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0

법화경이란 무엇인가? 법화경의 내용과 사상에 대하여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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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이란 무엇인가? 법화경의 내용과 사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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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각원사불대임기영
2018. 12. 9.


『법화경』「제23장 약왕보살본사품」에 의하면,「이 경은 능히 일체의 중생을 구하며, 이 경은 능히 일체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괴로움을 여의게 하며, 이 경은 능히 일체의 중생을 크게 유익케 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를 충만케 한다. 시원한 샘물이 능히 일체의 목마른 자의 목을 축여 주는 것같이, 추운 사람이 불을 얻은 것같이, 헐벗은 사람이 옷을
얻은 것같이, 장사꾼이 물주를 얻은 것같이,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만난 것 같이, 나루에서 배를 얻은 것같이, 어두운 밤에 등불을 얻은 것같이, 병든 사람이 의사를 만난 것같이,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같이, 백성이 어진 임금을 만난 것같이, 무역상이 바다를 얻은 것같이, 횃불이 어두움을 없애는 것같이, 이 법화경도 또한 이와 같아서,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괴로움과 일체의 병통을 여의게 하고, 능히 일체 생사의 얽힘을 끊어 풀어 준다.」
석가세존께서 깨달음을 여신 이후 일생을 통해 설하신 가르침은 「8만 4천의 법문(法門)」이라 할 정도로 그 수가 많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법문들을 총합하여 편집한 경전은 약 3천부(三千部) 5천 40여권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도 『법화경』이 가장 뛰어난 경전임은 예로부터 정설(定說)로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일체 모든 경전의 중요한 부분, 즉 석존께서 가르치신 엣센스가 이 『법화경』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은 일체경(一切經)의 정수(精髓)라고 한다.
왜냐하면 『법화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참모습은 어떠한 것인가 하는 우주관과 인간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인생관과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라는 인간관에 대해 소상하게 가르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은 무시무종(無始無終)으로 살아가는 것, 즉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라는 것」, 「모든 인간에게는 불성(佛性)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노력하기 나름대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즉 평등한 공성(空性)이라는 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에 입각하여 가르쳐져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왜 이 세상에 왔는가, 하는 세상에 온 목적이 뚜렷이 밝혀져 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세상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된다. 이렇게 믿고 이해했을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기쁨에 온몸의 피가 약동하는 것을 금할 수 없다. 단순히 개인으로서의 삶의 기쁨만이 아니라 인류의 일원으로서 이 땅이 곧 적광정토(寂光淨土)임을 알게 하는 이상(理想)과 사명감이 마음속에 확립되어 참다운 삶의 보람이 뭉클뭉클 솟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법화경》이 모든 경 중의 왕이라고 하는 까닭은 우리를 분발하게 하는 이 「진리」와 그 진리가 가져다주는 원동력(原動力), 즉 에너지에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원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의「삿다르마-푼다리카-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이다.「삿다르마(Saddharma)」란,「삿(Sat)」과「다르마(dharma)」라는 말의 합성어로 「삿」은 「진실한, 바른(正), 훌륭한(善), 뛰어난(勝)」등 과 같은 뜻을 가졌으며, 「다르마」는 한역하면 「법(法)」이다.그런데 이 「법」이라는 말에는 대략 네 가지의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사물(事物)」을 가리키는데 경전에서 이 뜻으로 사용되는 경유가 많다.「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 할 때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물」이라는 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주(宇宙)에 존재하는 일체의 물질(物質)과 생명체(生命體) 및 우주에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現象)」을 말한다. 두 번째는 「그러한 사물을 존재케 하며 혹은 살려주고 있는 근본적인 대생명(大 生命)」 또는 「그러한 사물 즉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꿰뚫고[貫通] 있는 절대적(絶對的) 진리(眞理)」등도 「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니, 법계(法界)라던가 법성(法性) 등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째는 그 절대 진리이며, 근본적인 대생명이 우리가 눈으로 본다든가 귀로 들을 수 있는 현상으로 나타날 때에는 일정한 규칙에 지배된다고 하는 그 「법칙(法則)」이라는 뜻도 있으니 현재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법」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은 의미이다. 네 번째는 그 진리나 법칙을 바르게 설하는 「가르침」이라는 뜻도 있다. 「불법(佛法)」이라 할 때의 「법」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삿」과「다르마」를 합친 「삿다르마」라는 말은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이다. 중국의 축법호(竺法護)는「정법(正法)」이라 번역했고, 네덜란드의 케른(Kern)은「진실한 법」으로, 프랑스의 부르뉴프(Burmouf)는「훌륭한 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본 이와나미(岩波) 문고(文庫)의 범어 번역본에는「바른 가르침」으로, 쿠마라지바(鳩摩羅什)는「묘법(妙法)」이라 번역했다.「푼다리카(Pundarika)」는 흰 연꽃(白蓮華)이다. 인도 사람들은 흰 연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여기는데, 진흙 속에서 나며 더러운 흙탕물에서 꽃을 피우건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밝고 맑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인간은 속세에서 생활하면서도 속세에 물들지 않고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사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수트라(Sutra)」는「꿴 실」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꽃을 실에 꿰어 머리에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줄기로 정리한 것을「수트라」라고
했다. 중국의 ‘경(經)’이라는 말도 원래는 날줄이라는 뜻인데, 거기서 도덕이나 성인의 말씀을 엮은 책이라는 뜻이 나왔으니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 하겠다. 요컨대「삿다르마-푼다리카-수트라」, 즉 『법화경』이란, 「속세에 있으면서 현상의 변화에 현혹되지 않고 우주의 진리에 순응하여 바르게 살며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면서 세상을 이상향(理想鄕)으로 만들어 가는 길. 더욱이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본질을 평등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설한 더없이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법화경』은 중국의 서진(西晉) 경제(景帝)의 태강(太康) 7년(286)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과 요진(姚秦) 문환제(文桓帝)의 홍시(弘始) 8년(406)에 쿠마라지바(鳩摩羅什)가 번역한『묘법연화경』7권, 수(隋)나라 문제(文帝) 원년(元年, 601)에 즈나나구프타(?那?多)등이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7권 등의 완역본이 있고, 이 밖에 일부분만 번역한 초역(抄譯)이 있다. 그러면 이들 번역본과 산스크리트 원전과의 관계를 살펴보자.『첨품묘법연화경』의 서문에는『법화경』의 여러 한역에 관해 설명한 문헌학적인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즉 「옛날 돈황의 사문 축법호가 진무(晉武)때 정법화(正法華)를 번역했다.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은 다시 나습(羅什)에게 청하여 묘법연화를 번역케 했다……」 현재 우리들은 『법화경』이라고 하면, 무조건 구마라지바(鳩摩羅什)의『묘법연화경』만을『법화경』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전과 가장 가까운 것은 『정법화경』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회복하자는 명분을 내건 새로운 불교운동은 기성 교단의 견제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부파불교로 대표되는 기성 교단과 달리 대중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실천적인 불교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초기 대승불전이 지니고 있는 특징을 초기불전과 비교해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초기대승불전들은 6바라밀 내지 십바라밀을 종교사회적 실천윤리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행과 생활을 조화시킨 것으로서 초기불교가 지니지 못했던 특징 중의 하나이다. 둘째 힌두교에 일반화되어 있는 주문을 대승경전 안에 수용한 것이다. 힌두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대승경전에서 강조하는 주문은 다른 것이 아니라 경전 자체를 주문처럼 암송하는 것이며, 그러한 암송 자체에 무량한 공덕이 있다고 가르치는 점이다. 셋째로 중요한 요인은 명상에 관한 것인데 대승불전에서 강조하는 삼매는 초기불교에서 강조하는 삼매와 달리 영적인 체험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승불전은 삼매를 통해 제불보살과 감응한다는 점, 나아가 삼매를 통해 초논리의 열반적정의 세계를 체험한다는 점이다. 초기 대승불전은 상통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이 다양하다. 이들을 크게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대승경전들이다. <반야경>, <유마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경전들은 해체론에 입각해 철저한 무집착 공을 강조한다. 둘째는 유신론적 입장을 견지하는 대승경전들이다. <아미타경>, <법화경>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해체론적 입장이 아니라 부처님을 초인격화시켜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재할 수 있는 절대자로 묘사한다. 그리고 이상의 두 가지 입장을 조화시키는 입장에서 등장하는 것이 중기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여래장계 경전이나 유가유식계 경전들이라 말할 수 있다.
 
35. 부처님 초월성ㆍ영원성 드러내
공ㆍ무상ㆍ무원의 3삼매 강조
 
<법화경>은 이상과 같은 경전들 속에서 유신론적 입장에 서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과 중생들의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에게 부처는 어떠한 존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의 제기인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된 것이 출세본회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방편설법이다. 중생들을 열반으로 인도하기 위해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설법을 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불타의 설법에는 논리적 정합성은 없다. 다만 궁극의 목표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논리적 정합성 보다 도덕적 종교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본다. 성립사적으로 <법화경>은 반야사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분석한다. 왜냐하면 <법화경> 전편을 통해 부처님의 초월성과 영원성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의 삼삼매 정신이라 가르친다. 혹은 일체법공의 정신을 버려선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존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되 우리들이 지니는 어떠한 편견에 의지해 판단해선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법화경>은 반야계 경전과 달리 대승과 소승을 대립적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는다. <반야경>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했던 불교운동가들은 정통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성 교단과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기성 교단을 소승이라 폄하하며 비판했다. 그들의 가르침은 중생들을 열반의 세계로 인도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면 구원은 고사하고 지옥에 가지 않으면 다행이라 주장했다. 심지어는 기성 교단에 대한 독설을 서슴치 않았다. 대승불교운동의 확대는 기존 부파교단에도 변화를 요구했다. 대중적 지지기반의 붕괴는 부파교단의 사원경제에 위협을 가했으며,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승원 외부에 건립되었던 불탑을 사원 내부로 끌어들였다. 동시에 시대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 다양한 변화를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이후 전개되는 대승불교운동과 직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성교단과 신흥 불교운동과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각각의 주장을 떠나 모두 부처님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법의 계승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상호간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것을 발전의 발판으로 삼으면 충분했으련만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양쪽을 비판하고 융합하려는 운동가 집단이 등장하게 되었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운동가들이 바로 그들이다.
 
36. 대승과 소승, 대립적으로 보지 않아
성문ㆍ연각ㆍ보살의 각 개성 인정
 
<법화경>에서 주장하는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은 바로 이상과 같은 불교교단사의 전개과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성문, 연각, 보살은 궁극적으로 일불승에 귀착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척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성문은 초기불교이래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이행하고 있는 출가자 집단을 지칭한다면 연각은 대중들을 외면하고 철학적 사색에 빠져 있는 이기적인 부파교단의 출가자들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반면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이상적인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으며, 반야사상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며 기존의 부파교단과 정면으로 대립했던 불교운동가들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법화경>은 성문, 연각, 보살은 각각의 개성이라 인식했다. 즉 자신의 성향과 근기에 따라 성문, 연각, 보살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성문은 4성제에 대한 가르침을 좋아하는 불교도, 연각은 12연기설을 좋아하는 불교도, 보살은 6바라밀의 가르침을 좋아하는 불교도라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들은 모두 일불승으로 들어오는 길이기 때문에 어느 길을 선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논란이나 대립의 조건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법화경>은 회삼귀일을 주장하여 기성교단과 신흥불교운동의 대립과 갈등을 종식시키고자 했다. 기실 <법화경>의 가르침대로 어떠한 교리를 좋아하던 그것을 통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나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바로 포용과 융합의 정신이 부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가르침이라 본 것이 <법화경>의 사상적 특징인 것이다.
 
‘이 때 사부대중은 일월등명불께서/ 대신통력 나투는 것을 보고 모두 기뻐해/ 무슨 일인가 서로 묻더니/ 부처님께서 삼매에서 깨어나시어/ 묘광보살을 칭찬하되 너는 세상의 눈이 되어/ 모두가 귀의해 믿게 되는 법장을 수지하리니/ 내가 설한 법을 너라야 능히 깨우쳐 알리라./ 묘광보살에게 이렇게 칭찬하여 기쁘게 해 주시고/ 법화경 설하시되 육십소겁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시니, 설하신 묘법/ 묘광보살이 모두 받아지니리라.'
 
이상은 《법화경》 서품에 나오는 게송을 소개한 것이다. 《법화경》은 내용이 매우 신앙적이고, 문장이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반야경》이나 《유마경》처럼 고원한 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교리도 별반 등장하지 않는다. 종교문헌이 지니는 관념적인 내용도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보살도의 실천과 융합의 정신을 찬양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37. 《법화경》세계 순례 완주하겠다는 정신자세 필요
 
여하튼 지상(紙上)이지만 《법화경》의 세계를 순례할 생각이다. 그것은 물론 독자들과 함께 하는 순례의 여행이다. 좋은 안내자가 되어 독자들의 신심을 북돋우어 주는 것은 필자의 몫이겠지만 긴 여행에서 낙오당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될 많은 독자제현의 몫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법화경》을 순례하다 보면 우리들의 상식이나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는 일이다.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인형'이란 연극을 보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처음은 이해할 수 없는 정황들도 극이 끝나면 이해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순례객 여러분들이 필요한 것은 경전에 나오는 말씀이니까 일단 믿고 끝까지 완주하겠다는 정신 자세이다. 현재 나의 상식이나 지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믿고 순례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의 의문이 점차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순례에 동참하는 여행자들은 모두 순례를 마칠 때까지 서로 밀고 당겨주며 격려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라 본다. 여행에는 목적지와 여행의 일정 등 전반에 대해 오리엔테이션이 있듯이 경전에 대한 순례도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순례의 지루함을 덜기 위해 간소화하기로 한다. 다만 목적지에 대한 대강의 설명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함께 순례할 《법화경》이란 경전의 이름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법화경》의 원래 이름은 삳 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이다. 삳(sad)이란 바르다는 의미이며, 다르마는 법(法)이란 의미이다. 법이란 단어는 존재 일반이나 규범, 정의 등의 개념도 함유하고 있는 매우 다의적인 용어인데 여기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푼다리카는 하얀 연꽃을 의미한다. 《법화경》에는 푼다리카 이외에 빨간 색의 연꽃을 의미하는 파드마도 활용되고 있는데 《법화경》의 제목에 파드마 대신 푼다리카를 사용한 것은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 부처님과 불성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라 해석한다. 수트라는 원래 실이나 선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성인들의 말씀을 패엽에 기록하기 시작한 뒤 패엽경을 묶기 위해 실이나 선을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에 의미가 바뀌어 중생을 보호하고 거두어들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초기불교시대에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트라를 한역할 때 사용한 경(經)도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경전의 이름이 지니는 전체적인 의미를 우리말로 옮기면 ‘올바른 가르침의 하얀 연꽃'이라 요약할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왜 하필이면 연꽃을 경전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일까' 하는 점이다. 그것은 ‘연꽃이 진흙 속에 살면서도 물에 집착하지 않듯이 보살도 세간에 살되 세간법에 집착하지 않고 보살도를 실천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라 본다. 즉 사바세계의 어려움을 핑계로 불교적인 삶의 가치를 훼손하지 말고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이 참된 부처님의 제자들이란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38. 부처님 가르침 이분법적 개념 초월
묘법…이분법적 개념 넘어 있는 가르침
 
《법화경》의 내용을 연꽃에 비유한 이유에 대해 인도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법화경》에 대한 주석서를 남긴 세친은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연꽃이 진흙 속에서 싹을 틔었지만 청정한 꽃을 피우듯이 최고의 가르침인 《법화경》은 소승에서 나왔지만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꽃을 피운다. 그처럼 성문이 《법화경》을 지니면 그들이 처한 진흙을 벗어나 성불할 수 있다. 연꽃이 꽃과 열매를 모두 지니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법화경》은 법신을 열어 보여 믿음을 일으키게 한다.' 결국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법신을 깨닫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 융합되어 그 길을 함께 가게 만든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따라서 《법화경》은 단순한 종교적 체험에 그치지 않고, 그 종교적 체험을 사회적 정화와 불성의 현현으로 확산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중국 천태종의 개산조사인 천태지의는 도생스님의 방편과 진실이라는 논리를 활용하여 연꽃을 이문육유로 설명한다. 적문과 본문을 연꽃으로 설명하고, 연꽃에 대한 여섯 가지 비유를 해석한다. 적문은 《법화경》앞의 14품을 지칭하는 말이며, 본문은 《법화경》 뒤편의 14품을 지칭한다. 적문은 법신불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그 모습을 방편으로 드러낸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면 본문은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법신불의 영원성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접근방식은 방대한 그의 사상을 구축하는 데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시 경전의 제목에 대한 설명을 보충하기로 하자. 이상에서 소개했듯이 《법화경》의 범어 이름을 보면 축법호가 286년에 번역한 《정법화경》이 원의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법연화경》을 줄여서 《법화경》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법과 묘법의 차이인데 문제는 정(正)이란 단어는 사(邪:간사하다, 어긋나다, 치우치다) 혹은 곡(曲:굽다. 휘다)이란 용어의 반대개념이 강하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사, 시비, 흑백 등 이분법적인 개념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정(正)이란 단어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등장한 단어가 묘(妙:묘하다, 젊다)란 글자이다. 묘법이란 이분법적 개념의 틀을 넘어 있는 가르침이란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은 28품이다. 그중에서 전반 14품과 후반 14품을 나누어 적문과 본문으로 구분하는 것이 천태스님 이래의 전통적인 이해 방식이다. 그리고 전반 14품의 핵심으로 방편품을, 후반 14품의 핵심으로 여래수량품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천태스님 이래의 전통적 구분에서도 방편품이 《법화경》의 핵심에 속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현대적인 불교학 연구 방법이 등장한 이후 《법화경》을 연구하는 방식 역시 달라졌다. 문헌학 내지 사회학적인 방법의 등장은 《법화경》이 한 날 한 시에 성립되었다는 가정 아래 연구되었던 과거의 연구 방법과 다른 연구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이 공통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법화경》이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법화경》의 설립과정에 관한 학자들의 연구 보고는 많았다. 각각의 주장에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섣불리 어느 학설이 가장 정확하다고 결론지울 수 없다. 다만 3단계 정도의 과정을 거쳐 오늘 날 우리들이 읽고 있는 《법화경》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그 중에서 방편품은 맨 처음 편집된 《법화경》에 속한다. 흔히 원시 《법화경》이라 불리는 부분이다. 이들의 내용은 또한 산문과 운문(시로 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운문이 성립한 뒤에 산문이 등장한 것으로 추정한다.
간략하게 《법화경》의 성립에 관해 소개했지만 그것은 방편품이 최초기에 속하는 원시 《법화경》에 해당하며, 그 중에서도 핵심 품이란 점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원시 《법화경》은 방편품을 중심으로 비유품과 신해품을 가장 일찍 성립한 것으로 보며, 거기에 약초유품, 수기품, 화성유품을 더하기도 한다. 필자 역시 이러한 견해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보며, 약간의 시차를 두고 약초유품과 수기품, 화성유품이 부가되어 원시 《법화경》을 형성한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방편품이 원시 《법화경》의 사상과 이론을 소개하는 품이라면 비유품과 신해품은 그 내용을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화적인 형식을 빌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초유품 이하 화성유품 역시 방편품의 사상을 해설하는 품이다. 원시 《법화경》을 방편품에서 약초유품까지 보고, 이어 시차를 두고 서품을 비롯한 촉누품제22까지 차례로 《법화경》에 편입되었다. 이들을 제2기 《법화경》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품들 역시 방편품의 사상을 부연하며 실천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결국 방편품의 사상을 다양한 시각에서 설명하면서 불교적 실천의 완성은 무량한 공덕이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법화경》의 사상적 핵심은 방편품에 들어 있다. 물론 전통적 이해의 방식에선 여래수량품을 《법화경》의 핵심으로 간주해 왔지만 그것은 불타의 영원성과 편재성이 중국인들의 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방편품을 이해하면 《법화경》 전편을 이해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품이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방편품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후에 등장하는 품들의 내용과 구성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방편품이 그렇게 중요한가? 《법화경》의 핵심 사상과 교리가 이 품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방편은 우리들을 ‘깨달음의 세계' 혹은 《법화경》에서 말하는 일불승의 세계(이 경우 불지견의 세계와 개념상 동일)로 이끌어 주는 수레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들이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면 좋은 것은 방편이란 단어의 개념과 방편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이다. 《유마경》의 문질품에도 방편이란 단어가 등장하며, 이 경전에서는 부처님이나 깨달은 자의 입장에서 방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비록 몸에 병을 지니고 있더라도 항상 생사에 머물면서 일체의 중생을 이롭게 하되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한다. 설사 몸에 질병이 있어도 영원히 열반에 들지 않는 것을 방편이라 한다.” 《유마경》에선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방편이며, 그들의 병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방편이라 풀이한다. 그런데 《법화경》은 《유마경》처럼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다만 “내가 성불한 이래 여러 가지 인연과 비유로 널리 가르침을 펼쳤으며,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들을 인도하여 모든 집착을 여의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여래가 방편과 지견바라밀을 이미 다 갖추었기 때문이니라.”라 말할 뿐이다. 가르침과 방편으로 중생들이 집착을 벗어나게 만들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래께서 방편바라밀과 지견바라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먼저 방편바라밀과 지견바라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방편이란 수단이며, 그 수단은 중생들이 집착을 끊고 열반에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불교사상에서 이러한 역할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8만4천 법문으로 알려져 있는 가르침을 한마디로 법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무수한 방편이다. 따라서 그것은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것이며,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넘어가기 위해 타는 수레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을 피안으로 건네주는 것은 좋지만 피안에 도달하고 나면 그 효용성이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지견바라밀은 피안에 도달했을 때 얻어지는 정신적 경지를 말한다. 흔히 부처님의 지혜란 표현을 쓰며, 달리 일불승 혹은 일승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란 차원에서 자연지(自然智), 진실지(眞實智)라 말하기도 한다. 부파불교 이래 방편지와 자연지로 구분되어 온 것이다.
 
예컨대 우리들이 시골에서 서울에 올 경우 다양한 길이 있을 수 있다. 자가용, 버스, 자전거, 도보. 비행기 배 등등. 그렇지만 이러한 모든 경우는 서울에 도착하면 어떻게 왔다는 과정의 문제는 될지언정 서울에 이미 도착했다는 점에선 동일하다. 마찬가지로 어떠한 방편을 통해 부처님의 지견을 터득하더라도 터득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방편은 이미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다만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지 못한 자들 혹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가려는 사람들에겐 여전히 방편이 중요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천태지의 스님은 방편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방(方)은 본받는 것이며, 편(便)은 사용하는 것이다. 혹은 방편이란 문이다. 문이란 통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보는데 방편이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용문과 같이 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천태스님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길장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일승이 진실이란 점을 나타내고자 하면 먼저 삼승이 방편이란 점을 밝혀야 한다. 만일 먼저 삼승이 방편이란 점을 밝히지 않으면 일승이 진실이란 점을 나타낼 수 없다. 때문에 경전에서 ‘방편문을 써서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한 것이다”
천태스님이나 길장스님이나 방편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방편은 바로 부처님의 지혜를 깨닫게 만들어 주는 통로라는 점을 강조한다. 틀리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방편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 즉 법(法)인 것이다. 한문으로 법은 가르침이란 의미도 있지만 본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천태스님은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제불보살의 행적을 본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깨달음의 길이 있고, 그것을 본받으면 우리도 부처님과 같은 성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방편은 언제나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보가 방편이며, 《법화경》에서 방편품이 앞에 놓여 있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방편품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의 하나가 제법실상, 혹은 실상이란 말이다. 이 단어를 풀이하면 존재들의 참다운 모습 정도다. 그렇지만 단순히 존재들의 참다운 모습 혹은 진실한 모습이란 풀이로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법화경》이나 천태사상의 핵심적인 교리라 말할 수 있는 제법실상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면 《법화경》의 사상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제법실상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중국에서 《법화경》을 번역한 쿠마라지와이다. 구마라집이란 한문식 이름으로 우리들에게 더 친숙한 그는 《법화경》이나 《대지도론》, 《중론》 등의 경전과 논소를 번역하면서 제법실상이나 실상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책들의 영향을 받은 승조나 도생, 천태지의 등에 의해 중국불교사상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용어로 자리 잡게 된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과 논소를 범어본과 대조하여 조사한 결과 대략 다섯 가지 정도의 단어를 제법실상 내지 실상으로 번역했다. 이러한 조사를 한 사람은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불교학자이자 인도학 전문가였던 나카무라 하지메란 분이었다. 그 분은 범어와 한문 등 어학에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조사 결과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별다른 비판 없이 수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그것을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한다.
하지메 선생의 조사에 의하면 제법실상의 원어는 다섯 가지인데 그것은 다르마따, 사르와다르마따타따, 부따, 다르마스와바와 혹은 쁘라크리띠, 따뜨와샤 라끄샤나 등이다. 필자가 범어 로마나이즈 자판이 없어 음역하여 소개했는데 이들은 용어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들은 법성(法性), 실제(實際), 법의 자성, 법상(法相), 진성(眞性)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대지도론》에 의하면 “법성이란 제법실상이다”고 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법성과 제법실상이 개념상 동일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대지도론》에 의하면 “실제란 앞에서 말했듯이 법성을 이름하여 실(實)이라 하며, 입처(入處: 들어가는 곳, 의지처가 되는 것)를 이름하여 제(際)라 한다”고 풀이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법성과 실제는 동의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중론》에서는 법의 자성이 법성과 동의어로 다루어지고 있다.
진성이란 따뜨와샤 라끄샤나를 번역한 말인데 ‘존재가 존재로서 성립해 있는 실다운 모습'이란 의미에서 법상과 같으며, 연기의 이법(理法), 즉 현상이 연기의 법칙 위에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기의 법칙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제법실상의 범어 원어는 다양하지만 그들은 모두 동일한 개념 즉 법성을 의미하며, 그 법성은 ‘일체의 존재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제한하는 관계 속에서 성립해 있는 실다운 모습을 의미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기(緣起)와 동일한 개념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제법실상이란 다름 아닌 연기의 법칙, 혹은 연기의 이법을 지칭한다. 이렇게 본다면 《법화경》의 사상 역시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핵심사상인 연기론의 입장을 계승하여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용어상의 차이 때문에 우리들에게 생소하게 보일 뿐이다.《법화경》 자체 안에서 구마라집은 제법실상을 연기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동시에 다양한 표현도 서슴치 않고 있다. 법자성인(法自性印), 법의 상속성, 법의 불변성, 무분별법 등의 표현이 그것이다. 법자성인이란 다르마-스와바와-무드라(mudra)를 지칭하는데 구마라집은 주로 실상인(實相印)으로 번역하고 있다. ‘모든 존재들이 상의 상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을 기인(旗印)으로 삼았던 가르침'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좀 더 쉽게 풀이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연기의 법칙 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가르치는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무분별법을 제법실상과 동일한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은 ‘망상을 제거한 법성'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망상(妄想)은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을 그러한 것으로 착각하고 오해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와 반대로 무분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연기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란 점에서 실상 내지 제법실상과 그 의미가 직결되는 것이다. 무분별법은 망상을 떠나 대상의식을 던져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것이 제법실상이란 점에서 분별의식에 젖어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경전 자체의 내용은 이상과 같지만 천태지의스님은 제법실상을 삼제원융론에 입각해 해석하고 있다. 즉 그는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현상을 임시로 존재하는 가제(假諦)라 말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것들의 본질은 인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만다는 점에서 영원한 실체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러한 점에서 공제(空諦)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엄연히 존재하며, 그러한 것들은 연기의 법칙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현실을 무시하고 현상의 이면에 있는 본질에 집착하는 것은 현실도피 내지 염세주의에 흐를 염려도 있다.
그런 점에서 현실에 대한 지나친 집착도 혹은 부정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가제와 공제의 두 입장을 동시에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중제(中諦) 내지 중도제일의제라 말한다.
천태지의스님의 입장을 공가중의 입장에서 설명했지만 그것은 설명을 하기 위한 편의적인 방법이며, 실질적으로 모든 존재나 현상은 상호 융합과 대립 속에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삼제는 원융무애하다고 말한다. 이것을 천태교학에선 삼제원융론이라 하는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 의해 생겼다 사라지는 일체의 것들은 세 가지 입장을 동시에 지니면서 전개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동시에 이 사상 속에는 중국인 전통의 포용과 대립의 음양오행사상의 영향도 나타나 있다.
그렇지만 천태는 보다 철저하게 불교적인 입장에서 제법실상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이 중국인 특유의 현실을 중시하는 의식과 결합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법화문구〉에선 “제법실상과 법성불법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색이건 향이건 실상 아님이 없다”고 해석한다. 여기서 제법실상은 이미 설명했기 때문에 다시 거론하지 않지만 법성불법이란 말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법성은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란 의미이다. 또한 ‘색이건 향이건' 하는 구절은 눈 귀 코 혀 몸과 의식의 대상이 되는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 인식의 대상인 존재일반 등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이다. 나아가 일체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말을 ‘실상 아님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방편품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려고 하자 5천명의 증상만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하는 것이다. 증상만이란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교만하기 짝이 없는 요즘 말로 하자면 아만으로 가득 찬 꼴통을 지칭한다. 이러한 무리들이 나타나 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는 것은 들을 필요도 없다고 퇴장하는 것이다.
방편품에는 사리불이 부처님께 《법화경》을 설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 번 간절하게 법을 청하지만 부처님은 거절한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선 사리불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이 《법화경》을 설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나 천신들이 모두 놀라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39. 《법화경》을 설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나 천신들이 모두 놀라고 의심하므로 안 하는 것이다.
 
천태스님은 증상만들이 의심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로 고찰하고 있는데 이들은 첫째 도에 반대하며 의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손해 본다고 생각해서 놀라는 것, 둘째 보살행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놀라는 것, 셋째 번뇌가 너무 많기 때문에 생각이 뒤바뀌어 놀라는 것, 넷째 대승적인 회향에 대해 후회하는 마음으로 놀라는 것, 다섯째 자신들을 속였다고 생각해서 놀라는 것 등이다.
이유야 여하튼 증상만이나 일반 대중들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필자 역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며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아니면 색깔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놀라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 역시 그런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은 초기불교 이래 성인이 고려하는 첫 번째 요인이다. 즉 비정상적으로 사는 중생들을 정상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같아서 외롭고 고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초기불교에선 범천이 등장해 부처님에게 중생을 위해 설법해야 한다고 간청한다. 단 한명이라도 당신의 말씀을 듣고 정신 차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전도라는 숭고한 여행을 시작하겠노라 다짐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었다.
 
40. 사리불의 간곡한 삼청에 설법해 설법 전 사부대중 5천명 자리 떠
 
방편품에 나오는 구상 역시 초기불교의 ‘범천이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는 장면'과 유사하다. 다만 주인공이 사리불과 일월등명 부처님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다. 사리불의 간곡한 청법을 세 번에 걸쳐 받게 된 부처님은 “네 이제 자세히 잘 듣고 생각하라. 내 너를 위해 분별해 설하리라”고 말하며 설법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때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 5천명의 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물러갔다. 이들은 죄의 뿌리가 깊고 무거우며, 증상만의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지 않고 물러가는 것이므로 구태여 말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상의 장면을 오천퇴거(五千退去)라 표현하는데 이들은 정말 단순하게 교만하고 죄업의 뿌리가 깊어서 《법화경》의 가르침을 듣고자 하지 않은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천태스님은 《법화현의》속에서 이들을 독특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들은 교만하고 죄업이 두터워 《법화경》의 가르침을 듣고 구원받지 못하지만 뒤에 《열반경》의 가르침을 듣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천의 증상만들은 《법화경》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는 낙오자들이지만 이들도 구제해야 하기 때문에 《열반경》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천태의 교판론에 따르면 《열반경》은 이삭을 줍는 가르침이란 의미의 군습교(裙拾敎)이며, 《법화경》의 가르침이 최고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천태스님의 해석은 매우 종교적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다. 문헌학의 발전으로 《아함경》 이래 많은 설법을 통해 불교적 구원이 있어 왔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구태여 《법화경》의 가르침이 최고라고 주장하며, 다른 가르침을 폄하하고 있는 점은 논리적인 정합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41. 교단의 발전 과정 먼저 이해해야
교단 내외의 사정 대승경전에 반영
 
이 점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수 있지만 현대불교학의 방법론에 의하자면 교단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대승불교란 새로운 불교운동의 전개와 그에 따른 기존 교단의 반발과 저항은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는 점이다. 새로운 불교운동을 박해하면서 그들의 기득권과 종교적 권위를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러한 교단 내외의 사정이 대승경전의 편집과정에 반영되었으며, 오천증상만의 퇴장이 극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야경》을 비롯한 초기대승경전들 속에는 대승불교운동자들과 기존의 부파교단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존재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초기대승불교운동가들이 새로운 불교운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존 부파교단의 시대적 한계 내지 교단의 무기력함을 역설했으며, 그것은 바로 기존 부파교단을 소승이라 폄훼하고 있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법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부파불교의 전개를 추동한 근본 원인이었다는 점에서 접근한다면 기존의 부파교단과 대승불교운동 사이에 얼마나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가능했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법화경》 역시 시대적 한계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승 경전의 내용이 《아함경》이나 《자타카》, 《수타니파타》 등 초기 불교경전의 내용을 필요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운동의 이면에는 깨뜨림과 새로운 탄생을 위한 아픔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천명의 증상만은 《법화경》의 내용에 입각해 설명하자면 순리에 역행하는 무리로 판단할 수 있지만 불교의 역사가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되었다는 거시적 차원에서 해석을 하자면 대승불교란 새로운 불교운동에 동참하지 않고 전래의 부파불교, 기존의 교단에 지지하는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법화경》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 속에서 대립과 갈등, 그리고 파탈(破奪)과 창조라는 과정의 반복이다. 불교 역시 그러한 흐름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래서 지금도 새로운 불교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긍정적인 차원에서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다.
 
42. 교단 내외의 사정이 대승경전의 편집과정에 반영되었으며, 오천증상만의 퇴장이 극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아니 새로운 시대를 끌어갈 이론을 재정립하는 것이다. 오천명의 증상만이 퇴장한 것은 그런 차원에서 구시대의 청산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암시한다. 부파불교의 한계를 타파하고 새로운 불교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여기선 《법화경》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선 “이제 이 무리에는 곁가지는 없고 참된 사람만 남았다”고 말하게 된다. 이들은 변화를 인정하는 무리라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오천명의 퇴장은 그래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것이자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선언이다.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부처님을 믿어야할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이것을 방편품에선 일대사 인연 내지 출세의 본회라 한다. 일대사 인연이란 가장 중요한 인연이라는 의미이며, 출세본회란 이 세상에 나타난 궁극적인 목적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이유가 무엇인가? 일체의 부처님 세존은 오직 일대사 인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시느니라. 사리불아 무엇을 일체의 부처님 세존께서 일대사 인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신 것일 뿐이라 말하는 것인가? 일체의 부처님 세존은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 청정함을 얻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며,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보이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을 깨닫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며, 중생들이 부처님의 지견의 길에 들어가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니라. 사리불아 이것이 일체의 부처님께서 일대사 인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신 것이니라.”
 
이상의 내용을 간추리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신 이유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지견을 열어서[開] 보여주고[示] 깨닫게 하고[悟] 들어가게 하는 것[入]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 개시오입이라 말하는데 여기서 부처님의 지견이란 부처님께서 지니고 있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며, 《법화경》에선 이것을 일승이나 일해탈 등의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열반경》이나 여타 대승경전에서도 이것을 불성이라 표현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지견이 무엇인가? 일승이나 불성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가능한 범위 내에서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범위를 넘어가면 불교적 수행에 의해서만 그 세계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한 바가 있지만 부처님의 지견의 세계는 언어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 오직 불교적 수행에 의해 체험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곳은 논리를 초월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믿음과 종교적 수행이 필요할 뿐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타난 목적이 중생을 위한 것이란 정의는 우리들에게 희망적인 가르침이 분명하다. 《법화경》의 존재의의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것 역시 중생을 위한 것이다. 위한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깨달음이든 아니면 사회적 봉사든 결국 인간을 성숙시키는 것이며, 인간들을 평화롭게 만드는 것이며, 인간들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불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일체 모든 생명체의 사랑과 존중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법화경》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도 마찬가지이다. 초기불전에 나타난 전도선언의 정신을 비롯해 수많은 대승경전에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몇 가지 실례를 들자면 우선 《대품반야경》 문상품에선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반야바라밀은 큰 일[大事] 때문에 생긴다. 수보리야, 일체 부처님의 큰일이란 이른바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일이며,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정토교의 기본 경전인 《무량수경》에선 “여래는 번뇌가 없는 대자대비로 삼계를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세상에 나타나신다. 오직 가르침을 밝혀 군맹(群萌:중생을 다양한 새싹에 비유한 단어)을 구제하고자 하며, 은혜로 진실한 이로움을 주고자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표현상의 차이는 있지만 방편품에서 밝히고 있는 출세본회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천태종의 창시자인 천태스님은 《법화경》과 다른 경전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즉 다른 경전들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난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불과하지만 《법화경》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난 목적을 달성한 경전이라 주장하는 점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려고 한다. 즉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바로 《화엄경》을 설했지만 너무 고상한 가르침이라 중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므로 《아함경》을 설해 기초를 다지게 된다. 이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기초가 확립되자 《유마경》이나 《반야경》과 같은 한 차원 더 높은 공사상을 설하게 된다. 그래서 중생들이 고상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법화경》을 설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천태스님의 이상과 같은 차별화를 보통 오시교판이라 말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다양한 경전들을 필요에 따라 정리한 것이다. 현대의 문헌학적 방법론에 의거한다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심오한 사상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 종교성과 합리성을 담보하기 위해 고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오시교판은 방편품의 게송인 “둔한 무리들은 소승법을 원해 생사에 집착하고/ 온갖 고통을 받고 있기에 열반을 설했나니/ 이 방편 만들어서 부처님의 지혜에 들게 하되/ …이 9부법은 중생 따라 설하여서 대승에 들게 하는 근본이기에 설하는 것이니라.”는 구절에서 힌트를 얻은 것으로 본다.
여하튼 지금부터는 일대사인연과 개시오입에 대한 천태스님의 해석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일대사(一大事)에 대해 천태스님은 두 가지 해석을 하고 있다.
첫째 일을 진리나 법신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둘째 대를 지혜나 반야로 해석하는 것이다. 셋째 사를 수행이나 해탈로 해석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와 지혜와 수행을 일대사로 해석하는 경우는 실천의 일치를 강조한 것이며, 법신과 반야와 해탈로 해석하는 경우는 세 가지 법이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참고로 열반경에서 대사(大事)를 불성으로 해석하고 있다.
개시오입에 대해 천태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개(開)란 처음으로 무명을 깨뜨리고 여래장을 열어 실상의 도리를 보는 것이며, 시(示)란 미혹의 장애가 제거되고 지견의 본체가 나타난 것이자 본체가 만가지 덕을 갖추어 법계의 다양한 덕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悟)란 장애가 제거되고 본체가 드러남에 따라 사리(事理)가 융통해져 대립이 없는 것이며, 입(入)이란 사리가 융통무애함에 따라 살바야(일체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나라 때의 규기스님은 《법화현찬》에서 “부처님의 지견이란 여래가 여실(如實)함을 깨달아 그 의미를 아는 것이며,…정체지와 후득지가 바로 진여이니 합하여 지견이라 말한다. 성(性)으로 상(相)에 나아가기 때문에 지견이라 이름한다.”고 유식사상에 입각해 정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개시오입을 해석하고 있다. 개란 ‘위 없다'[無上]이란 뜻이니 일체를 제거하여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체지란 부처이다. 시란 같다는 의미이니 성문, 벽지불, 부처의 법신이 평등한 것이다. 법신이 평등하다는 것은 불성과 법신은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오란 ‘모른다'[不知]는 뜻이니 일체의 성문과 벽지불은 그 진실한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입이란 불퇴전의 경지를 증득케 해서 한량없는 지혜의 업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상 두 분의 해석을 살펴보았지만 너무 현학적이란 점에서 일반 신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입(入)에 대한 해석은 관념적이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이것을 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6바라밀을 실천궁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것이 《법화경》의 사상과 통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43.《법화경》은 논리적 판단 초월 부처님 가르침 믿을 것 강조 진리는 언제나 만인 향해있어 상대화·비교 않아야 체득
 
방편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하나는 논리를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궁극적인 가르침은 언어를 초월해 있기 때문에 범부들의 의식을 가지고는 도달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즉 “사리불에게 말씀하시되, 제불의 지혜는 심심무량(甚深無量)하며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라[難解難入]. 일체의 성문과 벽지불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所不能知]”라 말하거나 혹은 “이 법은 사량이나 분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부처님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불세존은 오직 일대사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셨기 때문이니라.”(是法非思量分別之所能解. 唯有諸佛乃能知之. 所以者何.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故出現於世)라 설법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에 의거한다면 성자의 가르침, 여기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법화경》의 내용은 논리적 판단이나 설명에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초월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게송에서는 다시 “이 법은 나타내보일 수 없으며, 언어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是法不可示 言辭相寂滅)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리불아, 너희들은 마땅히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을 믿어야 하느니라. 말씀에 허망함이 없느니라.”(舍利弗, 汝等當信佛之諸說 言不虛妄)고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들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경전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법화경》의 내용은 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부처님은 어떻게 논리나 언어를 초월해 있는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무슨 이유로 우리들은 《법화경》의 내용을 이해할 수도 없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하는가? 쉽지 않은 대목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절망하거나 포기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법화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금강경》 제14에 나오는 “여래가 설하는 일체의 모습은 바로 모습이 아닌 것[卽非相]이며, 또한 일체의 중생은 바로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진어자(眞語者)이며, 실어자(實語者)이며, 여어자(如語者)이며, 불광어자(不語者)이며, 불이어자(不異語者)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이 법은 무실무허(無實無虛)하니라”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 《금강경》 중에서 “여래가 설하는 일체의 모습은 바로 모습이 아닌 것[卽非相]이며, 또한 일체의 중생은 바로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여래는 진실을 말하는 자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자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라고 말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마지막에 나오는 구절 “수리야, 여래가 얻은 이 법은 진실한 것도 허망한 것도 아니다[無實無虛]”라는 구절로 귀결된다. 진실한 것도 아니요 허망한 것도 아니라는 전제 위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실과 허망이라는 대립하는 두 개의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진실은 표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다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 말하는 것일 뿐 허망하지 않은 진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진실은 허망하지 않으며, 허망은 진실일 수 없지만 허망과 서로 대립하고 있는 진실이 있는 그대로 동시에 하나의 세계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는 여(如)이며, 진실인 것이다.
그런데 《금강경》에선 ‘사물에 사로잡혀버린 구도자'는 ‘있는 그대로' 그렇게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을 갇혔다고 하는데 다른 표현으론 암(闇:닫힌 문)이라 한다. 또한 이것을 방편품에선 ‘부처님의 지혜는 심원하여 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려우며, 들어갈 수도 없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금강경》의 표현에 의거한다면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은 닫힌 문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시사하며, 사물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사론》에 의하면 ‘사물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은 다섯 가지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자성, 의식의 대상, 집착의 장소, 원인(因), 사용(私用)행위 등이다. 이것에 에드워드 콘즈는 ‘대상 의식'이란 번역어를 부여하고 있다. 혹은 와스투란 학자처럼 장소란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여하튼 ‘사물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은 ‘의식의 대상에 사로잡혀 있거나 장소에 사로잡혀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에 있는 자들은 존재 전체를 볼 수 없으며,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대상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진실일 수 없으며, 그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인종, 출신성분, 빈부귀천, 남녀, 지역, 종의 차이 등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먼저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언어와 논리를 부정한다. 대상의식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부처님은 존재의 전체, 존재의 실상 자체를 여실하게 보여주며, 그것을 ‘여래의 도움으로 마침내' 교법이 알려지고 존재의 실상이 알려진다고 표현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부처님의 도움이 아니면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부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부처님께서 논리에 의지하지 않고 체험에 의지해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듯이 부처님을 믿는 자들도 논리에 의지하지 말고 종교적 체험에 의지해 존재의 실상, 생명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녹아 있는 것이다. 진리는 언제나 만인을 향하고 있지만 대상의식을 버린 사람, 헤아리거나 비교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법화경》은 우리들에게 준엄한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리불아 일체의 부처님은 오탁악세에 세상에 나오신다. 이른바 겁탁, 번뇌탁, 중생탁, 견탁, 명탁이다. 이와 같이 사리불아, 시대가 혼탁하고 어지러운 때에 중생의 허물이 무겁고 간탐과 질투로 착하지 않은 근기를 성취하기 때문에 일체의 부처님은 방편의 힘으로 일불승에서 분별하여 삼승을 설하느니라.” 여기서 말하는 탁(濁)이란 《금강경》에서 말하는 암(闇)과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유한한 자신과 한정된 존재자인 생명체 일반에 사로잡혀 존재의 일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입장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점을 없앨 수만 있다면 그 이면에는 한정할 수 없는 유일한 입장, 즉 부처님의 입장에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중생을 그러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44. 방편품에는 만선성불론으로 불리는 이 경전 특유의 성불론이 나온다.

즉 방편품 후편에 나오는 게송 중에는 과거의 무수한 부처님들이 헤아릴 수 없는 방편의 힘으로 모든 존재의 실상을 설하시는데 그것들은 모두 일승법을 설하는 것이며, 일체 중생을 불도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라 설파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성불한 중생이 무수한 것은 물론이다. 여기서 성불한 사람들이 성불하기 위해 닦은 성불의 인행(因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등을 실천.
둘째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착하고 유연한 마음(善軟心)을 지님.
셋째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사리를 공양하는 것.
넷째 7보로 치장하여 탑을 세우거나 돌탑을 세우며, 전단향, 침수, 목밀, 기타 목재, 벽돌, 진흙 등으로 탑을 만들거나, 들판에 흙을 쌓아 불탑을 만드는 것.
다섯째 어린애가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 불탑을 만드는 것.
여섯째 부처님을 위해 다양한 형상을 건립하는 것.
일곱째 칠보나 투석, 적백동, 백랍, 납, 주석, 철, 나무, 진흙, 교칠포로 치장하여 불상을 만드는 것.
여덟째 색채로 장엄한 불상을 그리되 자신이 하거나 남을 시켜 그리는 것.
아홉째 어린애들이 장난으로 초목이나 붓, 손톱으로 불상을 그리는 것.
열번째 탑묘나 보상(寶像), 화상(畵像)에 꽃과 향, 번개를 공양하거나 남을 시켜 음악을 울리되 북치고, 소라 불며, 피리, 거문고, 공후, 비파, 징, 동발 등을 울리며 공양하는 것.
열한번째 노래로 부처님의 덕을 찬양하는 것.
열두번째 부처님의 화상(畵像)에 산란한 마음으로 꽃 한송이 공양하는 것.
열세번째 불상에 예배 내지 합장 나아가 한 손을 들거나 머리를 약간 숙이는 것.
열네번째 산란한 마음으로 탑묘에 들어가 나무불 하고 단 한번만이라도 외우는 것
열다섯번째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설법을 단 한번만이라도 듣는 것.
이상에 열거한 항목들은 만선성불의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항목의 다소를 떠나 성불의 방식이 매우 일상적이고 상식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은 《법화경》 이전의 불교가 주장했던 삼아승지겁의 수행을 통해 성불한다든가 4향4과에 의거한 차제적인 수행의 단계론, 혹은 보살 수행의 4단계를 언급하고 있는 반야사상, 보살의 십지를 주장하는 화엄사상 등과 그 사상적 궤적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4념처관이나 5정심 등의 전통적인 수행방식과 달리 일체의 선행이 그대로 성불할 수 있는 수행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 파격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치게 이전의 불교사상과 차별화 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불교사상에서 일탈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6바라밀을 초두에 놓아 강조하고 있는 점은 만선성불론이 대승불교의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대승불교의 보편적인 흐름에 편승하면서도 《법화경》 독자의 수행론을 제시하여 그 종교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알려주는 것이기도 하다. 만선성불론의 주요 내용 중의 하나인 불상의 조성과 조탑 공양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법화불교의 주창자들이 출가집단이 아닌 비승비속의 보살집단이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대승불교운동의 시원을 탐색했던 일군의 학자들은 대승불교운동이 비승비속의 보살집단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부파불교시대에는 삼보별체설에 입각해 ‘불탑이 각 부파의 승원에서 독립'해 있었다.
불탑은 주로 사람들의 통행이 자유로운 광장이나 교통요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일반신자들은 승원 보다는 불탑을 예배하므로서 자신들의 안녕과 불교적인 종교생활을 이끌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불탑숭배의 번영과 그로 인한 불탑에 대한 신도들의 재산기증은 불탑을 중심으로 비승비속의 신앙자 그룹인 보살중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들이 불탑과 불탑이 지니고 있는 막대한 재산을 기반으로 신불교운동이라 말할 수 있는 대승불교운동을 이끌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대승불교가 대중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대중들은 번쇄한 철학적 탐구 보다는 경건한 신심과 구복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조상과 조탑 공양의 강조는 매우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장난으로 부처님의 모습을 그려 합장하거나 모래로 탑을 만들어 놓고 합장 예배하는 것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수행의 단순화 일상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반야사상은 철저한 무집착 공의 정신에 입각해 조상과 조탑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경전 중의 하나인 《금강경》에서 ‘부처를 물질이나 음성으로 구하려고 하는 것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과 같아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조탑과 조상, 심지어 음악, 그림을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법화경》의 주장은 대중성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한 신심만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은 외견상 《법화경》 자체의 주장과도 상호 모순을 노출하고 있다. 첫째 방편품에서 여래가 깨달은 지혜는 깊고 깊어 성문과 연각은 알 수 없는 것이며,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성문, 연각도 이해할 수 없는 부처님께서 깨달은 일승의 세계를 범부들의 평범한 신심과 예배를 통해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둘째 오직 일승뿐 2승과 나머지 수레는 없다고 주장하면서 역설적으로 만선성불을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 아닐 수 없는데 그 점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셋째 선행만으로도 성불할 수 있는데 성문과 연각이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은 일반적으로 지극한 신심은 집착심과 분별심, 대상의식의 탈피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라 본다. 종교적 실천을 중시한다면 나라든가 나의 소유라는 의식을 초탈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와 나의 소유라는 의식을 탈피하여 행하게 되는 일체의 복덕행과 지혜의 활동이 바로 성불로 가는 길이며, 그런 점에서 만선성불은 복덕문과 지혜문을 실생활과 연관시킨 이행도(易行道)의 실천문인 것이다.
 
