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페허(ruin)와 공(空) 사이의 진동" : 문화 : 베리타스
[서평] "페허(ruin)와 공(空) 사이의 진동"
박일준(원광대학교)
입력 Nov 09, 2022
편집자주- 원광대학교 박일준 교수가 최근 번역된 사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 사변적 실재론 이후의 인간의 조건』(모시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서평글을 보내와 전문을 싣습니다.
(Photo : ⓒ모시는 사람들)
▲ 『인류세의 철학』 겉 표지
본서는 시노하라 마사타케의 『인류세의 철학』을 조성환, 이우진, 야규 마코토, 허남진이 공동으로 번역한 작품인데, 이 번역서의 가장 탁월한 부분은 번역자들이 꼼꼼히 챙겨준 '미주'에 있다. 저자의 인용들을 일일이 원서를 찾아, 원문과 번역문을 꼼꼼히 달아놓은 미주는 그만큼 역자들이 이 책의 번역을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미주에서 원문을 직접 볼 수 있게 만든 노력은 이 번역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고 보여진다.
본서가 전개하는 『인류세의 철학』은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주체가 되었다는 디페쉬 차크라바티의 주장이 함의한 의미를 동일본 대지진 사태 이후 벌어진 현장과 연결하여, '사물의 의미'를 채근하고자 한다. 지질학적 행위자로서 인간이란, 자신이 이룬 인공의 문명보다 훨씬 더 장구한 지질학의 시간에 난입하며, 지질학적 흔적들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남기고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 기후변화를 기후위기로 읽는 시대이지만, 사실 기후변화라는 것 자체는 지구 시스템의 작동이지, 결코 '기후변화'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리고 5번의 대멸종이 있었을 만큼 생태계는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지금의 기후변화와 생태위기가 전과 다른 것은 이제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로 개입하여, 기후와 생태계에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있다는 점이며, 그래서 이를 파울 크뤼첸은 '인류세'(the Anthropocene)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즉 인간은 지구에 압박을 가하는 "지질학적 존재가 되었다"(98).
본서에서 시노하라는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지구온난화와 해수면 상승 등과 같은 문제들의 발생으로 위협받는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면서, 이 위기들은 단지 인간 실존의 위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성찰한다. 이 위기들은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서 자연이라는 근대적 개념의 토대를 뒤흔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연환경이 인간을 위한 "안정적인 배경이 아니라 인간세계의 존재방식을 뒤흔드는 것"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건들이라고 진단한다(6). 즉 '사물들'이 인간의 눈 앞에 자신들의 행위주체성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내는 사건인 것이다. 본서는 이를 "붕괴감각"(sense of ruin)으로 포착하면서, "붕괴되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새로운 인간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이 물음은 이렇게 표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폐허(ruin)가 되어버린 희망을 어떻게 다시 집어 들고 나아갈 수 있을까?'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 문명은 붕괴하고 있다. SF 소설이나 영화가 그려주는 미래가 더 이상 첨단미래과학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시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기후변화나 생태위기로 잿더미나 폐허가 되어 더 이상 사람들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없는 공간으로 변화한 미래에서 그 영화들은 미래의 이야기들을 시작하고 있다. 문명에 대한 보편적인 절망적 예감일까? 그런데 그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누구의 말처럼 현실화되고 있다. <인터스텔라>의 미래가 우리의 현실에서 싹트고 있는 상황 말이다.
시노하라는 이 예감의 전조를 1995년 고베 지진이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통해 포착한다. 그 재난들은 인간존재의 인공적인 삶의 조건들이 "언젠가는 붕괴해서 '무'로 돌아"간다는 의식, 즉 "인공적인 세계가 무너져서 언젠가는 폐허가 된다는 감각"을 전개한다(7).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는 통찰은 "경제성장을 촉진하기 위하여 대량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것은 파괴되고 소멸되며 공터가 되"어버리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근원적 통찰-특별히 동일본 대지진으로 선명해진 통찰-로 보인다(121). 이 무(無)로 달려가는 문명은 이제 "지구로부터의 이탈"을 통해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담지한 '파멸과 구축'(de/construction)의 사이클을 기술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123). 우리가 '해체'로 번역하는 de/construction의 본래 의미가 '파멸과 구축'을 동시에 의미하는 말임을 상기해 본다면, 결코 포스트모더니즘은 세계화 자본주의의 폐해를 은폐하는데 공모해 온 공범이라는 의혹이 짙어진다. 그들은 '사물의 행위주체성'을 저자의 죽음으로 은폐했다. 은폐된 것은 사물과 실재이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들을 '저자', '거대한 이야기' 등으로 불렀다. 그 은폐 속에 가려진 것이 바로 존재의 취약성이다.
