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 형성사.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1876~1910』, #옥성득 교수(UCLA 석좌교수)가 2020년에 출간한 대작(767쪽)이다. 가나안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 후 그분을 강사로 초대하여 출판 3주년을 축하하며, 그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경청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관심 있는 분들의 많은 참여바랍니다. (1. 일시: 2023. 2. 26. 일. 오후 3시; 2. 장소 및 zoom: 충무로 사랑방 & zoom(ID: 380-389-5679)
옥성득 교수의 관점은 한국에서 성장한 교회(1915년에 나온 존스의 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가 아니라 한국화된 기독교의 형성(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을 논하며, 개신교 선교회들의 역사(1929년에 나온 백낙준 박사의 A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가 아니라 선교사들과 한국인 기독교인의 능동성과 한국 기독교의 혼종성에 관심을 둔 한국 기독교 형성사(A History of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이다. 형성(making)은 근대성, 식민성, 다층성을 전제하지만, 본서에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비될 수 없는 아름다운 창조(creation)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처음 교회의 형성은 교회와 신앙의 모판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그 묻힌 역사에 대한 바른 기억은 현재 교회를 이해하고 쇄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1876~1910년까지 만들어진 제1 세대 한국 기독교(개신교)를 다룬다. 더욱 중요한 관점은 기존 한국 종교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면서 교회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과 근대 문명화에 기여하였듯이 유연한 타종교 신학을 가지고 토착적인 기독교를 창출하였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지다.” 역사적 민족주의와 문명적 근대성 그리고 종교문화적 토착성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3중 요소를 형성하였고 저자의 특별한 관심은 세 번째, 즉 한국 종교 문화 속에 있던 친화적 요소들 사이의 융합을 통한 토착적 한국 개신교의 창출사(創出史)이다. 저자는 토착적인 기독교야말로 한국교회가 “종교 문화적으로 민감하고 성서적으로 건전한 정체성을 가지며 영적으로 건강한 교인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사회적 적합성도 확보할 수 있는 기독교였음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초기 한국교회의 역동성과 신학적 창조력이야말로 지난 20년 이상 정체하고 쇠퇴하면서 희망을 잃은 한국 개신교가 발굴하고 성찰해야 할 영적 유산이 아닐 수 없음”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1세대 북미선교사들과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한국 종교문화를 파괴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한 복음주의자이며 성취론자로 그 이미지를 바꾸려고 한다. 저자는 “20세기 초 성취론은 시대적 한계인 문화 제국주의, 곧 영적 제국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지만 당시 다른 종교에 대한 가장 자유로운 타종교 선교 신학”이었음을 발굴하여 한국 개신교회가 전통 종교 및 문화 속에서 문화와 함께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북미 선교사들은 다음 세 개의 결정적인 발견으로 한국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게 되었다.
선교 사업의 첫 10년(1884-9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의 다중 종교성(multiple religious identity)을 발견했다. 이 다원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한국 종교를 더 깊이 연구했다.
두 번째 10년(1894-190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단군신화에서 한국의 원시 유일신 신앙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하ᄂᆞ님을 기독교와 기독교 항일민족주의의 하나님으로 채택했다.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 샤머니즘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세 번째 10년(1904-13년) 동안 내한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심오한 잠재력을 깨달았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이 서양인과 다르고, 한국인은 더 높은 영적·윤리적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한국인은 독립 국가와 민주주의 사회를 운영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버렸다. 1904-07년에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출현하자, 그들은 문화 제국주의에 기초한 입국 당시의 전제와 가정이 잘못되었고 왜곡되었음을 깨닫고 수정된 담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서론, 7개의 장과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개신교와 한국 종교 사이의 첫 만남에 대한 지난 120년간의 자의적 해석을 역사적으로 재검토한다.
제1부의 첫 세 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한국적 이해를 다룬다. 1장은 하나님론이고, 2장은 십자가 이미지를 통한 기독론이며, 3장은 성령론이다. 1장은 하ᄂᆞ님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신조어로 정착해나가는지를 추적한 개념어의 계보학이다. 하ᄂᆞ님은 단군신화의 삼위일체적 성격의 신화적 근거와 원시 유일신론의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채택되었다. 새로운 한국어 하ᄂᆞ님은 중국어 上帝와 일본어 かみ와 비교하여 볼 때 순수한 유일신 삼위일체론과 양립할 수 있는 견고한 신학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일 신관을 가진 전통 종교의 전이해는 삼위일체 교리를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했다.
