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구원해 주는 사람은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본인의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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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문장을 우연히 발견하고서 (출처는 댓글에) 나는 '아라한'이 떠올랐다. 사랑과 봉사로써 신자들을 '섬기는' 것이 성직자의 의무라고 우린 흔히 생각하지만, 이건 대승불교가 갈라져 나오면서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자비'의 의미를 변화시켰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기독교의 영향도 있을 것 같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준다고 하니, 그런 사랑을 받으려면 인간도 서로 서로 비슷한 노력이라도 해야겠지.) 그러나 초기불교에서 출가 수행자들의 의무는 오직 수행 뿐이다. (자비로운 '보살'이 중생을 극락으로 데려가고 이런 건 부처님의 말씀과 180도 반대되는 얘기.) 초기불교에서도 남을 돕는 건 물론 선업이지만, 코로나 (탐진치)에 감염된 사람은 스스로를 격리하고서 자기치료에나 집중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도 최급선무이고 또 남들을 위해서도 최선의 이타행인 것과 비슷한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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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함 중 가장 큰 인색함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지 않는 것이고 선물 중 가장 큰 선물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나누는 일이라고 초기불교는 얘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가자들을 가르치는 것이 출가 수행자들의 ‘의무’는 아니었다. (누가 와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할 때 대답해 주는 정도로도 괜찮다는 의미 아닌가 싶다.)
DN 2에서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들이 하지 말아야 하는 일 수십 가지를 나열하셨는데, 여기에는 점성술, 부적, 풍수 같은 것들 뿐 아니라 의료행위와 일기예보 같은 일들까지 포함된다. 출가 수행자들이 숲속에서 고요히 머무르다 보니 별자리 관찰도 자연스레 하게 되었을 테고 이런 저런 풀의 약효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터. 또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이런 저런 실용적인 지식이나 기술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다 보니 농사 짓는 재가자들이 수시로 와서 다양한 자문/도움을 청했을 것이며, 한 두 번 들어 주면 계속 와서 청했을 거다. 그런데 그 부탁을 일일이 들어 주다 보면 정작 수행자들이 수행할 시간과 여력이 남지 않게 될 것이기에, 그래서 이렇게 미주알 고주알 일일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거라고. 부처님 당시의 출가 수행자들은 재가자들의 집을 다니며 한 집에서 하루 밥 한 숟가락 분량씩을 얻어서 먹었고 (이렇게 받다 보면 그릇 안에서 음식이 섞여 개죽처럼 됨) 이게 수행자와 재가자 사이의 유일한 교류였다. 이런 탁발은 수행자가 재가자에게 바른 수행의 모범을 보이는 기회일 뿐 아니라 선업의 공덕을 쌓는 기회를 재가자들에게 주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 한 번의 이 탁발 이외 나머지 모든 시간은, 재가자에 대한 봉사는 커녕 오직! 수행에만 사용해야 했다. 세속의 온갖 의무 및 '얽히고 섥힘'을 피하기 위해 출가하는 거 아니냐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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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늪에 빠진 타인을 꺼내 주고 싶다면 우선 나부터 빨리 늪 밖으로 나와야 한다. -- MN 8
- 2인 1조 곡예를 하는 파트너들이 서로 상대를 보호하고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각자 자신의 역할을 오차없이 정확하게 해 내는 것이다. -- SN 47:19
- 자신의 의무와 남의 의무를 구분하지 못 하는 사람은 바보다. -- AN 2:98
- 출가 수행자들은 재가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친밀하게 지내지 말라. -- SN 22:3
- 자신의 수행처를 방문한 지인에게 "떠나 달라"는 얘기 이상은 하지 마라. -- AN 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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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금은.. 종교기관이 텃밭에서 농사까지 지어 신도들에게 맛있는 밥도 제공하고 사교의 장도 제공하고 이런 저런 문화/체험 프로그램 및 온갖 기복 기도회 등을 열면서 보시를 강요한다. (상대가 자발적으로 주지 않는 것을 달라고 하는 일조차 초기불교의 관점에선 도둑질 시도이건만. 그렇게 해서 받아 내는 일은 도둑질과 다름이 없건만.) 수행자가 재가자에게 가르침을 전하더라도 댓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부처님이 금지하신 이유는, 그렇게 되면 '서비스 제공자'인 성직자/종교기관은 '후원자'/'소비자'의 '사실은 세속적이면서도 뭔가 좀 심오하고 영적으로 보이고/느끼고 싶어 하는' 신도들의 온갖 은근한 욕망에 눈가리고 아웅하며 맞춰 줄 수 밖에 없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현재의 대다수 종교기관들은 이런 형국이 되고 말았다.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참여자들에게 '시간과 돈 투자한 보람이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온갖 편법을 사용할 뿐 아니라, 그런 얄팍한 요령에 잘 따라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소비자가 聖人의 한 단계라도 성취한 듯 '인증'을 해 주기도 하는 웃픈 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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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사랑과 도움을 주고 받는' 것을 아름답다고 우린 여기지만, 부처님이 설정하신 출가 수행자와 재가자 사이의 관계는 ‘인간적인’ 관점과는 좀 달랐다. 스스로 바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그 외의 '쉬운' 방법을 통해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인간들의 '사행심'이 존재하는 한, 타락한 종교인이나 사이비는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진심'이고 '정성'이어도 자기 자신의 노력이 아닌 타 존재에게 '잘 보이는' 방법을 통해 자기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건 세속에서조차 '비리'라 불리며 사기꾼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된다. 천공이나 건진도 바르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그런 영향력을 쥐어 준 것은 결국 '사이비의 피해자'라고도 볼 ‘수’ 있는 재가자 자신들의 어리석음인 것. (탐진치 중 가장 해로운 것은 치라고 AN 3:68은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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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내게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은, 내게 잘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삶의 모범을 보여 주는 아라한 같은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모든 건 제 눈의 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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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 #18. 초기불교는 '이기적''
'초기불교와 기타 영적 전통들 간의 차이 #9. 초기불교는 타력구제 신앙이 아닌 자력구제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