시노하라는 티모시 모틴의 말 "취약함(fragility)이 존재의 조건이다"라는 말을 인용한다(7). 이는 문명에 대한 시노하라의 근원적인 통찰에 더 가까운데, 왜냐하면 시노하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 "인간은 인간이 만든 인간이 만든 인공물에 의해 존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동일본대지진을 통해 붕괴가능하다는 현실적 자각, 즉 "인간이 만든 세계가 그것과 분리되었다고 여겼던 자연에 의해 간단히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로 이르기 때문이다(9-10). 시노하라에 따르면, 인간의 삶이 취약한 것은 "인간 생활의 조건이 인간적인 의도의 산물이라는 의미에서의 인공 공간만으로는 완결되지 못하고,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둘러싸고 지탱해주는 자연과 만나는 곳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90).
말하자면 동일본대지진은 시노하라에게, 특별히 지금의 생태위기 시대에, "인간이 만든 인공물들이 자연과 분리된 채로 존속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던지게 했다. 인간의 조건으로서 인공물과 자연의 분리는 인공물들을 인간의 의지대로 거의 무한히 생산할 수 있었던 근대에 이르러 급속히 가속화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 혹은 자연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의 터전인 '지구'는 무사당하거나 외면당해왔다. 그런데 동일본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세상에서 침묵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 그 왜소함을 통해 시노하라는 차크라바티의 "행성과 조우하는 감각"을 발견한다(18). 그리고 그 놀람의 경험 속에서 시노하라는 인간이 자연을 만날 때, 그 자연세계의 사물성을 만날 때, 그 붕괴의 경험, 그것은 곧 인간이 "자연에 의해 지탱되고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을 새삼 각성케하고, 자연이라는 타자의 야생성을 접하게 된다(91).
차크라바티는 '지속가능성'(sustainablity)라는 범주를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이라는 개념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지속가능성' 개념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사유로부터 연원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차크라바티는 '세계화'(the global)와 행성성(the planetary)을 구별하는데, 이는 'global'이 언제나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연동되면서 식민지적 사유를 네트워크화된 제국의 모습으로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계화 제국의 자리를 벗어나는 것은 곧 스피박의 사유를 인용하자면, 타자성(alterity)을 인식하는 것인데, 가장 타자화된 존재가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행성인 것이다. 근대란 "자연의 위험성을 제거해 나가는 역사"(20)로서, 다른 말로, "자연의 불안정성과 부자연스러움을 극복하려는"(21) 역사이기도 하다. 즉 자연을 타자화하여 지배하고 정복해 나아간 역사가 근대화이고, 세계화란 이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진행되었던 식민주의의 역사를 세계적으로 디지털 네트워크에 기반하여 확대/연장한 체제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지구를 타자화시켜,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근대적 사유가 기호자본주의 시대 '세계화'라는 모습으로 포장되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붕괴하고 있는 문명 속에서 인간의 조건을 새롭게 설정하는 철학적 문제는 퀸텐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를 위시한 소위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 운동을 통해 21세기 초엽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참여자들은 이를 '객체-지향의 존재론'으로 이름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체의 철학들의 시대를 지나 이제 철학은 '객체를 지향'해 나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체성의 철학에서 '타자'(the other)로 규정되었던 객체가 실은 존재의 기반이라는 인식의 전환이다. 예를 들어, "우주의 생성과 지구의 형성은 인간이 출현하기 이전에 인간과 무관한 곳에서 일어났다"(39). 즉 대부분의 현실 사건은 "인간의 사고, 의식의 한계를 넘어선 곳에서 일어"난다는 인식의 전환이다(40). 이를 시노하라는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상과는 무관하게 세계는 존재"하고 그리고 세계는 "인간의 생활을 둘러싸고 지탱하는 조건으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40). 존재의 세계는 인간이 상상하는 세계 너머의 객체들의 관계로 존재하는 세계를 포괄하고, 그래서 상호주관성으로 엮인 인간들의 세계보다 상호객체성으로 엮인 비인간의 세계가 더 크고 근원적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 말 속에 담겨있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을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계"(man-made world)를 통해 완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49). 