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 [동경대전 2] - 불연기연(不然其然)
무비앙스 Movieans
2021. 6. 2. 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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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전2권) 김용옥 지음ㅣ통나무ㅣ수운 최제우가 한문으로 쓴 동학의 기본 경전. 포덕문(布德文)·동학론(東學論)·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구성, 이념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동학 사상이 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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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23, 10:31 PM 도올 [동경대전 2] - 불연기연(不然其然)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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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飛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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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然其然 불연기연
그러하지 아니하다, 그러하다
<불연기연>이란 동학의 기본원리로 ‘그렇치 않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수운선생이 체포되기 한달 전(1863년 11월) 지으셨다. 수운선생은 불연기연을 통해 우주만물의 현상을 둘러싼 문제를 ‘불연不然’ 즉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기연其然’ 즉 인간의 경험과 이성으로 이해 가능한 세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898년 6월 2일(음) 교수형을 당하시기 직전의 해월 선생님의 모습. 72세. 모진 고문과 심문으로 야위셨고 다리는 퉁퉁 부어 진물이 흐른다. 가누기 어려울 정도의 몸상태였지만 꼿꼿한 자세와 형형한 눈빛은 만리 길을 뚫고도 남는다. 그 성스러운 자태에는 개벽 오만년 성상의 모든 희망과 서광이 서린다. 당시 러시아공사 파블로프가 촬영. 해월. 선생을 판결하는 판사석에 동학혁명 민중의 분노를 일으킨 주범, 전 고부군수 조병갑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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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大綱] 최수운은 계해년(1863)에 접어들면서 맹렬하게 개방적인 활동을 한다. 자기를 억압하는 세력들과 아무리 타협점을 모색한들 그것이 먹힐리도 없고, 아무리 자신이 득도한 바가 조선의 유학풍토에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증명한들 이해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럴 바에는 유감없이 소신에 따라 자유롭게 포덕하는 것이 정도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행동양식의 변화가 얼마나 큰 부작용을 초래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자기는 무지몽매한 관官의 세력(즉 국가폭력)에 의하여 제거될 운명에 처하여질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수운의 자유로운 포덕의 길은 죽음을 향한 데쓰 마치Death March였다. 그것은 마치 예수가 빤히 죽을 것을 알면서 예루살렘성전을 향해 가는 것과 동일한 행위양식어었다. 예수는 갈릴리 민중을 억압하는 율법의 총본산인 예루살렘 템플(The Temple at Jerusalem)을 뒤엎었다. 그것은 40년 후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전주곡과도 같은 상징체계였다. 수운도 결국 갑자년에 처형되었지만 그를 처형시킨 권력시스템의 총체
적 붕괴가 불과 46년 만에 가시화된다. 유대의 멸망이나 조선의 멸망은 유사한 세계사적 패턴의 반복이었다.
예수는 12제자를 키웠지만 그들은 결코 예수의 죽음의 행진에 동참하지 못했다. 수운은 접주제를 파하고 단 한 명의 후계자에게 도통을 전수한다. 수운
의 선택은 매우 현실적이었고, 멸망해가는 조선왕조의 황혼을 명예롭게 장식할 수 있었던 최선의 방략이었다. 해월은 도통을 지켰다. 그의 지킴이역할
은 조선왕조 오백 년의 민중의 한을 유감없이 표출하게 만들었다. 동학혁명이 없었더라면 조선왕조 오백 년의 찬란한 문명의 축적은 허무한 과거로 영락
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동학이라는 거대한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찬란한 멸망과 함께 새로운 자신만의 역사를 개척해나갈 수 있는 시작의
동력을 창출해 낸다. 역사는 멸절을 통해 새로운 개벽을 만들어낸다.
수운은 계해년(1863) 음 12월 10일 새벽 1시경 용담에서 체포되어 바로 다음 날 서울로 압송되는 끔찍한 추위 속의 여로를 재촉한다. 그리고 갑자년
(1864) 3월 10일 효수형에 처해진다.
(....)
한번 생각해보자! 다산은 과연 그 방대한 『여유당전서』속에 진정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았을까? 그가 살고 있는 시대적 담론의 상궤에 따라 많은 땀방울을 떨구었을지는 몰라도, 그가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한우충동하는 언어쓰레기 속에서 소리없이 사라지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수운의 『동경대전』은 『여유당전서』와는 차원이 다르다. 양자의 가치를 동일한 천칭天秤 위에 올려놓을 수는 없겠으나, 나는 수운의 원고 1장이 다산의 원고 1만 장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운은 문학問學의 과시가 없다. 그러나 수운은 오리지날하다.
