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7

다카하시 신지 - 마음의 원점 (상/하)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2/95


====

제 1 장. 마음의 원점 (1)

1. 대우주에는 의식(意識)이 있다.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우리들이 이 현상계(現象界)에 태어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구는, 태양은, 대우주는, 살아 있는 대자연은,

그것들과 우리와의 관계는 어떠한 짜임으로 되어 있는 것일까.

혼이라든가. 마음이라는 것은 실재로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존재하고, 어떠한 목적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다만 우연하게 있을 뿐인 것일까.

이제부터 말하고자 하는 여러 문제는,

인간의 존재,

마음,

신(神),

인생의 목적,

고락(苦樂)의 제상(諸相),

현상계(現象界)와 저 세상(實在界라고도 하는),

대우주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들이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여겨져 왔던 4차원이상의 다차원(多次元)의 여러 문제를 다루어,

해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가운데에는

그러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의 체험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체가, 소우주(小宇宙)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며,

고락(苦樂)의 제상(諸相)은,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부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차례로 추구하여 설명해 가고자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며, 대우주는,

모든 생명물질(生命物質)을 만들어 내고 있는 근원이다.

만약 지구나 우주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존재는 없을 터이다.

대우주가 있으므로 해서

1/13 전체보기

127

455,589

최근댓글

^

1 2 3 4

30줄 보기 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3/95

우리들 육체를 가진 인간이 지구라고 하는 장(場)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우주도, 잘 살펴보면,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물질로써 되어 있다.

빛(光)이라고 하는 입자(粒子)가 가지각색으로 결합 또는 분리함으로써,

공간(空間)이나 고체(固體)를 만들고 있다.

이 사실은, 오늘의 과학이 증명하고 있는 바로서,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 빛의 입자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우연인가.

아니면 무엇인가의 의사(意思)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

라고하는 문제가 되면 과학의 분야에서 아직 미해결이다.

미해결이지만, 자연과학자중에는,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무엇인가의 의사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기로 하고,

이 대자연계는,

그러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의 의사(意思)아래 움직이고 있고,

그 작용은 서로 작용하면서, 공존하도록 짜여져 있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데서 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우리는 공기를 마시고 살고 있는데. 그 산소의 양은 21%이다.

그것이 10%로 줄거나 반대로 50%로 늘거나 하면 살아가지 못한다.

흡수된 21%의 산소(O₂)는,

체내의 여러 기관을 거쳐 체외로 배출되는데, 그 때 이산화탄소(CO₂)로 바뀐다.

자동차의 배기가스도 마찬가지로 이산화탄소와 그 밖의 화합물이다.

공기 중으로 되돌아간 이산화탄소는, 이번에는 식물이 흡수한다.

식물은, 이산화탄소를 영양원(營養源)으로 하여,

태양의 열과 빛의 합성(合成)에 의해서,

전분이나 단백질, 지방, 당분(糖分)등을 만든다.

우리 인간의 피나 살은, 이와 같은 식물에서 얻어진다.

육체보존에 필요한 에너지-원(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과 식물은, 공기를 매체(媒體)로 해서,

이와 같이 상호의존(相互依存)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공기 자체는 인간과 식물 사이를 오감으로써, 공기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순환(循環: 불교에서는 전생윤회 (轉生輪廻)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상호 의존의 관계는, 우리 인간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그러한 관계로서 성립되며, 그러한 관계를 성립시키고 있는 것은

순환이라고 하는 법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러한 순환이라고 하는 것은, 우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공기이건, 식물이건, 물에 있어서도,

몇 천 년, 몇 만 년이 지나도, 줄지도 않고, 붇지도 않으며,

일정량의 질량이 항상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더욱 더 그렇다.

순환의 깊은 곳에 감추어진 누군가의 의사(意思)-

-의지의 움직임을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것이다.

대우주, 대자연계에는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의 의식(意識)-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4/95

-마음이란 것이 있다.

흔히 의식이란 세상사를 인지(認知)하는 힘,

또는 그것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대우주에도, 모든 것의 근본인

<‘ 일할 수 있는 능력인 에너지’> 가 동거하고 있다.

에너지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는 되어도, 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나의 지도령(指導靈)은,

“물질적 차원은 본디 고체적(固體的)인 불안정한 세계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차원이 다른 에너지가 동거하고 있다.

그리고 무기물질(無機物質)의 에너지보다,

유기물질(有機物質)과 동거하고 있는 에너지의 차원이, 훨씬 고차원이다.“

라고 설명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세계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색’이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를 말한다.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色)의 세계,

곧 0.00004센티~0.00007센티의 사이클이, 우리의 시계(視界)의 한계이다.

적외선도, 전파도, 자외선도, χ선 τ선 α선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만물(萬物)은, 온갖 색채로 둘러싸여 있다.

그러므로 물질을 ‘색’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육체도 색이요,

대자연도 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이란, 차원이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일반적으로 우리의 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물질의 에너지가 차원을 달리하여 공존하고 있는 것과 같이,

에너지는,

‘물질의 질량과 빛의 속도의 이승(二乘)의 적(積)이다,

라고 물리적으로는,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원리(特殊相對性原理)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는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대우주라고 하는 물질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고차원(高次元)의 의식마음이야말로, 신(神) 그 자체라는 점이 이해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태양계의 소혹성으로서,

다른 혹성군(惑星群)과

3만 수천 개의 위성이랑 소천체와 함께,

질서를 유지하면서 자전, 공전 하고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5/95

우리는 통상 태양력을 써서, 연령과 시간, 월일을 정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연월일,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태양과 지구, 지구와 달의 자전이나 공전에서 계산해 낸 것이다.

놀라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이 시간의 운행은,

백 년 동안에 천분의 1초밖에 틀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주선은,

겨우 달의 세계까지 도달할 수 있었지만,

태양계의 이러한 신비에 견주어 보면,

그것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 하는 느낌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더욱이 사람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우주의 운행을 볼 때,

우리는 거기에, 상상도 못할 우주의 의식,

물리적 에너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항성(恒星)이나 혹성(惑星)이,

만약 질서 정연하게 운행하고 있지 않는다면, 큰일이 난다.

지구 따위는 어디로날아가 버릴지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것들은 대우주의 의식, 의사(意思:意志)에 따라

조화(調和)하고 있으므로 안전하며,

그 빈틈없는 질서를 볼 때,

우리는 거기에

위대한 신(神)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자비를 베푸는 대자연

우리들은, 위대한 신의 자비(慈悲)에 의해서, 살려지고, 살아 가고 있다.

만물만생(萬物萬生)은 모두가 신의 현현(顯現)이고,

신의 자비아래서 생활하고 있다 하겠다.

이를테면, 우리의 육체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광물 등의 에너지를 흡수함으로써

그 보존이 가능하며,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서 춘하추동의 자연 현상이 일어나고

그래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도, 그 하나라고 하겠다,

태양의 열, 빛의 에너지가, 지구에게 조화된 환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에너지의 대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우리들에게 365일 쉬지 않고, 평등하게 그 은혜를 베풀고 있다.

태양은 인간에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열과 빛을 방사하고 있다.

태양은 신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것, 자체.

자비가 아니고,

사랑이 아니고,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6/95

무엇이겠는가.

인간이 만들어 낸 전력(電力), 가스 연료는,

사용료를 지불하지 않으면, 무자비하게 공급을 중단하고 만다.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고, 돈이 없는 사람은 쓰지 못한다.

신의 마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태양은 지구에게 1초 동안 약 200만 톤의 석탄을 태운 정도의 열에너지를,

365일 쉬지 않고, 공급하고 있다.

세계의 인류에게 균등하게. 태양의 열과 빛의 요금을 부담하도록,

태양이 청구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전 인류는 당장에 파산하고 말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이는 참으로 자비깊은 신의 마음의 표현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인간은, 이 대자비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가 내리면 불평을 한다.

맑은 날씨가 계속되면 계속된다고 불평이다.

즉, 감사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만약 태양의 열이 없어진다면,

지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아, 우리의 생존은 불가능할 것이다.

태양이 없는 세계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또, 지구가 살아 있다고 하는 이유로서,

그 내부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공존하고 있다.

화산, 지진의 현상을 보더라도, 그것은 알 수 있다.

태양의 열에 비교하면, 보잘것없지만, 지열(地熱)이라는 것이 있다.

온천 등은, 그 때문에 있는 은혜라고 하겠다.

우리의 육체도 마찬가지이다.

동식물의 에너지가 흡수되어 위(胃)로 들어가, 소화되어 여러 기관을 거쳐서,

피로 되어 심장으로부터 혈관, 모세혈관을 통하여 오체(五體)의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자연의 짜임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 짜임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자연의 자비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고 있다.

대자연의 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태양을 예배하라,

조상 공양(祖上供養)을 하라'고 하는 설교는,

지금까지 많은 종교가들에 의해서 강조되어 왔으나,

형식이 아니고, 감사의 마음, 그것에 상응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다.

대자연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게 되면,

우리는 혼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게 되며,

마땅히 사회 인류를 위해서 보시(布施)를 하는,

보은의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7/95

스스로 보편적인 신(神)의 자비의 고마움을 깨닫고,

마음과 마음과의 대조화(大調和)에 의한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그런 감사의 염(念)과 보은의 행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3. 자연계에도 마음이 있다.

지구를 포함한 대우주 전체는, 의식(意識) 그 자체이고,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고 하면,

마음이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이란, 마음을 에워싼 기능(機能)이기 때문이다.

대우주는, 신(神)이라고 하는 마음을 중심으로 하여, 회전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태양을 둘러싼 혹성군(惑星群), 위성군, 소천체군(小天體群)은,

태양의 인력아래 있어서, 저마다의 궤도를 규칙적으로 날고 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태양이라고 하는 항성(恒星)이 있어서,

그것들은, 태양의 힘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극미(極微)한 소립자(素粒子)에도 핵(核)이 있고,

그 주위를 핵외전자(核外電子)가 돌고 있다.

만약 그것이 흐트러져 무질서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원자(原子)라고 하는 체(體)마저도 형성되지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물질에는 모두 중심이 있다.

우리들의 의식도 같은 것이다.

대우주의 의식도 중심이 있어서, 마음이라고 하는 의사(意思)--

의지(意志)를 가지고, 우리들의 마음을 또한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마음이 있는 이상,

대우주의 마음은 자비와 사랑의 덩어리라고 말 할 수 있다.

왜 ‘자비와 사랑’이라고 말하느냐면

우리 인간을 비롯한 일체의 생물에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라고 하는 열과 빛,

지구라고 하는 장(場),

공기와 물에 있어서도 그렇지 아니한가.

일반적으로 ‘자비’라고 하면,

동정심, 자애, 긍휼(矜恤)을 뜻한다.

남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고 싶다.

고생을 면하고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은 자기를 버린, 자기를 확대한 넓은 마음,

높은 경지를 의미한다.

인도에서의 석가(釋迦l)는,

이 자비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설법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

이 마음이 있으므로써,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자격과 권능(權能: 깨달음)이 주어지는 것이다, 라고.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8/95

자비의 마음은,선인(善人)에게도, 악인(惡人)에게도 평등하게,

열과 빛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저 태양과 같은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도 ‘자비’와 같이 신의 빛이다.

자비를 우주의 마음(우주즉아)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조화를 목적으로 한 지상의 빛이다.

사랑의 근본도 마음에 있으며,

그 작용은, 서로 돕고 서로 보완하고 서로 용서하는 관용의 마음이다.

사랑은, 무한한 조화를 구(求)하는 것이며,

그것은, 인류애, 사회애, 부성애. 모성애,

그리고 애교심(愛校心), 애사심(愛社心), 자연애(自然愛)등,

 끝없이 넓어져 간다.

인간이 태어 날 때에는,

신의 자식으로서 순백(純白)한 마음을 가지고,

육체를 타고 나온다.

그것은 인생항로에의 출범이며, 곧 출생, 출발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지옥계(地獄界)에서 태어나는 것은 없다.

모두, 전세(前世)의 인생에서 행한 부조화(不調和)한 상념(想念)과 행위는,

모두 전세의 인생에 있어서 저지른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는,

지옥계나 천상계에서 수정(修正)하고 나오는 것이라고,

나의 지도령(指導靈)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몇 %인가의 부조화한 업(業)은 소멸하지 않고,

 육체를 가졌을 때에 나타난다’”

라고 덧붙인다.

아무튼 태어날 때에는, 둥글고 착한 마음을 지니고 나온다고 한다.

태어난 환경,

부모의 교육, 습관,

사회의 사상 등에 따라,

잠재하고 있는 의식의 자아(自我)가 싹터,

그 성격은 선아(善我)와 위아(僞我)를 만들어 내어 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본디 착한 마음으로 이 지상계에 태어나지만,

성장함에 따라,

마음을 어두운 상념의 구름으로 감싸, 죄를 범하고 만다.

그러나 신은 우리에게 반성(反省)이라는 자비(慈悲)를 부여하고 있다.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저 세상(實在界)에서는,

잠재의식이 90% (이 세상의 잠재의식은 10%)나 나오고 있기 때문에,

선악(善惡)의 판단이 이내 가려진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 부조화(不調和)가 있으면,

즉각 육체적으로 빛의 양이 적어지고 말기 때문에,

반성하여 잘못을 수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 현상계에 태어나 버리면,

잠재의식은 10%정도밖에 나타나지 않아서,

준엄한, 맹목적인 인생항로 때문에,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9/95

어떻게 해도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여 잘못을 범하고 만다.

하지만 저지른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

마음으로 반성하여,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고,

보다 광명에 찬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에 의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된다.

용서한다고 하는 사랑의 작용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가는 기쁨을 느끼고,

서로 손을 잡고 서로 도와, 조화에로 높여가는 것에 의해,

지상의 대조화라고 하는 환경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자비를 신불의 종적인 빛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사람의 횡적인 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종횡으로 조화된 자애의 빛이 결합했을 때,

사람은 신을 발견하고,

불성인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 대우주 전체는,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조화되고, 유지되어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자비, 사랑의 덩어리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 세포, 물질에도 생명의 활동이

대 자연계(大自然界)를 지배하고 있는 대의식(大意識)은,

자비와 사랑의 덩어리라고 하는 신불(神佛),

그 자체의 마음이며,

대우주체(大宇宙體)는, 그 마음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자연계는, 그대로 신불(神佛)의 몸(體)이며,

마음도, 아무것도 아닌 단지 물질이라고 보아온,

우리들의 생각은, 틀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불(佛)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부처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인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신(神)의 마음과 표리일체(表裏一體)가 된 마음의 소유자를 일컬어,

'부처'라고 한다.

별명으로 빛의 대지도령(大指導靈)이라고도 말하며

신으로부터 일체의 권한(權限)을 위임받은 책임자라고 하겠다.

지난날의 석가(釋迦)는 부처가 되었다.

그래서 대우주를 관통하는 신의 의사(意思:意志)를 중생(衆生)에게 설법하였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0/95

부처가 왜 신과 동체(同體)인가 하면,

신의 의식인 대우주체로, 그 마음이 확대되어,

거기서 위대한 신의 영위(營爲)를 발견하고,

인간의 마음도, 그 영위를 알고, 대행하여 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또한 그러했다.

예수도 신의 사랑을 몸소 체험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설교했다.

이 지구와, 지구를 둘러싼 저 세상,

실재계(實在界)(주;비물질의 세계, 영혼의 세계)의 인류는,

이와 같은 부처의 지도하(指導下)에서, 나날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지구를 지도하고 있는 대지도령은,

아가샤계(界)의 그룹으로서, 신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고 있다.

이 짜임새에 대해서는 뒤에서 기술하겠으나,

아무튼, 정도(正道)를 깨닫고,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경지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또 한사람의 자기’는,

자꾸 커져서, 대불(大佛)처럼 변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더욱 조화됨에 따라서,

마치 비행기 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자기 자신이 크게 부풀어 간다.

나중에는 지구가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것과 같이 되며,

그 위에 더욱 의식이 조화되면, 대우주 전체에까지 확대되어,

“우주는 곧 자기”

라고 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결국 우주를 움직이고 있는 자는 자기이고,

태양도, 지구도, 화성도, 금성도,

자기 마음의 한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경지에 이른다.

(후광의 모양.-그림참조)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려면은, 오랜 전 생 윤 회 (轉生輪廻).

바꿔 말하면, 인간의 혼은,

이 세상(現象界)과 저 세상(實在界)을 순환하면서,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며,

그 과정에서, 쌓아올린 조화된 마음이,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우주에서 본 지구는, 먼지나 티끌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작은 세포같은 지구일지라도, 의식을 가지고 있다.

석가가 크게 깨달아 우주크기 (宇宙大)로 된 뒤,

다시 작은 오체(五體)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도,

자기의 의식은 변하지 않은 것과 같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의식은 존재하고 있으며,

신의 에너지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태양계(太陽系)는,

대우주의 눈으로 보면, 현미경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로,

극미(極微)한 일점(一點)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는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속하는 은하계에는,

약 천억 개의 항성( 恒星)과, 그것에 딸린 혹성(惑星)이 존재한다.

지구는 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1/95

은하계를 하나의 섬 우주로 보면,

그러한 별들을 끌고 있는 섬 우주, 성운군(星雲群)은, 또한 약 천 억 개에 이른다.

이 엄청난 별들이 소위 대우주를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대우주에서 본 지구라는 것이,

얼마나 작은 세포체(細胞體)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체의 세포는 약 60 조(兆)이며, 각각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원자(原子)의 구조와 같다.

그런데 인간은, 인체인 세포와,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에너지, 의식,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꼭, 대우주의 구성과, 마찬가지의 틀로 짜여 져 있다.

다만 대우주가,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데에 비해서

인간은, 그 대우주를, 지상을,

보다 좋게 조화시키기 위해서 신불(神佛)과 마찬가지로,

그 의사(意思)와 자유(自由)가 부여되어, 사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부여받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불(神佛)의 마음으로 지상에서의 생활을 보낸다면,

지상의 조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의사(意思)와 창조(創造)와 자유(自由)의 전개는, 무한하게 확대되어

인간으로서의 기쁨,

불교에서 말하는 법열(法悅)의 경지를 누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하면,

지구에 낮과 밤이 있는 것과 같이, 암흑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어서

재해(災害), 조사(早死), 천변지이(天變地異) 따위의

사람의 지혜가 미치지 못하는 재앙(災殃)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있는 곳의 모든 환경은,

인간의 의사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악(惡)의 의사(意思)가 작용하면 악(惡)의 결과가,

선(善)의 의사(意思)가 작용하면 선(善)의 결과가,

주어지는 것이다.

대우주는 법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지상의 인간계도, 그 테두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의 의사와 자유성은, 그 대우주의 법을 잘 운용하여

보다 나은 조화를 구현해 가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화를 벗어난 악(惡)의 의사(意思)와 행위가 있으면,

자기 자신의 육체의 부조화를 가져오고,

그 부조화가 집단적(集團的)으로 되면,

인간이 사는 환경은, 인간의 의사(意思)에 맡겨져 있기 때문에,

물질세계에도 부조화를 가져와, 재해(災害)를 불러들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상념은, 사물을 낳고,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신이 하늘과 땅을, 그 의사(意思)와 위대한 능력으로 창조한 것과 같이,

신의 자식인 인간에게도, 그 의사와 창조와 자유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잘못 알아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2/95

대자연의 법칙인 전생윤회(轉生輪廻)라고 하는 순환의 법을,

올바르게 살려 가는 것에 의해서만이,

“기쁨과 자유”

라고 하는 마음의 해방이 있는 것이다.

상념에도 순환의 법이 엄연히 존재하여,

악(惡)에는 악(惡),

선(善)에는 선(善)이 돌아온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대우주에서 본 지구는, 작은 세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세포 자체도, 소우주를 형성하여, 생명과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1 그램의 물질을 에너지로 바꾸면,

1 마력(馬力:746 와트)의 모타를, 약 3,800년 동안 회전 시킬 수 있다.

태양을 부수어 지구를 만든다고 하면, 33만 3천개가 나온다.

이와 같이, 세포, 물질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으며,

우리네 인간은,

그러한 에너지라는, 생명의 큰 바다 가운데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동시에 인간 자체도,

그러한 에너지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음을

인식해 주기 바란다.

5. 법화경(法華經)은 법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다.

지구라고 하는 장(場)이 신의 의식(意識)의 나타남이라고 한다면,

지구!

그 자체는 대신전(大神殿)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은, 도시이건 시골이건 대신전입니다.

그 대신전 속에, 무슨 까닭에서인지,

금은보화(金銀寶貨)를 들여 온갖 신전을 세우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이 점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2,540여 년 전,

붓다는 인도의 쿠시나가라에서, 그 생애를 마쳤다.

예수 그리스도는 1세기에 이스라엘의 골고다 언덕에서, 세상을 떠났다.

석가의 시대나 예수의 생존 당시에,

과연 불각(佛閣)이나 교회란 것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다른 종교에는 우상과 제단(祭壇)이 있었지만,

 석가나 예수는 그런 것은 일체 만들지 않았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그 후세의 사람들이

석가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마음을 기리고자 해서 만들었던 것이, 그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물질과학이 발달하여,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3/95

극미(極微)의 세계, 극대의 우주로 인간의 과학하는 마음이 쏠려 가면

이러한 교회나 불각(佛閣)은, 겉발림 같은 것으로서

관광이나 결혼식장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뻔한 현실인 것 같다.

다만 좋은 점은, 이러한 교회나 불각은, 인간인 이상

인간의 마음의 고향으로서의 효용은 확실히 있는 듯하다.

결혼식이라는 인생의 출발을,

이런 장소를 골라서 하는 것도 그 표현일지 모른다.

또한 일이 잘 되어가고 있을 때는, 그다지 필요하게 느끼지 않지만,

장사가 부진, 후배에게 앞지름을 당하거나,

가정불화, 질병, 불안, 초조 등을 당하게 되면,

절간이나 교회에 가서, 정신적 안식을 구하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무엇인가에 매달리고 싶고, 도움을 구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참선(參禪)이라도 할 기분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될 수만 있다면, 깨달음을 얻어, 세상사의 이치를

이 눈으로,

이 몸으로

알고 싶다고 원하는 사람도 나오지요.

석가는, 처자를 버리고, 왕자의 자리마저 내던지고 출가(出家)했으나,

그 시대는,

전쟁과 빈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무력(武力)과 압정(壓政), 사종(邪宗) 의 횡행(橫行)등,

사람의 도리는 땅에 떨어져, 지배자이외는 동물 이하의 취급을 받던 시대로서,

오늘날과는, 그 배경이 전혀 달랐다.

깨달음을 얻은 뒤,

석가는, 재가(在家)의 중생에게 불교를 전도하여,

함부로, 현실 도피를 위하여 출가하는 일이 없도록 당부하였다.

인간의 목적은, 현실 사회의 조화이다.

생활 속에, 깨달음이 있다.

석가는, 그 길을 많은 중생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출가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 괴로움을 해탈하여,

인류 구제의 목적을 완수하여 간 것이다.

예수 또한 그러하다.

목수의 집에 태어나서, 처음에는 일을 하면서, 사랑을 설교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전도(傳道)외길로 나서서,

그 생애를 던져,

성서(聖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많은 기적을 남기고, 일생을 마쳤다.

이렇게 훑어보면,

사찰이라든지 교회의 존재 의의란 것은,

오늘에서는 그다지 마음에 닿지 않는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

현실로부터의 도피의 장(場)으로 밖에 좋은 용도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석가도 예수도,

이와 같은 전당(殿堂)이나 가람(伽藍)은 만들지 않았으며,

인간의 마음, 사물의 구별, 짜임새를 아는 것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4/95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사실,

사계의 변화, 물의 성질,

인간 사회의 가지가지 경험 속에서 충분히 깨달을 수 있다고 설법했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전당(殿堂)에 막대한 돈을 들여, 위엄을 뽐내게 된것도,

인간.

그 자신의 마음의 존엄성이야말로, 알아야 할 것이며,

또, 그런 돈이 있다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일이다.

대전당(大殿堂)을 만들어 신자를, 맹신시켜 조종하는 것은,

석가도 예수도 하지 않았다.

자연은 항상 바르게 운행하며,

우주도, 극미(極微)의 세계도, 하나로써,

신불(神佛)의 경륜(經綸)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그것은 본디 대우주체는 대신체(大神體)이며, 지구는 대신전(大神殿)이기 때문이다.

일련(日蓮)이 쓴 ‘남묘호오렌게쿄’라고 하는 만다라(曼陀羅)를 가지고,

이것을 신불(神佛)로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도 터무니없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만다라. 그 자체는 한낱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일련종(日蓮宗)의 신자가 나에게

“당신에게는 예배를 드릴 본존(本尊)이 없지 않은가.

우리한테는 만다라(曼陀羅)라는 본존(本尊)이 있는데,

대상물 없이도 기도를 올릴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한 적이 있다.

나는 반대로 질문했다.

“왜 기도할 대상이 필요한가.

 만다라는, 본존이라고 일컫는 일련이 만든 것인가.“

그 신자는 이렇게 대꾸했다.

“일련이야말로, 구원의 부처이니,

 성인이 만든 만다라야말로 본존이다.”

일련은 과연 신인가.

아니다.

일련도, 육체를 가지고, 인간으로서 지상계에서 생활했던 사람일 뿐이다.

그 일련이 태어났을 때, 목에 만다라를 걸고 나왔을까.?

역시 일련도 사람의 아들이다.

신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 주고 있으며,

만다라 따위는, 인간의 머리가 만들어 낸 것이다.

예배할 대상물은,

대우주의 법,

곧 신의 마음과 자기 자신의 마음과의 대화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당신이 태어날 때, 기도를 드릴 대상물로서 만다라를 목에 걸고 나왔다면 믿겠다.”

라고 하니 그 신자는

“만다라를 걸고 태어나지는 않았다.”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인도의 그 당시 고타마 붓다는

무학(無學)문맹(文盲)의 중생에게 방편으로 설법했다.

그 중에서 중생이 알기 쉽도록 설명한 것 중의 하나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5/95

법화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되었다.

-----------------------

“ 모든 중생(衆生),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들이여,

저 늪에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 있다.

어떤 것은 물 위에,

어떤 것은 물속에 피어 있다.

그러나 물 밑은,

진흙으로 더러워져 있을 것이다.

결코 깨끗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모든 중생이여,

비구, 비구니들이여,

그대들의 육체도,

저 연꽃과 같다 할 것이다.

눈을 보라,

피로할 때나, 눈병이 나면, 눈꼽이 나올 것이다.

코딱지, 귀지, 땀, 대소변, 깨끗한 것은 한 가지도 깨끗한 것은 나오지 않는다.

육체는 흡사 진흙의 늪과 같다.

이 진흙의 늪과 같은 육체에 집착을 가지고 괴로움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육체가 진흙탕처럼 더럽더라도,

마음이 “법”을 깨닫고,

그 법에 따라 생활한다면,

저 연꽃처럼 아름답게,

대자연속에서 조화되어

마음속은 평안하여,

신(神)의 마음과 조화되는 것이다.“

---------------------------

이렇게 설법한 것이, 법화경의 근본이 되었다.

이것을, 법화경이라고 해서, 중국류로 철학화된 것을,

2,500년 전의 인도의 중생에게 설법해서 이해되었을까.

아마도 이해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知)가 앞서고, 학문화되어 있어, 생활 속에서 살리기가 어렵다.

도대체 대승(大乘)이니 소승(小乘)이니, 원시불교(原始佛敎)니, 하는 자체가 이상하다.

‘법(法)’이란,

신(神)의 마음이며,

신리(神理)는 지금도 옛날도, 또한 미래에도 변하지 않는다'

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대자연의 법칙,

이것이야말로 불변의 법(法)이다.

대자연은, 또 대신전(大神殿)이고, 신(神)의 신체(身體)이다.

하찮은 것도 믿기 나름이라고 하는데,

신심 신앙이란 그런 것에는 없다.

‘무엇인가에 의지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6/95

‘그 대상을 구한다.’

이것은 인간의 약함이며. 인간의 마음이 물질로밖에 보이지 않고,

우주 전체를 꿰뚫고 있는 영원의 생명,

빛과 그림자를 초월한 곳의 혼의 유구성을, 잊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대지는, 신의 신전이며,

내 마음도 신불(神佛)을 품는, 대신전이기 때문이다.

6. 정글에서 보는 자연의 섭리

( = 마음의 눈으로 보는 정견)

이 지상계는,

인간 이외에도 많은 혼이 수행(修行)하고 있는 곳이다.

말하자면 수행장(修行場)이다.

동물도, 식물도, 이 지상에서 혼(魂)을 닦고 있다.

여기서 잠깐, 동물과 식물의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동물의 종류는, 곤충을 포함해서,

그 수가 몇 천, 몇 만에 달하여, 다종다양(多種多樣)이다.

미발견의 동물(곤충을 포함)도 아직 많이 있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

박테리아를 먹고 있는 벌레,

그 벌레를 먹고 있는 곤충,

다시 그 곤충을 잡아먹는 보다더 큰 동물, 이라고 하는 구조로.

큰 동물은 작은 동물을,

강한 것은 약한 것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 것이 그들의 세계이다.

동물의 세계를 밖에서 바라보면,

거기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지며,

애처로운, 생물의 숙명을 느끼게 한다.

자연에 대해서, 분노(憤怒)마저 느끼게 될 때가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동물의 생태 그 자체는,

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게 되어있어,

 거기에는 모순도 당착(撞着)도 없다.

백수(百獸)의 왕이라고 불리는 사자는 말 그래도,

대적할 상대가 없다.

사자를 눕힐 상대가 없으므로 왕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길 상대가 없으면 지상은 사자로 메워질 것이다.

그런데 사자의 수는 조금도 늘지 않는다.

늘지 않는 이유는, 먹이(다른 동물)의 숫자에 의해 제약되고,

또한 비례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사자의 먹이가 되는 동물의 수도 조금도 줄지 않도록 되어있다.

가령, 사자에게 먹히는 동물의 수가 백 마리 있다고 하면,

그것을 먹는 사자의 수는,

그것에 비례하는 범위 안에서,

그들이 존속을 계속하는 수(數)만이 살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 하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7/95

자연이 그들을 감시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의 습격도 받지 않고 성장한 사자는,

분명 왕자이고 우아하며 특권 계급의 레텔을 붙여도 좋을 것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불공평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굶주림이라고 하는 고통이 주어져 있다.

그들은 먹이를 잡는 일에 몹시 고생한다.

때로는 몇 십 일이나 굶주림과의 싸움을 강요당할 때도 있다.

기진맥진해서야, 겨우 먹이가 얻어걸린다.

이것은 비단 사자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육식동물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그들은 결코 특권계급도 아니요, 우아하지도 않다.

한편, 초식동물(草食動物)은 어떤가 하면,

이들은 풀과 나무가 충분히 주어져 있기 때문에, 굶주릴 걱정은 없다.

따라서, 그냥 놓아두면, 그들의 종족은 자꾸 불어난다.

그러나 초목이 마르면, 그들의 생존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초식동물과 초목과의 조정역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사자를 비롯한 육식동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목은, 무리지어 사는 초식동물의 배설물이 거름이 되어,

초목 자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비근한 예로,

꽃과 꿀벌이랑 나비의 관계이다.

꿀벌이나 나비는, 꽃에 있는 꿀을 찾고,

꽃은 꿀벌이나 나비의 중개로 꽃가루를 얻어,

꽃을 더욱 아름답게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동물과 초목과의 관계란,

서로 도우면서, 자연의 환경을 보존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따로따로 독립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전체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저마다의 입장에서 살려지고, 자기의 몸을 공양(供養)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처참한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강자가 약자를 먹는 꼴을 보이고 있지만,

그 그림의 숨은 배경이란 것은,

전체를 살리는 전체에의 조화이고,

여러 종족이 몸을 내 던지는 것에 의해, 다른 종족이 보존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한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그들은 절대로, 무익한 살생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로부터도 습격받는 것을 모르는 사자도,

일단 먹이를 얻어, 배를 채우고 나면,

절대로 그 이상의 먹이를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눈앞에 먹잇감이 지나가도, 그것을 덮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자연의 섭리’이다.

만약 그들이 재미로, 약자를 마구 죽이는 일을 한다면,

이윽고는 그들 자신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필요한 것밖에 잡지 않는다.

굶주림이 가시면, 그들은 거기서 만족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8/95

족(足)함을 알고 있다.

알고 있다기보다도, 하늘이 부여한 그들의 본능이다.

자연이 그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동물이나 식물의 이 세상에서의 사명이라고 하는 것은,

석유나 석탄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이 지상계의 진보와 조화의 초석이 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이, 이 지상계에 내려와,

이 세상의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서의, 선구자로 된 것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 자신의 혼(魂)의 진화가 촉진되어,

훗날 그들은 누구에게서도 범해지지 않는 혼으로 성장해 갈 것이다.

한 치의 벌레에도 오푼(五分)의 혼(魂)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힘껏 살면서 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 자연계의 모습을, 올바르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

표면에 나타난 모습만으로,

이것을 사회나 인생관에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이상을 가지고, 보다 나은 사회, 보다 조화된 지구국가(地球國家)를 이룩하여,

동식물을 포함한 대자연계의 좋은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神)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사명이다.

만물의 영장이, 동물의 투쟁 본능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

영토 다툼이나 경제 투쟁에 밤낮을 지새워,

피로써 피를 씻는 무익한 싸움에, 생명을 버리고 있다.

그와 같은 인간끼리의 추악한 다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한편 과학의 발달에 의하여,

살충제 따위를 쓰기도 하고,

사과나 복숭아 등의 과일을 인공 수정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화학제가 인체에도 해독을 주게 되었다.

산과 들의 동물들은, 양심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남획되고,

차츰 그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현대의 불행이다.

하천의 공해, 공기의 오염과 같은 자연의 파괴가,

갈수록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하여,

동물 이하의 추한 파괴활동이나,

마음을 잊은 학문적인 인간만을 만들어 내어,

자연의 조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우리들 모두는, 보다 더 힘써, 인간부활을 외치기 시작하여,

대자연과 하나인 것을 알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대자연의 보다 나은 조화 속에서,

다른 동식물과 함께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데,

자연을 해치는 다툼을 계속한다면,

동식물의 생태에도 많은 이상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동물, 식물의 실태를,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9/95

바르게 인식하고,

한층 더 혼의 향상을 지향해 가야 한다.

마음의 원점.- 다카하시 신지7. 윤회(輪廻)를 계속하는 물질계

우리들 인간을 비롯하여 동물, 식물, 광물의 생명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윤회를 계속하고 있다.

윤회란,

이 세상에서 생을 누리던 것이, 다시 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저 세상으로 돌아간 영(靈:意識.魂)은,

다시 이 현상계에 태어나는, 그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 전생윤회(轉生輪廻)의 과정을 통하여, 두 가지 목적이 있다.

그 하나는, 자기 자신의 혼의 조화이고,

다른 하나는, 지상의 낙원(유토피아. 佛國土)을 만드는 것.

그것이다.

이 지구위에 내려온 인류는,

험난한 환경. 즉 공룡(恐龍)이나 다른 동물들에 의해서 황폐된 지상에,

 만생만물(萬生萬物)의 조화를 목적으로 한,

이상향을 세우는 데 힘써 왔다.

처음에는,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험난한 환경 속에서,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해 갔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싸움도 전쟁도 없이, 규율 바른 평화로운 사회였다.

따라서 문명도 발달했다.

마침내 공룡들도 모습을 감추었고,

작은 동물들이 살게 되어, 인간의 벗이 되었다.

개나 고양이를 비롯하여 어류, 조개류, 양서류, 파충류등이 출현했다.

뱀등은 인류의 역사보다도 오래 되어,

그 성격이 간악하여서, 그 생명력과 교활함은,

다른 짐승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어둡고 습기 찬 곳을 좋아하며, 소리도 없이 다가가서는 먹이를 덮친다.

인류의 조상들은 이 뱀에게 심히 괴로움을 당하였다.

신은 뱀을 만들어, 인류에게 경고를 주었던 것이다.

업상념(業想念)에 사로잡혀, 오관육근(五官六根)의 포로가 되면

이윽고 자기 자신이 뱀처럼 된다고 ......

당시의 인류는 저 세상을 알았고,

이 현상계의 목적도 알고 있었으며,

뱀의 존재이유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일깨워가면서, 불국토(佛國土)의 건설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인류는, 자손이 다시 자손을 낳게 되고,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0/95

지상의 생활에 젖어감에 따라, 저 세상을 잊게 되었고,

종족 우선, 자기 보존의 욕망의 상념이 강하게,

그 마음을 지배하도록 되어 가서,

그 때문에 평화로운 지상은,

싸움의 저자거리로 바뀌어 간 것이다.

종족은 영토문제, 경계(境界)문제 등으로

다른 종족과 반목하여 분쟁을 일으켜,

급기야는 힘이 센 자가 전쟁. 약탈로 이겨,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가 생기고,

독재자가 명령을 하도록 되어 갔던 것이다.

지상계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자들 중에는,

인생에서의 목적을 잃어, 부조화한 어두운 상념을, 자신의 마음에 만들어,

지옥계에 떨어져 가는 자가, 많아져 갔다.

지상계를 연(緣)으로 한, 모든 집착심이,

영위기를 흐리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지옥계가 출현해 버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몇 번이나 인류는 마음을 상실하고,

어두운 상념으로 신의 빛을 차단하여, 큰 천변지이를 체험한 것이었다.

대우주체(大宇宙體)의 한 개 세포(=지구)의 부조화가

어두운 영위기(靈圍氣)를 형성하여,

신의 빛을 가로막아 버렸기 때문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버린 지역도 있다.

대지진에 의하여 부조화한 부분이 제거되어 간 것이다.

노아의 방주적 현상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흙 속으로, 혹은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갔다.

러미지아 대륙, 무우 대륙, 아틀란티스 대륙도,

이렇게 하여 바다 밑의 싸늘한 부스러기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과, 마음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인간들이,

많은 빛의 천사(신의 사자)를,

사형(死刑)시킨 것이 원인이었다.

나의 지도령(指導靈),

‘원투우스리’가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이 세상은, 조화하도록 되어있으며

인간의 육체도, 정신도, 신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어져 있으므로,

조화에 어긋나는 행위가 있으면,

그것에 비례하는 반작용의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뿌리지 않은 씨앗은 나지 않는다.

뿌린 씨앗은 거두어들여야 하는 것,

이것은 신의 섭리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불(神佛)의 사자(使者)에 대해서 위해(危害)를 가했을 경우에는,

그 몇 배인가의 시련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1/95

남을 저주하면 무덤이 둘.

(남의 눈에 눈물 내면 내 눈에 피눈물 난다.)

인간의 생각, 염력(念力)이라는 것은,

온 세계에 파문으로 되어 퍼져나가게 되며,

그것에 연관되는 사람들을 해침과 동시에,

그 염파(念波)는 결국은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조화되어, 광명에 싸여 있는 사람들에게는,

부조화한 염파가 보내어져도,

반작용으로 되어, 그것을 발신한 자들에게 되돌아 가버리는 것이다.

원망, 시샘, 미움, 노여움의 상념도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하물며 신의 사자를 해치거나 죽인 경우는,

지구라고 하는 대신전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것이므로,

그 파괴 행위에 가담한 자는, 모두 천벌을 받게 된다.

천벌이란, 하늘을 향해 침을 뱉는 것처럼,

스스로 지은 죄업을 스스로 받는 결과를 말한다.

현대는 물질문명의 세상이다.

사람은 저 세상을 잊고, 한 치 앞은 암흑이라고 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오리무중(五里霧中).

목적도 알지 못한 채, 마라톤 경주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이 현상계에 태어나 버리면,

동시에 저 세상의 기억을 잊어서,

기억하고 있는 의식(意識)은 100% 잠재되어 버린다.

사람은, 태어난 환경, 양친의 교육, 사상 등에 의해서

점점 성장하여 감에 따라,

표면에 나오는 의식이 10% 정도까지는 성장하여 간다.

잠재되어 있는 90%의 의식 속에는,

전생윤회(轉生輪廻)의 일체가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반대로 저 세상, 실재계(實在界)에서는,

(잠재의식의) 90%가 표면의식(表面意識)으로 나오고,

잠재의식(潛在意識)은 10% 정도로 되어 있다.

