希修
< '마음 공부' = '생각 공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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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보완/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인 '마음 다스리기'라는 건, '착하게 살기'가 아니라 결국 '사고방식 개조하기'. 배우자에 대한 '서운함'이라는 감정 A도 실은 '배우자는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주어야 한다'라는 나의 전제=생각 B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래서 불교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정서' 자체보다 정서까지 포함하는 '인지'/'의식'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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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함이든 화든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참는' 것은 잡초를 밟고 있는 행위. 조만간 발을 뗄 수밖에 없고 발 떼고 나면 언제 다시 고개를 쳐들지 모르는. '아, 나의 생각 B에 기인해서 이 감정 A가 일어났고 그게 나의 뒷목을 긴장시키고 있구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챙김은 잡초의 잎만 뜯는 행위. 뿌리를 뽑지는 못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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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까지 뽑으려면 결국, 고구마 하나 발견했을 때 그 줄기를 잡아당기면 고구마가 줄줄이 딸려나오듯, 그런 역추적을 통해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나는 어떻게 해서 생각 B를 갖게 되었고 그 수면 아래에는 어떤 빙산=욕망/잠재의식이 숨어 있는가?'에 대한 사유를 통해 정확한 '이해'를 해야. 그런 이해=지혜에 이르면 점차적으로 그 습을 버릴 수 있게 됨. 생각의 '空함'이라는 건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짐'을 의미하니,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원인과 과정을 알아야만 해체시킬 수 있음. 모든 습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단, 그 사유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탐욕, 허영, 위선, 치졸함 등을 직시/인정하기 괴로워 회피하면 표면만 긁적이다 늘상 '대충 긍정적인 결론'으로 타협하여 제자리에서 열심히 엔진 공회전만 하면서 단 한 발자국 못 나아간 채 평생을 보내게 되고, 자신의 탐욕, 허영, 위선, 치졸함을 스스로 변명하는 데에 급급하며 살 경우엔 그 '사유'가 오히려 자기기만이라는 '망상'이 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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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면서 불필요한 suffering을 자초하는 이유는 三毒 (貪嗔癡) 때문이고 그 삼독의 공통분모가 바로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석가의 진단인데, 어리석은 인간이 '사유'랍시고 해 봤자 십중팔구 '망상'으로 귀결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에, 그래서 흔히 "분별하지 말라", "생각을 놓아라"고들 하는 것이지만, 알아차림에서 시작하고 더 나아가 바른 사유를 통해 통찰지혜를 계발하는 것만이 어리석음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라는 사실이 바로 인간이 처한 딜레마. "분별하지 말라", "생각을 놓아라"는 건 그러므로,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내버리는 일. ('생각/분별에 게으름' 자체가 초기불교에선 不善으로 간주되며 축생으로의 윤회를 이끈다고 말함. '지혜'의 정확한 의미는 '매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어떤 경우에도 해로운 마음부수에 물들지 않는 통찰'을 뜻함. '생각/분별력 없음'이 미덕이 아니고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미혹/망상이며, '해로운 마음부수' #14~27에 물들지 않은 생각/사유인가?가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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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trials and errors뿐. 우리가 걸음마를 배울 때,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 그랬던 것처럼. 망상이라는 도랑에도 자주 빠지겠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털고 일어나 다시 시도해야. 그러기 위해 이런 '이론'을 배우는 것이고. 자기 마음을 늘 관찰하여 해로운 마음 부수가 섞일 때마다 '아, 마음의 흙탕물이 또 일어났구나. 이 흙탕물 가라앉으면 다시 생각해 봐야지'라며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식이 지혜를 보장하진 못 하지만, 아예 지식 없이 지혜가 가능하다는 것도 착각이고 망상. 사성제 팔정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어떻게 사성제 팔정도를 실천할 수 있겠는지?) 생각을 잠시 멈추는 건 '사유를 더! 잘 할 수 있기 위해'라는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서일 뿐이건만, '생각 멈춤' 자체를 궁극의 善/목적으로 여기는 건 평범한 인간의 의식 수준에서 축생의 의식 수준으로 오히려 더 내려가겠다는 결의. 인간의 정신이 워낙에 오염되어 있는지라 해로운 마음이 섞인 생각을 잠깐씩 멈추는 정도만 해도 심신의 건강이 크게 개선되는데, 이 '부수적 효과'에 탐닉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감각적 쾌락에의 집착'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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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회의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이기에, 강 저편=해탈에 다다르면 뗏목에서 '내려야'( =생각/지식/관념 등의 모든 노력을 놓아야). 그건 해탈에 이르러서나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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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유. 반조" - 일묵 스님
https://youtu.be/T6n0xhcnxsI
"망상을 버리고 바른 사유를 하라" - 일묵 스님
