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4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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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 회의 자료집

유교와 조상숭배 문화권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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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은 보통 하나의 종교라기 보다는 오히려 인륜과 정치윤리에 가깝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랜 선교역사에도 불구하고 유교권 선교는 부진하였고, 또 유교권 선교를 위한 전략도 변변치 못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에 뿐만아니라 중국에서도 끊임없이 시행해 오던 조상제사는 유교의 종교적인 행사이고 그뿐 아니라 무속문화권에 토착화된 고등 종교들과 사이비 이단종파들까지도 거의 예외없이 시행해온 공동적인 의례이며,심지어는 가톨릭 신자들과 일부 개신교도까지도 이를 허용하는 입장이다. 한국의 경우처럼 무교적인 영성과 고등종교들의 범신론으로 가득했던 아시아에서는 영들의 충돌이나 영분별이 요청되지 않았다. 오히려 유불선교 및 힌두교와 그 이단들은 무교적인 다신론과 함께 병행주의 또는 포괄주의적인 형태로서 공존해 왔던 것이다. 기독교가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원주의와 혼합주의 문화권에서 만나는 조상숭배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선교사가 배척을 받지않고 살아남기 위해서 중국의 예수회 선교의 경우처럼 제사를 용납하면서 관용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루스드라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처럼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저지하고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주께 돌아오라는 (행14:14-18) 충돌을 겪을 것인가?

조상숭배 문화권에서 제시된 토착화 신학은 지금까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조상숭배를 단순한 윤리적인 의례로 보아 허용하자는 입장이고,다른 하나는 단순한 종교적인 의례로 보아 결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조상 숭배와의 타협과 충돌을 번복해 왔던 천주교회의 선교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입장이 다 그 다른 한쪽 성격을 무시함으로써 현지인의 심각한 문제를 기피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해답을 제시해야 할 사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I. 유교의 귀신숭배와 제사원리

고대의 의례에 관한 공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고전 예기는 백신을 대상으로 붉은 송아지를 잡아서 희생제를 드리는 제의를 기록하고 있다.1) 百神중에는 일월성신,사방신,천지산천,죽은 사람들의 혼 등을 다 포괄하고 , 그들은 괴상한 일을 하는 것2) 을 신이라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이들은 상제를 최고 신으로 숭배했으며 모든 자연신들은 상제의 군신 내지 하늘의 현현으로 숭배했던 것이다.3) 이러한 자연숭배나 상제숭배 및 조상숭배 신앙은 은나라(1766-1123)시대의 제사와 점복에 관한 갑볼문16만편의 발견4)에 따라 확실해진 것이며, 그들의 삶은 제의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교문화 속에서 중국과 한국 초기의 가톨릭 선교를 통하여 크게 문제시된 조상숭배에 대해서 유교와 천주교의 신앙과 교리를 대조 연구함으로써 선교연구에 공을 세운 성균관 대학교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수원의 가톨릭 신학대학교 교수인 최기복 신부는 고대 조상들이 사후에도 하늘에서 상제를 모시고 살고 있으며,그들은 후손들이 복과 화를 내린다고 믿었다고 진술하고 있다5) 그러나 주대(1222-247)에 이르러서는 신중심적인 관심으로부터 인간중심으로 바뀌면서 인격적이고 최고 신으로 숭배했던 "상제" 대신에 "天"을 사용하면서 군왕의 통치와 덕목을 중심으로 내면화하게 되었다.이때에 "인간은 神의 주재자"이며,"백성은 신의 주인"이라는 사상6)이 나타난다.

1. 공자의 신앙

이러한 인본주의적 동향 속에서 당시 타락한 지도자들 밑에서 기근과 홍수와 질병까지 돌아 도탄에 빠진 백성들7)을 지도해야하는 "법무장관"8)으로서 공자의 본래적인 관심은 인륜과 정치윤리에 있었다. 그는 재래 종교들에 대한 비판이나 거절이 아니라 수용적인 입장에 선 윤리철학적 지도자였기 때문에, 그의 효도윤리는 무속신앙과 자연신앙과 혼합되어 있었다. 공자는 그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며9),능히 사람을 섬기지 못하면서 어찌 능히 귀신을 섬기겠는가? 생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라는 불가지론적인 입장을 취한듯 하지만.10),그가 귀신 숭배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제사할 귀신(대상)을 바로 알고 제사할 것과11),제사할 때는 반드시 재계(몸과 마음을 깨끗히 함)하고 의복과 음식과 거처지까지도 구별하였다.13) 논어에는 공자가 식사 전에 반드시 고수레(음식 조복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는 것과14),붉고 뿔이 반듯한 송아지를 산천의 신이 받지 않겠느냐16) 는 희생제에 대한 관심과 그의 자연신앙과 진술되어 있다.

