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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불교의 계율 수용과 변용 / 원영상
기자명 원영상
입력 2013.03.08
특집 | 불교와 계율
1. 시작하는 말
불교의 계율은 불타의 열반 이래 승단과 그 구성원들의 정통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불교 역사에서도 이러한 자의식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다. 아시아의 변토(邊土)에서 계율을 매개로 불법의 근본정신과 지역성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줄기차게 고민해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불교의 초기 역사에서 계율은 국가와의 관계에서 그 자율성을 담보 받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후에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불교의 독창성을 낳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곧 불법의 토착화를 의미하는 동시에 민중을 응시하는 시기상응(時機相應)의 불교라고 하는 일본불교 특유의 전통을 확립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불교의 독자성을 내세우기에 앞서 한국의 입장에서는 근대 식민지의 경험을 거치면서 일본불교가 한국불교계에 끼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과연 일본불교에서 제국주의적 상황에 의한 근대적 접촉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제하고 본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렵겠지만 이 점을 견지하면서 일본불교를 계율 수용과 그 변용 과정의 측면에서 간략하게나마 더듬어 살펴보고자 한다.
2. 고대 일본불교의 계율
1) 감진(鑑眞)의 도일(渡日) 이전의 상황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고대 아스카시대에 백제의 성왕이 서기 552년에 일본에 금동상, 번개(幡蓋), 경론 등과 함께 불법을 전했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외래의 신인 마레비토가미(客神)를 둘러싼 소가(蘇我)씨와 모노노베(物部) 씨족의 싸움은 불교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왕권마저 좌지우지하는 정치적 패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마침내 외래의 문물을 통해 자신의 기반을 다지고자 한 소가씨의 승리로 돌아간다.
국가권력에 대한 불교의 상징적인 역할을 실질적으로 확립한 이는 쇼토쿠(聖德, 574~622) 태자였다. 그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유불도의 대륙사상을 기초로 일본 최초의 헌법인 ‘17조 헌법’을 제정하였다. 불교와 관련하여 제2조에는 “삼보를 돈독히 경배하라. 삼보는 불법승이다. 즉, 사생(四生)이 마침내 돌아갈 곳이며 만국의 으뜸가는 조종(祖宗)이다. 어느 세상 어떠한 사람이 이 법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랴. 매우 악한 사람은 적으므로 능히 가르쳐 그것을 따르게 할 수 있다. 삼보에 돌아가지 않으면 무엇으로 굽은 것을 바르게 하랴.”고 하였다. 삼보야말로 통치의 철학을 담보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에 의한 이러한 불교의 점유는 삼보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고유의 승단을 형성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고대국가에서 불교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진호(鎭護)국가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불교의 통제를 의미했다. 민간포교는 전면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승려의 자격과 배출은 국가기관이 담당했다. 민간포교로 이름을 드날린 교키(行基, 668~749)의 등장이야말로 국가와 불교의 자율성이라는 관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아마도 《범망경》의 가르침을 따라 민중구제의 역할을 불교의 소임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역할은 국가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마침내 수도인 나라(奈良)의 동대사(東大寺) 건립의 핵심 인물로 민중의 권진(勸進)을 담당하게 되었다. 국가가 범죄자로 낙인찍은 승려의 도움으로 마침내 고대국가 체제의 상징을 완성한 것은 향후 일본불교의 역사의 진행방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고구려 승 혜편(惠便)에 의해 출가한 젠신니(善信尼)는 그의 제자 2명과 함께 588년 백제로 건너가 계율을 배우고 590년에 귀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한반도에서 도일한 승려들이 늘고 있음에도 여법한 계율의 수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초기 일본불교인들의 계율에 대한 의식의 희박성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국가가 장악한 승려의 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당시의 국가가 배출하는 관승은 정원이 10명이었다. 이러한 득도자를 연분도자(年分度者)라고 하였다. 물론 천재지변이나 국왕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여 특별히 득도시키는 임시도자(臨時度者)도 있었다. 천태종의 계단원이 세워지기 전인 고대 중엽까지는 이러한 연분도자의 정원제를 고수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중세 신불교가들이 흑의를 전형으로 했던 것에 비해 백의를 입은 모습이었다. 이들 출가 희망자는 추천의 과정인 공진(貢進)을 거친 후 시경(試經)이라는 선발 과정을 통해 전문교학에 대한 시험은 물론 《법화경》이나 《최승왕경》을 음과 훈으로 읽을 수 있는지도 함께 테스트를 받았다. 여기에 불교 전통의 3사7증제는 확립되지 않았다. 수계는 불살생, 불투도, 불음, 불망어 등 10계를 받았다. 이렇게 하여 관도(官度)를 받으면 도첩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당시의 국가가 세워 운영하는 사찰에서 근무하거나 호국법회에 봉사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민간승려의 수계는 주로 자서계(自誓戒)였다. 자서계는 주로 위경인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 경에는 삼취계(三聚戒)를 자서하면 ‘바라제목차 출가지계(波羅提木叉 出家之戒)’를 얻는 동시에 비구·비구니의 이름을 얻을 수 있다고 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반적으로는 《유가론》에 의한 자서수계가 이루어졌다고도 보고 있다. 여기에는 보살의 일체계에는 재가와 출가의 분계(分戒)가 있다고 보고 이 이분정계에는 삼취계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이 보살의 삼취계에는 다른 이로부터 계를 받는 종타정수(從他正受)와 스스로 행하는 자서계가 허락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족계를 얻었다는 사도승(私度僧) 교키는 스승 도코(德光)로부터 이러한 삼취계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불교 사상의 민간 침투로 인해 숙업에 따른 죄업의 인식이 깊어지고, 이에 따라 자서계는 참회의 계기로 삼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고대 후반기인 헤이안(平安) 시대에 이르러서는 병환은 물론 수명을 연장하는 의병(依病)출가의 풍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특히 임종에 이른 사람이 승려를 초빙하여 삭발 후에 출가를 단행하기도 하였다.