https://youtu.be/SkMqSQM1F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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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보완/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인 '마음 다스리기'라는 건, '착하게 살기'가 아니라 결국 '사고방식 개조하기'. 배우자에 대한 '서운함'이라는 감정 A도 실은 '배우자는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 주어야 한다'라는 나의 전제=생각 B에 기반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래서 불교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정서' 자체보다 정서까지 포함하는 '인지'/'의식'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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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함이든 화든 어떤 감정이 일어날 때 '참는' 것은 잡초를 밟고 있는 행위. 조만간 발을 뗄 수밖에 없고 발 떼고 나면 언제 다시 고개를 쳐들지 모르는. '아, 나의 생각 B에 기인해서 이 감정 A가 일어났고 그게 나의 뒷목을 긴장시키고 있구나'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마음챙김은 잡초의 잎만 뜯는 행위. 뿌리를 뽑지는 못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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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까지 뽑으려면 결국, 고구마 하나 발견했을 때 그 줄기를 잡아당기면 고구마가 줄줄이 딸려나오듯, 그런 역추적을 통해 점점 깊이 들어가면서 '나는 어떻게 해서 생각 B를 갖게 되었고 그 수면 아래에는 어떤 빙산=욕망/잠재의식이 숨어 있는가?'에 대한 사유를 통해 정확한 '이해'를 해야. 그런 이해=지혜에 이르면 점차적으로 그 습을 버릴 수 있게 됨. 생각의 '空함'이라는 건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짐'을 의미하니,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원인과 과정을 알아야만 해체시킬 수 있음. 모든 습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단, 그 사유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탐욕, 허영, 위선, 치졸함 등을 직시/인정하기 괴로워 회피하면 표면만 긁적이다 늘상 '대충 긍정적인 결론'으로 타협하여 제자리에서 열심히 엔진 공회전만 하면서 단 한 발자국 못 나아간 채 평생을 보내게 되고, 자신의 탐욕, 허영, 위선, 치졸함을 스스로 변명하는 데에 급급하며 살 경우엔 그 '사유'가 오히려 자기기만이라는 '망상'이 되어 눈덩이처럼 불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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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살면서 불필요한 suffering을 자초하는 이유는 三毒 (貪嗔癡) 때문이고 그 삼독의 공통분모가 바로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석가의 진단인데, 어리석은 인간이 '사유'랍시고 해 봤자 십중팔구 '망상'으로 귀결되기가 너무나 쉽기 때문에, 그래서 흔히 "분별하지 말라", "생각을 놓아라"고들 하는 것이지만, 알아차림에서 시작하고 더 나아가 바른 사유를 통해 통찰지혜를 계발하는 것만이 어리석음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라는 사실이 바로 인간이 처한 딜레마. "분별하지 말라", "생각을 놓아라"는 건 그러므로,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내버리는 일. ('생각/분별에 게으름' 자체가 초기불교에선 不善으로 간주되며 축생으로의 윤회를 이끈다고 말함. '지혜'의 정확한 의미는 '매사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어떤 경우에도 해로운 마음부수에 물들지 않는 통찰'을 뜻함. '생각/분별력 없음'이 미덕이 아니고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미혹/망상이며, '해로운 마음부수' #14~27에 물들지 않은 생각/사유인가?가 중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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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trials and errors뿐. 우리가 걸음마를 배울 때,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 그랬던 것처럼. 망상이라는 도랑에도 자주 빠지겠지만, 그럴 때마다 다시 털고 일어나 다시 시도해야. 그러기 위해 이런 '이론'을 배우는 것이고. 자기 마음을 늘 관찰하여 해로운 마음 부수가 섞일 때마다 '아, 마음의 흙탕물이 또 일어났구나. 이 흙탕물 가라앉으면 다시 생각해 봐야지'라며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지식이 지혜를 보장하진 못 하지만, 아예 지식 없이 지혜가 가능하다는 것도 착각이고 망상. 사성제 팔정도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어떻게 사성제 팔정도를 실천할 수 있겠는지?) 생각을 잠시 멈추는 건 '사유를 더! 잘 할 수 있기 위해'라는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서일 뿐이건만, '생각 멈춤' 자체를 궁극의 善/목적으로 여기는 건 평범한 인간의 의식 수준에서 축생의 의식 수준으로 오히려 더 내려가겠다는 결의. 인간의 정신이 워낙에 오염되어 있는지라 해로운 마음이 섞인 생각을 잠깐씩 멈추는 정도만 해도 심신의 건강이 크게 개선되는데, 이 '부수적 효과'에 탐닉하는 것도 또 다른 형태의 '감각적 쾌락에의 집착'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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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처님의 가르침은 윤회의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이기에, 강 저편=해탈에 다다르면 뗏목에서 '내려야'( =생각/지식/관념 등의 모든 노력을 놓아야). 그건 해탈에 이르러서나 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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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유. 반조" - 일묵 스님
https://youtu.be/T6n0xhcnxsI
"망상을 버리고 바른 사유를 하라" - 일묵 스님
https://youtu.be/SkMqSQM1F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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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崔明淑 and 7 others
8 comments
Kihwan Lee
생각엔 능동적으로 하는것과 수동적으로 일어나는게 있는것 같지요. 두개를 잘 구분해서 생각의 숲을 헤쳐서 잘 끌고 나가는게 중요한것 같습니다.
Hanjin Kang
감사합니다~~ 머릿속에서 정리가 팍팍 됩니다 ^^
希修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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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eply
Hanjin Kang
같이 보는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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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Hanjin Kang 오~ 아비담마 공부 시작하셨군요! 제가 작년에 각묵스님이 쓰신 아비담마 공부하고 올해는 보디스님의 영문판 시작했다가 타니사로 스님 책 읽느라 바빠 잠시 중단한 상태인데, 저도 다시 시작해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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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in Kang
希修 헉... 공부 시작한건 아니구요~ 그냥 심심할 때 함씩 봅니다 ^^;; 다른 공부(구약성경)에 관심두고 있어요.
근데 구약성경 진짜 너무 노잼이네요 ㅜㅜ 불교가 훨 재밌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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希修
아비담마 공부해 보면 정말 그야말로 태양계 안이든 밖이든 뭐 이런 공부가 있나 싶죠 ㅎㅎ. 저에게 불교가 '하나의 철학'이었다가 '나의 종교'가 된 것도 명리학과 아비담마 덕분이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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