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에서 배우는 에코 생활방식江戸に学ぶエコ生活術>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에즈비 브라운(アズビー・ブラウン) 선생의 <만족을 알다>이다.(2017년 발행 달팽이출판) 눈부신 日本에서 출간된 <江戸に学ぶエコ生活術>의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어판의 제목도 적절했다고 느꼈을 정도로 문자 그대로 에도시대(江戸時代)를 살았던 분들의 지혜로운 생활 방식이 매 페이지마다 형형히 드러난다.
읽다 보면 小生으로선 자주 고개를 경쾌히 끄덕거리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일단 욕심이나 시기, 질투와는 거리가 먼 생활을 구현하려 애쓰기에 묘한 동질성이 교감해 버린 셈이다.
그럼, 어떤 생활 방식이기에?
물론 ‘지속 가능한’ 자연친화적(自然親和的) 생활이다.
예를 든다면 平成 27년(2015년)에 유엔이 제창(提唱)한 <지속 가능한 개발목표持続可能な開発目標エス‐ディー‐ジーズSDGs>의 실천 방안에 江戸時代의 自然親和的 생활방식이 훌륭히 접목된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유엔이 목소리 높이는 목표 중의 하나가 <안전한 물과 화장실을 전 세계에! 安全な水とトイレを世界中に!모든 사람들이 물과 위생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관리를 확보한다.すべての人々の水と衛生の利用可能性と持続可能な管理を確保する>인데, 日本은 에도시대에 이 기준을 벌써 충족시켰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에즈비 선생은 이 책을 통해 江戸時代가 얼마나 <지속가능한 사회>였는지, 수많은 사례와 자료를 통해 조목조목, 섬세히, 촘촘하도록 형상화해 내어 입증(立証)시키고 있다.
이러니 小生이 깊은 감동으로 뭉클해지며, 손바닥에 턱을 괸 채 江戸時代도 선연히 상상해 버리기 일쑤이다.
그야말로 에도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이라, 小生뿐만 아니라, 여행을 좋아한다면 누구라도 얼굴에선 웃음꽃이 활짝 피고도 남을 테다.
특히 서두에서 선생이 강조한 이 대목은 폐부(肺腑)를 찌르는 평가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日本의 자연환경과 기후는 혜택이기도 했지만, 어려움도 있었다. 국토는 대부분 산이었고, 경작할 만한 곳은 해안평야의 아주 일부와 산골짜기 정도였다..........
에도시대 초기, 경작 가능한 토지란 토지는 거의 모두 농지로 돌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로부터 2백년 뒤, 환경 악화의 조짐은 거의 사라지고 같은 땅 위에서 2.5배가 많아진 3천만 명의 사람들이 먹고살았다.
산림 파괴는 없었고 원래의 상태를 회복했으며 농지개량으로 생산성이 증가했다. 도시 지방 할 것 없이 사회 전체가 자원보호에 힘썼다.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사람들의 의식주가 개선되고 건강해졌다.
어떤 객관적인 지표를 보더라도 이러한 결과는 주목할 만한 성과이자 세계에서 찾기 힘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사례이다.
이러한 성과는 일정부분 과학기술의 발전과 막부의 정책에 힘입은 결과다. 품종개량과 수문학(水文学)의 진보가 성과에 일조했으며 우수한 설계기술과 시기적절한 정보의 수집과 전달 또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성공의 원동력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진, 개선하고자 하는 정신적 태도였다. 이러한 태도는 자연생태를 거스르지 않고 환경개발의 한계를 잘 이해하는 데에서 나왔다. 이는 겸손함을 존중하고 낭비를 금기로 여기며 서로 협력하는 해결책을 제안시켰다. 그리고 각자가 필요한 만큼만 얻고 더는 원하지 않는 소박한 삶에서 의미와 만족감을 찾게 했다.>
따라서 <江戸に学ぶエコ生活術>은 에즈비 선생의 강렬한 육성을 증명시키는 江戸時代의 명료한 보고서(報告書)라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겠다.