2장은 한국인이 이해한 십자가 이미지를 통해 발전해 나간 메시아상과 천년왕국을 조사한다. 수직적으로 천년왕국 종말론인 미국의 세대주의와 한국의 민간 메시아 사상이 1894-1905년 전쟁기에 교회 마당에 세워진 붉은 십자기(예수기)를 통해 한국 개신교의 정치적, 물질적, 사회적 욕망을 드러낸다. 수평적으로는 두 개의 정치문화 이상인 기독교 후천년왕국설과 계몽 운동이 1890년대-1900년대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통합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 장은 위기에 처한 민중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정치성을 다루는 장이다.
3장은 샤머니즘과 개신교, 무교의 질병 개념과 서양의 세균론, 치병굿과 선교사들의 축귀 담론 간의 갈등과 협상을 토론한다. 이 장은 특별히 여성 종교로서의 한국 기독교의 영적, 심리적 측면을 검토한다. 여기서는 샤머니즘에 대한 선교사의 입장 변화와 기독교가 지속적으로 실천한 축귀 의례를 강조한다. 20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개신교 선교회는 영혼을 위한 복음 선교와 육체를 위한 의료 선교를 통합했다. 비록 육체의 구원이 영혼 구원의 한 수단으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영혼 구원의 우선성은 육체의 구원을 포함했다. 선교회가 세운 병원과 진료소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위대한 의사’인 예수의 대리인으로서 신체의 치유를 통한 전인적인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다. 한센병 환자 사역은 기독교가 인간을 전인적으로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육체는 과학으로, 영혼은 종교로”라는 근대 서구의 이원론 체계는 이들에게 양자택일의 난제가 아니었다. 귀신들림을 믿음으로 치유한 사례들은 의료 선교사와 복음 선교사 모두에게 이런 세속적 이분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341)
이어 2부 4-7장에서는 1부에서보이지않았던 한국 기독교의 신학적 측면과 달리 물질적 기독교의 측면인 의례, 예배당, 서적을 다룬다.
4장은 제사를 금지한 중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신교가 제사를 지속적으로 금지하면서도 대안 의례를 창출한 추도회를 토착화의 전형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4장이 다루는 제사는 유교 의례로 유교의 가족 인류학, 구원론, 윤리학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대응을 검토한다. 가정 추도회에는 제사가 드려지던 시간과 장소, 일부 형식은 그대로 둔 채 교인들도 초청하여 찬송, 기도, 성경 읽기 등의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며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형식이 추가되었다. 또한 조상 기념의 방법으로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유지 받들기와 자선사업 기부를 강조했다. 이는 조상에 대한 의존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과의 영적 교제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
5장은 1910년까지 건축된 교회 예배당이 가지는 공간 신학을 다룬다. 예배당의 양식과 외부, 내부 특징에서 교회의 지리적 확산과 더ㅈ불어 공간에 구형화된 투착적인 기독교 건축학을 눈으로 볼 수 있다. 한양 절충형 예배당 외형에 전통 종교와 타협한 내부 구조는 대한제국이 의욕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고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의식과 의례 측면 등에서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과 비교되는 한국 개신교의 근대성과 토착화의 균형 잡힌 성과다. 1903-07년에 전개된 개신교의 대부흥운동은 예배 공간에서 깃대를 없애고 휘장 철거를 논의하고 양반석을 폐지하는 등 동도·구본(舊本)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정화하는 과정이었다. 1910년 전후에 서울의 새문안교회와 승동교회가 로마네스크 복고 양식으로 건축되고 안동교회 등에서 휘장을 철거함으로써 서울에서는 장로회까지 구본신참을 너머 기독교 문명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갔다.(513)
6장은 한문서적과 한글로 번역된 전도문서와 찬송가를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가 전달한 메시지를 분석한다. 한글 문서의 배타적 태도와 달리 유교에 대한 성취론적 입장에 섰던 한문 기독교 문서들을 분석해 그 원자료인 중국 기독교의 영향, 독자층인 양반 지식인층, 특히 한성감옥의 전직 고위 관리들의 개종 동기와 그들의 신학 사상을 확인한다. 19세기 개신교의 메시지는 동아시아 문화와 종교에 대해 우상파괴와 토착화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자는 조상의 정령과 우상의 ‘미신적인’ 숭배 그리고 아편, 전족, 일부다처제 등 악습을 공격했다. 후자의 진보적인 태도는 기독교와 전통 종교 사이에 있는 유사한 접촉점을 강조하고, 전통 종교를 ‘복음의 준비’로 받아들다. 적응과 토착화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결과 한문 개신교 소책자는 한국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 천주교의 경우에는 박해와 핍박으로 꽃피지 못했으나, 개신교는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종교의 자유 속에서 급성장하면서 토착화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중국 기독교의 신학과 문서가 서구 영미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다.(605)