45. 비유
 
비유품(譬喩品)은 방편품 다음에 이어진다. 방편품이 강령을 말하고 있는 품이라면 비유품 이하는 방편품의 핵심 사상을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하기 쉽게 해설하는 품이라 생각하면 좋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부처님의 지견(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어떠한 방법을 활용하고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비유품은 제목처럼 부처님의 설법을 비유라는 형식을 빌어 전개한다.
《법화경》에 나오는 일곱 가지의 핵심적인 비유 중에서 맨 처음에 나오는 비유인데, 이것이 유명한 ‘불난 집의 비유'라는 설법이다.《법화문구》에 의하면 천태 스님은 “비(譬)는 비교해 가르쳐 주는 것이며, 유(喩)는 깨우쳐 가르쳐 주는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 비유를 설하는 이유에 대해선 “부처님께서는 일음(一音)으로 비유를 설해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교묘하게 4실단의 이익을 얻게 하기 때문에 비유품이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네 가지 실단할 때의 실단은 범어 싣단따의 음역이며, 성취, 종취, 이치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해 제시한 가르침의 네 가지 범주를 말하는 것이다. 천태스님은 《대지도론》의 영향을 받아 네 기지 실단을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베푸는 사법(四法)의 가르침이라 해석하고 있다.
중국 법상종의 대성자인 규기는 《법화현찬》에서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일곱 종류의 번뇌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중생을 위해 일곱 가지 비유를 설하며, 일곱 가지의 증상만을 치료한다. 그리고 세 종류의 염만(染慢: 오염과 교만), 번뇌가 없는 사람의 삼매해탈견 등의 염만을 위해 이들을 치료하고자 세 가지의 평등을 설한다”고 한다.
여기서 세 가지 평등은 불법승의 평등 내지 신구의 삼업의 평등, 혹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평등을 말하는데 이 문단에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평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규기는 “일곱 가지 비유란 범부와 유학자(有學者)는 번뇌를 지니고 있다고 하거나 일곱 가지의 증상만의 염만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므로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일곱 가지 비유를 설한다”고 거듭 밝히고 있다.
초기불교 이래 부처님의 설법은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이들을 정리하면 대략 9종에서 12종을 넘어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아홉 종류라고 생각했는데 이후 더 연구해 본 결과 12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을 9분교 혹은 12분교라 말한다. 비유는 부처님의 여러 가지 설법 형식 중의 하나로 일찍부터 알려져 왔으며, 특정한 장소나 대상에 따라 비유의 형식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태나 규기는 ‘중하근기의 사람들을 인도하기 위해 채택된 설법 형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명석하고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굳이 비유의 형식을 취하지 않아도 부처님께서 말하는 의미를 알아차린다는 점에서 그렇게 생각했다고 본다.
여하튼 비유품은 불난 집이란 한계상황을 제시하여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위해 어떠한 방편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려준다. 인간이란 태어나면서부터 한계상황에 놓여져 있다. 《여시어경》의 말씀처럼 개개인은 문화적 환경, 자연적 환경, 개인의 기질, 교양의 정도, 취미, 기호 등 다양한 여건에 따라 각자의 한계상황을 연출한다. 그중에서도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니는 욕망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그 욕망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실현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들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교만, 의심 등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따라다니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란 욕망의 지배를 받으며,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정의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욕망이 적절하게 조절되지 않으면 인간은 그 욕망 때문에 불행해 진다는 점이다.
‘불난 집의 비유'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상황을 염두해 두고, 그러한 한계상황을 탈출시키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묘사하는 것이다. 경전에선 부처님을 장자로, 중생을 자식들로 비유하고 있다. 또한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을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장자는 늙었으며, 재산, 전답, 가옥, 하인들은 매우 많았다. 그런데 그 집은 매우 크고 넓었으나 대문은 하나뿐이었다. … 그 집은 모두 낡아서 벽과 담은 무너졌고, 기둥 뿌리는 썩었으며, 대들보는 기울어져 위태롭게 생겼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불이나 한창 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자는 불타는 집에서 자식들이 놀고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며, 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다시 불난 집으로 들어간다. 그는 자식들에게 집에 불이 났으니 빨리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놀이에 팔려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을 불난 집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장난감 수레가 밖에 있으니 나가면 그것을 주겠다고 해서 아이들을 탈출시키게 된다. 처음에는 양이 끄는 수레, 사슴이 끄는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주겠다고 했었지만 장자는 불난 집에서 나온 자식들에게 크고 흰 소가 끄는 수레를 주어 이들을 만족시키게 된다.
인간의 한계상황을 불난 집에 비유한 가르침은 읽을수록 그 깊이를 헤아리게 한다. 인간이란 그러한 한계상황을 인식하면서도 ‘존재하기 위해서'란 전제 아래 여전히 그속에서 발버둥친다. 그러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조각배와 같이 안정감을 지니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불은 매우 다의적인 단어이다. 어느 특정한 것을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비유품에서 말하는 불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전에는 “(나는)삼계라는 썩고 낡은 집의 불타는 가운데서 태어나 중생들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근심하고 슬퍼하며,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어리석고 아둔한 삼독의 불에서 제도'하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느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바로 생노병사와 삼독을 불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선 근심, 슬픔, 괴로움, 번민 내지 다섯 가지 욕망을 불로 표현한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실상과 부처님의 지혜에 대한 무지,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정신적 육체적인 어둠이 근본원인이다.
때문에 부처님은 중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너희들은 삼계의 불타는 집에 있기를 좋아하지 말며, 빛, 소리, 냄새, 맛, 촉감 등 누추한 대상들을 좋아하지 말라. 만일 탐내고 애착하면 불에 타게 되느니라.” 인용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불은 여섯 가지의 감각 대상을 통해 사물에 집착할 때 발생하는, 매우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종교적이면서도 관념적이라 해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들이 느끼는 행복과 불행의 근거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천태지의 스님은 불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했다. 과보의 불, 악업의 불, 번뇌의 불이 그것이다.
불을 설법의 재료로 이용한 것은 《법화경》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잡아함경》이나 《사분율》 등에 나오고 있다. “비구들이여, 온 세상이 불타오르고 있다. 온 세상이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눈이 불타고 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불타고 있다. 눈의 분별이 불타고 있다. 눈이 보아서 즐거운 것이나 괴로운 것이나 모두 불타오르고 있다. 무엇 때문에 불타오르는가? 탐욕의 불이 불타오르고 있다. 어리석음의 불이 불타오르고 있다. 또한 생노병사의 근심 걱정과 고통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이처럼 귀에서도, 코에서도, 혀에서도, 몸뚱이에서도, 마음에서도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다”고 설법한다. 바로 이러한 내용을 비유품에선 ‘불난 집의 비유'로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중심으로 설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6근과 6경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기에 표현의 차이일 뿐 내용상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법화경》은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비유품은 중생이 부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의무가 부처님께 있다고 말한다. “사리불아, 부처님께서 이러한 것을 보고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느니라. ‘내가 중생의 아버지가 되었으니 마땅히 이러한 고통에서 건져내어 한량없고 가없는 부처님의 지혜의 즐거움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노닐게 하리라.'”
“사리불아, 저 장자가 자기 자식들이 불타는 집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두려움 없는 곳에 이른 줄을 알고는, 자기의 재물이 한량없는 것을 생각하고, 큰 수레를 여러 자식들에게 평등하게 나누어 준 것과 같이, 여래도 그와 같이 온갖 중생의 아버지가 되었으므로 한량없는 억천만의 중생이 부처님의 법문으로서 삼계의 괴롭고 두려우며 험한 곳에서 나와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을 보고는, 여래가 그때 생각하기를 ‘내게는 한량없고 가없는 지혜와 힘과 두려움 없음 등의 여러 부처님의 법의 창고가 있으며, 이 중생들은 모두 나의 자식들이니 평등하게 대승을 줄 것이요, 한 사람이라도 홀로 열반을 얻게 할 것이 아니라, 모두 여래의 열반으로써 열반하게 하리라'하고, 삼계를 벗어난 모든 중생들에게 다 부처의 선정과 해탈의 오락 기구를 주었으니…”
길게 인용했지만 이상은 모두 비유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부처님은 중생의 아버지이며, 아비가 자식을 보호하듯이 중생을 사랑하고 보호하리란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도 법의 계승이란 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삼계의 고뇌를 제거할 수 있으며, 그러한 법의 창고 속에 들어 있는 진기한 보물들을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주어 부처님과 똑같은 열반을 성취하게 하리라 강조한다.
그렇지만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으로 설정한 것은 《법화경》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장부경전》 제27경인 《기세인본경》에 보이고 있다. 이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바라문 출신의 제자인 바세타와 함께 바이라드바샤로 향하면서 인간의 귀천은 4성계급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대화 다음에 석가모니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바세타여, 여래에게 믿음을 두고, 믿음의 뿌리를 생기게 하며, 믿음을 확립하고, 믿음을 견고하게 해서 사문이나 바라문, 하늘이나 마구니, 범천이나 세간의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진실로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진정한 세존의 자식이다. 입에서 태어난 자이며, 법에서 태어난 자이다. 법에 의해 형성된 자이며, 법의 후계자'라고. 왜냐하면 그것은 바세타여, 이들은 여래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며, 법신(法身)이라고도, 범신(梵身)이라고도, 법체(法體)라고도, 범체(梵體)라고도 부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종류의 가르침은 《상응부경전》에도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법화경》을 중심으로 신행활동을 하고자 했던 불교운동가들은 초기불교의 이러한 내용을 수용하여 《법화경》 비유품에서 재구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비유품에도 이상의 인용문과 유사한 내용의 가르침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세존이시여, 제가 옛적부터 날이 저물고 밤이 새도록 항상 스스로를 책망하였더니, 이제 부처님께 듣지 못했던 미증유한 법을 듣고는 모든 의심과 뉘우침을 끊어 몸과 마음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오늘에야 부처님의 참된 자식이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났으며, 법의 교화에 따라 태어났으며, 부처님의 법이란 유산을 얻은 줄을 알았습니다.”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 비유품에서 말하고 있는 ‘중생이 부처님의 자식'이란 가르침이 초기불교 이래 설파되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석가모니부처님은 사성의 평등을 가르치기 위해, 인권의 존엄성과 생명의 고귀함을 가르치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위해 이상과 같은 설법을 했던 것이다.
특히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난다'는 구절은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은 누구나 차별이 없으며, 그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을 사는 불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도의 카스트제도 속에서 최상의 계급인 바라문은 범천의 입에서 태어난다고 생각해 왔으며, 부처님은 그러한 것을 부정하기 위해 불자들은 범천 보다 훨씬 존귀한 존재로 알려진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비유품의 인용문 중에서 중생은 부처님의 자식으로서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점이다. 그것을 경전에선 화생(化生)이라 표현하고 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화생을 어머니의 태반을 빌리지 않고 태어나는 것으로 보았지만 《기세인본경》 등의 내용을 참고하면 법의 교화에 따라 태어나는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비유품 중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오고 있다. 즉 “내가 옛날에 일찍이 이만억 부처님의 처소에서 위없는 도를 위했기 때문에 항상 너를 가르쳤다. 너 역시 장야(長夜)에 나를 따라 수학하였는데 나는 방편으로 너를 인도했기 때문에 (너는) 나의 법(가르침) 속에서 태어났느니라”고 사리불에게 말하는 내용이다. 또한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운허 스님 역본에서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문을 듣고 귀의하였으며'라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천태 스님의 해석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라 말할 수 있다. 천태 스님이 활동하던 당시의 중국인들은 인도의 풍속과 문화에 대해 오늘날과 같이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이 입에서 태어난다'는 점에 대해 수긍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따라서 입에서 태어난다는 문장을 ‘가르침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구생(口生)'이라 했으며,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라 해석했다. 매우 신앙적이면서도 절묘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날은 그것이 계급타파를 위해 설해진 것이란 본래의 의미를 되살리는 것도 필요하다.
한 가지 더 간과해선 안 되는 점이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자식들은 부처님의 법이란 유산을 물려받아 후세에 전해줄 의무가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법을 통해 삼계의 화택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법의 교화에 따라 정신적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점에서 그 은혜에 보답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특히 부처님의 수제자인 사리불을 등장시켜 그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 강조하는 점은 《법화경》이 정법을 중시하는 경전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이 매우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인도불교 교단사는 크게 법을 중시하는 지법자 계통과 계율을 중시하는 지율자 계통으로 구분되어 발전해 왔으며, 사리불은 아난, 가섭과 함께 지법자의 계통에 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적어도 《법화경》을 중심으로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한 사람들은 가섭을 지법자의 으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라 추정하게 만든다.
신해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자비를 비로소 믿고 깨우치기 시작한 부분이며, 두 번째는 부처님의 자비를 비유로 설명하는 장자궁자 이야기가 그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첫째 부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신해품의 전품인 비유품에서 사리불에게 수기를 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감동을 받은 수보리, 마하가전연, 마하가섭, 마하목건련 등이 마음에 진한 전율을 느끼고 존경하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저희들은 대중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미 늙었습니다. 스스로 ‘이미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해 더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옛날부터 세존에게 설법을 들었지만 공, 무상(無相), 무작(無作)만 생각했을 뿐, 보살의 법과 신통을 즐거워 함과 부처님 국토를 청정히 함과 중생을 성취하는 일은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선 저희들이 삼계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도록 하셨으며, 저희들도 나이가 들었으매 부처님께서 보살을 교화하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는 조금도 좋아하는 생각을 내지 않았습니다.”
이상의 고백은 짧은 구절이지만 《법화경》이 전개하는 불교운동의 방향을 여실하게 알려주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물론 대강의 방향은 방편품에서 다 언급하고 있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법화행자들이 추구하고 있던 불교운동의 방향을 강조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인용문의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의 사실들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 부처님의 십대 제자로 알려진 불세출의 스님들이 사리불의 수기를 보고 감격하는 장면이다. 따라서 이후의 품에서 각각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게 된다.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체득한 분들로 알려진 그들이 다시 수기를 받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열반을 얻었다'고 생각해 더는 노력하지 않고 안주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공, 무상, 무작이라는 고정화된 관념에 갇혀 있었다는 점이다. 공, 무상, 무작은 고정적인 관념의 틀에 갇히지 말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파된 가르침인데 반대로 교조적인 생각에 빠졌다는 고백이다. 또한 삼계를 벗어나 열반을 얻도록 가르쳤다는 착각이다. 몇 가지 사실을 통해 십대 제자로 대표되는 성문승들이 다시 수기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미 열반을 얻었기 때문에 더는 얻을 것이 없다는 교만한 마음, 그리고 관념에 닫혀 버린 형식화된 사고, 삼계를 벗어나 있는 것이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비현실성 내지 관념적 사고 등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말하자면 《법화경》에서 성문승들에게 수기를 주는 것은 단순히 ‘깨달음의 세계를 예언한다는 차원을 넘어 인식의 전환과 적극적인 사회성의 요구'라 해석할 수도 있다.
둘째 성문승들의 반성적인 고백을 통해 《법화경》에서 중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문제이므로 그 내용을 일별해 보기로 하자. 우선 보살법과 신통을 즐거워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6바라밀의 실천과 직결되어 있다. 즉 6바라밀 중에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은 보살법의 실천적 윤리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완성과 사회적 완성을 동시에 희구하는 대승불교사상의 이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신통을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반야의 완성을 지칭한다고 본다. 신통을 반야로 해석하는 것은 전통적인 해석 방법이다. 즉 삼명육통(三明六通)에서 말하는 명과 통은 바로 지혜를 완성했을 때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국토를 깨끗이 하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자책이다. 불교의 전통에서 불국정토는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완성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지칭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개인적 인격을 완성하더라도, 그 인격의 완성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불국정토를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없다면 높이 평가받을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러한 부류의 수행자들을 벽지불 내지 연각이란 칭호로 폄하했다. 다만 인용문을 통해선 불국토를 정화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 없지만 수기의 내용에 나오는 토상(土相:불국토의 모습)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아쉬움이라면 지금도 불교도들 사이에 팽배된 의식은 불교가 단지 개인적 수행을 중시하는 종교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우리들은 대승불교 내지 《법화경》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반성적인 고백의 마지막은 ‘중생을 성취하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중생을 성취한다는 구절의 의미는 매우 다의적이라 볼 수 있는데 여기선 몇 가지만 적시하기로 한다. 우선 중생들이 의식주 문제로 고민하지 않도록 앞장서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의 의식이 이기적이고 천박한데서 벗어나 남을 생각할 줄 알고 고상한 마음을 지니도록 만드는 것이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라도 마음의 평안을 지니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기설법을 통해 그들을 교화하는데 주력했으며, 그들의 잠자는 의식을 일깨워 주기 위해 평생토록 인도 전역을 순회한 것이다.
위대한 성문승들의 고백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무엇을 중요시해야할 가치인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뒤이어 장자궁자의 비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이유는 “여러 부처님들/ 자재한 법 얻으시고/ 중생들의 모든 욕망과 좋아함/ 골고루 아시며/ 또한 그 뜻과 힘에/ 감당할 바 아시고/ 무량한 비유로써/ 미묘한 법 말씀하실새”라며 게송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감안하면 왜 신해품이란 이름을 붙였는지 알 수 있다. 즉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믿음과 깨우침'을 올바른 믿음으로 재정립한다는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고전적인 해석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천태 스님은 신해품(信解品)에 대해 ‘이제 비유를 듣고 기뻐 펄떡 펄떡 뛰는데 믿음과 깨우침이 생기고, 의심이 제거되어 이치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믿음과 깨우침을 단계적으로 해석하여 “처음 의혹을 깨뜨리고 대승의 견도(見道)에 들어가기 때문에 믿음이라 이름하며, 나아가 대승의 수도(修道)에 들어가기 때문에 깨우침[解]이라 이름한다”고 전제하고, 전체적으로는 “불도의 음성을 일체 중생들이 듣게 하고, 원교(圓敎)를 듣고 원위(圓位)에 들어가게 하기 때문에 신해품이라 부른다”고 정의한다.
천태 스님과 달리 길장 스님은 삼론사상에 입각해 독특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첫째 “의심을 제거하면 믿음이라 말하고, 집착을 깨뜨리면 깨우침[解]이라 한다. 의심은 머뭇거리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결정한다는 뜻이다. 성문은 권실(權實)을 의심하며, 일과 삼에 머뭇거린다. 이러한 의심이 이미 멈추었기 때문에 믿음이라 부른다. 즉 삼은 방편이며, 일은 진실임을 믿는 것이다. 집착을 깨뜨리는 것을 깨우침이라 하는 것은 ‘깨우침[解]은 깨달음[了悟]으로 의미를 삼고, 집착은 미집(迷執)이란 말'이기 때문이다. 둘째 “믿음은 사견을 깨뜨리는 것이며, 깨우침[解]은 무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믿음은 있으나 지혜가 없으면 무명을 기르는 것이요, 지혜는 있으나 믿음이 없으면 사견을 기르는 것이다”라고 하여 믿음과 지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법화경》을 대표하는 일곱 가지의 비유 중 하나로 널리 알려진 것이 바로 장자궁자의 비유다. 장자는 요즘 말로 하자면 부자를 나타내는 단어다. 원래는 상인 조합의 조합장을 장자라 지칭했는데 조합장은 부자가 아니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부자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궁자는 가난한 아들 혹은 가난한 자식이란 의미다. 이 비유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렸을 때 가출하여 아버지와 헤어진 어떤 사내가 있었다. 이후 그는 쉰 살이 넘도록 타향 객지를 방황하며 가난에 찌들어 살았다. 일거리를 찾아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우연히 본래 자신이 살던 나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아들을 잃어버리고 상심하여 슬퍼하던 아버지 역시 백방으로 아들을 찾았지만 찾을 수 없어서 단념하고 한곳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엄청난 부자였는데 아들은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대광실로 일거리를 찾아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러나 너무 엄청난 집의 규모에 놀라 돌아서려는 찰나 장자는 한눈에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리고 불렀지만 오히려 놀란 아들은 멀리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아들임을 확신한 장자는 하인들을 시켜 그를 자신의 집으로 유인해 일을 시키게 된다. “너는 항상 여기서 일하고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 너에게 품삯을 더 후하게 주리니, 조금도 어려운 생각을 갖지 말라”고 하며, 장자 자신도 용렬하고 세파에 찌들어 겁이 많은 아들과 어울리기 위해 허름한 옷을 입고 함께 일을 하기도 한다. 마음의 안정을 찾은 아들이 성실하게 일을 하자 장자는 다양한 일을 시키며 20여 년이 지나게 된다. 함께 한 시간이 많아진 만큼 가까워지자 창고도 맡기고 회계도 맡기게 되었다. 그 사이 가난한 아들은 마음이 착하고 집착이 없는 깨끗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참으로 맑은 마음으로 맡은 일에 충실했다. 그 무렵 장자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직감한 장자는 친족과 시종들을 모아 놓고 가난한 아들을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람은 진실로 나의 아들이다. 나는 진실로 그의 아버지이다. 이제 내가 소유한 일체의 재물은 모두 이 아들의 것이다” 가난한 아들은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재보가 저절로 굴러 들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이상의 비유가 끝나자 “세존이시여, 대부호 장자는 곧 부처님이시며, 저희들은 모두 부처님의 아들과 같사오니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길 저희들을 아들이라 하셨습니다”라며 부처님의 자비심을 찬탄하게 된다.
장자궁자의 비유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길을 잃고 방황하며 세파에 찌들어 사는 중생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간주한다. 당신의 자식들이 방황하고 있기에 연민의 정을 금하지 못한다. 따라서 중생들이 하고 싶은 일과 욕망을 간파하시고 적절하게 근기에 맞추어 그들을 인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을 당신의 품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자신감을 회복하고 정신적 안정 속에 살 수 있도록 한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전 재산을 물려주어 부처님의 참다운 아들임을 자각하게 한다. 부처님의 자비는 이렇게 표현된다.
장자궁자의 비유는 길 잃은 미아를 통해 부처님의 자비가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알려준다. 중생들은 부처님의 자비를 통해 잃어버린 고향을 찾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근본을 되찾게 된다. 상처받은 영혼에 활력을 불어넣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부처님의 자식이라는 자부심을 지닐 수 있게 한다. 중생은 누구나 그렇게 고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상의 개략적인 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 천태 스님은 이들에 대해 자세한 풀이를 하고 있다. 즉 삼계 속에 살면서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이 궁핍한 것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핵심 방법을 얻지 못한 것을 가난하다고 말한다. 여덟 가지 고뇌의 불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고단하다고 해석한다. 나아가 사방을 돌아다니며 의식주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체의 범부들은 몸으로 심법(心法)을 느껴 네 가지 견해를 일으키고, 그 속에서 정도(正道)를 구하는 것이 먹을 것을 구하는 것과 같다. 조도(助道)를 구하는 것이 옷을 구하는 것과 같다. 해서 고뇌를 싫어하고 이법을 찾기 때문에 교화할 인연을 맺는다’고 설명한다.
본국으로 돌아와 우연히 아버지가 사는 집 앞을 배회하는 것에 대해 ‘일체 부처님의 가르침이 본래의 나라고 풀이하며, 동체대비를 집으로 해석한다’고 하고, 부처님을 장자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큰 부자란 실상의 경계를 집으로 삼고, 만 가지 덕을 갖추고 있는 것을 부유하다고 하며, 5바라밀을 실천하는 복덕을 재물이라 하고, 반야지혜를 보배라 한다’고 해석한다. 창고마다 보배로 가득 차 있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안에 있는 것을 가득 찼다고 하고 바깥에 있는 것을 넘쳤다고 한다. 쌀을 넣어 두는 것을 창(倉:곳집)이라 하고 물건을 넣어두는 곳을 고(庫:곳집)라 한다. 창은 선정을 비유한 것인데 선정은 백팔삼매를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고는 실상을 비유한 것인데 실상은 18공의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고 설명한다. 하인이나 마부들을 동복(僕)이라 하는데 이들이 많다는 것은 ‘방편지견바라밀을 모두 갖추고 있어서 물러나고 근기에 따르는 것이 사리(事理)에 알맞기 때문’이라 본다. 궁자가 타국을 편력한 것에 대해서는 ‘세 국토를 편력하며 비도(非道)를 행했지만 마침내 불도에 통달했다는 의미이다. 오직 법성(法性) 만이 자기 자신의 나라일 뿐’이라 해석한다. 궁자가 마을을 떠돌아다닌 것에 대해서는 ‘오음을 관찰하는 것으로 마을을 삼고, 12입으로 고을을 삼으며, 18계로 나라를 삼는다. 여기를 떠돌아다니며 이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의식을 구하는 것이라 한다’고 풀이한다. 전통적으로 음계입을 관심(觀心)의 대상으로 삼는 천태적인 해석이라 말할 수 있다. 50여 년을 방랑했다는 것은 5도에 떠돌아 다녔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가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음을 한탄했다는 것에 대해 천태는 우선 ‘법신이 교화한 보살들이 모두 보필하고 있는데 어찌 이러한 근심을 일으키는가?’하고 물으며, 이에 대해 ‘법신이 교화하는 것은 본래 흥폐(興廢)가 없는 것이므로 누가 늙었다고 말하더라도 이것은 논란거리가 될 수 없다’고 전제하고 화신의 권속으로 두 가지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첫째, 법신과 보살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취는 제자이지만 근본은 스승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둘째, 처음 화신불을 따라 도심(道心)을 일으키게 된다면 이것을 자식이라 말한다. 자식이 아버지의 가업을 계승하여 후손들로 하여금 끊이지 않게 한다. 사리불이 수기를 받아 화광불이 된 것과 같으니 한편으론 부처의 종자가 면면히 이어져 끊어지지 않는다. 후대의 중생에게 부처의 종자를 부탁하고자 늙었다고 탄식하게 되었다.
참고로 길장의 해석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우선 아버지와 궁자가 헤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가르침과 이치에 미혹하여 부처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를 잃어버렸다’고 전재하고 구체적으로는 ‘불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육도의 차별이 있으며, 또한 제불보살이 대승의 올바른 가르침을 설해 불성을 되찾게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에게서 도망갔다는 구절에 대해서는 ‘가르침과 이치에 미혹한 것은 은밀한 일이기 때문에 중생들이 지각(知覺)하지 못하는데 그것을 달아났다고 하고, 이치를 위배하고 미혹으로 향하기 때문에 떠났다고 한다’고 해석한다. 길장은 천태와 달리 의식(衣食)을 인천의 즐거움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사방을 사생(四生)으로 본다. 반야사상과 관계가 깊다고 본다.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우연히 본국으로 향하게 된다는 구절에 대해서 “본국은 대승의 이치이다. 법화삼매경에서 ‘근원을 거스르는 것이 다하면 집으로 돌아가고자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말한다. 고향은 무위를 지칭하는 것이며, 무위이기 때문에 청정한 집이라 부른다”고 해석한다. 우리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돌아가 부처님의 가업을 계승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46. 모든 존재가 지니는 공통속성 열 가지
방편품의 핵심사상 각 종파에 영향 미쳐 범어 원본에는 없어
 
《법화경》의 방편품 사상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십여시(十如是)라 말할 수 있다. 열 개의 이와 같은 것이란 의미를 지니는 십여시는 천태지의의 세계관과 존재관을 구성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만일 십여시가 없다면 천태의 일념삼천론은 구상되지 않았을 것이며, 그의 유심론적 세계관은 후대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일념삼천설을 구상했기 때문에 이후의 중국불교사상사에서 일념의 마음, 혹은 일심이 중요한 사상적 키워드가 될 수 있었다. 혹자들은 오해할 수 있다. 천태사상의 어떤 점이 중국불교사상사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는가? 하고. 그렇지만 일심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남종선, 화엄종, 정토종 등에 다양하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선종의 유심론적 세계관 내지 존재론의 사상적 원류 역시 천태를 무시하곤 말할 수 없다. 그러한 모든 사상의 배후에 십여시설이 있는 것이다.
《법화경》 자체에서 십여시의 언급은 일체 모든 존재의 실상(實相:참다운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시작된다. 방편품 해당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십여시에 대한 가르침이 나오고 있다. “아서라, 사리불아. 다시 말할 필요 없나니 이유가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성취하신 것은 가장 희유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도리이니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모든 존재의 실상을 구명할 수 있느니라. 이른 바 모든 존재의 이와 같은 상(相), 이와 같은 성(性), 이와 같은 체(體), 이와 같은 역(力), 이와 같은 작(作), 이와 같은 인(因), 이와 같은 연(緣), 이와 같은 과(果), 이와 같은 보(報), 이와 같은 본말(本末)이 궁극적으로 평등한 것이니라.”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은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 만이 알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일체 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공통의 속성 열 가지를 십여시란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각각의 개념에 대해 천태지의 스님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우선 십여시를 개괄적으로 설명하자면 여시상(如是相:현상), 성(性:성질), 체(體:실체), 력(力:공능), 작(作:활동), 인(因:1차원인), 연(緣:2차원인), 과(果:직접적인 결과), 보(報:간접적인 결과), 본말구경등(本末究竟:궁극적인 평등)이다. 천태지의스님의 대표적인 저서인 《마하지관》에 의거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들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상이란 현상 즉 우리들 눈 앞에 전개되어 있는 일체의 모습이며, 이것은 각각의 개성과 차별성을 지닌다. 따라서 현상이란 표면적으로 드러난 다양한 차별성들의 조합이다. 나무는 나무대로 돌은 돌대로 각각의 모습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각각의 특성을 판별할 수 있다. 상이란 단어가 지시하는 것은 그러한 차별성을 말한다. 성이란 세 가지의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개변(改變)할 수 없는 것, 종류라는 의미, 실성(實性=불성)이란 의미가 있다. 여기서 실성은 理性 내지 佛性과 동의어로 설명된다. 그리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일체의 존재는 본질적인 차원에서 평등할 수 있는 것이다. 체란 체질(體質)을 말하는데 육도중생은 물질과 정신으로 체질을 삼고, 이승은 오분법신으로 체질을 삼으며, 보살과 부처는 정인불성으로 체질을 삼는다고 본다. 인이란 1차 원인을 말하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각자의 의지행위의 결과 표출되는 업(=행위)으로 해석한다. 연이란 2차 원인을 말하며 행위를 도와주는 일체의 보조적인 것이다. 인과 연은 그런 차원에서 불가분리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인이 주관이라면 연은 객관세계 전체라 말할 수 있다.
본말구경등이란 처음과 끝이 궁극적으로는 평등하다는 의미인데 이러할 경우 현상은 근본이 되고, 간접적인 결과인 보는 지말이 된다. 그리고 근본과 지말은 인연 따라 일체의 존재를 발생시킨다. 그리고 각각의 역할과 활동, 공능은 필요한 만큼 활용되는 것이기에 본질적 가치란 차원에서 평등한 것이다.
천태는 이것을 다시 공가중 삼제의 시각에서 해석을 한다. 즉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기는 것이기에 공이며, 본말이 모두 공이기에 공의 입장에서 일체는 궁극적으로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자면 십여시 각각이 얽히고 섥혀서 다양한 모습과 과보를 만들어 내므로 그것은 가의 입장에서 평등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본질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인연 따라 생긴 것이기에 고정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일체 모든 것이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불성에 포섭되기 때문에 중도의 입장에서 평등하다고 말한다. 공가중 삼제란 본질적 차원, 현상적 차원, 중도적 차원의 시각을 말한다.
천태사상의 핵심이 된 십여시이지만 범어 원본 《법화경》에는 십여시의 내용이 없다. 십여시 대신 오하법이 있을 뿐이다. 세친의 《법화론》에 의하면 오하법이란 하등법(何等法), 운하법(云何法), 하사법(何似法), 하상법(何相法), 하체법(何體法)이 그것이다. 하등법이란 처음에 일승을 설하지 않고 삼승을 설한 것을 지칭한다. 운하법이란 하나하나의 수레에서 다양한 일을 대비하여 설하는 것이다.
하사법이란 삼승을 수행했는데도 수행이 청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완벽하지 않고 비슷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하상법이란 삼승은 오직 일승을 밝히기 위한 전단계임을 밝히는 것이다. 하체법이란 궁극적으론 일승뿐이며, 이승의 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오체법을 살펴보았지만 그 내용은 십여시와 너무 차이가 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묘법연화경》을 번역한 구마라지와는 어떤 근거로 십여시를 경전의 문구로 삽입하게 되었을까? 이 점에 대해 학자들은 용수가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대지도론》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 있다. 즉 《대지도론》에는 모든 존재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속성으로 아홉 가지 법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흔히 9종법이라 지칭한다. 내용은 십여시와 상통하는 내용인 체, 역, 인, 연, 과, 성 등이 있으며, 기타 법, 한애, 개통 등이 있다. 그런데 다른 용어 중에서 법(法)은 작용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십여시의 작과 상통하며, 개통(開通)은 본말구경과 상통한다. 그리고 한애(限礙)는 존재하는 것들은 각각 서로 상대방을 제한하고 부정하면서 존재하는 현실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십여시의 상과 상통한다.
그렇게 본다면 십여시 중에서 보에 해당하는 것만이 없는데 구마라지와는 《묘법연화경》을 번역하면서 9종법에 나오는 과(果)를 직접적인 결과와 간접적인 결과로 세분하여 보를 첨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중국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열이란 숫자로 채운 것이다.
열이란 중국인들에게 만수(滿數)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토착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전략이라 말할 수 있다. 결국 오하법의 내용이 너무 추상적이고 어렵다는 점에서 《대지도론》의 9종법을 응용하여 십여시로 의역한 것이 천태사상을 구축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47. 빗물은 부처님 자비의 법음/ 초목은 중생의 다양성 상징 /모든 존재의 근원은 空 그래서 모든 존재는 평등
 
법화칠유의 하나로 삼초이목의 비유가 있다. 〈약초유품〉에 나오는 이 비유는 중생을 초목에 비유하고 있으며, 부처님의 자비를 대상을 분별하지 않고 내리는 빗물에 비유하고 있다. 약초유품의 전체적인 해석에 대해 천태는 두 가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첫째 이행과(理行果)로 약을 삼는다고 해석하는 경우다. 이것은 이치와 수행과 그 결과로 약을 삼는다는 뜻인데 여기서 이치는 회삼귀일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이자 일체 모든 존재는 본질적으로 공하다는 점을 말한다. 행은 수행을 지칭하는데 《법화경》에서 중시하는 수행은 우선 《법화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암송하고 해설하고 사경하는 것이다. 《법화경》 〈분별공덕품〉에 의하면 수희, 독송, 설법, 겸행육도, 정행육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 얻어지는 과보는 일승의 세계요 제법실상의 세계다.
두 번째 약으로 법을 비유하고 풀로 근기를 비유한다고 해석하는 경우다. 여기서 약으로 삼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가르침을 통해 오욕락에 빠진 우리 자신을 돌이켜 해탈의 경지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풀을 근기로 비유한 것은 삼초이목의 비유에서 중생이 풀이나 나무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해당 구절을 소개한 뒤에 자세한 설명을 더하기로 하자.
 
“가섭아,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와 땅 위에 나는 모든 초목이나 숲, 그리고 약초가 많지마는 각각 그 이름과 모양이 다르느니라.
 
먹구름이 가득히 퍼져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덮고, 일시에 큰 비가 고루 내려 흡족하면, 모든 초목이나 숲이나 약초들의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과,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과,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이며, 여러 나무의 크고 작은 것들이 상중하에 따라서 제 각기 비를 받느니라.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의 종류와 성질에 따라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 비록 한 땅에서 나는 것이며, 한 비로 적시는 것이지만 여러 가지 풀과 나무가 저마다 차별이 있느니라”
 
이상의 인용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구절은 크게 비와 초목, 그리고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로 구성되어 있다. 쉽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는 부처님의 자비의 법음(法音)이며, 초목은 중생의 다양성이며,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내와 골짜기는 법계(法界)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설법을 통해 생명의 실상을 가르친다. 그렇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상에 따라 천차만별이 아닐 수 없다. 취미도 다르고, 관심도 제 각각이다. 사물을 보고 판단하는 능력도 동일하지 않으며, 지니고 있는 개성이나 소질도 다르다. 그런 점에서 《법화경》이 중생을 초목에 비유한 것은 절묘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그러한 중생들의 성품과 욕망을 꿰뚫어 보시고, 그들의 근기에 따라 설법을 하지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한결같이 생명의 실상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경전에선 동일한 풀과 나무에도 크고 작은 것이 있다고 가르친다. 초목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예로부터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상초(上草), 중초(中草), 하초(下草)와 대수(大樹), 소수(小樹)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도 입장에 따라 다양하다. 천태의 해석에 의하면 소초는 인천승이며, 중초는 성문과 연각승이며, 상초는 보살승이다. 소수는 통교의 보살이며, 대수는 별교의 보살이다. 삼론종의 길장은 약간 입장을 달리하고 있는데, 소초와 중초는 천태와 동일하게 해석하지만 상초를 보살승 중에서 지전(地前)의 40심(心)으로 해석한다. 소수는 초지보살이며, 대수는 칠지보살이라 본다.
이 구절에 대한 천태의 보다 상세한 해석을 소개하기로 한다. 즉 뿌리는 믿음, 줄기는 계율, 가지는 선정, 잎은 지혜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전제 위에서 ‘작은 뿌리, 작은 줄기, 작은 가지, 작은 잎’을 인천의 믿음과 계율, 선정과 지혜로 간주한다. ‘중간 뿌리, 중간 줄기, 중간 가지, 중간 잎’은 2승의 믿음과 계율, 선정과 지혜로 정의한다. ‘큰 뿌리, 큰 줄기, 큰 가지, 큰 잎’은 보살의 믿음과 계율, 선정과 지혜로 정의한다. 이하 통교보살과 별교보살의 믿음과 계율, 선정과 지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당나라 때 활약한 법상종의 규기는 삼초이목을 5성각별설로 해석하면서 ‘한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그들의 종류와 성질에 따라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라는 구절에서 ‘자라고 크며 꽃이 피고 열매를 맺나니’라는 구절을 매우 멋지게 해석하고 있다. 즉 “자란다[生]는 것은 사람들의 처음 마음[초발심]을 비유한 것이다. 큰다[長]는 것은 그 뒤에도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다. 꽃이 핀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수행하는 것이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이치를 깨달아 그 열매를 얻는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사람이 처음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생명의 실상을 깨닫게 된다면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대다수는 그러한 것에 궁금증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맹목적인 삶의 의지 속에 갇혀 살게 된다. 감각적 허상과 정신적 허위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다. 그렇지만 가능성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인연을 맺어주면 그 다음에는 각자의 근기와 환경에 따라 일정한 과정을 거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규기는 그러한 점에 주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삼초이목의 비유를 통해 간과해선 안 되는 중요한 교훈이 또 있다. 그것은 상대적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자비의 법우(法雨:진리의 비)를 근기에 따라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근본적인 차별의 이유는 아니다. 삼초이목이 우주 법계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법계를 장엄하는 것이며, 그와 같이 현상적인 차별의 모습이 있기 때문에 다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렇지만 다양한 차별상의 이면에는 본질적으로 모든 존재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법화경》에서 말하는 일승이나 불성이 그것이다. 〈약초유품〉에선 “마치 저 구름이 모든 것에 비를 내리면 풀과 나무와 숲과 약초들이 그 종류와 성질대로 비를 맞아 제 각각 자람과 같으니라. 여래가 설한 법은 한 모습이며 한 맛이니, 이른바 해탈의 모습과 여의는 모습과 멸하는 모습이니 필경에는 일체종지에 이르는 것이니라”라고 표현한다.
하나의 모습, 하나의 맛, 해탈의 모습, 번뇌를 여의는 모습, 적멸의 모습 등 다양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단어로 압축하면 공에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존재의 근원은 공이며, 그렇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런 점에서 현상적인 차별과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평등의 입장을 무시해선 안 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본질적인 차원에서 모든 존재는 평등한 것이기에 상대적 가치와 다양성을 존중하고 찬탄해야 하는 것이다. 범위를 인간세계에 국한시켜 말하자면 성별, 인종, 지역, 국적 등등의 외형적 차이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48. 보살도 완성하겠다는 굳건한 서원
중생의 다양성·차별성 나타내 다양성 속에 근기의 차별 존재
실천윤리로 자리 잡기 어려워 굳은 의지 있어야 보살도 완성
 
약초의 비유를 통해 법계의 중생은 누구나 자신의 근기에 따라 부처님의 자비의 법우(法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표현된다. 중생 저마다의 개성과 취향에 따라 반응하는 것도 각각 다르지만 결국 귀착점은 하나라고 설한다. 부처님께서 진리의 비를 뿌릴 때 “한량없는 중생들이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찾아와 설법을 들었느니라. 여래는 이 때 중생들의 근기가 영리하고 둔함과 정진하고 게으름을 관찰하여 그가 감당할 수 있도록 법을 설하되, 한량없는 이들을 모두 즐겁게 하며, 좋은 이익을 얻게 하였느니라”고 설하며, 이 때 중생들이 얻는 좋은 이익이란 다름 아닌 “현세에는 편안하고 후세에도 좋은 곳에 태어나 불도로써 쾌락을 받고, 또한 법을 듣게 되며, 법을 듣고는 모든 업장과 걸림을 여의고, 모든 법 가운데서 능력에 따라 점점 도에 들어가게 되나니, 마치 저 큰 구름이 모든 것에 비를 뿌리면 풀과 나무와 숲과 약초들이 그 종류와 성질대로 비를 맞아 제각기 자람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천태는 이러한 경전의 가르침이 중생의 다양성과 차별상을 나타내는 것이라 이해하고, 그들이 궁극적인 귀의처에 도달하는데는 시간의 빠르고 늦음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삼초이목을 인천승, 성문과 연각, 보살, 통교보살, 별교보살로 풀이하게 된다. 천태가 다양성 속에서 근기의 차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는 정도,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시간의 차이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구상된 것이 오시팔교설이다. 부처님의 일대 가르침을 설법한 시기에 따라 다섯 단계로 구분하고, 그러한 단계의 구별은 중생들을 점차 성숙시켜 마침내는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게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중생들이 다양한 만큼 설법의 방식이나 가르침의 내용이 다양하게 표현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인식 속에서 팔교의 교판을 수립하게 된다.
중생의 다양성을 인정하되 그들을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가게 만들어야 한다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나는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니, 제도받지 못한 이를 제도하며, 이해하지 못한 이를 이해하게 하며, 편안하지 못한 이를 편안하게 하고, 열반하지 못한 이를 열반하게 하느니라. 지금 세상이나 오는 세상을 실답게 아느니, 나는 일체를 아는 사람이며, 일체를 보는 이며, 도를 아는 이며, 도를 열어 보이는 이며, 도를 말하는 이이니, 너희 하늘과 인간, 아수라 등은 다 여기에 모여 나의 설법을 들을 지니라”고 표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일체를 알고 보며, 도를 알고 열어 보이는 자이며, 도를 말하는 자라고 스스로 말하는 것은 〈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은 부처님의 지혜를 세상에 열어서 보여주고, 그 지혜를 깨닫게 만들며, 그 지혜의 길에 들어가게 만드는 것이라 말한 것과 의미가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지혜를 개시오입(開示悟入)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실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서원이라 말할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고딕체 부분이 바로 부처님의 근본 서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천태를 거쳐 오늘날 불교의 의식에서 불교신자 누구나 부르고 있는 사홍서원으로 완성된다.
천태스님이 저술한 《석선바라밀차제선문》이란 책에는 구체적으로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사홍서원의 내용이 나온다. 이 책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 ‘제도받지 못한 이를 제도하며’ 는 또한 ‘중생은 가이없으니 맹세코 건지리라’고 말한 것이다. 둘째 ‘이해하지 못한 이를 이해하게 하며’ 는 또한 ‘번뇌는 무수하지만 맹세코 끊으리라’고 말한 것이다. 셋째 ‘편안하지 못한 이를 편안하게 하고’ 는 ‘또한 법문은 끝이 없지만 맹세코 배우리라’고 말한 것이다. 넷째 ‘열반하지 못한 이를 열반하게 하느니라’ 는 또한 ‘위없는 불도를 맹세코 이루리라’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 뒤에 천태는 보살이 사홍서원을 알더라도 필경은 공적(空寂)한 것이니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광대하기 때문에 ‘크다’[弘]고 하며, 자비와 가엾어 하는 마음으로 이 가르침을 찾기 때문에 마음이 금강과 같이 견고하며, 반드시 이루고자 하므로 서원이라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동북아 불교권에서는 불교의식에서 빠질 수 없는 의례의 하나가 된 사홍서원의 출처가 《법화경》 〈약초유품〉이며, 이것을 천태가 현재와 같이 정리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누구도 천태스님과 유사한 언급을 한 불교사상가들이 없기 때문에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천태가 오늘날과 같은 사홍서원의 내용을 정립하는 과정에 《보살영락본업경》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천태 자신이 이 경전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보충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것을 소개하면 “첫째 아직 고뇌를 여의지 못한 자는 고뇌를 여의게 한다. 둘째 아직 악을 끊고 선을 닦지 않는 자는 악을 끊고 선을 닦길 원한다. 셋째 아직 안락을 얻지 못한 자는 안락을 얻게 한다. 넷째 아직 성불하여 열반을 얻지 못한 자는 성불해서 열반을 얻길 바란다” 등이다. 《보살영락본업경》의 내용은 사성제를 위주로 성립된 것이며, 이 경전 자체가 중국에서 편집된 것이란 점에서 오히려 《법화경》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가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천태가 이 경전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홍서원은 보살도를 완성하겠다는 서원을 지칭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서원은 자칫 구호에 그칠 수 있다. 그만큼 현실 속에서 실천윤리로 자리 잡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자신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조건 없이 헌신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점을 감안해 경전에서는 서원을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이 갑옷을 입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그와 같이 굳은 의지가 없다면 보살도를 완성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약초유품〉에 나오는 사홍서원은 구체적인 불국정토의 건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강령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강령을 완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방법이 다시 다양하게 설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법화경》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종다양한 인간군, 다양한 생명의 양태. 그러한 차별을 넘어 그들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며, 깨달음으로 인도해야만 한다. 존재의 세계에 사는 다양한 초목와석들에게 자비의 비를 뿌려야 한다는 경전의 비유를 사홍서원으로 완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 그것은 일체를 구별하지 않는 비와 같은 사랑이어야 한다. 조건 없이 뿌리되 넘치면 넘치는 대로 모라자면 모자라는 대로 법계의 구성원인 초목에 맡기는 것이다. 단 그들의 선택이 완전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감안하고 그들의 능력을 성숙시킬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다.
 