잠재의식이 줄어드는 것은, 성장인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의 마음의 조화도(調和度)에 따라서

잠재의식이 표면화하는 정도가 늘어나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으로, 타인과 자유롭게 의지가 통할 수 있게 된다.

나의 수호령(守護靈) 포와이 신 포와이 신포오는,

 “혼의 진화에 따라서, 광명(光明)으로 충만해지고,

 잠재되어 있는 의식이, 서서히 표면으로 나온다.”

라고 말한다.

그것은 신의 마음과 조화하는 정도에 따라,

생활하는 환경의 영위기(靈圍氣)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2/95

정묘하게 변해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2 억 년 전에,

 다른 조화된 천체로부터,

 이 지상계를 조화시키기 위해 이동해 왔던 것이다.”

또 다른 지도령인 아가샤는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불국토(佛國土), 낙원이었는데.

 현대인의 과거세도 , 그 체험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은 것이다“

눈먼 인생을 통하여, 우리는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을 하고,

보다 넉넉한 혼을, 스스로의 상념과 행위에 의해서 만들어내고,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하는’

자애에 찬 사회를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전생윤회(轉生輪廻)에서 만들어 왔던 나쁜 성격,

부조화한 업(業)을 수정해야 하는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이, 신의 자식으로서,

이 지상계의 동물, 식물, 광물로 하여금,

지상의 조화에 역할을 다하도록 생활을 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진화론에 대해서 말해보자,

인간은 아메바로부터 생겼다는 설이 있다.

그런가하면,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는 설도 있다.

북경원인(北京原人),

남방 여러 섬에서 발굴 된 두개골을 보고

인간의 진화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아메바설에 대해서 말하면

아메바, 그 자체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아메바를 만드는 데에는 아메바의 원(元)이 있어야 한다.

수소(水素)나 헬륨 등, 100여 종의 원소에 대해서,

그러면 왜 원소는 존재하는가,

하는 점에 이르러서는, 오늘날의 과학은 설명하지 못한다.

오늘의 자연과학은, 하나의 벽에 부딪치고 있다.

그 벽이란 물질의 원(元)인 원자(原子), 소립자(素粒子)에 관한 상태는 설명가능해도,

그 상태를 낳고 있는 근원적인 에너지, 그 자체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양식있는 과학자는, 그 에너지를,

신불(神佛)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자는 빛의 입자로 구성되고,

빛의 입자는 영자(靈子)로 만들어져 있다.

고 하여도. 이것은 아직 객관적으로는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현실적인 입장에서,

영자(靈子)와 그 존재에 대해서 설명해 가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북경원인(北京原人)과

고대인(古代人)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만약 인간이 원숭이의 진화라고 한다면

진화 도상의 유인원이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3/95

그러나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도상의 유인원은, 현재는 없다.

북경원인이나 남방제도(南方諸島) 원시인의 두개골의 대부분은,

인간과는 다른 유인원이다.

인간의 두개골, 골격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이 없다.

백 만 년 전도, 지금도 큰 차이가 없다.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어 있고,

장래는 원숭이의 진화가 아니라는 것이 한층 더 명백하게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진화론이 옳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 앞에 원숭이에서 인간으로 변해 가는 과정의 인간이 있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문명과 문화의 진화의 과정을 들어,

인류에 있어서도 진화의 과정이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보여도 할 수 없다.

그러면, 지금으로부터 4,000여 년 전의 이집트의 문명이나,

잉카의 문명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잉카의 경우,

고양이과 동물을 모티브로 한 상(像)이나,

힘 찬 토기, 금, 은, 동 등의 장신구,

웅대한 석조 신전, 대규모의 관개공사, 계단식 밭의 조성,

이같은 기술과 경제의 발전은 지방적이기는 하나

오늘날에도 충분히 통용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에도, 그 신비가 풀리지 않는 1,300미터에 걸친 사크사와 만의 방벽,

접착제를 쓰지 않고, 거대한 돌을 쌓아 올린 석축(石築)은 지금도 끄떡없다.

돌과 돌의 접착부분은, 얇은 면도칼의 칼날조차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밀착돼 있어서

몇 천 년이 지난 오늘날도, 끄떡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의 기술이 얼마나 진보해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이집트의 문명을 보더라도 그러하다.

특히 회화(繪畵)에 있어서는, 일상생활의 모든 정경이 살아 있는 듯 그려져,

몇 천 년의 세월의 흐름도 잊게 할 만큼 신선한 매력에 차 있다.

당시의 이집트 사람은, 정신적으로 매우 뛰어났다고도 말 할 수 있다.

첫째로 인간에게는 내세가 있으며,

그래서 다시 현세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저 거대한 피라밋은,

인간이 죽었다가 현세로 다시 태어났을 때,

그것을 사용해서, 이집트 문명을 보다 번영시키기 위해,

필요한 재보(財寶), 자료를 보관하려고 만든 것이다.

4,000년 이상이나 지난 기제의 쿠프왕의 피라밋은,

밑변의 한 변이 230미터, 높이가 146.5미터나 된다.

석회석의 무게는 평균 2.5톤, 개수로는 230만개에 이른다.

2.5톤이나 되는 절석(切石)을, 100미터 넘는 높이까지 운반해 올린 방법은,

지금도 불명이라고 말하여진 정도로.

당시의 기술이 얼마나 진보해 있었는지 알만한 일이다.

쿠프왕의 피라밋은 일설로는,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4/95

20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35년이 걸렸다고 한다.

석회석은 주로, 지중해 연안, 그것도 유럽대륙에서 실어온 것도 상당수 있었던 것 같다.

그 정도로 당시는 해양기술(海洋技術)도 발달해 있었고,

건축, 토목, 회화, 조각에 있어서도, 잉카문화와 더불어 발달해 있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인류의 역사는,

옛되다거나 새롭다는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

하물며 현대인의 생활을 보고,

과거의 인류는 원숭이나 아메바였다고 하는 진화론은,

성급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이라는 것은,

과거세, 현세, 내세의 삼세에 걸쳐,

영구히 불변인 것이다.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원운동을 하는 것도,

인간이 이 세상을 마치면, 저 세상의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두가 생명의 흐름,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지는 죽음을 의미하는데,

죽음은 생명체에는 주어져 있지 않다.

우주가 영원한 활동을 정지하지 않는 것과 같이,

인간의 생명 에너지도 정지함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은 동물, 식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다만 인간과 다른 점은,

그들은 선택의 자유, 창조의 자유를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인간만큼 고락을 느끼지 못한다.

그만큼 진보도 늦는 것이다.

8. 천국(天國)과 지옥(地獄)

인간의 혼(魂)에는 삼세가 있다.

과거세, 현세 그리고 내세,

현재 이 지상에 자기가 있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반드시 과거세가 있었음이다.

인간은 우연하게 양친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다.

과거세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있는 현상계에서 말한다면,

저 세상이고

또한 그 이전에 자기가 지상에서 생활했던 전세(前世)를 말한다,

우리는 고락의 인생을 공부하고 있는데, 현세에 태어나기 전에는,

실재계(實在界). 곧 천상계에서 살았었다.

우리는 실재계와 현상계를 윤회하는 것이다.

전세에서, 어두운 상념을 지니고 지옥계로 갔다가,

거기서 혼을 닦고 정화시켜, 천상계로 진화했던 자도 있을 것이다.

지옥계로 떨어진 자도, 죽기 전에는, 인생항로의 목적을 완수하지 못했으나,

이 지상계에서의 생활이 있었던 것이다.

마음의 조화를 이룬 사람은, 자애의 빛으로 충만하여져 있기 때문에,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5/95

그 사람의 마음의 조화도에 비례하여 천상계로 돌아간다.

과거세에서 체험한 여러 가지 지식은, 누구든지 기억하고 있지만,

이 현상계에 나와 버리면, 그것이 잠재하고 만다.

우리는 신의 자녀라고 하는 자각을 잊고 만다.

육체주의 오관이 절대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과거세의 일을 기억해 내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체험해 온, 지나간 저 세상과 이 세상이, 과거세라고 불리우는 세계인데,

이것은 전생윤회하고 있으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테이프 레코드나 비디오 레코드처럼,

인간의 혼(魂)-곧 의식 속에는,

과거세의 체험이 엄연히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이 현상계는, 가장 고체적(固體的)인, 불안정한 세계로서

거기 사는 사람들의 영위기(靈圍氣)의 상태에 따라서 변화한다.

악(惡)은 부조화한 영위기를 만들어 내고,

선(善)은 정묘한 조화된 영위기를 만들어 낸다.

왜 그런가 하면, 이 현상계는, 신의 자녀인 만물의 영장 인류가,

조화된 지구를 완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의 의지에 의해서, 육체를 가지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사명과 목적을 잊고 말았기 때문에,

부조화한 비방, 노여움, 질투, 원한, 욕망, 투쟁과 파괴의 잘못을 만들어 내 버린다.

이것을 우리는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현상계에 나왔던 조상들 중에는,

지옥계로 떨어져 수행하고 있는 자도 많다.

그들은, 지구상에 놓고 온 것에의 집착심이 강한 자들인데,

그 때문에 지옥령이 되거나, 빙의령으로서,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상의 인간 중에 빙의하여, 현상계에도 혼란한 세상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마음의 바늘은,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어두운 지옥계에도, 광명으로 가득 찬 천상계에도 자유롭게 통한다.

생각하는 것 자체.

‘중도를 근본으로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 이유에서다.

그것은 10%의 표면의식으로서, 오관을 통해서 판단하기 때문에,

차원이 다른 세계를 아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계는,

물질과 생명이 불이일체(不二一體)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물질적 현상계는,

열, 빛, 전자력, 중력의 에너지 입자가 집중된 질량과,

분산된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는 에너지의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6/95

실재계,

 즉 천상계에는, 의식이 90%나 표면에 나와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도,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100%)해득되어 버린다.

그런 만큼 실재계에 있어서는,

‘수행’이라고 하는 목적을 완성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육체주(肉體舟)를 타고 나면,

의식이 장님과도 같아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자기의 마음속을 알리는 것이 조금도 없어,

자기 자신만의 마음세계에서, 올바르게 판단하여 행동을 해야한다.

따라서 우리들의 혼의 수행 장소로서는,

실재계에 비해서

이 현상계가 훨씬 더 적합하다 하겠다.

차원이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통신을,

그 사람의 마음의 조화도(調和度)에 따라서는 수신할 수도 있으나,

보통은 매우 어렵다.

그것은 이 현상계라고 하는 3차원의 장(場)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거울이나 스크린 속의 사람에게, 우리들이 통신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2차원의 세계이므로, 3차원의 현상계에서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역으로, 4차원의 세계에서 이 현상계를 보는 것은 쉽게 되지만,

현상계에서 직접 통신하는 것은, 3차원의 영위기가 정묘하게 되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 할 수 있다.

영화 스크린 속의 인물과 대화하는 길은,

필름이나 토오키에 취입하는 방법이외에는 불가능하다.

저 세상과 이 세상과는, 이와 같이 먼 곳이기도 하고,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의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행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현상계에는,

우리의 육체주(肉體舟)를 보존할 수 있는, 환경의 일체가 주어져 있다.

이야말로 신의 마음, 곧 자비와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지금의 환경에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며,

이 감사의 마음을,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로서 보답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다.

결국 인류를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생활이 가능하다면, 족(足)함을 알고,

남는 여분은, 사람들을 위하여,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로서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혼의 향상은, 마음의 평안이며,

객관적으로는, 집착이 적은 정신 상태이다.

마음의 평안은 조화이고, 조화의 정도가 높아짐에 따라,

이 지상은, 평화로운 유토피아로, 정묘화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7/95

저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해보면,

저 세상, 곧 내세(來世)란,

어차피 우리가 육체주(肉體舟)를 버리고, 광자체(光子體)로 되어 돌아가는 세계이다.

우리의 지금의 육체주는, 부모의 연(緣)에 의해서 주어진 원자세포의 육체이다.

그리고 이 원자세포로 된 육체주를, 감싸듯이 광자체가 있고,

광자체에 우리의 의식, 즉 혼이 있어서,

육체주를 지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원자체(原子體),

광자체(光子體),

영자체(靈子體;혼의 중심인 마음)의

삼체(三體)가 하나로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생명체인 것이다.

원자체와 광자체, 영자체는, 영자선(靈子線)이라고 하는 선으로써 이어져 있다.

죽음은, 원자체와의 결별인데, 영자선이 끊어져 버렸을 때이고.

영자체는, 광자체라고 하는 배를 타고

차원이 다른 저 세상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광자체나 영자체는,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으나

마음이 조화된 사람들의 심안에 의하면, 보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고,

반성하는 일도 아주 어려운 것이다.

천국에서의 생활은,

이세상의 생활에 비해서 기쁨에 찬 것이고, 반성의 정도가 빠르다.

악(惡)의 부조화한 상념에, 자기의 마음을 더럽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지면, 의식의 파동이 어두워,

상념은 사물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즉시,

악의 부조화한 상념이 자기자신에게 되돌아온다.

그곳은, 좀체로 반성할 겨를도 없는 세계이며

스스로의 마음이, 신의 빛을 가로막고 있다.

만약 거기에 떨어지면 몇 백 년이고 같은 장소에서,

고통을 겪고 신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상에서의 생활을, 어떤 사람이,

자아아욕, 그대로 인생을 마쳤다고 하자.

그 사람은, 틀림없이 지옥계로 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연속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 사람이 지상에서의 생활을 욕심대로 살다가 마치면,

그 의식을 가진 그대로, 저 세상에서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육체의 배를 타고 있는 동안에는,

좀체로 마음가짐을 알 수 없지만,

육체의 배에서 떠나면,

의식의 파동은 민감하게 되기 때문에,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8/95

생각하는 바가 즉시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기에 살아 있을 때보다, 그 반성은 훨씬 더 어렵고 준엄하다.

그것은 지구의 구름이 태양의 빛을 가리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가짐이 부조화하면

어둠으로 덮히어, 괴로움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스스로의 상념과 행위가 괴로움을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중도에 의해서 반성하고,

두 번 다시 같은 원인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 결과,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할 때, 우리의 마음의 어두움은 맑아지고,

광명으로 충만하여져 천상계로 가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마음의 조화도(調和度)에 따라,

광자량(光子量)

즉, 빛의 양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양에 따라서, 단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요컨대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그와 같은 단계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신(神)이, 자애의 빛을 평등하게 내리고 있어도,

사람들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빛의 상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신과 표리일체(表裏一體)인 제령(諸靈)은,

마음이 조화되고,

족(足)함을 알며,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떠나서

우주는 자기 자신이라고 깨닫고 있기 때문에, 빛의 양이 많다.

광명에 가득 차 있다고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면,

불타,

혹은 여래,

즉, 빛의 대지도령(大指導靈)들인 것이다.

이 대지도령들은,

저 세상과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선도(善導)하여,

신(神)의 자녀로서의 길을 가르치고 보여주고 있는 천사들이다.

고타마 붓다, 예수, 모세등은, 이 빛의 대지도령,

즉 여래이다.

신(神)으로부터 일체를 위임받고 있는 천사들이다.

빛의 단계를 구분하면,

유계(幽界),

영계(靈界),

신계(神界),

보살계(菩薩界),

여래계(如來界),

우주계(宇宙界)로

의식층이 되어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9/95

이 실험은, 우리가 지옥에 떨어져 있는 영(靈)들에게,

우리의 육체를 지배시키면,

 매우 무거워지고, 육체의 결함이 나타난다.

빛의 단계가 위로 가면,

 매우 가벼워지는 현상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마음을 조화하여, 대지도령이 지배하면

 육체가 매우 편안해진다.

우리 그룹의 사람들의 실험결과가,

모두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심안(心眼)으로 보면,

마음이 조화되어 있는 사람한테는, 반드시 후광이 뚜렷하게 보인다.

불상(佛像)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상(像)등을 보면,

반드시 후광이 나오고 있다.

대지도령들의 빛은, 특별히 크기 때문에 곧 알 수 있다.

때로는 동물령(動物靈)이,

보살이나 여래의 모습으로 둔갑하여 나타나는 일이 있지만,

그들은 극히 짧은 동안밖에 둔갑할 수 없으며,

후광의 빛이 흐려 있으므로 쉽게 그 정체가 드러난다.

같은 황금색이라도,

평온함이 없는 푸른빛이기 때문에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옥계는, 지상계에 집착을 가지고 있는 자들의 세계이기 때문에,

지상과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토지나, 집, 묘지나 절간 따위에 대한 집착심이 강하며

그러한 마음을 가진 영(靈)들이, 그 장소를 거처로 삼고, 지옥계를 전개하고 있는데,

이런 영(靈)들을 자박령(自縛靈)이라고 한다.

지옥에도 단계가 있다.

반드시 마왕이나 아슈라, 라잔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지옥계는,

이 지상계와는 전혀 다른, 혹독한 세계로서, 모든 것이 어두컴컴하며,

극한(極寒)의 세계, 혹은 화염에 휩싸인 세계도 있다.

나는 선정에 든 채,

의식이 육체를 빠져나가서 지옥계로 가보는 일이 가끔 있다.

그 곳은 지상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음침한 곳이다.

어둡기 때문에 푸른색도 검게 물들고,

햇볓이 쬐지 않는, 언제나 습기가 차 있는 곳이다.

내가 그곳에 가서, 그 곳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의 일이다.

살고 있는 사람들도,

도저히 바로 볼 수 없는, 귀신같은 얼굴들이다.

입이 찢어진 잔혹한 몰골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다.

그 세계에는 자비도 사랑도 없고,

마왕의 절대적 지배하에 놓여 있다.

나에 대해서는, 어떤 자는 ‘너의 팔을 내놓아라.’ 하고,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0/95

또 어떤 자는 ‘네 엉덩이 살점을 내 놓아라,’하면서 험악한 얼굴로 협박했다.

나는 반항하지 않고,

‘자,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라.’하고 몸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들의 얼굴은 보통 사람의 얼굴로 변해 버렸다.

어떤 마왕이라도, 자비와 사랑에는 반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그 곳에서, 약 두 시간 남짓,

신리(神理)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왔다.

돌아오는 길은, 골짜기 밑의 마을에서 올라옴에 따라,

검은 색이 차츰 엷어지고

천상계에서는, 아름다운 새싹이 눈 떠서

마치 이야기라도 걸어 올 듯, 상쾌함과 따뜻함이 깃든다.

9. 빛의 천사. 제천선신

우리 인류는, 신의 신체의 일부분인 지구라고 하는 환경에서,

 육체라는 배를 타고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지구 위의 만생만물을 지배하여,

대조화에의 길을 열어가는 사명을, 신으로부터 위임받고 있다.

빛의 대지도령과 천사들은, 인간을 위시한 만생만물에 대하여

자비와 사랑의 덩어리같은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

육체라는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큰 잘못을 범한 생활을 보고 있기도 하고,

투쟁과 파괴의 부조화한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을, 눈물을 흘리면서 보고 있다.

흡사 스크린에 비치고 있는 비참한 전쟁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같다.

마음있는 사람들의 영위기가 조화되어 있을 때는,

빛으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빛의 천사들이 영감적으로, 또는 현상적으로 협력할 수 있지만,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들에게 비례한 부조화한 영위기가 있기 때문에,

 천사들이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사람들의 의식의 차원이 흐려져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는 것이다.

그것도 모두 인간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 낸 현상이며

그 마음의 왕국의 지배자는, 자기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온갖 체험을 통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부조화한 혼란 속에서, 깨달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신의 자식으로서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 빠르냐 늦느냐 하는 문제일 뿐이다.

늦다는 것은,

큰 괴로움의 짐을 지고, 헐떡이면서 인생을 건너 간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과거세와 현세에서, 스스로 만들어 낸 상념과 행위가 집약된 것이,

현재의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1/95

실재계(實在界)의 빛의 천사들은, 항상 이러한 우리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지상계에 경찰이나 군대처럼,

 시민 대중을 다른 범죄나 폭력으로부터 지켜주는 직업이 있는 것처럼,

실재계에도 그와 같은 일에 종사하고 있는 천사들이 있다.

또한 빛의 천사들 중에는, 실재계와 현상계의 사람들이,

조화된 둥근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부조화한 지옥령이나 동물령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는 직책을 가진 천사들도 있다.

이들을 제천선신(諸天善神)이라고도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변재천(辯財天), 또는 대흑천(大黑天)이라고 하면,

무언가 돈벌이에 도움을 주는 선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잘못이다.

그들은 결코 돈벌이의 협력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변재천(辯財天)이란,

마음속에 매몰되어 있는,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만들어 내었던,

우리들의 지혜의 보고(寶庫)를 열기 위한 협력자이다.

대흑천은,

육체를 가진 빛의 천사들이, 정법(正法)을 유포(流布)할 때의 협력자이다.

경제적인 원조나 환경을 제공하는 제천(諸天)인 것이다.

그것을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우상화해 버려서,

그것에 빌면, 재물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유감스럽게도, 돈벌이와는 전혀 인연이 먼 제천선신인 것이다.

그리고 이나리대명신이라든가 용신, 용왕과 같은 선신(善神)도 있다.

그들은 동물령(動物靈)들에게,

신의 자식으로서의 길을 가르치는 직책을 맡은 천사들이다.

특히 여우 따위는, 영적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부조화로 이끌어가는 것이 많은데,

맹목적인 인간은, 이것을 이나리대명신으로서 제사지내고 있는 것이다.

여우는, 이나리대명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용왕(龍王)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이 지상계로부터 마음의 풍부함을 수행하도록,

동물들에게 정법을 가르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가장 엄격한 수행소(修行所)이고 학습이라고도 하겠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감정의 기성(氣性)이 강하고, 본능적이므로 지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용왕, 이나리 대명신이라고 불리는 제천(諸天)은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菩薩),

즉 윗단계의 빛의 지도령이 되기 위한 수행과정이다.

그러나 실패할 위험성이 많은 환경이기도 하다.

제천선신(諸天善神)들도, 뱀이나 여우들을 지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수행이어서,

이 현상계에서 말하면, 약 300년 동안이나

엄격한 환경에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2/95

세상에서는, 용신(龍神)이라든가 이나리 대명신이라고 하면,

여우나 뱀이나 용 따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그들 동물령들은, 장님과 다를 바 없는 육체인간을 회롱하기도 하고,

또한 그들도 인간이 되고 싶은 마음에서, 여러 가지 현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아아욕(自我我慾)에 빠져, 길을 잃고 마는 경우가 매우 많다.

어느 날 나를 찾아 온 중년 부인이,

“선생님. 저의 수호령(守護靈)은,

 흑룡(黑龍)이라고 다른데서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호령을 만나 뵙고 싶습니다만,,,”

라고 말했다. 나는 즉석에서,

 “당신은, 들이나 동물원에 있는 뱀등을 좋아 합니까.”

라고 되물었다. 그랬더니 부인은

 “무섭기도 하고 기분이 나쁩니다. 딱 질색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무릇, 뱀이나 용 따위가,

우리 인간의 수호령이 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용이나 뱀등이, 정법을 잘 터득하여 용왕들의 일을 도우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용신도 용왕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사가 번창할 것을 목적으로,

 흔히 여우 따위를 섬기고 있는 가정이나 점포가 있는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섬기고 비는 것은, 매우 위험한 노릇이다.

왜냐하면 여우나 용이나 뱀들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도 있지만,

그보다 먼저 그 가정을 혼란에 빠뜨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들을 볼 수 있고, 그들과 말할 수 있으며,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욕심을 위해서 그들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기도하여 장사가 번창하더라도, 인간은 이내

그들에게 사례하는 것도 공양을 바치는 것도 잊고 만다.

그래서 여우나 뱀의 불만을 사서,

 병자가 생기거나 장사가 기울거나 하고 만다.

태양은, 만생만물(萬生萬物)에게 아무리 많은 열과 빛을 주더라도,

결코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일이 없다.

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와 같은 동물령들과는 다르다,

동물령들의 대다수는,

자애가 없고, 욕망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나,

지도자의 인격을, 주의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여움, 시기, 비방, 아욕(我慾), 정욕(情慾)따위를 품고,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3/95

우리는 욕망을 채우려고 하다가,

도리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지상계에는 온갖 동물들이 있다.

저 세상에도, 혼을 향상시키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동물부터,

지옥계에서 본능 그대로,

 가혹한 환경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물들이 많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이 지상계에서 욕망에 눈먼 사람들의 마음속을,

혼란시키고 있는 동물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천선신(諸天善神)이라고 해도,

부조화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집을 마련하고 있는 부조화한 동물령이나 지옥령,

교만한 마왕이나 아수라들을 다스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의 마음의 왕국의 지배자이며,

스스로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를 수정하지 않는 한,

자애의 광명에 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제천선신(諸天善神)이, 부조화한 영(靈)들을 지배한다해도,

마음나쁜 사람들은, 저절로 괴로운 부조화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만다,

제천선신의 지배는, 일시적 청량제(淸涼劑)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결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못한다.

부조화한 지옥령에 지배되어 버리면,

사람은 마음의 안정을 잃고,

항상 불안의 연속이며,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만다.

육체배는, 원래 한 사람의 선장(意識.魂)이 지배하고 있는 것인데,

그 인간의 마음이 부조화하면, 지옥령에게 지배되어,

선장은, 두 사람도, 세 사람도 되고 마는 것이다.

지옥령들이, 귓전에서 속삭이기도 하고, 마음속에서 말을 걸어오기 때문에,

자기이면서도 자기가 아닌 것과 같은 상태에 빠진다.

다시 말해서 정신분열증처럼 되고 만다는 것이다.

조울(躁鬱)이라는,

중도(中道)의 마음을 잃은 양극단의 마음의 상태가 되어,

스스로의 인격을 상실하고 만다.

조병(躁病)의 경우는,

개방적이 되고, 완전히 지옥령에게 지배되어,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이미 영위기(靈圍氣)는 헝클어져, 불면의 상태가 계속되고,

환각을 일으키거나, 지리멸렬의 걷잡을 수 없는 언동을 하게 된다.

평소의 울분을 터뜨리듯, 마음속에 있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만다.

이러한 사람들의 일상은,

우울한 생활이며, 마음속에는 원한이나 질투, 비방하는 마음이 강하다.

겉으로는 얌전하게 보여도,

허영심과 자존심은 보통이상으로 강한 자들이다.

그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으며,

감정의 기복이 매우 심하고, 대단히 극단적이 되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4/95

 마음의 안정을 잃고 있다.

울병(鬱病)의 경우도,

본인을 지배하고 있는 지옥령의 성격이 그렇게 시킨다.

이것은 과보호의 교육, 방임 교육. 그리고 부모의 마음의 부조화가 원인이다.

어버이와 자식의 대화가,

거의 없는 가정에, 이러한 마음이 비뚤어진 자녀들이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어두운 상념에 뒤덮여, 이미 신의 빛을 받을 수 없고,

스스로의 마음을 지옥령에게 팔아버린 자들이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용기와 노력으로,

스스로의 성격을 중도로 되돌아오게 하는 수밖에 없다.

어두운 상념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제천선신(諸天善神)은 지켜주지 못한다.

그것은 이 지구가 수도장임과 동시에,

인간에게는 개(個=각각)의 생명으로서의 존엄이 있기 때문이다.

가정생활을 하는 인간이, 마음의 가치를 알고,

서로의 신뢰와 자애의 행위에 의해,

밝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빙의(憑依)하고 있는 지옥령들에게,

이 이상, 신의 자식으로서 범해서는 안 되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죄임을 가르쳐,

떨어져 나가게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항시, 빙의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지옥령들에게, 마음가짐을 가르쳐주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중도의 생활이, 일상 속에서 행위로 되어 나타날 때,

자기 자신을 원위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

부조화한 신앙 따위에 깊이 빠져들면,

점점 그들 지옥령들의, 무자비한 행위가 더욱 기세를 부린다.

이야말로

‘긁어 부스럼 일으킨다.’

라는 속담 그대로이다.

자신의 마음이 둥글고, 크고, 자비에 찬 사람들은,

절대로 이와 같은 정신적인 병으로 되지 않는다.

이 경우는,

마음속에서 생기는 마(魔)를, 제천선신(諸天善神)이 지켜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지상계에서 육체를 가지고 있는 빛의 천사들은,

변함이 없는 신의 마음인 길(正道),

즉 정법의 씨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심어,

정법의 꽃을 피우게 하여, 대조화에의 길에 광명을 준다.

그러나 인도의 고타마 붓다나 예수 그리스도, 모세도,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은, 무척 험난한 것이었다.

빛의 대지도령들이 지상에 내려오는 시기는,

이미 정법의 힘이 없는, 말법(末法)의 혼란기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5/95

사람들은 마음을 잃고,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을 잊어버렸을 때이다.

스스로의 마음을 물질문명의 노예로 타락시키고,

부조화한 종교가 난립하며,

마음을 마왕이나 동물령에게 팔아넘긴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이다.

투쟁이나 파괴가 일상의 다반사로 되어버린 세상을, 말법의 시대라고 한다.

세계의 여러 나라에, 재해나 천변지이(天變地異)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가정은 헝클어져, 어버이와 자식의 마음이 단절된다.

교육자는 중도의 교육을 잊고, 사상적으로 편협된 교육을 한다.

정치가는 사리사욕, 당리당략에 내달으며,

사상이라기보다는 자기주장의 난립, 거리에서의 사고사(事故死) .......등등

열거한다면, 끝도 없는 부조화한 세상이다.

이것을 구하는 길은 ....

정치가도, 법률가도, 교육자도, 문화인도, 종교가도,

모두가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인 판단을 기본으로 하는 길밖에 없다 하겠다.

남을 돌보지 아니하고,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이기주의자로서, 스스로 조화에의 길을 폐쇄하여 고독한 인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애를 남에게 주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애의 표현에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사회와 인류의 행복에 연결되는 행위를 하는 것이,

참된 보시(布施)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노동 봉사, 경제적 봉사. 정신적 봉사 의 행동이,

보다 나은 사회를 이룩해 간다.

그것이 사람마다의 자발적인 행위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 행위는,

강제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온 빛의 대지도령들도,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양친을 선택하고 가장 깨닫기 쉬운 환경을 가려 태어나는 것이다.

예수도, 모세도, 고타마 싯달다도

대지도령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서,

아가샤계 그룹의 빛의 대지도령들이다.

고타마 붓다는 자비의 마음을 45년간이나, 당시의 인도의 중생에게 설법했다.

그리고 불국토를 짓는 목적을 갖고,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설법했다.

당시의 바라문교의 화석화한 베다나, 우파니샤드,

그것들의 먼지를 털고,

올바른 법의 빛으로 많은 중생의 마음에

인생의 살아가는 기쁨을 설(設)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환경을 정하여,

이스라엘에 육체를 지니고 태어났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6/95

그래서 로마의 지배 하에서 신음하고 있는 대중, 화석화된 유태교,

사람들의 지(知)와 의(意)의 먼지에 싸인-- 모세의 올바른 법의 마음가짐을,

사랑이라고 하는 표현으로써 수정해 나갔던 것이다.

스스로의 육체는, 악마들에 의해서 멸망했지만,

부활의 현상으로서 제자들의 결속을 다지고, 정법의 토대를 쌓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계에 신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타난 빛의 대지도령들은,

몸소 인생의 의문에 부딪치면서,

‘이것으로 좋은 것인가’ 하며,

그 해명을 스스로 하고

실재계의 빛의 천사들의 협력을 얻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해 갔던 것이다.

그 신리는 불변의 것으로서,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정법도,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그의 제자들이나 학자들에 의해서,

학문적으로 어렵게 되어,

개인의 견해로 변해져 버리고 만 화석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한 그 역사 속에서 권력자나 지도자들이,

 대중을 지배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종교를 이용한다.

그러는 사이에 정법이 왜곡되어 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화석화된 "법(法)"의 수정을 위한,

사명을 띤 지도령들이 태어나는데,

구태를 고집하는 광신자나 맹신자들의 박해를 받고,

학자나 권력자들의 저해(沮害)를 당하여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또 여러 단계의 빛의 천사들도, 역시 육체를 갖고 태어나지만,

역시 종래의 종교적 환경 속에서,

정도로 돌려놓지 못한 채

실재계로 돌아가고 마는 예도 많다.

스스로 신을 자칭하여 예배하게 하고,

중생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마저 집착의 화신(化身)이 되고 말아서,

지옥계로 떨어지고 만 자도 적지 않다.

말법의 세상이 되면 될수록,

혼란된 부조화한 종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아,

교조라고 자칭하는 무리가 만들어 낸 종이에 배례를 올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표찰 대신에 목에 거는 펜던트까지 나돌아,

신의 대명사로서 비싼 값에 팔리고 있는 예도 있다.

교조(敎祖)라든가 그를 둘러싼 무리들은,

대신전(大神殿)인 이 지구상에, 옥상옥(屋上屋)을 쌓아,

정재(淨財)라고 칭하는 부정(不淨)한 돈을 모아서는

우아한 예술적인 건물을 지어,

소원을 빌 대상물을 만들어 놓고,

맹신자, 광신자들을 헤매게 하고 있다.

또한 몇 사람을 신자로 끌어들이면 구원받는다든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7/95

몇 사람을 인도해 오면 병이 낫는다든가 하면서, 협박하고 있다.

그리고 대신전, 대불전이라고 칭하는 건물을, 잇달아 지어가고 있다.

욕망에 끝을 모르는, 맹신자, 광신도들이야말로 구원 받지 못한다.

오직 한 마음으로 염불을 외우면 구원받는다고,

아침 저녁 근행(勤行)을 시키는 것은,

종교도 땅에 떨어진 것이다.

 “가난은 전세의 인연에 의한 것이다.

 이 종교에 귀의하여, 신에게 빌면 그 업(業)이 소멸된다.”

라고 신앙을 강매 한다.

그러나 가난하더라도, 마음까지 가난해지지 않는다면,

인간은 본래가 넉넉한 것이다.

태어 날 때에는,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모두 발가숭이일 뿐이다.

만다라를 목에 걸고 태어났을 리도 없다.

그러나 모두가, 인간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태양의 열과 빛, 대자연의 혜택의 일체가,

신의 대자비이고,

그것이 또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의 모습이 아닌가.

인간도, 그러한 그릇된 지도자들로부터,

속임을 당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신의 자식이다.

일체의 괴로움은,

우리들 자신의 마음가짐과 행위로써, 수정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인간은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정법은,

인간의 지혜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불변의 신리(神理)이다.

힘 안 들이고 구원받는 길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용기와 지혜와 노력에 의해,

자신의 결점을 수정하여 괴로움의 원인을 없앴을 때,

신으로부터의 조화된 광명에 의해, 구원되어 가는 것이다.

길은 오직 하나,

신의 마음을 지향하여

일상생활 속에서 평안한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신은 벌 따위는 주지 않는다.

벌은 자신의 마음가짐과 행위가,

 중도의 정법을 벗어 날때부터 마음에 구름을 만들어 내어,

 그것이 신의 빛을 차단했을 때,

 현상화되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8/95

즉, 벌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고 있다는 말이다.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지 않도록 하면 된다.

불교에서도, 그리스도교에서도, 본래의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가짐을 설(說)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전생윤회(轉生輪廻)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속에는,

일체의 인생에 대한 위대한 지도서(指導書)가 기억되어 있다'는것을 알아랴 한다.

이 체험된 지도서를 펴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정법은, 그 방법도 가르치고 있다.

예수도 고타마붓다도 마찬가지이다.

철학화된 불전(佛典)만이 정법이 아니라,

불전(佛典)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하고 행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것이니까.

이 세상에 육체를 지니고 있는 빛의 대지도령들도,

이와 같은 불변의 신리(神理)를 설법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바로 원시불교나 원시그리스도교가,

 완전히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원시불교이건, 원시그리스도교이건,

그것이 신리라면,

 현대에서도 통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인도의 강가강의 흐름이,

옛날도 지금도 변하지 않듯이,

신리는 불변인 것이다.

변했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아닐까.

정법은,

그 시대의 양상에 맞춰서 설명되어 왔지만,

근본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제 2 장 마음의 원점 (그 2)

1. 신의(神意)의 연(緣)

이 현상계는, 물질적인 연(緣)에 의해서, 모든 현상이 일어나는 수행장이다.

더욱이 물질은,

외력(外力)이라는 연(緣)에 의해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변화하여,

한순간이라도 ‘지금이라는 시간’을 보존하지 못한다.

현상계는 그런 세계이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에너지라고 말한다.

생물은 의식과 동거하고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9/95

의식에너지의 세계는, 물질에너지의 차원보다도 정묘한 차원이며,

이를 의식계라고도 한다,

일체의 만물만생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이다.

즉, 그 세계를 바로 실재계(實在界)라고도 한다.

우리는 이 비 물질적인 실재계에서,

양친으로 되어줄 육체주의 제공자와의 연(緣 )이 약속되어,

이 지상계에서, 그 약속, 목적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 지상계,

현상계에 태어나는 것도, 환경과 부모를 선택하는 것도,

모두가 다 자기가 실재계에서 사전에 계획한 일들이다.

이 현상계에 적응한 육체주(肉體舟)를 타고, 지상으로 나오는 것은

고락의 인생항로를 통한 수행이 목적이다.

맹목(盲目)으로 더듬어 가는 인생---

이 인생에서, 보다 넉넉한 마음을 만듬과 동시에,

새로운 학습을 하는 것이 목적의 하나이다.

동시에 인류의 대조화에 의한 유토피아의 건설,

그것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부과된 사명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리의 육체주의 선장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의식이요, 혼이다.

의식의 중심이 ‘마음’이며

이 마음이 실재의 세계로 통하고 있다.

인간은 실재계, 곧 천상계로부터 태어날 때에는,

누구나 모두, 둥글고 넓고 풍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신의 자녀로서 착한 자들이었다.

그런 것이 태어난 환경이나 관습, 교육이나 사상, 그리고 친구의 영향 등

오관(五官)에 작용하는 일체의 것에 의해서, 성격이 달라지고 만다,

우리의 의식은, 태어날 때에는 100% 잠재되어 있다.

그것이 성장함에 따라 표면으로 나온다.

그래서 마음속에는 ‘본능’이 싹트고,

오관(五官)을 통하여 ‘상념(想念)’에 전달되며

 ‘지성’이 발달하고

‘감정’의 표현으로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스스로의 ‘의사(意思)’가 뚜렷해지고, 자기의 입장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표면의식이 포화상태가 되어도,

10%정도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맹목적인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인간을, 실재계에 살고 있는 수호령이나 지도령들이,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래서 항상 집착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둥근 마음을 가지고

괴로움의 씨를 뿌리지 아니하며

중도를 마음의 척도(尺)로 삼아,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수호령이나 지도령들이, 직접, 영감적인 현상으로 지도하여,

평화로운 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0/95

반대로 자기만을 생각하고, 욕망대로, 도덕심도 없이,

감정을 노출시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두운 상념에 싸여, 지옥령에 지배되므로,

 항상 마음에 평화가 없다.

불평불만으로 인생을 보내고,

넉넉함이나 원만함을 잃고, 마음은 큰 왜곡을 만들어내고 만다.

그렇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것이 신의 자식으로서의 “증명”이고 현증(現證)이다.

실재계나 지옥계,

곧 저 세상의 영위기(靈圍氣)는,

파동이 미세하고, 또한 조화되어 갈수록 더욱 정묘해져 간다.

이에 비하여 현상계의 파동은,

고체적(固體的)이고 불안정하며, 연약하다.

그 때문에, 현상계에 있어서는,

 원인과 결과의 윤회가 느리고, 올바른 판단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내재되어 있는 90%의 의식은,

전생윤회의 일체를 기억하고 있으나, 쉽게 생각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부조화한 상념의 두꺼운 구름에 뒤덮혀서, 통신이 차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현상계는,

 선과 악이 뒤섞이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것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은,

정법을 공부해서, 생활 속에 살려나가는 길 이외에는 없다.

저 세상에서는,

 선과 악이 영위기에 따라서, 확실하게 단계가 정해져 있다.

그것은 마음의 넓이가 모든 것을 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컵 속에 재를 조금 넣어서, 물을 부어 보자.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맑은 물은 위로 올라가고, 흐린 물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와 같이 저 세상의 구조도,

그 사람의 마음과 행위가, 정법에 맞는 생활을 하였나, 아니 하였나로,

빛의 양이 달라서, 단계가 정해져 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그 위치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신의 뜻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육체주(肉體舟)의 선장인,

마음의 천국의 지배자.

즉 자기 자신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이다.

