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8

Taechang Kim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安藤昌益の[直耕正人]的農民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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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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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chang Kim

明日早朝共に哲学する旅路に立つ. 
長年の経営コンサルタントの職を終えて、最近農場に住み込み、
日本と世界の食と農の問題に取り組んでいる長年の哲友のところを訪ね、
食と農の崩壊危機に関する対話を交わす. その後、
元東京大学出版会理事兼編集局長とも会って
わたくし自身の引退以後の京都フォーラムの哲学活動に関する意見を聞いておき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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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者天下之大本
農学即科学(+哲学+宗教)であると言う意見に対して
農学即美学(生命開新美学)であり、種美学+開 美学+実美学ではないか、と問い返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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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民の位置付けと意味付けという観点と立場から改めて考え直すと、
安藤昌益の<直耕正人>的農民像が良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気がす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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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 농農은 천하天下에서 가장 으뜸이 된다는 뜻으로 농업의 중요성을 일컫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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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위치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사민四民과 사업四業에서 선비를 제외한 일반 백성의 일 가운데 으뜸에 있다는 농본주의農本主義 사상에서 알 수 있다. 따라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은 농본주의를 나타내는 깃발과도 같다. 농본주의란 농업이 산업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백성의 생업生業이며 농민과 농촌을 사회·경제의 바탕으로 삼아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는 생각으로서 농업의 발전을 통하여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상이다. 원천적으로 농본사상의 기원은 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유학과 농본사상은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채택된 왕조의 통치이념이었다.

역사적 원류를 찾아보면 농본사상과 그 기치 표현인 ‘농자천하지대본’은 중국 한漢나라의 3대 황제인 문제文帝(재위 기원전 180~157) 때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맹자孟子의 유가적 농본주의와 그 가치관을 현실 정치에 도입하려는 의지에서 발원하였다.
『사기史記』 효문본기孝文本記에 따르면 한 문제는 유학자인 가의賈誼의 진언에 따라 백성들에게 몸소 농사의 모범을 보이는 데 앞장섰다. 기원전 178년(문제 2)에 처음으로 적전籍田을 설치하고 몸소 쟁기로 밭을 갊으로써 농사의 중요성을 가르쳤다(前元 二年 正月 上曰 農天下之大本 基開籍田 朕親率耕 以給宗室廟粢盛). 문제는 이 권농행사勸農行事에서 ‘농천하지대본農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처음 썼는데, 이 말은 오늘날까지도 농촌·농민·농업과 관련된 수많은 행사장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한나라의 문제는 유가의 선비들이 제언하는 국정 의견을 크게 수용하여 백성들에게 농업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또한 중농정책을 시행하였다. 재위 22년 동안 여러 차례 농업 장려 조치를 반포하고 적전을 설치하여 몸소 권농행사를 이끌었으며 군·현의 농촌사회를 여유롭고 비옥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재위 후반기에는 창고에 쌓인 곡식들로 넘쳐나서 세금을 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문제와 그 뒤를 이은 경제景帝 시대까지를 한데 묶어서 ‘문경지치文景之治’라고 일컫는 태평성대의 시대로 본받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한편 조선 건국의 설계자이자 총수였던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42~1398)은 개국 일등 공신이 되어 ‘농자천하지대본’의 기치를 세웠다. ‘부자들은 땅이 천맥을 잇댈 만큼 넓게 가졌어도 빈자들은 송곳을 꽂을 땅도 없어서 소작 신세가 뻔하며, 지주들은 소출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니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해지는 것이 고려의 사정’이었던 것이다. 농본주의로 혁신하는 길밖에 없었으며, 이 같은 생각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 동안 변함없이 추구되었다. 다만 농본 개혁사상은 조선 전기에는 왕권 강화에 연루된 반면 후기에는 실학적 개혁사상이 나라와 백성의 근대화에 바탕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내용
유학에서 발원한 농본주의는 다면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농업이 의식주의 근본이며 부富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토지국유화, 경자유전, 병농일치, 중농억상, 10분의 1세, 부역균등, 상호부조, 사회보장 등의 정책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사상구조를 갖고 있다. 조선 농본주의 사상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세종·중종·영조의 권농교문勸農敎文, 정조와 고종의 권농유시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교문과 유시, 국가운영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그리고 세종 때 간행된 농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의 서문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경국전』에 적힌 “農者衣食之本 王政之所先也”라는 말은 ‘농업은 의식의 기본이 되고 왕정의 맨 앞에 있다.’라는 뜻이다. 세종의 『권농교서勸農敎書』에는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즉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을거리를 하늘로 삼는다’라고 적혀 있다. 정도전은 적전籍田으로 권농의 뜻을 피력하며 “農者萬事之本也 籍者勸農之本也”라고 하여 ‘농사는 만사의 근본이고 임금이 적전을 몸소 경작하는 일은 권농의 근본’임을 강조하였다.
농업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베푼 왕정의 사례를 보면 첫째로 일선 군·현과 수령의 임무인 농잠업 장려, 호구 증가, 교육 진흥, 공정한 군정, 부역 균형, 소송 신속처리, 미풍양속 장려 등을 우선하였다. 둘째는 권농상勸農桑을 위한 친경親耕과 친잠親蠶 의례로 동적전과 서적전을 두고 선농단에서 농사의 신神인 신농神農과 후직后稷에 풍년제를 지내며, 고대 중국의 시조인 황제의 정비正妃 서릉씨西陵氏를 잠신蠶神으로 모셔 선잠단先蠶壇에 제사하는 의례를 행하였다. 셋째는 각종 재해를 막기 위하여 원구단圓丘壇에서 제천제祭天祭를 거행하고 때마다 각급의 기우제와 기풍제를 거행하였다. 넷째는 『농사직설』과 『농가집성農家集成』 등의 종합서를 비롯한 양잠·구휼 등의 전문 농서를 편찬하여 백성들의 농업과학기술 수준을 향상시켰다. 다섯째는 흉년이나 춘궁기에 빈민과 무의탁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의창義倉과 진휼청賑恤廳을 운영하고, 물가 안정을 위한 상평창常平倉이나 향촌의 미풍양속을 위한 사창과 향약을 장려하였다.