49. 보편성 바탕한 깨달음 완성의 예언
수기의 형태나 형식은 다양/《법화경》은 ‘깨달음’우선시
보살행 통한 수기의 보편화/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선언
 
〈수기품〉은 말 그대로 수기를 주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마하가섭, 수보리, 마하가전연, 마하목건련에게 수기를 주고 있다. 앞서 제2장 〈방편품〉에서 사리불은 〈방편품〉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에 눈뜨게 되며, 스스로 부처님의 진정한 자식이라는 자각을 하게 된다. 따라서 제3 〈비유품〉에서 사리불은 수기를 받으며, 자신 이외에도 설법을 듣고자 하는 성문들을 위해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간청한다. 이러한 간청에 의해 전개된 것이 화택의 비유와 장자궁자의 비유다.
화택의 비유와 장자궁자의 비유는 무한한 부처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며, 현실을 살아가는 중생들의 위치가 어디쯤에 있는가도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설법을 듣고 수보리, 마하가전연, 마하가섭, 마하목건련 등도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들이 올바로 깨달았다는 점을 〈약초유품〉에 나오는 삼초이목의 비유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수기품〉에 이르러 이들에게 수기를 주는 것이다.
마하가섭이 성불했을 때의 불명은 광명여래이다. 세상에 빛을 뿌려 어둠을 제거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나라의 이름은 광덕이며, 시대의 이름은 대장엄이다. 토상의 특징은 부정한 것이 없고, 청정한 환경을 지니며, 일체가 다 부처님의 법을 보호한다. 수보리가 성불했을 때의 불명은 명상여래다. 나라이름은 보생이며, 시대의 이름은 유보다. 토상의 모습은 마하가섭과 대동소이하다. 마하가전연이 성불했을 때의 불명은 염부제금광여래다. 토상의 특징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가 없고, 하늘과 인간 내지 여러 성문과 무수한 보살들이 그 나라를 장엄한다. 마하목건련이 성불했을 때의 불명은 다마라발전단향여래이며, 시대의 이름은 기쁨으로 넘쳐난다는 의미의 희만이다. 나라 이름은 심신이 쾌적하다는 의미의 의락이며, 토상의 특징은 하늘과 보살, 성문이 많다는 점이다.
어느 경우나 동일하지만 수기를 받는 데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을 일반적으로 인행(因行)이라 부르는데 각각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하가섭의 인행은 3백만억 부처님을 친견하고 받들어 공양했으며, 공경 존중 찬탄하고, 널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수보리의 인행은 부처님을 찬탄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범행(청정한 삶)을 닦았다는 점이다. 마하가전연은 8천억 부처님을 공양하고, 그들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 탑을 세웠으며, 그 탑묘에 꽃과 영락과 향료를 공양한 점이다. 마하목건련은 마하가전연과 비슷한 인행을 보이고 있다.
이상에서 〈수기품〉에 나오는 4대 성문에 관한 수기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그렇지만 여기서 우리는 수기에 대한 약간의 사전 지식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것이 수기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기는 범어 vyakarana란 말을 의역한 단어다. 보통 수결(授決), 수결(受決), 수기(受記), 기별(記別), 기설(記說)이란 단어로도 사용된다. 순 우리말로는 소식, 기별이라 말할 수 있다.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던 무관하게 현대적인 개념으로 풀이하면 예언이다.
《아함경》 등을 분석하면 초기불교시대에는 수기가 다양한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첫째는 죽은 자의 재생에 관한 수기다. 많은 사례가 경전에 보이고 있는데 현대적인 개념으로 접근하면 호스피스나 터미널캐어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사후에 어디에 태어날까에 대해 궁금해 하는 제자들이나 질문자들을 위해 주로 사용되고 있다. 두 번째는 깨달음에 대한 수기인데 기별이라 부른다.
이것은 다시 부처님 자신이 예언하는 것과 고도의 정신 단계에 도달한 수행자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예언하는 것으로 구별된다. 이상과 같이 수기의 형태나 형식은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법화경》에 나오는 수기는 ‘깨달음에 대한 예언’에 집중되어 있다. 재생에 관한 예언이나 자신의 운명을 미리 예언하는 것과 같은 수기의 형태는 나오지 않는다. 물론 수기는 대소승 경전을 통해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다. 《법화경》에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화경》을 수기의 경전이라 지칭하는 것은 수기가 전편에 걸쳐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성문과 보살, 그리고 수행자들이 수기를 받고 있다. 개별적으로 수기를 주는가 하면 집단적으로 한꺼번에 수기를 주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수기가 특별한 종교행위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종교 의식으로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법화경》에 나타난 수기의 형태가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다는 인식 아래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기 위한 전단계의 사상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불성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수기의 형식이 깨달음의 완성을 예언하는 것이며, 그 행위가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불성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것과 상통한다고 본 것이다.
사실 수기의 형식은 누구나 보살행을 닦으면 성불할 수 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수기가 보편화되었다는 점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5백생을 수행하지 않으면 성불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부파불교의 가르침을 뒤엎는 것이다. 또한 한 세상에 한 분의 부처님만이 존재할 수 있다고 가르쳐 온 대승 이전의 가르침도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이다. 동일한 시대에 수많은 중생들이 성불하게 되면, 수많은 부처님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깨달음이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 수행하는 사람, 보살도를 실천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란 점을 시사하며, 그런 점에서 출가자들의 부질없는 권위주의에 도전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법화경》 전편에 나타난 수기는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구성 요건을 다 갖춘 경우도 있지만 생략된 사례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점을 소개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법화경》의 수기 형식은 크게 인기(因記)와 과기(果記)로 구분할 수 있다. 인기란 수기를 받게 되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나타낸 것이다. 일종의 동기를 말한다. 과기란 수기의 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선 인기에 시절과 인행이 있다. 시절이란 요즘 말로 언제라는 의미이다. 인행이란 원인이 되는 행위, 즉 어떠한 일을 해서 수기를 받게 되었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과기는 내용이 많다. 이들을 세세하게 분류하면 불명(佛名), 겁명(劫名), 국명(國名), 토상(土相), 권속(眷屬), 불수(佛壽), 법주(法住), 불화(佛化)다. 성불했을 때 사용하게 되는 이름이 불명이다. 그때 교화하는 시기의 이름을 겁명이라 하므로 요즘 언어로 시대의 이름이라 말할 수 있다. 현대를 정보화시대라 부르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국명은 교화하는 세상을 지칭하며, 토상은 그러한 세상의 대체적인 모습을 말한다. 권속은 성불하여 교화할 때 함께 활동하는 보살이나 성문, 대중들을 말하며, 불수는 부처님의 수명을 지칭한다. 법주는 정법이나 상법이 지속되는 시간을 의미하며, 불화는 부처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교화할 것인가를 나타낸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깨달음의 보편화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차원에 있다고 깨우쳐 주는 점이다. 적어도 《법화경》의 수기 속에는 어떠한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서 어떠한 사람들과 어떻게 살겠다는 강한 미래지향적인 사고가 담겨져 있다. 오늘의 한국불교계와 같이 퇴행적이고 소극적인 역사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50. 법화행자가 현세서 건설하려는 이상세계
다양한 불국토 모습/진취적 역사의식 보여/보살도 위해 태어나
불국토 건설로 완결/
 
《법화경》은 서품을 비롯해 비유품, 수기품, 오백제자수기품, 학무학인기품, 법사품, 제바달다품, 권지품, 종지용출품, 상불경보살품, 묘장엄왕본사품 등에서 수기를 행하고 있다. 이들 중에서 수기품, 오백제자수기품, 학무학인기품은 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수기가 핵심 내용이다. 전술했듯이 《법화경》에 나오는 수기의 구체적인 내용은 일정한 형식을 구비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토상(土相)은 불국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토상은 불국토의 모습이란 말을 압축한 단어이며, 구체적인 내용은 일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수기를 받고 성불한 다음에 건설하는 불국토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개성이나 취향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토상을 통해 법화행자들이 꿈꾸던 이상적인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동시에 법화행자들이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도 있다. 적어도 그들은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세계관과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각각의 종교는 독자적인 이상세계를 피력하고 있다. 유교의 대동세계, 도교의 선경, 기독교의 천년왕국, 불교의 불국정토 등이 그것이다. 물론 각각의 이상세계는 소속된 신도들, 내지 각각의 종교가 성립하기 시작하던 당시 구성원들이 꿈꾸던 세계가 분명하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만큼 꿈꾸는 세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이상세계를 동경하고, 그러한 세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종교인들이 있는 한 다양하게 표현된 이상세계는 사회적 역동성과 사회변동의 추동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사회의 발전을 도모한다든가 아니면 사회의 혼란기에 정치개혁의 동력인으로 등장하는 종교적 영향이 바로 그것이다.
대체적으로 이상세계에 관한 인간의 태도는 실현가능성이란 차원에서 두 가지의 사회현상으로 표출된다. 하나는 인간세상에서는 실현이나 접근이 불가능한 초월적인 이상세계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경도된 종교인들은 관념화되거나 극단적인 현실 혐오라는 양태로 그들의 의지를 표현한다. 종교적인 집단 자살 내지 최후의 종말이 오는 날 모두 함께 휴거한다고 주장하는 것들이다. 불교에선 미륵상생신앙이나 서방정토신앙 등이 있다. 또 하나는 실현 방법이나 시기는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상에서 꿈꾸는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보는 지상천국운동이 그것이다. 기독교의 천년왕국운동이나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법화경의 수기사상에 나타난 불국토사상 등이 여기에 속한다.
기독교의 천년왕국사상은 그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을 의미하며,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이전의 전 단계는 모두 과정으로 정의한다. 다만 천년왕국에 도달하는 과정은 쉽지 않아서 끊임없는 시련과 시험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러한 난관을 뚫고 도달했을 때 비로소 천년왕국에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생각하는 가치는 천년왕국에 거주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항구적인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가 서양의 역사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간주한다. 적어도 서양이 전 세계 문명을 주도할 수 있게 된 사상적 배경에는 천년왕국이란 목적지를 향해 어떠한 난관도 헤치고 가야한다고 가르치는 기독교의 영향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을 향해 부단히 나가는 것이 발전이고 진보라 생각하는 점에서 직선적 역사관이라 지칭한다.
반면에 동양은 순환적 역사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근대문명을 태동시키지도 못했고, 현대문명을 주도하지도 못했다고 평가한다. 순환적 역사관은 출발점과 도착점이 동일하다고 본다. 초기불교, 노장, 힌두교, 선불교, 유교의 상고주의 등이 순환론적 역사관을 대표한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상세계는 이미 과거에 존재했었다고 말하며, 현실은 다만 인간들의 욕망과 무명 때문에 타락한 세상일 뿐이라 생각한다. 결국 우리가 가장 이상적인 세계에 살고 싶다면 과거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현실적인 발전이나 진보란 불가능하며, 이런 사고 속에선 문명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전통사상과 융합하면서 선불교 내지 중국에서 발생한 종파의 사상 속에 순환론적 역사관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파의 교의체계가 매우 관념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면이 강하다. 때론 현실도피적인 성향도 강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의식 있는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업력의 결과로 태어나 끝없이 윤회한다는 사고 내지 12연기설과 같은 현실 등이다. 물론 업설은 인과설과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윤회설과 결부되었거나 그러한 점만 부각된 점도 있다.
대승불교운동은 그러한 점을 불식시키기 위해 원력에 의한 출생을 강조하게 된다. 이미 수행을 완성해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삶의 양태 속에 안주할 수 있지만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때문에 자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보살행의 궁극적 귀착점이 불국토의 건설로 완결된다고 말한다. 《법화경》에선 수기에 수반되는 토상이 여기에 해당하며, 미륵경 계통에서는 미륵정토로 표현된다. 영국인 노만 콘이란 학자는 이런 점에서 미륵정토와 천년왕국설은 사상적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일본인 학자 스즈키 나카오도 동일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다. 이들의 주장은 대승불교의 역사의식이 순환론적인 것이 아니라 직선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다면 직선적 역사관 때문에 서양에서 근대문명과 현대문명이 발생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기품에서 말하는 마하가섭, 수보리, 마하가전연, 마하목건련 등의 토상은 대동소이하다. 즉 이들이 건설할 불국토는 ‘돌, 자갈, 구덩이 등이 없고, 평평하고 반듯하며 유리로 땅을 삼고, 보배나무로 장식했으며, 황금의 새끼로 여덟 갈래의 교차도로를 경계한다. 또한 꽃으로 대지를 덮고,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도가 없으며…진주의 꽃을 흩뿌리는’ 세계이다. 참고로 오백제자수기품에 나오는 부루나 존자가 건설할 불국토는 ‘삼천대천세계가 하나의 불국토로 되며, …칠보를 합해 만든 집들이 충만하며, 여러 하늘의 궁전이 허공에 머물러 있으며, 사람과 하늘이 교류하고 접촉해서 서로 볼 수 있으며, 여인도 없으며, 일체의 유정은 화생하기 때문에 음욕이 없고, 대신통이 있어서 몸에 광명이 나며,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정진과 기쁜 생각과 지혜가 있으며, 금색신으로 32상을 갖춘다. 그 나라의 중생은 항상 두 가지 음식인 법희식과 선열식을 먹는다’고 말한다.
혹자의 비판처럼 이러한 묘사는 비현실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법화행자들 내지 대승불교도들이 이룩하고자 염원했던 세상이다. 시공을 초월해 이러한 염원이 결집되었기에 오늘에 이르러 점차 그 꿈이 영글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 이룩되지 않은 것은 불교도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완성해야할 숙제인 것이다. 이제 적어도 불교가 소극적이며 도피적인 종교가 아니란 점을 직시해야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 속에서 완성하고자 노력하는 불교도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51. 현실 안고 가는 인간 본능에 충실/ 경전도 이성만 아닌 감성에 호소/ 방편은 진리 깨우치기 위한 수단/수단이 없으면 진실을 알 수 없어
 
〈화성유품〉 후반부에 나오는 화성의 비유를 설하기에 앞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법하고 계신다.
 
“비구들아, 만일 여래께서 열반하실 때에 이르러 대중들이 청정하여 믿고 이해함이 견고하며, 공법(空法)을 요달하여 선정에 깊이 든 것을 알면, 여러 보살들과 성문들을 모아 놓고 그들을 위하여 이 경전을 설하리라. 세상에 이승(二乘, 성문·연각)으로 얻는 멸도는 없고 다만 일불승만으로 멸도를 얻을 수 있느니라. 비구들아 마땅히 알아라. 여래께서는 방편으로 중생의 성품까지 깊이 들어가 그들의 뜻이 소승법을 즐겨하며, 오욕에 깊이 집착하고 있는 것을 아시고, 이들을 위하여 열반법을 설하시나니, 이런 사람이 들으면 믿고 받아 지니느니라”
 
이상의 인용문은 방편품의 핵심사상인 이승 방편, 일승 진실의 원칙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미련한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베풀어진 것이 《법화경》의 정법사상이며, 그 정법은 다름 아닌 방편설이란 점을 재삼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중생 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어떠한 것인가를 방편품과 마찬가지 화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수용할 수 있는 것도 현실 내지 이해관계와 부딪히게 되면 본능에 충실하려는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점을 숨기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본능이 우리들의 행복감이나 존재의 당위성을 충족시켜주거나 확인시켜주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방편설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경전은 이상과 같은 설법의 내용을 보다 쉬운 이야기로 풀어서 설명하고자 한다. 논리적인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란 표현이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이란 문구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다. 워낙 유명한 비유라 널리 알려져 있지만 대강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보배로 가득 찬 도시가 있었다. 그곳을 경전에서는 보소(寶所)라 표현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보배로운 성, 혹은 부처님이 사는 유토피아적인 도시라는 의미에서 불성(佛城)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이 성에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험난하고 사나운 길이며, 인적마저 끊어져 무섭고 두려운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길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도시였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절망의 무게만큼 희망의 끈도 있는 법이라 보배로운 곳으로 가는 길을 잘 아는 한명의 안내자가 있었다. 그 안내자는 매우 총명하여 그 길의 장단점뿐만 아니라 막히고 뚫린 모양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그곳에 가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길잡이가 되었다. 희망이란 별을 따기 위해 활기차게 출발한 사람들은 기나긴 여정에 지쳐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다.
여행자들의 심리를 파악한 길잡이는 이들을 위해 방편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따라서 도중에 한 성을 만들어 여행자들의 쉼터로 제공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되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라. 이제 큰 성에 들어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이니, 눈앞에 있는 성에 들어가면 몸과 마음이 안온해지고, 보배로 넘치는 유토피아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방편력으로 만든 성이기에 화성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모르는 여행객들은 화성을 바라보며 즐거움에 넘쳐 희희낙락하며 몸과 마음을 쉬고 있었다. 이들이 모두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한 길잡이는 여행객들에게 “여러분들의 눈앞에 있는 이 성은 그대들을 쉬게 하려고 내가 만든 것이다. 보물이 있는 도시가 여기서 멀지 않으니 다시 출발하자”고 말한다. 이 능수능란한 길잡이의 안내로 마침내 사람들이 보배의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비유를 마치고 나자 부처님께서는 “여래도 이와 같이 이제 너희들을 위해 위대한 길잡이가 되어 온갖 나고 죽고 번뇌하는 악도의 험난하고 멀고 먼 것을 여의게 하며, 제도할 바를 아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길잡이가 바로 부처님 자신이며, 수많은 여행객들이 중생들임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한 화성(化城)이란 실체가 없는 이승 내지 방편을 의미하며, 보성(寶城)은 일승 내지 진실을 의미한다. 방편이란 진실을 깨우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만 그 수단이 없으면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진실 못지않은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런 점에서 천태는 화성은 방편이요, 보소는 진실임에도 진실을 버리고 방편으로 품명을 삼은 이유에 대해 ‘성이 임시로 만들어진 것을 알면 보소가 진실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성으로 품명을 삼아도 진실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풀이한다.
화성의 비유에 대한 중국 법화사상가들의 풀이는 대략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천태는 화성이라는 글자를 축자적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화(化)란 신통력이 하는 일이다. 신통력 때문에 없는 것 속에서 홀연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無而有]. 그것을 이름하여 화라 한다. 그릇된 것을 막고 적을 방어하는 것이 성이다. 이어서 방편지의 힘 때문에 없는 것인데도 있는 것이라 설한 것이니 가르침을 쓰는 것을 화라 하고, 사혹을 방비하고 견혹을 막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풀이한다. 결국 화성이라 말할 때의 화는 실체를 지니지 않으면서도 많은 중생을 교화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파악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면 사혹과 견혹을 제거하고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축자적인 해석이 매우 관념적인 것 같지만 매우 현실적으로 그 의미를 풀이하고 있다. 참고로 사혹(思惑)은 수혹이라고도 하는데 사물의 차별적인 본래의 모습을 알지 못해 일어나는 번뇌를 지칭한다. 견혹(見惑)은 마음에 일어나는 번뇌 때문에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을 지칭하며, 견도에 의해 소멸되는 번뇌이다. 천태는 이러한 두 가지 번뇌가 공관(空觀)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고 말한다.
천태와 동시대에 활약한 길장은 《법화의소》 권8에서 화성의 비유에 대해 몇 가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첫째 세간의 삼매와 삼마발제 때문에 실제는 없으면서도 있는 척하는 증상만을 치료하기 위해 화성의 비유를 설했다. 둘째 성문인들이 작은 열반을 버리고 큰 열반을 얻도록 하기 위해 화성의 비유를 설했다. 셋째 방편을 열어 진실을 보이는 것을 체득했기에 집착이 끊어지고 의심이 없어지기 때문에 화성유품이라 부른다. 넷째 이승이 비록 다르지만 함께 견혹과 사혹의 번뇌를 끊고 함께 무위열반을 얻기 때문에 하나뿐인 성[一城]이라 이름했다.
당나라 때 활동한 규기는 화성의 비유를 설한 이유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상중근기의 무리는 법을 듣고 수기를 얻지만 하근기의 무리는 아직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과거에 이미 인연이 맺어졌음을 밝힌 것이다. 또한 현재의 작은 결과인 화성의 비유를 설한다. 과거의 원인을 말해 진실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둘째 일곱 가지 증상만 중에서 제4 유정인이 아직 열반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얻은 척하므로 이것을 치료하기 위해 화성의 비유를 설한다. 방편으로 열반의 성에 들어간 것인데 그것은 제선삼매(諸禪三昧)의 성이다. 이미 그 성을 지났으므로 대열반의 성에 들어간다. 중국 사상가들의 공통점은 매우 현실적이고도 수행 위주의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52. 표현 방법 다를 뿐 불국정토 건설 지향
 
경전에 의하면 대통지승부처님의 열여섯 왕자들이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으며, 대통지승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 이들은 부처님의 법을 계승한 제자들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시방세계에 퍼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헌신한다. 사유사방에서 각각 두 명씩 활동하며, 불국토 건설을 위해 헌신한다. 경전에선 열여섯 사미가 성불한 뒤의 부처님 이름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사유사방서 두 명씩 활동 《법화경》 통해 중생 교화
 
“그 부처님의 제자 열여섯 사미들은 지금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시방의 국토에서 현재 설법하되, 한량없는 백천만억 보살들과 성문들이 그들의 권속이 되었느니라. 그 가운데 두 사미는 동방에서 성불하였으니 첫째 이름은 아촉으로 환희국에 계시고, 둘째 이름은 수미정이니라. 동남방의 두 부처님은 그 첫째 이름이 사자음이요, 둘째 이름은 사자상이니라. 남방에 계시는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허공주이며, 둘째 이름은 상멸이니라. 서남방의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제상이요, 둘째 이름은 범상이니라. 서방의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아미타요 둘째 이름은 도일체세간고뇌이니라. 서북방의 두 부처님은 첫째 이름이 다마라발전당향신통이며, 둘째 이름은 수미상이니라. 북방의 두 부처님은 그 첫째 이름이 운자재요 둘째 이름은 운자재왕이니라. 동북방의 부처님 이름은 괴일체세간포외이며, 열여섯째 부처님은 나 석가모니불이니, 이 사바세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였느니라”
 
이들은 한결같이 《법화경》을 설하여 중생을 교화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경전의 가르침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법화경》을 연구하는 대다수의 수행자나 학자들은 단순한 부자관계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 대목이 《법화경》의 정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대목이라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시방에 거주하는 범천왕들과 열여섯 왕자들이 대통지승부처님께 설법을 청한 이후 열여섯 왕자들이 출가하여 사미가 된다. 이들은 마침내 성불하여 대통지승부처님께서 입정에 들어간 사이 《법화경》을 설해 무수한 중생을 교화하며, 나아가 시방의 곳곳에서 권속들을 교화하며 불국토의 완성을 위해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 시방이라는 일치점,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일관하는 영원성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의 함의가 심상하지 않다고 본다.
 
"시방이라는 공간적 일치점과 과거·현재·미래로 일관하는
영원성 등 이 구절의 함의에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인용한 문장에 등장하는 부처님의 성격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아촉불은 Aksobhya란 말을 음역한 것인데 ‘흔들리지 않는’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부처님이 이룩한 불국토의 이름이 환희국이다. 최초로 아촉불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아촉불국경》이며, 일반적으로 원시대승경전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옮겨가는 과정 중에서도 최초기에 등장하는 대승경전이지만 아직 완전하게 대승사상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 시원성을 강조하여 원시 대승경전이라 말한다. 이후 이 부처님의 이름은 《소품반야경》, 《도행반야경》 등의 반야부 경전이나 《유마경》 등의 대승경전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미정이란 수미산의 정상, 꼭대기란 의미를 지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다른 어떠한 성인보다 존귀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여래 십호 중의 하나인 세존이란 의미와 상통한다. 사자음이란 사자의 포효란 의미인데 백수의 제왕인 사자가 울부짖으면 다른 짐승들의 울음은 사그라지듯이 부처님의 설법이 모든 가르침 중에서 최고임을 나타낸다. 사자상이란 원어는 Simhadhvaja 인데 여기서 dhvaja는 깃발, 표식, 상징이란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사자라는 표시, 상징, 깃발이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허공주는 허공에 안주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허공처럼 걸림없는 무집착 공의 세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멸(常滅)이란 항상 완전하고 원만한 열반에 들어가 있다는 의미이며, 제상(帝相)은 인드라의 깃발 내지 표식이란 의미이다. 범상(梵相)은 범천의 깃발 내지 표식이란 의미이다.
 
53. 발생지역 같지 않아 대승경전 성격 달라
 
아미타불은 여기서 Amitayus(無量壽: 영원한 시간이란 의미)를 번역한 말이지만 Amitabha(無量光: 무한한 빛이란 의미)라고도 말한다. 한역에서는 두 가지 모두 아미타라 번역된다. 《무량수경》, 《아미타경》, 《관무량수경》에 언급하고 있듯이 서방극락세계의 부처님이다. 정토신앙의 근본이 되는 부처님이시며, 《법화경》에서는 이곳 이외에 〈약왕보살본사품〉에도 나온다. 대승불교의 사상적 흐름 속에서 타력신앙의 소의경전이라 말할 수 있다. 특히 《아미타경》은 최초기에 등장하는 대승경전 중의 하나로 학자들은 간주하고 있다. 도일체세간고뇌불이란 일체의 세간과 고뇌를 제도하는 부처님이라 해석되는데 원어상으로는 ‘일체 세간의 재화와 공포에서 벗어난’이란 의미이다. 구원의 주체성을 강조한 번역이라 말할 수 있으며, 대승보살사상의 영향이 보이고 있다. 다마라발전당향신통이란 향료로 사용되는 타마라 잎과 전단향과 같이 향기로운 신통력을 보여주는 부처님이란 의미를 지닌다. 수미상이란 원어가 Merukalpa인데 수미산과 같이 웅장하고 출중하다는 의미를 상징한다. 운자재란 원어가 Meghasvaradipa인데 이 단어는 ‘구름처럼 울려퍼지는 등불’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운자재왕이란 ‘구름처럼 울려퍼지는 등불 중의 으뜸’이란 의미를 지닌다. 괴일체세간포외란 ‘일체세간의 공포나 두려움을 소멸시켜주는 부처님’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상의 소개한 내용을 정리하면 열여섯 사미가 성불하여 활동하는 내용은 첫째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중생들의 길잡이가 되어주며, 그 위의는 걸림없는 공의 세계에 있다는 점이다. 둘째 길잡이는 자비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중생들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일이며, 그들이 공포감을 지니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일이다. 셋째 그것은 타마라나 전단향처럼 사회를 위해 향기로운 일이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빛으로도 표현된다. 넷째 이러한 일은 쉽지 않기에 비상한 결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그렇기에 과정 중에 흔들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표현상의 차이를 불구하고 전체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불국정토를 건설하기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따라서 모두 대통지승부처님의 한 핏줄을 이은 자식들이라 말할 수 있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의식의 차이는 다양성 못지않게 갈등의 요인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대목을 교단사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이 《법화경》의 정신을 현양하는 일이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즉 대승불교운동은 광대한 인도 대륙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동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아가 각 지방의 문화와 풍속이 달랐기 때문에 불교를 수용하여 소화하고, 그것을 대승불교운동으로 승화시키는 방식도 역시 달랐다. 대승불교경전의 성격이 동일하지 않은 것이 이러한 인도불교사의 일단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과 의식의 차이는 다양성 못지않게 갈등의 요인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존의 부파교단과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갈등이 생겨났으며, 대승불교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운동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물밑 경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단의 발전과정에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현상들이었다. 법화운동가들은 이러한 점에서 새로운 요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양성을 인정하되 그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16왕자의 출가와 성불, 그리고 대통지승부처님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16왕자가 다양한 대승불교운동을 상징한 것이라면 대통지승부처님은 그 통일성, 귀일성(歸一性)을 상징하는 것이다. 바로 《법화경》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르침이다.
 
54. 오백제자 수기품
 
오백제자 수기품의 특징은 부루나 존자를 비롯해 천이백 명의 아라한에게 수기를 주는 장면이다. 처음에는 부루나 존자 개인에게 수기를 주는 것에서 시작해 천이백 명의 아라한에게 집단으로 수기를 주고 있다. 여기서 잠시 의문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천이백 명의 아라한에게 수기를 주면서 품의 제목을 ‘오백제자 수기품’이라 이름하고 있는 점이다. 경전의 내용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천이백 명의 아라한 중에서 우선 오백 명의 대표적인 아라한에게 수기를 주고 나머지 칠백 명의 아라한에게도 수기를 주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오백 명을 대표하는 아라한 중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성불한 이후 처음으로 녹야원에서 설법할 때 교화를 받아 아라한이 된 아약교진여가 있다. 이후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우루빈나가섭, 가야가섭, 나제가섭의 삼형제도 있으며, 기타 아니루타와 가루타이, 우타이 등도 있다. 이들은 모두 최초기의 불교교단을 형성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부처님의 대표적인 제자들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품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인생의 희로애락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삶의 아픔들이
어둠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몰아내고 빛으로 충만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보명이다" 오백제자 수기품의 내용에서 부루나존자와 천이백 아라한들이 개별적인 수기와 총수기(집단적인 수기)를 받는데 두 가지의 두드러진 특징이 보이고 있다.
 
첫째는 부루나 존자가 성불하여 활동하게 되는 시대의 이름이 보명(普明)이라는 점이다. 동시에 천이백 아라한이 성불하여 얻게 되는 부처님의 이름 역시 보명(普明)이다. 결국 보명이란 점에서 부루나와 천이백 아라한은 공통의 속성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보명(普明)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밝음을 널리 펼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인생의 희로애락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다양한 삶의 아픔들이 어둠이라면 이러한 것들을 몰아내고 빛으로 충만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보명이다. 수행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내면에 충만한 생명의 에너지를 찾아내어 자리이타의 보살정신을 구현하는 것이다.
 
내면의 생명 에너지 찾아내 자리이타의 보살정신 구현
 
둘째 《법화경》에 나타난 수기사상의 일반적인 특징이지만 수기를 받고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수나라 때 활동한 길장 스님은 바로 우리들 내면에 가득 차 있는 본질적인 생명의 빛이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이 생명의 빛은 어떠한 중생이나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수기를 주는 일이 가능하다고 본다. 이 존재 일반이 지니는 ‘근원적인 생명의 빛’을 불교적인 용어로 불성이라 표현한다. 부루나와 천이백 아라한, 그리고 다른 품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수기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점을 수기라는 의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수기는 단순한 종교적 의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체 생명의 절대적 평등성을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초기불교 이래 이어져 온 조건 없는 자비의 실천과 예외 없는 자율성을 중시하고자 하는 법화행자들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경전에선 “이와 같이 점차로 수기하거늘/ 내가 장차 멸도한 뒤에는/ 누구든 반드시 성불하리니”라 말씀하고 있다. 부처님께 수기를 받은 천이백 아라한의 기쁨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흔히 환희용약(歡喜踊躍)이란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 말은 ‘뛸 듯이 기뻐하며 춤을 춘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기쁨을 맛본 아라한들 중에서 오백 명의 대표적인 아라한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우쭐했던 일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반성하고 있으며, 그러한 반성을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즉 ‘옷 속에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구슬이 있었는데도 모르고 지냈던 어리석은 사람’과 마찬가지였다는 점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친구 집을 찾아가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마침 볼일이 있어서 집 주인이 출장을 가게 되었다. 가난한 친구를 생각해 집 주인이 값을 알 수 없는 소중한 보주(寶珠)를 잠든 친구의 옷 속에 달아주고 가게 되었다. 얼마 후 술에서 깨어난 가난한 친구는 자신의 옷 속에 엄청나게 비싼 구슬이 있는지도 모르고 궁핍한 생활을 하며 고생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우연히 옛 친구를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모습이 초라하며,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이에 구슬을 주었던 친구가 말했다. ‘네가 고생할까봐 비싼 구슬을 주었거늘 어찌하여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는가?’라고. 영문을 모르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의아해 하는 친구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입고 있는 옷 속을 찾아보니 그 구슬이 여전히 달려 있었다. 이에 ‘너는 그것도 모르고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고생하고 번뇌하며, 구차하게 살고 있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나. 이제 이 보물로 필요한 것들을 사들인다면 항상 흡족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라 말한다.” 그제서야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깨닫고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백 명의 대표적인 아라한들은 지난날 자신들이 우쭐했던 일이 매우 어리석었음을 ‘의리계주(衣裏繫珠)의 비유’로 설명하고 반성하고 있다 "
 
이 이야기는 우리 내면에 지니고 있는 불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설법으로 유명하다. 동시에 후대 선종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나라 때 활동한 마조 스님과 그의 제자인 대주 혜해 스님과의 대화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혜해 스님이 마조 스님에게 ‘어느 것이 저의 보배입니까?’라고 묻자 마조 스님은 ‘지금 나에게 질문하는 자가 바로 너의 보배이다. 일체를 갖추고 있으며, 조금도 흠결이나 부족함이 없다. 자유자재로 사용하는데 어째서 바깥에 의지하여 찾고 있는가?’라 대답한다. 진정 소중한 것은 내면에 충만한 빛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 빛은 태양보다 훨씬 빛나는 것이며, 우리들의 삶에 당당함과 행복의 안내자가 될 수 있다. 의리계주의 비유와 상통하는 설법이다. 그렇지만 비유에 대해 우리들은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식할 수 있으며, 다른 종교체험을 통해 각각의 인생에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의리계주 속에 나타난 상징성을 알아보는 것도 가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해서 천태 스님의 풀이를 간략하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천태 스님은 이 비유를 자세하게 해설하고 있다. 즉 비유의 내용 중에서 ‘어떤 사람이란 성문과 연각의 이승에 빠져 있는 사람’이며, ‘친구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보살’이며, ‘집이란 대승의 가르침’이라 해석한다. ‘술에 취해 잠들었다는 것은 대승을 향하는 근기가 약간 움직이고 무명이 잠시 억제되어 경을 듣자 내심으로 작은 깨달음이 있었더라도 무명업장이 워낙 두터운 까닭에 도리어 다시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라 본다. 공적인 일이 있어 출장을 가게 되었다는 구절에 대해선 ‘다른 곳에서 교화할 중생이 생겨서 인연 따라 가서 감응한 것’이라 풀이하고, ‘값을 정할 수 없는 보배 구슬’이란 일승의 실상(實相)과 진여를 깨달아 얻게 되는 지혜로 해석한다. ‘옷 속에 매달아 주었다’는 것에 대해 참회와 인욕으로 성냄을 제지하는 것은 겉옷이며, 믿음으로 선근을 감싸는 것은 속옷으로 풀이한다. ‘술에 취해 보주를 달아 주는 것도 몰랐다’는 것은 무명이 두터워 대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한 것이라 본다. ‘타국을 돌아다니며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구차한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는 구절에 대해 ‘대승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타국에서 방황하는 것’으로 보고, ‘선근이 발생하여 고뇌를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게 되는 것’을 일어나 돌아다니며 의식주를 구하는 것이라 보았다. 다시 친구를 만나 그가 준 구슬을 보게 되며, 비로소 그 구슬을 팔아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사서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구절에 대해선 ‘친구를 만나자 그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것’은 정신적인 집착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의심을 일으키는 것에 비유하고 있으며, ‘구슬을 찾아 보여 준’ 것은 숙세의 인연을 비유한 것이며, ‘구슬을 팔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은 수기를 받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비유한 것이라 본다.
 
55. 깨침과 무관한 수기<授記>, 佛性 평등 강조
 
수학무학인기품은 품명에서 알 수 있듯이 유학이나 무학의 경지에 있는 수행자들도 성불할 수 있다는 수기를 받는다. 성불이란 부처가 된다는 의미이지만 그것은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영광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수행했지만 부처가 된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많아야 일세에 한 분의 부처님이 탄생할 뿐이라 보았다. 그것이 부파불교 이전까지 불교계에 상식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데 《법화경》은 유학(有學) 내지 무학(無學)의 단계에 있는 수행자들 뿐만 아니라 누구나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는다고 가르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부연 설명을 하자면 유학자(有學者)란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는 수행자란 의미를 지니다. 반면에 무학자란 더는 배울 것이 없는 수행자란 의미를 지닌다. 유학자란 이미 불교의 진리인 사성제의 이치를 자각하고는 있지만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항상 계정혜 삼학을 닦는 과정에 있다는 의미이다. 초기불교의 수행에서 말하는 사향사과(四向四果) 중에서 아라한과를 제외한 일곱 단계에 있는 수행자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쉽게 말하면 유학자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수행자 전체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반면에 무학자란 사향사과 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아라한과를 체득한 사람을 말하며, 이미 부처가 된 사람, 혹은 성불한 사람이라 표현할 수 있다.
 
2천명의 학·무학인들 부처님 집단수기 받아
 
수학무학인기품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째는 아난과 라훌라가 부처님에게 수기를 받는 장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면서도 다문제일로 알려진 아난과 당신의 아들인 라훌라가 수기를 간청하고 있으며, 이들을 가엾게 여겨 수기를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석가모니부처님과 아난이 전생에 도반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전에선 “여러 선남자들아, 나는 아난과 함께 공왕불 계신 데서 함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었다. 아난은 항상 잘 듣고 많이 듣기를 좋아하였으며, 나는 항상 부지런히 정진한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었다. 그리고 아난은 내 법을 보호 유지하며, 또한 장래에 여러 부처님의 법장을 보호하여, 모든 보살들을 교화하여 성취시키리니 그 본래의 소원이 이와 같으므로 수기를 주느니라.”라 말한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근면하게 수행 정진하는 것과 가르침을 듣기 좋아하고 그 가르침을 보호하는 일은 모두 성불의 첩경임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깨달음의 선후는 있을 지라도 궁극적으로 성불할 수 있다는 점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에서 아난과 라훌라가 다른 성문 제자들 보다 늦게 수기를 받은 것은 육친이란 혈육의 정에 이끌렸기 때문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인 해석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제자들의 나이나 수행 경력을 감안하면 적당한 안배라 본다. 두 번째 이천명의 학무학인들에게 수기를 주고 있는 장면이다. 이들은 부처님에게 집단적인 수기를 받는데 성불한 뒤의 이름은 공통적으로 보상(寶相)여래라 한다. 보상여래는 범어로 라트나케투라자라 하는데 ‘보배로 찬란하게 빛나는 임금’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삼보를 널리 알리는데 최고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삼보 중에서도 법보를 구현하는데 최고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보배로운 모습이란 의미의 보상(寶相)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들 이천명의 학무학인들은 마음을 부드럽고 고요하며 청정하게 하되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수기를 받고자 했기 때문에 마침내 수기를 받게 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중요한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으므로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유학자와 무학자에게 동시에 수기를 주고 있다는 점이다. 교리적으로 입장에서 본다면 무학자는 이미 성불한 것이므로 새삼스럽게 수기를 주거나 받을 필요가 없다. 아라한과를 체득하지 못한 유학자의 입장에선 반드시 수기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전혀 상반된 입장을 지니고 있는 유학자와 무학자에게 동시에 수기를 주는 차원을 넘어, 동일한 불명(佛名:부처님의 명칭)을 주고 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이 유학자의 과정을 거쳐 무학자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며, 무학자의 경지에 도달하면 아라한과를 얻은 것이 되므로 이미 성불한 것이 된다. 아라한이라 부르는 것이 이미 부처님의 다른 칭호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학자와 무학자를 구분하지 않고 동시에 집단적으로 수기를 주고, 동일한 불명을 사용하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불성은 어디에나 존재 구원의 보편성 나타내
 
이것은 이미 설명한 바가 있듯이 수기라는 의식이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전제 아래 진행된다는 점이다. 불성이 없다면 수기를 주어도 성불할 수 없으니까 수기란 단어는 바로 불성이란 단어와 상통한다고 본다. 이런 점을 불성의 편재성이라 말한다. 편재성이란 불성은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이다. 무생물에도 있고 생물체에도 있다. 산에도 들에도 마굿간에도 존재하며, 뒷간의 구더기에게도 있다. 없는 곳이 없다는 것을 편재성이라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불성이 어디에나 있다고 강조하는 점은 바로 종교학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구원의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구원은 특정한 누구, 혹은 계급이나 성별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마음을 한 번 돌리는 순간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게 되며,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이 된다. 이런 것을 회심(回心)이라 표현하는데 어떠한 계기나 동기가 주어지면 종교적인 심성을 지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천명의 학무학인들에게 공평하게 수기를 준 것은 불성의 편재성과 평등성을 고려하면 너무나 당연한 설법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불성을 평등하게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깨달음의 유무를 떠나 수기를 받을 자격이 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란 점이다. 그런 점에서 수기는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의미와 앞으로 깨달음을 성취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천명의 학무학인들은 부처님께 수기를 받고 너무나 기뻐 뛸 듯이 춤추며 부처님을 찬양한다. 찬양하면서 수학무학인기품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지혜의 밝은 등불이신 거룩하신 세존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수기의 음성 듣고/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하네/ 마치 감로의 단비를 퍼붓는 것과 같네/ 우리들은 성불할 수 있으니/ 다시는 의심과 미혹이 없네/ 이 수기 주심을 들었기 때문이니/ 우리들은 이제 복덕과 이익을 얻네”
 
이천명의 합창으로 이상과 같은 찬송을 하고 있는 수행자들의 모습을 그려보자. 그러면 반드시 그 중에 우리 자신도 섞여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공을 초월해 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며, 그분의 가르침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복되게 했다는 사실 역시 동일하기 때문이다. 희망에 넘쳐 우러나오는 찬탄이기 때문이다. 못난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듣고 구언을 받았다는 기쁨이다.
 
56. 중생구제 원력 세우고 현생한 존재
 
법사품에는 다섯 가지의 법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법화경》을 수지, 독, 송, 해설, 서사하는 사람은 모두 법사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파격적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법사란 일반적으로 출가한 사문, 즉 스님들을 지칭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사품에선 법사를 출가자만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법화경》을 수지, 독, 송, 해설, 서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법사라 규정하고 있다. 물론 이들이 누구나 법사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법화경》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 적어도 글을 모르면 암송이라도 해야 법사가 될 수 있다. 다만 출가자에 국한되어 있던 법사란 칭호가 재가자에게까지 문호가 개방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법사는 모두 원력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철저하게 자각한 존재란 사실을 암시한다"
 
오종 법사로 일컬어지는 수지, 독, 송, 해설, 서사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법화경》을 받아 지니는 것, 소리 내어 읽는 것, 암송하는 것, 남을 위해 경전을 풀이해 주는 것, 베껴 쓰는 것 등이다. 초기불교시대부터 부파불교시대까지 경전을 수지하는 것은 출가한 스님들의 고유한 일 중의 하나였다. 더구나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는 받아 지니는 것과 독송하는 것은 구분되지 않았다. 스님들이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는 경전을 암송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불멸후 100년을 지날 쯤이면 암송에 전적으로 의지하던 경전을 문자로 기록하게 되며, 그런 다음에 소리 내어 읽는 것이나 해설하는 것, 내지 베껴 쓰는 것이 중시되기에 이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소리 내어 읽는 것과 해설, 서사는 경전이 문자로 편집된 이후에 강조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전법의 중시와 인쇄기술의 열악함에서 서사(베껴 쓰는 것)를 강조하게 된다. 이어서 대승불교의 흥기와 경전숭배 사상의 보편화는 《법화경》처럼 다섯 가지 법사를 강조하기에 이른다.
 
법사품에서는 법사에 대해 특별한 설법을 하고 있다. 오종 법사 내지 《법화경》을 공경 공양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부처님의 장엄으로 스스로 장엄함과 같으며, 여래의 어깨에 실린 바가 되어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따라 예배하며, 일심으로 합장하고 공경하고 공양하며 존중 찬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종법사들이 부처님처럼 대중의 존중을 받을 공덕을 지닌다는 점을 의미한다. 부처님처럼 존중받을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 보다 강인한 의지와 투철한 사명감, 신심, 열정이 없으면 안 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여 경전에서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법사는 원력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란 점을 강조한다. 불교에는 태어나는 방식이 두 가지가 있다. 업력에 이끌려 태어나는 것과 원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 업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을 업생(業生)이라 하는데 이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살아생전에 자신이 지은 업력에 의해 태어나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으며, 존재의 당위성을 자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내 던져진 존재(피투성의 존재)’라 말한다.
반면에 원력에 의해 태어났다는 것은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선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말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최대한 존중받고 발휘했다는 점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철저하게 자각한 존재들이라 말할 수 있다.
 
자기 의지와 선택으로 태어나 자유의지 최대한 발휘
 
법사품에서 말하는 법사는 모두 원력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라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의 당위성’을 철저하게 자각한 존재란 사실을 암시한다. 경전에선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법한다. “이들은 일찍이 십만억 부처님을 공양하고, 여러 부처님이 계신데서 큰 서원을 성취하고 중생을 가엾이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거나 “중생을 불쌍히 여기어 이 세상에 태어나길 원했으며, 《법화경》을 널리 분별하여 설하거늘, 하물며 받아 지니며 가지가지의 좋은 물건으로 공양하는 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 약왕아, 이런 사람은 청정한 업보(業報)를 스스로 버리고 내가 멸도한 뒤에도 중생을 불쌍히 여겨 악한 세상에 태어나서 이 경전을 연설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고 설하고 있다.
 
법사가 원력에 의해 태어난 것이라 말하는 경전의 설법은 법사들이 ‘존재의 당위성’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들이 자각하고 있었던 존재의 당위성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바로 미혹 속에 헤메고 있는 중생을 가엾게 여겨 그들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 그런데 그들을 구제하는 수단으로 《법화경》을 의지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선언이다. 또한 중생을 구제하고 《법화경》을 널리 연설하기 위해 ‘청정한 업보’를 버리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말한다. ‘청정한 업보’란 수행을 완성하여 다시는 윤회의 흐름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을 위해 자원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둘째, 법사는 스스로 여래의 사자(使者:심부름꾼)이며, 여래가 해야할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자각을 강조한다. 즉 “선남자, 선여인이 내가 멸도한 뒤 은밀히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법화경》의 한 구절을 말해 준다면, 이런 사람은 바로 여래께서 보낸 심부름꾼으로 여래의 일을 행하는 줄 알아야 하나니, 하물며 대중 가운데서 많은 인간을 위해 설법하는 것이야 말할 것이 있겠느냐?”고 말한다.
이 구절은 법사가 여래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신념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부처님의 영원성과 중생의 구원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함축되어 있다. 즉 부처님을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초월자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문제는 시공을 초월하는 것은 그분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것이니까 탓할 일은 아니지만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대리자란 개념이 활용된다. 즉 부처님을 대신해 시공 속에 등장해 중생을 구제하는 일에 전념한다는 생각이다. 법사품에선 바로 법사가 부처님의 대리자가 되어 있다. 다른 대승경전에선 화신불(化身佛)이라 말한다. 그런데 법사품에선 부처님의 화신이 바로 법사란 의미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의 일을 하면서 보살행의 삶을 살면 부처님의 격려와 보호 속에서 불타의 마정수기를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일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법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여래께서는 이들을 당신의 옷으로 덮어주며, 항상 이들을 보호해 준다. 이들은 위대한 믿음의 힘과 강고한 원력의 힘, 여러 가지 선근의 힘을 갖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법화경》을 설했을 때 따르는 무리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무리 역시 많다는 현실적인 상황 때문이다. 따르지 않고 방해를 일삼는 무리 역시 많다. 그래서 믿음과 원력과 선근의 힘이 있어야 한다. 바로 법사가 정신적으로 무장할 때 필요로 하는 무기들이다. 그래서 법사는 “항상 여래와 함께 살고, 여래의 손으로 그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것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일을 하면서 부처님과 함께 살면 부처님의 격려와 보호 속에서 부처님의 마정수기를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이다.
 
57. 법화행자의 세 가지 마음자세
 
법사품은 《법화경》에 대한 다섯 가지 법사를 설한 뒤에, 이 경전을 널리 알리거나 이 경전에 의지해 수행하는 법화행자들이 어떠한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에 대해 설하고 있다. 흔히 ‘홍법의 삼궤’라 하는데 이것은 법을 널리 알릴 때의 세 가지 규칙이란 의미를 지닌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거듭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지만 너무나 의미가 깊기 때문에 예로부터 중요시해 왔다.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께서 열반하신 뒤에 사부대중을 위해 이 《법화경》을 설하고자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선남자, 선여인은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사부대중을 위해 이 경전을 널리 설할지니, 여래의 방은 일체중생 가운데 대자비심이요, 여래의 옷은 부드럽고 온화하고 인욕하는 마음이며, 여래의 자리는 일체 모든 존재가 공(空)한 것이니, 이런 가운데 편안히 머물러 있으면서 게으르지 않는 마음으로 여러 보살과 사부대중을 위해 이 《법화경》을 널리 설할지니라”
 
"대자비심, 부드럽고 온화하며 인욕 하는 마음, 일체
모든 존재를 연민의 정으로 포용하는 것"
 
길게 인용했지만 이상의 문장 중에서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가 바로 《법화경》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법화행자들이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이다. 이것을 윤리적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홍법의 삼궤(三軌)’라 불러온 것이다. 대자비심, 부드럽고 온화하며 인욕하는 마음, 일체 모든 존재를 공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 등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세 가지에 대해 부연 설명을 덧붙이기로 한다.
첫째, 여래의 집 혹은 여래의 방을 대자비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자비심이란 타인을 나와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천태는 자비를 세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중생자비, 법연자비, 무연자비가 그것이다. 이들 중에서 중생자비와 법연자비는 자비의 핵심이 특별한 이유나 조건에 의거해 치우쳐 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자비라 할 수 없다고 본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만들게 되는 숱한 인연 속에서 조건을 가리지 않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분명하지만 부처님의 진정한 사랑은 중생에 대한 연민에서 출발하여 그들을 감싸주고 편안하게 해 주며, 그들이 모두 행복하길 바라는데서 끝나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자비를 무연자비라 부른다. 이것은 대상을 가리지 않는 조건 없는 자비의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다. 서구적인 개념을 빌리면 이기적이고 선별적인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 조건 없는 아가페적 사랑이다. 따라서 법화행자는 대상과 조건을 가리지 말고 사랑을 실천해야 하며, 그러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여래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인 것이다.
 
일체법이 空이라는 마음/ 조건없는 아가페적 사랑 /온화하며 인욕하는 자세
 
둘째, 여래의 옷을 부드럽고 온화하며 인욕하는 마음으로 설명한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가 걸린 일에 민감하며, 근본적으로 다섯 가지로 대표되는 욕망에 집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성적으로는 옳다고 동의하는 일에 대해서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혹은 이기심 때문에, 아니면 기타 다른 이유로 인해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현실 속에서 법화행자들의 고상한 생각이나 행위가 100% 존중받을 수는 없다. 생각의 차이로 인해, 혹은 이해관계에 따라 심각한 갈등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할 때 법화행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거나 대립과 갈등 속에 빠져들어 간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일은 보다 어려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부드럽고 온화하며 인욕하는 마음 자세는 종교인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법사품 안에는 이미 구체적인 사례가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쁜 말로/ 훼방하고 욕을 하며/ 칼과 막대기와 돌로/ 때리고 던지어도/ 지혜 신통 갖추신/ 부처님 생각으로/ 그 모든 고통을/ 다 참을 수 있어야 하느니라”고 설하고 있다. 게송에 나오는 문장이지만 법사품이 편집되던 시기에 법화행자들이 특정한 대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학자들은 ‘대승불교운동의 전개는 기존 부파교단의 강한 비판과 반발에 부딪히며, 그로 인해 대승불교도들이 많은 핍박을 받았다’고 본다. 바로 그러한 점이 여래의 옷이란 상징적인 개념을 탄생시킨 직접적인 원인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작은 실례에 불과하다. 법을 전파시킨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와 문화 사이의 갈등을 야기하기 때문에 보다 심각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중국에 불교가 처음 들어와 토착화하는 과정에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들이 바로 그러한 점을 말해 준다. 그렇게 보면 부드럽고, 온화하며, 인욕하는 것 이외에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말없이, 말없이 실천해야 한다.
셋째, 여래의 자리를 일체법공(一切法空)이라 풀이하고 있다. 일체의 법이란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의 육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일체의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때 법이란 물질적인 것과 물질이 아닌 것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것도 있지만 꿈이나 상상력, 내지 생각과 같이 인식할 수는 있지만 구상적이지 않은 대상들도 있다. 그러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다. 공이란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는 불변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공이란 단어의 개념은 대승불교가 전개되면 무집착이나 무분별, 내지 무소유의 의미로 확장되어 사용된다.
 
"법을 전파하는 데는 사람과 사람의 문제를 넘어, 문화와 문화 사이의 갈등을 빚기 때문에 때로는 심각한 저항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래서 일체법공이란 구절을 다시 정리하자면 그것은 육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집착할 대상이 아니며, 분별의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음을 공하게 만드는 것에서 일체 생명의 본질적인 가치를 느끼게 되며, 그러한 생명들은 어느 것이나 절대적으로 평등하다는 평등성을 체득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 일체법이 공이라고 바라보는 마음 자세 속에서 대자비심을 구현하고, 부드럽고 온화하며 인욕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는 것이다.
 
이상 설명한 홍법의 삼궤에 대해 천태 지의는 두 가지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첫째는 일반적인 해석이며, 두 번째는 특별한 해석이다. 일반적인 해석에서 천태는 “비(悲:가엾어 하는 마음)는 일체의 고뇌를 뽑아버리는 것이다. 4취, 3계, 2승보살 등의 고뇌를 말한다. 자(慈:어여뻐 하는 마음)는 일체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인천의 열반이 영원한 것 등의 즐거움을 말한다. 부드럽고 온화한 옷은 일체의 나쁜 것을 가리는 것이다. 4주의 미혹과 무지와 무명 등의 나쁜 일을 말한다. 공한 자리란 일체의 형상(관념적 편견)을 없애는 것이다. 유상(有相), 무상(無相), 비유상(非有相), 비무상(非無相)을 말한다”고 풀이한다. 특별한 해석에서는 “자비는 일체의 선을 생기게 하고, 부드럽고 온화한 것은 일체의 악을 막아주며, 공한 자리는 일체의 형상을 쓸어 없앤다. 자비와 인욕에서 일체의 복덕이 생기며, 공한 자리에서 일체의 지혜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모두 《법화문구》에 나오는 말들이다.
 