7장은 1900년대 전개된 사경회와 부흥운동 기간에 만들어진 새벽기도회를 다룬다. 이곳에서는 선도(仙道)의 새벽기도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와서 기독교 의례로 만든 평양 선도인 길선주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학자들과 달리 민간 도교인 선도가 한국 복음주의 영성 형성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다. 진보 진영의 주장처럼 부흥운동은 한국 근본주의의 출발점이 아니며,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외치는 보수주의의 정복주의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영성이 만나는 자리에 새벽기도회가 있었다. 1903-1907년까지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난 작은 지각 변동은 이후 북한 개신교의 급성장과 부흥운동, 나아가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영향을 미쳤다. 길선주의 개종은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중생 체험이 뚜렷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 후 그의 개종 체험은 부흥운동 당시 한국인들의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과거 신앙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무교-선교-불교로 발전되어온 한국인의 종교성이 근대 종교인 개신교를 수용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종교로 성취되는 연속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687)
결론적으로 옥성득 교수는 7장을 통해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와 도교(선도), 동학(천도교)과 민간 종교로서의 정감록 신앙과 풍수신앙 등을 토론한다. 그동안 초기 한국 기독교의 성장, 부흥, 민족주의 운동과 달리, 현재 한국 개신교에 요구되는 타종교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담론은 별로 연구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 기독교의 저층에 살아 있는 유산을 발굴한 본서는 1세대 북미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통 종교를 파괴한 십자군이요 문화 제국주의자였다는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본서는 영미 기독교와 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의 삼중 통합의 조합 양상을 추적하면서 한국 기독교인의 능동성(agency)을 밝힌다.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태평양을 횡단한 초기 내한 북미 선교사들은 엄격한 청교도형 보수주의자나 전투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복음주의자들로서, 한국 종교를 파괴하고 기독교로 대체하려던 태도를 점차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요소를 수용하고 이를 기독교로 완성해 나가는 성취론적 태도를 취했다. 즉 개신교를 한국인의 영적 열망과 예언적 갈망을 성취하는 종교로 제시했다. 성취론은 타종교에도 진리가 존재하며 계시의 흔적이 있다고 인정했다.(697)
둘째, 초기 한국 개신교는 황해를 횡단한 중국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한중 기독교 사이의 언어-신학적 연속성은 일본의 다신론적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유일신론적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신학의 주류(主流)는 영미의 온건한 복음주의였으며, 진보적인 중국 개신교가 저류(低流)로 흐르면서, 1910년 이후 등장한 신류(新流)인 자유주의 일본 신학과 대결했다.(701)
셋째, 북미 복음주의와 중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있는 접촉점을 수용하고 삼중적 융합을 이루면서 한국 종교와 혼종을 이루면서 한국 개신교를 형성했고 국가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상실한 유교의 대안 신종교로 자립했다. 기독교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번역되는 번역성과 함께 특정 종교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성을 가진다. 한국적 독특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 된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보편성의 원칙(수직적 초월)과 이민화와 문화화의 원칙(수평적 적응)의 창조적 조합을 통해 한국 기독교는 정체성과 적실성을 유지하면서 미완의 과제인 한국적 기독교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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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형성사. 한국 종교와 개신교의 만남 1876~1910』,