나라 시대의 불교에 대한 국가통제의 정점은 승니령(僧尼令)의 제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 ‘도승격(道僧格)’에 입각하여 제정된 승니령은 고대국가의 기본법인 대보율령(大寶律令, 701년)의 제정 시에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승려의 일반 생활에 관련된 규칙을 보여주고 있다. 승니령은 먼저 불교 교단의 규제적 성격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 전체는 27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1조에서 7조까지의 금지 조항을 어겼을 경우에는 바라이죄에 해당하는 환속에 처해졌다. 환속 이후에도 속법에 의한 처벌도 규정하고 있다. 이 외에도 천문에 의한 재액이나 길흉의 점복, 무술(巫術), 소속 사원 이외의 도량 건립이나 민중교화를 엄하게 금지하였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사원 내의 청소, 사경 등의 벌에 처해졌다. 또한 여기에는 관승 체계인 삼강(三綱)의 의무조항이나 규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내용은 소승사분율과 대승범망계의 계율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감진의 계율 전파와 그 영향
일본불교의 계율 역사에서 감진(鑑眞, 688~763)의 도일은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불교체제로부터 불타의 전법 계승이라는 결정적인 전환을 통해 불교 교단의 독자적인 수계의식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승려들의 질서를 계율수지를 통해 확립하려는 국가의 의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점을 감안해도 불교 교단 전체를 통틀어 첫 정식수계라는 역사적 의미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감진의 행적을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남도육종(南都六宗) 가운데 율종을 통해 그 전후 상황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감진의 도일 전인 고대 중엽에는 남도육종이라고 불리는 학파가 형성되었다. 국가공인의 학단인 셈이다. 삼론종, 성실종, 법상종, 구사종, 화엄종, 율종은 수도 각각의 대사찰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율종은 감진의 도일 이전 일본 계율의 연구 상황을 잘 보여준다. 견당사의 일원으로 처음 중국에 들어간 도코(道光, 653~678)는 중국에서 유행하던 사분율 관계의 문헌을 다수 수집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의사분율초찬록집》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도유(道融)에 의해 남산율의 도선(道宣)이 지은 《사분율행사초》가 강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율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승려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정식수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원흥사(元興寺)의 류손(隆尊, 706~760)으로 그는 승려의 신분은 10사(師)에 의한 수계에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여론을 계기로 비로소 중국에서 계사를 초청하게 되었다.
한편 이 외에도 여기에는 국내 사정이 있었다. 당시에는 승니령에 의한 불교 통제에 정부가 힘을 쏟고 있던 때기도 했다. 그러나 민간은 물론 왕이나 왕족에 의한 불교의 제병이나 주술적 효험에 기대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임시도자의 성행은 물론 학업이나 계율과는 무관한 승려를 대량으로 배출하여 관승의 질적 저하를 가져온 것이다. 정부는 득도허가를 경전 암송 외에도 정행(淨行) 3년 이상의 조건을 내걸기도 했지만, 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승니 대책마저 그 효과를 잃어가고 있었다.
감진의 일생은 제자 사탁(思託)에 의해 기록된 〈당대화상동정전(唐大和上東征傳)〉(779년)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일본왕의 칙명으로 파견된 요에이(榮叡)와 후쇼(普照)는 전계사를 초청하기 위해 20년 동안 당에 체재하면서 양주 대명사(大明寺)에 주석하고 있던 감진의 승낙을 얻어냈다. 753년, 65세의 감진은 법진(法進), 사탁(思託) 등의 제자들과 함께 일본 견당사의 귀국행 배에 올랐다. 일본에 계율을 전파하기로 결심한 이후 11년간 6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것이다.
이듬해에 동대사 대불전 앞에 계단(戒壇)을 세우고 승려를 비롯하여 상왕과 왕 및 귀족들 440명에게 처음으로 10사에 의한 보살계를 수여했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지 200여 년이 지나 정식 수계의식을 정비하는 한편 10사가 연대서명한 계첩(戒牒) 제도를 확립하였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불교의 발달이 가장 뒤처졌던 일본의 승려들은 중국에서 사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는 불교로 연계된 국격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감진의 활동은 전국적으로 알려져 각지에서 수계를 위해 승려들이 몰려들었다.