(....)
수운에게 있어서 과연 기연은 무엇이고 불연은 무엇인가? 기연其然, 즉 “그러하다”는 것은 시공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잡다한 이벤트 중에서 인과론적으로 설명 가능한 체계, 즉 합리적 논리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는 상식의 세계(the World of Common Sense, the Realm of Causality)를 가리킨다. 우리의 상식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는, 원인과 결과의 고리가 잘 먹혀들어가지 않는 초경험적인 세계를 수운은 “불연不然”이라고 부른다.“그러하지 아니하
다”는 우리의 감각의 인과를 벗어난다는 뜻이다.
나에게는 나의 엄마, 나의 아버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났다. 이것은 “기연”이다. 이것은 “그러하다”이다. 그런데 인류의 태초의 조상은 과연 누가낳았는가? 태초의 조상이 딱 한 명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한 명이 진실로 태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태초이기 때문에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질 수가 없다. 여기에 우리의 “그러하다其然”라는 인과적 설명이 단절된다. 그 단절 이상의 세계는 “그러하지 아니하다不然”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불연不然”은 초험적 사태, 감성을 넘어서는 초감각적 사태, 비인과적인 사태, 비논리적인 사태, 비이성적인 사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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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 동양사상에 이러한 초월과 내재, 본체와 현상, 초이성과 이성, 비논리와 논리라는 문제는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러셀의 말대로 모든 것의 오리진Origin을 추구하는 사유, 다시 말해서 모든 것에는 최초의 기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유 그 자체가 매우 비과학적인 사유에 속하는 것이다.
동방인들은 존재의 신빙성을 따지기 위하여 존재의 최초의 오리진을 규명할 하등의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존재는 “스스로 그러한 것”이며 최초로부터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복합적 관계이다.
최초를 규명하는 사유는 기실 중동사막문명의 종교적 사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오리진을 규명해야만 그 궁극에서 항상 단절적인 초월자, 즉 하나 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연의 갶이 있기 때문에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재자인 하나님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이란 본시 변화를 감지하는 우리의 인식의 문제이지, 그것 자체로 움직이는 실체적인 물건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을 실체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그 움직임을 형상화하
여 생각한다.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때는 대강 시간은 횡적으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존재의 오리진이나 역사를 생각할 때는 흔히 수직적으로 된다.
그런데 이런 수직적인 시간관에 있어서는 우리는 항상 기연으로 설명되지 않는 단절을 만나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말한다:
“일정한 도수대로 각각의 법칙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각기 제자리에 안정되게 머물며, 일찍이 실오라기 하나만큼의 착오도 없습니다. 만약 그것들 사이를 알선하고 주재하는 높으신 천주님이 없다면 오차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비유하자면 강이나 바다를 배로 건나가는데 위에서는 바람이 불고 아래서는 파도가 치는데도 흔들려 전복될 걱정이 없다면, 비록 배 안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도, 반드시 그 배 안에는 노련한 조타수가 잘 조절하여 편안히
물을 건나갈 수 있음을 또한 알 수 있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리치는 이 천지의 질서정연한 변화의 도수度數를 생각해보면, 그 질서를 가능케 하고 있는 외재적인 운동인이 인과적 세계 밖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너무도 아름다운 질서의 디자인 또한 그 밖에 불연不然의 디자이너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리치는 말한다:
“본래 이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물들이 질서적으로 배열되어 있다면, 그것들을 질서 있게 배열한 존재가 있게 마련입니다.”
정교한 집 하나만 해도 설계자와 목수가 없이는 스스로 지어질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한다. 리치는 생명적 대자연의 생성과 인위적 문명 내의 물건의 만들어짐을 등격화하는 아주 말초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리스토텔리아니즘+토미즘”적인 논리체계는 마치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진실인 것처럼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도 있다.
수운은 기독교적인 인격신(주재신)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리고 만났다. 그러나 그의 만남의 과정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하느님의 불연不然은 기연其然화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닫는다. 만물이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다(物不能自成也)는 기독인들의 논리는 허무맹랑한 수직적 사유의 단절을 전제로 한 것이다. 만물은 스스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우주는 스스로 그러하게 생성되어지는 것이다. 수운은 이 자립자성自立自成의 우주(the self-organizing
Universe)를 새롭게 발견하고 외친다:
“오도는 무위이화이니라.吾道, 無爲而化矣. 수기심정기기守其心正其氣 하고 솔기성수기교率其性受其敎 하면 화출어자연지중야化出於自然之中也이니라.”