옥성득 교수의 관점은 한국에서 성장한 교회(1915년에 나온 존스의 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가 아니라 한국화된 기독교의 형성(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을 논하며, 개신교 선교회들의 역사(1929년에 나온 백낙준 박사의 A History of the Protestant Missions in Korea)가 아니라 선교사들과 한국인 기독교인의 능동성과 한국 기독교의 혼종성에 관심을 둔 한국 기독교 형성사(A History of The Making of Korean Christianity)이다. 형성(making)은 근대성, 식민성, 다층성을 전제하지만, 본서에서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비될 수 없는 아름다운 창조(creation)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처음 교회의 형성은 교회와 신앙의 모판이기 때문에 어디서나 그 묻힌 역사에 대한 바른 기억은 현재 교회를 이해하고 쇄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책은 1876~1910년까지 만들어진 제1 세대 한국 기독교(개신교)를 다룬다. 더욱 중요한 관점은 기존 한국 종교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면서 교회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항일 독립운동과 근대 문명화에 기여하였듯이 유연한 타종교 신학을 가지고 토착적인 기독교를 창출하였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지다.” 역사적 민족주의와 문명적 근대성 그리고 종교문화적 토착성은 초기 한국 기독교의 3중 요소를 형성하였고 저자의 특별한 관심은 세 번째, 즉 한국 종교 문화 속에 있던 친화적 요소들 사이의 융합을 통한 토착적 한국 개신교의 창출사(創出史)이다. 저자는 토착적인 기독교야말로 한국교회가 “종교 문화적으로 민감하고 성서적으로 건전한 정체성을 가지며 영적으로 건강한 교인들과 함께 성장하면서 사회적 적합성도 확보할 수 있는 기독교였음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초기 한국교회의 역동성과 신학적 창조력이야말로 지난 20년 이상 정체하고 쇠퇴하면서 희망을 잃은 한국 개신교가 발굴하고 성찰해야 할 영적 유산이 아닐 수 없음”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1세대 북미선교사들과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한국 종교문화를 파괴한 근본주의자들이 아니라 기독교 토착화의 길을 연 온건한 복음주의자이며 성취론자로 그 이미지를 바꾸려고 한다. 저자는 “20세기 초 성취론은 시대적 한계인 문화 제국주의, 곧 영적 제국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지만 당시 다른 종교에 대한 가장 자유로운 타종교 선교 신학”이었음을 발굴하여 한국 개신교회가 전통 종교 및 문화 속에서 문화와 함께 나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북미 선교사들은 다음 세 개의 결정적인 발견으로 한국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게 되었다. 첫째, 선교 사업의 첫 10년(1884-9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의 다중 종교성(multiple religious identity)을 발견했다. 이 다원성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은 한국 종교를 더 깊이 연구했다.
두 번째 10년(1894-1903년) 동안 그들은 한국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단군신화에서 한국의 원시 유일신 신앙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하ᄂᆞ님을 기독교와 기독교 항일민족주의의 하나님으로 채택했다. 일부 선교사들은 한국 샤머니즘을 심도 있게 연구했다.
세 번째 10년(1904-13년) 동안 내한 선교사들은 부흥운동을 통해 한국인의 심오한 잠재력을 깨달았다. 선교사들은 한국인이 서양인과 다르고, 한국인은 더 높은 영적·윤리적 삶을 영위할 수 없으며, 한국인은 독립 국가와 민주주의 사회를 운영할 수 없다는 기본적인 가정을 버렸다. 1904-07년에 한국 정치 지도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출현하자, 그들은 문화 제국주의에 기초한 입국 당시의 전제와 가정이 잘못되었고 왜곡되었음을 깨닫고 수정된 담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서론, 7개의 장과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론은 개신교와 한국 종교 사이의 첫 만남에 대한 지난 120년간의 자의적 해석을 역사적으로 재검토한다.
본론
제1부의 첫 세 장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한국적 이해를 다룬다. 1장은 하나님론이고, 2장은 십자가 이미지를 통한 기독론이며, 3장은 성령론이다. 1장은 하ᄂᆞ님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신조어로 정착해나가는지를 추적한 개념어의 계보학이다. 하ᄂᆞ님은 단군신화의 삼위일체적 성격의 신화적 근거와 원시 유일신론의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채택되었다. 새로운 한국어 하ᄂᆞ님은 중국어 上帝와 일본어 かみ와 비교하여 볼 때 순수한 유일신 삼위일체론과 양립할 수 있는 견고한 신학적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일 신관을 가진 전통 종교의 전이해는 삼위일체 교리를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했다.
2장은 한국인이 이해한 십자가 이미지를 통해 발전해 나간 메시아상과 천년왕국을 조사한다. 수직적으로 천년왕국 종말론인 미국의 세대주의와 한국의 민간 메시아 사상이 1894-1905년 전쟁기에 교회 마당에 세워진 붉은 십자기(예수기)를 통해 한국 개신교의 정치적, 물질적, 사회적 욕망을 드러낸다. 수평적으로는 두 개의 정치문화 이상인 기독교 후천년왕국설과 계몽 운동이 1890년대-1900년대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통합되면서 개혁 운동이 일어난다. 이 장은 위기에 처한 민중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정치성을 다루는 장이다.