지옥행도, 극락행도,

자신의 선한 마음이,

인생의 일체를 재판하는 것이다.

(주;오로지팔정도의 설명-어두운 곳에서 갑자기 환한 곳으로 가면 눈이 부셔서 괴롭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더 밝은 세계로 올라가면은 눈이 덜 열린 사람은 괴로워서 살 수 없답니다.

 바로 천국에서 말이죠... 스스로 자기에게 맞는 밝기의 세계로 자기 발로 내려가는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1/95

 것이지요.. 임마누엘 스웨덴 보르그의 ' 나는 영계를 보고 왔다'참조)

육체주(肉體舟)의 지배자야말로, 불변의 자기 자신의 혼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종말이 아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육체주(肉體舟)와의 분리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인 배는, 이 지구상에서의 삶, 이외에는 필요가 없고.

저세상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마음의 창이 열리면, 험난한 현상계에 있어도,

살아 있는 기쁨은 무한대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혼의형제들이나,

수호령 * 지도령이,

항상 우리의 수행에 협력을 아끼지 않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2. 광자체(光子體)와 육체의 관계

우리들 대다수는, 이 현상계,

지구상에 태어나 버리면,

육체의 선조로부터 전해 온, 습관이나 부모의 교육, 사회의 사상,

선배나 친구, 형제 등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개성과 함께 인격을 형성해간다.

거기에는 오관이 항상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오관은, 육체주(肉體舟)의 부속품으로서,

인생항로에 있어서의 모든 장애물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인데,

자칫 독선적인 판단을 하기 쉽다.

그 때문에, 스스로 괴로움이나 슬픔의 원인을 만들고 만다.

혹은 원망, 질투, 비방, 노여움, 투쟁, 파괴 따위의 행위에 의해서,

스스로를 인생항로의 시궁창속으로 빠져 간다.

자기보존,

자아아욕(自我我慾),

'자기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편협한 생활이, 혼란한 사회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 원인은, 오관을 통하여 마음에 작용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올바르게 판단하는 ‘올바름’이라고 하는 기준의 결정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원인은, 눈. 귀. 코. 혀. 몸의 오관만을,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육체주(肉體舟)의 선장인 의식,

즉 혼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육체주야말로 진짜의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의 중심에 있는, 마음의 존엄성을 되돌아보지 않고,

인생항로에 있어서, 물질문명사회에서의,

지위나 명예에 대한 욕망,

돈에 대한 집착심, 정욕에의 맹목적 욕구 등

모든 것에 족함을 잊어버린, 부조화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2/95

상념의 구름이, 신의 빛을 차단하고,

괴로움의 씨를 뿌리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상계에 태어난 목적이나 사명을 망각하고, 욕망의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전세에서 약속하고 온 일들을, 생각해 낼 여유마저도 잃고 만 것이다.

욕망이 내키는 대로 살며,

자기에게 불리하면 주저없이 남을 걷어차 버리고 자기를 지킨다.

그래서 마침내는 마음을 마왕에게 팔아넘기고,

신의 의사(意思)에 거역한 괴로움의 한평생을 보내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생(一生)은 올바른 삶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오관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잡힌 감각으로서,

오관으로부터 대뇌에 통신되고,

그 전기적 진동이 육체주의 선장인 의식에 전달되어,

마음에 작용하는 것이다.

마음의 내부에는

본능의 영역,

감정의 영역,

지성의 영역,

이성의 영역이 있고

의지의 작용에 의해서,

행동이 되기도 하고, 마음속의 상념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도 포함해서,

우리의 혼(魂)이야말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자기 자신이다.

“ 혼이나 의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두뇌가 생각하거나 사고하는 것이므로,

 모든 현상의 뿌리는 두뇌에 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끝장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 그렇다면 잠자고 있을 때,

 콧구멍도 귓구멍도 열려 있는데도,

 왜 머리맡에서의 다른 사람의 말소리나 냄새 따위를

 감지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가.?“

뇌세포가 기억하는 기관이라면,

당연히 잠자고 있을 때라도 모두 기억할 터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에 따라서, 느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신경통이나 류마치스등, 깨어 있을 때에는 아프고 괴로운데,

잠을 자버리면, 고통이 없지 않은가.

이와 같이,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났을 때와, 자고 있을 때의 상태를 생각하면,

현대 의학도, 과학도, 아직 올바른 해답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슬플 때나 기쁠 때, 감격했을 때 등,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3/95

 눈물이 나기 전,

 먼저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것은 무슨 작용일까?”

그것은 마음속의 감정의 영역이 부풀었을 때의 현상이,

육체적으로 나타난 현상이다.

혼과 육체는, 이와 같이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지만,

또한 무엇인가의 실로써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인가의 실.

그 실을 나의 지도령(指導靈)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영자선(靈子線)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라고 설명한다.

 “이 영자선은,

 차원을 초월하여, 어느 곳으로도 통하는것이다.

 육체와 혼을 잇고 있는 것으로서,

 여러분이 어머니의 태중에서

 ‘배꼽줄’

 로 연결되어 어머니한테서, 영양을 빨아 먹고 있는 것과 같다.

 죽음은, 영자선이 끊어졌을 때,

 이 세상의 원자체(原子體)와 결별하고,

 새로운 4차원의 육체라고도 하는 광자체(光子體)의 몸으로,

 실재의 세계로 돌아가는, 상태이다.“

하고 생(生)과 사(死)의 접점에 대해서도,

그렇게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인간은, 육체주(肉體舟)를 타고나면 누구나 장님이 되기 쉽고,

선(善)과 악(惡)이 동거하고 있는 현상계인 만큼, 수행하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이 마음의 본성을 잘 알고,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만들어 낸 부조화한 개성이나 특징, 곧

“카르마(業)”

라는 것을 바로잡아, 조화(調和)된 마음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 체험을 통하여, 어느 사이엔가,

마음과 행위 속에 나오는,

“카르마(業)”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3. 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 만든다.

인생항로에 있어서, 육체주(肉體舟)의 부속품인

눈. 귀. 코. 혀. 몸. 뜻 이라는 육근(六根)이, 미혹을 만들어 낸다.

괴로움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는,

중도를 깨달은,

육체주의 선장인 혼*의식의 중심,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4/95

올바르고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마음”

에 묻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현상을, 편견없이,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

우리는 선의의 제3자의 입장에 서서, 자신을 반성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부조화한 상념의 구름을 걷어버리기 위해서는,

반성하여, 그 원인을 규명하고,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는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맹목적인 인생 수행을 하고 있는 우리에게,

반성은 오히려, 신이 내려준 큰 자비이다.

명상적인 반성은, 자신의 마음의 구름을 제거하고

그 상념이 신의 빛으로 뒤덮혀지기 때문에,

영위기(靈圍氣)가 정묘해 지고, 편안한 경지에 들게 된다.

인간은 여러 가지의 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무정이나 덧없음, 슬픔에 직면하여,

일상생활에서 반성할 기회를 만나도록 짜여져있다.

친한 사람과의 사별.

사회의 모순 . 질병,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운명의 장난,

삶으로 인한 헛된 노력 등

인간은, 온갖 괴로움을 통하여, 반성할 기회를 찾게 된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넓고 넉넉하고 둥근 마음을 만들어서,

신의 자녀로서의 자각이 싹 텄을 때,

실재계의 천사들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무엇 때문에 고락(苦樂)을 체험하며,

어찌하여 죽어 가는가.

그리고 죽은 뒤의 세계는?

이라고 누구든지 의문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의문으로부터, 인생을 올바르게 살아 가려고,

지난날의 그릇된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마음속에서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는 의식의 문이 열리어,

우리는 과거세에서 공부한 몇할인가의 체험을 기억해 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중도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마음의 판단에 기초한

생활의 매일매일의 노력이 이루어질 때,

자신 속으로부터 독선적인 마음이 사라지고,

인류는 모두가 형제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며

위대한 자애의 힘으로, 우리들의 영위기(靈圍氣)는 상승하고 향상된다.

자기가, 중도의 길을 밟지 않고 온 결점의 수정을,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5/95

용기를 가지고 수정했을 때,

마음은 정화되고, 자기 자신이 광명으로 충만되어 가는 것이다.

마음의 정화를 이루어 감에 따라, 수호령이나 지도령이나 혼의 형제들은,

우리의 새로운 혼의 진화에의 노력에 대해서,

서로 협력하여 영감을 주기도 하고, 직접 말을 걸어,

인생의 지침을 올바르게 가르쳐 준다.

지도령(指導靈)은, 새로운 인생학습에 대하여 가르쳐 인도하며,

그 마음에,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광명의 길을 열어줌으로써,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한 협력을 아끼지 아니한다.

반대로, 자기보존이나 자아아욕, 교만 따위가, 그 마음에 싹트면

어두운 영위기에 스스로의 마음이 뒤덮혀 버리기 때문에,

지도령이나 수호령들의 협력을 얻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지옥령이나 동물령, 끝내는 마왕에게,

그 마음을 침범 당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은, 그처럼 선악(善惡) 어느 쪽으로도 변하기 쉬운 것이다.

올바른 마음의 토대가 되는 법칙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말법의 세상이 되면, 인간은 판단하는 마음의 척도를 잃기 쉽다.

스스로 혼란에 빠져, 부조화한 사회를 만들고 만다.

부조화의 씨앗은, 결국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세상에서 제거하지 못하면,

혹독한 지옥계에서 그 부조화한 마음의 수정을, 완수해야 한다.

지옥계로 가는 결정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선(善)한 신(神)의 마음이,

자기자신의 인생항로에서의 마음의 방향과 행동을 재판하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재판하는 것이며,

그 재판은 공정무비한 판단으로 되어 있는것입니다.

 (주;공정무비한 판단에 의해서 타인을 비판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행동을, 공정무비한 판단에 의해서, 괴로워하지요.

 괴로워하는 고뇌란 자기 자신의 재판입니다.

 괴로워하는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 자기가 가야할 곳이 정해진다는 말입니다.)

이 현상계에 있어서의 재판은,

인간이 만든 법률에 의해서 타인을 재판하고 있다.

재판관의 생각이나 사상적인 배경, 개인적 감정도,

그 판결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본래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피고의 신병 구속(身柄拘束)으로,

육체적인 행동은 제한 할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마음까지 속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상념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만다.

일부 종교가들은, 벌을 받는다는 협박으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6/95

신자의 마음에 고랑을 채워, 조직의 세포로 만든다.

신불(神佛)은,

절대로 벌 같은 것은 내리지 않는다.

벌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릇된 교리를, 욕심많은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입시켜서 악용하고 있는 지도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큰 의문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의문을 가지면 벌을 받는다고,

자신의 마음의 영역을 점점 더 작게 하여, 풍부한 마음을 잃고 만다.

제목이나 경문을 올리면 구원받는다. 등은,

뇌세포만 혼란시킬 뿐, 마음의 평안은 얻을 수 없다.

스스로의 마음의 존엄성을 깨달았을 때는,

헤매고 있었던 자기자신을 안타깝게 생각할 것이다.

태어나기 이전까지는, 천상계에서,

마치 영화의 스크린에 비친 화면을 보는 것처럼,

이 지상계의 험한 생활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도.

성장함에 따라서 미망(迷忘)의 인생을 보내고,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많다.

둥글고 넉넉한 마음에 왜곡을 만들어,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보내고 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 걸음 나가면 한 걸음 물러서서,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반성하여,

괴로움의 씨를 뿌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이란,

 내재된 위대한 지혜의 샘을,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차원을 초월한 실재의 세계로부터,

그 사람이 구하는 질(質)과 양(量)에 비례한,

모든 지혜를 빌려주는 지도령들이 존재한다.

반성은,

자기를 새롭게 다시 보는,

 의식의 전환 작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자기를 새롭게 다시 본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이며

거기에는, 자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의 결점이나 장점이 확실히 나오는 것이다.

그 결점을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그 뿌리를 뽑아 없애야 한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수호령, 지도령도 동시에,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7/95

진실과 거짓이 동거하고 있는데,

반성에 의해서, 거짓된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낼 수 있다.

그것이 반성의 크나큰 공덕이다.

결점의 뿌리가 제거됨에 따라,

우리는 깨달음에의 일보를 도장찍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에의 단계가 올라감에 따라,

관자재(觀自在)의 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 나온다.

자유로운 마음을 얻어, 집착에서 벗어나,

생사를 초월한 대오(大悟)를 얻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마음의 세계, 실재계에는,

우리들 혼의 형제들이나 친구들이 있어서

항상 현상계에서 수행하고 있는 우리들을, 지켜봐 준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육체주의 오관번뇌도, 이와 같은 경지가 되면,

바로 소멸하여, 스스로 깨달음의 보리가 되는 것이다.

4. 경제의 노예에서 벗어나자.

조화란 신의 마음이고,

자비와 사랑이 나타난 모습이다.

대자연은, 그와 같은 대조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태양이 서쪽에서 뜨고, 낮과 밤이 뒤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태양의 열에너지가, 강해진다면 어떻게 될까.

남극과 북극의 얼음이 녹아, 육지는 물에 잠기게 될 것이다.

상상도 하지 못할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만약 태양이 없어진다면?

상상만 해도, 오싹해지는 파멸의 사태가 빚어질 것이다.

또한 지구가 운동을 정지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주 공간의 어디론가 날아가고 말 것이다.

지상의 생활은 하루도 견디지 못하게 되어 이 세상은 끝장이 난다.

사람을 비롯하여, 이 지상계의 일체의 생물은,

그와 같은 대우주의 차질없는 대조화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비가 너무 내린다고 화를 내고,

바람이 불었다고 하늘을 원망하며, 가물 때는 하늘에 기도하고 매달린다.

태풍도 지상의 오물을 씻어 내리고, 공기를 맑게 하는 자연의 배려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대우주의 섭리에 대해서,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 한 가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태풍이나 비나 바람도, 대우주의 조화라고 생각한다면

노여움이나 원망이나 저주하는 마음은, 있을 턱이 없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8/95

태양의 빛이나 열,

지구상의 물의 윤회,

대지의 전생(轉生).

그들 모두가 동물이나 식물을 길러,

내일의 생명, 내일의 생활을 약속해 주는 것임을 알면,

대자연의 이러한 배려에 대해서, 불만이 나올 여지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하늘에 감사하고,

그 밖의 환경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자기가 여기에 있다'고 하는 확실한 존재감,

이 현상계에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 바라던 그 결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도 대자연의 은혜, 신의 자애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보은의 형태로 해서,

조화된 행위로써 보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감사는,

행위에 의해서,

그 은혜를 갚는 것에 의해,

윤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이 육체를 제공해 준 조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부모에 대해서, 먼저 감사하고 보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인류가 생존하는 한,

육체 조상에 대한 보은 공양(報恩供養), 부모에 대한 효도는,

당연한 인륜지도(人倫之道)이며,

어떠한 시대가 오더라도, 그것은 달라질 수 없다.

또한 이 세상에 나와서, 우리가 육체를 유지 할 수 있는 것은,

만물곧 동물, 식물, 광물의 에너지의 덕분이니,

이것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 톨의 보리나 쌀도, 우리를 위해서, 그 생명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결코 헛되이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감사의 마음이고, 그러한 마음으로

그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며 뼈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곧 보은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호의호식만 좇아, 일 년 내내 불만의 마음을 가지고 먹을 경우에는,

음식들도 또한 그 사람을 싫어한다.

필연적으로 육체적 부조화의 원인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이와 같이 보은하는 행위에 의해서, 순환의 법칙에 따르고 있다.

만생만물(萬生萬物)은, 모두 이와 같이, 상호 관계에서 성립되어

우리의 육체주(肉體舟)의 보존도 가능한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9/95

우리는 이 사실을 잘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대자연을 더럽히지 않도록,

한 사람 한사람의 인간이, 깊이 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을 상실하고, 이익 추구만으로 내달려, 물질 문명은,

‘공해’

라고 하는 왜곡을 만들어 내어, 대자연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푸른 대자연이 있어야만이, 동물의 생존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 인류는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자연은, 인공적으로, 지나치게 손을 가하지 않는 한,

조화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다.

유화물(硫化物), 질소화합물(窒素化合物), 탄산가스, 그 밖의 공해 폐기물이,

인체에도 큰 영향을 주어,

독물, 약물이 인간의 기능장애를 이미 일으켜 가고 있다.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대자연의 환경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멸망의 위기가 내습하고 나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인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의 아들이란 자각을 가지고,

스스로의 마음을 단순한 물질문명, 경제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족함을 잊어버린 소비는, 괴로움의 길을 재촉할 뿐이다.

5. 번뇌. 버릴 수 있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불이일체(不二一體)이다.

육체는, 부모로부터 받은 원자육체(原子肉體)와

저 세상에서 가져온 광자체(光子體)라고 말할 수 있는 의식과

표리일체(表裏一體)로 되어 있는 것이며, 죽음은 그 양자의 완전 분리이다.

광자체와 육체주(肉體舟)의 선장인 의식*혼이,

차원이 다른 세계로 돌아가는 현상이다.

남겨진 육체는, 이 지상계에서 흙, 공기로 되돌아 간다.

그러나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주(肉體舟)가 병들거나 다치거나 하여, 고통이 있으면,

선장인 혼의 중심에 있는 마음도 괴로운 것이다.

육체와 한 몸이 되어 있는 광자체(光子體)에 상호 감응이 일어나,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전상(戰傷)이나 교통사고 등으로, 팔이나 다리의 신경 조직이 파괴되어,

세포조직이 절단된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외상(外傷)에 통증은 없다.

수족은 이윽고 부패되어 쓸수 없게 된다.

그러나 수족이 절단되어 의수족을 끼우고 있어도,

육체와 한 몸이 되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광자체의 부분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0/95

(주; 없어진 육체의 부분이 아프거나, ) 근질근질한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현세의 육체는 없어지더라도,

광자체의 다리나 팔은, 절단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육체는, 이와 같이 광자체라고 하는 또다른 하나의 신체를 가진 의식이며,

그것에 의해서 육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육체와 광자체의 관계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해 보자.

우리의 신체 기능은,

무엇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가. 하면

의학적으로는, 식물성 신경과 동물성 신경에 의한다고 한다.

전자는 자율신경이라 하여,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밤낮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신경을 가리킨다.

위장, 간장. 심장의 활동은, 모두 이 자율신경의 활동에 속한다.

한편 동물성 신경이라고 하는 것은, 뇌척수신경이다.

이것은 운동, 감각 작용을 하고 있다.

무서운 것을 보고 오금이 당기거나, 아름다운 꽃을 보고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것은,

 이 신경의 작용에 의한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신경조직은, 전연 별개의 활동을 하고 있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신경이 곤두선다든지, 걱정되는 일이 있다든지 하면,

위장의 활동이 약화된다.

반대로 크게 웃으면, 배가 고파지는 것처럼 서로 관련이 있다.

식물성 신경은, 동물성 신경의 산하(傘下)에 있다.

이를테면, 무서운 것을 보고, 기절하거나 때로는 죽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동물성 신경과 함께, 식물성 신경도,

동시에 활동을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병은 마음의 작용에 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육체 자체의 과로에 의하여, 자율신경의 활동이 약해져서

내장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고, 폭음 폭식에 의한 위궤양,

운동 부족과 비만에 의한 심장병, 과격한 운동에 의한 폐병등도 있다.

이와 같은 육체 자체의 병도 있으나,

역시 본인의 마음가짐에 좌우되는 것이 더 많다.

병의 원인을 규명해 보면, 역시 마음의 씀씀이에 귀착한다.

자율신경을 약화시키거나, 혹은 고유의 세포의식(細胞意識)을 약화시키는 정신 작용이,

병을 만든다고 말할 수 있다.

병은 마음의 병이라고 하는데.

병은 뇌척수신경의 활동에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뇌척수신경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광자체(光子體 )속에 있는

 각자의 혼의 본연의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뇌척수신경은,

혼의 명령을 받아, 각 기능을 작동하는 조직체로서,

뇌, 그 자체는 명령의 집행자가 아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1/95

명령을 받아서, 각 기관이 움직이게 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뇌는 육체주(肉體舟)의 전자 계산실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계적인 전산기(電算機)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의 혼이다.

이 혼의 자세가, 병의 제조자가 되기도 하고, 건강의 근원도 되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신경조직은, 인간의 혼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각인의 마음의 상념 여하에 따라,

두 개의 신경조직이, 보다 강인하게 되기도 하고 약하게 되기도 한다.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자아가 강한 사람,

욕망의 볼모가 되어 있는 사람,

성내고 원망하며 비난, 험담, 질투,

그러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가 병의 원인을 만들고, 사고(事故)의 원인을 불러들이며

환경의 부조화를 만들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념과 행위가, 질병의 경우,

자율신경을 약화시켜, 육체세포의 활발한 운동을 저해해 가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뇌척수신경도, 부조화하게 되어 정신병의 원인이 되고 만다.

이와 같이 우리의 육체와 광자체와 의식체는, 일체(一體)가 되어

현실의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의식체는 혼이고,

광자체는, 이 지상계를 떠나 갈 때의 육체주인데,

혼의 중심인 마음이, 육체주의 오관번뇌(五官煩惱)에 현혹됨이 없이,

정도(正道)의 생활을 하여,

스스로의 결점을 수정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후광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혼을 순화시킨다는 것은, 광자체의 광자량이 증가한다는 말과 같다.

마음도 육체도 상호 관계가 있으므로,

인간은 육체가 괴로워도, 마음이 아파도, 부조화하게 되어, 괴로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록 육체에 결함이 있어도, 마음까지 결함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

마음은, 누구라도 건전하며, 둥글고, 넓고, 풍부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날 때, 육체를 가지고 돌아갈 수 없다.

육체주의 뱃사공의 노젓기 여하에 따라,

험난한 이 인생항로도, 즐겁고 뜻 있게 보낼 수 있다.

물질경제도 생활에 지장이 없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족함을 잊어버린, 욕망의 노예가 되기 때문에,

괴로움의 멍에를 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결함을 수정해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어떤 신에게 빌더라도,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2/95

그런 것은 타력신앙으로서 성취하는 것은 없다.

자력(自力)이어야 하는 것이, 인간에게 부과된 신의 법칙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어진 것이라고 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육체주(肉體舟)를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부모를 위시하여 육체조상에 대한 가장 큰 효양(孝養)이 되는 것이며,

공양도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육체는,

이처럼 언제나 불이일체(不二一體)로 숨쉬고 있는 것이다.

육체의 고통은, 마음의 고통에 연결되고

마음의 번뇌는 또한, 육체 세포의 활동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자칫 무리한 일을 하는 수가 있다.

기일 내에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에 쫓겨,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육체를 혹사한다.

밤 2시, 3시까지 일을 하더라도,

정신이 긴장하고 있으므로, 피로는 그다지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에는 육체의 한계가 있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고 말면,

일의 목적 대신에,

병이라고 하는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만다.

말하자면 우리의 육체는, 적당한 운동과 휴식이 필요한 것이다.

정신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운동과 휴식의 상호 관계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

이것에 의해, 육체는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낮에는 육체를 움직이고, 밤에는 휴식을 취한다.

이러한 원리 원칙을 무시하고, 마음만 앞서,

어떤 목적 때문에, 육체의 휴식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육체는 당연히 신진대사가 약화되어, 결국 병에 걸리게 된다.

적당한 운동을 하지 않고, 난의(暖衣) 포식(飽食)을 일삼고 있으면,

육체는 저항력을 잃고, 대수롭지 않는 감기라도 큰 병을 유발하게 된다.

오랜 직장의 긴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은급(恩給)으로서 지내려고 하는 정년 퇴직자가,

긴장을 풀고 1,2 년 살다가 죽는 예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을 보더라도,

정신 활동과 육체 활동의 상관성, 원리(原理)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원리는, 생활환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제적으로 어렵다.

혹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은 아무래도, 자기를 발견하기가 어려운 듯하다.

돈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3/95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기 마련이고

가난하여 내일의 끼니가 여의치 않는 상태이면,

마음까지도 가난하게 되어, 남의 일에 마음 쓸 여유가 없어진다.

예부터 가문보다는 성장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환경에 의해서 인격의 형성이 크게 달라진다.

나의 지도령 원투스리는,

과거세의 모세라는 사람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왕궁에서 거두어져 양육되어,

거기서 지(智)와 인(仁)과 용(勇)을 배웠고, 성장함에 따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성(城)의 안팎을 막론하고, 노예의 괴로움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노예 해방을 위하여 결연히 일어섰던 것이다.

만약 모세가, 왕궁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노예의 자식으로서 성장했다고 한다면,

과연 어떠한 운명의 길을 걸었을 것인가.

운명의 아들,

모세의 생애는 전혀 달라졌을 것이며,

그 화려했던 후반생도, 매우 다른 것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왕궁에서 거두어졌기 때문에,

노예로서는 배울 수 없었던 문자를 배웠고, 품성(品性)을 도야했으며,

왕궁의 체제의 뒷면을 알고

사회 전반을 두루 볼 수 있는 소양을 몸에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용자(勇者) 모세는, 마침내 자기가 노예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모순에 눈 뜨게 된다.

그래서 육십 몇 만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안주할 땅을 찾아,

모세는, 사십 몇 년에 걸친 긴 여행길에 올랐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환경에 따라,

세상사를 보는 시각, 성격, 마음가짐이 달라지는 것이다.

정도 성취는, 고락의 양극단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중도의 마음은 찾으면 찾을수록, 실은 심오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 중도의 마음을

일상생활의 기본으로 삼고 실천하는 길 이외에, 길은 열리지 않는다.

반드시 자아가 튀어 나온다.

이기적인, 자기보존의 싹이 트게 마련이다.

우리는, 고락(苦樂) 속에 있어, 이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며,

자기의 결점을 고치지 않는 한,

깨달음의 경지에는 숫제 근접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항상 반성이라는 행위를 잊지 말고,

정신과 육체의 조화, 환경의 조화를 명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중도란, 글자 그대로,

한가운데의 길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4/95

한가운데란, 원으로 말하면, 원의 중심,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 세상은, 남녀, 선악, 미추와 같이 상대적으로 되어 있으며,

사람들은, 그 상대 속에서 혼을 닦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선(善)과 악(惡)이 혼합되어 있는 현상계만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좋은 수행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선인(善人)뿐이고, 괴로움이 없는 세계라면, 수행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을 통하여, 열심히 구할 때,

비로소 빛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

(광명의 세계를 찾았을 때의) 그 기쁨은 비할 데 없이 큰 것이다.

그것은 전생윤회의 비밀을 알고,

이 현상계에서 육체를 지니고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위대한 의의(意義)를 깨닫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깨닫는 것 없이, 고계(苦界)로부터 벗어나지도 못하고

번뇌 속에서 일생을 보내더라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태어나기 전의 둥근 마음을 왜곡된 상처투성이로 만들어,

저 세상으로 되돌아간들

그것 역시 자업자득일 뿐이다.

저지른 스스로의 죄는,

엄한 지옥계에서

그 값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떠한 괴로움도 견디고, 위대한 인생의 가치를 깨달아야 하며,

또한 욕망의 바다에서 방랑하고 있는 길 잃은 중생에게

사랑의 손을 내밀어 구해 주어야 한다.

그 실천 행동이야말로, 신의 자식으로서의 길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어떤 자는, 국가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사상에 취하여,

중도의 길을 그르치고도 그것을 대의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시한번,

대의와 명분이란 것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류는, 본디 모두가 다 형제이다.

지구는 하나이고, 거기에는, 애당초 국경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것이 인류생존의 긴 역사에 의해서,,

저마다의 자기보존, 자아아욕에 따른 생각으로 말미암아,

권력이 생기고, 지배가 생겨,

경계가, 대중의 희생 위에 만들어져 갔던 것이다.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나라와 나라의 경계는,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인류의 이상으로부터 벗어나,

각 나라의 민족 에고이즘이 되어,

그것이 인류의 한 척도가 되고 말았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5/95

이것은 인류의 큰 잘못이다.

그리고 개인의 마음까지, 일상생활 속에서, 선악의 감정에 지배되어,

이념보다도 자기의 이익, 가족의 행복이 선행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일까.

이유야 어떻든 간에,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은 선인(善人)이고,

자기를 매도하는 사람은 악인(惡人)으로 몰아 부친다.

이와 같이 우리의 개인생활도, 나라와 나라의 관계도,

모두가, 자기의 형편, 자기 나라의 형편, 자기 민족의 형편이라고 하는,

자기 보존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선, 악(善,惡), 정, 부정(正,不正)의 기준은,

지금 완전 엉망인 것이 현실의 모습이다.

예를 들어 법률이 있어도, 법률이전의 개개인의 자기 보존의 감정에 의해,

선악(善惡), 정(正), 부정(不正)의 척도를 정하고 있다.

이래서는 중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중도의 마음은,

자아를 떠난 객관적인 입장에 서지 않으면,

(중도의 마음을) 자신을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백지의 상태로 있는 자신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서,

머리속에 채워져 있는 기성관념들을 일단 옆으로 밀어내 놓고,

자기의 모습을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

여러 가지 지식이나 경험 따위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얄팍한 척도로서, 세상사를 보면,

자기의 척도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고, 상황의 판단도 흐려지고 만다.

중도의 마음은, 사심이 없는 것이다.

곧 신의 마음이요,

 신의 척도인 것이다.

이 신(神)의 척도에 섰을 때,

비로소 바른 판단이 서고,

 정신과 육체, 환경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생활을 할 때 ,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되고,

가족도 평화롭고,

나라도 번영하고,

이웃나라와의 조화도 유지되며

불국토,

즉 유토피아의 완성에 다가서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상실한 사상에 의해서는,

인간의 대조화도 없으며,

투쟁과 파괴의 아수라계를 만들어 낼 뿐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6/95

정도 성취(正道成就)는,

중도의 마음을 목표로 해서,

일상생활 속에서 (중도의 마음을) 실천하고,

끊임없는 반성과 보은의 행위를 하는,

(중도의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6. 깨달음의 피안으로의 길


중도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것은 부처님이 설법하신 중도의 목적에 맞는 팔정도 밖에 없다.

바르게 본다.

바르게 생각한다.

바르게 말한다.

라는 세가지의 정신작용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기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에는 속담에,

보지 않는다.

듣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라는 삼원(三猿)의 속담을 통하여, 번뇌 이탈의 기초 조건으로 삼는 말이 있다.

번뇌라고 하는 미망이 생기는 것은,

보거나

듣거나

말하거나 하는데서 일어나는 수가 많다.

그러므로 번뇌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눈. 귀. 입을 닫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은,

말 그대로 닫아 지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정신 작용을 통해서, 현실사회 속에서,

'그것을 올바르게 행하라'고 하는 뜻이다.

삼원(三遠)의 예를,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도피가 되기 때문이다.

중도를 마음의 척도(尺度)로 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생활,

그것이 인생이 아닐까.

그러나 세마리의 원숭이의 예는,

번뇌가 생기는 가장 위험한 정신 작용에 대한 경고를 뜻하며,

인간의 약점을 꼬집은 속담이다.

팔정도의 첫머리에 있는

‘바르게 본다.’(正見)

라는 것은 '선한 중도의 마음의 눈으로 보라'.

(주;선한 중도의 마음의 눈= 자비. 사랑. 감사. 보은. 관용)

‘바르게 생각한다.’(正思)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7/95

라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선한 중도의 마음으로 생각하라.'

‘바르게 말한다.’(正語)

는 것은 '선한 중도의 마음으로 생각한 바를 말하도록 하라'는 뜻이다

마음이란, 의식의 중심이며,

의식의 중심은,

자타의 차별관이 없는 선한 마음이다.

다음으로

‘바르게 일한다.’(정업)

라는 것은 주어진 그 직무에 대해서,

충실하게 의무와 책임을 완수한다는 뜻이다.

이 경우의 일이란,

단순히 표면적으로, 양적으로 남보다 많이 한다는 것보다도

사람들의 행복을 빌고, 일하는 환경과 그 제공자에게 감사하며,

그 감사의 마음을, 행위에 의해서 보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하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일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서로가, 보다 나은 생활의 안정과, 마음의 조화를 꾀하고,

서로 보완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기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

비록 봉사하는 일의 양은 적더라도,

진심에서 우러나는 봉사의 행위를 신(神)은 훨씬 더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혼의 수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므로

일, 그 자체는, 혼 수행의 재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질(質)과 양(量)이 상부하면, 그 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그러나 신불의 눈은, 어디까지나 그 질(質)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된다.

옛날부터, 부자의 만등(萬燈)보다, 빈자(貧者)의 일등(一燈)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에서 우러난 행위,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본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물질과 경제가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없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과연 경제만일까.

경제만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인간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화폐경제라고 하는 것이,

온갖 불안정한 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로부터,

참된 행복이란 과연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富)만이 인생이 아니다.

신이 만들어 낸 법칙은,

절대로 변하는 것이 없는 영원불멸의 것이며,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8/95

마음을 잃은, 인간의 지혜(智慧)만으로,

이 법칙을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의 자식인 인류는, 이 불변의 신리를 스스로 깊이있게 구하여,

그 신리에 맞는 생활을 하고, 보다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조화된 사회를 이룩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바르게 생활한다는 것은 (정명)

일상생활의 마음과 행동에 있어서,

가정생활의 본연의 자세,

이웃과의 사귐,

직장인으로서의 마음가짐.

사용자로서의 본연의 자세등을,

 올바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자칫 사소한 일에 마음이 빼앗겨

육근(六根)에 좌우되기 쉬우며, 마음의 왜곡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더욱이 눈으로 보는 여러 현상. 귀로 듣는 여러 문제, 그리고 내뱉는 말,

이런 것에 의해서 우리는 마음의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다.

또한 남까지 현혹시켜 큰 죄를 짓고 만다.

이와 같이 눈. 귀. 입은,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서,

이것들에 휘둘리게 되면,

번뇌의 노예가 되어, 자기 자신을 잃고 만다.

그래서 전생윤회(轉生輪廻)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카르마(業)가

마음속에서 배어 나와서,

악순환 (악(惡)의 운명)에 몸을 빠뜨리는 결과가 되고 만다.

바라지 않는데도, 병에 걸리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남한테 속기도 하여, 남을 믿지 못하게 되기도 하며, 마음은 점점 작아진다.

작은 틀 속에 갇힌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내어,

괴로운 인생을 보내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카르마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먼저 현재의 환경, 입장. 살게 해주는 그 자체에 감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물건 하나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고에 의해 만들어져, 도움받고,

또 태양이나 물등, 자연의 은혜가 있어서, 우리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갚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결점을 알고,

고쳐나가서, 인류의 사회를 위하여 남은 시간을 봉사해야 한다.

"바르게 사는 데는",

육근(六根)에 좌우되지 않는 자기를 발견할 것,

 그것이 먼저 해결되어야 할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결점과 장점을 똑똑히 바라보고,

결점은 고치고, 장점은 살려나가는 것이 중요하며,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9/95

그러기 위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병이건 사고이건, 또한 남에게 속임을 당하는 것은,

오관(五官)에 휘둘려진 상념과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결점,단점은, 아무래도 오관에 근거하는 상념에 제일먼저 결부되기 쉽다.

그러기에 결점을 고치는 데는 결단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르게 생활한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달은 나날의 생활 행위에 있는 것으로서,

항상 평안한 경지에서, 일체의 거리낌이나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족함을 아는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족함을 알게 되면,

일을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정도를 깨닫고, 후회없는 일을 하루하루 거듭해가면,

누구든지 피안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일일 일생(一日一生).

미련을 남기는 것이 없는, 생활을 하여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반성해도, 좋은 면밖에 나오지 않는,

그러한 하루를 체험해 보는 것이다.

"바르게 도(道)에 정진한다는 것은,(정진)"

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의 말이다.

부부, 양친과자식, 형제, 친구 등은,

저마다의 인연, 또는 약속 아래, 맺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욕에서 나오는 자기주장을 하지 말고,

조화를 목표로, 감사와 보은의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

그 중에는, 자기는 조화를 바라지마는 아내가, 남편이 또는 친구가

좀체로 말하는 것을 듣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어,

헤어지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는,

한 쪽이 양보할 마음을 가지고 태도를 바꾸면, 상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무엇인가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부조화의 뿌리를 깊게 찾아내어, 잘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래도, 조화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상대의 폭력이나 독설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중도에서 일탈(逸脫)한 상대의 모습을 느껴도,

다투어서는 안 된다.

다투지 말고,

‘이 가엾은 사람에게, 부디 신이여, 평안함을 주소서’하고

진심으로 기원할 만한 여유를 가져야 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0/95

인욕(忍辱)이란,

‘두고 보자.’

‘나중에 복수 하겠다.’

등의 생각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서는,

 인욕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고.

그런 상념은 어두운 구름으로 덮여 있고,

스스로의 영위기(靈圍氣)를 부조화로 혼란하게 되는 것이다.

외부로부터 받은 욕된 일을 잘 견뎌 마음에 왜곡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결론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 부조화하게 되거나, 남의 신뢰도 잃고

점점 더 괴로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고 만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는 돌고 돈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과 ,꼭 같은 결과가 된다는 말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둥글고 넓고 넉넉한 것으로 만들어,

여러 가지 부조화한 환경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대조화(大調和를 목적으로 한 인간관계를 이룩해 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정진의 제일의 목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다음으로,

" 바르게 염(念)한다는 것이다.(정염=正念)"

‘염(念)’에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훌륭하게 되고 싶다든가. 좋은 집에 살고 싶다든가, 저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든가.

저 사람은 밉다고 하는 것 등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일 터이다.

그러나 염(念)의 올바른 자세는,

중도에 맞는 목적을, 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염(念)속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에 뿌리를 둔 것이 많은데,

이 욕망은 멈추는 것 없이,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윽고, 사람과 사람과의 조화를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간에게는, 전생윤회(轉生輪廻)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스스로의 기량(器量),

이 현상계에 나와서부터의 기량(器量)이 있다.

그것이 총합된 인간의 그릇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여도, 대통령은 한 사람밖에 못한다.

그런데 기량은 생각하지 않고, 자리만을 탐하기 때문에, 쟁탈전이 벌어진다.

예전에는, 무력으로 이것을 빼앗았지만, 현대는 어떠한가.

선거라는 것이 있지만, 여기에도 투쟁은 필연인 듯하다.

그리고 관리나, 회사원의 세계에서도, 직책에 대한 집착, 자리다툼이 치열하다,

이와 같은 자기의(육신의 자기를 자기 자신으로 착각하여)욕망에 뿌리를 둔

염(念)의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는 투쟁과 모순으로 가득 찬 것으로 변해 버렸다.

이러한 욕망도, 하나하나가, 자기자신의 그릇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1/95

자아아욕(自我我慾)의 노예가 되어 버려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 맞는 업(適業)이,

무엇인가 하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이만하면 되었다라고 하는 한계가 없다.

그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에 족함을 아는 생활,

그것이 필요한 것이다.

염(念)의 바람직한 자세는, 이러한 의미에서,

족함을 안, 조화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정(正定)이 있는데,

이것은 반성을 가리킨다.

앞에서 말한 일곱 가지의 규범에 비추어,

오늘 하루의 자기의 상념과 행위에,

지나친 점은, 없었던가 어떤가를 되돌아보고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을 고쳐서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반성은 단순히, 나빴다. 좋았다. 로 끝나고 말면,

올바른 반성이라고 말하기 힘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반성할 때,

잘못을 범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 잘못은 왜 일어났는가 하는,

자기 마음속의 원인을 추구하여, 그것을 제거하는 일이 중요하다.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마음을 정화시키는 길이 된다.

그 결과, 정신과 육체가 우선 건전해지고

가정의 조화,

직장의 조화,

사회의 조화로 확대되어 나간다.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일에 실패했다면,

그 실패의 원인을 규명하여, 두 번 다시 같은 실패를 범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렇게 하면, 이윽고 그 실패는, 성공으로 연결되어 간다.

반성도 하지 않고, 같은 일을 반복해서는, 성공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마음과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정정”의 기본은,

반성에 있다는 점을 깊이 마음에 새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명상적 반성은,

마음의 구름을 제거하여

스스로의 영위기(靈圍氣)를 높여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성...!

반성...!

반성하고,

반성만으로 끝나면,

스스로의 마음을 좁고 작게 하고 말 것이니 주의해야 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2/95

인간에게는,

내향적, 외향적, 낙천적, 비관적 등의 여러 가지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기의 성격에 적합한 반성의 방법,

그것을 몸에 터득하여

‘정정’을 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정도(正道)는,

각자의 생활의 지혜와 실행력을 기울여,

용기를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 그에 이르는 지름길이며,

자기 자신의 마음의 상념과 생활이 풍부해지는 가장 빠른 길이다.

