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묵스님 / ‘마음의 절대화’ 유감
- 승인 2008.11.26 13:02
- 호수 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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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ㆍ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욕먹기로 작정하고 한국불교에 대해서 한 가지 더 쓴 소리를 해보라고 한다면, 필자는 주저하지 않고 ‘마음의 절대화’를 들고 싶다. 한국불교 전반에서 마음은 외도의 창조주나 하나님이나 천주나 알라나 브라흐마처럼 절대화되고 신성시되어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며, ‘일체유심조’는 신통방통한 주문으로 통하고 있다.
조건발생일 뿐인데…
무아(無我, anatta, 실체 없음)는 불교만대의 표준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아비달마-중관-유식으로 이어지는 불교의 주류에서는 무언가 변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와 세계의 안이나 배후에 깃들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단지 고정관념(산냐, 相)일뿐이라 하여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이처럼 불교는 무아를 역설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마음을 영원한 그 무엇으로 절대화해버린다면 그것은 즉시에 불교가 아니게 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마음을 절대화하여 이것을 불생불멸이요 불변하는 실체인양 상정하고 이것을 깨닫고 이것과 하나 되고 이것을 드러내고 찬양하는 것을 불교라고 잘 못 이해하는 불자들이 많다.
요점만 말하자면, 마음은 단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부처님께서는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초기경전들의 수백 수천 군데에서 마음을 포함한 오온은 조건발생(緣已生, 緣起) 일 뿐이고, 무상이요 괴로움이요 무아라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하고 있으며, 이러한 무상이나 고나 무아를 통찰할 때 염오-이욕-해탈-해탈지가 생겨서 깨달음을 성취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도 마음을 절대화해버린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직설과 정면으로 맞서는 외도의 가르침이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입각처가 생겨야 불교적 수행이 시작된다고 필자는 말하고 싶다. 깨달음은 마음과의 합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 등에 대한 염오(넌더리, 구역질, nibbida)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부처님께서 강조하셨기 때문이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마음이 무상하고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라고. 남북방 아비달마와 대승의 아비달마인 유식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찰나(khana)’와 ‘흐름(相續, santati)’으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전찰나의 마음이 사라지면 후찰나의 마음이 일어나서 찰나생.찰나멸로 흘러가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등무간연) 유식에서도 아뢰야식을 비롯한 마음은 전변하는 것이요(識轉變), 안혜(Sthiramati) 스님은 이것을 ‘인찰나가 멸하고 과찰나가 인찰나와 다르게 생기는 것’이라고 찰나와 흐름으로 멋지게 정의하고 있다. 찰나와 흐름을 이해 못한 교학과 수행은 불교가 아니다.
믿지 말고 보아야
고정불변한 마음은 없다. 그러므로 마음을 절대화하면 안된다. 그건 불교가 아니고 외도설이요 잡설이다. 무엇보다도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깨닫지 못한다. ‘절대’는 복종과 섬김과 충성과 합일의 대상이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의 믿음은 불.법.승.계에 대한 믿음으로 족하다. 왜 마음을 절대화하여 믿으라고 강요하는가. 마음은 믿지 말고 보아야 한다. 마음의 찰나성과 상속성과 조건성과 허망성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마음의 절대화가 존재하는 한 불교가 추구하는 깨달음은 결코 성취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불교신문 2480호/ 11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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