국가에서는 법진으로 하여금 동서의 후쿠오카와 토치기 지방에 각각 관세음사(觀世音寺)와 약사사(藥師寺)에도 계단을 세워 계율 보급을 확대했다. 동대사를 합쳐 이 세 곳의 국립계단을 천하의 3계단이라고 불렀다. 동대사에서는 《사분율》에 입각한 3사7증의 수계식을, 나머지 두 곳에서는 3사2증의 방식으로 수계를 행했다. 그 이유는 계사가 적었기도 했지만 지방과 차별을 둠으로써 국가의 통제를 용이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럼에도 전국의 요지에 계단을 설립함으로써 명실공히 불교 교단의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이다.
감진은 도선의 남산율종을 승계했으며, 《사분율》을 중시하는 한편 삼취정계의 수지를 주장하였다. 그는 도선의 제자인 항경(恒景)으로부터 율종을 배운 후, 40세 무렵에는 전계사로서 명성을 날리며, 중국에서 이미 4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수계를 행하였다고 한다. 승의(僧醫)이기도 한 그는 대승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비전원(悲田院)을 세워 노인과 고아를 비롯한 빈민구제에도 심혈을 쏟았다. 그리고 말년에는 계율의 근본도량으로 삼은 나라의 당초제사(唐招提寺)에 주석하며 많은 율사를 길러 냈다. 승속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수계받을 수 있도록 율학의 도량으로 삼은 것이다. 감진의 뒤를 이어 동대사 계화상 제1세가 된 법진은 《동대사수계방규》 《사미십계위의경소》 《범망경소》를 저술했다.
감진의 새로운 수계제도는 종래의 자서수계에 익숙해 있던 승려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수계권이 비록 정부로부터 계사에게로 이행되었지만 득도권이나 승니명부의 관리는 여전히 국가 권한에 속해 있었으므로 승려의 승관으로서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국가관리 체제에 반기를 든 사람은 일본 천태종의 종조인 사이초(最澄, 767~822)였다.
감진은 천태학자인 항경으로부터 사사한 것으로 보아 천태사상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도일 전에 천태산 국청사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사탁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천태의 서적도 다수 가져왔다. 그가 세운 동대사의 계단은 공·무상·무원(無願)의 3공(空)을 의미하는 3중의 형식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계단 위에는 불사리 대신 다보탑을 안치했다고 한다. 훗날 사이초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천태의 독립계단을 확립하는 것과도 깊은 인연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사이초(最澄)의 원돈계(圓頓戒)와 계단원 설립
고대 후반에는 현재의 교토(京都)인 헤이안으로 수도를 이전(794년)하면서, 약 400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변화가 이루어진다. 전기에 확립된 율령제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왕권은 약화되고, 공경(公卿)에 의한 합의제, 섭관정치, 원정(院政)시대로 이어지면서 말기에는 마침내 무사들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각종의 난이 일어났다. 불교계는 사이초와 쿠카이(空海, 774~835)의 등장으로 종합불교인 천태종과 진언종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사이초는 국가 사찰인 국분사(國分寺)에 들어가 유식과 선법을 배우고 정식 승려가 되었다. 804년 견당선에 올라 9개월간 천태산 등지를 역방하며 원선계밀(圓禪戒密)이라고 하는 소위 4종상승을 받고 귀국 후 천태종을 세웠다. 사이초의 천태종 독립은 남도6종으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그 대표주자였던 법상종의 토쿠이치(德一)와의 논쟁은 그것을 잘 보여준다. 토쿠이치가 《불성초(佛性抄)》를 지어 《법화경》은 방편의 가르침인 권교(權敎)일 뿐이라는 설을 펼쳤다. 법상종의 5성각별설에 근거하여 대승의 실유불성론은 《법화경》의 방편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이초는 《조권실경(照權實鏡)》 《수호국계장(守護國界章)》 《법화수구(法華秀句)》 등의 저술로써 《법화경》의 삼승 구별은 방편일 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일승사상을 설하고 있다고 논파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기존에 계단을 독점하던 남도 사원들의 기득권 주장이기도 했다. 수계작법을 통한 승려가 되기 위해서는 감진이 설립한 동대사의 계단이 중심이 된 대사찰의 지원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사이초는 818년 소승 2백50계의 폐기를 과감하게 선언함과 동시에 히에이산에 대승계단을 건립하기로 결심하였다. 마침내 천태종 연분(年分) 학생에게 대승계를 수여하여 보살승임을 선언하였다. 이어 12년간 산에서 두문불출하는 농산수행(籠山修行)을 하도록 하는 육조식(六條式)을 제정해 국가의 허가를 청했다. 여기에는 천태종의 연분도자 2인을 독자적으로 교육하여 수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팔조식(八條式)을, 다음 해에는 대승계의 독립을 주장한 사조식(四條式)을 올렸다. 이 삼식의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은 국가 관장의 계단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대승교단의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남도의 학단불교와는 다른 주체적인 입장에서 천태종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중앙 승관의 요직에 있던 남도의 종파들은 처음에는 묵살하다가 사이초가 사조식을 제출함과 동시에 대표적인 7대 사찰의 의견을 모아 격렬하게 비난했다. 사이초는 《현계론(顯戒論)》을 저술, 반론을 폈다. 더욱이 승려를 국왕이 통제하는 것은 정도에 어긋난다는 반론을 제기하기까지 하였다. 대승계단 독립 주장은 사이초의 생전에 실현되지 못하고 사후 7일이 지나 왕의 칙허를 통해 인정받았다. 다음 해인 823년에 새 수계제도가 시작되고, 5년 뒤에 마침내 연력사에 천태계단원이 만들어졌다. 비로소 독립교파를 이루고 그 교세는 헤이안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남도북령(南都北嶺)의 형세를 갖추게 되었다.
