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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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아침명상] 1. 어제는 '생명학연구회' 5월 모임(월 1회 - 지구인문학연구소)을 진행하였습니다. 유정길 님이 발제하여, 동학의 '불연기연' 편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불연기연(不然其然)'은 동학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다고 흔히 얘기됩니다.
<동경대전>에서 사상을 담은 글로는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과 더불어 4편의 글 중 하나가 됩니다.
"아니다, 그렇다"는 김지하 선생님이 널리 퍼뜨린, '불연기연'에 대한 현대적 표현입니다.
"반대일치의 논리"라는 건 야뢰 이돈화가 처음 발의하여 그 이후 윤노빈, 김지하 등이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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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 님은 불연기연에 대해 드러난 현상과 숨겨진 본질,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불연과 기연, 과정론적 차원에서의 불연과 기연, 분별과 대립에 즉하여 보는 것으로서의 기연, 초월적 입장으로 넘어가서 보는 것으로서의 불연, 이원론과 이분법으로서의 기연에 대한 협동과 공생으로서의 불연, 기연으로서의 형식논리와 불연으로서의 역설, 불교 화엄사상 공사상과 비교하며 살펴보는 불연기연론, 하강으로서의 기연과 상승으로서의 불연, 포월로서의 불연기연, 신의 존재증명과정에서 입안된 것으로 인과론적 설명 범위 내의 기연과 인과론적 설명력을 초월하는 초경험적 세계로서의 불연 등 그동안의 불연기연과 관련된 제반 학설들을 간명하면서도 낱낱이 소개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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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정길 님은 불연기연에 대해
- 드러난 현상과 숨겨진 본질,
-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불연과 기연,
- 과정론적 차원에서의 불연과 기연,
- 분별과 대립에 즉하여 보는 것으로서의 기연,
- 초월적 입장으로 넘어가서 보는 것으로서의 불연,
- 이원론과 이분법으로서의 기연에 대한 협동과 공생으로서의 불연,
- 기연으로서의 형식논리와 불연으로서의 역설,
- 불교 화엄사상 공사상과 비교하며 살펴보는 불연기연론,
- 하강으로서의 기연과 상승으로서의 불연,
- 포월로서의 불연기연,
신의 존재증명과정에서 입안된 것으로
- 인과론적 설명 범위 내의 기연과
- 인과론적 설명력을 초월하는 초경험적 세계로서의 불연 등
그동안의 불연기연과 관련된 제반 학설들을
간명하면서도 낱낱이 소개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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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참석자들의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시개벽(예정)에 소개합니다.
2. 저도 여러 가지 말을 보탰습니다만, 그중 한 가지만 다시 음미해보면 이러합니다.
발제자는 불연기연이 불교의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인식론, 존재론과 상통한다고 하였습니다. 크게 동의되는 말씀입니다.
기연으로 충분한 듯하지만 불연이 아니면 기연이 불가능하며, 불연이 근본인 듯하지만 기연이 아니면 불연은 불연 그자체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불일불이의 전개과정을 빼닮았습니다.
결국 불연기연은 세상만물이 모두 하나로 꿰어져 있으며, 그러면서도 각유성각유형(各有性各有形)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것이 존재의 실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점에서 각자위심(各自爲心)이란,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할 당시의 세상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만, 이 말을 그동안은 주로 '자기만을 위하는 마음' '자기만 잘 살겠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는 식으로 '이기심'이나 '배타적 경쟁심'으로 주로 이해해 왔습니다.
그런데 불연기연의 관점에서 보면, 각자위심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입니다. 즉 "각각의 형상 가진 존재(몸)가 스스로 다른 것과 구분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각자위심이고, 그것이 존재의 실상을 곡해하며, 그로부터 마음도 제각각, 세상도 제각각의 사태가 전개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암 손병희 선생이 강조한 설법 '이신환성(以身換性)'도 '육신관념'을 '성령관념'으로 바꾸라는 뜻이기보다는 '육신 가졌을 때, 성령을 바꾸라'라는 의미, 즉 육체 의존적 존재로서의 나의 실상을 깨달으라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몸을 가진 나는 기연의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 몸이란 보이지 않은 세계를 배경으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이 몸은 다른 사람, 다른 생물, 다른 사물,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은 물론이고 미래와 과거, 여기와 저기(우주)와 모두 연결된 존재라는 사실을 불망(不忘)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바로 불연기연의 의미라는 점을 생각합니다. 그 일이 바로 심고(心告)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또 하나 '불이(不二)'는 ''타자와 내가 둘이 아니다''의 의미뿐 아니라 '불이(不異)'로서 ''타자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전자가 불이의 존재론적인 측면을 말해준다면, 후자는 불이의 가치론적인 측면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 저나 나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저놈이 잘난 만큼 나에게도 잘난 구석이 있고, 저놈이 못나고 나쁘고 야비한 만큼 나에게도 못나고 나쁘고 야비한 구석이 억수로 많다는 것이지요. 자만할 필요도 없고, 자멸할 이유도 없습니다. 한결같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일일삼성(一日三省)의 자세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도리(道理)입니다. 그러니, 그러므로, 000을 나쁜놈, 못난놈, 후레자식이라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닙니다. 내가 못났다고, 내가 가난하다고 도둑놈을 보고 "도둑이야!" 소리치지 말라는 거야말로 경우없는 짓이겠지요. 경우없는 짓을 한다고, 내가 그 사람에게 경우없이 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겁니다. 하나의 매이지 않고 둘로 나아가는 것, 둘에 머무르지 않고 하나에 귀의하는 것,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나, 그 무한순환이 우리 삶의 본성이 아닌가 합니다.
2 comments
Taechang Kim
불연기연의 깊은 뜻을 새밝힘하는 좋은 모임였군요.
압축요약해 주신 덕에 새삼 다시 새김질 해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