지속가능한 개발이 이어졌던 도시, 농민(農民)들의 풍족한 삶을 구가시킨 논밭과 숲의 관리 및 풍부한 물의 활용, 무사계급(武士階級)의 절제된 삶의 방식 등을 구경할 수 있도록 한 구성이 단연코 돋보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1장의 논밭과 숲의 단락에서 <삶의 방식으로서의 자급자족>은 당대의 농민들이 얼마나 자원의 재활용에 심혈(心血)을 기울였는지 새삼 실감시키게 만든다.
<자원의 재활용은 놀랍다........ 그나마 나오는 농업 폐기물도 퇴비나 부엽토로 이용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는 비료와 섞어 재활용한다. 금속은 계속 고쳐서 쓴다. 깨진 솥은 낫날로 만들어 쓰고, 깨진 날은 두들겨서 작은 도구와 갈고리로 쓴다.>
산림보호도 마찬가지였다.
막부(幕府)의 엄정한 정책과 여기에 부응한 농민들의 협조는 울창한 숲을 보존시키는 결과를 낳게도 한다. 가히 현명하기 이를 데 없다.
<막부는 나무를 베는 일은 엄격히 제한했다. 연료로 나뭇가지를 주로 사용하고, 쓰러진 통나무라도 가져가려면 특별허가를 받아야 했다. 막부의 정책에 따라 시행된 이 관행은 영향력이 컸다. 원칙적으로 연료는 여러 세기 동안 거의 예외 없이 재생이 가능한 자원인 나무로 충족해 왔다. 하지만 연료용 벌목을 금지하자, 농민들 때문에 일어나는 숲 파괴의 잠재적 주요 원인이 사라졌다.>
거기에 텃밭을 일구는 무사들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밭일은 가족 모두가 함께한다. 무사가 흙일을 한다고 해서 품위가 떨어질 염려는 전혀 없다. 하세가와의 두 아들도 늦은 오후의 햇살 아래서 맨발로 무밭의 잡초를 뽑으며 땀을 흘린다. 무사의 가족이 이렇게 텃밭을 일궈 충당하는 식재료는 일부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야 교호개혁(享保改革)을 이끌었던 막부의 8대 쇼군(将軍)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님에게 고구마의 보급을 장려시키자는 상서(上書)를 올려 고구마 선생이라고도 불렸던 아오키 곤요(青木昆陽) 선생은 난학자(蘭学者) 및 농학자(農学者)임에도 막신어가인(幕臣御家人)이었다. 직책은 쇼모쓰부교(書物奉行). 자그마치 부교이다.
높으신 奉行도 직접 고구마를 재배했을 정도인데 일반 무사들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이겠다.
이렇듯 江戸時代의 각계각층(各界各層)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디테일로 지속가능한 자연친화적 생활방식으로 고도(高度)의 <공동체 사회주의共同体社会主義>를 의연히 창출시킨 셈이다.
그 명제가 참임을 에즈비 선생의 보고서는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밝혀 나간다.
그러한즉, 책을 읽으며 속절없이 느끼고 만 小生의 동일시(同一視)도 전혀 과도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잖을까. <지속가능한 自然親和的 생활>이란 사실 거창할 필요도 없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마인드가 아니라 자연과 조화(調和)를 이룬다는 마음이 베이스를 깐 채, 일단 낭비하지 않고 탐욕(貪欲)을 상쇄시키며 주변의 사람들과도 형형히 어우러지는 생활 자체가 바로 지속가능한 自然親和的 모습이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小生을 일례로 들어 말한다면, 솔직히 小生은 부산이란 도시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보냈고 서울이란 도시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으로 성장,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기 때문에 자연과의 밀접한 교감을 맛볼 수 있는 시골에서의 생활을 잘 모른다.
이걸로 타박해도 별 수 없다. 지금 거주하는 소도시(小都市)도 아들의 고교 야구부 진학을 위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에 내려와 정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소비를 알뜰살뜰히 할 따름이다. 벌어들이는 것만큼의 지출을 하지 않는다면 적자를 내기 때문에 늘 첨예한 소비가 몸에 생생히 배여 있다. 낭비라는 것을 그다지 체감하지 못한다. 그럴 조건도 아니다.
