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8

알라딘: 스님과 철학자 - 화엄경의 블랙홀, <법성게>의 우주와 삶을 논하다 윤구병,도법

알라딘: 스님과 철학자

스님과 철학자 - 화엄경의 블랙홀, <법성게>의 우주와 삶을 논하다 

윤구병,도법 (지은이)레디앙201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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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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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지리산 실상사 도법 스님과 변산 공동체 농사짓는 철학자 윤구병 선생이 만났다. 불경을 한글로 풀어내기 위해서다. 이들 ‘스님과 철학자’는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 일을 시작했다. 그 첫 번째 텍스트가 <법성게>다.



<법성게>는 의상이 중국에 있을 동안 지은 책으로 당시 중국 불교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내용의 완성도와 함께 인도 불교, 중국 불교가 판을 치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불교’의 핵심을 잡고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첫 텍스트로 <법성게>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줬다.



이 책의 내용은 <법성게> 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불교의 문제, 깨달음의 신비화에 대한 비판, 우리말 풀이의 의미, 현대물리학과 불교 정신의 관계, 기독교와 불교 세계관의 차이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진행된 활발한 논의 내용도 포함됐다.



너와 나, 우주가 다르지 않다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에 대한 앎과 직결된 것이고, 앎은 함(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법성게>에서 나타난 불교의 세계관과 실천론은 주장과 당위가 아니라 여실지견하면 드러나는 ‘실상’이라는 것이 이 책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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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 도법, 윤구병에게 삼배를 올리다 / 이광이



책을 내며 : 놀라운 인연이 낳은 돌덩이와 금덩이 / 도법 스님



본문

1장. 절집 생활 45년, 참 열심히 했는데

2장. 스님, 깨달으셨어요?

3장. 깨달음을 신비화하지 말라

4장. 김대중의 빨강은 본래 있던 것인가?

5장, 10의 52승, 갠지스강 모래는, 하나!

6장, 깨달음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달음

7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아직 멀었어!

8장.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

9장. “너는 나다. 이게 실상인 것이여.”



나가며 : 깨달은 자



법성게 풀이

노래하네, 그대의 삶을 : 도법 스님

마음결 읊음 : 윤구병

세상을 노래하다 : 백승권



불한당과 당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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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당구공이 두 개 있어요. 두 개가 붙어있을 때 ‘떡이 됐다’고 하죠. 어디서 둘이 맞닿고 있나요? 맞닿은 곳이 면인가요, 점인가요? 점이죠? 그렇다고 둘이 붙어 있지는 않잖아요? 딱 붙어 있으면 하나죠. 그러면 ‘떡이 된’ 두 개의 당구공은 하나일까요? 그 점은 빨간 당구공에 속하는가요, 하얀 당구공에 속하는 건가요?”



“둘 다죠.”



“둘 다라는 말은 무슨 말이죠? 여기도 속해 있고 저기도 속해 있다? 그 점은 빨갱이의 것이기도 하고, 하양이의 것이기도 하고, 빨갱이의 것이 아니기도 하고, 하양이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 이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이걸 ‘아페이론(?πειρον)’이라고 했어요. 규정할 수 없는 것, 무한한 것이라고요. 지금 제일 골치 아픈 게 물리학에서는 카오스 이론입니다.”



*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가르침이라고 봐야 합니다. 보살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죠.”



*



“나는 지금까지 삶을 고민하면 살았지, 경전 공부하면서 살아 온 것이 아닙니다. 삶의 실상을 알면 인생살이도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됩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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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1943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태어났다. 1972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뿌리깊은나무〉초대 편집장을 지냈다. 1981년 충북대 철학과 교수가 되었고 1989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를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았다. 1983년 이오덕 선생의 권유로 대학교수로는 처음으로 ‘한국글쓰기연구회(지금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회원이 되었다. 1988년 어린이에게 줄 좋은 책을 출판하려고 ‘보리기획(지금 보리출판사)’을 만들었다. 1995년 변산(전북 부안군)에 자리를 잡아 변산공동체학교를 꾸리고, 1996년 대학교수를 그만두고서 농사꾼으로 살기 시작했다. 2016년 ‘우리말글살리는겨레모임’에서 ‘우리 말글 으뜸 지킴이’로 뽑혔다. 쓴 책으로 《잡초는 없다》《실험 학교 이야기》《철학을 다시 쓴다》《내 생애 첫 우리말》《꽃들은 검은 꿈을 꾼다》《특별 기고》 들이 있다. 〈달팽이 과학동화〉〈개똥이 그림책〉을 비롯해 ‘세밀화 도감’을 기획하고 펴내 어린이책의 새 지평을 열었으며, 남녘과 북녘의 학생들이 함께 보는 《보리 국어사전》을 기획하고 감수했다. 접기