특징 및 의의
농본사상은 중농사상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중농사상은 단순히 산업으로서의 농업 위치를 강화하자는 뜻이지만 농본사상은 농업의 산업적 위상을 높일 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정치·군사·경제·사회 문제를 연계하는 강력한 정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농본사상 정치에는 ‘숭농억상공주의崇農抑商工主義’의 폐단이 싹틀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선 후기에 실학사상이 싹트면서 이 같은 폐단은 사라지게 되었다. 정조가 이른바 “옛 제도가 본받을 만하더라도 오늘날의 상황이 옛날과 다르다면 성인聖人이 다시 돌아와도 시속에 따른 다스림을 펼칠 것이고 통달한 인재는 옛 제도에 집착하지 않는 법이다.”라며 “온갖 업무를 뒤로 미루고 백성들을 뒤흔들어 가며 행할 수 없는 옛 제도를 재현한다는 것은 허황된 짓이다.”라고 피력한 바와 같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기치는 흔히 향촌의 농사일이나 마을 민속행사에 앞장서는 각종 두레 공동체의 품앗이 문화와 풍물에 내세우는 깃발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보기 드문 민속행사장에서나 볼 수 있는 어색한 정경이 되었다.

참고문헌
농사, 고전으로 읽다(구자옥, 농촌진흥청, 2016), 생명과학 농자천하지대본(최병한, 한림저널사, 1993), 조선시대 농본주의 사상과 경제개혁론(오호성, 경인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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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昌益 直耕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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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藤昌益 안도 창익 (읽기) 안도 쇼에키

일본 대백과 전서(닛포니카) 「안도 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안도 창익
안도쇼에키
(1703-1762)
江戸中期の思想家。通称は孫左衛門。著作時の堂号は確龍堂良中(かくりゅうどうりょうちゅう)、別号は柳枝軒(りゅうしけん)。正信、草高とも名のる
에도 중기 사상가 . 통칭은 손좌위문. 저작시의 당호는 확룡당 료나카(카쿠류도류추), 별호는 류에겐(류시켄). 마사노부, 쿠사다카라고도 한다.