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7. 마음의 평안.

정법이란,

올바른 법.

만고불멸의 신리.

신의 마음,

곧 우주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사물에는, 모두 전생윤회(轉生輪廻)라고 하는 법칙이 있으며,

그 법 자체가, 만물만생(萬物萬生)의 존재를 가르치고, 대자연에 있어서,

그것들이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신의 대자비이며, 크나큰 신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극미한 원자도, 핵을 중심으로 하여 핵외전자(核外電子)가,

마치 태양의 혹성처럼 돌고 있다.

하루가 끝나면, 이윽고 내일이 찾아온다.

사람은 태어나서 언젠가는 죽는다.

대자연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초목도 꽃도,

언제까지나 싹트고, 피어 있지는 못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의 본연의 상태와 생활의 본연의 자세에도,

이 자연의 법칙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선(善)의 행위는, 선(善)의 결과로서 순환하며,

 악(惡)의 행위는, 악(惡)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이러한 법칙을, 순환의 법칙이라고 한다.

인간의 일상생활도,

이러한 법칙에 따르는 순환의 법칙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다.

올바른 행위는, 올바른 결과로서,

그 사람의 인생, 건강. 환경을 정돈해 준다.

그것은 자연의 운행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어김없는 운행이 있으므로 해서,

우리 인간은, 지상에서의 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주;10%가 올바르면 10%만큼. 20%가 올바르면 20%만큼.

 정확무비하게=어김없는 운행)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3/95

자비와 사랑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법이 바르게 운용되고 있기 때문에,

태양의 열은 식지 않고,

지구는 정해진 궤도를 이탈함이 없이 움직이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지상에서의 생활도,

태양의 변함없는 열과 빛의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자비라든가 사랑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마치 인간적인 행위, 인간적인 감정을 연상하지만,

태양도 지구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마음을 중심으로 해서 움직이고 있으며,

자애(慈愛)란, 그런 의미로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대자연은 세상사를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세상사를 말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희노애락이 있는데,

자연은 우리가 아는 그러한 감정은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도 또한,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다.

사계의 바뀜, 풍우, 한난, 태풍, ....모두 살아 있는 표현인 것이다.

현상세계에 있는 것은, 모두 생명을 가지고 있고,

생명이 있다고 하는것은,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는것이다.

꽃도 동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애정을 가지고 접하면, 꽃도 동물도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된다.

그것은, 의지가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꽃에는 꽃의 정(精)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그 꽃의 정(精)과도 이야기할 수 있고,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않았기에 모르는 것이지, 그것은 부정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초목 등 모든 것에 의식(意識)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 주위에서 일어난 세상의 변이를,

(영청(靈聽)이 가능한 사람에겐)

정확하게 말하여 들려 준다고 하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구라고 하는 대지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지는, 인간을 비롯하여, 지상과 지하의 생명이 살아가도록 지탱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참을성 있게, 모든 생명을 살아가게 하고 있다.

대지에 표정이 없는가 하면, 그것도 분명히 있다.

우리가 여행등에서, 모르는 땅, 경치를 보고 걸을 때,

그 토지, 토지에, 영위기가 있는 것이 느껴진다.

대지는 수동적이고, 우리 인간은 능동적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 상념,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4/95

말하자면 거기 사는 사람들의 의식의 조화도(調和度).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그 고장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싸움이 많은 고장에는, 작물도 자라지 않는 곳이 많다.

그리고 마을이나 거리도 지저분하다.

조화로 가득 차 있는 곳은, 깨끗하고 밝고 느긋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대지는 어떤가.

역시 표정을 가지고 있다.

기후나 바람의 흐름에 따라, 상쾌한 곳이 있는가 하면,

현재는 인기척이 없지만,

그 옛날 인류가 집을 짓고 살았던 곳은 수없이 많다.

그러한 곳에는, 옛날 주민들의 마음의 파동이 남아,

저마다 명암, 미추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와 같이 대지라 할지라도, 생명을 가지고,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화산, 지진, 산사태, 함몰 등 대지 그것은, 때로는 성내고, 광란하는 수도 있다.

이러한 노여움이나 광기는, 대지가 제멋대로 부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제멋대로의 행동, 상념이 만들어 낸

물리적 현상이 대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태평양에 있었던, ‘무-대륙’도, 대서양에 있었던 ‘아틀란티스 대륙’도,

모두가 거기 살던 인류의 업상념이, 함몰시켰던 것을,

나의 지도령, 아가샤는 가르쳐 준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인간의 생명 의식, 지상에서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조화와 동시에,

동물, 식물, 광물을 포함한 지상의 대조화에 있으며,

그 목적에 위배되는 상념과 행위에 대해서는,

그 분량만큼의 배상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각자가 믿든 안 믿든,

인간의 생명 목적이란 것이 ,

신의 자식으로서,

이 지상계를 평화로운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한다.

이 목적을, 인간은, 육체주(肉體舟)를 타고 나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대지라고 하는 생활 환경에서,

태양의 열, 빛의 변함없는 에너지를 받으면서 생존하고 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거기에 대자연의, 신의 위대한 자비와 사랑이란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대자연의 생명에 조화하고,

신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고,

자비와 사랑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의를,

지금까지의 설명에 의해서, 대충 알았으리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가치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을 기준으로 무엇을 표준으로 정해야 할까를 설명하자.

우선, 가치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5/95

사물에 값어치가 있다는 것은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돈의 값어치는,

돈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절해의 고도에서 혼자 사는 생활이라면,

몇 억의 재보인들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가치라는 것은, 효용이 있는 것과 동시에, 상대적인 것이다.

인간의 값어치라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는 상대적이다.

나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사람이 좋게 보인다.

착한 사람만 있다면, 착한 사람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요즈음에는, 인간성이야 어떠하든,

돈이나 지위, 명성 또는 재능이 있는 사람한테는 ,

선인(善人), 위인(偉人)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 뭐니뭐니 해도, 저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다. .....’

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그것은 무엇에 대한 평가인가, 냉정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평가를 단순하게 받아들여,

그것은 틀렸다고 어렴풋하게 느껴져도, 대세에 휩쓸려 버린다.

그리고 또한, 인간의 성공과 실패를,

단순히 운, 불운만으로 돌리는 경향도 있다.

현상계에 있어서의 가치의 성질은,

이와 같이 상대적이지만

동시에 그 때의, 시대적 배경에 의해서도 가치관이 바뀐다.

원수 갚음은, 옛날에는 미담이었지만, 지금은, 살인죄에 해당된다.

부모를 위해서는, 딸이 매춘을 강요당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서는 자식에게도 주권이 있으며

매춘 그 자체도 금지되어 있으므로,

무법적 행위가 아니고서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가치관은,

시대적 배경, 사회의 구조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다.(=도덕)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시대적 배경이나 사상 혹은 사회 구조에 따라서

인간의 근본이 되는 가치관을, 바꾸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법은

언제,

어디에서도,

누구에게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며,

누구라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정법을, 마음의 양식으로 하여,

매일의 생활에 살려나간다면

우리는 항상, 미혹에 빠지는 일은 없으며,

정법의 길을 걷고 있다면,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여,

신의 자식으로서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때 우리의 마음은, 대우주의 마음과 조화되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6/95

본래의 평안의 경지에 이르고,

신의 빛에 싸여,

실재계인 저 세상에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주 즉아 (宇宙卽我)를 깨닫기 위해,

우주와 동화된,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제 3 장 인생의 의의와 정도


1. 색심불이(色心不二)와 과학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질문에 대해서,

‘색(色)이란, 눈에 비치는 만물만생(萬物萬生)을 일컫는다.’

라고 대답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만물만생(萬物萬生)에는, 모두 색채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적 청 황(赤靑黃)의 삼원색은, 색의 배합에 따라서 몇 만색으로도 변한다.

대자연을 보더라도, 춘하추동에 따라서 그 색채가 변화하고 있다.

색이란,

우리의 육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물질도 또한 색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무지개의 칠색(七色)의 범위뿐이다.

0.00004~0.00007센티미터 정도의 파장(波長)의 범위밖에 보지 못한다.

무지개의 양끝의 색은, 자색(紫色)과 적색(赤色)이다.

자색에서부터, 자외선(紫外線), 엑스선,알파선, 감마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또한 적색으로부터는, 적외선, 초단파, 단파, 장파로 주파수가 달라진다.

이들 세계를 우리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존재를 부정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전파도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오관으로는 감지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색’이라는 말은, 간단한 것 같으면서 기실 복잡한 세계이다.

전파 같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차원을 초월한 세계의 존재라고 하겠다.

이것은 에너지이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빛에 대해서도 그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전파도, 빛도, 열도, 에너지입자이다.

눈으로 보는 색체의 세계의 연장선상에 있는 세계이기는 하나,

물리적 차원이,

에너지, 즉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므로 그 차원이 달라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색심불이’

라고 하는 철학적인 표현을 쓴다.

물질과 에너지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색’이 물질,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7/95

‘심’이 에너지라고 보면,

법칙에는 변함이 없다.

물질이란,

우주 공간에 체적과 질량을 가진 것이라고, 물리학에서는 정의하고 있다.

물질의 본질은, 에너지입자가 집중고정화된 것이므로,

그것이 분산되면, 에너지입자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심(心)’은 의식(意識),

또는 혼의 중심인 우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육체주(肉體舟)와 선장이 동거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육체주만으로는 활동할 수 없다.

또한 혼(魂), 즉 의식(意識)인 육체주(肉體舟)의 선장만으로도,

이 지상계에서 행동하고, 현상화하기는 어렵다.

역시 이 지상계의 법칙에 따라

육체와 마음은, 일체가 되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다.

잠들어 버리면,

육체는 침상에 정박하고 있는 배(舟)일 뿐,

의지(意志)를 가지고 행동할 수 없다.

의지(意志)는, 선장인 혼.

즉 의식인 마음의 영역의 움직임인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에너지불멸의 법칙, 질량불변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E=MC²

E는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에너지이다.

그리고 C는 빛의 속도를 표시하고, M은 질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곧 질량과 빛의 속도의 적(積)은,

일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말이다.

또한 열의 문제에 관해서, 프랑크는 그의 실험을 통해서,

상수(常數)를 발견하고,

진동수(振動數)와의 적(積)에 의해서 열 입자의 에너지를 설명하고 있다.

E=𝐡𝐯

𝐡는 프랑크 상수로서

6.626x10²⁷(erg*sec)인 것이다.

𝐯는 진동수를 나타내고 있다.

E는 열. 에너지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의 의미도,

현대 물리학에서 증명하고 있는 자연의 법칙이다.

다시 말해서 차원이 다른 세계와 물질은, 동거하고 있다는 뜻이다.

(주; 비유해서 설명한다면,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자동차와 운전기사의 관계라고 할 수 있지요.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8/95

 자동차와 운전기사가 한 몸이 되어 굴러간다는 말이지요...

 사족이지만,

 비물질인 영혼이 물질인 육신을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칼로리가 필요할까요.

 매일 자야하는 잠은 영혼이 쉬고 에너지를 공급받는 일이지요.

 자동차에 연료가 아무리 많아도 기사는 두시간마다 쉬듯이...)

외력(外力)이라고 하는 연(緣)에 의해서,

물질은 형태가 변화하지만, 질량도 에너지도 변화하지 않는다.

‘공’(空)

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공’(空)

을 비어 있는 것이라든가, 허무하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와 같은 해설은, 지(知)만으로 공부한 작은 틀 속에서,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의 설명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를 공부하고,

마음과 행(行)을 실천하고,

집착을 버리고,

족함을 알아서,

불생불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다.’

와 같은 애매모호한 풀이는 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이론으로서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고,

차원을 넘어서 실재의 세계로 가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차원이란, 물질적 에너지의 차원과는 또 다른,

정묘한 의식계의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언젠가는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저세상

곧 실재계를 말한다.

만물을 만들어 내는 근본의 세계다.

그것도 ‘연’(緣)이라고 하는 작용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X축, Y축, Z축으로 이루어지는 입체의 삼차원의 현상계이다.

즉 물질계이다.

이 물질계로부터 X축, Y축에 의해서 묶어진 2차원의 세계를 생각해 보자.

영화의 스크린이 2차원의 세계이다.

여기에 투영되어 비추어져 나오는 화면을 상상해 보자.

이를테면 전쟁의 뉴스를 보도한다.

(자기의 귀여운 어린 아이가,

전쟁터에서 막 적병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려 하고 있다.

그의 신체는 온 몸이 상처투성이이다.)

그 뉴스를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의 양친,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2차원에 투영되고 있는 그 아이를, 아무도 구해 낼 수 없다.

소리를 질러도 통하지 않는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 관계가, 3차원에서 투영하고 있는 영사기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9/95

2차원의 스크린과의 연관 관계인 것이다.

뉴스 필름은, 3차원의 세계에서 취재한 것으로서,

그 생생한 모습은, 뉴스 카메라맨이 포착한 것이다.

삶의 모습이라고 하는, 인간 사회가 엮어낸 사건이,

카메라맨이란 연(緣)에 의해서, 기록된 것의 재현인 것이다.

그리고 또, 3차원의 세계를 투영하고 있는 세계가,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의 세계로서, 신의 마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다차원 세계가 참된 실재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비 물질적인, 가장 정묘한 세계로서,

자애에 찬 세계이며, 전혀 거짓이 없는 대조화의 세계이다.

물질은, 모두 에너지가 차원을 달리하여 변화한 것이다.

식물도 본래는 식물로서의 의식의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다.

다른 동물도, 같은 의식의 단계에서 생존을 계속하며,

3차원의 고체적 불안정한 세계를 왕래하며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다.

3차원으로부터의 연속된 저쪽 세계에는

부조화한 상념의 영위기(靈圍氣)에 감싸인,

비 물질적인 암흑의 세계도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지옥계이다.

거기에는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똑같은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애를 잃은 사람들의 마음이 만들어 낸,

집단의 수행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곳이다.

신리를 깨닫고, 마음이 조화되어 있는, 우리들 그룹 가운데에는,

차원을 넘어서, 그러한 실재계의 생활을 자유롭게 보고 온 사람들도 있다.

현상계의 육체주로부터, 광자체의 배가 분리되어,

차원이 다른 천상계랑, 지옥계에 가서,

지난 날에 이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과도 만나고 오는 것이다.

마음이 조화되면, 그와 같은 왕래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현상계의 어느 곳이든, 희망하는 장소에,

그 광자체(光子體)의 몸으로 가서, 보고 오는 것도 가능하다.

현재의 육체주(肉體舟)는, 물론 그곳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광자체라면 갈 수 있다.

이 육체주와 광자체의 배와는,

영자선(靈子線)이라고도 하는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탯줄’과도 같은 것으로써 연결되어 있다.

이 영자선은, 무한히 늘고 줄어드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광자체(光子體)에도, 우리의 혼 * 의식은 타고 있으므로,

도착한 행선지의 여러 현상을 뚜렷이 포착할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빛도 입자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소리도 입자라고 말할 수 있다.

소리의 파동도, 매체를 통해서보면,

입자가 물결이 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인간의 내장도 뚜렷이 보이고, 결함도 확실히 알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0/95

왜냐하면 차원을 초월해서 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은, 모든 현상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마음의 상태나 생각하는 것은,

의식에 기록되는 녹화테이프처럼, 전부 기록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테이프는 지워지지 않고 남는다.

아욕이 강한 사람들은, 붉은 문자로 기록되며,

중도를 이탈한 행동이나 상념도 붉은 문자로 기록된다.

원한, 질투, 노여움, 비방, 자기보존, 자아아욕 의 생각 등,

모두 의식 속에 기록으로 남는다.

특히 자비깊은 배려의 마음. 행위는,

황금색의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중도의 생활을 하고 있으면,

일반으로 쓰는 흑(黑)자로 기입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연애를 하고 있는 경우등은, 상대방의 이름이, 수 없이 기록되어 있다.

번뇌가 많은 사람들의 의식은,

어두운 영위기(靈圍氣)에 감싸여, 매우 무겁다.

중도를 걷는, 편협하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은,

광명에 차 있으며, 매우 가볍다.

붉은 글자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어두운 상념을 지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1초 1초의 사실이, 마음과 행위가, 모두 우리의 의식 속에 기록으로 남는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어두운 상념을 만들지 않는 생활이 중요하다.

만약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냈을 때에는,

중도라고 하는 마음의 자(尺)로써,

자기가 생각한 것, 행동한 것을, 잘 반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인 이상 잘못도 범한다.

반성의 기회는,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자비의 빛이다.

우리들의 기록의 테이프에는,

반성을 하면 부조화한 부분의 옆에,

그 반성의 사실이 기입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의 기록 장치는, 가장 정묘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 그룹의 사람은,

저마다의 수호령이나 지도령으로부터, 그 사람에 관한 일을 들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음속의 기록과 수호령의 조언을 종합해 보면

그 사람의 결점이나 장점을 절로 알 수 있다.

물론 마음에는 뚜렷한 형태가 있는데,

그것을 심안으로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둥근가 비뚤어졌는가 하는 것도, 금방 알 수 있다.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후광에 싸여 있으며,

그 곁에는, 반드시 수호령이나 지도령이 서 있다.

반대로, 어두운 상념과 부조화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1/95

어두운 영위기(靈圍氣)에 의해 뒤덮혀서, 자주 빙의령(憑依靈)에 빙의되어,

질병등의 원인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마음의 정묘함을 알게 되면,

인간은 얼마나,

그 생각하는 것. 사고하는 것이 중요한가하는 것에 주의하게 될 것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생각이나 행위는,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교육자나 의사들이 이와 같은 마음구조에 의해서,

보다 풍부한 마음으로,

학생이나 환자를 볼 수 있다면, 그보다 나은 일은 없을 것이다.

비뚤은 사상을 가르치지 않고,

마음있는 학생을 키워낼 수 있을 것이다.

일체의 질병의 원인도 추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의 세계로부터,

올바르게 3차원의 여러 현상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결점을, 용기를 가지고 수정하고,

편협되지 않는, 올바른 마음을 기준으로 한 생활을 보내고,

그 속에서 완성해가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공(空)의 세계는, 허무한 것이 아니며

“있다고 생각하면 없고, 없다고 생각하면 있는 것”

과 같이 애매한 것도 아니다.

이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고 되풀이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공(空)과색(色)은 윤회하고 있다는 것을,

한자로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물은 고체로도 기체로도 변한다.

압력이나 열(熱)의 연(緣)에 의해서, 세 가지의 상(相)으로 변화하지만,

물의 본성인 H2O는, 잃지 않고 있다.

공중에 증발한 수증기는, 공중에서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을 뿐이고,

열의 강하(降下)나 압력과 같은 연(緣)에 의해서,

다시 비나 눈이 되어, 형태를 바꾸어, 지상에 내려온다.

이것도 공즉시색(空卽是色)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는

윤회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실재계-즉 공(空)의 세계에서

양친과의 연(緣)에 의해서

이 현상계-즉 색(色)인 육체주(肉體舟)를 부여받아

험난한 고락의 인생항로를 수행하고,

이윽고 다시, 육체주와 광자체를 잇고 있던 영자선이 끊어져 (死),

다시 실재계-즉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2/95

실재계와 현상계는,

즉 이승과 저승의 차이가 있고, 표리일체(表裏一體)의 세계이다.

‘이’와 ‘저’의 차이일 뿐, 세상에는 다름이 없으며,

당장에라도 갈 수 있는 곳이 저 세상이다.

생과 사는, 영원한 윤회요,

신의 마음이며, 신리(神理)이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으니까 없는 것이다,

죽으면, 시신밖에 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인 견해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시신이,

생존하고 있던 본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시신은, 인생항로를 건너 갈 수 없게 되어버린, 육체주의 잔해이다.

이 잔해에 집착을 지나치게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현상계에 대한 집착이며

그래서 그것 자체가 고(苦=괴로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지옥계를 전개하여,

그 장소에서 지옥령으로서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왜 지옥으로 떨어졌는가, 알지 못하고 있다.

말법의 세상이 되면,

‘올바르다’ 고 하는 마음의 기준이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불단이나 신사(神社), 사찰(寺刹)을 찾아 불경이나 올리는 일이

신앙이고, 신심(信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와 같은 형식주의에 의존하고 있다면,

신불의 가피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 버린다.

스스로의 마음과 행을 바르게 하지 않고,

마음을 욕망의 구름으로 감싸서,

아무리 빌어도,

그것은 지옥령이나 동물령의 세계에 통해 버리는 것이다.

‘공’의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하다’등 으로 해석 되어버린 것이다.

경(經)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行)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우상이나 만다라에 공양하는 것은 “공염불”로 끝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과 행을 바르게 한다.

그럴 때, 신의 힘이 주어지는 것이다.

자력 우선(自力優先)이야말로,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다.

허무맹랑한 생각을 버림과 동시에, 종래의 그릇된 습성을 깨뜨리고,

신리의 실천에 매진하는 생활이 중요하다.

나의 지도령은 앞의 질문에 답하고,

 “그렇다.

 일체의 모든 현상은,

 공(空)의 세계에 의해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3/95

 법칙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神)의 의지(意志)라고 말할 수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색즉시공에 대해서 질문한 사람이 마음속으로

‘과연 그렇구나.’하고

수긍하는 파동이 나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마하*지관(摩詞止觀)”

이란 질문에 대해서는,

‘위대한 반성’

이라는 대답이 된다.

‘멈추어서 본다’ 라는 뜻이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일, 행하고 있는 일을, 확실하게 판단해서,

중도인가. 극단적인 행위인가를,

마음을 가라앉혀 반성하고

만약 그릇되었으면, 마음으로부터 정정하여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을 보다 풍부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어떤 지도자들은, 잘 선정(禪定)하여,

무(無)로 되는 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다.

마음속의,

원한, 비방, 시기, 미움, 노여움, 질투, 정욕,

권력욕, 금전욕, 질병에 대한 원인등,

심적(心的) 원인을 반성하지 않고,

어두운 구름이 낀 상태에서는,

지옥령이나 동물령들에게, 그 의사(意思)를 지배되어 버리는 결과로 된다.

반성에 의해서, 이제까지의 마음의 그늘을 제거하고,

감정, 지성, 이성, 본능, 상념, 그리고 상념, 의지의 영역에

비뚤어짐이 있는가 없는가를 점검하여,

둥글고 넉넉한 마음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

우리의 마음도 육체도 광명의 빛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보다 조화된 영위기(靈圍氣)가 만들어 지면,

내재된 위대한 지혜를,

자기의 것으로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내재한 위대한 지혜란,

반야바라밀다라고 일컬어지는,

전생윤회(轉生輪廻)의 과정에서 배워온,

불지(佛智)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재한 지혜의 보고의 문이 열려지는 것이다.

이승에서 배우지 않았던 일이라도,

과거세에서 배웠었다면, 당장에 알아버린다는 뜻이다.

현세뿐 아니라, 실재계에 가는 것도 가능하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4/95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항상 중도의 위치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란 것은,

무한에 가까울만큼, 변화무쌍한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자유자재인 만큼 항상

‘올바르다.’는 기준을, 확고하게 지니고,

자기 자신의 생활을 기준에 맞추어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마음의 자(尺)로써,

스스로의 상념과 행위를 멈추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마하지관’의 바른 의미이다.

천태(天台)이후의 승려나 학자들은,

이것을 매우 어려운 문제로 만들어 버려서,

그 결과 스스로의 마음과 행을 잊어버렸다.

그 까닭은 지(知)만의 해석으로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불교는, 학문이 아니라,

도덕이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질문자는, 학문적인 체험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지(知)만이 앞서 가는 듯 했다.

행(行)이 따르지 않는 불교는,

 정법도 아니며, 신(神)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조화된 광명에의 길은, 행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빛(光)’

‘행(行)’ 이, 정도(正道)의 모습이다.

제 3 장 마음의 원점

2.중도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의 강연회는, 매 토요일과 일요일 각지에서 열리게 되었으며, 질문자도 많아졌다.

그 중에서, 특히 알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올바르다.’

라고 하는 기준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대학생이 물은 것이었다.

올바르다는 것은,

그 나라마다의 지도자의 생각에 따라서도 다를 수 있고,

생활환경에 따라서도 그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러나 올바르다는 것은,

권력이나 인간의 지혜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대자연의 법칙 속에,, 그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복잡하게 생각하므로, 도리어 어렵게 만들고 만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5/95

자기의 형편에 이로운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무슨 일이라도,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이 있다.

그러나 선악의 구별 없이, 다른 사람을 돌보아 준다는 것도

올바른 일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선(善)은 선(善),

악(惡)은 악(惡)으로서,

매듭을 분명히 짓는 행동이 아니고서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된다.

자기의 입장을 중심으로, 노여움이나 원한의 상념을 마음에 숨긴 채,

겉으로만 상대방을 위하는 행동으로, 위장하고 있는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가듯,

몸도 마음도 지치고 말 것이다.

진실로 상대방을 용서하는, 그런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개고, 평화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입장에 집착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보존으로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도,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을 때에만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는 형식만의 위함은, 괴로움을 낳을 뿐으로,

마음의 짐은 배로 무거워질 뿐이다.

자기보존도, 자아아욕(自我我慾)도,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상대방이라고 하는 존재를 망각하고 있다.

일방적인, 한편으로 치우친 생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올바르다고 말할 수 없다.

“올바르다”

는 것은, 한 쪽으로 기울지 아니한, 중도의 생각과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나와 모든 타인을 포함한 조화된 생활이,

만물의 영장인 인류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이다.

편협되지 아니한 중도란, 대체 어떤 것일까.

우리의 육체 보존에 없어서 안되는 물은, H2O라고 하는 분자식으로 표기 된다.

H2인 수소도, O2인 산소도, 지극히 불안정한 것이다.

공기 중에 산소나 수소가 너무 많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O2인 산소는, 모든 것을 산화시키고 연소시킨다.

H2인 수소도, 애드벌룬이나 기구등에 사용되기도 하고

바테리의 충전을 하고 있을 때에도 나오는 것으로서, 폭발력이 강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연성, 폭발력이 강한 것이지만, 조화되면,

H2O라고 하는 가장 안정된 물이 된다.

더욱이 불타고 있는 것을, 소화(消火)시킬 수도 있게 된다.

물에는 산성분이 강한 것과, 알카리성의 것이 있으며,

증류수는 그것이 중화된 아름다운 물이다.

우리의 육체적 조건에 적응될 수 있는 것은,

가장 중화되어, 양극단과는 무관한 물이 좋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6/95

체질이 산성분이 강한 경우에는,

알카리성의 물이나, 매실장아찌같은 알카리성 식품을 먹음으로서,

체질의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신체를 보면, 물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모든 생물에게, 물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것이다.

어머니인 대지를,

태양의 열, 빛의 에너지와 함께, 적당한 온도로 유지하는 역할도 한다.

어떤 때는, 얼어붙어 은세계를 만들고, 또 어떤 때는, 유동하여, 대지의 청소자가 되어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대자연에 조화되어 있다.

또한 어떤 때는, 은자(忍者)처럼 기체가 되어 모습을 감추고

하늘 저편에 집을 짓고 있다가, 이따금, 먹이를 사냥하듯 대지로 날아든다.

변화 자재의 힘을 지니고 있다.

대지의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어, 모체의 혈액과 같이 수맥을 이루어 내닫고,

어떤 것은 모체의 열에 데워져 지상으로 분출하여,

사람들에게 온천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샘이 되어 흘러나와, 아름다운 실개천을 만들고,

스스로 많은 친구와 교제하고, 스스로 진로를 정해간다.

친구는 친구를 불러,

유유상종의 법칙에 따라 내(川)가 되어, 도시와 마을 근처를 아름답게 흘러간다.

먼지와 오물을 삼키면서 대하를 이루어,

마침내 바다로 들어가서 대조화에의 길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물이다.

하늘과 바다의 조화됨에 따라, 다시 깨끗한 물이 된다.

스스로 길을 찾아, 스스로 조화 속으로 녹아들어, 영원한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것이 물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대기의 오염 때문에,

그 깨끗한 물이 지상을 오염시키는 사태를 맞고 있다.

우리도 마음을 잃으면, 그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행동이 없는 실천은, 가공(架空)의 원칙으로 흐르기 쉬운 것이다.

자연의 흐름에 거역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진로를 정하여,

대조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물의 모습을 볼 때,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고 생각 한다.

인간은, 물과 같은, 용기도 지혜도 노력도 없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결점에는 눈이 어둡고

타인의 결점에 대해서만은, 유독 눈에 심지를 세우기 쉽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억눌러 이기는 극기야말로, 중요한 일이 아닐까.

스스로의 눈에 비치는 부조화한 모든 현상을 제어하고,

스스로의 귀에 들어오는 잡된 소리를 제어하고,

자기의 편의만을 입에 담는 것을 억누르고, 후각과 미각의 유혹을 제어하고,

일체의 집착을 끊고, 족함을 안다면,

인생항로의 거친 파도는 잠잠 해 질 것이다.

평안이 깃든 광명에 찬 대해 속으로, 조화되어 갈 것이다.

그래서 설령 대해(大海)에 대조화되는 물도,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7/95

그 개(個)의 물의 본성은 변함이 없는 것과 같이,

우리들, 각자(個)의 생명의 존재도 변함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의 흐름마저도,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에서 고타마 붓다가 설법한 올바른 마음의 가르침을,

강가강의 흐름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처럼,

내재된 의식을 열었을 때,

“올바른”마음의 가르침으로서,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물에 대해서는 말했는데,

NaCl(소금)은 또 어떠한가.

이것도, 생물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것이다.

서로 양 극단에 있는 NaOH(수산화나트륨)의 염기성분과,

HCl(염산)의 강산성의 염산이 화합하여,

중화되어 조화된 소금이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단맛과 매운맛도 소금넣기 나름,,, 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단맛과 매운맛의 양극단도, 소금에 의해서 중화되어 버린다.

고기나 야채 따위가 썩지 않도록 이용되며,

우리와 끊으려해도 끊을 수없는 연(緣)의 의하여, 묶여 있는 것이 소금이다.

또한 악귀를 쫓고 액을 물리치기 위해서, 소금을 뿌리는 습관도 있다.

이와 같은 습관은, 중화(中和), 조화가 근본이지만

최근에는, 자기에게 이롭지 못한 사람한테도 소금을 뿌리곤 한다.

뿌리는 형식보다, 마음가짐 쪽이 더 반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금을 뿌리는 사람은, 좀체로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맑게 한다는 것은, 조화한다는 뜻이다.

이 뜻을 알고 있다면, 소금을 뿌리기 전에,

사람끼리 서로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함으로써,

상호간에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선결 문제이다.

마음을 터 놓고 대화하기 위해서는, 자기 중심의 생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탐지하려 들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어서는,

불가능한 노릇이다.

자기의 결점도 장점도 드러내 놓고,

중도의 마음으로, 상대방도 자기 자신도 올바르게 보는 것이,

조화로 가는 첫걸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쌍방이 편협되지 않는 판단과 행동,

이것이 중도이며,

대조화에로의 길로 통한다.

하물며 권력이나 무력으로 상대방을 지배하여도,

일시적인 겉만의 조화는 이룰지라도, 결과는 혼란을 낳을 뿐이다.

육체적인 행동에 제한을 가하더라도, 중도의, 조화된 환경은 이루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으로 아무리 제약이 가해지더라도,

선장인 그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속에서 납득 된 것이, 외면적인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8/95

참된 조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의 의사(意思)인 대조화는,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열, 빛의 일체,

대자연의 조화로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자비의 모습이고

사랑의 모습이며

신의 마음의 현현이다.

고타마 붓다가 설법한,

법화경의 방편에도

진흙의 늪에 피는 연꽃이 인용된 것처럼,

대자연은 항상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스승은,

소금의 상태를 통해서도,

중도의 조화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제 3 장 인생의 의의와 정도

3. 환경의 조건과 마음과 행위

우리의 육체적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위 속에 산이 많으면, 위산과다가 되어 혈액까지 산성화된다.

그 때문에 육체적인 부조화가 생겨, 여러 가지 병의 원인이 된다.

반대로 무산성이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조화된 것이 중요하며, 음식물도,

한 쪽에 치우친 것은 육체적 부조화를 불러일으킨다.

그 증거로, 음식 가림이 많은 사람들 중에는, 반드시 병약한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음식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쌀, 보리쌀, 생선, 쇠고기, 돼지고기, 날짐승의 고기, 채소류, 과일 등

모두 생명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들의 육체보존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제공하여,(=살신공양)

만물의 영장(靈長)에게 공양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은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생명을 내던져 공양하고 있는 자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은 물론이고, 보은의 행위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우 보은이란, 그들을 헛되이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또한 그것을,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와 살과 뼈가 되어주는,

동식물을 헛되이 낭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식사를 할 때, 합장하고 먹는 것만이 감사가 아니다.

마음과 행위에 있어, 감사하고 보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음식물에 대해서, 미식이나 과식, 무절제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위장을 비롯하여, 각 기관을 위해서는,

아침, 낮, 저녁, 정해진 시간의 식사가 중요하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79/95

잘때가 되어, 위 속에 음식물을 들여보내는 것은,

혹사로 되어, 위도 피로해져 버린다.

육체적인 부조화를 만들어 내고 만다.

위장은 위장으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 선장인 마음의 판단으로,

제멋대로 음식물을 들여보내면, 위장이 쉴 수 있겠는가.

역시 위를 소중하게 다루어 주는 것도, 건강 유지에 제일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선장인 혼 * 의식의 중심인 마음이 병들거나,

지(知)가 앞질러가거나, 육체주(肉體舟)가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에도,

마음과 육체의 밸런스를 무너뜨리고 마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육체도 마음도,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고타마 붓다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불이일체(不二一體)이다.

위장의 컨디션도, 조화된 마음과 육체의 밸런스에 의해서 안정된다.

우리가 호흡하고 있는 산소의 양도, 21%가 필요한데,

조금만 적어서는 육체는 보존할 수 없다.

공해 때문에 산소가 결핍되어,

육체적 부조화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나무, 풀, 푸성귀 따위가

대기 속으로 내보내는 산소가 결핍되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지 개발, 택지 조성 등으로 말미암아,

초목이 제거되어 자연 파괴가 일어나고,

공장이나 자동차의 배기가스, 비행기의 배기가스, 아황산(亞黃酸)가스 등과 같은,

문명이 만들어 낸 폐기물이, 원인이 되어,

신(神)이 부여한 조화있는 대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외면해서는 안 되며,

공해 방지를 위한 운동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에 의해서 배설되는 폐수등의 영향으로,

야채, 생선류마저도 정상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육체주(肉體舟)의 보존도 위태로운 지경이 되고 있다.

신(神)은, 모든 것에 조화된 상호관계를 부여하고 있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그것을 파괴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마음의 눈을 돌려, 대자연을 수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각(嗅覺)은 어떠한가.

만약 ‘후각따위는 필요 없다.’고 한다면,

가스 회사에서 사고가 일어나도, 우리는 가스가 누설된 것을 알지 못할 것이며,

가스에 중독되어 죽고 말 것이다.

반대로, 후각이 과도하게 발달되어 있으면 어떠할까.

악취만 맡게 되어, 이것도 큰일일 것이다.

아마도 살기 어렵게 될지 모른다.

역시 중도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0/95

중간 정도의 후각으로서만, 안정된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불전(佛前)에 향을 피운다.

이것은 고타마 붓다의 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던 습관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체취가 강하여, 서로가 거북스러웠기 때문이다.

특히 사로몬이나 사마나(修行者)들은, 숲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독벌레등에게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약초나, 나무의 열매의 즙액등을,

몸에 발랐기 때문에, 역겨운 냄새가 났다.

그 악취를 피하기 위해서, 향불을 피워서, 냄새를 부드럽게 하는 것이,

서로의 예의요, 인사였었다.

몸을 씻더라도, 탕 속에 들어가서 목욕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이러한 습관이, 향을 피우는 형식이 되어 버렸다고,

나의 수호령이 가르쳐 주었다.

스컹크나 족제비 따위는, 강렬한 악취를 내뿜음으로써,

외적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독가스 따위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후각도, 중도 조화(中道調和)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우리들의 시각(視覺)은 어떠할까.

우리들의 시각의 범위는, 무지개의 일곱 가지 색의 범위밖에 볼 수 없다.

볼 수 없는 세계쪽이 훨씬 더 많다.

공중에 엇갈려 날고 있는 전파. 적외선, 자외선, 등,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운동 상태를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육체적, 물질적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완전히 볼 수 없고, 손으로 더듬는 상태이다.

하물며 차원이 다른 의식의 세계등은,

대부분의 인간은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있는 듯한, 없는 듯한, 세계를, 몸으로 느끼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들의 시각이,

적외선이나 자외선, X선 등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아름답게 조화된 자연계의 색채, 경치도,

전혀 다른 세계로 되어 버릴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만약 X선의 눈으로 본다면,

모두가 해골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야말로 야단이 날 판이다.

역시 극단의 적외선이나 자외선을 통해서 볼 것이 아니라

 무지개의 아름다운 색채의 세계만으로 좋은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조화된, 가장 좋은 주파수의 세계만 보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도 신의(神意)라고 할 수 밖에

1초에 50~60사이클 정도의 주파수를 가진 전등도,

1초에 50~60회 정도,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고속도 사진을 찍어보면, 점멸의 상태를 똑똑하게 확인할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1/95

우리들 눈의 특징으로서, 켜졌다, 꺼졌다 하고 있어도,

잔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연속적으로 켜져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역시 우리의 눈도 절대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

그러나 대자연의, 조화된 색채만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것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인지도 모른다.

아름답게 꽃이 피는 화창한 봄날,

나무숲이 짙푸르고 햇살이 강렬한 한여름의 바다와 산,

황금색으로 결실한 벼이삭이 바다처럼 출렁이는 가을의 들판,

그리고 단풍잎의 아름다움,

은백색의 숲을 이루고 있는 겨울 경치,

이처럼 철따라 변해가는 사계의 아름다움,

대자연의 변해가는 풍경은, 마음속까지 풍요롭게 해준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

이것 또한 조화이고, 중도이다.

그러나 그것 이외에. “올바르다”라고 하는,

편협되지 않은 중도의 생활을 즐기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용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광명에 차고, 신의 자애의 빛으로 감싸이기 때문에,

마음의 눈이 열려 간다.

그래서 마음의 눈이 열리면,

한층 더 아름다운 대자연의 광경을, 보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부조화한 내장(內臟)도, 자연색 그대로 똑똑히 식별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차원을 넘어선 세계의 풍경을 시작으로,

저 세상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도, 보이도록 되는 것이다.

육체로부터 나오는 부드러운, 본래 황금색의 후광이,

자색이라든가 핑크색 또는 붉은색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도 마음의 조화도가 낮은 단계에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광경은,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아도,

보려고 하는 의식이 작용하면, 당장에 볼 수 있다.

내가 설법하고 있는 정도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차원을 초월한 저 세상을 포함해서,

우리들 곁에 있는 수호령이나 지도령의 모습도,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많다.

지옥령이 빙의하고 있는 자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도 가능하다.

입고 있는 옷의 무늬부터 옷감의 짜임새까지,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다.

마음의 조화를 잃은 사람들은, 어두운 영위기(靈圍氣)에 싸여,

같은 마음을 가진 지옥령들에게 빙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지금, 3차원의 입체의 세계에 살고 있지만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2/95

2차원의 평면의 세계에 투영되는 영상쯤은, 간단하게 볼 수 있다.

그것은 3차원에서 2차원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고차원의 세계를 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고차원에 통하고 있기 때문에,

3차원도 2차원도 모두 내려다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차원의 세계로부터 저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교만해지거나, 겸허한 마음을 잃게 되면,

마치 전파를 통과시키지 않는 터널에 들어간 것처럼,

수신기는 전파를 잡지 못하게 되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자기에게는 엄하고, 타인에게는 관용하여,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는 벼이삭.’

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도의 생활 이외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의 체온은 또 어떠할까.

역시 35도에서 37도 정도가 안정된 체온이다.

만약 이 체온이 0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얼고 말 것이다.

반대로 100도나 된다면 어떠할까.

부글부글 끓고 말 것이다.