사이초의 수계 의식은 원돈계였다. 《범망경》에서 설하는 계의 근원으로 불성계(佛性戒)를 이념으로 한 위에 구체적인 계의 조목은 10중48경계로 구성된 삼취정계였다. 그 이름은 천태의 법화사상에 의한 것으로 천태원종의 승려로서 신분적 자각을 유도한 것이다.
이러한 천태의 계단에 대해 후대에는 감진에 의해 확립된 엄격한 계율준수를 완화했다는 비판도 생겨났다. 구족계를 준수해야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조건이 무너진 것은 사실이다. 천태종이 구족계를 준수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상을 전면에 내세움으로 인해 고대 말기부터 무계율화가 급속이 진전되었다는 비난은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3사7증제를 폐지함과 동시에 전계사 한 명의 입회하에 정식 수계를 인정한 것은 이 문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사이초는 형식적인 행동규범으로서 계율을 철폐하는 대신 내면적인 신앙심을 강조하는 계율로의 이행을 강조했다. 또한 중대한 계율을 범하더라도 참회 또는 회심을 통해 죄가 용서되고, 다시 계를 수지함으로써 불교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는 사상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 인간은 물론 초목까지도 불성을 구유하고 있다고 하는 천태본각론(天台本覺論)이라는 교의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는 번뇌구족의 중생이 그대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일체중생실유불성의 대승적 교의는 사이초의 시대에 이르러 무계율화를 촉진시키고 천태종의 가르침이 세속화되는 길을 터준 셈이 되었다. 이는 중세 신불교의 탄생에도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불법승 3보 각각의 종파화를 시도한 신조사들은 전수(專修)라는 입장에서 계율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날 한국의 불교인들이 지적하는 일본불교의 식육대처 일반화가 이 시대에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중세불교의 성립과 이후 근대에 이르는 긴 여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이기도 하다.
한편, 중국에서 진언밀교를 전수받은 쿠카이의 경우에는 《비밀만다라십주심론(秘密曼茶羅十住心論)》과 이의 요약본인 《비장보약(秘藏寶鑰)》을 저술하여 밀교 우위의 교상판석을 주장하고, 《즉신성불의(卽身成佛義)》 《성자실상의(聲字實相義)》 등을 통해 즉신성불 사상을 세워 진언종의 교학체계를 확립하게 된다. 그는 《승화유계(承和遺誡)》에서 승려로서 계를 지킬 것은 물론 승가의 화합을 위해서 규정을 어길 경우에는 행위가 비루한 악인이라고까지 주장했다. 또한 《십송율》을 근본으로 삼아 제자들을 지도하였는데 밀교와 관련해서는 독자적인 삼매야계(三昧耶戒)를 남겼다. 후기 밀교에서 보는 무상유가계(無上瑜伽戒)가 그것이다. 쿠카이의 《비밀삼마야불계의(秘密三昧耶佛戒儀)》에서는 삼마야계를 극도로 간략화하고 한 번에 한 사람만이 수계하도록 하였다. 전통적으로는 관정의 의식에서 소승계, 대승계, 삼마야계 전체를 차례로 받게 되어있으나 현재는 관정의 도사가 계율을 전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며, 이들 차례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다.
고대 밀교는 차츰 왕실은 물론 남도 대사원의 밀교화를 촉진하여 천태와 더불어 현밀체제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히에이산은 승려의 학당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중세 신불교 조사들 대부분이 천태로부터 독립하게 되는 종파불교의 모태가 되었다.
