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27

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 6장 인생론 노트-조화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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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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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al/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 6장 인생론 노트-조화에의 길
by Yuneelif 2023. 2. 16.

조화에의 길

현대 사회의 잘못된 점은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상실한 생활 환경에 있다.

긴 역사는 인류가 연출한 투쟁과 파괴, 전쟁과 평화의 되풀이였다. 당대의 권력자는 무력이라는 물리적 힘으로 봉건 사회를 만들어 자신의 번영과 안전의 삶을 중생의 희생 위에 구축했다.  권력자와 손을 잡은 상인들은 물질과 경제력으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다져나갔다. 하지만 봉건 사회는 자신이 뿌린 씨앗인 폭력에 의해서 이웃의 침공을 받고 무너진다. 권력은 세대 교체가 된다. 재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터전을 닦고 변함 없는 경제력을 많은 중생들의 희생 위에 구축하여 자기보존과 자아아욕의 집착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에 대하여 중생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들어 약자의 단결이란 기치를 들고 자본가와의 대립 투쟁에 몸을 던진다.

한편 지주들은 소작인의 머리 위에 앉아 불평등한 사회를 구축하고 있다. 약자가 일어날 수 없는 사회 제도는 계속된다. 인간은 물질문명의 환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만든 환경 속에서 더욱 물욕의 불꽃을 태우면서 노사 공히 만족할 줄 모르는 아귀도에 빠져 물질경제의 노예가 되어 있다.

많은 인간들은 본심을 잃고 본능이 유혹하는 대로 사회악을 저지르고 있으며, 매스컴은 또한 인간의 동물적 본능을 자극하는 기사에 열을 올려 인심을 올바르게 향도하는 길을 외면하고 있다.

교ㅈ육자들 가운데에도 극단적인 사상에 마음이 빼앗겨 제자들에게 배척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런 세상을 과연 문명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을 상실한 인간들의 사회, 말법의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야말로 전 인류가 각성할 때이다. 마음을 상실한 물질과 경제지상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로써는 조화있는 사회를 만들 수 없다.

자기 자신을 물질 경제의 노예에서 해방시키는 일이 선결 문제이다. 노사의 투쟁은 양쪽 다 고통을 만들고 있다. 공해 문제를 비롯하여 물가의 불안정, 동물적 본능, 사회의 무질서 등이 인간의 목을 죄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대조화에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끼리의 상호대화로써 이룰 수 있다. 

경영의 합리화만으로는 경제 사회의 근본적 해결은 불가능하다. 노사의 대립도 임금의 해결만으로는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떠한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신리를 깨닫고 인간은 모두 형제이며 같은 시대에 태어난 동기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지금의 환겨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선택한 것임을 상기하여 서로 인연으로 묶여 다 함께 인생 수행장에 내려와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노동자는 일할 수 있는 일터에 대해서, 고용주는 노동자에 대해서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생활의 근거이자 영혼의 수행장인 일터에서 최선의 땀을 쏟아야 한다.

땀을 흘려 좋은 결과를 맺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보은의 행위이다. 노사 쌍방이 서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은의 실천을 하고 있는 일터에는 투쟁과 파괴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생활을 할 때 물가도 안정되고 공해라는 부조화한 현상도 소멸될 수 있다.

노사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신리를 따르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자신을 멸망으로 몰고가게 될 것이다. 투쟁과 파괴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택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양보하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을 일상 생활에 실천으로 구현해야 한다. 몽매한 어린 양떼들을 양극단의 사상으로 선동해서는 안 된다. 그 선동은 자기 자신에게도 부조화한 상념이 되어 평화스러운 안심입명을 잃게 한다. 자신의 체면이나 지위나 명예 따위에 대한 집착은 버려야 한다. 이것이 평안에의 지름길이다. 