2. 귀신의 개념

공자의 개념속에서는 신과 귀신의 개념이 구별되지 않고, 또 번역가들도 그의 '신' 귀신으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다. 선진유교에서 "귀신"또는 "귀"와 "신"은 인간론과 우주론을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개념으로 사용된다.귀신이란 첫째로 신적 근원자를 일컬어 ,天,신,상제,氣등과 동일시되고, 둘째로 만물의 생성(신)과 사멸(귀)17),산사람(신)과 죽은 사람(귀)18)을 일컫는다. 성리학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반은 신이며 반은 귀라고 하는데, 살았을 때는 신이 주가 되고, 죽은 후에는 鬼가 주가 된다고 한다.19) "예기" 에는 사람의 몸이 氣와 魄 이 있어, 이를 역시 신의 기한 작용과 혼의 신기한 작용으로 보면서 사람이 죽으면 기가 하늘로 떠올라서 영원한 신령의 무리 속에 들어간다고 한다.20).성리학자들은 에기의 기와 백 대신에 魂과 魄의 개념을 사용하며, 혼은 신이고 백은 귀라고 생각하고 사람이 죽음으로써 혼과 백은 갈라진다고 본다. 혼은 天으로 돌아가고 백은 地로 돌아가, 혼백은 산화되어 一元氣로 돌아감으로써 고유성이나 개체성은 더 이상 존속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유교의 사상이다. 그러나 이 산화론은 무속신앙과 결합되어 완전소멸이 아니라, 제사를 통한 감흥으로 사자의 현재를 경험하는 spiritism(강신술)과 혼합되었다. 유자들은 원한에 맺혀 죽거나 흉사의 경우엔 혼이 산화되지 않고 한동안 요괴가 되어 "신적작용"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21)

위와 같이 성리학은 사령의 근원자로 돌아가 일원기가 되고 기가 산화될 지라도 오히려 그 理는 없어지지 않음으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그 제물을 흠향할 수 있다22)는 범신론적 신인동격 사상과 함께 무속적 spiritism의 두가지 중요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두가지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조상숭배 제의이다. 유교의 범신론적 사상체계 속에서 조상신은 천신과 동일시 되고, 조상숭배가 바로 천숭배와 마찬가지로 간주되어,조상은 유일한 숭배대상이 되고 있다.23)

2. 誠一효과가 귀신숭배의 통일

유교의 상제례에서 절대적인 요수는 성이다. 중용에 성자는 물의 마침이며 시작이다. 성하지 않으면 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고 물을 이룬다.24) 고 한바와 같이,제사드릴 때는 성에 의하여 귀신의 존재여부가 결정되고,제물의 음향여부가 결정된다. 이와 같이 율곡도 산 사람이 誠敬하면 귀신도 존재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조상이 "거처하신 곳을 생각하고, 웃고 말하던 것,즐거워 하던 것,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여 사고가 완연히 목전에 계심을 보게 될때 "산화된 기가 이에 격감한다는 것이고 기가 소멸되었더라도 理가 역시 격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25) 그러므로 제사와 성은 부모사멸을 막는 효행으로써 절대시 된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큰 악덕이다. 예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성은 제사를 준비하는 재계의 과정에서 실현된다. 10일간 욕망을 끊고, 마음을 가다듬고, 심신을 깨끗이 하며 음식과 행동을 삼가며, 음악을 듣지 않고 부정을 피하며 재계함으로써 신령을 맞을 준비를 하면, 고인의 모습이 느껴지고, 고인의 음성을 듣는 느낌이 든다. 효애의 마음이 골몰하면 부모의 영혼이 눈앞에 떠오르고, 효경의 정성을 다하면 영혼이 그에 감흥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을 피워 혼을 모시고 술을 부어 魄기\'b8� 모셔서 합일시키고 신령을 감흥케 한다는 것이다.25) 영혼의 감흥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자속에 내재화하는 것으로 상제례는 완성이 된다. 신령이 내안에 있다는 느낌은 슬픔과 공허감을 안정시켜주고 사자와 일체감과 통교를 느끼는 것이다.27) 예기는 귀신의 실재에 대하여,사람이 죽으면 그 정기가 뭉쳐서 강한 향기를 뿜어 느끼는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고, 신령이 강림하면 곧 사라져버릴 때가 가까워지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28)