최근작 : <[빅북] 보리 빅북 2 세트 - 전6권>,<[빅북] 우리끼리 가자>,<꿈꾸는 형이상학> … 총 12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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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 (지은이)



1949년 제주에서 태어나, 17세가 되던 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출가했다. 66년 금산사에서 출가하여 69년 해인사 강원을 거치고, 이후 13년 동안 봉암사와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선수행을 했다. 87년엔 금산사 부주지를 맡았고, 90년엔 청정불교운동을 이끈 개혁승가 결사체 선우도량을 만들었다. 95년부터 실상사 주지를 맡아 인간화 생명살림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 98년 실상사 소유의 땅 3만 평을 내놓고 귀농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98년 말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이 기존의 총무원과 정화개혁회의로 나뉘어 다툴 때 총무원장 권한대행으로 분규를 마무리짓고 미련없이 실상사로 내려갔다. 99년엔 인드라망생명공동체를 창립하면서 귀농운동 차원을 넘어 생활협동조합?대안교육?생명평화운동 등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2004년 실상사 주지 소임을 내려놓은 후, 생명평화 탁발순례의 길을 떠났다. 이후 5년 동안 3만 리를 걸으며 8만 명의 사람을 만나 생명평화의 가치를 전했다. 2010년부터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 자성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 본부장 등 종단 소임을 맡아 다툼없고 평화로운 사회로 가는 길을 내다 2018년 실상사로 내려와 다시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 마을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현재 지리산 실상사 회주이자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상임대표로 있다.



저서로는 《화엄경과 생명의 질서》 《길 그리고 길》 《화엄의 길, 생명의 길》 《그물코 인생 그물코 사랑》 《내가 본 부처》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지금 당장》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붓다, 중도로 살다>,<붓다로 살자>,<스님과 철학자> … 총 2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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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신을 향한 테레사 수녀님의 마음이 바로 구하는 마음입니다. 불교인들도 수녀님처럼 부처를 찾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에 붙들려 있습니다. 깨달음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인생을 걸죠. 나도 그랬어요. 해도 해도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깨달음이 안 이뤄졌어요. 그러니까 모두 평생 갈망 속에 허덕이고, 일생을 구하는 마음으로 헐떡이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사들이 쉬어라, 쉬어라, 망상을 내려놔라 하는 것이죠.



불교가 뭐냐? 부처가 되는 게 아닙니다. 부처로 사는 겁니다! 왜 그런가. 사람이 부처니까요. 그럼 부처로 사는 게 구체적으로 뭐냐? 부처로 사는 것의 사회적 실천이 바로 ‘화쟁 순례’라고 본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부처가 되려고 한없이 돌아왔는데, 이제 돌아가지 말고 질러가자, 질러가는 불교를 하자, 이것이 바로 ‘붓다로 살자’ 불교입니다. - <본문 중에서>



***



[주요 내용]



지리산 실상사 도법 스님과 변산 공동체 농사짓는 철학자 윤구병 선생이 만났다. 불경을 한글로 풀어내기 위해서다. 이들 ‘스님과 철학자’는 11명의 제자들과 함께 이 일을 시작했다. 모임의 이름은 ‘불한당’(불경을 한글로 풀어내는 모임). 불한당 당원들은 불교를 많이 아는 사람들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고, 교수와 신문 기자 출신 논술 강사, 요리 전문가와 백수 등 다양했다. 첫 번째 텍스트는 <법성게>.



매달 2회, 6개월 동안 전원 출석의 열기 속에서 <법성게>를 풀면서, 이들이 공부한 내용이 『스님과 철학자』에 육성으로 그대로 실려 있다. 그런데 도법 스님과 농부 철학자 윤구병은 <법성게> 공부 모임 훨씬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 10년 전 첫 만남 장면이다.



갑자기 스님보고 삼배를 하라니. 촌장은 재워 주는 대가로 삼배를 받겠다는 것이다. 양측이 합장 반배하고 인사를 나누면 될 일을, 촌장이 급소를 찌르고 들어온다. 더구나 양측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와중 아닌가. 난감한 일이다. 스님이 답한다.