인간답게 즐거운 일생을 보내는 것이 행복에의 길이며, 불국토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밑바닥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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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인생론 노트-인생
by Yuneelif 2023. 2. 16.
인생

인간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며 죽는 것일까.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인생!

친한 사람과의 이별, 싫은 자와 함께 사는 괴로움, 경제적인 고통, 원망, 시기, 질투, 노여움, 독점욕,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마음이 고독한 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유명인의 오만, 육체적 불구에 대한 고민, 종교를 사리사욕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자, 주색에 대한 욕망, 지위·명예욕, 인종차별에 우는 자, 동족끼리의 권력다툼, 종파싸움, 주의주장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투쟁과 파괴, 노사 분쟁, 고부간의 갈등 등등, 일일이 기록해 가자면 끝이 없는 부조화한 인생!

이러한 슬픔, 괴로움의 원인은 모두 중도의 마음을 상실한 행동에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욕망의 와중에 자신을 매몰시켜 거기서 빠져나올 줄 모르며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어떤 자는 인생에 실망하여 인간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은 결코 불가해한 것이 아니다. 다만 난해할 뿐이다.

이 난해한 인생을 가장 알기 쉽게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설명한 빛의 천사가 있다. 다름 아닌 인도의 석가모니부고 ㅏ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도다.

그러나 그들의 설법도 오랜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많은 승려와 학자들의 지와 의에 의해서 변질돼 버렸다. 철학화, 의식화, 심지어는 상업화로 타락하고 말았다.

기독교도 불교도 학문화, 철학화, 상업화되었기 때문에 그 가운데에서 신리를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즉 이치는 알고 있는데 상념과 실천의 방법이 모호해졌다.

마음이 없는 종교, 실천이 없는 종교가 현대 사회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와 의로써 도금된 불교와 기독교를 버리고 본래의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을 되찾는 길이다.

학문 종교, 관광 종교, 의식 조교로써는 현대 사회의 인간의 마음을 구제할 수 없다. 타락된 종교로써는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달을 수 없을 뿐더러 제멋대로의 인생을 밟게 되고 물질 경제의 노예가 되어 본성을 잃은 자가 수없이 많아진다. 신리의 철학화, 종교 전문화에 의한 타력 신앙, 이익주의 종교의 탈바꿈, 신불의 대량 생산화, 이런 것들이 종교의 왜곡상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그래도 대중은 마음의 보금자리를 찾아 헤맨다. 종교를 왜곡시킨 지도자의 죄는 무겁다.

경은 일상 생활의 방도를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은 신리이며 인류의 마음의 고향이다. 우리는 이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육체 조상의 관습이나 종교적 관례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므로 자기의 종교가 정법인지 사법인지 확실하게 구별조차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사, 사찰, 교회가 신불이 존재하는 곳, 기도하는 장소로 착각되어 어느새 기복 신앙, 타력 신앙으로 타락하고 말았다. 신사, 사찰, 교회는 살아있는 인간에게 신불의 자녀로서의 자각심을 일깨워주고 신리를 실생활에 실천하도록 가르쳐주는 교실이어야 한다. 석가도 예수도 신불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우상을 세워 중생에게 예배하도록 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라지그리하 교외의 베느베나(죽림정사)나 시라바스티 교외의 젯다베나(기원정사), 그밖의 많은 정사들은 여러 나라의 왕이나 장자들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었지 교단에 의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정사는 비구와 비구니들의 숙소요 신리를 설법하는 전당이었지 결코 신불에게 제사 지내거나 우상을 받드는 곳은 아니었다.

때로는 그리그랏드의 산저이나 공원의 광장 등이 설법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 신리를 설법한 예수 그리스도도 신불이나 우상 앞에서 공양 예배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병든 중생에게 사랑의 손길을 뻗어 때론 요르단강에서 때로는 나자렛 언덕에서 혹은 헤르몬산에서 신리를 설법했다.

