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 K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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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派>를 아는가?
통영 윤이상 기념관 자료보관실에서 선생의 특이한 자필 글을 읽게 되었다. 4쪽이나 되는 선생의 수필인데, 가난과 일제 치하의 억압 속에서도 민족적 긍지와 자유로운 예술혼을 불태운 사람들을 「아 - 派」라는 흥미로운 말로 서술한다. <예술목회연구원>은 「아 - 派」의 정신(혼)에 심히 공감하여 감히 그 계보를 이을 엉뚱한 꿈을 꾸며 폭소를 세차게 터뜨리다.
「아 - 派」 / 尹伊桑(윤이상) 음악가
나의 고향 통영에(지금은 충무시) 일제 때에는 민족 사회에 두 파(派)가 있었다. 하나는 「현실파」요, 하나는 「아~ 파」였다. 인구가 4만여, 항구도시로 시가의 중심지는 모두 일본사람이 차지하고, 우리 민족들은 변두리에 살고 있었다. 여기서 三一운동 때 격렬한 만세운동이 터졌고,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예수교가 일찍 들어왔고(호주선교 구역) 그를 따라서 서양문화가 들어와, 민족정신도 일찍 깨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이기 때문에 민족의 피에 줄기차게 깨끗한 정렬이 생동하고 있었다.
三一만세 때의 참패를 겪고, 젊은 층에는 차츰 두 갈래의 생활철학이 대두되었다. 하나는, 민족의 역량을 실력으로 길러야 하며, 무엇보다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제쳐두고, 입을 악물고 일본사람 밑에 들어가서 종이 되더라도 우선 경제와 기술의 실력을 기르자 -, 그래서 기초교육을 받고, 고장에서 실력 있다고 간주되던 사람들 중에도, 주유선(注油船)을 타고, 짐차 바퀴를 끌고, 화물차를 몰거나 일본인의 점원이 되어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더러는 점포를 내던지 논마지기를 사는 사람들이 불었다. 이들은 독서를 하지 않고, 철학하는 것을 경멸하고, 사상경찰에 걸려서 유치장에 끌려가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었다. 이런 사람들을 「현실파」로 불렀다.
이와 정 반대로, 민족의 설움을 제 설움처럼, 민족의 운명이 제 혼자의 양심에 달려있는 것처럼, 민족의 원수는 일인(日人)이기에, 모든 일인과의 타협을 절단하고, 오로지 청렴한 양심에서 살자-. 이런 사람들은 더러는 양복을 입지 않고,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바닷가에 나가 항상 한탄한다. 겨드랑이에 대개 책 한두 권을 끼고 다닌다. 일본 강담사에서 발행한 세계문학전집-, 워즈워즈나 브라우닝의 시의 구절을 암송하고, 슈니츨러의 희곡을 탐독한다. 집에는 끼니를 굶고, 동생들을 학교 보낼 형편이 못되어도 그들은 결코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다. 호수같이 맑은 바다 위에 뜬 달을 보고 「아~」하고, 봄날 아지랑이 이는 전원에서도 「아~」하고, 가을 낙엽을 밟으면서도 「아~」한다고 해서 소위 「현실파」들은 이들을 비꼬아서 「아~ 파」라고 불렀다.
이 「아~ 파」의 선배들은 일찍 동경으로 건너가 우선 공부하기 시작했다. 돈 없이 갔으니 납일(納日) 장사(신문배달)를 하며, 학교에 적은 두었으나 대부분 공부가 되지 않는다. 고생의 과정에서 권력자에 대한 반항의 철학을 배운다. 그래서 일본의 그때 유행하던 아나키스트들의 영향 속에서 일부는 과격한 무정부주의자가 된다.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사람이 집을 한 채 빌린다. 그다음 줄을 이어 고향 사람이 따라 들어온다. 집세는 반년이고 일 년 분이 밀린다. 그중에 부잣집 아들이 있어 다 달 송금이 오면 7-8인이 그것으로 산다. 때마다 수제비를 쑤어 먹어야 한다. 겨울이 오면 땔감이 없어, 울타리를 뜯어 땐다. 그다음에 집을 이은 판자를, 심지어 천정의 널빤지 까지도--.
일본사람 집주인이 집세를 받으러오면, 피한다. 집세는 2년, 3년이 밀렸다. 어쩌다가 주인이 대표자가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는 빨가벗고 긴 일본도(日本刀)를 옆에 놓고, 정좌를 하고 있다. 그래서 번번이 집주인은 질겁을 하고 도망을 한다. 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는 「죄없는 개인의 사유재산」이란 도덕이 통용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조선의 식민착취로 얻은 재산의 일부가 아니냐. 조선 총독부가 우리 민족으로부터 착취한 금액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이치다. 이때를 전후하여 동경에서 공부하던 통영 출신의 명사들 중에 유치진(柳致眞), 유치환(柳致環) 형제와 김용식(金容植) 전 외무부 장관이 있다. 유씨 형제는 이 무정부주의자들과 정신적으로, 또는 적어도 분위기적으로는 친분관계를 가지고, 또 그 영역에서 살았다. 이때 여기 속하는 사람 중에 예술 계통의 사람들이 꽤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분들이 고향에 돌아와 「아~ 파」를 형성하였거나, 그런 분위기를 조성 하였다는 것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아~ 파」로 불리우는 사람들은 비단 비생산적인 생활만 한 것은 아니다. 돈은 없어도 모여서 어두운 불빛 아래 시를 낭독하고 철학을 논의하였다. 때로는 스스로 각본(脚本)을 써서 엷은 반일적 연극(反日的 演劇)을 공연하였다. 이러다가 좌익운동으로 지하로 들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순수성」을 고집하던 사람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여 사설도서실을 꾸몄다. 이때 나의 어린 시절 여기서 동화집을 얻어다가 탐독하였다. 이런 시절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나에게는 어떤 예술적이 소양이 형성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짐작한다. 물론 이 「아~ 파」의 후배들이 일제 전쟁 말기에 고등경찰의 지목을 받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른 예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 八一五해방 직후에는 이 두 파가 어떻게 되었는가? 소위 「현실파」에 속하던 사람들은 재빨리 일본사람들이 던지고 간 상점을 점령하고 경제권을 잡는 데 급급하였다. 이른바 敵産적산) 처리의 소용돌이 속에 헤엄쳐 다녔다. 그러나 「아~ 파」의 후예들은 먼저 잃었던 민족의식을, 우리말과 우리글을 찾아주기 위해서 이리저리 뛰었다. 이들은 정치를 하는 것을 대개 더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중에 많은 사람들이 교육계에 들어갔다. 여기 병행하여 문화협회를 조직하고, 음악회를 열고 야학을 열어 무산 아동을 교육하고, 연극을 하고 한글 강습회를 하고 ---, 이를테면 계몽운동에 중점을 두었다.
오늘 한국에는 “통영에서 많은 예술가가 낳다~~”고 하는 말이 정평이 되어 있다. 이 말은, 통영에서 「아~ 파」가 닦아 놓은 길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말이리라. 그리고 전 한반도를 돌아봐도 통영처럼 “민족의 양심”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은 많지 않으리라.
나는 고향을 떠난지 30여년! 고향에 누가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하였는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는 진리의 표준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꿈에도 잊지 않는 나의 고향에 아직도 갈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환상(幻想) 같아서는 옛날 희랍의 철인(哲人)처럼, 눈에 돋보기를 쓰고 통영의 거리거리를 찾아다니며 소리를 외치며 물어보고 싶다, 「여기 어디에 아직은 양심이 살고 있는가 ?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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