이것은 실로 『천주실의』전체의 논의를 깔아뭉개는 호언豪言이요, 직언直言이요, 정언正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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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의 일생에 있어서 공생애는 3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짧은 생애 동안 수운은 내내 서학과 동학의 아이덴티티 사이에서 갈등하고 곡해되고 핍박을
받았다. 수운이 죽음을 앞둔 마당에서 「불연기연」을 집필했다는 것은 서학으로 오인되는 것에 대한 변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의 형이상학 전체가
근본으로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 국민에게 가르쳐주어야만 한다는 사명을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서학의 근원적인 수직적 사고는 불연의 사기성에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불연의 사기성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수직적 권위주의(Vertical
Authoritarianism)의 상징태이며 이것을 수용할 경우 우리민족은 왕정적 사유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깊은 우려를 수운은 죽음의 직전에까지 절
실히 느꼈던 것이다. 수운이라는 사상가의 애국애족의 마음과 그것을 표현하는 사상의 깊이에 우리는 경이감과 경외감을 동시에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의 총결론은 이러하다: “불연은 기연이다!”
“불연기연”이라는 제목을 모든 사람이 불연不然과 기연其然으로 잘못 읽는다. “불연기연”은 불연을 주어로, 기연을 술부로 갖는 문장이다: “불연은 기
연이다.” 그렇지 아니한 세계는(처음에는 겁먹게 마련이지만) 결국 알고보면 그렇고 그러한 것으로 다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인류지성사의 발전은 결국 불연을 기연화하는 과정이었다. 비이성적인 것을 이성화하면서 이성의 범위를 넓혀간 것이다. 인류의 참다운 과학
Science(본시 지식Knowledge의 의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 내에서의 불연을 기연화하는 프로세스였다. 수운은 죽어가면서도 우리민족에게 종
교를 선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선사하려 했던 것이다. 수운이 있기에만 우리는 고조선과 조선의 동시대성(Contemporanetiy), 그리고 무궁한 코리아의 미래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4-1] 歌曰: 而千古之萬物兮, 各有成, 各有形. 所見以論之, 則其然而似然; 所自以度之, 則其遠而甚遠. 是亦杳然之事, 難測之言. 我思我, 則父
母在玆; 後思後, 則子孫存彼. 來世而比之, 則理無異於我思我; 去世而尋之, 則或難分於人爲人. 噫! 如斯之忖度兮. 由其然而看之, 則其然如其
然; 探不然而思之, 則不然于不然. 何者? 太古兮! 天皇氏, 豈爲人, 豈爲王? 斯人之無根兮! 胡不曰不然也? 世間, 孰能無父母之人? 考其先, 則
其然其然, 又其然之故也. 然而爲世, 作之君, 作之師. 君者, 以法造之; 師者, 以禮敎之. 君無傳位之君, 而法綱何受? 師無受訓之師, 而禮義安
效? 不知也! 不知也! 生以知之而然耶? 無爲化也而然耶? 以知而言之, 心在於 暗暗之中; 以化而言之, 理遠於茫茫之間.
[국역] 노래의 형식으로 이르노라! 천고의 만물이여! 제각기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요, 제각기 스스로 형체를 갖춘 것이로다(일단 우리 고유의 세계관을 대전제로 깔고 들어간). 감각적으로 우리가 파악하는 바로써 이야기한다면 감성적으로 그러한 것은 어떠한 사태라도 그럴듯하다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현시점에서 수평적으로 파악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발전하여 온 유래를 수직적으로 파악한다면, 멀고 또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 된다. 그러한 일들은 또한 묘연한 것이요, 또 말로써 헤아리기 어려운 것들이다.
내가 나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님이 나의 감성세계 속에 엄존하시고, 뒤로 이어질 나의 후손들을 생각하면 같은 원리에 의하여 나의 자손이 후세에 이어질 것이 확실하다. 오는 세상(미래)을 비교적으로 헤아려보면, 이치가 내가 나된 것과 다를 바가 없다(같은 법칙으로 후손들이 태어난다). 그러나 지나간 세
상(과거)을 소급해 올라간다면 그 까마득한 옛날에 사람이 어찌 사람이 되었는지 실로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
아! 이와같이 양쪽 사태를 전체적으로 헤아려 보자! 우리 상식에 그러한 것을 통해 보면 그러한 것은 또 그러하니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러하지 아니
한 것을 탐색하여 생각해보면 그러하지 아니한 것이 그러하지 아니한 것 위에 쌓여갈 뿐이로다.