그럼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세계 소외"(world alienation)를 감행한다(104). 이는 "인간의 의도대로 되지 않는" 자연을 "개변"하는 것을 포함하는 과정으로서(49), 이는 곧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가 '자기-완결적'이 될 것을 의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자연을 "세계 아닌 것"으로 간주하는 과정이며, 동시에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이기도 하다(104). 하지만 기후변화와 생태위기 그리고 펜데믹은 특별히 동일본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의 과정들을 통해 '자기-완결적'일 것 같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의 세계로 난입한다. 이를 통해 이제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가 실은 비인간 자연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이 구축한 인공적 세계에 익숙한 우리는 이제 우리 세계를 둘러싼 비인간 자연 혹은 지구의 응답에 어떻게 응답-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가를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아렌트의 말을 따라, 시노하라는 인간 삶이 "무수한 인공물로 지탱되고 채워져 있다"고 전제한다(52). 그런데 인간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인공물들은 인간의 의도대로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들에 부여하는 의미나 생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며, "인간이 눈치채지 못하게 인간 생활의 존재 방식을 근저에서 규정하며 좌우하고 있다"(55). 하지만 우리는 이 인공적 '물'(物)의 행위주체성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 그저 그들은 우리 인간 삶을 위한 '도구'로서만 이해하기를 지속한다. 이 물의 행위주체성은 인간이 이룩한 인공문명을 "노화시키고 쇠퇴"시키는 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87). 그리고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기반으로 우리 인간은 "지구의 제약을 벗어나서, 자연이 부과하는 한계에 도전하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시도"하면서, "지구의 제약으로부터 철저하게 이탈하여, '뿌리없는 풀'처럼 살아가는 상황"을 오늘날 재현하고 있다(66). "뿌리없는 풀"이란 전대미문의 사태를 맞이한 인간존재의 상황을 표현하는 야스퍼스의 말이다(117).
인간의 세계가 붕괴하는 곳에서 사물을 만나다
이런 상황에서 시노하라는 테주 콜(Teju Cole)의 말을 인용한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방식을 항구적으로 바꾸고, 새롭게 사물을 보는 시각을, 새로운 슬픔의 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112).
우리가 만든 인공의 세계에서 살아가다, 문득 동일본대지진 사태와 같은 자연의 난입으로 인위의 산물이 무너지고 사라지고 나서야, 우리는 이 인간의 세계가 자연에 의해 둘러싸여 존재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이 깨달음은 새로운 통찰이나 경이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확실한 것으로 당연시하던 시공간의 붕괴이다. "객관적인 인식의 조건들로서 초월적론적인 시간·공간의 형식"이 붕괴되는 것이다(113).
시노하라에 따르면, 그 붕괴에서 혹은 그 붕괴 이후에 "우리는 사물과 만"나게 된다(64). 이 만남을 '자연과의 만남'으로 획일화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자연'이라 말하는 객체의 이미지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튼은 '자연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한다. 인간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야생성을 지닌 어떤 것으로서 자연을 상상하지만, 실은 자연은 유기체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비유기체적인 것들을 포함한다(75). 그 붕괴는 인간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파멸을 통해서 증언하며, 사물의 모습이 드러나게 한다. 우리가 사물을 만나는 곳은 "인간화가 미치지 않는 곳, 내지는 인간적인 세계가 균열되는 곳"이기 때문이다(67). 붕괴를 통해 사물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 그것은 인간중심적 이해가 투사된 자연이 아니라 사물 즉 '무기물의 세계'일 것이다. 동일본대지진을 일으킨 '자연'은 결코 우리의 낭만적인 투사를 담지한 'outdoor'의 장으로서 자연이 아니라, 비유기체적인 시스템으로서 자연일 것이다. '붕괴'는 우리가 평상시 '손 안의 존재'(Zuhandenheit)로 살아갈 때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정상적으로 운행될 때에는 보지 못하던 것을 드러내주면서, 그 문제를 통해 사물성을 드러낸다. 그렇게 "인간은 사물이 부서져야 비로소 그것에 의지하여 살고 있음을 의식화하는데, 이 의식화로부터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관심이 환기된다"(77).
