실험 중인데 검증이 된 셈이다. 오늘의 아나키스트, 마조히스트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