이게 도대체 웬말인가? 아주 태고太古의 천황씨를 생각해보자! 그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사람이 되었으며, 또 어떻게 해서 임금이 되었을까? 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든 족보의 뿌리는 없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렇지 아니하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세간에 부모라는 존재가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
느 사람이든지 그 선조를 캐어 들어가면 그러하고 또 그러하고, 또 그러한 연유에 의해 그 상식적인 계보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 인간세상이 만들어졌고, 또 임금이 만들어졌고, 또 스승이 만들어졌다. 군주라 하는 것은 법으로써 그 지위를 만든 것이요, 스승이
라고 하는 것은 그가 예로써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존경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 최초의 군주를 생각해보면, 그에
게 그 자리(위位)를 전해주는 군주가 선재先在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자리의 위세를 주는 법강法綱은 어디서 받는단 말인가? 또 스승이 그에게 가르
침을 주는 스승이 선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의禮義를 어떻게 본받을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로다! 참으로 모를 일이로다! 태어나면서부터 알았기 때문에(생이지지生而知之) 그렇다고 말해야 할까? 함이 없이 저절로 그렇게 생겨났기 때
문에(무위이화無爲而化) 그렇다고 말해야 할까? 생이지지라고 말한다 해도 우리의 마음은 암담함 속에서 헤맬 뿐이요, 무위이화라고 말한다 해도 그 이
치는 아득하고 망망한 사이에서 멀어져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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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夫如是, 則不知不然, 故不曰不然, 乃知其然, 故乃恃其然者也. 於是而?其末, 究其本, 則物爲物, 理爲理之大業, 幾遠矣哉! 況又斯世之人
兮, 胡無知, 胡無知? 數定之幾年兮, 運自來而復之, 古今之不變兮, 豈謂運, 豈謂復! 於萬物之不然兮, 數之而明之, 記之而鑑之. 四時之有序
兮, 胡爲然, 胡爲然! 山上之有水兮, 其可然, 其可然! 赤子之穉穉兮, 不言知夫父母, 胡無知, 胡無知? 斯世人兮, 胡無知?
대저 총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사실 불연不然의 세계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연不然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기연
其然을 안다고만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상식적인 기연其然의 세계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기연에 의지하여, 그 말초적인 것을
헤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근본을 탐구할 수 있으니, 사물이 사물이 되고, 법칙이 법칙이 되는 대업大業(이 세상의 총체적 조화의 법칙)이 어찌 우
리에게서 멀리 있어 불가사의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여! 어찌하여 모른다, 모른다고만 말하고 있느냐? 천지운행의 역수曆數(calendar system)가 정해진 것이 몇만 년이
냐? 운運(인간의 운수라기보다는, 천지운행의 운movement)이 스스로 왔다가 스스로 돌아가지 않느냐? 이러한 움직임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스러운 것이
다. 이 변함이 없는 천지의 운행을 놓고 운運이니 복復이니 할 건덕지도 실상 없는 것이다.
만물의 그러하지 아니함(불연不然)의 신비로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법칙에 따라 밝힐 수도 있는 것이요, 그것은 기술하여 대조함으로써 명료하게 헤아
릴 수 있는 것이다. 사시의 순서가 있음이여! 그것은 어찌하여 그렇게 될까? 어찌하여 그렇게 될까? 그것은 역법에 의하여 규명될 수 있는 것이다. 산꼭
대기에 호수가 있음이여! 그것은 어찌하여 가능한가? 어찌하여 가능한가? 갓난아기의 어리고 어림이여! 간난아기는 말을 못해도 부모를 이내 알아본
다. 어찌하여 갓난아기가 무지하다, 무지하다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사람들이여! 어찌하여 그렇게도 무지한고!
[옥안] 기연其然의 세계는 가사의可思議의 세계이고, 불연不然의 세계는 불가사의不可思議의 세계이다. 그러나 불연이 불가사의라 하여 그것이 초월
의 세계, 초월자의 별세계라고 판단하는 양학洋學의 이분법을 수운은 철두철미하게 타파해나간다. 불연의 세계는 불가사의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초월
계Transcendental Realm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우리 인식이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식의 확충에 따라 불가사의는 가사의로 전환될 수 있
는 것이다.