39도나 40도의 고열이 되면, 우리의 의식은 몽롱하게 되고 만다.

장기도 비정상이 되고 만다.

역시 우리의 체온도, 적온(適溫)이어야 한다.

기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외기 온도가 40도 50도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현세의 염열지옥이 될 것이다.

반대로 영하 20도의 저온이 계속된다면, 자유로운 행동이 가능할까.

외기온도는, 체온보다 12도~10도 정도 낮은 온도가,

신체에는 가장 조화된 온도라 하겠다.

이와 같이 체온도 외기온도도, 우리의 육체조건에 맞게,

중도의, 조화된 상태가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있다.

목욕시 탕 물의 온도도,

너무 뜨겁지 않고,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는 정도가 가장 좋다.

역시 신체에 알맞은 적온이 좋다는 말이다.

대지의 토양도, 산성, 알카리성의 비율이 한편에 치우치면, 작물의 결실이 나쁘다.

역시 중화된 토양이, 농작물에는 좋은 것이다.

산성분이 강한 토양에는, 비료에 중화제(中和劑)를 넣어서 토양의 개량을 꾀한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태풍이나 강우에 의해, 흙속의 독소를 흘려 보내기 때문에, 대단히 혜택받은 것이다.

이와 같이 토양도 조화되지 못하면, 작물에 영향을 미친다.

대기압(大氣壓)의 경우는 어떠한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3/95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은, 해발(海拔)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1기압(수은주 760밀리)이 가장 안정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기압이 높아도, 또한 낮아도, 우리의 육체 조건은, 그것에 조화되기 어렵다.

저기압이거나 반대로 고기압이 되면, 육체적 조건은 매우 불안정해진다.

우리들의 생활에서도,

기압도 또한 중도로서, 조화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수신기의 회로에 대해서는 어떤가.

방송국으로부터 발신되는 전파를 수신할 때에는,

전파와 수신기의 주파수가 일치되었을 때가, 최고로 감도가 좋다.

다이얼의 바늘이, 희망하는 주파수의 좌우 어느 쪽이건 벗어나면

전파를 깨끗하게 수신하지 못한다.

정밀한 수신기일수록, 다이알의 바늘도 정묘한 법인데,

병사구(並四球)라고 하는 구식 라디오로 수신할 경우는,

 다이알의 바늘도 매우 거칠다.

주파수가 일치했을 때의 수신기의 상태는, 입력(入力)이 크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수신기도 조화되지 않는 한, 주파수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마음의 조화도에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신기에도 성능의 차가 있듯이,

인간의 영위기(靈圍氣)도, 사람마다 그 정묘함이 다르다.

중도의 법을 마음의 척도로 하여 생활하며,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독선적인 부조화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는,

의식계의 단계에 있어서, 큰 차이가 난다.

집착으로 인하여, 만들어진 괴로움의 정도도,

스스로의 마음의 상태에 의해서 빚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사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현대 사회의 사상을, 크게 나누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주의(主義)도, 마음을 잃고 있다.

그것은 사상의 근본이, 물질경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스스로 이룩한 물질문명에 의해서,

보다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위대한 마음의 존엄을 망각하고,

형식적 종교에 마음의 위안을 구했기 때문에,

생활 속에, 습관 속에, 그것이 뿌리를 내리고 말았다.

그것은 자력을 망각해서,

타력본원(他力本願)의 자기도취에 빠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으며,

물질경제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재산이나 경제력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4/95

이라고 하는 인생관으로 변해 버렸을 때,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의 위대함을 잊고 만다.

그래서 스스로, 족함을 잊고, 욕망의 늪으로 떠내려가서

몸도 마음도 진흙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꼴이 된다.

그것은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 낸

“업”이다.

이 지구는, 무-대륙, 아틀란티스 대륙의 함몰 등

몇 차례의 천변지이(天變地異)를 체험해 왔다.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태어나면, 이 세상만이라고 생각해버려,

자아아욕(自我我慾)의 일생을 보내고 만다.

천변지이(天變地異)는, 그러한 인류에 대한,

그 시대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신의 경고였던 것이다.

인류가, 이 지구라는 장(場)을 수행장으로서 선택하여,

다른 천체로부터 이동해 왔던 당시는,

지구는 매우 조화된 유토피아였었다.

사람들의 마음은,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떠 있었고,

실재계와의 연락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족이 불어남에 따라, 저마다 종족 보존의 자아가 싹터서,

육체적 동족의 그룹은, 공동체로부터 분리해 갔으며,

마침내 스스로의 생활의 장(場)을 확보하기 위한, 경계가 만들어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종족의 분열에 의하여 또 세밀하게 쪼개져서,

생활 구역을 확립함에 따라서, 대립도 또한 생긴 것이며,

부족의 우두머리가, 각각 그 부족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원시 공산체제는,

자연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의 협력이 필요했었다.

인간은 거기서 갖가지 생활 수단을 생각해 내어,

그것에 따라서 유목민이 되기도 하였고, 농경 민족, 어민이 되기도 하면서,

생활의 장(場)이 넓어져 갔다.

그러나 생활의 장이 넓어짐에 따라, 인간은 서로의 사이가 멀어져 갔다.

그래서 인류는 모두 동포라는 것을 잊어, 고립되어 갔던 것이다.

부족의 세대(世帶)가 커진다. 그러면 호족이 생긴다.

약한 부족은 멸망하고, 강한 자는 침략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동족 사이에도 싸움이 벌어져, 그 싸움이 무장을 낳고

마침내 봉건 사회가 형성되어, 엄격한 계급 제도가 확립되어 갔다.

무력에 의한 전란이 계속된다.

약한 자는 지배당하고, 무장은 세력을 확대해 간다.

전투력의 우열이 승패를 좌우하여, 무력이 강한 자가, 마침내 국가를 통일해 간다.

이 무렵부터, 봉건제도는 더욱 엄격한 계급 제도를 만들어,

그 지배력을 공고하게 다져간다.

밑바닥의 대중은,

그 무력이나 권력의 희생물이 되어, 비참한 생활을 참고 살아가야 했다.

무력은,

약한 자들의 자유를 빼앗고, 행동의 자유에도 제약을 가하여 갔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5/95

일본에 있어서의 농민 봉기 같은 것은, 그 약한 자들의 단결에 의한 투쟁이었다.

그만큼 권력자에 항거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길이 없을 정도로 악정(惡政)이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상인들은, 무기나 식량이나 의류 따위를, 무장(武將)들에게 팔아,

장사로서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다.

어떤 때는 스파이가 되어, 정보까지 팔아,

적과 자기편의 구별도 없이, 장사수완을 부려 재(財)를 축적해 가기도 했다.

투쟁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무장(武將)들은,

상인들의 좋은 봉이 되어,

결국은 경제력에 의하여, 거꾸로 상인들에게 지배를 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여기에 드디어 자본주의의 싹이 움터 나오게 된다.

그래서 경제력은 대중을 지배해 가는데,

대중은 그 속에서, 자유에 눈뜨게 되고,

물을 얻은 물고기처럼, 단결이라는 조직을 형성해 간다.

무력(武力)은, 대중을 지배하여 대중의 행동을 제한할 수는 있어도,

그 마음은 지배하지 못한다.

그 결과 스스로의 부조화하고 교만한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들도 사람의 마음을, 붙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다.

그릇된 종교를 이용하여, 악덕(惡德)한 그 지도자와 결탁하여,

 대중을 기만하고, 마음의 속박을 꾀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날조된 종교, 타력본원 종교(他力本願宗敎),

인간이 만들어 낸 우상으로서는, 결과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칼 마르크스처럼

‘종교는 아편이다.’ 라는 것을 대중은 조금씩 깨닫게 된다.

올바른 신리에 근거한 것이라면, 사람들의 병든 마음을 구제할 수 있겠지만,

인간의 지식에 의하여 조작된 종교로서는, 사람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또한 그러한 종교에 속는다는 것은,

우리의 의식까지도 썩게 하고 마는 일이다.

권력자나 귀족이, 악덕 종교가들과 짜고.

대중을 희생시키는 따위의 종교는, 아편보다도 무서운 것이다.

태양의 열과 빛은,

모든 것에 평등하며, 신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는, 일부의 특권 계급의 독점물이 아닌 것이다.

대중은 자유에 눈을 뜸과 동시에,

사회주의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싹터,

마침내 행동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도, 물질경제가 기본이어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6/95

그들도 무장(武將)들처럼 무력(武力)으로서 지배하게 되었다.

스스로 단결이라고 하면서,

계급투쟁 속에서,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인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도 한다.

사상의 통일을 꾀하기 위해서는, 가혹한 탄압을 확대하게 되어

나중에는 그들 자신의 내부에도 불만이 생겨나게 된다.

그들은 남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을 잃고

언제 권좌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 떨면서 살고 있다.

오늘의 동지는, 내일은 인민의 반역자로 낙인찍히어 실각하고 만다.

인민이란 이름을 거짓으로 빌려, 행한 독재자의 주의 주장은,

마침내는 스스로의 부조화한 행위에 비례한, 반작용이 돌아가는 것이다.

스스로의 올바른 생활 행위 속에서,

인민의 평화로운 생활을 생각하고,

자기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대중을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지도자야말로,

본래의 신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기면 관군, 지면 적군이라는 속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싸움 그 자체가, 만물의 영장이 할 짓이 아니다.

싸움은 만물의 영장으로 진화하는 과정의 동물의 행위임을,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민 대중을 향해 단결을 호소하면서,

권력자와 자본가들과 함께 투쟁을 선동하고 있는 지도자는,

그것만으로도 자격이 없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권력욕이나 자기 보존의 마음이 싹터있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을 기만하고 있는 자들이다.

“올바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라면, 투쟁의 헛됨을 깨닫고 있을 것이다.

지도자는, 인민 대중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싸움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을, 알고 있다면,

싸움은, 스스로의 마음에 불안을 주고,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은, 모두 따라올 것이다.

투쟁과 파괴에 의해 희생되는 자는, 인민 대중이 아니겠는가.

계급투쟁에 의해서, 문명이 발달해 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사상가들은,

공해라고 하는 부조화한 독물(毒物)을, 만들어 내고 있는 공범자나 다름없다.

일할 수 있는 환경에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감사는,

스스로의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고,

보은이라고 하는 행위에 의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자본주의자를 자인(自認)하는 지도자들도,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7/95

대중에 대한 사고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대중은, 그들에 대하여, 일할 장소를 제공해 준 것에 대한 보은을,

실적을 올리는 땀으로서 보답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경영자는 일하는 종업원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환경 개선, 직업병 추방 등, 후생을 통하여 친자식처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된다.

지도자는 그래서, 스스로 일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직접 가져야 한다.

지도자다운 인간성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서로가 팽팽히 맞서 있어서는, 마음과 마음의 조화는 기대할 수 없다.

자본가에게는, 품성(品性)도 교양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친절한 마음 씀씀이가 필요하다 하겠다.

올바른 중도의 지도(指導)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투쟁의 반복은,

노사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우선이다.

마음의 교류가 끊겼을 때, 신뢰는 상실되고 만다.

지금은, 사회주의자도, 자본주의자도, 서로가 마음을 잃고 있는 실정이다.

각자가 자기자신의 마음을 잃었다.

“올바른 중도”

를 마음의 척도로 하여 사는 일이야말로,

노사(勞使)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다.

인간은, 마음을 잃고 물질문명의 노예가 됨에 따라,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노이로제 환자가 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자는, 심부재(心不在)의 육체주(肉體舟)를 부조화한 지옥령에게 지배당하여,

자기가 자기를 제어할 수조차 없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도 많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닌 사람들이다.

자기 이외의 자(者)가, 마음속에서 속삭인다.

이런 사람들은, 100% 지옥령에게 빙의되어 있으며,

분열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분열증이나 조울증의 사람들은,

거의가 스스로의 작은 마음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마음의 스트레스가, 부조화한 지옥령을 불러들인 결과이다.

그 원인은,

어릴 때부터의 가정환경, 양친의 교육, 애정 과다, 애정 부족등으로부터 발생하고,

또한 스스로의 마음에 작은 틀을 만들고 만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올바른 중도의 생활을 잊고,

원한, 질투, 시기, 미움, 노여움등을, 마음에 가진 사람들인데,

타인만이 나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반성이 없는 인간의 가련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서(情緖)를 잃은, 좁은,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세계로부터,

, 탈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되찾는 일,

스스로의 부조화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8/95

마음을 수정하는 일,

이것을 하지 않는 한

그러한 사람들은, 그 병으로부터 구제받지 못한다.

“중도”

라고 하는 마음의 척도로서, 과거의 잘못을,

용기와 결단을 가지고 수정해야 한다.‘

그때, 마음의 구름은 걷히고, 부조화한 지옥령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올바르다”는 그 기준은,

대자연의 질서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마음에 평안함을 만들어주는,

무엇보다도 최선의 방법임을 명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팔정도,

이 길이야말로,

스스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의 방법론이며,

지름길인 것이다.

4. 마음이나 정신의 실체는 있는 것일까.

이 제목의 질문은,

어떤 종교 단체의, 청년부의 간부한테서 나온 것이었다.

만다라(曼陀羅)앞에서,

아침저녁으로 경문(經文)이나 제목(題目)을 올리는 근행을 하는, 광신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석가의 불교는 이미 없으며, 일련상인(日蓮上人)이야말로,

말법의 세상을 구할 분이다.’ 라고 말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가 설법한 법화경(法華經),

전교대사(傳敎大師)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진 법화경,

그 경문을 올리면서,

‘이것은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지도자들은, 갖은 말로써, 그들의 주의(主義)를 진실인 양 꾸며대고 있다.

불교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말세의 가르침이라고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 철학이니 뭐니 하면서, 지(知)에만 매달려 있을 뿐,

마음은 전혀 없는 것이다.

다른 종교를 사교(邪敎)로 몰아붙이고, 신자들에게는 벌을 받는다고 협박하면서,

자기 자신의 마음까지 족쇄를 채운, 가엾은 사람들이다.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벌(罰) 같은 것을 받을 리 없건만,

두려움에 떨고 있으니, 어처구니가 없다.

종교 따위를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하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89/95

그러한 종교를 믿고 있는 자들의 마음은, 마음의 평안등은 조금도 없다.

‘몇 사람을 입교시켜야 당신의 업(業)이 없어진다.’ 라고 말을 듣게 되면,

욕망이 있는 자는 열심히 하게 된다.

그러한 신자의 모습이야말로, 슬프다.

조직의 세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것이 도리어, 괴로움과 의문의 와중(渦中)에서,

이 인생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의문도, 벌이 두려워서 숨기고 있는 지도자도, 가엾다.

질문자는 나에게 이렇게도 말한다.

“당신에게는, 예배를 드릴 대상물이 없지 않은가. 나에게는 있다.”

나는 그에게, 반대로

“당신은 태어날 때, 발가숭이였습니까.”

하고 질문했다. 그러자 그는,

“발가숭이였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태어날 때, 만다라를 달고 나왔는가하고 생각했다요.”

라고 되묻자, 강연회장은 곧 웃음바다가 되었다.

“남자니까. 달고 나온 것은 불알이었습니다.”

라고 그가 혼자말로 중얼거렸기 때문입니다.

신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었다.

만약 만다라 따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다면,

신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에게 그것도 주었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인쇄물이나 조각물을, 본존(本尊)이라고 모시고 있는 사람들은,

불교의 근본을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본존이 신이라면, 돈으로 살 수 있을 리 없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다.

경문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마음을 바르게 해서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

올바른 마음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누구라도 행복해지는 것이다.

자신을 잃고, 조직의 세포가 되어 버리면

올바른 말에도 귀가 열리지 않게 된다.

독선은, 이미 무지(無知)라고 할 수 밖에 없는데,

광신, 맹신에 빠지면, 그렇게 되기 쉬운 것이다.

벌(罰)은, 올바른 마음과 행위를 잊고,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존이, 벌 같은 것을 내릴 리 없다.

만약 선인(善人)에게 벌을 내리는 본존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도, 부처도 아니다.

그런 짓을 하는 것은, 마왕이나 아수라나 동물령정도이다.

하지만 마왕들도,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범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마음에 구름이 없으므로,

신의 자애의 빛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그들 마왕들도,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90/95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법칙에 따라. . .

침침한, 태양의 빛이 비치지 않는 곳은, 어떻게 해도 불결하게 된다.

그러한 곳의 물웅덩이에는, 파리나 모기의 유충인 구더기와 장구벌레가 들끓는다.

그런 곳이, 저 세상의, 이른바 지옥계이다.

음습하고 침침한 세계, 그 곳이 마왕들의 주가(住家)이다.

지옥령들의 마음이, 영위기를 어둡게 하기 때문에,

자비와 사랑의 빛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태양의 열과 빛으로 가득 찬 곳에는,

아름다운 화초가 있고, 싱그러운 푸르름이 있다.

대자연은 이렇게 밝게 꾸며져 있다.

이와 같은 곳에는, 나비와 꿀벌들이 모여들어,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이다.

설령 구더기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태양의 열과 빛 때문에, 살아 갈수 없는 것이다.

제목(題目)을 올리면,

죽은 자가 성불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상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제목을 공양하면, 죽은 자가 성불한다는 등,

어림도 없는 말이다.

우리들의 그룹 중에는, 이미 정도를 생활 속에 실천하여, 관자재가 되어,

저 세상의 지옥계에도, 천상계에도 가서,

자유로이 보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죽은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도 금방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사자(死者)가 지상계에서 생활하고 있던 때의 일을 상세하게,

질문자에게 답하고, 살고 있던 때의 모양도 보고, 설명해 줄 수 있다.

F출판사의 S사장은, 모든 종교를 취재해 온 베테랑이다.

그 분이, 놀랐던 일이 있다.

그 분의 죽은 아버지가,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서

살아 있을 당시와 똑같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 때 강연회에 출석했던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

이러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트란지스터를 응용한 좋은 수신기는, 여러 나라의 방송을 청취할 수 있다.

우리들도, 그러한 기계와 유사하여, 경문이 없어도, 또 불전이나 신전이 없어도,

모든 세계의 일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병사구(並四球)의 수신기는 잡음이 많고, 혼신도 있어서

가까운 발신국의 것밖에 수신하지 못한다.

전파를 넣고도 좀체로 선국(選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사람 각자의 마음의 조화도( 調和度)는,

이 수신기처럼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라디오는 어느 나라에 가져가더라도,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한다.

우리들의 그룹은, 고대 인도어를 비롯하여,

아득한 과거의 아틀란티스 제국과, 태평양에 가라앉은 무 대륙시대의 언어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과거세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91/95

그것은 생명이 전생윤회하고 있고, 우리들의 의식 속에는,

그 과거의 것도 모두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의 테이프 레코더를, 스스로의 마음의 조화도에 의해,

스위치를 넣는 것이 가능한가. 아닌가.

그 차이로, 과거세가 생각나는가. 생각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도 모두, 마음과 행위가, 그 능력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만큼 마음이란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면 그 마음이란 것은, 정신이란 것은, 어떠한 것일까.

우리의 마음은, 육체주의 선장인 의식의 중심이며,

선장의 두뇌라고 말한다면 좋겠다.

우선, 우리가 기쁠때는 감격하고, 또 슬플 때에는 가슴이 벅차온다.

가슴이 벅차 오르면, 눈에는 눈물이 나온다.

눈물은 마음의 감정의 영역이,

마음의 중심에 있는 상념, 지성, 이성의 영역의 작용에 의해서,

육체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노여운 마음이 생기면, 감정이 부풀어 올라

얼굴색이 파래지거나 붉어지고, 더러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거나,

몸이 굳어지기도 한다.

즉, 육체주에도, 선장의 마음의 움직임이, 그대로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선장이 감정적으로 노를 저으면, 배가 어떻게 되겠는가.

진행 방향을 잘못 잡는 일도 있게 될 것이다.

우리들의 감정의 혼란이, 육체적 부조화를 만들어내는 원인으로 되기 때문이다.

올바른 판단이 불가능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 한,

바르게 말하는 것도,

바르게 듣는 것도,

바르게 보는 것도,

바르게 염(念)(=기원)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이다.

감정적으로 된다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나쁜 말이나, 나쁜 것을 보았을 경우, 폭발하는 것이다.

실제 그런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중도가 아니다.

자기 보존의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제 3 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듣거나 보거나 한다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상대방의 오해 때문에 생긴 감정의 갈등인 경우에는

그 오해를 푸는 것이 중요하고,

몇 사람인가의 사람들을 거쳐 전해져 온 것이든 어쨌든,

올바르게 납득될 때까지,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이 감정적으로 노여움을 가지고 오더라도,

냉정한 판단으로 올바르게 듣고, 올바르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상대방의 감정적 언동에 휘말려, 자기 자신도 감정적 언동을 사용한다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92/95

상대방의 독을 먹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에 어두운 구름을 만들어,

자신의 영위기(靈圍氣)를 부조화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독은, 심신(心身)에 흘러 다니게 된다.

그래서 노여움이랑, 괴로움으로 되어 나타난다.

우리 그룹의 사람은, 과거세에서 친했던 사람들과,

가령 몇 천 년 전의 친구로 있었어도, 당시의 언어로써 서로 대화할 수 있다.

그리고 감격에 겨운 눈물의 해후를 체험하게 된다.

어느 강연회 장에서의 일이었다.

Y.S(33세)가,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와세다 대학의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인데

인생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그의 백모 미세스 부라운의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이었다.

Y.S는 신리의 강연을 몇 차례 듣고, 생활이 조화됨과 동시에,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포코라 파라 가리 파라세레 파라파라 치코라 파라 가리 파라세레 파라파라 .....”

라고, 자기가 고타마 붓다의 제자,

바라나시의 야사라고 하는 아라한이라는 것을, 말했던 것이다.

나도 인도 시절에는, 야사와 같이, 사로몬(수행자)으로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강연회에 참석한 많은 청중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당시의 일을,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우리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마하반야바라밀다”

즉 위대한 지혜가 솟아 나오기 때문이다.

마하반야바라밀다 는,

‘내재된 위대한 지혜에 도달한다.’

라는 뜻이다.

그리움에, 사람 앞에서도, 부끄럽다고 하는 기분도 일어나지 않는다.

부끄럽다는 감정도, 자기 보존이다.

사람들 앞에서도, 마음에 거짓이 없으면,

부끄럽다고 하는 심적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사람앞에서, 자기를 꾸미려고 하는 마음이,

부끄럽다고 하는 괴로움을 만들어 낸다.

자기보존인 것이다.

그리고 식욕과 정욕은, 본능과 감정이 작용하는 경우에 일어나는 것이다.

비록 짝사랑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인간 본래의,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능과 감정이 불타고 있으므로,

마음속에 사랑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육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한 것만으로도, 바로 육체로 나타나며, 마음은 불타는 것이다.

이때 우리들의 몸은, 핑크색의 빛으로 뒤덮인다.

후광의 색이 변화하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93/95

성이 났을 때에는, 피의 색과 같은, 불꽃같은 후광이 사람들의 몸에서 나오고 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우리의 의식(意識)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족함을 알고, 본능과 감정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이 브레이크가, 우리들의 이성(理性)의 영역이다.

음식물등은, 배의 80%라고, 약간 모자랄 정도로 먹는 것이 좋은데도,

맛있는 것은, 본능적으로 그만 배의 120% 과식하게 된다.

그러나 술이든 담배든, 끊으려고 작심만 하면 끊을 수 있다.

이성을 확고하게 가지고, 강한 의지력을 발휘하면 불가능한 일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는 무르고 관대하기 때문에,

자칫 본능, 욕망대로 살고 싶어 한다.

어린 아이들은, 좀처럼 이성도 의지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들 마음속의, 각 영역은, 성장함에 따라,

자기 나름대로의 지성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것이다.

갓 태어난 젖먹이는, 모유나 밀크를 자연스럽게 빨 줄 안다.

이것도 전세에서 식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가르쳐 주지 않아도 먹을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장함에 따라서, 오관(五官)이 작용하도록 되어, 욕망이 나오는 것이다.

자아의 싹틈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욕망과 본능의 영역이 눈을 뜬다.

그러나 아직 이성(理性)이 잘 작용하기 않기 때문에,

무작정 자아를 관철시키려는 응석을 부리게 된다.

이 시기부터, 좋은 환경과 부모 밑에서 편협되지 않은,

중도의 교육이 필요하게 된다.

인생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성(知性)은 오관(五官)으로부터 받는 것과 교육에 의해 풍부하게 되어 간다.

유치원에 갈 무렵에는, 선악(善惡)의 판단이 조금은 가능해진다.

그래서 친구나 가정의 습관등을

보고 듣는 것에 의해, 스스로의 지성을 닦아 가게 된다.

어버이의, 자식에 대한 예의 범절을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좋지 않으며,

지나치게 엄격한 것도 자식의 마음을 닫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서, 이성의 영역이 연마되어,

우리들의 표면으로 나오는 의식이, 점점 상승하여 가는 것이다.

그러나 표면의식은, 10%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다.

마치 빙산의 일각이라고 말하여지는, 수중의 얼음처럼,

의식의 거의는 잠재되어, 90%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10%의 표면의식도, 오관을 통해서,

여러 가지의 현상을, 보거나 듣거나 하는데, 좀처럼 올바른 판단이 어렵다.

자아가 표면으로 나와서 자기 본위가 되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댓글 2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20 PM 마음의 원점 (상)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1840&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94/95

그 마음속에는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올바른 중도의 길은, 이 10%의 표면의식의 길잡이기도 되는데,

좀처럼 중도의 길을 지키지 못한다.

자신의 결점의 수정은, 용기와 결단을 가지는 것.

그것이 중요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과정에 있다.

우리들은, 이 때문에, 마음과 행위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결점을 수정해서, 둥글고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가면,

마음속은 항상 원만하고, 살아 있는 기쁨으로서도 자연이 알도록 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반(反)하여,

지식이 많아지고, 지위가 높아지거나 하면,

자존심이라고 하는 불가사의한 괴물에 홀려,

도리어 마음에 왜곡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을 팔기도 하고, 욕설을 늘어놓거나 속이기도 하고,,,,

인간이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잘 생각해보면, 바보같은 것인데,

지(知)나 의(意)만을 좇아, 신의 자식인 자기의 본성을 망각해버린 것이다.

지성이 아무리 풍부해도,

마음의 조화를 잃은 사람들은, 인격자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들은 편협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정서(情緖)를 잃고 살벌한 인생을 보내도 한 세상이요,

항상 족함을 잊어, 욕망대로 살아도 한 세상이며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팔정도의 인생을 걸어도 한 세상이다.

그러나 같은 한 세상이라도,

그 마음의 넓이에 따라서는,,,

말하자면, 대우주의 그릇과, 양귀비씨 정도 그릇의 차가 생긴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모든 결과는, 스스로의 선한 마음이 재판한다.

이 세상을 떠날 때,

자신의 행위와 상념은,

자기 자신이 재판하고, 결론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들 그룹의 마음의 눈으로, 사람들의 마음의 모양을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표현과 같이

그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게 분류된다.

(**마음의 모양= 심행의 언혼에서 마음의 단면도...참조하세요..)

얼굴과 체격이 다른 것처럼

그 마음의 모양도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갯밭무시

가르침과 배움의 글들

・ 2021. 7. 12. 21:10 URL 복사  이웃추가

제 4 장 하늘과 땅을 잇는 가교(架橋)

1. 육체와 마음의 영역의 비밀

우리들이, 실재계.

즉 4 차원 이상의 천상계로부터 태어날 때에는,

누구나 둥글고 넉넉하고 넓은 마음을 가지고,

감정도 지성도 본능도 이성도,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도,

일체의 모든 현상도,

사물을 만들어 내는 상념의 영역도,

모두 조화되어,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뜨고 있었다.

태어나기 전에는 이 현상계.

지구상에 나오기 위한 수양소같은 곳에 있다.

육체주(肉體舟)를 제공받기 위한 약속은,

이미 부모와의 사이에서 이루어져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자(精子)와 난자(卵子)가 조화되는 기일이 예정되어,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태어날 장소, 환경, 육체적 조건 등,

모든 것이 계획되어 있으며 이 지상계의 사상, 습관,

그리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누구든지 잘 알고 있다.

실재계에서는, 누구나 성인(成人)이며

사람에 따라서는, 전세(前世)의 지상계에서 부조화한 일생을 보냈기 때문에

엄한 지옥계에서 수행하고, 그곳에서 깨달아,

천상계에 환생했던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다시 지상계로 나오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기간.

출생 예정자들의 눈에는,

지상계의 사람들의 상태. 양친이 될 사람의 생활환경등이 똑똑하게 보인다.

그러나 불안한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지상계의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신의 마음인,

“법”

이 멀어져, 잘못된 생활을 하고있기 때문에,

1/13 전체보기

128

455,590

최근댓글

^

1 2 3 4

30줄 보기 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3/66

출생하고 나서, 신의 자식으로서, 자각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먼저 육체주를 지니고 생활을 하고 있는 빛의 천사들도,

스스로 만든 종교적 환경 속에서,

교조라든가 살아 있는 신이 되어, 우쭐거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한 생활을 보고 있기 때문에,

역시 지상계는, 험난하고, 고체적(固體的)이며 불안정한 곳이라고, 잘 알게 된다.

천상계의 사람들은 또한, 자기들보다 앞서 지상계에 태어난 자들이,

실재계(천상계)에 있을 때에 약속하고 간 것을 잊고,

욕망의 생활에 젖어 있는 것을,

영화의 스크린을 보는 것처럼, 보며 슬퍼하고 있다.

그것은 그 무리의 마음이 흐려있기 때문에, 통신이 불가능하여,

불쌍한 그 사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 같은 사람은, 특히 험악한 생활환경 속에 태어나 있었으므로

실재계의 사람들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실재계의 수양소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어지러이 고생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보자.

지상계에 나가면,

이런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며, 이런 방법으로 깨달아 보자.

서로의 친구들과 약속도 하고, 태어난 후까지 계획하고 나오는 것이다.

실재계의 대지도령이나 빛의 천사들도, 이 지상계에 태어날 때에는,

인생에 의문을 가지고, 깨닫기 쉬운 환경을 골라서 태어나는 자들이 많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면, 자기의 응석대로 되고 말기 때문에,

인간은 아무래도 타락하기 쉬우며,

반대로 너무 가난하면, 마음까지도 가난하게 되어,

스스로를 상실하고, 세상을 저주하며, 남을 원망하게 되어

인생의 실패자가 될 염려가 많다.

프로의 종교가(宗敎家)에서 태어나면,

구래(舊來)의 잘못을 답습할 경우가 많으므로,

그런 환경에서 태어나는 것을 피한다.

나의 지도령은,

예수가 이스라엘에 태어났을 때,

토목공인 요셉과 마리아를 부모로 선택한 것은

“인생에 의문을 많이 가지기 위함이었다.”

라고 말한다.

“왜, 인간은 병들어 괴로워하는가.”

“왜, 같은 인간이면서, 권력자와 백성의 차별이 있는가.” 등의

‘왜’

라고 하는 의문이 많이 생길 수 있는 환경을 선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는 것은, 실재계에서 보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4/66

‘일시적인 죽음’ 이 되는 것이다.

실재계에서는, 광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이 지구상의 현상계는, 원자체에 의해서 육체주가 구성된다.

원자체의 모체에, 정자와 난자가 조화되어,

새로운 육체주의 세포 분열이 시작되고. 오체(五體)가 형성되어 간다.

이때의 마음의 상태는,

신의 자식으로서, 풍부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3개월쯤 되면, 약 7센티에서 10센티 정도로 성장하여, 오체(五體)의 모양이 갖추어진다.

이 때에, 아이의 의식이 지배하기 시작.

모친의 의식과 조화되지 않는 경우,

‘입덧’

이라고 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입덧은 모친의 의식과, 아이의 의식이 조화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또한 애기의 의식 속에는, 과거세의 현상계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물 등에 의해,

어머니와는 다른 기호(嗜好)가 있으므로,

어머니의 입맛까지도 달라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모체라고 하는 육체주를, 두 사람의 의식이 지배하기 때문에,

감정의 혼란이 일어나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체를 지배하고 있는 어머니의 의식은,

이미 이 현상계의 인생 체험을 하고 있으므로,

매사에 선악의 상념을 가지고 있는데,

태아의 의식은,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을 가진,

둥글고 넉넉하고 넓은 마음을 계속 갖고 있다.

그러므로, 상극이 일어나는 것도 있는 것이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는, 차원을 초월하여 보는 것이 가능한 사람들은,

태아의 의식과 그 수호령도 똑똑하게,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으며,

또한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어머니와 태아의 의식이 조화되면,

‘입덧’

현상도 사라지고, 배꼽의 탯줄을 통하여 영양을 취하면서

태아는 순조로운 성장을 계속해 간다.

그러나 그 태아도, 실재계의 수양소에 있을 때는,

훌륭한 한 사람의 어른이었던 것이다.

태내에서 자라 달이 차면, 마침내 아이는 태어나고.

공기를 접함과 동시에, 그 인생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계를 떠나, 아이로서 전생(轉生)한 인간의 의식은,

100% 잠재하여, 스스로 자각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다.

저 세상에서 본다면, 그것은 죽음인 것이다.

그의 앞길에는, 차원이 다른 현세에로의 일보.

험난한 수행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잠재하고 있는 의식,

그 중심인 마음속에는,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5/66

이미 본능이 싹터서, 모유를 스스로 자연스럽게 빨게 된다.

생후(生後) 1~2 주 정도 지나면, 혼자서 웃기도 한다.

이때는, 애기 곁에, 실재계의 혼의 형제나 친구인 천사들이 와서,

인생의 첫걸음을 축복해 주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나는 마음의 눈으로 똑똑히 본 적이 있다.

젖먹이 애기의 잠자는 모습은 순진하고,

죄(罪)도, 더러움도,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윽고 자아가 싹터서, 욕망을 만들어 내고

교육이나 환경, 습관등에 의해서,

애기의 마음은, 차츰 왜곡을 만들어 간다.

그래서 그것은 괴로움의 원인으로 되어 가는 것이다.

잠재되어 있는 의식은, 오관(五官)을 통하여 차츰 표면에 나타나는데,

아직은 어린 아이이다.

10세, 15세, 20세로, 사회의 여러 현상을 통하여,

서서히 지성이 발달되어, 10%쯤까지 표면의식도 눈뜨게 된다.

그러나 마음의 구름은, 인생의 올바른 마음가짐을 잊어버리게 한다.

나이가 참에 따라, 이성을 의식하게 되고,

자아가, 욕망이, 마음속에 싹터, 나오는 것이다.

오관에 포착된 것이, 대뇌로 보내져,

뇌파의 진동이, 육체의 선장인 의식(마음)으로 송신되어,

마음속에 여러 가지의 상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자손 보존의 본능과 감정이 크게 팽창하고,

지성이나 이성의 영역은 작아져 버린다.

“곰보도 보조개”

로 보이는 사춘기의 번뇌와 기쁨을 체험하고, 올바른 판단을 소홀히 하고 만다.

또한 스스로의 생활 행위의 부조화로 말미암아, 몸을 망칠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의 부조화로 인해, 몸을 망칠수도 있다.

이와 같은 일들도, 실은 반성의 기회로서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는 자비인데, 우리는 그만 그것을 잊고 있다.

인생에 있어서의 실패도 괴로움도,

실은 마음을 넉넉하게 키우기 위한 학습인 것이다.

만약 실패나 괴로움이 없다면,

괴로움이나 슬픔의

“쓴맛”

을 속속들이 맛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과 악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선(善)만이 있고, 악(惡)이 없다면,

악(惡)도 알지 못하고, 선(善)의 좋음도 알지 못한다.

선(善)과 악(惡)이 있으므로,

선(善)의 좋음, 악(惡)의 나쁨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6/66

이 지상계의 수행의 첫째 목적은,

자기의 업(카르마)을 바로잡는 일이다.

업(業)=카르마)의 수정은,

선(善)과 악(惡)이 혼합된 환경이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저 세상에서는,

악의 결과가, 그 자리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업의 수정이 어렵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자기의 마음의 풍부함을 만들기 위해,

온갖 경험과 학습을 하여 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와 같이 괴로움이나 기쁨을 통하여,

어떤 자는 왜곡을 만들고,

어떤 자는 풍부한, 자애에 가득찬 넓은 마음을 만들어 간다.

원한이나, 시기, 질투, 노여움 따위를 품으면,

필연적으로, 마음의 부조화나 육체적 부조화를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툭하면 감정적이 되는, 성질이 급한 사람의 마음은,

감정의 영역이 크게 부풀고, 이성의 영역은 반대로 작아져 있다.

이것을 “마음의 일그러짐”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장인 마음이 일그러지게 되면,

육체주에도 일그러짐이 생길 것은 뻔한 일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은,

생활의 여러 현상을 통하여,

일초 일초,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은,

지성의 상태에 따라서, 브레이크의 정도도 달라지게 된다.

지성은,

인생의 체험이나 학문에 의해서, 키워갈 수 있지만,

마음을 상실한 사상이나 타력 본원의 종교 등은,

역으로, 이성을, 논브레이크로 만들 위험이 많다.

사상이나 그릇된 종교는,

의식마저도 썩게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괴로움의 원인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마음을 잃은,

올바른 중도의 상념과 행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신은 공물을 요구하는가.


“오랜 인류의 역사에는, 신의 이름 아래, 산 짐승을 잡아 공양하기도 하고,

곡식과 실과를 공양하거나, 돈을 바치는 습관이 있지 않습니까.”

갯밭무시의 블로그이 질문자는, 신흥 종교의 한 열성 신자이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7/66

그러나, 그 신앙에 대해서는,

보시, 공양에 대해서, 큰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내용은,

“이 신 앞에 제물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훌륭한 제수음식을 바치고,

무슨 무슨 신이여, 드실 음식을 바치나이다, 운운..하며,

매월, 월례제라고 해서, 신자를 모아,

신자들에게 돈이나 제수를 바치게 하고 있는데

신은, 이러한 요구를 신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일까요.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직후의 육체조상 앞에,

감사의 마음을, 올리는 꽃이나 음식물을 공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막 사망한 자들의 대부분은,

이 지상계에서의 생활의 연장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식사라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들도 희망하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장 질환 같은 병으로, 죽었을 때는

음식물이 거의 목으로 넘어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양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 스스로가, 왜 죽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라고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경우,

거의 전부가 지옥계로 떨어지고 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 자에게는, 죽음에 대한 원인과,

인생에 있어서의 행위와 마음의 바른자세를,

올바른 마음의 척도로서, 그 잘못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어려운 경문(經文)을 읽어 드려도,

생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죽어서 바로 알 턱이 없다.

그들이 알아듣기 쉬운 말로써,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떠날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 선결문제다.

병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제 당신은 병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육체는 멸하여도,

새로운 육체를 갖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의 당신은 병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옛날의 육체는 불에 타 없어져도, 부패하여도,

이제 당신은 이 지상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을 못하는, 그 착한 양심으로,

인생에 있어서 당신이 생각했던 것. 행동했던 것을 하나하나 반성하여,

만약 잘못을 찾아내게 되면,

마음으로부터 신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당신의 마음의 구름은 걷혀서,

신의 빛으로 충만하여져,

당신은 구원받는 것이다.“

라고 마음에 새겨지도록,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8/66

그리고 제물을 차려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들은, 놀라서 쩔쩔매며,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며,

집착으로부터 떠나지 못한 자들이 많다.

그 때문에, 시체가 꼿꼿하게 경직하여 관절도 굽혀지지 않는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얼굴에 평온한 표정이 떠오른다.

사고사(事故死)의 경우에도, 집착심이 강한 자들은,

죽은 장소에 지옥계를 만들고,

스스로 그 곳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자박령(自縛靈=地縛靈)이 되어, 자기와 비슷한 마음의 사람들에 빙의(憑依)하여,

사고사(事故死)를 유발하는 경우도 많다.

지상계에 강한 미련이 있기 때문에, 그 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는, 죽은 이유를, 잘 가르쳐주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 낸,

종이 신이나, 나무나 금속이나 흙으로 만들어진 우상에게

음식물과 돈을 공양한다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짓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도,

신의 몸(神體)의 작은 세포이며,

대 신전(神殿)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대신전(大神殿)인 지구 위에서,

신의 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간이,

왜 조그마한 ‘대신전’이나 ‘대불전’을 만들어,

신을 제사지내는 것일까.