3. 중세 신불교의 발생과 계율
1) 신불교 조사들의 사상과 계율관
헤이안 중기에 이르면 말법사상의 유행과 함께 정토교가 일어났다. 본격적인 출발은 천태정토를 지향한 겐신(源信, 942~1017)이었다. 그의 《왕생요집(往生要集)》은 정토사상의 확산에 불을 붙였다. 후기에 이르면 대사원은 장원영주화와 함께 사병을 거느리며 사원 세력 간 무력충돌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중세 신불교의 등장은 국가와 승단 내 정세의 불안에 기인한 말법 및 말세관의 유포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직접적으로 권력에 밀착한 현밀체제와 민중의 괴리감이 조사들의 불법정신을 눈뜨게 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말법사상과 관련하여 중세 신불교의 등장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이초가 전해졌다고 알려진 《말법등명기(末法燈明記)》로, 말법시대에는 계를 지니지 않은 승려야말로 세상의 등불로서 존중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비록 위서이기는 하지만 말법시대에 들어온 일본불교계의 깊은 절망과, 동시에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한계를 절실히 체화한 사람은 정토종의 조사 호넨(法然, 1133~1212)이다. 그의 전수염불은 남도북령 대사원의 반발을 일으켰다. 그를 이단으로 비난한 〈흥복사주상(興福寺奏狀)〉 9개조 가운데 제7조에는 다양한 염불 가운데 오직 칭명염불에만 편중한 것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호넨의 계율관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지혜제일의 호넨방(法然房)으로 부를 정도로 천태 삼대부의 문리에 통달하였다. 정토교의 교의와 천태의 원돈보살계를 전수받은 후 선지식을 찾아다니던 중 《왕생요집》을 보고 도작과 선도의 저작에 연원하여 오직 염불만을 주장하는 전수염불(專修念佛)에 귀의하였다. 그는 《선택본원염불집(選擇本願念仏集)》에서 종래의 제행왕생의 폐해를 시정하고 선업과 계율의 수지 등을 믿음에 의한 칭명염불 한 가지 행으로 귀결시킨 것이다.
호넨의 제자 신란(親鸞, 1173~1262)은 이를 더욱 체화하여 오직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 이미 구제되었다고 하는 신심의 염불을 주창하였다. 이를 따르면 현생에서 왕생의 인(因)인 정정취(正定聚)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신란은 자신을 비승비속이라고 칭하고 계율이 없다는 계율부정론 사상을 견지했다. 그가 결혼하고 승려의 삶을 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그의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을 설한 《탄이초(歎異抄)》에서 “선인도 구제될 수 있는데 하물며 악인이겠는가.”는 종래에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사나 사냥꾼 같은 직업을 가지 사람들이 살생할 수밖에 없는 삶에 안심과 희망을 주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무계를 주장한 신란의 철저한 신심위본, 타력회향의 사상은 일본 최대 종파인 정토진종 구제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염불행을 실천으로 심화시킨 잇펜(一遍, 1239-1289)은 백일참롱 중에 중생의 정토왕생은 신(信)·불신, 정(淨)·부정과 관계없이 아미타여래의 명호에 의해 정해진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6자 명호 그 자체에 구제의 힘이 있다고 보고 이 명호가 새겨진 부산(賦算)을 주면서 포교하였다. 믿음이나 서원 등도 불필요하고 오직 이 염불만으로도 왕생한다고 한 것이다. 그는 처자식을 거느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포교의 장으로 삼았다. 여기에 전통적인 지계의식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음은 선종으로 먼저 에사이(榮西, 1141~1215)는 히에이산에서 천태교학과 밀교를 배우고 중국에서 임제종 황룡파의 선을 전수했다. 귀국 후 《흥선호국론》의 저술로써 선을 흥하게 함은 곧 호국임을 주장하였다. 총 10장 중 제1장에는 계율을 지켜 청정하면 불법은 영원히 상주한다는 것을 밝혔다. 선은 계율의 도움으로 인해 불법을 흥륭시키고 영구히 존속시킬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후 《일본불법중흥원문》을 지어 세속화된 불법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승원의 규칙인 선의 청규로써 계율을 부흥시키고, 진언밀교의 주력으로써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불타의 정계를 보유하는 것이야말로 불선(佛禪)이라고 하며, 《범망경》에 의한 천태원계만이 아니라 사분계를 포함한 대소승의 2계를 지킬 것을 주장한다. 천태종 담연(湛然)의 《지관보행전홍결(止觀補行傳弘決)》을 빌려 대소승의 2계는 여래선에 들어가는 방편이라고 한다.
한편 조동종의 조사 도겐(道元, 1200~1253)은 1225년 천동 여정(天童如淨)의 제자로 입실하고 3년간 정진 중 깨달음을 얻고 지관타좌(只管打坐)의 선을 설파했다. 참선만이 신심탈락을 경험하고, 수증일여의 깨달음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는 《호국정법의》를 지어 자신이 전파하고자 하는 불조정전의 선이야말로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정법임을 주장하고 말법사상이나 염불과 기도 등의 행위를 엄격히 배격했다. 그는 영평사(永平寺)를 열어 조동선의 근본도량으로 하고 이곳에서 10년간 주석하며 《정법안장》을 저술하였다. 마지막 설법은 불타의 열반 시의 설법인 《유교경》에 입각하였다. 8대인각(八大人覺)인 소욕(少欲), 지족(知足), 낙적정(樂寂靜), 근정진(勤精進), 불망념(不忘念), 수선정(修禪定), 수지혜(修智慧), 불희론(不戱論)을 설하며 “여래의 제자는 반드시 이것을 익혀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는 자는 불제자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중국의 선원청규가 일본에는 맞지 않는다고 보고 백장청규에 기반한 《영평청규(永平淸規)》를 제정했다.