佛法 실천 통한 불국정토 구현 상징
 
법사품의 말미에서 《법화경》을 전파하는 사명을 담당할 법사들이 지켜야할 원칙 세 가지를 강조한다. 홍법의 삼궤로 알려진 ‘여래의 방, 여래의 옷, 여래의 자리’이다. 이에 대한 설법이 끝나자 부처님 앞에 칠보로 만든 보탑(寶塔)이 땅에서 솟아나와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화려하게 장엄된 보탑 속에서 “능히 평등한 큰 지혜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며, 부처님께서 보호하고 생각하시는 《법화경》으로 대중을 위해 설법하시니, 이와 같이 석가모니 세존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진실”이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일에 대중들이 모두 놀라 기이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있을 때, 대요설보살이 부처님께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선 “이 보탑 안에는 여래의 전신이 계시는 것과 같다. 오랜 과거에 동방으로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를 지나서 보정이라는 나라가 있었으며, 그 나라에 다보라는 부처님께서 계셨다. 그 부처님께서 서원을 세우셨는데 그것은 ‘내가 만일 성불하여 멸도한 뒤에 서방국토에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나의 탑은 이 《법화경》을 듣기 위해 그 앞에 나타나 증명하고, 거룩하다고 찬양하리라’는 것이었다”고 대답한다.
 
"부처님께선 신통력을 가지고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보탑이 그 앞에 솟아나는데, 그 보탑 안에는 여래의 전신이 있어서 찬탄할 것이라 재차 강조한다."
 
또한 부처님께서 적멸의 세계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내가 멸도한 뒤 나의 전신에 공양하려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의 큰 탑을 세워라”고 말하며, 부처님께선 신통력을 가지고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보탑이 그 앞에 솟아나는데, 그 보탑 안에는 여래의 전신이 있어서 찬탄할 것이라 재차 강조한다. 다보여래의 보탑이 땅 속에서 솟아난 이유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견보탑품의 서두에 나오는 이상의 내용은 신비로운 만큼 그 상징성이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구체적으로 보탑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보탑이 땅속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는 구절을 통해 보탑의 전체적인 상징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법화경》 연구가들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전법활동이 탑 만드는 일이면 법사 활동은 법신 공양하는 일
 
첫째, 보탑은 여래의 진실한 모습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시공을 초월해 그 진실한 모습으로 중생들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땅속은 과거를 의미하며, 지표는 현재를 의미하고, 공중은 미래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정지적인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고 있는 여전히 동적인 이미지를 우리에게 준다고 본다. 여래는 정지적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들 속에 살아 숨 쉬는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탑이란 층층이 중첩된 것이지만 그것은 조화와 균형미를 살리지 않으면 허물어지고 만다는 점에서 교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교단의 발전과 함께 부처님의 말씀이 빛을 발하게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셋째, 부처님의 진실한 모습이라 해석하든 아니면 교단으로 풀이하든 그것은 부처님의 교법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교법으로 해석한다. 법의 중요성을 고려하거나 아니면 《법화경》이 교법을 중시하는 경전이란 점을 감안하면 셋째 해석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보탑이란 가르침의 실천을 통해 쌓아지는 탑이란 의미가 된다. 동시에 ‘보탑 안에 여래의 전신이 있다’는 경전의 내용과도 어긋나지 않는다.
 
중국을 대표하는 법화사상가 중에서 천태대사 지의는 《법화문구》에서 보탑을 ‘실상의 경지’로 이해한다. 보탑이 실상의 경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법신의 의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보탑 안에 여래의 전신이 있다’는 경전의 구절 중에서 여래의 전신을 법신으로 해석한 것이다. 가상대사 길장은 《법화의소》에서 “보탑이 솟아 나타난 것은 ‘법신에는 생멸(生滅:태어나고 소멸하는 시간적 개념)이 없지만 방편에는 생멸이 있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해석한다. 그렇지만 길장은 여기서 더 나아가 진속이제의 논리에 의거해 보탑이 출현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즉 “옛날에는 방편으로 진실을 가렸기 때문에 방편의 가르침을 땅과 같다고 하며, 이제는 방편을 없애고 진실을 나타내므로 땅에서 솟아 드러난 것과 같다고 한다. 혹은 옛날에는 자취에 집착하고 본질에 미혹했기에 미집(迷執)으로 땅을 삼았다. 이러한 집착은 장차 무너질 것이므로 땅이 갈라져 탑이 드러난 것과 같은 것이다. 탑이 공중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신이 실상의 허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고 말한다. 길장은 삼론사상에 입각해 《법화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전이 곧 법신이며, 이 법신을 부처님의 유골 사리 보다 더 중요한 법신 사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보탑을 어떻게 해석하든지 다양한 학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현학적인 해석을 피해 이해 가능한 해석이 우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현대의 학자들이 해석하듯이 진리의 보탑, 혹은 가르침의 보탑이라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법화경》 보다 성립이 약간 빠른 것으로 추정되는 《소품반야경》에서 법신을 경전으로 해석하는 것도 참고가 될 수 있다. 경전 속에 부처님의 정신이 들어 있으며, 그 정신을 우리는 법신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보탑 속에 여래의 전신이 들어 있다는 표현도 대승경전의 일반적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법화경》이 있는 곳에는 탑을 만들 필요가 없으며, 탑을 만들더라도 사리를 안치할 필요가 없다는 법사품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경전이 법신이며, 법신을 부처님의 유골 사리 보다 더 중요한 법신 사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견보탑품에선 보탑이 출현한 이유가 《법화경》의 설법 내용을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이라 증명하는데 있으며, 동시에 부처님의 거룩한 공덕을 찬양하는데 있다고 설한다. 그러면서 여래의 전신에 공양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큰 탑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큰 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법사품 이래 줄곧 강조되고 있는 《법화경》을 널리 세상에 알려 불국정토를 만드는 일이다. 수지, 독, 송, 해설, 서사로 표현되는 전법활동이 바로 탑을 만드는 일이며, 부처님의 법신에 공양하는 일이라 풀이한다. 이러한 일은 하는 사람들을 법사라 부르며, 법사의 활동이 곧 법신을 공양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그래서 경전은 커다란 믿음의 힘과 지원(志願)의 힘과 선근(善根)의 힘이 필요하다고 본다. 법신을 공양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견보탑품 전편을 통해 보탑이 용출한 것은 서품부터 법사품에 이르는 내용을 증명하는 것이란 평가는 고전적이라 말할 수 있다. 흔히 증전기후(證前起後)로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증전에 해당하는 것이 보탑이 용출한 의미로 평가한다. 성립사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견보탑품은 전편의 부촉품에 해당하는 내용이라 말할 수 있으며, 뒤이어 나오는 데바닷다품과 함께 별도의 경전으로 유행하다가 《법화경》에 편입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58. 佛의 영원성과 法의 정통성 상징
 
견보탑품을 대표하는 내용 중의 하나가 다보불과 석가불이 한 자리에 앉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것을 흔히 두 부처님이 함께 앉았다는 의미에서 이불병좌라 한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보탑이 땅속에서 솟아나오고, 그 속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찬탄하는 음성이 들린다.
이에 대요설보살이 어찌된 일인지 질문하게 된다. 부처님은 “보탑 안에는 여래의 전신이 있는데 그것은 보정나라에 계시는 다보여래며, 이 부처님이 보살도를 행할 때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나타나 증명하리라는 서원을 세웠다”고 화답한다.
 
두 부처 동석 불·법 不二 암시 감성적 호소력으로 이해 도와
 
신묘한 광경을 목도한 대중들은 마음속으로 매우 기이한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대요설보살이 그것을 보고,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이 부처님의 전신을 보고 싶다”고 청하게 된다. ‘시방에 계시는 분신불(分身佛)들을 모두 모은 뒤에야 나타나신다’는 다보불의 서원에 맞추어 시방에 계신 분신불들을 모두 한자리로 불러 모으게 된다. 수많은 분신불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을 뿐만 아니라 불국토를 장엄하여 만다라의 세계를 연출한다. 분신불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다는 것은 다양한 이름의 부처님들이 계시지만 결국은 한 부처님으로 통일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화엄경》에서 말하는 법신불로 통일되는 것이다.
분신불들이 한 자리에 모이자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허공으로 올라가 머물게 되며, 모든 대중들의 예배와 찬탄을 받게 된다. 그리고 칠보로 만든 보탑의 문을 오른 손으로 여니, 그 안에는 다보여래가 선정에 든 모습으로 앉아 계셨다. 다보여래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보자 “거룩하고 거룩하십니다, 석가모니부처님. 《법화경》을 쾌히 설하시니, 이 경전을 듣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라고 말하며, 석가모니부처님께서도 보탑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청하게 된다. 들어가자 다보여래는 당신이 앉은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석가모니부처님께 내어드리며 앉으라고 권하게 된다.
 
"드라마틱한 장면의 연출을 통해 두 부처님이 하나의 탑
안에서 하나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은 영화의 장면처럼
우리들의 감성에 직접적인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이에 석가모니부처님 역시 다보여래와 함께 가부좌를 틀고 앉게 된다. 드라마틱한 장면의 연출을 통해 두 부처님이 하나의 탑 안에서 하나의 자리에 앉게 된다는 것은 영화의 장면처럼 우리들의 감성에 직접적인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결론적으로 두 부처님께서 함께 앉았다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그 상징적 의미를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법의 상속이란 점에서 《법화경》이 석가모니부처님 뿐만 아니라 다보여래 이래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나타낸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부파가 존재했으며, 수많은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되었다. 저마다 정통성을 주장했으며, 치열한 사상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는 것이며, 대승불교란 새로운 불교운동의 종결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중요성을 지니고 있으며, 《법화경》이 불교의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둘째 불타의 영원성이란 점이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불교란 종교를 창시하고 81세에 입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위대한 스승으로 평가받는 석가모니부처님께선 시간이란 개념을 초탈하지 못하고 사라진 것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법화행자들은 그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불타는 영원한 것이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초월해 존재하는 구세자라 말한다.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부처님이 함께 앉았다는 것은 시공을 초월하여 불타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여래수량품이다. 부처님의 본질은 영원한 것이지만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방편으로 열반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견보탑품이 여래수량품을 설명하기 위한 단서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셋째 두 부처님께서 한 자리에 앉은 것을 보고 수많은 분신불과 대중들이 일심으로 찬탄하게 된다. 이것은 부처님의 본질이 영원하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부처님의 찬탄을 일체화하는 것이라 본다. 구체적으로 삼위일체의 불타관이 등장하기 이전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천태대사 지의는 《법화문구》에서 “다보불은 법불(法佛=법신불)이며, 석가불은 보불(報佛)이고, 분신불은 응불(應佛=응신불, 혹은 화신불)이다. 세 부처님이 비록 셋이지만 다른 것이 아니다.
 
초기불교 가르침에 수용 법화행자들이 알맞게 변형시켜
 
마땅히 이렇게 설명하고 이렇게 믿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삼신일체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가상대사 길장 역시 《법화의소》에서 동일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즉 “다보는 이미 입멸했지만 입멸한 것이 아니며, 입멸하지 않은 것으로 입멸을 나타낸다. 바로 석가와 함께 앉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다보여래가 나타났다는 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은 실로 생멸(生滅)이 없지만 방편은 생멸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세친은 《법화론》에서 두 부처님께서 한 자리에 앉았다는 구절에 대해 “화불, 보불, 법불을 나타낸 것은 모두 대사(大事: 큰 일)를 이루기 위함인데 대사란 다름 아닌 법신이다”고 밝히고 있다. 천태나 길장 모두 《법화론》의 영향을 받아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보여래가 어떠한 부처님인가를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 다보여래는 범어로 쁘라부으따 라뜨나란 말을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많은 보배란 의미이다. 어떤 보배가 많다는 것인가?
첫째는 삼보가 많다는 의미에서 불교가 융성했다는 점을 찾을 수 있다. 둘째는 법보가 많다는 의미에서 법의 인격화, 경전의 인격화를 통해 법신불을 상정하고자 한다. 부처님의 초월화는 논리적으로 가르침이나 경전의 인격화와 맞물려 있다.
 
"많은 종교의 특징이지만 두 부처님이 한 자리에 앉았다는 상징성을 통해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던 이들 역시 종교적 신비감을 잃지 않고 있다"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부처님이 한 자리에 앉기까지 경전의 묘사는 매우 황홀하며, 신비스럽다. 많은 종교의 특징이지만 두 부처님이 한 자리에 앉았다는 상징성을 통해 다양한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던 법화행자들 역시 종교적 신비감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두 부처님이 한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달하는 방식은 이미 초기불교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잡아함경》 권 제41에는 다자탑전반분좌란 고사가 나오고 있다. 다자탑 앞에서 석가모니부처님과 마하가섭이 같은 자리를 나누어 앉았다는 것이다.
이후 이 이야기는 세 곳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마하가섭에게 법을 전했다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의 하나가 되었다. 다른 또 하나의 모형은 《증일아함경》 권 제44에 나온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자신의 금란가사를 미륵불에게 전하기 위해 그 임무를 마하가섭에게 부탁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부탁을 받은 마하가섭은 금란가사를 전하기 위해 현재 계족산에 들어가 선정삼매에 잠겨 있으며,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면 그 가사를 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불법의 영원성과 법의 정통성을 필요로 했던 법화행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전거가 아닐 수 없었다. 초기불교에 나오는 가르침을 수용해 알맞게 변형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59. 계율과 자비실천 통해 心身 안정
 
안락행품은 《법화경》의 계율 사상을 대변하는 품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안락행품에 나타나 있는 계율은 초기불교의 계율 사상 못지않게 엄격하다는 점에서, 혹은 《법화경》 전반부의 사상인 포용의 정신과 궤적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별도로 유통되던 경전이 《법화경》 안에 편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 불교권에서는 《법화경》의 4대 요품 중의 하나로 중시되어 왔다. 우선 품명인 안락행이란 단어의 의미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안락행(安樂行)이란 말은 안락한 수행이란 의미가 아니고, 안락한 상태에 몸과 마음을 두고 실천하는 행법이라 정의할 수 있다. 범어 수카비하라란 말을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의 의미는 ‘즐거움’에 머무는 것, 즉 몸과 마음이 안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지칭한다. 자리이타의 대승정신을 추구하면서도 구체적으로는 계율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 몸과 마음을 안락하게 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교리적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의 완성은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안락행에 대해 천태지의는 축자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간단하게 소개하면 법사품에 나오는 홍법삼궤나 기타의 내용을 응용해 해석하는 방식이다.
 
"안락행품에 나타나 있는 계율은 초기불교의 계율 사상 못지않게 엄격하며, 전반부의 사상인 포용의 정신과 궤적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 등에서 별도로 유통되던 경전이 편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첫째 여래의 옷을 입으면 법신이 편안하다(安). 여래의 방에 들어가면 자유로운 마음이 즐겁다(樂). 여래의 자리에 앉으면 반야의 인도로 행진할 수 있다(行). 이것은 유화인욕이란 여래의 옷과 대자비심이란 여래의 자리, 그리고 모든 존재는 고정적 실체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일체법공의 입장에서 풀이한 것이다. 새삼스러울 것 없이 안락행의 의미를 잘 표현하고 있다.
둘째 인욕의 경지에 머물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다(안). 급작스럽거나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즐겁다(락).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관찰하기 때문에 행진할 수 있다(행). 이것도 첫 번째 해석과 마찬가지로 인욕, 자비, 법공의 관찰이란 점에서 풀이한 것이지만 여기에 나오는 글귀는 모두 안락행의 서두에 나오는 경전의 문구들이다.
 
《법화경》의 계율사상 대변 자리이타의 대승정신 추구
 
셋째 행을 세 가지 관점에서 실천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지행(止行), 관행(觀行), 자비행(慈悲行)이다. 지행이란 몸, 입, 마음의 세 가지 행업이 부드럽고 온유하여 순종하고 위배하는 것이 동시에 고요해진 것이며, 이것은 바로 법신의 실천행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여래의 옷이다. 관행이란 유일한 실상의 지혜는 분별없는 지혜의 빛이니, 바로 반야의 실천행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여래의 자리이다. 자비행이란 네 가지의 큰 서원(사홍서원)으로 일체의 중생을 널리 제도하는 것이니 바로 해탈의 실천행을 체험하는 것이다. 즉 여래의 집이다. 이것은 안락행의 구체적인 내용인 3업과 서원 안락행이 자리와 이타의 정신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법화칠유의 하나인 정주 혹은 명주의 비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것은 안락행에 대한 설법이 끝난 뒤에 《법화경》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해 설해지는 것이다. 내용이 간단하기 때문에 여기서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대강의 내용을 보자면, 전륜성왕이 여러 나라를 항복시키려 할 때 소왕들이 반항하므로 많은 군사들을 동원해 토벌한다. 전쟁이 끝나면 공에 따라 상을 주듯이 전륜성왕 역시 군사들에게 다양한 상을 주게 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전답, 가옥, 촌락, 도시, 칠보, 의복이나 장신구, 말, 노비 등등이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주지 않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마에 박혀 있는 명주였다. 이 구슬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주지 않지만 마지막 단계에 가면 왕과 그 권속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명주를 준다고 말한다. 이상 대강의 내용을 통해서 정주(頂珠)의 비유를 살펴보았지만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명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경전은 이어지는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 수단적 가치를 보다 존중하기
때문에 정신적 가치를 대표하는 《법화경》의 가르침을 함부로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륜성왕이 병사들 가운데 공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믿기 어려운 구슬을 머리 속에 감추고 함부로 주지 않다가 그제서야 주는 것처럼 여래도 이와 같이 삼계 속에서 위대한 진리의 왕이 되어 중생을 교화하실 때, 성인의 장군들이 오음마, 번뇌마, 사마와 싸워 큰 공이 있는 것을 보고, 또한 삼독을 소멸하고 삼계에서 나와 마군의 그물을 깨뜨리는 것을 보고, 그때 여래께서 크게 환희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의 지혜에 이르게 하는 《법화경》을, 그동안 온갖 세간의 원망이 많고 믿지 않아서 먼저 설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야 설하느니라. … 이 《법화경》은 여러 부처님 여래의 비밀한 법의 창고이며, 여러 경전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므로 오래도록 잘 수호하여 함부로 선설하지 않다가 이제 처음으로 너희들에게 연설하느니라.”
 
정주의 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인용문 속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약간 길게 인용했다. 우선 명주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경전에선 바로 《법화경》이라 말하고 있다. 《법화경》이야말로 값을 따질 수 없는 보주이기 때문에 함부로 설해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법화경》을 보배라 말하는 것인가? 일승의 가르침이라는 정신적인 양식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들은 변화가 무상하며, 우리를 타락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일승의 가르침은 우리를 행복하고 안락하며, 자유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자타를 구별하지 않고, 어떠한 편견에 사로잡혀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만을 사랑하고 포용하기 때문이다. 아니 인류나 전 생명체, 유상무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우주적 마음을 배양해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물질적 가치, 수단적 가치를 보다 존중하기 때문에 정신적 가치를 대표하는 명주, 즉 《법화경》의 가르침을 함부로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전륜성왕이 세상을 통일하려고 했을 때 작은 나라의 왕들이 반항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말하는데 그것 역시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고 있다. 작은 나라의 임금은 다름 아닌 오음마, 번뇌마, 사마를 지칭한다. 오음마란 인간을 형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구성 요소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의 요소가 활동을 왕성하게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들이 실존적인 고뇌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오음성고라 말한다. 오음의 활동이 왕성해서 생기는 고뇌란 뜻이다. 번뇌마란 탐진치의 삼독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수한 번뇌를 압축하여 표현한 말이다. 사마란 바로 죽음이며, 종말에 대한 두려움과 한계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죽음을 모든 것의 종말이라 생각하게 되면 인간은 짐승 보다 못한 일을 서슴치 않고 자행하게 된다. 그래서 모두 마구니라 말하는 것이다. 전륜성왕은 이러한 마구니를 소탕하고 우리들을 진정한 자유와 행복의 세계로 인도한 것이다. 그것이 통일이란 단어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가르침이 《잡아함경》을 비롯한 초기 경전에 이미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마왕 파순의 군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애욕, 의욕상실, 주림과 목마름, 갈망, 비겁, 공포, 의혹, 분노, 슬픔, 명예욕 등이다. 마군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정주의 비유에선 보다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60. 身·口·意·誓願 통해 편안한 상태 완성
 
안락행품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뒤에 오는 악한 세상에 이 경전을 설법하려면 네 가지의 법에 편안히 머물러야 한다. 첫째는 보살의 행할 바와 친근할 곳에 편안히 머물러 이 경전을 연설할지니라.”
여기서 네 가지 법(四法)에 편안히 머물러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네 가지 법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수당대에 활동한 길장은 《법화현론》이란 책에서 ‘지혜행, 이교만행, 무질투행, 자비행’의 네 가지를 들면서 이 네 가지에 안주하면 몸과 마음이 쾌락하기 때문에 안락행이라 한다고 말한다. 지혜행이란 모든 존재의 참다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되 편견이나 분별심을 지니지 않는 실천행, 이교만행은 교만을 여의는 실천행, 무질투행은 질투가 없는 실천행, 자비행은 일체의 중생을 내 몸처럼 생각하고 사랑하는 실천행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네 가지 법에 대한 해석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법화경》을 연구하여 이름을 떨친 광택사 법운은 ‘가실이공(假實二空), 설법, 허물을 여윔, 자비’로 풀이하고 있으며, 동진시대의 고승인 혜기는 ‘공, 교만을 여읨, 질투를 제거함, 대자비’로 해석한다. 송대의 고승인 혜룡은 ‘신체의 악을 멀리하고 공에 다가감, 구업의 과실을 제거함, 의업의 질투를 제거함, 자비를 일으킴’으로 풀이했으며, 남악혜사는 ‘무집착의 바른 지혜,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음, 윗사람을 존경하고 아랫사람을 교화함, 대자비’로 해석하고 있다.
 
"《법화경》을 연구하여 이름을 떨친 학자들의 공통점은
대자비와 네 가지 법을 우리들의 행위와 연결해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라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소개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이지만 해석상에서 공통적인 것은 먼저 대자비를 꼽을 수 있다. 일체 중생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시와 실천이 대자비심이다. 또한 공을 들 수 있다. 공이란 실천적인 차원에서 말할 때는 무집착과 무분별이다. 편견과 조건을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적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와 그러한 인식의 태도를 공이라 말한다. 따라서 공, 무분별, 무집착 등은 동일한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 다시 공통점을 찾고자 한다면 네 가지 법을 우리들의 행위와 연결해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라 말할 수 있다. 윤리적인 입장, 행위의 주체자와 실천자라는 차원에서 해석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구체화시킨 것은 천태 지의이다. 천태는 네 가지 법을 네 가지 안락행으로 해석한다. 즉 몸, 입, 마음, 서원이 네 가지 법이며, 이것을 통해 안락행을 완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네 가지 안락행으로 말하는 것이다. 선배들의 해석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네 가지 안락행으로 완성했던 것이다.
천태 지의가 네 가지 법을 네 가지 안락행으로 해석한 이후 다른 어떠한 도전도 없이 동북아 불교권의 불교도들에게 수용되었다. 따라서 안락행품하면 바로 4안락행을 말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몸과 관계된 신(身)안락행, 언어와 관련된 구(口)안락행, 의식과 관련된 의(意)안락행, 자비의 실천과 관련된 서원(誓願)안락행이 그것이다. 신·구·의는 우리들의 행위를 총괄하는 삼업이며, 이 삼업을 통해 윤리적 행위나 비윤리적 행위, 혹은 종교적 행위나 비종교적 행위를 하게 된다. 따라서 삼업이 청정하다는 것은 우리들의 행위가 윤리적, 종교적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삼업이 부정하다는 것은 새로운 각오와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4안락행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삼업이 청정하다는 것은 우리들의 행위가 윤리적,
종교적으로 승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삼업이 부정하다는 것은 새로운 각오와 반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째 신안락행은 행동거지를 경계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초기불교의 계율사상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다만 몇 가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중요한 것만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치인(국왕, 왕자, 대신, 관리)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
2. 극단적인 사상가들과 가까이 하지 않는 것. 이것은 계금취견이라고 하여 편견이나 분별심, 그리고 분쟁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불교라는 종교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3. 흉악한 장난이나 치고받는 것 등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4. 찬다라나 축산업자, 사냥꾼, 어부 등 악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5. 이익을 추구하는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
6. 여인을 보고 욕망을 품은 채 설법하거나 여인을 훔쳐보지 말 것
7. 남의 집에 들어가 젊은 처녀나 과부와 말하지 말 것
8. 오종불남(성불구자)과 너무 친하게 지내지 말 것
9. 여인을 위해 설법할 때 이를 보이거나 가슴을 보이지 말 것
10. 어린 제자나 사미를 기르지 말 것.
11. 항상 좌선을 즐기되 한적한 곳에서 마음을 잘 다스릴 것
 
이상 열거한 내용은 엄격하면서도 현실적인 교단의 사정을 감안한 것이라 하더라도 초기불교의 부처님 가르침과 어긋나는 점도 있다. 평등사상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둘째 구안락행은 경전을 읽을 때의 마음가짐, 내지 언어생활의 절제와 신중함을 요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함부로 말하지 말 것 △경전을 읽을 때 사람들과 더불어 경전의 허물을 말하지 말 것 △다른 법사를 가벼이 여겨 빈정대거나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말하지 말 것 △성문의 이름을 들어 그의 허물을 말하거나 칭찬하지 말 것 △원망이나 의심하는 마음을 품지 말 것 △어려운 질문을 받더라도 소승법으로 대답하지 말고 대승법으로 해설하여 일체의 지혜를 얻게 할 것 등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초기불교의 십선계에 나오는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 것이나 원망이나 의심을 품지 말라고 하는 것은 승단의 화합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초기불교 이래 대승불교에서도 중시되었던 항목들이다. 대승법을 중시하라는 것은 법화행자들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의안락행은 법화행자들이 일상생활이나 전법하려고 할 때 지녀야 되는 마음자세에 대한 설법이다. 즉 △《법화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사람을 질투하거나 아첨하는 마음을 품지 말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을 경솔하게 욕하거나 잘잘못을 말하지 말 것 △사부대중 중에서 성문을 구하거나 벽지불을 구하거나 보살도를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을 무시하면서 그들이 의심하고 후회하도록 현혹하는 말을 하지 말 것 △법을 장난으로 말하지 말고 그것을 가지고 다투지 말 것 △모든 여래를 아버지로 생각할 것 △보살은 큰 법사로 생각하고 공경할 것 △일체 중생을 위해 평등하게 설법 할 것 등이다. 이것을 경전에 나오는 구절을 빌려 표현한다면 ‘기만하는 거짓된 마음을 버리고, 항상 소박하고 정직한 행을 닦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남은 속일 수 있지만 자신은 속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서원안락행은 남을 위해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다. 사홍서원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을 희생해 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심신의 수련을 통해 성숙해진 정신이 있다면 사회를 정화하고 성숙시키는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원과 계율을 구분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서원은 이타적인 성향이 강한 반면 계율은 자기 자신의 근신과 수행을 위한 경계에 중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말세에 법이 소멸하려 할 때, 이 《법화경》을 수지한 재가인이나 출가인은 큰 자비의 마음을 내어 ‘누구나 다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할 때는 신통력과 지혜의 힘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이 법 가운데 살게 하리라’고 맹서해야 한다.
 
61. 종지용출품
 
종지용출(從地踊出)이란 땅 속에서 뛰어나온다는 의미다. 용자를 용(涌)자로 쓰는 경우도 있는데 ‘샘물이 솟듯이 연속적으로 솟아나오는 것’을 형용하고 있다. 연속해서 계속 뛰어나온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혼용하기도 한다. 품명이 되어 있지만 수많은 보살들이 어느 순간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꾸역꾸역 몰려나오는 장면을 연상하면 된다.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법화경》의 홍포와 수지를 부촉하는 장면에서 지용보살이 등장한다. 즉 많은 보살들이 이구동성으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가더라도 《법화경》을 수지하고 홍포하겠다’고 서원하자 부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한다. 그리고는 “나의 사바세계에는 6만개의 갠지스 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권속들이 있으며, 이 모든 사람들이 내가 멸도한 뒤에는 이 경전을 수지하고 보호하며 독송하고 널리 설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6만개의 갠지스 강에 있는 모래와 같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하나의 갠지스 강에 있는 모래도 무수히 많은데 6만개라면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넘어가므로 그냥 ‘무수히 많다’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불교적인 용어로 인간의 능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숫자, 즉 무량대수(無量大數)라고 말하는 것을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수히 많은 보살들이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서사할 뿐만 아니라 홍포한다고 하는 선언은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자아내는 것이다. 그런 뒤에 경전은 다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때 사바세계 삼천대천국토의 땅이 진동하면서 열리더니 그 가운데 한량없는 천만 억 보살마하살이 동시에 솟아나오되, 그 보살들의 몸은 모두 금색으로 32상을 갖추었으며, 한량없이 밝은 광명이 있었다. 이 보살들은 사바세계의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다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음성을 듣고 아래에서 솟아오른 것이다.”
 
"무수히 많은 보살들이 《법화경》을 수지 독송 해설 서사할 뿐만 아니라 홍포한다고 하는 선언은 독자의 궁금증을 한껏 자아내는 것이다"
 
무수한 보살들이 땅속에서 동시에 솟아나왔다고 했는데 이들을 지용보살이라 하는 것이며, 이 품의 제목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몸이 금색이며 32상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한량없이 밝은 광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에 대해 일별하자면 금색의 몸에 32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깨달은 자들이며 원생보살들이란 점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이미 깨달아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 삶을 성취했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자원해서 태어난 보살이란 점을 강조한다. 이미 앞에서 설한바가 있지만 원생보살이란 수행을 완성한 보살이란 종교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존재의 당위성을 확립했다는 철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밝은 광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깨달음의 완성이 소승적이고 이기적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전이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수행을 통해 얻은 성과물이 그 사회를 밝히는 등불과 같은 빛으로 화현한다는 점에서 흔히 언급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의 상태를 태양이나 광명으로 표현하는 것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용보살의 정체에 대해 교단사의 전개라는 점에서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는가하면 상징성에 비중을 두고 해석하는 수행자 등 많은 해석이 있다 "
 
나아가 밝은 광명은 인간의 본질을 형용하는 말이기도 하다. 철학적으로는 실체적이고 실유적인 것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실유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인간이란 본래 존재하며, 그 인간의 가치는 무한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구상된 것이 빛이라 말할 수 있다. 빛은 희망이며, 행복이며 생명의 환희이다. 그것은 인간 누구나 본래 지니고 있으며, 동등하게 향유해야할 절대적 가치인 것이다. 이것을 《법화경》에선 일승이나 불성 등으로 바꾸어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지용보살이란 이미 성불한 원생보살이며, 그들은 존재의 궁극적 가치를 통찰하고 그것을 밝히기 위해 등장한 보살이란 정의도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지용보살의 정체성에 대해선 많은 해석이 있다. 교단사의 전개라는 점에서 이해하는 학자들이 있는가하면 상징성에 비중을 두고 해석하는 수행자들도 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중요한 것은 《법화경》의 근본정신과 어긋나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지용보살의 정체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교단사의 전개과정이란 점에서 지용보살의 정체성을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되던 시점에서 《법화경》을 중심으로 신(新)불교운동을 전개하던 불교운동가들과 연결해서 해석하는 것이다. 즉 초기대승불교운동은 기존 교단의 강력한 반발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대승불교운동이 보편화되기 이전 대승불교운동은 이단이나 교단을 파괴하려는 움직임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움직임은 자유스러울 수 없었으며, 대승불교운동을 지지하던 대중들은 표면화되기 보다는 음성화되어 있었다. 특히 《법화경》을 중심으로 강력한 혁신불교를 주창했던 법화행자들은 핍박과 감시 속에서 음성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지금도 반체제운동을 지하운동이라 말하듯이 법화행자들의 신앙도 지하신앙이었다.
이유는 △보다 강력한 불교적 이념의 실현 △출가지상주의에 대한 부정과 대중성의 중시 △형식 보다는 본질을 추구하는 것 △불교적 신앙운동의 본질에 대한 각성의 촉구 등 때문이었다. 이러한 지하신앙운동이 대승불교의 보편화와 더불어 양성화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지용보살이라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수행이란 점에서 그 상징성을 중시하는 해석이다. 즉 사바세계의 아래에 있는 허공에 머물면서 깨달음의 경지를 즐기던 보살들이 석존의 말씀을 듣고 대지를 뚫고 나와 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점에 비중을 두어 해석한다. 이것은 인식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어느 정도 우주와 세계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었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를 모르고 있던 보살들이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구각을 탈피하고 우주법계에 대해 눈뜨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은 위대한 눈뜸이기 때문에 대각(大覺)이라 부르며, 진정한 의미의 삶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남, 즉 갱생(更生) 혹은 부활이 되는 것이다. 천태지의 스님은 지용보살이 세 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우선 석가세존이 다른 세계에서 와 있던 보살들의 간청을 물리치고 지용보살들에게 사바세계의 교화를 맡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법화행자들 자신이 지용보살 그 자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사바세계의 아래에 있는 허공에 머물면서 깨달음을 즐기고 있던 보살들이 석존의 말씀을 듣고 대지를 뚫고 이 세상에 출현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각을 탈피해 적극적으로 현실 속에 불국정토를 건설해야 한다는 염원의 표현이다.
셋째는 무수한 지용보살들의 지도자로 네 명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상행, 무변행, 정행, 안립행이다. 상행이란 향상일로를 향해 노력한다는 상징성을, 무변행은 끊임없이 법화행자의 길인 수지·독송·해설·서사에 노력하는 것을, 정행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은 항상 청정해야 한다는 것을, 안립행이란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이 안심입명의 경지에 머물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네 명의 지도자란 법화행자들이 수행의 과정 속에서 마음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한 현상 자체가 진여법계
 
종지용출품에서 우리들이 간과해선 안되는 것이 현상계와 법계를 동일하게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통찰력을 구비한 사람이라 가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현상계란 경험과 운동으로 우리들이 늘 대면하고 있는 시간의 흐름을 말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행복과 불행을 구분하며, 즐거움과 슬픔을 판단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영원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 변하는 것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흐름의 연속적 경험이나 사건을 역사란 말로 표현한다.
반면에 법계란 현상계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사물의 운동이나 경험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무시간성, 혹은 시공의 초월성, 근원성이란 말로 표현한다.
 
다만 이러한 법계는 현상계의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통찰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현상계의 변화 속에서도 법계의 영원성을 언제나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종지용출품에선 현상계와 법계의 합일에 대해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삼천대천 국토의 땅이 다 진동하면서 열리더니 그 가운데서 한량없는 천만억 보살마하살이 동시에 솟아나왔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일불승의 현현이기에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이들은 “땅에서 솟아나와 허공의 칠보탑에 계신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두 세존께 머리 숙여 예배하고 오른 쪽으로 세 번 돌고 합장 공경하며, 한쪽으로 물러나 기쁜 마음으로 두 세존을 우러러보며, 이러한 보살마하살이 땅에서 솟아나서 모든 보살의 가지가지 찬탄하는 법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니,…”라고 말한다. 이상의 인용문에선 보살들이 땅속에서 솟아나와 허공의 칠보탑에 계신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부처님을 찬탄하고 예배 공양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통해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부처님을 공양했다는 것은 부처님의 영원성과 교단의 정통성에 대한 확신과 공양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지하의 세계와 허공의 세계라는 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하의 허공에서 지상의 허공세계로 무수한 보살들이 솟아나와 다보여래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자리에 앉아 계시는 칠보탑을 공양했다고 경전에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시각적인 차원에서 설명하자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지하의 세계(출발) -> 지표의 세계(통과) -> 허공의 세계(합일, 귀일)로 진행한다. 시간적으로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적인 시간관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두 가지로 압축해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지하의 허공계와 지상의 허공계가 합일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합일은 다보여래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합일한 장소인 칠보탑을 공경하고 찬탄하는 것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지하와 지상의 허공계가 합일한다는 것은 대상의식을 탈피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
 
이것은 우주적인 생명을 체득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진실한 깨달음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열린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일불승의 현현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대다수의 중생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를 느끼고, 그 변화를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희로애락에 몸부림치고 있다. 만남과 이별에 아쉬움과 각별함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별은 또 다른 만남의 원인이 분명하며, 만남은 또 다른 이별과 만남의 원인이 된다. 예를 들어 늘 경험하게 되는 죽음이란 현상에 대해 말해보자. 이것은 오랜 인연의 단절로 느껴지기 때문에 종말과 한계상황, 슬픔, 어두움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지만 죽음이란 사대의 분해, 오온의 자연회귀를 말한다. 각각의 사대와 심리작용은 다양한 형태의 또 다른 인연을 통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물(습기), 불(온기), 바람(에너지), 땅(견고성) 등은 샘물이나 과일이나 또 다른 형태로 우리들과 만나게 되어 있다. 우주적인 네트워크 속에서 통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미 직시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별은 영원한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인연의 시작이 아닐 수 없다. 정신적 작용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을 뇌리에 기억해 자신의 행동을 바꾼다든가 위대한 정치가의 영향력이 역사의 물결을 변화시키며 누대에 걸쳐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위대한 성인들은 그들의 감화력을 현재까지 미치고 있다.
이야기를 통해, 혹은 전파를 타고, 혹은 종이 속에서 그들의 생명력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지하와 지상의 허공계가 합일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둘째 깊은 통찰력에 의거해 무시간성을 체득한 사람들은 당연한 일이지만 대상의식을 탈각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너와 나라는 대립관계 속에서 시작하여 미추, 호오, 빈부, 귀천, 적과 동지 등 대상의식 속에 살고 있다. 너와 나란 것이 대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의식할 수 없는 아득한 태초 이래 무한한 관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대가 바로 나이며, 내가 바로 그대라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하지만 기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계와 법계의 합일, 혹은 지하와 지상의 허공계가 합일한다는 것은 대상의식을 탈피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종지용출품>을 시간의 흐름을 통해 무시간성으로 표현되는 시공의 초월성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하자면 현상계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진실한 법계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법화행자들이 취해야할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이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내가 진실을 말하노라. 너희들은 믿을지니 옛날부터 이 대중들을 남김없이 교화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부처님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가르침을 진실하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상계과 법계, 혹은 현상과 본질을 《법화경》에선 본적(本迹)으로 설명한다. 본이란 근본이나 본질을 의미하며, 적이란 현상이나 자취를 의미한다.
이상에서 설명한 것을 여기에 대입하자면 지하의 허공계는 적에 해당한다면 지상의 허공계는 본에 해당한다. 중국 사람들은 《법화경》을 이해할 때 이 두 개념에 의거해 분석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이 두 개념은 원래 《장자》의 천운편에 나오는 자취(迹)와 ‘자취인 이유’(迹之所以)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자》에 대한 주석서를 저술한 서진말기의 곽상이란 사람이나 그의 영향을 받은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라는 천재적인 스님에 의해 현상과 본질, 혹은 체와 용이라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체계화 되었다. 이것이 이후 일반적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따라서 현상을 통해 법계를 파악한다는 것에 대해 천태지의는 ‘비근한 것을 통해서 심원한 것을 나타낸다’(開近顯遠)이라 말했던 것이다. 결국 천태의 해석도 본적사상에 입각한 것이며, 그것은 중국 전통의 체용사상에 입각해 《법화경》을 해석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62. 여래수량품
 
인생의 과정 중에는 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기쁜 일도 있지만 슬프고 괴로운 일들도 우리들에게 다가온다. 사람에 따라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가능하면 흔쾌하고 만족감 속에서 작은 행복이나마 느끼는 것이 중생들의 일상이다.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기쁘고 슬프다는 것의 차이도 개인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러한 것은 일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인생의 여정 속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숨 막히는 절망감이라 말할 수 있다.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정신을 놓아버리고 허물어지는 것을 절망이라 말한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깊은 병이 분명할 것이다. 그 절망의 병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서 기인하던가 아니면 자존심이 허물어지는 경우에도 찾아올 수 있다. 무상한 것이 자연의 순리이기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일들이 특별히 고정된 삶의 범주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올 때 그것을 견디지 못해 찾아오는 병이 절망이란 병이다. 돌이켜 보면 인생이란 대단한 것이지만 한편으론 약간은 아침의 이슬처럼 실체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 것이 부처님의 말씀이다. 괴로움도 기쁨도 실체가 없는 것이며, 우리들의 노력과 염원도 순간순간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있어도 영원한 실체를 지닐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따스한 마음과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며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속담처럼 병든 자의 의식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 "
 
의사와 그의 아들은 부처와 중생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법화경》의 특징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여래수량품 역시 미혹한 중생과 그들을 인도하는 부처님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훌륭한 의사는 인간들의 고집과 자기 범주화 속에서 맞이하게 되는 절망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부처님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보다 깊다는 절망 속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정신을 차리고 이 세상을 유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보다는 오욕의 심연 속에서 기쁨과 희망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을 훌륭한 의사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병든 자의 의식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교리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네 가지 집착(이것을 4취라 한다)을 말한다. 오욕에 집착하는 욕취, 잘못된 견해를 진실이라고 집착하는 견취, 올바른 원인과 가르침이 아닌데도 그것으로 착각하는 계금취, 자신의 말만이 진실이라고 고집하는 아어취 등이다.
 
무수한 이론들이 있지만 그것은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인 기준도 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을 최고이자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집착이며,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취(取)란 정신적 병인을 말하는 것이다. 내 종교, 내 이념, 내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도 정신적 병 중에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화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종교도 문화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현대의 흐름이라 말할 수 있다. 문화는 배타와 고집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이해와 포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약 안 먹는 반항적인 사람에게는 한계 상황 속에서 스스로 먹게 해 강제 없이 자율성·자존성 회복 도와
 
둘째는 우리들이 절망하거나 병든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힘에 의해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길 기다리며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는 속담처럼 병든 자의 의식을 해체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 종교적 차원에서 기도나 수행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스리는 것이다. 세상은 무상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불만과 고뇌 속에서 미움과 분노를 일으킨다는 점을 깨우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기도하며, 가르침의 본질을 철저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훌륭한 의사는 병든 자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그것이 쉽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양한 인간의 군상만큼, 성향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각종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본심까지도 완전하게 상실한 사람과 아직 본심은 상실하지 않은 사람이다. 깊고 낮음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정신적으로 병들었다는 점을 말한다. 자신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주체성의 상실이나 자아의 상실로 표현된다면 바로 그러한 현상을 지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중생들의 본심을 회복시키기 위해 좋은 약초의 빛과 향과 맛을 다 갖추어 약을 조제한 다음 아이들에게 먹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좋은 약이다. 빛과 향과 맛을 아주 잘 맞추었으니, 너희들이 먹으면 고통이 사라지고 다시는 다른 병에 걸리지 않으리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병든 자의 의식인 네 가지 집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말을 잘 듣는 사람도 있지만 반항적인 사람도 있다. 따라서 약을 먹고 본심을 회복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여기서 훌륭한 의사는 먼 길을 떠나 죽었다고 소문을 내어 한계 상황 속에서 스스로 약을 먹게 만든다. 자식들이 약을 먹고 정신을 회복하자 나타나 위로하고 칭찬한다. 끝까지 자율성과 자존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되 강제하지 않는 것이 훌륭한 의사가 선택한 길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훌륭한 의사와 어린 자식들의 관계는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를 감성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한다. 훌륭한 의사가 약을 제조할 때 빛과 향과 맛을 잘 맞추었다고 표현했지만 이것은 색·향·미(色·香·味)를 번역한 말이다. 일반적으로 불교사상가들은 색·향·미를 계·정·혜 삼학으로 해석하고 있다. 색은 계율이며, 향은 선정이며, 미는 지혜라는 것이다. 바로 계·정·혜 삼학을 통해 병든 자의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약을 잘못 먹고 약 기운이 전신에 퍼져 땅에 쓰러졌다고 하는 것은 오욕락에 취해 삼계를 윤회하고 있는 중생들의 현실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합리성보다는 기분에 의해 오늘도 우리는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일상의 반복이 윤회이며, 오늘의 역사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면 그 역사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다양한 가르침을 베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병든 자의 의식을 표현하는 문구 중에서 본심을 완전히 상실한 자들은 위대한 가르침을 소화할 수 없는 소승의 무리라 해석하고, 아직 본심을 상실하지 않은 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있는 무리로 해석하는데 이것은 바로 길장의 〈법화현론〉에 따른 것이다. 천태지의는 이들을 3승의 선근을 완전히 상실한 자와 아직 선근을 상실하지 않은 자들로 해석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 해석하더라도 중생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에 따라 구제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대성을 찾아야 한다. 이 품에서부터 제22 촉누품까지는 《법화경》을 수지하는 공덕과 《법화경》을 널리 홍통할 것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특히 다양한 공덕을 설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분별공덕품도 마찬가지이다. 여래수량품의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영원한 생명력을 믿고 찬탄한다면 그로 인해 다양한 공덕을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가상대사 길장은 공덕을 분별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규정한다. 첫째는 부처님의 생명력이 영원함을 듣고 믿을 때 얻게 되는 공덕이며, 둘째는 경전을 수지하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공덕을 널리 분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 말한다. 부처님의 수명이 무량하다는 것을 듣고, 그것은 시작도 끝도 없으며 불생불멸이며, 4구를 끊고 백비(百非)를 초월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들의 본질적인 생명력도 그러하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경전을 들으면 실상의 이치를 깨닫고 무생법인을 체득하기 때문에 공덕이 있다고 말한다.
가상대사와 달리 경전은 구체적으로 열두 가지의 공덕을 설하고 있다. 즉 첫째 문지다라니를 얻는다. 문지다라니는 한 번 들은 것을 언제나 기억하는 능력이다. 둘째 공의 이치를 깨닫는다. 셋째 요설무애변재를 얻는다. 표현력이 뛰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선다라니를 얻는다. 선다라니란 들은 것을 잘 기억할 뿐만 아니라 응용을 잘하는 것이다. 다섯째 불퇴전의 법륜을 굴린다. 주변에 진리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여섯째 청정한 법륜을 굴린다. 일곱째 소천세계 미진수 보살이 8번 윤회한 뒤 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여덟째 사사천하 미진수 보살이 4번 윤회한 뒤 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아홉째 삼사천하 미진수 보살이 3번 윤회한 뒤 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열 번째 이천하 미진수 보살이 2번 윤회한 뒤 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열한 번째 일사천하 미진수 보살이 한번 윤회한 뒤 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열두 번째 8세계 미진수 중생이 무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발심한다. 경전에 의하면 이상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설하자 만다라꽃과 마하만다라꽃이 보리수 아래 앉아 계신 부처님과 칠보탑 안에 앉아 계신 석가여래와 다보여래, 모든 보살대중과 사부대중 위에 뿌려졌다. 동시에 허공 속에서는 천고(天鼓)가 울리며 미묘한 음성이 퍼졌으며, 무수한 천의(天衣)가 뿌려지고, 진주를 비롯한 많은 보배구슬들이 사방에 드리워졌다. 사방에 은은한 향기가 퍼지며 미묘한 음성으로 부처님을 찬송했다.
찬탄이 끝나자 4신과 5품으로 지칭되는 《법화경》의 수행덕목이 재차 강조된다. 천태지의가 저술한 《법화문구》에 나오는 내용에 의해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4신을 살펴보자면 4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첫째 일념신해(一念信解)이다. 여기서 일념이란 일심이란 단어와 동일한 의미이며, 부처님의 생명력이 영원하다는 것을 일심으로 확신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법화경》을 한 번만이라도 신해하면 5바라밀을 실천하는 공덕 보다 더욱 크다고 말한다. 다만 반야바라밀은 제외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5바라밀은 방편에 불과한 것이며, 5바라밀의 완성이 지혜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지혜에 직입(直入)할 수 있는 것이기에 이렇게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 약해언취(略解言趣)이다. 부처님의 생명력이 영원하다는 것을 듣고 그것을 믿는 단계에서 나아가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한 공덕으로 부처님의 무상의 지혜를 얻게 된다고 말한다.
셋째 광위타설(廣爲他說)이다.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법화경》을 수지·독송·서사하게 하면 부처님의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심신관성(深信觀成)이다. 마음으로 깊이 부처님의 생명력이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확신함에 따라 부처님께서 영취산에 항상 계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 거주하는 사바세계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지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다. 여래수량품에서도 자신의 신명을 아끼지 않고 일심으로 부처님을 찾는 것에서 부처님이 항상 영취산에 있다는 것을 나타나게 되며, 부처님과 내가 만나는 곳이 바로 유토피아란 점에서 심신관성의 내용과 상통한다.
 
63. 5품
 
다음에는 5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5품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간 뒤에 그 뒤를 계승하여 《법화경》을 수지하고 홍포하는 실천 수행을 수행의 결과 얻어지는 공덕과 결부하여 설한 것이다. 초수희, 독송, 설법, 겸행육도, 정행육도가 그것이다. 각각의 내용을 일별하기로 하자.
첫째 초수희(初隨喜)는 《법화경》을 듣고 기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수희에 대해서는 다음 장인 수희공덕품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기회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둘째 독송이란 《법화경》을 수지 독송하는 것이다. 경전에선 독송의 공덕이 탑이나 사찰, 승방을 건립에 승단에 기증하는 것과 동일한 공덕이 있다고 말한다.
셋째 설법이란 법사품에서 강조하고 있는 《법화경》을 수지·독송·해설 서사하는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 하거나 남을 시켜 하거나 동일한 공덕이 있다. 5종법사의 구체적 활동을 말하며 경전을 중심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기 때문에 5종법사의 활동이 있는 곳에는 탑사를 만들거나 승방을 만드는 것 내지 여러 승려들을 공양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5종법사의 활동이 불교의 존재 이유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겸행육도이다. 여기서 육도란 6바라밀을 지칭하는 것이며, 6바라밀을 겸행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4신에서 말하는 일념신해와 달리 6바라밀을 겸비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다섯째 정행육도이다. 이것은 겸행육도에서 더 나아가 5종법사를 실천하면서도 6바라밀의 수행을 중심으로 수행을 마무리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4신5품을 살펴보았다. 결국 핵심적인 것은 믿음을 기반으로 부단한 실천수행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사품 이래 강조되는 5종법사행과 6바라밀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들을 다시 세분하여 설명하자면 우선 수행과 그것의 궁극적 도달점이다.
즉 수행의 방식은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며, 궁극적인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고 불필요할 수도 있다. 다만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 바로 5종법사행이나 5바라밀이다. 5종법사행이나 5바라밀은 자리이타라는 대승불교의 이념을 실천궁행하면서 궁극적으로는 반야의 완성을 통해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반야의 완성은 수행의 과정이 아니라 수행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길장이 ‘반야란 바로 부처님의 생명력으로 대상을 비춘다는 의미’라 정의한 것은 이런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동시에 반야는 평등하고 위대한 지혜이며, 지혜를 생명으로 삼기 때문에 혜명(慧命)이라 말한다고 해석한다. 반야를 아는 것이 부처님의 생명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란 점에서 5종법사행이나 육바라밀의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수희공덕품(隨喜功德品)의 핵심은 《법화경》의 한 구절이라도 듣고 기뻐하는 마음을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아가 《법화경》의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시작하여 50번째 사람이 듣고 기뻐하는 공덕은 물질적인 보시를 통해 얻는 공덕 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말한다. 경전에선 미륵보살을 등장시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진행된다.
 