이렇게 설법된 신리는 오늘날에 와서도 불멸이며 우리들은 석가나 예수 당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거기 진짜 마음의 신리가 있으며 경문의 바른 정신이 있다. 

종파의 싸움이나 파벌의 추한 투쟁을 버리고 신리의 대도 위에 종교를 올려 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머지 않아 중생들의 버림을 받게 된다. 종파의 고집은 나 자신을 구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파멸로 몰고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리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 학문 종교는 지에만 머물 뿐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상 생활의 행위는 위선이 되기 쉽다. 행위와 신리는 불이일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인간으로서 태어난 목적과 사명, 나 자신의 인생의 가치를 스스로 알게 된다.

석가와 예수가 설법한 신리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질되었으며 마침내 말법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중생은 마음을 상실하고 부조화한 생활의 늪에 빠져 사회 혼란의 원인을 만들고 있다. 물질경제 지상주의의 현ㄷ 사회가 과연 인간에게 마음의 평안을 줄 수 있을까.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중생은 신불을 찾고 있으며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헤매고 있지 않은가. 말법 시대이기 때문에 상업 종교, 타력 신앙을 광신 맹신하여 본성을 잃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신불의 존재를 부정하고 유물 사상에 심신이 빼앗겨 인간 사회는 계급투쟁을 거쳐서 발전해 가는 것이며 물질문명도 거기서 번영해 간다는 사고 방식에 젖어 있다. 그런 지와 의에 의한 인간의 사상은 실은 동물적 본성인 것이므로 약육강식적 투쟁과 파괴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사상과 행동은 현대에도 계승되어 물질 우선 심부재의 폭력에 의한 피의 혁명을 실행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설령 일시적인 성공을 거둔 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심의 인간까지는 도저히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결국은 깨닫게 될 것이다. 권력이나 폭력의 힘으로 일시적으로 사상을 통일하였다. 하더라도 자유를 욕구하고 평안을 갈구하는 인간의 마음을 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음을 상실한 지와 의만으로 무장된 지도자에게 세뇌된 사상은 어디까지나 도장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젠가는 그 도장의 칠이 벗겨져 인간 본래의 불성인 알몸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괴로움의 원인은 신리에 거스른 부조화한 상념과 행위가 만들고 있다. 부조화한 사상은 투쟁과 파괴를 불러일으켜 괴로움과 슬픔의 현상으로 나타나 순환한다. 왜냐하면 투쟁으로 쟁취한 것은 언젠가는 투쟁에 의해서 상실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조화한 사상으로 마음의 괴로움을 해결할 수는 없다. 인간의 마음은 무한대로 넓으며 지와 의의 산물인 협소한 사상의 올가미로 묶어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상상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자유 자재이며 그 누구도 제약할 수 없으며 그 누구로부터도 제약받을 수 없는 것이다.

제약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없다.

선인가 악인가의 판단은 신리인가 아닌가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 자신의 올바른 마음을 충실하게 지니고 인생을 영위하고 있는가, 그리고 자기중심이 아니라 남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중도의 척도로써 생활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선악은 결정된다. 신리는 불변이며 인간의 지와 의로써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신리는 신불의 지혜요 마음이며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류는 오랜 역사의 과정에서 조화와 파괴가 동거하는 사회를 만들었으며, 오늘날의 물질적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이 사고 방식은 큰 잘못이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며 신불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마음을 잊어버렸다. 대자연의 만생만물은 모두 상호 작용에 의해서 존립하며 대조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의 육체에 있어서도 한 개의 세포가 이상해지거나, 또는 한 기관이 부조화를 일으키면 여러 가지 변조가 나타난다. 즉 질병이라는 현상이다. 그러면 우리들은 병원이다, 의사다, 약이다 하고 당황한다.