3장은 샤머니즘과 개신교, 무교의 질병 개념과 서양의 세균론, 치병굿과 선교사들의 축귀 담론 간의 갈등과 협상을 토론한다. 이 장은 특별히 여성 종교로서의 한국 기독교의 영적, 심리적 측면을 검토한다. 여기서는 샤머니즘에 대한 선교사의 입장 변화와 기독교가 지속적으로 실천한 축귀 의례를 강조한다. 20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개신교 선교회는 영혼을 위한 복음 선교와 육체를 위한 의료 선교를 통합했다. 비록 육체의 구원이 영혼 구원의 한 수단으로 인식되기는 했지만, 영혼 구원의 우선성은 육체의 구원을 포함했다. 선교회가 세운 병원과 진료소에서 의사와 간호사는 ‘위대한 의사’인 예수의 대리인으로서 신체의 치유를 통한 전인적인 구원을 위해서 노력했다. 한센병 환자 사역은 기독교가 인간을 전인적으로 접근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육체는 과학으로, 영혼은 종교로”라는 근대 서구의 이원론 체계는 이들에게 양자택일의 난제가 아니었다. 귀신들림을 믿음으로 치유한 사례들은 의료 선교사와 복음 선교사 모두에게 이런 세속적 이분법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341)
이어 2부 4-7장에서는 1부에서보이지않았던 한국 기독교의 신학적 측면과 달리 물질적 기독교의 측면인 의례, 예배당, 서적을 다룬다.
4장은 제사를 금지한 중국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한국 개신교가 제사를 지속적으로 금지하면서도 대안 의례를 창출한 추도회를 토착화의 전형적인 사례로 제시한다. 4장이 다루는 제사는 유교 의례로 유교의 가족 인류학, 구원론, 윤리학의 영역에서 기독교의 대응을 검토한다. 가정 추도회에는 제사가 드려지던 시간과 장소, 일부 형식은 그대로 둔 채 교인들도 초청하여 찬송, 기도, 성경 읽기 등의 간단한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며 돌아가신 분을 추억하는 형식이 추가되었다. 또한 조상 기념의 방법으로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유지 받들기와 자선사업 기부를 강조했다. 이는 조상에 대한 의존을 그리스도 안에서 조상과의 영적 교제로 변형시키는 작업이었다.
5장은 1910년까지 건축된 교회 예배당이 가지는 공간 신학을 다룬다. 예배당의 양식과 외부, 내부 특징에서 교회의 지리적 확산과 더ㅈ불어 공간에 구형화된 투착적인 기독교 건축학을 눈으로 볼 수 있다. 한양 절충형 예배당 외형에 전통 종교와 타협한 내부 구조는 대한제국이 의욕적으로 근대화를 추구하고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여전히 의식과 의례 측면 등에서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한 점과 비교되는 한국 개신교의 근대성과 토착화의 균형 잡힌 성과다. 1903-07년에 전개된 개신교의 대부흥운동은 예배 공간에서 깃대를 없애고 휘장 철거를 논의하고 양반석을 폐지하는 등 동도·구본(舊本)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정화하는 과정이었다. 1910년 전후에 서울의 새문안교회와 승동교회가 로마네스크 복고 양식으로 건축되고 안동교회 등에서 휘장을 철거함으로써 서울에서는 장로회까지 구본신참을 너머 기독교 문명화 방향으로 전환해 나갔다.(513)
6장은 한문서적과 한글로 번역된 전도문서와 찬송가를 통해 초기 한국 기독교가 전달한 메시지를 분석한다. 한글 문서의 배타적 태도와 달리 유교에 대한 성취론적 입장에 섰던 한문 기독교 문서들을 분석해 그 원자료인 중국 기독교의 영향, 독자층인 양반 지식인층, 특히 한성감옥의 전직 고위 관리들의 개종 동기와 그들의 신학 사상을 확인한다. 19세기 개신교의 메시지는 동아시아 문화와 종교에 대해 우상파괴와 토착화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자는 조상의 정령과 우상의 ‘미신적인’ 숭배 그리고 아편, 전족, 일부다처제 등 악습을 공격했다. 후자의 진보적인 태도는 기독교와 전통 종교 사이에 있는 유사한 접촉점을 강조하고, 전통 종교를 ‘복음의 준비’로 받아들다. 적응과 토착화라는 방법론을 채택한 결과 한문 개신교 소책자는 한국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 천주교의 경우에는 박해와 핍박으로 꽃피지 못했으나, 개신교는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종교의 자유 속에서 급성장하면서 토착화의 열매를 거둘 수 있었다. 중국 기독교의 신학과 문서가 서구 영미 기독교와 한국 종교 문화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다.(605)