마지막으로는 열렬한 《법화경》 신앙자로 알려진 일련종의 니치렌(日蓮, 1222~1282)이다. 그 히에이산에서 《열반경》의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불타의 가르침에 의해 자신이 평생 의지할 유일경전으로 《법화경》을 선택한다. 그는 석존을 본문의 본존, 나무묘법연화경 7자를 본문의 제목, 그리고 법화행자의 참회수계 도량으로 본문의 계단이라고 하는 3대 비법을 확립한다. 영산정토와 같은 곳에 이 계단을 설립할 것을 원했지만 생존 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특히 “진언은 망국, 염불은 무간지옥, 선은 천마(天魔), 율승은 국적”이라고 하여 타 종파들과 끊임없는 논쟁과 대결을 일으켰다.
이처럼 중세 신불교의 조사들은 자신의 종파성에 극도의 신앙과 수행성을 투영하여 전통적인 계율정신을 자신의 교의 속에 통합시켜 버렸다. 역으로 계율이 각자의 불법에 포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착화된 일본불교의 가장 특징적인 요소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에 반해 대승계율의 부활을 외친 율종의 부흥은 중세불교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
2) 율종의 부흥과 계율정신의 실천
중세 신불교의 조사들은 새로운 종파 형성으로 일본불교의 토착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대승의 정신이 지역과 민심에 따라 원심운동을 하는 것은 이미 불교의 역사에서 숱하게 목격한 것이다. 이러한 역할은 신불교 탄생만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기존 남도북령의 불교계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거세게 일어났다. 무계와 파계의 시대가 신불교의 조사들을 탄생시켰다면, 이들은 대승정신의 부활을 외쳤다고 할 수 있다.
12세기 말인 헤이안 시대 말기부터 중세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걸쳐 지츠한(實範)과 묘에(明惠)는 계율부흥을 외쳤으며, 가쿠조(覺盛), 유곤(有嚴), 엔세이(円晴), 에이존(叡尊)은 계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국가주도의 계단을 철폐하고 개인의 철저한 수행에 바탕한 자서수계를 실시했다. 가쿠조는 사분율을 중시하고 감진이 주석하던 당초제사를 율종 흥륭의 거점으로 삼았다. 에이존은 서대사(西大寺)를 거점으로 십송율을 중심으로 진언율종을 개창했다. 이들을 남경율이라고 불렀으며, 교토 천용사(泉涌寺)의 슌조(俊芿)가 남송으로부터 가져온 율을 북경율이라고 불렀다. 이들 혁신파를 신의율(新義律)이라고 하여 이전의 고의율(古義律)과 구별했다. 이들 신의율은 율종 내의 교류를 더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여기서 살펴볼 조사는 에이존(1201~1290)이다. 그는 36세에 승려 본래의 자세로 돌아가기를 서원하여 동대사 계단에서 자서수계를 행하였다. 1245년 진언수행 중 문수보살로부터 불성삼마야계(佛性三摩耶戒) 관정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계율은 밀교와 일심이며 일월과 같다고 보았다. 계밀불이(戒密不二)의 사상을 전개했다. 또한 그는 실유불성·동일불성설 사상에 기반한 인간 구제를 중시했다. 특히 대비천제(大悲闡提)의 원을 세워 천제를 자신과 동일시하였다. 그는 “천제의 원을 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삼세의 모든 보살이 유정 세계의 모든 고통을 소멸케 하는 원을 세우지 않고는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여 중생구제의 홍원을 세웠다.
그는 쿠카이의 십송율을 근본으로 삼고, 서민에게는 일상생활과 관련, 계율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설법하는 등의 활동으로 많은 제자와 신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가르침은 살생을 금하고, 기도로 자신을 삶을 엄하게 다스리는 한편, 부처님의 자비심을 발휘하여 가난과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도록 하는 것이었다. 특히 불연이 희박한 무연고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이러한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에이존은 계율부흥을 위한 《범망고적문집(梵網古迹文集)》 《보살계본종요(菩薩戒本宗要)》 등을 저술하고, 계경(戒經)을 1만 7천 회에 걸쳐 강의하였으며, 당시의 왕과 귀족들에게 직접 계율을 강석하기도 했다. 이들은 그의 강의에 감동하여 대신들과 함께 보살계를 받는 동시에 사제의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는 보살정신의 발현을 설하며 집단적으로 삼취정계를 수여하였다. 모든 계율이야말로 성불의 가장 뛰어난 인연이라고 하였다. 무려 7만여 명에게 이런 보살계를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유업을 이은 제자 닌쇼(忍性, 1217~1303)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일본 최초의 병원을 짓고 이들과 평생을 함께 살았다. 1240년 24세 때에 스승이 주석한 서대사에서 정식으로 수계하였다. 천민·걸식자·병자들이 바로 문수보살이며, 이들을 구제하는 것이 바로 문수보살에게 공양하는 것과 같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진언율종을 공부하면서 대승정신인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닌쇼는 전생의 악업에 의해 부처님의 벌로서 불벌관(佛罰觀)을 믿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사명을 가졌다. 그는 비인(非人)으로 취급받는 이들을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보고 그의 스승이 대비천제의 서원을 세운 것처럼 이들을 대했다. 불법을 가르치는 동시에 계율호지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권면하였다. 그는 《문수사리반열반경》에서 설하는 문수신앙에 의거, 누구든 자비행으로써 문수보살을 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원형석서(元亨釋書)》에는 1287년 71세 때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아·빈궁자·병자의 구제시설 외에도 구와타니(桑谷, 가마쿠라의 한 지명) 요양소를 설치하여 친소를 가리지 않고 병자를 입원시켜 늘 그들의 병상에 다가가 용태를 묻고 곁에서 간호하였다. 20여 년간 이곳을 거쳐 간 환자는 46,800명을 헤아리고, 그 가운데 사망자는 10, 450명이었다.”