조화는 질병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인류의 수행 목적의 으뜸가는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투쟁 운운하는 이 현실 사회의 양상으로 과연 인류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부조화한 행위가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물질경제 지상주의에는 마음이 없으므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폭력으로 항거하는 사람들의 인생에 과연 진정한 자유와 평화가 존재하는 것일까.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배신자라는 말처럼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은 지옥의 아수라계에 통하고 있으며 그런 인생은 실로 어리석은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은 지배 계급의 횡포가 대중의 불만을 불러일으켜 생겨난 것인 만큼 지배층은 잘 반성해야 한다.

설령 자신의 노력으로 이룩한 경제력이나 지위라 할지라도 거기 만족할 줄 모르고 보다 많고 높은 것을 탐내고, 없는 자에게 베푸는 자비심도 없으며 자아아욕, 자기보존의 권화가 된 인간은 참으로 불쌍하고 저속한 자들이다. 사회에 이런 인간들이 많으면 혼란이 그칠 날이 없다.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은 대자연의 신리이며 우리의 육체뿐만 아니라 의식에도 작용한다.

신불의 자비, 즉 육체보존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자연의 환경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진다면 그것을 행동으로 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행위가 보은이다. 인간 사회의 조화를 자기의 능력 범위 내에서 봉사하는 것이 인간 상호의 신리를 다질 수 있으며 조화와 평안의 사회를 구축하는 원동력이 된다.

인간은 원래 누구든지 평화를 원하고 있다. 슬픔이나 괴로움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인간은 눈 앞의 현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잃고 스스로 슬픔과 괴로움의 원인을 짓는다.

마음이 없는 지적 사고 방식이 부조화한 사상을 낳고 표면적인 물질경제의 추구에 몰두하게 되며 인간 본래의 목적과 사명을 잃고 있다. 그래서 괴로움과 아픔의 불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불행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와 같이 물질경제가 근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인류는 조화의 틀이 잡힌 사회를 완성할 수 없다. 물질문명은 생활의 지혜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정신 문화나 마음의 진화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현대인은 물질경제에 사로잡혀 여러 방면으로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이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이 인간으로서 신성 불성을 되찾을 수 있는 첫걸음이다.

신리에 따라 인생을 엮어가는 것, 이것이 행복으로 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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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6장 인생론 노트-타력본원과 자력
by Yuneelif 2023. 2. 17.

타력본원과 자력

타력본원에 의해서 인간의 마음이 구제될 수는 없다.

니찌렌 시대의 사람들은 권력에 항거할 수 없는 무지몽매한 자가 대부분이었으므로 남묘호렌게교나 염불을 외는 타력 신앙을 통해서 신불의 존재를 깨닫게 하고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외에는 달리 구제하는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신불에게 나의 몸과 마음을 모두 맡긴 채 과연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기도하는 것만으로 진정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마음을 무의 상태에 두고 과연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은 신불의 존재를 아는 방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다.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서는 인간으로서의 수행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올바른 상념과 행위를 실천하는 가운데 신리의 조화는 생겨난다.

신불에 대해서 또한 우리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대자연의 만상만물에 대해서 감사하는 동시에 보은의 실천이야말로 보살심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칫하면 타력 본원, 자기보존에 빠지기 쉽다.

올바른 목적에 대한 일염력은 노력과 용기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이며, 자기도피와 자기보존의 제목 외우기 따위로 인류를 행복하게 인도할 수는 없다. 신불에게 감사하고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는 보은의 실천 행위를 함으로써 조화를 이룰 수 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수호령이 있다. 항상 자신의 양심에 묻는 생활을 실천하는 가운데 신성, 불지를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자신의 마음을 상실한 신앙은 정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영혼의 본체 혹은 분신에 의해서 보호를 받고 있으며, 나아가 각자의 마음의 조화도에 따라서는 지도령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영들에 대한 감사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 없는 협력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두고 있지 않으니 깨달음과는 거리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구도에 대한 노력의 정도에 따라서 마음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편 우리는 엉터리 지도자의 설법이나, 신리도 모르는 영능자의 예언 등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신불의 노여움이라고 겁을 주거나 부적을 강매하는 따위의 지도자나 교조에게 마음이 빼앗겨서도 안 된다. 그들의 교리를 자세히 살펴보는 동시에 그들의 일상생활의 태도도 관찰해 보고, 스승으로 받들 만한 인물인가 아닌가를 잘 판단한 연후에 신앙을 결정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마저 그들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음은 무한한 생명과 상통하고 있는 보배요 왕국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그 왕국을 제삼자에게 팔아넘기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잃게 되고 노력하는 길도 잊어버리며 타력 본원에 몸을 맡겨버리게 된다. 신불은 스스로 믿고 노력하는 자에게만 도움을 준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에 대한 수호령, 지도령의 협력은 항상 따라다닌다. 즉 자력을 다하는 노력의 극점에서 타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며 신리인 것이다.