하늘의 운행법칙도 “기지이감지記之而鑑之”(기록하고 대비하여 그 법칙을 찾아낸다) 하면 다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신비(불가사의)는 최초나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매우 평범한 일상경험에도 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 위에 큰 호수가 있다든지, 어린애가 말 못하면서도 사물을 인지
한다든지 하는 것은 평범한 감각세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불연不然”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다. 불연을 시간의 수직구조 속에서만 생각하는 서학의 논리
는 초월자에 대한 믿음을 강요하기 위한 엉터리 논리포석이라고 수운은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4-3] 聖人之以生兮, 河一淸千年, 運自來而復歟? 水自知而變歟? 耕牛之聞言兮! 如有心, 如有知. 以力之足爲兮! 何以苦, 何以死? 烏子之反
哺兮! 彼亦知夫孝悌. 玄鳥之知主兮! 貧亦歸, 貧亦歸. 是故難必者, 不然; 易斷者, 其然. 比之於究其遠, 則不然不然, 又不然之事; 付之於造物
者, 則 其然其然, 又其然之理哉!
[국역] 성인의 태어나심이여! 그 흙탕물인 황하가 천년에 한 번 맑아지면 성인이 태어난다고들 말하는데, 그것은 운運이 스스로 와서 스스로 돌아가기
때문일까? 황하의 물이 스스로 알고 변하는 것일까? 밭가는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음이여! 소는 분명 마음이 있고 인지가 있다. 힘으로 말하자면 충분
히 사람을 이기고도 남는다. 그런데 왜 저토록 충직하게 일하면서 고생을 하고, 저렇게 충직하게 죽음을 향해 가는고! 까마귀는 어렸을 때 어미에게 먹이
를 받아먹었기에 커서 그 에미가 늙어 움직이지 못하면 먹이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이 반포反哺의 현상은 까마귀가 효제孝悌를 안다고 하는 것일까? 제
비가 주인을 알아봄이여! 주인집이 가난해도 그곳으로 돌아온다. 가난해도 그 정감을 지키는 것일까?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불연不然일 뿐이고, 우리가 일상경험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을 기연其然이
라 하는 것이다. 사물의 이치를 머나먼 형이상학적 세계에 비정하여 규명하려고 하면, 모든 것이 불연이고 또 불연이고 또 불연의 사태가 되고 만다. 그리
고 또 한편 그것을 사물이 생성되어가는 조화의 세계에 의탁하여 생각하면 모든 것은 그러하고 그러하고 또 그러한 이치일 뿐이다!
[옥안] “난필자불연難必者不然; 이단자기연易斷者其然 ”이라는 말은 수운이 이미환웅이 내려온 신단수神壇樹에 새겨놓은 것이이라고 말할 수도 있
는, 우리민족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 새겨져야 할 명언이다. 이 한마디로써 서양철학의 모든 형이상학적 난제들이 해결될 수 있으며, 서양종교의 모든 독
단론이 힘을 잃는다. 불연不然은 초월이 아니라 단지 난필難必일 뿐이다. 결정론적인 인과관계를 벗어나는 사태는 우리의 가사계可思界에서도 얼마든
지 있을 수 있다. 그것도 “불필不必”이 아니라 “난필難必”일 뿐이다. 이러한 난필의 세계는 결국 쉽게 판단될 수 있는 이단易斷의 기연其然에 의하여 인
수분해 되어진다. 불연, 불연, 우불연지사가 결국 알고보면, 기연, 기연, 우기연지리라는 것이 수운의 최종 결론이다.
수운은 죽기 전까지 우리민족이 서양의 악폐인 이원론적 사유에 오염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서학의 악폐에 빠져, 본
질을5말하고, 본0체를 말하고, 초월자를 말하고, 천당을 얘기하고, 불변을 신봉하고 있다. 인생은 부운같이 허망한 것이라 말하면서, 오직 영원불멸의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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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로 향해야 한다고 구라치고 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이 이 간판 하나로 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오호! 애재라! 도올이 신학대학을 나오면서 외쳤던 우환
의 언사가 지금도 수운의 우려와 함께 21세기의 대기를 무겁게 만들고 있다.
「불연기연」에 관해서 나는 살아있는 수운의 마음으로 직접 뛰어드는 그런 사투를 감행하였다. 나의 번역은 그 고투의 결실이다. 독자들은 나의 해석을 본
문과 대조해가면서 잘 살펴보면 그 지향처의 정곡을 터득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도올은 대전의 큰 고비를 넘었다.
『東經大全』, 불연기연(不然其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