“여래가 멸도한 후 사부대중과 지혜 있는 이로써 어른이나 어린이가 이 경전을 듣고 기뻐하며 승방이나 한적한 곳, 혹은 성읍 촌락 등에서 그가 들은 바와 같이 부모 친척과 친한 친구와 지식 있는 이를 위해 힘껏 연설하여 많은 사람들이 듣고 따라 기뻐하며,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그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듣고 따라 기뻐하며, 또 전하여 가르치며 전전하되 50번째에 이르면 미륵이여, 그 50번째의 선남자 선여인이 기뻐한 공덕을 내 이제 말하리니 너희들은 잘 들어라”
 
“미륵이여, 이와같이 50번째의 사람이 《법화경》을 듣고 기뻐한 공덕이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지와 같거늘, 하물며 최초의 법회에서 듣고 기뻐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느냐? 그 사람의 복은 더욱 많아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지로 비유할 수가 없느니라.”
 
이상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법화경》을 듣고 기뻐하는 것은 무량한 공덕을 얻는 길이다. 어려운 수행을 통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공덕이 다가온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세 가지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 《법화경》을 듣기 위해 승방에 나가 앉거나 서서 잠시라도 듣는 경우. 둘째 설법하는 곳에 앉아 있다가 다른 사람이 오면 권하여 앉아 듣게 하거나 자리를 나누어 앉는 경우. 셋째 《법화경》을 듣자고 권유하여 그 말을 듣고 잠시라도 듣게 하는 경우 등이다. 세 가지 중의 어떤 경우에 해당하든 무량한 공덕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설법의 이면에는 공통적인 측면이 있다. 《법화경》을 듣고 기뻐하며 많은 사람들이 《법화경》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노력하는 것이란 점이다. 또한 당사자 한 사람에 국한되지 말고 지속적으로 《법화경》의 가르침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점이다.
앞서 인용한 경전의 내용을 오십전전수희공덕(五十傳轉隨喜功德)이라 약칭하는데 이것은 처음의 파도가 다른 파도를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파가 만파가 되듯이 한 사람의 법화행자가 주변으로 《법화경》의 사상을 전파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화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평화로움 속에서 인생의 지남을 찾을 수 있으며, 이웃을 사랑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수희공덕품의 가르침은 경전에 대한 홍포의 의무를 다른 차원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사랑의 편지를 통해 이웃으로 사랑의 바이러스를 전파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알리라고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다양한 기질의 인간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법화경》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정상적인 정서와 사고의 소유자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다수는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게 된다. 이 점에 대해 가상대사 길장은 네 가지 부류의 인간유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소승을 배운 사람들이 옛날의 가르침에 집착하여 따르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경우.
둘째 《법화경》이 무상(無常)의 인과를 가르쳐서 구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집착하고 일승의 인(因)을 듣고 불성인 일승의 과(果)가 상주 불멸한다고 밝히더라도 믿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
셋째 관념에 집착하여 《법화경》이 방편문을 열어 진실상을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남김이 없는 요의(了義: 불법의 도리를 명백하고 완전하게 나타낸 것)설이란 것을 듣고도 따르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
넷째 유소득인(有所得人: 어떠한 사상이나 관념, 범주에 사로잡힌 사람)이 방편과 진실이란 관념에 갇혀 따르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
 
길장 스님의 견해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이유를 들어 《법화경》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기뻐한다는 것(수희〈隨喜〉: 불보살이나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자신의 일처럼 따라서 함께 기뻐함)은 어려운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공덕이 있다고 지적한다. 길장 스님은 수희의 종류를 두 자지로 구분하고 있다. 수희법과 수희인이 그것이다.
수희법이란 이 경전에 따라 환희심을 내면 금강반야가 되는 것이므로 신심과 어긋나지 않는다. 따라서 수희라 부른다고 말한다. 수희인이란 앞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따라 환희심을 일으키고, 본대로 《법화경》을 수지하고 해설하여 환희심을 내기 때문에 수희인이라 정의한다. 이것은 법과 사람의 입장에서 해설한 것인데 가르침 속에는 우리들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며, 그 세계에 도달하게 되면 그것을 금강반야의 경지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수행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이다.
 
길장 스님의 해석과 달리 천태 지의 스님은 《법화문구》에서 “이사(理事)에 수순하는 것”이라 현학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규기 스님은 《법화현찬》에서 수희란 단어를 축자적으로 해설하고 있다. 즉 “‘수’란 순종한다는 뜻이다. ‘희’란 기뻐한다는 뜻이다. 몸과 마음이 순종하여 깊이 기뻐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이것을 인연으로 공덕의 과보가 생긴다.”고 말한다. 또한 방편과 진실이란 점에서 경전 자체를 진실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도와주는 뗏목과 같은 것으로 정의하고 ‘듣고 생각하고 닦는 바에 따라 모두 수희심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여기서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을 문사수(聞思修)라 하는데 이것은 방편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지혜는 지혜지만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 수단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방편지혜라 지칭하는 것이다.
끝으로 수희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범어 아누모다나(anumodana)란 말을 번역한 것이며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공감하여 귀의한다고 하는 의미이다. 수희공덕품의 제목이 된 이유는 여래수량품에 나오는 ‘부처님께서 상주불멸한다’는 내용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하여 일심으로 귀의한다는 점 때문이다. 이 품의 전체적인 내용도 이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기뻐하고 마음에 새겨서 실천으로 나타내며,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뻐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참회한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고 뉘우쳐서 전날의 죄업을 없애기 위해 참회한다는 뜻이다. 이 품의 내용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참회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데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그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는 점에서 종교적 의미를 읽을 수 있다.
 
64. 법화경의 인연
 
‘누구나 다 부처님’ 초대승적 사상 담겨 수많은 불보살 출현…장대한 드라마 / <법화경>이라는 이름 을 처음 접한 것이 1957년경이니까 40여년쯤 전 일이다. 그 무렵 불교사상 강의를 듣기 위해 대각사의 청년단체모임인 대각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모임의 부회장인 황대법선 보살님께서 <법화경>에는 굉장한 부처님세계가 전개되고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당시는 요즘처럼 경전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뿐 아니라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접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 후 안진호 선생님이 <묘법연화경>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법화경>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여 부른 이름이다. 초발심의 도반들이 성북동 계곡에 있던 안선생님의 조그만 기와집을 방문했고 그때 나도 한질 구입했다. 별로 경전에 대한 지식도 없으면서 ‘귀중한 진리가 있다’라는 주변의 권유로 나도 두터운 양장본으로 된 상하 두권을 샀다. 기독교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가 불교에 귀의했던 황보살님은 이 경전을 읽고 법화신앙에 상당히 감동을 받았다고 했지만 당시에 나는 전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종교적 세계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을 지닌 채 나의 서가 가장 끝자리에 <법화경>을 모셔 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가 <법화경>을 가까이 하게 된 것은 천태와 법화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한 근래 십여년간의 일이다. <법화경>의 본 경명은 <삿드 달마 푼다리카 수트라> 이다. 바른 법을 흰 연꽃에 비유하고 있는 경이다. 바른법을 묘법(妙法)이라고 번역했다. 흰 연꽃은 진흙탕인 연못에서 핀다. 오염된 현실에서 올바른 부처님법을 실현하는 대승불교의 실현자를 흰 연꽃으로 상징한 것이다. <법화경>은 초기 대승불교경전을 대표하고 있다. 이 경을 보면 초기대승불교운동이 얼마나 격렬한 활동을 전개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초기 불탑신앙은 재가불교신자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시대를 거쳐옴에 따라 출가와 재가의 구별없이 혼연한 사부대중이 참여하게 되면서 대승불교운동이 활발해지게 되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이 가운데서 새로운 경전의 결집을 지향하는 그룹 가운데 혁신적인 신앙운동을 전개한 것이 법화신앙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는 기존의 소승불교인이라고 하는 성문이나 연각을 얕보는 일없이 모두 대승보살로 인도하려는 의지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말하자면 일체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념보다는 일체중생이 모두 다 성불한다 라는 초대승적인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시말하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모든 사람이 다 부처님이라는 대전제를 보여 주는 것이 이 경이다.그러기 때문에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고 수많은 보살의 명호를 <법화경>에서 읽을 수 있다. 수많은 부처님이 계신 것은 중생의 수가 무수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시방세계에 충만하시다. 과거세상에도 미래세상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빛으로 충만하다. <법화경>을 읽으면 실로 장대한 드라마를 연상케된다. 부처님은 세상 안팎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마음속에 충만하신 생명이시다. 이 생명의 부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불자라고 한다.우리나라에서는 신라시대부터 ‘법화회’가 사찰에서 열렸고, 수많은 고승들이 <법화경>을 독송하고 연구하여 많은 영험담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 경을 서사(書寫)하고 마음에 새겨 읽고 외우며 주변인들에게 설법해 주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이들을 ‘법사’라고 하고, 이 설법하는 분들을 ‘여래의 사도’라고 하였다.여래의 사도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사부대중을 위해 법을 설한다. 여래의 방은 자비심이요, 옷은 온유하게 참아내는 마음이요, 여래의 자리는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비운 마음자리이다.<법화경>은 중국에서는 천태종의 주요 소의경전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삼론종 법상종 열반종 등 모든 조사들이 소중히 하였다. 특히 일본에서는 법화신앙이 큰 주류의 하나로서 <법화경> 연구가 크게 성행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보다 좀 약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불교인의 신앙관의 저변을 흐르고 있는 큰 맥은 법화신앙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법화경>이라는 이름 을 처음 접한것이 1957년경이니까 40여년쯤 전 일이다. 그무렵 불교사상 강의를 듣기 위해 대각사의 청년단체모임인 대각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때 모임의 부회장인 황대법선 보살님께서 <법화경>에는 굉장한 부처님세계가 전개되고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당시는 요즘처럼 경전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뿐 아니라 한문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접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후 안진호선생님이 <묘법연화경>을 출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영자<동국대 불교대학원장>
 
 
65. 법화경 해설
 
부처님께서 무량의처삼매에 드시니 하늘에서 가지가지 꽃이 뿌려지고 땅이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다. 큰 광명을 놓으시는 등 헤아릴 수 없는 신통변화를 나타내시니 미륵보살이 대중을 대표하여 문수보살에게 그러한 신통변화가 나타난 까닭을 물었다. 문수는 과거의 부처님이 <법화경(法華經)>을 설할 때 반드시 이러한 상서가 나타났는데 이제 또 그러하니 <법화경>을 설하실 게 틀림없다고 대답한다. ‘서품’에 나오는 이 말은 과거의 부처님이 항상 <법화경>을 설해 왔다 하여 이 경의 특별함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경>은 <묘법연화경>을 줄여 부르는 말로 범어 이름은 삿다르마 푼다리카 수트라(Sadharmapundarika-sutra)이다. 연꽃이 물에 자라되 물에 젖지 않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뜻을 묘법이라 하여 붙인 말이다. 한역본에 7가지가 있으나 구마라습역의 <묘법연화경>이 가장 널리 유통되었으며, 달마급다의 역은 <첨품묘법연화경>으로 제명되었고, 또 법호가 번역한 <정법화경>도 유명하여 이의 3본이 번역이 잘 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예로부터 “뭇 별 가운데 달이 으뜸이듯이 수많은 경전 가운데 법화경이 으뜸”이라고 한 경의 말을 인용, 이 경이 최고의 경전이라고 주장해 오기도 했다. 이 경을 의지하여 생긴 종파도 여러 개며 중국불교사상 유명한 천태지의(天台智)대사의 천태교관은 <법화경>을 연구하여 수립한 것이다. <화엄경>과 쌍벽을 이루어 <법화경>은 천태교학의 체계를 성립시키고 <화엄경>은 화엄교학의 체계를 수립하여 중국 교학사상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천태교학 정돈…화엄경과 쌍벽 적문.본문으로 구성…총 28품
28품으로 되어 있는 전체 경문의 전반 후반을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으로 구분하여 제법 실상의 이치를 천명하였는데 적문에서는 ‘방편품’이 가장 중요하고 본문은 ‘여래수량품’이 가장 중요한 품이다. <법화경>을 실교법문(實敎法門)이라 말하면서 삼승(三乘)의 방편으로 설한 권교(權敎)를 모아 구경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으로 대의를 삼는다. 이를 회삼승귀일승(會三乘歸一乘)이라 말해왔다. ‘방편품’에서 부처님의 일대사 인연을 밝힌 대목과 제법실상을 밝힌 10여시설(十如是說)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님들은 일대사 인연 때문에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여래의 지견을 열어주고, 보여주고, 깨닫게 해주고, 들어오게 해주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 10여시설을 근거로 하여 천태 지자대사는 일념삼천설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은 이미 구원겁 전에 성불하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가 정반왕궁에 태어나 출가하고 수도하여 도를 이루었다고 알고 있지만 나는 이미 구원겁 전에 성불하였느니라.” 본래성불의 이 이치를 바로 아는 것이 여래의 지견을 얻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일승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여 진정으로 바라는 바는 중생이 무상보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 외에 어떤 것도 구경목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성불의 길이 어디에 있는가? 천차별 만차별의 방편이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경의 사구게(四句偈)에서 밝혀 놓은 실상법문을 깨닫는 것이다. “천지 만유는 본래부터 항상 적멸한 모습 그대로다.(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불자가 도를 닦고 나면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리라.(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이 본래 적멸상이란 이 말씀이 일승의 묘법이다. 결국 고요한 적멸의 모습 그 하나를 보여 주신 것이다.
 
대승불교경전의 하나. 천태종, 일련종의 중심 성전. 원제는 산스크리트어로 『사다르마푼다리카 수트라』(백연화처럼 올바른 가르침). 산스크리트 원전, 티벳어역 및 한역 3종이 현존한다. 한역은 축법호역 『정법화경』, 쿠마라지바 역 『묘법연화경』, 사나굴다 달마급다 공역 『첨품묘법연화경』인데, 일반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쿠마라지바 역이다. 27(또는 28)장으로 되어있는데, 제2장 <방편품>을 중심으로 한 부분이 가장 일찍 성립하고, 그 사상은 <개삼현일(開三顯一)>, <개권현실(開權顯實)> 등이라고 한다. 즉 불은 중생의 근기(根機)에 응해서 삼승의 가르침을 펼쳤는데, 궁극적으로 진리는 단 하나라고 하여서, 종래의 대승ㆍ소승의 대립의 지양통일을 도모하고 있다. 늦게 성립한 후반 부분의 중심은 <여래수량품(如來數量品)>으로, 여기에서는 보리수 밑에서 성불한 석가는 가짜 모습으로, 실은 오백진점겁(五百塵点劫)이라는 태고에 성불했다고 하며, 영원의 불의 이상을 밝히고 있다. 최후의 6장은 가장 새로운 것인데, 그중에서 관음의 신앙을 주장하는 <관세음보살보문품>은 『관음경』으로서 독립해서 존중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천태 지의가 『법화현의』, 『법화문구』의 2대 주석서를 저술하고, 본경을 제경 중에서 최고의 진리를 주장한 것으로서 존중했는데 경의 전반을 <적문(迹門)>, 후반을 <본문(本門)>이라고 하는 것도 지의에 의해서 보급되었다.
 