실재계의 상단계의 빛의 대지도령이나 빛의 지도령들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함부로 지도 협력하지도 않거니와 무에서 유가 생겨나는 달콤한 약속 따위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노력도 하지 않고 자기 보존의 기도나 독경만으로 행복의 과실을 얻으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기도나 불공으로 구제 받는다고 유혹하는 교조나 지도자들을 조심해야 한다.

자아의 지와 의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깊은 추궁이 있어야 올바른 판단이 나올 수 있다. 

신불의 대리인을 자칭하면서 마으에 평안을 주지 못하는 교조나 지도자들은 저급령이나 동물령에 지배당하고 있다. 한편 이 지상계에 집착하여 방황하고 있는 지박령이나 지옥의 마왕이 빙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현혹되어서도 안 된다.

비록 그들의 예언이 적중하고 병을 고친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며, 더욱 부조화하고 어두운 영역으로 우리의 마음을 몰고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위선자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모순이 많으므로 그럴 때는 주저할 것 없이 의문을 가지고 올바른 해답을 얻어내야 한다.

무엇이든지 성급하게 믿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신불은 각자의 마음의 왕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물질이나 외모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중도의 마음은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견해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가운데 존재한다.

마음을 돌처럼 단단하게 굳히면 반드시 왜곡되어 버린다. 항상 유연하게 가져야 정법의 실천이 가능해지고 깨달음의 첫걸음을 열 수 있다. 이런 실천을 통해서 90% 잠재의식의 지혜가 용현되어 자신의 과거세를 깨닫게 되고 전생윤회의 과정을 소생시켜 볼 수 있다.

나와 나의 그룹은 마음 속에서 실재계의 수호령, 지도령과 대화도 할 수 있고 육체의 오관을 이용해서도 대화할 수 있다. 명상적 반성을 계속함으로써 우리 몸은 황금색 아로에 싸이고 의식의 광자체는 성운층을 뚫는 크기로 확대되어 지상에 있는 자신의 조그마한 육체를 내려다보게 된다.

우리의 의식은 광자체의 육체를 가지고 원자체의 육체인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원자 육체에서 이탈한 광자체를 부려 차원이 다른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물론 대지도령과도 대화할 수 있다.

이미 이 현상계를 하직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갈 볼 수도 있고, 상단계의 빛의 지도령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정도 방문할 수 있다.