정재(淨財)라고 일컫는 부정(不淨)한 돈으로서,

그런 것을 세운들,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진짜 신불이라면,

 “마음이 병든자에게도,

 몸이 불편한 자에게도,

 가난에 시달리는 자에게도,

 모든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보시하라,

 그들을 불행으로부터 구하라,

 그래서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 뜨게 하라,“

라고 할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이,

신의 마음에 대해서, 보은의 행위를 실천해 나간다면,

반드시 유토피아가 건설되어 갈 것이다.

신은,

인간의 생활의 지혜가 만들어 낸 돈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돈이 필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양도, 신에 대한 보은 감사(報恩感謝)의 증표로서,

그것을 올리는 마음의 사람이라면, 그 뜻이 살아날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a… 9/66

그러나 벌을 받는다든가,

자기 과시욕에서 하는 공양이라면,

그것은 벌써, 마음을 잃은 짓임을 명심해야 한다.

광신, 맹신자의 공양으로,

호화로운 옷을 입고, 금은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는 교조나 지도자들이 많다.

이들은 족함을 잊어, 몸을 지옥에 떨어뜨려 간, 잘못된 자들이다.

받아먹는 자나, 공양을 바치는 맹신자나,

모두 마음을 상실한 가엾고, 어리석은 인간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한 달에 한번의 제사로서, 돈이나 제물을 바친다고 해서

부정(不淨)이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약 씻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기회를 인연으로 하여,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잡고, 조화를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의 정화는,

타력 신앙에 의하여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올바른 마음과 행위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태양은, 1 초당 석탄 200만톤을 연소시킨 만큼의,

열에너지와 빛에너지를 지구에 공급해주고 있다.

이야말로 신의 자비, 사랑의 마음의 구현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 태양에게, 광열비를 지불하고 있는가.

신은, 광열대금 따위는 받지 않으며

하물며 부정을 씻어주는 대가 따위는 절대 받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제물을 바치고 있다.

이와 같은 마음을 상실한 행위는, 부정을 씻어주기는커녕,

마음에 구름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깨끗함을, 마음에서 우러난 것으로서, 받은 경우는,

감사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러나 설령 깨끗함을 받더라도

그 사람의 마음과 행위가 올바른 것이 아니라면,

또다시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보시란,

감사의 마음을 행위로서 나타낸 것이다,

결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보시 중에는,

노동의 보시,

작물의 보시,

금전적인 보시 따위가 있는데

그것은 남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체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올바른, 세상사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어, 보시를 강요한다면

이미 그 인간의 욕망은,

마왕, 아수라, 동물령, 지옥령의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0/66

정화에 의해 나타나는 빙의령에 대해서도,

집안에 제단이나 불단을 차리고 신불을 모시는 행위는

매우 위험한 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지옥계에 떨어져 있는 자들인 것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지옥임을 깨닫지 못하고,)

이 지상계에 집착을 가지고 있으니까, 위험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이 왜 지옥계에 떨어졌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서,

광명의 천상계로 보내 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불단이나 묘 따위에, 집착을 가지게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을 받들어 모시게 되면,

가정에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나,

도리어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바르게 하고,

정법을 들려 주어서,

빙의령을 납득시키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부조화한 채로,

정화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 된다.

‘건드리지 않는 신(神)애 동타나지 않는다.’(=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

라는 속담 그대로이다.

선생이 학생한테서 공부를 배우는 꼴이 되어서야

어찌 선생노릇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잘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는, 맹신자가 되거나,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에 의문이 있거든, 그것을 규명하는 것.

의문을 가진 채로 맹신하는 것은,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의 신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는 지도자는,

마음을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위선자의 낙인이 찍혀야 할 사람들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시아귀(施餓鬼)에 대하여

(시아귀;아귀도에 빠지거나, 연고자가 없는 사자(死者)를 위한 공양)

“저는 매년 시아귀(施餓鬼)를 행하고 있습니다만

과연 효과가 있는 것입니까.

승려로서 대대로 이어받아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갯밭무시의 블로그형식적인 행사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1/66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 질문과 같이 현대의 승려도,

시아귀(施餓鬼)는 습관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시아귀는,

원래는 몸이 나빠서 일하지 못하거나,

생활능력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보시 봉사를 하여,

그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자비와 사랑의 행위였었다.

요컨대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봉사였던 것이다.

그것이 어느 새에,

죽어서 방황하는 무연불(無緣佛)에 대한 공양으로 변하고 말았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에는, 법(法)을 깨닫지 못한 채

가혹한 지옥계로 떨어진 자들이 수없이 많다.

게다가 그들은,

무덤이나 절간 따위가 자신의 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다.

오랜 세월을 경과하는 동안에,

지상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잊혀져서,

공양받는 것도 없는, 무연불(無緣佛)이 되고 말았다.

갖가지 원망으로,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빙의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황하는 영(靈)들에게는,

올바른 법을 가르쳐줌으로서,

그들의 집착심을 버리게 하여, 자각시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 마음을 잃은 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지옥령들도 날뛴다.

따라서 이 지상계가 혼란해지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인간들이,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뜨면,

그들 지옥령들도 반성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말법의 세상이 되면, 살아 있는 인간들이,

인생의 가치에 대한 인식을 잃어 버리고 있다.

지옥령들은,

과거에 이 지상계에서 생활했던 자들이며,

지상계의 연(緣)으로 말미암아 지옥계로 떨어져 간 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나 지구상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어두운 영위기(靈圍氣)를 조성하고 있다.

결국은 지옥계도,

그들의 어두운 상념에 의해 만들어 진 세계이다.

시아귀(施餓鬼)란

이러한 방황하는 혼에게

정법을 가르쳐주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2/66

4. 우란분재(盂蘭盆齋). 피안회(彼岸會)의 의미

우란분재; 음력 7월 15일 조상의 영혼을 제사지내는 불교 행사.

피안회; 춘분, 추분 전후의 7일간에 행하는 불교행사.

“불교에는 우란분재(盂蘭盆齋)라든가

피안회(彼岸會)라고 하는 불사(佛事)가 있는데

여기에는 어떠한 유래가 있는 것입니까.”

어느 종교대학 학생의 질문이다.

이 두 가지는 불교의 행사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선조 공양과 연관된다.

조상을 숭배하는 국민성이 생활 속에서 융화되고 습관화되어

어느새 자연스런 행사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중날

곧 음력 7월 보름날에는 조상의 영(靈)이 집을 찾아오므로,

음식을 차려 공양하고 등을 켜고 춤을 추어 그들을 위안하는 한편,

살아있는 자신들도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하여,

오늘날과 같은 떠들썩한 행사가 되고 말았다.

스님들의 대목철이기도 하여 경문(經文)도 공양된다.

이와 같은 습관을 경험하고 이승을 떠난 자들 중에는,

백중날을 큰 낙으로 삼고 기다리고 있는 자도 있다.

자손과 조상과의 인연을 소중히 하기 위해서,

오늘날 우리들이, 일정한 계절을 정하여

조상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행위는 좋은 일이다.

우란분재(우란분재)의 참 유래는 다음과 같다.

* * *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고타마 붓다가 38세 때의 일이다.

고타마 붓다의 최초의 제자로서,카피라 바스투에서 붓다를 호위하기 위해서,

따라 왔던 5인의 무사중의 한 사람인, 아사지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 근교를 유행하고 있을 때의 일.

바라문의 우바뎃사(훗날의 샤리푸트라)가 말을 걸어 왔다.

그러나 아사지는,

지적(知的)인 종교 논쟁을 다른 종파에서 걸어오는 일이 있더라도,

거기에 응해서는 안 된다고 ,

붓다로부터 주의를 받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샤리푸트라는, 아사지를 보고,

이 분은 보통의 인물이 아니다.

여느 사마나랑 사로몬(수행자)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침착하고,

얼굴색도 좋으며, 태도도 겸허하여, 결코 교만하지 않은 태도에,

갯밭무시의 블로그어떻게든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3/66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아래인 아사지의 뒤를 밟고 따라갔다.

그리고 대화의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아사지가 시주받은 죽이 든 바리를 왼손에 들고, 식사 장소를 살피고 있는지라,

샤리푸트라는,

자기가 선정(禪定)할 때 쓰는, 풀로 엮은 방석을 나무그늘에 깔아주고

“사로몬이여,

 부디 이 방석위에 앉아서, 공양을 드십시오.”

하고 권했다.

아사지는 사양했으나, 간곡한 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샤리푸트라와 함께 식사를 했다.

논쟁을 걸어 올 것으로 여겼던 아사지는,

샤리푸트라의 너무나 친절한 행위에 대해서,

“저 같은 어린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어 주시어 감사합니다.”

하고 고마워했다.

“원, 별말씀을, 저는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뒤를 좇아 왔습니다.

 무례를 용서 하십시오,”

샤리푸트라가 대꾸했다.

아사지는, 그 말에 안심하여,

경계심이 마음속으로부터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의 바라문 교도는, 학문적으로 매우 수준이 높았으며,

진리에 대한 논쟁을 즐겨하는 자가 많았다.

쓸데없이 이론만 캐는 . . . .

샤리푸트라가 물었다.

 “사로몬이여, 당신은 어디서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아사지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아라한의 경지입니다.

 붓다의 경지에 이르기에는 요원합니다.”

 “당신을 보고, 붓다인 줄 알았습니다.

 당신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두신, 스승은 행복하시겠습니다.

 스승도 훌륭한 분이시겠지요,

 당신의 스승은,

 어떠한 수행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지,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샤리푸트라는 열심히 그렇게 말했다.

아사지는 평소에, 고타마 붓다가 가르치는 법을 실천하고 있으면,

다른 수행자의 마음에, 그러한 모습으로 비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어,

무엇인가 가슴 뿌듯하게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사지는 대답했다.

 “저의 스승은,

 코사라국 카피라 바스투의 왕자, 고타마 싯달다라고 하는 분입니다.

 그 분은 모든 원인과 결과, 연생(緣生)에 대해서 가르쳐 주십니다.

 마음의 올바른 자세를, 팔정도로써 정하여

 일상의 마음과 행위를 바르게 하여, 수행하고 있습니다.”

샤리푸트라는,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4/66

이것이야말로 진짜이다.

 신을 모셔놓고 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의 깨달음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짜의 붓다이다'라고,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면서,

“당신의 스승에게 인도해 주십시오,

 제가 찾아 헤매던 붓다이십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하고 아사지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라자그리하에서 북동쪽으로 산골짜기를 타고 한참 나아가면,

나란다라고 하는 고을이 나옵니다. 저는 거기서 태어났습니다.

저의 스승은, 아산쟈라고 불리는 바라문입니다.

이 스승 밑에서 우파니샤드를 공부하고, 엄격한 수행을 쌓고 있는 사로몬입니다.

저와 함께 수행하는 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는데

우리가 참 붓다를 만나게 되면

서로 연락하여 함께 공부하자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도 꼭 함께 소개해 주십시오,“

하고 아사지의 손을 잡고 흔드는 것이었다.

아사지는 망설여졌지만, 붓다에게 의논드려 보고

내일 이 장소에서 대답해 주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베르베나로 돌아왔다.

베르베나로 돌아 온 아사지는, 그날 있었던 일을 붓다에게 여쭈었다.

붓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이렇게 말했다.

“그 두 사람은, 전세(前世)에서도 나의 법을 공부하여, 정도를 잘 닦은 사람들이다.

다시 금세에서도 도를 닦아,

나와 함께 다시 중생의 마음에 광명의 등불을 켤 것이다.

마침내, 서로 만날 기회가 왔나보다.

아사지여,

과거세의 벗이 오는구나.

내일, 설법하는 시간에 그들을 안내해 오도록 하여라.“

이미 붓다는, 정법에 귀의하는 두사람의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지는 약속한 대로 이튿날,

베르베나의 많은 사로몬들의 앞에서, 샤리푸트라를 붓다에게 소개했다.

붓다는,

코스타니야, 우르베라 가샤파 등 천 수백명의 사로몬들 앞에서,

“지금 찾아 온 두 사람의 사로몬은,

 과거세에서, 정법을 닦은 사람들인데,

 다시 금세에서도 도를 닦아,

 상가의 지도자가 되리라,”

라고 말하며 모두에게 소개했다.

코스타니야를 비롯한 고참 제자들은,

방금 입문한 신참자가, 어째서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그 의미를 알지 못하여, 인사말로 한 것은 아닐까하고,

큰 의문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만난 붓다의 말에 크게 놀란 것은,

고참 제자들보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많은 제자들 앞에서,큰 눈물을 흘리며,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5/66

마음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격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반가움이라고 할까. 불가사의한 기분으로서,

그저 기쁨으로서, 치밀어 오르는 이유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상가의 공기는,

고참 사로몬들의 질투심 때문에, 적지 않게 조화가 흔들렸다.

붓다는 전원을 모아서,

,“수행자들이여. 잘 들어라.

 법에 신구(新舊)가 없는 것처럼,

 제자에게도 신구(新舊)의 차이가 없다.

 금세만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일찍 온 자, 늦게 온 자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제자가 된 자는, 후배를 잘 지도할 수 있도록

 자신을 바로잡아, 정진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지 아니한가.

 붓다는,

 과거세도, 현세도, 내세도, 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온 샤리푸트라도, 마하 몽가라나(목련존자)도,

 금세에 있어서는, 다른 수행자들보다 늦게 왔지만,

 과거세에서는, 나와 함께 정법을 설법한 자들로서,

 그때부터 생각하면, 가장 오래 된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세에서 수행을 쌓은 두 사람은,

 곧 아라한의 경지에 올라, 전생윤회의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생명은, 과거세의 연(緣)에 의해서, 현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금세만의 판단으로,

 신구(新舊)의 제자라고 하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 된다.

 서로 열심히 도를 닦아, 마음의 왜곡을 바로잡아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지도자라든가 지배자라는 것은, 자기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그 능력과 행동을 보고, 자연히 정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오래되었다든가. 새롭다든가.

 무력이나 권력등에 의해서,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혜와 용기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편협되지 않은, 생활 속으로부터,

 올바른 도를 거듭하여 갈 때에,

 스스로 인간은, 그 인간의 가치를 알고,

 자애에 넘치는 마음과 행위의 지도자를 흠모하게 될 것이다.

 이 두 사람은, 전생윤회(轉生輪廻)의 과정에서, 쌓아온 그릇이 크며,

 풍부한 마음이 수행에 의해, 만들어 질 것이다.

 멀지 않아 이 사실을 실증할 것이다.”

하고 힘주어 설법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몽가라나는 마음의 문을 열고,

갯밭무시의 블로그천상계와 지옥계를 보는 힘을 가지게 되어, 천안(天眼)의 제일인자가이되었다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6/66

그 결과, 고타마 붓다가

과거세에서도 붓다였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으며,

상대방의 육체적 결함부터, 마음의 상태까지, 똑똑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몽가라나가, 그의 천안(天眼)으로

자기의 육체적 선조랑, 어머니등이, 어디서 살고 있는가하고 찾아보았더니

어머니는, 어두운 세계에서 혼자 외롭게 일을 하고 있었다.

몽가라나는, 물 한 모금이나마 어머니에게 공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물은, 별안간 화염에 싸이고 마는 것이었다.

이 일을 붓다에게 여쭈었더니.

“너의 어머니는,

 생전에 자기만을 위할 줄 알았지. 타인에게 보시할 줄 몰랐다.

 불쌍한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베풀어 준 적이 없었다.

 항상 자기중심으로 살았고,

 남에게 자애를 베푸는 것 없이, 남에게서 받기만을 바랐다.

 자기의 뜻에 맞지 않은 자는, 바라몬 계급을 표면에 내세워,

 수드라들에게도, 잔인한 행위를 했었다.

 그러한 자신의 마음과 행위의 결과.

 화염지옥에 떨어져 있는 것이다.

 몽가라나여,

 너는 너의 모친을 대신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만큼, 보시를 하여라.

 너의 모친은, 그런 너의 행위를 보고,

 자신의 인생의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육친을 위한 너의 노력이, 너의 자비행이,

 모친을 구하는 것이다.”

하고 붓다는 타이르듯이 설명하는 것이었다.

 “붓다의 말씀대로, 어머니를 위하여, 저를 위하여,

 괴로워하는 중생들에게 보시 공양하겠습니다.”

몽가라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 뒤 일정한 날을 정해서, 모친을 위하여,

가난한 사람들이나 병든 사람들에게,

자애의 보시를 행하여 갔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본래의 우란분재(盂蘭盆齋)의 목적은,

죽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하지 않았던 보시 행을,

살아 있는 자손이 대신 행하는 일을 말한다.

습관이라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형되고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지기 일쑤이다.

그 뒤 3 개월 쯤 지나, 샤리푸트라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여,

과거세의 법을 생각해 내고, 상가의 지도자가 되었다.

붓다의 예언대로

샤리푸트라도, 마하 몽가라나도, 마음을 깨달았고,

많은 수행자들은, 그 지도자로서의 그릇을,

갯밭무시의 블로그자연스럽게 확인하고 인정하게 되어.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7/66

도(道)를 잘 행하도록 되어갔던 것이다.

오다쿠(大田區)에 살고 있는 A.K(당년 23 세)의 과거세,

즉 전생은 아사지였다.

그래서 A.K는 인도시대의 기억을 당시의 코사라말로써,

어제의 일처럼 설명하면서,

우란분재(盂蘭盆齋)의 유래를 이상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90%의 속에는,

마치 테이프 레코더나 비디오테이프처럼,

과거, 과거세의 일체가 기억되어 있다.

정법의 실천 생활의 누적됨의 결과.

마음의 구름이 걷히면, 자신의 마음의 스위치를 눌러서,

그 테이프 레코더를 회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이와 같은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반야바라밀다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 즉.

‘내재(內在)되어 있는 위대한 지혜에 도달한다.’

라는 뜻이다.

5. 마음의 녹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사람들도,

자재력(自在力)을 잃는 경우가 있는가.

아니면 살아 있는 동안은, 그 경지는 변함이 없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우리들 그룹 가운데서 나왔다.

매우 좋은 질문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쇠(鐵)라는 것은, 산화되기 쉽다.

그대로 방치해 두면, 산소(O₂)와 철(Fe)의 표면이 화합하여

Fe2O₂라는 산화제이철,

곧 빨간 녹으로 변하고 만다.

이 산화제이철은, 이미 Fe라는 철의 성질을 잃어

본디의 철로 되돌아가기 어렵다.

녹이 슬은 철 표면에 도장을 해도,

언젠가는 도장의 피막을 뚫고 나와, 도장의 표면에 녹이 드러난다.

우리의 마음과 행위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감을 얻고자 하여, 아무리 정법에 귀의하더라도,

지금까지 마음속에 녹슬어 있는,

부조화한 상념이나 행위를 반성하여,

어두운 상념, 그 마음의 녹을 긁어내지 않는 한

갯밭무시의 블로그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8/66

표면만을 정법이라는 도장으로 가렸을 뿐, 녹은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그 녹이, 마왕이나 동물령, 지옥령들을 불러들이게 된다는 말이다.

그들 악령들에게 지배되어, 자신을 잃고 마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없는 자기자신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과거에 해 버렸던 마음의 녹은,

올바른 중도의 자(尺)로서 반성을 하고,

잘못된 마음과 행위를, 진심으로 신에게 용서를 비는 것이 중요하다.

이때, 마음의 녹은 떨어져 나가고, 그 흐림도 맑아져,

신의 빛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두 번 다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생활이,

제 1 조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해서,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자들도,

생활이, 정도를 벗어나 버리면,

영적 현상인 관자재(觀自在)력은 잃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영적 현상이,

어느 날 갑자기 없어진다는 것은,

교만한 마음이 되거나, 마음과 행위가 부조화가 되면,

그 마음에 구름이 끼어,

빛의 천사들이 가까이 올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육체고행, 등으로 수행했다고 하는 자들은,

정법이라는 마음의 기준을 모르기 때문에.

부동명왕(不動明王)이니 무슨 보살. 무슨 신이다' 하고 영적 현상이 나타나기는 해도,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분간할 힘이 없다.

저 세상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없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

동물령이나 지옥령이라도,

병을 고치거나, 분실물을 찾아주는 일쯤은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수행자들이든가. 경험자들이든가. 그와 유사한 수행을 했던 자들은,

영매적인 일은 할 수 있어도,

육체적으로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나거나

그 자식에게 부조화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여,

마음의 평안은 얻을 수 없게 된다.

초조한 마음,

노여운 마음,

비방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오만한 마음이 싹터, 까닭없이 남을 업신여기게 된다.

이에 반(反)하여, 정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가족도 원만하게 조화를 이루고

항상 팔정도를 마음의 척도로 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갯밭무시의 블로그감정의 갈등도 없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19/66

그것도,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행동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가, 올바르다고 하는 마음의 기준을 알고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쇠의 표면에 파카라이징이라는 화학처리를 하면,

도장한 뒤에도 녹이 나타나는 일이 없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법에 따른 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항상 신의 빛으로 감싸는 것이 된다.

쇠의 표면도 늘 닦아주면, 녹슬지 않는다.

금강석도, 갈면 갈수록 그 광택이 더 난다.

정법을 마음의 양식으로 해서,

매일의 생활속에서, 실천하는 노력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더욱 넓고, 크고, 둥근 것으로 닦아져서,

빛의 천사들과 자유롭게,

저 세상의 일도 보고 듣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어릴 때, 신동이라고 일컬어지던 아이가,

20세가 넘어서면, 범인(凡人)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에 구름이 없을 때는,

지도령이나 수호령들의 협력을 얻어, 천재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지만,

차츰 마음을 잃어 감에 따라,

지도령들은 지도를 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범재(凡才)로 되고 마는 것이다.

도(道)는,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법 실천의 노력을 거듭하는 이외에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지도령이나 수호령의 힘과,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는,

마치 자전거의 두 바퀴와 같은 관계인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패달을 밟고 앞바퀴로써 방향을 정하는 것과 같이,

올바른 노력을 기울여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마음 세계의 법칙도, 이것과 똑 같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우리들의 마음과 행위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6. 노사의 투쟁


“저는 노동조합의 서기로서 일하고 있습니다만,

노사의 투쟁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법률이 인정하고 있는 테두리 안에서,

약한 자들은, 단결에 의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않는 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0/66

자본가는, 경제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목적의 관철은, 먼 꿈과 같습니다.

임금에 있어서도, 후생시설에 있어서도,

노동자들을 우선으로 하는 것이야말로, 자본가의 의무라고 하겠지요.

우리들의 투쟁이,

현대의 문명을 이룩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사는, 본질적으로 서로 용납되지 못하는 것이며

입장이 서로 다른 이상, 투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국가의 체제가, 사회주의라면 다르지만,

현재의 체제 아래에서는,

투쟁도 불가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정법으로도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은,

투쟁하여 사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은, 동물적 본능이며,

인간도 약해서는 살아남지 못한다고도 말한다.

현대인의 세계관은,

대체로 이 청년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도 마르크스주의도,

모두 물질경제가 근본이어서, 마음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을 잃은 사상이, 생활의 지혜로서 문명을 만들어내고,

공해를 낳고, 정신공해까지 낳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들의 괴로움은,

영원한 혼, 곧 자기 자신의 마음을 상실했을 때. 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마음을 잃고, 무슨 기쁨이 있을 수 있겠는가.

투쟁심은, 언제나 파괴밖에 낳는 것이 없으며

(그 파괴의 결과는)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사상의 대립도, 서로가 같은 인간 동지이다.

그 입장이 다르다는 것뿐이다.

따라서, 입장의 다름을 마음으로 생각하여,

서로 이해를 깊이하고, 대조화의 길을 걸어가지 않으면,

스스로를 점점 더 괴로움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고 말 것이다.

단결이라는 미명아래,

투쟁하여 승리를 얻은 것이, 진실로 행복해질 수 있었던가.

족함을 모르는 돈의 망령들의 행복등은,

한 때의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물가도 안정되지 않고, 투쟁하여 획득한 것들을 도로 토해 내고 있지 않는가.

사회주의의 나라들에, 진정한 자유가 있는 것일까.

권력자들은, 합법적인 폭력이나 무력으로 국가를, 민중을 지배하고 있지만

갯밭무시의 블로그사실은, 언제 자기 자신이 실각할지 모르기 때문에,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1/66

마음에 불안이 많은 생활을 보내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그 행동력이 지배당하더라도, 그 마음까지 지배당하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자유다.

그러므로 무력이나 권력에 의한 지배가 계속되어도,

인간의 마음은 항상 자유이어서, 그릇된 사상에 대한 비판은 없어지지 않는다.

비록 세뇌(洗腦)를 당하더라도,

신리가 아닌 것에는 모순이 생겨, 의문의 마음이 일어난다.

다만 민중은 입으로 말하지 않으며, 행동하지 않고 있을 따름이다.

권력자들은, 마음을 잃어버린 자들이기 때문에,

예사로 동지를 배반하며, 남의 목숨조차도 간단히 빼앗아 버린다.

하지만 육체주(肉體舟)의 뱃사공인 마음까지, 빼앗아가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지 행복하게 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고 산다.

사상에 관계없이, 이 점만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의 대다수는, 행복해지는 조건이,

모두 경제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겨우 가혹한 봉건 사회에서 벗어나서,

인간 평등의 입장에서, 노사도 또한 대화를 통한 조화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인류가,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스스로 뿌린 부조화한 씨앗을 베어내고, 겨우 도달하게 된 단계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변함 없는 마음의 존엄성을 깨닫지 않는 한,

참된 유토피아는 찾아오지 않는다.

우리들 인간이, 기본적인 마음의 존엄성을 확립했다면,

노사의 다툼도 없어지고,

문명은 보다 발달하여, 생활도 보다 조화를 이룰 것이며,

원시 공산사회보다도, 훨씬 진보된 공존공영의 사회로 되어 갈 것이다.

자본가, 지도자는, 그러므로 자기의 입장을 고집하지 말고,

대중을 위하여 마음을 넓고 넉넉하게 가지는,

자애에 찬 참된 용자(勇者)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버리지 말고, 대중에게 봉사하는 실천력을 발휘해야 한다.

인간은, 감사하는 마음을 잃었을 때.

불만이 일어나는 법이다.

불만의 마음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데에 대한 초조감과,

자기보존의 마음이 뿌리가 되어 있다.

서로의 의사가 소통되지 않는 것도 또한 원인이다.

올바른 견해를 가질 것.

자신의 마음속의 응어리를, 마음속에 억누르는 것은 안된다.

마음속의 응어리를 가지면, 해야 할 말도 못하게 된다.

남 앞에서 자기를 꾸미려고 하는 마음이나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2/66

손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마음은,

언젠가는 마음속에 부조화를 만들어 내고 만다.

약한 자들이, 단결이라는 집단행동으로 불만을 폭발시키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것은 자체의 내부에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지도자는, 단순한 불만의 대표자가 되어 올바른 견해를 잊거나,

권력자의 자리에 집착을 가지고,

조직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잘못을 저지르기가 일쑤이다.

감정적인 집단은, 자기주장만을 되풀이하여,

아예 조화와는 거리가 먼, 투쟁과 파괴의 수라장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또한, 물질 경제를 주체로 한, 마음을 잃은 집단의식은,

반드시, 내부 투쟁과 분열의 온상으로도 되어 간다.

무력이나 권력으로 지배해서,

일시적인 강압통제가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도,

힘으로 지배한 것은, 필경 힘의 불균형에 의해,

어느 날엔가는 무너지게 마련이며,

스스로의 목을 자르는 칼이 되기도 한다.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도 해당되는, 당연한 귀결이다.

감정적인 마음과 행위를 버리고, 도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

이것이 조화에 이르는 지름길이며, 불퇴전의 신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경영자이든, 노조의 지도자이든 간에 자기의 입장만을 고집하지 말고 ,

종업원이나 집단의 마음의 방향을 잘 파악하여,

중도를 마음의 척도로 삼고, 지도해 나가야 한다.

중도를 근본으로 한 마음과 행위가 있으면,

투쟁과 파괴따위는 일어날 리가 없다.

경제적인 문제는, 서로 양보하는 행위에 의하여, 대조화가 완성되는 것이다.

경제의 노예로부터 스스로의 마음을 해방시켜서,

서로가 힘을 합쳐서,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생명은, 전생윤회(轉生輪廻)를 되풀이하는 과정에 있어서는,

어느 때는 국왕의 체험을,

어느 때는, 힘겨운 노예의 체험을 한다.

그것은 모두, 자신의 마음을 넉넉하게 하기 위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신리를 깨닫는다면,

지금 생활하고 있는 것에, 보다 더 마음을 집중해야 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가치는, 지위나 경제력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보다 좋은 생활의 장을 만드는 것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만물의 영장.

신의 아들인 인간동지가,

동물적인 투쟁을 되풀이하여,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3/66

 피로서 피를 씻는 싸움의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노사가, 구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서로의 입장을 떠나,

인간끼리의 번영을 위하여 서로 협력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보은하는 행위를 실천하는 길 이외에,

대조화에의 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짓의 마음을 버린, 마음의 대화가 필요하다.

그 기준이, 중도,

즉 팔정도의 마음과, 실천에 있는 것이며,

사회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 행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또한 자본의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 낸 생활의 지식. 그것으로 독점한 경제력이,

인간을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생각을 고쳐야 할 시기에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모두 신의 자식이다.

모두, 평등한 것이다.

그런데, 조그마한 지구 위에서 다투고 있다니!

대우주의 눈으로 보면, 참으로 가엾고 어리석은,

마음을 잊어버린 인간의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죽어서, 재산을, 저 세상에 가져 갈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을 쓰는 것이야말로,

생활의 지혜도 열매를 맺는다고 말할 수 있다.

투쟁과 파괴만큼, 어리석은 행위가 없다는 것을,

언제인가 인류는 눈 뜰 날이 올 것이다.

법률은, 인간이 만든 것이며,

사회생활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보살심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법률로 정해져 있으니까, 당연하다고 하는 사고방식은,

중도의 마음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법률은, 행동에 대하여 제약은 가(加)하여도,

마음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유로운 마음은,

신리인 정법이 없이는 얻을 수 없고,

평안의 길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빗나가면,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자기 자신의 선한 마음으로, 재판해야 한다.

정도의 마음이야말로 공평무사한 법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4/66

불평등한 사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의 마음이, 정도(正道)를 깨달았을 때,

시정될 것이다.

그리고 편협된 사상이, 인류의 마음에서 사라질 때,

유토피아는 이룩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내려,

스스로의 마음을 이겨나가는 극기심이 선결 문제가 된다.

경제적 빈부의 차이, 사회적 지위의 차이에 의해서

마음의 풍부함이,

마음의 넓음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스스로 선택한 환경을 조화하여,

풍부한, 평안이 있는,

인생에 있어서의, 위대한 마음의 수확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중요하다.

7. 현세와 내세의 차이


저승이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은, 이승뿐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생명의 영원은, 육체의 자손을 통하여 보존되므로,

그런 의미에서의 영원성을 긍정한다.

이런 사람들은 유물적인 사고에 지배되어,

바른 생명의 전생(轉生)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조상이 혼과 마음까지 주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같은 어머니한테서 태어난 형제자매가,

재산 문제로 다투고 있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의 부조화한 대립이 일어나서,

결국에는, 서로 죽이는 일까지 벌어지는 것일까.

자식이 부모의 마음과 같다면, 부모가 생각하고 있는 것 모두를,

이해하고 불효 따위는 범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흔히 있는 보기이지만,

부모들은 자기가 못한 일을, 자식에게 자기 대신 하도록 하듯이,

‘공부하라, 공부하라’하고 자기의 분신처럼 교육한다.

그 아이가 부모와 같은 혼. 마음이면,

왜 노이로제가 되기도 하고, 불효를 하겠는가.

그리고 그토록 뒷바라지를 해 주었는데도

배신했다고 넋두리하는 부모가 있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다.

부모와의 연(緣)에 의해

갯밭무시의 블로그인생항로의 육체주(肉體舟)를 얻고, 양육되었지만,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5/66

부모는 혼. 마음까지 준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개성을 가진다.

하물며 마음까지 단 하나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부모 자식은, 서로 대화를 통해서 이해하고, 서로 가까워지는 것이다.

부모로서는 섭섭한 일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인생을,

그리고 새로운 자기완성의 학습장으로서 현세를 선택한 것이다.

차원이 다른 저 세상에서 서로 약속한 것을, 잊고 있을 뿐이다.

'마음의 원점'을 잘 이해하고,

한 쪽에 기울어지지 않는 생활을 영위한다면 ,

인간은 그 사실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

되풀이 말하지만, 저 세상을 물리적인 차원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면,

물질계인 이 현상계는,

X축, Y축, Z축을 잇는 3차원적 입체의 세계이다.

비행기는 3차원의 공간을 자유로 날지만,

X,Y 축의 2차원적인 좌우상하의 세계에서는, 활동이 불가능하다.

공간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활동이 불가능하다.

다만, 3차원의 세계에서 투영된,

2차원의 스크린의 영상은 보는 것이 가능하죠,

텔레비전의 스크린도, 2차원 평면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화면의 주인공에게, 3차원의 세계에서 말을 걸 수가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말을 걸더라도, 영상의 인물에게 3차원에서 통신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3차원을 투영하고 있는 4차원의 세계에서

3차원의 세계에 말을 걸어도 통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2차원은 3차원의 투영이니

이 둘은 연속된 것임에 틀림이 없고,

3차원과 4차원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을 할 수 있다.

X. Y. Z. t 의 4차원의 세계가,

물질의 차원보다 고차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물질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질의 질량 M과,

빛의 속도 C 의,

2 승의 적(積)은 차원이 다른, 즉,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E 와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4차원의 존재에 대해서, 보통의 능력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

인식은 못하더라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물질계는 분명히 3차원을 구성하고 있으나,

그 이상(以上)의 고차원의 존재를 부정할 수가 없다.

불교에 색심불이(色心不二)라는 말이 있다.

색이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6/66

우리의 오관에 감지되는 만생만물이며,

그 만생만물은 색채에 의해서 확인할 수가 있다.

마음의 세계, 의식의 세계도,

에너지의 차원과 같은 것으로,

3차원을 투영하고 있는 4차원 이상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것은 아니다.

죽은 영(靈)들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염파(念波)에 의한 텔레파시,

예지 능력,

투시 능력,

거슬러 올라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도,

4차원 이상의 세계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음의 문제는, 다분히 주관적이어서,

경험하지 않은 경우는, 이해하기 힘든 면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이 없다고 해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과학하는 현대인으로서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예로부터 많은 성자가,

보통의 상식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기적,

덕행을 실천하여, 중생을 구제해 왔다.

오른 뺨을 맞으면, 왼쪽도 대어주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은,

현대인에게는 쉽사리 이해되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모세의 대기적(大奇蹟)은, 오늘에는 하나의 신화로 전달되어

학자에 따라서는 한낱 가공의 인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듯하다.

또한 붓다의 깨달음에 대해서도,

전래되어 오는 창작처럼 보는 사람도 있으며,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모두 삭제해 버리는 경향도 있다.

오늘날, 남겨져 있는 문헌의 대부분은,

허구와 진실이 뒤섞여, 진위의 판단이 어렵게 된 부분도 많지만,

3차원적 이해를 넘어선 덕행이나, 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3차원이상의 고차원의 작용인 것을, 추측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3차원인 현세의 육체주를 타고 있을 때는,

우리의 의식은, 보통 10% 정도밖에 표면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장님의 인생을 살면서 고락을 체험하고 있다.

하지만 육체주에서 내려 있을 때

(잠 잘 때나, 마음이 조화되어 선장인 혼이 육체로부터 벗어 날 때)에는,

차원이 다른 세계로 가 있기 때문에,

육체주의 부속품,

눈, 코, 귀, 혀, 몸의 오관(五官)의 작용은,

사람각자에 따라 다르지만, 외부로부터의 진동에는 전혀 무반응이다.

따라서 기억력조차도 그 작용을 멈추고 만다.

기억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일체의 기억은, 결코 우리의 뇌 세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육체주의 선장인 의식. 즉 혼(魂)이라고 하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어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더라도,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7/66

잠을 자버리면, 그 때는 잊고 있다.

이것은 3차원의 육체주를 떠나

4차원이상으로 혼(魂)이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의식의 90%가 표면에 나오고,

10%가 잠재하여, 확실하게 현상화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면은, 육체와 의식,

즉 육체주(肉體舟)의 생명이 인생항로의 수행을 견디어 내기 위하여 하는 것이다.

수면은,

빛의 선(線),

즉 영자선(靈子線)같은 것으로서, 4차원 이상의 다차원의 세계에 접속되어,

이 빛의 선(線)을 통해서,

혼이 저 세상인 실재계(사차원 이후)로, 돌아가는 것이다.

죽음은 육체주(肉體舟)가,

인생항로에 견디기 어렵게 되었을 때이며,

육체주와 의식을 연결하고 있는 영자선(靈子線)은, 완전히 절단되어 버린다.

두 번 다시 육체주를 지배하여, 3차원의 공간에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공을 잃은 육체주는 차츰 썩어, 대자연으로 돌아간다.

한편 육체(원자체)를 떠난 혼은,

4차원의 배인 광자체(光子體)라고 하는, 정묘한 육체를 지니게 된다.

생전에 있어서 우리들의 원자 육체(原子肉體)는,

이 광자체(光子體)와 겹으로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죽음은 이 양자(原子體와 光子體)의 결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우리들의 의식은, 4차원이상의 다차원의 세계에도 통하고 있으며,

반대로, 같은 4차원에서도, 몹시 어두운 세계에도 통해 버린다.

자비와 사랑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대하고 있는 혼은,

빛으로 넘치는 ,다차원의 세계로 통하고,

자기보존, 자아아욕(自我我慾)이 강한 사람들은,

마음이 어두운 구름에 덮혀, 신의 빛을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후광도 어둡고,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 신음하며, 지옥계로 통하고 있다.

저 세상의 지옥계는,

아귀, 아수라, 축생, 연옥, 무간지옥이라고 하는, 무서운 세계이다.

아름다운 마음의 상태에 의하여,

비물질적인 정묘한 영위기(靈圍氣)를, 만들어 내고 있는 천상계는,

이 세상의 3차원의 불안정한 고체적 천체인 지구를 감싸고 있다.

지상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위가 중도의 조화된 생활이면,

지구는, 한층 더 광명화되어,

유토피아 완성의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다.

지상계의 인류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혼란한 투쟁과 파괴의 업(業)을 만들어 왔는데,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8/66

그 동안 매우 다면적이었던 사상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양극으로 나누어져,

겨우 조화에의 광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의 혼란된 사회는,

인류가 체험해야 할 업(業)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제력, 권력, 무력에 의해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일시적인 지배는 가능하여도,

인간 본래의 신성(神性), 불성(佛性)인 마음의 자유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생활환경의 경제적 틀이 달라지더라도,

마침내는 자유평등의,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하는,

자애의 마음이, 평화로운 세계국가를 완성해 갈 것이다.

인류는 그것을 위한, 엄격한 학습을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마음을 잃은 사상은, 사회를 혼란으로 빠뜨려,

인심을 어지럽히고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마음까지 썩어버린 사상가와 그 추종자는,

가장 혹독한 연옥, 지옥에서, 그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수행한다.

그 수행을 남에게 전가(轉嫁)시킬 수는 없다.

이 현상계는, 무(無)에서 유(有)를 낳게 하기는 불가능하다.

유(有)에서 연(緣)에 의해, 유(有)가 생겨나는 것은,

무너뜨릴 수 없는 현상이며 법칙이다.

우리들의 오관(五官)으로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이다.

인간의 생활의 지식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문명은,

공해라고 하는 부산물을 수 없이 낳고 있다.

대기 속에, 질소화물이나 유화물, 광화학 스모그라는

생물의 생존에 위험한 독물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우리들의 육체주(肉體舟)도, 양친의 연에 의해,

또 그 선장님도 차원이 다른 세계에서, 인(因)을 맺어,

그 연생(緣生)에 의해, 유(有)에서 유(有)가 생긴 것이다.

에너지 불멸의 법칙도,

질량 불변의 법칙도,

오로지 유(有)에서 유(有)가 생겨나는 것이며,

그 유(有)가, 모양을 바꾸어 현상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의 마음과 행위에 대해서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괴로움, 슬픔, 기쁨의 원인은,

모두 오관(五官)과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난 것이 아니다.