[미야케 마사히코 2016년 4월 18일]

평생과 행동

경력의 대부분은 불명하고, 1703년(겐로쿠 16)에 태어나, 1744년(연향 1)부터 1746년 사이, 육안(무츠)국 미토(산노헤)군 하 치노 헤 마을 (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에서 마을 의사를 개업, 1762년(호력 12) 10월 14일에 데와(데와)국 아키타군 후이다무라(아키타현 오다테)시에서 사망 해 , 동촌의 조동 (그러자) 소엔마쓰야마 온 천사 에 묘소가 있는 것만이 확실하다. 선조의 손자에몬이 1674년(연보 2)에 니이타무라의 간소(키모이리)(명주)를 맡고 창익도 1761년(호력 11) 10월 14일에 동촌에서 손자에몬이라고 칭하여 과 역을 부담해, 후손도 손좌위문이라고 하는 옥호로 동지에 현주하고 있는 것 등으로부터, 창익의 출생지는 니이다무라에서, 마을 관리인 클래스의 상층 농민 출신으로 추정 된다 .

 창익은 하치노헤 시대, 의사, 학자 로서 높은 평가를 얻고 하치노헤번으로부터 빈객의 치료를 명령받고, 대관, 측의, 유필, 유관상, 어용상인 등 10 여명 을 문인 했다. 1756년(호력 6) 니이다무라의 안도 본가의 당주가 사망하고, 1758년경 창익은 귀촌하여 본가를 이어준다. 후이이다는 미요(川代) 강지류의 재(川) 강변 마을로 에에노사쿠(고에사쿠)의 고지로 전해진다. 벼농사 하나의 논지대에서 무라타카 1500석, 160호 750명, 기타아키타 제일의 오무라에서 근향의 여러 마을을 위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익이 귀촌했을 때, 마을은 호력의 기근으로 피폐하고, 창익은 유력지주와 마을 관리층을 문인으로 하면서, 음식의 비용 이 가사무 신사의 정지 등, 마을 구제안을 향중에 제안해 실현하고 있다. 온천사의 과거장에 '창익로'와 이례적인 경칭이 붙여져 있는 것은 마을사람의 경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미야케 마사히코 2016년 4월 18일]

사상과 저작

창익의 사상은 기일원론, 사회변혁론, 존왕론을 특색으로 한다. 근원적 ​​실재인 '활진'이 분화하여 만물을 생성하는 영위를 '직경'이라고 한다. 지상에서 생성된 최초의 존재는 쌀이며, 쌀로부터 사람이나 조수충충어가 분화한다. 사람의 생산 활동도 '직경'이다. 만물은, 남자와 여자, 물과 불이라고 하는 쌍을 이루고 있어, 남자의 본성은 여자, 여자의 본성은 남자와, 서로 대립하는 것의 성질을 자기의 본성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를 '호성'이라고 한다. 「직경」을 실시해 「호성」을 유지하는 한, 자연이나 사회, 신체는 모순없이 조화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를 '자연의 세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성인 이나 인도의 석가 등이 나타나, 지배하고 수탈하는 것과 지배되어 생산에 따르는 것과의 절대적 대립 관계 ‘이별’을 만들어낸다. 「이별」에 근거한 제제를 「사법」, 「사법」이 행해지는 시대를 「법세」라고 한다. 「법세」는 「직경」과 「호성」이 부정되는 반자연적 상태이므로, 재해나 투쟁이나 병이 끊이지 않는다. '법세'를 '자연의 세상'으로 변혁하기 위해 과도적 사회가 구상된다.

 그 과도적 사회는, 「법세」의 계급이나 신분 등을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직경」시키는 것에 의해, 실질적으로 「2별」을 형해(게이)화시켜 가는 사회이다. 과도적 사회의 권력은 전국적으로는 「가미」(천황), 지역적으로는 「일가 일족」(혈연 공동체)을 기반으로 한다. 후자의 자치를 '읍정'이라고 한다.
과도적 사회에 '직경'과 '호성'을 구현한 진정으로 올바른 사람 '정인'이 나타났을 때 '자연의 세상'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過渡的社会に「直耕」と「互性」を体現した真に正しい人「正人」が現れたとき、「自然の世」に移行するのである

창익은 중국의 왕을 부정하지만, 일본의 천황은 수탈자가 아니라고 존중한다. 神仏混淆 등 후세의 신도를 부정해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신도는 「자연」의 체현으로서 존중한다. 창익의 사상 경향 가운데 존왕 척패론의 계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창익의 문장에는 도호쿠 방언 특히 아키타 방언의 특징이 관철되어 그 사상을 규정하고 있다.