“내가 왜 삼배를 해야 하지요?”

“스님, 법당에 들어가서 돌덩이나 쇳덩이한테 삼배를 하지요?”

“…….”

“그런데 내가 여기 주인이고 스님은 객입니다. 보아하니 나이도 내가 많고 그런데, 형한테 삼배하는 것이 잘못입니까?”

갈수록 빨려 들어간다. 삼배를 할 수도 없고, 안할 수도 없다. 바둑을 둘 데가 없다. - 본문 중에서



스님과 철학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불꽃 튀는 팽팽한 논쟁으로, 해학이 넘치는 유쾌한 방담으로, 우주와 나라는 존재의 심연에 대한 깊은 철학 이야기로, 거침없이 공부 시간을 보냈고, ‘무지한’ 학생들은 철없는 질문을 마구 던져 댔다. “스님, 깨달으셨습니까?”, “깨달은 경지에 들어서면 맞아도 안 아픈가요?”, “스님은 고기를 먹으면 안 되나요?” 등등.



<법성게>라는 한국 불교의 ‘불후의 명작’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 내용은 <법성게> 풀이를 넘어서 존재와 실상에 대한 깊고 통찰적인 이야기들로 풍부하게 채워졌다. 때론 고대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도 등장하고, 현대 물리학의 우주론과 양자역학도 상 위에 올려졌다. 그런데 왜 <법성게>일까?



*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 세상을 표현한 장엄하고 화려하고 방대한 경전이다. 하지만 이 경전은 부처님이 듣는 사람 귀를 생각지 않고, 깨달음의 세계 그대로를 온전히 설한 경전이라서 매우 어렵기로도 유명하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지혜 제일로 불리는 사리불도, 신통 제일로 불리는 목련존자도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하는 자리에서는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해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다.



그런데 방대한 『화엄경』 80권을(60권 본과 40권 본도 있다) 한자 210자로 압축한 초고밀도 시(偈頌)가 있다. 신라 시대 고승 의상 대사가 쓴 <법성게>다. 의상은 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스님이다. 원효의 유명한 ‘해골에 담긴 물’ 이야기는 이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유학파 의상은 국제무대에서 인정받는 학승이 됐고 신라 화엄종의 개조가 됐다. 국내파 원효는 각종 저술과 거침없는 행동을 통해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남아 있다.



<법성게>는 의상이 중국에 있을 동안 지은 책으로 당시 중국 불교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내용의 완성도와 함께 인도 불교, 중국 불교가 판을 치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불교’의 핵심을 잡고 공부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도 불한당이 첫 텍스트로 <법성게>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줬다.



화엄 사상은 “먼지 한 톨이 모든 우주를 머금고 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법성게> 표현처럼 우주 만물이 서로 끊임없이 연관되어 있으며(연기론), 각각의 존재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성기설) 또 “하나가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日卽一切多卽一)여서 우주 만물이 서로 원융(圓融)하여 무한하고 끝없는 조화를 이룬다는 세계관이다.(法性圓融無二相. 법성게 첫 줄)



스님과 철학자는 법성게 첫 구절인 ‘법성원융무이상’의 풀이부터 부딪쳤다. 학생들도 저마다 알든 모르든 한 목소리를 보탰다. ‘法性’을 ‘마음결’로 풀어야 한다는 철학자, 지금 여기에 있는 나라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스님, 우주 또는 진리라고 풀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난무하면서 공부 모임은 뜨겁게 달궈졌다. 결국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서, 세 송이의 꽃으로 번역본은 피어났다.



*



이 책의 내용은 <법성게> 풀이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불교의 문제, 깨달음의 신비화에 대한 비판, 우리말 풀이의 의미, 현대물리학과 불교 정신의 관계, 기독교와 불교 세계관의 차이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진행된 활발한 논의 내용도 포함됐다.



도법 스님은 부처님의 모든 설법은 지금 여기서 증명되고 확인되는 것이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눈앞에 직면한 곳에서 설명이 되고 해결되어야 하는데, 직면한 사실 가지고 안 풀리니까 계속 뭘 찾아서 다니게 되죠. 그러다 결국 패가망신하는 인생이 생기는 겁니다. 거기에 인생을 걸고 히말라야다, 미얀마다, 선방이다, 네팔이다, 심산유곡을 찾아갑니다. 과연 이런 게 불교냐? 이게 도 닦는 것이냐? 이런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아니 오히려 더 과감하게 문제로서 제기돼야 합니다.”