이와같이 유교는 전통적인 무속신앙을 그대로 수용하여 귀신을 섬기고 이를 효로서 못박아 절대시하였다. 禮記는 禮의 가장 중요한 것을 제사라 하고, 제사의 10가지 윤리 중에 그 첫번 것을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한다.29) .제의의 목적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귀신과 통하게 하는 것과 도의를 흥하게 하는 것으로써,제사를 통해서 효과가 시행되고, 효자가 아니면 부모를 제사할 수도 없다고 한다.30).효성을 측정할 때는 1.생시에 부모를 봉양하며 그 이순으로써 효를 측정하며 2.부모가 죽으면 상례를 시행하되 그 비애의 강도로서 효를 측정하고, 3. 상례 후에는 제사를 지내며,그 경애함과 정기적인 제사로서 효를 측정한다.31) 유교 제의의 이러한 양면적(효와 우상숭배)인 의미는 기독교 선교에 엇갈린 견해를 낳았고, 그 대표적인 본보기를 중국 가톨릭 선교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II. 천주교 유교제의에 관한 이해

1. 선진 유교에 대한 이해

중국 전통유교에 호의를 가지고 조상제사와 공자숭배 의례에 대해서 수용적인 자세로 접근한 예수회(Jesuit)는 유교를 인간 본성에 따라 조물주를 경외하고 천리에 순응하는 종교로써 천주교의 기본교리에 위배되지도 않는다고 보았으며,유교의 제의를 종교의식이라기 보다는 단지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의례로서 받아들였다. 예수회는 조상제사에 대하여 "생시와 같이 계속 애정과 감사를 표하기 위함이여 사자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거나 또는 제물을 먹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사자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을 뿐아니라 그에게 무엇을 구하지도 않는다"고 변호하고,공자 숭배 의례도 "공자를 신으로서가 아니라 다만 先師로 생각하여 감사드릴 뿐이요, 그에게 기도문을 염하거나 어떤 청원을 드리지 않는다"고 하면서 정식제사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예수회는 이렇게 함으로써 유교를 천주교와 접목시켜 천주의 존재론과 영혼 불멸론, 사후 천당 지옥설,愛主愛人의 도를 설명하려고 하였으며 32),선진유교가 천주를 섬겼다는 것을 유교경전을 통해서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2. 신 유교에 대한 이해

그러나 예수회는 송대(960-1279)의 신유교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Matteo Ricci는 성리학의 태극론과 이기론을 무신론이라고 배척하고,천주를 상제와 동일시하여,상제에게는 제사를 하나 태극 또는 理에는 제사하지 않는다는 예를 들어,태극에서 만물이 생성했다는 주장을 부정하고 천주가 만물을 무로부터 창조했다고 하여 상제는 창조자이고 또 심판자라고 가르쳤다 33).Ricci는 또 사후인간은 귀신이 아니라 선령(천당에 간 영혼)과 악령(지옥에 간 영혼)으로 칭할 것을 주장하고,인간의 영혼은 타물로부터 생출한 것이 아니라 천주의 창조물이고 자립체임으로 신체가 소멸해도 불멸자존한다고 설명하였다.34).물론 이 "자립체"또는 "불멸자존"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Ricci는 태극을 物자체도 아니고 物의 성분도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가르침이 유교 경전이나 성현들의 가르침에도 전혀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36) 그러나 선진유교를 들어 신유교 학자들을 비판하며 천주교와 동일시하려던 바로 그점이 Ricci의 결정적인 약점이 되었다. Ricci의 선진유교가 무속신앙과 혼합주의를 형성했고,처음부터 범신론적 세계관과 인간관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했고 고대의 상제숭배 신앙만을 알았던 것이다. 이것이 유지들의 비판 거리가 된 것이다.

M.Ricci는 신유교의 영혼산화론에 반하여 영혼불멸론을 주장하고 이를 선진유교의 사상에서 증명하려고 애를 썼다.36) 그는 또한 성리학의 조상제사를 허례라고 비판하고 기독교인(선령)은 죽어 천국과 영복으로 비 기독교인(악령)은 지옥과 영벌로 떨어짐으로 산자와 죽은자의 통감은 불가능하고,제사가 사자의 영혼에 아무 유익이 되지 않을 뿐더러,죽은 영혼이 제사를 흠향하러 세상에 올 수도 없고,제사는 오히려 악마가 흠향하고 선조가 영혼이 임재한 것처럼 속인다고 하였다. 또 마귀를 섬기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였다.37) 이것은 신유교 학자들의 반감과 반박을 불러 일으켰다.