천상계에 올라갈 때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마치 돔같은 것을 타고 초고속 엘레베이터로 상승하는 것 같다. 하늘의 별들이 똑똑하게 보인다. 실재계는 평온한 세계다. 저단계의 세계와 상단계의 세계는 그 영역이 천양지차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개 육체는 영자선이라는 것에 의해서 광자체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서로의 연락을 취할 수 있지만, 의식이 육체로 돌아올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이 지상계의 만상만물은 저 세상에도 존재하며 그 색채는 이 세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평화롭고 부드럽기 그지없다. 식물의 녹색은 이른 봄날의 신록처럼 보드랍고 포근하다. 이 색채는 영혼을 정화한다.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인류 공존의 세계이며, 마치 현상계의 올림픽처럼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저마다의 복장을 하고 공생하고 있는 집단 사회이다. 세계는 하나라고 하는 사실을 똑똑하게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저단계의 세계가 되면 역시 자국적 환경에 칩거한다. 자기주장을 하는 세계다. 더욱이 지옥계에 이르러서는 남을 신용할 수도 없고, 겉으로는 조화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되면 서로 싸운다. 자기보존의 세계이며, 평안이란 티끌만큼도 없다. 마왕의 권력에 의해서 지배되고 있으며 진정한 자유란 있을 수 없고 평안한 생활도 영위할 수 없는 세계다. 자기 자신의 마음을 상실한 인간들이 거주하는 부조화한 세계이며, 자비도 사랑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냉정한 인간들의 마음이 만들어 내고 있는 세계다.

하지만 이런 인간들도 그 환경에서 반성하는 계기를 잡고 언젠가는 빛의 천사들의 도움을 얻어 구제된다. 저세상의 세계는 표면 의식이 90%이기 때문에 반성하면 그 효과가 즉시 현상화되어 광자체의 광자량이 많아져서 조화에의 속도도 매우 빠르다. 마음의 조화도는 곧바로 육체(광자체)에 나타나 당사자는 그 조화도에 상응하는 세계로 상승해 간다. 이와 같은 부조화한 세계에도 여러 단계의 계층이 있으며, 또한 빛의 천상계도 여러 단계로 구분된다. 천상계의 상단계 이상은 천사, 빛의 천사, 상단계 지도령, 상상단계의 빛의 대지도령 등으로 그 세계가 구분되어 각기 조화에 비례한 사회가 구성된다. 

이 현상계는 실재계에서 투영되는 입체 영화와 같은 세계이다.

이승이건 저승이건 요는 그 육체 구성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중심인 영혼에는 변화가 없다. 전생윤회를 하는 과정에서 이 현상계에서는 원자체라는 육체를, 저 실재계에서는 광자체라는 육체를 그때그때 갈아 입는 환경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의식, 즉 영혼은 태어나는 일도 없으며 죽는 일도 없다. 불생불멸이다. 불지도 줄지도 않는다. 부증불감이다. 이것이 본래의 실상이다. 우리는 이 본질을 잘 이해하여 거짓의 자기 표현이나 거짓의 신불 신앙, 엉터리 판단은 피해야 한다.

신리를 외면한 거짓 인생이 자기 자신의 마음에 고뇌의 짐을 지게 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지배자인 마음의 왕국을 올바르게 구축하여 현상에 사로잡히지 않는 부동심을 가지고 마음의 짐을 벗어던짐으로써 비로소 안심입명의 평화스러운 환경을 누릴 수 있다.

전래의 누습을 타파하고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하는 신불인 '마음'을 믿고 그 마음의 왕국에 내재되어 있는 보고의 문을 자력으로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숙명론이나 쓸 데 없는 논쟁을 피하고 혼란스러운 온갖 유혹을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법에 따른 실천 생활을 통해야만 올바른 마음의 제동장치가 작용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카하시 신지_마음의 발견
제6장 인생론 노트-자기보존과 위선자

by Yuneelif 2023. 2. 17.

자기보존과 위선자

자기 자신의 욕망만을 좇고 남의 일은 내 알바 아니라고 하는 태도는 자기보존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을 주장하고 지위, 명예, 재산을 위해서는 마음을 희생시키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자기의 이름과 가문에 흠이 되지 않을까 늘 염려하고 있다.

남의 칭찬을 받으면 흡족하고 충고를 받으면 감정적이 되어 보복을 궁리한다.

경제적으로 남의 존경을 받으려고 하고 그 마음과 행위에는 조화가 없다. 

항상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며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물질 경제가 전부라고 고집한다.

남을 믿지 않는 주제에 자신을 믿게 하려고 금품을 뿌린다.