“모든 중생 성불할 수 있다”
가르침 종합 ‘敎觀 正法’체계 완성
육바라밀 수행 삼매체득 나타내
법화경 만큼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애독되어진 경전도 드물 것이다. 일찍이 삼론 법상 화엄종의 학자 선사에 이르기까지 두루 이 경을 연구하고 주석서를 내놓았고 마침내 중국에서는 천태가(天台家)에서 소의경전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아마도 이 경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매력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즉 이경은 기존의 경전들에 나오는 부처님 말씀을 화해하고 종합하여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정법체계를 완성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소승 대승 연각 성문 보살의 사상을 방편과 진실이라는 조화의 틀위에 교학적으로 체계화하고, 기존의 수행법인 수지 독송 해설 서사의 수행법을 선정삼매(禪定三昧) 체득의 수행으로 체계화하여 바야흐로 교관(敎觀)이 겸비된 경전이다. 그래서 역경가들은 이 경을 ‘정법화(정법을 설하는 경), 방등법화(방등의 가르침을 설하는 경), 묘법화(묘법을 설하는 경)’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법화경의 선정사상은 관(觀)을 통해 이루어지고 이를 경에서는 삼매행으로 설하고 있는 것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이른바 깨달음이란 제법 실상이라는 우주만물의 진실된 실상을 깨닫는 것이니 이는 불지를 얻어야만 체득되는 경계이므로 보통 대승의 몰록 깨닫는(대승돈각) 법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 상근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하근기 나아가서 일체중생에게도 근기를 성숙시켜 성불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 경의 특징이 있다.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불지는 무량의처삼매속에 들어 부처의 세계 불지견을 열어보이고(開示) 그 불지견에 깨달아 들어가는(悟人) 갖가지 삼매행이 묘음보살행, 약왕보살행, 관음보살행, 보현보살행 등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서의 선정수행은 주로 육바라밀의 선정이 설해진다. 이와같은 선정사상으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북제의 혜문(慧文) 혜사(慧思, 514~577)등의 선사(禪師)가 선정을 닦다가 법화경을 애독하게 되었고, 이어 천태대사(538~597)도 선정에 들어 법화삼매를 깨달아 개오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설잠(雪岑, 속명 김시습 1435~1493)은 <연경별찬>에서 ‘이 경에는 선가(禪家)의 뜻이 들어 있다’고 하는 등 법화경에서는 선정의 깨달음이 크게 중시된다. 현재 유통되는 법화경은 한역본으로는 축법호(竺法護)역의 <정법화경(正法華經)>, 구마라집(鳩摩羅什)역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그리고 사나굽다( 那 多)역의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의 세 본이 있는데, 이중 구마라집본의 묘법연화경이 비교적 쉬운 문장으로 법화경의 뜻을 잘 나타냈다고 평가되어 법화경의 대표적인 경전으로 사용되어 왔다. 법화경의 범본 원전은 11세기 이전 필사본과 그밖의 단편적인 범본들이 전해오던 것을 모아 범어 원본을 복원한 범본 법화경이 있다. 법화경에서 얻는 깨달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승(성문 연각)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이승작불(二乘作佛)사상과 석가모니 부처님은 본래 구원겁전에서 성불했다는 구원실성(久遠實成)사상이라 할 것이다. 첫째, 방편품을 중심으로 한 법화경 전반부에서는 제법실상을 십여시(十如是)로 설하여 모든 중생이 동등하게 법계의 실상을 갖추고 있다는 일승 묘법이 밝혀져 있는데 이와같은 입장에서 볼때 법화경을 설하기 이전까지 무상과 공에 집착하여 부처가 될 수 없다고 비난 받았던 이승, 여인, 악인마저도 부처님의 자비방편과 진실의 지혜에 의하여 수기받아 장차 성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한 본 뜻이 일대사인연이므로 부처의 지견을 열어서(開) 보여주어(悟) 부처의 지혜에 들어가게(入)한다는 법화경의 임무는 이승이건 삼승이건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보장을 해주고 나아가서는 아이들이 놀면서 모래로 불탑을 만들거나 장난으로 불상을 그리거나 혹은 산란한 마음으로 ‘나무불’이라 하여도 조그마한 선심(善心)의 싹이 결국 발심하여 불도에 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불도에 이르게 하고 있다.
육근 청정해야 실상경계 본다
무량의 뜻으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
오종법사 수행설해 염불의 길 안내
<법화경>에서는 몰록 깨달아 성불(頓悟成佛)하는 여래의 선사상을 설하고 있다. 돈오성불이란 중생으로 하여금 보살도를 이루어 곧 바로 불도에 들어가는 일불승으로, 일념으로 실상의 이치를 깨달아 일체의 번뇌와 습기를 끊고 일체를 보고 알아 통달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달리 일념신해(一念信解: 일념으로 믿음과 이해) 일념수희(一念隨喜:일념으로 따라 기뻐함)로도 표현한다. 그러나 <법화경>이 다른 대승경전보다 강조하는 것은 불도를 향해 나아가는 보살을 가르치는 법(敎菩薩法)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부처님께서 항상 호념하시는 경(佛所護念)이라는 데 있다. 부처님께서 호념(護念, Parigraha)하고 섭수(攝受)하는 경이란 ‘서품’에서는 ‘무량의 뜻으로 보살을 가르치는 법’이라고 설하고, ‘안락행품’에서는 ‘제천이 주야로 항상 법을 위하여 위호(衛護)한다’고 하며, ‘다라니품’에서는 ‘두 보살(막왕보살,용시보살) 두 하늘(비사문천왕, 지국천왕) 십나찰녀도 다섯가지 신주(神呪)에 의하여 <법화경>을 수지하는 오종법사(五種法師: 법화경을 수지 독송 해설 서사 하는 이)를 옹호(擁護)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와같이 <법화경>을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것은 곧 돈오의 일불승을 설하는 비밀법을 설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러한 일불승 여래선정의 경계는 경의 서두로부터 보살 대중과 성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제시하고 있다. ‘서품’에서 부처는 무량의처삼매(無量義處三昧: 법화삼매의 일종으로 실상을 아는 삼매)에 들어 백호에서 동방으로 만팔천토를 비추어 불국토를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무언의 설법을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대중들은 문수보살을 제외하고 이 광명이 뜻하는 바 실상의 법을 알지 못하여 의혹에 쌓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방편품’에 이르면 삼매속에서 일어나신 부처님께서 온갖 선정 삼매등 미증유의 법을 성취했다고 밝히고 오직 부처님이라야만 제법실상을 깨달아 알게 된다고 선언하면서, 이른바 제법은 “이와 같은 상(相), 이와 같은 성(性), 이와같은 체(體), 이와 같은 역(力), 이와 같은 작(作), 이와 같은 인(因), 이와 같은 연(緣), 이와 같은 과(果), 이와 같은 보(報), 이와 같은 본말구경등(本末究竟等)”라고 실상의 경계를 밝히자, 지혜제일 성문제자 사리불도 부처님의 본 뜻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실상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여래는 삼승 방편 일승 진실의 법을 폈다고 선언하자, 오천의 대중이 퇴장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면 이러한 여래의 선정으로 도달하는 돈각의 실상은 어떻게 체득되는가? 이를 위하여 부처는 무수한 인연과 비유가 필요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이어 육근청정(六根淸淨)으로 얻어지는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육근이 청정해지는 과정은 경을 통달해 지니고(受持), 읽고(讀), 외우고(誦), 해설(解說)하고, 베껴씀으로써(書寫) 끊임없이 <법화경>의 오종법사를 수행하면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六根: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에 전환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전에 우리의 육근은 자신의 업(業)에 의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의식하였으나, 이제 법화의 공덕으로 인하여 이것은 모두 허망한 감각들임을 깨닫고 참회하면 자연 오욕락이 허망한 것이 되어 버린다. 이를 <법화론(法華論>에서는 “보통 사람들도 <법화경>의 힘으로 인해 뛰어난 근기의 활동력을 얻어 비록 초지(初地: 견성)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더라도 부모가 낳아 주신 육안(肉眼: 육근)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안팎을 꿰뚫어 보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육근을 장엄하면 이제 냄새만 맡던 비근(鼻根)에서 안근의 색을 볼수 있고, 소리를 듣고, 촉감을 느끼며, 법을 아는 등의 상호 작용이 이루어진다. 곧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안(肉眼)에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의 작용이 갖춰지므로써 신통력이 생기고 불가사의한 경지를 체험하게 된다. 나머지 오근도 마찬가지이다. 이상이 육근청정을 얻는 과정이고 법화삼매에 드는 과정이다. 다음에는 법화삼매행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삼승 모두 깨달아 일승에 들라
법화삼매란 <법화경>의 대의인 삼승을 모아 모두 일불승에 들어가는 여래의 지견을 체득하는 선정삼매이다. <법화경>은 모든 중생이 속히 불도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설하는데, 이 법은 스스로 깨달아 체득하는 것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도에 나아가는 차제행이 아닌 속히 불도를 이루는 돈각의 법이라 한다. 따라서 법화 보살은 불차제행을 닦아 번뇌를 끊지 않고 보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법화의 일승법은 여래장이며 대승법이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부처와 다르지 않고 여래장을 지니어 반드시 안락을 이룰 것이므로 가르침을 따라 행하면 차제행으로 이승의 길을 가지 않고 번뇌를 끊지 않고서 그대로 삼매와 각종 다라니를 얻어 불도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를 비유하여 연꽃이 한꺼번에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법화삼매를 행하면 많은 결과가 한꺼번에 갖추어 진다고 한다. 삼매는 등지(等持)라고 하는데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는 것. ‘심일경성(心一境性)’ 혹은 ‘심일단성(心一端性)이라고 하여,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을 말한다. 또 다라니는 총지(總持)라고 번역되며 삼매를 닦아 오랫동안 익히면 이루어지는데 제법실상의 지혜와 함께 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삼매와 다라니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에서 삼매와 다라니는 정신통일하는 지와 관이 선과 관련되어 보살의 보편적인 실천덕목으로 되어 있다.
<법화경>에서 법화삼매의 선정을 설한 곳으로는 방편품 일불승의 비유인 화택삼거(火宅三車)중 대력백우거와 안락행품의 선정수행을 들 수 있다. 화택삼거란 <법화경> 일곱 가지 비유중 첫 번째 나오는 비유이다. 어느 장자가 불타는 집에서 놀이에 빠져 있는 아들들을 구하기 위해 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사슴의 수레, 양의 수레, 소가 끄는 수레를 각각 주겠다고 하여 일단 불타는 집에서 나오게 한 다음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크고 힘이 센 소가 끄는 수레를 아들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수레는 여래의 법체를 비유하며 수레를 장식한 장엄구들은 일불승에 들기 위한 수행을 나타낸다. 여기서 수레에 깔아 놓은 고운 대자리나 붉은 베개등은 온갖 관(觀)을 닦아 선정이 이루어지면 삼매에 들고(煉) 삼매와 그 덕으로 정관이 바르게 성숙하며(熏) 자재한 선정에 들어감(修)을 가리킨다. 또 안락행품에서는 신 구 의 서원(身口意誓願)안락행을 설하여 보살이 행할 바 선정의 수행을 밝히고 있다. 곧 “인욕의 경지에 머물러 부드럽고 온화하며 착하고 순하며 조급하고 성질내지 않고 마음에 공포가 없으며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온갖 사물의 여실상을 관하되 그것에 집착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라고 실상정관에 드는 보살이 수행하는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상불경보살 약왕보살 관세음보살 보현보살 등도 보살행과 교화행을 펴고 법화의 법을 들은 다음 법화삼매와 다라니를 얻어 일불승에 드는 <법화경> 선정삼매의 모습을 설하고 있다. 불교의 실천체계는 계 정 혜(戒定慧)를 중심으로 되어 있다. 계로써 신 구 의(身口意) 삼업을 다스려 조절하며, 이렇게 계를 청정히 한 바탕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 선정을 계발하며, 선정삼매가 청정해지면 지혜가 청정해져서 지혜로써 번뇌를 끊고 보리를 성취하는 수행이다. <법화경> 법화삼매 역시 계근(戒根)이 청정해지므로 여러 상서를 선정속에서 보아 법의 희열을 느끼고, 정근(定根)이 청정해져서 깊은 선정이 생겨 삼매에 들며, 혜근(慧根)이 청정해지므로써 법화삼매로 이끄는 보현보살 및 시방불을 삼매속에 뵙고 마침내 불지견을 얻어 보살정위에 들어간다. 따라서 법화삼매를 증득하므로써 <법화경>의 구경인 회삼귀일(會三歸一)의 법화실상을 증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롭고 바르게 사는 길‘정법화경’ 산스크리트 원전과 가까워
<법화경>의 원래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의 ‘삿다르마-푼다리카-수트라(Saddharma-Pundarika-Sutra)’이다. ‘삿다르마(Saddharma)’란, ‘삿(Sat)’과 ‘다르마(dharma)’라는 말의 합성어로 ‘삿’은 ‘진실한, 바른(正), 훌륭한(善), 뛰어난(勝)’ 등과 같은 뜻을 가졌으며, ‘다르마’는 한역하면 ‘법(法)’이다. 여기서 ‘삿’과 ‘다르마’를 합친 ‘삿다르마’라는 말은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가 생긴다. 중국의 축법호(竺法護)는 ‘정법(正法)’이라 번역했고, 네덜란드의 케른(Kern)은 ‘진실한 법’으로, 또 프랑스의 부르뉴프(Burnouf)는 ‘훌륭한 법’으로 번역하고 있다. 일본 이와나미(岩波) 문고의 범어 번역본에는 ‘바른 가르침’으로 되어 있고 쿠마라지바(鳩摩羅什)는 이를 ‘묘법(妙法)’이라 번역했다.‘푼다리카(Pundarika)’는 흰 연꽃(白蓮華)이다. 인도 사람들은 흰 연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여기는데, 진흙 속에서 나며 더러운 흙탕물에서 꽃을 피우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밝고 맑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은 속세에서 생활하면서도 속세에 물들지 않고 자유자재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 사상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수트라(Sutra)’는 ‘꿴 실’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꽃을 실에 꿰어 머리에 장식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 줄기의 계통으로 정리한 것을 ‘수트라’라 했다. 중국의 ‘경(經)’이라는 말도 원래는 날줄이라는 뜻인데, 거기서 도덕이나 성인의 말씀을 엮은 책이라는 뜻이 나왔으니 매우 적절한 번역이라 하겠다. 요컨대 ‘삿다르마-푼다리카-수트라’ 즉 <법화경>이란, ‘속세에 있으면서 현상의 변화에 현혹되지 않고 우주의 진리에 순응하여 바르게 살며 자기의 인격을 완성하면서 세상을 이상향(理想鄕)으로 만들어 가는 길. 더욱이 인간은 누구나 다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본질을 평등하게 갖고 있다는 것을 설한 더없이 거룩한 가르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법화경>은 중국의 서진(西晉) 경제(景帝)의 태강(太康) 7년(286)에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10권과 요진(姚秦) 문환제(文桓帝)의 홍시(弘始) 8년(406)에 쿠마라지바가 번역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 수(隋) 문제(文帝) 원년(元年) (601)에 즈나나구프타( 那 多) 등이 번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 7권 등의 완역본이 있고 일부분만 번역한 초역(抄譯)이 있다. 그러면 이들 번역본과 산스크리트 원전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첨품묘법연화경>의 서문에는 <법화경>의 여러 한역에 관해 설명한 문헌학적인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즉 “옛날 돈황의 사문 축법호가 진무(晉武) 때 정법화(正法華)를 번역했다. 후진(後秦)의 요흥(姚興)은 다시 나습(羅什)에게 청하여 묘법연화를 번역케 했다. …” 현재 우리들은 <법화경>이라고 하면 무조건 구마라지바의 <묘법연화경>만을 <법화경>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전과 가장 가까운 것은 <정법화경>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생 구제할 수 있어야 부처
우주 대생명인 부처님 심부름꾼으로 살라
서품(序品) 즉 서(序)란, 발단(發端) 또는 ‘실마리’란 뜻인데, 사연(事緣)이라고도 한다. 원래 이 ‘서품’은 경전을 모두 작성한 후 마지막으로 쓰는 것으로, 이 속에는 경전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서품’이라고 해서 그저 <법화경>을 설하게 된 사연, 즉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왜 설했는가 하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쉽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경전의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서품이기 때문이다.
우선 <법화경>은 보살행을 가르치는 것(敎菩薩法)이며, 모든 부처님이 꼭 간직하고 있어야 할 넓고 큰, 최고의 경전임과 동시에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믿고 간직하는 사람을 항상 보호하시는 가르침(佛所護念)이다. 첫 번째로 보살행을 가르친다는 것은 중생의 근기를 성숙시켜 보살로 인도하고 그 보살들이 해야할 일들 즉 보살도를 구체적으로 예시하는 가르침이란 말이다. <금강경>에서는 보살이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과 수자상(壽者相)이라는 네 가지의 생각(四相)을 버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 반해, <법화경>의 가르침은 <금강경>에서 말하는 가아(假我)나 브라흐만 교(婆羅門敎)의 실아(實我)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도(中道)인 진아(眞我)를 찾아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는’ 이른바 제법실상(諸法實相)에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제법실상이라는 말에는 만물만상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뜻도 있지만, 앞에서 말한 진아 즉 진리(眞理) 또는 우주의 대생명(大生命)이 현상세계에 나타난 것이라는 뜻에서 천태 대사(天台大師)는 “제법은 실상이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심부름꾼(使者)으로서 부처님을 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에게 전하여 그들을 모두 보살로 인도하자는 것이 교보살법이라는 것, 즉 보살을 훈계하며 그들이 모두 흰 연꽃(白蓮華)처럼 더러운 세속(世俗)에 살면서도 세속에 물들지(染) 말아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특히 ‘서품’에서는 부처님이란 우주의 대생명 즉 진리이며 그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에 수많은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과 ‘연등불(燃燈佛)’을 등장시키고 있다. 즉 처음의 일월등명불이 세상을 떠나자 또 일월등명불이 출현하였으니 이렇게 하기를 계속, 2만의 일월등명불이 세상에 출현하였다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최후의 일월등명불의 여덟 왕자 가운데 맨끝에 ‘활활 타오르는 등불’이라는 연등(燃燈) 또는 정광(錠光)여래라고 하는 이름의 부처님이 계셨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모두가 광명(光明)이라는 뜻이므로 이름하여 비로자나(毘盧遮那) 즉 바이로차나(Vairocana)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진리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여 존재하기 때문에 아미타바(Amitabha) 즉 무량광(無量光)이며 아미타유스(Amitayus) 즉 무량수(無量壽)이다. 이렇게 부처님이란 공간적으로 일체변조(一切遍照)임과 동시에 시간적으로 영원(永遠)한 것이므로 2만(二萬)의 부처님이 똑같은 이름의 일월등명불로 출현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부처님들은 모두가 여래(如來)이시다. 여래란 진리를 몸으로 나타내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는 실천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혜를 완성한 사람이라도 중생을 건지지 못한다면 부처님이라 할 수 없으며, 부처님이 되려면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서품’의 에센스라 하겠다.
보살로 거듭나게 하는 가르침
현상은 인연 모임, 실상은 하나의 대생명
방편이란 ‘방법, 교묘한 수단, 편리한 수단, 진실에 바탕을 두고 진실의 세계로 인도하는 수단’ 등으로 해석되며, ‘중생을 구제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일시적인 수단으로 설한 가르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법화경>에서는 ‘여러 가지 사연(種種因緣)과 갖가지 비유(種種譬喩)와 이론적인 이야기를 널리 펴서 말한 것(廣演言敎)’이라고 방편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진리란, 말이나 글로써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此法不可示 言辭相寂滅) 방편을 통해 진리를 나타낸다고 한다. 천태 대사는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출현하신 부처님의 설법을 적문(迹門)이라 하고, 모습도 이름도 없는 진리 그 자체로써 진리를 설하는 부분을 본문(本門)이라 말한다. 그리고 <법화경>은 부처님이 상대방의 근기에 따라 그 뜻에 맞도록 가르침을 설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근기에 관계없이, 묻는 사람이 없는데도 몸소 증득한 것을 부처님 스스로 말씀하신 것, 즉 무문자설(無問自說)인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적문의 부처님이신 석존(釋尊)께서는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고 한량이 없어, 그 지혜의 법문 즉 설법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諸佛智慧 甚深無量 其智慧門 難解難入), 일체의 성문과 독각(獨覺)인 벽지불은 부처님의 지혜를 알 수 없다(一切聲聞 支佛 所不能知). 왜냐하면 부처님은 일찍이 수많은 부처님들을 섬기면서 갖가지의 가르침을 받고 그 많은 부처님들이 행하신 모든 수행을 그대로 몸에 익혀(所以者何 佛曾親近 百千萬億 無數諸佛 盡行諸佛 無量道法) 온갖 장애를 용맹스런 마음으로 완전히 극복해 정진하니 그 명성이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었으며, 이렇게 무한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아직까지 아무도 얻지 못한 최고의 진리를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에(勇猛精進 名稱普聞 成就甚深 未曾有法), 그 진리를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설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 깊이 담겨져 있는 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隨宜所說 意趣難解)”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보살이 갖추어야할 일체지(一切智) 즉 평등상(平等相)에 대한 설법이 바로 십여시(十如是)이다. 십여시란, 일체의 현상(現象)을 열 개의 카테고리로 묶어 설명한 것이다. 즉 1)사물마다의 모습(如是相) 2)성질(如是性) 3)체상(如是體) 4)능력(如是力) 5)작용(如是作) 6)원인(如是因) 7)보조원인(如是緣) 8)결과(如是果) 9)과보(如是報)가 10)서로 다르게 보이지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가 사실은 한결같이 평등한 것이다(如是本末究竟等)는 말이다. 즉 현상계(有爲)의 모든 것은 천태만상이지만, 그 현상은 일시적인 인(因)과 연(緣)의 모임에 지나지 않을 뿐, 그 내면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의 대생명(眞理), 즉 절대(無爲)이기 때문에 평등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렇게 만물만상이 근원적으로 평등하다는 일체지를 증득토록 하여 보살로 거듭 태어나게 하는 <법화경>은, 부처님이 임시로 범정(凡情)에 순하여 세간의 욕락(欲樂)에 수응하는 교설(世界悉壇)이나, 중생의 근기를 살펴 각각 근기에 맞는 각각위인설법(各各爲人悉壇)이나, 번뇌·악업 따위의 중생의 미망을 없애는 대치설법(對治悉壇)이 아닌, 제일의(第一義)의 이치를 설하여 진증(眞證)에 들어가도록 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정직히 방편을 버리고 오직 위없는 깨달음만을 설한다(正直捨方便 但說無上道).
부처 출현은 일체중생 해탈선언
모든 존재 본래부터 열반 적정
부처님께서는 사리푸트라(舍利弗)의 간청을 세 번씩이나 거절하다가 “그대가 거듭 세 번씩이나 간청하니 내 어찌 말하지 않겠는가. 그대들은 이제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해 마음에 깊이 간직하라. 내가 그대들을 위해 더욱 자세히 알기 쉽게 말하겠다”며 청법(請法)을 승낙하셨다. 그러자 이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 비구·비구니·우바새· 우바이 5천 명이 별안간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떠나가 버렸다. 그 까닭은 이들은 지금까지 쌓아온 죄업이 무겁고 깊을 뿐만 아니라 증상만(增上慢)에 빠져 있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은 것처럼 착각하고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달은 척해 왔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는 잠자코 계실 뿐 말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렇게 증상만에 빠진 사람들은 물러가는 게 마땅하다”고 하시며 설법을 시작하셨다. “모든 부처님은 때와 장소에 따라 법을 설하므로 그 참뜻은 알기 어렵다.
나 또한 무수한 방편으로 갖가지 과거의 사연과 비유와 적절한 말로써 여러 가지 가르침을 설하고 있지만, 진실 그 자체는 헤아려 보거나 분별해서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니, 부처님들만이 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모든 부처님 세존들은 오직 하나뿐인 중대사를 인(因)과 연(緣)으로 해서(一大事因緣), 이 세상에 모습을 짓고 출현하신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가리켜 부처님 세존들이 오직 하나뿐인 중대사(目的)를 인과 연으로 해서 이 세상에 출현하느냐 하면,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들은 일체의 중생들이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님의 지혜(知見)를 스스로가 열어서(開) 청정한 마음을 얻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며, 또 부처님의 지혜를 중생들에게 나타내 보이기(示)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며, 또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중생들이 스스로 깨닫도록(悟) 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며, 부처님의 지혜에 깊이 들어가서(入) 평등상과 차별상을 모두 아는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깨닫는 길(道)로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이다.
사리불이여 이것을 가리켜 모든 부처님들은 오직 하나의 일대사(目的)를 원인(因)과 조건(緣)으로 해서 세상에 출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당장 중생들에게 최고의 가르침 설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착각하고 이 가르침 안 받으니, 이런 사람 과거세에 선행 쌓지 않았으며 5관 욕망 집착하고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번뇌 끊지 못하더니 여러 욕망 인연되어 3악도에 떨어지고 육도(六途)를 헤매면서 여러 고통 갖추어 겪고 전생의 악업은 미세한 모습으로 모태(母胎) 속에 들었다가 날 적마다 불어나니 박덕하고 복도 없어 뭇 고통에 시달린다. 이런 사람 위해 방편을 베풀어 여러 고통 끊는 길 말해 마음의 평안(涅槃) 가르쳤으나, 이는 소승의 멸제일 뿐 참 열반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 본래부터(諸法從本來) 평안하고 조화되어 조용한 모습이라(常自寂滅相)” 하시며 지금까지 설한 열반은 소승의 열반이며 대승의 열반은 모든 존재가 바로 열반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부처님들은 오직 보살만을 교화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항상 이 하나의 목적 즉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가르쳐 그것을 확실히 깨닫게 하는 것이다”고 하시며 앞으로 부처님이 될 보살은 소승의 열반을 구하지 말고 자기들도 일대사 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 것을 깨닫도록 하셨으니, 정말 코페르니쿠스적인 인식의 대전환이며 대선언(大宣言)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 아들
모래로 탑세우고 ‘나무불’외워도 불도성취
‘방편품’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속에 있는 진리 즉 대생명은 근원적으로 평등(平等)하다는 것과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한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지혜를 확실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시며 “마음의 평안만을 위하여 열반을 구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셨다. 이어서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적멸상(寂滅相)이므로 따로 적멸(涅槃)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아이들이 놀이할 때 모래 모아 탑 세우거나 혹은 부처님의 상(像)을 모신 절(廟)에 들어가 한 손을 들고 ‘나무불(南無佛)’하고 소리내어 불러도 그것을 연으로 하여 점차로 공덕 쌓아 고통 뽑아 주겠다는 큰마음(大悲心) 갖춘 후 모두 불도 성취했다”고 설하셨다.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리푸트라(舍利弗)는 너무나 가슴이 벅차 올라 뛸 듯이 기뻐하며 스스로가 이해한 것을 부처님께 여쭙는다.
“저는 부처님께서 오래 전부터 ‘누구든지 수행을 쌓으면 부처님이 된다’고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고 또 많은 보살들이 장차 성불하리라는 예언(授記)을 받는 것을 보았지만, 저희들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에게는 전혀 그런 말씀이 없으셨기 때문에 저는 오랫동안 수행에 수행을 거듭하더라도 결국은 부처님처럼 한량없는 지혜를 얻을 수 없는 몸이 아닌가 하고 매우 슬퍼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을 듣게 되어 모든 의혹(疑惑)과 원통해 하는 마음을 송두리째 없애버리니 마음과 몸이 느긋해져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이 평안합니다. 오늘 저는 비로소 참다운 부처님의 아들(佛子)이며 부처님의 입에서 태어났고 부처님의 교화에 의해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반드시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여 천신(天)과 사람(人)들에게 존경받는 몸이 되어 위없는 최고의 가르침 널리 설해서 많은 보살을 교화할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자 부처님께서는 “나는 전생에서 그대에게 최고의 깨달음인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도록 가르쳤는데, 이 세상에 와서는 그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내가 손쉽게 설한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이미 완전한 열반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해 버렸으니, 나는 그대에게 부처님의 아들로서 세운 본래의 서원(誓願)과 그 서원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갖가지의 수행을 다시 기억해 내도록 하기 위해 그대를 비롯한 모든 성문들에게 이 대승의 가르침인 묘법연화(妙法蓮華)·교보살법(敎菩薩法)·불소호념(佛所護念)을 설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부처님께서는 “사리푸트라(舍利弗)여, 그대는 생각조차 미치지 못할 만큼의 아득한 미래 세에 이를 때까지 한량없는 수많은 부처님을 섬기며 그 부처님들이 설하는 바른 가르침(正法)을 굳게 지켜 보살로서 해야 할 수행을 완전히 닦은 후, 기필코 부처님의 깨달음을 성취하리니, 이름은 화광여래(華光如來)·응공(應供)·정변지(正遍知)·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이라 하며 그 나라의 이름은 번뇌가 없는 청정한 리구(離垢)라 하리라” 하시며 수기(授記)한다.
이렇듯 사리푸트라는 자기가 부처님의 아들 즉 보살임을 알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수기한 것이므로,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神子)임을 알았듯이 우리들도 중생이 아닌 원생(願生) 즉 부처님의 제자가 아닌 부처님의 아들(佛子)임을 알아야 한다.
사바세계는 불타는 집
3승 가르침으로 중생 불길서 구해내
부처님께서는 “지금까지는 성문승(聲聞乘)·연각승(緣覺乘)·보살승(菩薩乘)의 3승(乘)을 분별해서 설했다. 이것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한 것이나 이 3승 모두가 부처가 되기 위한 수단(方便)일 뿐, 사실은 모두가 성불을 위한 하나의 가르침 즉 1불승(一佛乘)이다”고 천명하시며, <법화경>의 유명한 일곱 가지의 비유(七喩) 가운데 하나인 ‘화택의 비유(火宅喩)’를 설하신다. 원래 <법화경>에는 열 여섯 가지의 비유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명한 것이 일곱 가지다. 그러면 ‘화택유’ 즉 ‘삼계화택유(三界火宅喩)’를 듣기로 하자. “어느 마을에 자식 많고 나이 많은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는 넓고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낡아서 폐가처럼 황폐해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짓고 있었으며 뱀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큰 저택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입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불이나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장자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므로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인 장자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니 빨리 밖으로 나오너라’ 고 밖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이 났다는 것이 무엇이며 불이 집을 태운다고 하는데 그 집이란 무엇인지, 또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밖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자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들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羊)이 끄는 수레, 사슴(鹿)이 끄는 수레, 소(牛)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고 소리쳤다. 장자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써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는 모두 아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손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앞을 다투어,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말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아이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며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속한 양·사슴·소가 끄는 수레보다 더 크고 훌륭하며 날쌘, 흰 소(白牛)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이상이 장자화택(長者火宅) 또는 삼거화택(三車火宅), 삼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다. 불난 집(火宅)은 3계(三界) 즉 사바세계를, 아이들은 중생을, 장자는 부처님을 비유한 것이다. 양·사슴·소의 세 가지 수레는 각각 성문승·연각승·보살승인 3승을 비유한 것이며, 대백우거(大白牛車)는 1불승(一佛乘)에 비유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중생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1불승을 3승으로 나누어 설한다고 하시며 앞의 ‘방편품’에서 설한 3승방편(三乘方便) 1승진실(一乘眞實)의 가르침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무지와 탐욕 괴로움의 근본
진리 깨닫고 보면 우주가 자기 것
3계(三界)란,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를 일컫는다. 바로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바세계(娑婆世界)다. 사바(娑婆)는 범어 사바(Sabha)를 음역한 것으로 인토(忍土)·감인토(堪忍土)·인계(忍界)라고 번역하는데, 원래 뜻은 노름판 즉 도박장이다. 정말 적절한 말이다. 더럽고 치사스럽고 구린내 나는 예토(穢土)임에 틀림없다. “이 세상은 마치 불타고 있는 집과 같아 조금도 편안치 못한 곳이니(三界無安 猶如火宅), 온갖 괴로움에 가득 차 있어 매우 두려울 따름이다(衆苦充滿 甚可怖畏). 항상 삶에 대한 괴로움, 늙음에 대한 슬픔, 병에 대한 근심, 죽음에 대한 걱정 등이(常有生老 病死憂患) 솟구치는 불길 같이 맹렬히 타오르며 그칠 줄 모른다(如是等火 熾燃不息). 여래인 나는 일찍이 이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如來已離 三界火宅), 세상의 번거로운 일에 영향 받지 않는 경지에 머물고 보니(寂然閑居 安處林野), 지금 이 세상은 모두 다 나의 것이며(今此三界 皆是我有),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자식들인데(其中衆生 悉是吾子), 지금 이곳은 갖가지 환난이 많아(而今此處 多諸患難), 오직 나만이 그들을 구하고 지켜줄 수 있다(唯我一人 能爲救護).” 위의 글은 비유품에 나오는 게송 중의 한 구절인데 쿠마라지바(鳩摩羅什)의 명 번역으로 잘 알려져 있다. “참으로 이 세상이란 범부에게는 조금도 편안한 곳이 없다. 마치 불난 집과 같아서 갖가지 고통이 가득 차 무서울 따름이다. 인생의 가지가지 괴로움과 늙어 가는 괴로움과 병들어 아픈 고통과 죽음에 대한 괴로움 등 모든 근심과 걱정이 불처럼 타올라서 그치지 않는다.” 이 말은 생·노·병·사 그 자체의 괴로움보다 그것에 대한 근심과 걱정이 괴로움이라는 뜻이다. 즉 무지와 탐욕에 의해 마음에 불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이 곧 괴로움의 근본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미혹한 세계를 이미 떠나 세상의 번거로운 일에 영향 받지 않는 경지에 들어있다”고 하는 것은 눈뜬 사람의 청정한 마음의 경지를 읊은 것인데, 이것은 번거로운 장소에 살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번거로운 곳에 있을지라도 그 마음은 거기에 영향 받지 않고 항상 청정하고 평안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삼계는 나의 소유이다. 따라서 이 삼계에 살고 있는 생명 있는 것들 모두가 내 자식들이다. 그런데 이 삼계에는 갖가지 근심과 재난이 넘쳐 살기 힘겹다. 오직 나만이 그들을 구제하고 지켜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삼계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보면 이 우주가 자기 것이다’고 하는 대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즉 깨달음이란 이 우주와 자기는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는 동일체임을 아는 것이며 깨치지 못한 사람에게는 우주와 내가 상대적인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우주 전체에 용해되어 버리는 것이므로 ‘나’는 어느덧 우주 전체에 퍼져가게 되고 ‘우주는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자유자재하여 그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며, 제 뜻대로 행동하여도 모두가 남을 살려주는 행위가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속에 살고 있는 생명체는 모두가 내 자식이며 형제이며 친구가 된다. 이와 같이 부처님과 우리들의 관계도 엄밀하게는 동일체이지만 자신을 존재케 해 준다는 측면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부처님의 아들(佛子)이며 부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慈父)이신 것이다.
중생은 원래 부처님 아들
가르침 믿고 이해하고 실천해야
지금까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들 즉 2승(二乘)은 성불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성문인 샤리푸트라(舍利弗)가 수기(授記)되는 것을 본 마하카샤파(大迦葉), 마하마우드가리야야니(大目 連), 마하카티야야니(迦 延), 수부티(須菩提) 등의 네 사람의 대성문(大聲聞)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완전히 이해하여 다시 향상(向上)하려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자신들이 불자(佛子) 즉 붓다-푸트라(Buddha-putra)임을 천명한다.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 곁에서 실종되었던 궁자(窮子)가 여러 나라를 유랑하기를 50여 년, 지금은 완전히 타락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어떤 성(城)을 찾아왔다. 한편 아버지인 장자(長者)는 이곳 저곳 아들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아들이 찾아온 그 성시(城市)에 삶의 터전을 꾸리고 재산을 늘려 지금은 큰 부자가 되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궁자가 예고 없이 장자의 저택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장자는 한눈에 그가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고 급히 부리는 사람을 시켜 그를 데리고 오도록 했다. 그러나 아들은 뜻하지 않은 일에 놀라, 붙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이라 지레 겁을 먹어 기절하고 만다. 장자는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몰라보고 심근(心根)도 완전히 타락해 버린 것을 알고 일단 그 아들을 놓아 보내고 나서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냈다. 그는 은밀히 두 사람을 보내 그 아들에게 접근시켜 자기 저택에 데리고 와서 일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장자는 이것저것 방편을 써서 그 아들에게 접근하여 차츰차츰 익숙해지도록 했다. 그러기를 20년이 흘렀다. 궁자는 아버지인 장자와 마음이 서로 통하여 재산 관리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궁자는 자기가 고용인이라는 처지를 잊지 않고 마음을 더욱 의연히 하여, 장자가 가진 재산은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궁자는 지금까지 자기가 비열하게 살아왔음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부끄러워 하며 넓고 큰 마음을 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런 아들의 마음을 알게된 장자는, 자기의 임종 때에 이르러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의 친아들이니 내 모든 재산을 그에게 물려준다”고 선언했다. 그 아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 돌연히 생기자 “지금 이 보배(寶藏)가 스스로 내 것이 되었다”고 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이제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첫째, 장자와 그 아들이 원래부터 아버지와 아들이었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비유인가. 장자인 아버지는 부처님으로, 그 아버지를 버리고 도망간 어린 애는 직접적으로는 이 비유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마하카샤파(摩訶迦葉)를 비롯한 성문들에 의제(擬制)하고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버리고 여러 나라를 찾아 유랑(流浪)하는 궁자는 지금껏 부처님의 유인에도 접하지 못하고 따라서 성문으로도 되지 못한 미혹한 범부라고 한다면, 이 궁자는 생사의 세계에 침몰(沈淪)하는 미혹한 중생으로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문까지도 포함된 우리 모든 중생이 원래부터 부처님과 친자관계에 있는 것이 된다. 즉 우리들 모두가 본래적으로 부처의 아들, 불자(佛子)라고 하는 사실, 이것이 바로 <법화경>이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스승이 제자의 득법(得法), 또는 설법 등을 증명하고 인가하는 경우를 인가(印可)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가지고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한 네 사람의 큰 성문들에게 각각 제6장 수기품에서 수기하게 된다.
부처님 설법은 평등한데…
중생의 소질과 능력 맞게 방편 제시
이 약초유품은, 앞장인 제4장 신해품에서 마하카샤파(摩訶迦葉)를 비롯한 네 사람의 큰 성문들이 자신들이 이해한 것을 비유를 들어 말씀드리자, 석존께서도 역시 비유를 들어 설법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지상의 식물과 그 위에 내리는 은혜로운 비를 소재로 한 것으로서 약초유(藥草喩)라고 한다. 특히 여기서는 약초란 사람들의 생활에 관계가 깊은 식물로 모든 식물을 대표한 것이다. 구마라지바(鳩摩羅什)의 <묘법연화경>에서 약초유는 다음과 같다. 3천 대천세계의 온갖 곳, 산과 강, 골짜기와 평지에는 여러 가지의 풀, 나무, 약초가 무성해 있다. 거기에 큰 구름이 몰려와 일시에 비를 뿌리면 초목은 크든 작든 모두 한결같이 그 비에 젖어 저마다 자기가 가진 종류와 성질에 따라 생장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도 이 큰 구름이 일어나는 것과 같으며, 큰 음성을 내시어 널리 전 세계의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것도 이 큰 구름이 3천 대천세계의 국토를 덮고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에 부처님은 중생의 소질과 능력을 모두 아시고 각각의 중생에게 가장 알맞은 법을 설하신다. 그것을 들은 중생들은 저마다의 소질과 능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이해하고 불도(佛道)에 들어오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본래 본질과 작용이 하나(一相一味)이다. 그것은 동일한 해탈, 동일한 이욕(離欲), 동일한 열반이여서 결국에는 부처님의 지혜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설법을 받아들이는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누구인가, 어떤 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부처님뿐이다. 마치 여러 식물들이 자기들의 상·중·하 라고 하는 성질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오직 부처님만이 중생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그들의 의향을 살펴 아무렇게나 부처님의 지혜를 설하지는 아니했던 것이다. 이상의 비유 이야기 뜻은 방편품, 비유품, 신해품으로 차례차례 살펴보면 곧 분명해진다. 제2장의 방편품 이래로 설해온 방편과 진실이라는 테마가 여기서도 새로운 비유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러나 같은 3승방편 1승진실의 취지를 설할지라도 이 약초유품에서는 지금까지와 조금 시점이 다르다. 방편의 가르침과 진실의 가르침 중, 특히 방편의 가르침에 시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비에 비유되는 부처님의 설법은 평등하게 모든 중생에게 내린다. 그것은 본질과 작용이 하나, 즉 1상1미이며 본래 모든 사람을 부처님의 지혜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법은 받아들이는 쪽에 있는 중생에게는 여러 가지의 차이가 있다. 큰 나무는 많은 양의 비를 흡수하나 작은 것은 작은 양만을 흡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중생 측의 차이에 의해 본래 본질과 작용이 하나라는 가르침도 여러 가지로 되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께서 설법에 즈음하여 중생의 현 실태를 인식했을 때, 진실한 가르침은 어쨌든 방편의 가르침이라는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처님의 큰 자비가 사람과 경우에 따라 교묘하고도 현실적인 방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 측의 현실에서 보면, 법화경의 1승진실이라는 뜻과 반대로 3승진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깨달음의 경지는 오직 ‘하나’
용도 따르는 그릇처럼 의욕이 인간 구별
약초유품에는 쿠마라지바(鳩摩羅什)가 번역한 <묘법화>에 누락되고 없는 비유가 있다. 해와 달의 비유(日月喩)와 작병자의 비유(作甁者喩), 생맹인의 비유(生盲人喩)가 그것인데, 산스크리트 본(梵本)과 <첨품법화경(添品法華經)>에는 있다. 이 누락되어 알려지지 않은 세 가지의 비유 가운데, 해와 달 비유와 특히 병(甁) 만드는 사람의 비유를 소개할까 한다. “카샤파(迦葉)여, 여래는 사람들의 지도자로서 불공평하지 않다. 마치 해와 달빛이 모든 세간을 비춰, 좋은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또는 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래에 있는 사람이나, 방향(芳香)을 내뿜는 사람이나 악취를 내뿜는 사람을 불문하고, 어떠한 곳에서나 한결같이 비춰 얼룩이 없는 것과 같다. 참으로 이와 같이 완전히 깨달음에 도달한 여래가 놓는 부처님의 지혜와 의지의 광명은 다섯 갈래의 운명을 더듬어 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빛나고, 바른 가르침은 각각의 의향(意向)에 따라서 위대한 탈 것(菩薩乘)이나 독각의 탈 것(獨覺乘)이나 성문의 탈 것(聲聞乘) 등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평하게 가르쳐 준다. 또 여래의 지혜 광명은 과부족이 없어 그 결과 모든 사람은 복덕과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런 경우 카샤파여, 세 가지 탈 것 즉 세 가지의 가르침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사람이 따로따로 행동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까닭에 세 가지의 가르침(三乘)이 설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자 장로 마하 카샤파는 세존에게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 가지의 탈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현재 성문이라든가, 독각이라든가, 보살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까.” 이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카샤파여, 마치 도공이 같은 점토로 여러 가지의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경우, 어떤 것은 설탕 그릇이 되고, 어떤 것은 요구르트 그릇이 되며, 어떤 것은 버터(乳酪) 혹은 우유의 그릇으로 되고, 또 조악한 것은 오물을 담는 그릇이 된다. 이와 같이 사용되는 점토에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담는 물건에 따라서 그릇의 종류가 구별될 따름이다. 참으로 이와 같이 오직 하나의 탈것인 부처님의 탈 것만이 있을 뿐, 제2의 탈것도, 제3의 탈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을 들은 장로 마하 카샤파는 세존에게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여러 가지의 의향을 가진 사람들이 3계에서 벗어났다고 하면 그들에게 오직 하나인 깨달음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까, 둘 혹은 세 가지의 깨달음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모든 가르침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부터 깨달음의 경지는 열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인 깨달음의 경지가 있을 뿐, 둘 혹은 셋은 없다.” 이에 대한 게송이 있다. 도공이 도기를 만들 적에 똑같은 흙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설탕이나 우유나 요구르트나 물 등의 그릇이 되는 것같이, 어떤 것은 오물의 그릇이 되고, 어떤 것은 버터 그릇이 되지만, 도공은 똑같은 점토를 가지고 갖가지 그릇을 만든다. 어떤 물건의 그릇이 되는가는 담는 물건에 따라 정해진다. 이와 같이 세상의 인간에게는 차별이 없지만, 여래는 그들의 의욕에 따라 인간을 구별하는 것이다.
미래의 성불’ 의미로 사용
나라·시대명 등 六事열거 상례
이 수기품은 앞서 제4장에서 마하카샤파(摩訶迦葉)를 비롯하여 마우드가리야야나(大目 連)에 이르기까지 네 사람의 큰 성문들에게 부처님의 수기가 차례차례로 주어진다.‘수기’란 범어로 비야카라나(Vyakarana) 라고 하며 ‘기별(記 )’·‘기설(記說)’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수기(授記)는 주(授)는 쪽에서 말한 것이며, ‘수기(受記)’는 받는 편에서 말한 것이다. 불전 가운데 설해져 있는 수기라는 말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이를 크게 나누면, (1) 제자 등이 죽은 뒤에 태어날 곳을 밝히는 것 (2)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고 또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의 마음을 굳건하게 해주는 증과(證果)의 예언 약속 (3) 미래에 성불한다는 예언(豫言) 등의 세 가지 뜻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대승경전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기라는 말은 세 번째의 의미인 ‘미래에 성불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대단히 많다. <법화경>도 그러하다. 미래 성불의 수기에는 반드시 성불하는 나라의 이름, 성불하는 시대의 이름, 정법과 상법이 존폐하는 기간 등이 열거되는 것이 상례이다. 이것을 여섯 항목으로 나누어 6사(六事)라고 칭한다. (1) 행인(行因)은 미래세에서 여러 부처님 세존을 공양하고 찬탄하는 모습 (2) 득과(得果)는 최후신(最後身)에서 성불한 부처님의 이름(佛名) (3) 겁국(劫國)은 성불하는 곳의 나라와 시대(劫)의 이름 (4) 불수(佛壽)는 성불한 부처님의 수명 (5) 정상(正像)은 정법과 상법이 세상에 머무는 기간 (6) 국정(國淨)은 성불한 나라의 장엄된 청정한 모양 등이다. 이상의 여섯 가지인데 이는 경론에 따라 다소 들고남이 있다. 이제 이 수기품에 설해진 네 사람의 큰 성문 수기 가운데, 한 가지 예로서 마하카샤파의 6사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미래세에서 3백만억의 여러 부처님을 섬긴다 (2) 부처가 되어 광명여래(光明如來)라 한다 (3) 그 국토의 이름을 광덕(光德)이라 하고 시대(劫)를 대장엄(大莊嚴)이라 한다 (4) 부처님의 수명은 12소겁(小劫) (5) 정법이 세상에 머무는 것은 20소겁, 상법 또한 20소겁 (6) 국계(國界) 장엄하여 청정하며 유리(瑠璃)를 땅으로 하고 평탄하다. 큰 성문 네 사람의 6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장엄된 불국토의 모습에는 공통된 표현을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법화경>에서는 제1장 ‘수기’가 개설되어 4대 성문들의 수기 양상이 자세히 설해져 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법화경>의 수기는 미래 성불의 약속 또는 증명이다. <법화경>의 제2장 방편품에서 ‘지금까지는 절대로 성불할 수 없다’는 성문 등 2승에 대한 성불의 예언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진실한 가르침은 단 한 가지의 부처가 되기 위한 가르침이며, 2승·3승이라는 가르침은 방편인 것이다.
그러므로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아들(佛子)이어서 2승도 기필코 장래에 부처가 된다고 하는 것, 즉 2승 작불(作佛)이 설해진 것이다. 따라서 2승에 대해 부처님께서 성불의 예언을 주신다는 수기는 2승 작불이라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증한다는 의미에서 설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법화경 ⑫수기품 ②수기(授記)의 참뜻
수기(授記)란, ‘그대는 반드시 부처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증의 의미로 부처님께서 기별(記 )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고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법화경>에는 이 수기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이미 ‘비유품’에서 샤리푸트라(舍利弗)가 수기됐으며, 이 ‘수기품’에서는 마하카샤파(摩訶迦葉)·마우드가리야야나(大目 連)·수부티(須菩提)·카티야야나(迦 延) 등의 네 사람이 수기된다. 그런데 수기란, 어느 특정한 큰 제자들에게만 성불의 예언을 말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앞으로 ‘제8장 5백제자수기품’과 ‘제9장 수학무학인기품’까지 읽어가면 5백인이든 2천인이든 무수한 사람들이 수기되고, 다시 ‘제12장 제바달다품’에 이르면 악인 제바달다(提婆達多)와 겨우 여덟 살짜리 용녀(龍女)까지도 성불을 인정받고 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불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필코 부처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석존께서는 이 진실을 <법화경>에 의해서 밝힌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보증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존께서 주신 수기는 안일하게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첫 번째, 석존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은 부처다’고 하시지 않고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신다. 원래부터 부처님의 눈으로 보면,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당신은 이미 부처다’고 한다면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사람이 많을 것이다. 즉 범부는 자칫 그것을 안일하게 받아 들여선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부터 이러이러한 행을 계속하면……’이라는 조건을 붙인다. 즉 수기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수행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렇다고 그러한 마음을 자기만족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 오직 자기만의 기쁨으로 만끽하고자 한다면 부처가 된들 아무 의미가 없다. 자기만이 구제되어 부처가 되고 싶다거나 자기만이 부처가 되어 자유자재한 몸이 되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궁극의 목적은 세상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데에 있다. 세 번째로, ‘왜 꼭 수기를 받아야 하는가?’ 참으로 학문과 신앙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불교는 이성으로 아는 가르침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학문 쪽은 이성으로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지만, 종교는 아는 것만으로는 가치를 반쪽 밖에 붙잡지 못한 셈이다. 이해한 것이 마음의 감격으로 변하면 비로소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생기면 저절로 세상을 위해 사람을 위해 넓혀가야만 한다. 이와 같이 ‘이해’가 ‘믿음’이 되어 그것이 사람을 위하고 세상을 위해서 ‘헌신하는 행동’으로 전개돼야만 비로소 신앙이라 말할 수 있고 종교라 할 수 있다. 참다운 신앙에는 ‘힘(力)’이 있다. 그렇다면 그 ‘힘’의 원천인 ‘감격’은 어디에서 솟아나는 것일까. 감격은 이론이나 이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혼(魂)과 혼의 맞부딪침에서 솟아난다. 위대한 인격에 맞부딪쳐서 그 거룩한 말씀을 혼으로 들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들의 가슴은 불타오른다. ‘그대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이 한마디의 말씀이 불제자들에게는 결정적인 ‘힘’이 되기에 수기가 필요한 것으로 수기의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6왕자에 12인연법 설법
중생들 세세생생 ‘가르침’ 믿고 따라
이 ‘화성유품’을 산스크리트 본에서는 ‘전생의 인연’이라고 제명(題名)을 달고 있다. 이 품에는 전반부에 <법화경>이 아득한 옛날부터 설해져 내려온 것임을 밝히고 후반부에는 화성의 비유(化城喩)가 설해져 있기 때문이다. 아득한 옛날 대통지승불께서는 원래 전륜성왕의 아들이었고 그에게는 열 여섯의 왕자가 있었다. 대통지승불께서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16왕자들은 그 권속들과 함께 즉시 보리도량에 계시는 부처님께 이르러 부처님을 찬탄하고 “여러 천신과 백성을 위해 법을 설하소서” 하고 부처님께 간청했다. 또 부처님께서 깨달았을 때, 시방의 5백만억이나 되는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큰 광명이 널리 세계를 비추었다. 이 상서로움에 놀란 브라흐만 왕들이 앞을 다투어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날아왔다. 가장 먼저 동방의 브라흐만 왕들이 그 궁전과 함께 서방으로 날아와 그 까닭을 찾았다. 그러자 거기에는 대통지승불께서 보리도량에 앉아 계시고 여러 천신을 비롯해 많은 대중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었으며, 16왕자가 부처님께 법을 청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를 본 브라흐만들은 즉시 부처님께 예배하고 자기들의 궁전을 바치며 부처님의 설법을 간청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이를 허락했다. 다음에는 동남방의 브라흐만이 날아와 부처님께 궁전을 바치며 설법을 청하고, 또 다음에는 남방의 브라흐만의 왕들이, 서남방과 하방의 브라흐만 왕들도 똑같았다. 최후에는 상방의 시킨(尸棄)이라는 브라흐만 왕을 우두머리로 해 똑같이 궁전을 바치며 “바라옵나니 이 공덕으로 널리 일체에 미치게 하여 나와 더불어 모든 중생이 다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소서”하며 부처님의 설법을 간청했던 것이다. 이 게송은 너무 유명해 불교의 모든 종파들이 회향문에 널리 사용하고 있고 장엄염불의 마지막에 사용되고 있다. 시방의 브라흐만의 권청과 16왕자의 간청을 받고 대통지승불께서는 3전12행상(三轉十二行相)에 의해 네 가지의 진리(四諦)를 설하고, 널리 12인연의 법을 설했다. 이 설법으로 많은 중생은 해탈을 얻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의 설법에도 역시 많은 중생이 해탈해 무수한 성문 대중이 생겼다. 16왕자는 모두 출가해 사미가 되어 “부처님의 위없는 깨달음의 법을 설하소서”라고 청했다. 이 간청에 의해 2만 겁이 지난 후에 대통지승불께서는 <법화경>을 설하신 것이다. 대통지승불께서는 <법화경>을 8만겁 동안 설하시고 나서 조용한 방에 들어가 8만 4천겁 동안 선정에 드셨다. 그러자 16인의 보살 사미들은 법좌에 올라 많은 중생에게 <법화경>을 설해 각각 6백만 나유타 항하사 수만큼의 중생을 교화해 이를 ‘16왕자의 법화복강(法華覆講)’이라 한다. 대통지승불께서 멸도하신 후에도 계속 설해져 많은 중생을 교화했는데 그 하나 하나의 보살 사미가 교화한 많은 중생들은 세세생생 태어날 때마다 항상 함께 태어나 그 보살 사미에게 가르침을 듣고 믿고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보살 사미들은 모두 성불해 지금 8방(八方)에 두 분씩 계시고 중앙에 부처님 한 분이 계시는데 “그가 곧 현재의 나 석가모니불이다”며 전생부터 계속 <법화경>은 설해지고 있고 현재의 여러 분도 그때의 사부대중이었다. 이렇게 부처님과 우리들 전생의 사연에 대해 말씀하셨다.
2승방편·1승진실을 비유
有餘·無餘는 중생 위한 임시 휴식처
‘화성유품’에는 법화칠유(法華七喩) 중의 하나인 화성(化城)의 비유가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여기에 5백 요자나(由旬)가 계속되는 황야(荒野)가 있는데 인적은 끊어지고 험난한 길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을 지나면 진귀한 보배가 있어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그 보배가 있는 곳에 도달하려고 했다. 그들 가운데에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다. 그는 험난한 길을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을 인솔해 이 험악한 곳을 통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일행들은 피로해 그 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되어, “이제부터 앞길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이미 지쳐버렸으니 되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지도자는 수단을 강구해 그가 가진 신통력에 의해 광야 가운데 3백 요자나가 되는 곳에 하나의 성(城)을 출현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무서워할 것 없다.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저기에 성이 있다. 성안에 들어가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만일 더 가고 싶은 사람은 보배가 있는 곳에 갈 수도 있다.” 이 때 피로해 지친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며 자진해서 성안에 들어가 험악한 길을 통과할 수 있겠다고 안심을 했다. 그리하여 지도자는 그들이 성에서 휴식하여 피로가 풀려서 건강해진 것을 보고 신통력으로 출현시킨 성을 소멸시키고 나서 “여러분 출발합시다. 보배가 있는 곳은 가깝습니다. 그 성은 모두를 쉬게 하기 위해 내가 거짓으로 만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 화성의 비유담은 2승(二乘)의 열반은 진실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임시로 방편에 의해서 시설한 것, 1불승(一佛乘)에 의한 부처님의 열반이야말로 진실한 열반이라고 하는, 2승방편(二乘方便) 일승진실(一乘眞實)을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 이야기 중의 지도자란 부처님이시며 이 부처님은 모든 사람들의 대도사(大導師)가 돼 그들을 생사 번뇌의 악도에서 구제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만일 1불승만 설한다면 보배가 있는 곳이 멀다는 것에 지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과 같이 불도를 피하고 말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중도에 임시로 휴식처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유여(有餘)와 무여(無餘)라고 하는 두 가지의 열반이다. 이 두 종류의 열반은 성문과 연각의 휴식처에 불과하다. 이 휴식처, 즉 신통력으로 출현시킨 성에서 보배가 있는 곳은 바로 가까이에 있다. 부처님의 지혜라고 하는 보배는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2승을 얻은 열반은 진실한 것이 아니다. 오직 여래의 방편에 의해서 거짓으로 시설한 것에 불과하다며, “보물은 가까운 곳에 있다. 앞에 있는 이 성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내가 임시로 환상(幻像)으로 만들었다” 라고 설하며 화성의 비유를 끝맺는다. 그런데 왜 ‘화성유품’의 전반부에 전생의 사연이 설해져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제3장 비유품’의 3계화택(三界火宅)의 비유에서 ‘제5장 약초유품’의 3초2목(三草二木)의 비유까지 일련의 비유를 통해서 3승이라는 방편 시설, 1승 진실을 설해 밝히고 다시 2승의 수기를 전개하고자 할 때에 현재 <법화경>의 설상(說相)을 그 근원으로까지 소급시켜서 구원(久遠)의 과거에 그 근거를 두려고 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법화경>의 1승진실을 구원의 시간 속으로 짜 넣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집주인=석존, 구슬=불성 비유
보배 갖고도 고생한 사람은 성문·연각 2승
제7장 ‘화성의 비유’에 의해 화성(化城)인 2승의 열반은 부처님의 방편이며 1불승이야말로 참다운 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는 취지가 설해져 있다. 그것을 이어받아 우선 푸루나·마이트레야니·푸트라가 1천2백의 아라한을 대표해 최초로 등장해 지금까지 부처님의 방편 설법, 샤리푸트라와 수부티 등 4대성문에 대한 부처님의 수기, 과거와 현재의 연결, 모든 부처님의 자재한 신통력 등을 듣고 말없이 이해한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대중을 향해 “푸루나는 변설제일로서 훌륭하게 나의 정법을 지켜 왔으며, 나를 도와 가르침을 널리 전해 사람들을 이익케 함이 매우 컸다. 그는 과거세에도 부처님을 수행하며 정법을 지켜 왔고 설법제일이었다. 그는 미래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이 밝게 빛난다는 이름인 법명여래(法明如來)라 하고, 그 시대를 보명(寶明)이라 하며, 나라는 매우 밝고 맑다는 선정(善淨)이라 하리라”고 말씀하시며 푸루나에게 수기하신 것이다. 이 푸루나의 수기를 듣고 1천2백의 아라한들은 푸루나와 똑같이 기별이 주어지기를 마음 속으로 원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마하카샤파를 향해 이제부터 1천2백인의 아라한들에게 미래 성불의 예언을 주라고 하시며 대표적으로 카운디냐( 陳如)에게 수기를 설하신다. 이름은 보명여래(普明如來)라 하고 1천2백의 아라한 중의 5백의 아라한인 우루빌바카샤파·가야카샤파·나디카샤파 등도 모두 차례차례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게 되니, 모두 같은 이름의 보명여래가 될 것이라고 설하신다. 이 5백인의 아라한들은 부처님의 수기에 크게 기뻐하며 지금까지 자기들의 허물을 참회하고 자신들의 현재 심경을 비유 이야기로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 말씀드린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부유한 친구의 집을 찾아가 음식 대접을 받고 술에 취해 그냥 잠들어 버렸습니다. 마침 그 때 그 집 주인은 급한 공무로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잠들어 있는 친구를 깨운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 집 주인은 가난하게 지내고 있는 그 친구를 위해 비싼 보배 구슬을 그의 저고리 안쪽에 매달아 두고 떠났습니다. 술에 취해 잠들어 있던 친구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잠이 깨어 일어나자 친구가 없는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방랑의 길에 올라 다른 나라에 이르러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적은 돈이 생겨도 그것으로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그 후 친구와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이 사람의 가련한 모습을 보고, ‘이 답답한 친구야, 훌륭한 사내가 어찌해 먹고 입는 것 때문에 그렇게 초라해져 버렸나. 나는 자네가 안락하게 지내도록 어떤 욕망도 만족시킬 수 있는 비싼 보배 구슬을 언젠가 자네가 찾아왔을 때, 자네 저고리 안쪽에 매달아 두었으니 지금도 그대로 있을 것 일세. 자네는 그것도 모르고 고생하고 구차하게 살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구먼. 자네는 이제 그 보물로 소용되는 것을 사들인다면 항상 무엇이든지 뜻대로 돼 가난하거나 부족함이 없을 것 일세’ 라고 말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자신의 옷 안쪽에 있는 보석에 대해 알지 못했던 남자는 성문·연각의 2승, 그 보석을 매달아 준 친구는 석존, 보배구슬은 불성을 비유한 것이다.