 창익의 저서 로서 ' 자연진영도 '(도쿄대학 종합도서관 소장의 책 과 게이오 기주쿠대학 도서관·무라카미 슈아키 소장의 간본이 있다), ' 통도 진전 '(경대 도서관 소장), '자연 진영도 단맛의 제약 자연의 기행'(우에스기 슈소장), '확룡선생운경경'(동) 등이 있다.

[미야케 마사히코 2016년 4월 18일]

『안도 창익 연구회편 『안도 창익 전집』 전 21권(22분 권)・별권 1・증보 편 3(1983~2004・농산 어촌 문화 협회)』 ▽ 』(1970·호초 서방)』 ▽ 『하버트 노먼 저, 오쿠보 겐지역 『잊혀진 사상가――안도 창익의 일』(『하버트 노먼 전집 제3권』 소수・1977・이와나미 서점)』 ▽ 『미야케 마사히코편 『안도 창익의 사상적 풍토 오다테 니이다 민속지』(1983・그렇고)』

[참조항목] | 자연진영도 | 통도진전
출처 쇼가쿠칸 일본 대백과 전서(닛포니카) 일본 대백과 전서(닛포니카)에 대한 정보 | 범례

아사히 일본 역사 인물 사전 「안도 창익」의 해설
안도 마사아키

몰년:보력 12.10.14(1762.11.29)
생년:원록 16(1703)에도
중기의 농본 사상가. 저자로서의 호는, 처음 확룡당 안씨 마사노부 후 확룡당 료나카. 농가의 당주로서의 자칭은 손좌위문. 창익은 한방의(후세방계)로서의 호. 아키타 번령 의 데바국 아키타군 후이다무라(아키타현 오다테시) 출신. 생가 는 간소(촌장 상당)층의 농가였지만 몰락. 니이타무라를 나와, 연기 1(1744)년부터 호력 8(1758)년까지 하치노헤 번령의 육오국 미토군 하치노헤 성하(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에서 마을 의사를 개업 . 번의 신용 두껍고, 문인에게도 상사층이 많다. 8년 후이이타무라로 돌아가 본가의 당주가 된다. 안도가는 타지를 전부 잃고 궁핍 상태에 있었지만, 창익은 가산의 회복에 노력해, 3년 후에는 고20석 6두여를 소지. 후이다무라도 기근으로 피폐하고 있어 창익은 지주층의 문인들과 마을 기합을 지도, 지출이 많은 각종 신사를 일시정지하는 전통적 절약 방법으로 재건을 도모했다. 주저 는 논문 '자연 진영도', 간본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 등으로 동북 방언의 특징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창익은 생산활동을 자연, 사회, 인체의 통일원리로 삼아 만명이 사유지를 가지고 생산활동에 따른 신분차별이 없는 사회를 이상으로 무사가 농민의 생산을 수탈하는 봉건영주 제 를 비판 . 하지만 집을 생산의 단위로 하고 가부장제를 긍정하기 위해 여성차별을 내포. 생산에서 소외되고 있는 장애인이나 피차별민도 차별. 유교, 불교, 무도(神儒仏混淆의 신도), 노장, 법가 등을 부정해도, 자연 신도(神儒仏混淆 이전의 신도)는 일본과 일본인을 최우수로 해, 이국·이민족 차별 내포. 중국의 왕을 수탈자로서 부정하는 한편, 일본의 천황을 자연신도의 체현자로 농업의 보급자로서 긍정. 현실의 차별사회를 이상적인 평등사회로 변혁하기 위한 과도적 사회로서 천황에 의한 전국 지배와 ​​일가 일족에 의한 지역 지배를 구상했다. 스스로 붙인 사호는 수농 태신. 계명은 처음으로 현정도인 선정문, 이어서 견승도인사, 이후 창안구익신사. 묘석은 오다테시 니이다의 조동 종교 마쓰야마 온천사 경내에 있었고, 위패는 니이다의 문인 아다치 세이자에몬의 집(현필두자 유이치)에게 전해졌다. <저작> 안도 창익 전 집간 행회 감수 『안도 창익 전집』전 10권
(미야케 마사히코)