타인에게 배신을 당하면 원한을 품지만 자기는 남을 예사로 난도질하고 배신한다.

이런 사람들은 한때는 번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비와 사랑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몰락한다. 마음에 평화가 없고 근친자들로부터는 불신을 받게 되며 최후에는 사면초가가 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이 빈약한 자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마음은 아귀도에 통하고 반성이라곤 하지 않는 인생이기 때문에 죽으면 지옥에 떨어져서 본성을 깨달을 때까지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되는 원인은 정법을 깨닫지 못하고 물질 경제가 전부라고 착각하여 인간으로서의 수행 목적을 잊어버리고 나룻배인 육체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데 있다.

우리가 이승을 떠날 때는 경제도 지위도 명예도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다. 오로지 인생 경험의 일체가 기록된 의식, 즉 영혼을 가지고 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물질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는 인간은 평화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신불의 자녀로서의 만족감과 기쁨이 떠날 날이 없다. 

한편 종교 단체의 한 세포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속해 있는 종교의 교리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라고 맹신하여 자신의 근거지로 삼는다. 자기가 속한 교단이야말로 절대적인 것이며 상대방의 교단을 깔아뭉개려고 서로 논쟁한다.

제삼자로부터 올바른 신리라는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며, 마치 자기 자신이 신리를 깨닫고 있는 것처럼 남을 굴복시키려고 한다. 반론을 당하면 마음에 부조화를 일으켜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내어 다시 논쟁을 건다.

하지만 그러한 칭찬과 반론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것은 자기 만족에 도취되는 길 뿐이다. 자기 만족은 파멸의 씨앗이 되며, 도리를 깨닫고 있다면 논쟁 따위에 휘말릴 리가 없다.

철학적 불교 용어를 구사하면서 뽐내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의 왕국을 볼 수 없다.

개개인의 마음을 깨달음으로써 비로소 확고 부동한 조직이 확립된다. 지와 의의 논쟁은 조직에 금이 갈 뿐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불벌이라든가 법벌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어두운 상념이 지어내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의해서 현상화되는 것이지 결코 신불의 뜻은 아닌 것이다. 만일 벌을 받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신불을 사칭한 악령들의 짓임을 알아야 한다.

올바른 마음으로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은 신불의 빛에 싸이기 때문에 악령도 재앙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육체의 지배자인 마음의 왕국은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성역이기 때문이다. 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부조화한 상념에 의해서 자신이 불러들이는 것이다. 인간은 마음 속에 벌에 대한 공포심을 품으면 곧바로 그런 세계와 통하게 되어 현상화된다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신리도 아닌 엉터리 진리를 믿고 마음 속에 불안과 혼란의 신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잘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신앙에 대해서 공포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을 상실한 조직의 세포에 다름 아니며 마음 속의 공포를 더욱 에스컬레이트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같이 정법을 개닫지 못하고 마음의 왕국의 지혜를 알지 못하는 지도자가 사욕으로 조직을 확장해 나가면 그 부조화한 업보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또한 그 업보는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 질병의 모습으로 현상화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리를 깨닫지 못한 지도자야말로 위선자이며, 그의 잘못된 삶은 결국 죽어서 자기 자신이 심판 받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신불의 법칙이다.

마음의 절대성을 설법해야 할 종교 지도자가 자신의 마음의 평화도 다스리지 못하고 항상 아집과 투쟁심에 불타며 타종교를 헐뜯고 몰아부치는 것은 지도자의 자세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지도자는 자신의 위선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앉아 정도를 좇아 공부해야 한다.

또한 지도자로서 중생의 앞장에 선 자는 마땅히 중생의 평안과 복지를 위해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아아욕의 마음은 마침내 자기 파멸의 길로 몰고 간다.

기만과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않는 올바른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합지중이 되어 투쟁과 파괴의 와중에 휩쓸려 자신의 본성마저 잃어버린다.