내면에 간직돼 있는 불성
깨달음 통해 드러 내는 것
샤리푸트라(舍利弗)가 대승 사상을 이해하고 깨달음을 얻었음에 대해 기뻐하는 말을 들은 석존께서 그에게 하시는 말씀이 매우 흥미롭다.“샤리푸트라여, 그대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나의 제자였다. 그대는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자기 혼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는 그대로 하여금 본래의 서원(本願)에 의해 행했던 바를 생각해 내도록 하겠다.” 이것을 <묘법연화경>의 번역자 쿠마라지바(鳩摩羅什)는 다음과 같이 격조 높이 기술하고 있다. 샤리푸트라여, 나는 전생에서 그대에게 (최고의 깨달음인)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도록 가르쳤는데, 이 세상에 와서는 그것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내가 손쉽게 설한 가르침만을 그대로 믿고) 이미 완전한 열반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해 버렸으니, 나는 그대에게 부처님의 제자로서 세운 본래의 서원(本願)과 그 서원으로 말미암아 행한 갖가지 수행을 다시 기억해 내도록 하기 위해 그대를 비롯한 많은 성문들에게 대승의 가르침인 묘법연화·교보살법·불소호념을 설하는 것이다.” 이러한 석존의 말씀에는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대는 나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졌다”는 말은 되새기면 되새길수록 의미 심장한 말씀이다. 이 말의 뜻은 우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法·敎·道)’에 의해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불성(佛性), 다시 말해 부처님의 성품(性品)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미 부처가 된다는 수기(授記)는 받고 태어난 셈이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으므로 새삼 부처님께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의식(儀式)이 바로 수기임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 즉 진리를 믿는 것이며 이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고통의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생에서 그대에게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도록 가르쳤는데”라고 하는 부분은, 범문(梵文)에서는 “그대는 오랫동안 나의 제자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먼 옛날부터 샤리푸트라에게 불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샤리푸트라는 그 사실을 “말끔히 잊어버리고 자기는 이미 열반에 도달한 것처럼 생각해 버렸으니” 라고 하며 자기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대해 석존께서는 훈계한다. 석존께서는 샤리푸트라에게 “그대는 자기 몸에 불성이 간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자기 힘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대의 힘이 아니라 그대의 몸과 마음 속에 갖추어져 있는 불성이 그대를 깨치도록 한 것이다”라며 다시 석존은 “나는 이제 (옛날로 돌아가) 그대에게 (부처님의 제자로서 세운) 본래의 서원과 그 서원으로 말미암아 행한 갖가지 수행을 다시 기억해 내도록 하고자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잊고 있는 불성의 진실을 기억해 내는 것이 곧 제도되는 것이며 기억해 내고 눈뜨는 것이 깨침인 것이다. 이렇듯 ‘제도(濟度)됨’과 ‘깨치는 것’은 동의어(同義語)의 관계이다. 다음에 석존께서는 샤리푸트라가 본원(本願)에 의해서 얻은 바의 길을 잊어버리고 있으므로 이 사실을 “기억해 내도록(憶念)하련다”고 말한다. 즉 기억해 내도록 하려는 것이지 새롭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내(釋尊)가 말하는 가르침이란,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기억해 내도록 하여 인식시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배운 어떤 비유도 모두 이 ‘억념(憶念)’을 위한 것이었음이 여기에 잘 요약되어 있다. 이 ‘의리(衣裏) 계주(繫珠)의 비유’를 음미하면 진리는 가르치려 한다고 해서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며, 본인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잊어버리고 있는 그 진리를 어떻게 하면 생각해 내도록 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점에 교육의 가능성에 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아난다의 서원과 라훌라의 밀행
가르침 간직·보살교화 서원 아난다
미래세 성불, 부처님법 계승 라훌라
이 ‘수학무학인기품’의 내용은 아난다와 라훌라 및 2천 명의 샤이크샤(Saiksa) 즉 배우고 있는 사람(學人)과 아샤이크샤(Asaiksa) 즉 배움을 마친 사람(無學人)들에 대한 수기이다. 부처님의 시자 아난다와 부처님의 큰아들 라훌라는 지금까지 샤리푸트라를 비롯한 많은 성문들이 수기받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그 수기를 받고 싶다고 원했다. 배우고 있는 사람과 배움을 마친 2천 명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아난다에게는 ‘큰 바다와 같은 지혜의 노닐음에 통달한 분’이라는 산해혜자재통왕불(山海慧自在通王佛)이, 라훌라에게는 ‘일곱 가지 보배로 된 붉은 연꽃을 밟고 넘어가는 분’이라는 답칠보화여래(踏七寶華如來)가 되리라고 수기하셨다. 이때 새롭게 불도에 뜻을 세운 보살들 8천 명은, ‘대보살마저도 얻을 수 없는 부처님의 성불에 대한 예언이 왜 성문들에게 주어지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부처님께서 그 보살들의 의문에 응답하여 설하신 것이 아난다의 과거이며 라훌라의 밀행에 관한 것이다.
“아난다와 나(부처님)는 그 옛날 전생에서 ‘가르침의 하늘에 오른 임금’이라는 부처님 즉 공왕불(空王佛) 아래서 불도를 지원했었다. 아난다는 항상 많이 듣기를 원했고, 나는 언제나 열심히 정진했다. 그리하여 나는 불도를 완성할 수 있었으나, 아난다는 가르침을 지켜 간직(護持)하고 또 장래에 걸쳐서도 부처님의 교법을 호지하고 많은 보살들을 교화할 것이다. 이것이 아난다가 전생에서 품은 서원이었던 것이다.” 이상이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수기를 주실 때 들려주신 전생의 사연이며 아난다는 이것을 듣고 즉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린 것이었다. 다음에 부처님께서는 아들인 라훌라를 향해 설하신다. “라훌라는 미래 세에 성불할 것이니, 무수히 많은 부처님을 섬기고 그 여러 부처님의 맏아들이 될 것이다. 라훌라는 출가 전에는 석존의 맏아들이고 불도를 성취한 지금에는 부처님의 법을 계승하여 상속할 맏아들이며 많은 부처님의 맏아들이 될 것이다. 그리고 라훌라의 밀행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왜 아난다와 라훌라는 늦게 수기됐을까. 주제 넘는 생각이지만 석존의 마음 속을 미루어 짐작해 보면 아난다는 자기의 4촌 동생이며 20여 년간이나 항상 곁에서 시봉하고 있었다는 것, 또 라훌라는 육신의 아들이라는 것, 즉 양쪽 모두 현재신(現在身)의 석존에게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도리어 수행을 위해서는 마이너스의 요소가 숨어 있음을 고려하여 그것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늦게 수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교단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속된 해석일 것이다. 석존은 그런 옹졸한 분은 아니었다. 항상 곁에 있던 아난다의 경우, 아무래도 다른 제자들과 같은 순수한 귀의가 어려울 것이다. 육신의 아들도 마찬 가지여서, 아버지가 아무리 훌륭한 분일지라도 외부의 사람과 똑같은 마음으로 육신의 아버지를 대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고 도리어 수행에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을 암암리에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우리들이 가까운 사람 즉 아내라든가 남편이라든가 또는 아들이라든가 혹은 부모를 교화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말이 된다. 이런 사람은 말로써 인도하려고 해도 쉽사리 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실제의 행에 의해서 감화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그 행이라는 것도 훌륭한 일은 가끔 있을 뿐, 평소에는 자기 중심적인 행위나 보기 흉한 행위가 더 잦다면 감화의 결실을 거둘 수 없다. 항상 끊임없이(常住不斷),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도저히 가족이나 직장의 동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아난다의 사적(事跡)
기억력 탁월, 설법 정확히 전수
여성출가 허용 간청…비구니 탄생
아난다는 숫도다나(淨飯)왕의 동생 아므리타(甘露飯)왕의 아들로 석존의 4촌 동생에 해당하며 테바닷다(提婆達多)의 동생이기도 하다. 석존께서 성도한 후에 처음으로 카필라바스투(迦毘羅衛城)에 돌아갔을 때 출가하여 제자가 되었으며, 그 후 샤리푸트라(舍利弗)와 마우드가리야야나(目連)의 추천으로 항상 부처님을 모시고 따르는 시자(侍者)가 되어 20여 년 동안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섬겼다. 그는 훌륭한 기억력을 가져 석존의 설법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교단 가운데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불렸으며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제1회 결집 때, 법(法) 즉 경전의 송출자(誦出者)로 선출되었다. 아난다는 매우 선량하고 온순하여 마음이 약한 데가 있었다. 그렇지만 석존에 대한 충직함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으니, 데바닷다가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석존을 해치려고 했을 때에도 다른 비구들은 모두 도망쳤지만 아난다 혼자만은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석존께서 성도하신 지 5년 후, 숫도다나왕이 천수를 다하였다. 석존께서는 장례를 위해 카필라바스투에 갔었다. 그런데 석존의 이모로 석존을 양육한 고타미(摩訶波 波提)는, 앞서 친아들인 난타(難陀)와 손자인 라훌라도 출가하고 또 남편인 대왕도 돌아가시고 보니 점점 세상의 덧없음을 느끼고 있었기에 석존께 출가를 말씀드렸다. 그러나 석존께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석존께서는 바이샤리(毘舍離)를 향해 출발했다. 궁전에 남게 된 고타미는 아무래도 출가의 뜻을 버릴 수 없었으므로 그 뒤를 따라갈 것을 결심했다. 그러자 남편들의 출가에 의해 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많은 부인들도 고타미와 동행하겠다고 말했다. 부인들은 일제히 검은머리를 풀어 내리고 허술한 옷을 걸친 후, 손에는 한 개의 나무 바루를 들고 맨발로 카필라바스투를 떠났다. 그리하여 석존이 계시는 정사(精舍)의 문밖에 겨우 당도했을 때는 모두 피로에 지쳐서 쓰러질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듣고 시자인 아난다가 나와 보았더니 고타미를 비롯하여 많은 부인들이 완전히 변한 모습으로 있지 않는가. 깜짝 놀란 그가 그 사유를 묻자 불도에 들어갈 결심으로 여기까지 왔노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난다가 즉시 석존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석존께서는 “아난다여, 여인이 엄한 계율 아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포기하도록 설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난다는 선뜻 승복하지 않았다. “(말씀을 거역하는 것 같지만) 그렇다면 세존의 가르침은 남자에게만 문을 열고 여자에게는 닫는다는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진리라는 것은 인간계든 천상계든, 어디서나 진리이거늘 하물며 남녀의 차별 따위는 없다. 그렇지만 교단에 여자가 들어오면 교단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므로 출가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존이시여, 가르침의 문이 남녀의 어느 쪽에도 열려 있다고 하면 여인의 출가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출가를 허락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다. 아난다의 말에는 무리가 없었다. 원래부터 석존께서도 인정이 많은 분이었으므로 드디어 아무런 말없이 허락하게 되었다. 제1결집 직전에 마하카샤파는 다섯 가지의 허물을 들어 아난다를 결집회의에서 제외한 일도 있었다. 그 허물 중에 ‘여인의 출가를 억지로 세존께 간청한 것’, ‘세존의 유체(遺體)를 맨 먼저 여인에게 예배시킨 것’ 등 여인에 관한 조항이 두 개나 있는 것은 자못 아난다 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온화한 인품과 훌륭한 교학과 설법의 교묘함은 비구니 교단이나 재가 신도뿐만 아니라 차츰 교단 사람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으니, 마하카샤파가 입적할 때에는 어느덧 교단 제일의 실력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법사(法師)
여래의 ‘심부름꾼’·‘대행자’
수지·독·송·해설·서사 5종법사 지칭
예로부터 <법화경>은 공덕경(功德經)이라고 불리고 있다. 공덕이란 덕(德)을 쌓으면 공(功)이 된다는 뜻인데, 덕이란 바로 베풂(施)을 말한다. 다시 말해 공덕이란 베풂(布施)으로 말미암아 공(功)이 된다는 것이니, 이러한 공훈(功勳)으로 인하여 부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여 지켜주신다(護念)는 뜻이다. 그래서 ‘법사품’은 곧 새로 뜻을 세운 보살이 중생에게 법을 나누어 주어 두려움(無畏)이 없도록 하기 때문에 마음의 병을 고쳐주는 약왕을 등장시키고 있다. ‘법사품’은 <법화경>이라는 경전이 여러 경전 가운데 가장 높은 경전이며 이 경의 한 시송(偈頌)이나 한 구절(一句)이라도 받아들여 믿는(信受) 사람은 모두 성불(成佛)한다고 설한다. 물론 성불이란 부처님이 된다는 이야기지만 성불의 조건으로서 모든 번뇌를 멸진(滅盡)한 아라한이 된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승을 믿는 우리들은 너무나 대승에 치우쳐 금욕(禁欲)을 근본으로 하는 근본불교를 무시하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금욕생활이 출가자라는 일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만 일반인에게는 그와 같은 수행이 어렵기 때문에 보편성이 없는 단점이 있으므로 번뇌를 여의어 해탈에 이르는 길을 다른 각도에서 설명한 것에 불과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법사품’에서는 이 거룩한 경을 받아들여 간직하고 넓히는 사람, 즉 해설(解說)·서사(書寫)하는 사람, 다시 말해 남에게 법을 나누어 주는 사람을 가리켜서 여래의 심부름꾼(使者), 또는 여래의 대행자라고 한다. 이 경전은 또 여래가 세상에 계시는 현재마저도 원망하는 사람이 많을진대 하물며 말법시대(末法時代) 즉 후악세(後惡世)에서는 이 <법화경>을 넓이는 것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하며, 여래 멸후에 이 <법화경>을 수행 즉 넓히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홍경(弘經)의 삼궤(三軌)’ 즉 가르침을 넓히는 세 가지의 바른 길이라 하여 설하고 있다. 이 ‘법사품’의 타이틀로 되어 있는 ‘법사(法師)’란 불교 전반에서는 법을 설하여 신도를 올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승려(僧侶)를 말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은 출가 재가를 불문하고 모두를 법사라고 부른다. ‘법사품’에서의 ‘법사’에 대한 원어는 다르마바나카(dharmabhanaka)로서 ‘설법자’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을 독송하는 사람 즉 이 <법화경>을 신도를 위해 널리 읽어서 들려주는 것을 직분으로 하는 사람이다. 부처님께서는 약왕보살을 비롯한 8만의 보살들에게 “출가 수행인이든 재가 수행인이든 천신이나 인간 이외의 것들이 모두 불도를 구해서 이 <법화경>의 1게 1구(一偈一句)라도 듣고 비록 한 생각(一念)이라도 기쁨을 내는 이에게, 나는 모두 성불의 예언(授記)을 주겠다. 이것은 현재뿐만 아니라 여래가 멸도한 후인 미래세에서도 똑같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이어서 이 <법화경>을 비록 한 게송이라도 믿어 간직(受持)하고 읽고 외우며(讀誦) 해설(解說)하고 옮겨 써서(書寫) 부처님처럼 공경하며 이 경전에 꽃(華)·향(香)·목걸이(瓔珞)·가루 향(抹香)·바르는 향(塗香)·사르는 향(燒香)·비단 해 가리개(繒蓋)·깃발(幢幡)·의복(衣服)·기악(伎樂)을 공양하고, 합장하여 공경하는 사람도 ‘법사’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수지· 독· 송· 해설· 서사의 다섯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을 5종법사(五種法師)라고 부른다. 이 5종의 수행을 다시 신(身; 서사)·구(口; 독·송)·의(意; 수지) 3업(三業)으로 나누고 이 가운데 수지를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하여 정행(正行)으로 하고 다른 네 가지를 조행(助行)으로 한다. 그리고 또 꽃·향·영락 등 열 가지의 공양을 열 가지 경전 공양 즉 10종 경전공양(十種經典供養)이라 부르고 있다.
홍경의 삼궤
법사의 3실천덕목 衣·座·室
여래 마음으로 법보시 교시
이 품에서는 “바이샤라쟈(藥王)이여,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여래가 멸도한 후에 사부대중을 위하여 이 법화경을 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고 물으며, 여래 입멸 후의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으로 의(衣), 좌(座), 실(室)의 ‘홍경의 3괘(三軌)’ 즉 실천해야 할 세 가지의 바른 길(法度)을 설하고 있다. “여래의 방(室)에 들어가, 여래의 옷(衣)을 입고, 여래의 자리(座)에 앉아 사부대중을 위해 널리 이 경을 설해야 한다. 여래의 방이란 일체 중생에게 꼭 들어맞는 대자비심(大慈悲心), 여래의 옷이란 유화인욕(柔和忍辱)의 마음, 여래의 자리란 일체의 현상(法)이 공(空)임을 말한다”라고 한다. 즉 여래의 방이란 중생에 대한 넓고 큰 자비의 마음이며,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화평한 마음과 인내심, 그리고 여래의 자리란 일체의 현상이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임을 아는 것이니, 이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법을 설하는 것을 ‘의좌실(衣座室)의 삼궤(三軌)’ 혹은 ‘홍경(弘經)의 삼궤’라 하여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설하는 법도(法度), 또는 바른 길이라 일컫고 있다. 이것은 법사 즉 법을 보시(布施)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가져야할 마음가짐으로서, 모든 사람을 자비의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비란, 일반적으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 또는 사랑하는 마음 혹은 동정심 등의 감정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감정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직 반쪽만의 이해밖에 되지 않는다. 자비란 함께 즐거워하려는 마음이다. 즉 자비란 흔히 말하는 사랑이라든가 애타심(愛他心)이라든가 하는 말이 갖는 뜻보다도 더욱 깊은 불교 특유의 사상에서 나온 말이다. ‘자(慈)’란 범어 마이트레야(Maitreya)의 번역으로서 마이트레야는 우(友) 즉 벗이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인데 깊은 뜻은 ‘특정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 대해 우정을 갖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인은 이것을 보편적인 인애(仁愛)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悲)’란 범어 카루냐(Karunya)의 번역으로 원래 ‘신음(呻吟)’이라는 의미인데 인생살이의 갖가지 괴로움에 신음소리를 내는 것을 말한다. 그 신음소리를 듣고 자기도 동감하고 동정하여 “음-”하고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비’이다. 즉 남의 괴로움을 내 괴로움처럼 느껴 마음 속에서부터 이해하고 걱정해 주는 것이 ‘비’다.
결론적으로 평등성의 원리 위에서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에 눈을 떠야만 비로소 참 자비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속에 네가 있고 네 속에 내가 있다는 동체(同體)사상을 온몸으로 체득하여 부처님의 지혜(般若)를 완성(波羅蜜多)하고 ‘남 즉 나’, ‘나 즉 남’이라는 일체감(一體感) 속에서, 즉 나와 남이라는 상대적인 생각마저 사라진 자리에서 자기가 자기 아닌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 자비인 것이다. 다음으로 법을 설하는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라고 하는 것, 즉 일체의 존재가 공성이라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법을 설할 것을 말한다. 일체법공(一切法空) 즉 모든 존재에는 실체라는 것이 없다고 꿰뚫어 보았을 때, 보살 수행자인 보시자의 눈에는 이 세계가 너와 나, 사랑과 미움이라는 차별, 상대가 없는 절대 평등의 세계로 비치어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재무애의 경지가 나타난다. 이러한 경지에서 상대방이 그 무엇에도 취착(取着)함이 없어 노사(老死)·수(愁)· 비(悲)· 고(苦)· 우(憂)· 뇌(惱)에서 해방(解脫)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설법자의 태도이다. <법화경>에서는 “여래의 자리란 일체 법공(法空)이며 이 가운데 안주(安住)하여 해태(懈怠)하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여러 보살 및 사부대중을 위해 널리 이 <법화경>을 설하라”라고 말한다.
고원천착의 비유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고원서 우물 파는 것에 비유
<법화경>에는 모두 열 여섯 가지의 비유가 있는데 그 하나인 ‘고원에서 우물을 파는 비유’ 즉 ‘고원 천착의 비유’가 제10장 ‘법사품’에 들어 있다. ‘법사품’에서 석존께서는 바이샤라쟈(藥王) 보살에게 <법화경>의 위대함에 대해 설한다. 그 가운데서도 <법화경>의 신앙에 의해 최고의 바른 깨달음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이 갈 수 있음에 대해 설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요약하면, <법화경>을 설하고 읽어 주고 노래해 주고 옮겨 쓰며 <법화경>이 존재하는 곳은 어디라도 일곱 가지 보배로 된 탑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이 탑 속에는 부처님의 유골(舍利)을 두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법화경>에는 여래의 전신(全身)이 있기 때문이다. 이 탑을 꽃(華)· 향(香) 등 갖가지 물건으로 공양· 존경· 존숭· 찬탄해야 한다. 이 탑에 예배·공양한다면 최고의 바른 깨달음에 가까이 감을 알아야 한다. 여래의 전신(全身)이 <법화경> 가운데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법화경>이 여래 그 자체를 설한 경전임을 지적하고, 다시 <법화경>을 신앙하는 사람 모두를 성불시킬 수 있는 경전임을 의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다음에 재가든지 출가든지 보살도를 수행하는 경우, <법화경>을 보고 듣고 읽고 외우고 옮겨 쓰고 믿어 간직하고 공양하지 않는 사람은 보살도를 완전히 수행한 것이 아니며 <법화경>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보살도를 완전히 수행한 것이 된다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 <법화경>을 보고 듣고 믿고 이해하며 간직한다면 최고의 바른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다고 한다. 요컨대 보살도 수행의 중심이 <법화경> 신앙임을 지적한다. <법화경> 신앙으로 최고의 깨달음에 가까이 가는 것을 석존께서는 고원에서 우물을 파는 비유를 들어 설하시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목이 타서 물을 필요로 하여 고원(高原)에서 우물을 파서 물을 구한다고 하자. 마른 흙을 보면 물은 아직 먼 곳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노력하며 계속 파서 차츰차츰 습기가 있는 흙을 보고, 이렇게 하여 점차로 진흙에 도달하면 그 사람의 마음 속에서는 물이 반드시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안다.” 이상이 고원천착의 비유이다. <법화경> 자신은 이 비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법화경>을 아직 듣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해서 수행할 수 없다면 당연히 이 사람은 최고의 바른 깨달음은 아직 멀다고 알아야 한다. 만일 <법화경>을 듣고 이해하고 사유하며 수행할 수 있다면 반드시 최고의 바른 깨달음에 가까이 갈 수 있음을 안다. 왜냐하면 모든 보살의 최고의 바른 깨달음은 모두 이 <법화경>에 소속되기 때문이다. 이 <법화경>은 방편의 문을 열어서 진실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 <법화경>의 가르침의 창고는 깊고 견고하며 깊숙하고 아득히 먼 것이기 때문에 아무도 도달하는 사람이 없다. 지금 부처님은 보살을 교화하여 성숙시키고 그들을 위해서 <법화경>을 열어 보이는(開示) 것이다”라고 한다. <법화경>은 모든 부처님의 근원의 법을 열어 보인 것이기 때문에 성불을 지향(志向)하고 보살에게 최고의 바른 깨달음은 당연히 <법화경>에 소속되는 것이다. 이 ‘법사품’은 앞의 9장 ‘수학무학 인기품’까지와는 그 내용이 크게 달라져 <법화경>을 받아들여 간직함과 그 넓힘이 테마로 되어 있고, 경전 성립사상(成立史上)에서도 이 ‘법사품’에서 제22장 ‘촉루품’까지를 한데 묶어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보살행의 실천을 설하는 이 한 덩어리의 부분이야말로 <법화경> 본론의 중심부라고 하여 이 한 덩어리의 맨 처음 부분인 제10장을 기점으로 <법화경>을 재검토하려는 사람도 있음을 말해 둔다.
보배탑이 솟아남
다보여래님의 全身 사리탑
“법화경 설할 때 탑과 함께 참석 正法증명”
이 ‘견보탑품(見寶塔品)’에 이르러 석가모니불과 이 법회에 동참한 대중들 앞에 일곱 가지 보배로 이룩된 큰 탑이 홀연히 땅에서 솟아나 영축산의 하늘 가운데 높이 떠올랐다. 이 보배탑은 높이가 5백 요자나(由旬), 가로 세로 길이가 2백 5십 요자나에 달했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보배구슬로 장식되고 5천이나 되는 난순과 1천만의 감실이 붙어 있었다. 또 7보로 된 깃발과 해가리개, 보석으로 된 목걸이, 보배방울 등으로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되고, 4면에서는 타말라 잎과 찬다나 나무로 만든 향(多摩羅跋 檀香)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천룡 8부중이 보배탑에 온갖 꽃과 향, 영락, 깃발과 해가리개, 음악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여 공양을 드리자, 보배탑 안에서 큰 음성이 나왔다. “훌륭하고 훌륭하여라. 석가모니 세존이시여, 훌륭히 부처님의 지혜 즉 평등이라는 큰 지혜(平等大慧)로서 보살을 가르치는 법(敎菩薩法)이며 부처님께서 지켜주시는(佛所護念) <묘법연화경>을 가지고 대중을 위해 설하시니, 이와 같이 석가모니 세존께서 설하시는 것은 모두 진실합니다”라는 찬탄의 소리가 들려왔다. 자리에 모인 대중은 이 보배탑은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출현하였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은 과연 어떤 부처님일까 하는 의문을 품었다. 이에 석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보배탑은 아득한 옛날에 입멸하신 다보여래(多寶如來)라는 부처님의 사리탑이며, 지금도 이 탑 안에는 그 부처님의 전신(全身) 사리가 계신다. 이 부처님은 옛날 보살로서 수행할 때에 큰 서원을 세웠다. 자기가 입멸한 후에 언제 어떠한 장소이든 만일 <법화경>을 설하는 경우가 있으면, 자기는 이 보배탑과 함께 그 장소에 가서 <법화경>이 진실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찬탄하겠노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지금 이 <법화경> 설법의 자리에 이 큰 보배탑이 출현하여 다보여래께서 큰 음성을 탑 안에서 내시어 ‘모두 진실하다’고 말하며 ‘훌륭하고 훌륭하여라’라고 찬탄하는 것이다.” 석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대요설보살은 다시 “세존이시여, 원컨대 저희들은 이 부처님의 몸을 뵙고자 합니다”라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이 다보여래는 또 깊고 깊은 하나의 서원을 세웠다. 그것은 <법화경> 설법의 자리에 내 보배탑이 출현했을 때, 사람들이 만일 내 몸을 보고자 하면, 그때 ‘<법화경>을 설하고 있는 부처님의 시방(十方)에 계시는 분신(分身)의 모든 부처님이 그 장소에 모이도록 한 후에 비로소 내 몸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라고 하는 서원이다. 그러므로 나도 시방에 있는 나의 분신의 부처님을 이제부터 이 곳에 모이도록 하겠다.” 이상이 지금까지의 개요를 기술한 것이다. 이 11장은 앞장의 ‘법사품’에 이어서 <법화경>의 호지(護持)와 유포를 테마로 하는 유통분에 해당되지만 돌연한 탑의 출현과 다보여래라는 과거에 멸도한 부처님의 등장 및 처음 밝혀진 분신의 여러 부처님들, 이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다보불은 아득한 옛날에 입멸하신 부처님이시다. 그 다보불은 보살수행 때에 세운 서원에 의해서 지금 이 석가모니불께서 <법화경>을 설하시는 자리에 나타나서 그 설법을 찬탄하고 <법화경>이 진실한 가르침임을 증명한다. 이 다보불의 찬탄과 진실의 증명은 석존의 설법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걸쳐 <법화경>이 설해질 때에는 언제 어디서라도 출현하신다고 한다. 이것은 이 <법화경>이 과거·현재·미래의 3세에 걸쳐 언제나 진실한 바른 가르침(正法)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보편적인 진실, 이것이 <법화경>이다 라고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점이다.
견보탑품 증명법화
불탑신앙 ‘보배탑출현’으로 설명
다보불 ‘법화경의 진실성’ 증명
이 ‘견보탑품’이 지금까지와 다른 것은 그 다보불(多寶佛)이라는 부처님이 칠보탑(七寶塔) 속에 전신(全身)이 흩어지지 않는 몸으로―석가모니불은 그 사리가 시방으로 분산되어 사리탑에 봉안되었지만― 앉아 계시면서 보배탑과 함께 출현하였다고 하여, 불탑과 결부시켜 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화경>에는 여러 곳에 탑공양과 조탑공양(造塔供養)이 설해져 있어 이 <법화경>의 기반에 강한 불탑신앙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견보탑품’은 그것을 보배탑 출현이라는 극히 구체적인 형식을 취해 설하고 있다. 그런데 다보불에 의한 <법화경>이 진실하다는 증명―이것을 증명법화라 한다―은 ‘서품’에서부터 이 11장에 이르기까지 하신 설법을 진실하다고 증명하는 것이 되므로 이것을 증명하기 이전이라는 뜻에서 ‘증전(證前)’이라 한다. 구체적으로는 지금까지 밝히신 1승진실, 3승방편과 2승작불(二乘作佛)의 설법을 가리키는 것이 되지만, 그러나 이것은 형식상이고 실제로는 <법화경> 전체의 설법을 진실한 것이라고 증명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에 다보불이 계신 보배탑을 열기 위해 석존의 분신인 여러 부처님이 밝혀지고 그 여러 부처님이 와서 모이는 것이 설해지는데 이것을 ‘기후(起後)’라 칭한다. 여러 부처님이 모임으로써 보배탑이 열리고 석존께서 그 보배탑 안에 들어가 다보불과 자리를 나누어서 두 분의 부처님이 나란히 앉는다. 그 후에 아래에서 설하는 것처럼 석존께서 세 가지의 고칙(告勅)에 의해 부처님께서 멸도한 후의 유통(流通)을 맡을 사람을 불러 모으자 뒤의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 부처님 멸도 후의 유통을 담당할 보살들이 땅에서부터 출현하고, 이들의 보살들이 모두 전생에서 석존의 제자였음이 밝혀진다. 그러자 이 법회에 모인 대중은 지금의 석존과 땅에서부터 솟아난 지용(地涌)의 보살들과의 결부에 대해 의문을 일으킨다. 여기서 ‘제16장 여래수량품’에 이르러 지금의 석존은 실제로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성불하여 지금에 이른다고 하는 본문(本門)의 구원실성(久遠實成)이 밝혀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견보탑품’에서 다보불의 보배탑, 석존의 시방분신(十方分身)의 여러 부처님 등을 실마리로 하여 후의 본문 ‘수량품’이 불러일으켜지는데 이것을 ‘기후(起後)’ 라고 한다. 그러므로 앞의 ‘증전’과 합하여 ‘증전기후(證前起後)’ 라고 하며 다보불의 보배탑을 ‘증전 기후의 보탑’이라 부르고 있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이 ‘11장’이 현재의 형태로 정리되기 전에는 독립된 경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똑같이 독립된 경전으로서 유포되고 있던 ‘제바달다품’과 더불어 법사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널리 독송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하나의 큰 의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왜 다보여래께서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면 그 어디라도 칠보탑과 함께 출현하여 “<법화경>이 진실한 가르침이다”고 증명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 <법화경>에서는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참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에 대해 인도의 나가르주나 즉 용수보살은 그의 저서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말하기를 “그 옛날 다보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그 당시의 중생들의 근기가 미숙하여 <법화경>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화경>을 설하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화경>을 다보여래 자신은 설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진실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앞으로 <법화경>이 설해지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가르침이 진실한 것이라고 증명하겠다고 서원을 세웠기 때문에 이번에도 석가모니부처님이 설하시는 <법화경>이 진실하다고 증명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부처님 나란히 앉다
다보·석가모니불 보배탑 병좌
법신·보신의 鏡智묘합 나타내
세존께서는 이 자리에 모인 대중을 대표하여 다보탑을 열어 줄 것을 대요설(大樂說) 보살이 간청하자 시방 분신의 여러 부처님을 불러 모으셨다. 세존께서는 두 눈썹사이의 백호상에서 한 줄기 빛을 발하여 우선 동방의 무수한 국토에 계시는 부처님을 비추시고 그로부터 차례로 4방 8방, 상하를 합쳐 시방(十方)의 세계를 비추시며 그곳에 계시는 부처님들을 초청하여 오시도록 했다. 세존께서는 그 부처님들을 수용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를 신통력에 의해 더없이 청정케 하였는데 다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을 남기고 다른 천신들과 사람들을 다른 국토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사바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여러 부처님을 수용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각각 2백만 억 나유타의 나라들을 신통력에 의해 청정케 하고 그들 모두의 세계를 뭉쳐서 하나의 불국토로 만드셨다. 이것을 삼변토전(三變土田)이라 한다. 이리 하여 시방에서 오신 여러 부처님은 지금은 사바세계가 변하여 청정 광대한 불국토가 된 이 안의 각각 보배 나무 아래에 마련된 사자좌에 앉아서 모두 석존에게 탑을 열 것을 간청했으므로 석존께서는 영축산으로부터 공중에 올라 이윽고 보배탑을 여시려고 했다. 오른 쪽 손가락으로 문을 열자 마치 큰 성문을 여는 것처럼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러자 그 속에는 사자좌에 앉아 마치 선정에 들어 계시는 것 같은 다보불의 전신(全身)이 보였으며 이윽고 다보불께서 “나는 여기에 <법화경>을 듣기 위해 왔노라”고 말씀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보불은 자기 자리의 반쪽을 나누어서 앉을 수 있도록 양보하며 석가모니불을 탑 안으로 초대했다. 석가모니불께서는 그 초대에 응하여 보배탑 안에 들어가 다보불과 나란히 앉으셨다. 이것을 ‘이불병좌(二佛 坐)’라 한다. 석존께서 보배탑 안에 들어가 다보불과 나란히 앉으신 것을 본 사람들은 자기들도 공중에 머물고 싶다고 원했다. 이런 뜻을 간파한 부처님께서는 즉시 이 법회에 있던 사람들을 모두 허공에 올려놓으셨다. 이로써 <법화경> 설법의 자리가 지상의 영축산에서 허공으로 옮겨졌으므로 이후 ‘촉루품’에서 법회 자리가 재차 영축산으로 되돌아오기까지를 ‘허공회(虛空會) 설법’이라 한다. 이렇게 이야기의 순서를 따라가면 ‘보배탑의 솟아남’, ‘시방의 부처님들이 모여 옴’, ‘삼변토전’, ‘보배탑의 개탑과 이불병좌’, ‘법회가 허공으로 이동’ 등 어느 것이나 기상천외한 것이어서 이 ‘견보탑품’은 웅대하고도 장려한 하나의 드라마라고 해도 좋다. 중국 삼론종의 길장(吉藏)은 이 이불병좌에 대해서 “다보불은 오래 전에 멸도 했지만 불멸(不滅)이면서도 멸도의 상(相)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그 다보불과 함께 석가불이 나란히 앉음에 의해서 지금의 석가모니불도 실제로는 생멸은 없으나 방편으로 생멸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천태(天台)는 보배탑의 문을 여는 것에 대해, 이것을 방편을 연다는 개권(開權)에 적용시키고 탑중 부처님 뵙는 것을 진실을 나타낸다는 현실(顯實)에 적용 해석하고 있다. 또 ‘이불병좌’에 관해서는 경(境)인 법신(法身)의 다보(多寶)와 지(智)인 보신(報身)의 석가(釋迦)와의 경지묘합(境智妙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해석도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상의 여러 가지 모티브가 경전의 유통이라는 커다란 목적 아래 통일되어 있다는 점이다. 본 ‘견보탑품’의 극적(劇的)인 구성도 모두 그 목적에 따라 기획된 것으로, 참으로 이 <법화경>을 듣는 사람으로서는 유통의 대원(大願)을 일으키기에 걸맞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엉뚱한 공상(空想)의 소산(所産)이 아니라 역력한 불교신앙 속에 계승되어 온 전승(傳承) 즉 <잡아함경> 권41에 기인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허공법회와 진리는 하나
‘다보여래=완전한 진리’ 인격화
법화경 사상통일 最上乘 법문
이 ‘견보탑품’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허공회(虛空會)라는 것과 보배탑 안에 여래의 신체가 흩어지지 않고 한 덩어리로 안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허공회에 관해 허무맹랑하고 꿈같은 이야기라서 믿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법화경>이 드라마로 엮어져 있음은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이다. 허공회는 가능한 모든 지각과 감각 기능을 총망라한, 총지성적인 의식을 통한 상상에 의해 시간과 공간을 상호 관통케 하여 체험하도록, 즉 그 속에 몰입하여 감지하도록 극화(劇化)한 것(지식을 통한 이해를 배제하고, 다시 말해 분별을 버리고 오직 순박한 마음으로 지혜의 문으로 들어오게끔 의도된 것)으로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믿음도 없이 인간의 때묻은 지식만을 가지고 이 무구청정한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를 자기의 작은 잣대로 가늠하여 해석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되고 어리석은 짓인지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믿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일치되는 마당이며 부처님과의 대화의 광장이다. 이 대화의 광장 밖에서 부처님의 마음을 설명하려 함은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에 지나지 않는 어리석은 소행일 뿐이다. 선정(禪定) 즉 삼매(三昧)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근(信根)이 필요한 것이다. 허공회 즉 허공법회란 하늘에서 법회를 가졌다는 것이니 ‘하늘’은 인간계를 떠난 이상(理想)의 세계를 말하며 ‘땅’은 인간과 가장 밀착된 현실의 세계다(천태대사는 땅은 무명을 말하고 하늘은 제1의공(第一義空) 즉 진리를 뜻한다고 함). 석존께서는 보배탑의 주체는 아득히 먼 동방 즉 과거의 세계에서 오신 다보여래(Prabhuta-ratna)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아득히 먼 동방의 부처님’이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아득히 먼 과거에 출현하신 부처님, 즉 다보여래는 실제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모습(相)을 가진 부처님이 아니라 다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완전한 모습’을 인격화하여 이름한 것이다. 즉 보정세계(寶淨世界, Ratnavis-raddhalokadhatu)란 어머님의 태내(胎內)라는 말인데 그 태내에서 인간이라는 자연현상이 출현했다는 뜻이다. 이 말은 곧 불성(佛性) 즉 진리 그 자체에 의해서 왔음을 일컫는다. 불성이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말하는데 이 부처가 된다는 성질이 왜 진리인가 하면, 진리의 성질은 외향성(外向性) 또는 향상성(向上性)이기 때문에 불성이 바로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불성이 바로 진리 그 자체라든가 또는 진리의 완전한 모습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 당시의 인도 사람들로서는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부처님으로 인격화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이 없는 것이 진리이다. 그런데 이 진리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한 덩어리로 뭉쳐서 통일된 모습으로 상징한 것이 바로 다보여래이다. ‘많은 보배를 모은 여래’ ‘많은 불성을 한데 모은 것, 즉 사람’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래의 전신(全身), 즉 여래의 신체가 한 덩어리로 되어 안치된 의미는 무엇일까? 불전(佛典)문학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신 후, 그 유골(佛舍利)은 재가 신도인 여덟 부족들에게 분배되어 여덟 지방에 모셔졌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여래의 신체가 한 덩어리로 되어” 라고 하여 일반적인 전승(傳承)을 부정하고, 영원히 가르침을 설하는 부처님의 출현이라는 복선(伏線)을 깔고 있다. 아무튼 <법화경>은 진리 그 자체 내지 모든 사상의 통일 즉 일승(一乘)이라는 거대한 의의를 가진 경전이다. 최상승(最上乘)의 법문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악인성불
살인등 5역죄 범한 악인 ‘제바’
석존 “미래세에 성불할 것” 예언
이 ‘제바달다품’은 쿠마라지바(鳩摩羅什)의 <묘법연화경>에서는 ‘제12장’으로 독립되어 있으나 <정법화경>이나 <산스크리트본(梵本)>에서는 ‘제11장 견보탑품’속에 포함돼 있어 여기서부터는 <묘법연화경>의 품수(章數)와 <범본>이나 <정법화경>의 품수가 서로 일치하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 ‘제바달다품’은 석존의 전생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이 품은 ‘현재의 석존이 아득히 먼 옛날에 어떻게 하여 <법화경>을 얻었던가’라고 하는 석존의 과거 수행이야기이다. 석존께서는 이 법회에 모인 보살과 천신 및 사람들, 비구·비구니의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옛날 오랫동안에 걸쳐 <법화경>을 계속하여 구해왔다. 큰 나라의 국왕으로 있을 때에 원(願)을 세워 최고의 깨달음을 구해왔다. 대승의 보살로서 갖추어야 할 여섯 가지의 수행(六度)을 완성하려고 보시의 행을 닦아 재물, 나라, 처자(妻子), 심지어는 자신의 몸과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았다. 마침내 임금자리를 버리고 북을 쳐서 시방에 포고를 내려 법을 구했던 것이다. 그때에 아사선인(阿私仙人) 즉 무비(無比)라는 선인(仙人)이 있어 대승의 <묘법연화경>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선인에게 가서 필요한 것을 모두 주었으니 열매를 따고 물을 긷기도 하고 땔나무를 줍고 식사를 준비하며 이 몸을 모두 바쳐 섬기기를 1천년을 계속 했으나 그래도 몸과 마음이 피곤한 줄 몰랐다. 마음 속에 묘법을 구하는 마음을 계속 품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법화경>을 얻어 성불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법화경>을 구하는 과거세의 수행을 대중에게 설하고 또한 과거세와 현세를 연결시켜서 이렇게 말한다. “그때의 왕이야말로 지금의 나이며, 내가 섬긴 선인은 누구인가 하면 지금의 데바닷타(提婆達多; Devadatta)이다. 그리고 데바닷타야말로 나의 좋은 벗(善友)이며 그의 덕으로 나는 깨달음을 완성하고 부처로서의 온갖 덕성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설하신 다음 석존께서는 데바닷타에게 미래세에 성불할 것이라는 예언(授記)을 주고 그 이름을 천왕여래(天王如來)라고 하리라 한 다음 대중을 향해, “미래에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있어 <묘법연화경>의 제바달다품을 듣고 티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믿고 공경하며 의심치 않고 당혹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계에 떨어지지 않고 시방의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것이며 그 태어나는 곳에서 항상 이 가르침을 들을 것이다. 만일 사람이나 천신으로 태어나면 매우 높고 거룩한 즐거움이 가득한 생활을 할 것이며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경우에는 ‘부모의 몸을 의탁하지 않고’ 자연히 연꽃에서 ‘보살로’ 태어날(化生) 것이다.” 한문 번역에서의 제바달다란 데바닷타의 음역이며 제바(提婆)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하고 조달(調達)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석존께서 성도한 후에 출가하여 5백인의 비구를 꼬여서 교단을 분열시켜 화합승(和合僧)을 깨뜨렸고, 큰 돌을 던져 부처님의 몸에서 피를 내게 하였으며, 마가다국의 아자타샤트루왕에게 술에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게 하여 부처님을 밟아 죽이도록 하였고, 주먹으로 화색(華色)비구니를 때려죽이는 등 악역무도한 사람으로 전해지고 있다. 데바닷타는 이렇게 5역죄를 범한 악인이며 이러한 악인이 부처님으로부터 성불의 예언을 받았다. 대악인조차도 성불할 수 있다. 하물며 선인(善人)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악인 성불은 뒤의 용녀성불(龍女成佛)과 더불어 <법화경>을 수지하고 신앙하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격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법화경>의 사상이 일체 만물만상이 평등하다는 대원칙으로 일관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다 성불할 수 있다는 데 그 존재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용녀의 성불(일명 女人成佛)
보배 바치고 곧 남자로 변신·성불
불도성취 권고 분발의 뜻 담겨
이 ‘제바달다품’은 먼저 악인(惡人)인 데바닷다(提婆達多)의 성불을 밝히고 다음에 용녀(龍女)의 성불을 밝히는데, 여기서는 용녀의 성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우선 줄거리를 말하자면, 데바닷다에게 석존께서 수기를 마치시자 다보여래를 따라온 지적(智積)이라는 보살이 다보불에게 본래의 국토로 되돌아가자고 종용했다. 그러자 석존께서는 지적보살에게 만주슈리(文殊師利)라는 보살이 있는데 그 보살과 묘법(妙法)을 서로 논한 후에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큰 바다의 사가라(娑竭羅) 용궁(龍宮)에 사는 만주슈리 보살이 수레바퀴만한 1천 잎의 연꽃에 앉아 나타났다. 그는 다보불과 석존을 경배한 후 지적보살과 인사를 나누었으니, 여기서부터 두 보살의 문답이 시작된다. 지적보살은 큰 바다 속의 용궁에서 만주슈리의 교화 상태를 묻고 만주슈리는 항상 <법화경>을 설해 왔고 그 교화한 사람의 수가 수없이 많아서 헤아릴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에 대해 지적보살은 “<법화경>은 심심미묘(甚深微妙)하여 모든 경전의 보배인데 이 <법화경>을 수행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가 어떤가” 하고 묻는다. 여기서 만주슈리가 대답하기를 “사가라 용왕의 딸은 나이는 여덟 살이지만 지혜가 예리하고 여러 부처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잊지 않고 간직하여 정(定)·혜(慧)를 갖추어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얻어 깨달음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지적보살은 석존마저도 무량겁에 난행고행(難行苦行)하여 겨우 깨달음을 완성했다고 하는데 용녀가 아주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는 믿기 어렵다며 의혹을 표명했다. 그러자 그 말이 끝나지도 않은 사이에 용녀가 홀연히 용궁에서부터 부처님 앞에 출현하여 부처님을 찬탄하는 시(偈)를 읊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것을 본 샤리푸트라(舍利弗)가 용녀에게 질문한다.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여자의 몸으로 성불이 가능한 것인가?”
그러자 용녀는 한 개의 보배 구슬을 끄집어내어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은 즉시 이것을 받으셨다.
용녀가 지적보살과 샤리푸트라 두 사람을 향해 “나의 성불은 부처님께서 보배 구슬을 받으신 것보다 더 빠르다”고 말하자 금방 여자의 몸이 남자로 변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덕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위해 묘법을 설하자 그것에 의해 모두 깨달음의 예언을 얻고, 그 불국토인 무구세계(無垢世界)는 여섯 가지로 진동했다. 이를 본 지적보살과 샤리푸트라의 두 사람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납득하고 믿게 되었다. 이상이 용녀 성불을 설하는 부분의 개괄적인 요점이다. 그런데 용녀는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다. 그 몸은 축생의 몸이어서 앞의 데바닷다보다도 성불에 관해서는 한층 불리한 조건에 있다. 그 용녀의 성불이 설해졌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의의가 있는 것일까. 그것은 역시 성불하기 어려운 존재의 성불이 설해졌다고 하는 데에 있다. 이것에 의해서 그 이상의 존재들에게 불도의 성취로 향하도록 마음을 일으키게 권함과 아울러 분발토록 격려함이 교시되어 있는 것이다. 샤리푸트라의 말로 설해진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법을 담을 그릇이 아니다” “여인의 몸은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다”하는 말들은 모두 당시의 인도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남존여비라는 여성관의 소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열반경>에서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 설함과 같이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사상(皆成思想)을 표방하고 있다. 그것은 본래 출생이나 지위, 남녀의 성차별마저 넘어선 이상인 셈이다. 여성성불을 설하는 경전에 <불설초일명삼매경(佛說超日明三昧經)>, <무소유보살경(無所有菩薩經)>, <불설무구현여경(佛說無垢賢女經), <불설전여신경(佛說轉女身經)>, <해룡왕경(海龍王經)>, <승만경> 등이 있는데 그 수(數)는 매우 적으나 모두 대승불교의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믿음과 왕생극락
“법화경 듣고 충실히 수행하면
연꽃 가운데 보배자리서 탄생”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佛告諸比丘). 앞으로 오는 세상에 만일 훌륭한 신앙심을 가진 남자와 여인이 있어(未來世中 若有 善男子 善女人) <묘법연화경>의 제바달다품을 듣고(聞妙法蓮華經 提婆達多品), 더없이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믿고 공경해 의심치 않고 당혹하지 않는 사람은(淨心信敬 不生疑惑者) 지옥·아귀·축생의 악한 갈래에 떨어지지 않고(不墮地獄餓鬼畜生生), 시방의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것이며(十方佛前) 그 태어나는 곳에서 항상 이 가르침을 들을 것이다(所生之處 常聞此經). 만일 사람이나 천신으로 태어나면(若生人天中) 매우 높고 거룩한 정신적인 즐거움이 가득한 생활을 할 것이며(受勝妙樂) 부처님 앞에 태어날 경우에는 <부모의 몸을 의탁치 않고도 완전한 신체를 갖추어> 자연히 연꽃에서 <보살로> 태어나리라(若在佛前 蓮華化生).”근래 <법화경>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흔히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이 ‘즉신성불’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는 “<법화경>을 믿으면 곧 그 몸이 성불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밀교에서의 ‘즉신성불’ 즉 “그 몸이 곧 부처이다”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가 즉 이것이 무엇이냐”하는 선문답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곧 그대가 부처이다. 그러니 부처다운 일을 해야 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런데 과연 <법화경>에 즉신성불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용녀성불(龍女成佛)’에서 볼 수 있다. 즉 샤리프트라(舍利弗)가 용녀에게 질문하기를 “여자의 몸은 때묻고 더러워서 다섯 가지의 장애(五障)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여인의 몸으로 성불이 가능한가”라고 묻는다. 그러자 용녀는 그 값이 삼천대천세계와 맞바꿀 수 있는 보배구슬을 부처님께 바치니 부처님께서는 곧 그 구슬을 받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는 말이 “부처님께서 내가 바친 보배구슬을 받는 것 보다 성불하는 것이 더 빠르다”라고 하며 남방의 무구세계(無垢世界) 즉 청정한 세계에서 남자로 변하여 성불하였다는 것이 바로 즉신성불을 증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받으신 보배구슬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부처님께서 뇌물을 받으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렇지 않다. 삼천대천세계와 맞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믿음이란 그렇게 값진 것이니 믿음이 있어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 바로 값이 산천 대천세계와 맞먹는 보배구슬이다. 그런데 믿음이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흔히 우리들 인간의 대뇌의 활동에는 좌우(左右)가 서로 다르다고 한다. 왼쪽 뇌는 ‘로고스 뇌’라 하여 말이나 논리나 계산 등을 관장하고 있으며 오른쪽 뇌는 ‘파도스 뇌’라 하여 울거나 웃거나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만족해하는 정동적(情動的)인 작용을 관장한다. 뿐만 아니라 새의 울음소리나 풀벌레 소리에 감동하는 등의 작용을 관장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믿음이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것이라고 한다. 중국의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좌뇌를 구사하여 천태의 철학을 구축하였으니 로고스철학으로서 정밀하게 짜 맞춘(精緻) 천태의 교학은 너무나 이성적인 것이어서 믿음을 강조하는 일련종(日蓮宗)의 법화관(法華觀)하고는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다. 오늘날의 <법화경> 신봉자들은 전자(前者)인 “그 몸으로 곧 성불한다”라고 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쿠마라지바(鳩摩羅什)가 번역한 <묘법연화경>에 귀의한다는 말인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을 구창(口唱) 즉 입으로 소리내어 부르기에 바쁘다. 사실 <법화경>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여래신력품 제21’에는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이라고 소리쳐 부르는 대목은 있지만 ‘나무묘법연화경’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선종인 조계종에서는 그 소의 경전인 <금강경>의 제목인 ‘마하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며, 중국의 천태종을 위시하여 고려 천태종 및 일본의 천태종에서는 무시무종(無始無終) 즉 영원한 부처님이라는 인도의 말, 아미타불을 부르며 정근하고 있다. 아무튼 <법화경> ‘약왕보살본사품 제23’에 “어떤 여인이 <법화경>을 듣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충실하게 수행한다면 그 수명을 마친 뒤에 아미타불이 많은 큰 보살 대중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극락세계에 가서 연꽃 가운데의 보배자리 위에 태어날 것이다”라고 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인내와 노력
부처님 믿는 우리, 인욕의 갑옷입고
법화경 설하기 위해 어려운 일 참고…
이 13장의 장명(章名)을 옛날에는 ‘지품(持品)’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가르침(經)을 간직(持)한다는 의미에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께서는 ‘제10장 법사품’이래 여래가 멸도한 후에 <법화경>을 넓히는 것에 대해 설해 왔다. 특히 ‘견보탑품’에서는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누가 이 <법화경>을 믿고 간직하며 읽어주고 외워줄 건가. 지금 부처님 앞에 나와 스스로 서원을 말하라” 하시고, 여래가 멸도한 후에 <법화경>을 홍통할 사람을 세 번에 걸쳐 모집했다(이를 세 개의 고칙(告勅)이라 함). 지금의 이 ‘권지품’은 이러한 부처님의 부름에 답하여 불제자들이 스스로 경전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넓힐 것을 맹세하는 장이다. 우선 최초에 약왕보살과 대요설보살이 2만의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앞에 나아가 여래가 멸도한 후의 험악한 세상에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이 <법화경>을 믿어 간직하고 읽어주고 외워주거나 베껴 쓰거나 사람들에게 설할 것을 맹세한다. 그러자 다음에는 5백의 아라한들이 맹세를 하고, 또 8천의 배움을 마친 사람과 아직 배우고 있는 사람들이 <법화경>을 넓힐 것을 맹세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사바세계 이외의 다른 국토에서 넓힐 것을 맹세한다. 그 이유는 이 사바 국토의 사람들은 나쁜 습관이 많아 교만하며 덕을 베풀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 극히 적고 성내기를 잘해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에는 마하푸라쟈파티와 야쇼다라, 이 두 사람의 비구니를 비롯한 6천의 비구니들이 맹세를 한다. 이 13장에 이르기까지는 이해력이 높은 상근기인 샤리푸트라를 비롯해 이해력이 낮은 하근기인 푸루나와 카운디냐들이 차례로 부처님으로부터 미래에 성불한다는 예언(授記)을 받았지만 이 비구니들에게는 아직껏 아무 말씀도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르러 겨우 부처님께서 성불의 예언을 주시므로 더 없는 기쁨을 느끼고 타방 국토에서 <법화경>을 홍통할 것을 맹세한다. 그리고 맨 끝에 불퇴전의 경지에 있는 80만억 나유타의 대보살들도 맹세를 한다. 이상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에 응하여 여래가 멸도한 후의 세상에서 경전을 간직할 것과 넓힐 것을 맹세한 사람들이다. 경전을 간직한다는 것이란, 가르침을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여 잊지 않는 것인데 이것은 경전을 간직하는 사람 자신의 일이다. 하지만 경전을 널리 전파하는 것은 이것을 남에게 이해시켜 받아들이게 하여 믿도록 하는, 즉 남에 대한 역할이므로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뽑아 없애기 어려운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다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뚜렷한 객관적인 사실마저도 받아들이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는 경우가 가끔 있다. 그런데 더구나 <법화경>의 교설은 당시에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사상이었다. 나고 죽고 하면서 삼지(三祗) 백겁(百劫)이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보살 수행을 거쳐야만 겨우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법화경>에서는 한 구절(一句), 한 시송(一偈)이라도 들으면 누구라도 성불한다고 한다. 혹은 ‘방편품’의 게송에서는 어린애가 놀이 삼아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거나, 누구나 한번이라도 ‘나무불’ 하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성불한다고 설한다면 종래의 가르침을 믿고 받드는 사람 편에서 보면 이것은 이미 불교가 아닌 외도의 가르침으로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당시의 세상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가르침이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법화경>은 스스로의 가르침을 비밀스러운 가르침(秘說)이라 부르고,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세상에 넓히려 할 때, 세상사람들로부터 꾸지람을 듣고 비방과 박해를 받을 수 있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앞의 ‘법사품’에서 “이 가르침은 여래가 세상에 있는 현재마저도 미워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많은데 하물며 멸도한 후에야 말해 무엇하랴”라고 설함은 바로 그런 뜻이다. 부처님 믿는 우리 인욕의 갑옷 입고, 법화경 설하기 위해 어려운 일 다 참으며, 목숨도 아끼지 않고 다만 무상도를 구해, 앞으로 오는 세상 부처님 분부대로 지키고 간직하오리다.
법화경 전법자 박해
감연대사, ‘3종류 박해자’열거
신봉자 비방·危害·승원서 추방
<법화경>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세상에 전하려 할 때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방과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이 받는 박해란 도대체 어떠한 것일까. 경에는 미래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의 험악한 세상에서 받을 것이라고 설해져 있으나, 현실로는 신흥의 <법화경>을 신봉하는 집단이 실제로 만난 수난을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천태종의 6조(六祖) 묘락대사(妙樂大師) 감연(堪然)은 <법화문구기(法華文句記)>에 그 박해를, 박해자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고 있다.
1. 속중증상만(俗衆增上慢)― 이는 출가 수행자가 아닌 재가의 사람들로서 잘난 체 뽐내는 사라들을 가리킨다. <법화경>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정법을 홍통하는 사람들에게 악구(惡口), 잡언(雜言), 중상(重傷)하고 꾸짖고 헐뜯고 욕하며 몽둥이로 때리고 칼을 휘두른다고 한다. 2. 도문증상만(道門增上慢)― 도문이란, 출가한 사람들로서 잘난 체 우쭐대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 사람들은 삿된 지혜를 갖고 그 심근(心根)이 삐뚤어져 있어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서도 깨쳤다고 생각하며 우쭐대는 사람들이다.
3. 참성증상만(僭聖增上慢)― 참성이란, 실제로 성자(聖者)가 아닌데도 그 분수를 넘어 성자의 흉내를 낸다는 뜻으로서 성자인 체하며 우쭐대는 출가자를 말한다. <법화경>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인적 없는 조용한 곳에 살며 누더기 옷 걸쳐 입고 스스로는 진실한 수행을 한다고 생각하며 남들을 경멸한다. 악한 마음을 품고 마음속으로는 항상 세속의 일들을 생각하면서도 성자인 체하며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공경 받고 있다.” 이상이 세 종류의 박해자인데 이들이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을 비방하고 욕하며 위해(危害)를 가하고 승원(僧院)에서 추방시키는 것이다. 박해자들이 말하는 비난의 말은 “<법화경> 신봉자들은 제멋대로 경전을 만들어 세상에 넓히며 외도의 가르침과 같은 것을 설하여 세상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그것은 ‘자기들은 부처가 된다’고 하는 삿된 견해의 가르침이다”라고 한다. <법화경> 신봉자들에 가해지는 박해의 원인은 <법화경>의 내용 그 자체에 있다. <법화경>이 스스로를 ‘비설(秘說)’이라 부르고 있음은 아직 세상에 용납되지 않고, 더욱이 그 내용이 출가수행자뿐만 아니라 속인들도 놀랄 만큼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란 <법화경>이 설하는 1불승(一佛乘)의 가르침임은 말할 것도 없다. <법화경> 이전에 설해진 많은 가르침은 실제로 <법화경>을 설하기 위한 교화의 수단으로서의 가르침, 즉 방편(方便)이며 “<법화경>이야말로 모든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한다면 종래의 출가자는 놀라고 분노하며 <법화경>을 외도의 논(論)이라고 배척할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이것이 박해의 원인이다. <법화경>은 이와 같이 하여 가해지는 박해에 대해 그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을 뿐더러 인욕의 갑옷을 입고 참고 견디며 가르침(法)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디라도 찾아가 법을 설하겠다고 하는 결의를 말하고 있다. 일본의 니찌렌(日蓮)스님은 <법화경>을 넓혔기 때문에 사도(佐渡)로 유배되는 박해를 받았고 그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 ‘권지품’ 20행의 게송을 특히 중요시하여 말하기를 “지금 니찌렌은 말법(末法)에 태어나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는 다섯 글자(五字)를 넓히려다 박해를 받는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2천 2백여 년 동안 실로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도 일체 세간에 원망이 많고 믿기 어려운 경문을 실천하지 않았도다. 자주 몰아낸다는 명문을 봄(見)은 오직 니찌렌 나 한 사람 뿐”이라고 하며 경문을 몸으로 읽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감연대사(堪然大師)가 열거한 세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켜 “세 종류(三類)의 강적(强敵)”이라 하고 “당세(當世)에 세 종류의 강적이 없다면 누가 불설(佛說)을 믿고 받아 간직(受持)하겠으며 니찌렌이 없으면 누가 <법화경>을 펴겠는가”고 하며 자신이 법화행자(法華行者) 즉 실천자(實踐者)라는 자각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법화경>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전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근본적인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아 실상(實相)을 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직제자→악인→여인→근친에 수기
“누구나 成佛”…皆成·일승사상 기조
본장(本章)에서는 석존에게 가장 가까운 두 사람에게 수기를 주고 있다.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샤리푸트라(舍利弗) 존자(尊者)를 비롯하여 성문(聲聞)으로 불리는 많은 직제자(直弟者)들에게 차례 차례로 미래에 부처님의 깨달음을 완성하고 부처가 될 것을 보증해 왔다. 그 가운데는 석존이 태자로 왕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 태어난 라훌라의 밀행(密行)에 대해 도칠보화여래(蹈七寶華如來)의 수기를 준 것도 포함돼 있다. 라훌라는 석존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노력을 한 것을 ‘밀행’이라는 말이 이야기하고 있다. 아무튼 이렇게 차례 차례로 수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연(緣)이 깊은 석존의 양모(養母)와 지난날의 아내에 대해서는 아직 수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은 이러한 근친자(近親者)들도 석존의 뒤를 좇아 출가하여 오랫동안 수행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석존은 이러한 근친자의 생각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우선 젊어서부터 수행자로서 깨달음을 구해 온 직제자들에게 수기를 주고, 그런 다음 비로소 근친자에게 수기를 줄 기회가 왔으리라고 본다. 즉 보살들이 미래의 악세(惡世)에서 나름대로 ‘인내(忍耐)’를 가지고 <법화경> 전할 것을 맹세한 정경(情景) 뒤에, 석존의 양모(생모의 동생)인 마하프라쟈파티가 근심 어린 얼굴로 석존을 우러러보는 것이다. 그러자 석존은 “아직 저희들에게는 장래에 성불을 이룰 것이 보증되지 않는다고 근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결코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미 나는 모든 성문들에게 장차 성불함을 보증한다고 밝히고 있지 않는가” 하고 말씀하신 후, 다시 구체적으로 “미래의 세상에서 6만 8천 억의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대법사(大法師)가 된다”고 밝히고, 또 함께 있는 6천인의 비구니에게도 동시에 ‘법사(法師)’가 됨을 보증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점점 보살의 수행을 쌓아가서 이를 완성하여 부처님이 될 것이니 그 이름은 일체 중생의 눈에 기쁨을 준다는 일체중생희견여래(一切衆生喜見如來)가 될 것이며, 이 일체중생희견여래와 6천의 보살들은 서로 차례차례 이어가며 수기하고 각기 위없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라고 수기를 주신다. 그때 라훌라의 어머니 야쇼다라가 “석존께서는 미래 성불을 보증하는 가운데 오직 한 사람 나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는구나” 생각하자, 이를 아신 석존께서는 “그대는 장래에 백 천 만 억의 여러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보살행을 닦아 대법사가 되어 점차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완성해 축복받은 땅인 선국(善國)에서 마침내 성불할 것이니, 이름은 수많은 반짝이는 깃발을 가진 사람이라는 구족천만광상여래(具足千萬光相如來)라 할 것이다”는 수기를 내리신다. 이와 같이 ‘권지품’은 ‘제바달다품 제12’에서 설한 여인성불(女人成佛)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석존의 출가 이전의 양모와 부인에 대한 기별 즉 미래 성불의 보증이 밝혀져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마하프라쟈파티는 석존의 이모로서 탄생이래 계속 석존을 양육한 분이며 또한 라훌라의 어머니 야쇼다라 비구니는 지난날 석존이 태자로서 카필라바스투에 있었을 때의 아내였다. 지금까지 석존은 이러한 가장 가까운 근친자에 대해 구체적인 미래 성불의 보증을 주지는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섯 사람의 직제자의 대표를 최초로 하여 차례차례 기별을 주어온 석존은 최대의 악인인 제바달다에게 기별을 주는 것에 의해 어떠한 악인에게도 성불이 허락됨을 설하고, 이어서 여덟 살된 용녀의 성불에 의해 여인성불을 밝힌 연후에 비로소 근친자 중의 근친자인 길러주신 어머니와 지난날의 부인에게 수기를 설한 것이다. 여기에 석존의 위대한 교화방식이 있음을 생각하지 아니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기별은 최초에 널리 주어지고 있지만, 제자들은 구체적으로 자기의 이름을 들어서 수기를 밝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석존은 빼어난 직제자들, 오랫동안 석존을 따른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수기하고, 다시 악인·여인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통 사람들에의 지침을 우선하고 최후에 근친자에의 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법화경>은 평등대혜(平等大慧)라는 반야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누구나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사상(皆成思想)을 비롯한 일승사상(一乘思想)이 기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락행