닌쇼의 스승 에이존은 “보살은 먼저 중생을 불도에 인도하기 위해 사섭사(四攝事) 즉,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와 보살의 수행덕목인 6바라밀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동사는 상대와 같은 입장에서 그를 고통으로부터 구하고, 또한 사람에게 선을 권하며 간병 등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법망경보살계》의 보살에 대해 “가난과 고통으로 차별받는 현실 속에 들어가 모든 사람을 구제하고, 그것에 의해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자”라는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율승들의 활동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그들과 교단을 보호하고 사원의 건립에도 적극 후원하였다. 이들 율승들이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전국시대였다. 그들은 무연고의 민중을 향한 각종 사회사업을 일으키는 한편 전쟁터에서는 장례를 담당하고 이들의 천도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대승계율의 중생구제의 이상을 현실화한 것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다.
4. 근현대의 계율부흥 운동
무로마치시대의 5산 제도와 같은 선종의 전면적인 대두는 계율을 선과 일치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시대 말기에서 에도시대 초기에 계율부흥을 위해 노력한 승려들이 나왔다. 그 주도적인 인물은 묘닌(明忍, 1576~1610)이었다. 고산사에서 자서수계한 묘닌은 유손(友尊) 및 에운(慧雲)과 함께 진언율종의 중흥을 도모하기 위해 폐사가 된 교토의 서명사(西明寺)에서 암자를 짓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명나라로 가는 도중 35세에 대마도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계율부흥 운동은 묘닌의 유업을 이은 에운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17세기 에도시대에 이르러서는 단가제도의 정착과 함께 불교계는 막부의 권력하에 예속되었다. 단가제도는 에도막부의 민중 통제책이었다. 기독교인의 적발을 위해 사원의 증문을 발행하는 사청(寺請) 제도에 기반한 것으로 모든 민중을 사원에 예속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사원 제법도를 제정, 본말사제도의 수립은 물론 사원의 일반적인 규정까지 막부가 통제하였다.
사원 제법도는 천태종, 진언종, 법상종, 정토종, 임제종, 조동종에 내려졌는데 천태와 진언종의 사원에 집중되었다. 양자는 중세에 무사계급과 세력 관계를 형성했던 현밀체제의 종파였다. 그 내용은 본사의 특권 강화, 승려의 교학과 수학에 관한 재교육, 중세사원의 특권 박탈 등이었다.
이러한 현실은 17세기 후반부터 각 종파의 계율인식을 돌아보게 했다. 천태종의 묘류(妙立)는 소대승율 겸학의 호지를 위해 안락율(安樂律)을 주장하였다. 또한 진언종의 조곤(淨嚴)은 불도수행의 근본을 계율에 두고 여법진언률(如法眞言律)을 제창하였다. 정토종에서는 지쿠(慈空) 및 레이탄(靈潭)이 정토율(淨土律)을, 일련종에서는 겐세이(元政) 등이 법화율(法華律)을 주장하여 승풍 쇄신을 외쳤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단가제에 의지한 승려의 부패타락상을 목도하는 가운데 계율부흥을 위해 노력한 승려가 나왔다. 진언종의 온고(飮光, 1718~1805)는 석존 재세 시의 계율부흥을 목표로 정법률(正法律)을 제창하였다. 승려의 생활규율에 대해 시공을 불문하고 불타의 교설 그대로 따를 것을 주장했다. 심지어는 승단의 조직이나 가사의 형태, 일상의 수행 형태까지 석존 재세 시의 그것과 같도록 했다. 그는 정법을 율장에서 찾고, 종파의 종지에 대한 심천을 논하지 않는 한편 종파별 수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십선계를 계의 근본으로 삼아 자신과 국가를 다스리는 기초로 놓았다. 이처럼 평이한 길을 설파함으로써 종파를 초월하여 많은 승려와 재가자는 물론 왕실 관계자들까지 그에게 귀의하였다. 온고는 《범학진량(梵學津梁)》 《십선법어(十善法語)》를 저술했으며, 그의 십선계는 근대의 불교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기의 불교는 서구의 위협에 의한 국내의 위기의식이 겹쳐 불교의 호법운동이 일어났다. 온고의 영항을 받은 진언종의 운쇼(雲照, 1827~1909)는 히에이산에서 《범망경》을 배우고 43세에 〈구폐 일세(一洗)개혁의 조〉를 저술하여 폐불훼석으로 인한 불교계의 피폐를 불교혁신을 통해 일신하고자 하였다. 그는 진언종의 개혁을 위해 교토 지적원(智積院)에서 본산회의를 개최하고 혁신을 주도했다. 1884년에는 십선회를 결성하여 동사(東寺)에서 봉행하였다. 이듬해에 진언종단이 그의 계율주의의 제안을 부정하고 1종1파의 종제법을 결정한 것에 반발, 종단과 관계를 끊고 단독으로 계율주의 운동을 개시했다. 그는 계율주의학교를 창설하고, 십선회의 재흥을 위해 운조사(雲照寺)를 세웠다. 이후 기관지〈십선보굴(十善寶窟)〉을 창간하고, 승원 규칙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1868년 메이지 신정부의 폐불훼석은 신불습합의 전통 속에서 사원과 신사가 공존하는 현상을 분리하여 승려를 환속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1871년 신정부는 새 호적제도의 전면적인 실시와 함께 단가제의 근원인 사청제도의 폐지를 단행하여 법적으로 무효화하였다. 이는 승려의 승관화를 철폐한 것이긴 하지만 불교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신도의 국교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일련의 법적 조치는 실제로는 신도식 장제를 장려하기 위한 것이자 신교의 자유를 용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배불적인 상황과 신도 국교화 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조동종의 오우치 세이란(大內靑巒, 1845~1918)은 자내심의 신교(信敎)로써 지계지율의 정신을 고양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 1872년 〈태정관포고〉를 통해 “지금부터 승려의 식육·대처·축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법요 이외의 경우에는 인민일반의 복장을 착용해도 관계없다.”