사물을 만난다는 것은, 벤야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우라가 붕괴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인간이 "사물을 대상으로서, 다시 말해 사물을 단지 거기에 있는 객체로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71). 이 사물성이 드러나는 시공간으로서 환경은 "인간화되지 않을 여지, 인간에 의해 완전히 채워질 수 없는 여지가 있고, 그래서 인간의 의도와는 무관한 무언가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이다(79). 그리고 '일어남'은 언제나 존재들의 얽힘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환경이나 세계는 곧 객체로서의 사물들의 상호연관성이 펼쳐지는 곳, 즉 상호객체성(interobjectivity)을 통해 세계가 구성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의 상호주체성의 세계는 이 상호객체성의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상호객체성의 세계 안에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공적인 '상호주체성의 세계'가 담겨진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주체가 객체를 만난다는 것은 곧 객체를 주체의 각도에서 파악한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해서 주체의 객체 이해는 언제나 주체가 파악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객체 이해는 언제나 알 수 있음과 알 수 없음 사이에서 진동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주체의 객체이해가 담지한 불안정성이 결코 객체들의 존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객체들의 완고하고 엄연한 사실성이 존재한다.
객체의 행위주체성을 시노하라는 구마모토현 미나마타시 신일본질소 화학공장에서 유기수은 유출사태를 통해 예증한다. 화학공장에서 유출된 유기수은은 물고기를 떼죽음으로 내몰았고, 그 물고기를 먹은 인간의 몸도 유기수은으로 오염되어버린 일 말이다. 우리가 기후시스템에 압박을 가해 움직이게 만들고, 그 영향을 받은 기후 시스템이 다시 인간의 소멸을 불러올 수도 있는 상황이 딱 그렇다. 우리는 우리가 온전히 제어할 수 없는 객체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우리가 끼친 영향력은 객체들의 행위주체성을 통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사태로 돌아오는데,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와 팬데믹이 바로 그것들이다.
폐허로부터 침묵의 '공'(空)으로
시노하라의 사물 이해는 좀 난해하다. 한편으로, 아렌트의 사유로부터 시노하라는 "인간적인 구성요소가 될 수 없고, 인간세계로부터 배제되고 버려지는 무용지물이자 폐기물로 취급"되는 존재를 '사물'로 간주하는데, 인간의 입장에서 "서로 무관한 것들의 퇴적이자 잡다한 무더기이자 불필요한 것에 불과"한 것이 사물이다(158). 즉 인간이 인공을 통해 구축되는 세계로부터 "세계가 아닌 것으로서 추방된 무용지물" 말이다(158). 그래서 사물들은 "경제적 ·문화적 근대화 아래에서 형성된 생활영역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쓰레기이자 잔해이자 폐기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시노하라는 서술하며, 이를 가와우치의 말을 빌려 "파편"이라고 표현한다(208).
다른 한편으로 시노하라는 모튼으로부터 "취약한" 사물 개념을 인용하는데, 그 사물은 "우리 주변에서 늘 죽어가고 있다"고 인용한다(158). 그래서 사물이 취약해져 사라져 가는 과정 가운데 존재한다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물이야말로 사물이 본래 갖추고 있는 성질을 느끼게 해주는 방식으로 존재"하며, 그 흩어져 있는 사물은 "아렌트가 말하는 세계 아닌 영역으로 추방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세계로부터 해방되어 그것을 둘러싼 생태적 영역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시노하라는 말한다(161).
아울러 시노하라는 모튼의 관점에 따르면 사라져 가는 취약한 사물은 "잔향과 흔적 그리고 발자국"으로 존재하며, "그것들은 우리가 알거나 말하는 것을 벗어나고 넘어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완전한 무(無)는 되지 않은 채, 거기에 있는 인간의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서 존재한다"(161).