상념은,

현상(現象)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육체적, 정신적인, 여러 가지 현상은,

그 때문에 상호관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29/66

불교에서 말하는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하는 의미를, 상기해 주기 바란다.

양자(兩者)는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 현상을 만들어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의학의 거의 모든 분야가,

육체적 조건만을 추구하여, 일체의 질병을 고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은 큰 잘못이다.

물리학의 분야는, 벌써 하나의 큰 벽에 부딪혀,

수십 년 전의 상대성 이론,

특수상대성 이론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우리들의 육체의 여러 기관은,

위는 위로서,

심장은 심장으로서의,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육체주의 조화를 위해,

각 기관들은,

저마다의 사명을 갖고,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육체주의 선장님인 혼, 의식의, 상호관계의 대조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며,

질병은, 이 양자의 부조화가 원인인 것이다.

현대인에게 흔한 노이로제라는 병도,

육체주(肉體舟)와 선장님인 마음의 부조화가, 원인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편견과, 자기중심적인 생각,

그리고 마음속에 부조화한 상념을 가득 넣어, 뱉아 내지 못하는,

정서 불안정한 생활의, 누적된 결과, 생겨나는 질병으로서,

그 대부분이 다른 차원의 지옥령이나 동물령의 빙의에 의해,

인격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어둡고 습한 장소에, 바퀴벌레나 구더기가 득실거린다.

그들은 밝은 태양 밑에서는 살 수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행위가 올바른 사람들은,

마음속에 구름이 없기 때문에, 악령들이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3차원의 색(色)의 세계와,

 4차원 이후의 마음의 세계와는,

 서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제 5 장 마음의 원점 (신은 빛이며 나와 함께 존재한다.)

1. 예술과 정도(正道)

“예술가는 표현을 통하여

어떻게 제3자의 마음에 호소할 것인가 하는 일로, 늘 고심하고 있습니다.

욕망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자칫하면 타락하기 쉽고,

갯밭무시의 블로그또한 작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므로,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0/66

자기만족의 독선적인 생활에 빠지기 일쑤입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것은 어떤 여자 배우의 예술과 정법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음이 없는 예술은, 일시적으로는 인기를 얻을지 몰라도,

나중에는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 것이다.

배우들은 대개가 팬들에게 둘러싸여 떠받들어지므로 교만한 마음이 생겨,

사생활과 예술의 불일치에 고민하다가,

결국은 대중 앞에서 자취를 감추고 과거의 사람으로 잊혀져 가는 것이 통례이다.

그 원인은, 마음과 행위에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비록 화려한 환경 속에 있더라도,

오만에 빠지지 아니하고, 항상 겸허한 자세로 예술의 길에 정진해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마음에 어두운 상념을 만들지 않게 되므로, 광명에 차게 될 것이다.

배우가 하나의 연기를 통하여, 완전하게 그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과 행위까지 완전한 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우리의 마음은 일념삼천(一念三千).

선으로도 악으로도 통하게 되는 것이므로,

악역, 병자. 자살, 연인 등의 연기를 통하여,

마음도 몸도 완전히 그 연기 중의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연기에서 풀려났을 때는,

올바른 마음의 척도로써,

자기가 연기한 주인공의 선악을 확실하게 인식하여,

착한 것은 마음에 새기고, 악한 부분은 잘 반성해서,

현실 생활에서는 자기의 마음과 행위에 그것이 연장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조화한 장면은,

반드시 차원을 넘어서서 부조화한 세계와 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가, 병자의 장면을 연기하고 있는 사이에,

실제로 주인공의 질병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수가 있다.

그것은 주인공의 배역이 되어 있는 이상,

당연히 주인공의 의식과 함께 통하고 말기 때문이다.

특히 사망한 주인공의 장면을 재현하는 경우,

연기에만 그쳐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그 반작용이 현상화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원망, 질투, 비방, 노여움, 시기 따위의 연기는

당연히 부조화한 영들에게 통하고 있으므로,

올바른 마음의 기준을 잊고 무심히 생활하고 있으면,

배우 자신의 마음도 같은 상태가 되기 쉬운 것이다.

시나리오의 줄거리를 통하여,

인생의 표리(表裏)를 바르게 판단하고,

그 가운데서, 스스로의 마음을 넉넉하게 키워나가는 것이 훌륭한 연기자라고 하겠다.

조화된 좋은 연기 내용은, 관중의 마음을 보다 넉넉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1/66

연기자도 조화된 인격이 되는 것이므로,

그러한 배역에서는, 자신을 닦는 것이다.

오락 영화나 신파극 같은 데서,

관중들의 마음에 악(惡)의 씨를 심는 것같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장면들은,

반드시 그 반작용이 어두운 마음을 가진 연기자들이나 제작자에게 되돌아 가는 것이다.

악은 반드시,

신의 빛을 차단하여 스스로의 목을 조르게 마련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는 조화된 작품은,

대중의 호응과 지지를 얻어, 불멸의 명작으로 남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자극을 주고, 악의 씨를 흩뿌리는, 무책임한 자들의 상업 행위는,

언젠가는 자기자신의 선한 마음으로,

그 행위를 엄중하게 재판을 하게 된다.

그것은 원작자, 시나리오 작가. 감독 등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의 마음에, 선악을 판단하게 하는 정도(正道)가 심어져 감에 따라서,

올바른 비평을 받도록 될 것이다.

항상 대중과 함께 숨 쉬며,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직업일수록,

마음의 존엄성을 스스로 깨달아 행동해야 한다.

대중들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자각과 책임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단 배우뿐만 아니라, 예술의 모든 분야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매일의 생활속에서, 정법을 실천하고, 원전(院展)에 출품한 그림이 인정되어,

최고상을 획득한 사람으로, 치바현 거주의 K.D씨가 있다.

이 사람은, 그림을 그리는데 기교에만 치중하여 왔다.

50 여년 가까이 노력을 했으나, 화가에게는, 기교 이상으로,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고 깨달았다.

다음은 그 사람이 보내 온 편지의 내용이다.

“1971년도,

일본미술원 56회전에 출품한 저의 150호 짜리 ‘여름의 물’이,

다행스럽게도 최고상인 미술원상을 받았습니다.

원전에 출품할 정도의 화기이면,

누구나 미술원상을 타는 것이 가장 큰 꿈이요, 동경입니다.

그것은, 큰 명예인 동시에, 하나의 큰 관문을 돌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로서 저의 손에 들어 온 것입니다.

이 저에게요!

저는 작년 4월, M상점의 사장으로부터 ‘연생의 배’(마음의 발견,으로 변경)를 받고,

아사쿠사의 팔기빌딩에서 하는 토요 강연에도 나가서,

처음으로 인간의 마음과 행위의 올바른 척도를 배웠던 것입니다.

강연장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을 정도로 열심인 사람들에 의해

꽉 들어 차 있는 것에 우선 놀랐지만,

처음으로 뵙는 <연생의 배>의 저자의 품격이,

정작 종교가라기보다는

성실하고 예술가다운 데에 더욱 놀랐습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2/66

강연이 진행됨에 따라,

성실하고 티끌만한 의심도 끼어들 틈이 없는 신리,그 자체가,

저의 몸에, 마음에, 서서히 스며들듯 울림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나 쉽게, 신리를 만나게 해 주신 것이 황송하고 감사함에,

그 은혜를, 마음속에서 취한 듯 중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는, 한없이 욕심부리듯이, 매 토요일의 강연회에 나갔습니다.

신리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듯하였지만,

마음의 향상은 아직도 요원한 듯하여, 스스로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저는 14세에 그림에 뜻을 두고,

그 뒤 40년 이상을 이 길에 외곬으로 노력해 왔습니다.

그 결과 이제 겨우 미술원상을 받게 되었습니다만,

젊어서부터 세상에 알려진 재능있는 화가들과 비교하면,

부끄러운 화가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마음이 미숙함에 이르러서는, 붓을 들고 있는 지금도,

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고 할 정도로 부끄러운 생각이 듭니다.

다만 저와 같은 사람도, 4개월 동안 신리를 배운 것만으로도,

이와 같은 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실재계에서 현상계에 태어 날 때,

매우 강한 결심을 하고 나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림에 대해서만은 의심없이 오늘날까지 해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나의 마음의 상태로서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맏아들로 태어난 제가 ,

큐슈(九州)에서 도쿄로 올라 올수 있었던 일이나,

중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화가로서의 소양을 닦기 위해 근근히 독학을 하고 있을 때,

뜻밖에도 제국미술(지금의 무장美大). 일본화과에 적을 얹고

학습의 소망을 이루게 된 일이나,

카시야마 난뿌우 선생에의 제자 입문을,

소개자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었는데,

마침 거기서 서생(남의 집의 가사를 도와주고 기식하면서 공부하는 사람)

을 하고 있던 초등학교 동기생의 인연으로,

반년 뒤에는 제자로 들어 갈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이번에는 난뿌우 선생의 추천으로

동경하던 요코야마 다이칸 선생의 내제자가 될 수 있었던 일,

또한 그림으로는 결정적 영향을 저에게 남기고 죽은 학우가 있었던 일,

후원자의 덕분에 그림을 팔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었던 일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사람들과 물질의 은혜를 받아 온 것 등은,

아무리 생각해도, 수호령의 힘이었던 것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무명작가나 다름없는 화가가 이런 시대에,

자신의 창작 작업에만 몰두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전혀 보답이 없었던 기나긴 실의의 시기를 간신히 견뎌낸 끝에,

3년쯤 전부터, 겨우 연속해서 장려상 정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재작년에는 차점까지는 올라갔지만,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3/66

원상(院賞)이란 멀고도 먼 존재로 여겨졌었습니다.

선생님의 강연을 듣고, 반성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은,

중요한 마음의 문제에 대해서, 나의 관심이,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상념의 중요성을 알지 못한 탓으로,

많이, 잘못을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화가의 기(技)만으로써, 승부하려고 덤벼들었던 어리석음을,

이 나이가 되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난 해, 책(마음의 발견)을 쓴 분의 덕분으로,

출품할 그림을 준비할 시기가 왔어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 놓았습니다.

그러자 6월 초순경, 이틀에 걸쳐서, 새벽녘에, 구도의 밑그림이 있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지도령의 인도로서,

저는 주저없이, 작업에 착수하여, 순식간에 기초그림을 그려 낼 수 있었습니다.

카시야마 선생 댁에서 있었던, 기초 그림의 비평회 석상에서,

선생을 비롯한 여러 선배들로부터,

이 작품이라면 좋은 그림이 될 것이라는 격려의 말을 듣고,

올해야말로 어떻게든 하고, 큰 의욕이 솟아났습니다.

곧장 본 그림에 착수하였는데,

병때문에, 붓을 잡지 못하는 날이 계속되어, 초조해졌습니다.

마침 그 무렵, 도찌기현의 만원사에서 연수회에 처음으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병든 몸이었습니다만,

3일 동안의 일정은,

설법과 수행으로, 짜여진 참으로 고마운 나날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덕택에, 집으로 돌아 온 뒤,

건강을 회복하고, 순탄하게, 예정대로 그림을 완성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림을 액자에 넣고, 혹시나하여, 전년도의 작품을 꺼내어 나란히 놓고 보았습니다.

비교해 보니까,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그림에는, 빛이 있고 훌륭하다

마감이 가까워지면서.

이 그림에 빛을' 하고 염하면서 붓을 움직였던 적은 있으나,

이렇게나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저 자신도 믿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4개월 남짓밖에 선생님의 강연을 듣지 못했던 저는,

마음의 향상에 조금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중요한그림에 그것이 인정되어, 정말로 기쁘기만 하였습니다.

‘연생(緣生)의 배(舟)’ 를 인연으로 하여,

오랜 염원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지금 마음속으로 깊이 음미하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길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4/66

이제부터 더 한층 괴로운 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선생님과의 이 소중한 인연을 마음에 새겨,

어느 날엔가 실재계로 빛과 함께 돌아 갈 수 있도록,

더욱 더 팔정도를 실천해 나가려고 다짐하는 바입니다.“

일본 화가 와카키야마(若木山)

이와 같이 올바른 마음의 기준을 깨닫고 생활함으로서,

마음에 구름아 없어지고, 마음은 광명으로 차게 되고.

목적에 대하여 노력하면,

그 행위에 비례한 지도령이,

보다 나은 일(작업)이 가능도록 하여

,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협력한다고 하는 것이다.

화가의 이야기는 하나의 좋은 현상례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이야말로,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으뜸의 문제이다.

예술가는 예술을 통하여,

인간의 깨달음이 궁극적으로

마음에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문학가의 죽음


“저는 신문기자입니다.

작가의 자살이 예전부터 많이 있는 듯 한데

그들은 왜 죽음을 서두르는지요.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염세적으로 되고 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질문이다.

하기야 최근에도, 대표적 작가인 미시마, 가와바다. 두사람의 자살이 잇달아,

문학 애호가들에게는, 슬픈 소식이 되어 있다.

작가를 죽음에 이르게하는 마음속까지는 알 수 없다.

존경하는 작가의 죽음은, 나의 마음까지도, 쓸쓸한 그늘을 던진다.

삶의 무상(無常)함이 엄습해 온다.

죽음이라는 결론은 같다 하더라도,

그 동기는, 사람마다의 입장. 환경, 사상에 따라 다르다.

자살은 인생으로부터의 도피이고,

자기보존의 극단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비단 문인(文人)에 한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천수를 다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생의 수행을 포기하는 것은,

비록 세상에 알려진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그리고 어떤 사정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올바른 이유가 되지 못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5/66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 원하여 부모로부터 부여받은 이 육체주(肉體舟)는,

그 생명이 존속되는 한,

신의 자식으로서,

이 인생항로에서 완수해야 하는 수행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

목숨이 있는 한,

이 육체주(肉體舟)를 소중히 다루는 것이,

신의 자식으로서의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작가가 남기는 작품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그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신의 자식으로서의 책임은 더욱 무거운 것이다.

작품 가운데는,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겨,

그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저속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자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지성을 넉넉하게 하여, 조화를 갖춘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도 있다.

그 내용은 가지각색이다.

신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눈 뜨고, 마음이 조화되어 있는 작가의 작품은,

독자에게 마음의 양식으로 되어, 인생을 살아가는데 용기와 기쁨을 준다.

그러나 아무리 명성이 높은 작가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잃어버린 작품은, 마침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한 작품이 과연 독자의 마음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없는 독자와, 마음 있는 독자에 따라서도,

작품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다르다.

다시 말해서 작품의 내용은,

독자의 올바른 마음의 척도로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내용에 따라서는, 많은 독자에게 큰 영향을 주며,

그로 인한 현상도 또한 크다.

저속한 작품의 경우는 특히 그 영향력이 강하다.

부조화를 불러일으킨 그 책임은, 작가 쪽에도 물론 있지만,

그 독을 먹은 독자에게도 큰 문제가 있다.

독을 뿌린 죄의 대가는,

신의 자식으로서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수행장(지옥)에서 치러야 한다.

작가의 책임은 그런 의미에서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논픽션이건 픽션이건 간에,

그 이야기의 주인공의 마음으로 되어 붓을 움직이고 있는 사이에,

작가의 마음속에 만들어져 나가는 상념은,

작중 인물의 마음과 완전히 합일 되고 만다.

이를테면 역사상의 남겨진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난세를 헤쳐나간 한 무장의 이야기를 쓴다고 하자.

이 경우, 작가의 마음속에는, 당시의 상황이 살아나온다.

이럴 때, 차원을 넘은 세계로부터, 그 작가의 지도령이 쓰게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갯밭무시의 블로그결투의 장면을 쓰고 있을 때는, 작가의 마음까지도 싸움의 파장으로이일렁거린다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6/66

만약 묘사하고 있는 그 장수가 악인(惡人)이라면,

작가의 마음도 같은 마음의 상태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즉 그것은, 창작하고 있는 작가의 마음이,

차원이 다른 저 세상으로 통하고 말기 때문이다.

조화된 마음의 상태라면 좋으나,

부조화한 상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경우에는,

설사 그것이, 창작이라 하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속에도 부조화한 현상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올바른 마음의 척도를 확고하게 깨닫고 생활하고 있는 작가들은,

비록 부조화한 주인공을 그리고 있을지라도,

스스로의 올바른 마음의 판단으로,

그 마음속에 어두운 상념을 만들어 내는 일이 없다.

그러나 작가가, 올바른 마음의 척도를 잊고,

창작 중의 부조화한 인물에 도취되고 말면,

작가의 마음도 어느새 주인공으로 바꿔지고 마는 일이 많은 것이다.

이럴 때, 불면 노이로제라고 하는, 불안정한 마음의 상태를 만들어 내고 마는 것이다.

상념은, 현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보존에 빠져, 가정생활도 불안정하게 되고,

이름이 유명해짐에 따라, 오만해지는 작가도 있다.

겸허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자기는 위대한 인간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작가들이 많은 것이다.

자신(自信)과잉과, 자신 상실은 표리관계에 있다.

마음의 변화는,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기복이다.

그 기복도,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명작을 남긴 작가라도,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는, 항상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어느 사이엔가, 그 마음의 상태가,

창작 속에서 태아나는 부조화한 마음에 상응한 지옥령에게 빙의되어,

마침내 올바른 판단을 잃고 마는 것이다.

창작의 작은 세계 속으로, 도피해서는 안 된다.

명리에 구애받지 않고,

 항상 평정을 간직할 수 있는 넓고 넉넉한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작가의 마음에는,

 사신(死神)이라는 지옥계의 빙의령이 접근해 온다.

그러므로 유명한 작가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표리가 없는 인간인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가 않다.

인간의 가치는, 명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노여움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면,

가장 가혹한 연옥, 지옥의 화염에 휩싸인 환경에서,

반성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자신의 명성에 도취되어, 마음속에 그려내는 부조화로 혼란한 파괴적 상념을,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7/66

실천하려고 했을 때,

의식의 바늘은, 벌써 연옥, 지옥의 아수라계로 통하고 만다.

감정의 영역이 부풀고, 이성을 잃은 마음은,

크게 왜곡되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서 문무 양도(文武兩道)따위는, 신리일 수 없다.

그것은 봉건시대의 한갓 잔영에 불과하다.

문필은, 때와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는 무기가 될 수 있다.

투쟁적 무력(鬪爭的武力)은, 육체적 행동을 제어할 수 있어도,

마음까지 지배할 수 없다.

왼손에 칼, 오른 손에 붓을 들고,

문무양도(文武兩道)를 외친다면, 과격한 작품이 만들어 질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마음의 불만, 마음의 적에게 쫓기게 되어,

스스로의 목을 조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마음의 격투는,

스스로가 중도를 깨달은 마음과 행위에 의해 가라앉힐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독자의 마음의 준비는,

작품 속의 선악을 올바르게 판단하여,

선의 길을 존중하고, 선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으며,

보다 둥글고, 넓고, 넉넉한 인격을 만들어서,

인생을 의의있게 지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과 악은 그 어느 쪽도,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에 의해서,

윤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일일 일생 (一日 一生)

1971년 11월

강연회는 도쿄에서 지방으로 확대되어, 특히 칸사이 지방의 출장도 많아져 갔다.

24일에는 오사카, 25일은 시코쿠로 가는 등 분주한 일정은,

마치 선거운동의 유세를 방불케 했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것이 일생의 사업이라고 지도령으로부터 듣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 이틀은, 하루에 8시간의 연속 강연과, 질의응답,

거기에 현상(現象)을 나타냈던 것이다.

수천 명의 청중, 더욱이 환자의 개인 상담이 76명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

 15년되는 앉은뱅이, 10년되는 반신불수의 사람들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청중이 보는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협력해 주는 빛의 대지도령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인간 각자(個)의 생명은, 차원을 넘어선 세계로부터 도움이 없는 한,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8/66

도저히 기적 따위는 일으킬 수 없는 일이다.

기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조화된 영위기(靈圍氣)를 조성해 내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들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 당시 일어났던 기적을 체험한 히가시 오사카시에 살고 있는 K.T의 수기를 소개하겠다.

“이 몸에 기적이!

 의사에게서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던 좌반신의 마비가

 남편의 빙의령(憑依靈)이라니“

라는 서두로 시작하여

”내 앞에 앉으세요. 당신에게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앉았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과거의 제가 아니고,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저는 소화 38년 2월 5일,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져,

당시 네 분의 의사로부터 재기불능이라는 진단을 받고,

비탄의 괴로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자식도 없었는데, 이런 형편에서 오래 자리에 눕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불안하여 마음의 평안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Z.회 교단(敎團)에 입단하고 있던 몸이라,

N회장으로부터, 왜 이런 병에 걸렸는가'에 대해서,

과거세에서부터 금생에 태어나서, 자신이 행해온 부조화한 생활,

그 원인을 만들어낸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고,

<가르침을 믿고,

지금까지의 인생을 깊이 반성하여,

나의 말이 납득이 가면 그 행을 실천하세요,

반드시 과학에서는 해결하지 못한 결과가 일어나,

다시금 불도에 정진할 수 있는 신체로 됩니다.>

라고 타일러 주셨습니다.

저는 그 가르침을 굳게 마음에 새겨, 실행해 가는 동안에,

재기불능이라던 신체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을 정도까지 회복되어,

2년 뒤에는 험한 등산길도, 동행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올라갈 수 있을 정도까지 건강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발병했을 당시, 시신경(視神經)을 다쳐,

좌반신지각마비와, 오른손에 저림이 남고,

 그 위에 삼차신경통이라는 후유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오른 쪽 얼굴은, 하루 종일, 침으로 찌르는 것같이 아프고,

때로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의, 심한 통증이 일어나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눈과 안면 신경이 탈이 나 있었기 때문에,

글씨를 쓸 때나 사물을 볼 때에는,

반드시 오른 쪽 눈을 감지 않으면 똑똑히 초점이 잡히지 않았고,

콧물이 입까지 흘러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39/66

의사는, 오래 된 병이니, 완전치유는 어렵다.

치료는, 오른쪽 머리부터,

삼차를 향해 약을 주입시키는 것밖에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통증만 없어진다면, 얼마나 편할까.

하고 저는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체가 이러하니까, 정진할 수 있는 것이려니 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타일러,

참회멸죄(懺悔滅罪)의 길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고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한 통증이 몰아치면,

그 아픔에 지고 마는 일도 자주 있었습니다.

왼쪽 반신은 뜨거운 물에 담가도 감각이 없어,

화상을 입어도 알지 못했습니다.

항상 감각이 없어서,

한 열흘 전에도, 왼쪽 다리에 화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12일, 우연히도, 선생님의 설법을 듣게 되었고,

그때 선생님한테서 빛을 받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저의 안면에 양 손을 대어,

 “길 잃은 영(靈)이여,

 그대는 이 사람한테 빙의하고 있어서는 ........”

하고 타이르듯이 상냥하게 말씀하시는것 까지의 말씀은 알아들었으나,

그 뒤로는 그저 가슴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에 빠져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 하였습니다.

죽은 남편이 저의 입을 통해서, 온갖 말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저의 양 어깨를 감싸듯이 두드리면서,

 “당신에게는 죽은 남편이 빙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몸에서 떠나서,

 빛의 천사의 인도를 받고 수행소로 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자비와 사랑의 눈길은, 제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저는 자신의 얼굴을 만져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언제나 싸늘하게 느껴졌던 얼굴이,

더운 물에 목욕하고 난 뒤처럼 따뜻하게 느껴졌으며,

통증도 깨끗이 가시고 없어졌습니다.

몸도 말할 수 없이 가볍고,

두 다리도 대지를 꽉 밟고 설 수 있는 힘을 느꼈습니다.

밤에는, 작은 글씨를 읽지 못했는데,

선생님이 읽어 보세요'하고 내민, 카세트의 작은 글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감격과 환희는, 도저히 붓이나 혀로는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은

“당신의 남편은, 당신에게 빙의하고 있으면,

 구원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원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제부터 당신의 남편은,

 수행소에서 자신의 인생을 깊이 반성하여,

 이 현상계의 시간으로 쳐서 2,3년에 상당하는 시간이 지나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0/66

 천상계로 올라갈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법의 설법도 듣고,

오랜 동안의 육체적 고통도 없어졌으니, 하늘에라도 올라간 심정입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보고, 반성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현상계에서의, 자신의 모든 집착이,

이와 같이 죽은 남편의 빙의된 원인이었다고, 알게 해 주셨습니다.

혼자이기 때문에,

늙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항상 마음 한 구석에 불안이 있어,

온갖 것에 대한 집착을 갖고 있었습니다.

햇빛이 드는 장소에, 항상 있고 싶은 욕망,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지키려는 욕망등,

마음의 빈약함, 더러움을, 새삼스럽게 다시금 반성하였던 것입니다.

이 날을 기하여, 선생님은 저의 건강을 되찾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이 신체로써 팔정도를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진지하게 수행하여,

올바른 마음의 자세를,

저와 같은 병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승에서의 저의 사명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노력 정진해 나갈 것을 마음깊이 결심하고 있습니다.

10월 3일을 시작으로, 오늘까지,

선생님의 문증(文證), 이증(理證), 현증(現證)을,

이 귀로, 이 눈으로, 그리고 이 피부로 느끼고,

정법의 위대함을,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신리로서,

저의 마음은 용기 백배 약동하고 있습니다.

Z회 교단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과 연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Z회 교단의 N회장의 용단과 자비에 의하여,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법>에 귀의할 수 있게 된,

몸의 과보(果報)를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K.T는,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는 것이었다.

K.T 는 10년 가까이나, 신체적인 부조화로 고통 받아 왔는데,

그 원인을 만들어 내고 있던 ‘<마음>’

그 속에 있는 상념의 작용, 그 선악이,

 육체주(肉體舟)에 영향을 끼쳐왔던 것이다.

이처럼 연일연야(連日連夜),

나는 강행되는 스케줄에 쫓기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항상 지도령으로부터

 ‘신체도 자기의 일부이니, 주의를 게을리 하지 말라.’

라는 말을 들어 왔으나,

나는 32년 동안, 병에 걸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몸을 혹사하고 말았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1/66

수면 부족 때문에, 위의 소화력이 약해져 있었는데,

기름기 많은 음식을, 그것도 밤 한시 경에 먹고, 잠을 잤다.

새벽 3시경이나 되었을까.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그런데 15미터쯤 떨어진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아니 저런저런 하는 사이에, 나의 육체주(肉體舟)에서 선장인 의식,

즉 ‘또 하나의 내’가 빠져 나가지 않는가.

이 현상계와 실재계를 잇고 있는 돔(원통)속에서,

‘아아 큰일 났군’하고 ‘ 또 하나의 나’는,

쓰러져서 자유를 잃은 나의 육체를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무엇이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잠이 깬, 동행자인 I 부인이 달려와서, 당황해 하고 있다.

잇달아 같은 방에 자고 있던 S박사. M주지가 가까이 달려온다.

세 사람의 놀람은, 나 보다 더 컸다.

I 부인은 내 심장에 손을 대고 있다.

S 박사는 맥을 짚고 있다.

두 사람의 눈과 눈이 마주치며,

심장이 완전히 정지하고 있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있었다.

I 부인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주고 있는 분에게,

 왜 실재계의 대지도령은, 무자비한 짓을 하는 것일까.

 나는 모르겠다.

 왜 구해 주지 않는단 말인가....“

라고 마음속에서 자문자답하고 있다.

나의 지도령들은 I 부인의 뒤쪽에서 가만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I 부인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의문은, 죽어 있는 나에게 전해진다.

그때, 큰 빛의 광자체가 나의 육체를 지배함과 동시에,

 “걱정할 것 없으니, 그냥 두세요.”

지도령(指導靈), 화이 신 화이 신포가 말하였다.

I부인은 영청(靈聽)으로 그 말을 듣고,

 “아아. 괜찮다. 지도령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다....”

하고 직감하는 것이었다.

S박사는, 수건을 물에 축여서, 내 머리 위에 얹고 있다. 그리고.

 “다카하시 선생이 죽고 나면,

 오사카의 새 법우들 3만 수천 명은 어떻게 될까.”

하고 걱정이 태산이다.

M주지는 내게는 최초의 제자인데, 그의 걱정도 대단하다.

열심히, 나의 심장에 신의 빛을 넣어주고 있다.

이처럼, 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똑똑히 내게는 손에 잡히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돔의 준엄한 파동 속에서,

내 인생의 모든것을 반성하는 것이었다.

내가 설법하고 있는 것에 잘못이 없었던가,

올바르다고 하는 기준,

그것에 잘못은 없었던가.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2/66

괴로움의 인생에서 해탈하는 길,

팔정도,

이것 밖에는 없는 것인가.

내 자신이 오만에 빠져 있지는 않았던가.

사리사욕(私利私慾)의 마음이 있지는 않았던가.

행동에 잘못은 없었던가.

이렇게 ‘또 한 사람의 나’는,

나 자신의 결점을 캐어물으며, 반성을 거듭하고 있다.

돔 속에는, 여전히 격심한 진동과 같은 파동이 전달되어 온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돔 안을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 안에서, 팔짱을 끼고 곰곰이 반성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내가 실천하고 있는 일과 신리에는, 절대로 잘못이 없다.

내가 전혀 배운 적이 없는 불교의 진수를 속속들이 깨닫고 있는 것도, 신기한 일이며

역사적인 그 경과도 배우지 않았는데, 죄다 알고 있다.

내 자신이, 그 불가사의함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큰 집착이 있었다.

나는 내가 소유한 전기회사를 비롯한 몇 개의 회사, 건물, 주차장 따위의

사무적인 여러 문제에 관해서,

나 자신이외에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우쳤던 것이다.

아아. 실수다.

이 문제를 남겨 놓고 있는데, 어떻게 전달하면 좋을까.

도장. 열쇠, 서류, 시작하고 있는 일...

내 마음속에는,

차례차례로 살아 있는 자에게 인계해 주어야 할 문제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지금 건설 중인 사업, 자.... 어떻게 할까. 어떻게 연락할까.

 하지만 육체는 완전히, 호흡도 심장도 멎고 있다.

 ‘또 한 사람의 내’가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당황해서는 안 된다.)

하고 나는, 마음을 가라앉혀, 돔 속에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렇다.

아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있으니까, 차원이 다른 세계와도 말이 가능하다.

실재계로 돌아가서, 영적 현상을 일으켜, 연락을 하자.

그러나, 육체를 좀 더 소중하게 다루었어야 했다.

실수하고 말았구나, 아아 잘못했군. ....)

하고 나는 몇 번이나 생각하는 것이었다.

신리에 관해서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무렵

네 권의 저서를 남겨놓았으니까,

뜻있는 사람이 반드시 계승해 주리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으므로,

이 문제에 관해서는, 거의 집착심이 없었다.

다만 사업의 뒤처리와, 가족의 문제만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3/66

일생의 반성과,

남아있던 집착심을,

한 시간 남짓한 사이에,

맹렬한 속도로 모조리 처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돔 안에서,

‘또 한 사람의 나’는,

아래로 하강함과 동시에,

누워있던 육체주(肉體舟)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육체주(肉體舟)는, 그 순간, 크게 숨을 토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걱정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나는 비로소 내 입을 열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모두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아직은 눈을 뜨지 못한다.

물론 육체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시금 육체의 괴로움이, 마음속에 전달되어 온다.

육체주(肉體舟)에서 내려서, 돔 속에 들어갔을 때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는데,

육체주를 지배하게 되니,

 다시 전과 같은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죽음의 경계에 서게 되었고,

처음으로,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나는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상계에, 미련을 가지면, 그것은 역시 괴로움이 된다.

그것은 마치 무거운 짐을,

저 세상으로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마음의 척도로써 반성하여,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미련이 남지 않는 생활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무거운 짐을 가지고 말았다면,

나는, 그때 완전히 지옥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미련이 남는 집착심이라는 것은,

전기회로(電氣回路)의 전기적 저항(電氣的抵抗)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평상시의 지관(止觀)의 상태에서,

‘또 한 사람의 내’가 이탈했을 때는,

다시 한번 되돌아 온다고 하는 가벼운 마음이니까,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는데,

다시 이 현상계로 돌아 올 수 없다는 결론이 났을때는,

육체주(肉體舟), 가족, 재산등,

현상계의 모든 것으로부터 마음이 떠나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서,

지금은, 일체 마음에 걸림을 갖지 않도록,

언제 실재계로부터 귀환 명령이 오더라도,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4/66

 응할 수 있는 심경이 되어 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그것은 1971년의 최대의 깨달음이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실행하려고 하면, 이것도,

상당히 힘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가, 이와 같은 생활을 보내는 것이,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결점을, 용기를 갖고 수정하고, 팔정도를 실천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우리들의 수행이라'는 것이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라 해도,

그 당시의 권력자인 악마들의 손에 의해서,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던 것과 같이.....

비록 신의 가호가 있었다고 해도, 그 죽음의 원인을 만들면,

인류는, 언제라도 무상한 바람에 휘날리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계,

저 세상에서 보면,

죽음은,

이 현상계로부터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실재계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낡은 상처투성이의 육체주(肉體舟)를 이 현상계에 방치하는 것뿐으로,

우리들은, 지금의 육체주와 동거하고 있는 새로운 육체주,

즉 우리들의 육안에 보이지 않는 광자체주(光子體舟)를 타고 가게 된다.

이 새로운 신체가,

얼마나 광명에 싸여 있는가에 따라서,

자기가 돌아 가야할 장소가 정해지고 마는 것이다.

마음의 광명도(光明度)는, 자기자신의 일상의 마음과 생활 상태가,

얼마나 올바른 것이었던가' 하는 것으로 광자량에 차이가 생기고,

사후에 가야 할 단계도 또한 거기 비례하여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것은,

정도를 깨닫고 실천하지 않는 한 매우 어려운 것이다.

정법을 깨닫지 못하고, 행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생활하고,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함도 없이,

이 세상을 떠나면, 어김없이 지옥계로 떨어지고 만다.

말법의 세상으로 되면 마음속의, 법등(法燈)은 꺼지고,

마음이 상실된 시대가 되어,

인간은 물질경제의 노예로 타락하고 말기 때문에,

즉신성불은 아득한 꿈속의 용어로 끝날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문명이라고 하는 생활의 지식이,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고,

도시의 스모그가 태양의 빛을 차단하여,

갯밭무시의 블로그광화학 스모그라는 부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이,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5/66

마음을 상실한 문명은 이 지구상에,

혼란한 아수라계를 만들어 내어,

신의 자식, 동지의 자비, 사랑을 잊고,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하는 신의 마음을 잊어 가고 만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낸 마음의 스모그를

털고 닦아내는 일이 시급한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일일일생(一日一生)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를 정진하지 않는 한, 완수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런 생활을 쌓아가는 노력으로써,

참된 유토피아가 완성되어가는 것이다.

반성, 마음과 행위는,

마음 깊숙이 잠재하고 있는 위대한 불지(佛智)를

 풀어내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반성에 의해서 마음의 구름은 맑게 개이고,

위대한 광명의 천상계로 통하여,

빛의 천사들의 협력을 얻도록 된다.

부조화한 마음의 세계는,

영위기(靈圍氣)는 흐리고,

 어두운 세계의 지옥령들에 의해서 점거되어 있다.

스스로 만들어낸 부조화한 행위에 의해,

인간이 혼란한 사회를 형성한다면, 괴로움의 가담자가 될 것이다.

인간은, 일초, 일초, 경과해 가는 시간 속에서,

마음과 행위가 얼마나 중대한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4. 일념삼천(一念三千)

사람의 마음은, 본래 자유이다.

마음의 넓이는, 우주대에 이르고 있다.

보통은 그 넓이를 체험으로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대우주는 참으로 넓구나’

라고 느끼는 마음은,

우주대(宇宙大)로 넓어진 그 마음을 객관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모두 그와 같은 마음을 잠재의식 속에 가지고 있다.

그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넓은 마음이 실제의 생활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엇에 원인이 있는 것일까.

육체라고 하는, 오관(五官)에 마음이 빼앗겨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매우 작거나, 혹은 이지러져서,

본래의 넓고, 둥글고, 넉넉한 마음이 살려지지 않은 채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6/66

불교에 일념삼천(一念三千)이라는 말이 있다.

일념삼천이란, 사람의 마음은 어느 곳에라도 통한다는 말이다.

악을 생각하면 악,

선을 생각하면 선으로 통하는 것이다.

마음의 바늘은, 이승뿐만 아니라,

저승의 세계로, 그대로, 스트레이트로 통하고 만다.

그러므로 오관(五官)에 좌우되어,

자기보존의 마음으로, 성내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질투하면,

그러한 상념들이 모여 있는 지옥계로, 의식이 통하여,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그와 같은 상념의 와중에 빠져들어,

그것이 온갖 장애가 되어 생활상의 문제를 야기하기에 이른다.

반대로 넓은 마음으로 되어,

사랑과 자비의 생활,

남을 살리는 정도를 실천하고 있으면,

천상계로 의식이 통하여, 수호령과 지도령의 빛을 받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둥글고 크고, 넉넉한 것이다.

넓은 마음은, 빛의 천사의 인도를 받는다.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통신을 보내어서, 그 사람을 선도(善導)해 준다.

육체인간은, 내일의 생명조차 알지 못한다.

그런만큼 방황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황 속에 있더라도,

정도를 지켜 신불을 믿고, 넓은 마음을 잃지 않으면,

반드시 그 사람의 앞길에 희망을 보내준다.

오관(五官)에 사로잡힌 좁은 마음은,

넓고 크고 자유로운 마음을 스스로 폐쇄하는 것이다.

일념삼천(一念三千)이란 말은, 중국의 천태지의라는 고승이 썼던 말이다.

일념(一念)이란, 상념의 바늘이다.

이렇게 하고 싶다. 저렇게 하고 싶다. 이것이 먹고 싶다.

저것이 갖고 싶다. 등의 상념이다.

인간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할 수 없다.

하나밖에 할 수 없다.

그 하나로서

악을 생각하면 지옥으로 통하고,

선을 생각하면 천상계로 통하고 만다.

따라서 악은 생각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삼천이란,

3이란 수는 나눌 수 없는 수이다.

2나 4나 6은 나눌 수 있으나,

3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천(千)이라는 표현은, 큰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3천(三千)이라고 하면 무한대라는 의미가 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일념삼천은 우리의 생각이 무한대의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뜻이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7/66

악을 생각하면 악(惡)의 극(極)으로,

선을 생각하면 선(善)의 극(極)으로 통한다.

일념삼천을 각도를 달리하여 해석하면,

사람의 마음의 무한성, 즉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로운 마음을,

악(惡)에다가 연결시키면 이윽고 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결과가 되고 만다.

대체 악(惡)이라든가 선(善)은, 무엇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일까.

보통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남의 물건을 훔치면 나쁜 것이다.

등으로 해석한다.

물론 도둑질하거나, 살인하는 것은 악(惡)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정법에서 말하는 선(善)과 악(惡)은,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마음'을 문제로 삼는다.

즉, 가지고 싶은 마음, 남을 미워하는 상념은,

‘자기가 소중하다’,

자기만 좋으면 된다.‘

고 하는 자기보존과 자아아욕(我慾)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 자아가 없다면,

도둑질하거나 가로채거나 하는 마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체의 악은, 자기보존인 것이다.

자기보존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보존을 중도로 돌려, 만족함을 안 생활을 해 나가면,

이 세상은 조화된 사회가 될 것이다.

신의 심판은, 사람의 행위도 물론이지만,

그 것 보다도 먼저, 그 행위를 행위로서 움직인 마음,

즉 자기보존의 상념,

악(惡)의 일념(一念)이,

제일 중요시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선 우리들은 악(惡)을 생각하지 않고,

항상 선(善)한 생각을 가지고,

정도에 맞는 생활을 해나가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정의 불화, 질병, 사업상의 문제, 공해 등 온갖 트러블은,

자기보존과

족함을 모르는 욕망이 작용한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5. 지식과 지혜

지식과 지혜를 동일시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허지만 이 양자를 명확하게 구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어디까지가 지식이고,

어디서부터 지혜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지식은, 이 세상에서 배운 모든 지식 그 자체를 말한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8/66

지혜란, 잠재의식 층에 내재된 산 경험이다.

대학에서 배운 지식이 실생활에 어느 정도 응용이 가능한가.

아무리 해야 10의 지식 가운데, 1 아니면 2 정도이다.

학자나 특수한 직업인이면 몰라도,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의 응용범위는, 그야말로 미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식을 응용해서 실생활에 살리려고 하면, 대개는 실패한다.