윤구병 선생은 ‘쉬운 우리말 쓰기’ 단지 우리말 사랑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강조한다.



“우리의 옛말들을 찾아내고 되살려 내게 되면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어떻게 했는지, 어떤 걸 보고 무얼 느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런 우리말을 되찾아서 세 살짜리 꼬마도 까막눈 시골 어르신도 알아듣는 말로 우리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제야 비로소 민주 세상이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스님과 철학자』는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내가 자연과 우주와 분리되지 않았으며, 바로 이런 연기적 세계관을 알고 실천하면 그 사람이 바로 부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고 부처가 심신산골이나, 히말라야 산 속이나, 미얀마 같은 곳에 있어서 높고 깊은 깨달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와 불교, 그리스 철학과 고대 인도의 세계관도 함께 논의된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인간의 원리와 원칙에 따르면, 또 사람의 두뇌로 생각하면 우주를 하나로 봐야 풀리는 지점들이 있어요. 그래서 무한히 크기는 하지만 우주는 하나다, 우주 지배 궁극적 힘은 하나님만 가지고 이어야 한다, 이게 기독교적 세계관입니다.

불교는 그게 아니에요. 일체개공(一切皆空)이다, 무(無)다, 공(空)이다, 이렇게 무로부터 출발하는 거죠. 수학에서 원점은 0으로 놓습니다. 만일에 0을 원점에 놓게 된다면, 모든 게 무와 공으로 수렴될 수 있다는 생각이 가능합니다. 빅뱅이론도 하나의 점으로 수렴됐다가 나중에 확산된다는 이론으로 볼 수 있죠. 무를 중심으로 놓느냐, 유일신인 하나님를 중심으로 놓느냐에 따라 세계관이 아주 달라집니다.

나는 무를 중심으로 놓으면, 연기론이나 인드라망이 세계관이 있긴 하지만, 극한적인 자율성이 가능하게 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종교로 봐야 되나, 구제해 줄 다른 신적인 주체가 없는데?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너와 나, 우주가 다르지 않다는 동체대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에 대한 앎과 직결된 것이고, 앎은 함(실천)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다. <법성게>에서 나타난 불교의 세계관과 실천론은 주장과 당위가 아니라 여실지견하면 드러나는 ‘실상’이라는 것이 이 책의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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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뮨 2017-02-1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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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스님과 철학자 새창으로 보기

후후후후 자랑

yuna 2016-09-26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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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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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도법 스님으로부터 받은 ‘스님과 철학자’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의상 대사의 법성게(法性偈)를 놓고 도법 스님과 윤구병 선생, 그리고 몇 몇 학인들이 같이 이야기한 내용이다.

재미도 있고, 난해하기도 하지만, 도법 스님의 해석에 많은 공감이 간다.



법성게의 일부다.

무명무상절일체 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 證智所知非餘境

도덕경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

무명천지지시  無名天地之始

유명만물지모  有名萬物之母

논어에 나오는 구절이다.

필야정명호  必也正名乎



이름(名)이 어디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개념으로 나온다.

지금까지는 서로 다른 차원을 이야기하고, 누가 더 진리에 가까운가하는 것으로 더러 논쟁이 있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무언가 다른 것 같으면서도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다른 측면에서 보고 있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법성게나 도덕경이 본질에 대한 보다 형이상학적 접근이라면, 공자의 경우는 매우 현실참여적이다.

공자가 법성게나 도덕경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했으리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이해한 바탕에서, 현실로 나아갔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직접적인 표현은 아니더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우열(愚劣)을 논하기보다는 서로가 상보(相補)하는 면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문득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이었다.



특히 요즘은 옛날의 화두 같은 이야기들을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대단히 보편화된 시대다.

구체적인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이런 고전들이 어떻게 현대에 살려질 수 있는지를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이 증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종교가 현대에 의미를 갖는 것은 이와 같은 고금합작(古今合作)의 길을 개척하는데서 찾아야할지 모르겠다.



Comments

선유

名은 소리 또는 언어를 지칭합니다

존재가 인간일 수 있는 제1언어이지요

금강경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를 아시리라 봅니다

이때의 음성이 名

색이 相입니다

(조금이라도 참고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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