예수회는 조상제사를 허용했으나 추모와 봉헌으로써 이해했고 신령과의 감격은 부인했다. 또 신주를 허용하면서 거기에 혼이 깃들여 있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사모지심의 의지처로써 허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가 예수회 선교사들의 생각 속에서 그 철학적 본질이 파괴될리는 없다. 결국 예수회는 유교의 상제례를 관용함으로써 우상숭배 행위를 허용하고 만것이다. 어떻게 조상숭배로부터 효성을 장려하면서 미신을 분리해낼 수 있겠는가?

III. 조상숭배 문화권 선교전략

예수회는 유자들의 거부감과 이질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때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고 한문을 연구하며 스스로를 서유(西儒)라고 칭하고,서양인의 발달된 과학지식과 기술을 소개하면서 중국인의 호의를 얻어 점진적으로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려고 했다.38)그러나 예수회보다 약 반세기 후에 중국에 입국한 Dominikaner(1631)와 Franziskaner(1633)는 예수회의 적응주의적 선교방침을 혼합주의라고 비난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과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조상숭배와 공자공경의례를 미신과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상제라는 개념도 태극보다 하위개념임으로 오직 천주만을 신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Innocenz10세는 1648년 조상숭배와 공자공경의례를 금하게 되었다(1651).그러나 예수회는 이들의 17개항 질의서가 시골 무식층과 접촉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반박함으로써(1651), Alexander7세는 1656년에 다시 미신적인 것이 제거된다면 사자에 대한 공경의식을 허락한다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또 다시 Dominidaner는 이의를 제기하였고, 교황청은 마침내 1669년 위의 두 훈령을 종합하고 말았다. 즉 1659년에 내린 관용결정이 1645년의 금지 결정을 무효화 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훈령에 언급한 모든것을 다 지켜야하며,제기된 문제점과 환경에 따라 지킬 것을 선언하였다.39) 위와같은 제의논쟁은 유교권에서 오늘까지 계속되면서 효성이나 우상숭배의 그 한쪽만을 지지하면서 다른 한쪽을 무시하려는 경향이었다. 1664년에 일어난 박해 후에 1668년 중국 선교사들은 42개의 조항을 발표하였다. 제41항은 그들이 왜 적응주의적 선교방책을 택하였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조상제사 문제로 말미암아 수많은 중국인에게 구원의 문을 닫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사실상 1652년부터는 예수회만 법적으로 포교의 자유를 누렸고, 그들이 그때부터 1705년까지 얻은 신자는 30만명이나 된다는 것이다.40) 그러면 예수회가 취한 적응주의적 선교방법은 전략적으로 합당한가? 적대감을 피하기 이해서 미신적인 의례에 참여할 수 있으며, 1659년의 훈령과 같이 악한 습관을 변경시킬 때에 자제와 침묵으로 하고, 진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가질 때 하라41)는 지시는 옳은가? 물론 악습을 변경하는 일은 진리를 받아들일 자세가 선행되어야 할 거이다. 문제는 적응주의적 선교전략이 복음의 순수성을 보존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선교는 충돌과 배척으로 인하여 차단되어도 안될 것이고, 관용과 타협으로 진리의 절대성이 파괴되어도 안될 것이다.1931년은 혼합주의의 필연성을 주장한 H.W.Schomerus는 선교의 과정으로써 전통적인 것이 형성되거나 개종을 하게 된다고 주장하였다.42) 이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K.Hartens- tein은 1933년에 혼합주의는 성경적 증거가 파괴된 아주 위험한 하나의 "새로운 종교"라고 경고하였다.43) 이조시대에는 불명의 영혼을 위해 위령제(혼을 불러 회복시킴)과 3헌제(혼의 방황을 염려하여 드리는 제사)와 사당에 죽은 조상의 이름을 새긴 신주를 모시고 제물을 드리며 사건을 고하면서 죽은 자와의 교통을 꾀하였다.