출처 아사히 일본 역사 인물 사전:(주) 아사히 신문 출판 아사히 일본 역사 인물 사전에 대해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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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카 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 「안도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안도 창익 안도 쇼에키

[생]타카나가 4(1707)?.
[몰] 몰년 미상 에도
시대 중기의 사상가. 전기 는 별로 분명하지 않지만, 창익 연구를 종합하면, 아키타번 쿠보타 성 아래에서 태어나 혼초와 의학을 수습한 후 남부 하치노헤로 이주해, 마을 의사로서 생활, 만년은 나가사키에 가서 해외의 사정을 연구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활동은 향보~보력 연간(1716~64)으로 간주되어 의사로서보다는 사상가로서 매우 특이한 활동을 했다. 저서는 공간된 것으로는 「공자 1 세 변기」와 「자연 진영도」(3권, 3권, 1753)가 있고, 미간의 것으로는 「자연 진영도」(100권, 92권) ) 『통도 진전』(5권)이 있다. 그 사상의 특징은 봉건사회에 대한 철저한 비판과 만민평등에 의한 농경중심주의에 있다. 공자, 묘자를 비롯해 지금까지의 도덕교리는 농민에 대한 계급 지배를 합리화한 것에 불과하고, 또 도쿠가와 봉건제는 그 구체화라고 철두 철미 공격했다. 그의 농경주의는 일면에서는 복고적이지만, 그 근저에 있던 인간의 일체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별의 폐지, 남녀 동권의 평등주의의 주장은 매우 시대를 넘은 보편 성을 가지고 있다.
출처 브리타니카 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사전 브리타니카국제대백과사전 소항목 사전에 대한 정보

백과사전 마이페디아 「안도 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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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창익【안도쇼에키】

에도 중기 사상가, 의사. 전기에는 불명한 부분이 많지만, 아키타번의 상층 농민의 집에서 태어나, 1744년에는 하치노헤에서 마을 의사를 개업하고 있어, 1745년에는 하치노헤번사, 번의사, 스님 등의 지식층과 박학의 학자로서 교류하고 있다. 1750년대 전반에 주저, 고본《자연진영도》를 저술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저에서 창익은 당시의 신분제사회와 유불사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지배·피지배 관계가 없는 만인이 <직경>(농업생산)에 종사하는 <자연세계>를 제창했다. 1758년 고향으로 돌아가 생가를 부흥, 마을 역인층을 문인으로 마을을 지도해, 흉작에 의한 피폐로부터 구해, 모두로부터 수농대신을 명했다. 저서에는 그 밖에 간본《자연 진영도》《통도 진전》 등이 있다. 에도기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메이지기에 카노 마키요시가 발견·소개하고, 제2차 대전 후 EH 노먼의《잊혀진 사상가》에 의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지만, 창익의 사상의 위치 에 대해서 그러나 정설을 보지 않는다.
출처 주식회사 평범 사 백과사전 마이페디아에 대해서 정보

디지털판 일본인명 대사전+Plus 「안도 창익」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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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창익 안도-쇼에키

1703년?~1762년 에도 시대 중기의 사상가.
겐로쿠(겐로쿠) 16년? 출생. 연향 원년경 육안(무츠) 하치노헤(아치모리현)에서 마을 의사를 하고 있었던 것과, 만년 데바(데와) 후이이다(아키타현)에 헹구고 있던 것 이외는 불상. 봉건적인 신분제도를 비판하고 철저한 평등주의에 근거하는 이상적인 사회 「자연의 세상」을 주장. 보력 12년 10월 14일 사망. 60세? 메이지 32년경 카노우 코키치에 의해 그 저서 「자연 진영도」가 소개되고, 또 제2차 대전 후 EH 노먼의 「잊혀진 사상가」로 히로쿠 세상에 알려졌다. 글자(아자나)는 양중. 통칭은 손좌위문. 호는 확룡당, 야나기 가지. 저작은 그 밖에 「통도 진전」등.
【격언 등】 부를 원하지 않고, 가난을 초대하지 말라. 유저를 생각하지 않기보다는, 무·버림을 위해(나)자자레(「자연 진영도」)
출처 코단샤 디지털판 일본인명 대사전+Plus에 대한 정보 | 범례