대학교수나 학자로 하여금, 정치나 사업을 시켜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성공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생활의 터전은, 살아있는 생물과 마찬가지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다.

어제의 지식이 오늘은 소용없는 휴지가 되는 일이 많다.

오늘날의 의학은 100년 전에 비해서 엄청나게 진보하였다.

그러나 의학의 진보와 함께, 새로운 질병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차례차례로 새로운 신종의 질병이 나타나서,

의학이 거기에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이에 비해서 혹자는 말한다.

의학의 진보가 있으니까, 이제까지의 미발견의 질병이 발견되는 것이다,

원래 그런 질병이 있었는데,

의학이 유치했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던 것이라고,

또한 지금까지의 의학은 치료의학이었을 뿐 예방의학은 미개척 분야이다.

그런 까닭에 환자가 그칠 날이 없다고도 말한다.

나는 의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의학의 분야에서 고칠 수 있는 질병도 많고,

또한 그런 치료를 하는 것이 좋은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질병의 80% 가까이는, 물리적 치료만으로써는 낫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왜냐 하면 마음이 질병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신종의 질병이 의학의 진보와 병행해서 나타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사물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시대와 함께 욕망의 방향도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의학은, 물질과학으로서, 물리적 치료에만 역점을 두어 왔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물질과학으로서의 의학은 진보되어 왔지만,

질병의 영역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넓어져 가기 때문에,

의학과 질병은 끊임없는 경쟁관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지식과 현실이다.

의학이라는 소위 과학 지식의 정점을 달리는 학문조차도,

질병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문이나 지식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우리의 생활의 터전은, 지식이나 학문에 의해서 지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학문이나 지식의 필요성은 새삼 논할 필요도 없지만,

요는, 우리의 날마다의 경험이, 우리의 실생활을 살려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날마다의 경험에서 우러난 생활의 지혜가, 우리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어떠한 직업이었건, 혹은 가사였건, 지식만으로는 계산해낼 수 없는이그블무엇이 로그에서있다검색 .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49/66

그 무엇이란 다름 아닌 경험이다.

경험으로 습득한 것이, 비로소 실생활에 도움이 되고 있다.

예부터,< ‘외우기보다는 숙달하라’>라고 하는 속담이 있다.

어떠한 직업이건, 제 몫을 하기까지에는 적어도 3년 내지 5년의 경험을 필요로 한다.

대학을 나와서, 취직을 해도 금방은 힘이 되지 않는다.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다 지도자적 지위에 앉는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만으로도 훌륭한 사회인으로서,

대회사의 사장을 맡아 훌륭하게 해내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예는 그 사람의 경험과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사회에서의 생활의 지혜가, 그렇게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도대체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란 산 경험의 축적이다.

축적이, 연(緣=條件)에 따라, 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사태에 따라

보통은 영감으로 나타나며,

사람에 따라서는 보다 구체적인 적절한 판단력으로 나타난다.

지혜는, 지식이나 두뇌의 활동으로서는 생겨나지 않는다.

지혜는, 마음에서 우러난다.

머리속에 지식이 가득 차 있으면, 지혜는 생겨나기 어렵다.

지식이 지혜의 용현(湧現)을 억누르고 말기 때문이다.

지혜의 보고는 잠재의식에 있다.

잠재의식이 열리면 지혜가 쏟아져 나온다.

불지(佛智)라는 말이 있는데,

불지란, 잠재의식의 밑바닥에서 샘물처럼,

표면의식으로 흘러나오는 위대한 파동이며, 빛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고,

오관으로는 판단이 되지 않는 문제가 해결되며,

일상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해 준다.

내가 하는 일은 전기(電氣)가 전문이다.

전기에 관한 것이면 대개는 다 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은 제로이다.

경문 한 줄 배운 적이 없다.

배운 적도 없는 부처님의 말씀이, 불경이 입을 통해 흘러나오며,

그 뜻도 알고 있다.

전화로써 본 적도 없고 이야기 한 적도 없는 사람으로부터 갑자기 상담을 받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수화기를 드는 그 순간에 그 사람의 전모를 알아버린다.

어째서 알게 되는 것일까.

인간의 잠재의식 층에는,

저마다 혼의 형제가 있어서, 소위 수호령으로서, 그 사람을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의 탄생 이후의 인생을, 그 수호령은 전부 알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의 수호령으로부터,

그 사람에 관한 전모를 듣고 아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0/66

이런 것은 지식으로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금세의 지식 이전의 살았던 경험이,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과거세가 있다.

전생윤회(轉生輪廻)의 살았던 경험이, 각자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

그 내재의식이, 마음의 창을 여는 것에 의해, 흘러 나오는 것이다.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마음의 창은, 정도에 맞는 생활을 함으로써, 열린다.

그러면, 그 사람의 과거세에 경험했던 것이, 표면의식으로 흘러나와,

인생의 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물론, 사람의 과거세는 저마다 다르다.

정도를 걸어 온 자도 있고, 욕망속에서 일생을 끝낸 자도 있다.

따라서 마음의 창이 열렸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도시 사람에게 쌀을 생산하라고 해도, 모심기 하나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과거세에 경험하지 못했던 것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은, 말할 수 있다.

매일의 생활이, 정도에 따르고 있고,

또한 그런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호령 이외에 지도령이 있어서,

그 사람의 노력에 상응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따라서 과거세에서의 경험이 없다고 하여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또 잠재의식이 열리는 것을 영도(靈道)가 열린다고 말하는데,

영도가 열리지 않는 사람이라도, 지혜는 솟아난다.

그 사람의 일상생활이 정도에 따른 생활을 하고 있으면 그렇게 된다.

지혜이외에 악(惡)지혜라는 것이 있다.

세상에는 악(惡)지혜를 부리는 자가 너무나 많아서,

그때문에 어느 세상도 항상 불안과 혼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악(惡)지혜는, 악마라든가, 동물령이 그 사람의 의식을 지배할 때 일어난다.

자기보존, 아욕,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는 상관없다는 사고방식이 강해지면,

이런 것들이 빙의하게 된다.

악마나 동물령이 빙의하면,

질병에 걸리기 쉽고, 의사에게 가도, 잘 낫지 않는데,

그러한 질병이라고 하는 현상 외에,

남을 속이고, 남의 물건을 횡령하며 남의 마음을 선동하고 뽐내기 좋아하며,

냉정하여 피도 눈물도 없는 경우도 있다.

사람도 십인십색(十人十色)이듯이, 악마나 동물령도 여러 가지다.

불지(佛智)라든가, 수호령 * 지도령으로부터 얻어지는 지혜는, 조화이다.

사람을 살리는 지혜이다.

사람을 골탕먹이는 간지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잘 알고,

정도에 맞는 생활을 보내야 한다.

6. 심행(心行)의 언혼(言魂)

갯밭무시의 블로그대자연의 지배자인 신은, 공평무사하며,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1/66

인간도 또한, 평등하고 차별심이 없는 마음의 소유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사회에는 능력의 차이,

기호의 차이,

체력의 차이,

지식의 차이,

절도(節度)의 차이,

태어나는 환경의 차이가 있으며,

희노애락에도 차이가 있음은 어쩐 일인가.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

행동하는 자와 방관하는 자,

공부하는 자와 향락에 빠지는 자,

오늘을 사는자와 내일을 기대하는 자,

건강한 자와 병약한 자,

자신에게 엄한 자와 남을 탓하는 자,

애정이 깊은 자와 냉정한 자,

화합을 으뜸으로 여기는 자와 분쟁의 씨를 뿌리는 자,

겸허한 자와 자신을 높게 보이려고 하는 자,

책임을 다하는 자와 의뢰심이 강한 자,

만족할 줄 아는 자와 욕심이 많은 자,...

이러한 차이가, 평등이어야 할 인간이 불평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신은, 결코 인간을 불평등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스스로의 마음에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조화도가 그 사람을 만들고,

올바른 자들의 마음에는, 광명이 비쳐서, 평안으로 휩싸이는 것이다.

마치 청천의 태양의 빛이, 만생만물을 육성하는 에너지로 바뀌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의 에너지도 온갖 것들을 키운다.

어두운 마음은, 마치 새싹처럼 어두운 돗자리 속에서,

빛을 차단해서 성장하는 것을 키우는 것이다.

그래도 신은, 평등하게, 자비의 빛을 쏟고 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니고는,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달렸다.

사랑이란, 관용이다.

포용력이다.

용서하는 것이다.

만일 이 지상에 사랑이 없다면,

인생은 물이 없는 사막의 나그네처럼

기갈에 울고 남을 돌볼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사랑은 서로 돕고

서로 보살피며

서로 감싸주고

서로 용서하는

그런 가운데 살아 있다.

사랑은 신의 빛이다.

지상의 등불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암야를 헤매는 사람들의 마음에 여유를 가져오고,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2/66

살아가는 보람을 주는 것이다.

사랑이란 등대의 불빛이다.

하지만 사랑에 맹목적으로 빠져서는 안 된다.

사랑은 준엄하다.

사랑은 자신에게 이기는 자,

향상을 목표로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야의 세계는, 자신의 진로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한다.

전도에 무슨 장애가 있는지도 모르며, 언제 웅덩이에 빠질지도 모른다.

초조감에 사로잡힐 때도 있을 것이다.

이 암흑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불량배들의 군상, 협박, 강도, 박해, 폭행, 사기.... 등은

그대로 공포의 세계이며,

만족하는 것이 없는,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고해(苦海)이다.

그것은 광명을 잃은 자들의, 악상념(惡想念)이 만들어낸 세계이다.

투쟁과 파괴, 폭력과 무력이 득세하는 세계이다.

자비깊고, 사랑을 베푸는 자는,

스스로 평안한 마음을 만들어, 사람들의 마음에 광명을 주며,

악마를 지배하는 올바른 길,

신의 길을 걷는 자이다.

악마에게 이기는 길은, 자애의 마음과 행동 이외에는 없다.

악마는, 나의 마음속에도 숨어 있다.

정도를 깨닫고 용기와 노력의 실천에, 위대한 지혜가 더해져,

자신의 결점을 수정할 때,

마음속의 악마는 멸망할 것이다.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야말로, 진정한 용자(勇者)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혼은, 전생윤회라는 신의 설계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의 자녀이며, 신불 자신이기 때문이다.

신불은, 무한의 진화를 목표삼고, 무한의 대조화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인간의 전생은, 그 목적과 함께,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대자연의 윤회와 완전히 똑같아서, 인간만이 예외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만약, 이 법을 거슬러, 자의대로 하고, 자아에 몸을 맡기면

그 사람은, 그 분량만큼, 보상의 짐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다.

물질도 또한, 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다.

집중과 분산이라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그 에너지는 영원한 활동을 지속한다.

그것도 모두 외부에서의 연(緣=條件)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원인과 결과라는 ‘법’을 왜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질 활동의 목적은, 생명의 전생윤회를 도우고,

한 편으로는 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생명도 물질도, 이와 같이, 전생윤회라고 하는 신의 ‘법’아래,

갯밭무시의 블로그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살려지고,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3/66

인간은, 눈뜨고 있을 때는, 육체를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잠자고 있을 때는, 육체가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받지 않는 한

잠자고 있을 동안에는 무자각(無自覺)이라고 할 수 있다.

육체주(肉體舟)에서 선장이,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직장도, 아무것도 모른다,

오관의 기능이, 아무 것도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콧구멍도 귓구멍도 분명히 열려 있다.

그렇지만 의식을 작용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비로소 육체주(肉體舟)의 자신을 자각하고,

아내랑 자식이 있음을 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일체의 ‘것’은 자기라는 의식이 있음으로서,

비로소 존재한다는 의미가 된다.

자기라는 의식이 없으면,

이 대우주도, 지상 세계도, 자기의 육체도, 인식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식이라는 것은, 이렇게 위대한 것이며,

의식은 우주대의 넓이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의식이야말로,

신의 마음으로 통하는,

진짜 자기 자신의 마음이다.

불변의 혼이라고도 할 수 있다.

7. 정법이란 조화의 길.

정법이란, 대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법칙이 조화된 중도를 말한다.

춘하추동의 사계절, 주야의 구별, 생자필멸, 인과응보,

모두가 다 정법에 부합되지 않음이 없다.

자연의 모습이 바뀌지 않는 한, 정법도 바뀌지 않는다.

정법은 영원한 것이며, 불교의 철학적 용어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까운 생활환경 속에, 정법은 존재하고 있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정법을 공부하고 정법을 실천하는 방법밖에 없다.

자연은 항상,

지상의 인간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대자비를 베풀고 있다.

참(眞)은 거짓의 반대,

거짓(僞)이 있으므로 참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정법의 이치는, 오직 한 가지 신의 이치를 말한다.

정법의 신리는, 대자연이 가르치는 가르침인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4/66

유(類)는 유를 부르고, 친구는 친구를 부른다.

마음은 만물을 살리고, 사랑은 모든 것을 치료한다.

물은 낮은 데로 흐르며, 낮은 데로 흐름으로써, 그 생명을 유지한다.

자신을 소중하게 하는 자는, 남도 또한 살린다.

정법에 기초한 신리(神理)는, 영원하며 불변이다.

실천이 없는 정법은, 그림의 떡이다.

그 맛을 모른다.

정법은, 생활 속에 살려지며, 살아 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보라,,,,,,

자연은, 일초의 휴식도 없이 활동하고 있다.

결코 정지함이 없다.

자연은 항상 숨 쉬고 움직이고 있으므로 정법은 그 가운데 살아 있다.

이와 같이 정법은, 중도에 의해서 살아 있다.

정법은 지식이 아니다.

관념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생활 행위이다.

정법을 깨달은 자,는 행위에 의해서, 대자연과 일체가 된다.

우주즉아(宇宙卽我)의 경지는 그 극치(極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상계의 만생만물은, 모두 윤회하며,

한 시도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

무상(無常)의 모습이다.

인간의 상념도, 윤회의 순환을 계속하고 있다.

악(惡)의 상념은 악으로 통한다.

행복을 원한다면, 우선 악(惡)의 상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노여움, 미움, 시기, 질투, 모략, 중상, 등 이러한 상념을 뽑아버리고,

책임, 박애, 용기, 지혜, 노력, 진보, 조화, 등의

 선(善)의 상념을 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행, 불행의 근본은,

매일의 상념과 행위의 결과에 달려있다.

많은 물질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그 어느 쪽이 행복할 까.

가진 자일까.

못 가진 자일까.

만일 가진 자가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해서,

한층 모으려고 하면 괴로울 것이다.

갖지 못한 자가, 그것을 가지려고 탐을 내면,

욕망의 노예가 된다.

이 둘 다 불행한 자들이며,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다.

하루의 식량은, 몇 조각의 빵으로 족하며,

잠자리는 수 제곱미터로 족한 것이다.

소유물의 많고 적음으로서 행. 불행을 저울질하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모든 물질은, 언젠가는 대지로 환원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죽을 때도, 맨몸 하나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행복한 자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이며,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5/66

항상 족함을 알고 생활을 하는 평화로운 마음의 사람들이다.

이 대자연계는, 신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

인간도 또한 자비와 사랑의 소유자이다.

정법이라고 하는,

신불의 법에 귀의한 자는,

우선 그 마음을 체득하고,

그 뜻을 이해하여, 실천에 옮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비를 법에 비유하면, 사랑은 법의 실천 행위다.

자비를 신(神)이라고 하면, 사랑은 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

자비는, 만생만물에게 무한의 빛을 주는 것으로서,

사랑은 관용하고 상부상조하며 서로 용서하는 행위다.

자비도 사랑도, 스스로 돕는 자에게 그 빛은 주어지는 것이다.

마음을 소홀히 하는 자.

실천을 주저하는 자는, 자비의 빛도 도달하지 않는다.

사랑을 원하는 자는, 사랑의 행위를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

자비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자는, 법의 마음을 체득해야 한다.

말법을 구제하는 자는, 여래이며, 신의 사자다.

여래는 정법을 설하고, 자비와 사랑의 광명을,

중생에게 부여하지 않고서는 못 배긴다.

자비는, 사랑의 행위에 의해서 윤회한다.

자비는, 신의 세로의 빛이고,

사랑은 실행의 가로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여움은, 비록 거기에 어떠한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 파동은, 언젠가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며,

 혼의 전진을 저해한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해야 한다.

익을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벼이삭같은, 심경이 되어야 한다.

항상 집착하지 않는 유화한 마음은,

신의 마음이며, 법의 마음에도 있기 때문이다.

타협은, 조화의 모습은 아니다.

자아가 따르기 때문이다.

타협에 의해서, 일시적인 균형은 유지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하면, 이 세상은 일순간에 암흑이 된다.

타협은, 파괴를 막는, 일시적인 방파제에 지나지 않는다.

영속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타협에는, 진심의 공감이 없기 때문이다.

조화는 무한의 진보와, 평안을 약속한다.

조화의 밑바닥에는, 사랑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자기 주장이 없다.

뽐냄도 없고, 아첨도 없다.

갯밭무시의 블로그기쁨이나 슬픔이 있다고 해도, 거기 사로잡히지 않는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6/66

괴로워하는 자가 있으면, 그 괴로움을 덜어주고,

슬퍼하는 자가 있으면, 빛을 비추어, 희망을 안겨준다.

사랑은, 신의 마음이며,

사심(私心)이 없는, 신으로 통하는 위대한 가교(架橋)이다.

이 세상이, 사랑으로 충만하면, 지상에는, 불국토가 탄생한다.

신은 그것을 바라고, 그 날이 오기를,

인내심있게 기다리고 있다.

지상계의 인류가 조화의 영위기(靈圍氣)에 감싸여지는 것을---

마음과 오체의 전기적 구조

오관------>대뇌----->의----->심

(五官)<----(大腦)<----(意)<----(心)

 ↑↓ ↑ (상념)

오체 뇌파의 진동

(五體)


-----> <====== 발신 수신에 의한 파동

8. 명상적 반성의 의의


선종(禪宗)의 참선의 목적은 마음을 비우고,

그 비움 가운데에서 참 나(眞我)를 찾으려고 하는데 있는 것같다.

일반적으로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이 되는 것이,

견성성불(見性成佛)로 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고타마 싯달타가 가르친 명상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일상생활의 상념과 행동의 자세가, 중도에 맞는가 아닌가를 확인하고,

만일 잘못이 있으면, 신에게 용서를 빌고,

지혜와 용기와 노력으로써,

두 번 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자신으로 수정해 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명상의 목적은 반성이었으며,

하루 24시간의, 올바른 생활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결코 명상을 위한 명상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지, 우리들은 반성하는 것에 의해서 전진한다.

학업이건 직업이건 인생의 문제이건, 반성 없이는 진보도 없다.

우리들의 인격을 형성하는 마음과 행위의 문제도,

반성을 통해서 키워지며

안심입명(安心立命)의 자신을 확립할 수 있게 된다.

반성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으며,

숙달되면, 일초 일초가 반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명상에 의한 반성은,

반성의 내용을 한결 심도있게, 충실한 것으로 이끌어 올려 준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7/66

왜냐하면, 중도를 척도로 삼고 반성을 하면,

반드시 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호*지도령이 곁에 와서,

그 반성을 도와주기 때문이다.

또한 명상은, 가볍게 눈꺼풀을 닫고 그러면서 눈동자는 뜬 채

사념을 일점에 집중시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 사념이 아무래도 산만해지고,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외계의 움직임에 마음이 빼앗기기 쉬우며,

생각이 깊지 못하고 얄팍해지기 일쑤이다.

우리들의 마음과 육체의 관계는 누누이 말한 바와 같이 별개의 존재다,

깨어 있을 때는, 양자가 일체가 되어 생활하고 있으므로,

 육체가 정신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마음과 육체의 파동은 마음, 의지, 대뇌, 오관, 육체의 순으로 전달 왕래한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아름답다.더럽다 등으로 느끼는 것은

눈이라는 오관에서 대뇌로, 대뇌에서 의식(마음)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만약, 잠들어 버리면,

제 3자가 비록 눈을 열어주어도 미추의 감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마음의 형태는, 원래 둥글고 큰 것인데,

오관에 좌우되어, 여러 가지의 왜곡을 만들어 간다.

그것을 중도라고 하는 잣대를 갖고,

외계로부터의 영향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으면,

마음의 왜곡은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은 그렇게는 되지 않고,

아프다, 가렵다고 하는 신경이 마음에 전달되기 때문에,

오관과 오체를 중심으로 한 견해, 사고방식에 젖게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의(意)가 올바르게 작용하지 못하고 마음에 왜곡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연애 중인 사람의 마음은 본능과 감정의 영역이 유별나게 부풀고,

지성, 이성은 작아진다.

본능과 감정이 부풀면, 마음의 모양은, 하트형이 된다.

하트(heart)는 마음이란 뜻이지만, 마음의 본형은 하트형이 아니다.

연애 감정을 품으면 ‘곰보딱지도 보조개’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의 장점만 보인다.

즉 상대방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다.

지성, 이성이 작게 오므라들어, 충분한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지성과 감정이 이상하게 부풀 경우도 있다.

이것은, 주의나 사상에 빠졌을 경우에 일어난다.

지난날의 군국주의자나, 일부 인텔리를 자칭하는 자들에게 흔히 볼 수 있다.

명상적 반성은,

이와 같은 비뚤어진 마음을 수정하고, 본래의 둥근 마음을 되찾게 해 준다.

즉 중도라고 하는 팔정도의 잣대를 갖고,

자신의 마음이, 지금 어떻게 기울어져 있는가

부풀고 있는가.아니면 오므라졌는가를 살펴 볼 수 있게 된다.

사람에 따라서는 4면 4각도 있고, 3각형으로 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마음의 모양은 여러 가지로 변형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8/66

마음의 이그러짐은, 의식인 자기의 의사,

즉 사고방식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괴로움, 슬픔의 원인은, 모두 이러한 마음의 이그러짐이 만들어내고 있다.

마음의 둥글고 풍부하면, 마음의 평안, 부동의 진아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반성이 진행되고, 반성의 결과를 행위로 나타내어 가면,

명상의 경지도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수호령 * 지도령과의 대화도 가능해 진다.

반성 후의 명상이 더욱 깊어지면

자신의 혼이 육체를 이탈하여, 저 세상의 여러 가지 세계를 보고 올 수 있다.

또한 멀리 떨어진 사람의 근황도 아는 것도 가능하다.

좀도 나아가면, 천상계의 사람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앉아서도, 세상사의 추이를 손바닥처럼 환하게 알 수 있다.

삼매의 경지란, 명상의 극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무념무상이 되어, 기분이 좋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념무상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마음의 공백을 의미하며,

언제 외부세계자(악령)들이 자기의 의식 속에 침입할지 모른다.

(주; 무념무상은, 비유하자면,

 집안에 불을 환히 밝히고, 대문을 열어젖히고,

 주인이 되는 내자신이 집을 비우는 것과 같다.

 그 집안에 금은보화(집착,,,욕심...욕망)가 가득하면,

 들어 온 자가 나가겠는가.-오로지팔정도)

명상 중에도 자기 자신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대아(大我)의 자신은, 어떠한 경우에도, 부동(不動)의 자기 자신이며

명상이 깊어질수록,

대아(大我=별명을 無我라고도 함)인 자기자신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반성의 명상은 눈꺼풀을 가볍게 닫고,

눈꺼풀 속의 눈은 똑바로 전방을 본다.

눈을 완전히 (잠을 잘때처럼 완전히) 감아버리면, 대개 졸음이 와서,

반성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속눈은 전방을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다.

졸음이 오면, 대개 눈동자가 위로 이동한다.

피로할 때나, 밤이 깊었을 때는,

눈꺼풀을 닫으면, 스르륵 잠이 온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그렇지 않는데, 눈꺼풀을 닫으면 그렇게 된다.

이것은 자연현상이고, 생리현상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럴 경우,

속눈을, 똑바로 전방을 응시하고,

의식을 긴장시키면, 그다지 졸리지는 않게 된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할 수가 있어서,

반성이 비교적 용이하게 이루어진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59/66

명상이라고 하면,

보통 조용히 눈을 감고, 여러 가지 망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즉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가 않다.

명상의 의의는 우선 반성의 명상을 되풀이하여,

수호령 * 지도령의 빛이 내려왔을 때

비로소 진가가 나타나는 것이다.

반성도 하지 않고, 갑자기 잡념을 불식하는 명상에 잠기거나 혹은

그런 습관이 몸에 배면

마음이 비뚤어진 채로 있어, 그 때문에,

그 이그러진 마음에 통하는 악령을 불러들이고 마는 것이다.

정도를 모르면서,

좌선을 하면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으로 명상의 고행을 계속하는 중애,

마(魔)에 침범되어,

정신분열증이나 육체적 결함으로 괴로워하는 자가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반성은 명상에 있어서 절대 빠뜨릴 수 없는 기본적 수행법이며

마음의 때를 벗기는, 단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명상은 아무래도 밤에 할 수 밖에 없다.

낮에는 일에 종사해야 하며,

일을 하지 않고 명상만 하고 있으면, 생계에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밤이 되면 하루의 피로가 나타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명상을 하면 졸음이 오게 마련이다.

아무리 하여도 반성이 되지 않을 때에는,

눈꺼풀을 약간 열고, 앉아 있는 조금 앞의 전방에 시점을 고정하고,

반성을 하도록 하면, 졸음은 해소된다.

반성이 잘 되거든, 다시 눈을 감고, 명상의 반성으로 들어 간다.

밤은 낮과 달라서, 잡음과 소음이 적은 것이 이점이다.

초목의 활동도 조용해지고, 동물들도 잠이 든다.

그만큼, 밤의 명상은, 심도가 깊고, 마음을 통일하기 쉬운 상태로 된다.

동시에, 저 세상의 천사들의 통신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된다.

낮에는, 가사나 일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므로, 천사들의 통신을 잡기가 어렵다.

고타마 붓다의 명상이, 거의 한밤중.

그것도, 지금의 시간으로 새벽 1시부터 3시 사이에 집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반성의 명상을 하지 않고,

잡념을 닦는 의식의 공백상태나 집념에 마음을 빼앗기면,

마(魔)가 들어오기 쉽다. 밤은 낮보다 위험한 것이다.

백귀야행(百鬼夜行)이라는 말처럼, 밤은 마(魔)가 활동하기 쉬운 시간대이다.

반성의 명상을 하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는 경우는,

반성의 방법에, 어딘가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며

반성이 아니고,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다.

이럴 때는 의례히 지옥령이 곁에 와서,

본인의 의식 속에 들어가려고 엿보고 있으니, 위험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태가 여러 날 계속되면 노이로제가 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이것은 반성이 아니라 집착이므로, 이럴 때는 반성의 명상은 잠시 중단하는 이 블로그에것이서 검색좋다.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0/66

정법에 따라 반성을 하고 있을 때는,

수호령 * 지도령이 곁에 와서, 본인을 지켜준다.

마(魔)는 절대로 가까이 오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명상을 끝나면, 금방 잠들 수 있다.

이와 같이 반성의 명상을 계속해 가는 동안에,

수호령, 지도령과의 교류가 이루어져, 대화가 가능해진다.

결국 마음의 구름이 걷혀서,

언제, 어디서나, 수호령, 지도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명상은 제 1 단계에서 제 9 단계까지 있다.

수호령 * 지도령과의 대화는, 제 4 단계에 속한다.

제 1 단계는, 반성이다.

제 2 단계는, 반성 후의 마음의 통일.

제 3 단계는 수호령, 지도령과의 교류이며,

그런 다음, 제 4 단계에 이른다.

이러한 구별은, 반성을 거듭하여, 마음의 구름을 벗기고,

일상생활에 반성의 결과를 실천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제5, 제6, 제7....상승해 가지만,

제 6 까지 갈 수 있는 사람은 극히 한정되어 있다.

제 8은, 여래의 명상이며,

앉아서 외계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하게 알 수 있다.

제 9 단계는, 고타마 붓다, 예수, 모세의 명상이다.

이 명상은 과거세의 수행이 쌓여,

신과 직접 교류할 수 있게 된 대여래의 경지이다.

여기에는 여타의 사람은 근접할 수 없다.

과거세의 수행에 의해서, 또한 금세의 덕행에 의해서,

제 6 단계까지는 누구든지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단계가 되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무튼 반성의 명상은,

모세도, 예수도, 석가도 실천했던

중요한 수행법이었던 것이다.

9. 신은 빛이며 나와 함께 존재한다.

인류는, 신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지니고,

대우주체의 각 세포와 함께,

신의 마음인 대조화로,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해서,

영원한 전생윤회(轉生輪廻)를 되풀이하고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보다 풍부하고, 크고, 둥근 마음을 완성하여,

대생명과 조화하기 위해서, 지금도 윤회를 하고 있는 도상인 것이다.

지구라고 하는 장소에 적응한 육체주(肉體舟)를 타고,

우리의 혼*의식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1/66

불안정한, 고체적 물질계의 혼란한 부조화한 세계에서,

일초일초 지나가는 중에

여러가지 체험을 쌓아가면서 수행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체험한 일체의 현상, 상념과 행위는,

우리들 의식의 내부에 있는,

기억 연합령(記憶聯合領)이라고 할 수 있는 상념대에 기록되어 있다.

과거세의 체험과 상념도, 잠재된 상념대에,

깊숙히 저장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지혜의 보고를 열 수 있는 것은, 신도 아니오, 남도 아니다.

자기 자신의 올바른 상념과 행위의 수양을 쌓아감으로써,

신의 마음과 조화되었을 때, 내재된 불지(佛智)는 열려지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마하반야바라밀다’라고 가르치고 있다.

내재된, 위대한 지혜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의식계는, 이 3 차원의 물질적, 고체적인 불안정한 세계와는 달리,

가장 정묘하게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실재의 세계이며, 고차원의 세계이다.

스스로 구해서 편협하지 않은 (팔정도로) 인생항로를 건너는 수행자는,

자신의 결점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집착이 없는 반성을 해서, 항상 전진해야 한다.

스스로의 마음속의 위아(僞我)를 극복할 수 있는 자야말로,

진실로 선아(善我)를 깨달은 용기있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고차원의 저 세상에서, 스스로 부모와 출생지를 선택하여,

육체선조로부터 계승되어 온 육체라는 배를 타고,

혹독한 맹목의 인생을 체험하고 있는 수행자이다.

투쟁도 파괴도, 인류가 신의 자녀로서의 자각을 잊어서 만들어 내고 만,

부조화한 상념의 산물임을 알아야 한다.

멀지 않아 인류는, 모두 같은 동포라는 위대한 불지(佛智)를 자각하고,

공존공영의 유토피아를 스스로의 손으로 건설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부조화한 혼란은,

긴 역사를 통해서 인류가 만들어낸 업(業=카르마)이지만

언젠가는 이 어리석은 부조화한 모든 현상에서 탈피하여,

인간은 신의 자녀라는 존엄성을 자각하여,

스스로 풍부한, 신의 뜻에 따른 큰 자비로 넘치는 마음을 만들어 갈 것이다.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지상계의 혼란과 미망은,

이윽고 다가올 신의 나라, 광명의 세계에 이르는 발판인 것이다.

역사의 경과 속에서, 혼란을 만들어낸 부조화한 자들의 행동을,

우리들은, 출생하러 나온 전세, 실재계에서 지켜보면서,

선배들의 잘못을 두번 다시 범하지 않는다고, 마음에 맹세하고 태어 난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사실을, 육체주를 타고 태어 났을 때부터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괴로움도 슬픔도,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고락의 체험도, 깨달음에 이르는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2/66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통하고 있는 신의 의식은,

인류가, 스스로 자유롭게 체험해 온,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의 잘못이랑,

인생의 과제를 반성하는 것에 의해,

마음속의 어두운 부조화한 구름을 닦아,

진아 즉 선아인 위대한 지혜를 터득하도록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노력과 실천에 의해서 이다.

(반성은,

그 노력과 실천으로 지혜의 열매를 맺어준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인류가,

자연의 대조화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는가,

아니면 혼란한 부조화에 이르는 길을 선택하는가는,

자유의 권한을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질적 욕망, 정욕의 자기보존, 자아아욕,

투쟁과 파괴 등의 부조화한 환경을 만들기 쉬운 것이다.

몇 번이나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괴로움과 슬픔을 체험하면서,

그 결과 마침내,

자비와 사랑으로 조화된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부조화한 상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양심없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들의 집단은,

스스로 뿌린 악의 씨를,

괴로움과 슬픔의 혹독한 환경에서, 뽑아 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은, 천변지이랑 화재를 통해서,

인류에게 잘못을 알아 차리게 한다.

그리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면, 보다 큰 시련을 안겨주고,

거듭 잘못을 되풀이하면 더욱 지엄한 반작용이 가해진다.

마지막에는 사면초가가 되어 스스로의 잘못을 배우게 하는 짜임새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일념삼천(一念三千)이며, 자유자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자유의 마음으로, 괴로움과 슬픔의 체험을 통해서, 반성을 하고,

그 속으로부터 인생을 공부하고, 마음을 풍부하게 키우는 능력을 배워 간다.

마음의 본성을 잘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은,

자신의 고민을 괴로움을 완화하는 지름길이다.

남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자는, 남으로부터도 자애를 받게 된다.

사회인류을 위하여 자애를 베풀려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자애를 부여받을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선한 상념과 행동의 조화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결점에, 강한 의지로 맞서서 성공하는 것이,

자신의 영위기를 광명으로 채우는 첫 걸음이 된다.

기쁨으로 넘치는 생활은, 우리들 인류 한 사람 한사람의,

올바른 편협하지 않는 세상사의 판단과 행동에 달렸다.

갯밭무시의 블로그그것은 결코 먼 이상향이 아니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3/66

인류의 마음과 마음이 대조화를 이룬다면, 고통아나 불행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둥근 달의 그림자가 비추어지듯이,

마음의 이지러짐이

둥근 마음에 이지러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올바른 마음가짐’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알아 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배운, 불변의 올바른 기준을,

인류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생각해 내어 가는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기준이, 영원히 변치 않는 신의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공포심은, 악의 세계로 통하고, ‘현상화되는 것’이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항상 냉정하게 마음을 잃지 않고, 올바른 세상사의 판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늘 쾌활하고 명랑한 환경을 조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둡고 음습한 환경에는, 진드기와 구더기가 끓는다.

태양 빛으로 가득 차 있는 환경은,

아름다운 녹색으로 둘러싸여, 꽃들이 핀다.

인류의 한 사람 한사람은,

모두 실재계의 천사. 빛의 천사들의 감시 하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은, 모두가 유리관 속처럼 환하게 보인다.

우리들이, 2차원의 평면 세계에서 상영되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보고 있는 것과 닮아 있다..

하지만 존재하고 있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에,

천사들이 직접 우리들에게 말을 건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상념의 흐림, 맑음의 방향이 잘 변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상념과 행동을 쌓아감으로써, 우리들의 마음의 창은 열리고,

자유롭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된다.

그것이 보고 듣는 것이 안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가 나빠서,

수신하는 스위치를 넣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아아욕, 자기보존의 습관적 생활이,

 ‘신은 나다’를 잊고, 작은 마음을 만들어 내고 만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신은 빛이며, 나와 함께 존재한다.’

신의 실재를 알기 위해서는,

정법을 자신의 마음의 잣대로 해서,

생활 행위의 실천을 하는 중에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조화되어, 평안의 경지에 도달하고,

집착을 떠나 족함을 안 생활이 실천되었을 때,

빛의 천사들이, 우리들 마음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갯밭무시의 블로그수호령, 지도령들의 조력을 얻을 수 있다.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4/66

이와는 반대로, 혼란한 부조화한 마음과 생활이 거듭되었을 때는,

어두운 지옥령들의 침범을 받아, 더욱 마음의 혼란이 생기고,

분열증이라고 하는 병으로 자기자신의 마음과 몸을 잃는다.

인격이 변하고 만다.

하지만, 자신의 본심을 되찾았을 때는,

그 지옥령들은 옆에 가까이 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혼란한 부조화한 환경에 놓여도, 참된 자기 자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관에만 의존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

항상 우리들의 의식은, 차원을 넘어선 세계,

결국에는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저 세상에 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그리하여 위대한 빛의 대지도령들로부터 보내지고 있는 조화의 빛을,

둥글고 풍부한 마음 속에 흡수하는 것이다.

인류는, 더욱 더 가혹한 지상계에서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인류의 시련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이 기회를 충분히 활용하여, 풍부한 마음을 완성함과 동시에,

인류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 결과, 자신의 마음과 이웃과의 마음의 대조화가 만들어져,

광명으로 충만한 평안의 경지가 이 지상에 건설되리라.

인간은, 이 지상계에 한 번 태어나는 것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그것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전생윤회의 되풀이 되는 경험을 통해서,

풍부한 마음이 만들어져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헛된 체험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생활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체험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악을 통해서 선을 알고,

선을 통해서 보다 큰 대선(大善)을 알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풍부하게 하기 위한 교훈이다

.

우리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불평을 하고, 성을 내는 반항적인 상념과 행위가 많아짐에 따라

마음속에 고뇌의 무게는 배가(倍加)된다.

하지만 마음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평안의 경지에 도달함에 따라,

고뇌의 짐은 가벼워진다.

인생항로의 나날의 생활속에서, 마음속에 항상 불만이 있으면,

마음의 이지러짐은 점차 커지고 만다.

우리들의 몸도 부조화한 영위기에 휩싸이고 만다.

하지만 일체의 불만은, 스스로의 마음의 자세로 해소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원인을 잘 추궁하여, 반성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들에게는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과제,

배워서 터득해야 할 문제가 차례차례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우리들은 항상 마음에 이지러짐을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5/66

올바른 마음의 기준을 단단히 지니고, 생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모든 고통과 난관도, 신의 자녀로서의 자각을 위한,

신의 빈틈없는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음의 진보를 위해서는, 어떠한 어려운 학습도 이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혼은,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지어낸 카르마(業)의 상태와,

신리에 대한 이해의 정도에 따라서,

그 학습의 정도(程度)가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의 상념과 행위를 재판할 수 있는 것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선아(善我)인 신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의 왕국의 지배자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죄는, 정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법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마음의 이지러짐을 만듬과 동시에,

타인에게도 낭패를 끼치게 된다.

눈에 보이는 육체만이, 우리들이 아닌 것이다.

육체는 나의 한 가지 표현체에 지나지 않으며,

그 주인인 불변의 혼이야말로, 진짜 나 자신이다.

마음속에, 초조, 원한, 질투, 노여움, 족함을 잃어 버린 욕망등이 일어나면,

곧바로 그 원인을 추궁할 것,

그리고 반성할 것,

어두운 상념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나는 신(神)의 자녀다.

나의 마음이여,

광명에 싸여라’

하고 (자신의 잘못을 신에게 사과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할 때, 우리들은 황금빛 자애의 신의 빛으로 가득차서,

평안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혼*의식이야말로, 우리들 자신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이며,

내재되어 있는 잠재의식의 속에는,

전생윤회의 과정에서 체득한 위대한 지혜의 보고가 있는 것이다.

이 보고의 문을 닫아버린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부조화한 상념의 구름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인간의 수행의 가치는,

풍부한 넓은 마음을 만들어, 고락속으로부터,

새로운 학습을 배우고 터득하는 것이며,

인간은 보다 높은 차원에로,

 혼을 진화시켜 가기 위해서, 주야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 블로그에서 검색

공감 8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갯밭무시

갯밭무시의 블로그 이웃추가

이웃으로 추가하시겠어요?

5/27/23, 3:30 PM 마음의 원점 (하) - 다카하시 신지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nyc77777&logNo=222429125525&categoryNo=47&parentCategoryNo=0&viewDate=&currentP… 66/66

‘법’은 도이며

도는 실천이다.

그리고 인류는 신의 자녀로서의 자각에 눈 뜨고,

지상계에, 신의 마음인 ‘법’을 펴며

그 법을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 살아야 한다.

그 결과, 유토피아가 건설되어 가는 것이다.

인류는, 오랜 지구 생활에서 만들어 낸

" 법 "

에 위배된 먼지와 때로, 신리를 덮어버렸다.

하지만, 그 먼지와 때를 제거함으로써,

광명의 신리는 다시 되살아나며

인류의 마음에 평안을 안겨주고, 조화에의 환경이 조성되어 가리라.

지금, 인류는, 딱하고 힘든, 혼란한 사회생활을 체험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국은 다가올

광명의 유토피아에로의 시련인 것이다.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