이러한 시노하라의 사물에 대한 서술은 아무래도 "인간세계를 삼켜버린 자연이 일단 물러난 뒤에 다시 나타나는 세계"에 "정적"을 가져오는 경험, 즉 동일본 대지진 이후 버려진 폐허의 정적에 대한 경험을 기반으로 서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사물이 등장하는 모습을 특정한 측면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말이다. 사물은 늘 인간으로부터 배제된 것으로만 모습을 드러낼까? 오히려 사물은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지만, 하이데거의 말처럼 '손 안의 존재'로 간주되어, 사물성을 박탈당한 채 인간세계의 일부로 귀속된 포로가 되어 존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시노하라가 말하는, 이 흔적으로 우리 주변을 맴도는 사물은 '희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본정신보다 더 선명하다. 그래서 오노의 시는 일본정신을 외치며 총동원체제에 동원된 공장지대를 걸어가며 "내가 풀이라고? / 오히려 광물이야. 땅에 박힌 수억만 개의 유리관"이라고 시를 썼다(181). 인간 문명에 의해 버려진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라는 행위자위에 쌓여가고, 그렇게 쌓인 물질의 힘은 'tipping point'를 넘기면 거대한 초객체(hyperobject)의 힘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기후변화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노하라에게, "사물성이 감지되는 장소는 인간의 생활과 조화된다고 여겨지는 유기체론의 전체(全體)와는 다르다"는 사실이다(182). 말하자면, "철저하게 진행된 공업화 끝에 정신은 사라"지고, 이는 "인간의 정신작용으로는 수렴할 수 없는 압도적 힘에 의해 초래"된 것이며, 바로 여기서 "물질과의 만남이 일어나고, 우리가 사는 곳이 가득 채워질 것"이다(185). 아마도 동일본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땅에서 경험하는 사물성이 바로 이것일 것이다.
우리의 붕괴는 그렇게 우리와 공존하는 사물의 현존을 가까이 가져다 준다. 그 붕괴는 우리가 인공으로 구축한 세계의 정신의 붕괴를 의미한다. 사물은 그 정신이 붕괴해야만 포착되는 존재이다. 그 정신의 붕괴를 통해, 결국 우리가 우리의 의도대로 만들어내려 했던 물질성, 그것은 우리의 이용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 혹은 우리 자신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물의 야생성이다.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된 인류세 시대에 우리는 우리와 공존하는 생명들과 사물들 그리고 물질들을 파괴하고 해체하며 돌이킬 수 없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붕괴 현상도 우리가 존재의 얽힘과 더불어 '공존'해 나아가는 한 양식임을 대멸종들은 증언한다. 이 공존의 관계 속에서 '인간 아닌 것' 즉 '비인간 존재들'은 인간의 삶의 시공간 너머에서만 포착된다. 우리의 삶의 공간 내 존재들은 우리의 '손 안의 존재'(Zuhandenheit)가 되어, 거의 인식되지 못한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에는 오직 그것이 우리 삶의 공간에서 문제가 될 때뿐이다. 목수는 망치가 부러졌을 때에야, 망치를 인식한다. 그렇지 않다면, 망치는 그저 목수의 몸의 연장(extension)일 뿐이다.
시노하라는 인간의 세계를 파괴하고 난 후 도래하는 정적이 인간에게 남겨놓는 "상처"를 "그때까지 객체화되고 지배의 대상으로 간주되어 온 자연이 그 주체성을 회복했다는 증거"로 삼는다(211). 즉 인간/자연의 관계가 더 이상 지배/피지배의 관계로 조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시노하라는 그 정적의 '공'(空)을 주목한다. 거기는 "인간세계가 자연세계와 접하고 만나는 곳"이며, 결코 자연에 의해 삼겨지거나 일체화되는 곳이 아니라고 말한다(215). 자연과 구별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자기-완결적인 세계로 포함되지도 않는 그 정적의 공(空)의 공간에서, 시노하라는 "사이"(the between)을 보았다(215).
침묵의 사물을 넘어서 물(物)의 진동으로
그렇게 시노하라의 『인류세의 철학』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세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물성을 성찰하며, 인간을 넘어선 실재의 힘을 증언한다. 그를 통해 시노하라는 이제 우리가 사물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할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역설한다. 재난으로 폐허가 된 세상은 압도하는 힘으로 우리에게 '정적'을 안겨준다. 그 정적은 인간의 세계가 여기서 끝난다는 경고이며, 또한 인간의 언어가 지배할 수 없는 영토를 표기하는 침묵이기도 하다. 그 정적의 '공'(空) 속에서 시노하라는 사물을 만난다.