마음이 없는 부조화한 몇몇 지도자에 의해서 대중이 선동되고, 걸핏하면 때려부수는 행위가 마치 정의의 용사처럼 자행되는 현실은 바로 지옥의 아수라계로 통한다.

마음을 잃은 주의와 주장이 폭력을 휘둘러대는 행위는 위선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그들은 물질 경제만을 으뜸으로 삼는 인간들의 집단이며 물질과 경제의 노예로 전락한 군상들이다. 그들 사이에는 배신 행위도 거침없이 자행되고 있다. 약한 자는 저항할 수 없으며 폭력 앞에 굴복을 강요 당한다. 하지만 그 폭력도 올바른 마음을 지닌 사람까지는 굴복시킬 수 없다. 육체는 구속할 수 있을지 모르나 마음까지 지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행사한 자는 폭력의 반작용을 받게 되며 추상같은 업보를 피할 길이 없다.

이러한 사회는 어두운 상념에 덮여 수없는 혼란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유와 평화의 마음이 싹터 조화에의 상념은 구체화된다. 인류가 신불의 자녀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자신을 되살펴 볼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봉건 사회 혹은 독재 하에서 오랜 투쟁과 파괴의 업을 체험하면서 진화하여 왔다.

언젠가는 원시 공산 사회보다 차원이 높은 만민 평등의 공존공영의 사회로 진화해 갈 것이다. 물질 경제를 초월한 마음의 소유자들에 의해서다. 그리고 심우선(마음이우선)의 사회로 전진해 갈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자신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는 신불의 지혜의 보고를 자력으로 언젠가는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책은 오늘날의 종교의 잘못을 구체적으로 밝혀내고 인간의 올바른 목적과 사명에 대해서 적은 것이다.

형식적 종교나 우상을 받드는 종교의 잘못 등을 지적하는 한편 신앙의 올바른 자세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는 위대한 불성, 신성을 상술하고 인류가 물질 지상주의의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이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소원이 아닐 것이다.

생명은 본체를 중심으로 다섯 분신으로 성립되며 교대 교대로 이 지상계에 내려와 영혼의 수행을 한다. 그리고 이 지구 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목적을 안고 있다.

감정, 이성, 지성, 본능의 조화를 팔정도에 의해서 이루고 신리에 맞는 생활을 통해서 영혼을 보다 고차원으로 진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 길이 바로 신불의 자녀다운 우리들의 사명이다.

신슈 사쿠의 고원에서 태어났던 나의 생활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열 살 때 거기서 생사의 경계를 왕래하는 희귀한 체험을 되풀이하면서 '신앙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나 자신의 육체 안에 있는 '또 한 사람의 나'의 존재를 알았다. 그 후 30 수 년 동안 나는 그 '또 한 사람의 나'에 대해서 회의하였으며, 그 해명을 위한 탐구에 탐구를 거듭해 왔다. 그래서 이젠 그 생명의 불변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외없이 수호령 지도령이 있다. 올바른 인생을 보내기 위해서 영혼의 형제들이 차원이 다른 저세상에서 항상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나는 알아내었다. 그리고 또 사고, 질병 등 모든 고뇌의 원인은 부조화, 욕심, 자기보존 등의 어두운 상념에 기인한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우리들의 인생은 이 세상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저 세상과의 왕래를 통해서 영원히 전생윤회를 되풀이하고 있는 유전의 생명이ㅂ다.

이러한 사실을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이해하고, 그 이해된 것이 실천으로 옮겨져, 보다 고차원의 '조화있는 삶과 사회'를 구축해 나가기 위한 인생을 엮어 준다면 나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고 싶다.

나의 염원은 이것뿐이다.

평안과 조화의 마음을 깨달아 인류가 투쟁과 파괴의 동물적 본능을 버리고 보다 좋은 사회를 구축하는 데 일조가 된다면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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