왕문사 일본사사전 삼정판 「안도 창익」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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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 창익 안도 쇼에키

? ~1762에도
중기의 사상가·의사
아키타에서 태어나, 의학·혼초학을 수습해, 육안(아오모리현) 하치노헤(하치노헤)에서 동의를 개업. 이후 나가사키에 서유럽 사정을 알기 위해 유학했다고 하는데 사력은 불명.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을 저술하고, 무사・성인・군자를 불경식의 도둑이라고 극언하고, 통치자가 없는, 만인이 경작에 종사하는 평등한 「자연세」를 이상 라고 하는 사상을 설했다.
출처 왕문사 일본사사전 삼정판 왕문사 일본사사전 삼정판에 대한 정보

디지털 대사천 「안도 창익」의 의미・읽기・예문・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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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쇼에키[-시야웨키]【안도 마사유】

[1703~1762]에도 중기 사회사상가·의사. 데와 사람. 봉건사회 와 그것을 지지하는 유학 · 불교 를 비판.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생산에 종사하고 생활하는 '자연의 세상'을 주창했다. 저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 등.
사쿠라다 히사 히사의 소설. 쇼와 44년(1969)간. 의 전기 소설.
출처 쇼가쿠칸 디지털 대사천에 대한 정보 | 범례

정선판 일본어 대사전 「안도 창익」의 의미・읽기・예문・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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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쇼에키【안도 창익】

에도 중기의 사회 사상가. 데와 사람. 글자는 양중, 호확룡당. 본업은 의사. 봉건사회의 제도습속을 비판하고 철저한 평등주의를 주장. 모든 사람이 농경에 의해 사는 자연세를 이상으로 했다. 주저 「자연 진영도」 「통도 진전」. 보력 12년( 1762 ) 몰.
출처 정선 판 일본어 대사전 정선판 일본어 대사전에 대한 정보

세계대백과사전 제2판 「안도창익」의 의미・알기 쉬운 해설
안도쇼에키【안도 창익】

1703? -62 (원록 16? - 보력 12) 에도
중기의 의사, 사상가. 글자는 양중, 호는 확룡당. 전기에는 불명의 점이 많아, 확실히 알려져 있는 것은, 1744-46년(延享1-3) 무렵, 육안의 하치노헤의 성하에서 마을 의사로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과, 만년의 약 5년간을 데와쿠니 아키타군 니이다무라(현, 오다테 시내)로 보내, 이 땅에서 몰린 것만으로, 주요 저술을 완성한 것은, 52-55년(보력 2-5)경 라고 추정되지만, 그 시기에 어디에 거주하고 있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하치노헤에서 창익의 문인은 의사, 번사, 신관, 상인 등 각종 직업에 속하고 있어 같은 시절 마쓰마에, 에도, 교, 오사카, 나가사키에도 소수의 문인이 있었다.
출처 주식회사 평범사 세계대백과사전 제2판에 대해서 정보

세계 대백과 사전 내 안도 창익 의 언급
【자궁】에서

… 이집트에 널리 전해지는 가장 강력한 부적은 여신 이시스의 자궁을 그 인대나 질과 함께 따랐다. 자궁을 장기로 하는 설은 많지만, 안도 창익과 같이 신장 전, 간 아래, 대장 뒤의 공간이 자궁으로, 형태는 없다고 하는 생각도 있었다(《통도 진전》). 파라켈수스는 3종의 자궁을 전한다. …

【자연 진영도】에서
… 안도 창익 의 주저. 제목은 자연스러운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진>(또는 <활진>)이 운영하는 길, 즉 자연계의 법칙성을 의미한다. …

【통도 진전】에서
… 안도 창익 저. 4권 5권으로 구성된 1부가 게이오 요시카쿠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

※「안도 창익」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용어 해설의 일부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출처 | 주식회사 평범사 세계 대백과 사전 제 2 판에 대해서 |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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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直耕」とは何か : 飢饉と『自然真営道』
高木 松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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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年 8月4日
農業尊重へ崇高な理念を紹介
東奥「安藤昌益―直耕思想いま再び」