7장은 1900년대 전개된 사경회와 부흥운동 기간에 만들어진 새벽기도회를 다룬다. 이곳에서는 선도(仙道)의 새벽기도를 교회 안으로 가지고 와서 기독교 의례로 만든 평양 선도인 길선주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학자들과 달리 민간 도교인 선도가 한국 복음주의 영성 형성에 미친 영향을 강조한다. 진보 진영의 주장처럼 부흥운동은 한국 근본주의의 출발점이 아니며, ‘조선의 예루살렘 평양’을 외치는 보수주의의 정복주의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한다.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영성이 만나는 자리에 새벽기도회가 있었다. 1903-1907년까지 기독교인들에게 일어난 작은 지각 변동은 이후 북한 개신교의 급성장과 부흥운동, 나아가 한국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영향을 미쳤다. 길선주의 개종은 복음주의가 강조하는 중생 체험이 뚜렷한 전형적인 사례다. 그러나 1895년 청일전쟁 후 그의 개종 체험은 부흥운동 당시 한국인들의 기독교에로의 개종이 과거 신앙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무교-선교-불교로 발전되어온 한국인의 종교성이 근대 종교인 개신교를 수용함으로써 보다 완전한 종교로 성취되는 연속성을 유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687)
결론적으로 옥성득 교수는 7장을 통해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와 도교(선도), 동학(천도교)과 민간 종교로서의 정감록 신앙과 풍수신앙 등을 토론한다. 그동안 초기 한국 기독교의 성장, 부흥, 민족주의 운동과 달리, 현재 한국 개신교에 요구되는 타종교에 대한 유연한 태도와 담론은 별로 연구되지 않았다. 반면 한국 기독교의 저층에 살아 있는 유산을 발굴한 본서는 1세대 북미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인들이 전통 종교를 파괴한 십자군이요 문화 제국주의자였다는 고정 관념에 도전한다. 본서는 영미 기독교와 중국 기독교와 한국 종교의 삼중 통합의 조합 양상을 추적하면서 한국 기독교인의 능동성(agency)을 밝힌다.
주요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태평양을 횡단한 초기 내한 북미 선교사들은 엄격한 청교도형 보수주의자나 전투적 근본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복음주의자들로서, 한국 종교를 파괴하고 기독교로 대체하려던 태도를 점차 버리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요소를 수용하고 이를 기독교로 완성해 나가는 성취론적 태도를 취했다. 즉 개신교를 한국인의 영적 열망과 예언적 갈망을 성취하는 종교로 제시했다. 성취론은 타종교에도 진리가 존재하며 계시의 흔적이 있다고 인정했다.(697)
둘째, 초기 한국 개신교는 황해를 횡단한 중국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 한중 기독교 사이의 언어-신학적 연속성은 일본의 다신론적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유일신론적 민족주의 형성에 기여했다. 초기 한국 개신교의 신학의 주류(主流)는 영미의 온건한 복음주의였으며, 진보적인 중국 개신교가 저류(低流)로 흐르면서, 1910년 이후 등장한 신류(新流)인 자유주의 일본 신학과 대결했다.(701)
셋째, 북미 복음주의와 중국 개신교는 한국 종교에 있는 접촉점을 수용하고 삼중적 융합을 이루면서 한국 종교와 혼종을 이루면서 한국 개신교를 형성했고 국가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상실한 유교의 대안 신종교로 자립했다.
기독교는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권으로 번역되는 번역성과 함께 특정 종교와 문화를 변화시키는 변혁성을 지니면서 동시에 그 문화권에 뿌리를 내리는 토착성을 가진다. 한국적 독특성과 세계적 보편성이 만나고,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창조적이 된다. “기독교의 정체성과 보편성의 원칙(수직적 초월)과 이민화와 문화화의 원칙(수평적 적응)의 창조적 조합을 통해 한국 기독교는 정체성과 적실성을 유지하면서 미완의 과제인 한국적 기독교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