현대는 박근원 박사의 진술처럼 제사를 지내며 절할 때 자기조상을 우상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 44) 한마디로 일축해 버리면서 유교의 제의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과거 예수회나 현대의 천주교인들처럼 조상제사도 지내고 주일예배도 드리는 방법을 택하는 교인들이 현재도 많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제사 대상도 없이 제사를 지낸단 말인가? 무속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숭배해왔던 불명의 영혼(또는 氣내지 理)에 대한 신앙이 현대에 아서 잊혀졌거나 파괴되었다는 말인가? 현대의 유자들도 영혼불멸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이 세속시대에 살면서 불가지론적이거나 불성실해질 수는있다. 그러나 그것이 조상숭배를 더 추구하고 있는 형편이며, 고연령층이 될수록 조상수배는 더욱 실제적이 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천주교회와 기독교가 다 우상숭배를 옳다고동의한 일은 없다. 동의하는 사람들은 조상제사가 우상숭배가 아니라 윤리적 행위라고 전제해 놓고 찬성하는 것이었다.조상숭배에 개방적인 입장인 박근원 박사도 "제사가 조상을 우상으로 섬기는 예식이라면...그것은기독교의 신앙에 위배되는 행위이다"라고 못밖고 있다.45) 비록 천주교가 마리아 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죽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성도들의 통공의 신앙을 가졌을 지라도,조상숭배의 맥락에서는 죽은 사람의 혼에 제사하고 기도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유교의 제의가 효와 조상숭배가 뗄수없이 연합되어 있어서 둘중에 하나만을 기호대로 선택할 수 없다는데 있다. 위에서 고찰한 것과 같이 유교제례의 숭배대상은 사영임을 논란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회나 천주교의 교황청이 중국의 조상숭배를 효성으로써 선택한 것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우상숭배를 제거하지도 못했고,그렇다고 조상숭배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납득할 만하고 근거있는 진술도 하지 못했다. 문제는 조상제사를 포기함으로써 효성을 실행하는 일이 좌절될 때 선교사들이 그 대응책을 제시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천주교는 오히려 더 우상을 만들어 놓고 숭배한다는 비난까지 받았던 것이다.46) 기독교가 부모공경에 대한 계명 뿐만이 아니라,제사때에 울어나오는 지성과 효를 실행할 만큼한 실제적인 해답을 주지 못하면,유교권 선교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기에 큰 어려움이 될 것이다. 세속화시대의 개인과 사회윤리적이 부패와 타협,이것이 교회안에 있을 때 어떻게 교회가 효를 실행하겠는가? 우리가 우상숭배와는 타협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10계명대로 산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한다.부모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 이것이 조상숭배문화권에서의 최선의 길이다. 그러므로 선교사업에 앞서 교회의 복음화운동과 회개운동이 더 불가피하게 여겨진다.

닫는 글

한가지 주목해야할 일은 R.Bohre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관혼상제 의식 집행은 Kerygma와 Koinonia와 Diakonia의 선교적 기회이며,교회와 세상의 동반자적 기회로써 좋은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것이다.47) 우리는 유교의 제례가 기독교의 접촉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효성과 우상숭배의 혼합문화권에서 우리가 대답해야할 선교학적 문제는 이것이다. 1) 기독교가 유교의 효행을 능가하는 행위를 보여주어야 한다. 2) 종교적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참 신앙 대상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 3) 사랑의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혈연적인 공동체를 형성할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H.Kraemer가 지적한대로 유교나 다른 고등종교들은 보통 교리적 차이나 대립을 별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관용주의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통적인 종교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절대적이어서, 그들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는 죄악으로 여긴다.이들은 진리문제가 나오면 곧 바로 투쟁적이 되고 핍박한다.그것은 진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적 동기로 일어난다.Kraemer는 이러한 비관용성 (Undrldsamkeit)를 "가상적 관용"또는 "표면적 관용"(Schein-Duldsamkeit)이라고 칭한다48).그러므로 현지인 신자들은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 공동체 속에 머물러서 더욱 사랑을 실천하고 효행으로 본이 됨으로써,기독교인들이 전통문화의 파괴자라는 오해를 벗도록 해야할 것이다. 유교 문화권 선교사들은 사랑의 실천으로 현지인들의 오해와 불신앙을 극복해 나가고, 사역할 때마다 부딪히고 복음과 함께 배척을 당할 것이 아니라 속히 충실한 현지인 제자들을 양육하여, 그들로 하여금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함으로써 전달자와의 이질감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선교사는배척을 받을지라도 복음은 살아남아야 한다. 주의 말씀이 흥황하던 두란노 서원에서는 현지인들이 와서 자복하고 마술사들이 스스로 그 책을 불사르니 은 오만이나 되었다(행19:18하)는 기록이 있다. 먼저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들 스스로가 악습을 폐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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