하지만 사물은 '연장된 정신'이나 다시 말하자면, 사물은 수동적으로 혹은 죽어있는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존재의 차원에서 살아있는 유기체들과 더불어 삶을 함께 만들며 진동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제인 베넷은 『진동하는 물(物): 사물정치생태학』(Vibrant Matter: A Political Ecology of Things, 2010)에서 물(物)이 존재의 진동을 통해 살아있는 유기체들과 어떻게 존재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증언한다. 이미 우리의 몸은 그 물과의 얽힘으로 형성되어 있다. 우리 인체의 70%를 구성한다는 물은 인간 개체의 역사와 지구 및 우주의 역사에 접점을 이루면서, 50억년 지구의 역사를 담지한 채 우리 몸 속에 담겨있다. 자연생태계의 순환을 돌고 돌아, 우리 몸의 한 부분으로 되어있지만, 그 물은 또한 지구의 역사를 공유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몸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는 세포가 '광물화'(minealization)을 거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물(物)은 살아있는 것들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통해 생명과 죽음을 넘나들며 존재를 구성한다. 그 물(物)을 지배와 정복의 대상으로 보고, 자본의 창출을 위해 추출 자본주의에 종속시켜 착취해 온 인간 문명의 역사가 이제 수유하는 엄마의 모유 오염이라는 사태로 다가온다. 북미 지역에서 수유하는 엄마들의 모유를 채취해 성분검사를 한 결과, 도저히 식약청의 판매승인을 받을 수 없을만큼 많은 양의 오염물질들이 함유되어 있었는데, DDT, 로켓연료, 드라이크리닝 용액, 등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매우 유독한 유해물질들이 모유에 담겨 있었다. 이는 물(物)과 생명의 유기적 순환이 그저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것만으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시노하라의 사물은 물의 이 적극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物)은 또한 '연장된 정신'(the extended mind) 개념을 통해 인간의 연장으로서 작용한다. '사이보그로서 인간'이란 개념이 그것을 증언한다. 우리의 뇌는 감각 자체를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두개골 속에 폐쇄되어 있는 뇌가 외부환경과 상호작용을 하기 위해서는 몸의 감각들을 인터페이스로 활용해야 한다. 그래서 뇌는 감각의 한계 내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하지만 몸이라는 인터페이스가 만일 디지털 네트워크와 인공장치들과 더불어 '아상블라주'를 이루게 되면, 우리의 감각이 그만큼 '연장'(extension)된다. 아울러 신경가소성 연구는 뇌가 상황과 조건의 변화에 적응하여 새롭게 인식의 체계를 재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포스트휴먼적 현실의 도래는 우리의 마음이나 인식이 결코 비물질적 정신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물(物)과 더불어 함께 구성되는 것임을 증언한다. 그래서 앤디 클라크는 인간이 이미 그리고 언제나 '자연적으로 태어난 사이보그'(natural-born cyborgs)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물'(物)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사물이 침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물은 우리의 사유와 의식 속에 이미 그의 행위주체성을 발휘하고 있다. 존재의 물(物)적 조건이 이미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을 결정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남겨진 폐허 속에서 사물의 소리와 울림을 들었다는 시노하라의 사물 이해는 혹시 후쿠시카 원전에서 여전히 울려퍼지는 방사능 물질의 소리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 방사능 물질들은 가만히 그 자리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우리가 진실에 두려워서 사실과 정보를 은폐했을 뿐이다. 그 방사능 물질들은 이제 물(物)의 힘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지 않은가? 문명의 이기들을 너무 신뢰하지 말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제 과학기술의 발전에 물(物)의 정치적 목소리를 반영하고 대변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갖추지 않고서는 모든 것이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측면에서 기후변화와 생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정치적 민주화가 시급하다고 주장한 부르노 라트루의 이야기가 실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노하라의 '정적'과 공(空)은 폐허와 쓰레기더미 위에서 새로운 삶을 향한 통찰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폐허 속에서 피어날 수 있는 희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가 품어야 할 희망은 우리는 결국 이 모든 어려움과 절망을 극복할 것이라는 단순한 긍정의 정신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은 우리가 처한 이 절망적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즉 그 좌절과 체념과 절망을 함께 읽어내야 한다. 그럴 수 있을 때라야, 우리는 희망을 말할 수있다. 희망은 낙관주의가 아니라고 캐서린 켈러는 『지구정치신학』에서 힘주어 강조한다. 이 문명의 좌절과 실패는 바로 기독교 신학의 실패 아닌가? 이 실패 아래서 우리가 희망을 찾을 수 있는 단초는 절망과 좌절을 은폐하고 침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낫게 실패하는 것이다. 차리리 '실패하는 것이 낫다.' 거짓된 위로와 긍정으로 진실을 은폐하기 보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그리고 다시 시도하고. 그것이 바로 '실패의 정치신학'일지도 모른다. 시노하라의 침묵과 공의 사물은 우리가 대면해야 할 실패의 얼굴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