江戸中期の独創的思想家として知られる安藤昌益。八戸の町医者だった彼は、封建の世にあって徹底した平等思想を説き、男女が助け合い田畑を耕す「直耕(ちょっこう)」を唱えた。人はみな額に汗して働くべきだとの崇高な理念だ。マネーゲームに踊らされた末に経済危機に陥り、働くところさえ奪われる時代に、昌益が問い掛けるものは何か。4月開始の特設1ページ大型企画(毎週金曜日)は「昌益探しの旅」を続けている。

昌益を社会批判に向かわせたきっかけは寛延2(1749)年の「猪(いのしし)飢饉(けがじ)」。凶作のうえイノシシに田畑を荒らされ、数千人の餓死者が出た。八戸藩では藩財政のため大豆を作らせたが、栽培した後に放置された焼き畑にワラビやクズが繁茂、イノシシが食べて繁殖した。「自然の生態系を壊す者、それは自ら耕さずむさぼり食う支配階級」と、昌益は痛烈に批判した。

こうした昌益の思想を「わが国に大思想家あり」と紹介したのが狩野(かのう)亨吉(こうきち)博士。今年は博士が明治32(1899)年に昌益の「自然真営道」百巻本を入手してから110周年に当たる。残念ながら関東大震災で焼失し現存は15巻15冊のみだ。カナダの外交官ハーバード・ノーマンは第2次大戦後、「忘れられた思想家」を書いて昌益を世界に紹介した。連載は昌益研究の歴史を解き、不明な部分の多い昌益の京都修行や八戸時代も推察する。今秋には昌益ファンの手で市内に資料館がつくられる。

取材・執筆の吉田德寿編集委員(八戸支社駐在)は「食糧基地であり農業が基本の青森で、むつ小川原などの工業開発が優先されるのはおかしいと思い、農を大事にした昌益の思想をいつか紹介したいと思っていた。政治も社

농업 존중에 숭고한 이념을 소개
히가시오쿠 「안도 마사익―직경사상 지금 다시」

에도 중기의 독창적 사상가로 알려진 안도 창익. 하치노헤의 마을 의사였던 그는, 봉건의 세상에 있어 철저한 평등 사상을 설교해, 남녀가 서로 돕고 타바타를 경작하는 「직경(초경)」을 주창했다. 사람은 모두 이마에 땀으로 일해야 한다는 숭고한 이념이다. 돈 게임에 춤을 춘 끝에 경제 위기에 빠져 일하는 곳마저 빼앗기는 시대에 창익이 묻는 것은 무엇인가. 4월 개시의 특설 1페이지 대형 기획(매주 금요일)은 「창익 찾기의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창익을 사회비판으로 향하게 한 계기는 관연2(1749)년의 '이노시시 기근(케가지)'. 흉작 후 멧돼지에 논밭을 거칠어져 수천명의 아사자가 나왔다. 하치노헤번에서는 번재정을 위해 콩을 만들었지만, 재배한 뒤 방치된 구운 밭에 고사리와 쓰레기가 번식, 멧돼지가 먹고 번식했다. “자연의 생태계를 부수는 자, 그것은 스스로 경작하지 말고 먹는 지배계급”이라고 창익은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창익의 사상을 「우리나라에 대사상가 있다」라고 소개한 것이 카노 쿠시 박사. 올해는 박사가 메이지 32(1899)년 창익의 '자연진영도' 백권책을 입수한 지 110주년에 해당한다. 불행히도 간토 대지진으로 소실되어 현존은 15권 15권뿐이다. 캐나다 외교관 하버드 노먼은 2차 대전 후 '잊혀진 사상가'를 써 창익을 세계에 소개했다. 연재는 창익연구의 역사를 풀고, 불명한 부분이 많은 창익 교토 수행과 하치노헤 시대도 추찰한다. 올 가을에는 창익팬의 손으로 시내에 자료관이 만들어진다.

취재·집필의 요시다 히로시 편집 위원(하치노헤 지사 주재)은 “식량 기지이며 농업이 기본의 아오모리로, 무츠오가와라 등의 공업 개발이 우선되는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농을 소중히 한 창익의 사상을 언젠가 소개하고 싶다. 정치도 사회도 문제 투성이의 지금이야말로 창익을 재검토해 주었으면 한다. 현재 18회 연재는 내년 ​​3월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심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