참으로 江戸時代의 농민들처럼 자원을 힘껏 재활용할 수밖에 없다 텃밭을 일구는 무사들처럼 부업도 가급적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늘 미소 짓는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 녀석이 내려오면 함께 식사하며 웃고 떠든다. 직장에서도 웃음이 얼굴에서 내내 떠나지 않는다. 서울의 친구들과 모처럼의 모임이 있을 때도 언제나 파안대소이다. 지극히 혐오하는 反日從者들이나 자기중심적 잡배들이 아니라면 누구하고나 선연히 어우러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반한 사람이 여자친구인 건 아니지만, 사랑의 본질을 어렴풋하나마 깨닫고 있기에 족함도 안다. 그저 징징거리지 않고 쾌활한 하루를 영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런 태도 덕분인지, 에즈비 선생의 이 육성은 가슴으로 선연히 스며들어 가스등처럼 머리를 밝힌다.
<필요한 만큼만 얻고 더는 원하지 않는 소박한 삶에서 의미와 만족감을 찾는다.>
<만족을 알다満足を知る>.
그야말로 京都 료안지(龍安寺)의 석조 물그릇에 새겨진 오유족지(吾唯足知)의 선연한 경지이다. 江戸時代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小生 또한 그 점을 닮고 있으며, 애써 가 닿으려 노력할 따름이다. 그것을 <지속가능한 자연친화적 생활>이라 감히 자부한다.
의당 행복한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조용히 머문다.
물론 ‘지속가능한 욕심’도 없진 않다. 사랑하는 아들 녀석이 日本에서 깊이 정착하기를 바라며, 小生의 노후엔 日本 100대 城 순례, 그 다음에 시코쿠 순례(四国巡礼), 구마노고도 순례(熊野古道巡礼) 등 神仏의 자연과 깊이 교감하고 싶은 마음도 사뭇 간절하다.
그러한 마음 하나하나를 담아 이 책 <江戸に学ぶエコ生活術>에서 江戸時代 선현(先賢)의 위대한 모습을 천천히, 섬세히, 깊이 배운다. <만족을 알다>이다.
=====
그렇다면, 만족을 알 때, 떠오르는 영화가 가히 존재하지 않을 리 없겠다. 당연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둠을 밀어낸 촛불처럼 생각났던 작품이고, 마침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는지라, 마냥 반가운 마음에 불쑥불쑥 클릭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영화.
바로 <리틀 포레스트リトル・フォレスト>이다.
이가라시 다이스케(五十嵐大介) 선생의 원작 동명만화를 영화화한 것으로 대자연에 둘러싸인 작은 시골 마을 고모리(小森)에 지내는 한 여성 이치코(いち子)의 자연친화적 생활을 카메라에 선연히 담아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여름/가을夏/秋> <겨울/봄冬/春> <사계절四季節> 이렇게 시리즈로 3편이 나란히 있다.
‘힐링’이란 말을 단박에 실감할 수 있을 만큼, 제목 フォレスト를 장엄하도록 체감할 정도로 영상에 비치는 숲과 논밭 그리고 이치코를 비롯한 작중인물들은 지속가능한 自然親和的 에도시대와 운명의 붉은 실(運命の赤い糸)처럼 선연히 이어져 있는 듯하다.
그들 또한 자연과의 調和를 통해 만족을 아는 삶을 형형히 구현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도 <江戸に学ぶエコ生活術>를 일독(一読)하면서, <リトル・フォレスト>를 감상한다면 어느새 自然親和的이 된 자신을 발견하곤 재차 삼탄(三嘆)할 수밖에 없을 테다.
지속가능한 자연과 조화를 이룬 삶은 분명 감동이며, 행복인 것이다.
<필요한 만큼만 얻고 더는 원하지 않는 소박한 삶에서 의미와 만족감을 찾는다.>
덧,
참고로 <江戸に学ぶエコ生活術>의 에즈비 브라운 선생은 米国 출생으로 예일대학을 거쳐 도쿄대 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건축에 관한 저서도 여러 권 낸 학자이자 건축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