는 법령을 발포하였다. 이전에 식육대처의 공인을 주장한 사람은 조동종의 셋소 세이세츠(雪爪淸拙, 1814~1904)였다. 그는 당시의 계몽운동가들과 논의한 후, 신정부에 올린 건백서(1871년)에서 승려의 식육대처 공인, 학교 운영, 서구 종교계 시찰 등의 항목을 내세웠는데 이는 정부의 배불론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논란 속에서 식육대처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법적 판단은 승려의 계율과 관련성을 국가가 부인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계율은 각 승단에 귀속된 성격의 것이었다. 식육대처의 승려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각 종파에서는 이 문제를 공인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이를 당연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자 판단은 정지되었다. 일본불교의 세속화는 여기에서 정점에 이르고 말았다. 근대국가의 의도대로 불교계는 자율성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동양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국주의 정책을 아시아 각국에 펼쳤다. 그 결과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8년 시베리아 출병,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등 쉼없는 대외전쟁을 일으켰다. 신도 국교화에 성공한 후 불교계는 신도의 아류로 전락하는 한편, 전쟁의 도구로 이용되었다. 불교 각 종파는 대외전쟁에 승려의 파견은 물론 자신의 단가를 살육의 장으로 내몰았다. 태평양전쟁에 이르러서는 전시교학을 확립하여 국가의 수족이 되었다. 오늘날에야 비로소 국가의 전략에 말려들어 거교단적으로 바라이죄를 저지른 것에 대한 참회의 길을 걷고 있다. 불교가 국가의 이념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게 될 때 극도의 결과를 낳는다는 교훈을 일본불교계는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와서 일본불교는 계율의 정신에 대해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 걸맞은 계율의 새로운 해석을 종학을 중심으로 펼쳐가고 있다. 근현대 불교교학의 발전에 힘입어 종파성에 치우친 계율 정신을 대승정신의 회복이라는 과제와 함께 위기의 지구적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시도를 해내고 있다. 특히 일반불교학의 견지에서 불교사 전체는 물론 인도로부터 남방,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에 이르기까지 사회와 계율의 변화를 중심으로 불교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음은 고무적인 일이다.
5. 맺는말
교리에 반영된 대로 현재 일본의 전통 종파는 헤이안시대 이후 출가자는 바라제목차를 수지하고 있지 않다. 고대에 도입된 보살계인 삼취정계는 일본의 불교계에 많은 변화를 준 것도 사실이지만 대륙이나 한반도와는 다른 무계승려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세불교의 성립은 이것을 더욱 심화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율의 문제도 마찬가지 현실에 놓여 있다. 타국의 전통적인 승가와는 다른 개성이 강한 종파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의 불교를 대승불교권의 이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불법의 대중화를 지향해 온 역사는 국가권력과의 갈등이 상존했음에도 그 이념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국가권력에의 종속이라는 암흑기의 근대불교계였지만 고준한 교의에 대한 대중의 굴절된 이해가 요청되는 현대적인 상황에 대해 불교계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고민은 첫째 전통적인 계율과 불교의 지역적 토착화의 문제이다. 시대를 따라 제정된 계율과 계의 정신인 계체(戒體)와의 조화를 일본불교계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종파불교로서 일본불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둘째로는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전통적인 계율의 정신을 이 시대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오늘날에도 불교의 원심운동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본 신불교의 경우, 계율 문제를 불법의 사회화와 밀접하게 관련지어 해석하고 있는 점에서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불교가 일본불교에 관심을 둬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관점들을 공유하기 위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
원영상 /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 원광대학교 졸업. 일본 교토(京都) 불교대학에서 일본불교사상 연구로 석사·박사학위 취득. 주요 논문으로 〈근대일본의 군국주의 정책과 불교계의 수용〉 등이 있고, 저서로 《동아시아불교, 근대와의 만남》(공저) 등 다수. 원불교 교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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