법화경 설할때 몸·마음가짐 밝혀
천태대사, 몸·입·뜻·서원 4분류
앞의 ‘제13장 권지품’에서 바이샤쟈라쟈(藥王) 보살과 마하푸리티파나(大樂說) 보살을 우두머리로 하는 2만의 보살들에서부터 80만 억 나유타의 보살에 이르기까지,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에 <법화경>을 간직하고 넓힐 것을 맹세했다. 이 ‘제14장 안락행품’에서는 그 맹세를 받고, 다음의 험악한 세상이 된 이 사바세계에서 어떻게 <법화경>을 설해 넓힐 것인가, 즉 경전을 넓힘에 있어 가져야 할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밝히고 있다. 그 몸과 마음가짐에 대해 설한 것이 ‘4안락행’이다. 천태대사(天台大師)의 해석에 따르면 이것을 몸(身)·입(口)·뜻(意)·서원(誓願)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 먼저 몸(身)의 안락행에는 보살의 행위 즉 행동(行處)과 교제범위(親近處)가 설해져 있다. 행처(行處)란 인욕의 경지에 머물러 제법실상(諸法實相)의 모습을 관(觀)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친근처(親近處)에 대해서는 우선 최초에 보살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열거하고 다음에 친근해야 할 것으로 (1)조용한 곳에서 좌선을 하여 마음을 닦아 다스릴 것 (2) 일체의 현상(一切法)이 공성(空)임을 관찰할 것 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 14장의 이름의 유래가 된 ‘안락행’이란, 원어 수카-비하라(Sukha-vihara)의 중국어 번역으로, 원래 의미는 ‘낙(樂)에 머무는 것, 즉 심신이 안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안락행이란, 안락한 수행이라는 뜻이 아니라 안락한 상태에 몸과 마음을 두기 위한 실천행법(實踐行法)을 말한다. 그래서 범본 즉 산스크리트 본에서는 이 14장을 ‘안락한 생활’이라 부르고 있다. 이 ‘안락행품’의 첫머리에서 만주슈리(文殊) 보살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이 여쭙는다. “세존이시여, 이 여러 구도자(菩薩)들은 참으로 보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부처님을 존경하고 따르기 때문에 큰 서원 세우기를,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의 험악한 세상에서 이 <법화경>을 수호하며 읽고, 외워, 배우고, 남에게 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큰 뜻을 세운 초심의 구도자들이 다음의 험악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할 때에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앞 장(前章)의 ‘권지품’에서 다섯 종류의 사람들이 <법화경>을 마음 속에 간직(受持)하고 넓힐 것을 부처님 앞에서 맹세했다. 그것을 이어받아서 이 ‘안락행품’에서는 구도자 만주슈리가 대표가 되어,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다음의 악한 세상에서 이 <법화경>을 어떤 방법으로 설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부처님께 묻는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만일 보살마하살이 미래의 악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설하려면 마땅히 다음의 네 가지 행법(行法)에 편히 머물러야 한다”고 하시며 다음의 네 가지의 행법에 대해 차례 차례로 설하신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 네 가지의 가르침을 ‘4안락행’이라 이름한다. 그러므로 ‘4안락행’이란,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의 악한 세상에서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이 지녀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앞의 ‘법사품’에서의 ‘홍경(弘經)의 삼궤(三軌)’ 즉 <법화경>을 넓히는 세 가지의 바른 길과 비록 그 길은 하나이지만, 그 내용은 ‘법사품’의 옷(衣)·자리(座)·방(室)의 세 가지의 길보다도 훨씬 구체적이며 현실에 입각하여 설해져 있다. 첫 번째의 안락행은 앞서 말했듯이 천태대사에 의하면 이를 ‘신안락행(身安樂行)’이라 하는데 이를 둘로 나누어서 해석한다. 즉 보살의 행처와 친근처가 그것이다. 행처(行處)란, 아차라(acara)의 번역으로 행동(行動) 또는 거동(擧動) 등의 뜻이다. <법화경>에서는 “인욕(忍辱)의 경지에 머물러 그 어떤 것에도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고 제법여실(諸法如實)의 상을 관하라”고 설하고 있다. 즉 항상 모든 것에 대해 참고 견디며 어떠한 것에도 마음이 사로잡히지 않고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찰하라는 것이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서든 그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보는 눈이 흐려진다. 그러므로 이 집착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법사품’에서 설한 “유화인욕(柔和忍辱)의 옷을 입고, 일체법(一切法)이 공성(空)이라는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말법시대에 <법화경>을 넓히려는 사람은 이러한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고 한다. 이것이 초심의 보살이 <법화경>을 넓히려고 할 때 지녀야할 마음가짐이다.
권력자·이교도·사냥꾼·예술가 등-멀리해야 할 사람
좌선·마음 다스리는 일, 空입장서 觀하기-가까이해야 할 일
지난 호에서는 ‘신안락행’에서의 행처(行處) 즉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친근처(親近處)이다. 친근처의 원어는 고차라(gacara)로, 행위의 대상 또는 행동 범위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이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과 반대로 가까이해야 할 것이 설해져 있다.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것이란 대인관계에 관한 내용으로, 우선 다음에 열거하는 사람들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국왕이나 왕자, 대신이나 관리와 같은 권력자. 다음으로 이교도, 문학자나 음악가, 격투인 등 세상에 오락을 제공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오락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또 찬드라라고 하는 천민 계층의 사람들이나 짐승을 기르거나 어업과 사냥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 이와 같은 세속의 사람들을 자진해서 가까이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상대방이 찾아왔을 경우에는, 마음에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즉 어떤 대가도 바라지 말고 법을 설해 줘라”고 강조한다. 이어서 성문(聲聞) 2승(二乘)의 출가자 및 그 남녀 신도를 가까이해서는 안 되며 또 성적(性的) 능력이 결여된 남성과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상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인데 맨 마지막, 성적 능력이 결여된 사람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불교교단에는 원래부터 성적으로 건전한 남자가 아니면 승단(僧團)에 들어올 자격을 얻을 수 없었다. 곧 출가 수행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성욕이 없거나 성적으로 불구여서 불능(不能)인 사람은 불도(佛道) 수행에서 성욕이 왕성한 사람보다 깨달음에 더 가깝지 않을까 하고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욕망과 마찬가지로 성의 욕망도 극복할 수 있어야만 해탈 열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성적으로 불능인 사람은 불교 수행 길에서는 결격자로 규정되어 왔다. 이상과 같은 배경에서, 수행자가 아닌 가르침을 받는 쪽의 사람에 대해서도 성적으로 건전해야할 것을 요구한 것이리라. 이 대인관계에서는 이상과 같이 가까이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열거하고 있는 것 외에 또 나이 어린 제자나 사미(沙彌) 및 어린애 등을 기르지 말라고 한다. 여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하고 있다. 이것도 앞의 성 문제(性問題)와 연관되는 것이지만 그 근본은 어떤 경우에도 욕망의 생각(欲想)을 가지고 접근치 말라는 것이다. 성의 문제는 불교교단에서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출가수행자의 계율(戒律) 맨 처음에 바라이죄(波羅夷罪)로서 불음계(不淫戒)가 두어져 율(律)의 문헌에 갖가지 사례가 설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바라이(波羅夷)란 파라지카(parajika)의 음사(音寫)인데 ‘함께 살지 못한다’고 하는 뜻으로, 비구가 승단(僧團) 또는 그 결계(結界)에서 떠나가야 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은 모두 초심의 보살 즉 초발심의 보살이 가져야할 마음과 몸가짐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출가자의 본분은 독신(獨身)이어야 한다. 출가라는 말은 가족을 가지지 않아야 함을 말하는 것으로 특히 중국의 유가(儒家)에서는 제가(齊家) 즉 집안을 다스리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데 불가(佛家)에서는 집안을 포기하는 것이라 하여 비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온갖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우선 본능적으로 집착하는 근친자로부터 해방되어야 하기 때문에 출가자는 가정을 버리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금욕(禁欲), 아니 극욕(克欲)이라 해야 맞을 것이다. 그런데 근자에 와서는 신출가(身出家)보다도 심출가(心出家)가 더 위라 하여 출가자들이 가정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은 대승(大乘)이라는 이름 아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면에서부터 위반하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리하여 남방불교인 상좌부불교(上座部佛敎)에서는 북방불교 즉 이른바 대승불교(大乘佛敎)를 비불교(非佛敎)라고 규정짓고 있음에 대해 조용히 반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본다. 다음에는 앞과는 반대로 친하고 가까이해야할 것이 있으니, 그 첫번째는 ‘항상 좌선(坐禪)을 부지런히 하고 한적한 장소에서 그 마음을 다스려라’고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공(空)의 입장에 서서, 있는 그대로를 관찰하라’고 하는 것이다.
혜사스님, 4안락행 수행 규범으로
日蓮 스님 “몸과 마음 ‘空’에 두라”
첫번째 안락행인 신안락(身安樂), 즉 보살의 몸가짐에서는 어떤 일에도 참고 견디며, 몸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가까이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좌선(坐禪)에 정진해야 한다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를 제13장 ‘권지품’과 비교하면 매우 소극적인 처신이라는 느낌이 든다. ‘권지품’에서는 “내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다만 위 없는 깨달음만 아낀다(我不愛身命但惜無上道)”고 하며 인욕의 갑옷을 입고 <법화경>을 넓히는데 매진하는,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설해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와 같은 결연한 모습은 없다. 이것은 다음의 구안락행(口安樂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천태는 “이 네 가지 안락행은 초심의 얕은 행을 하는 보살을 위해 설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는 삼론종의 길장(吉藏)도 똑같다. 즉 “초심의 보살이란 사실 사바세계에서 이 <법화경>을 전파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 다른 국토에서 <법화경>의 홍통을 지원한 5백의 아라한, 8천의 성문들을 말한다. <법화경>에 의해서 보살이 된 이들은 아직 경험이 없어 위대한 보살로서의 힘을 갖추지 못했다. 이 사람들에게 사바세계에서의 경전 홍통에 대한 마음가짐을 설한 것이 바로 안락행이다”라고 <법화의소(法華義疏)> 권10에서 말하고 있다. 두 번째의 안락행이란, 천태가 구안락행(口安樂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왜 이렇게 이름했는가 하면 그 내용이 언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홍통자가 <법화경>을 남에게 설하거나 경을 읽어줄 때에는 사람이나 경전에 대해 그 허물을 지적하거나, 다른 법사를 경멸하지 말며 남의 장단점을 말하지 말라, 사람들에게는 부드러운 얼굴로 설하라, 질문을 받았을 때에는 대승으로써 답하라 등과 같이 말이나 태도에 대해 설하고 있다. 세번째의 안락행은 몸(身)·입(口)에 이어서 의안락행(意安樂行)이라 부른다. 이것은 주로 홍통자의 마음가짐에 대해 설한 것으로서 타인에 대해 질투, 거짓말, 아첨, 경멸 등의 마음을 품지 말며 다른 수행자의 장단점을 거론치 말라, 희론(戱論)으로써 남과 다투지 말라고 설한다. 그리고 홍통자는 모든 사람에게 대비심을 일으키고 모든 부처님에게는 자애로운 아버지(慈父)라는 생각을, 보살에 대해서는 큰 스승(大師)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설한다. 이와 함께 법을 설할 경우에는 어느 한 사람을 편애하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설하라는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있다. 마지막 네번째의 안락행을 천태는 서원안락행(誓願安樂行)이라 이름한다. 그것은 홍통자에게 <법화경>에 의한 중생 제도의 서원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은 출·재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에게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자기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에는 그 모든 사람들을 <법화경> 속으로 이끌어들이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고 설한다. 이상의 첫번째부터 네번째까지가 4안락행이다. <법화경>은 “말법시대에 이 <법화경>을 넓히는 사람은 이 네 가지의 몸과 마음가짐, 즉 마음을 닦음에 의해 그 설법에 과실이 없어, 출가수행자나 재가의 국왕을 비롯하여 브라흐만·거사 등 온갖 계층의 사람들에게도 존경과 찬탄을 받는다. 만일 사람들에게 어려운 질문을 받더라도 천신들이 밤낮으로 항상 그를 지켜 줄 것이다” 라고 설한다. 천태 지의대사의 스승인 남악혜사(南嶽慧思: 515∼577) 스님은 중국 남북조 말기에 강학(講學)불교로 변화한 당시의 불교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좌선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불교를 강하게 제창하였으니 그 때문에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정도의 박해를 받은 사람이다. 그는 <법화경>을 보살의 실천 수행을 설한 경전으로 보고 특히 ‘안락행품’을 그 실천 불교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의 저서 <법화경안락행의(法華經安樂行義)>는 법화삼매(法華三昧)라는 <법화경>에 의거한 제법실상을 관(觀)하는 삼매행(三昧行)을 설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그는 4안락행을 보살 수행의 규범으로 파악하고 이를 무상행(無相行)이라 이름했다. ‘무상행’이란, 항상 좌선을 행하고 일체법공(一切法空)의 입장에서 몸을 두게 하는 수행을 말한다. 그는 이 4안락행에 의거하면서 다시 독자적인 해석을 하여 적극적인 절복(折伏)의 근거로 삼았다. 그리고 이 혜사 스님의 ‘법화삼매’는 제자인 지의 스님에게 이어져 그의 저서 <법화삼매참의(法華三昧懺儀)>에서는 이 4안락행이 그 행법으로서 채용되었다. 일본의 니찌렌(日蓮)은 이 14장의 4안락행을 절복, 즉 강제적으로 인도하는 행법이 아니라 섭수, 즉 온화한 태도로 인도하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말법의 악한 세상에서 널리 유통케 하는 것은 섭수가 아니라 절복역화(折伏逆化)에 있다”고 하여 섭수를 부정한 것이다.
비밀장…가장 얻기 힘든 경전의미
악마는 수행 방해 마음속 번뇌 표상
<법화경>은 4안락행을 설한 다음 ‘계중명주의 비유’를 통해 <법화경>이 모든 부처님 여래의 비밀장(秘密藏)으로서 가장 얻기 어려운 경전이라는 점을 말한다. ‘계중명주’ 즉 ‘상투 속의 밝은 구슬’에 관한 비유는 아래와 같다. “만주슈리(文殊)여, 비유하면 강력한 전륜성왕이 그 위력으로 여러 나라를 평정하려 하지만 여러 나라들은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왕이 직접 토벌에 참가한다. 왕은 전공(戰功)을 세운 장병에게 각각 그 공로에 알맞게 여러 가지의 상을 내린다. 그러나 전륜성왕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상투 속에 있는 훌륭한 보배만은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보배구슬은 임금만이 상투 속에 비밀히 감추고(秘藏) 있는 것, 즉 왕위(王位)를 상징하므로 만일 그것을 주면 다른 왕들이 “왜 왕위를 남에게 줄까?” 하며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만주슈리여, 여래의 경우도 이와 같다. 여래는 선정(禪定)과 지혜의 힘으로 진리의 국토를 얻은 전세계(全世界)의 왕이다. 그러나 많은 마왕은 진리의 왕에게 복종하지 않으므로 진리의 왕은 부하인 수행자의 여러 장군을 마군(魔軍)과 싸우게 한다. 이 싸움에서 전과(戰果)를 올린 수행자에게는 다시 많은 가르침을 설하여 그들을 기쁘게 한다. 또 여래는 해탈과 번뇌에 물들지 않는 소질의 힘이라는 진리의 재물(法財)을 그들에게 나누어 준다. 포상을 받은 그들은 번뇌를 멸하여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기뻐하지만 그래도 여래는 이 <법화경>을 설하지 않는다. 만주슈리여, 전륜왕이 자기의 상투 속에 감추어 두고 누구에게도 주지 않았던 밝은 구슬을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주려고 하는 것처럼 여래도 또한 마음 속의 악마인 탐냄· 성냄· 어리석음의 세 가지의 독(三毒)을 멸한 위대한 수행자에게도 일찍이 설하지 않았던 <법화경>을 지금 여기서 설하려 한다. 만주슈리여, 왜냐하면 이 <법화경>은 일체 중생을 훌륭하게 여래의 지혜에 도달하게 하지만 그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는 도리어 원수가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사람들이 믿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까지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래는 지금 이 경을 여기서 설한다. 만주슈리여, <법화경>은 여래의 가장 높은 설법이며 수많은 설법 가운데서 가장 깊은 비밀의 가르침이므로 가장 최후에 그대들을 위해 자세히 설하려 한다.” 이 ‘계중명주의 비유’에 등장하는 악마란 불도 수행을 방해하는 마음속의 번뇌를 표상한 것으로서 이 악마를 극복하는 것을 ‘항마(降魔)’라고 한다. 석존의 전기(傳記)에 의하면 석존께서 깨달음을 완성하려고 보리수 아래 앉아 있을 때, 갖가지의 악마가 나타나 협박하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며 석존의 깨달음을 방해하였지만 석존께서는 그 습격을 참고 견디며 결국에는 악마를 굴복시키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때의 석존께서 취하신 좌선(坐禪)의 자세는 가부좌(跏趺坐)인데 오른손을 아래로 왼손을 무릎 위에 두었다. 이를 항마좌(降魔坐)라 하고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려 두번째 손가락으로 대지(大地)를 가리키는 모습을 하였더니 악마가 물러갔다고 하여 이 두 손의 모양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 이름한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악마가 밖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 속에는 부처와 범부가 함께 살고 있으니 이를 선가(禪家)에서는 ‘불범동거(佛凡同居)’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와 범부는 모두 인격체가 아니며 부처는 불성(佛性)을, 범부는 인간성(人間性)을 비유한 말이다. 따라서 불성과 인간성은 원래 이질적이거나 다른 차원의 것이 아니라 동일성의 것이니 이것이 대승불교의 사상이다. 윤리의 세계에서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선악과 정사(正邪)의 현상을 상대적으로 보고 선과 악, 정(正)과 사(邪)를 서로 싸우게 하여 선과 정이 악과 사에 이기도록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선과 악, 정과 사를 서로 적대적(敵對的)인 것으로 여기지 않고 동거(同居)하는 것으로 여겨 나란히 앉게 하여 선과 악, 정과 사를 하나의 몸(一體)으로 지향한다. 이리하여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진리(法)는 곧 중생심인데 그 중생심 속에 진여심(眞如心)과 염심(染心)이 있다”고 하며 의상대사(義湘大師)의 <법성게(法性偈)>에서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이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 정사를 한몸으로 하여 그 위치를 향상시키려면 양자를 싸움에 의하지 않고 정과 선이 각각 사와 악을 조어(調御), 즉 컨트롤하여 정리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실천하는 것이 불교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땅에서 솟은 보살들
땅 갈라지며 ‘큰 뜻 구도자’ 솟아
무명 깨고 일어난 부처님 제자들
범본(梵本) <법화경> 제14장 ‘구도자(菩薩)들이 대지(大地)의 갈라진 틈새에서 출현했다’는 것을 <묘법연화경>에서는 ‘종지용출품제십오(從地涌出品第十五)’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종지용출품’에서는 첫머리에 6만 갠지스강의 모래(恒河沙) 만큼이나 되는 수없이 많은 구도자(菩薩)들이 땅속에서 돌연히 출현하여 이 사바 세계에서 <법화경>을 지키고 간직하며 넓히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 법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땅 속에서 솟아난 구도자들에 대해 당연히 놀라고 의심하는 마음을 품는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참으로 이 구도자들이야말로 내가 옛날부터 교화한 사람들임을 밝히지만, 사람들은 성도한지 불과 40여 년밖에 되지 않으신 석존께서 어떻게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을 교화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처님께 그 까닭을 해설해 주소서 하고 간청한다. 이것이 이 15장의 줄거리인데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품은 의문은 다음의 ‘제16장 여래수량품’에서 밝혀진다. 그러므로 이 15장은 구성상에서 다음 ‘여래수량품’의 도입부에 해당하며 또한 ‘여래수량품’을 설하기 위한 복선이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법화경>을 성립사상(成立史上)의 관점과는 달리 그 형태상으로 보면 ‘제14장 안락행품’과 ‘제15장 종지용출품’과의 사이에서 둘로 나누는 것이 중국이래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특히 천태지의(天台智 )가 전반(前半) 14품을 적문(迹門), 후반(後半) 14품을 본문(本門)이라고 부른 이후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본(本)’·‘적(迹)’이라는 글자의 뜻은 ‘근본’과 ‘흔적’이라는 의미인데 원래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編)’에 나오는 ‘적(迹)’, 즉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과, ‘적하는 까닭’, 즉 그것을 생하게 하고 나타나게 하고 있는 근원적인 바탕(本)이라는 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이 15장에서부터 <법화경>의 본문(本門)에 들어간다.
이 15장의 첫머리에서는 타방(他方)의 국토에서 온 6만 갠지스강 모래 수보다 더 많은 구도자, 즉 보살들이 “만일 저희들에게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도 이 사바세계에 있으면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이 <법화경>을 지켜 간직하고 읽어주고 외우며 쓰고 베껴서 공양할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참으로 이 국토에서 널리 <법화경>을 설할까 합니다”라고 말씀드린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그만두자, 선량한 남자들이여, 그 뜻은 고맙지만 그대들이 <법화경>을 지키고 간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거느리는 이 사바세계에는 6만 갠지스강 모래 수만큼이나 되는 위대한 뜻을 세운 구도자가 있으며, 그 하나 하나의 구도자에게는 각각 6만 갠지스강의 모래와 같은 숫자의 제자들이 있어, 이 여러 사람들이 내가 멸도한 뒤에 <법화경>을 지켜 간직하고 읽어주고 외워주며 널리 설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사바세계 전체의 땅이 모두 진동하면서 벌어지더니 그 속에서 한량없는 천 만 억의 큰 뜻을 세운 구도자들이 동시에 솟아 나왔다. 그 구도자들의 몸은 황금색으로 서른 두 가지의 위대한 사람이 갖는 모습(大人相)을 갖추었으며 무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상의 줄거리에서 <법화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이 사바세계는 만주슈리(文殊)·사만타바드라(普賢)·아바로키테스바라(觀音)·마이트레야(彌勒)와 같은 관념상의 보살이 아닌 사바세계의 사람들에 의해 교화되고 구제되어야 한다. 즉 지구 속에서 솟아 나온 구도자들, 무명을 깨고 일어난 사람들은 석존의 제자이기 때문에 석존의 가르침을 넓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며, 이 사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세계의 중생과 연(緣)이 깊어서 <법화경>을 넓히는 것이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새로 등장하는 네 사람의 위대한 구도자(四大菩薩)란, 모두 행(行)을 위주로 하는 구도자이므로, 앞으로 <법화경>을 설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할 구도자는 행을 통하여 구제해야 하며, 훌륭하게(上行), 끝없이(無邊), 청정하게(淨), 그리고 꿋꿋하게(安立) 행(行)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바세계에서 <법화경>을 설할 사람들은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누구라도 한결같이 훌륭하게 끝도 없이 항상 맑고 깨끗하며 꿋꿋하게 굽히지 않고 <법화경>을 설해야 할 것이다. 즉 세간 법에 물들지 않음이 마치 연꽃이 물에 있음과 같아야 한다.
아비 젊고 아들 늙은 비유
구도자들 지용보살 존재 의심
부처님 “먼 옛날부터 대중교화”
금빛으로 빛나는 부처님만이 갖춘 서른 두 가지의 특별한 모습(三十二相)을 가진 위덕있는 구도자(菩薩)들이 땅 속에서 솟아 나왔다. 이 구도자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사바세계 아래의 허공 가운데 머물러 있었으나, 석가모니불께서 자기들에게 중생 교화를 맡긴다는 음성을 듣고 아래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다. 이 구도자들 가운데 네 사람의 도사(導師)가 있었다. 첫째의 이름은 뛰어난 행을 하는 상행(上行)이요, 둘째의 이름은 끝없는 행을 하는 무변행(無邊行)이요, 셋째의 이름은 깨끗하고 맑은 행을 하는 정행(淨行)이요, 넷째의 이름은 확고한 행을 하는 안립행(安立行)이다. 이 네 분의 구도자는 대중의 우두머리로서, 앞에서 그들을 인도해 가는 지도자였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 구도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 모인 대중들은 이 땅 속에서 솟아난 지용(地涌) 보살(菩薩)의 출현이라고 하는 전대미문의 사실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함과 동시에 한결같이 의문을 품었다. 도대체 이 구도자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그들이 오게 된 연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들은 누구에 의해서 교화되었으며 또 어떤 법을 간직하고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동의 의문을 구도자 마이트레야(彌勒)가 대중을 대표하여 부처님께 질문한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지용 보살들은 부처님인 내가 이 사바세계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은 후에 교화한 사람들이며, 그들은 나의 법, 즉 <법화경>을 배워 익히기를 밤낮으로 정진하며 사바세계의 아래쪽 허공 가운데에 머물고 있던, 오랜 옛날부터 내가 교화해 온 구도자들이다. 이 사실을 일심으로 믿어야 한다.” 이 말씀을 들은 구도자 마이트레야를 비롯한 대중들은 한층 더 의혹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계시는 석가모니불께서는 출가하여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여시고 붓다(佛陀)가 되신 지 불과 40여 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천만억겁이라는 세월에 걸쳐 가르쳤어도 가르칠 수 없을 만큼의 구도자들을 교화해 왔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듭 구도자 마이트레야는 이 의문을 비유를 들어 부처님께 질문한다. “머리털은 검고 얼굴과 살결이 고운 25세의 젊은이가 백발에 주름투성이인 100세의 노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내 아들이다’ 하고, 그 노인도 ‘이 분은 내 아버지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일을 세상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는 것처럼 지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고 여쭙는다. 이것이 ‘아비 젊고 아들 늙음의 비유’이다.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석가모니불께서 이렇게 많은 지용의 보살들을 교화해 왔다는 사실이 커다란 놀라움이며 의문이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진실한 말씀만을 하신다고 믿으면서도 마이트레야는 후세의 보살들이 이 <법화경>을 의심하고 법을 깨트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 부처님께 “그 까닭을 말씀하소서” 하고 간청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마이트레야의 최초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지용보살들이 머문 곳과 교화의 스승, 그리고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가르침에 대해 대답하셨다. 그 대답 가운데의 게송 맨 끝에 “내 아득한 옛날부터 이 대중들을 교화해 왔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성도한 이래 40여 년, 현재 이렇게 대중 앞에서 <법화경>을 설하며 나이 80에 입멸하시는 석존이 실제로는 우주가 시작된 아득한 옛날부터 수명을 계속 유지하며 교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이트레야는 물론 현재의 우리들도 이 점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편 이 눈앞의, 나이 80에 입멸하는 우리와 가까운 석존이 실제로는 아득한 옛날부터 수명을 유지하며 지금에 이르렀음을 밝히는 것을 ‘개근현원(開近顯遠)’, 즉 가까운 것을 열어서 먼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 이러한 사실은 35세 성도(成道) 80세에 입멸(入滅)이라는, 현실의 석존에 대한 종래 사람들의 부처님에 대한 생각을 뿌리에서부터 변혁시키는 것이 된다. 한량없는 수명의 부처님이란 어떠한 존재이며 80세에 입멸하시는 현실의 부처님과는 과연 어떤 관계일까. 부처님의 신체에 관한 문제가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이에 대한 해설이 다음의 ‘여래수량품’이다. 즉 수량(壽量)이라는 말을 바꾸어 말하면 ‘무량수품(無量壽品)’이 되므로 지난날의 법화천태종에서는 <나무묘법연화경>이 아닌 <아미타불>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우주탄생~소멸까지의
‘영원한 절대 진리’를 인격화한 것
‘제2장 훌륭한 수단’이라는 ‘방편품(方便品)’이 이론적이며 공간적으로 사물의 참모습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면 이 ‘제16장 영원한 생명’의 수량품(壽量品)에서는 종교적이며 시간적으로 부처님(즉 진리)의 본체(법신, 法身)를 밝힌 것으로서, 이 두 장은 둘이면서 하나임과 동시에 하나이면서도 둘, 즉 불이이이(不二而二) 이이불이(而二不二)인 상즉(相卽)의 관계이다. 앞의 ‘제15장 종지용출품’에서 구도자 마이트레야(彌勒)를 대표로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품고 있는 놀라움과 의문에 대해 부처님께서 대답하는 것이 16장 ‘여래수량품’이다. 첫머리에 부처님께서는 세 번에 걸쳐 “그대들은 여래의 진실한 깨달음의 말을 똑똑히 듣고 이해하여 굳게 믿도록 하라”고 강조하셨다(‘三誠’). 이에 대해 대중들도 역시 세 차례에 걸쳐 “세존이시여, 원하고 원하오니 그 진실을 설해 주소서. 저희들은 반드시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겠습니다”라고 간청하고(‘三請’) 다시 한번 더 청한다(‘重請’).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를 받아 “그대들은 여래의 본체(‘如來秘密’)와 자유자재한 능력(‘神通之力’)을 자세히 들어라”고 하시며(‘重誠’) 비로소 설법을 시작한다. 이렇게 3성3청(三誠三請) 중청중성(重請重誠)의 형식을 거친 후 말씀하신 부처님의 설법 내용은 지금까지의 석가모니불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그 밑바닥에서부터 흔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물론 부처님의 본체에 대해서는 <법화경>의 개경(開經)인 <무량의경(無量義經)> ‘덕행품(德行品)’에서도 이미 밝힌 바가 있지만 그때는 시간성(時間性)에 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무량의경>에 의하면 무량의(無量義)에는 체무량(體無量)과 용무량(用無量)이 있다. 부처님의 본바탕(‘法身’)은 한량없이 크기 때문에 체(體)가 무량하다는 것이니, 다시 말해 오직 한정된 우리들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현상 세계 속에 있는 진실한 모습, 즉 현상 세계와 겹쳐서 존재하는 ‘실재’의 세계인 실상의 본체(‘佛’)는 헤아릴 수 없는 아주 무한한 것이므로 ‘그 본질은 한량이 없다’고 한다. 또 실상, 즉 부처님이라는 단 하나의 진실한 세계, 다시 말해 절대의 세계(‘無爲’)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모든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근본인 ‘실상(佛)’의 ‘작용(用)’ 또한 무한하여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복잡 미묘하기 때문에 ‘작용(用)이 무량’한 것이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절대진리를 인격화한 것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 몸을 나타내신 석가모니세존을 부처님이라 하고, 또 영원히 불멸하는 상주(常住)의 법신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이 둘을 두고 의아심을 품는 경우가 바로 앞장의 ‘종지용출품’에서의 미륵보살을 비롯한 대중들의 경우이다. 물론 석가세존도 부처님이시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진리의 부처님도 부처님이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인도에서는 깨달은 분(‘覺者’)을 붓다(佛陀: buddha), 즉 부처님이라 했고 또 붓다란 진리에서 왔다하여 여래(如來: tathagata)라고 했다. 이는 변화하는 현실상(現實相)의 본래적인 상태, 즉 현실상의 진리는 변화하는 것이지만, 이 변화한다는 것의 영원상(永遠相) 혹은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진리는 절대 불변하는 것(이를 무위(無爲)라 한다)이므로 이를 일반적으로 ‘여(如: tatha: 있는 그대로)’ 라든지 ‘진여(眞如: tathata: 있는 그대로의 상태)’라고 부르며 부처를 여래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든지, 신성한 것이기 때문에 불가침이라고 말하며 핵심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제행(諸行)은 무상(無常)이다’고 하며 이 세상의 만물만상은 ‘변화’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세속적인 진리는 ‘변화한다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진리란 변화하지 않는 것(‘不變’)인데 변화하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틀림없이 반문하겠지만, ‘이 변화한다는 진리는 영원토록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는 불변한다는 것이다’ ‘공(空)’ 또는 ‘공성(空性)’이라는 것은 ‘변화’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무릇 세상 모든 것은 변화하는데 이것은 공성, 즉 실체(實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변화하는 것을 지탱하고 있는 것, 즉 불변하는 ‘그 절대’,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절대적 진리’를 인격화한 것이 부처님이다. 그렇다고 ‘공’이 부처님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부처님의 본체는, 아득한 그 옛날 즉 우주가 생겨나서부터 마지막날까지 영원토록 항상 있는 절대 진리를 이름하여 우리는 부처님이라 한다
여래수량품 제16 영원한 생명
현실의 모든 부처님은 무량수불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도 한 부처
“그대들은 여래의 진실한 깨달음의 말을 똑똑히 듣고 이해하여 굳게 믿으라”고 말씀하신 석존께서는 이제서야 비로소 설법을 시작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천신과 아수라도 모두 ‘지금의 석가모니불이 출가 후에 가야성 부근에서 성도(成道)하여 정각(正覺)을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의 붓다(‘覺者’)인 석가모니불은 아득한 구원(久遠)의 옛날에 성도하여 이미 한량없고 끝간데 없는(‘無量無邊’) 백천만억(百千萬億) 나유타(那由陀) 겁(劫)이라고 하는 한없이 길고 긴 시간이 경과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성불하여 지금까지에 이른 시간을 5백진점겁(五百塵點劫)이라고 하는 비유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즉 “어떤 사람이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의 3천 대천세계를 부수어 아주 작은 가루로 만들었다고 하자. 그 분말을 가지고 동쪽으로 날아가 5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번째의 별을 지날 때마다 한 미립자(微粒子)씩을 떨어뜨리면서 계속 날아가 마침내 그 미립자를 모두 떨어뜨렸다고 하자. 그대들은 과연 얼마만큼의 천체(天體)를 거쳐왔는지 머리로 생각할 수 있겠으며 헤아려서 그 수를 알 수 있겠는가? 그 미립자를 떨어뜨린 세계와 그저 스쳐지나 갔을 뿐 그 미립자를 떨어뜨리지 않은 세계를 합해서 다시 부수어서 가루로 만들었다고 하자. 그리고 그 미립자 한 개를 1겁이라고 가정한다면, 내가 성불하고서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은 그 미립자 수와 같은 겁에다가 다시 백천만억 나유타 아승지 겁을 더한 세월이 지난 것이다”라고 한다. 우리들은 흔히 아득한 옛날을 이야기 할 때 ‘호랑이 담배 먹든 시절에’ 또는 ‘옛날 옛적에’라고 표현하지만 인도사람들은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실감나게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즉 나유타(那由陀)는 10의 11제곱이고 아승지는 무앙수(無央數)를 말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무시(無始)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부처님의 이 설법을 듣기 이전까지의 모든 사람은 물론 천신들이나 아수라(이 셋을 삼선도(三善道)라고 함) 등도 눈앞의 석가모니불은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나고 똑같이 나이 들어갔으며 이윽고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갈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실은 아득한 옛날에 이미 성불해 있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기나긴 시간동안 석가모니불은 항상 이 사바세계에 계시면서 설법교화를 계속해 왔다고 한다. 이것이 종래의 부처님의 몸(‘佛身’)에 대한 인식의 일대 변혁(一大變革)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수량품’의 설법에 의해서 80세 입멸하는 현실의 석가모니불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다시 말해 한량없는 생명을 가진 부처님임을 밝힌 것이다. 이 ‘수량품’의 설법에서 밝혀진 영원한 부처님을 ‘구원(久遠)의 본불(本佛)’이라 하며 본불이란 적불(迹佛)에 상대한 말이다. 우리들과 똑같이 태어나 멸해 가는 부처님의 근본적인 뿌리(‘本源’)에 영원 불멸의 부처님이 계시고, 이 불멸하는 부처님의 응현(應現)이 현실의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생각 끝에 생겨난 것이 본불이다. 구원에서부터 불멸의 부처님은 중생 교화를 위해 여러 가지로 몸을 나타내어 “만일 어떤 중생이 나에게 찾아오면 나는 부처님의 눈(‘佛眼’)으로 그 사람의 신근(信根) 등이 날카로운가 둔한가를 관찰하고 어떻게 가르치면 깨달음을 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수단을 생각한 후, 그들에게 알맞도록 가지가지의 다른 부처님의 이름을 들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부처님들의 이름이 같지 않고) 또 그 부처님의 연대가 크고 작아 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 가르침을 설하고 나면 또다시 이 세상에서 떠나(‘涅槃’)리라는 것도 말한다”라고 설한다. 그러므로 영원 불멸의 부처님을 본불이라 하고 거기에서 응현하여 현실에 몸을 나타내어 법을 설하는 부처님을 적불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본불이나 적불이라고 하는 본적(本迹)의 두 부처님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 불멸한 부처님인 본불이 수승한 것이 아니며 그 응현인 생멸의 모습을 취하는 적불은 보다 한 단계 가치가 낮은 것이라고 하는 우열론(優劣論) 등은 <법화경>의 참뜻에서 벗어난 것이다. <법화경>에는 원래 ‘본’이나 ‘적’이라는 말은 전혀 설해 있지 않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의 구체적인 석가모니불이 그대로 영원 불멸의 부처님, 즉 수명이 한량없는 부처님인 무량수불(‘阿彌陀佛’)이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아직껏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법화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진리의 나타남
석가불은 적불·화신불·응신불
세상 모든 현상은 본불의 화현
이 ‘16장 여래수량품’에서 부처님께서는 구도자 마이트레야(‘彌勒’)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들은 극히 깊고 오묘한 여래의 본체(‘秘密’)와 자유자재(‘神通’)한 능력(‘力’)을 들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부처님이란 생신(生身)의 석가모니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 다시 말해 이름 붙일 수 없고 그림으로 나타낼 수 없는(‘名不得 相不得’) 진리를 임시로 이름지어 부처님이라 한 것이다(그러므로 부처님이라는 말도 가명(假名), 즉 일시적인 이름이다. 왜냐하면 부처님도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 즉 변해 가는 존재(‘法空’)이기 때문이다). 앞에 설명했듯이 법이라는 말 자체가 변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부처님의 본성은 변하는 것이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말이 바로 ‘비밀(秘密)’이라는 말이다. 천태는 비(秘)란 1신 즉 3신(一身卽三身: 法身·報身·應身)인 것, 밀(密)이란 3신 즉 1신(三身卽一身)인 것, 다시 말해 1신과 3신의 상즉(相卽)을 ‘비밀’이라 해석하여 <법화문구>에서 이를 “지금까지 설하지 않았던 것을 ‘비’라 하고,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을 ‘밀’이다”라고 설명한다. 또 삼론종의 길장도 그의 저서 <법화의소 권10>에서 말하기를, “지금까지 설한 바가 없는 것을 ‘비’라 하고 그 감춰져 온 법이 매우 깊기 때문에 ‘밀’이라 한다”고 하여 천태의 <법화문구>와 그 해석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법상종의 자은대사(慈恩大師) 기(基)는 해석을 조금 달리 하는데, <법화현찬 권9>에서 그는 “법신과 보신의 2신(二身)의 본성이 심묘(深妙)하므로 ‘비밀’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에 ‘신통(神通)’이란, 천태에서는 법·보·응 3신의 작용을 ‘신통지력(神通之力)’으로 해석하고, 길장은 부처님의 수명이 장원함을 짧게 나타낸 것이 ‘신통’이라 하며, 자은대사는 화신이 중생으로 응해서 나타나는 작용이 ‘신통’이라고 해석한다. 길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불신론(佛身論)에 의한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신통지력’의 원어는 가지력(加持力) 또는 위신력(威神力), 즉 신비한 힘이라는 뜻이다.‘아설연등불등(我說燃燈佛等)’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크다. 연등불이란 과거세에 출현하여 석존에게 성불의 예언(‘授記’)을 하신 부처님이신데 정광(錠光) 또는 보광(普光)이라 번역된다. ‘제1장 서품’에서는 묘광(妙光)에게 교화되어 차례 차례로 성불한 일월등명불(日月燈明佛)의 여덟 왕자 중 최후에 성불한 분이 연등불이라고 설하고 있지만 이 연등불과 석존의 관계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 않다. 이 ‘아설연등불등’이라는 말은 쉽게 지나칠 글귀가 아니기 때문에 예로부터 두 가지 해석이 있어 왔다. 그 첫번째는 “내(‘釋迦佛’)가 연등불 등이라 설해 왔다”라고 하는 뜻으로 해석하는 설, 즉 연등불 등의 부처님들은 본불인 석존이 중생 교화를 위해 방편으로 나타난 응현불(應現佛)이며 본래는 석존과 동체(同體)라고 하는 설이다(천태 이전의 해석과 자은대사의 <현찬> 등). 이 설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두번째의 해석은 연등불과 석가는 별도의 부처님이라는 설이다. 이 해석은 천태의 학설인데 천태는 앞의 해석을 비판하여 배척하고, <법화경> 이전의 경에서는 석가불은 연등불 아래서 수행하고 연등불로부터 성불의 수기를 받았다고 설해져 있으나 그것은 모두 방편으로써 실설(實說)은 아니며 종래의 석가(‘迹’)에 대한 인식을 개혁시키기 위한 것이 <법화경>이 바라는 글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경을 해석하면 ‘아등연등불등’의 뜻은 “나(‘釋迦佛’)는 연등불 등의 일을 설해 왔다”라고 하는 의미가 되고, 이런 경우에는 첫번째의 해석인 연등불이 곧 석가불이라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 연등불과 석가불은 별도의 부처님이 된다. 그러나 범문(梵文)에서는 “선남자여, 나는 그 동안 디판카라여래 등을 칭찬해 왔다”라고 되어 있어 “내가 연등불 등을 설해”라는 첫번째 설이 타당한 해석인 듯하다. 결론적으로 법신에서 법이란, 변화하는 능력(‘功能’)을 말하고, 이 법이 의지하는 자체를 몸(‘身’)이라 한다. 몸이란 마음(‘淸淨一心’)을 말하고 이를 세간에서는 진여·부처님·우주의 대생명 또는 본불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종래에는 석가모니불만을 가리켜 부처님이라 생각해 왔으나 그 석가불은 본불, 즉 대생명 또는 비로자나불이 일시적으로 변화해서 나타난 적불(迹佛)이며, 적불은 화신불 또는 응신불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본불의 화현임을 말하고 있으니,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초초(花花草草)가 부처(‘如來’) 아닌 것이 없다. 이로써 우리 모두는 여여불(如如佛)임을 알아야(‘覺’) 한다. 이것이 바로 ‘여래수량품’이 가지고 있는 진면목이다.
여래수량품 제16
부처님 세계, 중생 세계
깨친 사람엔 현세가 극락정토
일체의 현상 마음이 만든 허상
원래 이 세상은 부처님이 보는 세계나 중생이 보는 세계나 어디까지나 절대 평등하여 똑같은 세계이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들은 큰불이 나서 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지만, 부처님의 세계는 언제나 안온하여 천신과 인간들이 넘쳐흐르며 수 많은 놀이동산과 아름다운 누각에다 보배로 이룩된 산과 들에는 나무마다 꽃과 열매 무성하여 중생들이 놀며 즐긴다. 천신들은 북을 치며 갖가지 음악 연주하고 만다라꽃비 내려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뿌린다. 나(부처님)의 정토는 항상 이와 같이 허물어지지 않건만 중생들은 불에 타 없어진다고 생각하며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괴로움에 가득 차 있다(我此土安穩 天人常充滿 園林諸堂閣 種種寶莊嚴 寶樹多華果 衆生所遊樂 諸天擊天鼓 常作衆伎樂 雨曼陀羅華 散佛及大衆 我淨土不毁 而衆見燒盡 憂怖諸苦惱 如是悉充滿)”고 ‘여래수량품’은 노래하고 있다. 이 노래는 허공법회(虛空法會)에서 본불(本佛)인 구원실상의 부처님(‘眞理’)께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사람 등 다섯 갈래의 마음을 모두 없애고 오직 향상된 마음만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설한 것이다. 예로부터 <법화경>을 설한 장소는 두 곳이며 법회는 세 번 열렸다 하여 2처3회(二處三會), 즉 2막3장(二幕三場)이라 한다. 그 세 번의 법회 가운데 두번째의 법회가 이 허공법회인데 인간의 마음을 공, 즉 제일의공(第一義空)의 세계로 끌어올렸음을 비유하여 허공이라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허공이란 ‘없다’ 또는 ‘허망’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일체 만법이 실체가 없는 공성임을 아는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말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인간 이하의 마음이 지배하고 있다면 이 <법화경>을 설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공을 아는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衆生心’)속에는 진여심(眞如心)과 염심(染心)이 평등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밖으로 표출되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며 둘이 동시에 표출되지 않는다. 이렇게 표출되는 것이 하나라는 것은 생각이 하나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을 연으로 하느냐에 따라 정(淨)과 염(染)의 행이 생기므로 의상대사는 <법성게>에서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 한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을 반야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이 허공법회이다. 이렇게 허공법회에 동참한 사람들은 모두 마음이 공의 경지에 사무쳐 해탈을 하였고 동시에 너와 내가 본래 하나임을 알았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이들을 향해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은 극락정토이며 너희들(‘衆生’)이 착각(‘顚倒’)된 눈으로 보는 세계는 너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 즉 극락과 지옥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상즉(相卽)된 것인데 그 어느 한쪽만 보고 지옥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올바로 보지(‘正見’) 못하고 삿되게 보는(‘邪見’) 것이니 중도(中道)로서 보면 나(‘佛’)와 같이 실상을 볼 수 있다. 즉 빛이 부처이고 부처가 빛인 것이다. 깨친 사람의 눈에는 현실 그 자체가 모두 빛(‘光明’)이니 이 세상이 극락정토인데 어디에서 극락을 구하려 하느냐고 말씀하신다. 부처님은 3계의 참모습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나고 죽고 하여 기필코 변화하는 것이나, 그것은 현상 위에서 만 분의 일에 불과하며 여래의 눈으로 그 속에 있는 실상(불변의 진리, 즉 마음)을 보면 모든 것은 사라지지도 않고 나타나지도 않으며 모든 생명체는 그대로 살아있을 뿐 이 세상에 있다든지 혹은 세상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본래 없으므로 눈앞의 사물이 실제로 있다고 보는 것도 잘못이며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이다. 또 사물이 항상 변화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생각함도 미혹이지만, 그렇다고 현상만 보고 상주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함도 얕은 소견이다. 여래는 3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그와 같은 생각을 초월해 그 속에 있는 실상을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결코 잘못 보는 일이 없다. 일체의 현상(‘事物’)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지만, 깨치지 못한 중생은 저마다 각기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으며 제각기 다른 욕망, 자기의 주관에 의해 분별하는 습성이 있으므로 항상 이렇게 착각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진리(‘佛’)는 항상 이 세상에 있으면서 방편을 가지고 교화를 계속해 왔다. 이와 같이 진리는 항상 이 우주가 처음 시작되면서부터 존재해 왔고 또한 영원하기 때문에 항상 이 세상에 머물고 있어 없어(‘滅’)지는 일은 없다. 결론적으로 진리는 영원한 것이다. 진리는 고통이 아니고 즐거움(‘樂’)이며 진리는 부처님(‘我’)이며 진리는 청정1심(‘淨’)이며 조화(‘寂滅’)된, 즉 평등한 모습인 것이다.
의사와 아들의 비유
충격요법으로 미혹에서 깨어나게
의사=석존, 묘약=불법, 아들=중생 의미
이 ‘여래수량품’에는 ‘훌륭한 의사의 비유’ 또는 ‘의사와 아들의 비유’라 불리는 유명한 비유가 설해져 있는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어떤 이름난 의사가 있었는데 그는 아무리 어려운 병도 거뜬히 고쳤다. 그는 또 많은 아이들을 둔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여행을 떠난 사이에 아이들이 무엇인가에 중독되는 불행한 일이 생겼다. 때맞춰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아버지의 모습을 본 아이들은 괴로워하는 가운데서도 기쁘게 아버지를 맞이하며 “저희들의 고통을 빨리 치료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한다. 아버지인 이름난 의사는 아이들이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보기만 해도 깨끗하고 향기도 좋은 약을 만들어 “빨리 마셔라”고 아이들에게 권한다. 증상이 가벼운 아이는 곧바로 마시고는 즉시 나았다. 그러나 증세가 무거운 아이는 독이 몸 속에 깊이 스며들어 마음도 평정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약의 색깔이나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다며 먹으려 하지 않았다. 훌륭한 의사인 아버지는 어떻게 하면 중증의 아이들이 약을 먹을 마음을 일으킬까 고심한 끝에 한 가지의 방법을 생각해 낸다. 그는 “나는 늙었으니 머지않아 죽을 것이지만 울며 슬퍼하지 말라. 여기 내가 조제한 약을 둘 것이니 마시고 싶어지면 마셔라”는 말을 남기고 먼 여행길에 오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는 거짓 소식을 전한다.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들은 슬퍼하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가 최후에 남긴 말씀을 생각해 낸 아이들은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약을 마실 마음이 생겨나서 약을 먹고는 간신히 병이 나았다.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여행에서 돌아와 건강을 되찾은 아이들을 보고 기뻐했다. 명의인 아버지가 주는 약을 거부하는 중증 환자인 아들의 이야기는 극히 단순한 비유처럼 생각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의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들은 의지할 곳 없는 외로움으로 인해 생긴 슬픔이라는 충격에 의해 비로소 미혹에서 깨어난다고 하는 점이다.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서 석존은 이렇게 가르친다. “내가 언제까지나 살아있다면 사람들은 어느 때라도 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언제까지라도 가르침을 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이 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한 방편으로, 매우 드물게 이 세상에 출현한다고 설한다.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놀라고 슬퍼하며 나의 가르침을 들으려 할 것이다.” 이 석존의 말씀을 통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서 ‘이름난 의사’는 석존, ‘중독된 아이들’은 미혹한 우리들, 그리고 ‘묘약’은 훌륭한 가르침임을 알 수 있다. “어버이의 돈이 항상 내 곁에 있다고 생각지 말라”고 하는 말도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의 해석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어느 시대라도 아이들은 아버지를 어려워하고 아버지의 잔소리나 훈계를 귀찮게 생각하지만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가 중요함을 알게 된다. 이 비유도 이러한 일을 밑에 깔고, 병석에서 신음하는 아이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가까스로 아버지가 조제해 준 약(가르침)을 생각해 낸다고 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다음으로 “독이 몸에 깊이 스며들어 마음도 평정을 잃고 있기 때문에 약을 먹을 생각이 없다”고 하는 구절에서는 현대인의 많은 정신적 고뇌를 읽을 수 있다. 우리들은 머리가 아프거나 몸에 열이 나면 스스로가 이를 알고 즉시 약을 먹거나 의사의 치료를 받기도 하여 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방지한다. 그러나 난치병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믿고 있는 가운데 병세가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했을 때는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라고 하는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되는 것을 우리는 매일처럼 보고 듣고 한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잘못이다” 하는 자각 증상을 느낄 경우에는 사죄나 참회에 의해 그 죄과를 가볍게 할 수 있지만 나쁜 일을 하면서도 나쁜 일을 했다고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즉 자의식이 없는 사람처럼 구제하기 어려운 사람은 없다. 마치 자각증상이 없는 병이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처럼 죄의식이 없는 악행은 본인의 인간성 상실이라는 중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두 분의 석존
事의 석존 육체가진 유한생명 존재
理의 석존 불생불멸 구원의 법신불
세 번째로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복선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양약(良藥)을 병든 아들에게 남긴 채 여행길에 올라 객지에서 “죽었다”고 알리는 명의인 아버지라는 석존과, 아이들이 완쾌된 것을 알고 귀국하는 아버지라는 석존과는 ‘다른 차원의 석존’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이 비유는 육체를 가진 역사상에 존재하는 유한(有限)한 생명을 가진 인간 석존과 육체를 갖지 않고 역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진리(法, 법) 상징으로서의 석존이라고 하는, 다시 말해 구원(久遠) 실성(實成)의 석존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석존이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생신(生身)의 석존에 대한 신앙에서 진리를 몸으로 하는 고차원적인 석존에 대한 신심(信心)으로 몸을 바꾸(轉身, 전신)라고 하는 가르침이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 가득 채워져 있다. 즉 인격적인 석존 신앙에서 법(진리)인 석존에 대한 신심을 권장하는 가르침이 이 비유에 설해져 있다. <법화경>의 설정에 의하면 이때의 석존은 여든 살에 가깝고 입멸 직전의 시점으로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쟈그리하(왕사성) 밖에 있는 영축산에서 이 ‘수량품’을 설하고 있다. 석존으로서는 유한한 자기에 대한 인격신앙에서 자기가 깨닫고 또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법신심(法信心: 진리를 믿는 마음)으로 차원을 높이는 가르침을 설하는 것이 마땅히 최후의 설법이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다. 이 심원(深遠)한 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우선 ‘의사와 아들의 비유’를 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죽지 않은 아버지를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문제가 남는다. 석존과 제자들은 이 점에 대한 다음과 같이 문답을 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의사가 방편을 사용한 것을 거짓말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없습니다”고 제자가 대답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나도 아득한 옛날에 성불하여 지금까지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나는 죽을 것이다’ 하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리 그대로 말한 것이어서 거짓말 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한다. 이처럼 <법화경>에는 두 사람의 석존이 등장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한 사람은 말할 필요조차 없는 역사상의 석존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나 육체를 갖춘 역사상의 석존을 ‘사(事實, 사실)의 석존’이라 하여 공경하고 이 사(事)의 석존이 깨달은 법을 ‘이(眞理, 진리)의 석존’이라 하여 신심의 대상으로 삼는다. 사의 석존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므로 우리들과 똑같이 멸하는 시간적인 존재이다. 지금 석존께서는 “나는 죽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진리 그대로를 말한 것이어서 거짓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대로이다. 이(理)의 석존은 사(事)의 석존과는 달리 육체가 없으므로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불생불멸의 구원(久遠)한 존재이다. ‘또 한 분의 석존’이란 이 불멸의 이(理)인 석존을 말한다. 이렇게 사의 석존과 이의 석존이 같은 ‘석존’이라는 이름으로 <법화경>을 설하고 있다. 이 사(事)와 이(理)라고 하는 두 사람의 석존에 대한 관계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예를 들면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은 1643년에 태어나 172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인력은 뉴턴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했고 뉴턴이 사망한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한다. 여기에 임시로 인간 뉴턴을 ‘사의 뉴턴’이라 하고 그 만유인력을 인격화하여 ‘이의 뉴턴’이라 부른다면 어떠할까. 두 사람의 석존에 대한 관계와 내용이 서로 다름도 이해될 것이다. 이(理)의 석존은 법의 인격체이므로 ‘법신불(法身佛)’이라 한다. 이 법신불은 모습이 없으므로 우리의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수량품>에서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법신불인 석존이 눈에 비치는 인간인 석존의 모습(相, 상)으로 나타난(應, 응) 것으로 믿어 사(事)의 석존을 ‘응신불(應身佛)’ 또는 ‘화신불(化身佛)’이라 부른다. 응신이란 몸을 나타내는 것, 화신은 법신이 육신으로 변화하는 것을 뜻한다. 중국의 천태는 이(理)의 석존, 즉 법신의 석존을 본지(本地: ‘근원’이라는 뜻)의 부처님으로서 ‘본문(本門)의 석존’이라 하며 ‘문(門)’이란 총합(總合)이라는 뜻으로 모든 진리나 가르침이 본문의 석존으로 통일·총합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본문의 석존을 신심(信心)의 대상으로 삼는다. 또 천태는 사(事)의 석존, 즉 역사상의 석존을 ‘적문(迹門)의 석존’이라 하는데 ‘적(迹)’이란 인간으로 나타난 모습이라는 뜻이다. 법신의 석존·본문의 석존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점에서 인격 신앙이나 수상숭배를 초월한 ‘수량품’의 사상적인 깊고 오묘함이 여기 있다.
법은 아득한 과거와 현재를 거쳐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존재
천태 대사는 <법화경> 28품을 둘로 나누어 전반 14품을 적문의 가르침, 후반 14품을 본문의 가르침이라 분류했다. 즉 전반은 붓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여신 ‘사(事)의 석존’의 설법이며 후반은 ‘수량품’에서 나타내 보이는 ‘이(理)의 석존’의 설법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수량품’ 이후는 인간 석존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설법한다는 법이 법을 설한다고 하는 지금까지 전혀 없었던 사상이 전개되고 있다.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진리임을 깨달은 석존이 진리의 몸으로 설법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적문의 석존’ 혹은 ‘법신·응신의 석존’이라고 한다면 역사상의 석존과 진리인 석존으로 2분화되어 마치 순위가 정해진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이 2분화의 인상을 하나로 정리하는 것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이다. 여행에서 병든 아들 곁으로 돌아와 약을 만들고 다시 여행길에 나서서 “죽었다”고 전했던 석존은 적문의 석존이며, 아이들이 완쾌한 후 귀국한 석존은 본문의 석존이다. “사망했다고 전했으나 참으로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라고 하는 말 속에 ‘두 사람의 석존’의 1인화를 느낄 수 있다. 아이들, 즉 미혹한 사람들은 아버지(적문의 석존)의 사망에 의해 미혹에서 깨어나니 비로소 아버지(본문의 석존)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의사와 아들의 비유’는 적문의 아버지와 본문의 아버지를 동일 인격으로 본다. 교리 상으로는 사(事)와 이(理)의 두 사람의 석존으로 나누어 설하지만 궁극에는 사와 이의 석존을 한 분의 석존으로 신봉하는 이지불이(理智不二)의 부처님이다. 법을 설하는 부처님은 아득한 옛날에 보살도를 행하고 성불한 보신의 석존이며, 법을 설하는 마음은 법신의 부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의사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왔다”는 대목은 기독교의 ‘부활’과는 전혀 그 의미가 다르다. 즉 부활은 인간이 죽은 후에 다시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지만 이 비유에서의 아버지는 참으로 죽은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알린 것은 적문의 석존의 사망을 뜻하지만 적문의 석존에 깃들어 있는 깨달음의 진실, 즉 본문의 석존(법신)은 불멸인 것이다. 앞의 “보게 하였다”라고 하는 것은 만난다는 것을 뜻하므로 여기서 부처님을 뵙게 되었다는 것이니 바꾸어 말해서 깨달음을 얻음, 즉 마음의 눈이 열렸다는 뜻이다. <법화경> ‘수량품’에서 말하는 구원의 생명이란 요컨대 법(진리)을 말한다. 법·진리는 아득한 과거로부터 현재를 통해서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므로 “법(佛)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여래수량품’이라는 말이 바로 ‘무량수품’이라는 말을 바꾸어서 한 말이다. 그리하여 이 본문의 부처님인 법신불은 수명이 한량없어 “때로는 다른 부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타나므로 그 이름이 같지 않고 세상에 머무는 시간도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반야(般若)의 공(空) 사상, 즉 법공(法空)을 이해한다면 쉽게 이해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법신불은 이름이 없다. 흔히 <화엄경>의 비로자나불이 법신으로 알고 있는 분이 많지만 사실은 비로자나불도 보신불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아득한 옛날에 보살도를 행해 마치고 성불한 부처님이기 때문에 보신불인 것이다. 왜냐하면 법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보신불인 노사나불은 동일한 이름의 바이로차나를 음역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도 법신의 부처님, 즉 본불도 석가모니불이요, 법을 설하는 보신불도 석가모니요, 응신불도 석가모니불이라고 하는 것이며 단지 그 수명이 아미타라는 것이다. 3즉1(三卽一)이요 1즉3(一卽三)은 바로 법신에는 보신과 응신이 구족되어 있고 응신에는 법신과 보신이 갖추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화경>이 일승(一乘) 사상에 일관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삼승(三乘)을 일승으로 귀일시킨 것이 아니라 만법(萬法) 동귀(同歸)를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이든 회교이든 유교이든 도교이든 이 세상의 어떤 종교 및 어떤 사상이든 이를 통일하는 사상이 <법화경>이요, ‘묘법(妙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